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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96)화 (196/234)

꽃과 깃털로 이뤄진 화려한 머리장식에 머리카락을 전부 틀어 올린 탓에 새하얗고 뽀얀 목선이 훤히 드러났다.

오프숄더 형태의 네크라인엔 화려한 레이스가 달려 있었는데, 레이스를 지나 몸매에 딱 떨어지는 푸른색 쉬폰 레이스는 그녀의 눈 색과도 무척 잘 어울렸다. 거기다가 팔뚝까지 길게 올라오는 새하얀 실크 장갑을 끼고 플로네 공작의 에스코트를 받는 그녀는 무척 우아해 보였다.

카이든은 잠시 마른침을 삼켰다.

[머저리처럼 굴지 말고 정신 차려.]

머릿속을 울리는 제나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그는 하마터면 덜떨어진 행동을 보일 뻔했다.

플로네 공작과 주변 사람들이 있는 것도 잊고 마거릿에게 키스를 할 뻔했으니까.

마거릿은 어쩌자고 이렇게 아름다운 거지?

풍성한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그를 올려다보며 살포시 미소 짓는 마거릿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다.

카이든은 잠시 미간을 좁혔다.

가슴이 참을 수 없이 울렁거린다.

기이한 감각이다. 얼굴로 열이 쏠리는 것 같았는데 왜 그런 건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마거릿 예쁜 게 어디 한두 번 있는 일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은 정말 마탑에 가둬두고 저 혼자만 보고 싶을 정도로 살인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제기랄.’

카이든은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온몸에 힘이 들어가서 뻐근할 지경이다.

“안 되겠군. 잠시 네가 시간 좀 끌어라. 내 상태를 보면 마거릿이 걱정할 테니까.”

아직도 어지럼증이 너무 심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봐 노인네, 착각하나 본데. 넌 지금 내 노예야.”

[건방진 것.]

제나스가 화를 눌러 참는 목소리르 대꾸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명령이다. 잠깐이면 돼.”

제나스가 뭐라고 대답할 새도 없이 이미 카이든에 의해 육체의 주도권이 제나스에게로 넘어간 뒤였다.

제나스는 다소 불만스럽게 서 있다가 카이든이 ‘발현’을 외치며 인장을 찍어 내리는 통에 하는 수 없이 그가 하라는 대로 마거릿을 마중 나갔다.

* * *

에녹은 내내 심기가 불편했다.

마거릿이 파트너 신청을 거절한 것까지는 괜찮았다. 그녀는 카이든의 파트너 신청도 거절했다고 했으니까.

황족들만 드나들 수 있는 연회장 내부 입구에 서서 에녹은 마거릿과 카이든이 들어오는 장면을 놓치지 않고 주시했다.

연회장 안으로 마거릿과 플로네 공작, 그리고 카이든이 함께 들어왔다.

공식적으로 마거릿의 파트너는 플로네 공작이었다. 그러나 카이든도 함께 나란히 등장하며 마거릿에게 친근하게 굴고 있어 언뜻 보기엔 그녀의 파트너가 카이든처럼 보이기도 했다.

카이든 역시 그 점을 노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영악한 자니까.

낭패감에 에녹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들을 보며 수군대는 귀족들의 말소리가 에녹이 있는 곳까지 적나라하게 들려온다.

“플로네 영애와 로드가 친분이 있던 사이었나?”

“그것 참 의외네요. 플로네 영애에겐 황태자뿐인 줄 알았는데.”

“이제 다른 남자를 눈에 담을 때도 되지 않았소. 혼기가 찬 나이잖소.”

“그것도 그러네요. 황태자 전하께선 플로네 영애를 싫어하시잖아요.”

“그럴 만도 하지. 플로네 영애가 그분을 스토커처럼 쫓아다니면서 좀 괴롭혔소? 나라도 질려서 거들떠도 보지 않을 거요.”

“여자로서 매력이 많이 부족한가 보죠. 아니면 뭔가 하자가 있어서 그렇게 집착을 하는 건가?”

이제는 마거릿을 향한 험담으로 이어진다. 에녹은 심기가 몹시 불편해졌다.

