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8. 레오니에, 어린 날 (50/51)

외전 8. 레오니에, 어린 날

펠리오와 바리아의 결혼식은 무사히 끝났지만, 그들의 신혼여행은 3년이 지난 뒤에야 떠날 수 있었다.

“그때 후딱 가 버리지.”

레오니에가 아쉬워했다.

“그랬으면 벌써 동생이 하나 더 생겼을지도 모르는데.”

“동생 싫어!”

벨레아니가 기겁을 하며 반대했다.

“동생 따윈 필요 없어!”

“왜? 동생은 귀여운데.”

“동생은 싹수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생명체야.”

“자기소개인가….”

어이가 없어진 레오니에가 흥분한 여동생을 번쩍 안았다.

“그럼 집 잘 부탁해.”

바리아가 두 딸의 볼에 입술을 쪽쪽 맞추며 잠깐의 이별을 고했다.

“레아 넌 언니한테 대들지 말고, 말 잘 듣고 있어.”

“걱정 붙들어 매셔!”

벨레아니가 호쾌하게 단언했다.

“언니야쯤이야 없어도 알아서 잘하니까.”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가늘게 접힌 레오니에의 두 눈은 미심쩍은 의혹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건 다녀오마.”

펠리오도 마차에 오르기 전에 두 딸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사위한테 인사는 받고 가지.”

“누가 사위야.”

펠리오가 학을 뗐다.

“당신도 이쯤 되면 그만 사위로 받아들여요.”

바리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스칸디아는 레오니에가 졸업하자마자 보레오티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이미 세간에선 스칸디아를 보레오티의 두 번째 안주인으로 여기는데, 정작 보레오티의 가주는 아직도 결혼 허락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아빠, 내 나이가 벌써 스물 하고 셋이야.”

동거만 어느새 4년 차였다.

“결혼 허락을 해 주든가, 아니면 나랑 스칸이 별관에서 따로 동거해 살림 차리는 걸 허락해 주든가.”

“네 나이에 무슨 결혼이야.”

펠리오는 자신이 서른 넘어 결혼했으니, 레오니에도 서른이 넘으면 결혼을 허락할 생각이었다. 제 딴에는 쉰에 시키려고 한 것을 무려 20년이나 당겨 준 거라며 으스댔다.

“…….”

레오니에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은 많은데, 효심으로 겨우 참을성을 끌어내는 중이었다.

“스칸 님은 아침에 잘 다녀오라고 인사했어.”

바리아가 너무 걱정 말라며 레오니에를 위로했다.

“엄마가 가서, 설득 한번 해 볼게.”

“설득했다가 엄마만 위험해지는 거 아냐?”

위험을 핑계로 음험한 처벌이 내려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가능성은 있어.”

바리아가 목소리를 낮췄다.

“네 아빠랑 스칸 님은 술도 같이 나누는 사이잖아.”

결혼 허락은 아직이지만, 펠리오와 스칸디아는 예전과 비교하면 무척 사이가 가까워졌다. 술잔도 종종 나누고, 펠리오가 공무 때문에 외출할 때는 이따금 스칸디아를 데려가 사람들에게 직접 소개해 줄 때도 있었다.

“여행 다녀오면 네 아빠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지도 몰라.”

“나는 그 긍정이 부디 3, 4년이 아니길 바랄 뿐이야.”

정작 레오니에는 회의적이었다.

“언니야 결혼하게?”

벨레아니가 레오니에의 배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난 벌써 한 줄 알았는데!”

“그러게나 말이야.”

레오니에의 웃음이 공허했다.

“자, 그럼 엄마랑 아빠는 이제 진짜 갔다 올게.”

바리아의 말대로, 이제는 진짜 출발할 시간이었다.

“다녀와! 빠빠!”

벨레아니가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바리아가 먼저 마차에 오르고, 펠리오는 저택에 남을 아이들에게 마지막 안부를 전했다.

“레아는 언니 말 잘 듣고.”

“생각해 보고!”

“레오 넌 네 차명으로 내 재산 빼돌리지 말고.”

“애 돌보는데 하나 정도는 용서해 주라.”

“나 애 아냐!”

벨레아니가 레오니에의 코를 잡아 뜯으며 소리쳤다.

“…어휴, 저것들을 두고 가야 한다니.”

마차에서 지켜보던 바리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녀와! 올 때 동생!”

“싫어어어!”

장녀와 차녀의 격한 인사를 뒤로하며, 보레오티 공작 부부를 태운 마차는 여행지로 향했다. 목적지는 남부 아우스트 공작이 준비해 준 해안가였다. 출입이 철저히 제한된 별장에서 무려 열흘간 지낼 예정이었다.

“…자아, 그럼.”

레오니에는 벨레아니를 품에 안은 채로 저택으로 들어왔다.

“언니는 이제 일 때문에 바쁠 예정인데.”

“히잉, 같이 안 놀아줘?”

“네 아빠가 일을 너무 많이 남겨 두고 갔어.”

“아빠는 언니야가 형부랑 못 놀게 하려고 그런 거야.”

영특한 아가 맹수가 완벽한 추리를 자랑했다.

“으음, 그럼…….”

벨레아니가 팔짱까지 낀 채 진지하게 고민했다. 고민하느라 찌푸려진 미간을, 레오니에가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렀다.

“형부랑 놀래.”

“뿜뿜이는 아마 훈련장에 있을걸?”

“헤헤, 뿜뿜이 형부!”

벨레아니가 들뜬 걸음걸이로 앞장섰다.

“이제는 예쁜 아찌라고 안 부르네?”

뒤따라가는 레오니에가 짓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애도 아니고! 곧 있으면 여덟 살이라고!”

“흥, 이 언니는 이미 스물셋이란다.”

“우와, 엄청 늙었네.”

“네가 오늘 혼나려고 작정을 했구나.”

울컥한 레오니에가 벨레아니의 발목을 잡고 거꾸로 들어 올렸다. 벨레아니가 자지러지는 웃음을 터트렸다.

회랑을 지나, 가시단 훈련장에 도착한 벨레아니가 문득 고개를 올렸다.

“와, 사자다.”

천장에는 언젠가 자신들의 선조 중 누군가가 그렸다는 검은 사자가 입을 쩍 벌린 채 포효하고 있었다.

“저런 건 너무 보지 마. 나중에 꿈자리 사납다.”

바닥에 내려놓기 무섭게, 벨레아니는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형부!”

우렁찬 외침에 기사단 단원들이 흐뭇한 미소와 함께 길을 비켜줬다. 그렇게 다다른 곳에는 한쪽 무릎을 꿇고 달려오는 아가 맹수를 안아 줄 준비를 마친 은발의 기사가 있었다.

“레아 님!”

스칸디아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달리시다 넘어지면 크게 다치십니다.”

“에이, 그 정도론 안 죽어.”

안 죽으면 장땡이라며, 벨레아니는 오늘도 연륜이 묻어나는 어휘력을 자랑했다.

“이게 코라도 깨져 봐야 정신을 차리지.”

어느새 다가온 레오니에가 잔소리를 했다. 벨레아니가 볼을 부풀리며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야는 표현이 왜 그렇게 극단적이야?”

“걱정하는 거야.”

레오니에가 얄미운 여동생의 머리를 벅벅 쓸었다. 예쁘게 자른 단발머리에 쓴 분홍색 머리띠가 살짝 삐져나왔다. 스칸디아가 부스스해진 벨레아니의 머리칼을 손으로 빗은 뒤, 머리띠를 원래대로 고쳐 씌워 줬다.

“언니야는 내가 형부랑 친해서 질투하나 봐.”

어쩔 수 없구먼, 벨레아니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스칸디아가 정말이냔 듯이 레오니에를 바라봤다. 기대에 찬 눈빛이 반짝거렸다.

“…질투는 무슨.”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꼈다.

“어차피 우리 자기는.”

스칸디아가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축 내리던 차였다.

“나밖에 안 보이잖아.”

한 손가락으로 스칸디아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치?”

기운 없던 잿빛 눈동자가 생기를 점점 되찾아 가자, 레오니에가 야릇한 눈웃음을 쳤다.

“…좀!”

벨레아니는 자신의 임시 보호자 둘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둘 다 내가 여덟 살인 거 까먹었어? 이런 건 애 정신교육에 안 좋다고! 자중 좀 해.”

구구절절 다 옳은 정론이었다.

“죄송합니다….”

스칸디아는 어린아이에게 부끄러운 꼴을 보였다며 반성했다. 하나 레오니에는 아니었다.

“난 한평생을 자중하며 살았어!”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였다면서, 이제는 즐길 자격이 있다고 반박했다.

“네 아빠랑 엄마가 얼마나 닭살이었는지 아냐? 나도 그 사이에 껴서 고통받고 살았다고.”

“그럼 언니야도 내가 힘든 거 알아야지!”

“아니.”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꼈다.

“오히려 네 아빠랑 엄마가 하는 걸 보고,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며 이를 갈았단다.”

“어휴….”

벨레아니가 사뭇 안타까운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우리 언니야는 언제 철들려나….”

그러곤 저의 작은 품으로 레오니에를 끌어당겨 꼭 안아 줬다. 여태 자매 싸움을 즐겁게 관전하던 스칸디아가 기어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여튼 두 분 다 사이가 좋으십니다.”

“들었지? 스칸이 나보고 좋은 언니란다.”

“언니야는 귀나 파.”

귓구멍에서 돌 나온다고 까불거리던 벨레아니는 끝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자, 공중부양!”

레오니에는 사랑하는 여동생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그대로 팔을 들어 올렸다.

“아아악!”

덕분에 벨레아니는 고통스러운 까치발을 세워야 했다.

“우리 근육이는 목소리도 우렁차지.”

레오니에는 어느새 추억에 젖어 있었다. 여동생의 성량이 어릴 적부터 남다르긴 했었다. 그리고 레오니에가 팔에 힘을 조금 더 실으려던 순간.

“잘못했어! 잘못했어!”

드디어 벨레아니의 입에서 패배 선언이 나왔다.

이를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멜레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기시감이 느껴지네.”

멜레스의 혼잣말에 기사들이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언니야는 너무 치사해!”

정원을 산책하는 벨레아니가 씩씩거렸다.

“나이를 그렇게 먹었으면서, 어떻게 어린 동생을 이겨 먹으려고 한담.”

“레오를 이기는 건 힘들죠.”

뒤따라가던 스칸디아가 동의했다. 벨레아니가 배신감에 치를 떨며 입을 쩍 벌렸다.

“형부는 내 편 들어줘야지!”

“하지만 사실이지 않습니까.”

“…….”

입술을 삐쭉 내민 벨레아니가 휙 돌아섰다.

“흥, 다들 언니야만 좋아해….”

차기 공작에, 뭐든 잘하고, 부모님의 기대도 듬뿍 받고. 반면에 저는 장난만 치는 철부지 꼬마였다.

“나 좋아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

“그런 말씀 마세요.”

스칸디아가 잔뜩 삐친 벨레아니의 볼을 조심히 어루만졌다. 그런다고 심술보가 가득찬 볼이 금방 가라앉진 않았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레아 님을 좋아한답니다. 당연히 저도 레아 님을 좋아하고요.”

“그치만….”

벨레아니가 스칸디아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는 이내 시선을 피했다. 그러곤 애먼 땅을 발로 퍽퍽 찼다.

“레아 님.”

스칸디아가 벨레아니를 품에 안았다. 곧 느릿한 걸음으로 정원을 산책했다. 초봄인데도 정원에는 아직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여 있었다. 스칸디아의 걸음을 따라 눈이 사박사박 밟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레오는 레아 님과 입장이 조금 다릅니다.”

“무슨 입장?”

“레아 님도 이제는 아시지요? 레오가 어렸을 적에 어디서 자랐는지.”

벨레아니가 고개를 느리게 주억거렸다.

“고아원이랬어.”

이제 벨레아니는 레오니에가 저와 엄마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레오니에가 부모님과 의논해, 벨레아니도 어느 정도는 알아도 될 나이란 결론을 내린 뒤에 직접 알려줬기 때문이다. 물론 전부 다는 아니었지만.

“고아원에서 태어난 귀족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고아원에서 자랐다?”

순진한 대답에 스칸디아의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모두가 이렇게만 생각해 준다면, 세상이 얼마나 행복해질까. 하지만 그러지 못하였다.

“천하고 무식하단 뜻입니다.”

벨레아니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우리 언니야는 엄청 똑똑하고, 못하는 게 없어!”

조금 전까지 삐치고 화낸 건 다 잊어버렸는지, 벨레아니는 언니를 비호하기 바빴다. 가는 목에 핏줄이 설 정도였다.

“…누가 그랬어?”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아가 맹수가 이를 갈았다.

“목을 뜯어 버릴 거야…!”

“다 옛날 일입니다.”

스칸디아가 아가 맹수를 진정시켰다. 아직 어리다고 해도 과연 보레오티는 보레오티라고, 벨레아니가 내뿜는 살기에 스칸디아의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그래서 레오는 남들보다 몇 배나 노력했죠.”

저를 얕잡아 보는 귀족들을 직접 족치기 위해서라도, 레오니에는 필사적으로 노력해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벨레아니가 입을 쩍 벌렸다.

“언니야도 노력해?”

“이 세상에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엇이든 다 잘하는 언니라고 막연히 생각했던지라, 벨레아니에게 스칸디아의 말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은 한결 가뿐해졌다.

“언니야도 못할 때가 있었구나.”

벨레아니가 헤실헤실 웃었다.

스칸디아의 위로 덕에 벨레아니는 금방 기운을 되찾았다.

“형부는 역시 멋진 남자야!”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둘은 손을 맞잡은 채 사이좋게 저택으로 돌아갔다.

“이젠 무얼 하고 놀까요?”

