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해한 구혼자 9권
34.
‘어리석도다, 인간 중의 인간을 알아보지 못해 결국 죽이고 말았구나!’ 신은 탄식했다. 그러나 듣는 자가 없었다.
루가와 구혼자가 무슨 대화를 나눴든 축제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만족해서 돌아갔다.
음식도 충분했고 볼거리도 루가와 구혼자가 넘치도록 제공해주었으니까.
투이나는 혼자 뒤처리를 위해 남았다.
“어쩌다 천장이 무너졌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아르힘 님이 종소리 대신 바위를 보내신 걸까요? 저희를 벌하려고?”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 하시네.’
사제들은 설명 못 할 상황에 괜히 찔려 하며 당혹스러워했다.
“그런 일은 아니니 걱정 마세요.”
“하지만 정확히 루가 님이 있던 자리 아닌가요?”
“불길합니다.”
그 일은 아르힘이 아니라 신을 원하는 죽은 영혼들의 짓이라고 말해버릴까?
아마 더 공포에 질릴 가능성이 컸으므로 투이나는 그냥 살래살래 손짓했다.
“여러분도 기절하셔서 아시겠지만 아르힘 님이 잠깐 성소에서 나오셨을 뿐이에요. 보세요, 아무도 걱정하지 않잖아요.”
사제들이 흥겹게 돌아가는 사람들을 힐끔거렸다. 투이나가 말을 이었다.
“원하던 대로 축제가 잘 마무리되었으니 당분간 쉬는 게 좋겠어요. 모두 다요.”
“…세 번째 시험을 준비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그렇죠.”
투이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두건을 매만졌다.
“이번에는 의회나 사제님들 어느 쪽도 필요 없는 시험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그들은 바로 그래서 무슨 시험인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투이나는 대답하는 대신 억지로 쉬라며 사제들을 쫓아냈다.
하지만 아무리 태연한 척해도 통하지 않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루가 님.”
투이나가 몸을 돌렸다. 호위 세 사람이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투이나는 비로소 피곤으로 꽉꽉 뭉쳐있던 미간을 눌렀다.
“고생 많았죠.”
“아닙니다.”
“…….”
호루니는 어떻게 서두를 떼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손가락을 비비 꼬는 그녀를 본 투이나가 연회장 한쪽을 가리켰다.
“앉아서 얘기할까요.”
호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악 대신 달그락거리며 음식을 치우는 소리가 느릿하게 울려 퍼졌다.
그동안 생각을 정리해둔 투이나가 차분히 말했다.
“세 번째 시험은 치를 거예요.”
“그, 그럼……!”
“루가 님, 정말… 저자들과 결혼하실 생각이십니까?”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요?”
투이나의 말에 라카인은 비소라도 삼킨 것처럼 뱃속이 뜨거워졌다.
라카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이 되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는 사람으로 사는 게 좋아요.”
투이나가 무심코 라카인을 바라보았다가 뜻밖에도 열기를 품은 눈동자에 다소 놀랐다.
왜 저렇게 간절하게 보는 걸까?
그녀의 신도라서?
무언가 뜨끔하고 목을 찌르고 지나가는 느낌이다.
투이나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아르힘 님이 말하신 게 틀릴 리도 없으니까요. 결국 그렇게 된다면 조금만 더 사람으로 살고 싶어요.”
“…….”
“그럼 결국 신이 되는 건 확실하신 거군요.”
스카차가 숨 막힌 소리를 토해냈다.
“너무 엄청난 이야기라… 이거 참.”
“마법사들이 모든 수호신은 한때 사람이었다고 했잖아요.”
호루니가 간신히 그 말만 했다. 그리고 한참동안 톡 튀어나온 눈을 굴리더니 덧붙였다.
“저는 루가 님도 당연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수줍은 태도와 달리 열정적인 어투였다.
그제야 투이나는 이미 호위들이 자신을 믿고 있다는 뜻이 무엇인지 실감했다.
자신이 무슨 선택을 하든 믿음이 뒤따를 것이다.
‘그리고 더 늘어나게 될까?’
투이나는 차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한 가닥 위안이 되는 건 만약 자신이 신이 되더라도 아르힘이 그녀를 가르쳐줄 거란 기대뿐이었다.
스카차가 물었다.
“그럼 루가 님은 어디의 신이 되시는 겁니까?”
“글쎄요…….”
투이나가 말을 흐렸다.
‘만약 내가 신이 되면 아르힘 님의 자리를 대체하게 되는 건 아닐까?’
아르파가 했던 말 때문이다.
아르힘은 투이나가 자신의 후계임을 거리낌 없이 밝혔으니까.
애초에 루가라는 자리가 왜 생겼겠는가.
아르힘이 사라진다는 생각은 두려웠지만, 투이나는 벌써부터 겁먹지 않도록 다짐했다.
“어쨌든 자세한 이야기는 아르힘 님이 해주시겠다 약속하셨으니. 일단 아르힘 님께서 안정을 찾도록 하는 게 급선무예요.”
“그래서 세 번째 시험을 서두르시는 거군요.”
“아르파나 마법사가 신전에 얼쩡거려봤자 아르힘 님께 좋을 게 없으니.”
“그렇죠.”
라카인은 첫 질문을 빼면 계속 침묵에 잠겨 있었다.
묘하게 신경 쓰이는 태도라 투이나가 계속 그를 흘긋거렸다.
그걸 본 호루니가 재빠르게 소리쳤다.
“저는 벌써 믿고 있어요! 아르힘 님도 훌륭하시지만, 누가 루가 님의 첫 신도냐고 물어본다면 반드시 제가 나설 거예요!”
“좀 진정해라….”
스카차가 텁텁한 표정으로 호루니의 어깨를 잡았다.
투이나는 그녀가 왜 라카인을 견제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해졌지만, 라카인은 이해했다.
차라리 호루니처럼 순수하게 믿음으로 충만했다면 좋았을 텐데.
라카인은 자신의 내면이 더럽다고 느꼈다.
마구잡이로 뒤엉킨 감정은 이제라도, 지금이라도, 하고 목 놓아 외쳤지만 이미 그의 이성이 그것들을 차단하고 있었다.
의무를 다해라.
이미 투이나에게서 평범한 인간의 흔적은 차츰 사라지고 있었다.
병이 그녀를 뒤덮을 지라도 오히려 진흙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수호신으로 터져 나올 전조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아무리 투이나가 사람으로 사는 게 좋다고 해도, 결국은 끝나버릴 것이다.
자신 따위가 신이 되려는 인간의 껍데기를 붙들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라카인은 조금만 더 함께 있어달라고 말하는 대신 혼탕한 마음속에서 한 줄기 믿음을 뽑아냈다.
“루가 님은 신이 되실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것처럼 들렸다.
투이나는 경건하게까지 보이는 라카인의 모습에 순간 긴장했다.
그러나 라카인은 끝까지 평정을 가장했다.
“감히 신에게 부탁을 드릴 수는 없으나, 루가 님이 아직 사람이실 때 한 가지 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그럼요. 뭐든 말만 하세요.”
반쯤 멍해져 있던 투이나가 얼른 대답했다.
오히려 라카인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청한다는 사실이 기뻤다.
투이나가 미소 지으려는 찰나, 라카인이 말했다.
“한 번만 안아주시겠습니까.”
곧장 투이나의 호흡이 흔들렸다.
호루니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으나 라카인은 모든 욕심을 내려놓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딱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모든 감정이 가라앉은 목소리였으나 왜 그녀의 귀에는 애절하게 들렸는지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평소였다면 간단하게 승낙했을 일을 이토록 망설였는지도.
“좋……아요.”
투이나가 살짝 양팔을 벌렸다.
왠지 지금은 장난스럽게 다가가 끌어안을 수가 없었다.
라카인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느리게 일어난 그가 천천히 투이나의 등에 손을 올렸다.
닿는 걸 조심스러워하듯 한참동안 허공에 머물던 손은 차츰 가까워지는 상체와 맞닿은 뒤에야 비로소 힘 있게 끌어안았다.
샨처럼 도망가지도 못하게 꽉 끌어안은 것도 아니었는데도 갑자기 투이나는 몸을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살짝 숨 쉴 틈을 남겨둔 자리가 오히려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왜…지?’
투이나는 머뭇거리며 여전히 거리를 지키려는 라카인에게 몸을 붙였다.
닿아있는 자리로 순식간에 움찔하는 진동이 느껴졌다.
라카인은 애써 동요를 숨기려는 듯 한참동안 그 자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곧 크게 뛰는 심장박동이 그의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빨라.’
저도 모르게 투이나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두근거리는 소리가 너무 컸다.
마구잡이로 날뛰는 고동에 덩달아 자신의 심장까지 숨이 찼다.
‘지금 라카인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지?’
