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머리 남자, 아스달의 얼굴 한쪽으로 날카로운 번개가 스쳤다. 덕분에 제나스의 공격은 어그러지고 말았다.
강렬한 스파크가 튀고 있었던 탓에 뺨에 화상까지 입은 아스달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었다.
“큭!”
그러나 그는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제나스를 향해 석궁을 겨누며 방아쇠를 당겼다.
피융-.
‘이 정도는 가뿐히 피하…….’
제나스는 날아오는 석궁의 화살을 피해 몸을 틀었다.
문제는 그 중요한 순간에 몸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왼쪽으로 몸을 돌렸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가 움직인 방향은 오른쪽이었다.
‘젠장.’
카이든의 육체가 제나스를 거스르기 시작한 것이다.
간신히 화살 하나는 피했으나, 두 번째 날아오는 화살은 피하지 못했다. 결국 제나스는 아스달이 쏜 화살에 맞고 오두막의 나무 벽에 처박혔다.
피로 범벅이 된 아스달이 힘겹게 떨리는 숨을 뱉었다. 그의 이마에서부터 눈까지 길게 가른 상처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흘렀다.
“이봐, 반황. 뒤를 조심해야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에녹을 나무란 아스달이 다시금 쿨럭거리며 피를 토했다.
“제길, 아스달!”
에녹이 황급히 그의 상태를 살폈다. 한쪽 눈을 잃은 아스달이 힘겹게 에녹을 올려다봤다.
아스달은 오두막 내부의 소란을 듣고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고 결국 아나타가 결계를 완전히 무력화하기도 전에 결계를 뚫고 내부로 진입해버렸다.
그러니 한쪽 눈을 잃은 건 모두 자업자득이었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결론적으론 에녹을 도울 수 있었으니 다행이 아닌가.
“위험하게 이게 무슨 짓인가!”
“자네가 하고 있는 이 미친 짓거리는 위험하지 않고?”
아스달이 웃음을 지었다. 농담을 하며 에녹의 어깨를 두드리는 여유까지 부린다.
“그래도 모두 살았잖아. 우린 아카데미 시절도 함께한 나름 친한 친우가 아니었나. 친우니까 돕는 걸세.”
에녹은 여유로운 척을 해도 아스달의 손이 후들거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아스달을 부축해 일으켰다.
물론 그들의 여유는 오래 가지 못했다. 제나스가 먼지구름 속에서 뻐근한 듯 뒷목을 매만지며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제나스는 어깨에 박힌 화살을 뽑으며 미간을 구겼다. 두 남자에게 다시 공격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도 몸이 제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말을 안 듣네. 우리 후손님.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군.”
그러고 보니, 처음엔 온갖 반항을 하며 욕설을 뱉던 놈이 어느 순간 얌전해져서는 그에게 가만히 몸을 내주었지.
‘이상하긴 했군.’
평소의 그였다면 의심해 봤을 법한데, 마거릿과 대화하는데 깊이 빠져 다른 데 신경 쓰지 못한 게 잘못이었다.
쾅! 콰앙!
그때, 오두막 지붕을 뚫고 거대한 무언가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아나콘다였다. 요란하게 모습을 드러낸 놈은 하늘을 향해 입을 쩌억 벌리더니 불을 뿜었다. 이윽고 거센 불기둥이 하늘 위를 휩쓸며 뜨거운 열기를 풍겼다.
땅 위의 생명체들을 모두 압도할 정도로 충격적인 등장이었다.
괴물 같은 아나콘다의 머리 위에 자그마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다름 아닌 마거릿이었다.
“에녹!”
마거릿이 그들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아나콘다가 오두막을 뭉개고 오두막 주변의 결계마저 뚫어버렸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듯 결계가 맥없이 무너졌다.
결계가 사라지자마자 오두막 주변으로 푸른색의 마법진이 펼쳐졌다. 결계를 무력화시키는 마법을 진행 중이던 아나타가 상황을 파악하고 빠르게 마법 수식을 변경한 탓이다.
아나타는 제나스를 제외하고 그녀의 시야에 닿는 모든 이들에게 보호 마법을 걸었다.
그 모든 게 예기치 않게 나타난 마거릿 덕분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제나스마저도 황당한 얼굴로 높게 솟아오른 아나콘다와 마거릿을 넋 놓고 바라봤다.
‘저 여잔 대체 뭐야.’
대체 안식의 방에선 어떻게 빠져나왔고 저 망할 마물의 진화는 어떻게 시킨 건지 감도 오질 않는다.
