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 (32/43)

32.

…그녀는 모든 기쁨을 잃어버리고 만나는 자의 마음을 빼앗아갔다. 텅 빈 가슴을 채우려고…

베인은 잠든 것처럼 보였다.

부드러운 뺨은 따듯했고 감긴 눈은 금방이라도 다시 뜨일 것처럼 곱게 닫혀있었다.

베인의 옷을 갈아입히고 침대에 눕히는 동안 혹시라도 그가 깨어날까 봐 조심스레 다루게 될 정도였다.

하지만 곧 보기 좋은 얼굴이 야위기 시작할 거고, 그가 영영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레오나는 의식이 없는 베인이 보이는 순간부터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을 따라온 의원들이 잠든 베인의 아름다움을 보고 남몰래 경탄하는 사이, 레오나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베인…! 베인! 눈 좀 떠봐라. 응?”

레오나가 떨리는 손으로 뺨을 두드렸다.

차마 보고 있기가 힘들어진 투이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도 아르힘에게 몇 번이나 물어보고 싶었다. 베인이 정말 깨어날 수 없는 거냐고.

신은 두 번 말하지 않았지만 더는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단호히 자신의 뜻을 알렸다.

아르힘이 작은 몸으로 베인을 안아들었을 때 마치 최후의 순간 그를 맞이하러 온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아르힘은 말없이 베인을 옮겼다.

투이나는 아르힘을 따라 걸었고, 다시 베인의 거처에 도달했을 때까지 그가 미동도 없는 걸 보며 서서히 기대를 접어야 했다.

베인의 뺨을 두드리던 레오나는 무너지듯 그의 상체에 엎드렸다.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투이나는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그러나 자포자기하고 싶은 심정과 반대로 서 있는 몸은 더욱 뻣뻣해졌다.

의원들은 거리낌 없이 슬픔을 드러내는 레오나를 아주 잠깐만 기다려주었다.

“안타깝긴 하지만 베인 크로퍼드가 직접 아르힘 님께 형벌을 받음으로써 당신에게 돌아갈 죗값이 다소 줄어들었소.”

“신전과 결탁해 권력을 농단하려는 시도의 원인이 재력에서 나오는 바, 크로퍼드 상단에 비축해둔 모든 자금과 독점 상품을 압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소.”

“목을 간수한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길 일이지.” 

레오나가 눈물이 흘러내린 얼굴을 빳빳하게 들어올렸다. 그녀의 눈빛이 형형했다.

“…어차피 이번 일에 쓸 병력을 모으느라 여유 재산은 다 털어 넣었습니다. 상품이야 얼마든지 돌려드리지요.”

의외로 순순하게 나오는 태도에 의원들이 안심한 것도 잠시, 레오나가 비죽 덧붙였다.

“허나 어쩌나. 돈은 안 되겠습니다.”

“뭐라?”

“나라의 내기를 잊으셨습니까?”

당장 반발하려던 의원들이 멈칫했다. 레오나는 여전히 젖은 눈으로 투이나를 쏘아보았다.

“루가 님의 결혼 상대가 누구인지 맞혀야지요!”

“허…!”

그제야 의원들은 신전과 의회를 막론하고 모든 백성들이 구혼자들에게 돈을 걸었던 것을 떠올렸다.

크로퍼드 상단의 재산을 압류하는 순간, 그들의 내깃돈도 함께 쓸려가게 된다.

레오나는 마치 이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뻔뻔하게 눈을 번득였다.

“어디 사람들한테서 돈을 다 빼앗아가고도 당신이 무사할지 두고 볼까?”

“그까짓 내깃돈을 못 가져갈 줄 아나!”

“그럼 해보든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끝나는 내기에서 갑자기 판돈을 빼버린다고? 거기에 대체 얼마가 걸린 줄 알아? 다른 나라 인간까지 그 내기를 했어!”

“웃기는 소리! 그럼 돈을 건 만큼 다시 돌려주면 될 일이다!”

“그렇겠지?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장부는 미리 태워버렸다. 그건 나만 알아.”

레오나가 베인을 바짝 끌어안았다. 필사적인 몸짓이었다.

“사람들은 액수를 부풀리고 거짓말을 할 거야. 내가 다시 서류를 쓰지 않는 이상, 내깃돈을 가져간 너희는 수많은 빚쟁이를 갖게 될걸.”

의원들과 똑같이 굳어있는 투이나에게 레오나가 빠르게 속살거렸다.

“신전도 파산하게 될 겁니다, 루가 님. 그들이 책임을 물을 거예요. 이건 루가 님의 내기니까….”

“말을 삼가십시오.”

그때 라카인이 입을 열었다.

“루가 님을 내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을 반성하기는커녕 그 결과까지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됩니다.”

레오나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박제된 곰의 머리가 갑자기 말을 하는 걸 목격한 사람 같았다.

의원들도 저 인간이 있는 줄도 몰랐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라카인은 사실을 정정하고는 다시 침묵했다.

“……그런 처벌은 의원님들과 논의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왜 베인을 만나러 왔는지 기억하세요.”

투이나의 목소리가 기어이 갈라졌다.

가급적이면 그녀가 말하지 않기를 바랐던 라카인이 고개를 숙였다.

“저는 레오나의 결정을 도와주려고 여기까지 온 겁니다.”

“……베인의 구혼자 직위를 포기하도록 말인가요?” 

레오나가 목이 졸린 듯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투이나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하…….”

레오나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밧줄에 묶인 채로 마구 움직여서 쓸려있던 손목이 더욱 붉어졌다.

‘제발, 빨리 포기해주세요.’

지켜보는 투이나도 미쳐버릴 것 같았다.

베인이 누워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 하나하나가 다시 떠올랐다.

자신이 조금만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베인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벌레처럼 계속 머릿속을 갉아댔다.

라카인은 위태롭게 서 있는 투이나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보기엔 레오나만큼이나 그녀도 불안해 보였다.

한참동안 신음을 삼키던 레오나가 마침내 대답했다.

“포기 안 합니다.”

투이나의 표정이 흔들렸다.

“……네?”

“베인이 여전히 구혼자여도, 신전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레오나가 가시가 돋힌 말투로 소리쳤다.

“결혼하십시오!”

레오나가 베인의 멱살을 끌어당겼다.

“베인과 결혼하면 모든 게 해결되겠군요!”

아연실색한 투이나의 숨이 완전히 흐트러졌다. 방금 들은 말을 도저히 넘길 수가 없었다.

“자네 미쳤나!”

“원래 루가 님과 결혼할 사람은 베인이었어!”

레오나가 사납게 소리쳤다.

“나도 내기에 돈을 걸지. 베인이 승리할 거야. 루가 님은 베인을 사랑해!”

“맙소사. 제정신이 아니야.”

“완전히 돌아버렸어.”

의원들이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투이나는 숨도 쉴 수가 없었다. 레오나가 하는 말마다 그녀의 목을 조르고 흔드는 것 같았다.

‘결혼을 하라고?’

베인과?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상대와 평생을 맹세하라니.

심지어 그녀에겐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죄책감까지 있었다. 단지 한때 베인을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래야 하는 건가?’

투이나의 상태를 알아차린 라카인이 급히 다가갔다.

“루가 님. 숨 쉬십시오.”

충격 때문에 심장이 발작하듯이 뛰었다.

표정이 어두워진 라카인이 그녀를 억지로 앉혔다.

가만가만 등을 누르며 호흡을 유도하는 손길에 투이나가 간신히 막혀있던 숨을 뱉어냈다.

레오나는 생각보다 충격을 받은 투이나의 모습에 주춤했으나, 여전히 베인을 쥔 손은 놓지 않았다.

레오나가 한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베인은 죽지 않았습니다. 한때는 그토록 사랑하셨던 사이 아니십니까. 차라리 동정심이라도 좋습니다.”

그녀가 무력하게 고개가 떨어지는 베인을 투이나를 향해 내밀었다.

“이 애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비스듬히 쓰러진 베인은 금방이라도 일어나 그녀를 향해 환히 웃을 것 같았다.

간신히 진정됐던 투이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호루니가 뛰쳐나왔다.

“데려가세요!”

호루니가 억지로 레오나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루가 님이 힘들어하시는 게 안 보입니까? 다들 지켜만 보고 뭐 하는 거예요!”

“아….”

그제야 멍청하게 서 있던 의원들이 레오나를 끌어당겼다. 레오나가 발버둥 쳤다.

“루가 님! 잊으시면 안 됩니다! 또다시 베인에게 잔인한 짓을 하실 수는 없습니다!”

“데리고 나가!”

