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 레오니에, 졸업과제(2)
북부는 돈이 많다.
혹독한 계절과 마물이 도사린단 위험을 안고 감에도, 대자연이 품은 값비싼 광물과 귀한 특산품 등으로 단단한 경제적 기반을 지니었다. 하나 재력의 편파가 보레오티에 지나치게 몰려 있고, 경제적 기반도 한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레오니에는 오래전부터 이 문제를 개선하고 싶었다.
“북부와 서부가 이어지는 경로에 관광 지구를 설치했지만, 이득은 여전히 서부가 많고.”
서부엔 온천과 광활한 숲을 활용한 관광 지구가 많았다. 찾아오는 관광객들은 물론이요, 제국 귀족들의 별장도 서부에 편중되어 있으니 매년 안정된 관광 수입이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라고 못 할 게 없지.”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뭘 어떻게 하실 건데요?”
“당장 할 수 있는 건…….”
자신 있게 말하려던 레오니에가 멈칫했다. 이내 가늘어진 검은 눈이 앞에 있는 플로무스를 원망스럽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말하기 싫어졌는데?”
“세상에, 아직도 삐치셨어요?”
“흥, 삐치긴 누가 삐쳐.”
안 삐쳤다고 말하기엔, 레오니에는 어딘가 심통이 가득 난 것처럼 보였다.
“난 화난 거야.”
플로무스가 쓰게 웃었다. 누구보다 어른스럽고 대단하신 분이 이따금 저런 모습을 보일 때면 얼마나 귀여운지. 본인에겐 당연히 비밀이지만.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리시겠어요?”
“글쎄, 좀 힘들걸?”
하지만 플로무스가 왜 그랬는지는 대충 이해가 갔다.
‘황제랑 사귄다는 건 쉬이 말할 수 없는 거니까.’
이해는 가나, 여전히 어이가 없었다. 플로무스가 제게 이 사실을 비밀로 했다는 것엔 딱히 화가 나진 않았다. 오히려 저 어린것이 홀로 비밀로 했을 것이 불쌍했다.
그러나 황제가 저를 속였다는 건 아주 괘씸했다. 특히 가장 만만하게 여겼던 인물 중 한 놈이었던지라, 얼얼한 뒤통수는 아직도 치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잡히는 구석이 있었다.
“황제가 너한테만 존대하더라.”
“그, 그랬나요?”
플로무스가 얼굴을 붉혔다.
‘황제는 이런 취향이었군.’
선한 인상에 착한 마음씨를 지닌 사람.
“그때 눈치를 챘으면, 그런 식으로 알게 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휴가를 겸해 놀러 온 스칸디아와 광장을 돌아다니다, 은근한 밀회를 즐기려고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갔더니.
먼저 온 선객이 있었다.
원래 그곳은 들켜선 안 될 연애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선객이 있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그저 그 선객이 플로무스와 황제였던 게 충격이었던 거지.
“네가 생각해도 어이없지?”
“네에…….”
죄송하다며 플로무스가 시뻘게진 얼굴로 사과했다.
“사과할 건 없어.”
레오니에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거참, 우리 순둥이가 혀를 그리도 잘 쓰더…….”
“아! 아아!”
레오니에가 양손으로 그때 목격했던 것을 흉내 내니, 플로무스가 괴상한 소리와 함께 후다닥 달려들었다. 그러곤 그날을 생동감 넘치게 표현하던 두 손을 떨어트렸다.
“짓궂으세요!”
“난 뭐 밥 먹는 줄 알았다.”
“…….”
“어이구, 네가 운다고 내가 뭐 눈이라도 깜짝할까 봐?”
예뻐하니 기어오른다며 레오니에가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결국 놀림도 거기서 끝났다. 레오니에는 플로무스의 질문에 대한 답을 뒤늦게 했다.
“축제 준비는 미리 보내 둔 녀석들이 나 대신 움직이고 있어.”
예전부터 생각해 둔 것들이라 빠르게 기획을 세우고 진행할 수 있었다.
“부모님 결혼식 때 그것들을 미리 선보일 거야.”
“레오니에 님은 그런 걸 어떻게 다 하실 수 있는 건가요?”
플로무스가 존경과 부러움을 담아 물었다.
“저는 잘할 수 있을까요…….”
플로무스는 풀이 죽었다. 황제 폐하께 부끄럼 없는 연인이 되어, 훗날 제국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뭐든지 잘하는 레오니에나,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스스로 위축되기만 했다.
“이런, 아가.”
어느새 플로무스의 고개는 레오니에의 손에 감싸인 채였다.
“넌 잘해.”
“…….”
“내가 빈말하는 거 봤어?”
도리도리, 플로무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레오니에가 그 보라며 멋들어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기적인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난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가장 가까이에 둔단다.”
플로무스는 저 말도 사실이란 걸 잘 알았다. 그렇기에 레오니에의 오만하기까지 한 자기 자랑이 아주 큰 위로가 되었다.
“북부로 올라가면 네가 할 일이 아주 많아.”
곧 찾아올 겨울 방학을 맞이해 레오니에가 마물 사냥으로 자리를 떠나면, 플로무스에게 자리를 부탁할 생각이었다.
“카텔은요?”
“걘 다른 거 해야지.”
카텔은 지금도 레오니에가 명한 일을 수행하느라 바쁜 아이였다.
“이제 일할 기운이 좀 생겼어?”
“레오니에 님이 황제였어도 무척 멋있었을 거예요.”
고마움을 담아, 플로무스가 늘 생각해 왔던 진심을 고백했다.
“아주버님이 들었다간 기함할 소리.”
레오니에가 키득거렸다.
“난 그런 거 됐어.”
검은 맹수는 윗대가리 가지고 노는 흑막이 더 취향이었다.
* * *
레오니에의 마지막 겨울 방학이 찾아왔다.
“언니야!”
집에 온 언니를 환영하러 달려가던 벨레아니가 멈칫했다.
“…….”
낯선 사람들이 마뜩잖던 아가 맹수는 서둘러 펠리오의 품으로 도망쳤다.
“졸업 과제 같이하기로 한 따까, 아니, 친구들이야.”
레오니에가 부모님에게 친구들을 소개했다.
“전에 말했던?”
먼저 연락을 받았던 펠리오가 친히 마중을 나왔다.
“응. 폭설 내리기 전에 축제 준비 빨리 하려고.”
“마물 사냥 나갈 동안은?”
“플로랑 카텔이 나 대신 봐줄 거야.”
“흠…….”
펠리오가 레오니에의 친구들을 한 명씩 찬찬히 살폈다.
“언니야는 친구 없어.”
벨레아니가 펠리오의 귀에 속삭였다. 물론 다 들렸지만.
“레아가 아는데, 저 사람들 다 언니야 시다바리야.”
“너 그 말 누구한테 배웠어?”
펠리오가 드물게 놀라며 물었다.
“기사 오빠야가.”
“내 그놈들을…….”
오늘 자 글라디고 기사단들의 훈련 강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잔혹해지는 순간이었다.
“다들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살벌해진 분위기를 환기할 겸, 바리아가 환한 미소로 딸의 친구들을 맞이했다. 카라와 사용인들이 이들의 짐을 옮기며 손님방으로 안내하는 동안, 레오니에는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마물 사냥 끝나고 축제를 할까 싶은데.”
“날은 언제로?”
“이날 둘 다 구경 가능해?”
레오니에가 태연스럽게 부모님의 결혼식 날짜를 물었다.
“엄마는 괜찮아.”
“나도 하루 정도면 일정을 비울 수 있을 거다.”
“좋아, 그럼 이때로 할게.”
결혼식 날짜까지 정하니, 레오니에는 쉴 틈이 없었다.
“테온 남작도 같이 왔거든? 작업실 좀 구해다 줘도 될까?”
“너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한다고 이렇게 야단이야.”
이쯤 되니 펠리오는 무언가 수상쩍게 느껴졌다. 가늘게 찌푸려진 그의 눈가에는 레오니에의 심중을 추궁하려는 의도가 가득했다. 하나 그런 것에 흔들릴 레오니에가 아니었다.
“당연히 엄청 대단한 거지!”
레오니에는 팔짱까지 끼며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나중에 축제 기획 보고서 올릴 테니까 감탄이나 하지 마슈.”
“말하는 만큼 대단해야 할 거다.”
“아빠가 레오 너한테 기대가 큰가 봐.”
“저 아빠는 하여튼 솔직해지질 못해.”
“못 해!”
하지만 계속 옆에 있다가는 진짜 들킬 것만 같아서, 레오니에는 이쯤 해 두고 벨레아니와 함께 방으로 가 버렸다. 그러나 옷을 갈아입기 무섭게 다시 펠리오를 보러 집무실로 향했다.
“아빠.”
“또 왜.”
“검은 다이아 좀 써도 돼?”
“왜.”
“엄마 옷에 장식 좀 하게.”
테온 남작도 가족들과 함께 북부로 올라오는데, 일전에 맞췄던 옷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그거 입고 축제 때 돌아다니면…!”
크으으, 레오니에가 술주정뱅이처럼 잔망스러운 소리를 냈다.
“쿠우우!”
벨레아니도 따라 흉내 냈다.
“…얼마나?”
펠리오가 물었다.
“그냥 다 쓰고 보고하면 안 될까?”
“…….”
“아빠아아앙.”
“아빠아앙!”
허락해 달라며 두 딸이 연달아 애교로 위협했다.
“…….”
