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사람들은 공포에 빠져 서로의 영혼을 도둑질했다.
“와, 라카인…!”
투이나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맞잡았다.
“너무 근사해요!”
“감사합니다.”
라카인이 순하게 답했다.
시종들도 완전히 살가워져서 한 마디씩 던졌다.
“진작 자르지 그랬어요! 사람이 다 달라 보이네.”
“머리가 잘못했네.”
“왜 그동안 거지 삽살개처럼 길러놨어요?”
“거지 삽… 라카인을 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어요?”
“어흠. 사실이 그랬잖아요.”
표현은 좀 과해도 다들 새롭게 나타난 잘난 얼굴을 보고 흡족해했다.
투이나가 깔끔하게 잘린 라카인의 옆머리를 만져보는 동안 호루니가 슬쩍 다가왔다.
“루가 님, 저는요?”
“호루니도 정말 근사해요!”
투이나가 곧장 관심을 옮기자 호루니가 활짝 웃었다.
그녀가 스카차도 빼먹지 않고 칭찬을 하는 동안 호루니가 약간 우쭐한 눈으로 라카인을 흘겨보았다.
아무리 그가 달라져도 투이나의 관심을 독차지할 수는 없다. 호위니까.
설마, 감히?
호루니의 소심한 견제에도 라카인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무슨 이유에선지 약간 조바심이 난 얼굴이었다.
투이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오랜만에 찾아온 일상을 열심히 누렸다.
“이렇게 나란히 서니까 정말 눈에 확 띄네요.”
“다들 훤칠하셔서 그래요.”
투이나가 스카차 옆에서 까만 옷자락을 펼치는 데 관심이 쏠린 사이 호루니가 재빠르게 속닥거렸다.
“괜한 생각 마세요.”
“……?”
라카인이 주의를 돌렸다.
호루니는 작은 목소리로 다닥다닥 말을 붙였다.
“아무리 구혼자 한 명이 쓰러졌다지만 남은 사람을 호위 중에서 뽑을 가능성은 없어요. 특히나 당신은 더!”
“처음부터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면 루가 님을 그렇게 바라보는 일도 그만두세요!”
“…….”
라카인이 호루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전전긍긍하게 라카인의 입에서 나올 대답을 기다렸다.
호루니는 그저 초조해 보였다. 라카인이 덤덤히 답했다.
“기대를 아예 하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 그게 무슨 뜻이에요? 설마 다른 기대를 하는 건 아니죠? 상대는 루가 님이에요!”
“…….”
라카인이 어색하게 이마를 매만졌다.
“당장 무엇을 바라는 건 아니다. 그저 마음에 들어 하시면… 어쩌면 그분께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무슨 도움이요?”
“위로…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어리둥절해하던 호루니가 점점 입을 벌렸다.
꼭 연인이나 남편이 아니더라도 줄 수 있는 위로라면.
호루니가 말을 마구 더듬었다.
“서, 서, 설마 루가 님의 처, 첩이 되려고요?”
“……너무 과분한 일이긴 하다.”
라카인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호루니로선 그게 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라카인이 작정하고 마음을 드러내면 무릎이 쇳덩이인 작자도 푸딩처럼 부드러워져서 무릎을 꿇을 텐데.
평소에 호위 서던 일에 보이던 자신감의 반의 반도 못 하는 자존감에 기절할 지경이다.
아니,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호루니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가뜩이나 투이나가 라카인을 아픈 손가락처럼 여기는데, 대놓고 구슬리면 정으로 넘어가 버릴지도 몰랐다.
투이나가 다른 구혼자랑 결혼하는 것도 싫었지만, 라카인과 함께 하는 모습을 상상해도 뱃속이 이상하게 꼬였다.
호루니가 단호해졌다.
“절대로 루가 님은 당신을 돌아보지 않을 거예요.”
“알고 있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라카인은 담담했다.
“그래도 그분의 선택지는 가능한 한 많이 남겨두고 싶다. 내가 드릴 수 있는 건 믿음뿐이니까.”
만약 투이나가 정말 세상일에 다 지쳐서 애인이나 여럿 사귀고 말겠다는 식으로 나와도, 라카인은 대비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호루니는 너무도 당연하게 그런 가정을 해보는 그가 경악스러우면서도 분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감히… 어떻게 감히 루가 님의 옆에 자기 자신을 넣어볼 수가 있어요?”
“…….”
라카인은 호루니가 더 이상 분개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건 오히려 서러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저는 상상도 못하겠어요. 어떻게… 그 일을 다 보고도… 여전히 루가 님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가 있어요?”
“노력할 뿐이다.”
“……소용없는 짓이라니까요.”
라카인은 자신과 똑같이 깊은 애정에 목마른 한 사람을 보았다.
그래서 다른 말을 찾는 대신, 서툴게 위로했다.
“너도 오늘 아주 아름답다, 호루니.”
울컥한 호루니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라카인에게 멋있어 보인다고 화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다고 투이나가 그들을 연인으로 삼아주는 것도 아니니까.
자신이 하고도 너무 속이 좁은 생각이라 화가 났다.
라카인처럼 멋있게 대응하고 싶었는데.
실은 라카인도 한 때 투이나 다음으로 닮고 싶었던 사람이라서 더욱 지금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에게서 기대한 건 무술 실력이었지 이런 마음을 견주는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마저 지다니.
“……당신이 싫어요.”
주먹을 움켜쥔 호루니가 후다닥 그를 지나쳤다. 그리고는 억지로 태연한 척 투이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신이 하는 짓도 저렇게 어리게 보일까 싶었다.
라카인은 수십 번씩 고쳐 입었던 옷의 소매를 잡았다. 그러지 않으면 투이나가 만졌던 부분으로 계속 손이 올라갈 테니까.
바보라도 그 짓을 보면 마음을 눈치 챌 것이다.
라카인은 투이나가 자신을 바라보는 동안 목 끝까지 올라왔던 감정을 다시 눌렀다.
아주 깊은 곳까지 내려가야 지나친 생각을 하지 않으리라.
가령, 누구와 결혼하든 딱 하룻밤만 그에게 허락해준다면, 평생을 그 기억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고.
라카인은 만약 구혼 기간이 끝나고 투이나가 호위의 대가로 무슨 보상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이 생각을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호루니가 그에게 경고하고 싶었던 건 사실 그런 추악함이겠지.
다행히 라카인은 감정을 가두는 일에 익숙했다.
주군은 절대로 하인의 마음을 몰라야 하는 법이니까.
머릿속을 말끔히 지워낸 라카인이 빨리 와보라고 손짓하는 투이나에게 다가갔다. 어떤 사심도 없이.
* * *
수로가 열렸다.
축제 때만 열리는 신전의 수문은 신전 바닥에 그려진 무늬를 따라 투명한 물을 흘려보냈다.
다른 나라에서 초청해 데려온 설계자는 신전의 입구까지 물이 흘러가는 동안 어떤 곳에서도 넘치거나 모자라게끔 하지 않았다.
무수한 물의 길이 신전을 감돌자, 수백 개의 등잔을 걸어둔 기둥과 복도를 따라 눈부시게 번쩍였다. 금과 빛의 조화였다.
밤에만 드러나는 영롱한 길은 신도들에게도 개방되었고, 활짝 열린 중앙 신전에 모인 구경꾼들을 더욱 감탄하게 만들었다.
