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70)화 (170/234)

* * *

오두막 주변으로 독가스가 짙게 깔리고 결계가 쳐졌다. 제나스의 소행이었다.

혼란의 연속이다. 아스달은 난장판이 된 주변을 훑었다.

마거릿은 제나스에게 납치됐고 카이든은 갑자기 모습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루제프는 겨우 정신을 차렸으나, 그간의 상황을 듣고는 패닉에 빠졌다. 그는 일이 이렇게 된 것이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주교님은 지금 회복에 집중해야 해요. 자책은 회복에 방해되니 나중에 하세요.”

루제프가 무너지지 않도록 냉정한 말로 그를 다독인 유안나가 루제프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발현된 새하얀 빛이 온 시야를 장악했다. 공기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저 옆에 있었을 뿐인데, 아스달은 제 정신마저 깨끗하게 정화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다행히도 루제프의 안색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유안나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내며 주위를 둘러봤다.

“별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아요. 지금 주교님께는 휴식이 필요해요.”

아나타란 여자가 유안나를 도와 루제프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아스달은 허탈하게 자리에 주저앉았다.

‘제기랄,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망할 귀걸이.’

문득, 카이든이 사라지기 직전 했던 말이 귓가에 선명히 떠올랐다.

마거릿이 납치된 직후, 카이든의 귀걸이에서 갑자기 빛이 났다. 마력 보조구라고 들었는데, 귀걸이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그 말을 남긴 뒤로 카이든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대체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들이 과연 이 섬에서 탈출을 할 수는 있는 걸까.

아스달의 시야에 독가스가 짙게 깔린 결계 속으로 뛰어 들어가려는 에녹과, 그런 그를 디에고가 가까스로 말리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차라리 부숴버리는 게 낫겠군.”

에녹이 장검을 빼어 들었다. 그가 든 검에서 번개처럼 보이는 노란 빛이 사납게 불빛을 튀기며 요동쳤다.

놀란 아스달이 달려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이봐, 반황! 자네 미쳤나!”

아스달의 제지에 에녹의 무심한 시선이 흘끗 그에게 닿았다.

“제발, 진정해!”

“진정? 마거릿의 생사도 모르는 상황에서 지금 진정하란 소리가 나오나.”

낮게 목소리를 깐 에녹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 기백이 어찌나 무겁고 살벌하던지 삽시간에 공기가 매서워졌다.

그럼에도 아스달은 물러서지 않고 그의 어깨를 잡고는 마법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발동하고 있는 결계를 힘으로 부수려다가 죽어 나간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걸 알고도 자네는 지금 그 짓을 하겠다는 건가?”

에녹은 아스달의 말을 흘려들으며 마법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에녹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아스달은 기어코 검기만으로 결계를 가르고 있는 에녹을 보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차가운 검날을 휘감고 생성된 검기가 차차 크기를 넓혀 에녹의 몸을 휘감았다.

이윽고 에녹의 주변으로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사방에 노란 불꽃이 사납게 튀겼다. 번개가 내리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압도적이고 살벌한 기운이었다.

에녹의 몸은 그 강하고 날카로운 힘에 베이며 찢기고 상처가 났다.

“제기랄, 이러다가 죽는다고!”

아스달의 부르짖음도 소용이 없었다.

“괜찮다. 위험하니까 비켜 있어.”

괜찮기는! 아스달이 발을 동동 굴렀지만, 에녹은 개의치 않고 검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온 신경을 결계를 가르는 데만 집중했다. 게다가 애초에 에녹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서 있는 건 제법 절망적이었다. 아스달은 에녹을 바라보며 자괴감에 젖었다.

그때 루제프를 돌보다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유안나가 아스달에게 말했다.

“전하의 숨만 붙어 있다면,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치료할게요. 우선 저희도 결계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얼른 찾도록 하죠.”

유안나의 말에 아스달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에녹에게서 한발 물러섰다. 그가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발만 동동 굴러봐야 체력 낭비만 할 뿐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유안나의 말대로 얌전히 에녹과 마거릿이 숨이라도 붙어 돌아올 수 있게끔 기도하는 방법밖에 없어 보였다.

이 섬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몇 달을 지내더니 다들 단체로 미친 게 분명했다. 다들 자기 목숨이 너무 쉽다.

사실은 아스달, 본인만 해도 그렇다. 이 섬에서 탈출을 하는 게 꼭 자신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스달은 무너지는 정신을 애써 부여잡았다.

보라색 연기처럼 퍼진 독가스와 푸른 장막처럼 처진 결계를 에녹이 기어코 검으로 갈라내 틈을 만들었다.

“마거릿을 찾아오겠다.”

그렇게 말을 남긴 그는 다른 이들이 나서기도 전에 결계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지켜보던 이들이 끼어들 틈 같은 건 없었다.

에녹까지 사라지고 나자 일행의 사기가 땅으로 떨어졌다.

‘하아…….’

관자놀이를 꾹꾹 문지르며 한숨을 내쉰 아스달이 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는 아나타를 쳐다봤다.