그러나 그들의 말 중에서 사실이 아닌 건 없었다. 과거의 그는 마거릿을 진심으로 경멸했고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하면 마거릿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을까. 이제는 그에게 마거릿뿐이라는 걸 모두가 알아야 했다.

“일찍이 도착해 있었군.”

그때 황제와 황후가 도착해 에녹에게 말을 걸었다.

에녹이 입은 황태자 제복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했다. 그간 황태자의 실종으로 면이 없었던 황실이었기에, 이는 황실의 권위를 위해 황제가 직접 지시한 일이었다.

황제 황실의 체면을 다시 세우고 전쟁을 치른 상대 국가와 황태자를 납치한 세력에게 경고하기를 원했다.

그런 강경한 의지 때문에 황후 또한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못마땅한 눈초리를 하고 에녹을 훑었다. 하지만 곧 에녹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오늘따라 멋있구나. 덕분에 황실의 권위가 살겠어.”

황후의 말에 황제가 허허 웃으며 에녹의 어깨를 두드렸다.

“에녹, 이제 네가 나의 희망이니라. 그러니 실망시키지 말거라. 그간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지 떠올리고 네 형처럼 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야.”

황제의 말에 순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황후가 그를 노려봤다가 당황하여 고개를 돌렸다. 황제는 그 모습을 못 본 것처럼 웃음 지을 뿐이었다. 에녹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연회장에 들어갈 준비를 모두 끝내고 섰다. 이어서 팡파르가 울리자 에녹은 황제, 황후와 함께 천천히 연회장 안으로 입장했다.

내부엔 란그리드 제국의 고위 귀족들이 전부 모여 있었고 교황청의 사람들도 있었다. 로하데 가문을 중심으로 마법사 협회 사람들도 있었으나 정작 로하데 후작은 보이지 않았다.

모란꽃 세력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대거 모여 있는 데다가 인파가 많은 파티라 그들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에 적합했다.

에녹은 그들을 유심히 살피다가 왜 파티에 로하데 후작이 보이지 않는지 고민했다.

‘로드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모란꽃 세력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이 있는데, 그게 바로 로하데 후작, 황후, 그리고 교황이었다.

교황이야 황실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지 않아도 이상할 것이 없었으나, 란그리드 제국의 귀족인 로하데 후작은 달랐다. 그는 이 파티에 왜 나오지 않았을까.

황제의 인사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상을 내려와 에녹은 마거릿을 찾아가려고 했다. 황제가 마거릿을 먼저 찾지 않았다면 말이다.

“로드, 플로네 영애. 이리로 오게. 오늘 파티의 주인공들 아닌가.”

황제가 구석진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마거릿과 카이든을 향해 손짓을 했다.

자신들이 호명되자마자 마거릿과 카이든은 마치 발표하기 싫은 학생들처럼 떨떠름한 기색을 하고 느릿느릿 파티장의 중심부로 걸어 나왔다.

에녹은 자리에 멈춰 서서 제게로 다가오는 마거릿을 보고 잠시 숨을 삼켰다.

아름답다, 그런 상투적인 말로는 표현이 모자란다. 아찔하게 뻗은 목선과 그녀의 새하얀 피부를 돋보이는 물빛의 드레스. 마치 물의 요정이 걸어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간 고생이 많았네. 섬에 납치된 동안 영애가 신수와 각인을 했다고 들었네만.”

이어지는 황제의 말에 파티장이 술렁거렸다.

에녹은 황제의 옆에 서서 바짝 긴장한 얼굴의 마거릿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녀가 잠시 휘청하는 듯하자, 옆에 서 있던 카이든이 그녀의 팔을 잡아 무게를 지탱해준다. 바짝 붙어서 황제 앞에 선 두 사람은 마치 연인 같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에녹은 주먹을 다시 꽉 움켜쥐었다.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카이든을 밀어내고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모두의 앞에서 신수를 보여줄 수 있겠는가? 란그리드 제국이 신수를 가진 신성한 국가임을 만천하에 증명하는 걸세.”

황제가 마거릿에게 나직하게 하명했다. 황제가 은지를 파티에 데려오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마거릿이 잠시 망설이다가 에녹을 쳐다봤다. 시선이 맞물린다. 에녹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마거릿이 천천히 드레스 주머니에서 은지를 꺼내 들었다.

“세상에, 뱀이라니.”