“언니야 이야기 듣고 싶어.”

레오니에가 열심히 노력했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과 커다란 호기심이 벨레아니의 마음속에 피어났다.

“언니야가 어렸을 때!”

한데 스칸디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살짝 음울한 기색에 벨레아니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안 돼?”

벨레아니가 입술 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혼자 하실 건가요?”

스칸디아가 저도 같이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벨레아니가 빵긋 웃으며 호기롭게 승낙했다.

“그럼 형부가 내 부하 해!”

“예, 대장님.”

부하의 깍듯한 대우에 꼬마 대장이 히죽거렸다. 그렇게 레오니에 어린 시절 모험단이 결사되었다. 모험단이 맨 처음 찾아간 사람은, 레오니에를 어릴 적부터 돌본 전속 하녀인 코니와 미아였다.

“큰 아가씨가 어렸을 적이요?”

“어머, 이거 말해도 되나?”

코니와 미아가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럼 이 이야기는 어떨까?”

“그건 괜찮겠다, 얘!”

하지만 이미 말할 기색이 만만이었다.

“큰 아가씨는 말이죠.”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코니였다.

“어릴 적부터 경제와 돈에 관심이 많으셨답니다.”

“돈을 헛되게 쓰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죠.”

“돈을 왜 써?”

벨레아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빠가 안 사 줬어?”

한 번도 자신의 손으로 뭔가를 사 본 적이 없는 벨레아니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경제 교육을 받으셔야겠네.’

스칸디아가 벨레아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떨결에 칭찬받은 벨레아니가 고개를 스윽 올리더니 이내 빵긋 웃었다.

“으음, 그렇다기보다는요….”

미아가 말을 조심히 골랐다.

“큰 아가씨는 그냥 돈을 좋아하셨죠.”

“맞아, 그거지.”

코니가 격하게 동의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 * *

레오니에가 아홉 살을 넘겼던 어느 늦겨울.

빨간 리본으로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가장 좋아하는 실내용 망토를 걸친 채.

“내 앞에 놓인 금단의 빨간 선!”

아기 맹수는 깡충깡충 복도를 노니고 있었다.

“난 날 말릴 수 없어, 말리지 않아!”

요상한 노래를 부르며 방으로 돌아갔더니.

“…둘이 뭐해?”

레오니에는 깜짝 놀랐다. 아침까지는 멀쩡했던 제 방이 수십 벌의 옷과 신발로 어질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가씨 오셨어요?”

“수업 잘 들으셨나요?”

그 안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코니와 미아가 하던 일도 멈추고 레오니에를 반겼다.

“왜 이렇게 방이 어지러워?”

“아아, 지금 아가씨 옷방을 정리 중이에요.”

“작년에 입으셨던 봄옷은 이제 안 맞으니까요.”

마침 옷을 품에 안고 있던 미아가 그중 한 벌을 골라 레오니에의 몸에 가져다 댔다. 샛노란 원피스는 한눈에 봐도 크기가 작았다.

“역시 엄청 자라셨네요.”

코니의 말에 레오니에가 싱긋 웃었다. 제 나이대보다 작은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이제는 그 차이를 좁히다 못해 월등히 추월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레오니에는 무럭무럭 성장하는 중이었다.

“며칠 뒤에 의상실에서 사람이 올 거예요.”

별생각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던 레오니에의 시선은 자연히 옷들로 향했다.

“그럼 얘네는 어떻게 해?”

레오니에가 못 입게 된 옷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물었다.

“다 버려?”

“보통은 버리죠.”

코니가 답했다.

귀족들의 옷은 사용인들이 걸레나 행주로 쓰기엔 너무 비쌌다. 그렇다고 다른 귀족들에게 물려주지도 않았다. 정말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남이 입었던 옷을 받아 입는 건 좋게 보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예외적인 경우는 뭐야?”

“으음, 아가씨께 여동생이 계시거나….”

“아니면 선조의 옷을 물려 입든가요.”

미아가 끼어들었다.

“특히 귀부인들의 드레스가 정말 비싸고 고급스럽잖아요.”

그런 것 중에 정말 가치가 높은 건 대를 이어 결혼식이나 특별한 연회에 입고 나간다고 한다.

“오오.”

레오니에는 새로운 사실을 또 하나 배웠다.

‘나랑은 상관이 없네.’

저에겐 옷을 물려줄 여동생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후자는 가능성이 있었다. 저의 증조모가 드레스에 일가견이 있는 분이었단 이야기를, 얼마 전에 펠리오에게서 직접 들은 적이 있었다. 그마저도 지금의 이 몸으로는 입지 못하니 문제지만.

즉, 레오니에의 옷은 다 폐기 처분 예정이었다.

“기부는 안 돼?”

레오니에는 이 멀쩡한 옷을 버리는 것이 상당히 아까웠다. 이제 좀 귀족다운 경제관념을 가지게 되었는데도 이따금 소시민적인 감각이 튀어나오곤 했다. 오늘이 딱 그랬다.

‘그냥 버리려니 아깝네….’

옷을 바라보는 레오니에의 눈에서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기를 잠깐.

“…….”

레오니에가 음산하게 히죽였다.

* * *

노인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응!”

넋이 반쯤 나가 굳어 있는 저를 향해, 보레오티 공작 영애가 가지고 온 보석들을 두 손으로 한 번 더 밀었다.

“감정해 주세요!”

노인의 콧등에 걸쳐져 있던 안경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이곳 보레오티 영지에서 태어나, 가업을 이어 보석상을 물려받아 운영한 지도 어언 40년. 그는 선선대 보레오티도, 선대 보레오티 공작도 직접 만난 적이 있었다.

당연히 현 보레오티 공작과도 만난 적이 있었다. 젊은 공작은 제 딸에게 어울리는 장신구를 수차례 주문했었다. 그리고 그때 주문한 장신구들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들을 팔아 달라고요?”

당신의 아버님께서 당신을 위해 준비한 이것들을?

노인의 질문에는 진의가 숨겨져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아기 맹수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거 엄청 비싼 거니까, 잘 쳐주세요!”

“…….”

“혹시 보증서가 필요한가요?”

“아닙니다.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

자신이 이 보석들을 직접 공수해 팔았는데, 보증서는 무슨. 그때 노인의 머릿속에 몇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심부름이신가요?”

“네에!”

아니시군. 레오니에의 천진난만한 미소도 노인의 연륜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노인은 일단 감정을 하는 척하며 무언가를 적었다.

“만약 이것들이 전부 진품이라면….”

얼추 이 정도는 될 거라고 노인이 말하니.

“싸장님!”

아기 맹수가 입꼬리가 찢어질 정도로 빵긋 웃었다.

“들숨에 재력과 날숨에 건강을 얻으세요!”

“허허….”

태어나 처음 듣는 미사여구에 노인이 적잖게 놀랐다.

“그런데 값은 어떻게 치러 드릴까요?”

“무기명 수표로!”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달란 말과 함께, 노인이 직원에게 자신이 조금 전까지 쓰던 종이를 전달해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레오니에의 턱이 툭 떨어졌다.

“드디어 우리 보레오티에.”

아이의 얼굴 위로 점점 커다란 그늘이 드리워졌다.

“장물아비, 아니, 장물자식이 나왔군.”

“아, 아빠…!”

“이 웬수야.”

노인의 전달을 받자마자 보석상에 온 펠리오는 눈에 넣으면 무척 아플 것 같은 딸을 데리고 돌아갔다.

“…아니, 잠깐만!”

어째 분위기가 혼날 것처럼 흘러가자, 레오니에가 서둘러 자기변호를 시작했다.

“어차피 내 옷이었잖아!”

그러니 어떻게 처분하든 상관없지 않으냐고 주장했다. 펠리오는 어이가 없단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있는 보석은 전부 보레오티의 이름으로 구매한 거다.”

즉, 처분 소관은 전적으로 현 공작인 펠리오에게 있었다.

“그럼 나한테 선물로 준 보석들은?”

“그건 다 네 거야.”

“휴우….”

레오니에가 안심했다.

“네가 지금 안심할 때가 아닌데?”

펠리오가 코웃음을 쳤다.

“레오 넌 내 허락도 없이 보석을 처분하려고 했으니 장물죄를 지었지.”

“아니, 그게 뭐 장물까지나 돼!”

“내 보석을 훔쳐 팔려고 했으니까.”

“이씨, 그냥 과실이지!”

아기 맹수가 소리를 빼액 질렀다.

“해맑은 어린아이의 무지에서 비롯된 귀여운 실수! 이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냐!”

레오니에가 팔을 휘저으며 이야기를 끝냈다.

“난 네가 그렇게 말할 때면 참 웃기더라.”

펠리오가 웃음기라곤 전혀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애당초 그는 아직 끝낼 생각이 없었다. 이 영악한 딸이 벌써 사적 자금을 꾸리려고 하다니. 솔직히 기특했다.

‘과연 내 딸이군.’

이제 겨우 아홉 살인데, 똘똘하기론 과연 천하제일이었다. 하지만 펠리오는 가문의 수장으로서 이번 일에 대한 처벌을 내려야 했다. 부성애는 잠시 뒤로 넣어 둬야 할 때였다.

“네가 경악해 마지않는 천사와 사냥꾼.”

“악!”

동화책을 언급하자마자 레오니에가 경기를 일으켰다.

“그 책을 읽고, 사냥꾼을 동정하는 관점에서 감상문을 써라.”

글자 수는 네가 팔려고 했던 보석 감정액만큼이었다.

“차라리 쳐!”

레오니에가 팔을 쭉 내밀었다.

“골절도 감수한다!”

“녀석, 씩씩도 하지.”

“아니, 나는 금융범이잖아! 성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이건 너무 과한 처벌이야!”

“여기엔 평소 네가 자행하는 근육 희롱도 포함된 거다.”

“범죄를 소급하지 마!”

* * *

“…그 뒤 아가씨는 피눈물을 흘리시며 감상문을 쓰셨죠.”

“끝에 가선 성범죄자들의 물리적 거세 단행과 손모가지 절단의 필요성을 주장했지만요.”

이 일을 계기로, 레오니에는 ‘차명계좌’라는 것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참으로 귀여우셨군요.”

스칸디아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저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순간을 옆에서 지켜보지 못했다니, 스칸디아는 가슴이 절절할 정도로 슬펐다.

“…….”

벨레아니는 그런 형부를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언니야가 범죄를 저질렀단 소리 아냐?”

벨레아니는 어리다. 하나 코니와 미아가 한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이해할 만큼은 영민했다. 요는, 레오니에가 어렸을 때부터 돈으로 못된 짓을 했단 뜻이었다.

“범죄는 아니고요. 장난을 치려다가 실패한 겁니다.”

“그런 거야?”

벨레아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코니와 미아는 싱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레오니에의 어린 시절 하나를 얻어낸 모험단은 또 다른 곳으로 모험을 떠났다.

“언니야는 참 사고뭉치였네.”

“아이는 원래 그렇게 자라는 겁니다.”

“으휴, 철이 언제 들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네.”

아가 맹수가 혀를 짧게 차며 애늙은이 소리를 냈다.

“레아 님도 어제 장식용 방패를 썰매처럼 타고 놀다가 혼나지 않았습니까.”

“…….”

“묵비권을 행사하시는 건가요?”

“묵비권?”

“말하지 않겠단 뜻입니다.”

두 사람이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은 휴게실이었다. 그곳에서 홀로 쉬고 있던 루페가 눈을 의아하게 떴다.

“두 분이 여긴 어쩐 일로…….”

루페가 소파에 반쯤 누워있던 몸을 엉거주춤 일으켰다.

“루페 아저씨!”

벨레아니가 다짜고짜 명했다.

“언니야의 옛날이야기 해 줘!”

“예?”

“지금 레아 님과 모험 중이거든요.”

스칸디아가 조금 더 상세히 설명했다. 그제야 루페가 납득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어릴 적이면….”

웃으며 추억을 떠올리던 루페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갔다. 그러곤 이내 공포에 질린 듯이 몸을 잘게 떨었다.

“아저씨는 묵비권을 행사하는 거야?”

영특한 아가 맹수가 곧장 배운 것을 써먹었다.

“묵비권은 안 되오! 나는 언니야의 어린 시절이 궁금하거든!”

“그러고 보니, 어제 작은 아가씨께서 방패 가지고 장난을 치셨지요?”

“이번엔 내가 묵비권을 행사하겠어.”

벨레아니가 입을 꾹 다무는 시늉을 하자, 스칸디아와 루페가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은 말입니다.”

가까스로 웃음을 멈춘 루페가 말했다.

“큰 아가씨께서도 똑같은 장난을 치셨답니다.”

그것도 지금의 벨레아니와 똑같은 나이였을 때.

* * *

“레오가 비상하다더군.”

“예?”

루페가 놀란 눈을 한 채로 고개를 휙 들었다.

“얼마 전에 아르데아와 학부모 상담을 했었는데….”

상사가 아이를 입양한 지 3개월째.

루페는 이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펠리오가 딸 바보가 되어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봤다. 도대체 어떻게 저토록 맹목적인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는 건지 여전히 이해가 안 갔지만, 그래도 펠리오의 진심에는 이따금 감동하곤 했다.

‘이런, 펜을 놓으셨네.’

그리고 펠리오가 손에서 펜을 놓았다는 건, 그의 자식 자랑이 꽤 오래 이어질 거란 뜻이었다.

“지적 수준이 이미 어른에 버금간다더군. 기억력이나 배우는 속도도 꽤나 상위 수준에 속한다고.”

“오, 그건 정말 엄청나네요.”

또 시작이겠거니 하던 루페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이의 가정교사로 입주한 아르데아는 아카데미 출신의 유명한 교수였다. 그 괴짜에게 인정받을 정도라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

“범상치 않으신 건 분명하죠.”

