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나를 오롯이 내려다보는 그는 제 입술을 슬쩍 핥는 듯했다.
이윽고 그가 붉은 입술을 다시 열었다.
“형님의 가발을.”
“제, 제, 제가 설마 릴의 웃옷을 잡아당겼다거나 바지를……. 아니죠, 아닐 거……. 네?”
현실을 부정하던 내게 닿은 말.
덕분에 머릿속에 있던 선 하나가 끊어지는 것만 같았다.
형님의 가발을 벗겨, 가발을, 가발을, 가발을…….
동시에 머릿속에 연회장에서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 * *
자신의 주량에 대해서 알게 되는 건 술에서 깬 이후의 일이다.
목구멍이 타들어 갈 듯해서 순간적으로 딸꾹질은 했지만, 입 안에 번지는 맛은 무척이나 달았다.
단맛 때문인지 정말 신기하게도 기분이 확 좋아졌다. 때문에 나는 당당하게 술잔을 내밀었다.
“한 잔 더 주세요.”
“……응? 너 괜찮니?”
“네. 아주 맛있는데요. 이런 와인 처음 먹어봐요.”
잔을 붙잡은 내가 헤실헤실 잘도 웃자, 카림은 별 의심 없이 술을 따라주었다.
가뿐하게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은 나는 또다시 잔을 채워주는 그를 보며 실없이 속삭였다.
“먹을 거 주면 좋은 사람이랬는데.”
“아서라. 사탕 준다고 해도 절대로 따라가면 안 돼. 알겠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미 릴이 먹인 사탕 덕에 아픈 적이 있어서요. 사탕은 절대로 안 먹을 거예요.”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한 건데, 카림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더니 다시금 술을 들이켜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미간이 미묘하게 일그러진 채였다.
“…….”
“왜 그렇게 봐요? 제가 그렇게 예뻐요?”
철면피를 깐 소리에 그가 웃음을 머금었다.
“너 좀……. 이건 따박따박 대드는 게 아닌데. 핀트가 어긋났다고 해야 하나?”
“제가 좀 예쁘죠? 눈을 못 떼겠죠?”
대담해진 나는 동문서답 겸 헛소리를 내뱉으며 그의 무릎에 매달렸다.
카림의 잘생긴 얼굴에 순간 헛웃음이 떠올랐다.
왜 저렇게 웃을까. 생긴 건 참 멀쩡한데.
내 입 밖으로 튀어 나간 소리는 이어지는 생각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쁜데 다람쥐는 무슨. 쥐새끼는 무슨. 전 힘세고 용감한 사자라고요!”
그것도 미친개 따위는 한입에 꿀꺽 삼켜버릴!
“……오. 그 근거 없는 자신감, 아주 좋아.”
“근거 없긴요!”
카림이 습관처럼 엄지를 들어 올리며 한 소리에, 나는 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가 자연스럽게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나는 자랑하듯 내 붉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봐요. 갈기 같죠?”
“프리드린? 암사자는 갈기가 없어.”
“있거든요!”
…두고두고 밤마다 이불을 찰 흑역사가 적립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리는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기분 좋고 행복하니 내 멋대로 행동해야 할 뿐.
나는 카림에게 머리를 바짝 들이밀었다.
머리카락을 부러 풍성하게 말아 턱 근처에 붙였다.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은 얼핏 보면 수사자의 갈기처럼 보이기도 할 테니까.
“여기 있잖아요.”
“…….”
“오늘부로 암사자도 갈기 있음!”
카림은 기막힌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한숨 어린 음성을 남겼다.
“프리드린. 너 취한 거 같아.”
“네? 취하고 싶은데 안 취하는데요? 그러니까 한 잔 더 주세요.”
“발음이 완전히 꼬였거든?”
“언니 보고 싶어요.”
이어지는 내, 중구난방의 헛소리에 그가 적잖게 당황한 듯했다.
“……응?”
“카림은 우리 언니가 얼마나 멋진 줄 모르죠?”
“알아.”
“뭘 알아욧!”
카림의 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언니 자랑을 줄줄 늘어놓았다.
“목소리도 예쁘고, 얼굴은 더 예쁘고요. 언니는 항상 제가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쥐새끼라고 다정하게 속삭여줘요. 쥐새끼 중 제가 최고래요.”
카림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칭찬이야, 욕이야?”
“귀찮게 해도 화 안 냈고요, 누워만 있을 때 머리도 감겨주고 세수도 시켜주고……. 같이 살 때에는 맨날 제가 잘 때까지 옆에서 손을 잡아줬어요. 제가 잠든 걸 확인하면 꼭 이불을 덮어줬고요. 그리고, 그리고…….”
또 언니가 뭐가 잘났더라.
모르는 게 없고, 뭐든지 잘하고, 성격은 좀 많이 더럽고 그래서 사소한 걸로 자주 싸우긴 했는데.
굳은 머리로 잠시 생각이라는 걸 할 적 카림은 기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부럽네.”
“그렇죠? 우리 언니 같은 언니가 세상에 어디 있어.”
“그렇게 사이가 좋을 수 있다는 게 부럽다는 거야.”
