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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1. 니블은 어디에 (22/69)

Chapter 21. 니블은 어디에

“에리카 황녀님. 카이로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카시스님.”

아리스가 주최한 에리카 환영 티파티가 열렸다.

말이 좋아 티파티지 이건 뭐 웬만한 연회 급의 화려함과 규모라 로엘은 입장 전부터 들어가기 싫어졌다. 특히 아리스와 에리카의 저 과한 친한 척이 더더욱 그렇게 만들었다.

“돌아가고 싶어지는군요.”

“안 돼요. 수아 님. 수아 님마저 없으면 저야말로 정말 돌아가고 싶어진다고요.”

수아 역시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작은 한숨을 삼켰다.

몰브가에 잠입했다가 다친 모습을 보인 로엘로 인해 니블에 대해 알게 된 수아는 로엘의 부탁을 거절 못 하고 함께 티파티에 나오게 된 것이다.

한동안 이런 티파티에 안 나와서 까먹고 있었는데, 이곳은 귀족 영애들과 황실 여인들의 사치가 끝을 달리는 걸 보여 주는 곳이다.

본디 여인들 사이에서 인정받아야 진정으로 인정받은 법.

최신 유행을 누가 선도하는지, 누가 제일 잘 어울리는지, 그러한 패션 센스는 누가 좋은지 전부 판가름 나는 곳이 바로 이 황실 티파티다.

“황실 일원뿐만 아니라 웬만한 공작가 영애들도 전부 모였군요.”

“뭐. 토르티아의 황녀가 왔으니 그런 거겠지요.”

로엘은 시큰둥하게 답했다.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귀가 다 간지러운 온갖 아첨들을 듣는 에리카는 꽤나 즐거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카이로스의 영애들은 에리카의 패션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다.

“황녀님, 이 실크는 어디서 나온 건가요? 색감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북방의 치피어라는 작은 면직 도시에서 나오는 소량의 소재입니다. 제가 이번 사신단에 여분으로 좀 가져왔으니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황녀님. 모자가 너무 세련되셨어요. 이건 토르티아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인가요?”

확실히 에리카는 객관적으로 눈에 띄었다. 로엘보다 훨씬 진한 붉은 머리칼도 그러하였고, 토르티아 특유의 쨍한 색깔의 화려한 드레스도 그러하였다.

“예쁘네요. 객관적으로.”

무엇보다도 에리카 그녀 자체가 워낙 미인이었다. 무얼 걸치든 다 잘 어울릴 만큼.

수아는 그런 로엘을 빤히 보며 답했다.

또 이러신다. 이분이.

“제가 지난 연회 때도 말씀드린 거 같지만, 아카시스님이 제일 예뻐요. 아주 객관적으로.”

“하하. 감사합니다.”

로엘은 수아의 진심을 이번에도 그저 그녀의 기분을 좋게 해 주는 빈말로 들었다.

수아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일부러 똑바로 로엘의 눈을 맞추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분은 좀 자기 자신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로엘 님. 저는 빈말을 하지 않습니다. 제가 장담하건대, 이 티파티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시는 건 로엘 님이에요. 그러니 당당히 가세요. 그 누구보다도.”

아니라고 말하면 화낼 기세라, 로엘은 더 이상 수아의 말을 부인하지 못했다.

화려한 저들을 보고 기가 죽었다거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도, 수아의 말에 괜히 자신감이 더 생겼다.

그래서 이리 말해 주는 수아가 고마웠다. 저도 모르게 처질 뻔한 그녀를 단단히 잡아 준 셈이다.

“그래도 제 눈에는 수아 님이 제일이에요.”

“감사합니다.”

정작 그녀의 진심 어린 찬사는 늘 이리 대충 넘겨도 말이다.

로엘과 수아가 함께 회장에 들어섰다. 야외에서 진행되는 야외 티파티였는데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이들은 자연히 두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 파티의 하이라이트인 에리카와 로엘의 만남이 그러하게 만들었고, 좀처럼 이런 자리에 나오지 않는 수아 켈트의 간만의 나들이도 그렇게 만들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수아 님을 초대했던가요?”

“제가 초대받고 올 위치는 아니잖아요? 아리스 몰브 님.”

콕 짚어 ‘몰브’라고 말하는 수아는 명실상부한 켈트가의 영애.

몰브와 켈트가 앙숙이라는 것은 카이로스 사람으로서 모르는 이가 없는데 그 두 집안의 영애가 이리 붙는 건 또 처음 보았다.

워낙 이제까지 수아가 숨을 죽이고 산 덕분에 아리스 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왔는데, 오늘 수아의 등장은 더 이상 이를 좌시하지 않겠단 의미였다.

“로엘 님. 가실까요.”

“네, 수아 님.”

무엇보다도 그런 수아를 이 자리로 나오게 한 이는 로엘. 수아의 노선은 확실해진 거다.

유유자적하게 상석에 자리하는 두 사람을 보며 아리스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지 않아도 꼴 보기 싫은 로엘이 또 하나의 거슬리는 혹까지 달고 온 셈이다.

