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 과연 운일까요
오기 전부터 참 많은 문제를 일으킨, 바로 그 토르티아의 황녀 에리카가 드디어 카이로스에 도착했다.
카이로스 입장에서도 꽤 오랜만의 사신단이라, 그것도 다른 나라도 아닌 북방 토르티아의 사신단이라, 백성들의 분위기도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카이로스 못지않게 화려하기로 유명한 토르티아는 온갖 북방의 보석과 비단, 향료로 꾸며진 사신단의 행렬로 백성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눈 아프게 화려하네요.”
“네가 올 때도 이랬나.”
“그럴 리가요.”
로엘은 작은 실소를 뱉었다. 어찌 치우지 못해 안달이었던 조카와 금지옥엽인 딸이 같을까.
로엘은 멀리서도 보이는 그 화려한 행차에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나라에 돈이 없어 마약을 팔기에 이르렀는데, 이런 사치라니. 행렬이 이러한데, 마차 안에 계실 그 잘난 황녀님께서는 얼마나 꾸미고 오셨을지 눈에 훤했다.
“달려가 칠 기세인데.”
“치느니 죽이고 말죠.”
에단은 피식 웃었다. 심히 그녀다운 대답이었다.
모두가 베일에 싸인 에리카와 그 아름다운 시종들에게 시선이 빼앗겼을 때, 에단은 아까부터 계속 로엘을 보고 있었다.
토르티아의 사신단인 만큼 오늘은 그녀가 아카시스를 대표하여 아리스를 제치고 당당히 그의 옆에 앉았다. 덕분에 오늘따라 바짝 신경 쓴 티가 났다.
추측컨대 그녀보다 그녀의 시녀들이 더 신나서 달려들었을 거다.
“아름답네.”
“그러게요.”
“저기 말고, 여기.”
좀처럼 꾸미지 않는 그녀라 더 눈이 갔다. 토르티아의 상징인 붉은색에 맞추어 붉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는 루비 장식이 아름답게 꽃혀 있었고, 센스 있게 다른 장신구들은 카이로스를 상징하는 황금들이었다. 수십 개의 다이아가 박힌 금 목걸이와 커다란 황금 귀걸이가 그녀의 위치를 상기시켰다.
가히 카이로스의 아카시스다웠다.
“나는 지금 나의 아카시스가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아무튼 시도 때도 없다. 이 사람의 쓸데없이 달콤함은.
그의 낯간지러운 말은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아 로엘은 애써 시선을 피하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이러한 공식 행사에 그가 그녀 바로 옆에 있다는 것. 이리 당당히 그의 옆에서 앉아 그와 눈을 맞출 수 있다는 것.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생각보다도 훨씬 더 좋았다. 괜한 욕심이 들 만큼.
“대 토르티아의 황녀 에리카 네아레스 님께서 드십니다.”
국빈을 모실 때 울리는 국악단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에리카를 필두로 토르티아의 사신단이 들어왔다.
역시나 붉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로엘보다도 선명한 붉은 머리칼을 뽐내며 걸어 들어왔다.
이 수많은 카이로스의 대신들 앞에서도 당당한 그 모습은 가히 토르티아의 황녀다웠다. 평생을 황족으로 떠받들어진 그녀에게 이러한 자신감은 몸에 밴 습관 같은 거다.
“여전하네.”
로엘은 나지막이 말했다. 자신을 참 지독히도 괴롭히던 자신의 사촌은 여전히 화려하고, 여전히 철이 없었다.
이 사신단의 규모를 보아하니 돈을 한두 푼 들인 게 아니다. 황녀께서 직접 행차하시니 분명 그 격에 맞추어 규모가 더 커졌을 터. 조금이라도 긴축재정을 해도 모자랄 판에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토르티아의 황녀. 에리카 네아레스. 대 제국 카이로스의 황제, 에단 폐하를 뵙습니다.”
드디어 그녀의 붉은 베일이 벗겨졌다. 서서히 에리카의 고개가 들리고, 자연히 그녀의 눈이 에단과 로엘을 향했다. 그 순간 웃고 있던, 그 얼굴이 바로 굳었다.
“카이로스에 온 것을 환영한다.”
에단의 형식적인 인사가 나오고,
“카이로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에리카 황녀.”
뒤이어 로엘의 인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에리카는 두 사람의 인사에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그 넋 나간 모습에 로엘은 한숨을 삼켰다.
기대하던 그림이 아닐 거다. 상상하던 상황도 아니겠지.
로엘은 안다. 에리카가 이곳에 온 것이 결코 니블 때문만은 아님을.
“황, 황녀님. 예를…….”
에리카는 그녀를 보러 온 거다.
자신이 내쫓은 자신의 사촌이 얼마나 처참히 사는지 친히 구경하러 이곳까지 행차하신 거다.
“황제 폐하. 그리고 아카시스 마마. 이리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좌관이 에리카를 재촉해서야 에리카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얼굴은 물론, 귀 끝까지 붉어졌다. 속에서부터 부글부글 분함이 끓어올랐다.