루페도 쉽게 동의했다. 레오니에가 사용하는 언어 구사력이나 평소 보여 주는 행동 등은 그 또래들과 분명히 달랐다.

“제 조카는 아가씨보다 한 살이 더 많은데, 확실히 비교가 되긴 되는군요.”

“파르두스 후작의 손주?”

펠리오는 어린이 동반 다과회에서 보았던 사내아이를 떠올렸다. 볼살이 통통한 아이는 파르두스란 이름이 무색할 만큼 순박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루페 널 좀 닮았던 것 같군.”

“오, 정말요?”

조카 바보인 루페가 멋쩍게 웃었다.

“좀 맹하게 생겼더라고.”

너도 어릴 땐 그렇게 생겼다며 펠리오가 말했다.

“…전 좀 잘생기지 않았었나요?”

루페가 제 날렵한 턱선을 만지작거렸다. 펠리오는 흉측한 것이라도 본 것처럼, 그리고 끔찍한 것이라도 들은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군.”

“제가 공작님 옆에 있어서 좀 하향화가 된 거지, 이래 봬도 나가면 인기가 많습니다!”

“그래서 차였냐.”

“차인 게 아니라, 제가 너무 바빠서 헤어진 겁니다!”

억울해진 루페가 바로 반박했다. 펠리오는 듣는 척도 안 했다.

“그리고 저는 아가씨께서 공작님의 샛서방 후보 1순위로 삼을 정도로 잘생겼다고 해 주셨습니다.”

“그딴 걸 자랑이라고.”

어쩐지 요즘 저와 루페를 바라보는 레오니에의 시선이 더욱 심상치 않아졌더라니.

“…지식에 굶주리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괴짜로 유명했던 아르데아는 칭찬에 박했다. 보레오티 공작 앞이라고 입에 침 바른 소리를 할 성정도 아니었다. 한데 아르데아는 학부모 상담에서 레오니에를 후하게 평했다.

특히 아르데아가 가장 높이 친 건 레오니에의 습득력이었다. 학문이나 지식을 단순히 외우는 게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만들어 흡수하는 능력이 대단하다고.

“그렇게 영민한 애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펠리오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고아원에서 고생만 했을 아이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쓰렸다. 만약 자신이 그곳에서 레오니에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 사랑스럽고 똑똑한 아이는 제 능력 한번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저물었을지도 모른다.

설령 자력으로 탈출했다고 해도.

“…….”

끔찍한 상상이 펠리오의 심기를 또 불쾌하게 만들었다. 오늘도 지하 감옥에 계시는 선생들과 진득한 대화를 나눠 봐야 할 것 같았다.

“…확실히.”

그런 상사의 생각을 읽은 루페가 레오니에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일곱 살짜리가 어른들 비리 장부를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머리도 영민한데 행동력도 좋고.”

“공작님은 정말 아버지가 다 되셨군요.”

루페는 이제 펠리오가 자식 자랑 좀 그만하기를 바랐다. 다행히 펠리오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로 가십니까?”

“그래.”

“갈아입으실 옷은요?”

잠깐 고민하던 펠리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쯧, 루페가 지하에 계시는 선생들을 동정했다. 펠리오가 심문하러 갈 적에 갈아입을 옷을 찾지 않는다는 건, 도구 대신 맹수의 송곳니를 사용한다는 뜻이었다.

‘죽느니만 못하겠군.’

뒤따라가던 루페가 혀를 내두르던 찰나, 앞서가던 펠리오가 걸음을 멈췄다. 널따란 등에 얼굴을 박을 뻔한 루페가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런데 자신들이 가려던 길목 저 앞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과외를 끝낸 레오니에는 사색도 할 겸, 복도를 어슬렁거렸다.

‘아르데아 할아버지는 좀 이상해.’

자기가 공부한다고 처자식 버리고 떠났으면서, 무슨 자격으로 미련을 가지고 저러나 몰라. 아무리 생각해도 학식 빼곤 배울 점이 희석한 물을 또 희석한 것처럼 눈곱만큼도 없었다.

심지어 오늘은 공부도 레오니에 혼자서 했다. 가끔 자기 연구에 몰두하면 알아서 공부하라고 방치하기 일쑤였다.

‘봉급이 아깝다, 아까워.’

아기 맹수는 아빠가 왜 저런 사람을 저택에 상주시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펠리오였다면 당장에 내쫓았을 거다.

‘그나저나….’

그렇게 복도를 걷던 레오니에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뭐 하지?”

아기 맹수는 크나큰 문제에 직면했다. 너무 심심했다. 얼마 전까지 리네 백작 가문이 머물렀던 터라, 조용한 저택 내부가 유난히 적적하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애독서를 읽거나 기사단 근육을 염탐하러 가고도 남았겠지만, 오늘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그렇게 생각하기를 잠깐.

“…….”

레오니에가 오늘따라 아무도 없는 복도를 두리번거렸다.

“…아.”

아아.

어색하게 뱉어낸 목소리가 휑한 복도를 맥없이 채웠다.

“…훌라훌라훌라.”

그러곤 요상한 노래와 함께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훌라, 훌라, 훌라.

“훌라 춤을 춘다, 탬버린!”

힘찬 외침을 끝으로 복도는 다시 적막에 휩싸였다. 괜히 부끄러워진 레오니에가 복도를 빠르게 살폈다.

“…아무도 없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진짜 없지?”

조심스럽게 한 번 더 확인했다.

그제야 이곳에 오로지 저 혼자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 아기 맹수는.

“…으헤헤헤!”

냅다 복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냅다 무릎을 꿇더니, 반질반질한 복도에 제 스타킹을 마찰시켜 미끄럼을 탔다.

“푸하하하!”

고삐가 풀린 레오니에는 광기 어린 웃음을 토했다.

“나 이런 거 해 보고 싶었어!”

그렇게 달리다가 무릎으로 미끄러지는 놀이를 몇 번 반복하더니, 이번에는 여기에 왜 있는지 모를 장식용 갑옷에 달린 방패를 빼 들었다.

“잠깐만 빌릴게.”

그 와중에 야무지게 강제적 허락을 구했다.

“다들 비켜라! 맹수 나가신다!”

와다닥 달리던 아기 맹수는 폴짝 뛰어 방패를 제 발밑에 두었다. 번쩍번쩍 광이 나는 방패가 복도를 시원하게 달렸다.

“어떤 것도 날 붙잡을 수 없다!”

내가 바람의 후손이여! 방패가 멈추면서 우당탕 넘어졌지만, 레오니에는 그마저도 재밌단 듯이 까르르 웃으며 다시 방패 썰매를 탔다.

그리고.

“…….”

“…….”

펠리오와 루페가 복도 모퉁이에 숨어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째서.’

루페는 두 손으로 조용히 얼굴을 감쌌다. 왜 내가 이다지도 수치스럽고 창피하단 말인가. 루페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안으로 곱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누명 같은 부끄러움에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펠리오의 딸이다!”

나는 이제 겁나 부자다!

울 아빠가 세계 최강이다!

마침 또 레오니에가 세속적인 이유로 아버지를 향한 만세 삼창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곤 요상한 춤사위와 함께 이상한 노래도 불렀다.

“아빠가 사는 이 집! 이 집은 내 집이 되었지!”

네가 타는 마차!

“그 마차도 내 것이 되었지!”

속물적인 노랫말과 흉측한 율동이 무색할 만치, 레오니에의 노래 실력은 무척이나 수준급이었다. 루페는 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창문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유리창을 와장창 깨며 밖으로 도망치는 상상을 그려 내는 중이었다.

‘공작님은 괜찮으신가.’

그러고 보니 펠리오가 아까부터 조용했다. 더욱이 지금 복도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생각하면 저 침묵이 심상치가 않았다.

‘충격이시겠지.’

루페가 드물게 펠리오를 동정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펠리오가 뒤를 돌아봤다. 섬뜩한 얼굴과 예고 없이 마주친 루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응?”

그리고 그 낌새를 눈치챈 레오니에가 방정맞은 춤사위를 멈추며 주변을 살폈다. 아이는 냅다 방패를 치우고는 기척이 느껴진 곳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러나 복도 모퉁이에는 아무도 없었다.

“…….”

괜히 찝찝해진 아기 맹수는 뒤늦게 찾아온 수치심에 몸서리를 치며 반대 방향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어머, 아가씨.”

마침 지나가던 미아가 레오니에를 불렀다.

“곧 점심시간이잖아요.”

“벌써?”

레오니에가 깜짝 놀랐다. 나잇값 못하고 미친 사람처럼 놀았더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주방장님이 크림소스에 뭉근하게 끓인 닭고기를 만드신대요!”

“와아, 진짜?”

아기 맹수가 빵긋 웃었다. 주방장이 손수 개발한 크림소스는 당근이나 브로콜리가 들어가도 맛있었다. 그런 크림소스가 듬뿍 스며든 닭고기의 고소한 풍미를 생각하니, 레오니에의 입 안에 벌써 군침이 돌았다.

“거기에 후추도 톡톡!”

레오니에가 후추 뿌리는 흉내를 냈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단 사실만으로, 조금 전까지 저의 미친 꼴을 누가 봤을지도 모른단 불안감이 싹 사라졌다.

“근데 미아 어디 가려고 했었어?”

“아가씨 찾으러 돌아다니던 중이었어요.”

“난 저택을 모험하는 중이었어!”

절대 복도에서 지랄을 한 게 아니라고, 레오니에는 괜히 저 혼자 찔려서 변명을 해 댔다.

“저택이 너무 넓어서, 아직 못 가 본 곳도 있다?”

“그럼 저택에 대해서는 제가 선배네요?”

자신은 저택을 꿰뚫고 있다며 미아가 자랑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식당으로 향한 뒤에야, 복도 모퉁이에 있던 방문 중 하나가 열렸다.

“…아슬아슬했네요.”

루페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벽에 몸을 기대었다. 자신은 뭘 딱히 한 것도 없는데 밤이라도 새운 것처럼 지쳐 버렸다.

만약 들켰더라면.

‘어우.’

생각만 해도 섬찟했다. 괜히 화를 내며 씩씩거릴 레오니에와 그런 딸을 몇 날 며칠 가지고 놀릴 펠리오. 그리고 부녀 싸움에 낀 자신. 손을 얹은 가슴이 아직도 벌렁거렸다.

“루페.”

루페가 진절머리를 치던 와중, 여태 침묵을 지키던 펠리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그, 아가씨, 말씀이십니까?”

역시 충격이었나, 루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아무리 제 딸을 사랑한다고 해도, 저런 창피한 모습까지 받아들이긴 힘들 터였다. 하지만 보는 사람 수치스러운 건 차치하고서라도, 조금 전 그 모습이 진짜 아이의 모습이지 않을까.

루페가 아까 본 레오니에의 모습은 딱 일곱 살 꼬마와 다를 게 없었다. 까불거리고 흥 많고, 활기 넘치는 해맑은 아이.

“아이답고 좋지 않습니까.”

원래 저 나이 때는 다 저런다며 루페가 변호했다.

“그거 말고.”

한데 펠리오가 물어본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넌 뭐 그런 당연한 것을 자랑이라고 말해.”

펠리오가 혀를 짧게 찼다.

“아까 레오가 한 말 못 들었나?”

“훌라요?”

저런 것도 비서라고, 펠리오는 한심함을 담아 루페를 잠깐 노려봤다. 루페는 억울했으나 저의 봉급을 떠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 정도 비굴함쯤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액수였다.

“…녀석, 참.”

펠리오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아빠란 사실이 저리도 좋았을까.”

설마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내가 펠리오의 딸이다!’라고 소리를 지르며 노래까지 부를 줄이야.

“솔직하지 못한 녀석 같으니.”

평소엔 그렇게 빽빽 소리 지르며 대꾸하더니, 아빠를 좋아하는 마음을 몰래 품었던 모양이었다. 저 말괄량이 악동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맛에 아이를 키우나 보군.”

그건 아닐걸. 루페가 반사적으로 반박했다. 일단 그는 그 맛이 어떤 맛인지 모른다. 궁금하긴 해도, 적어도 이들 부녀를 통해 알고 싶진 않았다. 하나 확실한 건, 지금 저들 부녀의 ‘자식 키우는 맛’은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버티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 힘든 맛을 세상에서 유일하게 감당할 수 있는 펠리오는 그저 제 딸이 마냥 귀여운 모양이었다.

“저리 노는 걸 보니 또 애 같아서, 뭐, 나름 귀엽네.”

“예.”

루페는 이해를 포기했다.

“역시 동심은 강요한다고 생기는 게 아닌 모양인가 봐.”

“동심…….”

루페가 보기엔 조금 전 레오니에가 보인 모습은 ‘동심’보다는 ‘술주정’에 가까웠다. 심지어 그걸 맨정신에 했다는 게 더 놀라웠다.

“그나저나 예술에 소질이 있는 것 같은데.”

펠리오는 나중에 레오니에에게 악기나 춤을 미리 가르치는 게 어떨지 보스그루니 백작과 상의해 봐야 할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일정을 잡아 둘까요?”

루페가 반쯤 포기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일 수업 오거든 내 집무실로 잠깐 들르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럼 식사하러 가지.”

“지하로 안 가십니까?”

“레오가 나랑 먹고 싶다잖아.”

그 말을 끝으로 펠리오가 식당으로 혼자 가버렸다.

‘…그런 말까진 안 했는데.’

루페는 딸 바보를 넘어선 딸 등신이 되어 버린 펠리오를 욕하며 제 일을 하러 가 버렸다.

* * *

“언니야는 나보다 더 엄청난 사고뭉치였네!”