예상을 깨는 것은 물론 그의 사고의 틀까지 부숴버린다. 단연코 이런 상황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때 검을 빼들고 달려온 디에고까지 에녹, 아스달과 합류하며 제나스를 대적했다. 제나스는 짜증스럽게 혀를 차고는 그들을 돌아봤다.
‘성가시게 됐군.’
* * *
멀리서 전투가 계속됐고 아나타와 유안나는 루제프를 부축하며 주변을 살폈다.
“우리는 탈출이 용이하도록 문을 열어두는 게 좋겠어요.”
아나타의 말에 유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나콘다의 등장으로 오두막이 무너지는 바람에 지하로 향하는 길이 가로막혔다. 무너진 오두막의 잔해를 치우고 지하로 향하는 길을 터 두는 게 중요했다.
아나타와 유안나는 손발을 걷어붙인 뒤, 오두막의 잔해를 치우는 작업을 시작했다.
“저도……. 저도 돕겠습니다.”
두 여자가 움직이는 것을 본 루제프가 잔기침을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교님은 몸을 회복하시는 게 돕는 거예요. 정말로 저흰 괜찮아요.”
유안나의 제지에 루제프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유안나의 얼굴을 바라봤다.
“저도 정말 괜찮습니다. 부디 돕게 해주십시오.”
그리고는 묵묵히 무거운 나무판자들을 들어 옮기기 시작했다. 아나타는 무게가 상당한 나무들을 힘겹게 밀며 심호흡을 하다가 루제프를 돌아봤다.
“마물의 모체를 몸 안에 봉인했다면서?”
아나타의 물음에 루제프가 흠칫 놀라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는 슬쩍 유안나의 눈치를 보고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정확히는 원혼들입니다. 이 실험에 유감이 많은 혼령들이죠. 잠들어 있는 동안, 제 안에 봉인되어 있는 원혼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모두 안타까운 사연을 갖고 있더군요.”
“아……. 그렇군.”
루제프의 대답에 아나타는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어색한 얼굴로 루제프를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회피하고 말았다. 아마도 원혼들이 가진 안타까운 사연의 원인 되는 자가 바로 그녀와 제나스였기 때문이리라.
루제프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물었다.
“당신은 왜 저희를 돕는 겁니까?”
유안나도 내심 아나타의 답변이 궁금했는지 그녀를 흘끗 바라봤다.
“천년 정도 살다 보면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아나타의 물음에 유안나와 루제프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힘없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기가 신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껴. 특히나 이 알레아 섬에서 피실험자들이 죽어 나가는 걸 지켜보고 있으면 더욱 그렇게 되지.”
아마도 지금 제나스가 그러하지 않을까, 루제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로하데 가문의 핏줄이 이 섬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어.”
“로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유안나가 되묻자 아나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피가 섞인 후손이라고 하니까, 기분이 이상하더군. 제물로 선정되지 않았다면 그 아이의 미래는 어땠을까, 그게 무척 궁금하더라고.”
아나타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뿐이야. 정말 그뿐…….”
“결론은 본인의 핏줄만 중요하다는 겁니까. 선택적인 동정이로군요. 덕분에 저희는 도움을 받고 있지만, 그동안 죽어간 사람들은 무슨 죄입니까.”
루제프가 그답지 않은 신경질적인 투로 대거리했다. 화를 꾹꾹 눌러 담아 애써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
유안나는 말없이 두 사람을 지켜봤고 아나타 역시 그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미안해.”
그러나 아나타의 사과가 루제프에겐 전혀 와 닿지 않았다.
* * *
제나스는 에녹 일행을 상대하는 데 생각보다 고전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성가신 보호 마법이 걸려 있었던 건 둘째 치고 공격하는 중요한 순간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순히 몸을 내어 준다 싶더니, 이런 귀여운 수작질을 하고 있었군.”
[이제 알았냐?]
제나스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머릿속으로 답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카이든이었다. 제나스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머리카락을 손으로 거침없이 헤집었다.
“봉인이 깨졌나? 되는 일이 없군.”
[너만 죽이는 게 불가능하다면, 같이 죽어야지. 절대로 나 혼자는 죽을 생각 없거든?]
하. 제나스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카이든은 그와 몸을 공유하는 편이 움직임을 제한하기 쉽다고 여긴 모양이다. 그의 전략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역시 마지막까지 실험을 지켜보기만 했어야 했나.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게 썩 좋은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다.