“그럼 빨리 탈출 방법을 말해보지. 지금 우리 일행을 이렇게까지 희생시키고 데려온 사람이 당신 아닌가.”

아스달이 흉흉한 얼굴로 아나타를 추궁했다. 유안나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아스달의 격한 반응을 이해하고 공감했던지라 그를 만류하지는 않았다.

“……오두막 지하에 문이 하나 있어. 제나스의 눈을 피해 그 문을 열기만 하면 돼. 안식의 방문을 열었던 것처럼, 그 열쇠로.”

아나타가 유안나의 손에 들린 열쇠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에 유안나가 놀란 얼굴로 열쇠를 내려다봤다.

“……정말 문만 찾으면 되는 거였어?”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건 아스달과 디에고 또한 마찬가지였다.

“1년을 주기로만 열리는 문인데, 그 문을 통해 실험체를 데려왔었어. 제나스가 분명 그 열쇠만 있으면 1년을 기다리지 않고도 문을 열 수도 있다고 했거든.”

아나타가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자책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그 사실을 일찍 알았다 하더라도 너희가 그 문을 열 수 있었을 리 없었을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아스달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나타는 잠시 그를 빤히 보다가 멀리 보이는 오두막을 쳐다봤다.

“오두막 주변에는 항상 안개가 깔려 있거든. 그 괴물 같은 황태자야 들어갔다고 치지만, 너희는 오두막 근처로도 오지 못하고 다 죽었을걸. 플로네 영애와 함께 있었던 걸 다행으로 여겨.”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마거릿은 왜……?”

“다른 차원에 다녀온 영혼이라 알레아 섬의 시스템이 플로네 영애에겐 일부 통하지 않았거든. 그녀 혼자 마력을 쓸 수 있었지?”

“네. 그랬죠.”

“그녀가 다른 차원에 다녀온 영혼이라서 그런 거야. 그래서 섬의 시스템이 그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 오류를 범하는 거지.”

아나타가 한 말의 의미를 아스달과 디에고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회귀 전 기억이 있는 유안나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다.

“제나스가 뭘 계획하고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 계획을 무너트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마거릿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유안나의 말에 아나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타는 회귀 게이트를 돌리기 전부터 다른 차원에 다녀온 마거릿이 모두를 섬에서 탈출시킬 열쇠가 될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다행히도 들어맞았다. 회귀 전과 달리 아무도 죽지 않고 살아있었으며, 기어코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천년 동안 이렇게 본격적으로 제나스의 오두막을 공격해온 피실험자는 한 명도 없었다.

“어떤 식으로 제나스의 발목을 잡을지 모르겠지만, 나도 부디 그런 일이 일어나길 바라.”

아나타가 조금의 희망을 갖고 중얼거렸다.

“나머지 사람들은 내가 탈출시킬 테니, 걱정하지 말고 열쇠로 탈출 문을 열면 빠져 나갈 사람은 먼저 빠져나가. 망설이면 절대 안 돼.”

아나타의 당부에 아스달이 팔짱을 낀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도와주는 건 고맙군. 하지만, 동료가 위험에 처했는데 혼자 빠져나갈 정도로 비겁하진 않아.”

“저도 혼자 나갈 생각은 없습니다.”

디에고가 아스달의 말에 동의하며 덧붙였다. 유안나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아나타를 돌아봤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자 아나타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우선 황태자와 플로네 영애를 먼저 구한 다음, 우리 후손님을 구하는 게 좋겠어.”

“왜 로드가 마지막이죠?”

“아마 제나스가 그의 몸을 차지하고 있을 거야. 그게 우리 후손님이 피실험자 명단에 포함된 이유거든.”

“……어찌 그런, 사람이 어찌…….”

충격 받은 아스달이 할 말을 잃고 입만 벙긋거렸다. 아나타는 개의치 않고 어깨를 으쓱인 뒤에 계획을 세웠다.

“우선 오두막의 결계부터 무력화시켜야겠어.”

“오두막의 결계는 어떻게 무력화시켜요?”

“제나스에게 대적할 정도는 못 되지만, 나도 일단은 마법사거든. 마력을 되찾았으니 결계 정도는 풀 수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아스달이 날카로운 눈으로 유안나를 바라보며 석궁을 들었다.

“그럼, 일단 정비를 한 뒤 바로 시작하지.”

* * *

에녹은 휘청거리는 사지를 추스르며 검을 다시 바로잡았다. 그의 옷가지는 넝마 되어 전부 찢기고 성한 곳 없이 상처로 가득했다.

이마에서부터 흐른 핏방울이 뺨을 적셨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결계를 뚫고 들어와 드디어 제나스의 오두막 앞으로 진입한 차였다.

“자칫하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구동 중인 마법진의 결계를 억지로 뚫다니, 그 무모함에 감탄이 절로 나오는군.”

오두막 문을 열고 나타난 인영은 너무도 익숙한 사람의 것이었다.

에녹은 은발에 붉은 눈, 그리고 오른쪽 귀에 귀걸이를 하고 있는 남자를 노려봤다.