갑자기 그게 몹시도 궁금해졌다.
체취가 감도는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투이나가 고개를 들려는 낌새를 보이자 라카인은 갑자기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손을 뗐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물러났다.
만약 투이나가 떨어진 다음에도 쿵쿵거리며 뛰는 맥박을 듣지 못했더라면 라카인을 완벽하게 침착한 얼굴이라고 착각했을 법했다.
“…감사합니다.”
그가 깊게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을 때에야 투이나의 이성이 깨어났다.
‘이상하다.’
감사 인사를 들었는데도 기분이 좋아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며 무언가 잘못했다는 예감만 들었다.
그에게 듣고 싶었던 건 그 말이 아니다.
“아, 아니에요.”
투이나가 더듬거렸다. 그녀가 갑자기 손발을 어디에 놔 둬야 될지 모르는 사람처럼 허둥거렸다.
“정말 별, 별거 아닌 일인 걸요. 이건 없던 일로 해요.”
투이나가 서둘러 말했다. 그에게서 떨어졌는데도 피부가 화끈거렸다.
전 재산을 도둑맞은 것처럼 입을 벌리고 있던 호루니가 그 말에 확 표정을 바꾼 뒤에야 투이나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아차.’
이 말은 마치 라카인과 껴안은 걸 후회한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나.
‘이런 건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는데!’
“아, 저 그게 아니라!”
“괜찮습니다, 루가 님.”
라카인은 이미 오해를 납득한 뒤였다.
“잊겠습니다.”
그가 씁쓸하면서도 무언가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보니 투이나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 *
그날 투이나는 잠을 설쳤다.
눈을 감기만 하면 자꾸만 라카인과 있었던 일이 되살아났다.
겪을 때는 몰랐던 몹시 사소한 잔상들이었다.
라카인의 손바닥에 있던 굳은살이나, 숨소리, 체온 같은 것이 느닷없이 나타나 투이나를 잔뜩 헤집어놓고 사라졌다.
‘내가 왜 이러지?’
밤새 베개로 머리를 감쌌다가 일어났다가 동동거리던 투이나는 결국 새벽이 다 되어서야 간신히 눈을 붙였다.
그것마저도 아침 햇살 한 번에 바로 깨져버리고 말았지만.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루가 님.”
“으응…. 조금만 더 잘….”
잠투정을 부리던 투이나의 정신이 벌떡 일어났다.
‘라카인 목소리잖아!’
허겁지겁 눈을 떠보니 자신을 내려다보는 라카인이 보였다.
기겁한 투이나가 다급하게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잠시만요!”
라카인은 유난스럽게 구는 투이나를 멀뚱하게 내려다보았다.
‘지금까지 왜 몰랐지? 라카인도 계속 같이 있었잖아.’
호위이다 보니 아침부터 밤까지 그가 당연하게 곁을 지켰다. 시종들이 있을 때도 물론이다.
지금까지 자다 깬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엄청나게 부끄러워졌다.
‘맙소사. 심지어 옷 갈아입는 것도, 씻는 것도, 우는 모습까지 다 보여줬어!’
그동안 라카인한테 별 꼴을 다 보여줬다는 생각이 갑자기 그녀를 습격했다.
‘으아아, 세상에!’
이제 와서 예의를 차리는 것도 우스운 꼴이지만.
투이나는 이불을 머리 위로 둘러쓴 채 팔만 바깥으로 뻗었다.
“저어, 오늘은 저 혼자 씻을게요.”
“그렇게 전해두겠습니다.”
부스럭거리며 라카인이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투이나는 괜히 싱숭생숭해졌다.
‘어떡하지?’
갑자기 그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모르게 되어 버렸다.
다행히 씻고 옷을 입을 때쯤이 되자 산만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놀라서 그런 거야.’
어제 일이 보통 많았는가.
아르파에 아르힘에, 수호신이 된다는 얘기까지 정신없이 몰아쳤으니 정신이 제자리에 있기 어려운 게 당연했다.
마지막에 라카인이 요구한 일은 그것들과 비교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그 전에도 포옹은 많이 했었잖아?’
투이나는 애정을 숨기는 편이 아니었다.
걸핏하면 악수는 물론 포옹도 덥석덥석 서슴지 않았으니, 호위들에게 각별히 친근하게 군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러니 문제는 그녀다.
“루가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네!”
투이나가 성급하게 대답했다.
기다리던 시종들과 호위들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우웃, 또.’
투이나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췄다.
라카인은 이상하게 구는 투이나에게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평소랑 너무 똑같았다.
그나마 달라진 게 있다면 축제 이후로 자른 머리 때문에 시종들이 가끔 힐끔거린다는 점뿐이다.
전보다 얼굴이 잘 보이게 됐는데 오히려 더 속내를 모르겠다니.
투이나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안 호루니가 꾸벅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좋은 아침이에요, 호루니.”
투이나가 얼른 대답했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 덕분에 평소처럼 지낼 수는 있을 거 같았다.
라카인이 서 있는 자리가 평소보다 의식되긴 해도 투이나는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물론 그 일정에는 아르힘과 베인을 찾아가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도 의식이 없나요?”
“예.”
베인을 담당하는 시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투이나는 눈에 띄게 마른 베인을 걱정스레 내려다보았다.
사제 한 명을 붙여가면서까지 억지로 음식을 먹이고 있었지만, 언제까지 저 상태로 버틸 수 있는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사제는 목에 걸린 음식까지 치료할 수 있으면서도 여전히 깨어나지 않는 베인에게 두 손을 내저었다.
“치료는 잘 통합니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것뿐이지요.”
사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는 게 당연했다. 영혼이 빠져 있으니까.
투이나의 얼굴이 굳었다. 이미 베인에게 오기 전에 성소에 다녀온 뒤였다.
축제 때 아르힘이 나타났기에 일말의 기대를 품고 간 성소는 그녀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여전히 응답 없이 조용한 종탑은 아무리 만지고 기도해도 열리지 않았다.
평소보다 차가운 것도 마음에 걸렸다.
‘샨과 아르파 신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아르힘 님이 베인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건 분명해.’
하지만 도대체 어떤 영향을 미쳤기에 신까지 성소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는지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혹시라도 어떤 답을 얻을까 해서 누워있는 베인을 보러 왔지만, 그를 보자 오히려 정신이 더욱 어지러워지기만 했다.
베인이 맹목적으로 매달려서 일으킨 문제만 빼면 그는 흠잡을 데 없는 인격이라고 평가받는 사람이었다.
‘베인이 나를 사랑했기에 아르힘 님이 고통스러워하시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어차피 수호신은 모든 신도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볼수록 아리송하기만 했다.
라카인은 투이나가 한참동안 베인을 보며 고민하는 걸 지켜보다가 사제에게 말했다.
“잠깐 저희들과 루가 님만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그가 말을 걸 줄은 몰랐던 사제가 화들짝 놀랐다.
“둘만 말입니까?”
“아니요. 저희 모두를 말하는 겁니다.”
눈에 띄게 경계하던 사제가 누그러졌다.
호위들은 물론, 투이나까지도 라카인이 왜 그러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사제가 허락을 구하듯 투이나를 돌아보자 그녀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자네는 잠깐 나 좀 돕지.”
“예에.”
사제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을 한 시종을 데리고 나갔다.
라카인은 그들이 문을 닫자마자 투이나에게 먼저 설명부터 했다.
“제 마음대로 움직여서 죄송합니다, 루가 님.”
“아니에요. 라카인이 그러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다른 일도 포함해서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라카인은 절도 있는 자세로 무릎을 꿇었다.
한층 더 당황한 투이나는 그가 품에 손을 집어넣자 흠칫했다.
호루니와 스카차가 후다닥 무기를 쥐었지만 다행히 그가 꺼낸 것은 한 뭉치의 머리카락이었다.
“뭐, 뭡니까 그게?”
스카차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늘 있는 듯 없는 듯하던 라카인이 갑자기 움직여서 그도 어지간히 놀란 것 같았다.
그러나 투이나의 심장은 다른 의미로 뛰고 있었다.
‘고백하는 줄 알았어.’
라카인이 무릎을 꿇는 모습이 너무도 청혼할 때의 그 자세여서 한순간 머리에서 착각이 일어났다.
말도 안 되는 착각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투이나의 귓바퀴가 소리 없이 뜨거워졌다.
‘맙소사.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혹시 자는 동안 마법사가 몰래 그녀한테 마법을 퍼붓고 간 게 아닌가 싶었다.
차라리 그게 더 말이 될 것 같았다.
‘정신 차려. 라카인은 저렇게 진지해 보이잖아!’
그가 무언가 어려운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자신은 이런 바보 같은 망상에 빠져 있다니.
투이나는 속으로 자신의 뺨을 짝짝 때려가며 집중했다.
