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72)화 (172/234)

억지로 마법 수식을 풀어버린 탓에 마력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뒤엉켰다. 제나스가 울컥 시커먼 피를 토했다.

성공이 눈앞에 있었다. 그가 만든 마법진에 모두가 발이 묶여 죽어가는 것만 지켜보면 되는 거였는데.

그랬는데-.

천년 동안 기다려온 계획이 단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마거릿 때문에.

아무리 미쳤거니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제 손으로 전부 죽일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랬기에 펜던트의 봉인을 푸는 것도 차원의 문을 연 뒤 차원을 지배하는 데 쓰기 위해 아껴두지 않았던가. 이렇게 될 것이라 예견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펜던트의 봉인부터 풀었을 것이다.

모든 건 그의 오만에서 비롯되었다.

“이게…… 이게 대체, 믿을 수 없어. 마거릿, 너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제나스가 윽박지르자 마거릿이 화들짝 놀라 그를 노려봤다.

“헛소리 그만하고 이거 놔!”

“제기랄……!! 대체 나를 어떻게 한 거야?!! 대체 어떻게……!! 어떻게!!!”

마거릿이 그의 품에 안겨 버둥거리다가 그의 이마를 자신의 이마로 세게 부딪혔다. 그녀를 품 안에서 놓쳤지만, 제나스는 그저 멍하니 충격에 젖어 있었다.

이건 대체 무슨 감정이지?

추락하는 순간에 그녀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따윌 하다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목숨 따위는 어떻게 되든 관심도 없었다. 어차피 끝내는 죽일 사람이었는데…… 그랬는데.

이럴 순 없다. 이럴 수는 없어.

[마거릿을 살려줘서 고맙다. 머저리 같은 놈.]

카이든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에서 모래알 같은 가루들이 퍼져 나왔다. 허공에 흩어진 모래알들이 둥글게 뭉쳐지며 사람의 형태를 갖추고는 바닥을 굴렀다.

마력이 크게 엉키며 제나스의 지배력이 약해지자 카이든이 제 몸을 되찾은 것이다.

튕겨져 나온 제나스가 바닥을 구르며 신음했다. 정신을 차린 카이든이 빠르게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큭.

가슴에서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제나스는 제 심장에 꽂힌 단검을 멍하니 바라봤다.

‘피실험자는 직접적으로 만나지 마. 심리적으로 그들에게 동조하거나 동화되어 버리니까. 그러는 순간 끝이야. 그들을 죽일 수 없게 된다고.’

그제야 아나타의 그 말이, 뼈저리게 실감이 났다.

그는 아나타와 다르다. 그에겐 천년의 시간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분명 그렇게 자신했었다.

유안나를 만났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왜 이제야…….

제나스는 흐릿해지는 시야가 점멸하며 완전히 소거될 때까지 자신을 노려보는 마거릿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그가 천 년 동안 이룩해온 위대한 꿈을 단 한 순간에 망쳐버린 원흉을, 그렇게 눈 속 깊이 담았다.

그게 그의 마지막이었다.

* * *

제나스가 죽었다.

그의 숨이 끊어지는 걸 확인한 카이든은 급하게 나를 찾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의 얼굴엔 언뜻 울음이 배어 있었다.

“마거릿! 무사해서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나는 네가……. 네가…….”

그는 나를 강하게 끌어안고는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몸 전체가 옅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다. 카이든이 무사히 돌아와서 너무도 다행이다. 내가 그를 얼마나 걱정했는데. 제나스가 카이든의 몸을 하고 나타났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나는 그를 꼭 끌어안고 등을 쓸어내렸다. 울컥 치미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고 있을 때였다.

에녹이 숨을 헐떡이며 내게 달려왔다. 그는 잠시 내 상태를 확인하고 엉망인 카이든의 얼굴을 본 뒤 안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은 그가 말없이 돌아서서는 제나스의 죽음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제나스는 정말로 죽었다.