“죄송…합니다, 루가 님. 설마 이렇게 나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나가세요.”

호루니가 으르렁거렸다. 의원들이 서둘러 빠져나갔다.

그동안 투이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레오나가 나간 자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라카인의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모든 오욕들이 담긴 신전에서 그녀를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아르힘은 인간에게서 풀려났는데도 어째서 루가를 돌보지 않는가.

자신은 그녀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똑같이 손발이 찢어질 것 같은데.

호루니는 바닥에 늘어진 베인과 라카인에게 안겨 있는 투이나의 참담한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루가 님…….”

차마 괜찮냐고 물어보기도 어려웠다.

투이나는 먹먹해서 잘 넘어가지 않는 침을 삼켰다.

그들을 걱정시킬 수는 없다. 걱정시킬 수는 없는데….

“……쉬고 싶어요.”

기어이 투이나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라카인은 턱에 핏대가 서도록 입을 꽉 다물고 그녀를 안아들었다.

라카인은 투이나가 말없이 웅크리는 모습에 가슴이 난자당하는 것 같았다.

호루니는 무언가 저릿한 느낌이 들어 입술을 깨물었다.

라카인의 품에 안겨서 떠나는 투이나의 모습은 세상에 그래서는 안 될 사람이 마지막으로 실망하는 장면 같았다.

절대로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사람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었다.

‘혹시…….’

호루니는 말을 삼켰다.

더 없이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투이나의 뒤통수를 받치는 라카인을 보면서 분명한 의혹이 떠올랐던 것이다.

단순히 충성심으로 보기엔 가냘프게 끝을 떨리게 하는 저 느낌은 그녀 자신에게도 있었으니까.

스카차가 굳어있는 호루니에게 다가왔다.

“우리도 가야지.”

“……아니겠지?”

호루니가 중얼거렸다.

스카차는 가망 없는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는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리고 여기엔 그런 자가 너무 많았다.

스카차는 그 대가를 온 몸으로 받아낸 남자를 일으켜 다시 눕혀주었다.

그리고 루가 님을 사랑했다간 베인처럼 험한 꼴을 겪게 될 거란 자신의 전망을 말해주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스카차는 순수한 동정심으로 호루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닐 거야.”

위로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아는 거짓말이라 호루니는 고개를 떨구었다.

* * *

투이나는 휴식을 원했지만, 사후처리를 원하는 자들은 계속 찾아왔다.

다만 이미 한 차례 신전을 헤집고 간 의원들 대신 마디악이 방문 요청을 한 것이 그들이 해준 약간의 배려였다.

“강녕하셨습니까.”

나이 든 마디악이 서슴없이 건강을 걱정할 만큼 투이나의 안색은 퀭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마디악.”

“그간 걱정이 늘었습니다.”

지팡이를 의자에 기대둔 마디악은 오랫동안 잡담만 건넸다.

낙엽이 지는 거리 얘기나 올해 수확이 풍족하다는 얘기 등.

정치 생활로 뼈가 굵은 그녀가 일부러 사사로운 얘기만 꺼내는 마음을 이해한 투이나가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의회의 결정을 전달해 주셔도 돼요.”

찻잔을 쥐고 있던 마디악이 한숨을 쉬었다.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들의 뜻만 전달하면 그만이라고 여기지만, 그럴수록 일은 반대로 되어 가기 십상이지요.”

마디악이 다 식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의회에서는 결국 크로퍼드 상단의 재산을 보류해 두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때까지 레오나는 의회에서 맡게 되었지요.”

“그렇군요.”

“사제들의 처분은 어떻게 되어 가십니까.”

“아르힘 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시지만 제 쪽에서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사제들은 다시 나타난 신을 마냥 기꺼워하지도 못하고 두려워하지도 못했다.

베인에게 찬동해 그가 신전에 마법을 들여오는 것을 허락한 탓에 결과적으로 신을 가둔 일에 일조한 셈이기 때문이다.

아르힘이 사제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물을 거란 생각에 요즘 그들은 발소리조차 죽이며 살살 다녔다.

그래도 내심 마음 저편에 용서받으리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모양이었다.

루가인 투이나가 무사하고, 그녀를 왕으로 만들고자 한 계획이었으니까.

투이나는 침묵 속에 깔린 그런 불온한 기대감에 외출을 더욱 자제했다.

마디악이 말했다.

“여러모로 불안한 시대군요.”

“…정말로 한 시대를 살아오신 분께서 보시기엔 어떤가요.”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일이 또 있었냐는 질문에 마디악은 담담하게 답했다.

“언제나 시련은 있기 마련이지요. 바람이 스쳐 지나가도록 두십시오.”

“…….”

“허나 루가 님은 사람들에게 스쳐 가는 바람마저 조절하실 수 있다고 믿게 만드셔야 합니다.”

투이나의 눈이 굳었다.

“이번 일은 너무 컸습니다. 말이 새어나가고 잔잔해야 할 수면을 건드렸습니다.”

비유법을 사용하는 마디악에게 투이나가 조심스레 화답했다.

“파도를 걱정해야 할까요?”

“폭풍을 대비하셔야 합니다.”

투이나가 입술을 깨물자 마디악이 슬쩍 동정심을 내비쳤다.

“키를 잡을 인간이 어찌나 없던지, 저 같은 늙은이에게 부랴부랴 중매까지 부탁할 정도더군요.”

“그 말씀은…….”

“구혼자를 새로 뽑아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투이나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서릿발처럼 뻗친 투이나의 모습을 보며 마디악이 목소리를 낮췄다.

“물론 일부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허나 남은 후보자들의 악평이 이번 일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평온한 시기였다면 그저 다른 선택지였을 구혼자들은 베인이 혼수상태에 빠진 순간 괴물로 변했다.

“신전에서는 아르힘 님의 감금을 숨기려고 했지만 아르힘 님과 베인에게 무슨 문제가 발생했다는 이야기까지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사제들이 함구령을 내렸지만, 의회에서 크로퍼드 상단의 재산을 압류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크게 동요했다.

내기 때문에 이미 신전 내부에서 돌아가는 사정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들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주변을 쪼아대기 시작했다.

결국 쉬쉬하면서 조금씩 풀려나간 이야기는 진실이 섞여 마구 부풀려졌다.

아르힘의 신전에 강림한 아르파가 아르힘을 죽였다더라.

아니다, 저주받은 마법사가 신전에 끌어들인 마법으로 구혼자들을 모두 없애버리려고 했다더라.

정작 일의 주동자인 베인은 영영 깨어나지 못한다는 소문이 합쳐져 가련한 피해자로 변해갔다.

재담꾼들은 신이 나서 영원한 잠에 빠진 구혼자와 루가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레오나가 투이나에게 베인과 결혼하라고 소리친 일은 어느새 베인을 깨울 유일한 방법으로 각색되어 돌아다녔다.

진실이 그토록 낭만적인 이야기로 둔갑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미 나라에 널리 알려진 베인의 외모와 지대한 사랑 덕분이었다.

평범한 아르힘 사람들은 같은 나라 사람인 베인을 편애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결국 마디악이 꺼낸 새 구혼자 이야기는 그들의 관심을 돌려보고자 꺼낸 차선책이었다.

마디악이 최대한 돌려 말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투이나는 그 사실을 피부로 느낀 순간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어떤 기분이실지 압니다. 강요하고자 꺼낸 이야기가 아니니 부디 마음을 가라앉혀 주십시오, 루가 님.”

“……새 구혼자는 받지 않을 거예요.”

투이나가 극심한 두통 속에서 대답했다.

마디악이 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오나 크로퍼드가 꽤나 머리를 잘 굴렸습니다. 결국 상황이 겹쳐져 이도 저도 못 하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의회든 신전이든 직접 일을 진행해야 할 사람들이 모두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엮인 자가 많아 건드려도 얻을 이익은 없는데 손해만 극심할 골칫거리였으니까.

결국 마디악처럼 한 발 물러나 있는 사람이 간접적으로 손을 써야 할 만큼.

투이나가 지친 표정으로 머리를 기댔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요청을 기억해 둘게요.”

그만 물러가도 좋다는 뜻이었는데, 마디악은 앉은 자리에서 시간을 지체했다.

그녀가 주름진 손마디를 천천히 감쌌다. 

“루가 님. 저는 새 구혼자 따위나 이야기하려고 늙은 몸을 일으켜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 비록 투이나를 엄청나게 심란하게 만들지언정 이건 편지로도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마디악은 처음 투이나를 만날 때부터 자신이 의회를 대신해서 왔음을 숨기지 않았고, 지금 그 결실이 드러날 때였다.