그러나 펠리오는 별 반응이 없었다. 대신 루페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 몇 장을 챙기더니 묵묵히 뭔가를 작성했다. 그리고 그걸 펠리오에게 전달했다.
“적당히 써라.”
펠리오가 서류에 인장을 찍더니, 이를 레오니에게 줬다.
“반출량 작성해서 넘기는 거 잊지 말고.”
“아빠 고마워!”
“고마워!”
허락해 준 아빠 볼에 입술을 쪽쪽, 맞춘 두 딸은 들뜬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갔다.
“레아, 우린 그럼 특훈을 하러 갈까?”
“오, 특훈 하자요!”
문 너머 들리는 소리가 얼마나 씩씩한지, 다시 집무에 몰두하려던 펠리오의 입가가 소리 없이 올라갔다. 루페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간 참 빠르군요.”
그는 오랜만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가씨가 벌써 저렇게 자라시다니.”
더욱이 레오니에의 고아원 시절을 직접 목격했기에, 루페는 요즘 유난히 눈가가 시큰거렸다.
“애들 자라는 건 금방이야.”
펠리오도 공감했다.
“저희 집 루피는 언제 자라나 싶은데, 아가씨 보면 정말 금방이구나, 싶습니다.”
“아직 더 자라야 해.”
철들려면 아직 멀었다고 퉁명스레 말하지만, 펠리오의 얼굴엔 자식을 향한 뿌듯함이 가득했다.
“공작님은…….”
루페가 펠리오의 험난했던 육아를 떠올렸다. 죽을 때도 아니건만, 광활했던 나날이 마냥 주마등 같았다.
“…성직자도 어울리셨을 것 같습니다.”
펠리오의 내리사랑은 순교를 각오한 성직자에 버금갈 정도로 위대했다.
“미친놈.”
펠리오가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부정은 없었다.
* * *
“와아, 내가 살면서 보레오티 저택에서 밥을 먹는다니!”
“소문인 건 아는데, 마물 고기는 안 먹나요?”
“이게 그 유명한 보스그루니산 식기군요…….”
“벽에 그림이 걸려 있네요. 선배님이 그린 걸까요?”
아침부터 보레오티 저택에서 낯선 떠들썩함이 울려 퍼졌다. 식당에는 레오니에의 친구들이 아침 식사 중이었다. 물론 보레오티 일가가 먼저 식사한 뒤였다.
“할머니 기분 좋아 보이네요?”
레오니에가 눈에 띄게 들떠 보이는 카라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주인님은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시니, 이곳 저택은 언제나 조용하지 않았습니까.”
카라는 그것이 조금 섭섭할 때가 있었다. 집이란 사람이 있어야 그 가치가 빛나는 곳이었다. 아무리 거주하는 사용인이 많더라도, 실제로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그 모양이니 언제나 적막하고 쓸쓸했다.
“아가씨가 오신 뒤로 참 많이 바뀌었지요.”
“그런가?”
괜히 머쓱해진 레오니에가 어깨만 으쓱거렸다.
“아가씨께서 일으킨 변화랍니다.”
저택은 레오니에가 나타나기 전후로 나뉘었다.
어린 레오니에가 호기로운 장난을 치다가 벽에 내 버린 흠집, 임신한 바리아를 위해 만든 실내 정원. 벨레아니가 제 언니 따라 한답시고 벽에다 그린 낙서까지.
얼음 같던 저택은 오랫동안 잃었던 훈기를 되찾았다.
“할머니는 나 듣기 좋은 소리만 하더라.”
“참인 것을 어찌 거짓이라 할까요.”
부끄러워진 레오니에가 카라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젠 내가 할머니보다 더 커요.”
“당연히 그러셔야죠.”
카라와 훈훈한 대화를 나눈 뒤, 레오니에가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있어.”
레오니에가 저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이들을 손짓으로 제지했다.
“식사하면서 듣도록.”
레오니에가 상석 의자에 기댄 채 말했다.
“축제 준비는 일주일 안에 끝내도록 한다. 그 후엔 폭설로 나가지 못할 테니까.”
“북부의 폭설은 얼마나 심한가요?”
“궁금하면 나가 봐.”
유서는 미리 써 두고. 굳이 말리진 않겠다며 레오니에가 창밖을 힐끔거렸다.
“폭설이 한 번 내리면 눈이 건물 2층 높이까지 쌓여요.”
카텔이 대신 설명해 줬다.
“테온 남작, 오늘 내로 보석을 줄 테니 가봉 마무리해.”
“기다리겠습니다.”
“카텔은 보파에게 찾아가 진행 과정 확인하고.”
“네.”
“그리고 넌…….”
레오니에는 한 명, 한 명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이제 곧이야.”
어느새 식탁에 두 팔을 기댄 채 서 있던 레오니에가 모두와 한 번씩 눈을 마주쳤다. 마주칠 때마다 그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사기가 고양되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줘.”
모두 결의에 차오른 표정으로 고개를 비장하게 끄덕였다.
“…….”
“…….”
그리고 그 모습을 우연히 구경하게 된 코니와 미아는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졸업 과제 하시는 건데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뭔가 엄청난 건가 봐.”
“으음, 도대체 뭘까…….”
“하지만 아가씨가 원체 대단하시니까.”
“맞아, 그러니 저리 반응하시는 것도 이해는 가.”
두 하녀의 고민은 빠르게 끝났고, 외출 준비를 도와달라는 레오니에의 부름 때문에, 조금 전 고민은 빠르게 잊혔다.
* * *
외출 준비를 마친 레오니에는 벨레아니, 스칸디아와 함께 광장에서 가장 유명한 찻집으로 갔다. 오래된 건물임에도 내부는 깔끔했다. 부드러운 홍차와 향긋한 원두, 이국의 찻잎 냄새가 어우러지면서 찻집 특유의 아늑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한데 모인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요란스러웠다.
“와아…….”
스칸디아의 품에 안정적으로 안긴 벨레아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칸디아가 괜찮다며 벨레아니를 다독였다.
“예쁜 아찌, 사람이 많다요.”
“폭설 전이라 손님들이 많군요.”
“폭설이 내리면, 밖에 못 나가니까?”
“예. 그래서 사람들을 미리 만나는 겁니다.”
스칸디아가 벨레아니의 말벗이 되어 주는 동안, 레오니에는 구석진 자리에 홀로 앉아 있던 테르를 발견했다.
“물건은?”
레오니에가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부터 꺼냈다.
“아슬아슬하게 구했습니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니란 듯, 보석함을 내미는 테르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다.
“에르바누 전 백작이 몰래 숨겨 두고 있었던 듯합니다. 저희가 찾아 발견할 때 마침 장물로 팔아넘기려 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그러니 그 모양으로 사는 거죠.”
에르바누 전 백작은 몰락한 이후에 완전히 망가졌다. 아내는 이혼 후 친정으로 가 버렸고, 그토록 예뻐했던 막내딸에게도 버림받았다. 그렇다고 바리아를 찾아갈 수도 없었다. 큰딸에게 무정했단 걸 뒤늦게 깨달은 건지, 아니면 바리아를 애지중지하는 보레오티가 무서운 건지.
확실한 건, 그에겐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단 사실이었다. 추락한 현실에 절망한 전 백작은 술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결국 술 중독에 술병까지 걸렸다.
“…얼마나 살 것 같든?”
레오니에가 보석함 뚜껑을 닫으며 물었다.
“그런 종은 의외로 끈질긴 편이지만…….”
테르가 턱을 쓸며 추측했다.
“…1년 내 객사?”
“북부와 서부로 올 가능성은?”
“그때 보니 왼 다리를 절더군요.”
“으음…….”
“치울까요?”
“됐어.”
레오니에가 보석함을 벨레아니에게 넘기며 답했다. 벨레아니는 레오니에의 눈치를 살피면서 보석함 뚜껑을 슬쩍 열어 장신구를 구경했다.
“오오, 팔면 좀 나오겠는데?”
“바리아 님께 드릴 선물이니 팔면 안 됩니다.”
스칸디아가 벨레아니의 손을 슬쩍 막았다.
“엄마 거야?”
“엄마가 싫어하면 너 줄게.”
레오니에가 동생의 머리를 벅벅 쓸며 약속했다.
볼일을 마친 네 사람은 찻집 밖으로 나왔다. 오전임에도 어둑어둑한 하늘은 곧 몰아닥칠 폭설이 얼마나 거셀지 미리 알려 주었다.
“보석함 아래에 보증서도 있습니다.”
“꼴에 좋은 것만 챙겼나 보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살펴 가십시오.”
“기사님도요.”
레오니에는 대충 손짓으로 인사했고, 스칸디아가 대신해 테르와 악수하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테르가 몸을 낮춰 벨레아니에게도 인사했다.
“벨레아니 님도 조심히 가시고요. 건강하셔야 합니다.”
언니 발치에 쭈그려 앉아 눈 뭉치를 조물거리던 벨레아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아는 건강 빼면 시체니까 걱정 마.”
“말씀도 참 재밌으시지.”
“이게 연륜이라는 거야!”
“…말을 누구한테 배운 겁니까?”
테르가 퍽 심각한 표정으로 레오니에에게 물었다.
“일단 난 아냐.”
“언니야!”
“…저게 뻑 하면 내 핑계를 대는데, 진짜 아냐.”
그러나 부질없는 핑계에 불과하단 걸,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어렴풋이 알았다.
“그럼 약속된 날에 뵙겠습니다.”
“네 할아버지랑 아빠는 데려오지 마라.”
