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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씁쓸한 현실이었다. 왕실이라고 해도 결국은 가족의 이야기인데 말이지. 가장 슬픈 사연을 가진 가족.
생각에 잠긴 내 얼굴을 빤히 보던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그래.”
내 얼굴이 뭐가 어때서. 뭐, 물론 좋은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난 이 썩어빠진 꼴에 딱 어울리는 한 단어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말을 내뱉어도 되는지 모르겠을 뿐.
조금 머뭇거리다가 속삭였다.
“저기……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언제는 네가 솔직하지 않은 적이 있었나. 넌 솔직한 게 매력이야.”
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라 모르겠다 싶었던 나는 주저 없이 내뱉었다.
“참 개판이다 싶어서요.”
“개판이라.”
다른 때였다면 내 이 기막힌 단어 선정에 웃음부터 터뜨렸을 릴은, 이번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페라엘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는 물빛 시선이 가을날 서리처럼 차가웠다.
“권력이 따르면 그만큼 사람들의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지. 자랑은 아니지만…… 원래 왕실보다 개판인 곳은 존재하지 않아.”
이번에도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가끔, 릴이 반박하기 어려운 옳은 말을 할 때에는 당황스러웠다. 그의 신분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고 하면 좋을까. 물론 나를 때리는 팩트 몽둥이를 휘두를 때와는 다른 의미의 옳은 말이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세상의 이치에 맞는 소리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릴 데스테리언을 나타내는 유명한 소문을 생각할 때에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덩달아 진지해진 내가 고개를 끄덕일 때, 그는 슬그머니 내게 손을 뻗었다. 단단한 양팔이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근데 있지.”
“네?”
“아무리 개판이어도 너, 도망 못 간다?”
……새삼스럽게?
개판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꼬일 대로 꼬인 관계가 썩어 보이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따지고 보면 그 권력을 좇았던 우리 집안도 개판이니 말이다. 가족끼리 사이가 나쁘지는 않지만 어쨌든 개판.
허리에 붙은 팔이 나를 바짝 끌어안았다. 창졸간에 빈틈없이 맞붙은 품에서는, 이제는 익숙해진 고급 향유 냄새가 났다.
“이젠 안 보내. 아니, 못 보내.”
애정이 담뿍 느껴지는 말이 떨어졌다. 우리 두 사람의 거리가 보다 가까워졌음을, 내 자신이 가장 잘 느끼고 있었다.
릴의 품에 얼굴을 묻은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원래도 이혼 금지 아니었어요?”
“어라.”
아마 릴의 눈초리가 가늘어졌을 것이다. 뭔가 건수를 잡은 것처럼.
…이제는 굳이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릴 데스테리언에게 서서히 길들여지고 있었다.
“지금 혼전 계약서 때문에 내 곁에 붙어 있는 거야?”
“일단은요?”
생각할 것도 없이 대꾸했다. 입술을 비죽 내민 나는 이어서 툴툴거렸다.
“나 청혼받았을 때 아직 안 잊어버렸거든요?”
결혼식도 없어, 청혼도 얼렁뚱땅이야……. 심지어 청혼받을 때에는 어마어마한 협박까지 들었잖아? 언니는 다른 의미일 수도 있다고 했지만……. 크흠, 흠.
어쨌든 생각할수록 억울한 일들만 가득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백 번 강조해도 모자랐다. 내가 꿈꾸던 연애와 결혼은 이런 게 아니었다고! 하물며 청혼을 거절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소리를 들은 건 세상천지 나밖에 없을 거다.
……정말, 진심으로 나쁜 놈이었네. 어쩌다가 코가 꿰여서는! 그리고 어쩌다가 이 남자에게 넘어가서는!
“그래, 그땐 내가 잘못했어.”
이어지는 그 순순한 인정에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나는 그의 품 안에서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이 인간이…… 웬일이래? 나 안 놀려 먹고?
“이혼 금지라. 아무리 생각해도 계약서 조항 중에 제일 잘 쓴 거 같아.”
릴은 뿌듯하다는 듯 덧붙였다. 내 생각에는 각방 금지야말로 그가 제일 좋아하는 조항 같은데…….
순간적으로 당황한 나는 입술을 떨었다. 그를 밀어내며 서둘러 말머리를 틀어버렸다.
“어, 어쨌든 릴도 마음 곱게 써요. 당신 말대로, 못된 짓 했다가는 업보로 무자식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내게서 밀려난 릴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새파란 눈에 한순간 장난기가 스쳐 지나갔다. 은근해진 목소리가 떨어졌다.
“낳아 줄 생각은 있고?”
“어…….”