“결국 축제가 열리긴 열리는군.”
“도저히 이대로는 못 할 줄 알았는데.”
“나와도 제대로 즐기겠어? 신전도 계속 쪼아댈 테고, 의원들과도 무시무시했잖아?”
수확제는 저마다 가져온 음식을 나누어먹는 축제다.
그러나 사람들은 쟁반에 가득 쌓아온 음식보다 꾸려온 이야기를 푸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약혼자가 그렇게 됐으니 얼마나 상심이 크겠어. 에휴, 루가 님이 걱정이야.”
“어허, 말은 똑바로 해야지. 약혼자가 아니라 구혼자잖아.”
“결국 결혼할 남자가 드러누운 건 똑같네, 뭘!”
“아유. 그게 뭐가 중요해. 결국 다른 남자를 고르라는 아르힘 님의 뜻인 게 틀림없어.”
“그런데 아르힘 님은 언제 종을 울리셔?”
마지막 말을 한 사람이 발꿈치를 들고 신전 안을 기웃거렸다.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는 아르힘이 울리는 게 관례였다.
신이 직접 나타났다간 기껏 모인 사람들이 죄다 기절해버려서 축제가 엉망이 될 테니까.
사람들은 어서 빨리 투이나가 나타나 축제를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후우…….”
투이나는 고스란히 그 풍경을 보면서 호흡을 가라앉혔다.
벌써 몇 번이나 축제를 주관했지만 지금은 특히나 마음이 술렁였다.
다른 때와는 달리 모든 책임이 그녀의 어깨에 드리워져있기 때문일까.
투이나는 자꾸만 뺨에 감기는 천을 다시 한 번 떼어냈다.
보기에는 예쁜데 조금만 방심하면 자꾸 살에 달라붙었다.
‘괜히 베인을 보고 왔나.’
그를 남겨두고 다른 구혼자들과 만나자니 사소한 일마저 심란하게 느껴졌다.
‘아냐. 이런 생각 말자. 베인은 꼭 깨어날 거야.’
매일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투이나는 그의 이마에 성수를 뿌리고 기도를 올렸다.
자신에게도 기적이 딱 한 번 있었으니, 베인에게도 딱 한 번만 주어질 수 있다.
‘누구에게나 딱 한 번의 기적은 있어.’
투이나는 나란히 서있는 호위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에게도 각자가 바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세 사람 모두 그 소망이 오직 투이나 뿐인 것처럼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거면 투이나의 등을 떠밀기에 충분했다.
비로소 용기가 차오른 투이나가 사람들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오늘 한 가지 선택을 내릴 예정이었다.
“아르힘의 축복, 아르힘의 광영! 루가 님이십니다!”
세찬 박수소리와 함께 투이나가 걸어 나갔다.
처음엔 천장이라도 뚫어버릴 듯이 요란하던 함성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신전에 켜둔 밝은 빛으로도 시간은 속일 수 없다.
밤의 장막이 새로 열리듯 네 사람이 걸어 나왔다.
“루가 님……?”
“뭐야?”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떠들썩한 활기를 기대하고 신전으로 왔다.
그러나 신전에서 기다리는 건 죽음처럼 고요하고 엄숙한 루가의 모습이었다.
당황한 사람들은 하나의 그림자처럼 따라 들어오는 호위들과 루가를 훑어보았다.
물론 시선을 빼앗는 모습이긴 했다.
검은빛으로 물들인 천은 가벼운 바람에도 출렁이며 무수한 음영을 만들어냈고, 그들의 빼어난 외모와 더해지자 어쩐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마 시드룬이 보았다면, 영혼의 세계의 모습과 닮았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드룬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안쪽에서 투이나가 걸어 나오는 걸 기다리고 있던 샨만이 그것을 보았다.
그도 보는 사람의 숨을 막히게 할 만큼 빼어나게 근사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의 숨통을 거머쥘 만한 차림을 하고서도 그의 표정은 사나웠다.
샨의 시선이 불만스레 고정된 곳은 투이나의 옆자리였다.
낯선 자가 태연스레 투이나의 시중을 들고 있는 꼴이 몹시 거슬렸다. 게다가 어쩐지 옆태가 눈에 익었다.
“저놈은 뭐지?”
“어떤 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옆에서 대기하던 하인이 조심스럽게 응답했다.
“지금 바닥에 쓸리는 루가의 옷을 밟지 않으려고 물러난 놈.”
“라카인입니다.”
“누구?”
소속이 아니라 이름을 부르는 짓거리에 샨이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후 샨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내 하인?”
“예.”
샨이 믿기지 않는 눈으로 고개를 홱 쳐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
저런 놈이었으면 처음부터 루가에게 보내지도 않았을 거다.
자기 구혼자가 한눈을 팔라고 비는 짓도 아니고.
무엇보다 샨의 신경을 건드리는 건 그들 사이가 이미 보통을 넘어설 만큼 친밀해 보였기 때문이다.
사태를 파악한 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가 그동안 엉뚱한 놈을 족치고 있었군.”
빠드득, 이가 갈렸다.
검은 호위들이 신의 딸을 호위하는 광경은 성스러움보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그날따라 투이나의 걸음이 신중해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집중했다.
무언가 중대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예감이 그들을 감쌌다.
투이나는 잔치 음식을 품에 안고 모인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즐거운 축제 날입니다.”
뒤쪽에 모여있는 사제들의 긴장이 느껴졌다. 이번 축제를 잘 끝내는 것에 그들의 향방이 달려있었다.
“원래는 이 자리에 축복을 내려 주시러 올 아르힘 님 대신에, 제가 수확제를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투이나가 황금 종을 꺼냈다.
신도들은 그제야 웅성거리며 아르힘이 성소에서 종을 울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르힘 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신전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겁니까!”
대략 그런 아우성이 메아리쳤다.
주변이 고요한 덕분에 비교적 정확하게 말을 알아들은 투이나가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에게 많은 소문이 떠돌고 있다는 걸 들었어요.”
밀알이 쏟아지듯 사람들의 속삭임이 밀려 나왔다. 투이나가 얼른 그 입구를 틀어막았다.
“많은 추측에 흔들릴 바에는 차라리 제 입으로 진실을 밝히고자 나왔습니다.”
뒤에서 요란하게 펄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사제 하나가 급하게 말하지 말라고 팔을 휘두르는 소리였다.
그러나 투이나를 잡기 위해 뛰쳐나왔던 사제는 세 사람의 호위에게 곧장 가로막혔다.
호위들을 무시하고 지나칠 수가 없자 사제는 비로소 지금 상황의 주도권은 그들을 떠나 투이나에게 완전히 쥐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투이나는 변함없이 앞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와의 결혼이 많은 걸 약속하고 있다는 걸 압니다. 지금까지 주어진 적 없는 지위가 오히려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해주는 겁니다. 힘만 있다면요.”
투이나가 숨을 한 번 골랐다.
“저는 그 힘이 오직 아르힘 님에게서만 나오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신의 힘을 탐낸 순간, 그것은 신을 떠나 사람에게로 내려왔습니다.”
완벽한 침묵이 투이나의 말에 따라왔다.