“기쁜 마음으로 함께 참석하겠습니다.”
“말을 귓등으로라도 듣는 척 좀 해라.”
테르가 가 버리고.
레오니에와 스칸디아, 벨레아니는 마차를 타고 케라타 저택으로 향했다. 두 보호자 사이에 앉은 벨레아니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창밖을 구경했다.
“케라타 저택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겁니까?”
스칸디아가 벨레아니의 망토를 고쳐 입히며 물었다.
“청첩장도 돌릴 겸, 우리 레아 특훈해야지.”
“특훈!”
아가 맹수가 눈을 반짝였다.
“맹수의 송곳니? 그거 훈련해?”
“아니.”
“힝…….”
실망한 벨레아니가 흐느적거리며 스칸디아의 허벅지 위로 쓰러졌다.
“오셨어요?”
케라타가 도착한 마차를 맞이하러 나왔다.
“어머, 벨레아니 님은 왜 그러세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레오니에의 품에 안긴 채 축 늘어진 벨레아니였다.
“송곳니 훈련 안 해 준다고 삐쳤어.”
“어머, 아직 안 하셨어요?”
“아직 어리다고 안 해 줘.”
벨레아니가 고자질했다.
“저런, 섭섭하시겠어요.”
플로무스가 벨레아니를 위로했다.
“오늘은 화동 훈련을 할 거야.”
레오니에가 동생을 다독이며 말했다.
“피이.”
벨레아니가 입술을 삐죽이며 빈정거렸다.
“나는 맹수의 송곳니를 훈련하고 싶어.”
“아직은 어려서 안 돼.”
“언니야는 몇 살에 했어?”
“일곱 살.”
플로무스가 안내한 연습실에 도착한 레오니에가 벨레아니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벨레아니의 손에 조그마한 바구니가 쥐어졌다. 안에는 잘게 자른 종이가 담겨 있었다.
“아빠랑 엄마는?”
“아빠도 일곱 살? 엄마는 안 배웠지. 송곳니가 없잖아.”
“보레오티인데? 울 집에서 가장 강한데?”
“그러니까 대단한 거야.”
겉옷을 벗은 레오니에가 스칸디아에게 눈짓했다. 스칸디아가 벨레아니에게 말했다.
“화동은 저와 함께 배울 겁니다.”
“예쁜 아찌도 화동해?”
그거 좋은데? 레오니에는 그 자리에서 다음에 낼 어둠의 회지 내용을 결정했다.
훈련에 앞서, 스칸디아가 화동에 대한 설명을 차근히 했다.
“화동은 결혼하는 사람을 축복해 주는 사람입니다.”
“왜 축복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라고요.”
“우리 엄마 아빠는 결혼 안 하고 사는데? 안 행복해?”
“…….”
스칸디아는 말문이 턱 막혔다.
“당해 버렸네.”
지켜보던 레오니에가 피식 웃었다. 벨레아니의 질문 지옥에 빠지면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었다. 천하의 펠리오도 벨레아니의 ‘왜?’ 공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후후.”
플로무스가 작게 웃었다.
“플로 너도 웃기지?”
“웃기다기보다는…….”
물론 그런 것도 없잖아 있지만.
“벨레아니 님은 레오니에 님 어린 시절이랑 똑같아요.”
“욕이니?”
“당연히 칭찬이죠.”
당돌한 태도나 능수능란한 말솜씨까지. 심지어 체격도 당시의 레오니에와 엇비슷했다.
‘그때의 레오니에 님은 무척 작으셨지.’
그때의 귀엽고 작던 아기는 이제 북부를 지킬 어엿한 맹수가 되어 버렸다.
“난 저 정도까진 아니지 않았어?”
레오니에가 스칸디아에게서 꽃 뿌리는 동작을 배우는 동생을 응시한 채 물었다. 벨레아니는 스칸디아의 우아한 손동작을 빤히 구경하더니 이내 곧잘 따라 했다. 가르쳐 주지도 않은 사뿐사뿐한 발재간과 잔망스럽게 들썩이는 무릎 동작이 참 웃겼다.
“난 나이에 비해 무척 점잖았잖아.”
“물론이죠.”
“진심으로 안 들려.”
레오니에의 삐뚤어진 목소리에 플로무스가 또 한 번 웃음을 머금었다.
“근데 너희 부모님은 아시니?”
네가 황제랑 사귀는 거.
레오니에가 내부를 실없이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관리는 잘되어 있으나 고루한 느낌이 나는 벽지나 낡은 커튼을 보아하니 돌아가신 선대 케라타 자작이 쓴 방인 듯했다.
“참, 내가 너한테 부탁했던 축제 준비 상황은…….”
본론으로 들어서려던 찰나.
“어…….”
플로무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친우의 흔들리는 동공을 보기 무섭게, 레오니에는 순간 뭐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언제 말씀드리면 좋을까요?”
“말 안 했니?”
“…….”
“연애한다는 말은 했어?”
“아니요…….”
“…….”
짠, 짠짜! 언니들이 한창 연애 이야기로 머리를 싸매는 동안, 벨레아니는 화려한 빙글빙글 기술을 선보이며 종이를 뿌렸다.
“아찌 어때? 근사하지?”
“무척 멋집니다.”
“에헴! 이게 바로 레아의 필살기야!”
하찮고 귀여운 필살기였다.
* * *
저택에 돌아온 벨레아니는 잠들기 전까지 꽃 뿌리는 흉내를 내며 촐싹거렸다. 지켜보는 레오니에는 조마조마했다. 혹시나 저 입 싼 동생이 화동을 언급해 계획이 들키면 어쩌나, 싶었다.
“그건 무슨 놀이야?”
특히 바리아가 직접 물어볼 때는 심장이 철렁했다.
“놀이 아냐. 훈련이야.”
“무슨 훈련인데?”
“미안하지만, 그건 말해 줄 수 없다네…….”
다행히 벨레아니는 비밀을 엄수했다. 꽤 진지한 표정까지 곁들이며 언니와 나눈 약속을 지켰다.
“비밀을 밝히는 배신자에겐 죽음만 있을 뿐이지.”
“그 말은 누구한테 배웠어?”
“언니야.”
“야, 나 아니라고.”
끝내 어디서 배운 말인지 밝히지 않은 채, 벨레아니는 꿈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그럼 나도 자러 갈게.”
“잘 자라.”
“좋은 꿈 꾸고.”
레오니에도 부모님과 저녁 인사를 나누며 방으로 향했다.
“주인님.”
가려던 찰나, 손님방 하나가 조용히 열렸다. 레오니에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방은 무척 넓었다. 커다란 침대며 화병이 올려진 테이블, 의자까지. 한눈에 보아도 값비싼 최상품이었다.
하지만 지금 테이블 위에는 여러 서류가 펼쳐져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 회의가 될 거야.”
레오니에는 준비된 상석에 앉으며 말했다. 스칸디아가 그 어깨 위로 실내용 망토를 덮어 줬다. 자리에 앉은 모두가 경청했다.
“내일부터 마물 사냥 준비에 들어갈 거거든.”
말인즉슨, 펠리오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단 뜻이었다.
“그러니 너희도 내일 준비된 여관으로 이동해.”
계획이 마무리되어 실행만 남겨 놓은 지금, 여기에 더 머무르다가 들킬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합류한 뒤부터는 플로에게 최종적으로 확인받고, 폭설이 끝난 후에 바로 준비에 들어가.”
제 할 말을 마친 레오니에는 다른 이들의 보고를 받았다.
“각 영지에서 축제에 대해 긍정적으로 회신하였습니다.”
“하지만 숙박 및 교통 시설 기반이 부족합니다.”
“축제를 본격적으로 활성화할 땐 이를 먼저 해결해야겠지요.”
“서부에 내려보낸 상단에서 꽃을 확보했습니다만 조금 부족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레오니에는 보고를 들으면서 조금씩 조언을 첨삭했다.
“시설 기반은 이번을 보고 차후 설비하면 돼. 그리고 꽃이 부족하면 다른 수도 있으니 걱정 말아요. 아, 일반인들의 참여 유도는…….”
밤새 이어진 회의는 기어코 날을 넘겼다. 그리고 싸락눈이 제법 매섭던 다음 날, 레오니에의 친구들은 보레오티 저택을 떠났다.
폭설은 그 후로 이틀 뒤부터 시작되었다.
* * *
북부의 겨울은 폭설로 시작된다.
겨우내 짧게 뜨는 해마저 감춰 버리는 난폭한 눈보라는 무자비하다. 모든 것을 없애 버릴 것처럼 휘몰아치는 자연재해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북부의 가옥은 독특한 형식을 지니고 있군요.”
스칸디아가 짐 꾸러미를 살피며 말했다. 그는 이번 마물 사냥에 견학차 참여하기로 했다. 레오니에의 부군이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폭설이 내리면 밖을 못 나가니까, 어지간한 시설은 내부에 두는 거죠. 아니면 회랑으로 건물과 건물을 잇게 하든가.”
레오니에가 스칸디아의 옆에 쭈그려 앉았다.
“예쁜 아찌, 내가 저택 구경시켜 줄까?”
레오니에의 등에 업혀 있던 벨레아니가 스칸디아에게 제안했다.
“언니 남자한테 작업 걸지 마.”
“아빠아! 작업 거는 게 뭐야?”
“아오, 저 입 싼 게!”