로엘 따위가 감히 그녀에게 상전 노릇을 하다니. 이건 절대로 그녀가 원하던 상황이 아니다.
“카이로스는 성심을 다해 토르티아의 황녀를 맞을 것입니다. 모쪼록 카이로스에 계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아카시스 마마.”
에리카는 남몰래 드레스 자락을 꼭 쥐었다. 심장이 쿵쿵 뛸 만큼 이 상황이 어이가 없고 분했다. 아니, 충격을 받았다. 지금 이 모든 것들이.
마차를 타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이 황궁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까지도, 붉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이곳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이 황금의 제국의 위엄을.
붉은 베일을 벗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카이로스 황궁의 모습은 화려하다는 표현으론 부족했다.
하늘에 닿을 것만 같은 높은 천장, 기둥 하나까지도 황금으로 뒤덮힌 화려함과 웅장함, 토르티아의 대연회장 정도 크기의 거대한 알현실까지. 그 모든 것들이 가히 사람을 압도하였다.
평생 토르티아의 황녀로서 누리고 살던 그녀마저도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카시스는 기쁘겠군. 오랜만에 그리워하던 가족을 만났으니.”
“……예. 폐하.”
뻔히 에리카와의 사이를 알면서, 그는 일부러 저러는 거였다. 그 짓궂은 발언에 로엘은 그를 흘겼지만, 그는 오히려 재밌다는 듯이 그런 그녀의 허리를 당겨 가까이 했다.
“그렇다고 너무 기뻐하진 마. 그러다가 나를 버리고 토르티아로 돌아가 버리면 안 되니까.”
다 들리게 말하면서 속삭이는 그에게 그녀는 웃고 말았다.
정말 그는 ‘일부러’ 이러는 거다.
그녀를 참 오랫동안 지독히도 괴롭혀 왔던 그녀의 사촌에게 보여 주기 위해.
그 모습을 부들부들거리며 지켜보는 에리카를 보아하니, 그의 ‘일부러’는 꽤나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카이로스는 주고받는 것이 정확하다. 그 어떠한 거래도 예외는 없지.”
뼈가 있는 그의 말에 에리카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로엘을 보던 눈과는 전혀 다른 얼음장같이 차가운 황금의 눈이 에리카를 직시하자, 에리카는 저절로 긴장이 되고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가 무엇을 얼마나 아는지 가늠할 수도 없거니와, 설사 안다 하더라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니 토르티아의 에리카 황녀. 이곳 카이로스에서 토르티아가 주어야 할 것은 주고, 받아야 할 것은 받을 수 있기를.”
그래서 에리카는 그저 허리를 깊이 숙여 그 눈길을 피했다.
더 마주하다간 자기도 모르게 모든 것을 실토해 버릴 거 같았다.
아니. 그에 더해 목숨을 구걸할 것만 같았다.
“부디 먼 곳까지 온 보람이 있길 바란다.”
에리카는 저절로 떨려 오는 몸을 애써 숨기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대 카이로스 황제 폐하의 큰 은혜에 토르티아를 대표하여 감사를 올립니다.”
분명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 같은 자이며, 그 손에 죽어 간 사람은 셀 수 없을 정도라 했다.
그리하여 북방의 소문에 에단 황제는 두 사람을 합쳐 놓은 듯한 키에, 큰 발에는 발가락이 여섯 개씩 있고, 팔도 칼과 창을 다 들 수 있도록 한 쪽에 두 개씩, 총 네 개라고.
그 정도로 괴물같이 생겼다고 하였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저 아름다운 이는 누구란 말인가.
“에리카 황녀님. 이리 다시 보니 반갑군요.”
그리고 그 옆에 당당히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로엘.
토르티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그 화려한 모습은 가히 카이로스의 아카시스다웠다.
저 자리가 본디 에리카, 그녀의 자리였다.
“부디, 카이로스에서 내내 잘 지내다 가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테바로스의 데릭 때처럼 그녀 스스로 박찬 자리에 로엘이 앉아 있다.
어찌 분하고 원통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감사합니다. 아카시스 마마.”
카이로스의 아카시스 자리를 박찬 것도 에리카 그녀고, 로엘을 억지로 보낸 것도 에리카 본인.
카이로스의 눈치까지 보면서, 온갖 명분을 가져와 안 된다는 일을 겨우 바꾼 그런 자리다.
그런데 이런 반전이 있다니.
에리카는 태어나서 처음 로엘에게 고개를 숙이며, 이 끓어오르는 화를 삭여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이 오롯이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놓친 그 기회 때문이란 걸 애써 부인하면서 말이다.
***
“네가 할 줄 아는 건 평생 내 자리 뺏는 것뿐이니?”
역시나 한 치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다.
로엘은 사람들이 물러나자마자 바로 평소의 말투로 돌아오는 에리카의 모습에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
“그건 내가 해야 할 말 아닌가.”
그래서 로엘 역시 평소의 그녀로 돌아왔다.
