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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매운 걸 못 먹는다고요?”
“네. 매운 거 못 먹잖아여.”
들켰다.
당황한 인우의 셔츠 안으로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전무님이 그러더구먼, 뭘.”
전무님? 영우를 말하는 건가?
술에 취해 두서없이 중간만 말하는 해나가 자꾸만 인우를 답답하게 했다.
“영우 형이요?”
“녜. 오늘 점심 먹을 때 그랬어여. 내가 인우 씨랑 낙지 먹었다니까 인우는 매운 거 못 먹는다구. 박하사탕도 못 먹는댔는데 내가 낙지도 먹이구, 박하사탕도 먹여서 내가 미안해서 오늘은 낙지 반도 못 먹었어여.”
점심을 같이 먹어? 영우 형이랑? 왜?
저 술에 취해 발음이 픽픽 새는 여자가 날 궁금해 말려 죽일 작정인가 싶었다.
피가 마르는 듯한 인우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영우 형이랑 오늘 점심을 같이 먹었다?”
“녜.”
“그 낙지를 먹었나?”
“녜. 불낙지.”
“형이 나 매운 거 못 먹는다고 말했고?”
“녜. 미안해여. 몰랐어여.”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 오는 해나를 보니 귀엽고, 영우랑 점심을 먹었다고 하니 열불이 나고. 영우 형은 왜 쓸데없이 그런 걸 얘기하고 다니나 싶고.
한 번에 여러 가지 감정이 몰아쳐 꼭 술을 마신 기분이 들었다.
“둘이 먹었습니까? 단둘이?”
자세한 상황을 알아야겠다고 판단한 인우가 꼭 범인을 신문하듯 물어 왔다.
“녜. 인우 씨도 내가 생각 없었다고 생각해여?”
이건 또 뭔 소리야.
어묵탕엔 손도 대지 않은 인우가 해나가 쥐여 준 숟가락을 내려놓고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누가 해나 씨보고 생각 없답니까?”
술에 취한 해나는 술술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밥 먹고 회사 들어가다가 사모님을 만났거든여. 근데 사모님이 아무리 전무님이 착해서 밥 같이 먹자고 챙겨 준다고 따라가 밥 먹는 건 생각 없는 거랬나? 뭐랬지?”
미쳤구나.
제가 없는 곳에서 혜영에게 수모를 당했을 생각에 인우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근데 한유라가 어머님이라고 해서 내가 좀 짜증 났거든여. 그래서 한 방 먹였어여, 내가.”
미치겠다.
안 그래도 복잡한 내용에 해나가 앞뒤 다 잘라 가며 말하는 통에 하나부터 열까지 유추해 내야 하는데, 이제 한유라까지 등장이라니.
답답한 인우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물었다.
“한유라도 있었습니까?”
“녜. 사모님이 한유라가 우리 고등학교 수석 입학이라고 좋아하길래, 내가 나는 수석 졸업이라고 했어여. 한유라 창피해서 얼굴 빨개지는 거 내가 봤음.”
내가 봤음이라니.
술에 취할수록 해나는 생각보다 더 재밌고 귀여웠다.
저 새는 발음과 이상한 말투까지.
영우와 혜영, 그리고 유라를 생각하며 올라온 화가 해나를 보니 또 스르륵 녹았다.
“잘했네요.”
“그럼여. 제가 바로 그 유명한 독종이라구여. 난 넘어져도 꼭 누구 하날 잡고 넘어질 거야.”
당당한 표정으로 말해 오는 해나를 보는 인우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이 상태라면 늘 입을 꼭 다물던 해나의 진심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제일 궁금한 영우에 대한 마음부터 알아보자고 생각한 인우가 턱을 괴고 해나에게 물었다.
“근데 왜 점심을 영우 형이랑 둘이 먹었어요?”
해나가 턱을 괴고 물어 오는 인우를 따라 하듯 자신도 턱을 괴고 대답했다.
“내가… 왕딴가?”
자신을 따라 하는 해나가 귀여워 미치겠는 것도 잠시, 해나가 뱉은 말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해나 씨가 왕따라니.”
“아니, 이상하게 우리 직원들이 나를 막 피하는 것 같애. 응. 긴가민가했는데 이젠 좀 확실해여. 점심시간에 맨날 자기들끼리 쏙 나가구. 나 점심 혼자 먹는 거 싫은데. 그래서 전무님이 같이 먹자고 해서 나는 좋았는데, 사모님은 싫어하니까. 앞으로 그냥 혼자 먹게여.”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해나의 말에 인우의 머릿속은 혼돈의 도가니였다.
“직원들이 해나 씨를 피해요?”
“그렇다니까여. 내가 들었는데 이제 내가 좀 불편한가 봐여. 그럴 수 있지. 나 같아도 그렇겠다. 회장 며느리라니. 으으… 불편해, 불편해.”
말을 마친 해나가 소주 한 잔을 원샷 하더니 그대로 상 위로 엎어졌다.
인우가 그런 해나의 이마가 상에 박지 않게 재빨리 손을 뻗어 해나의 이마를 감쌌다.
팔뚝이 어묵탕 뚝배기에 데는 것도 모를 만큼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어마어마하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술이 취할 대로 취한 해나를 집에 데려다줘야겠다고 생각한 인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장렬히 전사한 해나를 놔두고 일단 계산을 하려는데, 현금이 오만 원짜리뿐이었다.
“무슨 포장마차에서 오만 원이야! 만 원짜린 없어?!”
