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9. 그리운 사람 (20/69)

Chapter 19. 그리운 사람

“마마.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황실 의원을 불러요. 열이 계속 오르잖아요.”

“괜찮아. 자고 일어나면 떨어질 거야.”

지혈이 된 걸 확인하자마자, 로엘은 서둘러 자신의 궁으로 돌아왔다. 혹시 그에게 연통이 있었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오늘 밤은 정말로 아무 소식이 없었다.

로엘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염증 때문에 계속 열이 올라 시녀들 걱정만 잔뜩 시켰다.

딜리아는 물수건을 한 번 더 갈아 주며, 걱정 가득한 눈으로 그녀의 땀을 닦아 주었다.

“벌써 동이 틀 시간이에요. 몇 시간째 열이 안 떨어지니, 이러시다가 정말…….”

“괜찮대도. 괜한 소란 일으켜서 그러지 않아도 정신없는 분,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마마.”

“괜찮아. 괜찮아.”

로엘은 열이 올라 붉어진 얼굴로 연신 괜찮다고만 했다.

“마마. 잠시만 일어나 보세요. 제가 해열에 좋다는 거 듬뿍 넣어 즙을 좀 내려 봤어요. 힘드시겠지만 이거 조금만 드셔 보세요.”

그녀를 걱정하는 게 어떻게 딜리아뿐일까. 안나는 바로 그녀에게 해열 음식을 대령했고, 헤더는 열이 떨어지도록 편한 옷을 준비해 주었다.

그녀가 만류했어도 같이 따라갔어야 했다고, 시에라는 자책에 빠져 있었으며, 페니 역시 그런 시에라를 위로하면서 그녀의 곁을 지켰다.

한결같이 그녀만을 걱정하는 그 마음에 로엘은 아픈 와중에도 미소가 절로 났다.

아플 때 누가 곁에 있어 주는 것.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 있는, 참 오랜만의 일이다.

“다행이야. 너희들이 곁에 있어 줘서.”

“저희가 이럴 때 마마 곁에 있지, 그럼 어딜 가겠습니까.”

“얼른 푹 주무세요. 그래야 열이 떨어져요.”

그녀가 미소에 그녀들도 따라 미소 지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사람’이 고픈 분인 걸 알기에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는 그녀가 그녀들은 그저 마음 아팠다.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렇게 밤새 곁을 지키려 했건만, 애석하게도 그 역할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나 보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그 때문에 그녀의 궁, 세룸니르가 발칵 뒤집혔다.

평소였다면, 그의 그녀에 대한 남다른 애정에 놀랄 것도 없이 그녀의 침실로 안내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모두들 우왕좌왕 정신이 없었다.

“차가운 물수건부터 갖다 줘. 일단 열부터 식히고……. 아니다. 차라리 화장을…….”

물론 가장 놀라고 당황하는 건 당연히 로엘이었다.

축 처지는 몸을 겨우 일으키며, 그녀는 최대한 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상처가 드러나지 않도록 가운을 단단히 여몄다.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일부러 한 번 더 크게 그의 도착 소식을 알리는 시에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성큼성큼 보폭이 크기도 한 그 특유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로엘의 심장도 쿵쿵 뛰었다.

다칠 것을 예상 못 했듯 이렇게 다친 것을 그에게 들킬 것도, 나아가 그 이유를 설명하게 될 것도 모두 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다.

“하늘 같으신 폐하를 뵙습니다.”

그러니, 이리 얼음장같이 차가운 그의 표정 역시 예상하지 못했겠지.

“다 나가.”

그는 자신에게 허리를 조아리는 그녀들에게 딱 한마디 했다.

그리고 그 한마디에 로엘 님께서 몸살 감기에 걸리셨다는 그 뻔하디뻔한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난처하다 못해 무서워하는 그녀들에게 그녀는 한숨을 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나가도 된다니, 그건 말없이 당장 나가라는 의미였다.

“……오셨네요.”

열이 올라 여전히 정신이 몽롱하고, 겨우 지혈된 상처 부위에선 아직 통증이 가시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얼굴로 그를 맞았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침대헤드에 몸을 기대고 앉아 그를 맞는 그녀는, 누가 보아도 멀쩡해 보이지 않았다.

“안 오길 바랐나 보군.”

정색한 그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쓸데없는 일에 시달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이 새벽에 잠시 잠들어 있을 얼굴이나 보고 가려 했는데, 온 궁 사람이 깨어 있는 거부터 심상치 않았다.

그런데 이 꼴이라니.

“그런 거 아니에요.”

“입 다물어. 진짜 화났으니까.”

화났다는 사람치고,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그의 차가운 손이 열이 펄펄 끓는 그녀의 이마에 닿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에서 힘을 뺐다. 그리고 좀 더 편히 등을 기대며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열이 높은지 그 숨결마저도 뜨거웠다.

그의 표정이 더더욱 굳었다.

“소독 냄새.”