휴게실을 나온 벨레아니는 기분이 좋아졌다. 재잘거리는 아가 맹수가 총총걸음으로 발재간을 부렸다.

“나는 방패 타고 놀아도 그렇게 까불거리지는 않았는데.”

뒤따라가는 스칸디아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했다.

‘사람이 어쩜 그렇게 귀여울 수 있을까.’

스칸디아는 루페가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리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다. 그는 펠리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사랑하지 않고는 도저히 배길 수 없었을 테지.

‘나중에 딸이 태어나면 레오를 닮아야 할 텐데….’

소박한 희망을 꿈꾸며, 스칸디아는 벨레아니와 함께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세 번째로 만난 사람은 집사 카라였다.

“카라 할머니!”

“어이구, 작은 아가씨 오셨어요.”

카라가 제게 오는 벨레아니를 반갑게 맞이했다. 펠리오의 유모이자 현 집사인 그는 이제 은퇴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장은 아니지만, 곧 그의 아들에게 이 자리를 물려줄 예정이었다.

“큰 아가씨의 어린 시절이요?”

마찬가지로 같은 질문을 받은 카라가 잠시 고민했다.

“언니야가 사고 친 걸로 들려줘!”

“이런, 나중에 제가 곤란해지지 않을까요?”

“괜찮아. 레아가 지켜 줄게!”

벨레아니가 어린 말투까지 써 가며 호기롭게 약속했다.

그 의젓한 모습에 감명한 카라가 싱긋 웃었다.

“그럼 작은 아가씨를 믿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 *

드높은 창공 아래로 새하얀 이불보가 바람 따라 펄럭였다.

보레오티 저택의 모든 빨랫거리가 모이는 동쪽 구역은 저택 내부만큼이나 분주한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바삐 움직이던 하녀들이 하던 일도 멈추고 잠시 자리를 비켜야 했다.

“푸르르군.”

펠리오가 펄럭이는 이불보 너머로 비치는 하늘에 감탄했다. 감성에 젖은 그의 시선은 이제 이불보를 향했다. 한눈에 보아도 고급스러운 이불은 이 저택의 주인 가족이나 손님들이 쓸 법한 것이었다.

두툼하지만 깃털만치 가볍고, 온기를 오랫동안 머금는 소재로 만들었으며, 극상의 숙면을 보장하는 이불.

“레오.”

그 이불이 지금은 물에 젖은 채로 빨랫줄에 널려 있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애정이 듬뿍 담긴 다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애들이라면 누구나 다 실수하는 법이지.”

펠리오의 말엔 거짓이라곤 전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진심으로 안도하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보레오티는 이런 데서도 보레오티군.”

이어 말하는 펠리오의 얼굴에 흡족함이 가득했다.

“저렇게나 웅장한 지도를….”

“…아, 쫌!”

빼액!

기어코 얼굴이 시뻘게진 레오니에가 괴성을 질렀다.

“내가 싼 거 안다고! 내가 이불에 오줌 쌌다고!”

아기 맹수는 분에 겨운 목소리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기실 인정보다는 굴욕과 치욕에 겨운 패배 선언에 가까웠다.

“녀석, 자기 잘못도 이렇게 인정할 줄 알고….”

아빠는 감동이구나. 펠리오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오, 빡쳐…!”

그러나 아빠 맹수의 태연자약함이 도리어 아기 맹수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스읍, 말은 곱게 해야지.”

“이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을 곱게 해!”

레오니에가 제정신이냐고 반박했다. 지금 아이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에 빠진 상태였다.

일단, 레오니에는 평범하지 않다. 아이는 자신이 이불에 실수 좀 했다고 아빠나 어른에게 혼날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았다. 만약 혼을 낸다면 아동학대로 간주, 이불을 그자의 얼굴에다 문질러 반격할 요령이었다.

다만 정신 연령이 워낙에 높다 보니.

‘…죽자.’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힘들었다.

‘아니지.’

그러다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고 상황을 판단하려고 했다.

‘똥 안 지린 게 어디야.’

하나 정신적 충격이 너무도 컸기 때문에, 제대로 된 사고를 발휘할 수 없었다.

‘…좋아!’

맹수의 송곳니를 폭주시키자! 레오니에가 이 방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운 뒤에 저도 부작용으로 앓아눕자는 쪽으로 생각을 키워 가던 찰나.

‘레오, 아침이다.’

그날따라 웬일로 펠리오가 레오니에를 깨우러 왔고.

‘어서 일어….’

‘…….’

‘…….’

그는 딸아이의 이불 위 웅대한 지도를 직접 목격해 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레오니에는 몰려드는 창피를 모면하고자 스스로 창밖으로 뛰어내리려고 했다. 물론 펠리오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난 끝이야…!”

아기 맹수가 끝내 주저앉았다. 진짜로 땅에 주저앉은 레오니에는 앙증맞은 주먹으로 땅을 툭툭 내리치며 통곡했다.

“창피해서 어떻게 살아! 이 나이에 오줌이나 지리다니!”

“그 나이엔 다 지릴 수 있다.”

펠리오가 헛숨을 내뱉었다. 하여튼 쪼그마한 게 별소릴 다 했다.

“저게 그냥 지린 거야? 완전히 폭포수를 쏟아부었네!”

“넌 네 입으로 그런 말을 하고 싶냐…….”

“아이고! 내가 이제 무슨 염치로 얼굴을 들고 살아…!”

“누가 들으면 대역죄인이라도 되는 줄 알겠군.”

때마침 바람이 한층 강하게 불었다. 빨랫줄에 매달린 이불보가 레오니에의 처량한 마음만큼이나 강하게 펄럭거렸다. 이불 아래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토록 평화로운 순간.

“아빠.”

한참을 꺼이꺼이 우는 시늉을 하던 레오니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시뻘겋게 물든 얼굴엔 당연히 눈물 자국은 없었다.

“왜.”

“나 배고파….”

“아침도 안 먹고 그 난리를 피우는데 당연히 고프지.”

펠리오가 딸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는 이제 이 정도로 놀라는 신출내기 아빠가 아니었다.

“난리는 다 피웠냐.”

“으으응.”

레오니에의 대답은 참으로 뻔뻔했다.

“더 피우고 싶은데 배가 고파서 못 피울 것 같아.”

“환장하겠군.”

“지랄도 배가 불러야 할 수 있는 법이거든. 일단 밥부터 먹고, 어떻게 지랄할지 고민해야지.”

펠리오는 뭐 이런 게 다 있느냔 눈으로 레오니에를 흘겨봤다. 그래도 제가 하던 짓이 정상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레오.”

“응?”

“자기 전에 뭘 마셨지?”

“사과주스를 한 병 몰래 뽀려서….”

“예쁜 말.”

“…훔쳐서 마셨어.”

레오니에가 이실직고했다.

“그러니 저렇게 싸지.”

펠리오가 한숨을 푹 쉬었다.

* * *

“있잖아….”

이야기를 듣고 나오는 길.

“언니야, 말인데.”

벨레아니가 주변을 두리번거린 뒤, 자신들만 있는 걸 확인한 뒤에야 스칸디아에게 속삭였다.

“좀 이상한 거 같아.”

차마 카라 앞에서는 하지 못했던 말을, 벨레아니가 용기 내어 제 형부에게 고했다.

“나도 이불에 지도 그린 적 있거든?”

“있었습니까?”

“응. 근데 비밀이다?”

스칸디아는 자매가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나, 싶어 신기했다.

“하지만 나는 언니야처럼 그러진 않았어.”

아가 맹수는 스스로가 정상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럼 어찌하셨습니까?”

“언니야 이불이랑 바꾸려고 했어.”

그러다가 유모한테 들켜서 실패했다고 한다.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참으로 아쉬웠다며 벨레아니가 혀를 쯧 찼다. 스칸디아는 이쯤 되자 펠리오의 어린 시절이 새삼 궁금해졌다. 그 역시도 자신의 딸들처럼 사고뭉치 같은 나날을 보냈을까, 짧게 상상해 보았으나 쉬이 떠오르는 장면은 아니었다.

“레아 님.”

스칸디아가 일단 벨레아니의 의견을 정정해 줬다.

“레오는 이상한 게 아니라, 똑똑하고 재치가 많은 겁니다.”

그러니 그런 재미난 발상을 떠올릴 수 있었던 거라고 말했다.

“레아 님도 마찬가지고요.”

“나도? 나도 똑똑해?”

“물론이죠.”

이불을 바꾸는 계획을 떠올린 것 자체가 얼마나 신선한지 모른다며, 스칸디아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레오가 제게 레아 님 자랑을 얼마나 하는데요.”

“정말? 언니야가 뭐래?”

벨레아니의 눈이 반짝거렸다.

“받아쓰기도 엄청 잘하시고, 체력 훈련도 열심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연이은 칭찬에 벨레아니의 입꼬리가 광대를 찌를 정도로 올라갔다.

“그럼 모험은 계속하실 건가요?”

“으음….”

대장이 고민했다.

“사실 좀 지겨워졌어.”

너무도 솔직한 표현에 스칸디아는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치만 보레오티는 쉽게 포기하지 않아!”

모험은 진행되었다.

“근데 형부는 왜 글라디고가 된 거야?”

“레오와 결혼하면 저도 보레오티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일을 돕기 위해 글라디고에 입단한 거죠.”

“원래는 서부 기사님이었어?”

벨레아니가 스칸디아의 은발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잿빛을 풀어 놓은 것처럼 탁한 색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예쁜 은색이었다.

“레보오에 있었지만, 황실 기사단이기도 했습니다.”

스칸디아가 말했다.

“언니야가 황실 기사단은 쓰레기라고 했어.”

“예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의 황실 기사단은 훌륭한 황제 덕에 크게 개편되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글라디고 기사단이 상주하는 훈련장이었다. 기사들의 훈련을 봐 주던 멜레스가 다시 돌아온 둘을 반겼다.

“우리는 모험 중이야!”

“레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큰 아가씨 어린 시절이요?”

으음, 멜레스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 동작이 뜻하는 바는 딱 하나였다.

“뭘 말하지?”

사실 멜레스만이 아니라, 여태 물어본 사람들 전부가 이런 반응을 보였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단 듯이. 심지어 고민도 그렇게 짧지 않았다. 드디어 찾아온 복수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조급함도 살짝 보였다.

다만 멜레스는 여기에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잘못 말하면 아가씨 범죄자 되는데….”

그간 두 모험가가 들은 이야기는 시작도 아니었다. 기실 레오니에의 진짜 영웅담의 시작은 바로 이곳, 기사단에서 시작되었다. 자신의 소신을 처음 힘차게 외쳤던 곳도, 아이의 노래에 맞춰 흉물스러운 근육 파도가 넘실거리던 곳도 여기 훈련장이었다.

“……!”

멜레스의 충격적인 혼잣말에 벨레아니가 입을 쩍 벌렸다.

“언니야 잡혀가는 거 아냐?”

“그럴 리는 없습니다.”

스칸디아가 안심시켰다. 애초에 레오니에를 잡아갈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비통함을 애써 꾹꾹 눌러 참던 벨레아니가 스칸디아의 손을 꼭 쥐며 부탁했다.

“언니야가 잡혀가도, 나랑 형부는 언니야 편이어야 해.”

“물론이지요.”

“내가 생각하니까, 형부 아니면 언니야랑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것 같아.”

풉! 멜레스가 황급히 입술을 깨물었다. 세상에, 작은 아가씨도 드디어 그 사실을 깨달아 버리신 듯하다.

“레아 님….”

스칸디아의 눈망울이 감동으로 촉촉이 젖어 들어갔다. 그는 제 손을 꼭 쥔 작은 손을 다시 덮어 감쌌다.

“저를 인정해 주시는 거군요.”

“형부는 이제 보레오티에서 못 벗어날 거야….”

“감사합니다. 정말 감동입니다.”

“잉? 내 말 이해는 했어?”

벨레아니가 의구심을 품으려는 찰나, 멜레스가 서둘러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한동안 보레오티 저택은 침울한 상태였다. 어린 레오니에는 가슴 아픈 배신을 당했고, 펠리오는 이 사실에 진노하였다. 더군다나 이로 인해 레오니에가 또 송곳니를 폭주시켜 버려 저택 내에 있던 사용인 전원이 크게 앓아누워야 했다.

멜레스가 처음 겪어 보는 암울한 보레오티였다. 심지어 레지나가 사라졌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적어도 그때는 레지나에 대한 진실이 전부 감춰졌으니까.

어쨌건 보레오티는 어두워졌지만, 이러한 분위기는 금방 사라졌다. 펠리오는 훌륭한 아버지였다. 그는 기운 없는 딸을 위하여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글라디고 기사단에게 근육이 도드라져 보이는 쫄쫄이 훈련복을 입혔고, 그 속에서 레오니에도 함께 훈련시켰다.

효과는 참 좋았다. 너무 좋아서 문제였다.

“적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이상한 노래 부르지 마라.”

준비 운동을 하는 레오니에는 어느 때보다 기운이 넘쳤다. 그래서 펠리오는 그런 레오니에를 진정시키느라 평소보다 진이 더 빠진 상태였다.

“주군.”

한참 훈련하던 중, 프로보가 손을 들어 질문 허가를 요청했다.

“뭐지.”

펠리오가 짧은 고갯짓으로 허가했다. 그는 모노와 함께 쫄쫄이 훈련복의 실용성에 대해 논하던 중이었다.

“아가씨가….”

“오늘은 넘어가라.”

근육 희롱이 적정선만 지킨다면 어지간한 건 좀 봐주라고, 추후 오늘의 노고를 후하게 쳐서 지급하겠다고 했다. 물론 이는 펠리오가 미리 기사단원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설명한 이야기였다. 이 자리에 모인 전원도 이에 동의했다.

