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잠깐, 잠깐만……!”
제나스가 마법진 위에 서 있는 내게로 천천히 걸어왔고 나는 황급히 두 팔을 벌려 그를 멈춰 세웠다.
못마땅한 얼굴로 눈썹을 치켜 뜬 그가 나를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왜. 할 말 있어?”
“지금 그 말은 나를 죽이겠다는 소리야?”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새삼스럽게 무서워? 괜찮아. 금방 끝내줄게.”
깜짝 놀란 나는 빠르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자, 잠깐! 기다려. 기다려 봐. 카이든……! 카이든은, 정말로 죽었어?”
“죽는 게 차라리 낫지. 말하지 않았나. 내가 먹었다고. 영원히 여기서 깨어나지 못할 거야.”
제나스가 다시 한 번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절망적인 답변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나는 감정을 애써 추스르며 자기세뇌를 했다.
‘괜찮아. 그래도 죽지 않았잖아. 죽지 않았으면 됐어. 그러니까 정신 차려.’
* * *
제나스는 미간을 좁히고 끙끙거리는 마거릿을 가만히 쳐다봤다.
마법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있는 마거릿은 꼭 새장 속 귀여운 카나리아 같기도 했다. 그 작은 머리통으로 머리를 암만 굴려봐야 답은 없을 텐데.
촛불에 붉게 그림자 진 그의 얼굴에 엷게 웃음기가 배어 나왔다.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쓸데없이 잔머리 굴리느라 힘 빼진 마.”
그가 입을 열자 마거릿이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다. 반짝이는 푸른빛 눈동자에 일순 불쾌함이 담겼다. 제나스는 그를 향한 그녀의 혐오를 느긋하게 받아들였다.
고민 어린 얼굴로 망설이던 마거릿이 조심스레 말했다.
“……저쪽 세계 사람들이 왜 차원의 문을 열지 않는 거냐고 물었지? 그 세계엔 마법이 없어. 네 상상과 다르게 마법이 아닌, 산업기술이 고도로 발달했거든.”
마거릿의 말은 그의 흥미를 끌었다. 마법이 없는 세계라니. 어떻게 그런 세계가 있을 수가 있지?
제나스는 진지하게 마거릿의 이야기를 들어줄 의향이 있다는 얼굴로 고개를 까딱했다. 더 말해보란 듯이.
마거릿이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눈치를 보다가 뒷말을 이었다.
“내 머리를 열어도 소용없어. 직접 겪고 느낀 경험과 단편적인 기억은 비교할 수 없거든. 넌 나 없이 그 세계에서 절대 적응 못 해. 잘 생각해 봐. 너한텐 내가 필요해.”
그에게 자신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악에 받쳐 그를 노려보는 마거릿의 몰골은 제법 볼 만했다. 더 괴롭혀서 눈물을 보고 싶을 정도로.
그건 제나스로서는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가학성이었다. 애초에 그가 누군가에게 이 정도로 흥미를 가져 본 것도, 대화를 하는 게 즐겁다는 감상을 해본 것도, 처음이었지만.
제나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마거릿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죽임당하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그를 회유하고 있지만, 그를 향한 적대적인 표정을 감출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하여간 귀엽군.’
바로 죽여 버리긴 역시 아쉽다.
그녀를 바라보며 제나스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제가 그렇게 미소를 머금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는 마거릿을 향해 짐짓 오만한 투로 말했다.
“안타깝지만, 마거릿. 나는 차원 너머의 세계에 적응할 생각은 없어. 내가 온전히 지배를 하면 그만이잖아.”
그를 노려보는 마거릿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제나스는 팔짱을 낀 채로 동요하는 그녀의 얼굴을 감상했다. 그러다가 의자를 끌고 마거릿에게로 바짝 다가가 앉았다.
그런 그를 보며 마거릿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사실 그의 주관적 감상을 제외하고 봤을 때도 마거릿은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제나스가 마거릿에게 느끼는 이 기이한 감정은 당연하게도 그런 외적인 요소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아마도 다른 차원에 다녀왔다는 말을 들어서겠지. 그녀가 정말로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천년 만에 너 같은 건 처음 보긴 해.”
