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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60화 (6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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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내 세상을 뒤덮은 어둠을 거두어가는 빛이 있었다. 그 빛 속에서 나는 다소 황망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윽고 눈에 담기는 곳은 몇 달 새에 익숙해진 곳이 아니었다. 곧 담담하게 나를 부르는 음성이 들려왔다.

[너로구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이그드라실의 신비로운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또다시 왕실 신전의 그 장소였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또다시 꿈을 꾸고 있나?

의문도 잠시, 머리가 묵직하게 아려왔다. 한 차례 관자놀이를 압박한 나는 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

갑자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비틀거리다가 밭은기침을 토해냈다. 그리고 암전. 눈을 뜨니 왕실 신전의 이곳.

이곳에서는 오늘도 신비로운 도백색 화우가 흩날리고 있었다. 풀밭에는 저번에 내가 피워낸 푸른 꽃이 지천이었다.

아름다우면서도 성결한 광경이다. 몇 번을 다시 보아도 순간적으로 감탄을 토해낼 것만 같았다.

이 와중 거대한 세계수 근처에 앉아 있는 이그드라실은 너무나도 신성해 보여서, 내 가슴을 떨리게 했다.

‘그래, 저런 게 신이지. 나 같은 게 아니라.’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눈앞의 이그드라실은 내 신앙에서 위배되지 않는 위대한 존재였다.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붙이고 경배의 말을 올려야 할 것 같은 이 감각. 신앙을 지닌 이들만이 이해할 수 있을 감정이었다.

“저…….”

그런 이그드라실을 향해 살포시 고개를 들어 올린 내가 입술을 열었다. 내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이그드라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제게 무슨 일이…… 있는 거죠?”

마지막 기억을 더듬어보면 내 상태가 이상했다. 날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그드라실은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라는 말을 할 것까지는 아니고……. 그래, 죽을 일?]

들려오는 말에 경악한 나는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그게 무슨 일이 아니면 뭐가 무슨 일이요?

“네, 네?”

저절로 언성이 높아졌다. 그대로 이그드라실에게 달려가 매달리려고 했지만, 드리아스인 이그드라실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덕분에 내 몸은 이그드라실의 몸을 그대로 통과할 뿐이었다. 관성으로 인해 그대로 바닥으로 엎어진 나는 새파란 꽃밭과 짙은 스킨십을 나누었다.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동그라진 나는 아픔도 모른 채 처절하게도 외쳤다.

“제, 제 꿈은 무병장수예요! 죽을 일이라뇨!”

[무병장수는 모르겠고…… 지금 상태라면 유병단수는 가능할 것 같구나.]

유병단수라니! 내 소박한 꿈과 정반대잖아! 말도 안 돼!

기가 막혔던 나는 가까스로 말이란 것을 만들어냈다.

“왜…… 어쩌다가?”

[역병이 돌고 있잖니.]

남 일이라는 듯 가벼운 답이었다. 저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여서 나는 멍청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제가 역병에 걸렸다고요?”

이, 이삼 일 내로 열이 안 내리면 죽는다는 그 역병? 정말 유병단수잖아!

할 말을 오롯이 상실한 나는 이그드라실을 망연자실하게 올려다보았다. 무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 이그드라실은 냉엄하게 한마디 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사하크의 아이가 힘을 쓰고 있으니 괜찮을 거다. 그 정도야 자신의 권능으로 말끔하게 낫게 하겠지.]

“…….”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던 나는 멍청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릴이……. 릴이 있으니까 괜찮으려나.

휴, 병 걸려서 죽을 일은 없으니 다행이다. 유병단수라니,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릴이…….”

작은 속삭임이 입술을 비집었다. 수줍은 미소가 돋아났다.

내 중얼거림을 들었던 걸까. 나를 내려다보던 이그드라실이 문뜩 미소를 지었다. 순간적으로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 하나.

‘예, 예쁘잖아…….’

원래도 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존재인데, 그런 사람이 미소를 보이니까 근처가 환하게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 귀신에 홀린 듯 이그드라실을 바라보고 있을 적 뜬금없는 제안이 들려왔다.

[옛이야기 하나, 보여줄까?]

“네?”

들려줄까도 아니고 보여줄까였다.

내가 되물은 그 순간 눈앞의 정경이 바뀌었다. 나, 난 수락도 거절도 안 했는데요?

아름답고 정결한 신전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내 눈에 담긴 곳은 아득한 폐허였다.

완전히 박살이 나 있는 처참한 모습. 검은 그을음이 사방을 물들였고 시뻘건 불꽃이 하늘을 태워갔다. 머잖아 솨아아, 빗소리가 들렸다.