상대가 저리 나오는데 굳이 혼자서 예를 갖출 필요는 없다.
“하! 뻔뻔한 년. 그 자리. 원래 내 자리였다는 거 몰라? 넌 대타야. 항상 그랬듯 내 대타라고!”
에리카를 안내하는 역할을 하필 로엘이 맡았다. 에리카를 위해 준비된 귀빈 궁으로 데려가면서, 로엘은 올라오는 짜증을 꾹꾹 눌러 담았다.
에단은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럴 만한 명분도 없고 괜한 구설수에 또 오르고 싶지 않아 그냥 하겠다고 말했다.
조국이 같다고 해 보았자 남보다도 훨씬 못한 사이이건만, 그래도 핏줄이라고 다들 에리카 의전을 로엘에게 기대하는 눈치였다.
참 뭘 모르고들 하는 소리다.
“나라에서 버림받아 팔려 온 주제에!”
그저 니블에 대한 정보를 얻겠다는 그 일념하에, 정말 조금도 변한 게 없는 사촌의 험한 말을 묵묵히 들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없던 정마저 떨어지게 만드는 건 여전했다.
그녀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뺏고 보아야 직성에 풀리는 에리카. 그런 에리카가 절대로 뺏을 수 없는 ‘로엘의 것’을 두 눈으로 보고야 말았으니, 지금 그 속이 말이 아니겠지. 그래서 조금은 받아 주려 했다. 아주 조금, 지금 이 잠깐 동안만.
“그런 포로 주제에 감히 나에게 하대를 하다니……! 네 주제를 알아! 네 아비처럼 주제도 모르고 날뛰지 말고!!”
그런데, 기어코 사람의 인내를 끊어 버렸다.
‘아비’라는 그 한 단어에 앞서가던 로엘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천천히 몸을 돌려, 로엘은 드디어 제대로 에리카를 마주했다.
지금까지 그저 무표정이기만 했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해지더니, 로엘의 붉디붉은 눈이 그녀만큼이나 붉은 에리카의 눈과 정확히 맞았다.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누가 아니래?’
그래. 바로 이 눈이다. 에리카가 극도로 싫어하는 로엘의 눈.
“네가 울고불고 못 가겠다고 난리 친 덕분에 난 이 카이로스의 아카시스가 되었고, 너의 상전이 되었지.”
혼자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래서 너 같은 것은 가소롭다고 말하는 것 같은 그 기분 나쁜 눈.
“황금의 나라에서 황금에 둘러싸여 토르티아보다 더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어.”
한 번을 웃지도, 울지도 않는 소름 끼치는 마녀 같은 눈.
‘네가 황녀인 것도 맞고, 네가 더 예쁜 것도 맞고, 네가 더 상전인 것도 맞아.’
‘그래서 뭐? 나에게 어쩌라는 거니?’
‘난 네가 가진 그 어떠한 것에도 관심 없어.’
저 눈을 하고 항상 에리카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그녀가 세상의 전부라 생각하고,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하찮은 것들로 만들었다.
‘아니, 너에게 관심이 없어. 에리카.’
그렇게 늘, 그녀의 자긍심을 산산이 부숴 놨다.
“다 네 손으로 버린 것들이야. 네 손으로 포기하고, 네 손으로 직접 네가 나에게 쥐여 준 것들이지. 그러니 탓하려거든 어리석은 네 자신을 탓하렴.”
에리카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로엘이 일부러 이러는 거 뻔히 안다. 그녀가 이런 금은보화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 없다는 거, 나아가 ‘자리’에 대해서는 더욱더 관심이 없다는 거.
다른 누구도 아닌 에리카가 제일 잘 안다.
그러함에도 분했다.
“로엘, 너……!”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다 차올랐다.
“너, 어디서 건방지게……!”
그래서 결국 예전 버릇 그대로, 손부터 올라갔다.
“그 역시 내가 할 말인 거 같은데.”
다만, 이제는 로엘이 예전 같지 않을 뿐.
귀찮으니 한 대 맞아 주고 끝내던, 그 어린 날의 로엘 네아레스가 아니다.
“아닌가? 에리카 황녀.”
로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시에라를 필두로 키로스들이 로엘의 앞을 둘러쌌다.
딜리아 역시 지금까지 꾹꾹 참았던 것을 터트리듯, 정색한 얼굴로 바로 로엘 앞에 섰다.
“에리카 황녀는 아카시스님께 예를 갖추라.”
물론, 기사의 국가 토르티아의 시녀들이 키로스의 위협에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의 주인인 에리카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검을 빼 들었다.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여기서 칼부림이라도 하자고?”
“못 할 거 없지.”
로엘은 정말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너무 진심이 묻어 나오는 그녀의 답에 에리카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토르티아도 아닌 카이로스 황궁 한복판에서, 누가 보아도 카이로스 황제에게 사랑받고 있는 아카시스와 칼부림이라니. 결코 현명한 짓이 아니다.
아무리 사리 분별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망아지 같은 에리카일지라도 그 정도는 안다.
