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 화 (70/132)

70 화

이때까지는 그저 미나엘이 나보다 키가 크고, 검술도 할 줄 아니 힘이 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통의 여성이 키가 조금 크고, 검술을 조금 배웠다고 이 정도 힘을 낼 수는 없었다.

‘미나엘 헥사바임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너는 정체가 뭐야. 일단 인간은 아닌 것 같은데.”

“사람들은 저를 그리 부르더군요.”

“…….”

“마녀라고.”

* * *

전생의 기억이 완전히 떠오른 건 최근이지만, 이전에도 종종 기억을 되찾은 적은 있었다.

라헨의 임종을 지키며 그에게 목걸이를 받았을 때.

멜이 옛 녹시렐 저택에서 바닷물이 되어 사라질 뻔했을 때.

그리고…… 마녀 수용소로 끌려가던 미나엘 헥사바임을 발견했을 때.

“세르베인! 왜 갑자기 저기에 가겠다는 거야! 제정신이야?”

“구해야 하는 사람이 있어.”

“누구? 아는 사람이 저 중에 있어?”

프로셴은 내가 당장이라도 마녀 후보자들을 끌고 가는 기사들에게 달려들까 봐 불안해하는 기색이었다.

그런 주제에 내가 실행한다면, 무서워도 나를 따라 그들에게 뛰어들 프로셴을 알고 있었다.

“그건 아니야.”

정확히 말하자면 이번 생에서는 아는 사이가 아니니 그렇게 답했다.

하지만 여전히 시선은 블미에를 완전히 닮은 여자에게서 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두고 볼 수가 없어. 저대로 두면 분명 죽을 테니까.”

“…….”

프로셴은 굳은 얼굴을 했다. 그리고 이내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도한 헌금으로 나빠진 민심을 되돌리기 위해 교황은 대대적으로 마녀사냥을 개최했다.

교황에 대한 반감을 마녀에게로 돌리는 식이었다. 그리고 마녀사냥에 보내진 여자들은 전부 죽임당했다.

“다음에는 내가 너를 구하도록 할게.”

블미에 헥사바임에게 미처 지키지 못한 약속이 있었다.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녹시렐 공작가가 하루아침에 멸망한 이후, 그녀는 잘 살고 있을까.

혹시 녹시렐 가문에서 의사로 일했던 것이 꼬투리 잡혀 죽임당하지는 않았을까.

커다란 금전적 보상도 하지 못했는데, 혹은 가난으로 인해 고생하고 있지는 않을까.

‘어차피 소용없는 일이겠지만.’

저 여자는 블미에와 소름 끼치게 닮았지만, 결국에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녀를 구함으로, 내 마음속의 부채를 깎아 내고 싶었다.

오로지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해 내렸던 이기적인 결정이었다.

“프로셴, 우리 여기서 조금만 더 머물자.”

“왜? 여기 분위기도 흉흉한데. 쉬고 싶으면 다음 마을에 간 후에 쉬자.”

곧장 이 마을을 떠날 예정이었지만 나는 프로셴을 설득했다.

하지만 그는 마녀사냥처럼 흉흉한 것을 싫어했기에, 원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아니, 감옥에 들어가야겠어. 일단 네가 나를 마녀로 팔아넘겨.”

“뭐?! 감옥에서 쉬고 싶다고?”

“내가 네 여동생인 걸로 하지. 이런 사례는 흔해. 돈 때문에 가족을 팔아먹는 거 말이야.”

“나보고 그런 파렴치한 역할을 맡으라고?! 아니, 그 이전에 그런 짓은 왜 하려는 거야? 네가 감옥에서 쉬는 것에 흥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내 계획을 들은 프로셴은 기함했다.

다짜고짜 이유도 모른 채 내가 감옥에 들어갈 거라고 하니 황당해하는 심정은 이해가 갔다.

그런데 내가 왜 그곳에 쉬러 간다고 오해하는지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쉬러 들어가는 거 아니야. 구해야 하는 사람이 있어.”

“누군데? 친구? 가족?”

“모르는 사람.”

“야!”

하지만 이유를 말해도 프로셴은 내 계획에 따라 주려 하지를 않았다.

그는 블미에를 닮은 여자를 구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쓸모없는 여자잖아. 우리 쪽 사람들을 이용해 이곳을 급습하면 우리 정체가 탄로 날 수 있어. 그런 위험을 무릅쓰는 이유가 뭐야?”

“마땅히 구할 수 있는데 구하지 않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잖아.”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는데? 넌 내가 왕의 핏줄이 아니었으면 구하지도 않았을 거잖아!”

그날 프로셴은 끝까지 이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다. 애써 우리 편으로 돌린 귀족들의 병력을 이런 데에 노출하면 위험하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동의하는 바였다. 내가 인륜으로 사람을 구하는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도 동의했다.

하지만 블미에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오후 3시. 처형식이 시작되기 직전에 사람들을 보내.

결국 나는 프로셴을 억지로 움직이기 위해 쪽지만 남기고 제 발로 수용소에 걸어 들어갔다.

근처를 얼쩡거리니 그곳을 지키던 병사들은 당연하다시피 나를 가뒀다.

“안 그래도 이번에 쓸 마녀가 적었는데 잘됐군.”

