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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씀하세요.”
“아무래도 내가 결혼식에 못 갈 것 같아. 여태 퇴원도 못 하고 있잖나. 주치의 선생님도 안 된다셨기도 했고, 사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지. 결혼식에서 추태를 부리고 싶진 않네.”
형우의 착잡한 목소리에 인우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버님, 결혼식을 건강을 회복하신 후로 미뤄도 괜찮습니다. 저랑 해나 씨도 오늘 주치의 선생님께 여쭤보고 외출이 안 된다시면 식을 미루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고요.”
하나뿐인 소중한 딸 결혼식에서 딸의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은 당연했다.
인우도 그 마음을 알기에 식을 미루고 싶었지만, 형우는 단호했다.
“아닐세. 수술 전에 우리 딸이 결혼을 해야 내가 맘 편하게 수술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수술이 좀 어려운가. 내가 그 어려운 수술을 하면서 우리 딸 옆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만 하면 걱정이 돼서 그래.”
형우의 모든 선택은 다 해나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인우도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네, 아버님. 걱정 마세요. 제가 잘할게요.”
비록 계약 결혼이지만, 그 말은 진심이었다.
잘해 줄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해나에게 젖어 들고 있는 인우에게 이제는 이미 사랑 없이 하는 계약 결혼이 아니었다.
잘해 주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졌다.
“해나야, 아빠 없이도 잘할 수 있지?”
끄덕끄덕.
너무 울어 말할 기운도 없는 해나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사돈 어르신껜 주 서방이 양해 좀 구해 줄 수 있을까? 곧 결혼식인데 이렇게 돼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걱정 마세요.”
든든한 인우의 말에 형우가 옅게 웃었다.
한참을 형우의 손에 얼굴을 묻고 울던 해나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아이고, 우리 딸 얼굴이 붕어가 됐네.”
고개를 든 해나의 두 눈은 그야말로 붕어가 따로 없었다.
퉁퉁 부은 것도 모자라 눈물을 훔쳐 내느라 발갛게 짓무른 피부까지.
“오늘은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다, 해나야.”
들어가서 쉬었으면 좋으련만, 해나는 병실을 떠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아냐, 괜찮아. 아빠랑 있을래. 간병인 이모도 들어가셨는데 어떻게 아빠 혼자 둬.”
“이 병원 특실이 참 좋더라. 24시 간병 서비스가 있더라고. 아빠 걱정 말고 들어가서 쉬어. 너 그러고 여기서 쪼그려 자는 거 보면 아빠 맘 아파서 잠도 못 자.”
“그래도 싫어….”
“어서. 주 서방이 해나 좀 잘 챙겨 줘요. 나는 피곤해서 좀 잤으면 싶은데, 해나가 저러고 있으면 내가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꿋꿋하게 버티던 해나가 피곤하다는 형우의 말에 결국 한 수 물러났다.
“그럼 아빠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 줘. 알겠지?”
병실을 나서면서도 해나의 눈은 하염없이 아빠를 좇았다.
웃으며 배웅하는 형우의 모습에 또 눈물이 나오려는 찰나, 인우가 문을 닫아 시선을 차단했다.
“결혼식이 내일모렌데, 여기서 더 울면 부기 빠지는 데 이틀은 더 걸릴 것 같은데.”
어색한 분위기에 장난스레 툭 던진 인우의 말에 해나가 눈물을 꾹 참았다.
그날만큼은 꼭 행복해 보여야 한다.
결혼식을 보는 이들 모두가 속을 만큼 행복해 보여야 하기 때문에, 결혼식을 앞두고 눈이 부을 만큼 운 신부는 되지 말아야 했다.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고개를 끄덕인 해나가 인우의 뒤를 쫓았다.
차에 올라탄 인우가 자연스레 블루투스를 연결해 해나가 듣던 노래를 틀었다.
“어? 이 노래는….”
놀란 해나가 인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새로 생긴 인우의 습관이었다.
해나와 노래를 같이 들은 그날 이후, 해나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항상 이 음악을 틀곤 했다.
해나가 차에서 내린 후에도 냄새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꽤 지속됐다.
해나의 온기도 차 안에 그대로였다.
거기에 해나가 들려주었던 이 노래까지 더하면 차 안이 꼭 인우의 방공호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뭐, 나쁘지 않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음악을 틀었던 인우가 제 행동에 놀라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말했다.
인우의 귀가 또 빨갛게 달아올랐다.
집으로 오는 길, 차 안은 대화 없이 노랫소리뿐이었지만 더 이상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한바탕 울고 나니 머릿속 고민이 눈물에 씻겨 내려간 것 같았다.
해나는 그렇게 모든 걸 텅 비우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인우를 한참 바라봤다.
노래에 맞춰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드리는 인우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취향에 딱 맞는 예술 작품을 보다 보면 꼭 홀린 듯 멍해지는 순간이 있듯, 해나도 인우를 보다 보니 꼭 뭐에 홀린 기분이었다.
“들어가요.”
“네….”
아빠가 없는 집에 들어가면 또 아빠 생각이 날 텐데.
아빠 생각을 하면 눈물은 자연스럽게 날 테고.
이대로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해나가 말꼬리를 늘였다.
늘 해나의 방 불이 켜져야 차를 돌리던 인우가 해나가 들어가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해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돌아서질 않았다.
항상 차에서 내리자마자 부리나케 집으로 뛰어가던 해나였는데.
“해나 씨.”
또 우는 건가.
평소와 다른 해나의 모습에 인우가 조심스럽게 해나를 불렀다.
“술… 마실래요?”
저를 부르는 인우의 목소리에 별안간 고개를 치켜든 해나가 두 눈을 꾹 감고 떨리는 목소리로 인우에게 물었다.