오만 원을 내밀자 사장님이 또 한 번 호통을 쳤다.
몇 번 들었다고 적응이 된 걸까.
기분이 나쁘지 않은 호통에 인우가 무뚝뚝하지만 예의 바르게 말했다.
“네. 죄송합니다. 저 여자가 다음에 또 오면 오늘 남은 돈으로 계산해 주세요.”
“여기가 무슨 양주집이여? 킵해 놓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장부에 착실히 해나 이름을 적은 사장님이 인우에게 신신당부했다.
“해나 저거 잘 데려다줘! 몸 다치지 않게! 술도 못 먹는 게 오늘은 왜 저리 마셨나 몰라. 두 병 시킬 때부터 알아봤어, 쯧쯧. 그래도 당신 믿고 놔둔 거니까 잘 데려다줘!”
단골이란 말을 증명하듯 해나와 잘 아는 것 같은 사장님의 말에 인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해나 씨.”
자리로 돌아와 해나를 불러 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인우는 잠시 고민하다 이미 잠든 듯한 해나를 품에 안듯 부축해 일어섰다.
자꾸만 다리에 힘이 풀리는 해나 탓에 영 진도가 나질 않아, 골목길에 들어서서는 아예 해나를 안아 들었다.
“뭐가 이렇게 가벼워.”
해나를 공주님 안듯 가뿐히 안아 든 인우가 빠르게 집에 도착했다.
“해나 씨, 일어나 봐요. 집에 도착했어요.”
비밀번호를 알아야 문을 열 텐데.
해나는 미동도 없이 새근새근 잠만 잘도 잤다.
“해나 씨, 비밀번호 뭐예요. 그것만 말해요.”
잠결에도 비밀번호는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든 해나가 인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공일일삼….”
제 목을 감싸 안은 해나의 손.
귓가에 불어오는 해나의 뜨거운 숨과, 속삭이는 목소리.
견디기 힘들 만큼 자극적인 상황을 애써 무시한 인우는 떨리는 손으로 비밀번호를 눌렀다.
현관으로 들어선 인우가 신발을 벗고 눈으로 해나의 방을 찾았다.
“저기다.”
‘노크해 주세용’이라고 적힌 방이 해나의 방이겠구나 싶은 인우가 살며시 문을 열었다.
다른 곳은 깔끔하게 정리됐지만 이부자리는 또 어수선한 모습이 꼭 알 수 없는 해나와 같았다.
해나를 침대에 눕힌 인우가 목이 껴 답답해 보이는 해나의 블라우스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하….”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키면서도, 온 신경을 집중해 욕망을 참아 내고 있었다.
뒤척거리는 해나의 묶은 머리까지 풀어 주고 나가려는데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미친놈. 쓰레기냐.”
저번의 일도 아직 사과를 못 해 놓고, 취한 여자를 상대로 무슨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는 거야.
제 자신을 책망한 인우가 힘겹게 방을 나왔다.
자꾸만 방으로 가는 눈길을 애써 돌려 집 전체를 둘러봤다.
집은 주인을 닮는다더니, 제 텅 빈 집과 달리 사람 사는 티가 나는 집이 정겨웠다.
“집이 주인 닮았네.”
다시금 방문으로 향하는 시선에 고개를 현관 쪽으로 돌린 인우는 아쉬움을 잔뜩 남긴 채 집을 나섰다.
***
새벽 4시, 해나는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눈이 번쩍 뜨여 일어났다.
꼴을 보아하니 씻지도 않고 잠든 게 분명했다.
뒤늦게라도 씻어 보고자 침대에서 일어났는데, 숙취가 남았는지 어질어질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지는 숙취였다.
“어우, 얼마나 마신 거야….”
금방이라도 게워 내고 싶은 속을 부여잡은 해나가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려 했다.
켜진 휴대폰의 시계 밑 인우의 메시지가 시간보다 먼저 눈에 띄었다.
[일어나면 연락 줘요.]
“어? 어…?”
맞다, 내가 어제 술 먹자고 했지. 그러곤 포장마차에 가서, 오돌뼈랑 어묵탕을 시켰었다.
인우 씨는 물 채워 주고, 나는 세 잔 먹은 다음에….
“어떡해! 기억이 안 나!”
그다음부터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원래도 술을 못해 즐기지 않던 그녀였다.
어제는 더 이상 울지 않기 위해 술의 도움을 받은 거였는데, 오랜만에 마신 술에 필름이 끊겨 버린 해나는 지금 딱 울고 싶었다.
“나 뭐 실수한 거 없겠지? 좋아한다고 고백이라도 했으면 어떡해….”
울상을 지은 해나가 인우에게 연락을 할까 하다가 자고 있을 것 같아 말았다.
“일단 씻고, 좀 더 자자.”
지금 와 걱정해도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주워 담을 수도 없을뿐더러 세 시간 후면 출근을 해야 했기에, 빠르게 머리를 굴린 해나가 내린 답이었다.
***
“여보세요.”
울리는 벨소리에 전화를 받은 인우의 목소리가 한껏 잠겨 있었다.
어젯밤 해나를 데려다준 후 집에 돌아온 인우는 쉬이 잠들 수 없었다.
처음 느껴 보는 강한 욕망에 운동을 두 시간이나 하고 나서야 힘들게 잠이 들었었다.
-인우 씨, 미안해요!
이제야 일어난 걸까.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 와 대뜸 사과부터 하는 해나의 모습에 아침부터 웃음이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