“나야 못 할 거 없지만, 에리카 황녀는 아니실 텐데.”
게다가 로엘의 눈이, 저 흔들림 없는 붉은 눈동자가 또다시 자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해 아까부터 에리카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번만큼은 그러면 안 될 거 같은데.”
그녀가 무얼 어디까지 얼마나 아는지 가늠할 수 없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다면 꼬리를 내리는 수밖에.
자존심 상하고 화도 나지만, 에리카도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섣불리 행동하기엔 너무 걸리는 게 많다.
“여기인 거 같은데 그만 가시죠. 누구와 달리 난 교양이 넘치니까, 이런 작은 일들로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습니다.”
로엘은 절로 헛웃음을 나왔다. 교양이 높으셔서 그토록 지독하게 사람을 괴롭혔나 보다.
이제껏 네가 무얼 어떻게, 얼마나, 악질적으로 행동했는지 일일이 말해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로엘은 관두었다. 에리카의 말처럼 아니, 로엘이야말로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시에라.”
로엘이 먼저 시에라에게 눈길을 주어, 검을 거두어들이게 했다. 시에라는 마지못해 검을 내렸다. 그러자 다른 키로스들도 검을 내리고 토르티아의 시녀들도 검을 내렸다.
“되도록 마주치지 맙시다. 아카시스.”
더 말했다가 자신도 모르게 실수를 할까 봐 에리카는 서둘러 로엘을 지나쳐 들어가 버렸다.
쾅, 하고 유달리 세게 닫혀 버린 문을 보며 로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누가 할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 세상 통틀어 자신만큼 에리카 네아레스를 보고 싶지 않은 이가 있을까.
‘너는 항상 내 밑이야.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나보다 밑이라고. 알아들어?’
‘네 아비가 절대 내 아버지 위에 서지 못하듯, 너도 평생 죽을 때까지 내 아래에서 살아.’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어린아이가 참 독하기도 했다.
어찌나 모진 말을 뱉어 내던지, 어린 날 로엘 역시 꽤나 상처받았다. 물론 그것도 한두 번이었을 때 일이지만.
끊임없이 괴롭혀 오면 나중 가서는 정말 아무런 감도 없게 된다. 에리카를 만나는 날이면, 그렇게 자신에게 또 한바탕 하고 가 버리면, 그냥 그날 하루는 똥이라도 밟은 재수 없는 날인 셈쳤다.
“마마. 어째서 저런 말들을 그냥 듣고만 계신가요? 너무 무례하고, 너무 불손하잖아요.”
딜리아는 거의 울먹이듯 말했다.
“이 정도면 아주 양호한 거야.”
그건 딜리아 말대로, 이제는 에리카가 그녀에게 ‘불손’해지는 그런 관계로 바뀐 덕분이다.
만일 로엘이 에리카가 원했던 모습으로 있었다면, 그렇게 이 카이로스에서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었더라면 에리카는 절대 이대로 물러서지 않았을 거다.
끝까지 그녀의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었을 테지.
“좀 씁쓸하네.”
이깟 지위가 뭐라고. 그녀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도대체 왜 저리 못되게 구시나요? 아무리 그래도 가족인데…….”
“글쎄. 일종의 습관 같은 거야. 에리카가 나에게 이러는 건.”
로엘은 아리스를 처음 본 순간 에리카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참 다르다고 생각했다.
아리스가 그저 철없기만 한 귀족가의 영애라면, 에리카는 꽤나 자긍심 있는 한 국가의 황녀다.
아버지가 황제라는 사실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아이.
그 어린 에리카를 더 몰아붙인 건 아마 로엘보다도 로엘의 아버지, 제이드일 거다.
혹시라도 숙부께서 자신의 아버지 자리를 빼앗을까 봐.
그래서 그녀가 황녀가 되지 못할까 봐. 그게 그토록 무서웠던 거다.
그 때문에 그토록, 로엘의 것을 뺏으려 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좀 안쓰럽기도 하지. 저 아이가 저렇게 비뚤어진 데엔 분명 환경적 요인이 아주 컸으니까.”
“그런 건 변명이 되지 못해요. 환경이 힘들기로 치자면 절대 마마도 어디 가서 뒤처지진 않는다구요. 그런데 마마는 안 그러시잖아요.”
“하하. 이걸 칭찬으로 들어야 하는 거 맞지?”
로엘은 순수하기도 한 딜리아의 분개에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너무 맞는 말이다.
성장 배경으로 치자면, 확실히 에리카보다야 그녀가 더 파란만장하다.
“물론 옹호할 생각은 없어. 그러기엔 너무 못된 짓을 많이 했거든, 쟤는.”
그녀에게도, 그녀의 부모님에게도. 그리고 이제는 토르티아에게도.
