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95)화 (195/234)

나는 옆에 선 아버지의 눈치를 살짝 살피며 그에게 속삭였다.

“장소가 장소이니 무슨 일인지 지금은 묻지 않을게. 그런데, 좀 위험하지 않아? 네가 가사상태에 빠질 때마다 제나스가 네 몸을 차지하는 거.”

“위험하기보단 성가셔. 어차피 내 몸을 일정 시간 이상 차지하면 그놈 영혼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그런데도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꼬박꼬박 네게 찾아가는 이유가 뭐겠어?”

“뭔데?”

그 미친놈이 설마 내가 보고 싶어서 찾아왔을 리는 없을 테고.

정말 궁금해서 물은 건데 카이든이 미간을 좁혔다. 말하기 싫은 기색이었다.

“그게…….”

카이든이 막 대답을 해주려는 찰나에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마거릿, 이 아비만 따돌리고 둘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나게 속삭이는 게야.”

아버지는 우리의 대화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따돌린다고 말하기엔 아버지도 신이 나서 지인들을 만나고 온 것 같은데.

덕분에 카이든이 도로 입을 다물었고 때마침, 파티장 한쪽에 마련된 오케스트라 구역에서 금관악기 주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우렁찬 팡파르 선율이 퍼지며 황족의 등장을 알린다.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고 그쪽을 쳐다봤다.

황궁의 외부로 통하는 입구가 아닌 내부로 통하는 문이 열리고 황제와 황후, 그리고 에녹이 등장했다.

파티장에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들을 따라 고개를 숙인 뒤, 다시 에녹을 쳐다봤다.

에녹은 처음부터 나만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의 금안과 금방 눈이 마주쳤다. 그가 계속해서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자 파티장 사람들이 흘끗흘끗 나를 바라보는 게 보였다.

부담스러워.

다행히도 그 시선들은 황제가 입을 여는 순간 모두 사라졌다.

* * *

예전에 유안나가 가졌던 일생의 목표는 기껏해야 교황에게 엿을 먹이는 것 정도였다.

그런 그녀의 보잘것없는 목표가 알레아 섬에 다녀온 뒤로는 제법 거창하게 바뀌었다.

마거릿이 행복할 것.

행복. 그래, 그건 거창한 목표였다. 적어도 유안나에게 있어서는.

“제 목표도 비슷합니다.”

유안나를 따라 기도실로 향하던 루제프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흘끗 제 옆에 서서 걷는 루제프를 올려다봤다.

“플로네 영애를 돕고 싶습니다. 그녀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요.”

덤덤한 얼굴로 대답하는 루제프의 옆얼굴을 보던 유안나는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교황청의 한적한 복도를 걸었다.

“사실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그녀가 다른 차원에 다녀왔다는 이야기요. 어떻게 그런 일을 겪으셨는지, 그녀가 경험한 것들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지, 지금 또한 얼마나 괴로울지. 제가 감히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침묵을 가르고 루제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유안나도 그의 말에 공감했다. 사실 믿기지 않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겪은 일들을 누구에게 말해도 쉽게 믿지 못할 것이다.

루제프가 불현듯 걸음을 멈췄다. 유안나도 그를 따라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그녀는 행복해야 합니다. 물론 당신도요.”

물론 마거릿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섬 탈출은커녕 섬 안에서 한 달도 살아남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마거릿의 활약 이전엔 유안나의 희생이 있었다. 유안나가 기꺼이 자신을 바쳐 시간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마거릿은 없었다.

유안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얼굴에 개구쟁이처럼 장난스러운 기색이 가득 퍼졌다.

“저도 끼워줘서 고맙네요. 실은 주교님에게 마거릿뿐이라는 거 다 알아요.”

유안나의 대답에 루제프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 그런 것 아닙니다!”

“괜찮아요. 어차피 제게도 마거릿이 가장 중요한 걸요. 아 그리고 제가 뭘 알아낸 게 있는데요.”

유안나는 됐다며 손을 휘젓고 웃다가, 문득 주머니를 뒤적거리면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복도의 코너를 돌아 구석진 자리로 루제프를 끌어 당겼다.

그녀가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틴케이스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뚜껑 안에는 붉은 가루가 담겨 있었다.

“이게 뭔지 알아요?”

“모르겠습니다.”

“로하데 가문에서 개발했다는 텐타티오넴 꽃이에요.”

루제프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코를 틀어막았다. 그의 반응을 본 유안나가 케이스의 뚜껑을 다시 닫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꽃수술을 제거한 뒤에 가루로 만든 거라 괜찮아요. 가루만으로는 섬에서와 같은 반응은 없을 거예요.”

“이걸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꼰대 방에 지하실이 있거든요? 밤중에 몰래 들어갔었는데, 요행히 문이 열려 있더라고요.”

유안나가 말하는 꼰대란 교황밖에 없었다. 루제프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세상에 그런 간 큰 짓을……!”

“쉿.”

유안나는 자신의 입술 위로 검지를 누르고는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알레아 섬에서 우린 이 꽃 향을 맡은 뒤에 환각을 보고 흥분을 했잖아요? 이걸 가루를 만들면 다른 효과를 일으키는 모양이에요.”

“이를테면?”

“꼰대 지하실에 있던 로하데 가문의 ‘실험 일지’에 적혀 있었던 내용인데요. 내륙에서 실험했을 땐 이 꽃의 가루를 마신 사람은 졸도를 했다고 하더군요.”

“그럼…….”

“아무래도 우리를 납치할 때도 이 꽃이 쓰인 것 같아요. 차나, 약재, 음료 등에 가루를 섞어서 마시면 효과를 발휘한다더군요.”

루제프는 눈을 질끈 감고 괴로운 얼굴을 했다.