수아 켈트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은 그녀와 참 오랫동안 부딪혀 온 아리스가 제일 잘 안다.

“아리스 님. 신경 쓰실 거 없습니다. 저의 파티에 누가 오든 저는 개의치 않아요. 원래 끼리끼리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에 지지 않는 에리카가 이 자리에 있지만.

조금도 거르지 않고 대놓고 말하는 에리카의 시선은 정확히 로엘과 수아를 향했다.

로엘은 한숨을 삼켰다. 아무리 제 궁에서는 그랬다 한들 남의 나라에서까지 이러기는 쉽지 않은데, 역시 에리카는 에리카다.

몸을 사린다는 의미가 한 마디도 안 하겠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었나 보다.

“그러게 말입니다. 로엘 님께서 워낙 몰브와 닮은 분이라 하셔서 기대하였는데,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셨군요. 토르티아의 황녀.”

수아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로엘은 그런 수아를 보면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평소 그녀 앞에서의 얌전하고 조용했던 그 수아가 맞나 모르겠다.

그녀가 이곳에 오기 전에, 수아가 그랬다. 자신이 그 자리에 가는 이유는 단 하나라고.

오로지 로엘을 돕겠다는, 아니 지키겠다는 이 이유 하나로 가겠노라고.

수아는 그 말을 감동스러울 정도로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면전에서 비꼬는 건 여전하네요. 켈트 님. 냉궁에 홀로 박혀 있어서 그 성질이 좀 죽었나 했더니만 아닌가 봐요.”

“전 예의라도 있지요, 몰브 님. 지금 하신 말씀, 되게 무례란 거 아시죠? 아, 모르시려나. 모르니까 그렇게 자주 저러시나.”

꼬박꼬박 몰브, 몰브 하는 수아에게 대응하듯 아리스 역시 켈트가 입에 붙었다.

로엘과 에리카의 싸움을 보러 왔는데, 이거 엄한 데 기 싸움이 먼저 터진 셈이다. 로엘의 입장에서야 이런 수아의 모습이 신선하여 저절로 눈이 가고 미소가 나왔다.

아, 진짜. 지금도 너무 좋은데 이러다 더 좋아지게 생겼다.

“정말 끼리끼리가 따로 없군. 저 아카시스도 버림받았다지? 누구처럼.”

“무례하게 굴지 말라고 경고했던 거 같은데. 머리 나쁜 건 알고 있었지만, 나라 대표로 왔으면 조심 좀 해.”

“닥쳐. 어디서 훈계질이야.”

에리카는 얼굴을 찡그리며 바로 받아쳤다. 로엘은 그녀가 몸을 사리기로 한 것이 맞는지 다시금 고민하게 되었다. 어찌나 이리 놀랄 정도로 똑같은지 한편으론 신기하다.

“어제도 말했듯, 몸 사려야지, 에리카. 그러다 여기 온 목적이 틀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그랬다간 토르티아 전체가 다 같이 쪽팔리는 거야.”

에리카를 보지도 않은 채 정면을 바라보며 조곤조곤 말하는 로엘의 말이 에리카의 표정을 순식간에 일그러트렸다.

평소의 로엘답지 않게 일부러 그녀를 도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열이 오르고 심장이 멋대로 뛰어 댔다.

“어제부터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너 얼굴 빨개졌어.”

에리카는 드레스 자락을 쥐어 올렸다. 그리고 열심히 다른 손으로 들고 있던 부채로 부채질을 하였다.

카이로스에 도착하기 전, 몰브로부터 급한 서신을 받았다. 어쩌면 배후가 토르티아라는 것을 들켰을지 모른단 소식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거래 장소와 시간도 모두 급하게 바꾼 거다.

“혼자 소설 쓰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지만, 다른 데 가서 하시죠? 아카시스님.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사람을 의심하지 말고.”

케인 몰브가 로엘이 이 사건을 파헤치는 게 연관되어 있다고 했을 때부터 에리카는 너무 불안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로엘이다. 에리카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토르티아의 방식도 너무도 잘 안다.

그래서 더더욱 조심하고 더더욱 피해야만 한다고.

최대한 숨기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한다고 수십 번을 되뇌었다. 그런데도, 고작 몇 마디에 이 꼴이라니.

에리카는 자기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반대로, 아무렇지도 않는 로엘은 너무도 얄미웠고.

“의심, 걱정, 이간질. 그런 건 네 특기지. 내 특기가 아니라. 그래 봤자 항상 나한테는 실패했지만 말이야.”

“야, 로엘!”

그 모든 다짐들이 무용지물이 돼 버리고 에리카는 결국 터지고야 말았다. 머리보다도 감정이 먼저 벌컥 튀어나와 버렸다.

씩씩대면서 그녀의 이름을 소리치는 에리카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나머지 영애들은 그런 에리카의 모습에 매우 놀란 거 같았으나 오히려 아리스는 그런 에리카에게 연민이 갔다.