“사제들과 왕위 논의를 하셨다 들었습니다.”

“…….”

변해가는 투이나의 표정에도 마디악은 재촉하듯 덧붙였다. 

“그리고 수락도 하셨다지요.”

“…네.”

“루가 님께는 새 구혼자보다는 새 왕좌가 더 어울리실 겁니다.”

투이나의 입매가 딱딱해졌다. 마디악이 의자 깊숙이 파묻었던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의회에서도 같은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왕이 되시겠습니까?”

투이나는 왜 하필 지금 이런 제안을 하냐고 소리칠 뻔한 혀를 꾹 눌렀다.

술렁이는 머리를 잠재운 투이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마디악. 당신은 왕이 없는 아르힘이 좋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왕이 없는 곳을 사랑한 까닭은 상대할 적수의 존재 때문이었습니다.”

마디악이 또렷한 눈으로 대답했다.

“지금까지는 신전이 충분히 의회를 견제해준다 여겼고, 의회 또한 신전을 공격하기에 알맞다 여겼으나 이번 일을 보십시오.”

“…….”

“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한쪽이 무너지면 쉽게 끌려가 버리는 꼴을 보셨잖습니까.”

“…왕이 세 번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투이나가 고개를 틀었다. 그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제가 아는 왕은 오히려 그 나머지 둘을 삼켜버릴 존재였습니다. 레오나도 왕을 의회의 머리 위에 둘 존재라고 표현했어요. 그건 세 번째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루가 님께 제안하는 겁니다.”

투이나가 다시 시선을 맞췄다.

“다른 왕과 달리 루가 님의 직위는 세습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신께서 선택해야 하지요.”

 마디악은 그 나이치고는 놀랄 만큼 열정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신께서는 언제나 올바른 사람을 택하고 버리실 결정권이 있습니다.”

투이나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다른 나라와 달리 저희에게는 직접 행동하고 보고 들으실 수 있는, 현신할 수 있는 아르힘 님이 있습니다.”

아르힘이 있는 한 루가는 투이나가 내내 걱정해온 것처럼, 루가의 자격이 있는 자답게 굴어야 했다.

“그러니 의회와 신전을 견제하면서도, 그들이 아닌 신을 따르시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마디악은 투이나에게 독립을 제안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왜냐하면 마디악은 투이나가 신전에 실망했다는 것까지 꿰뚫어보고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그녀의 편이 아니었던 의회도, 보호해주었으나 믿음은 주지 않았던 신전도.

아르힘보다는 자신이 우선이었다.

투이나의 얼굴 위로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마디악은 노련한 눈썰미로 그것을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자신이 던진 말이 언제쯤 되돌아올까 재어 보았다.

마침내 투이나가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썩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으나 마디악은 예의를 차리고 물러났다.

적어도 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그녀가 보인 배려는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나은 수준이었다.

아르파와 아르힘의 충돌로 트라우마가 생겨 몸이 다 나은 다음에도 덜덜 떨며 다니는 시종들, 세뇌 마법의 여파로 의심만 잔뜩 늘어난 사제들보다는.

투이나는 얼굴을 쓸어내린 다음 지팡이를 짚고 나가는 마디악을 부축했다.

문을 열자 기다리고 있던 호위들과 시종들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마디악이 의원이 아니었기에 이 만남은 비공식적으로, 둘이서만 만날 수 있었다.

물론 마디악이 도저히 누구를 공격할 체력이 없다는 사실도 한몫했지만.

나이 든 자라도 충분히 암살자가 될 가능성이 있어 혼자 걱정한 라카인이 무사히 나온 투이나의 모습에 조용히 안도 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무사하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라카인은 안타까움을 삼키며 마디악을 만나기 전보다 기력이 없어진 투이나를 살폈다.

“따듯한 수건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피곤하지는 않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약간 늦게 대답하긴 했지만 투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카인은 식사량이 줄어 부쩍 마른 그녀의 목덜미에 애가 달았다.

“식사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보다 이리 들어와요.”

투이나가 살짝 손짓했다. 시종들이 슬그머니 든 고개를 피하자 쓰게 덧붙였다.

“호위분들만요.”

투이나와 시종들은 서로를 껄끄러워했다.

투이나는 그들에게 미안해서, 시종들은 또 무서운 일을 겪을까 봐 두려워서였다.

그래서 다른 때보다도 호위들을 많이 찾았지만, 호위들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투이나가 의지할 사람이 이제 그들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투이나는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그리고 라카인은 그녀가 그들마저 붙잡지 않을까 봐 죽도록 무서웠다.

투이나가 뒷덜미를 주물렀다.

닳아버린 신경으로 둔한 자극이 전해져왔다.

요새 투이나의 신경은 멀쩡할 날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에게 몰려와 답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 같았다.

그나마 편안한 시간은 호위들과 함께 있을 때였다. 그들끼리만 있을 시간이 적다는 게 유일한 흠이지만.

습관처럼 목을 주무르는 투이나를 본 라카인이 대신 목덜미로 손을 가져갔다.

따듯한 손이 닿는 걸 느낀 투이나는 그대로 근육을 풀도록 내버려두는 대신 그의 손바닥을 눈앞으로 가져왔다.

“많이 아물었네요.”

투이나가 걱정스런 눈길로 연한 살가죽을 문질렀다.

라카인은 잠깐 곤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예.”

“여러분도 손 한 쪽씩 주세요.”

숙제 검사를 하듯이 투이나가 호루니와 스카치의 손바닥을 각각 확인했다.

얌전하게 새겨진 얼룩은 투이나가 누를 때마다 꾹꾹 살 안으로 들어갔다.

투이나가 한숨을 쉬었다.

“휴우….”

“저희 진짜 괜찮습니다.”

“속상해서 그러죠.”

투이나는 하루가 지날 때마다 꼬박꼬박 호위들의 병을 확인했다.

얼룩을 잘라낸 라카인에게 사제들의 치유가 통하지 않았으니 여전히 병에 걸려 있는 건 확실했다.

호위들은 스스로 병을 가져갔으니 그런 투이나를 말리기도 애매한 처지였다.

그나마 유일하게 라카인만 꿋꿋하게 투이나는 투이나의 걱정만 해야 된다고 요구할 정도였다.

“루가 님. 아르힘께 가셔야 합니다.”

투이나는 얌전히 손을 올려놓은 라카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잖아요, 라카인.”

아르힘은 베인에게서 빠져나온 뒤로 만남을 거절하고 있었다.

어지러운 마음을 품고 투이나가 아르힘을 찾아갔을 때 성소까지 가는 길은 비어 있었지만, 정작 흰 벽에 다다른 뒤에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문이 없는 종탑은 허락이 없으면 들어갈 수가 없었다.

투이나는 아르힘도 베인의 몸에 갇혀있는 동안 상당한 충격을 받았으리라 생각하고 방문을 멈췄으나, 호위들은 그것을 좌시하지 못했다.

“병의 위중함으로 따지면 루가 님이 더 심각합니다. 어찌하여 치료해주지 않고 버티시는 겁니까.”

“정말 괜찮은걸요.”

무심코 대답한 투이나가 호위들의 부리부리한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어쩌다 보니 똑같은 대답을 하고 만 것이다.

호루니와 스카차가 번갈아 말했다.

“루가 님은 아르힘 님이 아끼시는 분이잖아요. 찾아가 부탁드려도 개의치 않으실 거예요.”

“맞습니다. 저희는 이제 막 시작된 병이지만 루가 님은 더 놔둘 수 없을 지경이란 말입니다.”

‘글쎄, 정말 그럴까요.’

투이나는 얼룩 병에 걸린 사람들이 흔히 시달리는 정신 질환이나 가려움, 얼룩을 없애버리고자 하는 충동이 없었다.

잠시 끊겼다고 해도 아르힘의 치료를 받던 몸이었으니.

‘오히려 라카인이 더 심각해 보이는걸.’

아무리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지만 스스로 살을 잘라 얼룩을 떼어낸다는 발상은 얼룩 병에서도 심각한 단계에 속하는 증상이었다.

때문에 투이나는 다른 일을 하다가도 계속 라카인을 곁눈질하게 되었고, 그가 시야 안에 없으면 불안해졌다.

한때 정말로 소중했던 사람을 잃고 나니 더 이상 누군가를 잃기가 무서웠다.