“이것은 마법사에게서 받아낸 머리카락입니다.”
움찔한 스카차가 천에 싸놓은 뭉치를 손으로 헤집었다.
그러자 그에게도 익숙한, 보라색의 긴 머리카락이 딸려 나왔다.
그걸 보자 투이나도 더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이걸 어떻게 얻어냈어요?”
“수호신의 이야기를 팔아 받았습니다.”
라카인은 몹시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대답했다.
그러나 그 말이 가져다준 충격은 더했다.
‘라카인이 아르파의 이야기를 팔았다고?’
투이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르파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 아니라 정말로 죽으려고까지 하던 라카인이 아르파를 팔아먹었다고?
차라리 자기 머리카락을 잘라 파는 게 덜 충격적이리라. 아니면 자기 팔을 자르던가.
그 정도로 맹목적이던 라카인이 변하다니.
투이나도 그에게 다른 나라를 주선해주려고까지 했지만, 막상 이렇게 변화한 모습을 보니 놀라웠다.
‘정말 이제 더는 아르파 신을 믿지 않게 된 건가?’
끔찍한 신에게서 벗어난 건 좋았지만 어딘가 찜찜했다.
그렇다면 지금 라카인이 믿는 대상이 누구지?
‘설마……?’
아르힘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도저히 그 빈자리에 자기 이름을 적어 넣을 수가 없던 투이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라카인은 그녀의 반응을 오해했는지 서둘러 덧붙였다.
“주제넘은 짓이라는 걸 압니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벌을 받겠습니다.”
라카인이 말할수록 투이나의 불길한 짐작은 점점 확실해졌다.
‘그러고 보니 아르힘 님이 호위들을 보고 신도라고 얘기했었잖아.’
그러나 단순히 그들이 자신을 믿는다는 얘기와, 그녀를 신처럼 여긴다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더더군다나 지금까지 라카인이 자신을 수호신처럼 대했다고 생각하면 더욱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제 들은 이야기 때문에 라카인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훨씬 전부터 그래왔을까? …나랑 만난 뒤로 쭉?’
묘하게 속이 상했다.
투이나는 초조하게 답을 기다리는 라카인을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그… 건 괜찮아요. 그냥 저는 왜 그랬는지 궁금하기만 한걸요.”
“루가 님이 마법사를 부를 때 조건이 너무 제한적인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라카인이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런 감정은 잘 보이는데.’
“루가 님에겐 아직 아르힘을 구출할 때 도와주기로 약속했던 마법사들이 있습니다.”
“아르힘 님은 벌써 구출되었는데…. 아, 다른 마법사들을 불러올 때 쓰라는 말인가요?”
“예.”
“하지만 지금까지 시드룬을 불렀을 때 나타나지 않았던 적은 없었잖아요?”
“……그렇습니다만, 좋지 않은 예감이 듭니다.”
라카인의 얼굴빛이 약간 어두워졌다.
“꼭 그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루가 님에게 쓸 수 있는 패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갑자기 투이나의 목이 먹먹해졌다.
라카인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을 위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계속 라카인 자신만 생각하라고 해왔지만, 지금은 그 마음이 와락 크게 감겼다.
“고마워요. 라카인.”
투이나가 저도 모르게 같이 눈높이를 맞춰 무릎을 꿇었다.
“……생각해줘서 너무 기뻐요.”
투이나가 중얼거렸다. 라카인은 담담하려고 애썼으나 평소보다 감정적으로 보이는 투이나의 모습에 약간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투이나가 내비친 감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호루니가 말했다.
“꼭 여기가 아니더라도 말할 수 있는 이야기였잖아요.”
호루니가 불편하게 팔을 꼬았다.
확실히 마냥 감동에 젖기엔 장소가 좋지 않았다. 베인이 누워있는 자리였으니까.
베인을 본 투이나는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머리가 식었다.
‘그의 앞에서는 싫어.’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들이 한꺼번에 머리를 지나가는 것 같았다.
다른 곳에서라면 몰라도 여기는 안 된다.
베인이 있는 곳에서는 지금 그녀가 느끼는 모든 것들이 잘못된 것처럼 변질되었다.
마치 그가 잘못된 것처럼 느끼게 할지도 모른다.
라카인은 안색이 달라진 투이나를 보고는 더욱 차분해진 표정을 지었다.
“이곳이어야만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라카인은 여전히 제물로 바치듯 올린 머리카락을 손에 든 채 말했다.
“수호신들이 대화하는 자리에는 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호루니와 스카차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나 더 들었습니다.”
“……?”
“베인을 깨어나게 할 방법에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제가 그 역할을 대신하겠습니다.”
잠깐 투이나와 호위들의 표정에 의아함이 번져갔다.
‘베인을 깨어나게 할 때 필요한 사람?’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던 투이나의 표정이 한순간 변했다.
그 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건 그녀뿐이다.
“안 돼요!”
투이나는 더 따질 것도 없이 소리 질렀다.
호루니와 스카차가 깜짝 놀랐으나 설명할 겨를이 없었다.
‘베인 대신 아르힘 님을 받아들일 희생양이 되겠다고?’
그래서 베인의 영혼을 꺼내라고?
라카인이 내민 제안에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다.
“절대 안 돼요. 아무도, 아무도 그런 식으로 살아서는 안 돼요!”
“…….”
라카인은 뜻밖에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자 물끄러미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 모습이 오히려 왜 자신을 써서 사랑하는 사람을 구출하지 않냐고 묻는 듯이 보여 투이나는 펄쩍 뛰어오를 것 같았다.
“이 얘기는 다시 꺼내지 마세요!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라카인이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나 투이나는 여전히 라카인의 목소리에서 분명한 미련을 읽을 수가 있었다.
‘도대체 왜?’
아무리 자신이 섬기는 신이라고 할 지언정 자신의 몸과 영혼까지 바치며 섬기려는 태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얼마나 절실하기에?
투이나는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것 같았다.
‘라카인은, 내가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베인을 사랑한다고 믿는 거야?’
그 짐작에 기어코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라카인은 본의 아니게 투이나가 큰 충격을 받자 쩔쩔맸다.
“잘못했습니다. 괜한 이야기로 루가 님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
“도대체 루가 님한테 무슨 제안을 한 거예요?”
돌아가는 상황에 애가 달은 호루니가 동동거렸다.
라카인이 곧이곧대로 답변하려는 걸 투이나가 막았다.
“아니에요. 어차피 하지 않을 일인데 굳이 알 필요도 없죠.”
단호한 말투였다. 호루니는 라카인의 옆구리를 찔러서라도 알아내고 싶은 표정이 되었다.
투이나는 호루니도 그 내용을 들으면 자기가 하겠다고 나설까봐 겁났다.
‘원래 다들 그러는 건가?’
믿는 신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다 바치는 사람들이라니. 설령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나는.’
투이나는 자신이 죽어갈 때가 생각나 입을 다물었다.
‘나도 다를 게 없구나.’
아르힘이 자신을 수호신으로 만든다는 이야기에 당장 거절이 떠오르지 않은 것만 봐도 그렇다.
투이나가 관자놀이를 눌렀다.
하지만 역시 그들처럼 맹목적으로는 따를 수 없다.
그녀가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로 끊고 수호신이 되지 않는 것처럼.
신은 그러한 믿음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오만해.’
결국은 투이나도 한낱 사람일 뿐이다. 자기 좋을 대로 신을 따르는.
투이나의 표정이 울적해지자 라카인은 더더욱 안절부절못했다.
그걸 보니 갑자기 껴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그냥 괜찮다고. 괜찮아질 거라고.
‘그렇게 해준다면 좋을 텐데.’
멍하니 생각하던 투이나가 화드득 어깨를 떨었다.
이제 보니 라카인을 볼 때 떠오른 일은 해주고 싶은 게 아니라 받고 싶은 일이었다.
갑자기 밤을 새웠던 이유가 떠오른 투이나가 황급히 평정심을 끌어 모았다.
“아, 아무튼 결국 마법을 쓸 수 있게 됐으니까 잘 된 거죠. 그것만 기억해요, 우리.”
라카인은 허둥지둥하는 투이나의 기분이 풀린 건지 가늠해보았다.
그대로 그를 보다간 정말 괜찮다는 핑계로 팔이라도 두를 것 같아 투이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라카인은 어차피 내가 베인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잖아.’
의도한 것보다 더 쏜살같이 마음이 가라앉았다.
대체 라카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너무 신경이 쓰였다.
‘어차피 헤어졌다는 걸 알면서, 무슨 의미로 영혼을 대신하겠다고 그런 걸까? 어차피 내가 신이 될 거라 생각해서 희생양을 자처하는 걸까?’
결코 달갑지 않은 결론이다.