한데 프로보가 이의를 제기할 것처럼 구니, 펠리오는 살짝 기분이 언짢아졌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프로보가 눈치를 살피더니 결국 펠리오를 모셔갔다.

“복직근들아, 힘내!”

“…….”

“복직근 속에 있는 복횡근도 무럭무럭 자라야 한다? 특히 척추를 지탱하고 있는 너희 중심 근육들이야말로 진흙 속 사금…!”

“저어, 아가씨….”

마누스가 끝내 윗몸 일으키기를 중단했다. 숨을 고르는 그의 숨결이 거칠었다.

“제 배에다 무슨 주문을 외우시는 겁니까?”

“마누스 오빠의 근육들 잘 크라고 응원하는 중이에요.”

그 말마따나 레오니에의 시선은 오롯이 마누스의 수축하는 복직근에 고정되어 있었다. 동글동글한 검은 눈이 얼마나 생기로운지 모른다.

“…응원이요?”

마누스는 무슨 음험한 저주인 줄 알았다. 글라디고 내에서 가장 우량한 체격을 자랑하는, 레오니에가 오기 전만 해도 근육을 예찬하던 그마저도 눈앞에 있는 아기 맹수의 근육 박애에 질겁을 했다.

“이 오빠가 뭘 모르네.”

떽! 레오니에가 마누스를 혼내는 시늉을 했다.

“우리가 식물을 키울 때, 뭐라고 해요?”

“뭘 해야 합니까?”

“바보! 사랑을 주잖아요.”

자신이 하는 행동도 바로 그런 것이라며, 레오니에가 당당하게 설명했다.

“식물에게 예쁜 말을 하면 쑥쑥 자란다는데.”

“…….”

“그러니까 근육에게도 말을 걸어 주면 더욱 커질 거예요.”

아이 예뻐, 아이 예뻐! 레오니에의 작은 손이 마누스의 복직근 허공을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충격적인 이유에 마누스가 할 말을 잃던 찰나.

“…응?”

레오니에가 문득 제 배를 내려다봤다.

“에구머니나.”

그러곤 호들갑을 떨며 제 올챙이 배를 어루만졌다. 보레오티에 온 뒤로 나날이 늘어 가는 뱃살은 건강한 어린이의 상징이었다.

“질투하지 말렴?”

아기 맹수가 제 뱃살을 위로했다.

“내가 지금보다 조금만 더 체력을 키우면, 그때 너희를 아름답게 가꿔 줄게.”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라며 제 손바닥에 입술 도장을 꾸욱 찍어 뱃살에 전달했다.

“어허, 대퇴근들아.”

레오니에가 타이르듯 말했다.

“너희도 차례차례 예뻐해 줄 테니 삐치지 마.”

아이는 제 몸의 근육들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주면서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세심하고 다정한지.

“…….”

그리고 그런 딸을 바라보는 펠리오는 얼마나 착잡한지.

당연히 주변에 있던 기사들도 그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진짠가?”

그런 와중에 마누스는 레오니에의 모습에 현혹되어 자신의 근육들을 더듬거려 봤다. 옆에 있던 파보가 발로 툭툭 쳐서 그를 말렸다.

“오, 아빠!”

레오니에게 저를 보는 시선을 눈치채곤 팔을 붕붕 흔들었다.

“아빠가 새롭게 규정한 훈련복, 너무 좋은 것 같아!”

“글쎄다….”

펠리오는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다짐했다. 이 쫄쫄이 훈련복은 영구 금지였다.

“근육은 정말, 하아….”

아이는 결국 말까지 멈추고 말았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눈까지 지그시 감았다. 얼마나 감동을 했는지, 옹골차게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살아 있단 증거야.”

두 번 살았다가는 난리 나겠군. 펠리오는 저 근육 변태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본디 사람은 자라면 자랄수록 얌전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그 가설이 제 딸에게도 통할지 의문이었다.

“나 지금 감정이 너무 풍부해졌어.”

그래서 이 마음을 노래로 표현하고 싶어졌어.

“…뭐?”

당황한 아빠를 내버려 둔 채, 어느새 목을 풀던 레오니에가 귀여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난 살아 있다아!”

끝내 근육만 남았다아.

“숨 쉴 때마다아, 눈을 뜰 때마다아.”

근육이 있다아아!

“활성산소도 퍼져간다!”

심금을 울리는 애절한 노래와 충격적인 가사의 절묘한 조화. 레오니에는 예술에 소질이 있었다. 그림도 잘 그리고, 노래도 상당한 실력을 자랑했다.

“…….”

“…….”

그래서 펠리오를 비롯해 이 자리에 있던 글라디고 기사단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노래 끝!”

아기 맹수가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노래가 끝나기 무섭게 공허한 적막이 훈련장을 가득 채웠다.

“뭐야, 다들 내 노래에 감동했어요?”

레오니에가 콧방울 근처를 긁적이며 수줍어했다.

“…뭐.”

펠리오가 땅이 꺼질 정도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단 잘 부르긴 하는군.”

현실 도피가 다분한 감상이었다.

* * *

벨레아니와 스칸디아의 모험은 이렇게 끝났다. 그들은 레오니에의 다양한 어린 시절 이야기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것들은 각자에게 다른 의미로 전달되었다.

“형부, 형부….”

벨레아니는 스칸디아의 손을 내내 붙잡으며 간청했다.

“언니야랑 꼭 결혼해, 알았지?”

“저야 당장이라도 하고 싶지요.”

“아니, 진짜로 해!”

저의 조급함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벨레아니가 발을 동동 구르며 불안해했다.

“언니야가 좀 많이 이상해! 근데 형부가 없으면 큰일 날 거야!”

“그럴 리는 없습니다.”

스칸디아는 흔들림 없는 편안한 얼굴이었다.

“레오가 없으면 제가 분리불안으로 죽거든요.”

“그런 뜻이 아니야아!”

아가 맹수가 소리쳤다.

“언니야는 아찌가 생각하는 것보다 위험한 변태야!”

얼마나 흥분했는지, 벨레아니는 저도 모르게 어릴 때 스칸디아를 부르던 호칭까지 써 버렸다.

“그건 상식인데요?”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북부 어디에도 없었다. 스칸디아가 그런 것으로 놀라기엔 너무 새삼스러웠다.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스칸디아는 어린 레오니에가 눈앞에 있다면, 너무 행복한 나머지 나잇값도 못 하고 힘껏 안아 줬을 것 같았다.

“이 아찌가 말이 안 통하네.”

답답해진 벨레아니가 주먹으로 제 가슴을 팡팡 쳤다.

“아직도 모르겠어?”

“무엇이요?”

“언니야가….”

속삭이는 벨레아니의 얼굴에 비장감이 머물렀다.

“…아찌를 잡아먹을 거야.”

스칸디아가 시선을 느리게 굴리며 피했다.

‘이미 잡아먹혔는데.’

물론 제 처제가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닐 테지만, 엄연히 따진다면 스칸디아는 이미 잡아먹힌 지 오래였다.

‘서로 잡아먹었지.’

그런 형부의 속내를 모르는 채.

“그치만 난.”

벨레아니는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스칸디아의 손을 잡았다.

“언니야가 더 소중해.”

그러니 형부는 언니야 옆에 계속 있어 줘야 해.

“보레오티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형부는 언제나 언니야의 옆에 있어야 해. 알았지?”

어린 아가는 가문의 평화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형부를 희생하기로 했다.

“예, 알겠습니다.”

“이혼이란 소리 나오면 내가 형부를 잡아서 언니야한테 바칠 거야.”

벨레아니가 이번 모험에서 깨달은 건 하나였다.

레오니에는 엄청난 존재였고. 그런 언니의 옆에 있을 수 있는 건 형부뿐이었다.

“어여 빨리 결혼해.”

스칸디아는 제게 축언해 주는 처제를 꼭 안아 주었다.

* * *

잠든 동생을 살피러 온 레오니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얘가 왜 이렇게 앓지?”

격한 모험을 끝마친 벨레아니는 점심도 거른 채 낮잠에 빠졌다. 아침부터 이 넓은 저택을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니 진이 다 빠지는 것도 당연했다. 다만 본인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지친 건지.

“끄응, 으으응…!”

인형을 끌어안은 채 잠든 벨레아니는 쉴 새 없이 끙끙거렸다.

“어디 아픈가?”

레오니에가 걱정되는 마음에 벨레아니를 서둘러 살폈지만, 열이 펄펄 끓는 것과 같은 이상 증세를 보이진 않았다.

“피곤해서 그런 겁니다.”

스칸디아가 이부자리를 고쳐 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와, 자신들이 없는 동안 무얼 했는지 물었다.

“둘이 나 없는 동안 뭐 했어요?”

“저택을 모험했지요.”

“뭐야, 나 빼고 둘만 재밌게 놀았잖아.”

레오니에가 섭섭하다며 입술을 삐죽였다. 아이 같은 행동이 어찌나 귀여웠는지, 스칸디아가 고개를 숙여 입술을 쪽 맞췄다. 이제 허락 없이 입 맞추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나도 어릴 적에 종종 했죠.”

어느새 레오니에가 그의 목에 제 팔을 걸었다. 자연스럽게 스칸디아의 가슴에 몸을 밀착하게 되었다. 스칸디아는 조금 더 편히 기대란 듯이 팔로 레오니에의 허리를 감쌌다.

“그래서.”

레오니에가 쪽, 하고 턱 언저리에 뽀뽀했다.

“진짜로 뭐 했어요?”

둘이서 진짜 저택만 돌아다니는 평범한 일을 할 리가 없었다.

“레아가 얌전히 놀 리가 없는데.”

“역시 동생을 잘 아시는군요.”

“걘 누가 뭐래도 내 동생이거든요.”

부모님이 낳았으나, 닮기는 저를 더 닮은 동생은 레오니에의 자랑이었다. 결국 스칸디아가 이실직고했다.

“레아 님이 레오의 어린 시절이 궁금하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다녔습니다.”

“좋은 이야긴 없었겠군.”

레오니에가 피식거렸다. 어떤 내용을 들었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스칸.”

그래서 물어보는 대신에 이름을 불렀다. 은근한 욕심을 담아서.

“내 방으로 갈래요?”

물어보기 무섭게 스칸디아가 레오니에를 한 팔로 번쩍 들어 안았다. 얼떨결에 포대 자루 신세가 된 레오니에가 눈을 멀뚱거리다 이내 깔깔 웃었다.

“이젠 참을 생각도 없어요?”

“당신이 아카데미에 다니는 동안, 내 인내심은 다 바닥났지.”

“아니, 그중 2년은 자기도 미성년자였거든?”

방으로 들어선 둘은 문이 닫히기 무섭게 서로의 입술을 거칠게 삼켰다. 하나 이 격한 행위는 점점 느려지고 진득해졌다. 레오니에의 선전이었던 초반과 달리, 후반전은 명실상부 스칸디아의 역전승이었다.

스칸디아는 레오니에가 숨을 잠깐 고르던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무자비하게 들이닥쳤다.

평소에는 부드러운 성정으로 칭찬이 자자한 작은 부군이지만, 그 속을 희롱하는 놀림은 결코 부드럽거나 상냥하지 않았다. 입술 안쪽 살을 간지럽힌 뒤, 혀를 얽으면서 은근슬쩍 호흡을 막아 버린다. 레오니에가 온전히 제게만 기대도록 하기 위한 못된 짓이었다.

하나 레오니에도 보통이 아닌지라, 오기를 부려 버티기 마련이었다. 어느새 다리에 힘이 풀려 무너지기 직전이면서도. 그러면 결국 마음 약한 스칸디아가 입술을 살짝 떨어트린다.

물론 그 뒤엔 바로 혀를 집어넣어 아까 채 못 한 집요한 장난을 이어 갔다.

입천장을 혀끝으로 집요하게 문지르며 미세한 주름 하나까지 자극하고, 종국엔 조그맣고 긴 혀를 사탕처럼 물고 빨았다.

레오니에는 이렇게 집요하고 느린 애정 표현에 약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밀어붙이면, 끝내 레오니에의 검은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들어간다.

‘사랑스러워라.’

남들은 모두 두려워하는 보레오티의 검은 맹수지만, 제 앞에서만 이렇게 ‘여인’의 모습을 보여 줄 때면 오싹했다. 그리고 스칸디아가 레오니에를 침대에 눕히며 제 욕심을 드러내려던 찰나였다.

“…아, 진짜 좀!”

레오니에가 스칸디아를 밀치며 상체를 일으켰다.

“잡아먹어라, 아주.”

투덜거리는 입술은 서로의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그럴 생각으로 한 건데….”

그 말이 진짜인 듯, 스칸디아는 제 욕심을 레오니에에게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이를 눈치챈 레오니에가 숨을 잘게 떨었다. 하지만 결국엔 스칸디아를 멈추게 했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안 된다고 하시는 건 아니지요?”

물어보는 스칸디아의 얼굴엔 억울함이 가득했다. 이렇게 분위기가 달아올랐는데, 하물며 지금의 저는 하반신에 미친 듯이 몰린 열을 해결하지 못하면 방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되어 버렸는데.

“보레오티가, 이왕 시작한 거면 송곳니 끄트머리라도 뽑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 송곳니 꺼냈다간 뿜뿜이는 죽거든요?”

“저를 죽여 달란 뜻인데요.”

“인간아….”

듣다 못한 레오니에가 잠깐만 기다려 보라며 스칸디아를 말렸다.

“나도 지금 이대로 끝내기엔 억울하니까.”

스칸디아는 그제야 가까스로 진정했다. 그러나 참을성은 정말로 바닥이 났는지, 레오니에에게 지분거리는 입술이나 손짓은 더욱 집요해졌다.

“혹시 아픕니까?”

“그런 거 물으면서 옷 벗기지 말아 줄래요?”