분명 로엘이 저 순진한 얼굴로 사람 속을 뒤집어 놓았을 것이 뻔하다.

“저런, 에리카 황녀. 체통을 지키세요. 보는 눈이 많습니다.”

“너. 그 잘난 얼굴, 언제까지 웃을지 아무도 몰라. 네 아버지가 그렇게 죽을지 아무도 몰랐듯이……!”

미리 부채로 입가를 가려 놓아서 다행이다.

로엘은 ‘아버지’란 단어에 순간 또다시 울컥할 뻔했지만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이번에도 똑같이 감정이 더 앞서 같이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에리카와 둘이 마주하여 대화할 수 있는 시간,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럼 웃을 수 있을 때 웃어 놔야겠네. 애석하게도 지금이 그때고.”

“잘난 척하지 마. 어차피 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 다 알고 있어. 그러니까 이렇게 먼저 안달이 나서 나한테 말 거는 거 아냐? 무엇이든 알아내려고.”

에리카 역시 순순히 물러날 마음이 없었다. 항상 로엘에게 당해서 그렇지 그녀도 어디 가서 말로 지는 위인은 아니었다.

“네가 아카시스 신분으로 도둑질하고 다니는 거, 잘난 황제 폐하는 알고 계시니? 네가 천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만, 참 너도 가지가지 하는구나. 어디 할 짓이 없어서 남의 집 담을 넘어, 넘기를.”

에리카가 작정하고 받아치자, 로엘은 오히려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 입장에선 에리카가 그녀를 피하는 것보다 이게 훨 낫다.

“저런 들켰네.”

적어도 대화가 이어지게 되니까.

“덕분에 하나는 확실해졌지만. 우리 에리카 황녀께서 뒷골목 마약 상인 노릇하러 이곳에 오셨다는 거.”

평정심을 찾은 지 몇 분 되지도 않아 에리카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겨우겨우 나라를 위한다고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던 에리카의 자존심을 그녀는 기어코 이리 아프게 밟았다.

에리카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다.

“네 말대로 난 몰라. 네가 어디서 어떻게 니블을 건네고 어떻게 돈을 받는지. 그런데, 적어도 네가 이곳 카이로스 황궁에 있는 동안, 이 사절단 기간 내에 움직일 것은 알아.”

로엘은 한 발자국 더 에리카에게 다가섰다. 그러고는 살짝 상체를 숙여 에리카의 귓가에 속삭였다.

꾹꾹 이 사태에 대한 그녀의 분노를 모두 눌러 담아, 섬뜩한 그녀의 경고를.

“그러니 에리카. 꽁꽁 숨으렴. 내가 먼저 찾아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기 전에.”

순간 에리카의 등줄기를 따라 오싹함이 번졌다.

갈기갈기 찢기는 존재가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로엘의 붉은 눈을 보자 상상돼 버렸다.

“독한 년. 소름 끼치는 년……! 나는 절대 혼자 안 죽어.”

“그래. 같이 죽자. 너와 토르티아가 멸망한다면 이 한 목숨 기꺼이 바칠게.”

로엘의 입가에 형식적으로나마 있던 미소마저 사라졌다. 그만큼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져, 에리카는 좀처럼 멋대로 떨리는 몸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이 재수 없는 붉은 공주가 돌아와 자신들을 지옥으로 떨어트릴 것만 같았다.

“그러니 에리카. 너도 웃어 둘 수 있을 때 실컷 웃어 두렴.”

정확히 에리카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며, 로엘은 당장이라도 제 분에 못 이겨 울 것 같은 에리카를 지나쳐 갔다.

더 부딪쳐 보았자 원하는 답도 없이 자신의 머리만 더 아플 것 같았다.

“로엘 님. 괜찮으세요?”

“네. 저는 전혀 문제없어요.”

바로 아리스가 에리카에게 다가간 것처럼, 수아와 그녀의 시녀들도 바로 로엘에게 다가왔다. 워낙 두 사람이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던지라 선뜻 다가가지 못한 것이다.

“뭐 좀 알아내셨나요?”

“아니. 그냥 토르티아가 니블을 팔러 왔고 몰브가 그걸 사러 왔다는 정도를 확인받았어. 여전히 언제 어디서 거래하는지는 감도 잡지 못하겠고.”

“여기까지 황녀가 올 정도면 굉장한 물량일 텐데 어디다 숨겼는지도 정말 의문이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로엘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초조함이 더 커져만 갔다.

어째 무언가를 하려 들수록 더 미궁에 빠지는 그런 기분이었다.

“잠시만요, 아카시스님. 머리 좀 잠깐 고쳐 드릴게요.”

모두가 니블로 고민하는 와중에도 헤더는 로엘의 머리 모양부터 챙겼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오늘은 헤더가 직접 따라나왔는데, 헤더는 까치발까지 들어 바로 머리 장식의 위치를 다시금 제대로 잡아 주었다.

“우리 헤더 눈 돌아가겠네. 새로운 드레스에, 새로운 보석에. 아까부터 아주 눈이 반짝반짝거려.”