“저게 신수라니 믿을 수 없군.”

“징그러워.”

예상과 다른 ‘신수’의 모습에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점차 커졌다. 마거릿의 두 손 위에 올라간 가느다란 실뱀이 겁을 먹고 움츠렸다.

그러자 황제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좌중을 훑었다.

“이 뱀이 하늘을 열고 내려왔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게 정말 신수라면,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증거가 있는가. 이 자리에서 보여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황제의 말에 파티장 내부가 고요해졌다. 연주하던 오케스트라의 반주 소리마저 이제 들리지 않았다.

마거릿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을 때에 교황청의 사제복을 입은 열두 주교 중 한명이 나와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바람에 뒤집어쓰고 있는 모자가 벗겨졌다.

에녹은 남자의 목덜미에 새겨진 모란꽃 문양을 발견했다.

마거릿의 옆에 서 있던 카이든도 발견했는지 에녹을 향해 눈짓한다.

“외람되오나 폐하. 말씀하신 신수와 관련해서 교황청의 입장을 밝혀도 되겠습니까. 저건 신수가 아니라, 마물입니다.”

술렁.

마거릿의 얼굴에 짙은 당혹감이 스쳤다. 에녹은 무릎 꿇은 주교를 바라본 뒤에 황후를 흘끗 보았다.

지극히 찰나의 순간이지만, 황후와 주교가 눈빛을 교환하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에녹은 짜증스레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황제가 마거릿에게 신수를 데려오라고 명한 순간부터 이런 식으로 이의 제기할 준비를 한 모양이다.

에녹은 얌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가 나서서 마거릿을 돕는 그림보다는 신수의 주인인 마거릿이 직접 나서는 편이 낫다.

아무 말이라도 좋다. 마거릿이 한마디만 먼저 해준다면, 그때 그가 나서서 그녀를 지지할 생각이었다. 아마 성질을 억누르고 얌전히 서 있는 카이든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이리라.

주교가 계속해서 말했다.

“고서의 기록에 따르면 신수에게선 마력이 아닌 신력이 느껴져야 함이 맞습니다. 하나, 이 뱀에게선 마력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주교의 말에 근처에서 카이든의 눈치를 보던 마법사 협회의 원로 의원장 하나가 재빨리 무릎을 꿇고 말을 보탰다.

“맞습니다. 이 뱀에게선 확실히 마력이 느껴집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점차 커져 갔다. 카이든의 살벌한 시선이 마법사 협회 원로 의장의 옆얼굴에 꽂혔다.

식은땀을 흘리며 카이든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원로의장이 착실하게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주먹만 한 크기의 투명한 구슬이었다.

“신수가 아닌 마물이라는 것을 증명해줄 마력구입니다. 가진 마력의 양을 판별하는 구슬로 보통 마법사들의 자질 테스트에 사용되는 물건이지요. 마력을 가진 자가 이 구슬에 손을 얹으면 구슬이 보랏빛으로 변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에녹은 마거릿이 은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는 것을 보았다. 마치 은지에게 마력을 나눠주듯이 말이다.

“좋네. 그럼 플로네 영애가 데려온 이 뱀이 신력을 가졌는지, 마력을 가졌는지 판단해 보도록 하지.”

황제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마법사 협회 원로 의장에게 고갯짓을 했다.

마거릿이 얌전히 은지를 구슬 위에 올렸다. 은지가 주먹만 한 구슬 위를 감싸고 올라가자 구슬이 보랏빛을 내며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놀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주교가 기다렸다는 듯이 은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보십시오! 역시 이건 간악한 마물입니다! 거짓으로 폐하를 속이고 감히 신을 사칭한 플로네 영애는 엄벌에 처해져야 함이 옳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처단을 해야 하니, 영애는 교황청에서 인도하여 죄를 묻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마거릿은 알레아 섬의 생존자 중 한 명이고 눈앞의 사제는 모란꽃 세력이다. 그들이 마거릿의 신변 인도를 요구하는 이유는 너무도 투명했다.

흰 뱀이 깜짝 놀라서 몸을 움츠리고 마거릿의 눈치를 봤다.

“저 X……!”

카이든이 욱해서 욕설을 뱉으려는 찰나 마거릿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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