“네?”
해나의 뜬금없는 말에 인우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대로 집에 가면 또 울 것 같아서요. 집엔 아빠도 없고! 정신도 너무 똘망똘망하고! 술이라도 마시고 집에 가서 뻗고 싶은데 혼자는 싫고! 아름이랑 먹으면 또 아빠 얘기를 할 게 분명하고! 또….”
고! 고! 고!
창피함에 주먹을 꽉 쥐고 변명을 늘어놓는 해나의 말이 래퍼처럼 빨랐다.
게다가 말끝마다 저놈의 ‘고!’를 강조하는 탓에 인우는 속절없이 웃음이 터졌다.
저렇게 귀엽게 술 동무를 제안하는데, 거절할 수 있을 리가.
고개를 해나의 반대쪽으로 돌린 채 몰래 웃던 인우가 웃음을 지우고 말했다.
“맘 바뀌기 전에 얼른 다시 타요.”
“넵.”
눈을 뜨고 빠르게 차에 올라탄 해나가 인우에게 물었다.
“그런데 우리, 어디로 가죠?”
해나의 물음에 인우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인우는 집에서 가끔 향 좋은 와인만 마시는 터라 와인 바를 갈까 했다. 하지만 프라이빗 룸이 있는 와인 바는 너무 멀고, 이 근처엔 시끌벅적한 먹자골목뿐이었다.
인우가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때, 해나가 비장하게 말했다.
“제 단골집에 초대할게요.”
정말이지 선심 썼다는 표현이 딱 알맞았다.
그렇게 소중한 단골집이라니, 궁금해진 인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차부터 주차하라는 말에 주차를 끝내고 답지 않게 쫄래쫄래 해나를 따라왔는데….
“사장님, 오돌뼈랑 어묵탕이요. 술은 소주 두 병 꺼내 갈게요!”
해나가 당당하게 인우를 데려온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근처 대로변의 포장마차.
태어나 처음 이런 곳에 와 보는 인우가 황당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입구 막지 말고 얼른 가서 앉아!”
바쁘게 안주를 준비하던 사장님의 불호령에 인우의 한쪽 눈썹이 삐쭉 솟았다.
‘손님에게 다짜고짜 반말이라니. 형편없군.’
생경함에 삐딱하게 선 채로 인상을 잔뜩 찌푸린 인우의 손목을 잡아끌어 자리에 앉힌 해나가 속삭였다.
“사장님이 저래 보여도 엄청 따뜻하고 잔정이 많아요.”
해나의 속삭임이 들렸던 걸까?
포장마차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안주가 엄청나게 차려지기 시작했다.
다슬기, 계란말이, 어묵볶음, 돌김, 뻥튀기, 투박하게 뭉쳐 낸 주먹밥까지.
분명 시킨 건 오돌뼈에 어묵탕뿐이었는데 한 상 가득 차려지는 안주가 인우의 호기심을 자극시켰다.
“이렇게 팔아서 남는 게 있습니까?”
차오르는 호기심을 참지 못해 해나에게 묻는 인우에게 별안간 사장님의 호통이 들려왔다.
“내 밥벌이 신경 쓰지 말고 많이 먹기나 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어묵탕을 상에 놓던 사장님이 인우의 질문을 듣고는 해나 대신 대답했다.
“네, 사장님. 오늘도 감사해요!”
손으로 하트를 그려 보이는 해나를 밉지 않게 흘겨본 사장님이 오돌뼈를 만들러 가며 말했다.
“웃기지도 않어, 증말.”
그런 사장님을 보는 인우에게 이곳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저렇게 웃으면서 웃기지도 않는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역설법인가….”
그 말에 웃음이 빵 터진 해나가 소주병을 따 빈 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냥 츤데레예요. 아름이랑 스무 살 때부터 다녔는데, 사장님은 10년째 저러세요.”
츤데레? 츤데레는 또 뭐야.
이제는 아예 물음표가 얼굴 주위를 떠다니는 것 같은 인우의 모습이 꽤 볼만했다.
“인우 씨는 차 갖고 왔으니까 저만 마실게요.”
그렇게 말한 해나가 제 잔엔 소주를 채우고, 인우의 잔엔 물을 채웠다. 사람들의 냄새가 괴로운 인우가 술을 마시고 대리를 부른다면, 저도 없이 대리 기사와 함께 집에 가는 길이 퍽 괴로울 거라고 생각한 해나의 배려였다.
때마침 오돌뼈가 나오는 걸 본 해나가 제 잔을 인우의 잔에 부딪치고는 망설임 없이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었다.
“크….”
쓴 소주의 맛에 재빨리 물을 한입 마신 해나가 오돌뼈를 집어 먹었다.
인우는 그저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한 잔이 두 잔, 두 잔이 세 잔이 되면서 해나의 볼이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괜찮겠습니까?”
“그럼여. 끄떡없어여.”
끄떡없어 보이지 않는데.
해나의 발음이 새는 게 뻔히 보이지만, 인우는 딱히 만류하지 않았다.
“이거, 인우 씨 먹으라고 시킨 건데 왜 안 먹지. 먹어 봐여. 국물이 끝내줘여.”
해나가 어묵탕을 인우 쪽으로 밀어 놓으며 말했다.
인우는 제 손에 숟가락까지 들려 주는 해나가 웃겨 뻔히 알면서도 괜히 되물었다.
“나 먹으라고 시킨 겁니까?”
“네. 인우 씨는 매운 거 못 먹으니까.”
인우는 먹지도 않은 술이 깨는 기분이었다.
분명 불낙지 먹을 때는 눈치 못 챈 것 같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