‘피곤하군.’
그때 거대 아나콘다가 제나스를 향해 불을 내뿜었다.
제나스는 마법진을 펼치고 가뿐히 불을 흡수했다. 하지만 연달아 공격해오는 에녹 일행을 상대하는 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은지야, 조심해! 카이든이란 말이야!”
아나콘다의 머리 위에 앉아 있던 마거릿이 외쳤다.
제나스는 그 외침을 듣고서야 자신이 그들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이든의 몸은 그에게도 중요했지만, 그들에게도 중요했던 모양이다. 제나스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아아. 이제야 얘기가 좀 쉬워지겠군. 이 몸 주인이 죽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면 다들 자리에 멈추는 게 좋을 거야.”
순간 그를 향해 공격을 퍼붓던 에녹 일행이 멈칫했다.
제나스는 아스달과 디에고마저 에녹을 따라 마거릿을 보호하고 선 것을 보며 다시 주변을 훑었다.
‘그런데, 아나타는 어딜 간 거지?’
아나타는 물론 유안나와 루제프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탈출구를 찾으러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성녀에게 내가 왜 만능열쇠를 줬는지 아나타는 모를 텐데.’
그가 열쇠에 대해 설명한 적이 없으니까.
‘아직 너희가 이 섬에 온지 1년이 되지 않았잖아. 주기가 되지 않았을 때, 닫힌 문을 억지로 열면 어떻게 될까?’
정작 아나타와 유안나가 들어야 할 말을 들었던 마거릿은 그의 눈앞에 있었다.
제나스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만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감출 수 없었다.
그래. 아나타가 그를 배신했으니, 그도 마지막 카드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쪽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제 피실험자들이 전부 죽으면 증폭된 마력을 갈취하기만 하면 됐다.
눈앞에 있는 마지막 피실험자들의 마력만 모으면, 드디어 차원을 열 수 있다.
거의 다 왔다. 거의 다.
차원의 문을 연 다음엔 펜던트의 봉인을 풀 것이다. 그 힘이라면 모든 차원을 아울러 지배하고 권력을 차지할 완벽한 힘을 갖출 수 있으리라.
[네가 하는 꼴을 내가 얌전히 보고만 있을 것 같냐?]
머릿속으로 카이든의 목소리가 울렸지만, 제나스는 무시했다. 카이든이 얌전히 있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최대한 빠르게 일을 처리할 셈이었다. 그런 다음 카이든의 자아까지 먹어치우는 거다.
제나스는 바닥에 가볍게 발을 굴러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처음엔 그저 작은 원이었던 것이 부서진 오두막의 잔해를 완전히 감쌀 만큼 커지더니, 점점 더 크게 부풀어 간다.
이를 본 에녹 일행이 제나스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마법진을 발동시키며 세운 결계에 가로막혀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이윽고 섬 전체를 감쌀 정도로 거대한 마법진이 완성됐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압도적인 크기에 섬뜩한 기운마저 풍기는 최후의 마법진이 빛을 내며 힘을 발현하기 시작했다.
환한 빛과 함께 흙더미가 땅에서 하늘 위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꼭 마치 세상이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일행들이 어떻게도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안 돼!”
금방이라도 에녹 일행을 전부 집어삼킬 것만 같은 위기감에 마거릿이 아나콘다와 함께 제나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제나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마법으로 밧줄을 만들곤 달려드는 아나콘다를 꽁꽁 묶어버렸다. 아나콘다가 쓰러지면서 놈의 머리 위에 있던 마거릿이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망할 제나스!”
마거릿이 악에 받쳐 욕설과 함께 그의 이름을 외쳤다. 끝까지 재미있는 여자.
그러다가 문득,
‘지금 그 말은 나를 죽이겠다는 소리야?’
‘넌 나 없이 그 세계에서 절대 적응 못 해. 잘 생각해 봐. 너한텐 내가 필요해.’
그녀가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갔다.
이상했다. 마거릿에게 세뇌되기라도 했는지 그 뜻이 아닌 걸 알면서도 그녀가 없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저기서 떨어지면 마거릿은 즉사다.
낙화하는 꽃잎처럼 힘없이 떨어지는 마거릿의 얼굴에 선명한 두려움이 떠올랐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심장이 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마거릿이 바닥에 충돌하기 직전.
제나스는 순간적으로 발동 중인 거대한 마법 수식을 풀고 떨어지는 마거릿을 제 손으로 받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