아가 맹수의 반란은 기어코 언니 맹수에게 발목 잡혀 거꾸로 매달리는 형벌을 당함으로써 끝이 났다. 폭설이 내리쳐도 보레오티는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그리고 폭설이 하염없이 내리치던 2주가 끝나자, 실로 오랜만에 구름 한 점 없는 창공이 드러났다.
“조심히들 다녀와요.”
“빠빠…….”
바리아와 잠이 덜 깬 벨레아니의 배웅을 받으며, 글라디고 기사단은 북부 산맥으로 향했다.
마물 사냥이 시작되었다.
이번 마물 사냥엔 특별한 점이 있었다. 스칸디아가 신랑 수업을 겸해 참여하면서, 그리고 멜레스가 부기사단장으로서 기사단을 이끄는 기념비적인 첫날이었다.
“긴장되나?”
모노가 멜레스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그로서는 오늘이 마지막 마물 사냥이며, 이 일이 끝나면 일선에서 물러날 예정이었다.
“실수가 없어야 할 텐데요.”
“오늘까지는 실수해도 괜찮아.”
그러라고 자신이 온 것이라며, 모노가 호쾌하게 말했다.
“네가 할 건 주군의 명대로 기사들을 통솔하는 거야.”
글라디고에 상하 복종을 우습게 여길 정도로 덜떨어진 녀석들은 없으니 큰 문제가 아니란 말도 덧붙였다. 그 점은 멜레스도 알았다.
“제가 걱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닙니다.”
“음? 그럼?”
의아해하는 모노에게, 멜레스가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정말 장대한 광경이군요.”
“어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여기에 있는 거라곤 만년설이랑 암석이랑 식인 마물 몇백 마리뿐이에요.”
“제가 방해나 안 되면 좋을 텐데…….”
“무슨 섭섭한 소리를! 우리 뿜뿜이는 존재만으로 이미 나의 자양 강장제인걸!”
마치 이 공간에 자신들 둘밖에 없는 것처럼 알콩달콩 달라붙은 레오니에와 스칸디아.
“…….”
마물의 피가 흥건히 묻은 검을 조용히 응시하는 펠리오.
“주군, 죽이시면 안 됩니다.”
“거시적으로 생각하십시오.”
“큰 아가씨를 감당할 수 있는 건 저 사람뿐이란 말입니다.”
“그걸 주군도 아시잖습니까!”
그리고 살기를 누그러트리지 못하는 펠리오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려고 땀 뻘뻘 흘리는 기사들.
“…이런 상황에서.”
멜레스가 고뇌했다.
“저는 잘 헤쳐 나갈 수 있을까요?”
멜레스는 벌써 자신이 없어졌다. 눈앞에 펼쳐진 저 난리는 불가항력에 가까운 재앙이었다.
“어쩌겠냐.”
모노가 실없이 웃었다.
“이젠 내 일도 아닌데.”
뺑이 치라는 진심 어린 응원은 덤이었다.
* * *
북부 산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동안.
‘2주 안에 끝내.’
레오니에가 정해 둔 기간 내에 모든 일을 끝내기 위해, 보레오티 영지에 남은 맹수의 수하들이 발 빠지게 움직였다.
“…하면서 느낀 건데요.”
카텔이 플로무스에게 말했다. 둘은 바쁜 와중에 겨우 짬을 내 숨을 돌리는 중이었다. 눈 밑에 남은 시커먼 피로와 테이블에 차려진 향이 짙은 차가 지금 이 둘이 얼마나 바쁜지를 증명했다.
“주인님은 공작님을 그대로 복사한 것 같아요.”
“생김새가요?”
“아니, 얼굴도 얼굴이지만…….”
보레오티 특유의 서늘한 미모는 말하면 입 아팠다. 정작 본인은 최근 그 점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레오니에는 동물들이 저를 보며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날 때마다 ‘아이 씨, 나도…?’라며 괴롭게 중얼거린 적이 있었다.
물론 카텔이 말하려는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제가 보레오티 공작님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레오니에를 보필하다 보니, 자연히 펠리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주인님이 누굴 닮았는지는 알겠더라고요.”
카텔이 한 손으로 연거푸 입가를 쓸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두 눈이 두려움으로 질린 채였다.
“남들은 주인님이 역대 최흉의 보레오티가 될 거라고 하지만, 글쎄요…….”
카텔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리 레오니에가 날고 긴다고 해도, 펠리오를 이기진 못할 것 같았다.
“주인님은 좀 속전속결? 후환을 최대한 남기지 않기 위해 바로 처리해야 한다는 쪽이잖아요.”
플로무스가 차를 넘기며 긍정하다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 마시는 것보다 진하게 우려낸 탓이었다.
“어우, 써.”
카텔도 오만상을 썼다.
“어쨌건 주인님은 그런데, 공작님은 무서울 정도로 신중하시더라고요.”
펠리오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일들을 보니, 섬뜩하리만치 오랜 준비 기간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처리된, 속된 말로 펠리오에게 ‘찍힌’ 자들은 세상에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럼 복사한 것처럼 닮았다는 말엔 어폐가 있지 않나요?”
플로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요.”
카텔이 정색했다.
“그 점을 닮은 거예요.”
처음엔 레오니에의 졸업 과제 주제를 듣고 참 즉흥적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사람이 대단하면 그런 것도 과제로 선뜻 결정해 버리는구나, 싶어 감탄까지 했다. 하지만 막상 일을 진행하고 보니 알게 되었다.
“주인님은 이 모든 걸 몇 년 전부터 계획하셨더라고요.”
공작 부부의 결혼식으로 파생될 경제적 파급 효과.
말이 졸업 과제지, 고작 몇 개월 빠릿빠릿 움직인다고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금 이렇게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건, 레오니에가 일찌감치 이 모든 것의 기틀을 잡아 두었기 때문이었다.
“본인은 서둘러 해치우는 게 좋다고야 하시지만…….”
인고의 기다림을 바탕으로 하는 해결 방식이 부녀 둘 다 소스라치게 흡사했다. 그래서 카텔은 펠리오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공작님은 주인님이 그렇게 자라도록 가르치고 돌보셨잖아요.”
카텔이 넌더리를 쳤다.
“저는 못 키워요.”
카텔의 감상은 솔직했다.
“주인님이 아무리 근사해도, 딸로 키우기엔 난도가 너무 높지 않나요? 키우다 쓰러질 것 같은데.”
“어머…….”
플로무스는 안타까운 한숨을 흘렸다. 그러나 부정은 없었다.
“…워낙 씩씩하고 강한 분이시니까요.”
저의 어린 기억 속 레오니에도 지금과 썩 다를 바가 없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확실히 어지간한 각오로 키우기엔 분명 범상찮은 인재임은 확실했다.
“케라타 영애, 카텔 님.”
그때, 하녀가 들어오더니,
“드레스 시착이 끝났습니다.”
기다리던 소식과 함께 바로 옆방과 연결된 문을 열었다.
“와아…!”
“세상에, 공작 부인!”
플로무스와 카텔이 환호를 감추지 못했다. 검은 드레스를 시착한 바리아가 수줍은 미소를 띤 얼굴로 다가오는 둘을 맞이했다.
“어때요? 어울려요?”
바리아가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었다. 전신을 휘감은 검은 드레스는 체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자칫 부담스러울 수 있을 법하나, 허리 아래로부터 치마가 넓게 펼쳐지면서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엄마 너무 예뻐! 진짜 예뻐!”
벨레아니는 목이 쉬도록 외치며 폴짝거렸다.
“이게 다 검은 다이아인가요?”
카텔이 치마를 장식한 검은 보석들을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게 다 얼마야…!’
오직 보레오티 영지에서만 채굴되는, 부르는 게 값이라는 귀한 보석으로 치마 전면을 장식했다.
“공작 부인, 불편한 곳은 없으신가요?”
“덕분에요.”
바리아도 드레스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신기하네요. 보석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찌 안 무거운지.”
“무게를 가볍게 하는 경량화 작업을 마친 보석들입니다.”
드레스를 꼼꼼히 점검하던 테온 남작이 설명했다. 그의 두 눈은 뻘겋게 충혈된 채였다. 얼굴에도 피로가 덕지덕지 묻은 상태였다.
“밤을 얼마나 샌 거예요?”
카텔이 남작의 귀에만 들리게끔 물었다.
“잠은 잤습니다만, 다이아 작업 때문에 눈이 좀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치마를 수놓은 검은 다이아는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드레스 예쁘고, 검은 다이아 비싸고, 거기에 경량화 기술에 테온 남작의 작품이니까…….’
카텔이 드레스의 값어치를 얼추 계산해 봤다. 당연히 구체화된 수치는 나오지 않았다. 이 드레스는 앞으로 보레오티 가문의 가보 중 하나가 될 터고, 그 값은 말 그대로 천정부지로 치솟을 거다.
‘거기다 이 드레스는…….’
바리아가 입은 뒤엔 레오니에도 입을 거고, 벨레아니도 입게 될 거다. 드레스가 곧 보레오티의 역사가 될 거다.
‘주인님은 이것도 계산했겠지.’
카텔은 이제 주인님의 위대함에 감탄하는 것도 벅찼다.
“레아도 이거 입고 싶어!”
바리아가 입은 드레스가 얼마나 예쁜지, 미적 감각이 무당개구리에 머무른 벨레아니도 욕심을 냈다.
“하하, 나중에 작은 아가씨께서도 결혼하실 때 입…….”
“커헉! 컥! 콜록!”