“한 때 아르힘 님은 갇혀 계셨고, 지금은 풀려나셨지만, 지금 저는 그분이 온전하리란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부풀어 오르던 불안이 팍 터지듯 웅성거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아르힘 님이 갇히셨다고?”
“어떻게? 그래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데?”
“풀려나다니? 온전하지 못하신다니, 세상에!”
“도대체….”
투이나는 웅성거림을 낮추기 위해 목소리를 더 높였다.
“저는 후회합니다! 처음부터 받아서는 안 될 은혜를 가진 탓에 다른 사람이 다치는 걸 더는 못 보겠어요!”
스카차는 발밑에서 작은 돌이 떨리는 걸 발견했다.
성스러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발로 치우려고 하던 그는 곧 바닥 전체가 얕게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투이나는 단단한 석반 위에 서 있느라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계속 소리쳐 말했다.
“그래서, 저는 이 자리에서 아르힘 님께 루가의 지위를 반납하고 이 모든 결혼을 취소하고자 합니다!”
우르릉.
불길한 진동과 함께 모든 사람의 고막을 터트릴 것처럼 거대한 종소리가 터져 나왔다.
“!”
신전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귀를 틀어막았다.
의심할 수 없는 아르힘의 종소리였다.
‘아르힘 님?’
투이나가 비틀거렸다. 종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머리를 통해 울려 퍼지는 강한 공명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악!”
“저, 저기!”
무너질 것처럼 진동하던 신전의 천장에 쩍 하고 금이 갔다.
이명에 무릎이 풀려있던 인간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거대한 바위 조각이 쩌렁쩌렁한 종소리를 이기지 못하고 천장에서 떨어져 내렸다.
정확히 투이나가 있는 자리였다.
‘아르힘 님에게 또 하나 반납해야 할 게 있다면, 그건 내 목숨인가?’
투이나가 찰나의 순간 멍하니 바위를 올려다보았다.
“이 멍청아! 피해라!”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오는 샨이 고함을 질렀다.
투이나는 그에게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강한 힘에 허리가 붙들렸다.
스카차가 발밑을 내려다볼 때부터 상황을 눈치챈 라카인이 그녀를 낚아채 간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 바위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어마어마한 먼지와 소란이 퍼져나갔다.
“신전이 무너진다!”
“아아악! 아아아악!”
“아르힘 님이 벌을 내리시는 거야!”
공포에 빠진 사람들이 한꺼번에 뒤엉켜 달아나기 시작했다. 대혼란이었다.
사제들은 지금 일어난 광경에 놀라 발이 달라붙은 듯 움직이지도 못했다.
호루니도 투이나의 머리 위로 바위가 떨어지는 장면에 심장이 멎을 뻔했다.
그러나 안전하게 빠져나온 라카인과 투이나의 모습을 보자 그녀는 투이나 대신 넋이 나간 사제들을 다그쳤다.
“뭘 하는 거예요! 당장 상황 통제하세요!”
“뭐, 뭐라?”
호루니가 아득바득 서로를 밟아대며 도망가려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전 루가 님 곁으로 가야 해요! 할 일을 하시라고요!”
호루니가 급하게 달려갔다.
그녀의 눈은 투이나가 구출된 뒤에도 그쪽으로 달려가는 샨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커흑, 콜록…!”
“괜찮으십니까?”
회색 먼지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투이나가 급하게 손을 휘둘러 먼지바람을 걷어냈다.
이러는 동안에도 아르힘의 종소리는 멈추지 않고 울려 퍼졌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투이나가 급하게 라카인의 어깨를 붙잡고 일어났다.
그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없는지는 이미 촉각으로 확인했다.
“다들 무사해요?”
“예! 저희는 괜찮습니다!”
스카차가 소리치는 게 들렸다.
귀가 먹먹한 종소리 때문에 다소 웅웅 울렸다.
“아르힘 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가 봐야….”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 순간 투이나의 등줄기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먼지가 자욱한 시야 너머로 샨조차 놀라 멈추는 게 보였다.
그토록 불러도 나오지 않던 아르힘이 그녀의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투이나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소년의 모습을 한 아르힘이 부드럽게 라카인에게서 투이나를 가로채 갔다.
급히 뻗은 라카인의 손이 헛손질을 했다.
“너에게 보여주마.”
투이나가 입을 벌렸다.
“네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마지막 종소리와 함께 갑자기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투이나는 공포에 질려 있던 사람들이 차례로 눈을 감는 것을 보았다.
그 표정은 순식간에 평화가 깃드는 것 같았다.
누구도 아르힘이 나타난 모습을 보지 못하였는데도 신전의 바깥까지 거대한 침묵이 그들을 휩쓸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자리에 서 있는 건 병에 걸린 자와 신이 깃든 자뿐이었다.
“그들은 오늘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신전의 모습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 모든 건 꿈이 될지어니.”
그리고 흰 벽에 연보랏빛이 반사되어 비치기 시작했다.
영혼의 세계의 모습이었다.
투이나가 넋을 잃고 그 장면을 지켜보는 사이, 거친 주먹이 투이나와 아르힘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지금 제정신인가, 아르힘!”
한쪽 눈이 붉은 샨이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급하게 아르파가 뛰쳐나온 모양이었다.
그는 주변의 변화에 어떤 인간보다도 강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평소에 내키는 대로 내질렀던 분노가 아니라, 당혹스러움이 한 꺼풀 덮여있었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 이걸 불러왔다간 다 끝장이야! 아니, 이게 가능하기나 한 거였나!”
“내 아이에게 주기 위한 것이다.”
“무어라?”
그때 감히 신의 손목을 떼어내는 자가 있었다.
“루가 님에게서 떨어지세요.”
호루니였다.
후들후들 떨고 있는 호루니를 본 스카차가 곧 합류했다.
같잖은 벌레가 붙었다는 표정과 정확히 똑같은 얼굴을 한 아르파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이따위 것들이 첫 번째 신도인가? 내 권속까지 가져가 놓고?”
“그가 선택했다.”
라카인은 아르힘이 투이나를 데려간 이후로 그 자리에 멈춰있었다.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라카인의 표정에 투이나는 처음으로 아르힘의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아이야.”
아르힘이 투이나를 부드럽게 불렀다.
“우리의 말을 이해하겠느냐?”
그제야 자신이 두 신 사이에 끼어있다는 걸 알아차린 투이나가 숨을 들이켰다.
“아, 아니요. 모르겠습니다. 대체 무슨 일인지 하나도…….”
“네게 주어진 것을 내가 준 것이라 여기지 말거라.”
아르힘은 상냥하게 얘기했지만, 아르파가 성질 급하게 끼어들었다.
“웃기지 마라! 아무리 네놈이라고 할지라도 병든 것을 신으로 만들 수는 없어!”
신?
얇은 종이가 불에 타들어 가듯이 정신의 테두리가 확 타올랐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모두 그러했다.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호루니는 자신이 누구에게 말을 거는 줄도 모르고 더듬거렸다.
“루, 루가 님을 신으로 만드신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르파는 몹시 짜증이 난 얼굴로 호루니가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뒷목을 후려쳤다.
반쯤 혼몽한 상태에 빠져 있던 투이나가 화들짝 놀랐다.
“호루니!”
“닥쳐 봐라. 안 그래도 정신 사나우니까.”