라카인도 투이나가 계속 그를 신경 쓴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금세 이성적인 호감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이대로 투이나가 자신에게 관심을 쏟는 상황을 남몰래 마음에 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랑스레 상처를 내보이고, 조금만 더 만져달라, 안아 달라, 그렇게 응석을 부리며 자기를 한 번만 더 보아달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라카인은 그것을 포기했다. 그것은 그가 받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주고 싶은 일이었으므로.

지금도 아낌없이 퍼줄 준비가 되어 있는 강둑을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투이나에게 닿지 못할 거라면 굳이 괴로움을 더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라카인은 쏟아지는 폭포에서 어렵게 손바닥으로 물을 받아 웅덩이로 옮기는 사람처럼 애정을 약간만 떠냈다.

“아르힘은 분명 루가 님을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분에게 가는 길을 망설이지 마십시오.”

제발 치료를 받으러 가라는 뜻이다.

투이나는 올곧게 다가오는 라카인의 말에 가슴이 시큰거렸지만, 차마 그러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르힘이 치료를 원했다면 진작 투이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는 방문을 거절하는 아르힘의 뜻을 헤아려주고 있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나 라카인과 호위들의 말을 듣고 있다 보면, 정말 저대로 아르힘을 놔둬도 괜찮은지 의문이 생겨났다.

정말 제대로 된 루가였다면 이런 고민 없이도 신의 뜻을 완벽하게 알았을 텐데.

투이나가 그 대신 마디악과 있었던 얘기를 꺼내려는 순간, 보라색 마법진이 번뜩이더니 시드룬의 머리가 허공에서 튀어나왔다.

“악!”

“깜짝이야!”

라카인이 재빨리 그녀의 앞을 막아선 동작과 달리 시드룬은 평소처럼 태평한 얼굴로 머리를 까딱였다.

“다행히 당신이 있군요. 평소에 나오던 곳이 아니라 틀린 줄 알았는데.”

잠깐 자신이 시드룬을 불렀나 혼란스러워하던 투이나가 곧 정신을 차렸다.

“대체 여긴 무슨 일이에요?”

“이것저것 들은 것이 있습니다.”

시드룬은 마법진에서 빠져나오려는 듯이 몸을 틀었다.

그러나 평소보다 작게 열린 마법진은 쉽게 그의 어깨를 빠져나가게 두지 않았다.

결국 그냥 마법진에 끼인 채로 시드룬이 말했다.

“아르힘이 풀려났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래요.”

“아르힘 님 때문에 그 꼴로 공중에 걸려있는 겁니까?” 

스카차가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드룬이 짙은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풀려난 다음 아르힘의 경계심이 올라갔는지 평소보다 신전에 쳐진 힘이 강하군요.”

엄청나게 불편해 보이는 꼬락서니에도 술술 이야기하는 시드룬을 보자 긴장이 저절로 풀렸다.

투이나는 라카인의 뒤에서 살짝 걸어 나왔다.

“그동안 열심히 애써줬는데 미안해요.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뜻밖에도 시드룬은 위로 비슷하게 들리는 말을 꺼내놓았다.

“모하세스가 아르힘을 꺼낼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어…… 잘 알고 있네요? 그것도 이것저것 들은 이야기인가요?”

“본인한테서 듣고 오는 길입니다.”

“네?”

아무렇지도 않게 꺼낸 말에 투이나의 눈만 휘둥그레졌다.

“샨이 시드룬을 만나줬다고요?”

‘그럴 사람이 아닌데?’

평소에 마법사라고 실컷 멸시하던 사람이 시드룬에게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주었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시드룬은 멀뚱멀뚱하게 눈을 깜박이더니 덧붙였다.

“정확히는 크로퍼드를 확인하러 갔을 때 마주쳤습니다. 아마 지금도 거기 있을 겁니다.”

뭐?

“잠, 잠깐만요. 샨이 지금 베인 옆에 있다고요?”

시드룬이 직접 보라는 듯 마법진을 하나 새로 열었다.

이번에도 좌표가 빗나갈 줄 알았는지 꽤 집중한 얼굴이었다.

다행히 마법진은 정확한 곳으로 연결되었다.

투이나는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누워있는 베인과 샨의 옆모습이 마법진 너머로 나타나는 걸 바라보았다.

‘세상에, 누가 막지도 않은 거야?’

하긴 요즘 샨의 앞을 가로막을 만큼 대담한 자는 모두 사라진 뒤였다.

투이나는 심장마비가 올 것 같은 기분으로 베인을 내려다보는 샨을 쳐다보았다.

꼭 죽이려는 것처럼 삐죽이 올라간 입매가 더욱 눈에 박혔다.

투이나가 간신히 목소리를 높였다.

“거, 거기서 뭐하는 거예요?”

샨이 바로 고개를 돌렸다.

인기척도 없이 어떻게 나타났냐는 경계심 어린 얼굴이 투이나를 보자마자 바로 찌푸려졌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루가.”

샨이 성큼성큼 마법진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겁도 없이 마법진 너머로 상체를 내밀었다.

“늘 이런 식으로 마법사와 밀회하고 있던 건가?”

비아냥거리던 샨이 곧 뒤쪽 마법진에 끼어있는 시드룬을 발견했다.

찌푸려져 있던 그의 미간에 더더욱 골이 파였다.

“저치는 왜 또 저러고 있고?”

시드룬은 고개만 까딱였다.

투이나는 샨의 머리가 시드룬처럼 신전 안을 헤집어보기 전에 다가갔다.

“지금 건너갈게요.”

비키라는 뜻으로 한 소리였는데 샨은 투이나를 흘끗 돌아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잡아줄 테니 건너와라.”

그가 보이는 친절에 머리가 더 이상해질 것 같았다.

투이나는 의아함으로 터져버릴 것 같은 눈으로 샨을 바라보았지만, 샨은 막무가내로 그녀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당연히 투이나가 넘어가자 호위들도 따라갔지만, 샨은 투이나만 넘어오면 되었다는 듯 뒤따라오는 일행은 신경 쓰지 않았다.

베인이 누워있는 곳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황금빛 햇빛에 떠다니는 솜털마저 자취를 감춘 듯 했다.

샨은 투이나를 이쪽으로 데려와 놓고는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는 말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투이나마저 쉽게 질문을 꺼내지 못했다.

고요하게 누워있는 베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녀는 침묵을 지키게 되었으니까.

‘잘 있었나요, 베인.’

속으로 몰래 하는 인사만으로도 버거웠다.

당신을 반드시 깨워주겠다는 말은 마음으로라도 그릴 수 없었다.

샨은 베인을 응시하는 투이나를 내려다보다가 불쑥 말했다.

“내가 너에게 주었던 소원이 왜 금기인지 알고 있나.”

“……?”

투이나가 묻는 듯한 시선을 올려보냈다. 샨도 베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르힘에게 답을 얻어내는 그 의식은 완전히 신에게 영혼이 잠식당할 위험성이 있어 금기로 전해지던 것이다.”

투이나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그렇다면 샨이 그 의식을 요청한 투이나에게 미친 듯이 화를 냈던 것도 이해가 갔다.

나는, 으로 시작하는 질문들은 모두 자신을 잃고 아르파가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뜻이니까.

상상 이상의 대가에 투이나의 가슴이 조여들었다.

“미, 미안해요. 그렇게 심각한 대가를 치를 줄 알았더라면 요구하지 않았을 텐데.”

샨의 입술이 비틀렸다.

“내가 곧 아르파니 사과할 이유가 있나?”

자존심이 넘치는 문장이었으나 이제야 거기에 깔린 자조가 느껴졌다.

“어차피 신의 힘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 때부터 그 정도 대가를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하지만 이 어리석은 놈은 무엇을 바치고 무엇을 얻을 줄도 모르는 도박에 자신을 내던졌지.”

투이나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아무리 샨이 베인과 같은 일을 한 자라고 해도 함부로 말하는 표현에 그녀가 대신 상처를 받고 말았다.

지금 분노할 사람은 듣지 못하고 말할 수 없으니까.

오래도록 투이나의 반응을 살피던 샨이 가만히 입술을 열었다.

“내가 그를 깨울 방법을 안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나, 루가?”

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투이나의 머리가 홱 쳐들렸다.

샨은 예상했던 그대로 움직이는 투이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흉중에 품고 있던 말을 꺼냈다.

“그 대신 나와 결혼해다오.”

만약 샨이 청혼한다면 전쟁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피가 난무하고 살이 튀는 그런 전투가 아니라, 화려한 종전 후에 보상 협상을 하러 오듯 보물이 오가는 상황일 거라는 뜻이다.

실제로 샨은 보물을 싸들고 아르힘으로 왔다.

자신과 루가의 결혼은 정해져있으니 예물이나 받아가라는 식으로.