제나스가 무심코 뱉은 말에 마거릿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말 진짜 엿 같이 잘 해. 넌 천 년 전에도 친구 없었지?”
“친구? 그런 게 왜 필요하지? 흠. 그런데 이렇게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시간을 버는 게 목적이라면 성공했군. 남는 게 너무 없어서 쓰레기 같은 대화지만, 이런 것도 나쁘진 않아.”
이대로 해야 할 일도 미루고 계속해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의 대꾸에 분노한 마거릿이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줄줄이 뱉어댔다. 제나스는 즐겁게 그녀의 욕설을 한귀로 흘려들었다.
그녀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어 그는 잠시 화제를 전환해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 번에 독은 어떻게 해결했지?”
“이 XX……. 뭐?”
“텐타티오넴 꽃. 심하게 중독된 것 같았는데. 일행이 해결해 줬나?”
한참 욕을 하고 있던 마거릿이 갑자기 고뇌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나스는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벙커에서 만난 그녀는 이미 텐타티오넴 꽃에 심각하게 중독된 상태였다.
그를 끌어당겨 안고는 놔주질 않던 그녀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문대던 감촉까지 아직 생생했다.
‘가지 마, 제발…….’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하던 그녀의 목소리까지 떠올리자니 기분이 다소 묘해졌다.
“알아서 뭐하게?”
마거릿은 삐뚜름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히려 그렇게 반항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입을 다무니 더 궁금해진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제나스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대답해주면, 보상으로 네 질문에 대한 답을 한 가지만 해줄게.”
“에녹과 카이든이 해독해줬어. 그 이상은 묻지 마.”
마거릿은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대답하고는 도전적인 시선으로 그를 노려봤다. 제나스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선 에녹과 카이든 앞에 그녀를 두고 나왔던 것이 다시금 떠올렸다.
‘그때 그냥 데리고 나올 걸 그랬나.’
텐타티오넴의 해독 방법을 알고 있기에 괜히 몹쓸 상상을 했다가 기분만 나빠졌다.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해. 이 섬에 영혼이 담보로 묶이면, 살아남을 방법은 아예 없는 거야?”
마법진의 결계에 바짝 붙은 마거릿이 그를 향해 물었다. 제나스는 그녀가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단번에 파악했다.
“네가 뭘 궁금해 하는지 알겠는데, 그런 건 불가능해. 성녀는 살릴 수 없어.”
그렇게 말한 그는 마치 신이 인간을 굽어 살피듯이 자비를 베푸는 얼굴로 한마디 덧붙였다.
“섬 전체를 파괴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전부 없애버리면 영혼을 담보로 묶을 필요가 없어지잖아. 하지만 마거릿, 섬을 무슨 수로 파괴시키겠어. 안 그래?”
제나스는 잠시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새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마거릿과 대화를 계속 나누고 싶었지만, 더 지체하는 건 곤란했다.
그러나 절망적인 얼굴로 앉아 있는 마거릿을 그냥 지나치기 다소 찝찝했던 그는 결국 한 마디를 덧붙였다.
“사실 섬을 파괴하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해.”
그녀가 단박에 희망적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제가 먼저 꺼낸 말이지만, 그녀의 얼굴이 퍽 우스웠다. 그가 하는 말 따위로 희망을 갖다니.
“이 섬은 1년을 주기로 란그리드 제국과 통하는 문이 열려. 나와 아나타는 그 문이 열릴 때, 새로운 제물을 받아왔지. 아직 너희가 이 섬에 온지 1년이 되지 않았잖아. 주기가 되지 않았을 때, 닫힌 문을 억지로 열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는데?”
“질문은 여기까지.”
“제기랄, 말을 해줄 거면 제대로 해주든가!”
“너도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다 해주지 않았잖아.”