아르파가 옷을 툭툭 터는 것처럼 스카차도 후려쳐 떨쳐냈다. 아르힘은 투이나를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라, 죽이지 않을 것이다.”
“누구 마음대로? 이제 와서 새로운 수호신을 내가 살려둘 거 같나?”
아르파가 비아냥거렸다.
투이나의 속에서 무언가 욱하고 치밀어 올랐다.
기민하게 그것을 알아차린 아르힘이 진정하라는 듯 투이나를 껴안았다.
“이미 신도가 생겨났다. 조금만 기다리면 돼.”
“그러니까 내가 왜 기다려야 하냔 말이다! 이미 너 하나만으로도 처리하기 힘든 신은 충분하다.”
아르파의 손이 꿈틀거렸다.
“내게 죽을 줄 알면서도 불러들이지 않았나?”
“알고 있다.”
아르힘의 눈빛은 여전히 잔잔했다.
“나의 아이가 신이 되면 더 이상 네가 아는 아르힘은 없을 것이다.”
“……!”
투이나와 아르파에게 똑같은 강도의 충격이 가해졌다.
‘아르힘 님이 없어진다니?’
투이나의 입술이 갈라지기 전에 아르파의 웃음이 먼저 터져 나왔다.
“그래서였나?”
아르파가 그 큰 가슴을 부풀려가며 요란한 소리로 웃어댔다.
“나약한 놈!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준비해왔던 게 고작 이것이었더냐?”
아르힘은 그의 경멸을 무시했다. 그리고는 애정을 듬뿍 담아 투이나를 바라보았다.
“너에게 아주 옛날이야기를 하나 해야겠구나.”
죽은 자는 모두 영혼의 세계로 간다.
그러나 돌아오는 자는 신뿐이다.
“이 땅이 사막이었을 시절부터 나는 사람들을 이끌었다.”
아르힘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르파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르힘을 노려보았으나 말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수호신이 없는 땅을 알고 있겠지. 그곳을 무한히 확장해 보거라. 어느 곳으로도 피할 수 없고, 굶주리고, 절실한 사람들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모래바람이 들이치지 않도록 천으로 얼굴을 감싼 사람이 나타났다. 아르힘이 모습을 바꾼 것이다.
아르힘은 건장한 체격을 가진 청년이 되었다가, 등이 꼬부라진 노인이 되었다가, 결국에는 다시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만 이번에는 같은 얼굴의 소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까보다 훨씬 키가 컸다.
“사막을 가로지르던 사람들은 지금 이 산 앞에서 이동을 멈췄다. 짐승과 험준한 길 앞에서 절망한 그들은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들었다.”
바로 기도하는 것이다.
투이나가 뜻밖에도 온건한 방법이라 생각하기 무섭게 아르파가 비웃었다.
“인간들이 나를 보고 야만스럽다고 말할 때마다 얼마나 웃긴 줄 아나, 아르힘?”
아르힘은 빙그레 웃었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지. 아이들은 쉽게 잊는다.”
“그래서 경멸하는 것이다.”
아르파가 투이나를 내려다보았다.
“병든 것아, 기억해둬라. 모든 수호신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아르파가 비아냥거렸다.
“아르힘이 말하는 기도라는 건 달이 뜬 밤에 무기도 옷도 빼앗고 들판으로 내쫓는 것이니까.”
“……!”
투이나가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아르힘은 부정하지 않았다.
“안개가 짙은 밤이었다. 사람들은 길을 잃어버렸고, 미신을 필요로 했다. 그것이 진짜 신앙이 되어야만 그들을 지켜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인간이었을 때의 아르힘은 홀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투이나는 어렵지 않게 그가 느꼈을 공포를 상상할 수 있었다.
차가운 이슬이 피부에 닿고,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주변을 맴돌았다.
곧 죽으리라는 예감. 그런데도 도망칠 수 없다는 의무감. 공포가. 두려움이. 그를 덮칠 때.
저도 모르게 투이나가 아르힘을 붙잡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때를 이야기 하는 신은 너무도 어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감히 자신이 가엽게 여길 만큼.
소년은 너무 크게 뜬 탓에 눈물이 흘러내리지도 못하는 투이나의 눈가를 천천히 엄지로 문질렀다.
“나는 그때 수호신이 되었다.”
아르파가 비판적인 눈초리로 말했다.
“너의 제물이 기도일 줄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러한가? 나는 아직도 네가 피를 뽑는 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는데.”
“힘에 걸맞은 특별한 의식이었지.”
아르파가 헛웃음과 비슷한 소리를 내뿜었다.
웃음으로 위장했으나 급하게 쓴맛을 삼켰을 때나 나오는 소리였다.
투이나는 지금 들은 이야기를 소화시켜 내려보내느라 사막의 언덕보다 말라버린 목구멍을 힘겹게 움직였다.
“…그렇게 수호신이 되신 건가요?”
“그렇다.”
“저도 그렇게 되어야 하나요?”
투이나의 목소리가 더욱 뻑뻑해졌다.
루가가 되고서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이런 길은 단 한 번도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아르힘은 부드럽게 투이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
아르파가 벌컥 화를 냈다.
“이것을 신으로 만들고 대신 죽어주겠다면서?”
“이야기를 왜곡하는구나.”
아르힘은 잠시 투이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아르파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나를 죽여도 너에게 신도가 옮겨가는 일은 없다, 아르파. 내게는 이 아이가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이것을 계속 죽이려고….”
갑자기 아르파가 말을 뚝 멈췄다.
파리하게 커진 눈에서 유일하게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가 굴러갔다.
“그래서 나를 불렀나?”
“…….”
“수호신이 되려면 반드시 한 번은 죽어야 하니까, 이 나를 의식의 일부로 끌어들인 거냐?”
갑자기 샨의 얼굴을 한 아르파가 확 머리를 들이밀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붉은 빛에 투이나가 움찔했다.
“방금 들은 얘기를 이해하나? 증오하거라! 네 수호신이 너를 죽이려고 든 것이다!”
“그게 무슨….”
“거기서부터 오해를 정정해야겠군.”
아르힘이 아르파에게서 투이나를 떼어냈다.
“내가 이 아이를 신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무슨 헛소리냐?”
“이 아이는 원래 수호신으로 태어날 운명이었다.”
투이나의 몸이 경직되었다. 아르힘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그녀를 다독였다.
“나는 먼저 발견했을 뿐이야.”
“잠깐, 정리가 안 되는데.”
아르파가 미간을 씰룩였다.
“신으로 태어날 아이였으면 몸에 있는 저 더러운 것들이 설명이 안 돼.”
갑자기 아르파가 투이나의 팔을 낚아채갔다.
꼭 더러운 것을 만지듯 엄지와 검지로만 집었지만, 힘이 엄청나서 꼭 집게로 물린 것 같았다.
아르파는 투이나의 팔에 가득한 회색 얼룩을 아르힘이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흔들었다.
“이 더러운 것들을 몸속에 집어넣은 게 네가 아니란 뜻이냐?”
“그래.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르힘은 곤란한 표정으로 입가를 문지르다가 설명했다.
“아이야. 마법사와 함께 다녔으니 너도 어느 정도 저 얼룩들이 무엇인지 짐작했으리라 믿는다.”
“…….”
