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화
“그래.”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미나엘에게 이 일에 대해 왜 그랬냐고 물을 예정이다.
하지만 그녀를 믿는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을 거야. 너도 괜히 내가 미나엘을 오해하게끔 부추기지 마.”
나는 프로셴이 내 대답을 듣고 서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미나엘과 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게 목적인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뜻밖에도 다른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내게도 약속 하나 해줄 수 있어?”
“무슨 약속?”
“내가 미나엘처럼 언젠가 네 계획을 망쳐 버릴 짓을 해도 날 싫어하지 말아 줄래?”
프로셴의 표정은 전에 본 적 없이 진지했다.
그의 자색 눈동자는 위엄 있는 왕의 것처럼 혹은 고백을 앞둔 이의 눈처럼 진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말 자체는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이건 대놓고 ‘언젠가 내가 네 계획에 초를 칠 건데 미리 용서해 줘.’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여기에서 ‘응’이라고 대답하는 건 내 목숨을 거저 주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건 좀 다르지.”
나는 프로셴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은근슬쩍 밑밥을 깔고 의도적으로 뒤통수치는 거랑 이게 같아? 네가 그런 짓을 하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프로셴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못 본 척해 버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미나엘의 말이 사실이야. 프로셴은 내게 녹시렐 공작위를 주고 싶어 하지 않아.’
갑자기 마주한 배신의 전조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 *
그날, 미나엘과 나는 왕궁에서 나왔다.
우리는 잠입할 사교 클럽 근처에 허름한 집을 하나 얻었다. 잠입한 동안 평민인 척 연기하며 머물 집이었다.
“너도 외모에 조금 변화를 줘야 할 것 같아.”
왕궁에서 나오기 전에 나는 하녀에게 머리를 검게 물들여 달라고 했다.
하지만 미나엘의 외모는 변한 게 없었다.
내 정보가 흘렸으니 미나엘의 정보도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제안했다.
“머리라도 조금 자르는 게 어때?”
“왜지?”
“네 신상이 귀족들에게 알려졌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또…… 평민들은 보통 허리까지 머리카락을 기르지 않아. 일할 때도 거슬리고, 머리를 감는 데도 물이 많이 사용되니까.”
미나엘은 그런 이유가 있을 줄은 몰랐다는 얼굴을 했다.
미나엘은 똑똑했지만, 전형적인 귀족 아가씨였기에 평민들의 차림과 생활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런가. 그럼 미용사를 불러야겠군.”
“보통 평민은 미용사를 부르지 않아. 직접 방문하지. 게다가 자르는 정도만 하는 거면 그냥 알아서 자르고.”
미나엘은 제 손을 바라보다가 나를 바라봤다.
꽤 갈등 어린 얼굴을 보며 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내가 잘라 줄게.”
사실 이번 생의 나는 머리를 직접 잘라야 할 만큼 가난하게 살지 않았다.
라헨의 증손녀로 자라며, 그가 노력해서 일군 것들로 꽤 혜택을 보며 살았다.
하지만 이전의 삶, 하슈 레이타로 살 때는 머리를 많이 잘라 봤다.
스스로 자르기도 했고, 돌보던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자르기도 했다.
사각사각.
나는 꽤 익숙하게 가위질을 했다.
처음에는 불신의 눈빛으로 거울을 통해 끊임없이 나를 감시하던 미나엘도 점차 긴장을 풀었다.
“…….”
내 손에 들린 가위는 미용 용도가 아닌 일반 용도의 가위였다. 즉 날이 굉장히 크고 투박했다.
‘뒤에서 목을 노리면 사람은 쉽게 죽지. ……아니야. 생각하지 말자.’
무심코 미나엘을 위협하는 상황을 떠올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생각을 곧장 털어 버렸다.
프로셴에게는 미나엘을 완전히 신뢰하는 것처럼 말해 놓고서 속으로는 그녀가 배신하거나 진실을 말하지 않을 때 어떤 수단을 쓸지 가늠하다니.
역겹고 이중적인 행태였다.
나는 쓰게 웃다가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내 버렸다.
“미나엘. 왜 그랬어?”
“무얼 말하는 거지?”
“내가 의식이 없는 동안 네가 암살자들을 보낸 가문을 추려내기 위해 수를 썼다며.”
“거기에 딱히 이유를 댈 필요가 있나? 우리에게 이를 드러낸 가문을 없애는 것쯤이야 당연한 거지.”
“……내 말은 왜 그 모든 일을 내가 지시한 것처럼 귀족파에게 정보를 흘렸냐고 묻는 거야.”
“그래야 귀족들이 너를 두려워할 것 아닌가.”
미나엘은 이제 거울을 통해 나를 감시하고 있지도 않았다.
눈을 감고 내게 목 뒤를 그대로 노출한 채 평이하게 말을 이었다.
애초에 숨긴 적도 없다는 듯이 떳떳한 태도였다.
“너는 너무 안일하게 굴었어. 교황도 죽이지 않으려 했고, 교황파였던 귀족들도 적극적으로 숙청하지 않았지. 그러니 그들이 너를 만만히 보고, 네게 암살자를 보냈던 거다.”
“…….”