“아. 잠깐……!”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가 단단히도 여며 놓은 가운의 끈을 풀어 내렸다. 그러자 바로 피가 조금씩, 여전히 새어 나오고 있는 환부가 드러났다. 그의 표정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잘못했어요.”

훈련하다 그런 거라고, 잠시 거짓말을 해 볼까 했지만 말았다. 더 이상 그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이러지 않을게요.”

그와 눈을 맞추며, 손을 꼭 쥐어도 그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로엘은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멍청한 실수 때문에 안 그래도 바쁜 그를 더 신경 쓰게 만들어 버렸다.

이 차가운 표정과 눈길이 오롯이 그녀에 대한 걱정 때문이란 걸 알기에, 그래서 그녀의 상처에 그녀보다도 더 아파하는 게 느껴져 그녀 역시 마음이 아팠다.

“에단.”

“부르지 마.”

로엘이 침대 위에서가 아니면 좀처럼 부르지 못하는 그 이름을 부르자, 어쩔 수 없이 조금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녀는 무거운 몸을 좀 더 일으켜 그런 그의 몸을 꼭 안았다.

“잘못했어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그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어찌나 힘이 없는지 가냘프기까지 했다.

에단은 올라오는 화를 꾹꾹 참고 조심스럽게 그런 그녀를 품에 안았다. 다쳤다는 것을 아는 순간 정말 심장이 요동쳤다. 혹여 심각한 것이면 어쩌나 겁부터 났다.

“……의사는.”

“너무 늦기도 했고, 그렇게 심각한 상처도 아니에요.”

“그걸 말이라고. 어서 당장…….”

“아니. 그러지 말아요.”

그를 말리는 그녀의 손이 다급했다. 그의 팔뚝을 세게 잡는 그녀는 그의 눈을 보며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에단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아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괜한 소란 만들고 싶지 않아요. 토르티아 때문에 그러지 않아도 어수선한데 저까지 보태고 싶지도 않고요. 이런 상처,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면 금세 낫는 거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폐하,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세요.”

돌려 말해도 결국은 그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더 화가 나는 건, 그런 그녀의 말이 전부 옳다는 것.

만일 그녀의 상처 입은 사실이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분명 득달같이 달려들 거다.

그녀가 무얼 하다 다쳤으며, 어디서 다쳤고, 황제의 여인으로서 어떻게 다칠 수가 있냐며 그녀를 끌어내리기 바쁘겠지.

그러면 그 피해는 오롯이 그녀가 떠안아야 한다. 그래서 그 역시도 선뜻 황실 의원을 부르라 말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이, 그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대신, 아침까지 제 곁에 있어 주세요. 폐하가 옆에 있어 주면, 바로 나을 거 같아.”

그런 그의 마음을 그녀 역시 모를 리 없다.

그녀는 일부러 활짝 웃으며, 평소에 잘 하지도 않는 투정을 부렸다.

그녀는 그의 목을 안으며 그와 눈을 맞추었다. 아무리 화내고, 아무리 차갑게 말해도 그녀에게는 고스란히 전해지는 그의 걱정을, 그 아픔을 다독여 주기 위해.

“제가 잘 때까지 어디 가시면 안 돼요. 저 아프단 말이에요.”

그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귀여운 투정에는 이길 수 없었으니까.

그는 혹여 그녀가 아플까 조심스럽게 허리를 안으며 다시 침대에 그녀를 뉘였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손길로, 식은땀에 젖은 그녀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또 한 번 다쳐서 오면 진짜 가만 안 둘 줄 알아.”

“네.”

그는 이제야 그녀와 제대로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녀가 잘 수 있도록, 이불을 덮어 주고, 아프지 않게 토닥여 주는 그 덕분에 그녀는 정말로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것 같았다.

그저 웃음이 나고, 그저 좋았다.

이래서 어린아이들이 아플 때 투정 부리나 보다.

“어딜 다녀온 거야.”

“제가 나간 걸 아셨어요?!”

“이 황궁 안에서 감히 누가 널 다치게 해. 당연히 황궁 밖이겠지.”

토끼 눈이 되면서까지 놀라 하는 그녀를 보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를 보는 순간 화살에 맞은 것을 알았다. 전쟁터에서 지내 온 세월이 얼마인데 그가 그것 하나를 알아보지 못할까.

그런 화살을 이 황궁 내에서, 그것도 가장 깊숙이 자리 잡은 후궁 내에서 맞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러니 당연히 나갔다고 볼 수밖에.

“……그런데 왜 화내시지 않는 거예요.”

“화났어. 다시는 그런 위험한 짓 하지 마.”

말로만 화났다고 하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손길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로엘은 순간 울컥했다. 그에게 나갔다는 그 말을 하는 것이 제일 무서웠는데, 그런 그녀의 걱정을 그는 단번에 없애 줬다.

“왜 이 시점에서 울려 해. 최대한 약하게 혼내고 있는 건데.”