그 악랄한 인간이 정말로 죽었다니까 믿기지가 않았다. 한참이 지나도 그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서야 우리는 모두 긴장을 풀었다.

이제 끝이다. 정말로 끝.

이상하게도 나를 바라보던 제나스의 마지막 얼굴은 뇌리에 깊이 남았다. 그는 왜 내게 배신감이라도 느낀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걸까.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마탑주들의 마력이 봉인된 펜던트를 주웠다.

“쿨럭.”

그때 쓰러져 있던 아스달이 피를 토해냈다.

카이든은 나를 끌어안고 있다가 모든 기력을 다한 사람처럼 정신을 잃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일행을 챙겼다. 쓰러진 카이든을 디에고가 들쳐업었다. 아스달은 에녹이 부축하고 일어났다.

상태가 모두 심각했다. 어서 유안나를 만나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았다.

다시 작은 새끼 뱀으로 돌아온 은지가 내 팔에 재빨리 매달렸다.

나는 황급히 유안나와 아나타가 있을 장소를 찾았다. 아스달의 말로는 그녀들이 탈출구를 찾아 문을 열어두기로 했단다.

탈출구라.

그 순간, 갑자기 제나스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이 섬은 1년을 주기로 란그리드 제국과 통하는 문이 열려. 나와 아나타는 그 문이 열릴 때, 새로운 제물을 받아왔지. 아직 너희가 이 섬에 온 지 1년이 되지 않았잖아. 주기가 되지 않았을 때, 닫힌 문을 억지로 열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는데?’

‘질문은 여기까지.’

혹시 그 문이, 유안나 일행이 찾으러 간 그 문이라면…….

아니, 사실 맞을 것 같다. 분명 그 문일 거다.

오두막에서 ‘탈출문’이라고 할 만한 건, 지하에 있던 그 문밖에 없었다.

나는 그제야 제나스가 유안나에게 왜 하필 ‘만능 열쇠’를 주었는지 깨달았다.

‘만능 열쇠의 의미는 대체 뭘까요. 단순히 벙커만 열라고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를 주진 않았을 텐데.’

‘혹시 본인의 계획이 틀어질 때를 대비해서 수를 쓴 거 아니야?’

‘그럼 그 열쇠를 사용해서 ‘뭔가’를 여는 게 함정일 수도 있겠네.’

우리가 했던 예측이 맞았다. 제나스가 하필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를 준 진짜 이유가 이것이었을 테다.

만약 우리 중 누군가가 지하실의 문을 발견한다면, 유안나의 열쇠를 사용해서 문을 열 수 있도록 한 거다.

제나스가 왜 그랬을까 생각하면 답은 하나뿐이다. 문을 여는 게 섬의 파괴뿐만 아니라 우리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 거다.

이 섬엔 다양한 루트의 죽음이 존재하고 아마 열쇠도 그 중 하나였을 거다.

‘닫힌 문을 억지로 열면 어떻게 될까?’

그의 말이 계속 찝찝하게 머릿속에 맴돌았다.

“……서둘러야겠어요! 성녀님이 지하실의 문을 열기 전에 그녀를 만나야 해요!”

나는 일행을 향해 외치고 서둘러 오두막의 잔해를 치우고 지하실의 입구로 향했다.

* * *

무너진 오두막의 잔해 사이로 지하실의 문을 겨우 찾았다.

유안나는 문 앞에 서서 아나타를 돌아봤다. 아나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라는 뜻이다.

잠시 마른 침을 삼킨 유안나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들었다. 아나타가 봉인되었던 안식의 방도 열었던 열쇠다.

회귀 전, 제나스가 그녀에게 주었던 만능열쇠.

‘문제 없겠지?’

그때 문득, 전에 마거릿이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그녀는 믿을 만한 사람이 맞아요?’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아나타도 제나스에게 봉인될 것을 각오하며 자신을 희생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망설여졌다.

“의심하는 거 아는데, 탈출구 맞아.”