구혼기간의 대부분을 빨리 구혼기간을 끝내자는 협박으로 소비한 남자다웠다.

그래서 그가 호언장담하듯이 요구하는 청혼이 아니라, 정말로 결혼을 원하는 사람처럼 말할 줄은 정말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투이나가 말을 잃어버린 동안 샨은 여전히 기이할 정도로 차분했다.

“나와 결혼하면 아르힘을 벗어나 쉴 수 있다. 이곳은 축복받은 땅일지언정 그대 혼자 감당하긴 힘들지.”

샨이 손을 내밀었다.

많은 전장을 헤쳐 나온 자였으며, 언제나 스스럼없이 그녀를 끌어당기는 사람답게. 거리낌이 없었다.

“내가 떠날 수 있게 해주겠다.”

샨이 투이나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그토록 휴식을 원하는 투이나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정확하게 지금 나타나서 그녀를 바깥으로 데려가주겠다니.

호루니는 저도 모르게 라카인을 돌아보았다.

투이나에게 청혼하는 샨을 본 자신의 가슴도 이렇게 불안하게 두방망이질 치는데, 라카인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라카인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달라진 게 없었다.

그는 묵묵히 옛 주인이 지금의 주인에게 청혼하는 걸 지켜보는 듯 했다.

그런데 그녀가 정말 그의 주인이었나?

호루니는 그 자리에 돋아나는 긴장에 침을 삼켰다.

투이나가 라카인을 가진 적이 없으니, 병에 걸린 라카인이 무슨 선택을 할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녀의 추측대로 정말 라카인이 투이나를 좋아한다면…?

라카인은 대답 대신 침묵만을 내세웠다.

반면에 투이나는 겉으로 극심한 동요를 드러내고 있었다.

샨이 모르는 사람처럼 보일 때는 항상 아르파가 끼어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녀가 알았던 사람은 모두 아르파 같았고, 지금 처음으로 샨을 만난 것 같다.

아주 가끔씩만 나타나는 냉정한 푸른 눈의 사내.

샨은 언제나 자신이 붉은 눈을 가진 자와 같다고 주장해왔지만, 이제는 분명하게 서로가 다른 존재임을 알았다.

그러니 샨에게서 정말 제대로 받는 청혼은 지금이 처음일 것이다.

‘어쩌다 샨이 나와 결혼하고 싶어진 거지.’

이제는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살아난 직후만 해도 샨이 아르파라는 사실에는 의심 한 점 끼어들 겨를이 없었는데.

당혹스럽고, 그에게도 위안이 필요한가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손목을 잡고 있는 손가락이 답을 재촉하듯 연한 살을 문질렀다.

적어도 한 가지는 샨과 아르파가 똑같았다.

지독하게 장소를 가리지 않는 것.

베인이 누워있는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하기는 싫었다.

“…….”

투이나가 손을 잡아 뺐다.

샨의 미간이 살짝 우그러들었지만, 그녀의 시선이 베인을 향한 걸 보고는 이해했다.

“안심하라. 나의 마음은 느긋하니까.”

“느긋하게 기다릴 필요 없어요.”

“하지만 단번에 거절할 일도 아니지.”

샨은 일부러 날카로운 눈초리로 베인을 겨냥했다.

의외로 그는 베인을 사랑한다면 제안을 받아들여라, 같은 말 대신 관대함을 보였다.

자신의 입으로 베인이 한때 투이나의 연인이었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대에게 제안을 하는 거야. 쉬어야만 할 정당한 권리와 함께.”

투이나가 밭은 헛웃음을 내보냈다.

“평생을 쉬라는 말인가요?”

“나와 함께라면 그래도 좋지.”

샨이 비죽 웃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바빠질 수도 있다. 우리가 결혼하더라도 아르힘은 그대의 몫으로 남겨둘 테니 필요할 때마다 찾아가면 그만이다.”

샨은 얼룩을 가리지 않은 투이나에게 손을 뻗었다.

그동안 아르파가 갖은 욕설을 퍼부은 몰골이지만, 실은 그런 꼴이라도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투이나라면 제법 괜찮았다.

아니, 늘 답답하게 둘러쓰고 있던 두건을 벗기고 머리를 풀어헤친 모습이 훨씬 더 나았다.

회색 얼룩들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샨은 손가락에 감기는 투이나의 머리카락을 한 번 쥐었다.

“그대에게도 기댈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나.”

투이나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즐기며 샨이 스르륵 손가락을 빼냈다.

결혼만 하면 실컷 이 감촉을 즐길 수 있다.

샨은 여유롭게 물러났다.

“잘 생각해 보라.”

만나는 사람들마다 투이나에게 하나씩 무언가를 떠넘기고 갔다.

이제는 그것이 넘기는 게 아니라 빼앗는 것이라는 게 보인다.

투이나의 머릿속을 차지하려고 아웅다웅하는 사람들이 내지르는 소리에 귀가 멍멍해지는 듯 했다.

‘나 좀 내버려둬.’

영혼의 세계에서 떠들던 속삭임도 이에는 비하지 못했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생각할 게 많은데.’

투이나가 머릿속에서 왁왁거리는 요구들을 진정시키려 애쓰는 사이, 엉뚱한 곳에서 머릿속을 비워주었다.

“이야기가 다 끝났다면 나 좀 밀어주겠습니까.”

시드룬이 여전히 마법진에 끼인 채로 말했다.

바보 같은 꼬락서니에 투이나도 그만 허, 하고 긴장이 풀려버렸다.

‘그래. 한 번에 하나씩만 해도 모자라지.’

호위들이 떨떠름한 눈길로 달려가 시드룬의 어깨를 미는 걸 보니 어쩐지 모든 일이 다 바보 같다.

* * *

“그냥 결혼해 버려.”

수리시가 땅콩을 씹으며 말했다.

시드룬이 이것저것 들은 게 무엇인지 듣는 김에 점심을 같이 하게 된 투이나의 표정이 구겨졌다.

말로는 시드룬의 머리통을 마법진에서 빼준 대가라며 식사를 차려주겠다던 수리시는 샨의 청혼이 그저 군침 도는 전채로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뒤에서 물이 끓으며 냄비 뚜껑을 밀어 올리는 소리보다 수리시가 킬킬거리는 소리가 더 컸다.

“아니면 하기 싫다고 뻗대면 되지. 뭐가 그렇게 고민이야?”

“남의 일이라 쉬워 보이는 거예요.”

투이나가 투덜거렸다.

하필 시드룬이 있는 자리에서 샨이 청혼한 바람에 자연스럽게 수리시의 귀에도 들어가고 말았다.

다른 일로 마법사의 마을에 왔을 때는 서로 경계하기 바빴지만 가정집에 음식을 차려놓고도 긴장하긴 어려운 법이다.

수리시의 집에 둘러앉은 호위들도 그런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수리시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음식을 차려놨던 것이다.

“우리가 올 줄 알았어요?”

“아니. 그냥 하는 김에 많이 했지.”

수리시가 덜그덕거리며 감자 그릇을 밀어주었다.

가만뒀다가는 쿠즈가 숟가락으로 모두 으깨버릴 기세였다.

바즈아둡이 칭얼거리는 쿠즈를 껴안고 으깨놓은 감자를 먹이려고 드는 사이 수리시가 계속 말했다.

“전부터 궁금한 거지만 네가 루간데 뭐 이렇게 못하는 게 많아?”

“제 마음대로 다 했으면 신이게요.”

“오호, 불경한 발언. 좋아. 너도 질릴 때가 됐지.”

투이나가 홧김에 수리시를 노려보았다.

질릴 때라면 시도 때도 없이 마법사 쪽으로 몰아가려는 장난이 질릴 때가 됐다.

수리시가 숟가락을 빙빙 돌렸다.

“아무튼 이제 아르힘은 구출되었다면서. 그런데도 답이 안 나와?”

“…만나 주질 않으시는걸요.”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한때 영혼이었던 신이 살아있는 영혼에 들어갔으니 분명히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얌전히 음식들을 보고 있던 시드룬이 끼어들었다.

“많은 육체를 가지고 한 실험에도 불구하고 영혼끼리는 서로 섞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신이 영혼의 일부를 받아갔다면 그 자체가 어떤 다른 것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신으로서 기능하게 하는 부분이 영향을 받았다면….”

“긴 설명 참 고맙다, 시드룬. 먹을 땐 자제하자.”

수리시가 말을 끊었다.

그래도 호위들은 이미 마법사들이 무슨 실험을 했는지 상상하고 입맛이 날아간 표정을 지었다.