카텔이 수명이 단축될 것 같은 기침을 미친 듯이 토해 냈다. 덕분에 ‘결혼’이란 단어는 묻혀 버렸다.
“엄마, 카텔 아픈가 봐.”
벨레아니는 혹여 제게 아픔이 옮을까, 재빨리 바리아의 뒤에 숨었다.
“죄송합니다. 그저 부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찬양하려다 사레가 걸려서요.”
조심치 못했다며 카텔이 사과했다. 그 틈에 테온 남작이 벨레아니에게 말했다.
“작은 아가씨 드레스도 곧 완성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응. 기다릴게.”
카텔과 플로무스가 조용히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이는 바쁘려나?”
바리아가 시착한 드레스를 손으로 쓸며 수줍게 웃었다.
“남편에게도 보여 주고 싶은…….”
“공작 부인.”
카텔이 싱긋 미소 지은 채로 끼어들었다.
“주인님께서 축제 당일까지 이 드레스는 비밀로 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펠리오한테도?”
“부인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공작님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으시대요.”
바리아가 퍽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노라고 답했다.
“그런 장난이면 장단 맞춰 줘야지.”
어느새 바리아도 펠리오에게 장난칠 생각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바리아의 드레스 시착이 끝날 즈음, 루페와 인세레아 부부와 그들의 아들인 루피가 보레오티 저택에 도착했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덕분에 인세레아는 바리아의 드레스를 아슬아슬하게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루피 안녕!”
“벨레아니 님, 안녕하세요.”
루피는 아직 어리단 이유로 합석했다. 하지만 루페는 아니었다.
“리코스 자작님은 안 됩니다.”
“남자는 출입 금지예요.”
플로무스와 카텔의 엄중한 경고와 함께 쫓겨난 루페는 머쓱히 문 앞에 서 있다가 홀로 집무실 방향으로 향했다.
‘무슨 꿍꿍이인지…….’
평소처럼 자리에 앉았지만, 루페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최근 레오니에의 친구들이 북부 여기저기를 바쁘게 움직인단 보고가 속속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레오니에의 졸업 과제는 분명 북부의 경제 발전에 아주 큰 도움이 될 내용이었다.
다만.
‘내 감이…….’
루페는 자신의 감을 썩 믿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간의 경험과 시간이 만들어 온 노련함이 석연찮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설마 반역?’
큰 아가씨가 기어코 작위 계승을 기다리지 못해서? 하나 이 추측은 빠르게 폐기되었다.
‘아가씨가 공작님을 얼마나 존경하는데.’
오히려 펠리오가 작위를 벨레아니에게 물려준다고 해도 순순히 물러날 터였다.
“…흐음.”
하나 이 찰나의 고민은 금방 끝나 버렸다.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나?’
루페는 새삼 머쓱해졌다. 학생들 과제에 지나치게 의심하고 숨겨진 것을 찾으려고 애쓰는 꼴이 저답지 않았다.
‘이것도 직업병이지.’
루페는 마음을 다잡고 업무를 시작했다. 펠리오가 사냥을 끝내고 돌아오기 전까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그리고.
“루페 아저씨.”
마물 사냥을 끝내고 돌아온 레오니에는 마물의 피로 칠갑한 갑옷도 벗지 않은 상태로 루페를 찾았다.
“아가씨 지금…!”
루페는 저를 찾은 레오니에의 차림새에 놀라고.
“아빠 결혼식에서 들러리 좀 서 주세요.”
이어 청하는 부탁을 듣기 무섭게 머릿속이 새하얗게 지워졌다.
* * *
“요즘 이상하군요.”
“뭐가요?”
바리아가 펠리오의 얼굴을 조물조물 마사지하며 물었다. 펠리오는 아내의 부드러운 손길에 눈을 편히 감은 채였다. 마물 사냥으로 고생하고 돌아온 남편을 위해, 바리아가 책으로 배운 마사지를 직접 해 주는 참이었다.
“아빠 떽!”
옆에 같이 누워 있던 벨레아니가 호통쳤다. 아가의 얼굴에는 얇게 자른 오이 조각들이 얹어진 채였다.
“마사지 받는데 말하면 얼굴에 주름져.”
“아빤 잘생겨서 주름져도 괜찮아.”
“그렇게 방심하다간 후딱 늙는 수가 있어.”
“네 언니가 그리 말하든?”
들어 본 적 있는 욕인데. 펠리오는 누운 채로 손을 슬쩍 옆으로 뻗어 벨레아니의 옆구리를 간질간질 괴롭혔다.
“꺄아아! 간지러!”
오동통한 배가 들썩거리더니 얼굴에서 오이가 툭툭 떨어졌다.
“에고.”
벨레아니가 떨어진 오이를 다시 얼굴에 얹었다가, 부모님 눈치를 보고는 이내 하나를 집어 들어 오물오물 먹었다.
“근데 이거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펠리오가 다시 바리아의 손길에 집중했다.
“이유는 무슨.”
마침 바리아의 엄지가 펠리오의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피로가 사르르 풀리는 기분에 펠리오는 저도 모르게 옅은 숨을 길게 내뱉었다.
“마물 사냥하고 왔으니 피곤하잖아요. 고생한 남편한테 이런 것도 못 해 줄까 봐?”
“나 없는 동안은 당신도 피곤했을 텐데.”
펠리오는 신경 써 주는 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걱정 마요. 저는 내일 레오랑 마사지 받으러 갈 거예요.”
“레오랑?”
“레오가 먼저 권했어요.”
바리아가 남편의 이마에 입술을 쪽 맞추며 말했다.
“…역시 수상한데.”
펠리오가 기어코 상체를 일으켰다. 마사지를 위해 편안한 차림새를 한지라, 반쯤 벌어진 상의 사이로 다부진 체격이 살짝 드러났다.
“레오가 먼저 효도 비슷한 행동을 할 때는 의심해야 합니다.”
“당신은 당신 큰딸을 좀 믿어요…….”
바리아가 펠리오의 상의 단추를 채우며 타박했다.
“그렇게 의심하고 수상쩍어하니까 레오가 툴툴거리지.”
“그럼 당신은 왜 레오랑 마사지를 받으러 갑니까?”
“딸이 엄마랑 놀지도 못하나?”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며, 오랜만에 모녀 둘이서 재밌게 놀다 오겠다며 바리아가 자랑했다.
“엄마, 레아는?”
어느새 오이를 다 먹어 치운 벨레아니가 슬쩍 달라붙었다.
“레아는 아빠랑 데이트하면 되지?”
“싫어! 아빠 재미없어!”
저도 같이 데려가라며 벨레아니가 찡찡거렸다. 펠리오는 둘째의 단호함에 상처 입은 마음을 애써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
“그래도 개운치 않군요.”
최근 루페의 반응이 이상했다. 레오니에가 하는 일들은 펠리오에게도 보고가 올라온다. 과제라고는 해도 북부 행정을 간섭하는 일이었으니까. 한데 축제 관련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루페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펠리오의 눈치를 살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기억을 되짚으면, 얼추 자신이 마물 사냥에서 다녀온 후부터였다.
‘날 한번 잡아서…….’
족쳐 볼까.
펠리오는 그간의 정을 봐서 나름 상냥한 방법들을 떠올려 봤다.
* * *
“…헉!”
갑작스러운 한기에 루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요실금 왔어요?”
이런, 레오니에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나중에 요실금에 좋은 운동법 가르쳐 드릴 테니 인세레아 언니랑 열심히 해요.”
“그런 거 아닙니다.”
루페가 애먼 헛기침을 콜록거렸다. 조금 전 보인 추태가 무안했다.
루페와 레오니에는 함께 외출한 상태였다. 이 두 사람이 보기 드문 조합은 아니었지만, 단둘이서 외출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도착한 곳은 보레오티 영지에 있는 신전이었다.
“나 여기 한 번을 안 왔었네.”
레오니에가 신전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공작님이 안 오시니까요.”
루페가 성호를 그으며 신상 앞에서 짧게 기도했다. 레오니에는 별꼴을 다 본다는 시선으로 잠시 바라보곤 휙 고개를 돌렸다.
‘뭐 좋은 신이라고.’
마음 같아서는 신 새끼 찬양하는 이 신전도 부숴 버리고 싶지만, 레오니에는 넓은 아량을 베풀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는…….”
신전을 살피던 레오니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좀 좁죠?”
레오니에의 질문엔 많은 것이 생략되었지만, 루페는 서글프게도 숨겨진 뜻을 전부 알아들었다.
“진짜로 하실 겁니까?”
결혼식을? 루페 역시 여러 가지를 생략한 채로 물었다.
“그럼 안 하나?”
“아니, 그…….”
대답도 채 하기 전에 두통이 찾아왔다. 루페는 간헐적으로 지끈거리는 통증을 가까스로 참았다.
“차라리 저한테 알려 주시지나 않았으면…….”
루페는 이쯤 되자 레오니에가 원망스러웠다. 왜 저에게 이런 엄청난 비밀을 말해 고통스럽게 하느냔 말이다.
“에이, 들러리한테는 미리 말해야지.”
정작 당사자는 태연했다.
“들러리보다 본인들께 이를 말씀하셔야지요.”
“그럼 깜짝 선물이 아니잖아요.”
“공작님 뒷목 잡고 쓰러지는 모습이 훤합니다, 벌써…….”
“역시 내가 세계 최강이라니까.”
레오니에가 하얀 이를 보이며 씩 웃었다. 뭐라고 반박하려던 루페는 이내 어깨에 힘을 뺐다. 저가 이렇게 화를 내 봤자 뭐 하겠나, 싶었다.