“그러나 네게 정확한 사실을 말해주지 않은 까닭은 그것이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우며, 네게 줄 충격이 크기 때문이다.”
“계속 그렇게 말을 빙빙 돌릴 거냐? 이건 영혼들이야! 수호신도 없이 뒈진 영혼들!”
아르파가 치를 떨며 다시 투이나의 팔을 떨쳐냈다.
투이나는 힘이 빠져나간 팔을 다시 수습할 생각도 못했다.
‘영혼?’
방금 들은 말이 소리굽쇠에 내리친 망치처럼 귓속에서 윙윙 울렸다.
“영혼…이라니요……?”
온몸에 새겨진 회색 얼룩들이 갑자기 어느 부위에 있는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정수리에, 이마에, 팔뚝에, 무릎에, 발등에 있는 이 자국들이 모두 영혼이라니?
투이나가 비명을 지르려는 것을 아르힘이 다급하게 붙들었다.
“진정하거라! 너는 괜찮다. 아이야. 너는 괜찮을 것이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아르파는 둘이 충격을 수습하려고 애쓰든 말든 혼자 상황을 납득하고 있었다.
“영혼의 세계에 가지 못한 영혼들이 새로운 수호신을 찾아 달라붙은 거로군? 그래서 저것이 그토록 자주 죽을 뻔했던 거야.”
아르파는 소름끼치는 흥미를 드러내며 투이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힘의 품에 있었음에도 투이나의 손가락은 어느새 얼룩 위를 움켜쥐고 있었다. 긁어서 떼어내려는 것처럼.
“네가 죽어야 신이 되어 그들을 이끌고 영혼의 세계로 갈 수 있을 테니까.”
투이나는 오한이 들었다. 뒷덜미가 서늘해지고 추위가 그녀의 턱을 떨게 만들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나 어느 깊은 구석에서는, 이제야 아귀가 맞아떨어진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왜 다른 자가 아닌 자신만이 영혼의 세계를 열 수 있고, 얼룩병에 걸렸음에도 마법과 신의 힘이 통하는지 말이다.
‘내가 죽어 신이 되길 바라는 영혼들 때문에 그랬단 말이야?’
그러나 혼란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여전히 많은 부분이 혼돈과 함께 뒤섞여 있었다.
아르힘은 그런 혼돈에서 투이나를 끄집어냈다.
“너는 아직 선택할 수 있다. 아이야. 죽음이 아니라 결혼을 통해서 빠져나갈 수 있어.”
아르파는 비웃기만 했다.
“그것이 죽어 신이 되어야만 하는 게 아니었던가, 아르힘? 네게도 분명히 문제가 생겼을 텐데.”
아르힘은 아르파의 비아냥을 무시했다.
소년의 모습을 한 아르힘은 투이나만 바라보고 투이나의 귀에만 말을 흘려 넣었다.
“그러니 아직은 루가의 자리를 포기하면 아니 된다. 세 번째 시험을 치르거라.”
아르힘이 작은 손으로 투이나를 꼭 쥐었다.
“반드시 내가 너에게 다시 오겠다. 그때 모든 것을, 모든 것을 말해주마.”
아르힘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겁에 질린 투이나가 소리쳤다.
“이대로 가시면 안 돼요!”
“시간이 없다. 아이야. 영혼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거라. 내가 다시 오겠다.”
아르힘이 갑자기 손을 놓고 떨어졌다.
투이나가 수천 가지 말을 토해내려고 입을 벌렸으나 시간이 없었다.
“다시 오겠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듯 거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아르힘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신전에 일렁이던 영혼의 세계도 사라지더니, 피가 팍 튀었다.
여전히 눈앞에 서 있는 아르파 때문이었다.
여태까지 아르힘이 투이나를 보호해 주고 있었는지, 아르힘이 사라지자마자 반사적으로 아르파의 힘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아르파는 무슨 이유에선지 뿜어져 나오는 피를 멈추게 했다.
가만히 상대를 지켜보던 아르파가 갑자기 손을 치켜들었다.
무기는 없었으나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활강한 손바닥은 시작한 만큼이나 갑작스레 멈췄다.
투이나는 그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
파리한 목줄기 바로 옆에서 멈춘 손의 주인은 다시 파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샨은 아르파가 투이나를 시험해보려 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도 쉽게 신을 누를 수가 있었다.
샨은 희멀겋게 질린 투이나와 그 때문에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회색 얼룩을 잠시간 지켜보았다.
그에게는 신들이 나눴던 대화보다도 자유롭게 투이나를 향해 뛰쳐나오는 자신의 영혼이 더욱 놀라웠다.
무언가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애정, 애환, 안타까움, 그 모든 감정들이 전부 다.
투이나 때문이었다.
깨달음이 부글거리며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이제 그대가 나를 얼마나 싫어하든 상관이 없게 되었어.”
샨은 투이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가 손만 뻗으면 닿을 자리에 있었으니까.
그가 어떻게든 투이나를 더 제 품으로 밀어 넣으려고 애쓰며 중얼거렸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우리는 서로를 피할 방법이 없다. 내가 그대를 찾아갈 것이다.”
샨의 목소리에 배인 감정은 애정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으나, 단순히 애정이라고 보기엔 꺼려지는 짙은 층위가 쌓여있었다.
샨은 복잡한 감정을 몰아내는 대신 가녀린 어깨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떨림에다 모조리 집어넣었다.
“그대가 좋아.”
자신조차 이해하기 버거운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투이나가 정말로 가엽고 안타까웠다.
동시에 사랑스러웠다.
“그러니 다른 신을 기다리지 않아도 돼.”
샨이 희열에 차서 중얼거렸다.
“남은 일은 내가 다 설명해주겠다. 신을 불러서라도 말해주겠다.”
그의 손이 느릿하게 투이나의 등을 쓸어내렸다.
“내게 오라.”
아르힘이 만들어낸 기절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가장 처음 본 광경이 바로 샨이 애정을 토해내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귀를 찢는 신전의 종소리도 잊고, 잠깐 기절했다는 사실도 잊었으나.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다루듯 루가를 껴안고 있는 샨의 모습이 잊어버린 기억을 깡그리 덮어버렸다.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저것이 정말로 사납고 광폭한 야만신의 왕이란 말인가?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고 투이나를 껴안은 샨을 보고 있을 때, 오직 한 사람만이 샨이 아니라 투이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과 다른 충격에 빠져있었으며, 투이나와 똑같은 생각에 시달리고 있는 유일한 자였다.
‘신이 되려 하십니까?’
라카인은 어지럽던 투이나의 눈동자가 차츰 고요해지는 장면을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그녀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일어난 모든 사건에도 불구하고 라카인은 투이나가 생각을 끝낼 때까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저렇게 다가가 껴안을 수가 있단 말인가?
투이나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아마 샨이 자신을 껴안고 있는 줄도 모를 것이다.
쿵쿵거리며 올라오는 심장 소리가 어지럽게 귓전을 때렸다.
투이나가 깨어난다면, 저 생각에서 깨어난다면.
라카인은 신들이 벌이는 거대한 극장에 홀로 관객이 된 것처럼 두려워졌다.
정말 그에게는 결말을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나?
시드룬이 연회장에 도착했을 때는 상황을 파악하기엔 너무 늦은 뒤였다.