“하아. 아무튼 피곤한 아이야. 그러니 너희들도 너무 마음 쓰지 마. 보다시피 나도 그렇게 꾹꾹 참고 살지만은 않았거든.“
웃으며 말하는, 참 속도 좋은 자신의 주인을 보며 오히려 그 두 사람이 한숨을 내쉬었다. 로엘은 다시금 굳게 닫힌 귀빈실의 문을 뚫어지게 보았다.
“우리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니블을 찾아야지.”
분명 에리카에게 단서가 있다. 에리카가 여기까지 온 만큼 거래 현장에 직접 가는 패도 생각해 볼 수 있으며, 그녀 대신 토르티아 고위급 인사가 나타날 가능성도 매우 농후했다.
“성격이 불같으신 거 같은데, 조금만 찔러보면 바로 나오지 않을까요?”
“흐음. 그러지 않을걸? 성격이 불같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멍청한 것은 아니니까. 게다가 영악하기로는 세상 제일이거든. 거짓말하고 사람 속이는 데에도 타고났고. 사안이 사안인 만큼, 생각보다 쉽지는 않을 거야.”
로엘은 에리카의 말과 행동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확실히 평소의 에리카보다 몸을 많이 사리고 있었다. 지나치게 많은 호위가 붙은 것도 그러하고, 이리 그녀와의 대립에서 순순히 물러나는 것도 그러하다.
“물론, 그렇다고 물러나겠단 말은 아니니까. 더 열심히 내 사촌의 뒤를 캐는 수밖에 없지 뭐.”
로엘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에리카가 숨긴다고 한들, 몰브가 감춰 준다고 한들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도, 진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는 것.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는 것.
너무 당연한 이 순리를 로엘은 따라 보려 한다.
“토르티아도, 몰브도 반드시 이 불장난의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이번만큼은 확실하게 말이다.
***
“에리카 황녀가 카이로스에 갑자기 간 이유를 알아낸 것 같습니다.”
“그래?”
계속 지루한 정무만 보던 데릭이 버리의 말에 바로 관심을 보였다. 이제야 에리카 황녀가 카이로스에 도착할 시간인데 벌써 알아내다니 확실히 유능한 심복이다.
“아무래도 ‘니블’을 팔러 간 거 같습니다.”
“니블이라면, 마약?”
“네.”
“갈 데까지 같군.”
데릭은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한때 북방을 호령하던 토르티아가 이제는 남의 나라 뒷골목에서 마약이나 팔다니. 같은 북방국의 민족으로서 마음이 아플 지경이다.
어쩌다 이 정도까지 떨어졌단 말인가. 그 유명했던 붉은 나라가.
“이유야 너무 확실하지.”
“네?”
“너무 확실해서 더 어이가 없지만.”
제이드 네아레스가 황제가 되었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을 문제들.
토르티아는 지나치게 고지식했다. 적자가 아니면 황제가 될 수 없다고 믿는 우매하고도 어리석은 발상이 자신들을 옭아매어 이 지경까지 만든 거다.
“확실한 거 맞아?”
“거의 확실합니다. 카이로스에 있는 세작들이 말하길 이주 전부터 황실 대장군 루카스가 움직였다고 합니다. 카이로스 뒷골목을 다니면서 니블굴을 찾은 거지요. 저희 세작들은 작정하고 정보를 캐느라 그나마 알고 있었던 거지, 꽤나 발 빠르게 움직이는 거 같아요.”
데릭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니블은 마약 중에서도 워낙 티가 나지 않기로 유명한 마약이다.
소량만으로도 효과가 확실하면서, 시간이 지나면 체내에서 빠져나가 멀쩡해지기 때문에 금세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래서 잘 안 걸리고, 그래서 위험성을 잘 모른다.
적어도 중독되기 전까지.
“니블은 ‘침묵의 독’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죠. 서서히, 소리 없이 사람을 죽이니까요. 그래서 니블은 그 한 번이 절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아요. 반드시 끝까지 사람을 몰고 갑니다. 그 전까진 당사자도, 그 주변 가족도 나아가 국가도 모르죠. 이미 알아차렸을 땐 그 모두가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요.”
“그러함에도 카이로스 황제는 초기에 발견했다, 그건가.”
“예. 무얼 하든, 참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어쩌면 기라성 같은 카이로스가 무너질 위기가 되었을 수 있다. 그런데 그걸 초장에 발견했고, 지금 해결하려 들고 있다.
데릭은 버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가장 부흥의 시대에 태어난 것도, 경쟁자 없이 단번에 황제가 된 것도, 가장 적절한 시기에 선대 황제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쉽게 황권을 장악한 것도, 그 흔한 외척의 싸움 하나 없는 것도 전부 다.
하늘이 작정하고 밀어주는 것이 아닌 이상 이리 좋을 수가 없다.
온갖 역경을 딛고 이 자리까지 온 데릭의 입장에서는 곱게 보일 리 없다.
“그래서, 그다음은.”
“일단 거의 모든 니블굴은 문을 닫은 상태라고 합니다. 아주 재빠르게 움직여서 꼬리를 밟히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이건.”
“유통하는 윗대가리가 일개 장사치가 아니란 거지.”