“으음, 울 아빠 부모님은 어디서 식을 올렸어요?”
레오니에가 물렀다.
“신전에서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선조들도?”
“야외에서 하시거나 저택 내에 별관에서 하신 분도 계시고.”
“별관?”
설마, 하고 루페를 바라보니.
“…그 별관 맞습니다.”
레오니에가 코니에의 진실을 목격했던 그곳이었다. 루페는 혹시 하는 마음에 레오니에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크게 흔들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거기서 할까?”
오히려 별관을 결혼식 장소로 진지하게 고려 중이었다.
“진심이십니까? 그래도 거기엔…….”
루페가 머뭇거렸다. 당신의 좋지 않은 추억이 있지 않으냐고 차마 물어보지도 못했다.
“난 과거에 연연하지 않아요.”
레오니에가 돌아서며 말했다.
“앞만 볼 뿐이지.”
그러니 그 별관에 자신의 슬픈 과거가 잠시 머물렀다 한들, 고작 그딴 찰나가 아름다울 미래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별관이 컸던 것 같으니까, 거기로 하죠.”
식장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하아.”
루페가 한숨과 함께 동의했다.
“하면 자제를 옮기는 것은 어찌하실 예정이십니까? 공작님께 들킬 게 뻔한데.”
“그것도, 방법이 있죠.”
레오니에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울 아빠가 나 어렸을 적에 써먹은 방법이 있잖아요.”
아이고. 루페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러니 어릴 적 가정 교육이 중요한 거였다.
그리고 며칠 후.
“아빠아앙.”
레오니에가 알랑방귀를 뀌며 펠리오에게 뭔가를 건넸다.
“난 네가 그럴 때마다 섬뜩하던데.”
“으휴, 마음에도 없는 소리.”
“딸아, 난 항상 진심이란다.”
“잔말 말고 이거나 마셔 봐.”
펠리오가 미심쩍은 눈으로 건네는 찻잔을 응시했다.
“…독?”
잔에 담긴 액체는 연한 노란색을 띠고 있었다. 코에 가져가 킁킁 냄새를 맡아 보니 달콤한 냄새가 올라왔다.
“내일 축제에서 팔 음료수야.”
숙면에 좋은 효능이 있어서 따로 챙겨 왔다고 설명했다.
“엄마도 여기.”
“고마워, 잘 마실게.”
잔을 건네받은 바리아가 한 모금 작게 마셨다.
“…….”
레오니에가 이를 지켜보았다.
“…이거 너무 맛있다.”
바리아가 감탄했다.
“달콤한데, 끝 맛이 쌉쌀한 게 깔끔하네.”
“역시 엄마는 입맛이 고급이라니까.”
바리아와 레오니에가 나누는 대화를 물끄러미 듣고 있던 펠리오도 이내 차를 한 모금 넘겼다.
“맛은 좋군.”
차를 즐기지 않는 펠리오조차 괜찮게 느꼈다.
“이걸 축제에서 팔 거라고?”
“어때? 품질 좋지?”
“상품화해도 나쁘지 않겠군.”
펠리오가 관심을 보였다. 북부에서 마시는 차는 다른 지역에서 수입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정도 차를 북부 내에서 만들 수 있다면 이건 큰 이익이었다.
“주재료는 케라타 영지에서 키우는 순록의…….”
펠리오와 바리아가 찻잔을 냅다 테이블로 치웠다.
“…먹이 중 하나인 이끼를 말려 우린 거야.”
내가 설마 이상한 걸 먹일까 봐? 둘은 레오니에의 싸늘한 시선을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어쨌건 펠리오와 바리아는 차를 깔끔하게 넘겼다. 숙면에 효능이 있단 말이 사실이긴 한지, 바리아는 차를 다 비우기 무섭게 꾸벅꾸벅 졸았다.
“벌써 잘 시간이네.”
“으음, 자러 가니…?”
바리아가 힘없는 팔을 흐느적거렸다. 그 뜻을 눈치챈 레오니에는 기꺼이 다가가 바리아를 꼬옥 안아 줬다.
“그러고 보니 레아는…….”
하아아, 바리아가 하품을 숨기지 못한 채 둘째를 찾았다.
“레아는 아까 내가 재웠어.”
“그래…?”
“그러니 엄마도 코오, 자자.”
말하기 무섭게 바리아의 눈꺼풀이 스르륵 떨어졌다. 레오니에는 제 품에 잠든 바리아를 소파에 천천히 눕혔다.
“…레오니에.”
그 모습을 힘겹게 노려보던 펠리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차에, 뭘…….”
“독 아니니까 걱정 마.”
어느새 펠리오 앞에 쪼그려 앉은 레오니에가 턱받침을 한 채 싱긋 웃었다. 펠리오는 천진난만한 딸아이의 모습에서 악마를 보았다.
“아빠가 예전에 나한테 먹인 수면제랑 똑같은 거야.”
네가 먹은 건 멀미약인데.
하나 펠리오는 차마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럼 내일 결혼식에서 봐.”
안녕히 주무세요. 짓궂은 목소리로 전하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펠리오는 소파로 힘없이 쓰러졌다.
“…진짜 잠든 거 맞지?”
레오니에가 벽난로 근처 벽에 걸린 부지깽이 중 불에 넣지 않은 것을 집어 들어 펠리오를 살살 찔러 봤다. 다행히 깊이 잠든 듯했다.
부모님이 완전히 잠든 걸 확인한 뒤에야.
짝짝-!
레오니에의 손뼉 소리와 함께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왔다.
“시작해.”
결혼식 준비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 *
잠든 펠리오와 바리아는 글라디고 기사들에 의해 침실로 옮겨졌다.
“멀미약이 저렇게 빨리 잠들게 합니까?”
어지간한 수면제보다 강한 효능에 스칸디아가 의아함을 보였다.
“동부에서 만든 마법약이에요. 비싼 만큼 부작용도 적고, 효능은 아주 좋죠.”
“그렇군요.”
“저도 어릴 때 아빠가 먹인 적 있어요.”
레오니에가 즐겁게 설명했다. 그날의 복수를 의도치 않게 오늘 해 버렸다며 기뻐하는 건 덤이었다. 기뻐하는 건 레오니에만이 아니었다.
“드디어…….”
카라가 감동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느라 안경을 벗었다.
“기쁜 날이 오는군요.”
손수건으로 젖은 눈가를 훔치는 노년의 집사는 이제 여한이 없는 것처럼 감동에 겨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유모였을 때부터 펠리오를 돌본 카라로서는 이번 결혼식이 보통 감격스러운 게 아니었다.
“드디어 주인님과 마님이 결혼식을…!”
“내가 해냈죠!”
레오니에가 으스댔다.
“아가씨가 효녀입니다.”
카라가 레오니에의 손을 꼭 쥐더니 손등을 한참 쓸었다.
“정말 장하십니다.”
“할머니, 울 아빠랑 엄마 결혼식 안 한 게 그렇게나 마음에 걸렸어요?”
“죽기 전에 두 분이 식 올리는 거 봤으니 여한이 없습니다.”
덩달아 슬픈 감정이 옮아 버린 레오니에가 그런 말 하지 말라며 고개를 붕붕 가로저었다.
“나랑 스칸이 결혼하는 것도 봐야죠.”
“그렇죠, 아직 아가씨 결혼이 남았죠…….”
“이렇게 울 시간이 어딨어요. 서둘러 준비해야지요.”
“아가씨 말씀이 맞습니다.”
겨우 눈물을 그친 카라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결혼식을 보레오티 저택 내에서 시작하게 된 이상, 내부를 단장할 수 있는 시간은 결혼식 전날 밤부터 당일 새벽까지였다.
“부모님 깨기 전에 다 끝내야 해요.”
레오니에의 말대로, 사용인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진짜로 내일 두 분께서 결혼식을 하시나요?”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무슨 결혼식을 이렇게 후딱 해…….”
사용인들은 전부 내일 있을 결혼식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아무리 보레오티가 범상치 않기로서니, 이건 범인의 수준에선 쉬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들도 보레오티 최대의 행사에 마음이 들떠 갔다. 중대한 사명을 해낸다는 사실에 감정이 고조되어 갔다.
“레오. 이쪽으로.”
스칸디아가 레오니에를 데리고 어느 방으로 향했다.
“조금 전에 카텔이 가져온 겁니다.”
그곳에서 스칸디아가 보여 준 건, 결혼식 예물로 부부가 교환할 시계였다.
“어머, 예뻐라!”
레오니에는 스칸디아가 건넨 하얀 장갑을 손에 끼고는 시계를 찬찬히 살폈다. 검은색과 분홍색 두 가지 색을 사용해 만들어진 시계는 크기 차이 빼고는 똑같은 모양이었다.
특히 가장 눈에 띄는 건 내부 동력 장치를 드러냈단 점이었다. 크고 작은 태엽과 톱니바퀴 등으로 이뤄진 복잡한 장치는 북부 장인들의 기술력을 자랑하면서 하나의 예술로 승화되었다. 덕분에 장식 없이도 고급스럽게 다가왔다.
“잘 나왔네요.”
“다들 열심히 했으니까요.”
스칸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올 겁니다.”
저를 응원해 주는 말에 레오니에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스칸디아가 두 팔을 넓게 벌렸다.
“잠깐만이라도 쉬는 게 어떻습니까?”
“이 품에서?”
“해 줄 수 있는 게 지금은 이것밖에 안 떠올라서요.”