유난히 열리지 않던 마법진을 간신히 장소를 맞춰 들어왔더니 신전엔 무너진 흔적이 있었고, 분명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게다가 바닥엔 마구잡이로 밟힌 음식과 먼지가 보이는데도, 사람들은 이상하리만큼 침착하게 떠들고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한 시드룬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바위를 둘러싸고 떠들던 사제들이 시드룬을 발견하고는 급히 물러났다.
그들의 표정이 몹시 기이했으나 시드룬으로서는 해석할 수 없었다.
사제들은 불편하게 안을 힐끗거렸는데, 그건 모하세스와 함께 앉아있는 루가 때문인 것 같았다.
“……?”
시드룬은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 같은 건 몰랐다. 다만 둘이 한 번도 같이 앉은 적이 없다는 건 기억났다.
우두커니 앉은 투이나를 옆에 앉은 샨이 직접 끼고 돌았다.
그게 왜 이상한지 짐작해보려던 시드룬에게 누군가 인기척을 냈다.
“마법사님.”
이런 존칭을 들어본 적 없었던 시드룬이 눈을 깜박였다. 그를 부른 자는 처음 보는 낯선 자였다.
검은 머리가 짧고 체격이 강건했으나 어딘가 느낌이 익숙했다.
열심히 추리해보던 시드룬이 같은 복장을 한 다른 호위를 보고서야 비로소 정답을 맞혔다.
“루가의 호위.”
“맞습니다.”
“내게 무슨 볼일입니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호위는 몹시나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을 건넸다.
“일전에 마법사가 아닌 자도 마법을 쓰는 방법을 들었습니다. 그건 어떤 마법이든 상관이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려운 부탁이지만, 제게 당신의 마법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시드룬은 이유를 묻는 대신 제안을 고려해보았다.
“그 대가로 내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정보입니다.”
이 대목에서 호위는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곧은 눈빛으로 돌아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오기 전에 수호신들이 신전에 영혼의 세계를 불러내었습니다.”
시드룬의 눈빛에 흥미가 감돌았다.
“듣겠습니다.”
시드룬이 그 자리에서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머리카락 중간에 마법진을 한 번 통과시키면 되니까.
신전 안이라 원래 의도보다 많이 잘리긴 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끌릴 만큼 길었다.
호위는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보라색 머리카락을 받아 품에 넣었다.
짧게 고개를 꾸벅인 그가 신전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일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흥미롭군요.”
시드룬은 방금 들은 정보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렸다.
영혼의 세계가 이 땅에 나타날 수 있다는 점도 놀라웠지만, 아르파가 아르힘에게 그 부분에 대해서 화를 냈다는 점도 중요해 보였다.
‘영혼의 세계에 있는 문이 인간들에게 발휘할 영향을 고려한 것인가?’
그 문이 다른 자들에게 닿는다면 자신처럼 몸이 변이할지도 모른다. 더 심각할지도 모르고.
“당신은 그때 아르파나 아르힘을 보아도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당신이 가진 병을 보여주십시오.”
호위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손바닥에 흉터처럼 발간 자국이 있었지만 회색 얼룩이 나타난 부분은 손목이었다.
시드룬은 그 자의 몸에 있는 얼룩병을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이 얼룩들이 죽은 영혼이라니.
영혼은 언제나 육체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그의 지론에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신의 힘까지 통하지 않는 걸 보면, 수호신들도 마법처럼 영혼에서 힘을 얻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론을 확립한 건 좋았으나, 시드룬은 가장 문제가 많은 부분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정말로 루가를 신으로 만들려고 합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아르힘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말했고, 루가 님이 이미 수호신으로 태어날 운명이라고 하였습니다.”
호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아르힘은 호위들이 이미 그 분의 첫 번째 신도라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루가 님의 의도와 상관없이 일이 진행 중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원래 아르파를 섬긴다고 들었습니다. 정말로 루가를 신처럼 생각합니까?”
라카인은 아주 오랫동안 침묵했다.
“……예.”
왜 간단한 대답을 그토록 힘들게 말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시드룬이 물었다.
“아르파에서 이교도는 무슨 처벌을 받습니까?”
“아르파의 의식에서 산 제물이 됩니다.”
“인간이 아닌 신이 내린 구속력은 없습니까?”
“아르파를 섬기는 자가 신에게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을 때는 피가 역류한다고 들었으나, 몇십 년간 그러한 일이 없어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운이 좋게도 병에 걸리는 덕분에 아르파의 처벌을 피해간 셈이로군요.”
“…….”
호위는 시드룬이 해석할 수 없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슬퍼하는 것도 아니고 즐거워하는 것도 아닌 미묘한 감정은 그에게 약간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호위는 곧 감정을 아래로 흘려보내듯 씻어 내렸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입니다.”
“충분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드룬은 거래에 만족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투이나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것이라 여긴 그는 남겨진 호위를 금방 잊어버렸다.
* * *
라카인은 떠나가는 시드룬을 보며 긴장했던 몸을 천천히 이완시켰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들어온 마법에 놀라서였다.
그가 품 안에서 사각거리는 머리카락의 느낌을 거북하게 자각했다.
마법을 쓰는 것은 이보다 어려울 것이다.
벌써 몇 번이나 자신이 주제넘은 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돌아보았지만, 라카인은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가의 근처를 계속 서성이는 호루니와 스카차도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중간에 아르파에 의해 기절한 그들은 라카인처럼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했지만, 필요한 만큼은 들었다.
투이나가 신이 된다니.
호위들은 거의 안절부절못할 지경이 되었다.
당장이라도 투이나에게 자세한 사정을 묻고 싶은데, 옆에 앉은 샨이 그녀를 놓아주질 않았다.
샨은 한 팔로 투이나를 감싸 안은 채 어린 새끼에게 먹이를 먹이듯 다루고 있었다.
그가 누군가를 저렇게 대하는 모습은 라카인도 처음 보았다.
실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넋을 빼고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먹기에 불편하지 않나? 새로 술잔을 채우는 게 좋겠군.”
샨은 음식을 하나하나 조각내 투이나에게 밀어주었고, 잔이 조금이라도 비면 당장 새것으로 바꿔주었다.
자신이야 아무렇든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보지도 않고 대충 집어먹으면서 말이다.
투이나는 딱히 찡그리거나 화를 내지도 않고 앉아 있다가 가끔씩 입을 열었다.
“베인의 영혼을 구해내는 방법이 뭐죠?”
“자아, 여기 청포도는 잘 익었군. 아까 것은 시었을 테지.”
“아르힘 님이 오랫동안 준비하고 있다는 게 무엇이었죠? 그분이 바뀌었다는 건요?”
“음. 이건 내가 먹어보아도 달군. 이것이 낫겠다.”
잠깐 그들의 대화에 집중해보던 라카인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까부터 둘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반복되었다.
끈질기게 질문만 반복하는 투이나와 끈질기게 투이나에게 음식을 먹이려는 샨이다.
둘 다 고집을 굽히지 않는 모습이었으나 바깥에서 보기엔 더없이 정다워 보일만도 했다.
“세상에, 세상에.”
“도대체 언제 둘 사이가 저렇게 된 거야?”
“아르파에게 홀렸나?”
“내기 판이 또 바뀌겠구만.”