“이번 일을 통해 확실히 공포감을 심어 두면 더는 날뛰지 않겠지.”
그런 이유였을 줄은 몰랐다.
나도 모르게 가위질을 멈추고 말았다. 미나엘이 계속해서 말했다.
“솔직히 그동안 네가 그 방법을 쓰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군. 네가 사람을 공포심으로 억누른다는 것에 도덕적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그런 부류의 사람은 아니지 않나.”
“거기엔 이유가 있었어. 그건…… 잠입이 끝난 후에 알려 줄게.”
모두가 평등하게 여겨지는 세상.
신분제가 사라진 사회.
그러기 위해 나는 교황도 반국왕파의 귀족도 죽이지 않으려 했었다.
가난하지만 철저히 귀족 가문의 영애로 살았던 미나엘이 순응할 것 같지 않기에 말하지 않은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 다짐하며 가위를 내려놓을 때 미나엘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성격이 많이 죽었군. 다짜고짜 네가 내 목에 가위를 가져다 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너한테 그런 식으로 굴었다고.”
나는 당황하며 허둥지둥 가위를 멀리 치워 버렸다.
미나엘의 머리칼을 자르는 건 이미 끝난 일이었다. 말할 타이밍을 잡지 못해 계속 정리하는 척 가위질을 했던 게 양심에 걸렸다.
“그런가. 하긴, 너는 인어를 만난 후 성격이 꽤 누그러지긴 했었지.”
“…….”
미나엘의 말이 이상했다.
이번 생의 나는 누군가에게 패악질을 부린 적이 없었다. 미나엘에게는 한결같이 상냥하게 대했던 기억뿐이다.
미나엘은 뒤돌아 이제 나를 마주 봤다.
그녀는 그저 내가 보아왔던 미나엘 헥사바임이어야 했다.
하지만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약 100년 전, 공작가의 후계자였던 삶에서 만났던 누군가를 떠올렸다.
“안 그렇습니까?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블미에 헥사바임.
쿠당탕!
뒷걸음질 치다가 가위와 핀들을 얹어 둔 협탁을 엎어버렸다.
내가 전생을 기억하니, 미나엘도 전생을 기억할 수 있지 않나.
우연히 그녀의 전생이 블미에일 수도 있지 않나.
그런 가능성을 떠올리면서도 나는 과할 정도로 이유 모를 두려움에 휩싸였다.
의자에 앉아 나를 바라보는 미나엘에게는 서늘한 감각이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면 내 팔에 오르는 소름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귀신을 마주했을 때나 느낄 법한 감각이었다.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을 최선을 다해 숨겼다.
미나엘, 아니 블미에에게 내가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보이면 안 된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나는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하고 물었다.
“너도 전생의 기억이 있어? 언제부터 기억해 낸 거야?”
“…….”
미나엘은 느릿한 손짓으로 제 머리칼의 끝을 매만졌다.
짧게 잘린 머리가 익숙하지 않은 듯 몇 번 빗질해보던 미나엘은 이내 빙긋 웃었다.
“전제가 잘못됐습니다. 아가씨. 제게 전생의 기억 같은 건 없습니다.”
이 상황과 맞지 않는 말이었다.
그녀가 전생의 기억이 없으면 나를 어떻게 알아보겠는가.
“네가 ‘블미에 헥사바임’이던 전생의 기억이 없다면 어떻게 나를 알아봐? 말이 안 되잖아.”
초조한 내 얼굴을 천천히 살피는 회색 눈동자에 의문이 서렸다.
나는 표정을 숨기고 그 눈동자를 빤히 마주했다.
이미 내 두려움을 읽어 낸 미나엘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말이 됩니다. 저는 블미에 헥사바임으로 살던 때부터 지금까지 죽지 않았으니까요.”
“!”
당장 이 허름한 집에서 도망쳐 나가고 싶었다.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가 내 앞에 서 있다는 게 두렵고 소름이 끼쳐서 미칠 것 같았다.
이런 내 반응을 눈치챈 미나엘이 웃었다.
“도망치고 싶으신가요? 제가 무섭고 소름 끼칩니까?”
미나엘이 아무리 표정이 드물다고 해도 웃는 일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그 웃음에서 섬뜩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어쩌죠. 지금은 보내 드릴 수 없는데.”
“……왜?”
“당신을 만나고서야 죽음에 다가갈 실마리를 찾았거든요.”
미나엘이 의자에서 일어나 내게 한 걸음씩 다가왔다.
나는 그럴 때마다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도망치기 이전에, 의문을 해소해야 했다.
“내가 ‘그’ 세르베인 녹시렐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처음부터 당신이 내가 알던 세르베인 녹시렐이라는 건 알았습니다. 다만 기억이 없다는 것도 알았죠.”
“내가 기억을 되찾았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정신을 차린 후 대뜸 성기사단의 명단을 요구했을 때 의심했고, 제 목을 가위로 찌를까 고민할 때 확신했죠.”
그리 말하며 미나엘이 내 손목을 잡았다. 더 이상 뒤로 도망가지 못하게 막을 심산이었다.
화사하게 웃는 얼굴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다시 태어난 세르베인 녹시렐은 내 목을 가위로 찌를까, 같은 생각은 하지도 못할 여자였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