특히나 호루니는 제대로 먹는 시늉도 하지 못했는데, 스카차가 눈치를 보는 사이 그녀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루가 님. 정말로 결혼하실 거예요?”

투이나는 간신히 생겨난 휴식에서 현실로 다시 돌아왔다.

그래도 호루니의 질문이라 보다 가벼워질 순 있었다.

“해야겠죠.”

그게 아르힘 님의 뜻이니까.

무심코 인상을 쓴 투이나가 덧붙였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어떤 게 옳은 길인지.”

“옳은 게 뭐가 중요해. 네가 만족하는 게 중요하지.”

“수리시는 제가 결혼했으면 좋겠나요?”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어.”

대충 대답하던 수리시가 빤히 쳐다보는 시드룬의 시선에 정정했다.

“아니, 시드룬이랑 하면 좋겠지. 아님 말고. 다른 사람도 있으니…….”

수리시의 말끝이 뭐가 켕기는 사람처럼 흐려졌다.

“어차피 세 번째 시험을 치러야 누구랑 결혼할지 결정 나는 거 아냐? 여기서 이러쿵저러쿵 해봤자 소용없잖아.”

“그 시험을 내는 게 전데요.”

투이나가 맑은 눈으로 지적하자 수리시가 괜히 땅콩 껍질만 와득와득 씹었다.

가만히 쿠즈를 어르고 있던 바즈아둡이 한마디 했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게 제일 좋지 않겠어요?”

“…….”

분위기가 아까보다 더 싸해졌다.

결혼보다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면 더 처참한 지경이라니.

얽히고설킨 구혼자들의 관계를 떠올린 투이나가 애써 평상심을 유지했다.

“그럼…… 좋겠죠.”

문제는 이제 누구를 생각해도 애정을 떠올릴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 때 묵묵히 접시만 내려다보고 있던 라카인이 말했다.

“무엇이든 루가 님이 원하시는 결정이 옳은 결정입니다.”

드물게도 그가 눈을 맞추지 않고 말했다.

“아무도 그 결정에 이의를 달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라카인이 고개를 꾸벅였다.

잠깐 식탁에 정적이 흘렀다.

호루니가 갑자기 음식을 퍽퍽 퍼먹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식탁에 다시 수리시가 목소리를 풀어놓았다.

“어쨌든 그래. 네 결정이지. 아르힘이 널 예뻐하니 무슨 결정이든 일단 들어는 주지 않겠어?”

그나마 희망적인 관측이었다.

시드룬이 말을 보탰다.

“만약 아르힘에게 문제가 생겼더라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영혼의 세계요?”

“예. 그리고 크로퍼드를 살펴볼 수도 있겠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뒤따라온 말에 투이나의 눈이 커졌다.

“베인과 아르힘 님이 연결되었다는 소리인가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드룬은 오히려 왜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눈을 깜박였다.

“모하세스가 크로퍼드를 깨울 방법을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시드룬은 일 더하기 일은 이라는 투로 설명했다.

“크로퍼드가 죽지도 살지도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신과 접촉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모하세스는 오랜 세월 동안 수호신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런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쪽도 왕이 죽어야만 신이 몸을 옮겨갈 수 있다면서?”

흥미를 보인 수리시가 끼어들었다. 시드룬이 수북히 쌓인 완두콩만 내려다보았다.

“자세한 방법은 나도 모른다. 하지만 거래의 수단으로 삼은 걸 봐서 모하세스가 신과 연결된 영혼을 어떤 식으로 다뤄야 할지 아는 건 분명해.”

“…그렇겠지. 만약 그의 영혼이 정말 신과 상관없어졌다면 우리가 영혼의 세계에서 데려올 수 있었을 테니까.”

쨍그랑!

투이나의 손에서 떨어진 숟가락이 접시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투이나는 자신이 힘이 풀렸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수리시는 잠깐 시드룬에게 닿아있던 시선을 떼어내 투이나에게 보냈는데, 어딘가 섬뜩하게 보였다.

“몸은 살아있다며?”

“그게 아니라, 영혼의 세계에서 데려오면 베인이 다시 눈을 뜰 수 있다는 뜻이에요?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살아있을 때와 똑같은 게 아니라 살아나는 거지.”

수리시가 접시에 놓인 고기를 푹 찔렀다.

“우리가 왜 그 고생을 해가며 영혼의 세계에 집착한다고 생각해? 고작 시드룬이 기억 좀 잃어버렸다고?”

수리시가 피식 웃었다.

“거기엔 영혼들로 가득 찼어. 왜 수호신이 자기들끼리만 그곳에 들락거리겠어? 영혼은 힘이고, 다루는 방법만 알아낸다면 사람 하나 살리고 죽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영원히 죽지 않거나, 직접 신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런….”

“신을 모독하지 마십시오!”

스카차가 탁자를 짚으며 일어났다.

“사람들을 위해 힘을 쓰시는 분과 뻔뻔하게 탐내는 자신을 어찌 비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너희들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수리시가 예민하게 받아쳤다.

“루가야말로 되살아난 장본인이잖아? 신이 하면 괜찮고 사람이 하면 안 된다는 거냐?”

만만치 않게 험악해진 얼굴로 수리시가 으르렁거렸다.

“이래서 신을 믿는 종자들을 싫어하는 거야. 자기 스스로 영혼을 가질 배짱도 없는 것들. 식사 대신 바깥에 있는 다른 마법사들에게 던져줄 걸 그랬어.”

“이…!”

“그렇게까지 해서 뭘 하고 싶은 거죠?”

당장이라도 칼을 빼 들려던 스카차를 제지한 건 투이나였다.

그녀도 일어서 있었다. 힘이 빠져나간 어깨와 달리 서 있는 자세는 올곧았다.

“영혼을 얻고 힘을 얻으면 그다음에는요? 당신이 신이 되고 영원히 무엇을 할 건데요?”

“…….”

가장 통렬하게 비난할 줄 알았던 투이나가 질문을 던지자 오히려 수리시는 더 못 견뎌 했다.

그녀는 차라리 화를 내라는 듯 찡그렸다가, 무슨 생각인지 말해보라는 듯 이를 내보였다가, 내내 담담한 투이나를 보더니 결국 고개를 틀었다.

“무슨 거창한 이유가 필요해? 그냥 살고 싶은 거야.”

수리시는 쿠즈를 껴안은 바즈아둡을 응시했다.

소란에 놀란 쿠즈가 그의 품에 파고들듯이 안겨 있었다.

“어떤 문제도 없이.”

“…….”

투이나는 여전히 선 채로 수리시를 바라보았다.

라카인은 그녀의 눈에 연민이 스쳐 지나가는 걸 보았다.

투이나는 때때로 믿음보다도 다른 걸 택할 때가 있었다.

이번에도 그러할까 싶어 숨을 죽였지만, 잠시 후 투이나의 입에선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당신을 위해 기도할게요.”

잠깐 눈을 감았던 투이나는 아르힘의 기도문을 읊었다.

곧장 거부감을 드러냈던 수리시는 잔잔히 이어지는 기도문을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고, 결국 뭐라고 하는 걸 포기하고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이어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호루니와 스카차는 외경심이 섞인 얼굴로 그녀를 보다가 같은 기도문을 입속으로 따라 외웠다.

시드룬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쿠즈는 기도문이 일종의 노래라고 생각했는지 따라 흥얼거렸는데, 그러자마자 시작하자 수리시가 고갯짓으로 말린 것만 빼면 그래도 평화롭게 끝났다고 볼 수 있겠다.

그곳에서 라카인은 자신에게 다른 기도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투이나에게만 바칠 수 있는 문장이.

* * *

시드룬은 굶주린 위장에 마땅한 대가를 채우고 나자 곧장 투이나를 불러냈다.

“연구는 거의 끝에 다다랐습니다. 곧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도 끝날 겁니다.”

“아, 잘됐네요.”

투이나가 의욕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이제 저와 결혼할 생각이 사라졌나요?”

“그러길 원합니까?”

“꼭 시드룬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지금은 아무와도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못 하겠어요.”

물끄러미 투이나를 보던 시드룬이 화약고에 횃불을 던지듯 말했다.

“내가 당신과 결혼해서 받으려고 했던 것은 아이였습니다.”

푸웁.

갑자기 사레가 들린 투이나가 미친 듯이 기침하기 시작했다.

눈이 왕방울만해진 호루니가 뒷목을 잡는 사이 라카인이 서둘러 투이나의 등을 두드렸다.

그도 눈빛이 영 좋지 않았다.

간신히 캑캑거리던 투이나가 되물었다.