“티 안 내려고 했는데 티가 났나 보네요.”

헤더는 조금 부끄러운 듯이 말했지만, 로엘은 꿋꿋이 자신의 본분부터 하는 헤더가 예뻐 보여 미소가 지어졌다.

“에리카 황녀님, 저도 너무 밉지만 그래도 패션 센스가 좋으신 건 인정할 만해요.”

“완전 인정하지.”

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저 콧대 높은 귀족 영애들이 모이는 게 아니다.

“근데, 생각보다 옷이 심플하네요. 전 좀 더 드레스가 풍성할 줄 알았어요.”

“맞아. 토르티아의 스타일이 원래 저래. 그래서 나는 맨 처음 카이로스의 드레스를 보고 기겁을 했잖아. 이걸 사람이 입고 어떻게 하루 종일 생활하나 싶어서.”

“저희가 좀 욕심이 과하긴 하죠.”

이번에는 수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토르티아는의 옷은 좀 더 가벼운 느낌으로 세련미가 더한 것 같았다. 헤더는 빤히 에리카를 보더니만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저 정도라면 가져오신 짐들의 부피가 지나치게 큰 게 아닌가요? 에리카 황녀님 드레스 상자만 마차로 열 대가 넘게 카이로스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거든요. 도대체 저 안에 어떤 드레스가 있길래 그러냐고.”

“맞아요. 저도 같은 소문을 들었어요. 그래서 다들 기대한다는 소문도요.”

딜리아가 헤더의 말을 거들었다. 로엘은 놀라 하는 그녀들에 비해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근데 고작 며칠 계시는 것치고 너무 과다해서, 저는 혹시 로엘 마마님을 위한 선물로 가져오셨나 그랬는데…….”

“그럴 리가.”

로엘은 자조적인 웃음을 뱉었다.

“뭐, 쟤는 옷이라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꿔 입고 그러는 애라 그럴 수 있어. 게다가 사신단으로 온 거고, 여긴 다른 나라이고 이래저래 생각하면 뭐…….”

로엘은 말끝을 조금 흐렸다.

이곳 카이로스에 있는 시간이 고작해야 열흘이 될까 말까인데 마차 열 대라면 확실히 과하긴 했다.

“도대체 뭘 갖고 온 거야. 하루에 수십 번은 갈아입을 요량인 건가.”

“그렇다면, 엄청난 유난이시네요.”

유난이다마다.

로엘은 눈살을 찌푸려지게 만드는 에리카의 사치에 또다시 화가 올라왔다.

니블을 팔러 온 주제에, 나라가 그 지경인 마당에 정말 생각이 없어도 너무 없다.

“아. 맞다. 그거 어쩌면, 아리스 님 선물일 수 있어요.”

딜리아는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아리스 님께서 창고 하나 비워 두라고 하셨다나 봐요. 갑자기 너무 뜬금없이 그러셔서 다들 되게 힘들었다는 말을 사촌 언니로부터 건너 들었어요. 그 창고가 혹시 에리카 님께 받을 선물을 위한 게 아닐까요?”

순간 로엘은 번뜩 눈이 뜨였다. 에리카는 많이 가져오고 아리스는 창고를 비웠다라.

이거. 아무래도 진짜 단서를 잡은 거 같다.

“맞는 거 같아요. 그죠?”

“네. 저도 그거. 맞는 거 같아요.”

똑같은 생각을 수아도 했나 보다. 로엘과 수아는 서로 마주 보며 씩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그들이 너무 어렵게 생각했나 보다. 물건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정해져 있고, 두 사람의 거소가 정해져 있다면, 답은 뻔하다.

당연히 그 거소 안에서 남에게 들키지 않는 무언가를 ‘통해서’ 주면 되는 거다. 수아는 순간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토르티아 사절단의 환송식을 위해 몰브가 가면무도회를 준비한다고 들었습니다. 참석한 귀족들은 물론, 시녀들과 시종들 모두 가면을 쓰겠지요. 대규모의 황실 가면무도회라면, 옆 사람이 사라지든, 뒷사람이 무얼 하든 아무도 개의치 않을 거예요.”

찬찬히 말하는 수아의 말에 로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윤곽이 잡힌다.

에리카가 그 짧은 기간 동안 생각해 낸, 심히 에리카다운 방식을.

멀리 아리스와 다른 영애들과 함께 특유의 가식적인 웃음을 뱉는 에리카를 바라보며 로엘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거, 우리가 진짜 단서를 잡은 거 같네요.”

웃을 수 있을 때 많이 웃으란 말. 진심이다.

앞으로는 울 일만 있을 테니.

***

“가면무도회요?”

“네. 바로 거기서 전달이 이루어질 거예요.”

되묻는 루카스에게 로엘은 자신 있게 답했다. 확신에 찬 그녀의 눈에 다들 잠시 뒷말을 잇지 못했다.

모든 일에 만약을 염두에 두고, 의심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신중한 그녀가 이번만큼은 단호했다.

“근거는?”