레오니에가 제 바지를 벗기려던 스칸디아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이것도 적절한 때라면 때려나?”

“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지금의 레오니에가 할 수 있는 말은 딱 하나였다.

“아빠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네요.”

* * *

“애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요?”

“집안 살림만 무사하면 되었습니다.”

“으이구, 하여튼 짓궂기는.”

펠리오와 바리아는 예정된 열흘보다 나흘이나 더 지난 뒤에야 북부에 도착했다. 남부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도 행복해서, 두 부부는 이 여운을 그냥 흘려보내기가 아쉬워 남부 내 보레오티 별장에서 사흘을 더 보냈다. 그리고 나머지 하루는 수도에 들러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샀다.

“하지만 뭐….”

펠리오가 바리아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감았다. 푹 쉰 덕분인지, 펠리오는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계속해서 웃는 얼굴이었다.

“레오가 컸으니 우리도 이런 여유로운 걱정이 가능한 거죠.”

“이렇게나 효녀인데 결….”

“결혼은 아직 이르죠.”

“어휴, 진짜!”

바리아가 남편의 손가락에 얽힌 제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펠리오의 굵직한 손가락이 살짝 조여들었다.

“우리 남편은 다 멋진데, 딸들 문제만 관련되면 사람이 귀여운 바보가 된다니까.”

“그게 또 저의 매력이지요.”

“저기, 욕이었거든요?”

이번에도 설득에 실패한 바리아가 한숨을 푹 내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고는 아예 몸을 남편 쪽으로 돌렸다.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겠단 뜻이었다.

“여보.”

아니나 다를까, 바리아의 입에서 나온 ‘여보’ 소리가 참으로 듣기 거북했다. 펠리오는 묵비권 행사를 위해 입꼬리를 축 내렸다. 그렇다고 봐줄 바리아도 아니었지만.

“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고집을 부리는지, 한번 솔직하게 말해 봐요.”

이곳 마차엔 저와 당신뿐이니, 솔직하게 말해도 누구 하나 놀리거나 비웃지 않을 거라고 안심시켰다.

“내 이유가 그렇게나 어처구니없을 것 같습니까?”

펠리오가 물었다.

“논리적이지 않을 거란 확신은 있죠.”

그렇지 않고서야 이 야무지고 똑똑한 사내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유로 자식의 결혼을 방해할 리가 없었다.

“레오가 왜 당신의 허락을 기다리겠어요.”

“…….”

“당신의 진심 어린 축하를 받고 싶으니까 그런 거죠.”

만약 레오니에가 제 성질대로 했다면, 이미 자신들은 손주를 보고도 남았을 정도였다.

“손주는 무슨.”

펠리오가 질색했다.

“레아가 이제 곧 여덟 살입니다. 그런데 그 어린 나이에 조카가 생긴다?”

“서로 형제처럼 지내면 되죠.”

“이모와 조카가 형제처럼? 집안 꼴이 참 잘도 돌아가겠군요.”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한담….”

남편의 반응이 생각 이상으로 격하자, 괜스레 서운해진 바리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도….”

그래서 소소한 반격을 날렸다.

“집안은 잘만 돌아갈걸요?”

펠리오가 장기간 자리를 비워도, 이젠 레오니에 혼자서 그 빈자리를 완벽하게 채울 정도로 자랐다. 특히 졸업 과제로 능력을 크게 인정받아, 세상은 레오니에가 언제 공작 작위를 이어받아도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바리아 당신은 도대체 누구 편입니까?”

펠리오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물었다. 사실 언짢다는 말보다, 자식만 편애하는 아내에게 삐쳤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어떡하지?”

바리아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너무 귀여운데요?”

그렇게 딸아이를 위한 설득은 실패로 돌아갔다.

* * *

펠리오가 없는 동안, 가주 대리는 레오니에였다. 레오니에는 부모님의 빈자리와 가주의 부재를 채우고자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번 신혼여행은 레오니에가 자신의 자유 일정을 포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작으로서의 업무만이 아니라, 어린 동생도 돌봐야 했다.

“레아.”

“응.”

“근육아.”

“왜 자꾸 불러!”

계속해서 부르는 목소리가 귀찮았는지, 벨레아니가 버럭 짜증을 냈다.

“미쳤나, 이게.”

정작 짜증을 내고 싶었던 건 레오니에였다. 고개를 아래로 떨구니 제 허리에 팔다리를 두른 채 원숭이처럼 매달린 벨레아니가 있었다.

“나중에 엄마랑 아빠 오면 다 말해!”

아가는 또 웬일인지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있었다.

“동생한테 미쳤냐고 욕했다고 다 이를 거야!”

“내가 또 언제 그랬다고.”

“아까 욕했잖아!”

“아름다운 미가 하늘을 친다고오.”

레오니에가 잽싸게 딸기우유 맛 사탕 하나를 꺼내 동생의 입에 넣어 줬다.

“흥, 으응, 고작, 으으웅, 이딴 거로….”

투덜거리는 벨레아니의 볼이 빠르게 움직였다.

“맛있지?”

“푸딩보단 아니야.”

어쨌거나 마음에 들었는지 벨레아니는 얼굴 근육을 계속 우물거렸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붙어 있어.”

레오니에가 동생의 등을 토닥였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요사이 벨레아니가 유난히 제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언니는 이제 진짜 일해야 해. 좀 떨어지면 안 될까?”

“레아도 일하는 거야.”

벨레아니가 레오니에의 허리에 두르던 팔다리에 힘을 더욱 줬다.

“…….”

에휴, 레오니에는 결국 그대로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종이가 팔락팔락 소리 내며 넘겨지고, 만년필 촉이 슥슥 움직이면서 잉크 특유의 냄새가 퍼져 갈 때.

“…언니야.”

살짝 지겨워진 벨레아니가 물었다.

“일 언제 끝나?”

“몰라.”

“나랑 놀아. 응?”

“레아 너 오늘 치 공부는 했어?”

벨레아니의 공부는 레오니에가 직접 봐 주고 있었다. 매일매일 일정량의 숙제를 내 주는데, 레오니에는 요즘 동생이 공부하는 꼴을 못 봤다.

“인생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벨레아니가 말할 때마다 딸기우유 냄새가 솔솔 났다.

“너 솔직히 말해 봐, 그 말은 누가 가르쳐 줬어?”

“언니야!”

“안 됐구나, 동생아.”

아쉽게도 여기서 거짓말이 들통났다.

“난 ‘인생은 재산과 작위 순이다’라고 말했거든.”

거짓말을 한 벌로, 벨레아니는 끝내 집무실에서 쫓겨났다.

“이이, 이익!”

심통이 난 아가 맹수가 발을 애먼 바닥을 발로 콩콩 찍었다.

“레아 님?”

마침 저를 부르는 소리에 옆을 돌아보니, 스칸디아가 놀란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형부!”

벨레아니가 칭얼거리며 스칸디아의 품에 안겼다.

“히잉, 언니야가 나 괴롭혔어.”

“저런….”

형부가 애처로이 우는 처제를 위로했다.

“야, 내가 언제 괴롭혔어.”

그리고 그 장면을 언니가 목격해 버렸다.

“아냐! 언니야는 내 마음에 상처를 입혔어! 그러니까 형부가 날 위로해 준 거야.”

“지금 상당히 위험한 말을 한 거 같은데?”

레오니에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뜻을 눈치챈 스칸디아가 목이 떨어질 정도로 고개를 붕붕 가로저었다.

“응?”

반면 벨레아니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휴우.”

레오니에는 아직 유지되고 있는 여동생의 순수함에 안도했다. 하지만 스칸디아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걱정과 염려, 불안과 집착에 의해 엉망이 된 시선으로 레오니에를 응시했다.

“좀 쉬시라니까.”

“세상에, 뿜뿜이까지 나 방해할 거예요?”

“방해가 아니라 걱정입니다.”

스칸디아는 요즘 부쩍 레오니에의 심정을 이해했다.

“힘줄 자른 채로 족쇄 채워 어디 가두고 싶은 마음이 이런 걸까요.”

“주제넘게 감히.”

레오니에가 건방진 말을 내뱉는 그의 입술에 달콤한 입맞춤으로 벌을 내렸다.

“꾸엑.”

덩달아 사이에 낀 벨레아니가 찌부러졌다.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내가 일하는 꼴을 못 보니….”

레오니에가 어쩔 수 없단 듯이 두 팔을 들었다. 항복 선언을 받아낸 벨레아니와 스칸디아의 표정이 환해졌다.

“잠깐만 쉬어 준다.”

“와아, 그럼 나랑 놀아! 응?”

후다닥 형부 품에서 내려온 벨레아니가 레오니에에게 매달리듯 폴짝거렸다. 스칸디아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으음, 그럼….”

잠시 고민하던 레오니에가 동생의 이마에 입술을 쪽쪽 맞추더니 이내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방패 가지고 놀까?”

* * *

“이래도 괜찮습니까?”

어지간한 일엔 당황하지 않는 스칸디아지만, 지금만큼은 당장이라도 저 두 악동 자매를 뜯어말리고 싶었다.

“아이고, 아가씨들!”

“다치면 어쩌시려고요.”

그리고 스칸디아의 마음이 곧 사용인들의 마음이었다.

“펠리카 부인께서 쓰러지셨다!”

“집사님까지 쓰러지시면 안 되어요!”

“누가 가서 유모 좀 불러와!”

우왕좌왕하는 와중에도, 맹수 자매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저택 내 이불이란 이불은 다 가져와 홀 계단에 잔뜩 깔아 놓은 뒤, 장식용 방패 위에 다정히 모여 앉았다.

“실내용 썰매도 재미난 법이지.”

“법이지!”

레오니에의 선창에 벨레아니가 따라 말했다. 이를 지켜보던 스칸디아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이러다 큰일날지도 모릅니다.”

“이거 한 번 탄다고 뭐 큰일까지야.”

귀 따가운 잔소리를 뒤로하며, 레오니에가 출발을 외쳤다.

“그럼, 출발!”

“아냐!”

벨레아니가 휙 돌아봤다.

“출발은 레아가 외칠 거야.”

“에이, 내가 이불을 다 깔았는데?”

“그건 레아가 대장이라서 그런 거야.”

“치이.”

이번만 봐준다며 레오니에가 순순히 물러났다.

“출발!”

벨레아니의 씩씩한 구호와 함께, 방패가 이불을 타고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달려라, 보레오티 호!”

“꺄아아아!”

두 선원을 태운 조그마한 방패가 이불 바다를 달려 목적지인 현관홀에 착지한 순간.

“얘들아, 우리 왔어.”

“별일 없….”

막 집에 도착한 부모님이 현관문을 열고 나타났다. 별일 없었느냐는 펠리오의 걱정이 채 끝나기도 전에.

“…….”

“…….”

집에 단둘이 있을 딸내미들을 위해 마차에 한가득 선물을 싣고 온 부모님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고.

“…….”

“…….”

눈에 넣으면 피가 날 것 같은 딸들은 주섬주섬 방패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 어처구니없는, 그리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 성대하고 요란한 환영 인사에 네 가족 모두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오셨습니까….”

서둘러 내려온 스칸디아가 굳어 있는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인사드렸다.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그의 시선은 평소보다 불안했다.

“…레아가.”

자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레오니에였다.

“방패 가지고 놀고 싶대서, 나는 하지 말자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동시에 발로 방패를 슬그머니 벨레아니 쪽으로 밀었다. 벨레아니가 배신감 어린 눈으로 레오니에를 노려봤다.

“언니야가 어떻게…!”

일곱 살 꼬마가 분에 겨워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이대로 있다간 진짜로 저 혼자만 혼날 것 같아서, 벨레아니는 서둘러 부모님께 레오니에의 잘못을 고자질했다.

“있잖아!”

그것도 초강수를 뒀다. 지금부터 자신이 할 말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언니야 임신했어!”

초강수는 말 그대로 초강수였다. 벨레아니의 폭로와 함께, 보레오티 저택은 빙하기라도 찾아온 것처럼 공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다, 다들 대피해…!”

사용인들이 눈치껏 몸을 사리며 최대한 홀에서 먼 곳으로 도망쳤다.

“입단속 잘들 해라.”

헤쳐 나가는 중, 누군가가 경고했다. 만약 조금 전 들은 이야기가 주인 가족분들이 아닌 이의 입에서 퍼졌다간 피를 못 면하게 될 터였다.

그렇게 보레오티 일가만 덩그러니 남은 홀.

“…너, 너는!”

바리아는 늦게 반응한 만큼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레오니에, 너는 진짜!”

바리아가 처음으로 아이에게 손을 들었다. 입술까지 앙다문 채로 레오니에의 팔뚝을 찰싹찰싹 때렸다.

“아! 아야, 엄마!”

“너는 어쩌자고! 어쩌자고 지금 임신을 해!”

“나 혼자 임신해? 반은 뿜뿜이 책임이거든?”

“둘 다 진짜!”

바리아는 이제 스칸디아의 팔뚝도 매섭게 내리쳤다. 스칸디아는 연신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묵묵히 얻어맞았다. 물론 문제는 바리아의 분노가 아니었다. 아니, 바리아가 지금 이렇게 화를 내는 건 오히려 액땜에 가까웠다.

자신이 먼저 이렇게 화를 내야, 제 뒤에서 조용히 침묵을 일관하고 있는 남편이 덜 분노할지 모를 일이었다.

정말 모를 일이었다.

‘…왜 반응이 없지?’

바리아는 슬슬 불안했다. 하필 북부로 올라오던 마차에서 그런 대화까지 나눴기에 침묵이 불러오는 공포는 점점 증폭되었다.

“저, 리오.”

여보, 자기야? 바리아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남편을 불렀다. 하나 펠리오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저어, 아빠?”