“……그래서 더 눈물 나는 거예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에게 그는 피식 웃어 주었다.

그녀는 진짜 두려웠나 보다. 그에게 그녀가 황궁 밖으로 나갔다는 그 사실을 말하는 것이.

그런데 그는 화가 나면서 이해가 되었다. 황궁 밖에 나가는 것. 그게 뭐 대수라고.

그도 황자 시절, 못 나가서 안달이었는 것을.

“네가 황궁을 나갔다면 그건 나를 위해서겠지. 니블에 대해 무언가를 알아냈을 거고, 그걸 말하기엔 내가 너무 바빠 보여서 직접 나선 거 아니야. 나의 겁 없는 아카시스께서는.”

묻지 않아도 안다. 변명하지 않아도 알아준다.

로엘은 진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녀는 그녀를 빰을 덮어 주는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토르티아가 범인이었어요. 토르티아가 니블을 가져와 몰브와 거래한 거였어요.”

왜 이 말을 하는데 이리 눈물이 나는지. 로엘은 자신을, 북에서 온 그녀를 이리 믿어 주는 그를 배신하는 것만 같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나갔어요. 확인해야만 해서. 정말 토르티아라면, 당신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무서워서. 그래서 나갔어요.”

하염없이 흐르는 그 눈물을 그는 말없이 닦아 주었다.

솔직히 그는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을 뿐, 어렴풋이 의심하고 있었다.

그가 이 정도로 수색하는데 꼬리조차 잡히지 않을 정도라면 몰브뿐 아니라 그 공급책의 힘 역시, 몰브 급 혹은 그 이상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다면 충분히 토르티아를 의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보기에 지금의 토르티아는 충분히 밑바닥을 보일 만큼 심각한 상태였으니.

“네가 왜 미안해하는 거야. 네 잘못 아냐.”

그런 것쯤은 그녀도 머리로 안다. 하지만 마음이 그러하지 않았다.

토르티아가 미워서, 토르티아가 증오스러워서 여기까지 왔고, 그 나라를 멸망시키려고 목숨을 걸었는데도, 그러함에도 이건 싫었다. 이 모순적인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리석구나. 네 부모가 그곳에서 억울하게 죽었다 한들, 그곳은 어쩔 수 없는 너의 뿌리. 네 붉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를 닮은, 너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첫날, 그가 했던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그곳은 어쩔 수 없는 그녀의 뿌리라는 그 말, 애석하게도 그녀의 현실인가 보다.

토르티아가 망하길 바라도, 이런 식으로 이렇게 볼품없이 추락하는 것까지는 보고 싶지 않은 걸 보면.

“울지 마.”

“안 울어요.”

로엘은 떨어지는 눈물을 애써 닦았다. 그의 말대로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아니니까 이렇게 울고 있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가서 확인했어요. 몰브가에 직접 들어가서, 계약서도 훔쳐왔고요.”

뭘 믿고 이렇게 겁이 없는지, 에단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몰브가의 담을 넘는 순간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여자만 모르나 보다.

“화살은 어쩌다 맞은 거야.”

“……이반 황자님을 지키다가.”

이번엔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전혀, 정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름이 나왔으니.

당연히 키로스인 시에라를 데리고 갔겠거니 했다. 그런데 이반이라니.

로엘은 놀라 하는 그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보며 말을 이었다.

“이반 황자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부탁을 하였고, 황자님께서 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나오는 길에 제 실수로 들켜 버려서…….”

로엘은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기껏 좋아진 분위기를 다시 냉랭하게 만들어 버린 건 아닌지. 아니면 이번만큼은 그도 정말로 화내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이반과 그녀 사이를 의심하고 실망하는 건 아닌지.

막상 말을 해 놓고 보니 덜컥 겁이 몰려왔다.

“그래.”

그런데 그런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그의 반응은 너무 담담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전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이반이라면 들어줬겠지, 네 부탁을. 잘했어. 혼자 가는 것보단 훨씬 나아.”

너무 아무렇지 않은 듯한 그 반응에 이번엔 로엘의 말문이 막혔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다시는 대신 다치고 그러지는 마. 네가 지켜 주지 않아도 이반은 너보다 훨씬 강해.”

그리고 깨달았다. 그녀가 너무 과소평가했다고.

그의 이반에 대한, 이 절대적 믿음을.

“……저도 강해요.”

“알아. 그래도 그러지 마.”

그가 질투도 많고, 독점욕도 심하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로엘이 제일 잘 알았다. 그런데도, 그녀가 이반과 단둘이, 이 밤에,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나갔다 와도 그의 형제만은 예외다.

그는 정말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대답.”

“네.”

그는 고분고분한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녀의 부탁대로 진짜 그녀를 재워 주고 갈 요량인가 보다. 그녀에게 자라고 말해 주는 그 표정에 애정이 가득해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또다시 미루고 말았다.