눈치를 보던 스카차가 한 마디 했다.
“기왕 받은 거 진짜로 마법을 쓸 수 있는지 확인이나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분위기 우중충하니까.
그런 뒷말은 생략해도 될 만큼 투이나가 얼른 제안을 달가워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호루니는 찡그린 얼굴로 스카차와 라카인을 번갈아보다가 쪼그라든 목소리로 동의했다.
“네, 루가 님이 안전하신 게 제일이니까요.”
라카인도 확인 작업이 필요하다고 여겼는지 군말 없이 머리카락을 넘겼다.
투이나가 조심스럽게 천 뭉치에서 보라색 머리카락 한 올을 들어올렸다.
얇게 뽑아낸 보석처럼 햇빛에 닿은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어디로 가볼까요?”
“시험해보는 상황이니 원래 방문하던 곳이 좋겠습니다. 혹시 마법이 잘못되더라도 마법사들이 있는 곳이면 고칠 수 있을 테니까요.”
일리가 있는 말이다. 고개를 끄덕인 투이나는 머리카락을 손에 꾹 쥐었다.
‘시드룬과 있을 때 하던 것처럼 하면 되겠지.’
영혼의 세계를 부를 때 찾아가곤 하던 감각으로 투이나는 마법사의 마을을 떠올렸다.
“우왓!”
스카차가 깜짝 놀란 소리를 내 마법진이 열렸다는 사실을 곧장 알 수 있었다.
투이나는 뿜어져 나오는 연보랏빛에 만족해 고개를 들었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는 전혀 예상치 못하고서.
투이나의 몸이 굳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 순간 공기를 빨아간 것처럼 말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마법진 너머는 익히 알던 시드룬의 집이었으나 그 안에 전혀 낯선 사람이 서 있었던 것이다.
마법사도 아니고, 수호신도 아니고, 어쩌면 인간도 아닌, 거울에 비친 그림자 같은 존재.
또 한 명의 투이나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거짓말.’
투이나는 멍하니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도 똑같이 했다.
처음에 투이나는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형제가 붙잡혀 왔나 싶었다.
동생들을 보러간 지 오래 되었으니, 그들이 자랐다면 지금쯤 그녀의 얼굴을 닮았을 테니까.
그러나 신전의 옷을 입고 있는 투이나와 달리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는 그녀는 정수리 끝부터 발가락 하나까지 완벽하게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저 눈과, 깜박이는 동작까지 닮았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피부는 어떤 회색 얼룩도 없이 깨끗했다는 것뿐이다.
“…….”
“…….”
투이나는 멍하니 상대방을 바라보기만 했다.
‘꿈을 꾸는 게 아닌데?’
상대방도 투이나를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둘 다 반쯤 넋이 나가 있던 터라 호루니가 간신히 목 졸린 소리를 낼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루, 루, 루가 님이 두… 명?”
호루니의 목소리에 마법진 너머에 서 있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내 이름이 루루루가 님 인가요?”
“예……에?”
호루니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세상에. 목소리까지.’
“똑같아요.”
투이나가 탄성이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상대방도 귀가 쫑긋거렸다.
“나랑 목소리가 똑같네요.”
“얼굴도요.”
투이나가 멍하니 대답했다.
그리고는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각으로 두 사람이 동시에 한 쪽 손을 살짝 들어 올려 흔들었다.
가벼운 인사였지만 이미 충격에 빠져있던 호위들을 숨넘어가게 하기엔 충분했다.
“세상에. 세상에.”
“신이시여… 제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겁니까.”
“…….”
말로 표현하진 못했지만 라카인은 인생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엄청나게 동요하고 있었다.
투이나는 마법진 너머의 자신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있어서 그런 그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긴장을 깬 건 마법진 쪽이었다.
갑자기 벌컥 문이 열리며 위쪽에서 고함이 들렸던 것이다.
“너! 내가 함부로 방 밖으로 나가지 말랬…!”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목소리가 갑자기 확 줄어들었다.
계단 위에서도 열린 마법진과 넋이 나간 투이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젠장할.”
“미안해요, 수리시.”
얌전히 투이나를 건너다보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까딱였다.
“근데 제가 신기한 사람을 발견했어요.”
태연하게 투이나를 손가락질하는 그녀를 보며 수리시가 욕설과 함께 얼굴을 파묻었다.
골치 아프게 됐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는 수리시를 보며 투이나가 삐걱거리며 얼굴 근육을 움직였다.
“…이건 정말 반드시 설명해줘야겠어요, 수리시.”
* * *
수리시는 일단 그들을 한 자리에 앉혀두었다.
신기하게 그들을 훑어보는 또 다른 투이나 때문에 모두가 한껏 긴장해 있었다.
“하…….”
수리시는 계속 한숨을 쉬며 방 안을 서성였다.
안 그래도 충분히 산만한 분위기에 그녀의 정신없는 동작까지 더해지자 골치가 다 저려왔다.
수리시가 입을 열기만 기다리던 투이나가 침묵을 버티지 못하고 캐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설명하자면 길어.”
툭 내뱉은 수리시가 곧장 후회하며 마구 머리를 헝클었다.
“젠장. 시드룬이 올 때까지 기다려주면 안 되겠냐?”
“사전 설명은 할 수 있잖아요.”
“그렇지. 그렇겠지.”
푸우우 한숨을 내쉰 수리시가 호위들을 쏘아보았다.
“하다못해 저 녀석들을 내보내고 말하면 안 되겠니?”
“안 돼요.”
투이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지금 잘못한 쪽은 누가 봐도 수리시 쪽이었다.
그녀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결국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얘는 네 복제다.”
이마를 마구 문지르며 꺼낸 말치고는 짧았다. 투이나는 질책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사람을 복제한 거예요?”
“그래.”
“누구의 마법으로요?”
수리시의 눈매가 잠깐 날카로워졌다가, 엄정하게 노려보는 투이나의 시선과 마주치자 결국 사실을 실토했다.
“내 마법이야.”
즉시 그 자리에 있던 호위들이 수리시에게서 세 걸음은 떨어졌다.
반대로 라카인은 수리시를 견제하듯 몸을 비스듬히 바꿨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리시는 초조하게 손가락을 꼬았다.
“빌어먹을. 어차피 더 숨길 수도 없을 거 같아서 말하는 거지만 지금부터 할 얘기는 죽어서까지 비밀이어야 해. 알아들어?”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예요?”
투이나는 이 순간에도 협박을 놓지 않는 수리시를 다그쳤다.
“대체 어떤 마법이 사람을 만들어낼 수가 있어요? 그것도 저 몰래 이런 일을!”
“다 설명할 테니까 진정해! 나도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단 말이다. 망할 수호신, 망할 영혼들 같으니!”
수리시가 주먹을 쿵쿵 부딪쳤다.
“내 인생이 꼬여도 진짜 단단히 잘못 됐지. 빌어먹을. 마법사가 된 순간부터 일이 잘못 돌아간다는 걸 알았어야 하는데.”
“당신 넋두리 말고 진실을 말해요!”
더는 참지 못한 호루니가 소리쳤다.
수리시는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그녀를 쏘아보다가 독배를 마시는 듯한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나는 한 때 도둑이었다.”
수리시의 마법은 복제였다.
간단한 물건들을 복제해보던 수리시는 곧 자신의 마법이 어떤 원리인지 깨우쳤다.
“어떤 물건이든, 무엇이든, 그것의 일부만 있다면 원래 상태 그대로 복제할 수 있어.”
수리시가 신경질적으로 소매 한 쪽을 찢어냈다.
그리고는 북 찢어지는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지금 입고 있는 상의와 똑같은 한 벌을 만들어냈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뜨던 투이나가 곧 이상한 점을 잡아냈다.
“…복제된 옷은 소매가 찢어져 있지 않네요.”
“바로 알아차리는구나? 하. 맞아. 이 마법이 진짜 대단한 건, 내가 생각하는 완전한 상태로 복제된다는 거야.”
원본의 일부만 가져도 완벽한 원본을 가질 수 있었다.
심지어는, 손상된 원본보다 더 가치 있는 복제일지도 모른다.
희열과 함께 그걸 깨달은 수리시는 그 마법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을 찾아냈다.
“그게 도둑질이란 말입니까?”
“적성에 완벽하게 맞았지.”
엄중하게 보호된 물건을 통째로 훔쳐 나오는 것과 일부만 손에 넣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쉽겠는가?
하물며 물건의 일부만 있다면 얼마든지 더 만들어낼 수도 있다.
수리시의 이야기를 듣던 투이나가 문득 눈썹을 찌푸렸다.
“이야기 속에 나오던 대도가 당신이었어요?”
세상을 떠들썩하게 뒤흔든 도둑의 이야기는 아르힘까지 퍼져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갑자기 사라졌다고 들었던 도둑이 설마 수리시였을 줄이야.
