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58화 (58/115)

58

언니는 릴을 이끌고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제법 심각한 얼굴이었다.

졸지에 혼자 남은 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지? 뭐 때문에 나는 못 듣게 하는 건데?’

아니, 애초에 언니가 릴에게 개인적으로 할 만한 이야기가 있나?

혹시 속옷 속의 두 글자…… 뭐 그런 얘기 하는 거 아니겠지, 하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저번에 그 사, 삼 센티 얘기도 그렇고 두 사람의 거침없는 대화 수준을 보면 하고도 남기는 했다.

……별로 상상하고 싶은 상황은 아니었다. 징그러운 광경이다.

그러면 혹시 언니가 게르드나 브렌델로 돌아가기 전에 둘이 날 놀려먹을 궁리를 하는 건가? 으, 그러면 어떻게 방어해야 하지?

내게 그런 고민을 안긴 릴은 제법 시간이 지난 후에야 돌아왔다. 언니는 보이지 않았다.

“둘이 무슨 얘기 했어요?”

보자마자 물은 것에 릴은 어깨를 으쓱였다. 얼굴이 어둡거나 목소리가 진지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응? 별거 아냐.”

별거 아닌데 언니가, 저 성격의 언니가 독대를 청할 리가 없었다. 내가 가느다란 눈초리로 흘겨보자 빠르게 한마디 덧붙였다.

“말리카 얘기야.”

“……별거 아닌 게 아니잖아요.”

그제야 언니가 릴을 조용히 부른 이유를 알 법도 했다.

애초에 페라엘 샤리프스가 와서 말리카의 명을 따라 언니와 형부를 데리고 간다고 했으니까……. 페라엘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은 언니가 릴과 말리카의 이야기를 할 수는 있었다. 물론 자세한 이야기는 알 수가 없었지만.

다만 걱정이 앞선 나는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혹시, 언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건 아니겠죠?”

“그런 걱정은 넣어 둬. 말리카도 감히 세린을 건드릴 생각은 안 하겠지. 라펠리타라면 모를까.”

가볍게 대꾸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가볍지 않았다.

아군은 많을수록 좋지만 적은 적어야 한다. 하비에르는 제1재상 따위, 바꿔버리면 그만이라고 했지만 그 순간 세린은 말리크의 적이 되는 것이다. 말리카가 굳이 세린을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건드리지는 않을 거라는 의미였다.

반면 라펠리타는 말리카의 친정이니까. 자기 친정을 자기가 어떻게 하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나. 죽었다가 깨어나도 릴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유일한 곳이 라펠리타였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형부의 가문이 라펠리타의 방계라는 점이었다.

“형부는 괜찮은 거 맞아요?”

“응. 괜한 걱정 하지 마.”

내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릴은 굉장히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은 채였다.

“너와 네 가족은 내가 지킬 테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익숙지 않은 분위기가 릴을 감쌌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제법 싸늘해졌다.

“말리카를 실각시킬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야.”

“…….”

나는 순간적으로 그 말을 곱씹었다.

실각, 실각이라고……. 말리카를 실각시킨다고.

신전이 릴의 편을 들고 있는 이상, 말리카는 다른 말리카들에 비해 쥐고 있는 권력이 작은 편이었다. 본래 신전은 말리카가 다스리는 곳이었으니까.

이 와중 말리크와 말리카는 정말 금슬 좋은 부부였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서, 왕궁의 모든 사람은 두 사람을 이상적인 부부로 손꼽았다. 가뜩이나 말리크는 하렘에 그 흔한 여자 하나 들인 전적이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런 말리카를 건드리면 말리크와 틀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릴의 말을 곱씹던 나는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다.

“그러면 말리크와 전면전을 벌이는 게 되는 거 아니에요?”

릴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제아무리 말리크가 릴을 아낀다고 해도, 사랑하는 아내보다 소중하게 여기지는 않을 터였다. 동생과 아내. 둘 중 누구를 선택할지는 너무 뻔했다. 애당초 답이 정해진 문제였다.

나는 슬그머니 릴의 손을 붙잡았다. 내 행동에 릴은 다소 놀란 눈을 하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있잖아요, 릴.”

“응?”

“내가 언니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릴도 말리크를 좋아하잖아요?”

단순히 좋아한다, 고 표현할 만한 감정은 아닌 듯했다. 둘은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형제였지만 사이가 좋았다. 일명 개판인 왕실에서 참 보기 드문 우애였다.

“릴이 그렇게 말리카를 싫어하면서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건 말리크를 위해서겠죠?”