이반에 대해서, 이반과의 지나간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불같이 화내는 케인의 목소리가 몰브가 전체를 울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꽁꽁 숨겨 두었던, 애지중지하던, 바로 그 니블 계약서를 거래 하루 전날 두 눈 뜨고 뺏겼으니 제정신이 아닐 수밖에 없다.

“당장 찾아! 카이로스 전역을 뒤져서라도 그 좀도둑들을 찾아내란 말이야!!”

“그게……. 애초에 두 사람밖에 없었고, 흔적도 전혀 남기지 않아서…….”

“아무래도 일반 도둑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문서를 노리고 온 것이 아닌 이상, 그것만 가지고 갈 이유가…….”

“누가 그걸 몰라? 그러니까 더 찾으라고! 당장 나가서 찾아!”

손에 잡히는 대로 던져 버리는 케인 때문에 수하들은 더 이상 케인 방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케인은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겨우 억눌렀다. 온 방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도 분이 풀리지가 않았다.

그 계약서가 어떤 계약서인가.

토르티아와 몰브를 단번에 사지로 몰아넣을 그런 계약서다.

“젠장할……!”

케인은 성질을 못 이겨 술병을 벽에 던져 버렸다. 병이 깨지면서 유리 파편이 그의 얼굴에 튀어 생채기를 만들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 이깟 상처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케인은 그날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 냈다.

그러고 보니 얼핏 담을 넘어가던 그 좀도둑을 보며, 정확히는 뒤돌아 그와 눈을 맞추는 그 왜소한 자를 보며 순간 직감한 것이 있었다.

여자라고.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머리에 스쳐 가는 단 한 사람.

붉은 눈동자의 바로 그 여자.

“분명…… 분명 로엘, 그년이야.”

아무리 술에 취하고 약에 취한들, 그 눈을 못 알아볼까.

똑바로 그와 눈을 맞추며, 감히 그에게 고개를 조아리라 명하던 그 건방진 눈. 그 눈이 분명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달밤에, 그의 집에서, 그의 물건을 훔쳐 가며.

“제기랄!!”

또 한 번 악에 받친 그의 고함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케인은 손에 닿는 술병을 집어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정말 로엘의 손에 들어갔으면, 에단의 손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근데……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는 뭐지?”

케인은 단번에 비워 버린 술병을 아무렇게나 던져 두며 생각했다.

두 사람을 보았다는 시종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녀는 분명 다른 이를 지키려다 활을 맞았다.

“에단 황제일 리는 없고…….”

애초에 황제가 알았다면 그녀를 보내지도 않았을 테니.

그리고 무엇보다 에단 황제는 몰래 황궁을 빠져나올 만큼 여유로운 처지가 못 된다.

아무리 쇠락하고 있다고 해도 토르티아다. 그 토르티아의 황녀가 사신으로 온다는데 그 고지식한 노인네들이 그를 놔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누구지. 도대체 누가 아카시스와……!”

‘몰브는 황자님께 예를 갖춰라.’

또 한 명, 스쳐 지나가는 사람.

케인은 탁, 하고 테이블을 쳤다.

“하. 설마 진짜…….”

입으로는 설마를 말해도, 마음으로는 이미 확신했다.

비몽사몽한 상태에서도 확연히 느낄 수 있는 남다른 실력.

실력자 중 실력자만 모아 둔 몰브의 사병들을 비웃듯 아주 가볍게 넘겨 버리는 그 여유까지.

붉은 머리의 그녀뿐 아니라, 동반한 그 남자 역시 머리끝까지 둘러 싸매고 있어 머리카락 한 올도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이거 재밌어지네?”

황제의 여인과 황제의 형제가 함께 있는 그림이라.

아주 구미가 당기는 이야깃거리다.

“그 로엘과 그 이반이란 말이지.”

그것도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여인이고,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형제다.

케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큰 패를 잃었으나, 그보다 더 큰 패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단번에 눈엣가시인 두 사람을 날려 버릴 그런 엄청난 패를 말이다.

***

“하늘 같으신 폐하를 뵙습니다.”

로엘이 잠든 모습을 보고 나서야 에단은 다시 집무실에 들었다. 동이 막 틀 무렵인 그 꼭두새벽에, 그보다도 먼저 그곳을 지키던 이반이 에단의 등장에 바로 고개를 숙였다.

평소처럼, 에단은 그런 이반을 대수롭지 않게 맞았다.

“잠은 자고 살아.”

“워낙 급한 일이라.”

“이렇게 새벽에 보고할 만큼은 안 급해. 어차피 계약서 한 장만으로는 어쩌지 못하잖아.”

이반의 눈동자가 커졌다. 마치 로엘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에단 역시 그런 이반의 반응에, 지난밤 로엘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주 덤덤히 반응했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란 듯이.

“형제. 이번에도 큰 건 했던데.”

실제로 그에겐 그러하였다.

“잘했어. 그리고 고마워.”