“맞습니다. 그것도 그냥 귀족도 아닌, 카이로스의 가장 큰 실세인 몰브가예요.”
참으로 골치 아프고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토르티아와 몰브 다, 카이로스 황실에서 섣불리 나설 수 없는 상대들이었다.
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는 에단 황제라 하더라도 이 둘의 마약 거래는 확실한 물증 없이는 언급 안 하느니만 못하다.
“재밌네.”
데릭은 피식 웃었다. 그래 봤자 남의 나라 일.
테바로스 입장에서는 둘이 어떻게 되든 솔직히 상관없다. 이대로 카이로스가 니블에 취해 쇠락하면 최고이고, 설사 니블을 해결하여 몰브가를 치고 토르티아와 전쟁을 한다고 해도 나쁠 것 없다.
몰브가 같은 권세가를 도려내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내분을 일으킬 테고, 토르티아와 전쟁을 한다면 그동안 테바로스는 무엇이든 ‘준비’할 수 있다.
차후 토르티아를 정벌하는 준비를 하든, 카이로스가 쳐들어왔을 때 대비하는 준비를 하든 말이다.
“아니면, 선수를 칠 수도 있지.”
데릭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버리가 제대로 그 말을 듣지 못했지만, 데릭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직은 추이를 지켜보고 결정해야 할 일이었으니 서두를 것 없었다.
“맞다. 그리고 로엘 공주에 대한 소식도 들어왔습니다.”
자기 생각에 잠시 빠져 있던 데릭의 눈이 다시 버리를 향했다.
알아 오라 시켰을 때는 툴툴거리더니만, 그래도 잊지 않고 알아 온 거다. 당연히 흥미가 안 갈 수 없었다.
“생각보다도 더, 아니 꽤나 잘 지내시는 것 같습니다. 얼음장 같기로 유명한 에단 황제의 마음을 녹였다나 뭐라나. 세간에서는 북방의 붉은 공주가 태양의 황제 품에 안겼다고 하더라고요. 그만큼 에단 황제의 총애가 남다르답니다.”
궁금했던 마음이 풀렸다. 잘 지낸다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식을 파혼당하고 토르티아에 유폐당해 공주 대접은커녕 인간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런데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토르티아가 워낙 팔아 치우듯이 쫓아낸 거라 잘 지낼까 싶었는데 너무 잘 지내서 저도 좀 놀랐습니다. 확실히 뭔가 남다르긴 한가 봐요, 그 공주님. 괜히 그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이 아닌가 봐요.”
“그래서가 아니야.”
“네?”
“그 여자가 특별한 건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이기 때문이 아니라고.”
에단 황제가 그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게 놀랍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에단 황제이기에 더더욱 그녀를 마음에 들어 했을 거다.
그자라면, 그 여자의 진가를 알아봤을 테니.
“……정말 억세게 운이 좋군.”
하다 하다 그녀까지 얻다니.
데릭은 혀끝에서 느껴지는 쓴맛에 씁쓸한 조소를 뱉었다. 이 묘한 기분 나쁨이 무엇인지 그는 알 것 같다.
이건, ‘후회’다.
“짜증 날 정도로 운이 좋아.”
이미 놓쳐 버린 것에 대한 뼈아픈 후회.
데릭은 버리의 보고를 그만 멈췄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더 들어 보아야, 후회와 실망만이 더 커질 것 같다.
***
“회의하자고 부르신 거, 아니셨어요?”
“아니야.”
제롬의 안내를 받고 온 에단의 침실에는 화려한 술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귀한 포도주와 안줏거리들이 분위기를 내주는 촛불과 함께 정갈하게 차려져 있는 것을 보며 로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제가 모르는 무슨 날인가요?”
“아니. 그만 따지고 가까이 와.”
그녀보다 먼저 와 있었던 그는 이미 편한 옷차림이었다. 아직 화장도 지우지 못한 채, 에리카를 맞이했던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차림 그대로 온 그녀가 그의 곁으로 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편히 입고 올 걸 그랬어요.”
“어차피 다 벗을 거니까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아요.”
여느 때처럼 말은 짓궂어도 그는 자연스럽게 다가온 그녀의 손을 잡아 에스코트해 주었다.
친히 의자까지 빼서 앉혀 주는 그의 다정함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 장미도 제 거예요?”
“그럼 내 것일까.”
그녀는 품에 안기 딱 좋은 사이즈의 장미 꽃다발을 안으며 향을 맡았다. 역시나 달콤한 향이 확 퍼지면서, 그녀의 미소를 좀 더 진하게 만들었다.
두근두근.
예상하지 못했던 그의 이벤트에 그녀도 조금씩 설레기 시작했다.
“무슨 날인 거 같은데…….”
“아니라니까.”
그는 손수 잔까지 채워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얼떨결에 그와 잔을 맞대고, 깊은 향이 느껴지는 포도주 한 모금을 마셨다. 쓴맛 뒤에 오는 달콤함이 기분 좋게 번졌다.
