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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57화 (5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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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정말…….’

그대로 얼어붙은 나는 한동안 이 남자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제법 시간이 흐른 후에야 겨우 대꾸할 수가 있었다.

“대체……. 그렇게 느끼하게 말하는 법은 어디서 배워요?”

“느끼해?”

“네!”

기름이 줄줄 흐르는 것 같다. 내 적극적인 대답에도 릴은 싱긋 눈을 휠 따름이었다.

“사실인데? 네가 좋은 걸 어떡하라고.”

“…….”

나는 가만히 입술을 달싹거렸다.

물론…… 릴의 입장에서 날 싫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툭 치면 알아서 굴러다니는 좋은 장난감 아니냐고.

덕분에 스스로의 위치를 다시 한번 자각하고야 말았다. 괜스레 다시 뺨이 부풀어 오를 때 그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

“이제는 네 기분을 느끼는 것마저 행복한데.”

으, 갈수록……. 언니라면 형부가 저런 말을 해줄 때에 반가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로서는 온몸을 배배 꼬며 들을 말이었다.

“……그게 썩 유쾌하지 않다고 한 게 고작 한 달 전 아니에요?”

“한 달이면 모든 게 바뀌기에는 충분한 시간 같은데.”

세상이 개벽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 아니고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말의 신빙성을 의심한 내 눈이 가늘어지자, 릴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대꾸했다.

“사실 나도 저럴 줄은 몰랐어.”

묵직한 손이 어깨 위에 올라왔다. 나지막한 음성은 제법 진지했다.

“네게 배웠지.”

“네? 제게 배우다뇨?”

“네 덕에 세상이 참 달라 보여서.”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다름과 그의 다름이 의미하는 바는 살짝 다를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넌 뭘 하고 싶어?”

이어지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네?”

“억울하다면서. 연애도 못 해봤다고.”

“그야…… 억울하죠.”

“그러면 연애를 했으면 뭘 해보고 싶었는데?”

이어지는 질문에, 그가 내 소망을 이루어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저번에 한번 이것저것 속풀이를 했던 보람이 있나 보다.

기분이 좋아진 난 가만히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야 늘 꿈꿔왔던 건 무도회에서 한 마리 나비처럼 살랑거리다가, 잘생긴 기사님의 손을 잡고…….

그래, 손을 잡고…….

……결국 나는 멍청한 목소리로 되물어야 했다.

“……그러게요?”

고개를 꺾어 눈앞에 있는 릴을 아득하게 올려다보았다. 날 보는 새파란 시선이 무척이나 예쁘다고 생각했다.

“뭘…… 해야 하죠?”

재차 묻는 내 목소리가 흔들렸다.

“릴은 익숙할 거 아니야? 보통 이럴 땐 뭘 해요?”

“…….”

릴은 순간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만 보았다. 왜 그걸 자기한테 묻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그렇지만 지금 물어볼 사람이 당신밖에 없는걸요?

천천히 그가 관자놀이를 압박했다. 이윽고 어디서, 뭐가 꼬인 것인지 깨달은 듯 침착하게 속삭였다.

“프리드린, 오해하지 않길 바라.”

“네? 무슨 오해요?”

“내가…… 그래, 바르게 살아왔다고는 말 못 하겠네. 보여준 것도 있고. 앞으로도 네가 생각하는 수준으로 바르게 살아갈 수는 없을 거야.”

그야 생존이 달린 문제니까. 저건 너그럽게 넘어가기로 했다.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일을 저지르는 것만 아니라면.

그리고 과거의 일이야 뭐,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억울한 건 억울한 거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나도 누구하고 손잡고 이러고 돌아다니는 건 처음이라고.”

이어진 담담한 고백에 나는 릴을 올려다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지금까지 그에게 열심히 들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오는 이성 안 막고 가는 이성 안 막는다면서요?”

“그건 짐승의 특성을 말한 거고.”

툭 대꾸한 릴이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름다운 두 눈에 혹시, 하는 기색이 스쳤다.

“너 설마……. 그 말을 진짜 믿었어?”

“…….”

나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럼 누가 한 말인데 당연히 믿지, 안 믿을 수가 있나.

머잖아 넋이 나간 목소리가 입술을 비집었다.

“혹시 그게…… 농담이었어요?”

“당연하지.”

릴은 너무나도 가볍게 긍정했다. 되묻고 싶었다.

……어딜 봐서?

어딜 봐서 그게 농담이었는데? 누가 듣든 간에 완벽한 진담 아니었나?

내 넋이 나간 얼굴을 내려다보던 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하니 내가 아내 앞에서…… 맙소사. 그래, 그렇게 순결하게 살아온 건 아니라는 건 인정하는데.”