“아, 아이를요?”

“그렇습니다.”

시드룬은 미쳤냐는 시선 속에서도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 덕분에 영혼의 세계를 열 수는 있었지만, 그곳의 영혼에는 손댈 수는 없었습니다.”

“그, 그래서요?”

“마법으로 영혼을 섞을 수 없으니 육체적인 결합을 시도해볼 생각이었습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것 같지만 투이나가 간신히 이성을 다잡았다.

“그렇지만 영혼은 자식에게 물려주는 게 아니잖아요?”

“단언할 수 없습니다.”

시드룬이 여전히 평온하게 대답했다.

“마법사의 자식은 마법을 쓰기 쉽습니다. 신도들의 자식은 신을 믿기 쉽습니다. 영혼도 육체의 일부인 이상, 아이가 만들어질 때 영혼이 전해진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걸 저와 결혼해서 실험해볼 작정이었다고요?”

“그렇습니다.”

지금 이 순간 시드룬과 결혼하는 선택지가 깡그리 지워졌다. 아주 흔적도 없이.

투이나가 호흡을 가라앉혔다.

“저한테 그 얘기를 안 하고 청혼한 건 현명한 짓이었네요. 왜 이제 와서 말할 생각이 든 거예요?”

“영혼을 섞는 방법이 아이를 통하지 않더라도 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시드룬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크로퍼드의 영혼이 어떻게 아르힘과 얽혔는지 확인한다면, 내가 영혼의 세계에 품고 있던 마지막 의문이 해결됩니다.”

“마지막이라면…….”

시드룬은 그때까지 투이나의 도움을 받아 가며 얼기설기 짜 모았던 부분이 갑자기 딱 하나의 빈자리만 남겨진 것처럼 굴었다.

그래서 조금 다르게 말했다.

“내게는 영혼의 세계에서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당신도 보았을 겁니다.”

투이나는 골똘히 시드룬을 응시하면서 그와 꼭 같은 색이었던 영혼의 세계를 떠올렸다.

그리고 영혼의 세계 한가운데 불길하게 자리 잡고 있던 검은 공허도.

그것은 영혼의 세계의 다른 속삭임들처럼 작은 목소리나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바깥세상에서 온 어떤 예측이 잠시 투이나를 스쳤다.

“아르파 신이 말하던 게 그건가요?”

절대 마법사의 힘으로는 열 수 없다던 문.

시드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과 함께 간 영혼의 세계도 접근하기는 어려우나, 모든 평범한 인간들은 단 한 번 그곳에 갈 기회를 얻습니다.”

죽었을 때다.

“그러나 진정한 힘은 그 너머에 있습니다. 내가 변이한 것도 그것에 닿았을 때 일어난 일일 겁니다.”

시드룬은 영혼의 세계에 다녀온 뒤 비늘이 돋아나 더 이상 사람의 형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시드룬이 그토록 심하게 변이되었는데 벌써 몇 번이고 영혼의 세계에 다녀온 투이나가 멀쩡하다는 게 말이 안 된다.

결국 논리적으로 따져 봐도 진짜 영혼의 세계는 연보랏빛 몽롱한 세계 너머에 있다는 뜻이다.

“당신과 함께 존재하지 않는 시간 축을 옮겨 다녔을 때, 나는 그 끝마다 모두 검은 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전 그런 걸 본 기억이 없는걸요.”

“마법을 쓴 당사자만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니 못 보는 게 당연합니다.”

시드룬이 말했다.

“평범한 마법을 쓸 때도 나는 마법이 이루어지는 공간 너머로 영혼의 세계의 존재를 지각할 수 있습니다. 볼 수도 없고, 보여줄 수도 없지만.”

“하지만 그게 제가 죽었던 시간을 돌아다니면서 느낌이 바뀌었다는 거군요. 영혼의 세계의 연보랏빛이 아니라, 검은 문으로.”

“예.”

시드룬이 매끄러운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조금 더 참아주면 됩니다.”

스스럼없이 자신을 참아 달라 부탁하는 시드룬에게 투이나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알겠어요.”

투이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꼬리에 달라붙은 생각들을 머리 한쪽으로 밀어두었다.

그리고는 일부러 가볍게 물었다.

“이것저것 들었다더니 정말 수리시와 꽤 열심히 했나 보네요. 이렇게 빨리 연구가 진행될 줄이야.”

그러자 생각지도 못하게 시드룬의 표정이 굳이 분류하자면 이상야릇한 쪽으로 바뀌었다.

“수리시에게 들은 게 아닙니다.”

“그럼요?”

“…….”

시드룬이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다물린 입술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사람처럼 꾸물거렸다.

그러더니 그냥 마법진을 열어버렸다.

“신전으로 돌아가 있는 게 좋겠습니다. 언제 또 정확한 위치를 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군요.”

“지금 아주 잘 열리는 것 같은데요.”

투이나는 정확히 자신의 방안으로 열린 마법진을 보며 지적했다.

“…….”

시드룬은 이제 와서 잘 되기냐? 하는 식으로 눈썹을 밀어 올리지는 않았다.

그냥 무표정한 얼굴로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축객령을 발휘하기만 했다.

어설프게 손으로 마법진을 가리키는 시드룬을 보며 투이나는 그가 또 뭘 숨기고 있을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숨기려고 해도 잘하지도 못해버리네.’

무슨 비밀이든 조만간 들킬 것 같다.

‘그래도 시드룬을 만나는 동안은 아르힘 님 걱정을 하나도 안 했어. 그거 하나는 편한 것 같아.’

이게 그나마 텅 빈 가슴에 부는 유일한 위안이라니.

투이나는 씁쓸하게 마법진을 넘었다.

* * *

구혼자 한 명이 쓰러지고 또 다른 구혼자 한 명이 청혼해도 시간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수확제가 하루 앞까지 성큼 다가왔다.

미리 주문해뒀던 옷과 장식이 산더미처럼 방으로 운반되었다.

시종들이 다채로운 색채에 군침을 삼켰다.

“그러고 보면 루가 님이 현명한 결정을 하신 것 같아요.”

곱게 개어진 옷을 만져보고 있던 투이나가 영문 모르고 고개를 들었다.

“지금 와서 너무 화려한 복장이었으면 아무리 수확제라도 빈축을 샀을 테니까요.”

“맞아요. 그때는 너무 어둡다 싶었는데 이제 보니 오히려 딱 맞다 싶어요.”

“적당히 엄숙하고, 위엄 있고.”

시종들이 입을 모아 칭찬했다. 애써 분위기를 살려보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화려한 장식과 열매들이 함께 왔다지만 새까만 네 벌의 예복은 상복이라는 인상을 감출 수 없었다.

‘베인이 완전히 죽었다는 소문이 나기 좋겠는걸.’

투이나는 부드럽게 감기는 검은 천을 매만졌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주문한 옷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옷에 어울리는 꼴이 되어버렸다.

본디 수확제는 일할 거 다 일하고 실컷 놀고 먹자는 의미가 강했으나, 요 며칠 심란한 일이 많았다 보니 수도 전체가 마냥 흥겹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신전과 의회의 향방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니, 이럴 때일수록 더더욱 개의치 않고 축제를 주관해 변치 않는 아르힘의 믿음을 보여야 한다고 사제들이 신신당부했다.

사제들은 레오나가 잡혀간 뒤로 분개하긴 했지만, 그들에게까지 화가 미치지 않는다는 걸 알고는 금세 시치미를 떼고 평소처럼 굴었다.

물론 그런 사제들도 끝으로 가면 힘없는 목소리로 아르힘 님의 소식은 아직이냐고 묻긴 했지만.

투이나도 매일 신전의 성소로 찾아가는 걸 빼놓지 않았지만 여전히 종탑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사제들은 이제 서품식이나 수확제의 축복은 아무래도 좋으니 아르힘이 무사한지나 알았으면 좋겠다고 한탄을 해댔다.

투이나도 아르힘을 걱정했으나, 그녀에게는 그녀만의 문제가 따로 있었다.

긴 머리카락을 감아쥔 투이나가 시종들이 옷을 둘러주도록 바르게 섰다.

“이번에는 입는 법이 꽤 복잡하네요?”

“새로 짠 천이 워낙 부드러워서 복식을 바꿔봤다고 하더라고요.”

“저희도 당일날 실수하지 않으려고 미리 연습해보는 거예요.”

본래 아르힘의 복식은 어깨로 걸쳐 허리띠로 묶어 고정하는 방식이 주였으나 이번 복장은 머리에서부터 휘감아 내려오는 식이었다.