콰아앙-!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커다란 굉음과 함께 바닥에서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결계 외부에서 거센 충돌이 일어난 것 같았다. 제나스가 방문을 가만히 노려봤다.
누군가가 오두막의 결계를 뚫고 진입했다.
“손님이 왔네.”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보고 마거릿이 결계를 거세게 두드렸다.
“어디 가!”
“손님맞이.”
“나 풀어주고 가.”
“재미있는 소리를 하네. 여기 있어. 내가 지켜줄 테니까.”
“네가 직접 죽이기 전까지 가만있으란 소리겠지. X소리 할 거면 그냥 입을 닥쳐!”
마거릿의 격한 외침에 제나스가 즐겁게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그녀는 최후까지는 살려둬야겠다. 재미있어.
“다녀올게.”
그렇게 말한 제나스는 결국 마법진 안에 마거릿을 내버려 둔 채로 안식의 방을 나갔다.
* * *
나는 마법진 밖으로 나가기 위해 발악하다가 결국 힘만 소진하고 바닥에 다시 누워버렸다.
‘망할 제나스!’
그렇게 제나스를 욕하며 한참을 누워 있는데, 복부에서 무게감이 느껴졌다. 뭔가 묵직한 게 내 배 위에 올라와 있는 것 같았다.
슬쩍 고개를 내리니 은지가 내 눈치를 보며 시무룩한 얼굴로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은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꼭 탈출하는 게 내가 아니어도 괜찮다. 은지는 부디 이 섬에서 나가 좋은 공기를 마시며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은지야, 너는 괜찮아?”
내 물음에 은지는 조금 슬픈 눈을 하고는 나를 쳐다봤다. 해맑고 귀여운 아이가 그런 눈을 하고 있는 건 처음 봤다.
녀석은 몹시 기가 죽어 있었다. 아무래도 내게 도움이 되지 못해 자책하는 걸로 보였다. 가슴이 뭉클해져서 나는 녀석의 민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어쩔 수 없었어.”
내 위로가 썩 도움이 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녀석은 내 배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그렇게 어리광을 부렸다.
그런데 갑자기 내 몸에서 마력이 쑥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당황스러운 현상에 어리둥절했는데, 빠져나간 마력이 꼭 은지의 몸 안으로 스며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의 몸에서 은은하게 광채가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만, 은지야. 너 왜 그래?!”
내가 놀라서 외치자 녀석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내 눈부신 빛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빛이 소거되고 시야가 돌아왔을 땐, 내 몸 위를 무겁게 차지한 거대한 아나콘다의 은비늘이 보였다.
“으윽.”
배가 심각하게 눌려 고통을 호소하자 은비늘이 바짝 서더니 이내 빠르게 움직였다. 나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놀란 눈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은지가 방안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크기로 성장해 있었기 때문이다.
은지가 스스로도 당황한 듯이 허둥지둥 방안을 기어 다녔다.
녀석이 진화하며 커진 덕분인지, 마법진의 양초가 일부 쓰러져 있었고 마법진도 엉망으로 뭉개져 있었다. 마력으로 그린 것이라 뭉개질 일이 없을 텐데 말이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 엉망으로 된 마법진 앞에 섰다. 그러곤 천천히 결계를 향해 손을 뻗었다.
투명한 벽에 가로막혀야 할 손이 아무런 방해 없이 허공을 휘저었다.
‘맙소사, 진짜로 결계가 사라졌네.’
나는 마법진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은지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듯이 이리저리 방안을 기어 다니는 중이었다.
마물인 은지가 진화를 한 것이 어쩌면 결계에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북섬에 넘어와서 마주쳤던 상상 이상의 거대한 아나콘다가 떠올랐다. 혹시 내가 마력을 더 나눠주면, 그 마물의 몸집만큼이나 은지가 커질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아주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은지야, 언니랑 깽판치러 가지 않을래?”
은빛 아나콘다는 그저 내 말이면 뭐든 좋다는 얼굴로 해맑게 혀를 날름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