불과 몇 분 전, 페라엘의 입에서 비슷한 얘기를 들었을 때에는 기겁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펄쩍 뛰었을 것이다.
릴이 내게 장난을 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단순히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가, 이제는 어느 정도 사이가 깊어진 남편이 하는 말이라서 자연스럽게 진지한 생각이 이어졌다.
결국 결론을 내린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생기면요?”
이런 대답을 들을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릴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돌았다. 그 기쁨과 다른, 짓궂은 한마디가 이어진다.
“지금 만들까?”
“…….”
이 인간아, 네가 그럼 그렇지! 고양이가 생선 가게를 그냥 지나갈 리가 없잖아!
……아니, 나는 어느덧 그가 한 말대로 놀림받는 걸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것 같다. 툭 치면 멀리까지 굴러갔다가 아득바득 되돌아오는 게 아니라, 그가 툭 쳐줄 때까지 일단 기어오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이러지 말아야 하는데, 왜 나는 이 모양 이 꼴인지. 흑흑.
“지금 당장 그러기 싫으면.”
끝이 없는 자아 반성이 이어지고 있을 때 또다시 의외의 말이 들려왔다.
“데이트하러 가자.”
“……네?”
또다시 스스로의 귀를 의심한 나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페라엘을 보더니 뭐,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건가?
“가…… 갑자기 웬 데이트요?”
“아니, 다른 건 아니고 청혼했을 때 얘기를 하니까 찔리잖아.”
릴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릴 데스테리언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다.
“사실 청혼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했지. 그때는 나도 급했거든.”
“네? 급할 게…… 있었나요?”
“그럼. 내가 그때 너 때문에 얼마나 혼란스러웠다고.”
내가 어디에 있든 날 느낄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다 보니 네게 해준 게 아무것도 없잖아.”
…내가 미친 모양이다. 이상한 감동이 밀려들어 왔다. 아, 남편님. 이제야 제 억울함을 알아주시는 건가요!
“이제라도 잘해야지. 남에게 안 뺏기려면.”
…순간 광장에 나가서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동네 사람들! 미친 멍멍이라고 불리던 내 남편이! 철이 들고 있어요! 이그드라실이여, 감사합니다!
* * *
물론 데이트라고 해도…… 역병 덕에 싱숭생숭한 분위기인 오펠에서는 크게 할 게 없었다. 그저 다소 어색하게 릴의 손을 맞잡고 거리를 활보했을 뿐.
디저트 가게에 들어가 간식거리를 내 품에 잔뜩 안겨준 그가 속삭였다.
“역시 넌 보석보다 초콜릿 쪽이라니까.”
단 음식을 소중하게 끌어안은 나는 볼에 바람을 집어넣었다. 릴의 표현대로라면 먹이를 모으고 있는 다람쥐처럼.
“먹는 게 남는 거라고 하잖아요.”
“그렇지. 그런데도 살 안 찌는 거 보면 신기해.”
“그게 지금 릴이 할 소리예요?”
내 새침한 대꾸에 그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되묻는 건 덤이었다.
“응? 내가 뭘?”
“당신 술고래잖아요. 살찌기 가장 좋다는 술을 그렇게 들이부으면서 말이야.”
“어허. 술고래라니.”
짐짓 엄한 척 한마디 한다. 나는 그런 릴을 흘끗,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군살 없이 근육으로 잘 다져진 몸이었다. 생각해 보면 신기하다. 그렇게 술을 마시는데?
“그럼 아니에요?”
“나 술 별로 안 좋아해.”
제법 진지한 답이 들려왔다. 물론 나로서는 전혀 믿을 수가 없는 말이었지만.
프레이르 전역을 휩쓴 유명한 소문도 있고, 내가 직접 본 것도 있는데 지금 저게 무슨 소리요?
“……거짓말. 술을 동이째 들고 먹던 거 기억하고 있거든요?”
“있지, 프리드린.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거다? 취하지도 않는데 술을 어떻게 좋아할 수가 있겠어. 그냥 어쩔 수 없이 마시는 거지.”
그…… 그렇긴 하네. 취하지 않는다는 말이 진짜라면 말이다. 별맛도 없는 거, 이유 없이 좋아하기는 힘들겠지.
릴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그가 좋아하는 건 뭐고 싫어하는 건 뭘까. 물론 후자에는 말리카가 있긴 하네.
맞잡힌 손을 괜히 꿈지럭댔다.
“그럼 릴이 좋아하는 건 뭐예요?”
“글쎄.”
입버릇을 얹은 릴의 새파란 눈이 내 모습을 제법 노골적으로 훑어보았다. 이어 무심한 듯 아닌 듯, 한마디 툭 던졌다.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