가장 상석에서 고개를 괸 채 그런 그녀를 보는 에단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표정 하나 없이 그녀를 직시하는 그 황금의 눈에 로엘은 저절로 긴장되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확신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에리카 황녀가 자신의 드레스란 명목으로 무려 마차 열 대를 사용하여 짐을 날랐습니다. 그와 맞물려 아카시스 아리스는 자신의 개인 창고 하나를 통째로 비우셨고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정도 상황 정황은 심증에 불과해요.”

아론은 바로 반론했다. 그 또한 맞는 말이라 로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것만으로는 절대 에리카 황녀도, 아리스 님도 추궁하지 못해요.”

“그걸 아시면서 왜 가면무도회가 열리는 날이라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로엘은 아론의 공격적인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천천히 이곳에 있는 이들을 설득하려 들었다.

언제나처럼 흥분하지 않은 채, 듣기 좋은 잔잔한 목소리로, 청중을 집중시키면서.

“우선 첫째. 케인 몰브가 더 이상 나설 수 없습니다. 케인 몰브의 집에서 우리가 모두 아는 바로 그 계약서가 나왔기 때문이죠.”

로엘은 자연히 이반에게로 시선이 갔다. 이반 역시 그런 로엘과 시선을 맞추며 옅게 미소 지었다.

계속하라는 듯한 그의 작은 끄덕임에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케인 몰브를 비롯한 몰브가 일원들은 이번 니블을 직접 수령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에리카 황녀가 카이로스에 있는 동안 프래카는 눈에 불을 켜고 몰브가를 지켜볼 테니까요.”

“당연하죠. 몰브가가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기만 하면 바로라고요”

루카스는 바로 말했다. 매우 루카스다운 반응이다.

저리 대놓고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말에 흥미를 보이는 것까지 포함해서.

“그렇다면 케인은 어떻게 할까요?”

“자신의 목숨을 걸린 일을 맡길 만큼 신뢰하면서도 프래카가 감히 감시할 수 없는 사람에게 맡기겠지. 그러면 딱 한 사람 남고.”

이반이 로엘의 말을 받아 이었다. 정확히 로엘이 하려던 바로 그 말들이었다.

“바로 아카시스 아리스 몰브.”

너무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게, 자신의 말을 해 버리는 그가 조금은 얄미워 그녀는 이반을 흘겼다. 자신의 생각을 너무 훤히 꿰고 있다는 게, 자신의 말버릇마저 닮아 가는 게 싫었다.

“계속하시죠? 아카시스님.”

물론, 가장 싫은 건 바로 이 능글거림이지만.

로엘은 애써 이반을 무시하며 다음으로 넘어갔다.

“아리스 님은 기본적으로 아카시스이기에 쉽게 밖으로 나갈 수 없지요. 설사 나갈 수 있다고 한들 나갈 이유가 없습니다. 프래카가 아리스 님을 감시하지 못하는 것은 그분께서 다른 곳도 아닌 ‘후궁’에 계시기에 그런 거지, 그 담을 넘는 순간 상황은 달라요. 그렇다면 자연히 거래 장소는 이 황궁 내일 테고, 그 시기도 정해집니다. 바로 토르티아의 사람들이 이 카이로스 황궁에 있는 것이 허락되는 사절단 기간.”

에단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려 했다.

참 똑 부러지기도 하다. 그 누구 하나 만만힌 사람이 없건만, 그녀는 그 모두와 일일이 눈을 맞추며 설득해 가고 있었다.

게다가 이리 제일 중요한 실마리마저 스스로 찾아내어 가져오니 어찌 안 예쁠 수가 있나.

참, 모든 것이 예상을 뛰어넘는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어떻게’가 남겠네요.”

그만큼 아름답고, 그만큼 멋있는 여자다. 이 여명의 공주님은.

“으으. 마마. 뜸 들이지 마시고 빨리 말씀해 주세요, 빨리빨리!”

“바로 ‘사람’이에요.”

“네?”

재촉하던 루카스는 로엘의 답에 바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비단 루카스뿐 아니라 아론과 콜린, 제롬까지 모두 다 로엘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로엘은 그런 그들에게 좀 더 다가가 섰다.

“이미 몰브와 토르티아가 거래한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한, 절대 니블은 상자 따위에 곱게 포장돼서 운반되지는 않을 겁니다. 여기 위대하신 에단 황제께서는 몇 날 며칠이 걸려도 상자란 상자는 다 열어 보실 분이니.”

로엘은 슬쩍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충분히 그러실 분이죠.”

“그럼요.”

이 와중에도 그녀다운 귀여운 비꼼이다. 에단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이군.”

“네. 맞아요. 그래서 사람이고, 그래서 가면무도회인 거예요.”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극히 일리 있는 말이다.

프래카가 눈에 불을 켜고 몰브가를 주시하고 있는 이 와중에 에리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다.

그런 에리카가 가장 자유롭게 다른 이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 특히 몰브가 누구와 인사하고 말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기회.

당연히 공식적인 자리밖에 없겠지.

