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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73화 (7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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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내게만 의외인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 명령을 들어야 하는 당사자에게도 충격과 공포를 선사한 듯했다.

한순간 릴은 넋이 나간 시선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만 보았다. 눈을 두어 차례 끔뻑인 그는 나조차도 처음 듣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얼떨떨한, 완전히 혼이 빠졌다는 표현이 잘 어울렸다.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할아버지는 딱딱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입을 열었다.

“말리크께서 카림께 제8재상직을 내리니, 내일부터는 정시에 입궁하시라는 명입니다.”

끔뻑, 끔뻑. 붕어가 입술을 뻐끔거리는 것처럼 눈을 끔뻑이던 그는 저 현실이 믿기지 않는 듯 되물었다.

“제8재상?”

“예, 제8재상입니다.”

“정시에 입궁?”

“예. 참, 조금이라도 늦으면 벌을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과거를 생각해보면 아미르들이 종종 하위 재상직을 차지하곤 했었다. 다만 그 경우는 일반적으로 말리크가 아들에게 자리를 주고 실무를 익히게 하고 싶어 할 때였다.

‘……잠깐, 말리크가 아들에게?’

나는 잠시 그 사실을 곱씹어야 했다. 레브아에게 묻고 온 그 소문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시녀로 있을 때 듣지 못한 걸로 봐서는 최근에 성행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레브아는 저 소문은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문이 말리카를 자극한 게 맞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릴이 제8재상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의심이 증폭되는 거 아니야? 카림에게 재상직을 내리는 경우는…… 내가 알기로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말리크가 말리카와 릴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말리카의 경계심이 한층 더 날을 세우지 않을까.

“벌이라니, 무슨 벌?”

“야근입니다. 지각하시면 댁에 못 돌아가실 거랍니다.”

“우리 다람쥐를 독수공방 시킬 수는 없는데…….”

릴과 할아버지의 대화가 들려왔다. 순간 그 사이에 끼어들어 릴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저, 저기요? 지금 할아버지 앞에서 독수공방이라뇨? 그게 하실 말씀입니까?

내 내면의 발악과 별개로, 릴은 할아버지께 당연한 것을 물었다.

“자와는 어떻게 하고?”

“파직됐습니다.”

“대체 언제?”

“조금 전에요.”

“왜 그러셨대?”

“말리크께서 카림께 그 자리를 맡기고 싶어하셨기에.”

어떻게 생각하면 참 황당한 대화였다. 말리크가 재상직을 내렸다는 게 릴에게는 어지간히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던 모양이다.

…왜일까. 말리카를 약 올릴 방법이 하나 더 생긴 거 아닌가? 그러면 좋아할 법할 일인 거 같은데.

이윽고 릴이 인상을 확 일그러뜨렸다. 습관처럼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한마디 한다.

“자와가 내 원망 안 해? 욕 안 하디?”

“세상천지 누가 감히 이그드라실의 유지를 잇는 분을 원망하고 욕할 수 있습니까? 도리어 자신의 자리를 카림께 내어놓아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지금쯤 이 저택을 향해 절을 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할아버지의 추측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이었다. 릴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말려 올라갔다. 파들파들 떨리는 게 척 보기에도 억지로 웃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럼 말리크의 말씀을 무사히 전해 들으신 것으로 알고…….”

“싫은데.”

릴이 딱 잘라 대답했다. 의외로 정말 끔찍하다는 얼굴이었다.

그 답에 할아버지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사무적인 어조가 뒤따랐다.

“싫으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성주님. 대체 형님을 왜 안 말렸어?”

릴을 응시하던 할아버지가 한 차례 눈을 깜빡였다. 더없이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리크께서 제가 첨언을 올린다 하여 들으실 분이십니까?”

“재상이라면 얼마든지 형님을 설득할 수 있지 않나? 사랑스런 손녀를 위해서라면 말리셨어야지.”

“원대하신 카림께서 말씀하셨듯 저는 재상입니다. 말리카께서 같은 재상을 등용하시겠다는데 제가 나서서 감히 왈가왈부한다면, 그건 국정을 농단하는 꼴이지요.”

선명한 경고였다. 이것은 정해진 길이며, 너는 그걸 따라 걸어야만 한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반항은 결단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나조차도 분명히 알아들은 강경한 말이었으니 릴도 그랬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낸 릴이가 관자놀이를 압박했다.

“이미 말리크의 명이 떨어졌으니 그저 따르시면 됩니다.”