언제나처럼 형제가 자신을 위해 일해 준 것일 뿐. 언제나처럼 그에 대해 고마워할 뿐. 에단에겐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없었다.

“그런데 앞으론 다치게 하지 마. 야생마처럼 보여도 생각보다 여리니까.”

이반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언제 어떻게 이걸 가져왔냐고. 왜 말하지 않았냐고. 누구랑 함께 갔냐고. 그 모든 말들에 대해 어떻게 답해야 할지, 밤새 생각했다.

아니, 무슨 거짓말로 형제를 속일지 그 생각만 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에단은 지난밤의 모든 고민과 걱정을 단번에 허무하게 만들었다.

“이반.”

어떻게 저리 일말의 의심이 없을 수 있는지, 이반은 올곧은 그의 눈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로엘이 멋대로 부탁을 했겠지. 그 고집은 아무도 못 꺾어. 그래서 들어준 거 알아.”

그런 그의 마음마저 꿰뚫어 보는, 그리고 품어 주는 그의 형제를 마주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너는 로엘의 부탁으로, 나에게 할 거짓말을 준비해 왔을 테고, 그게 미안해서 이리 아침부터 달려왔겠지. 덕분에 한숨도 못 잤을 거고.”

에단은 작은 한숨을 뱉었다. 로엘이며, 이반이며 둘 다 똑같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그를 너무 속 좁은 남자로 보았나 보다. 그들이 왜 궁을 나갔는지, 어째서 그에게 숨겼는지 모를 만큼 그는 바보가 아니다.

두 사람 모두, 전부 그를 위해서 그랬겠지.

“쓸데없는 자책 하지 마. 그보다는 어떻게 니블 거래 현장을 알아낼지나 궁리해. 그게 더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야.”

다만, 두 사람이 그에게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이 괘씸할 뿐.

거기다 멋대로 다치기까지 한 것이 아주 화날 뿐.

두 사람의 의도에 대해서는 단 한 순간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무엇이 불안하여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그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는 그를 위한다는 그 마음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자신을 가장 위하는 두 사람이 정작 모르는 거 같다.

“황자 이반. 황제의 명을 받들지 않을 건가.”

여전히 굳어 있는 이반에게 말하는 그의 명령조는 딱딱했지만, 오히려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일부러 그를 편하게 해 주는 그에게 이반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정말이지 당해 낼 수가 없다. 그의 형제에겐.

“황자 이반. 하늘 같으신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그래서 장단을 맞추어 드렸다. 이럴 때만 나오는 그의 황제 놀이에.

“반드시 니블의 머리를 잡아 오겠습니다.”

드디어 나온 이반의 만족스러운 태도와 대답에, 에단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래.”

늘 그는 그의 형제에게 이런 걸 원했다.

남들의 눈치를 보고,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그런 이반 말고, 무엇이든 해낼 것 같은, 그리고 실제로 그러할 수 있는 그가 가장 신뢰하는 카이로스의 황자 이반 말이다.

“제대로 하자. 더 이상 헛발질 그만하고.”

충분히 쓸데없는 생각들로 시간을 낭비했으니, 이제는 진짜 일을 할 때였다.

에단은 이반이 가져온 토르티아의 문장과 몰브의 문장이 선명한 그 계약서를 펼쳤다.

이리 눈으로 보니 확실히 머리로만 생각하고, 귀로만 들었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사안이 사안이라는 거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자칫하단 전쟁이지. 어쩌면, 아주 좋은 명분을 물었을 수도.”

에단은 피식 웃었다. 정확히 그가 생각하던 바였다.

“솔직히 토르티아가 그 배후일지도 모른다는 거. 나의 위대하신 형제께서는 진즉부터 의심하고 있었잖아.”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니까. 지금의 토르티아를 생각한다면.”

겨우겨우 북방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을 뿐, 그들은 하루하루가 버거운 지경에 이르렀다.

조지 황제가 즉위한 후 토르티아가 잃은 영토가 얼마며, 뺏긴 상권이 얼마인가. 그런 그들에게 마약 사업은 아주 매력적인 사업이다.

작은 투자만으로도 몇 십 배가 넘는 수익에, 한 번 고객은 영원한 고객이 되어 주니, 이미 갈 데까지 간 조지 황제에게 니블은 어쩌면 선택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걸로 전쟁할 생각, 없잖아?”

“없지.”

에단은 일말의 망설임 없었다.

“애초에 명분 따위, 나에겐 필요 없어.”

그 말에, 이반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가 그리하겠다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께서 그리하시겠다는데 감히 누가 토를 달까.

그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다.

“나의 북방 정벌은 ‘대의’야. 이따위 추잡한 일에 엮일 마음, 추호도 없어.”

이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인 일이던가.

그간 쏟은 노력을 생각하면, 에단의 그러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건 ‘그녀의 대의’이기도 하다.