그녀는 그런 자신을 바라봐 주는, 촛불의 빛을 받아 오늘따라 더 잘생긴 그와 눈을 맞추었다.
“나, 좀 알 거 같아요. 폐하가 이러는 이유.”
“모르는 거 같은데.”
“아니요. 알아요.”
그녀는 자신의 입에 토르티아산 포도 한 알을 넣어 주는 그를 보며 말했다. 이제 보니, 이 익숙한 맛의 포도주 역시 토르티아산이다. 전부 그를 위해 진상해 온 최상품들.
아무래도 그는 조금 속이 상했나 보다.
그녀와 너무 비교된 에리카의 진상품들에 대하여.
“저는 괜찮아요. 마음 쓰실 거 없어요.”
“모르는 거 맞네.”
북방의 제국 토르티아의 황녀의 행차는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했다. 진상한 금은보화는 얼마며 가져온 귀한 음식들은 또 얼마인가.
진상품들을 실어 오는 수레가 카이로스 황궁 정문에서 도심의 성문까지 끊이지 않고 줄줄이 이어졌다.
거기에 에리카를 호위하는 병사들은 아예 한 소대가 왔으며 그녀를 위한 맞춤형 마차와 자잘한 배려들은 과하다 못해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잠깐 사절단으로 오는 에리카는 그러한데, 이리 황제의 아카시스가 되려 떠나는 로엘에겐 어찌하였던가.
토르티아를 나오면서 그녀를 따라온 시녀 한 명이 없었으며, 그녀를 호위하고 마중 나온 병사 한 명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토르티아에서부터 카이로스의 마차를 타고 루카스 2소대의 호위를 받아 왔다. 지참금이라고 해 보았자 고작 수레 하나 정도.
시골의 남작가 영애도 그렇게는 안 보낸다.
“지금 생각하는 그거 아냐.”
또 나왔다. 그녀는 괜찮다는 저 미소.
에단이 유일하게 싫어하는, 그녀의 아픈 미소.
그는 그녀의 손목을 당겨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저 네가 기뻐하는 걸 보고 싶었어. 그게 다야.”
“그럼 성공하셨어요. 지금, 많이 기쁘거든요.”
그녀는 순순히 그런 그의 다리에 앉아 그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실은, 낮부터 많이 기뻤어요. 폐하께서 제 옆에 계셔 주셔서.”
그 많은 토르티아의 가신들 앞에서, 그 콧대 높은 에리카 앞에서 당당히 그녀 곁을 지켜 줘서.
그렇게 그녀의 구겨진 체면을, 산산이 조각난 자존심을 다시금 보란 듯 세워 줘서.
로엘은 그의 양 볼을 감싸며 그의 입에 입술을 올렸다.
“당신이 나를 진짜 아카시스로 만들어 줘서.”
그녀의 속삭임은 그에게 삼켜져 버렸다. 방금 마신 포도주 향이 번지고 그 달콤함이 느껴졌다.
술에 취하는지 그녀에게 취하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 뜨겁고 짜릿한 감각이 순식간에 온몸에 번졌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번쩍 안아 침대로 걸어갔다.
“너는 카이로스에 오는 그 순간부터 아카시스였어.”
이미 열기에 달아오른 눈으로, 그녀가 그에게 매달린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런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으며 능숙하게 그녀의 높게 올린 머리를 풀었다. 붉은 머리가 아름답게 흘러내리고 그녀의 붉은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그 말은, 네가 감히 아무도 손댈 수 없는 나의 여자가 되었다는 뜻이지.”
그는 툭툭 그녀의 드레스 단추를 풀어 갔다. 실은 낮에 보는 순간부터, 그녀에게 지나치게 잘 어울리는 이 붉은 드레스를 직접 벗기고 싶었다.
“그랬군요. 나는 처음부터 당신의 여자였군요.”
오늘따라 그녀 역시 순순히 그를 따랐다. 그가 거침없이 그녀의 드레스를 전부 끌어 내리자 그녀는 순식간에 나신이 되었다.
단 하나, 카이로스를 상징하는 금 목걸이만은 남긴 채.
희미한 촛불 아래, 하얀 살 위로 붉은 머리카락이 흐드러지고, 그 금빛 보석이 홀로 빛나는 모습은 숨이 막힐 만큼,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맞아. 처음부터 내 것이었어.”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가 서로를 찾았다. 좀 전보다 훨씬 농후해진 입맞춤은 두 사람의 불을 한층 더 지폈다.
그가 습관처럼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고 그 정점을 손가락으로 굴리자, 그녀는 바로 몸을 비틀어 새된 소리를 내뱉었다.
“흐응.”
그는 그 소리마저 삼켜 버렸다. 그녀가 숨을 쉴 틈을 주지 않은 채 키스가 이어지고, 그녀를 뜨겁게 젖어 들게 만드는 그의 손에도 힘이 실렸다.
어디 손에만 힘이 실렸을까.
“하아. 에단.”