“최고의 방법이죠.”
레오니에는 거절 없이 곧장 스칸디아의 품에 안겼다.
“하아…….”
레오니에는 그제야 자신의 피곤함을 드러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그렇게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스칸디아는 레오니에를 번쩍 들어 안은 채로 소파 의자에 털썩 앉았다. 다음엔 레오니에를 제 허벅지 위에 편히 앉혀 가슴에 기대게 했다.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꼼꼼히 덮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지막으론 느린 손짓으로 레오니에의 등을 도닥거렸다.
“재우지 마요…….”
레오니에가 품에 얼굴을 비비며 칭얼거렸다. 그러나 목소리엔 어느새 졸음이 가득했고, 총기 어린 검은 두 눈도 초점이 살짝 흐려진 채였다.
‘피곤하실 테지.’
이번 일로 안 바쁜 사람이 없다지만, 그중 가장 바빴던 사람은 누가 뭐래도 레오니에였다. 이 모든 일을 기획하고, 하나하나 지휘하며, 틈틈이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확인하고 수정해야 했다. 개중 몇 개는 직접 발품까지 팔았고, 바쁜 일정에도 마물 사냥까지 다녀왔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시는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스칸디아가 졸음에 끔뻑이는 레오니에의 눈꺼풀 위에 입술을 살짝 맞췄다. 쪽 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러운 접촉에 눈가가 움찔거렸다.
“단순히 저희의 결혼 때문은 아니죠?”
“그건 진짜예요.”
레오니에가 반박했다.
“내 졸업 다음 목표는 우리의 결혼과 임신이라고요!”
“…….”
“물론 다른 것도 좀 있고.”
하지만 이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부모님이 결혼식을 안 한 게 내심 마음에 걸려서요.”
“설마 레오 당신의 탓이라고…….”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레오니에가 힘줘 말했다. 오히려 저 때문에 둘이 결혼했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아빠랑 엄마는 당시 상황이 안 좋았잖아요.”
표면적으론 결혼식이 귀찮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였다. 하나 실상은 달랐다. 당시 바리아가 자신의 결혼식을 빌미로 친정 식구들이 들러붙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러다 겨우 여유가 생기나 싶었더니 벨레아니가 태어나면서 결혼식은 흐지부지 잊혀 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니, 레오니에는 어느새 성인을 문턱에 둔 상태였다. 그제야 아이는 부모님이 저와 동생 때문에 젊은 나이에 얼마나 많은 인고를 견뎠는지 가늠하게 되었다.
“나름 효도한다고 했는데, 그게 진짜 효도였겠어요?”
아빠 말마따나 허파 뒤집는 일이었지. 레오니에가 펠리오의 말버릇을 흉내 내며 킥킥 웃었다. 스칸디아도 따라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러니 이젠 진짜 결혼해야죠.”
“하지만 공작님은 또 허파 뒤집혔다고 말씀하실 것 같군요.”
“내가 안 물어봤을까 봐요?”
레오니에가 콧방귀를 뀌었다. 이 깜짝 선물을 준비하기 전에 먼저 물어봤지만, 둘은 이 나이에 무슨 주책이냐며 부드럽게 거절했다.
“주책인 나이는 없어요.”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거기에 나이 운운하며 왈가왈부하는 건 촌스러운 짓이었다.
“우리 아빠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신랑 신부가 될 거예요.”
“역시 레오는 착하군요.”
스칸디아가 장하단 듯이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었다. 느릿느릿한 손짓에 레오니에의 얼굴이 살살 녹아내렸다.
“아주, 근사할…….”
애정이 듬뿍 담긴 손길에 기어코 레오니에의 의식이 가물가물해졌다.
“재우지 말라니…….”
“30분 뒤에 깨워 드릴 테니까, 잠깐만이라도 눈을 붙이세요.”
“하지만…….”
레오니에는 어떻게든 잠에서 깨려고 눈을 찡그렸다. 하나 곧 졸음이 겨운 얼굴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 스카니아는 레오니에의 입술을 제 입술로 살짝살짝 깨물었다. 푸딩을 먹듯이 부드럽게 짓이기고 머금을 때마다, 바닥에 살짝 뜬 레오니에의 두 다리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이를 눈치챈 스칸디아의 눈가가 얄망궂게 휘어졌다.
“…재우려는 거 맞아요?”
견디다 못한 레오니에가 스칸디아의 얼굴을 밀쳐 냈다. 얕은 숨을 씩씩거리는 레오니에의 얼굴은 빨갛게 물든 채였다. 손대지 않아도 화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노려보는 눈가엔 눈물이 살짝 맺혔고, 영역 표시처럼 침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은 살짝 부은 채였다.
“이런, 깼습니까?”
재우려고 그랬다며 스칸디아가 먹히지도 않을 변명을 토했다. 어이가 없어진 레오니에는 얄궂은 연인의 코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레오는 이런 것에 약하지 않습니까.”
스칸디아가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격정적인 접근보다 애가 닳을 정도로 느릿한 것에 레오니에가 더 약하단 걸, 스칸디아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또 기어오른다.”
바빠서 한눈 좀 팔았더니 버르장머리가 없어졌네. 레오니에가 당장 눈앞에 있는 듬직한 흉근을 손가락으로 꼬집었다. 아프지도 않은 처벌임에도 스칸디아가 엄살을 부렸다.
“이번에는 레오가 잘못했습니다.”
자신이 안 기어오르도록 돌봐 주지 않은 당신의 잘못이었다.
“…….”
레오니에는 말문이 막혔다.
“나중에 보자…….”
그러나 간질거리던 흥분과 함께 몰려온 어마어마한 졸음을 끝내 이기지 못해서, 레오니에는 훗날을 도모하며 눈을 감았다. 곧 안정적인 숨소리가 색색 울렸다.
스칸디아는 잠든 레오니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큼지막한 손이 잠든 얼굴을 어루만지니, 얼굴의 절반 이상이 간단히 가려졌다.
‘나중에 보자니.’
위협이라곤 전혀 없던 협박을 떠올리며, 스칸디아는 뒤늦게 웃음을 터트렸다. 잠든 레오니에의 얼굴을 보는 게 처음도 아니건만, 스칸디아는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게 참 신기했다.
‘그때랑 똑같네.’
딱 한 번 봤던 일곱 살 꼬마는 아직도 이 얼굴 속에 숨어 있었다. 레오니에가 곤히 잠든 뒤에나 볼 수 있는 귀한 분이었다.
“딸이었으면 좋겠네요.”
당신을 닮아 씩씩하고 귀여운 아이였으면.
스칸디아는 자세를 고쳐 레오니에를 조금 더 깊숙이 품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30분 동안 어떤 미동도 없이, 깊이 잠이 든 레오니에를 기다려 줬다.
* * *
“벨레아니 보레오티.”
레오니에가 지엄한 표정으로 명을 내렸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비틀거리던 아가 맹수가 단번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엄마랑 아빠가 결혼해!’
엄청난 사실을 떠올리기 무섭게 벨레아니가 차렷 자세를 했다. 레오니에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지금부터 아빠를 깨운다.”
“깨운다!”
“실시.”
“실시!”
벨레아니는 용맹한 걸음으로 펠리오의 침실까지 향했다. 두툼한 잠옷 차림 덕분에 오동통한 뱃살이 유독 강조되었다.
“아빠!”
기운 넘치는 울부짖음과 함께 침대 위로 올라간 벨레아니는 펠리오의 얼굴을 찰싹찰싹 때렸다.
“…딸아.”
펠리오가 제 볼을 연타하는 둘째를 가까스로 잡아 말렸다.
“다음엔, 조금 더 상냥히 깨워 주거라.”
쥐똥만 한 게 힘은 어찌나 좋은지, 말하는 중에도 펠리오는 양 볼이 후끈거렸다.
“맹수에게 그런 건 없어.”
벨레아니가 엄히 말했다.
“보레오티는 강자만 살아남지. 아빠는 졌다!”
“패배한 아빠는 이대로 기절해도…….”
괜찮지 않겠느냐며 침대에 다시 누우려던 펠리오가 멈칫했다.
내가 왜 자고 있지?
흐릿한 전날의 기억은 다행히 금방 떠올랐다. 동시에 얼굴의 핏기가 단번에 가셨다.
‘그럼 내일 결혼식에서 봐.’
‘안녕히 주무세요.’
악마보다 섬뜩했던 레오니에의 얼굴이 생생했다. 펠리오가 예고도 없이 벌떡 일어난 탓에, 벨레아니가 데구르르 침대 위를 굴렀다.
“놀래라!”
벨레아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언니 지금 어딨어?”
펠리오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그제야 침대에 저 혼자 있었단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늘 함께 자는 바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언니야가 데려갔어.”
“어디로?”
“결혼식!”
침대에서 내려온 벨레아니가 촐싹거리며 답했다.
“…뭐?”
평소라면 요상한 춤사위를 자랑하는 둘째를 칭찬했겠지만, 지금의 펠리오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는 지금 ‘결혼식’이란 글자에 이성이 반쯤 뒤집힌 상태였다.
“…으응?”
까불거리던 벨레아니가 멈칫했다.
“아빠, 송곳니 으르렁거려.”
펠리오의 격한 감정에 따라 요동치는 맹수의 송곳니를, 벨레아니는 기민하게 눈치챘다.
“네 언니가 결혼한대?”