“토르티아가 몰래 마약을 파는 것. 그것도 오로지 돈을 위해 적국의 귀족 가문과 거래를 한다는 것. 그건 그들이 수치스러워할 그들의 치부이지 내 알 바 아니야. 그러니 이 문제에 토르티아는 중요하지 않아.”

그녀가 무슨 마음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고작 니블 따위에 토르티아는 무너지면 안 된다. 그렇게 허망하게 멸망해 버린다면 그녀의 복수마저 너무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 에단 역시 토르티아를 강조할 마음이 없다.

처음부터 토르티아가 배후임을 예상하였음에도, 이리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여전히 토르티아가 대수롭지 않은 그 이유. 에단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이반 역시 안다.

그 이유가 ‘그녀’라는 것을.

“하지만 몰브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에단의 눈빛이 순간 바뀌었다. 이내 꾹꾹 참은 그 분노가 눈매에 서렸다.

몰브는 다르고말고.

토르티아가 카이로스에게 마약을 판다고 한들, 스스로 부끄러울 뿐 그들이 카이로스에게 미안해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몰브는 다르다.

국가의 녹을 받고, 백성들에게 귀족으로서의 인망을 받는 그 잘난 귀족에겐 귀족으로서의 의무라는 것이 있다.

그들에게 들어가는 세금이 얼마이며, 그들이 카이로스의 귀족으로서 누리는 혜택이 얼마인가.

그런데 감히, 마약을 들여와?

에단은 생각하면 할수록 용서가 되지 않았다.

“……확실히 몰브는 다르지.”

이반은 나지막이 말했다. 에단의 눈을 보건대 이번만큼은 그 몰브가라 할지라도 곱게 넘어갈 성싶지 않다.

“아니. 달라야지.”

애초 에단에게 니블은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차갑고 잔인하기로 유명한, 피도 눈물도 없는 태양의 황제께서는 그 명성이 악명에 가까울지라도 엄연한 ‘성군’이시다.

오로지 이 나라, 카이로스의 발전과 부흥만을, 그리고 그 백성들의 평안과 안녕만을 마음으로 바라고 또 이루어 낸 사람.

그런 그에게 백성을 파탄에 이르게 하고 나라 경제를 좀먹는 마약은 절대 용납될 수 없다.

“거래 현장을 잡아야 해. 그래야 끝나.”

“알아. 그게 어디인지, 언제인지를 몰라서 그러지.”

계약서에는 토르티아와 몰브가가 거래한다는 내용만 명시되어 있을 뿐, 그 외의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 뻔히 알고 있는데, 눈 뜨고 놓칠 판이다.

“분명 에리카 황녀가 카이로스에 있는 그 시기에 거래가 이루어질 거야. 계약서를 봐서 알겠지만 이번 거래량은 한 나라의 1년 예산은 족히 충당할 만한 엄청난 규모지. 이걸 한 번에 가지고 올 수 있는 건 오로지 에리카 황녀뿐이야.”

문제는 그렇다고 에리카 황녀의 짐을 수색할 수도 없다는 거다.

“하. 그놈의 황족.”

에단의 표정에 짜증이 서렸다. 계속 꼬리를 잡고, 또 잡아도 도무지 몸통을 칠 수가 없었다.

가져오는 자도, 받는 자도 모두 부와 권력을 쥐고 있으니 보통 밀매상을 잡는 접근 방법으로는 택도 없다. 그러니 답답할 수밖에.

“방법을 찾아. 찾아서 니블 한 조각이라도 이 나라에 있게 하지 마.”

그 답답한 마음이 비단 에단뿐일까. 밑도 끝도 없는 그의 명령에 이반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그저 한 귀족 가문의 일탈, 혹은 한 국가의 구차한 자구책 정도의 가벼운 문제로 생각할 수도 있다. 아마 그저 그런 왕이었다면, 무능하고 사치스러워 자신의 안위가 더 중요한 그런 자였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그런 일이다.

이미 화친을 맺은 국가와 껄끄러워지는 것도, 가장 힘이 센 원로원 귀족과 척을 지는 것도 모두 다 황제에겐 아주 부담스러운 일일 테니.

그러함에도 에단은 조금도 그러한 계산을 하지 않았다.

“나의 황제시여.”

늘 그랬듯 그의 첫 번째는 항상 이 나라 카이로스.

그리고 그 카이로스를 이루는 카이로스의 사람들.

“오로지 이 나라와, 이 민족과, 하늘 같으신 황제 폐하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마음에 응하지 않을 그의 부하는 없다.

이반 역시 한 사람의 신하로서,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형제로서 그런 그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홀로 헤쳐 가는 에단의 길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베리타스에 성큼성큼 걷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혼자 책장에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던 로엘은 그 익숙한 발걸음 소리에 미소부터 지었다.

“정말 말 안 듣네.”

“어서 와요.”

에단은 그런 그녀를 보며 눈썹부터 찡그렸다. 꼼짝 말고 쉬라고 했건만, 기어코 이리 나와서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책이나 읽고 있었다.