그렇다면 그런 공식 자리 중 가장 정신없고, 가장 시선이 분산되는 때는 당연히 마지막 날의 가면무도회다.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 그 분위기 속에 에리카가 누굴 만나 무얼 하는지 알아내기란 결코 쉽지 않을 테니.

“그렇다면 사람으로 정확히 어떻게 할 거란 이야기죠?”

“드레스요.”

“네?”

“드레스를 바꿔치기 할 거예요.”

콜린의 질문에 로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그 말도 안 되게 많았던 드레스 물품들.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다.

“이번 가면무도회에서는 귀족들뿐만 아니라 시중을 드는 시녀들도 똑같이 가면을 쓰고 드레스를 입는다고 들었어요. 그럼 더욱이 우리는 알아차릴 수 없겠죠. 지인들도 가면 아래에서 신분을 숨기는데 얼굴조차 익숙지 않은 시녀들을 알아차릴 리 없어요.”

자신 있다는 얼굴. 확신에 찬 저 눈빛.

“아마 에리카와 아리스는 그 시녀들에게 옷을 입혀서 서로 바꿀 거예요. 그리고 그 드레스 안에는 니블이 아주 촘촘히 누비어 있겠지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아론이고, 콜린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놀랐다.

전혀 생각치도 못한 그 기발한 계획에 대해. 그리고 그 기발한 계획을 기어코 알아낸 그녀에 대해.

“우와……. 진짜 그럴듯한데요? 공주님 천재 아냐?”

“공주님이 아니라 아카시스님.”

“지금 그게 중요하냐, 멍청아.”

루카스와 아론의 평소와 같은 투닥거림 속에서도, 콜린과 제롬의 놀랐다는 표정에도 로엘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그들이 그녀의 말을 경청해 준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니블은 아주 소량으로 사용될 수 있죠. 니블 한 움큼만으로도 니블굴 전체를 가득 메울 수 있어요. 그러니 한 손 가득이면 백 명분의 한 달치가 되겠죠. 그걸 밀봉하여 드레스에 넣어 누비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아요. 아마 티도 나지 않을 겁니다. 이를 위한, 아주 화려한 드레스를 준비했을 테니까요.”

로엘은 새삼 자신의 시녀들이 너무 고마웠다. 에리카의 드레스가 지나치게 얇아서 놀랐다는 헤더의 말이 없었다면, 그리고 아리스가 갑작스럽게 창고를 비우라 했다는 딜리아의 말이 없었다면 절대 알아내지 못했을 거다.

그저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그것이 이 나라를 구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 셈이다.

꼭 나중에, 너희가 이 나라를 살렸다고 말해 줘야겠다고 로엘은 속으로 다짐했다.

“이번 가면무도회. 몰브가가 먼저 제안하고 몰브가가 전적으로 전담합니다. 그 안에는 당연히 시중드는 시녀들의 드레스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디 황실 의전 담당인 시종장 제롬은 놀란 얼굴로 급하게 말했다.

로엘의 말을 들어 보니 모든 것들이 딱딱 맞았다.

“몰브가에서 처음부터 토르티아와 자신들의 관계를 고려하여 대접하고 싶다고 청해 왔습니다. 자신들이 토르티아와 상거래 할 일이 많다고, 특히 아리스 님께서 꼭 원하시니 부담이 되어도 자신들 완벽하게 하겠다고. 그래서 폐하께서도 바로 재가하셨습니다.”

에단이야 파티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으니 그런 사소한 일에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호의가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이야.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저 아리스의 허세와 사치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많은 품과 돈이 드는 일이다.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만큼.

“뭐 있네, 있어. 그 짠돌이에 능구렁이들이 이렇게 아무 이유 없이 돈을 쓸 리가 없다고. 이거 딱 걸렸어.”

“몰브의 사람들도 많이 들어와도 전부 사전 승인을 받고 진행할 거라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폐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이라도…….”

“그냥 진행해.”

에단은 고민 않고 바로 말했다.

“그럼 어쩌시려고요?”

“기다려야지.”

“그러다 놓치면요?”

“안 놓쳐.”

어련하시겠어.

로엘은 작은 한숨을 삼켰다. 아무튼 자신감은 세상 최고다. 그 자신감엔 항상 이유가 있어, 믿음이 간다는 게 더 큰 문제지만.

그러니 얄미울밖에.

“결국 이번 일의 관건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니블을 거래하는 에리카 황녀와 아리스 몰브의 시녀를 구별해 내는 거겠네요.”

한동안 잠자코 있던 이반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러자 로엘 역시 같은 생각이었던 차라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다만, 그게 매우 어렵다는 거죠. 하나같이 같은 드레스에 같은 가면, 같은 머리를 할 테니까요.”

심지어 그들이 어디 좀 조심하겠는가. 한 나라와 한 가문의 명문이 달린 일에. 아주 작정하고 속이려 들 거다. 그러지 않아도 정신없는 사신단 연회에서, 가면 뒤에 숨은 적을 몰래 찾으라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네 생각은.”