‘마법사였다면 이해가 가.’
수리시는 삐딱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대부분 별 거 아닌 거였어. 소문이 부풀린 거였지.”
하지만 수리시의 마법이라면 웬만한 헛소문보다 더 엄청난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투이나가 벙 찐 얼굴이 되자 수리시가 고통스럽게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내 남편을 만나고 말았어.”
그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수리시의 남편인 바즈아둡은 망각을 다루는 마법사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운명이라고 생각했어. 같은 마법사란 걸 알았을 땐 도저히 놓아줄 수 없을 지경이었지.”
복제와 망각이라니. 도둑질하기엔 환상적인 조합이긴 하다.
수리시가 추억을 떠올리자 잠깐이나마 숯처럼 굳어있던 얼굴이 재가 되듯 풀어졌다.
“그는 착한 사람이었지만 기꺼이 내 일에 동참해줬어. 어쨌든 날 사랑했거든.”
“저어… 사랑한다고 저지르기엔 당신이 했던 일은 좀 과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스카차가 살짝 찌푸린 얼굴로 끼어들었다. 혹시라도 수리시가 화를 낼까봐 목소리를 낮추긴 했지만.
“도둑질에 성공하더라도 그걸 갖고 있던 모든 곳을 불태우지 않았습니까? 도둑질로도 유명했지만, 당신이 지나간 뒤에는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면서요.”
“흔적을 지워야만 했거든.”
다행히 수리시는 아직 추억에 잠겨 큰 소리 없이 대꾸해주었다.
“도둑질이라는 건 물건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이 잃어야 한다는 사실도 꽤 중요해.”
“상대방이요?”
“내가 복제한 물건을 팔아먹고 다닌다고 생각해봐. 도둑맞은 상대방은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자기 물건을 확인하겠지? 그런데 물건이 그대로 있으면 당연히 마법이라는 걸 들키겠지.”
수리시가 퉁명스럽게 설명했다.
“가뜩이나 마법사는 보이는 족족 잡아 죽이려고 하는데 이 마법을 들킬 순 없었어. 그러다간 평생 젖 짜는 암소처럼 복제만 해대며 살게 될 테니까.”
그래서 수리시는 물건의 일부만 손에 넣으면 대부분 불태우거나 무너트려 없애버렸다.
“하지만 내가 하는 짓들을 신들이 모를 리가 없지. 결국 계속 나라를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어.”
어차피 마법사는 수호신이 있는 곳에선 정착하기 힘들었다.
수리시는 거리낌 없이 보물을 훔쳐내고 집을 불태웠다.
바즈아둡을 만난 뒤에도 그런 행태는 바뀌지 않았다.
경악한 호루니가 중얼거렸다.
“대체…. 그렇게 훔쳐댔다면 재산을 걱정하지 않을 만큼은 벌었을 거 아니에요.”
“감히 넌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벌었지. 하지만 그때는 단순히 훔치는 게 아니라 복수심도 좀 있었어. 젊었으니까.”
수호신이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에게서 보물을 훔쳐낼 때면 통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수호신들도 어리석지는 않았기에 도둑들이 나라를 벗어난 뒤에도 끝까지 추격대를 붙였다.
아무리 바즈아둡이 망각의 마법으로 사람들을 속일지라도 신의 눈을 피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수리시의 눈이 회한으로 물들었다.
“신들의 추격을 점점 피하기 어려워질 때쯤, 처음으로 시드룬을 만났어.”
그때는 아직 앳된 소년의 모습이었다고 했다.
시드룬은 다짜고짜 자신의 집에 쳐들어온 남녀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고 했다.
“꼬마야, 얌전히 있으면 살려줄게. 라고 했더니 시드룬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살려주는 건 별로 관심 없으니까 마법을 가르쳐달라고 하더라.”
“시드룬이 그때 마법사가 되었단 말인가요?”
“아니, 그 애는 이미 마법사였어. 우리를 만나기 전부터 그랬지. 그냥 마력을 효율적으로 다루고 마법진을 숨기는 방법 같은 걸 알려달라는 거였어.”
수리시와 바즈아둡은 실전 경험만큼은 넘쳐났으니 시드룬에게 가르쳐 줄 것이 충분했다.
“그러다 시드룬이 다루는 마법이 공간이라는 걸 알았을 때 눈이 뒤집혔지.”
신에게서 숨을 수 있는 완벽한 도피처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수리시는 열성적으로 시드룬을 설득하며 금은보화를 약속했다.
“모든 걸, 이 세상 모든 걸 복제해주겠다고 했는데도 시큰둥한 게 어찌나 짜증나던지.”
수리시가 짧게 투덜거렸다.
“하지만 시드룬은 대신 자기 연구를 도와달라고 했어. 그럼 마을을 하나 지을 수 있을 만큼 큰 공간 하나를 내주겠다고.”
“그때부터…….”
“그래. 이 마을은 그 대가로 얻어낸 거야.”
수리시는 잠깐 그녀가 쌓아올린 집을 올려다보았다. 투이나도 시드룬의 집에 처음 왔을 때를 기억했다.
시드룬의 집안에는 무언가를 오랫동안 연구한 흔적이 가득 쌓여있었다.
“그 애를 돕는 건 어렵지 않았어. 남편의 마법 덕분에 누구를 납치해오든, 잡아오든 문제없이 돌려보낼 수 있었거든.”
“……그런데 문제가 생겼군요.”
“맞아.”
수리시의 목소리에 고통이 스며들었다.
“내 남편이 기어이 수호신이 보낸 추격대에게 살해당하고 만 거야.”
“……!”
투이나는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
잘 뛰고 있던 심장이 갑자기 멈추면서 칼날을 경계하는 듯한, 소름끼치는 느낌이 척추를 갈랐다.
뒷덜미를 서늘하게 만든 감각은 그녀뿐만 아니라 호위들에게도 똑같이 밀어닥쳤다.
그 자리에서 멀쩡할 수 있는 건 복제된 투이나뿐이었다.
그녀가 하얗게 질린 사람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 나갔다 온 것뿐이었는데. 시드룬이 마법진을 열어 구출한 뒤에는 이미 늦었지.”
수리시는 아직도 피를 쏟으며 돌아온 남편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밤마다 그 악몽 때문에 깨어난다.
경악한 호루니가 더듬더듬 말했다.
“하, 하지만 다, 다, 당신 남편은… 살아 있잖아요.”
수리시가 섬찟하게 웃었다.
살아있다 뿐이랴. 심지어 그들은 함께 식사를 하고 떠들기까지 했다.
창백해진 스카차가 감히 상상하기도 두려운 일을 제 입으로 꺼낼 수가 없어 더듬거렸다.
“서, 설마.”
“당신 남편을 복제한 거예요?”
투이나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감히 크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이야기에 수리시가 비로소 얼굴을 파묻었다.
“그이를… 보낼 순 없었어. 절대로!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사람을 어떻게 보내? 죽어도, 죽여도 그건 허락할 수 없었어.”
“그렇다고 사람을 복제하다니…!”
호루니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녀의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투이나조차 이런 끔찍한 이야기에 머리가 멍해질 정도였으니.
스카차가 눈을 부릅떴다.
“대체 마법사들은…! 그러니 수호신들이 당신을 쫓는 겁니다!”
“닥쳐! 네가 뭘 알아!”
수리시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주먹이 당장이라도 스카차를 후려칠 듯이 치솟았다.
“처음부터 그것들이 우리를 고통받게 만들었기 때문이야! 신이 없었더라면 내 남편이 죽을 일도, 그런 짓을 할 필요도 없었을 거라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당신은 미쳤어요!”
호루니와 스카차가 괴물을 보듯 수리시를 노려보았다.
투이나는 귀를 먹먹하게 하는 고함들 속에서 자신의 복제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투이나는 살아있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이야기에서 슬픔밖에 읽어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그 잔인함의 일부가 되었음에도 그러했다.
복제된 투이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평온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당연하게 머리를 짓누르는 섬뜩함을 가질 수가 없었으니까.
‘내가, 당신을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요.’
투이나는 낯선 타인을 보듯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왜 루가 님의 복제를 만든 겁니까.”
라카인이 낮은 목소리로 소란을 갈라놓았다. 씩씩거리며 싸우던 호위들과 수리시가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의 말대로 사람을 복제한 것뿐이라면, 이렇게 긴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라카인의 말이 맞아요.”
투이나가 천천히 응했다.
“정말 그것뿐이라면 이런 이야기 없이, 당신의 마법으로 저를 복제했다는 것만 알렸겠죠. 그리고 저… 분을 어떻게 할지 이야기했을 테고요.”
복제된 투이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가벼운 동작에 수리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네 정말 빌어먹게도 영리하긴 하구나. 내가 하려는 말을 미리 다 짐작도 하고.”