그녀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이 아나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유안나가 문고리에 열쇠를 끼워 넣었을 때였다.

“성녀님!”

오두막의 잔해를 해치고 마거릿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안나가 그녀를 보며 반색했다.

“마거릿!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아, 그리고 문을 여는 건 잠시 기다려주세요. 제나스가 한 말이 있는데 뭔가 찝찝해요.”

다급히 달려왔는지 숨을 헐떡이던 마거릿의 팔뚝엔 평소보다도 크기가 더 작아진 실뱀이 감겨 있었다.

“아나타, 이 문은 1년을 주기로 열리는 문이라고 했죠?”

“맞아요.”

마거릿의 물음에 아나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제가 제나스에게 섬에 영혼이 묶인 성녀님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물었거든요. 그때 그가 섬을 파괴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섬을 파괴하는 방법을 알려줬는데…….”

마거릿이 굳게 갇혀 있는 문을 가리켰다.

“‘1년을 주기로 열리는 문을 억지로 열면 어떻게 될까?’라고 제게 도리어 묻더라고요.”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유안나가 미간을 좁혔다. 마거릿이 어깨를 으쓱이며 문고리에 꽂힌 열쇠를 조심히 빼냈다.

“성녀님, 이 열쇠 말이에요. 시간을 돌리기 전에 제나스가 선물해준 거라면서요.”

“아. 네……. 그랬죠.”

“제나스가 왜 하필 탈출문을 열 수도 있는 만능 열쇠를 선물했을까요?”

“……!”

“이건 아무래도 함정인 것 같아요. 1년이 되지 않았는데 열쇠를 이용해 억지로 문을 열면 섬이 파괴되는 거죠.”

“섬이 파괴되면 여기서 탈출할 수 있는 거니, 좋은 것 아닌가?”

“문제는 그 말을 제나스가 했다는 거예요. 대화의 맥락도 조금 이상했어요. 단순히 섬만 파괴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아나타. 정말 아는 거 없어요?”

그 말에 루제프와 유안나는 물론 마거릿의 등 뒤로 따라온 이들의 시선이 전부 아나타에게로 향했다.

“뭐……?”

아나타가 도리어 놀란 얼굴로 두 눈만 깜빡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유안나의 얼굴에 짙은 배신감이 어렸다.

“아나타,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제나스가 나까지 속이고 함정을 판 거라니,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아나타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잠시 말이 없던 그녀가 돌연 유안나를 쳐다보았다.

“제나스는 왜 하필 네게 그 열쇠를 줬고, 회수하지도 않았을까. 그놈이라면, 아마 재미있는 ‘변수’ 같은 걸 기대했을 거야. 네가 희망에 차서 탈출구라 믿으며 문을 열기를 바랐겠지. 마치 지금처럼.”

“……!”

“물론 너희가 문을 열어도 그만, 안 열어도 그만……. 그저 본인의 재미를 위한 선물이었던 거지.”

그 말을 들은 유안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탈출문을 열면, 섬이 파괴된다면서요. 제나스에겐 좋을 게 없는 일이잖아요.”

“이 문은 톱니바퀴처럼 섬의 시스템이 전부 맞물려 있어. 그런 문을 억지로 열면 당연히 섬이 파괴되겠지. 섬만 파괴되겠어?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는 실험체에게도 영향을 미치겠지.”

“아…….”

“너희는 마력만 남기고 전부 죽었을 가능성이 커. 마지막 실험이었잖아. 섬이 파괴되는 건 제나스에게 별 타격이 아니야. 그에게 중요한 건 너희가 가진 마력과 신력을 효과적으로 갈취하고 차원의 문을 여는 거지.”

유안나가 섬뜩하다는 얼굴로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툭.

모두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열쇠 쪽으로 기울었다.

그때 아나타가 문득 물었다.

“잠깐, 그런데 제나스는?”

“죽었어요.”

마거릿의 대꾸에 아나타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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