사람들은 신전에서 새로 준비해온 음식을 집어먹으며 떠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일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한 채 음악소리에 흥겨워만 했다.
라카인은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도 기이해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나 투이나와 샨의 모습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투이나는 조금 말만 할라치면 입에 음식을 들이미는 샨을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가렸다.
“샨. 아까 무엇이든 대답해준다고 하지 않았나요?”
샨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딴소리를 했다.
“그대가 지금 얼마나 창백한지 알고나 있나?”
“그건 화장 때문에….”
“그대가 이따위로 가만히 앉아있는데 기운을 차렸다고는 말 못 하겠지.”
샨이 여전히 누그러진 얼굴이었으나 그의 눈초리가 잠깐 차가워졌다.
더 항의하려던 투이나도 차마 그 말까지 반대하진 못했다.
샨은 아이를 어르듯 투이나의 뺨을 쓸어올렸다.
“그대를 좋은 술과 음식으로 채우기 전까지는 어떤 얘기도 들려주고 싶지가 않군.”
‘피부가 아직도 이렇게 차가운데 말이야.’하는 뒷말은 굳이 들리지 않아도 충분히 몸짓으로 표현해주었다.
투이나는 찡그리며 몸을 떨었다. 하는 수 없이 투이나가 천천히 음식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그제야 만족한 샨이 대답했다.
“아까 물어보았던 질문의 답은 같다. 그자의 영혼은 아르힘과 뒤섞여 있으니 의식을 치러 분리해내면 된다.”
투이나가 바로 씹는 걸 멈췄다.
“어떤 의식이죠?”
“마저 먹어라.”
투이나가 짜증스럽게 남은 걸 삼켰다. 샨은 그래도 좋다고 씩 웃었다.
“아르파에서는 신을 담을 수 있는 몸이 많다. 아르파는 강한 몸을 좋아하니, 지금 신을 담고 있는 자보다 강한 자가 신을 부르는 의식을 치르면 신이 그자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지.”
투이나의 눈이 커졌다. 얼핏 들어도 아르파에서 극비로 다뤄질 만한 사실이었다.
이것이 외부로 유출될 경우 초래할 권력다툼을 떠올린 투이나의 표정이 변하자 샨이 만족스러워했다.
“지금은 내가 제일 강하니 걱정할 거 없다.”
“그게 문제가 아니….”
“그러니 빨리 나와 결혼해 아이를 낳아주면 좋겠군. 내가 노쇠한 다음에 다른 자에게 신을 빼앗기는 것도 만족스럽지 못하니까.”
투이나의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샨이 쿡쿡 웃었다.
“그렇게 질색할 거 없다. 장담하건데 그만한 대가를 치러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아껴줄 테니.”
투이나는 저기에 대꾸하느니 차라리 주제를 바꾸는 편을 택했다.
“…그럼 아르힘 님을 다른 몸으로 다시 가게 만들면 베인의 영혼은 떨어져 나온단 말이죠?”
“그래.”
샨이 느긋하게 말했다.
“아르힘은 몸에 별로 미련이 없으니 다른 희생양을 하나 찾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다.”
그러나 투이나에게는 다른 어떤 방법만큼이나 어렵게 들렸다.
투이나가 희생양이 아닌 다른 방법은 없을까 골몰하는 사이, 샨은 대답을 계속했다.
“다른 건 다 알겠으나 아르힘이 무엇을 오랫동안 준비했는지는 모르겠군. 아르파의 의식을 다시 치르면 확실해질 거다.”
“아니, 그건 하지 말아요.”
투이나가 서둘러 거절했다.
금기가 야기할 결과를 안 뒤로는 샨이 그 일을 하게 만든데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베인에게 그런 일이 있었으니, 신에게 삼켜지는 모습을 더더욱 보기가 싫겠지.
그래서 샨은 자신이 점점 신을 통제할 수 있게 되어간다는 사실은 일부러 말해주지 않았다.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긴 했지만, 그뿐이다. 그것이 분노로 번지지 않도록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여전히 바깥으로 나와 있는 건 자기 자신이었고 신에게 휘둘린 투이나가 피를 토해내며 쓰러지는 일도 없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더 먹어라.”
샨이 금 접시를 슥 밀었다.
쟁반에 넘치도록 담겨있던 과일이 굴러 떨어져서 탁자에 흐드러지게 쌓였다.
샨의 호의는 단순하고 알기 쉬웠다.
별로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확실히 먹을 것이 들어가니 머리가 좀 돌았다.
‘더는 필요 없지만….’
투이나는 음식을 먹고 탄력을 받은 생각이 저 멀리까지 굴러가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이를테면 필요 없다는 말 한마디에 그녀가 신이 되면 더는 음식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 떠오를 만큼.
투이나가 급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젠 진짜 배불러요.”
“그럼 다른 거라도 더 먹을 수 있지 않나.”
샨이 권했지만 투이나는 꿋꿋했다.
“한 사람의 영혼을 품었다고 아르힘 님이 그토록 힘들어하실 줄은 몰랐어요.”
“모른다. 그런 개인적인 고통은 온전히 아르힘의 문제지.”
“당신은 괴로운 적 없었나요?”
투이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뜻 대답하려던 샨은 그녀가 자신이 아니라 아르파에게 묻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샨에게 갑작스레 불쾌한 느낌이 엄습했고, 다행스럽게도 시드룬이 나타나면서 감정이 끊겼다.
“여기 있었습니까.”
“…뭐하다 이제야 슬렁슬렁 나타났나?”
턱을 괸 샨이 대꾸했다. 그는 시드룬을 별로 경계하지 않았다.
키만 크고 삐쩍 마른 마법사는 가지고 있는 힘에 비해 욕망이 부실했다.
투이나와 계속 접촉하는 건 거슬렸지만 그런 주제에 아무런 친밀감도 없어 보여서 놔둘 수가 있었다.
오히려 그가 걱정하는 건 뒤쪽이었다.
샨은 시드룬의 뒤에서 천천히 접근하는 라카인을 새삼스럽게 뜯어보았다.
저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투이나를 섬겼지? 거의 일 년이 다 되었던가?
투이나에게 정신을 할애하고 있으면서도 샨은 주변 시야를 전부 확인할 수 있었다.
납작하게 엎드려 있어야 할 놈이 마법사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는 것부터 그의 심기를 거슬렸다.
투이나의 지시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그녀는 아르힘을 만난 이후로 줄곧 넋을 빼놓고 있었다.
라카인의 행동은 그 주인이 시켰다고 보기엔 아무래도 수상쩍다.
샨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라카인은 얌전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는 부아가 치밀었다.
원래 같았으면 자신을 섬기는 자의 생김새가 어떻든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투이나가 관계되고 보니, 그녀 주변에 무엇으로든 관심을 끌 작자가 있는 게 싫었다.
시드룬도 싫었고, 호위들도 싫었으며, 라카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싫었다.
그러나 가장 최악인 것은 베인이 한껏 꾸며낸 아름다움으로 투이나를 꼬여낼 때였다.
이제 그자는 영영 일어나지 못할 테니 시들어갈 일만 남았다.
‘만약 깨어난다고 해도 이미 늦었겠지.’
샨의 입술이 비틀렸다.
눈을 가리는 인물이 사라졌으니 이제 투이나는 정신을 차리고 자신만 바라볼 것이다.