비꼬는 수리시에게 투이나는 그저 슬프게 눈썹을 밀어 올리기만 했다.
결국 호위들의 멱살을 붙잡고 때려눕히려는 걸 포기한 수리시가 다시 주저앉았다.
“…내가 모든 사람을 복제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수리시의 손바닥이 머리카락을 밀어 올렸다.
“당연히 사람을 복제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몇 번 더 시험해봤지. 하지만 아무리 마법이라도 그냥 사람을 만들어낼 순 없었어.”
호위들은 속에서 불끈불끈 치솟는 말을 참느라 입술을 꿈틀거렸다.
그럼 대체 저기 앉아있는 투이나의 복제는 뭐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것이다.
수리시가 설명했다.
“평범한 사람을 복제해봤자 육체만 나타날 뿐, 살아나진 않아. 시체로도 똑같이 해봤지만 그건 진짜 시체가 복제될 뿐이었지.”
호루니가 구역질이 치미는지 입을 가렸다.
“그럼 내 남편은 어떻게 복제했는지 궁금하겠지.”
수리시는 검붉은 피가 팔꿈치까지 적시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녀는 바즈아둡이 죽어간다는 생각에 거의 미치광이가 될 지경이었다.
가엽고, 사랑스러운 남편은 죽어가면서도 수리시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울지 말라고.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고작해야 울지 말라는 소리밖에 못하는 그 얼굴을 보고 수리시는 과연 무슨 말을 했어야 옳았을까.
그저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는데.
수리시의 얼굴이 기묘하게 굳어버렸다.
“나는 남편의 죽어가는 얼굴을 보며 애도하는 대신 마법을 썼다. 그리고 그의 영혼을 훔쳐내는 데 성공한 거야.”
“…….”
“그… 말은…….”
갑자기 공기가 끈끈하고 숨 막히게 변했다.
호위들은 감히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지금 고개를 돌리면 그녀를 향한 공격이나 다름없기에 필사적으로 온 몸을 제자리에 묶어두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왜냐하면 이미 투이나의 안부 따위는 개의치 않는 수리시가 그녀를 향해 말을 쏘아 보냈기 때문이다.
“그래. 사람을 복제해도 영혼은 복제할 수 없어. 내가 살아있는 사람을 복제하려면, 원래 인간은 죽어야만 해.”
투이나는 우두커니 앉은 채로 수리시를 응시하기만 했다.
귓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으나, 그것은 착각일 뿐이라고 못을 박는 듯 수리시의 목소리가 정확하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러니 이제 제발 나도 하나만 묻자. 어떻게 복제한 네가 살아있는 거지? 왜 너도 살아있는 거야!”
수리시는 거의 자포자기한 말투로 투이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너는 원래 죽은 것이라고.
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한 수호신이 악당과 마주쳤을 때 오로지 대화만 거듭한 끝에 그를 자살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존재를 부정하는 건 그만큼 사람을 위협한다는 뜻이다.
투이나는 잠깐 크게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았다.
‘수리시의 설명대로라면 내 머리로도 어떻게 살아있는지 이해가 안 되지만.’
그것보다 압도적인 사실이 있다.
‘내가 지금 살아 있잖아.’
투이나는 숨을 쉴 때마다 자신의 죽음을 반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수리시의 말에 당장 대답할 수 없더라도 어쨌든, 침착해질 수 있었다.
“…저도 그게 궁금하네요.”
투이나가 가볍게 인정했다. 당황한 수리시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럼 음… 저 사람에게 원래 제 영혼이 있다는 뜻인가요?”
“그, 그래. 내 추측으론.”
수리시가 말까지 더듬는 걸 보면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설마 투이나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아예 본인이 물어보는 자세로 나왔다.
“너, 넌 짐작 가는 거 있어?”
“수리시도 알다시피 전 되살아난 몸이잖아요.”
말할수록 오히려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벙찐 호위들을 놔두고 투이나가 열심히 고민했다.
“그때 영혼이 나뉘었던 걸까요?”
“영혼은 나뉘지 않아. 영혼은 ‘잃는’ 거야. 수호신들이 마법사들을 병들었다고 얘기하는 건 우리가 영혼을 깎아내고 마법을 들였기 때문이지.”
신의 예시를 들은 투이나는 마법사들이 말하는 예시도 기억해냈다.
“신을 믿는 것도 영혼에 같은 일을 하나요?”
“그래. 너희 아르힘의 사제들도 영혼을 깎아내고 아르힘을 받아들였을 테지. 대부분의 신도들은 티도 안 날 거야.”
수리시가 멍하니 대꾸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복제된 투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당신 영혼인가요?”
“글쎄요? 저는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얼빠진 얼굴로 투이나와 복제된 투이나의 대화를 듣던 사람들은 갑자기 번쩍이며 나타난 마법진에 기겁했다.
“으악!”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까?”
시드룬이었다.
마법진을 열고 나타난 시드룬은 어수선한 방안을 둘러보고는 두 명의 투이나를 발견했다.
그가 눈썹을 미미하게 까딱였다.
“들켰군요?”
사람 하나를 통째로 복제해놓은 걸 들켜놓고 뭐 저리 담담한 반응이 있나 싶다.
투이나가 새삼스럽게 질린 표정이 되었다.
“이제 시드룬이 설명해 볼래요?”
시드룬은 괴이한 자세로 굳어있는 수리시를 보더니 더는 숨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당신이 부상당한 날, 피를 좀 챙겼습니다. 그걸로 수리시에게 복제를 부탁했습니다.”
“그 부분은 설명했어. 건너뛰어.”
수리시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투이나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마법사들은 왜 이럴까?’
“저 몰래 무슨 짓을 꾸민다는 건 알았지만 어떻게 이런 걸 숨길 생각을 했어요? 저 사람을 어쩌려구요!”
“살아날 줄 몰랐습니다.”
시드룬은 물어본 사람이 머쓱해질 만큼 멀뚱하게 답했다.
“얼룩병을 조사해볼 생각으로 당신의 육체만 빌릴 생각이었습니다.”
“그것도 문제예요.”
“그렇군요.”
“복제한 몸으로 조사만 끝낸 다음에 폐기처분하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눈을 떠서 우리도 기절할 뻔했다고.”
그러니까 복제된 투이나가 살아난 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 것이다.
복제된 투이나는 자기 탄생 설화를 듣고도 빙긋이 웃고만 있었다.
어느 모로 봐도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투이나가 물었다.
“기억…까지 복제되진 않은 건가요?”
“그래.”
수리시가 마른세수를 했다.
“복제된 후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나 다름없어. 먹고 자는 것부터 가르쳐야 하거든.”
“그럼 당신 남편도….”
“내가 가르쳤지.”
수리시는 그 사이에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뙤약볕에 내어놓은 토마토처럼 쭈그러든 그녀가 다시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솔직히 또다시 살아있는 인간을 복제하고 싶진 않았어. 이따위 끔찍한 실수를 또 하게 될 줄은….”
“또라니요?”
“나는 내 남편을 복제한 일도 후회해.”
수리시가 꽉 다물린 이 사이로 내뱉었다.
시드룬은 그를 향해 손을 흔드는 복제 투이나에게 다가갔다.
그동안 수리시는 지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말은… 말은 복제라고 했지만 그 사람이 정말 내 남편이 맞는 걸까? 너를 복제한 뒤로 그 의문이 더욱 커지기만 했어. 넌 여전히 살아있는데, 그럼 저 복제된 인간은 뭐야?”
수리시의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 가죽을 일그러트렸다.
“그 생각만 하면 미칠 것 같아. 이미 남편은 죽었는데, 지금 내 곁에 있는 건 누구지? 나는 뭘 사랑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도 도저히 없으면 안 돼. 그거라도 옆에 있어야 한다고.”
복제된 투이나는 시드룬이 가까이 가자 그의 뒤로 숨듯이 팔을 붙잡았다.
수리시는 가까이 다가가기도 어려울 만큼 무척 괴로워 보였다.
시드룬은 수리시의 탄식을 한두 번 들은 게 아닌지 담담하게 설명했다.
“복제된 바즈아둡은 마법을 쓰지 못합니다. 그것이 수리시가 남편을 의심하는 이유입니다.”
“…하! 정확히는 너 때문에 의심이 더 커진 거지.”
수리시가 투이나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솔직히 복제된 너랑 만나면 둘 중에 하나가 펑 터져버리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둘 다 무사하잖아.”
“…….”
투이나는 자조적인 어투로 말하는 수리시가 가여워졌다.
결코 그녀가 한 일을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필사적인 사람에게 가혹해지긴 힘들었다.
“수리시. 나는… 나도 그 의문에 대답해줄 순 없어요.”