좀처럼 묘안이 생각나지 않아, 하나같이 침묵하고 있는데 갑작스레 에단의 목소리가 울렸다.

“네?”

그 것도 정확히 로엘을 향한 말이.

“네 생각을 말해 봐. 명색에 프란시아잖아?”

순 자기 멋대로 정한 거면서, 프란시아 타령은!

로엘은 순간 울컥하여 한 소리 하려다 말았다. 그 생각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나 에단은 애써 웃음을 참았다. 지나치게 투명한 이 점이 좋아, 이리 그녀에게 빠져 버린 거다.

“일단 우리가 먼저 조치를 취하려 든다면 의심을 살 거예요. 처음부터 몰브거 전담했던 만큼 끝까지 신경 쓰지 않는 태도로 일관해야 해요. 자칫하다간, 그러지 않아도 예민한 그들이 도망갈 수도 있어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일은 더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들이 조심하는 만큼 우리도 조심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음. 그럼 차라리 황궁 시녀들에게 언지를 주는 건 어때요? 몰브가 사람들을 지켜보라고요.”

“안 됩니다. 그러기엔 통제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로엘은 바로 반대했다.

감사하게도 그녀의 사람들이 입이 무거울 뿐, 나머지 황궁 사람들은 믿을 수 없었다.

걸러 내지 않고 말을 하는 어린 시녀들부터 모든 것을 전하기 바쁜 철없는 이들까지. 황궁에는 비밀이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이번 일은 무엇보다 비밀 유지가 생명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신뢰할 수 없는 이들에게 맡길 수는 없어요.”

로엘은 꽤 단호했다. 다른 반론은 전혀 나오지 못할 만큼.

그 모습에 제일 놀란 건 제롬이었다. 아랫사람들에게 유하기로 유명한 그녀가 이리 나오는 것이 조금 의외였다.

한번은 사라에게 로엘 님은 너무 여리셔서 걱정된다고, 아랫사람에게 다정한 것은 좋다만 자칫하다 위엄이 안 설 수 있다고. 그러니 조언을 잘 드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사라는 웃으며 기우라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그분은 필요할 때 충분히 위엄과 권위를 보이시는 분이라고 답했다.

그 말을 제롬은 이제야 이해할 거 같다.

확실히 때와 장소에 맞는 사리 판단이 되는 영특한 분이다.

그저 여리기만 하여 폐하의 보호 아래에만 있어야 하는 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럼 아예 프래카를 쫙 배치할까요. 프래카마다 시녀 하나씩을 전담시켜서 열심히 지켜보게 하는 거지.”

“멍청아, 멍청한 소리 좀 하지 마. 지금까지 말한 것 중에 그게 제일 티 나.”

바로 아론의 핀잔이 날아왔다.

루카스는 괜한 무안을 주는 아론에게 투덜대었지만, 정작 아론도 별다른 기발한 생각이 떠오르진 않았다.

로엘도 마찬가지였다. 무언가를 하려 든다면 바로 그 자체가 위험을 수반하니 선뜻 무언가 시도하기가 어려웠다.

사안은 중대하고 기회는 한 번뿐인 경우라 신중하면서도 확실한 계책이 필요했다.

“역이용하면 되잖아.”

바로 그때, 심드렁한 그의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한쪽 손으로 자신의 고개를 괸 채, 홀로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그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러네. 역으로 이용하면 되겠네.”

그리고 그 말을 바로 이해한 이반 역시 그의 말에 동조했다.

“누가 누군지 알아보기 힘든 거. 그쪽도 마찬가지니까.”

이반의 부연설명이 이어지자 로엘도 뒤늦게 에단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렇네요. 우리도…… 똑같이 이용할 수 있네요!”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이리 가까운 곳에 해답이 있었는데.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이리 금세 알 수 있는데.

그들의 무기가 우리의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뭐야, 뭐야. 지금 나만 못 알아들은 거야? 그런 거야?!”

“맞네. 폐하의 말씀대로…… 저희가 이용하면 되겠네요!”

“확실히, 잘만 이용하면 역이용할 수도 있겠어요.”

뒤늦게 아론과 콜린 역시 깨달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역시나 에단은 에단이다. 이곳에 이 많은 최고의 지략가들이 있어도, 그를 따라갈 순 없다.

이건 타고난 특출함이고 타고난 판단력이다. 그러니 다른 이들이 이리 골머리를 앓던 것을 이리 쉽게 해결해 버리는 거다.

“아, 뭐냐고 그니까! 같이 좀 알자.”

“쉽게 말해 우리도 가면을 쓴다는 거야.”

“그게 뭐? 가면무도회니까 당연하지.”

그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들이 주군께서.

“바로 그 당연한 걸 이용하자는 말씀이야. 우리가 저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만큼 저들도 우리를 못 알아볼 테니까. 우리도 가면 뒤에 숨어 에리카 황녀와 아카시스 아리스 님의 시녀들을 감시하는 거지. 저들이 어디서 나와 어디로 가는지. 누구와 만나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말이야.”

