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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민머리가 너무 황홀하게도 반짝여서 눈이 멀 것만 같았다.
이 순간의 저 반짝거림이 굉장히 아름답게 보였다면 그건 주신(酒神)께서 보우하사, 나의 정신 만세.
“반짝반짝!”
제대로 정신이 나간 나는 기묘한 구호를 외치며, 손을 뻗어 말리크의 맨들맨들한 대머리를 매만졌다. 기름을 아낌없이 칠한 듯 미끈해서 생각 외로 촉감이 좋았다.
기겁한 카림이 내 손을 붙잡았다.
“프리드린!”
“부드러워…….”
“정신 차려. 어서!”
“싫어. 더 만질 거야! 부드럽단 말야!”
근처가 살벌하게 얼어붙었지만 그런 분위기조차 읽을 수가 없었다.
술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미친 것처럼 맨들맨들한 머리를 매만졌다. 부들부들한 게 촉감이 아주 좋았다. 잘 기른 동물의 털을 쓰다듬는 것과 비슷했다.
말리크의 눈치를 본 카림이 가까스로 중얼거렸다.
“혀, 형님.”
“…….”
당연하게도 창피를, 그것도 어마어마한 굴욕을 당한 말리크의 얼굴이 좋을 리가 없었다.
웃는 얼굴 그대로 석상이 된 말리크는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붉으락푸르락하는데 차마 뭐라고 말을 못 하는 모양이었다.
그게 심상찮게 느껴졌던 듯 카림의 음성이 드물게 흔들렸다.
“형님, 존모하는 말리크시여. 얘가 절대로 악의가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니고…… 애초에 아무것도 몰라요. 게다가 취한 사람에게 뭘 바라겠습니까? 형님께서 너그러운 아량으로 봐 넘겨주시면…….”
“이그드라실께.”
카림의 말을 끊은 말리크는 겨우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서 서슬 푸른 한기가 느껴져서 근처 공기가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
“감히 뭐라고 하겠느냐. 나 또한 신 앞에 서면 일개 인간이니 무슨 말씀을 하시든 섬겨야 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 기꺼이 받들어 모셔야지.”
“형님…….”
“그렇죠? 제가 좀 신성해요.”
말리크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나는 자랑스럽게 허리를 주욱 폈다.
‘저 미친 것 보게.’ 하는 시선이 나를 훔쳐보았다. 애초에 언니는 나 같은 걸 모른다는 듯 몸을 돌리고 있었다.
“프리드린!”
기겁한 카림이 나를 부르든 말든, 필사적으로 내 손목을 움켜쥐든 말든.
술에 취한 사람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다.
카림의 손아귀를 가볍게 뿌리치고, 모든 걸 무시한 나는 말리크의 머리를 두어 차례 쓰다듬었다. 그리고 마치 주문처럼 소리쳤다.
“자라나라 머리머리!”
그러자 마치 거짓말처럼, 민둥하게 반짝이던 머리에서 새카만 머리카락이 우수수 자라났다. 말리크가 쓰고 있던 가발보다 몇 배는 풍성함을 자랑했다.
“마, 말도 안 돼…….”
사늘하게 얼어붙었던 근처에서 아득한 탄식이 들렸다.
시렸던 머리가 따뜻해졌기 때문일까. 말리크가 떨리는 손으로 제 머리를 붙잡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마침내 자신의 머리를 뽑아 모근을 확인해보기까지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안타깝게도 속삭였다.
“반짝이는 게 좋았는데…….”
“…….”
여러 쌍의 기막힌 시선이 나를 바라보았다.
헤실거리며 웃던 나는 그대로 자리에 픽 쓰러져 버렸다.
……그렇게 내가 살아 있는 신으로서 세상에 내비친 첫 번째 기적은 탈모 치료였다.
* * *
아니, 저 일을 이런 식으로 말해야 했냐고!
항상 그렇듯 바락바락 대들었다.
“아니, 오해하기 좋게 말하지 말라고요!”
“왜.”
여전히 내 위에서 피식 웃은 그가 내 뺨을 쓰다듬었다.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태도가 방금 전과 묘하게 달라졌다.
“네가 이런 걸 기대하는 것 같아서 서비스 좀 해 봤는데. 마음에 안 들었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고작 가발을 벗겼단 말을 이렇게 에로틱…… 느끼하게 해야 했냐고요오!”
“그리고 말이야.”
내 한 맺힌 외침을 무시한 이 나쁜 놈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부드럽게 휜 눈이 지금 내 모습을 꽤나 노골적으로 훑었다.
아니, 이 변태 좀 보게?
아직도 베개를 쥐고 있는 손이 파르륵 진동했다. 이 인간을 한 대 때려야 할까, 말아야 할까.
“네 옷은 네가 벗었다? 난 손 안 댔어.”
“거짓말하지 마세요! 제가 왜!”
“거짓말을 왜 해. 흑흑, 나도 매 맞는 남편이 되기는 싫단 말이야. 쥐 잡듯이 때리잖아.”
그 발언에 떡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매, 매 맞는 남편?
“오해하기 좋게 말씀하지 말라니까요. 누가 들으면 제가 각 잡고 때리는 줄 알겠어요.”
“각 잡고 때리는 거 맞잖아. 지금도 몽둥이 들고 있으면서?”