폐허 위에 쏟아지는 비는 무엇보다 차갑고 처량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는 세상 모든 것을 퇴색시켜갔다.

그렇게 빛바래가는 공간 한가운데에 서 있던 남자와, 한 여자.

― 이시스.

우람하게 울리는 빗소리를 뚫고 살벌한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손끝에서 극광을 자랑하는 새파란 검이 부르륵 떨리었다.

이내 남자가 쥐고 있던, 새파란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강! 바닥에 맞부딪친 검은 의외로 맑은 방울 소리를 내었다.

― 어딜 가려는 겁니까.

― ……사하크, 그대.

여자의 입술이 열렸다. 한없이 냉정하고 차가운, 그리고 눈앞의 사람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것만 같은 그런 목소리였다.

남자는 그 냉정한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핏발이 선 눈으로 여자를 노려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을 뿐이다.

― 어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 이만, 떠날 때가 된 것뿐이다.

― 못 갑니다.

집착이 느껴지는 단호한 한마디였다.

― 존모하는 이여, 나는 그대를 묶어두기 위해서라면 더한 짓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양손에…….

여자의,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을 흘끗 바라본 남자의 얼굴에 비틀린 미소가 피어났다.

― 나의 미래와 우리의 번영을 들고, 이곳을 떠나실 수는 없습니다.

― 그리하여.

여자가 더없이 허탈한 웃음을 머금었다. 폐허로 변한 사방을 바라보며, 한 발자국 떼었다. 여자의 발에 남자가 바닥에 내던진 검이 짓밟혔다.

― 그대, 이따위 짓으로 나를 막아설 수 있다고 생각했나.

― 이시스!

남자가 소리쳤다. 여자는 그 외침을 외면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허망한 하늘을 우러르며 속삭일 뿐이다.

―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법이다.

― 아닙니다.

남자가 빠득, 하고 이를 갈았다. 피맺힌 절규가 뒤를 이었다.

― 그대는 죽어서도 내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 멋대로 해보거라.

여자는 더없이 냉정했다. 남자를 외면하고, 그대로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차가운 비에 젖어 나가던 뒷모습은 세상 무엇보다 서늘했다.

그 뒷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남자가 잇새로 살벌하게 읊조렸다.

― 그대는 결단코…… 나를 벗어날 수 없단 말입니다.

음산하게 물든 남자가 하늘을 바라보며 절규를 토해냈다. 그 절규는 비가 되어, 눈이 되어, 아니, 그 모든 것이 아닌 기묘한…… 내가 차마 묘사할 수 없는 무형의 어떤 것이 되어 저 멀리 사라져가는 여자를 덮쳤다.

그 순간 나는 신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름다운 이그드라실이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한바탕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나는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그저 그런 옛날이야기.]

이그드라실은 쓰디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희들이 신봉하는 나와 사하크의 이야기지.]

내리깔린 눈이 쓸쓸하게 반짝였다.

[말했잖느냐. 사랑의 꿈은 한때는 참 달았노라고.]

이어 이그드라실은 노래를 부르듯 유려하게 속삭였다.

[기억하렴, 아가야. 달콤했던 한순간의 꿈이 끝나면 그 후에 남는 것은 배신과 증오뿐이란다. 특히나 사하크의 핏줄을 믿어서는 안 돼. 웃는 낯으로 뒤통수를 때리는 것들이거든.]

유려한 속삭임에는 오래된 증오와 해묵은 원한이 담겨 있었다. 나로서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방금 본 저 이야기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겠는데. 대충 추측하자면 우리에게 전해지던 ‘신화’와 다른 사연이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이그드라실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이그드라실에 꽃이 피면 재림하실 거라고…….”

[재림? 내가?]

이그드라실이 웃음을 터뜨렸다. 무척이나 허망하고 공허한…… 그래서 가슴 아픈 소리였다.

[그래,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구나.]

“네?”

[사하크는 내 힘을 빼앗고 나를 이 땅에 가두었다. 내가 저에게 베푼 은혜를 원수로 갚아, 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지.]

이그드라실은 아름다운 꽃비를 흩뿌리고 있는 거대한 나무를 가리켰다.

[지금의 나는 무력하기에 혼자서는 이 나무에 꽃을 피우는 것도 불가능해. 너를 통해서야 비로소 가능하지.]

처음 이 나무 앞에 왔던 날이 떠오른 이유는 왜였을까. 이그드라실이 중얼거렸다.

[너야말로 나의 권능이거든.]

“…….”

[그러니 단꿈에 너무 빠지지 마렴. 프레이르는 언제고 네 뒤통수를 칠지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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