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영영 이별은 아니지만……. 하아, 이렇게 가면 제법 오래 못 볼 거야. 그래서 하는 말들이고.”
다른 때였으면 일단 내 머리를 쥐어박고 보았을 언니가 어울리지 않게 진지했다. 릴이 진지한 것만큼이나 적응되지 않는 모습이다.
덕분에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려 언니를 응시한 내가 눈을 끔뻑거렸다.
“왜?”
“여기 일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네가 날 보러 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말리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내가 널 보러 올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완전히 생이별이잖니?”
“그건 그렇지만…….”
솔직히 언니가 결혼한 이후에는 그렇게 자주 본 것도 아니잖아, 라는 말이 혀끝에서 까끌거렸다.
언니는 신혼을 즐기느라, 또 나는 시녀로 일하느라 서로 바빴을 때에는 거의 보지 못했다. 뭐, 그래도 내 의지로 보지 않는 것과 강제로 이렇게 되는 건 조금 다르려나.
언니의 눈에 나는 읽을 수 없는 온갖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프리드린.”
“응?”
“선택 잘해.”
언니의 말은 갑작스러웠다. 언니가 닉스톤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삭, 과육이 터지는 청량한 소리란 진지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상큼했다.
물론 주어가 없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어야 했지만.
“……무슨 선택?”
“이제 네가 정말 아름다운 소리를 듣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거든.”
“언니!”
그 말에 기겁한 나는 근처를 살펴보아야 했다. 다행히 시중을 드는 하녀들도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언니의 말을 들을 염려는 없었다.
누가 들으면 진짜 큰일 날 말이잖아? 아름다운, 은 말리카에게 칭하는 존칭이니까.
반역을 꿈꾸고 있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릴을 눈엣가시로 보는 말리카의 귀에 들어간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릴은 프레이르의 일에 책임감조차 가질 수가 없다고 말했었다. 반역이 되니까. 이 와중 저런 노골적인 말은 함부로 내뱉으면 안 되는 소리 아니냐고.
하지만 간이 나보다 몇 배는 큰 언니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솔직히 그랬으면 좋겠거든.”
“언니, 제발…….”
“그러면 이럴 일은 없을 테니까. 누가 감히 날 건드려?”
…두 주먹을 꾹 움켜쥔 언니가 살벌하게 읊조렸다. 언니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페라엘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돌아가야 하는 지금 상황에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포기하면 편한데 말이야.’
나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시녀 생활을 하면서 하위 귀족이라는 내 신분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다. 말리카의 시녀들은 대부분 성주의 직계 자식이었고, 아니면 성주 후계자의 부인이었다. 나 같은 방계 출신은 굉장히 드물었다.
그래서 내가 모자라고 불리하면 고개부터 숙이고 보았다. 어차피 이길 수 있는 상대는 거의 존재하지 않으니까. 저편이 빠르고 일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콧대 높은 언니는 아니었다. 지금 이게 처음 겪어보는 굴욕이 아니었을까. 제아무리 상대가 말리카의 수석 시녀라고 해도…… 처음 당해보는 일은 원래 견디기 힘든 법이다.
가뜩이나 성질 더러운 우리 언니는……. 그 자리에서 페라엘의 따귀를 올려붙이지 않은 게 다행인 건가?
“어제 카림께도 말씀드렸어. 싫다고 끝날 일이 아니라고.”
“언니…….”
나는 한탄처럼 언니를 불러야 했다. 저래서 릴이 내게 별일 아니라고 한 거구나. 릴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인 게 맞으니까.
내 부름을 무시한 언니는 이를 빠득빠득 갈며 중얼거렸다.
“지금 당장 마음만 먹는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카림 밑에 무릎을 굽힐걸? 신전뿐만이 아니라 귀족들도, 대다수 신민들도. 네가 있으니까 더 그렇지.”
그런 언니를 바라보던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언니가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나올 줄은 꿈조차 꾼 적이 없었다.
릴이 질색하던 신전 사람들이 생각났다. 근처에서 하도 이렇게 나서대니, 말리카와의 사이가 원만할 수 없는 게 아닐까. 말리크와도 그렇고.
괜히…… 그런 이면의 일부를 목격한 것 같다. 그것도 내 언니를 통해서.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릴은 그러는 걸 끔찍하게 싫어할 텐데.”
“응, 질색팔색을 하시긴 하더라? 하지만 어쩌겠니?”
언니가 오만하게 턱을 당겼다. 당연한 말을 한마디 덧붙였다.