쓰게 웃은 그가 내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 주었다. 한순간 내 뺨에 와 닿은 손가락의 온기가 굉장히 차갑다고 생각했다.
저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정신머리가 없던 나는 헤실거리며 내뱉었다.
“어떻게 사이가 나빠요? 한배에서 태어나고 평생 같이 자라왔는데.”
“그래, 그게 맞지.”
“그렇죠? 언니 성격이 더러워서 맨날 싸우긴 했지만요. 그래도 사이가 갈라질 일이 없는걸요. 믿을 건 가족뿐이잖아요.”
“가족이라…….”
그는 한순간 내 말을 곱씹었다. 어울리지 않게 진지함을 내비치는 얼굴이 무척이나 슬퍼 보였다.
“가족이라서 무조건 사이가 좋을 수 있으면 참 좋겠어.”
굉장히 쓴 음성이었다. 선명하기 때문에 더더욱 슬픈 진실 하나가 그 입술 새로 흘렀다.
“우리는 항상 내 쪽에서 일방적인데.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고.”
그리고 방금 보인 태도가 가식이라는 듯, 자연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어휴, 내가 취한 애한테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무슨 소리긴요. 릴에게는 제가 있잖아요?”
이어지는 내 헛소리에 카림이 눈을 끔뻑거렸다. 그는 다시 웃으며 속삭였다.
“너 참……. 취하니까 정말 맥락이 없네.”
“맥락은 무슨. 어디에 있든 절 느낄 수 있다면서요. 그건 뭐, 가족보다 더한 사이 아니에요?”
근데 저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그 일을 떠올린 나는 한마디 안 덧붙일 수가 없었다.
“아, 근데 변태였지.”
“…….”
“릴, 당신 말이야. 변태들의 왕이야. 왕변태!”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며 와인을 들이켰다. 정신이 반쯤 나가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때 홀에서 우아하게 드레스 자락을 자랑하는 언니가 보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나는 목소리를 높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언니다!”
“야, 너!”
카림은 그런 나를 기겁하며 불렀다.
당연히 지금 내 발걸음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는 제 발끼리 꼬여 비틀거리다가 고꾸라질 뻔한 나를 재빠르게 낚아챘다.
카림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람쥐야, 제발 얌전히 앉아 있어줄래?”
“언니 불러주면!”
“알았어. 다칠까 봐 무서우니까 앉아서 기다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일단 자리에 얌전하게 앉았다. 귀찮을 법도 하건만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선 카림이 홀로 향했다. 마침 화려한 춤곡이 끝나가고 있었다.
덕분에 머잖아 카림이 언니와 형부를 데리고 돌아왔다. 언니가 이유 없이 반가웠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언니이이!”
“프리드린!”
비틀거리는 내 발걸음에 카림이 기겁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언니에게 와락 안겨들었다.
“아리엘! 아리엘이다!”
“요게 어디서 하늘 같은 언니 이름을 막 부르…… 으, 술 냄새.”
언니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을 적, 짜증이 인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가 휙 고개를 꺾었다.
“카림, 혹시 프리드린에게 술 먹이셨나요?”
“응? 내가 안 먹였어. 프리드린이 뺏어 먹었지.”
“애초에 술 근처에 두신 게 잘못이에요. 프리드린은 포도 근처에만 가도 취하거든요.”
언니의 말에 나는 당연하게도 반박했다.
“나 안 취했어!”
“만취했네, 만취했어.”
혀를 끌끌 찬 언니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언니가 부드럽게 나를 품에서 떼어냈을 적 카림이 기막힌 음성으로 내뱉었다. 그 둘을 무시한 나는 정처 없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거면 왜 말 안 했어. 술이 이렇게 넘치는 곳에서.”
“저도 오늘 알았거든요, 포도 근처에만 가도 취한다는 거요.”
“……내가 웬만해서는 이런 말 안 하는데.”
한 걸음, 두 걸음. 비틀거리며 옮기는 발걸음이 왜 이렇게 상쾌하던지.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브렌델 부인도 정말 만만찮은…….”
“어, 프리드린! 어디 가니?”
언니의 음성에 언니를 돌아본 나는 무심코 옆에 팔걸이를 붙잡았다.
그런 나를 본 언니와 카림의 얼굴이 순간 사색이 되었다. 나는 팔걸이를 손으로 툭툭 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그래?”
“프리드린!”
“나, 난 몰라.”
경악하며 내게로 달려오는 카림과 다르게 언니가 고개를 휙 들렸다.
…내가 잡고 있는 건 팔걸이가 아니었다.
사람의 머리였지.
그것도 말리크의.
내 자그마한 손 밑에서 말리크가 나를 부르는 음성이 들렸다.
“이그드라실이…….”
하지만 그 말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못했다.
미끄덩, 하고.
내 손짓 덕에 말리크의 머리에 붙어 있는 것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으니까.
“시…… 여……?”
당황한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화려한 불빛에 화려하게도 반짝이는 무언가가 눈에 담겼다.
생전 처음 보는, 눈부신 광택을 자랑하는 반사광.
미―끈.
말리크는 머리털 한 올 없는 대머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