“그래. 이젠 뭐가 뭔지 나도 도저히 모르겠어.”
수리시가 머리를 감쌌다. 그대로 천장이 무너져 내릴 거라고 믿는 사람처럼.
잠시 후, 시드룬이 입을 열었다.
“어쩌면 모든 해답은 구혼식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시드룬에게 쏠렸다. 시드룬은 자신의 팔에 매달린 복제 투이나를 보며 답했다.
“당신의 호위에게서 수호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죽거나 결혼하는 방법만이 수호신으로 가는 방법이라지요.”
스카차가 언제 그런 얘기까지 했냐는 표정으로 라카인을 잠깐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를 오래 보기엔 시드룬의 이야기가 너무도 흥미로웠다.
“아르힘이 아니라 당신의 신성이 목숨을 지켜주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제 신성이요?”
“그렇습니다.”
시드룬이 잠깐 고개를 끄덕이자 복제된 투이나가 팔을 떼고 물러났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가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영혼의 세계를 볼 수 있어요.”
“……!”
“시드룬이 말하길, 나처럼 영혼의 세계를 열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이 저랑 똑같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
복제된 투이나가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쌍둥이 열쇠 같네요. 우리.”
투이나가 얼떨떨하게 복제된 투이나를 바라보았다.
잔잔한 눈동자를 응시할수록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가 자신에게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
머리를 아뜩하게 만들 만큼 저 멀리, 별이 뜨는 곳에서 오는 듯한….
투이나가 흠칫 물러났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영혼의 세계를 열 수 있는 조건이 처음부터 당신에게 예외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시드룬이 천천히 답했다.
‘영혼의 세계를 열 수 있는 조건?’
오래전에 시드룬이 말했던 것처럼, 수호신과 죽은 자들만이 영혼의 세계를 열 수 있었다.
투이나는 내심 자신이 한 번 죽었기에 영혼의 세계를 열 수 있는 것이라 믿었다.
‘그게 아니라면?’
죽음이 아니라 수호신이라는 조건을 통과한 것이라면?
“루가 님이 이미 신이 되셨다는 뜻입니까?”
“가능성이 있습니다.”
잔뜩 긴장한 스카차의 질문에 시드룬은 가볍게 어깨를 움직이는 것으로 답했다.
“적어도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건 확실합니다.”
‘그래서 아르힘 님은 내가 되살아난 뒤에도 결혼을 고집하셨던 걸까?’
투이나의 머릿속으로 퍼뜩 생각이 지나쳐갔다.
그녀가 결혼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한 순간 종소리가 터져 나오고 신전이 무너졌다.
그게 신이 되는 문제였다면 성소에서 나오지 않던 아르힘을 기어이 바깥으로 뛰쳐나오게 할 만한 이유처럼 들리긴 했다.
호루니는 좀처럼 믿기 어려운 이야기인지 말을 더듬었다.
“그, 그래도 역시 이상하잖아요. 루가 님은 여기 계신데. 저 복제된 사람한테 루가 님의 영혼이 있다니.”
“…꼭 루가의 영혼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시드룬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수리시조차 그 얘기에 고개를 들었다.
“무슨 헛소리야? 복제한 사람에 다른 영혼을 넣을 수 없다는 건 이미 확인해봤잖아.”
“그랬지. 하지만 과거에 루가가 살해당한 순간 그녀가 수호신의 자격을 획득했다면?”
“그게 무슨…….”
“아르힘이 당신을 살리면서 일이 꼬였을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시드룬이 담담하게 설명했다.
“한 때 사람이었더라도 신이 된 이상 하나의 영혼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수호신은 그들을 믿는 자의 영혼을 조금씩 받아야만 하니까요.”
시드룬은 적절한 단어를 찾느라 천천히 말을 이었다.
“추측일 뿐이지만 당신이 죽는 순간 이미 영혼은 신이 되었지만, 되살아난 몸은 여전히 영혼을 필요로 하기에 신과 분리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주변이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내 영혼이 두 개가 되었다는 뜻인가요? 사람의 영혼과 신의 영혼으로?”
“그렇습니다.”
“그럼 내가 복제한 몸에 뭐가 들어갔다는 거야?”
수리시가 눈을 부릅뜬 채 다그쳤다.
“저 몸에 들어있는 게 이미 신이 된 영혼이란 말이야? 내가 그걸 인간의 몸에다 가뒀다고?”
“반대일 수도 있다.”
커져가던 수리시의 목소리를 시드룬이 틀어막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의 중심을 투이나에게로 옮겨놓았다.
“저 루가에게 신이 된 영혼이 깃들고, 영혼의 세계를 떠돌던 인간의 영혼이 복제된 몸으로 들어갔을 수 있지.”
투이나의 살갗이 차갑고 축축하게 젖어갔다.
시드룬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까?
정확히 무엇을 언급하고 있는지 안다면, 이토록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시드룬은 무감각한 연보라색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인간의 영혼을 가졌다면 아르힘은 헛수고를 하게 되는 셈입니다. 신이 된 쪽이 우리에게 있으니까요.”
‘아니야.’
투이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복제되지 못한 죽은 영혼들이 왜 자신의 몸을 떠나지 않는지.
자신이 신이 된 쪽이기 때문이다.
투이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토할 것 같아요.”
투이나의 말에 곧장 정신을 차린 건 라카인이었다.
투이나가 양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허리를 구부렸다. 라카인이 서둘러 그녀에게 달려갔다.
“천천히 숨 쉬십시오.”
라카인이 파들거리는 투이나를 감싸 안았다. 투이나의 호흡이 지나치게 빨라지고 있었다.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를 연이어 들었더니 과호흡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미 자기 힘으로 천천히 숨을 쉴 수 있는 단계를 지나쳤다.
라카인은 가쁘게 오르내리는 투이나의 가슴 부근을 묶은 옷끈을 느슨하게 풀었다.
“뭐, 뭐하는 거예요!”
“…….”
호루니가 기함했지만 그녀가 보기에도 투이나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흐으… 흐….”
“천천히 저를 따라 숨 쉬셔야 합니다.”
라카인이 침착하게 말을 반복했다.
투이나는 그 말을 따르려고 노력해보았지만 헐떡이는 숨은 쉽게 멈춰지지가 않았다.
“못… 흐윽… 못하… 겠….”
복제된 투이나가 걱정스럽게 투이나를 향해 다가왔다.
라카인이 본능적으로 흠칫 뒷덜미를 곤두세웠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아, 전 걱정이 돼서….”
복제된 그녀가 투이나라면 했을 법한 행동을 하는 게 두려웠다.
저렇게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목소리를 하고.
라카인이 질끈 어금니를 악물었다.
“잠시 나가 있게 해주십시오.”
복제된 투이나가 있을수록 투이나는 더욱 고통스러울 것이다.
이미 마법사들이 무신경하게 던진 이야기를 들을 만큼 들었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했는지 수리시가 복제 투이나를 잡아끌었다.
“아, 알았어.”
“정말로 도와주지 않아도 됩니까?”
라카인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헉, 헉…!”
투이나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놀란 호루니와 스카차가 당장 다가왔지만 그들도 어찌할 줄을 몰랐다.
“루가 님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말 좀 해봐요!”
“루가 님!”
라카인은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과호흡은 전쟁터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은 자들이 종종 보이곤 했던 증상이다.
사람들은 가벼운 병이라 여겼지만 이대로 방치하면 손발이 돌아가거나 심장에 무리가 와 실신할 수도 있었다.
‘호흡을 멈추게 해야 한다.’
라카인은 필사적으로 투이나의 주의를 끌려고 애썼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원하지 않던 일을, 정말로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만…….
“……!”
경련하던 투이나의 손이 튀어 올라 간절하게 라카인을 움켜쥐었다. 살려달라는 듯이.
“…용서하십시오.”
라카인은 투이나의 입에 직접 숨을 불어넣으면서도 오로지 그가 하지 않으면 겪게 될 일들만 떠올렸다.
끔찍한 상상만이 자신의 감정을 억눌러 줄 테니까.
“…….”
복제된 투이나를 데리고 나가려던 마법사들이 놀라 멈춘 게 느껴졌다.
호위들마저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어 했다.
머리로는 의료적인 행위라는 걸 알면서도 시각적인 충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라카인은 머릿속을 비웠으나, 턱을 잡은 손가락 사이로 투이나가 흘린 눈물이 느껴졌을 때는 참지 못하고 살을 깨물었다.
왜 우시는 겁니까.
무엇이 당신을 그리도 슬프게 만들었단 말입니까.
라카인은 기계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내뱉을 때 목소리를 섞었다.
“여기 계십니다.”
“…….”
“아직 살아 계십니다.”
라카인은 투이나를 움켜쥐었다.