머리를 감싸는 두건부터 살짝 드러난 등 밑으로 하나의 천이 깊이 감을 남기며 떨어지는 방식이었다.

낯설긴 하지만 이 위에 얹힐 장신구를 생각하면 오히려 오목하게 드러난 부분이 한 층 더 시선을 끌 것이다.

“열매는 살짝 덜 익었지만 내일까지 놔두면 딱 알맞은 색으로 변할 거예요.”

“지금도 색이 예쁜걸요.”

시종들은 화관 식으로 머리에 드리워보았다가, 허리 쪽에 새로이 달아보았다가 하는 식으로 이리저리 재어보더니 만족해서 물러났다.

“이대로가 가장 좋겠어요.”

“보석만 달면 되겠는걸요.”

“앗. 그건 제가 일부러 신전 보관실에 신청해두지 않았어요. 이대로도 충분해요.”

일부러 보석을 쓰지 않을 생각으로 언급을 하지 않았던 건데, 시종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저어… 루가 님. 그런데 꼭 신전의 보물이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요?”

“예?”

“구혼자들이 보내 온 선물이 있습니다.”

투이나의 눈매가 살짝 찡그려졌다.

“지금까지 받은 건 전부 보관실로 보내지 않았나요?”

“예.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새로 도착한 물건이거든요.”

시종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천으로 덮어두었던 상자를 끌고 왔다.

투이나가 미리 보면 창고로 보낼 줄 알고 감춰둔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 샨 아르파 모하세스가 보낸 장식입니다.”

흑단으로 만든 상자를 열자 눈이 부신 광채가 터져 나왔다.

태양을 꼭 닮은 황금 테두리와 아기 주먹만 한 크기의 새빨간 루비였다.

“머리에 걸 수 있도록 해둔 물건입니다. 색도 워낙 선명해서 지금처럼 까만 두건을 둘렀을 때 더 화려해 보일 거예요.”

시종 하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시종이 은으로 만든 상자를 열었다.

“이건 시드룬이 보낸 물건입니다.”

장식 없이 매끄럽고 길쭉한 은상자에는 육각형으로 세공된 자수정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값비싼 보석은 아니지만 세공이 워낙 잘 된 물건이라 은은한 분위기를 내기 좋아 보여요.”

“대체 시드룬이 이걸 언제 보낸 거래요?”

“무도회라고 하니까 공중에서 나타나 툭 떨구고 가던데요?”

“한참 된 일이에요. 아르힘 님이 풀려나시기도 전일걸요? 발견한 사제가 이때 꼭 참석해달라는 일정을 벽에 붙일 때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수리시가 입김을 불어넣은 게 틀림없었다.

시드룬이 괜히 안 해도 되는 구애 행위를 할 때마다 뒤에서 수리시가 킬킬거리며 놀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떨떠름해진 투이나가 마지막 상자를 바라보았다.

다른 상자보다 눈에 띄게 작았지만, 남은 순서를 생각하면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었다.

“그건…….”

“레오나 크로퍼드가 베인 크로퍼드를 대신해 보낸 물건입니다.”

눈치를 보며 작은 상자를 들고 있던 시종이 달칵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두 개의 에메랄드 반지가 들어있었는데, 그 사이에 작은 종이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투이나가 망설이다가 쪽지를 펼쳤다.

다른 하나는 베인의 손에다 끼우시면 됩니다.

간결한 문장이었지만 투이나의 뱃속이 따끔했다.

구속된 상태에서도 레오나는 여전히 포기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치 베인과 투이나의 결혼을 단념하는 순간 베인까지 완전히 포기하게 될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

이번에는 시종이 어떻게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하는 대신 눈치만 보았다.

보아하니 간신히 재산을 보전하게 된 레오나가 많은 뇌물과 인맥을 동원해서 투이나에게까지 전달한 모양이었다.

시종들은 원래 베인에게 걸었던 사람들이었으니 크게 힘들일 필요도 없었겠고.

‘이걸 전달하려고 다른 구혼자들의 선물을 일부러 감춰두고 있었구나.’

덜렁 베인의 선물만 전달하기엔 그들도 양심에 찔렸던 것이리라.

혹은 왜 보물을 갖고 있냐는 사제들의 의심을 피하지 못했거나.

상자 속에서 반짝이는 에메랄드 반지는 하루 이틀 만에 준비한 예물이 아닌 것처럼 귀물이었다.

작은 흠집마저 없었고, 손톱만큼도 다르지 않을 정도로 똑같이 생긴 쌍둥이 반지였다.

어쩌면 베인이 청혼할 때 쓰려고 준비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투이나는 목에서 꾹꾹 올라오려는 감정을 억눌렀다.

“셋 다 쓰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루가 님…….”

“처음부터 결정한 일입니다.”

낑낑거리는 신음을 내는 시종에게 투이나의 눈빛이 단호해졌다.

하는 수 없이 시종들이 보물들을 도로 닫았다.

투이나는 그들의 눈빛에 일말의 불안함이 깃드는 걸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구혼 기간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

세 사람이 보낸 선물을 모두 거절했다면, 투이나가 아직도 결혼 상대를 정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지금쯤은 결정하셔야 하는데…….”

“쉿.”

투이나도 들었다. 투이나도 알았다.

가지에서 떨어지는 낙엽만큼이나 초조했다.

겨울이 오면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어떤 제안을 받아들이든 여기서 나아가야만 한다.

‘선택해야만 해.’

샨의 제안을 수락하고 결혼해 베인을 되살리고 아르힘을 잠시 떠나 있는 것.

마디악의 제안을 수락해 의회와 신전에서 분리된 왕이 되어 구혼식을 중단하는 것.

그러나 이 조건은 아르힘의 응답이 필수 조건이었기에 확실하진 못했다.

‘게다가 결국 아르힘 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면 잠시 미루는 정도밖에 안 돼.’

차라리 시드룬의 제안을 일단 받아들이고, 베인을 레오나에게 돌려보낸 뒤 아이를 달라는 조건만 거부할 수도 있었다.

일견 끔찍해 보이지만 남은 제안이 레오나의 것이라 시드룬의 제안은 그나마 괜찮게 보일 지경이었다.

베인과 결혼할 수는 없었다. 그가 죽든 살든.

설령 아무 문제 없이 베인이 깨어난다고 해도 투이나는 다시 그를 보기조차 어려웠으니까.

하나같이 수락할 마음이 드는 게 없었다.

투이나가 어두운 표정으로 남은 옷과 신을 신는 걸 본 시종들은 아까 일 때문에 그녀가 화가 난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루가 님은 이만하면 되셨으니 호위분들을 불러올까요?”

“네에! 그래요. 완전히 끝내기 전에 서로 잘 어울리는지 보셔야죠.”

“아아, 네.”

시종들이 급하게 호들갑을 떨며 문을 열었다.

바로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들이 같은 옷 일색으로 들어왔다.

어지러운 고민에 마음을 빼앗겨있던 투이나마저도 잠시 생각하는 걸 잊었다.

한 쌍의 까마귀처럼 매끈하게 차려입은 호루니와 스카차도 놀라웠지만 제일 뒤에서 들어오는 라카인의 변모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별생각 없이 투이나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호위들을 불렀던 시종들마저도 탄성을 삼켰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깔끔하게 머리카락을 잘라낸 라카인은 비로소 훤칠한 이마부터 턱까지 세상에 드러내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아르힘 식으로 새롭게 고쳐 입은 복장은 그가 가진 근육과 힘을 더는 감추지 못했다.

세상에 밤이 있다면 그를 두르기 위해서였고, 낮이 있다면 그의 발길을 밝혀주기 위해서였다.

그때까지 세상에 무언가 빠진 줄도 몰랐던 자리를 비로소 그가 나타남으로서 채우는 듯했다.

그리고 라카인도 자신이 세상에 드러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느 정도는 의도한 일이다.

단 한 번도 앞에 서 보지 않았던 거울 앞에서 그는 오랫동안 자신을 응시했다.

더는 세상에서 은둔할 생각이 사라져 머리카락을 잘라낸 모습은 몹시 낯설었다.

머리카락을 잘라준 스카차와 호루니도 잠깐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어서 그의 자신감은 몹시 하락한 상태였다.

그래도 보고 구역질을 할 얼굴은 아니다.

그 희박한 자기평가가 감히 투이나에게 이 모습을 보여줄 용기를 주었다.

라카인이 등에서 진땀이 솟는 걸 참으며 투이나 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투이나는 시종들과 함께 넋을 빼고 있었다.

마음에 드시나 보다.

라카인이 아주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여파는 따로 서술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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