양팔을 활짝 벌리고 공기를 들이마신 남자가 상쾌한 얼굴을 하고 에녹을 바라봤다.

“마거릿도 그렇고 요즘 애들은 아주 패기가 넘쳐. 하지만 안타깝게 됐어. 어렵게 왔을 텐데, 더는 못 들어가.”

그 얼굴은 분명 카이든이었다.

하지만, 표정과 말투 몸짓 등은 절대로 에녹이 알던 카이든이 아니었다.

에녹은 잠시 오두막과 제나스의 위치, 그리고 오두막의 앞마당의 넓이를 한 번 가늠했다.

이전에 마거릿과 카이든이 했던 설명에 의하면 오두막의 3층에 안식의 방이 있다고 했다. 제나스가 마거릿을 납치해 어딘가에 데려다 놨다면, 분명 그곳밖에 없으리라.

위치를 가늠하자마자 그는 곧장 자세를 잡고 제나스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이보게. 정말 나를 상대할 텐가? 자네 일행의 몸을 하고 있는데?”

제나스가 재미있다는 듯 턱을 매만지며 웃음을 지었다.

에녹은 말없이 제나스를 노려봤다. 고요하던 에녹의 주변으로 갑자기 옅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에녹의 흑발이 살랑거리며 흔들리다가 이내 그의 발밑으로 원형의 강렬한 회오리바람이 생성됐다.

지지직-!

에녹의 검날에서 매섭게 튀기는 불꽃은 상대를 단숨에 압도시킬 정도로 위압적인 기운을 풍겼다.

제나스는 잠시 주춤하고는 감탄했다.

긴 실험의 마지막이었기에, 대륙에서 가장 대단한 마력을 가진 자들만 골라 데려왔고 자신의 손으로 이 계획을 승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힘을 실제로 마주하는 것은 달랐다.

‘전쟁 영웅이라고 했던가. 기가 막힐 정도인데.’

그래봐야 완전한 육체를 얻고 마력까지 개방한 제나스가 상대 못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제나스는 제게로 달려오는 에녹을 피해 그의 등 뒤로 워프했다. 곧바로 에녹의 뒤를 노려 공격 마법을 날렸다.

아쉽게도 에녹은 가뿐히 바닥을 굴러 공격을 피했다. 놀라울 정도의 순발력이었다.

자세를 바로 잡은 에녹이 곧장 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러자 제나스가 서 있는 방향까지 바닥이 쩌억 갈라졌다. 회오리처럼 맹렬하게 솟아오른 불꽃이 갈라진 틈 사이로 튀어나와 제나스를 공격했다.

제나스는 급히 워프 마법을 발동해 날아오는 검기를 피했다. 에녹의 앞으로 이동한 그는 속박 마법을 걸기 위해 에녹의 발밑으로 마법진을 구현시켰다.

그러나 에녹이 마력을 사용해 검기를 펼치고 있는 상태라 힘의 흐름이 흐트러져 속박 마법은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

‘제법이군. 진심으로 상대해야겠어.’

제나스는 자세를 바로 하고는 마력을 모았다. 그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빛이 소용돌이치며 크기를 키웠고 이내 그것이 곧장 에녹을 향해 내리쳤다.

콰앙!

에녹이 서 있던 자리 주변으로 바닥이 깊게 패이며 거센 돌풍을 동반했다.

뿌연 흙먼지가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사위가 고요했다.

아무런 움직임도 감지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에녹이 재기불능 상태가 된 모양이었다.

‘끝났나.’

너무도 쉽게 마무리가 되었지만, 오랜만에 나쁘지 않은 전투였다. 혀를 찬 제나스가 미련 없이 돌아서려는 때였다.

타다닥-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흙먼지 안쪽에서 무언가 빠르게 흙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그것이 흙먼지 사이로 튀어 올랐다.

타다다닥- 탁!

피로 범벅이 된 몰골이었지만, 에녹은 놀라울 정도로 건재했다. 제나스는 황급히 바닥을 굴러 자리를 피했다.

쿵-!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검이 꽂혔다. 제나스는 조금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에녹이 그를 돌아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땅에 박힌 검을 뽑고 있었다.

“제길, 대체 뭐야?”

이 정도 공격이었다면, 보통의 인간이라면 죽는다. 기상천외한 괴물이었다.

‘그냥 섬을 전부 파괴해버릴까. 그럼 한 번에 죽일 수 있는데.’

하지만, 그랬다간 천년의 실험이 무용지물 될 것이 분명했다.

성가시지만 직접 움직여 끝을 보는 수밖에.

제나스는 제게 달려드는 에녹을 보며 분신 마법을 시현했다. 순식간에 제나스의 모습이 둘에서 셋으로, 넷에서 다섯으로 늘어났다.

에녹이 잠시 주춤한 사이, 그의 등 뒤로 나타난 진짜 제나스가 뾰족하게 날이 선 번개를 생성시켜 그를 향해 내리꽂았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피하지 못하리라!

확신에 찬 공격을 감행하던 그때.

“조심해!”

에녹을 밀치며 나타난 분홍 머리 남자가 제나스의 공격을 비켜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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