“일어나.”

“좀 만 더 읽고 가고 싶은데…….”

“알았으니까 일어나라고.”

마지못해 그녀가 일어나자 그는 지난번처럼 어깨에 걸친 황제의 도포를 깔았다.

감히 만지는 것도 황송스러운 그 황금 도포를 차마 밟지 못하고 서 있자, 이번에도 그가 먼저 앉아 그녀를 당겨 품에 안았다.

“처음도 아니잖아.”

“백 번을 해도 똑같다고요.”

투덜거리면서도 그녀는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어디서든 그녀를 안심시켜 주는 그의 단단한 가슴에 기대며 그녀는 그를 올라다보았다.

“바쁘실 텐데 어떻게 나왔네요? 원로 회의는 잘 끝났어요?”

“말도 꺼내지 마. 짜증나니까.”

에단은 바로 표정을 찌푸렸다. 의전만 준비하면 어찌나 쓸데없는 말들이 많은지, 도저히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

언제부터 국정을 그리들 돌보셨다고, 에단은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누가 우리 폐하 말을 안 듣는 거야. 이거 안 되겠네, 그 사람들. 내가 가서 한소리 할까요?”

“아서라.”

허세보단 애교에 가까운 그녀의 말에 에단은 피식 웃었다. 역시나 무리해서라도 오길 잘했다.

이리 잠시만 같이 있어도 웃게 되니, 계속 생각나고 계속 보고 싶은 거다. 특히 이리 지치고 힘들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몸도 성하지 않으면서 여긴 왜 온 거야.”

“그냥……. 오랜만에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그녀의 손에 들린 책은 토르티아가 가장 부흥했을 시절, 즉 제이드 네아레스의 토르티아가 기록된 문건이었다.

북방을 휘어잡던, 그래서 중부마저도 감히 넘보지 못하였던 그 시기의 토르티아는 가히 현재의 카이로스와 견줄 만하였다.

그녀가 왜 갑자기 이곳에 왔는지, 에단은 알 것만 같았다.

“보니 어때?”

“가슴이 뛸 정도로 좋지요.”

그녀는 예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위로가 받고 싶었나 보다. 과거의 영광을 되짚어 보면서. 토르티아의 공주로서 다친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회복하고 싶었는지도.

“찢어질 듯이 아프고.”

억울하고 분해서. 원통하고 원망스러워서.

어떻게 지킨 나라인데 이렇게까지 밑바닥을 치게 만드는지.

그녀는 좀 더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그건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없어.”

“알아요.”

평소답지 않은 그녀의 어리광이 나왔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하여도, 그녀가 아무리 자신과는 더 이상 상관없는 나라라고 하여도 그녀는 아픈 거다. 슬픈 거다.

자신이 모국이 이토록 썩어 문드러져, 쇠락해 간다는 사실이.

“……대신 이야기해 주세요. 카이로스에 왔었던 아버지에 대해.”

로엘은 펼쳐 놓은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얼핏 보아하니 카이로스와 토르티아, 두 나라의 친목 명목으로 제이드 네아레스가 카이로스에 왔던, 바로 그날의 기록이었다.

“아버지가 카이로스에 대표로 오셨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워낙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해서, 자세히는 알지 못했었는데……. 아버지, 이곳에서도 정말 유명인이셨군요.”

“유명인이라기보단 신에 가까웠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존재.

북부에서 온 붉은 머리의 장수가 중부의 모든 기사들을 제압한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에단의 뇌리에 선명히 박혀 있다. 그날의 충격을 어떻게 잊을까. 지금도 이리 생각하면 가슴이 쿵쿵 뛰는데.

“모두가 열광했지.”

어쩌면 그에게 미쳐 버렸다는 말이 맞을지도.

에단은 그녀 덕분에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온 나라가 축제였던 그날, 세상의 중심이 카이로스라 믿었던 카이로스의 사람들은 그날의 제이드를 보는 순간 충격에 빠졌다. 마치 카이로스의 오만함을 비웃듯 그의 실력은 가히 압도적이었으니까.

“질투하기조차 부끄러운, 다른 차원의 실력이었지. 경외하지 않을 수 없었어. 네 아버지는.”

카이로스의 황태자로서, 가장 높은 곳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았지만 오히려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했다.

어린 그의 눈에는 정말 제이드 네아레스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어떻게 하면 당신을 가질 수 있는 거지.’

‘이거 맹랑한 꼬맹이일세? 초면에 다짜고짜 나를 갖겠다니.’

‘무엄하도다. 나는.’

‘대 카이로스의 황태자이자, 태양의 신의 축복을 받은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 맞지?’

정말이지,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토르티아의 장군이자, 붉은 머리의 민족이라 카이로스의 황족에겐 숙이지 않아. 그러니 나에게 넌 그저 아주 예쁘게 생긴, 아들 같은 꼬맹이일 뿐이지. 조금 껄끄럽고, 조금 불편한, 그런 꼬맹이.’