“그 말은 그러니까…… 프래카 대신에 키로스를 집어넣어 감시한다. 그 말 맞지?”

“정확해요.”

로엘은 씩 웃으며 답했다.

통제되지 않는 시녀들도 아니고, 의심을 살 수 있는 프래카도 아니다.

이 계획의 핵심은 ‘키로스’다.

훈련된 군인으로서 순발력이 빠르고 눈썰미가 좋으면서도 자연스럽게 가면무도회에 스며들 수 있는 사람들.

몰브의 사람들이, 그리고 에리카의 심복들이 활개를 치고 다닐 때 키로스의 눈은 그들을 끊임없이 좇을 거다.

“그런데 그럼 원래 배치되었던 시녀들이 교체되었단 말이 새어 나갈 수 있잖아요? 그건 어떻게 하시려고요?”

“무섭게 협박이라도 하시려나. 잘하실 거 같은데.”

“아. 니. 요. 그냥 휴식을 줄 거예요.”

로엘은 이반의 말에 발끈하여 대꾸해 버렸다. 은근하게 사람 속을 긁는 그를 흘겨보자, 오히려 이반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렸다.

“당연히 당일 갑작스럽게 교체할 거고, 폭력이나 협박 같은 것은 없을 겁니다. 황자님께서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그저 아주 잠시만 그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놓고, 몇 시간 후에 나올 수 있게 할 거예요.”

로엘은 이반을 똑바로 바라보며, 잔뜩 가시를 세웠다.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협박을 잘할 거 같다니. 이런 무례가 있나.

로엘은 당장이라도 한바탕 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담고, 제롬에게 다시금 눈을 돌렸다.

“그 일은 제롬 경이 알아서 잘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예. 맡겨 주십시오.”

이런 일이야 당연히 제롬이 전문이다.

이곳 황실의 일원으로 황궁 인력을 관리한 지만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교체쯤이야 얼마든지, 단번에 신속하게, 실수 없이 처리할 수 있다.

“어쨌거나 드디어 실마리가 좀 풀려 가는군요.”

“좀이 아니지. 거의 다 한 거지! 그것도 우리 프란시아, 로엘 님 덕분에!”

루카스는 무슨 대회의 우승자인 양, 대뜸 로엘의 손목을 잡고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하하. 고마워요. 루카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로엘은 민망함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지만, 루카스의 손에 잡힌 로엘의 가는 손목을 보며 에단과 이반은 동시에 얼굴을 찌푸렸다.

“루카스, 손.”

아이러니하게도 루카스를 제일 먼저 저지한 건 아론이었다. 루카스는 그제야 로엘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저도 모르게 그만, 하하. 로엘 님이 너무 좋아서 그랬어요. 너무 대단하고 막 그래서.”

“네. 고마워요. 별거 안 했지만.”

“별거 아닌 건 아니지. 잘한 건 잘한 거니까.”

루카스의 말에 이어 이반 역시 자연스럽게 로엘의 공을 칭찬했다. 사람 성질을 건드릴 때는 언제고 이번엔 또 칭찬 모드인 이반이 로엘은 전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황자님.”

“무슨 말씀을.”

문제는 그런 두 사람 사이에 은연중에 나오는 반말이라는 거다.

정작 두 사람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예민한 콜린은 바로 에단의 눈치부터 살폈다. 다행히 그분 역시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진짜 수명이 줄어드는 것 같아서 안 되겠다. 이 말도 안 되는 눈치를 보는 건.

“이반 전하. 그만 가 보셔야 합니다. 북방 쪽에서 잠시 사람이 왔었습니다.”

“그래. 폐하. 그럼 저는 이만.”

에단은 이반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가라는 의미로 손사래를 쳤다. 이반은 그런 자신의 형제에게 피식 한 번 웃어 주곤 그만 회의실을 떠났다. 로엘은 속으로 그제야 한숨을 뱉었다.

무시로 일관해야 하는데 이래저래 이반의 페이스에 말려든 거 같았다.

“폐하. 그럼 전 계획대로 움직이겠습니다.”

“저는 키로스를 좀 훈련시킬게요.”

“저하고는 사신단과의 협의 일정에 대해 논의하셔야 합니다.”

이반이 나가자마자, 다른 이들도 하나둘 각자의 일을 알아서 맡았다.

로엘은 그 모습에 말없이 미소 지었다.

그가 특출한 것은 맞지만, 그 옆에 저들이 있기에 그의 생각이 실현될 수 있는 것도 맞았다.

이미 업무 모드에 들어간 그들에게 괜한 방해가 될까 싶어 로엘은 조용히 걸음을 뒤로하였다.

그저, 항시 자신을 보고 있는 그에게만 예쁜 눈인사를 남긴 채.

“마마.”

“가자. 우리도 바빠.”

그렇게 길었던 니블의 행방에 대한 회의가 파했다.

니블은 카이로스 황궁에 있다.

이제 그 니블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낼 때 낚아채면 그만.

드디어 길고 길었던 안개 속의 끝이 보여 간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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