당사자 모르게 꽃가루를 체내에 흡수하게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다. 거기다가 그들처럼 신분과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면 그런 일을 벌이기가 더더욱 어렵다.

그렇다는 건 아나타의 말대로 정말 그들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자들의 배신이 있었다는 말이다.

“누가 우리를 배신했다는 건 어차피 알고 있던 내용이잖아요. 그런 표정 할 거 없어요.”

유안나가 틴케이스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손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이걸 역이용할 생각이에요.”

“역이용이요?”

“똑같이 그들을 납치할 생각이에요. 용도를 알았으니까 텐타티오넴 꽃을 모아야겠네요. 주교님, 그거 알아요? 저 도둑질에 자신 있어요.”

유안나가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윙크까지 하자 루제프는 한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역시 유안나는 성직자의 자리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그것 또한 그녀다워서 할 말이 없었다.

“납치해서는 어찌하시게요?”

“음. 우리가 당한 걸 되갚아 주는 게 좋겠네요. 알레아 섬을 다시 복원하자고 할까요?”

“성녀님!”

루제프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외치자 유안나가 농담이라며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문제는 루제프에겐 전혀 그것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는 거다.

루제프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유안나를 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떠나오기 전에 란그리드 제국의 막사에서 디에고 경과 따로 이야기 나누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랬죠.”

유안나가 미간을 좁히고 대답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신 겁니까? 두 분의 고성이 오갔다고 들었는데요.”

“무슨 고성까지야. 다들 과장이 심하네요. 그냥 좀……. 혼났어요. 디에고 경한테.”

“네? 혼이 났다고요? 경께서 감히 성녀님을 혼내셨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네……. 뭐…….”

유안나는 민망했는지 뺨을 긁적이며 루제프의 시선을 회피했다.

“디에고 경이 화내는 이유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라 괜찮아요.”

“이유가 뭔지 궁금해지는군요.”

“필요하다면, 언제든 제가 희생하겠다고 했어요. 그러니 미끼로 써도 좋다고. 어차피 전 섬에서 죽었을 운명이잖아요.”

“맙소사. 죽어야 하는 운명이 어디 있습니까?”

루제프는 황당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여 대답하고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디에고 경께서 화내실 만도 했습니다.”

“…….”

“그리고 이제 알레아 섬도 탈출했고. 피의 혈서랑 마력석만 찾으면 되는데, 그럴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루제프의 말에 유안나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위험할 일이 아예 없다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 세계에 차원의 균열이 생겨서 모란꽃 세력이 ‘실험 섬’ 같은 걸 만든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 실험 섬만 파괴했고요.”

“그건…….”

“우린 아직 차원의 균열을 메우지 못했어요. 무슨 말인지 알죠? 근본적인 게 해결되지 않은 거예요. 그걸 해결하지 못하면 제 2의 모란꽃 세력이 또 나올 거예요.”

“방법이 있습니까?”

루제프의 물음에 유안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가 그에게서 조금 떨어져 섰다.

“그건 지금부터 찾아봐야죠. 같이 찾아보실래요? 차원의 균열에 관해선 천 년 동안 실험을 진행해온 교황청에서도 조사한 게 많을 거예요.”

“하지만 저희는 열람 권한도 없을 테고 관련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교황청 내부의 고위 성직자들은 대부분 모란꽃 세력인 듯했습니다. 저희가 그 정보를 찾고 있다는 걸 들키면 위험합니다.”

“그러니 안 들키게 해야죠.”

“생각해두신 방법이 있는 겁니까?”

유안나는 호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지금부터 찾아봐야 해요. 저희가 할 일은 이거네요. 모든 일이 끝나면, 차원의 균열까지 메우고 완전한 평화를 이룩할 것. 이 긴 이야기를 저희가 마무리하는 거죠.”

유안나의 말이 꽤나 거창해서 루제프는 저도 모르게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마거릿의 생일파티엔 선물로 좋은 소식을 전해줘야 하니까 서둘러야겠네요.”

유안나의 말에 루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바랐다.

* * *

황실의 연회장.

카이든은 마거릿이 자신을 파트너로 선택하지 않았어도 괜찮았다. 마거릿은 에녹의 파트너 신청도 거절한 듯했으니까.

그래서 부러 파티장에 일찍 도착해 마거릿을 기다렸다.

[우리 후손님, 지금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데. 걱정해주는 건 아니니 착각하진 말고.]

머릿속에 제나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밀려오는 현기증에 비틀거리며 벽을 짚은 카이든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잠시만 쉬면 될 것 같은데, 아주 잠시만.

제국에 돌아온 후에도 카이든은 쉰 적이 없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위계질서가 엉망이 된 마탑을 뒤집어엎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피의 혈서를 찾기 위해 몇 년 간 발길을 끊었던 로하데 저택에도 방문했다.

하지만, 저택엔 그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었고 저택을 전부 뒤져도 ‘피의 혈서’ 비슷한 건 찾을 수 없었다. 남은 건 저택의 지하 실험실을 뒤지는 것뿐이었는데, 그건 조금 더 구체적인 계획을 짜고 잠입을 해야 했으므로 하는 수 없이 후퇴했다.

하지만 성과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모란꽃 세력이 그들을 알레아 섬까지 납치한 방법을 찾았으니까.

[나는 분명 경고했다. 아무리 증거 수집이라 하지만, 텐타티오넴을 직접적으로 만지는 건 좋지 않다고. 더군다나 가루를 들이마시다니. 그런 멍청한 짓을……. 쯧.]

“시끄럽군.”

후우. 카이든은 잠시 심호흡을 하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다가 플로네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예상대로 마거릿은 자신의 아버지인 플로네 공작과 함께 나타났다.

그리고 그간 본 적 없는 마거릿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카이든은 잠시 숨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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