정말 오래된 기억이자, 에단와 제이드. 두 사람만이 아는 추억.

‘그리고 황태자님. ‘사람’은 갖는 게 아니야. 가지려 들면 더 가질 수 없게 되는 게 ‘사람’이지. 정말 그 사람을 원한다면, 그리하여 네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면 네가 먼저 부탁을 해. 내 사람이 되어 달라고. 네 진심과 네 마음을 다해서.’

그가 너무도 어렸을 적, 제이드 네아레스를 한참이나 올려다봐야 했던 그 시절, 그렇게 에단은 제이드를 만났다.

‘그런 일방적인 명령으로는 아무도 너의 진짜 사람이 되어 주지 못해.’

축제로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도 홀로 고요했던 후원에는 달빛이 환히 비추고 있었고, 그곳에서 황금의 에단과 붉은 제이드가 함께하고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어린 그에게는 마법 같던 만남.

‘카이로스의 황태자는 부탁 같은 거 하지 않아.’

‘어련하시겠어.’

‘그러함에도 내가 부탁을 한다면, 고개를 숙인다면, 당신은 내 사람이 되어 줄 건가.’

에단은 가끔 생각했다.

그 순간, 그 사람은 조금이라도 흔들렸을까 하고.

‘토르티아는 당신을 알아주지 않아. 그 나라는 당신을 썩히고 있지.’

자식뻘에 가까운, 건방지기도 한 타국 황태자의 말에 일말이라도 마음이 흔들렸을까.

‘당신의 형제는 질투와 열등감에 눈이 멀어 당신을 죽음에 이르게 할 테지. 그 끝을 뻔히 알면서도 가만히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고도 멍청한 짓이야. 당신의 재능이라면, 따르지 않을 이가 어디 있을까. 카이로스의 사람이 되지 않으려거든, 나를 위해 검을 들지 않으려거든, 적어도 토르티아의 황제가 되어라.’

그때 그 말을 할 때, 제이드는 웃고 있었다.

그는 화를 내지도, 슬퍼하지도, 비웃지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저 에단의 말을 듣고 있었다.

‘맹랑하다 못해 위험하네. 이 황태자님.’

그 어린 에단이 알고 있던 그 사실을 제이드가 몰랐을 리 없다. 그러함에도 그저 웃기만 했던 그는 과연 무슨 마음이었을까.

‘그래서 마음에 들어. 카이로스의 영광을 가져다줄, 누가 보아도 훌륭한 왕재야.’

나이가 들고, 이리 황제가 되어서도 에단은 계속 생각했다.

어째서 제이드 네아레스는 그 뻔한 결말을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었는가.

그 제이드 네아레스라면 북방을 통일하고 중부까지도 위협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어찌하여 욕심내지 않았을까.

에단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내 사람이 되어 주는 건가.’

‘아니. 그러기엔 내가 토르티아를 너무 사랑해.’

‘그럼 토르티아의 황제가 되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당신을 죽일지 몰라.’

‘하하. 진짜 왕재야. 왕재.‘

에단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버지를 추억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추억이 꽤나 소중하다는 것을 로엘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이런 표정을, 이리 아이 같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로엘은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는 몰랐던, 그와 아버지 사이의 무언가가 있었나 보다.

“네 아버지는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나는 사람.”

에단은 기억한다. 그가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추었던 그 순간을.

“한순간도 누군가의 아래에 있어 본 적이 없는 사람. 군림하려 들지 않아도 모든 이들에게 군림하는 위대한 자.”

‘아름다운 태양의 나라. 황금의 민족. 카이로스의 하늘이시여. 이미 많은 것을 가진 황태자께서는 제가 없어서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직 작은 태양이시여. 더 큰 태양이 되어 세상을 비추소서.’

아름답다 못해 눈이 부셨던 사람.

‘언제나 황태자님의 길에 영광이 있기를. 저 역시 마음으로 빌겠습니다.’

“그게 바로 네 아버지. 제이드 네아레스야.”

에단은 로엘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느꼈지만, 참 많이 닮은 눈이다.

“그래서 나도 많이 동경했어.”

부러웠다. 닮고 싶었다.

너무도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나도 보고 싶어. 너랑 꼭 닮은, 너만큼이나 빛나는 네 아버지를.”

로엘은 순간 눈물 한 방울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

절대 그에게서 나올 수 없는 극찬이 이어졌는데,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

아무래도, 그녀가 그 대신 울어 주나 보다.

그리운 만큼 원통한, 그분이 너무 생각나서.

“저도요. 저도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로엘을 손을 뻗어 그를 꼭 안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아버지를 이리 기억하고 있었다니. 고맙고 미안하고, 그러면서도 기뻤다.

아아. 오늘따라 유독 그리운 밤이다.

그녀에게는 하늘이었던, 그리고 그에게도 태양이었던 그 빛나는 분이 그립고도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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