그녀가 가쁘게 내뱉은 숨만큼 사라져 버리지 않도록.
비로소 투이나의 호흡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흐느적거리던 팔과 다리가 새의 꼬리처럼 축 처지는 게 느껴졌다.
라카인은 조심스럽게 머리를 떼었다.
여전히 투이나는 자신의 품에 안겨있었으나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가늠할 수 없어서였다.
눈물로 젖은 투이나의 초점은 온전히 자신에게 향해 있었다.
라카인은 조용히 그녀가 화를 내거나 따귀라도 때리기를, 혹은 살아나게 해줘서 고맙다는, 어떤 말이나 몸짓을 보이기를 기다렸다.
“……지금은 보고 싶지 않아요.”
뜨끔.
순간 라카인은 그녀가 자신을 두고 한 말인 줄 알고 명치가 아팠다.
그러나 훌쩍이며 일어난 투이나는 라카인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하지만 아무데도 보내지 마세요.”
“누굴?”
“알잖아요.”
투이나가 킁 하는 소리를 내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라카인은 어쩔 줄 모르고 투이나가 제 옷으로 눈물을 닦는 걸 내버려두었다.
“생각이 정리된 다음에 다시 보고 싶어요. 그녀랑 저만 단 둘만요.”
“단 둘이서 보고 싶다고?”
“네.”
투이나가 피하고자 했던 사람은 복제된 인간과 마법사였다.
그걸 깨달으니 마음이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투이나는 지친 얼굴을 돌렸다.
“지금은 집에 갈래요.”
“집이라니, 아니, 루가야!”
“알겠습니다.”
수리시가 무어라고 소리쳤지만 라카인은 일어섰다.
투이나가 요청했다. 그렇다면 따라야지.
투이나는 아직도 미약하게 떨긴 했지만 얌전히 라카인의 목덜미에 팔을 감고 안겨 올라갔다.
“시드룬, 문 열어주세요.”
시드룬이 고분고분하게 마법진을 열었다. 그러나 투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신전 말구요.”
“어떤 곳을 말하는 겁니까?”
“제 진짜 집이요.”
투이나가 자꾸만 속에서 무언가 울컥울컥 치미는지 여러 번 침을 삼켰다.
“혹시 저한테 문제가 생기면, 복제된 투이나를 없애지 말고 여기로 보내주세요.”
“…….”
갑자기 공기가 얼어붙었다.
라카인마저도 순간 몸에 힘이 풀릴 정도였다. 투이나를 안고 있다는 생각이 아니었으면 그녀를 놓쳤을 것이다.
복제된 투이나마저도 그 말뜻을 이해한 것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수리시가 더듬더듬 말했다.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렇게 해주세요.”
“미쳤어? 복제되었다고 얘가 진짜 너라도 되는 줄 알아?”
“그럼 수리시의 남편은요?”
수리시가 멈칫했다.
투이나는 수리시가 차마 반박하지 못할 여러 감정들을 욱여넣는 것을 지켜보았다.
“수리시가 받아들였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럴 수 있을 거예요.”
“너, 너… 제정신이 아니구나. 아까 못 들었어? 내가 왜… 내가 왜 지금까지 시드룬을 돕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야? 복제된 인간은 진짜가 아니라니까!”
“그래도 살아 있잖아요.”
투이나가 조용히 속삭였다.
“….”
수리시는 입술이 하얗게 될 지경이었다.
그녀가 붙잡고 있던 복제된 투이나는 조금도 투이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복제된 자신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고도 막상 시선을 받기는 힘든지 투이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다시 올 테니까 그때까지 설득당해 주세요.”
“이봐!”
투이나는 고개를 틀어 시드룬에게 주소를 일러주었다.
무감각한 인간은 이럴 때에도 편리하게 작동했다.
시드룬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마법진을 열어주었다. 이번에는 신전이 아닌 바깥이었다.
“가요.”
투이나가 재촉하자 라카인은 무의식적으로 따랐다.
그러나 머릿속은 온통 진흙탕이었다.
호루니와 스카차가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따라왔다. 바깥은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저 쪽이 우리집이에요.”
“루가 님….”
호루니가 애가 달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투이나는 대화를 회피했다.
여전히 아픈 것처럼 라카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것이다.
명치 부근이 다시 축축하게 젖어드는 무게가 라카인의 갈비뼈를 눌렀다.
그래서 라카인은 우선 명령에 따랐다.
투이나의 집은 마법으로 갔을 때 보았던 과거의 모습과는 달리 제법 번듯하게 세워져있었다.
아마 투이나가 루가가 된 뒤로 가족들이 살기엔 어울리지 않는다며 신전에서 새로 마련해준 곳 같았다.
라카인은 문고리를 잡았다.
“잠겨 있습니다, 루가 님.”
“……집에 아무도 없나 보네요. 그냥 열어요.”
라카인이 힘을 주자 문고리는 너무도 쉽게 부서져버렸다.
무지막지한 침입이었으나, 루가의 집이니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스카차가 박살난 경첩을 보며 끄응 하고 한탄했다.
“누가 보면 완전히 빈집털이구만.”
호루니는 아무 대꾸도 없이 떨어져 나온 문짝을 옆에 기대두기만 했다.
그 사이에 라카인은 이미 투이나를 안고 안쪽을 둘러보았다.
집안은 깔끔했다. 그러나 어떤 살림의 흔적이나 자잘한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반듯하게 치워지긴 했지만 잠만 자고 가는 여관과 비슷한 모양새다.
라카인은 마땅한 곳을 찾다가 그나마 깨끗하고 푹신해 보이는 자루 위에다 투이나를 내려놓았다. 의자 대용으로 쓰는 모양이었다.
투이나는 라카인이 자신을 내려놓을 때까지 얌전히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투이나가 호위들만큼이나 낯선 눈으로 집안을 응시했다.
“…이번이 세 번째예요.”
“어떤 세 번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집에 오는 거요.”
투이나가 붉게 부은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루가가 되고 나서 한 번, 축제 때 한 번, 그리고 다시는 못 왔어요. 가족이 루가에게 사사로운 부탁을 하면 안 되니까요.”
그래서인지 투이나는 자기 집에 앉아있으면서도 꼭 손님처럼 보였다. 그 부조화가 몹시도 가슴 아팠다.
투이나의 가족은 대가족이었는데도 그다지 애정이 넘쳐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소금호수에서 투이나의 언니와 오빠를 만났을 때도 그러한 인상은 변하지 못했다.
그녀의 병 때문에 사랑받을 기회를 모두 지나쳐버린 걸까.
라카인은 가슴이 터질 듯이 저렸으나, 투이나는 말끔한 얼굴이었다.
적어도 아까보다는 상처를 덜 받아 보였다.
호루니와 스카차는 기묘한 평온함에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죄를 지을 각오를 한 라카인이 먼저 무릎을 꿇었다.
“이제는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어떤 걸요?”
“왜 루가 님의 자리를 복제된 자에게 넘기시려는 겁니까.”
라카인은 그 말을 꺼내며 속에서 무언가 들끓는 것 같았으나 간신히 참아냈다.
투이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둥글게 뜨고 있었지만, 엷게 비틀린 눈썹에서 이미 답이 보이는 듯 했다.
“제가 수호신이 될 거니까요.”
적막한 가운데 투이나의 말이 서릿발처럼 바닥을 타고 자라났다.
“죽음이든 결혼이든, 언젠가 떠나버릴 자리에 대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들어온다면 더 낫잖아요.”
단순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말투.
그 목소리, 저 표정에서 이미 모든 것은 결정되었다는 투가 배어져 나왔다.
운명이라면.
신이 그렇게 말하였으니.
라카인은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타는 듯한 벼락에 꿰뚫린 것 같았다.
그녀가 운 이유.
그럼에도 진정한 이유는.
‘이미 자신을 받아들이신 겁니까?’
막연히 그녀가 신이 되리라는 짐작보다, 완전한 신처럼 사고하고 움직이는 지금, 라카인은 선연히 번져오는 공포를 느꼈다.
무소불위의 지고한 신이 인간을 아끼고 사랑하기에 자신의 자리마저 내어준다.
얼마나 애틋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얼마나 인간들이 그 신을 사랑해주겠는가?
허나, 지금 신이 되기 직전의 인간이 하는 말에 추위와 두려움이 먼저 덮쳐오는 까닭은 그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직 인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틀렸다.’
사람을 사랑하기에 투이나가 삶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라카인은 무서웠다.
무섭고 또 무서워 몸에 흐르는 피가 모두 차가운 가시가 되어 피부를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저 안 사라져요. 오히려 다행이죠. 제가 신이 된다면 여전히 여러분을 지켜줄 수 있잖아요.”
투이나는 웃었다.
그 미소에 라카인의 마음이 찢겼다. 도저히 더는 들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