“공작님….”

이쯤 되니 레오니에와 스칸디아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게, 신중하려고 한다는 게 이렇게 되어 버렸는데….”

레오니에가 뒤늦은 변명을 시도했다.

“어차피 결혼할 생각이었고, 뭐, 요즘은 준비된 예비부부에게 임신은 최고의 선물이라잖아.”

“아니래요. 임신 사실 들키면 아빠한테 조….”

벨레아니는 말을 끝맺지도 못한 채 바리아에게 붙잡혔다.

“공작님.”

그때, 스칸디아가 레오니에의 앞을 지키듯 나타났다.

“아니, 아버님.”

“뿜뿜아…!”

감동한 레오니에가 울컥했다. 잠시 뒤를 돌아본 스칸디아가 걱정하지 말란 듯, 레오니에의 손을 꼭 쥐었다. 레오니에는 이제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었다.

“순서가 이렇게 늦어 버려서 죄송합니다.”

스칸디아가 꾸벅 사과했다.

“오오, 남자!”

방정맞은 추임새를 넣던 벨레아니는 끝내 바리아의 손으로 입술을 봉인 당했다.

“아버님, 저를 용서하시는 게 쉽지 않으실 겁니다. 그간 아버님께서 제게 보여 주신 신뢰를 이런 식으로….”

“자기야….”

레오니에가 훌쩍였다.

“이렇게 속을 썩인 만큼, 따님에게 더욱 잘하겠습니다. 보레오티의 일가가 되기엔 부족한 점이 아직 많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진심을 담아 다짐하는 스칸디아의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나 이토록 성실한 반성에도 불구하고 펠리오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우?”

이상을 먼저 눈치챈 건 벨레아니였다. 이 중에서 가장 작은 키였기 때문에, 아가 맹수는 펠리오의 눈에 맺힌 뭔가를 가장 빠르게 알아봤다.

“아빠, 울어?”

그 말에 가족들이 놀란 얼굴로 펠리오를 바라봤다.

“세상에, 여보!”

“아빠 진짜 울어?”

“아버님…!”

당황하는 가족들을 내버려 둔 채, 펠리오는 황급히 등을 돌렸다.

“…잠시.”

억눌린 목소리가 힘겹게 나왔다.

“잠시, 나갔다 오마.”

“이제 집에 막 왔는데 어딜 가요.”

바리아가 황급히 남편을 붙잡았다.

“솔직히, 받아들이기가 힘들군요.”

펠리오가 저를 붙잡은 아내의 팔을 천천히 떨어트렸다.

“그러니 잠시 산책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 저도 같이 갈까요?”

“오래 걸릴 터이니 먼저 자고 있어요.”

펠리오가 현관문을 열었다.

“서부를 지도에서 지우고 오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펠리오는 정말로 저택을 나가 버렸다.

* * *

그리고 2년 후.

조그마한 대기실 앞에 두 기사가 서 있었다. 그들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화려하고 근엄한 예복을 걸친 그들은 소속된 기사단이 달랐다. 그러나 문 뒤에 있는 소녀들을 호위하는 임무를 받은 건 똑같았다.

“근데 있잖아.”

친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은발의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집은 아직 멀쩡한데?”

보레오티 공작이 서부를 지도에서 지운다고 했지만, 소녀의 소중한 고향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건 말이지.”

흑발의 소녀가 숨겨진 진실을 말했다.

“울 엄마랑 언니랑 글라디고 기사단들이 가까스로 아빠를 잡아 말렸거든.”

“에이, 재미없다.”

마무리가 너무 허무하다며 펠리데아가 실망했다.

“근데, 너희 아버지.”

펠리데아는 누가 들을라.

“좀 이상한 거 같아.”

소리 죽여 친구에게만 들리게끔 속삭였다.

“원래 딸 가진 아빠들은 다 그렇게 미쳐 있대.”

벨레아니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두 소녀는 똑같은 모양의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벨레아니는 검은 머리를 양 갈래로 올려 묶었고, 펠리데아는 잿빛 어린 은발을 아래로 나눠 묶었다. 그리고 둘 다 예쁜 화관을 머리에 썼다.

하지만 대화의 주제는 차림새만큼 우아하지 못했다.

“펠리 너도 생각해 봐. 귀한 딸이 결혼 전에 임신했는데, 어느 아빠가 좋아하겠어.”

“물론 그건 작은 오라버니가 잘못하긴 했지.”

두 아이의 대화 주제는 2년 전, 각자의 언니와 오빠가 친 어마어마한 속도 위반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 아빠, 그 뒤로 한참 아팠어.”

펠리오가 지도에서 서부를 지우지 못한 건 주변 사람들이 그를 만류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큰딸의 임신에 충격받아 자리에 드러누운 탓이 더 컸다.

“근데 공작님이 정말로 서부를 없애려고 했어?”

“내가 봤을 때는 진짜였어.”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벨레아니는 그때만치 펠리오가 무서웠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형부는 진짜 죽을 뻔했지.”

어린 기억에도 형부가 사선을 넘나들던 기억은 제법 많이 있었다. 와인에 무색무취의 극약을 넣고 싶다고 중얼거리던 아빠의 혼잣말을 엿듣고 자신이 구해 준 적도 있었다.

“우리 작은 오라버니, 거기서 구박받는 거야?”

펠리데아가 걱정하며 물었다.

“아니야아!”

벨레아니가 빠르게 부정했다.

“이제는 안 그래. 울 아빠랑 형부가 얼마나 친하다고.”

“…….”

“안 때리면 친한 거 아냐?”

“어머니가 왜 이따금 신전에 가서 작은 오라버니를 위해 기도하는지 알겠다….”

작은 오라버니의 생사 때문이었구나.

“난 우리 큰 오라버니가 주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작은 오라버니도 문제가 많았네.”

“원래 천재는 어딘가 살짝 미쳐 있는 거랬어.”

벨레아니가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두 아이가 재잘재잘 떠들던 와중.

“아가씨, 보레오티 영애.”

헤스페리 저택의 하녀가 둘을 불렀다.

“이제 곧 식이 시작될 거라고 하네요. 어서 나오셔요.”

“오, 시작한대!”

“두근거린다….”

둘은 각자의 꽃바구니를 챙기며 밖으로 나왔다.

* * *

보레오티 공작 영애와 헤스페리 후작 영식의 결혼식은 화창한 봄날을 자랑하는 헤스페리 영지에서 열렸다. 본래라면 작위가 높은 공작저에서 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아들을 잘 보내고 싶다는 헤스페리 후작 부부의 바람 덕에, 결혼식은 헤스페리 저택에서 올리기로 했다.

신부 측 하객으로 참석한 북부 귀족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결국 하는군요.”

“그러게요.”

“진짜로 결혼을….”

펠리오의 자식 사랑은 너무도 유명했다. 하물며 제 큰딸이 쉰 살이 되면 결혼을 허락하겠다던 농담 아닌 진심은 북부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진 지가 오래였다. 그러나 결국 레오니에는 오십은커녕 딱 그 절반인 스물다섯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충격이건만.

“보레오티 영손께서 지금 몇 살이죠?”

“며칠 전에 돌을 맞이하셨죠.”

우르마리티 백작이 기쁘게 답했다.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러우신지, 미래가 아주 기대되는 분이십니다!”

남들에겐 영원히 말할 수 없지만, 죽은 딸이 남긴 손주가 아이를 낳고, 이렇게 결혼한다는 사실에 그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백작께선 보레오티 영애를 워낙 아끼시니까요.”

함께 온 보스그루니 백작이 호호 웃었다. 머쓱하게 웃던 우르마리티 백작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따님과 함께 오셨군요.”

“이제야 문제가 해결되었거든요.”

보스그루니 백작 옆에는 딸이 함께였다.

“아들놈은 적에서 팠답니다.”

묵힌 먼지를 털어낸 것처럼, 보스그루니 백작은 개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 애비도 공부하러 갈 땐 작위까지 다 포기했는데, 저는 작위도 내놓으라고 난리를 피운 거예요.”

“저런.”

“그 망할 놈을 드디어 치웠답니다.”

우르마리티 백작은 그 아들을 ‘어떻게’ 치웠는지 묻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보스그루니가 될 백작 영애와 인사를 나누었다.

“다들 여기 계셨군요.”

파르두스 후작이 서글서글한 웃음과 함께 나타났다.

“어머, 혼자 오셨나요?”

“아내랑 함께 왔죠. 아들놈은 아카데미 후배들과 만나러 갔고, 아버지께선 북부에 계시죠.”

파르두스 전 후작은 장거리 이동이 힘든 나이가 되었다. 그는 이번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을 무척이나 억울해했다.

“그 모습 보면 아직 정정하시구나, 싶지만서도요.”

후작의 농에 사람들이 하하 웃었다.

“그러고 보니 케라타 자작은 어디 계시나.”

“황후 폐하와 함께 있더라고요.”

가리킨 곳에는, 케라타 자작 부부가 오랜만에 만나는 딸과 안부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황후 폐하.”

“몸은 불편치 않으시고요?”

“아이참, 그냥 편하게 부르시라니까.”

플로무스 황후가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부르는 호칭만 달라졌을 뿐, 시집간 딸을 걱정하고 살피는 부모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너 배는 괜찮냐?”

그런 중에 오빠인 알체스만 플로무스를 여느 때처럼 대했다.

“이 녀석이!”

그러다 자작에게 한소리 들었지만, 플로무스는 그토록 얄밉던 오빠가 처음으로 고마웠다.

“안정기라서 괜찮아.”

플로무스가 배에 손을 올렸다.

“근데 이렇게 장거리 이동해도 되는 거야?”

“황제 폐하도 계시고, 제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단들이 호위해 주잖아.”

“오오, 이제 황족이라고 황실 기사단 편드냐?”

알체스의 놀림에 플로무스는 싱긋 웃을 뿐이었다.

서부 측 하객들도 이 경사로운 날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스칸이 여태 살아 있는 게 놀랍군요.”

“그러게 말이다….”

크리세토스 황제는 이벡스와 함께, 스칸디아의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이제 아이도 태어났으니, 죽이진 않겠죠?”

“설마 따님을 과부로 만들겠어?”

“하하, 그렇죠?”

이제 안심해도 되겠다며 두 부자가 하하 웃었다.

“우피 언니!”

“유니!”

우피클라는 동부에서 온 유니시아와 반갑게 인사했다.

“그간 잘 지냈어?”

“헤헤, 이제 곧 마법 승급 시험이 있어요.”

그래서 죽을 맛이라며 유니시아가 투덜거렸다.

“근데 왜 너희 가족은 북부가 아닌 서부에 있는 거야?”

“동부 최고의 거래처가 서부잖아요.”

유니시아의 말 그대로, 오르티오 후작 부부는 헤스페리 후작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곳엔 카니스 백작 부부도 함께였다.

“근데 우피 언니네 동생분은요?”

“지금 헤스페리 영애 호위 중이야.”

“그렇구나. 어, 테르 오라버니.”

“북부 사람이 여긴 왜 온대?”

둘은 다가오는 테르에게 반갑단 듯이 손을 흔들었다.

“반가운 얼굴들이 보여서 잠시 들렀습니다.”

“으휴, 능글스럽긴.”

“오라버니도 잘 지내셨어요?”

식장은 시끌벅적했다.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러 모인 사람들인 만큼, 떠들썩한 분위기 속엔 행복이 가득했다.

그리고.

“하미….”

“할머니가 아니라, 살루스 이모예요.”

“하미이!”

신부대기실에선 비밀스러운 만남이 이뤄지고 있었다. 남부 아우스트 가문의 대표로 참석한 살루스가 사촌 조카를 처음으로 만나는 중이었다.

“우, 우우.”

레오니에의 무릎 위에 앉은 돌쟁이 아기가 포동포동한 젖살을 씰룩였다.

“하미….”

아기는 결국 바리아의 품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검은 눈동자는 살루스의 청옥색 머리칼에 고정된 채였다. 심지어 손까지 뻗으며 잡으려고 했다.

“…기사님을 많이 닮았네.”

살루스가 기꺼이 제 머리칼을 조카의 손에 쥐여 줬다. 아기는 검은색을 품었지만, 인상은 전체적으로 아빠를 빼닮았다. 하지만 손에 쥔 머리칼을 고집스레 꼭 쥐는 모습은 엄마 판박이였다.

“그래서 얼마나 다행이야.”

신부가 진절머리를 냈다.

“벌써 장담하면 곤란하지.”

바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기억 안 나니? 레아도 이때까진 순했어.”

그러나 지금은 레오니에가 어디서 몰래 낳아 온 자식이 아니냔 소문까지 들릴 정도였다.

“엄마는 결혼 앞둔 딸한테 악담을 그렇게 퍼붓고 싶어?”

레오니에가 입술을 삐죽였다.

“레오 널 닮으면 아주 사랑스럽고 건강할 텐데, 당연히 칭찬이지.”

“아닌데? 엄마 얼굴이 너무 짓궂은데?”

“우리 큰딸이 혼자 찔리는 구석이 많아서 그런 거지.”

모녀 싸움의 승자는 바리아였다.

이를 즐겁게 관전하던 살루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식장으로 가 볼게.”

결혼 축하해, 살루스가 레오니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전하며 돌아섰다.

“엄마도 이제 가 봐야겠네.”

바리아 역시 식장으로 갈 준비를 했다. 나갈 낌새를 눈치챈 아기 맹수가 옹알이를 시작했다.

“우리 꼬마는, 삼촌이랑 같이 기다리고 있자?”

“우우, 으응!”

삼촌 소리를 알아들었는지, 아기가 어서 가자고 팔다리를 흔들며 보챘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레오니에가 피식 웃었다.