“뭐…… 그렇긴 해. 내가 귀찮은 편이 차라리 편하니까.”

“그러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원하지 않는 선택은 하지 않아도 돼.”

아마 실각시킬 수단은 레브아의 건이겠지? 말리크는 말리카의 짓이 아니라고 딱 잘라 얘기하긴 했지만 증거가 있다면 말리크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와중 릴이 프레이르를 뒤집어엎을 생각이 있었다면 일찌감치 나서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이유는 말리크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중하게 여기는 관계를 해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면 굳이 이제 와서 그 관계를 뒤집을 이유도, 필요도 존재하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힐 필요는 없잖아.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는 갑자기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좋다.”

“왜, 왜 또 이래요.”

“저번에 네가, 가족이니까 서로 양보하고 나누는 거라고 했지.”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지. 지금 생각하면 조금 미안했다. 뭘 그렇게 잘 안다고 떠들어댔는지.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궁금했었거든. 나는 형님께 무엇을 나누고 양보했는지. 내가 나누었다면 무엇을 받았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나는 게 없더라. 그런데 모든 걸 너한테 받네.”

“……이건 양보라기보다는 역지사지예요.”

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언니와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게 되면 정말 마음 아플 테니까요. 그러면 릴도 마찬가지겠죠. 말리크와 관계가 틀어지면 정말 슬퍼할 거잖아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말리크는 릴을 제외한 다른 형제들을 전원 죽였으니까.

전통을 따져보면 저게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고, 특수한 상황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3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다.

당사자들은 전혀 다르게 느끼지 않을까? 다른 형제들하고는 사이가 좋지 않았나? 자신이 죽임당할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근데 왜 그렇게…… 말리크를 좋아해요?”

“아버지 같은 형님이니까.”

릴의 답은 극단적으로 단순했다. 내가 복잡하게 생각했던 것들은 안중에도 없던 듯이.

둘의 나이 차이가 제법 나기는 했다. 고작 세 살 차이인 언니도 맨날 내 기저귀를 갈아줬다고 큰소리를 치는데, 말리크는 정말 릴의 기저귀를 갈아줬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제는 네가 더 소중해.”

“……그건 안 물어봤는데요.”

“엉뚱한 것도, 예리한 것도 감이 좋은 것도 다 마음에 들어.”

“그, 그만.”

나를 조금 더 강하게 부둥켜안으며 하는 소리에, 반쯤 기겁한 나는 볼멘소리를 냈다. 엄마야, 닭살 돋는단 말이야! 난 저런 대사에 내성이 없다고!

“아, 아무튼 간에……. 나를 위해 릴이 소중하게 여기는 관계를 부술 필요는 없어요. 원하는 대로 해요.”

내 답에 릴은 나를 조금 더 강하게 부둥켜안을 뿐이었다. 흑흑, 이 무거운 분위기. 어울리지 않아.

* * *

페라엘은 나와 언니에게 많은 시간을 주지 않았다. 자신의 여독을 풀 시간도 없이 바로 게르드로 올라가는 걸 선택했다.

말리카의 명령 덕에 언니와 형부도 그 여정에 함께 껴야 했다. 그렇게 언니가 오펠을 떠나던 날 점심시간이었다.

“하아…….”

사이좋게, 이제는 이름을 알게 된 과일― 닉스톤을 까먹고 있는데 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과일을 한 입 먹다 만 나는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왜 한숨을 쉬고 그래?”

“우리 쥐새끼가 눈에 밟혀서 발이 안 떨어지네.”

언니답지 않게, 아련한 목소리였다. 손을 뻗은 언니가 내 턱을 타고 흐르는 과즙을 닦아주었다.

순간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때에도 늘 언니는 나를 챙겨주느라 바빴으니까.

나는 괜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럴 때까지 쥐새끼야?”

“당연하지. 넌 평생 내 쥐새끼야.”

다른 때였으면 올챙이라고 놀렸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조용해진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물끄러미 나를 보던 언니가 붉은 입술을 열었다.

“쥐새끼야.”

“응?”

“카림 말씀 잘 듣고. 앞으로 점심 혼자 먹어야 한다고 굶지 말고. 몸 잘 챙기고. 역병 조심하고. 알았지?”

이럴 때 보면 언니는 언니였다.

걱정이 가득한 말이 묘하게만 들린 이유는 왜였을까. 따라서 숙연해진 나는 발끝을 꼼지락거리다가 중얼거렸다.

“언니, 왜 그래.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