샨이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방해가 있어 늦었습니다.”
시드룬이 걸리적거리는 옷을 끌고 굳이 나란히 앉으려고 들어왔다.
“반대쪽으로 가라.”
당연히 시드룬은 개의치 않았다.
샨은 짜증스럽게 시드룬의 옷이 탁자를 치며 음식이 굴러떨어지는 꼴을 지켜보았다.
멍하니 있던 투이나도 차마 그 꼴은 보기 어려웠는지 양손으로 탁자 밑에서 음식을 걷어냈다.
방금 전에 겪은 소동으로 이미 건물이 위태위태했기에 샨은 드물게 인내심을 발휘해주었다.
또 마법사와 싸웠다간 이번엔 앉을 자리도 없이 폭삭 무너지고 말 것이다.
“더 이상 이런 자리에 나올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군, 마법사.”
투이나에게 말을 걸려던 시드룬이 눈동자를 굴렸다.
샨은 삐죽이 튀어나온 거만함을 굳이 돌려 표현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동안 필요한 건 몰래 훔쳐가고 있었을 텐데. 그런 도둑질도 오늘까지다. 루가는 더 이상 네게 협조할 시간이 없을 테니까.”
시드룬은 샨이 뭘 알고 저리 말하는 건가 확인하듯이 빤히 샨을 바라보았다.
투이나는 굳이 설명할 기력도 없었다. 어차피 샨이 제멋대로 구는 건 시드룬도 잘 알고 있었으니.
“당신이 루가와 결혼하기로 결정된 겁니까?”
“처음부터 내가 아닌 그 누구도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샨이 으름장을 놓았다.
구혼식의 제일 처음부터 줄곧 가졌던 태도가 더욱 강해져 있었다.
왜냐하면 투이나가 수호신이 된다면 당연히 결혼할 상대는 인간을 떠나 신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사람으로 따지고 신으로 따져도 샨의 압도적인 승리다.
투이나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죽음이 아니면 결혼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고 했어.’
아르힘이 급하게 가버리는 바람에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묻지 못했지만.
투이나는 필사적으로 그 생각에 매달렸다.
‘하지만 죽는 것이야말로 수호신이 되는 방법이라고 했어. 그렇다면 누군가와 결혼하는 것도 수호신이 되는 길인가?’
분명히 문제가 있어 보이던 아르힘의 모습과 누워있던 베인의 모습이 겹쳐졌다.
‘아르힘 님은 내가 신이 되길 원하시는 건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아르힘의 말이 곧장 기억났다.
혼란스럽다. 혼란스럽다.
투이나는 또 다시 끝없는 상념으로 침몰하기 전에 대화로 돌아갔다.
“…구혼식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서로를 노려보던 샨과 시드룬이 동시에 투이나를 돌아보았다.
투이나는 잔물결처럼 계속 그녀를 때리다 결국은 깊은 물까지 끌고 가려는 고민에게 저항했다.
“세 번째 시험을 치를 겁니다.”
대번에 샨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번에는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투이나가 자신을 시험해보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마침내 받아들이겠다는 뜻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시드룬은 그런 샨의 고민을 끝내주겠다는 듯 별다른 의도 없이 그의 속을 북 긁었다.
“문제가 있군요. 그 시험에서 모하세스가 이기면 승자를 가릴 수 없게 됩니다.”
“닥쳐라!”
샨의 이마에서 핏대가 솟았다.
아무리 참아준다고 해도 첫 번째 시험과 두 번째 시험에서 모두 패배한 것까지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시드룬은 자신이 제대로 왕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을 이었다.
“세 번째 시험에서 내가 이긴다면, 당신과 결혼해 아이를 낳을 겁니다.”
샨의 복장을 뒤집는 저 말이 무슨 뜻인지는 투이나만이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시드룬은 아이를 실험체로 쓰겠다는 데 동의하냐고 묻고 있었다.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나왔지만, 투이나는 어차피 골치 아픈 문제에 시달릴 거라면 자신이 문제를 쥐고 있기를 택했다.
“샨이 세 번째 시험에서 이긴다면 그 다음 시험은 없을 거예요.”
“……!”
샨과 시드룬이 동시에 눈썹을 찌푸렸다.
상당히 희극적인 동작이었지만 투이나는 하나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샨은 저 말을 승리하기만 한다면 자신과 결혼해준다는 뜻으로 이해할 테고.
시드룬은 두 번의 승리를 차지한다면 자신과 결혼해준다는 뜻으로 이해할 것이다.
세 번째 시험만으로도 둘 중 한 사람과 결혼하리란 결론을 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아무도 베인을 다음 시험의 승리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따라서 더 시험이 치러질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투이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속에서 쓴물도 같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 시험을 왜 시작했는지 아직 기억하고 있어.’
살인자를 찾기 위해서다.
그리고 살인자는 이미 찾았다.
“그런 조건이라면 거절할 수가 없군.”
샨이 만족스럽게 대꾸했다.
눈빛이 느른하게 풀린 걸 보아 이걸 투이나가 보내는 간접적인 애정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어쨌든 겉으로는 다른 구혼자들이 가진 한 번의 승리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나도 동의하겠습니다.”
시드룬도 쉽게 대답했다. 애초에 그는 별로 잃을 게 없었으니까.
시험 내용을 모르니 자신이 쉽게 승리할 거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투이나는 자신의 짐작을 굳이 표현하지 않았다.
“시험이 끝나면 여러분은 기다리던 대답을 얻게 될 거예요.”
구혼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투이나는 비로소 연회장에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시 해가 뜰 때
남은 자는
모두
그를 믿었다.
사랑하였다.
아르힘을 찬양하는 노래를 들으며 투이나는 눈을 감았다.
아르힘은 그녀가 루가의 자리를 유지한 채 세 번째 시험을 치르기를 원했다.
투이나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신은 답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직접 신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니까.
“그럴 수 있고, 그러고 싶다고 해도 정말로 살인에 이르는 이유를 물어볼 겁니다.”
투이나는 두 번의 시험으로 앞의 대답을 모두 얻었다.
이제 베인을 깨워 마지막 답을 얻을 차례였다.
신이 되어서라도.
투이나는 다시 눈을 뜨고 멀리, 저편으로 시선을 보냈다.
구혼자도 지나고, 아무것도 모른 채 들뜬 사람들도 지나고, 신전도 지나.
마침내 고요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세 명의 호위들이자 신도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무언가 온당치 못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원래는 자신을 향할 믿음이 아닌데도, 자신이 그것을 도둑질한 것처럼 느껴졌다.
심장을 감싸는 죄책감과 불안한 고동이 그를 뒷받침했다.
이건 너의 자리가 아니라고. 자꾸만 그런 속삭임이 들렸다.
‘이게 ‘다른’ 영혼의 소리일까?’
알 수 없었다.
라카인은 그런 투이나를 보며 말없이 두 손을 맞잡았다.
그가 부를 신의 이름은 아르파도 아니었고 아르힘도 아니었으며, 투이나의 이름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있기에 라카인은 아직 이름도 없는 신에게 기도했다.
그녀에게 평화와 안식이 있기를.
영혼에 정말로 힘이 있다면, 자신의 온 영혼을 다 바칠 테니.
당신을 구원하소서.
-9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