그거야 뭐, 다들 그러니까. 아파서 누워 있던 내가 특수한 상황이었고. 딱히 따질 것도 없고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나를 흘끗거린 그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네 앞에서는 저런 농담 하면 안 되겠네. 진짜 말하는 그대로 다 믿는 거 아냐?”

“아니…… 믿을 만하니까 믿죠!”

“뭐가 믿을 만했는데?”

“소문을 생각해 봐요. 아침 점심 저녁 옆에 있는 여자가 바뀌고……. 말리크께서도 저런 거에 대해 한마디 하셨었잖아요.”

“그야 형님은 내가 유흥에 찌들어 사는 줄 알고 계시니까. 그래야만 하고.”

원래 릴이 왕실의 망나니 행세를 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저런 것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긴 하다.

“그러면 그동안 연애도 안 하고 뭐 했어요?”

“널 기다렸지.”

생각할 시간조차 없이, 자연스럽게 툭 나오는 그 대꾸.

…와, 정말 나 아닌 다른 사람이면 홀라당 넘어갔다. 나도 순간 간지러워지는 기분 덕에 한 박자 늦게 대꾸했다.

“……거짓말하지 말고요.”

“어라, 안 속네.”

그 대꾸에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릴은 빠르게 말을 고쳤다.

“누구를 만나서 마음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고 표현하면 되려나.”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서. 살고 싶은 마음이 무엇인지 잘 알기에, 그가 내뱉은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맞잡힌 손을 꿈지럭거렸다.

“지금은…… 그런 여유가 있어요?”

“여유가 없어도 마음을 쏟아야지. 누구와 함께하는데.”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한 말에 발끝이 간지러워졌다. 고개를 슬쩍 돌렸다. 내 뺨이 붉어졌을 것이다.

“……피.”

“어쨌든 잘 생각해 봐. 오늘은 일단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겠네.”

릴이 하고 싶은 것?

그 말에 내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의 미간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왜 그래?”

“아니, 릴이 하고 싶은 거라면…….”

……침대 위 아닌가?

두 사람이 함께 밤의 장막 속으로 녹아내리는, 저 살색의 향연 말고 다른 게 생각나지 않았다.

“또 엉큼한 생각 한다.”

“누, 누, 누가요!”

“네가?”

대꾸할 수가 없었던 나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릴이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넌 얼굴에 생각이 다 보인다니까.”

내 뺨이 더욱 둥글게 부풀었을 것이다. 당황을 머금은 입술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래서…… 내 생각이 틀렸어요?”

“뭐, 물론 틀렸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봐, 맞잖아! 나도 이제 이렇게 당신에 대해 잘 안단 말이야!

…속으로 이상한 뿌듯함을 챙길 때 그의 말이 이어졌다.

“사람은 메인 디시만 먹고 살지 않잖아? 오르되브르도 있고 앙트레도 있지. 전채가 풍부할수록 본 요리에 대한 기대도 커지는 법인데.”

흘끗, 나를 살펴보는 눈빛이 오늘도 참 야릇했다.

“오늘은 전채 요리를 제대로 즐길 생각이거든.”

릴은 빈틈없이 내 손을 맞잡았다. 깍지 낀 손이 하나로 이어진 것만 같은 묘한 감각.

곧 릴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종종 따라가고 있는데 어김없이 들려오는 호객 소리.

“과일 사실래요?”

천만다행히도 이그드라실의 어쩌고…… 하는 사기 행각은 아니었다.

혹시 그 과일도 있을까, 싶었다. 상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오펠에서 처음 봤던, 독특한 타원형 모양의 과일이 있었다.

내가 그걸 빤히 쳐다보자 푸근하게 웃은 상인이 친근하게 말을 붙여 왔다.

“처음 보죠?”

“네.”

“닉스톤이라고 해요. 이산나에서 들여온 거예요.”

닉스톤……. 과일이라기보단 보석일 것 같은 이름이었다. 상인의 말을 들은 릴이 고요하게도 읊조렸다.

“이산나가 쓸모 있을 때도 있네.”

“……그러게요.”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옆 나라 이산나와는 수교가 단절된 건 아니었지만 우리와 감정이 썩 좋지 않았다. 이산나는 프레이르를 신에 미친 광신도들이라고 부르곤 했고, 우리는 신을 섬기지 않는 이산나를 야만족이라고 불렀다.

물론 이산나는 비옥한 평야 지대를 소유한 곳이라 프레이르가 부러워할 만한 조건을 갖추기는 했지만.

“저거 게르드로 돌아갈 때에 잔뜩 들고 가야겠어요.”

어쨌거나 좋은 게 좋은 거지. 닉스톤을 하나 집어 들던 나는 자그마하게 덧붙였다.

“언니도 좀 주고.”

* * *

“원대하신 카림.”

그렇게 저녁나절, 오펠 성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언니가 나보다 먼저 릴을 찾았다. 릴도 의외라는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응?”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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