딱딱하게 말씀하신 할아버지가 나를 돌아보았다. 노쇠한 회색 눈빛이 한 차례 애틋하게 반짝였다. 할아버지는 어렵게도 내게 말을 붙였다.

“또…… 뵙시다.”

“…….”

이윽고 주저 없이 몸을 돌린 할아버지가 저 멀리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가끔 뵈는 날이면 늘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깊은 애정을 전해주곤 하셨던 분이셨다. 집안의 막내였던 나는 모두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만큼 더 많은 사랑을 받았었다.

이 거리감과 어색함. 나는 그대로인데 멀어져 버린 관계가, 좁힐 수 없는 거리가 무척이나 서운하게 느껴졌다.

“당했다…….”

문뜩 들려오던 그의 목소리. 나는 할아버지의 잔상에서 눈을 돌렸다. 계속 바라봐 봤자 내 마음만 씁쓸하니까.

“당했다뇨?”

내 되물음에 릴은 조용히 내 손을 붙잡았다. 맞닿은 손이 차갑게 식은 채였다.

“다람쥐야.”

“네?”

“우리 확 도망갈까?”

릴을 올려다보던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도망? 갑자기 왜? 재상직 받아서?

“한 오 년만 어디, 그래, 하다못해 쓸모없는 이산나에라도 가 있는 게 어떨까.”

쓸모없는 이산나로 도망이라니. 프레이르 사람에게서 쉽게 나올 수 있는 생각은 아니었다. 가뜩이나 요즘 이산나와의 사이가 굉장히 험악하지 않았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상 자리를 받은 건…… 말리카에게는 나쁜 일이지만 릴에게는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이게 도망갈…… 일이에요?”

“당연하지.”

“왜요?”

“지금 신혼에 일을 더 하라고?”

기겁한 척, 릴은 부러 과장되게도 행동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진심이기도 했을 터였다.

“오펠에서, 브렌델에서 고생한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든? 그것도 네 일이니까 했지, 다른 사람 뒤치다꺼리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어요. 그러니까 가야 해.”

나는 릴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 과장된 행동 안에 숨기고 있는 다른 게 있다는 걸.

“이상한 핑계 대지 말고요.”

그래서 한 말에 릴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에는 제법 진지하게 날 부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프리드린.”

당연하게도 나는 긴장을 삼켜야 했다. 릴이 저런 식으로 나를 부를 때 좋은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나? 없던 거 같은데.

“네?”

“지금 이거, 데스테리언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살고 싶은데 그러지 말라는 뜻이거든.”

아…….

나는 작게 신음을 토해냈다. 이제는 아예 옆에 두고 감시할 생각인가, 싶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릴이 장난스럽게 덧붙여 왔다.

“나 그래도 지금까지, 나름대로 데스테리언에서 조용히 살아왔다?”

“조용히라뇨.”

이건 묻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온갖 소문을 몰고 다닌 걸 생각하자면 참 시끄럽게 살아온 것 같은데 말이다.

“이상한 별명을 얻었는데도 그게 조용히 살아온 거예요?”

“그럼. 나 정말 착하게 살았다고.”

착하게와 조용히는 좀 다른 것 같지만…….

내가 떨떠름한 눈초리로 빤히 바라보자 릴은 변명처럼 덧붙였다.

“한번 생각해 봐. 나 정말 정신 나간 짓을 작정하고 했다면 프레이르에 일 년 내내 비만 내리게 만들 수도 있었어. 아니면 일 년 내내 해만 쨍쨍하게 만들거나.”

으, 음…….

그래,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는 건 얼마든지 악용이 가능하겠구나. 저렇게 생각하면 정말 착하게 살아온 게 맞긴 했다.

…다른 의미의 기상천외한 짓을 해 왔을 뿐이지. 휴, 그래도 이제는 안 하니까 다행인가.

“그런데 이제는 데스테리언에서 조용히 사는 것조차 허락을 못 하시겠다는 거야.”

그의 푸른 눈이 마치 거울처럼 내 모습을 비추었다.

“네가 있으니까.”

“네? 저는…… 왜요?”

“네가 세 개의 기적 중에 두 개를 해냈다니까? 마지막 하나도 가능하겠지.”

으, 음……. 물론 첫 번째 기적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그런 건 넘어가자.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한순간 고개를 꺾은 릴은 먼발치에 보이는 왕성을 응시했다.

“물론 형님의 불안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닌데……. 이러시면 서운하지.”

나는 할아버지께 서운하고, 릴은 말리크에게 서운하고.

참…… 새삼스럽게도 혈육이 뭔가 싶었다. 괜히 밀려드는 생각에 나는 서글프게 눈을 내리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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