그의 손이 아까부터 살살 문질러 두드리던 그녀의 샘은 달콤하게 차올라 그의 손가락을 적셨다. 미끄럽고 끈적한 꿀을 퍼올리기 위해 그의 손가락이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고, 그녀는 그 저릿한 느낌에 하복부의 감각이 얼얼했다. 그저 얼른, 그가 가득 채워 주길 바랐다.
“에단……. 이제 그만. 으응.”
“재촉하지 않아도……!”
충분히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단번에 그녀의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꽉 조여 오는 속살이 터질 것 같은 그의 것을 잡고 놔주지 않았고, 두근두근 느껴지는 그곳의 맥박이 그의 심장도 뛰게 만들었다.
“아. 아. 읏!”
규칙적인 움직임에 따라 침대의 삐걱거림이 울렸다.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무는 그녀의 입을 벌려 다시금 깊은 키스를 하며, 그는 좀 더 깊숙이 그녀 안으로 파고들었다.
굵어진 그는 조금도 성을 풀 생각이 없었고, 달아오르는 그녀의 샘도 조금도 열기를 낮출 생각이 없었다. 그저 서로의 것을 놓지 않은 채, 지금의 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짜릿함에 취했다.
“로엘. 하아.”
“아읏! 응!”
혹여 그녀가 힘들까 봐 힘이 실리면 안 되는데 조절이 잘 되지 않았다. 저절로 힘이 들어가 계속 그녀가 밀리고, 밀린 만큼 아니, 그보다 더 그가 그녀를 밀어붙였다. 가지런하게 정돈된 침대 시트가 이미 멋대로 흐트러졌고, 그녀의 긴 머리 역시 멋대로 흔들렸다.
실은, 이 모습이 보고 싶었다.
“아아. 아. 에단. 에단.”
“아카시스.”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오늘의 그녀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당당히 그의 옆에 앉아 토르티아를 맞는 그녀는 그녀의 말대로 가히 ‘아카시스’라는 칭호에 어울렸다.
고고하여 더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얼굴을 붉히지 않은 이가 있었을까.
에단은 그런 그녀를 보는 순간, 저 여신 같은 얼굴이 자신으로 인해 흐트러지는, 그만이 알고 있는 그 얼굴이 보고 싶었다.
이렇게, 세상에 둘만이 있는 것 같은 이 뜨거운 밤에.
“에단. 빨라요. 당신 지금 좀, 빨라……!”
“나도 알아.”
그런데 멈춰지지가 않은 걸 어떡할까.
서로가 이어진 부분을 지그시 누르며 지분거리자 그녀의 교성이 터져 나왔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그는 잠시 빠져나왔다가 다시금 뒤로부터 그녀를 안았다. 순식간에 빠져나갔다가 더 큰 쾌감을 가지고 들어온 그에게 그녀는 또다시 눈물을 떨어트렸다.
“제기랄.”
욕이 절로 나올 만큼 너무 좋았다. 여자를 즐기진 않았어도 안을 만큼 안아 봤는데 도대체 그녀는 무얼로 만들어졌길래 이리 안을 때마다 미치도록 좋은 걸까. 도저히 제정신일 수가 없다.
“으읏! 에. 에단……!”
그녀의 등에 그의 가슴이 느껴지고, 그의 손이 다시금 그녀의 가슴을 찾아 세게 움켜쥐었다. 오늘 밤의 부드러움은 아까 잔을 채울 때까지였나 보다. 지금은 마치 먹이를 사냥하는 산짐승처럼 사납고 거칠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르는 물방울이 떨어지고,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릴 때마다 두 사람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살과 살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스스로 그의 것을 놔주지 않고 잡고 있다는 것을 느낄때마다 그녀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가 자신을 가득 채웠다는 이 느낌. 모르면 몰랐지 알아 버린 이상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아아아!”
“윽!”
결국 긴 신음 소리가 그녀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드디어 그의 움직임이 멈추고 뜨거운 곳에서의 뜨거움이 찬찬히, 가득 채워 갔다. 그 모든 것을 세세히 느낄 만큼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깨어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진짜 오늘 무슨 날이에요? 오늘따라…….”
“유난히 좋으니, 한 번 더.”
“네?! 아니, 아니. 잠깐만……!”
씨익.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가 이리 환히 미소 짓는 모습, 여기 이 침대 위 아니면 볼 수가 없다.
로엘은 금세 자신의 발목을 당기며 그녀의 허리에 키스를 하는 그를 뒤돌아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그는 두 번째가 준비된 상태다.
“내가 못 살아, 정말.”
잠시 감동적이었던 분위기는 어디로 가고 금세 평소의 두 사람처럼, 육체적 욕구에 아주 충실해졌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그녀는 조금도 싫지 않다는 거다.
아니, 그게 문제려나.
“아시다시피, 카이로스의 밤은 깁니다. 아카시스.”
얄미울 정도로 섹시한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사랑을 속삭이는 그에게 결국 그녀가 또 져 줬다. 아무래도 내일 행사 내내 허리를 두드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밤도 잠들기는 글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