“멍청한 여자. 그러게 왜 이 근처를 남자도 없이 혼자 돌아다녀?”

애초에 마녀사냥에 희생시킬 여자는 많을수록 좋았기에 그들에게 나는 굴러들어 온 떡이었다.

퀴퀴하고 피 냄새와 비탄이 진득이 묻어날 듯한 나무 감옥에서 나는 우연히 그녀와 같은 곳에 투옥됐다.

“…….”

처음 내 얼굴을 살피던 미나엘의 얼굴을 기억했다.

내가 막 감옥에 들어갔을 때, 내일 너희는 죽을 거라며 떠들어 대는 간수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그녀는 구석에 앉아 있었다.

‘뭐라고 말을 붙이지?’

도저히 말을 걸 만한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다시 보니 그녀의 옷은 평민의 옷과 달리 고급스러운 재질이었다.

마녀로 희생되는 사람 중 귀족 가문의 여성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녀가 그 예인 것 같았다.

‘일단 곧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안심시켜야 하나?’

속으로 온갖 대사를 떠올리며 머뭇거리던 사이에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

잠시 눈이 마주쳤다.

이내 내 손목을 잡고 휙 끌어당기는 흰 손이 보였다.

“……너, 이름이 뭐지?”

미처 눈동자 색까지는 보지 못했었는데.

감옥에서 만난 미나엘의 눈동자는 블미에의 것처럼 회색이었다.

삶에 의욕이 없다는 듯 가라앉아 있던 눈은 전에 없이 강렬히 빛났다.

나는 무심코 본명을 말하고 말았다.

“세, 세르베인 녹시렐.”

녹시렐이라는 성을 말하고 나서야 아차, 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나는 내 앞의 여자가 부디 약 100년 전에 망한 공작 가문의 이름 따위는 모르길 바랐지만, 그럴 리 없단 걸 알았다.

하지만 여자는 웃었다. 아주 화사하게 눈을 휘며 웃었다.

당시의 나는 ‘이 사람은 블미에와 달리 웃음이 많은 사람인가 보구나.’ 생각했지만, 후에 그 웃음이 흔치 않은 것임을 알았다.

“나는 미나엘 헥사바임이다.”

헥사바임. 블미에의 가문이었다. 그녀의 후손이었기에 이토록 닮을 수 있었던 거구나.

나를 향한 호의만이 반짝이는 눈을 하고서 미나엘은 내 손을 잡았다.

“약속을 지키러 왔구나.”

* * *

당시에는 제정신이 아닌 미나엘이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었다.

가족에게 팔아넘겨졌으니 정신적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그리 생각하며 그 말을 못 들은 척했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전부 약속 때문이었어.’

미나엘이 그때 했던 말을 힌트로, 갑자기 모든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렇게 계속 삶을 반복하는지.

어째서 전생을 기억하게 됐는지.

‘바다의 저주 같은 게 아니었어. 우연 같은 것도, 나의 의지나 원한 때문도 아니었어.’

바다는 이미 내게 실마리를 보여 주었다. 바다에 빠졌을 때 바다가 내게 보여 준 장면이 있었다.

내가 호수에서 익사한 후 멜은 구슬피 울었다. 그때 그가 말했었다.

“약속을 지켜.”

아마 그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를 호수에 가두며 멜은 내게 마법을 걸었던 것이다.

“네가 한 약속을 지켜, 세르베인.”

내가 한 약속들을 지키기 위해 나는 다시 태어났다.

아마 그때 했던 약속을 다 지킬 때까지 계속 이 삶을 반복할 것이다.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공작가의 후계자인 세르베인 녹시렐로서 살해당하기 전, 나는 많은 약속을 했었다.

“내 선물인데 안 받을 거야?”

“선물 받지 않아도 돼. 네가 살아 주기만 하면 돼. 그게 가장 큰 선물이야.”

“다음에 만나면 돌려 달라는 뜻에서 주는 거야. 그러니까 거절하지 마. 나 다시는 안 볼 생각이야?”

현재 의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나이까지 장수했던 라헨.

여태껏 운이 좋아 그가 장수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나와 다시 만나야 하기에 100세가 될 때까지도 죽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증명으로, 마침내 내게 증표를 넘겼을 때 라헨은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다.

“금전적 사례는 지금 받고 있는 진료비로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네가 그랬듯 다음에는 내가 너를 구하도록 할게.”

금전적 사례를 거부한 블미에에게 내가 내민 대가였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구한 적이 없었기에, 블미에는 내가 구하기 전까지 죽을 수가 없었던 것 아닐까.

“언젠가 너를…… 바다로 보내줄 때, 네게 증표를 줄게.”

……그리고 멜.

너는 증표가 없었기에 바다로 돌아가지 못했던 걸까.

그래서 저택을 나올 수도 없었던 걸까.

“멜이 원하니까 조금 더 살아 보도록 할게. 네가 없어도 조금 더 살아 볼게.”

네가 무사히 바다로 돌아가려면…… 네가 없어도 나는 더 살아야 하는 거겠지.

……‘조금’만 더 버티면 돼. 그것 정도는 할 수 있어.

“만나지는 못해도, 내가 있었다는 것만은 기억해 줘.”

“응. 그럴게.”

사실 이건 약속하지 않았어도 당연히 잊을 수 없었을 텐데.

“내일, 반지를 가져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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