“모, 몽둥이라뇨?”
“사람을 때리는 도구면 다 몽둥이지.”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래, 베개라는 이름의 몽둥이를 들고 있었지.
내가 입술만 달싹거리자 카림은, 어울리지 않게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물어왔다.
“다람쥐야, 나 때릴 거야?”
“……네. 그러고 계시니까 사력을 다해 때리고 싶네요.”
“정말?”
“네!”
말이 좋아 때리고 싶다지, 줘 패고 싶다는 말이 조금 더 정확했다. 어쩜,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내 안의 폭력성을 이렇게 잘 일깨우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웬걸. 몸을 동그랗게 만 카림은 처량하게 우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흑, 압사당할 위기를 넘겨가면서 낑낑거리며 방에 업어 왔더니.”
“압사라뇨. 저 안 무거워요!”
“갑자기 덥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스트립쇼를 할 때 알아봤어야 했어…….”
울먹거리는 척하며 이어지는 그 소리란.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 내 흑역사가 그의 입술에서 흐르고 있었다.
부끄러움이 치밀어 올라,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바닥에 한바탕 만들어 둔 피자까지 치워줬는데. 훌쩍.”
“……저기요?”
“이런 착하고 다정하고 상냥하고 일까지 잘하는 남편을 때리고 싶대. 흑흑, 아무래도 나 인생 헛살았어.”
그럼 미친개 소리를 듣는 인생이 허투루 산 거지 제대로 산 거냐!
속으로 거침없이 반박하던 난 그의 말에서 거슬리는 걸 하나 찾아냈다.
바닥에 피자를 만들어 뒀다니.
그 말이 의미하는 건…….
“혹시 저, 토했나요?”
“와.”
그는 내 말에 맞다 아니다 답을 하지 않았다. 혀를 내둘렀을 뿐이다.
몸을 바르게 편 카림이 나를 응시했다.
…왜 저래, 더 불안하게. 설마 내가 더 처절하고 이상한 짓을 저지른 건 아니겠지.
“있지, 프리드린.”
“네?”
“우리 아직 안 튼 게 많잖아?”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텄다기보다는…… 아직까지는 튼 게 없었지. 제대로 무슨 생활을 해 보기도 전이었으니까.
…그러기 전에 술 취한 모습부터 보인 내 자신에게 박수를 보낸다.
“근데 설마하니 아내님의 위장 속을 먼저 볼 줄은 몰랐어. 다른 건 아주 쉽겠네.”
아주 거하게 한 모양이다. 나름대로 억울했던 나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애초에 술 준 건 댁이거든요? 근데요.”
그리고 본전도 못 찾을 시비를 걸었다.
“다른 호칭 대신 이름 부르라면서요. 이거 계약 위반 아닌가요?”
“이것 좀 보게? 너도 댁이라고 했잖아."
“먼저 다람쥐라고 한 건 그쪽이거든요! 그리고 것이라고 하지 말라고요!”
할 말을 상실한 듯 그가 나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다소 늦은 답이 떨어졌다.
“좋아.”
카림은 제법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얼굴에 뭐라고 쓰면 돼?”
생각할 것도 없이 답했다.
“왕쫌생이.”
“넌 주정뱅이.”
“…….”
쫌생이와 주정뱅이 부부라니. 아이고, 그거 정말 볼만하겠다.
이러다가 나도 미친개로 함께 낙인찍힐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미 어제 한 짓으로 미친개2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말리크의 가발을 벗기다니.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었다.
말리카께서 이를 갈고 계시지 않을까. 평소에는 봄바람처럼 온화한 말리카였지만 화가 나면 정말 무서웠다.
아아, 내가 미쳤지. 정신 나갔지! 대체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
‘잠시만.’
가발을 벗겼다고?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렸다.
“저, 저기 있잖아요…….”
“응? 왜?”
“제, 제가 말리크의 가발을…… 벗겼다고요?”
카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끔뻑거리던 나는 멍청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말리크께서 가발 쓰세요?”
“응. 그러니까 벗겼지.”
“왜요?”
이유를 물었지만 굳이 묻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사람이 가발을 쓰는 이유가 하나밖에 더 있겠어?
머리숱이 아주 적거나, 없거나, 없거나…….
이어 묻는 입술이 파들파들 진동했다.
“호, 혹시 대머…….”
차마 말을 다 마칠 수가 없었다.
말리크가 대머리요! 하고 떠들고 다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잘릴지도 모르잖아? 가발까지 쓰고 다녔다는 건 어떻게든 그걸 숨기고 싶었다는 의미였을 테니까.
어쩌다가 그 젊은 나이에 머리가…….
생각을 이어 나가던 내 얼굴이 창백해졌을 터였다.
“자, 잠시만요.”
“응? 또 뭐가 궁금해?”
“그, 그럼 혹시…….”
카림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파들파들 진동했다.
대, 대머리는 유전이잖아.
가뜩이나 말리크는 고작 서른여덟 살이었다.
“리, 리, 리, 릴도 대머리?”
내 남편이 대머리라니, 그 무슨 소리요!
기겁한 나는 그의 애쉬 그레이빛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겉보기에는 참 풍성하지만 저, 저게 가발이라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잡아당겼다.
훌러덩.
풍성했던 가발이 벗겨지며 반짝반짝 민머리가 세상에 빛을 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