“그게 이그드라실인걸.”
뭐, 그건 그렇지. 신앙이란 어쩔 수 없이 절대적이니까.
다만…… 내 머리는 딱딱 아파올 뿐이었다.
“그러니까 너도 선택 잘하라는 거야.”
“…….”
언니의 냉정한 말에 난 아무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짙은 한숨만 푹푹 내쉬는 것만 가능했을 뿐이다.
나보고 정말 어쩌란 말이냐. 나도 아름답고 가련한 말리카의 자리를 빼앗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사람이 은혜를 알아야 하지 않겠어?
내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을 뿐이지, 말리카는 내게는 정말 좋은 상사였다고!
* * *
언니가 그렇게 쫓겨난 이후, 나와 함께 점심을 먹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점심시간이면 혼자 외롭고 쓸쓸하게 식사를 해야 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며칠째가 되니까 참을 수 없는 공허함이 있었다.
가뜩이나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에 익숙해졌다가 혼자가 되어버리니까 더 적응할 수가 없었다. 이런 내 처지가 처량해서, 저도 모르게 한숨이 튀어나왔다.
“……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곁에서 시중을 들던 하녀가 달달 떨기 시작했다. 찻주전자를 들고 있던 손에 부들부들, 지진이 왔다.
“이, 이, 이, 이그드라실이시여…….”
소름이 오싹 돋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 정말 저 말 좀 안 듣고 싶다고. 하비에르가 부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해!
흑흑, 내가 어쩌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됐을까. 당장이라도 저렇게 부르지 말라고 한바탕 성질을 부리고 싶었다.
그래도 최대한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답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날 어렵게 생각하는데 조금이라도 날카롭게 대꾸했다가 도망가면 어떡해.
“네?”
“호, 혹시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신지요? 제 시중이 미흡한 건 아니시고요?”
“불편한 점도 없고 시중도 완벽해요.”
물론 어려워하지 말고 점심이나 같이 먹어주면 더 좋을 텐데…….
딱 자른 답이었지만 하녀는 살살 눈치를 살폈다. 굉장히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그러면 어쩐 일로 그렇게 시름 깊은 한숨을……. 아! 혹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신가요?”
“그런 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내 답에 하녀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물론 안절부절못하는 태도였다. 흑흑, 이제 마음대로 한숨도 쉬면 안 되겠네.
언니가 그렇게 가고 나니까 그 빈자리가 더더욱 크게 느껴졌다. 나와 대화다운 대화를 해주는 사람이 릴과 하비에르뿐이니까 더. 물론 하비에르는 일방적으로 내게 잔소리를 하는 입장이라서 대화라고 말하기에는 모호한 감이 있었다.
릴과는 나름대로 즐거운 신혼을 보내고 있기야 하지만…… 그와의 일상이 어디 가겠나. 말끝마다 어떻게든 나를 놀려먹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디서 그렇게 꼬투리를 잘 잡아대는지.
어쨌든 무엇보다, 이 현실이 내 기묘한 외로움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이유 모를 쓸쓸함이 밀려와 나를 울적하게 했다. 나와 놀아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아니면 최소한 할 일이라도 있거나.
시녀로 있던 시절은 할 일이라도 있어서 외로울 새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나치게 무료했다.
이 상태대로라면 언니의 말대로, 언니를 제법 오랜 시간 보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오늘도 그렇게, 심심하게 저물던 저녁이었다. 나와 다르게 보여줘야 할 시늉이 많을 릴은 그제야 볼 수 있었다.
“나 왔어.”
“릴!”
드디어 나와 놀아 줄 사람이 왔다!
반가운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순간이었다. 세상이 진동했다. 천장이, 내 눈앞에 있는 릴이 뱅글 돌았다.
“프, 프리드린!”
식겁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 허리를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어, 어라……?
풀려버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멀쩡했던 육신이 갑자기 허물어지는 것만 같은 이상한 감각.
균형을 잃은 내 몸을 단단하게 지탱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따스한 물음이 이어 들려왔다.
“왜 그래?”
“고마워요. 모르겠어요, 갑자기…….”
나는 말을 제대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말을 이으려는 순간 목구멍에서 뭔가 비릿한 것이 넘어와서. 밭은기침이 터졌다.
“컥!”
나, 나 갑자기 왜 이래?
황망하게 릴을 응시했다. 멀쩡했던 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날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왔다.
“프리드린!”
곧 칠흑처럼 새카만 어둠이 찾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