“아빠 말마따나 난장판 집안인가?”

“응? 왜?”

“세상에, 삼촌이 조카보다 어리잖아.”

“고작 몇 개월 차이로 무슨.”

바리아가 그런 거 걱정할 여유가 있거든 오늘 결혼식만 생각하라며 잔소리했다. 그러나 엄마의 발걸음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참 예쁘네.”

눈앞에 있는 이 아가씨가 자신의 딸이라니, 바리아는 그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오늘의 넌 누구보다 아름다울 거란다.”

바리아가 다가가자, 레오니에가 두 팔 벌려 엄마를 소중히 끌어안았다.

“우?”

덩달아 두 사람 품에 절로 안기게 된 아기가 배시시 웃었다.

“엄마 딸이니까, 당연히 아름답지.”

“네가 늘 그렇게 말해 줄 때마다 얼마나 기쁜지 알아?”

“기쁠 게 뭐 있어.”

당연한 사실인데. 레오니에는 어느새 훌쩍이기 시작한 바리아의 얼굴을 소중히 감싸 안았다.

“오늘 잘 봐 둬.”

그리고 여느 때처럼 씩씩하게 말했다.

“이 예쁜 신부가 누구의 딸인지.”

“그러게 말이야.”

촉촉이 젖은 초록색 눈이 예쁜 호선을 그렸다.

“우리 꼬마도.”

레오니에가 아들의 볼에 입술을 쪽 맞췄다.

“나중에 식 끝나고 보자?”

“으응!”

“대답도 야무지지.”

둘을 보내고.

“후우….”

드디어 홀로 남은 레오니에는 긴장감이 섞인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결혼식 준비 때문에 아침 댓바람부터 사람이 계속 옆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혼자 있는 시간이 큰 위로가 되었다.

‘참 길었다….’

걸레짝보다 못한 넝마나 걸치던 꼬마가 귀족이 되어. 제 소중한 사람을 위해 강해지기로 다짐했으며. 불굴의 노력 끝에 모두가 인정하는 보레오티가 되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소중한 아이도 태어났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결혼이었다.

레오니에는 고개를 돌려 거울 속 여인을 바라봤다. 거울 속 여인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어머니가 물려준 검은 다이아 드레스와 가문의 장신구로 화려하게 치장한 미인.

어릴 적에는 귀엽단 소리만 들었다면, 지금은 차갑고 시린 분위기 때문에 무섭단 소리가 가장 먼저 나왔다.

“펠리! 우리 화동 대결하자.”

“좋아. 가장 멋지게 꽃 뿌리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아이고, 아가씨들!”

결혼식 날에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짓입니까!

마침 대기실 밖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전해졌다.

“풉!”

레오니에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이제 시작하는구나.’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니 바깥 상황이 훤히 그려졌다. 긴장한 얼굴로 식장을 걸어가는 사랑스러운 남편, 재잘거리는 화동들의 웃음.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레오니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발걸음 소리가 들릴 때면, 레오니에는 항상 기분이 좋아졌다.

똑똑.

“레오.”

“아빠!”

펠리오는 저를 보고 환하게 웃는 딸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호, 내가 너무 예뻐서 놀랐나 보지?”

“레오 네가 예쁜 건 당연한 거고.”

“오늘따라 칭찬이 후하시네.”

레오니에게 키득키득 웃었다. 반면 펠리오는 웃지 않았다. 레오니에는 지금 아빠가 얼마나 복잡한 마음인지 알기에 딴지를 걸진 않았다.

“다 컸나, 싶다가도.”

펠리오가 손을 내미니, 레오니에가 그 위에 제 팔을 걸었다.

“딱히 변한 것도 없구나, 싶다.”

“응? 그런가?”

대기실을 나온 둘은 식장 앞에 섰다.

“어릴 때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어.”

“으음, 나도 동안인가?”

가볍게 툭 던진 농담에 펠리오가 입꼬리 한쪽을 비틀었다. 레오니에는 그 입가에 걸린 희미한 주름이 걸쳐진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변한 건 없지.”

신부, 입장하시겠습니다.

사회의 진행과 함께 보레오티 부녀가 느린 걸음으로 행진했다. 레오니에는 글라디고와 레디오, 두 기사단이 만든 예도 관문이 유난히 길다고 느껴졌다.

“넌 여전히 내 딸이고.”

펠리오가 예도 관문을 통과한 뒤에 말했다.

“난 너의 하나뿐인 아빠니.”

행진의 끝에는 스칸디아가 서 있었다. 새하얀 예복을 갖춰 입은 그는 눈에 띄게 긴장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레오니에에게 고정된 채였다.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을 집요한 시선에 레오니에는 저도 모르게 그만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펠리오는 당장이라도 저놈을 죽여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나 결국엔 깊은 한숨만 푹 내쉬었다.

“…그래.”

펠리오가 말했다.

“아빠는 늘 지는 존재지.”

언제 자신이 이 웬수에게 이겼던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무척 행복한 패배였다. 수도 없이 깨우쳤던 세상의 진리를, 그는 오늘 저의 딸을 다른 사내의 손에 쥐여 주면서 또 깨우쳤다.

“잘 살아라.”

“아빠….”

레오니에가 말을 흐렸다. 펠리오는 다 안다는 듯, 아이의 손등을 토닥였다.

“…결혼해도 아빠랑 사는 건 변함없는데 무슨 소리야.”

생뚱맞은 소릴 하고 있어. 레오니에가 어이가 없단 듯이 중얼거렸다.

“…내가 진짜 뭘 먹고 널 키웠을까.”

역시 동심 기른다고 양심을 놓쳤던 것이 잘못이었던 걸까, 펠리오는 평생 지우지 못할 후회를 다시금 상기해야 했다. 이윽고, 펠리오가 스칸디아에게 레오니에의 손을 넘겨줬다.

“잘해라.”

살벌한 경고 한마디를 끝으로, 펠리오는 벌써부터 울고 있는 아내의 옆에 앉았다.

“괜찮아요?”

바리아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며 물었다.

“그건 내가 할 말 같은데.”

펠리오가 실소했다.

“당신 마음이 그냥 마음이 아닐 거 같아서요.”

“…….”

사실 바리아의 말이 맞았다.

오늘 이날까지, 보레오티는 정말 다사다난했다. 레오니에와 스칸디아의 속도위반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가, 겨우 진정되나 싶었더니 바리아가 신혼여행의 여파로 셋째를 임신해 버렸다. 펠리오가 그렇게 우려하던 동갑내기 3촌 관계가 태어나 버렸다.

벨레아니는 동생이 싫다며 그렇게 빽빽거리더니 결국 혼나고. 엄마와 딸이 같이 부푼 배를 끌어안고 근육 크로키로 태교를 하질 않나.

“…머리야.”

펠리오가 지난 과거를 떠올리기 무섭게 두통이 일어났다.

“그래도 즐겁죠?”

“즐겁기는 무슨….”

솔직히 즐겁다는 말이 썩 어울리는 상황은 아니었다. 갓난아기가 연달아 둘이나 태어난 탓에 보레오티는 어느 때보다 시끌벅적했다.

“행복한 거지.”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이 새로운 행복을 싹틔우기도 하는 법이었다.

“어차피 각오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레오니에 말마따나 결혼하고도 같이 살 거고,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선 떨어져 지낼 일은 당분간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섭섭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바리아는 그저 조용히 남편의 손을 쥐었다. 두 부부는 손을 꼭 마주 잡은 채, 만인의 앞에서 성혼을 맺는 딸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최고의 아버지예요.”

펠리오는 눈시울이 조금 뜨거워졌다.

* * *

“엄마?”

“큰누나.”

검은 머리와 어두운 분홍 머리. 제각기 다른 색을 품은 두 아가가 뒤뚱뒤뚱 빠른 걸음으로 쪼르르 걸어갔다.

“…….”

그곳엔 레오니에가 비통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섯 살 꼬마들이나 앉을 법한 나무 의자에 쪼그려 앉은 보레오티 영애는 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목에는 ‘아들 명의로 차명계좌를 만들지 않겠습니다.’라고 적힌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얘들아!”

이 나이에 이런 벌을 받고 있으려니 창피해 죽을 지경이던 레오니에가 꼬마 맹수들을 향해 두 팔을 크게 벌렸다.

“엄마, 엄마…!”

페델이 해사한 미소와 함께 레오니에의 품에 꼬옥 안겼다.

“에헤, 벌이다, 벌!”

반면 막냇동생인 레니우스는 제 누나가 벌 받는 게 마냥 재밌는지 깔깔대며 레오니에를 놀렸다.

“아! 아야야!”

그렇게 까불다가 종국엔 큰누나에게 두피를 깨물리고 말았다. 물론 아프진 않았다.

“삼촌 나빠….”

페델이 울상을 지었다. 처연하게 내려간 눈꼬리가 울먹이듯 움찔거렸다.

“엄마는 괜찮아.”

레오니에가 제 무릎에 아들을 앉히며 눈가에 입술을 쪽 맞췄다.

“우리 꼬마, 착하기도 하지.”

“피이, 나는?”

레니우스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레니 넌 아까 누나 놀렸잖아.”

“아냐!”

“맞거든요?”

“아니야아!”

이내 놀아 주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레니우스가 냅다 레오니에의 무릎에 엉덩이를 걸쳤다.

“큰누나, 왜 혼나?”

그리곤 제 누나의 목에 걸린 잘못 목걸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도리어 레오니에가 물어보고 싶었다.

‘내 아들 몫 좀 챙기려는데 왜 혼이 나야 하는 건지.’

보레오티 재산을 건드린 것도 아니고, 그냥 제 시계 브랜드에서 나오는 수익 중 일부를 법망 몰래 주려는 게 다였는데 말이다.

“꼬마야, 아빠는?”

“아빠?”

페델이 우웅, 하고 생각한 뒤에 답했다.

“어어, 할아버지랑, 마차 탔어.”

“오호.”

그렇단 말이지? 레오니에가 눈을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영지 시찰을 하러 나간다고 했는데, 사위랑 갔으니 둘이 술 한 잔을 가볍게 걸치고 올 가능성이 컸다.

“꼬마 맹수들!”

레오니에가 아가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지금부터 너희에게 임무를 준다.”

임무란 말에 아가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너희에게 이 목걸이와 의자를 하사하마.”

레오니에가 잘못 목걸이를 벗어 페델의 목에 걸어 줬다.

“큰누나! 나도!”

“오냐, 오냐.”

레오니에는 펠리오가 근처에 두고 간 종이에 ‘큰누나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불었습니다.’라고 쓴 뒤에 노끈으로 묶었다. 잘못 목걸이를 쓴 아이들은 의자 밑에 나란히 앉았다.

“너희가 나를 대신해 이곳에 앉아 있는 거야. 알겠나?”

“으응.”

페델은 순순히 답했고.

“그럼 까까!”

레니우스는 대가성 뇌물을 요구했다.

“그래, 뭐 먹을래?”

“쿠키! 초코 쿠키!”

“나는, 딸기우유 사탕….”

페델도 자신이 먹고 싶은 걸 조용히 주장했다.

“그래, 두 개 다 가지고….”

올게, 라며 휙 뒤돌아섰더니.

“잘하는 짓이다, 큰딸.”

“…!”

‘와 씨 봐라!’라고 외칠 뻔한 것을, 레오니에가 어린아이들이 있단 사실을 깨달으며 황급히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 아빠다!”

레니우스가 펠리오의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리며 꺅꺅 웃었다.

“꼬마도 이리 와.”

펠리오가 페델에게 손짓했지만, 페델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가, 앉으랬어.”

“…….”

펠리오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장녀를 흘겨봤다.

“넌 네 벌을 아들이랑 동생한테 시켜? 도대체 언제 철들래?”

“철 정도면 각 잡고 들면 천 근 정도는….”

들 수 있다고 말하려던 레오니에의 잔망스러운 입술을, 펠리오가 손가락으로 꼬집었다.

“어, 어어!”

놀란 페델이 허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냐, 엄마 아야 안 돼! 할아버지 하지 마! 하지 마아!”

페델이 어느새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개를 붕붕 저었다.

“…….”

그리고 손주에게 너무도 약한 펠리오는 어쩔 수 없이 손을 치우고 말았다.

“엄마, 아파? 아야해?”

호오, 호오오. 페델이 호호, 입김을 불어 줬다. 감동한 레오니에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 천사를 내가 낳았다니…!”

“그러게나 말이다….”

어떻게 너한테서 저토록 순하고 착한 아이가 태어난 거지, 펠리오는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내심 레오니에가 자기 닮은 딸 낳아서 고생하기를 살짝 바랐는데, 정작 제 막내아들이 누나 판박이었다.

“스칸 닮아서 다행이지.”

사위의 공로가 너무 컸다.

“너랑 결혼한 것도 모자라서, 이런 손주까지 안겨 줬으니 말이다.”

“죽이려고 했을 땐 언제고.”

레오니에가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문밖에서는.

“…….”

아내와 장인어른의 대화를 전부 듣고 있던 스칸디아가 커다란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있었다.

“형부는 눈물도 많다.”

뭐 이런 거로 우냐며 벨레아니가 킥킥 비웃었다.

“놀리지 마.”

바리아가 둘째의 이마를 손등으로 가볍게 때렸다. 그리곤 감격해 마지않아 훌쩍이는 사위의 등을 쓰다듬어 줬다.

“저이가 그간 했던 짓도 있고 해서 평소에는 퉁명스럽지만.”

끄덕끄덕. 스칸디아는 차마 말조차 꺼내지 못해 고개만 느리게 움직였다.

“사실 우리 아들을 아주 좋아한답니다.”

없는 곳에서 사위 자랑을 무척이나 한다면서, 바리아는 모두가 아는 비밀을 가르쳐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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