살기 어린 목소리가 다물린 잇새 사이로 낮게 울렸다. 처음 보는 아빠의 화난 모습에 벨레아니가 눈치를 살폈다. 가슴 앞섶에 모은 단풍잎 같은 손가락이 불안하게 꼬물거렸다.
“아빠는 결혼 싫어?”
당황한 벨레아니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 그럼 안 되는데…?”
“충분히 가능하단다.”
결혼식이란 본디 반대하는 사람이 나타나 깽판을 침으로써 더욱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법이지. 펠리오가 살벌한 감정을 다정히 설명했다.
“그러면 엄마는 어떡해?”
벨레아니가 물었다.
“아빠가 신랑인데, 그럼 엄마는 신부 못 하는 거야?”
“레아.”
펠리오가 서둘러 몸을 낮췄다.
“다시 말해 봐. 방금 뭐라고 말했지?”
“어, 엄마 신부…….”
“엄마가 신부라고?”
듣고도 믿지 못한 펠리오가 한 번 더 되물었다.
“그리고 아빠가, 그러니까 내가 신랑이고?”
벨레아니가 고개를 끄덕인 덕에, 펠리오는 잘못 들은 게 아님을 빠르게 확신했다. 후우, 펠리오가 안도했다. 레오니에가 결혼하는 줄 알았던 펠리오는 빠르게 진정했다. 물론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그럼 이제 가자요!”
벨레아니가 펠리오의 팔을 쭉쭉 잡아당겼다.
‘이거 무슨 놀이인가?’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예복 차림으로 제게 인사하는 기사들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누구 생각이지?”
“생각하시는 그대로입니다.”
대표로 나온 마누스가 말했다.
“그대들은 언제부터 알았고.”
“저희도 오늘 새벽에 들었습니다.”
그리 대답하는 마누스 역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빠!”
꾹꾹, 벨레아니가 펠리오의 옷자락을 쥔 채 말했다.
“레아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롱!”
벨레아니는 발치를 폴짝폴짝 튕기면서 손뼉을 짝짝 쳤다.
“아빠 결혼 축하해!”
해맑은 축하가 무색하리만치, 펠리오와 기사들의 얼굴 위론 피로가 짙게 드리워졌다.
결혼식 당일 아침이었다.
* * *
“축제는 성황리에 진행 중입니다.”
카텔은 어느 때보다 들뜬 상태였다.
“수도에 있었을 때 미리 홍보해 둔 덕인지, 관광객이 전년 대비 대폭 증가했습니다.”
“다른 문제는 없고?”
레오니에가 하녀들의 치장을 받으며 물었다. 거울 속 레오니에는 오랜만에 머리를 올려 묶었다. 길게 내려오는 검은 머리는 하녀들의 능수능란한 손길 따라 멋들어지게 정리되었다. 화장대 옆에는 레오니에가 입을 검은 정장이 준비되었다.
“아직까진 예상 범위입니다.”
“급하게 해결해야 할 건?”
“현재로서는 없습니다만, 추후 파악되는 대로 보고 올리겠습니다.”
보고를 간략히 마친 카텔이 조그만 상자를 내밀었다. 검은색 벨벳으로 뒤덮인 조그마한 상자였다.
“결혼식 답례품입니다.”
카텔은 가져온 물건을 코니에게 넘겼고, 코니는 그것을 레오니에의 손에 전달했다. 상자 속에는 시계가 있었다.
“…보레오티네.”
새하얀 팔각형 테두리 속 검은색 상판, 그 속에서 째깍째깍 움직이는 작은 시곗바늘까지. 완성품을 보는 레오니에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답례품으로 주기엔 아까울 정도야.”
당장 최고급형 브랜드에 입품시켜 팔아도 될 정도였다.
“작년에 각 지역을 상징화해서 만든 시계가 반응이 좋았던 탓에, 이번 것이 더욱 아쉽네요.”
“하지만 홍보는 되겠지.”
“더할 나위 없을 홍보일 겁니다.”
카텔이 물러난 뒤, 레오니에는 준비된 정장으로 바꿔 입었다. 즐겨 입는 망토도 오늘만큼은 어깨 한쪽에만 걸치도록 장식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셔츠 목깃에 장식된 브로치 타이였다. 언젠가 자신의 시계와 교환했던 스칸디아의 펜던트 목걸이로 만든 것이었다.
“어때?”
레오니에가 물었다.
“말해 뭐 합니까.”
“완벽하시죠.”
코니와 미아가 기다렸단 듯이 찬양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잠시 심각하게 고민하던 코니가 각오를 다지고는 말했다.
“세 번째로 아름다우세요.”
“저도 오늘만큼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옆에서 경악하던 미아도 이내 동의했다.
“당연하지!”
자리에서 일어난 레오니에는 옆방으로 향했다. 문을 지키고 있던 멜레스와 또 다른 여자 기사가 예를 갖춘 뒤에 문을 열어 줬다.
“오늘 가장 아름다운 분은 바로 여기 있으니까.”
“바로 나지롱!”
벨레아니가 씩씩하게 외쳤다. 알록달록한 화관을 머리에 쓴 벨레아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의 요정이 되었다.
“땡, 틀렸지롱.”
레오니에가 충격에 입을 쩍 벌린 여동생을 번쩍 안아 들었다.
“오늘 가장 예쁜 사람은 바로…!”
감질나는 침묵을 길게 끈 레오니에가 정답을 발표했다.
“엄마랑 아빠입니다!”
“흥.”
벨레아니가 콧방귀를 뀌었다.
“엄마면 봐준다.”
보레오티의 새로운 역사가 될 검은 드레스를 입고, 긴 머리를 아름답게 올려 묶은 바리아는 그 이름처럼 아름다운 맹수였다. 벨레아니가 한 수 접고 들어갈 만했다. 하지만 바리아의 귀걸이와 목걸이 등은 북부의 귀한 광물들로 만든 것이었다.
레오니에가 테르를 시켜서 가져왔던 에르바누 가문의 보석들은 바리아가 기겁을 했기 때문이다. 테르의 고생이 헛되었지만, 레오니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저기…….”
정작 결혼식의 주인공은 이 모든 것이 얼떨떨했다.
“…너희 아빠는 아니?”
바리아가 혹시 하는 마음에 물었다.
“아빠도 방금 막 알았어.”
“세상에, 레오…….”
바리아가 탄식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엄청난 건 미리 말해 줬어야지…!”
“말한다고 했을까?”
소파에 털썩 앉은 레오니에가 빈정거렸다.
“두 사람한테 이제 결혼식 좀 올리라고 몇 번을 말했어? 내가 이번 여름 방학 때도 물어본 거로 아는데?”
바리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슬슬 식 올리지?’
레오니에가 이따금 결혼식을 권유하긴 했지만, 그날따라 유독 집요하게 물어봤었다. 그때 자신들은 뭐라고 말했던가.
‘이 나이에 주책이다.’
‘번거로우니 됐어, 얘.’
말만으로도 고맙다며 정중히 사양했었다.
“엄마는 결혼식 싫어?”
벨레아니가 물었다.
“싫다니, 그럴 리가!”
바리아가 서둘러 부정했다.
“절대 그런 거 아냐.”
혹여 아이들이 그렇게 착각이라도 할까, 바리아가 격한 목소리로 다시 또 부정했다.
“너무 고마워서 그래…….”
결혼식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아이들이 더 소중했다. 저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과연 아이들에게 잘해 주고 있는지 늘 의문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자신이 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행복을 이리도 간단히 안겨 줬다.
“엄마.”
어느새 옆에 다가온 레오니에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바리아의 손을 쥐었다.
“엄마가 전에 나한테 말했지?”
내가 행복의 마침표라고.
레오니에는 오늘 그 말을 조금 고쳐 볼 예정이었다.
“나와 벨레아니는 행복의 늘임표가 될 거야.”
“…….”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첫날이 될 거고.”
부모님의 결혼식을 축복하는 역할을, 저와 벨레아니가 기꺼이 맡아 내어 완벽하게 수행할 것이다.
“레아가 화동 연습 열심히 했어!”
벨레아니가 자랑했다.
“엄마, 나만 믿어! 레아가 엄청난 축복을 내려 줄게!”
“어이구, 세상에나.”
레오니에가 쓰게 웃었다.
“울면 어떡해.”
“응? 엄마 왜 울어?”
“너무 기쁘면 이렇게 울기도 해.”
“엄마는 바보네. 기쁘면 웃어야지!”
그래도 엄마가 우는 게 불안한지라, 벨레아니가 바리아를 꼭 끌어안았다. 레오니에도 그런 둘을 다정히 안아 줬다.
* * *
“…….”
“…….”
루페와 트라는 이런 식으로 서로 만나게 될 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은 결혼식이 거행될 별관, 식장 바로 옆에 마련된 신랑 대기실이었다. 둘은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냈지만, 설마 들러리 복장 차림으로 나란히 앉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큰 아가씨는 정말 대단하군요.”
트라가 감탄했고.
“정말 전무후무한 분이시지.”
루페 역시 깊이 공감했다. 그분이 어렸을 적부터 지켜봐 왔고, 이제는 얼추 행동과 생각을 예상할 수 있다고 여겼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예단이었다. 루페는 자신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레오니에의 머릿속을 절대 읽을 수 없을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아가씨가 근육 박애니 뭐니 외칠 때 알았어야 했는데…….’
이 역시도 참 늦은 깨달음이었다.
“마님 쪽 들러리는 누가 선답니까?”
“제 아내와 레스 양입니다.”
“레스 양이면…….”
트라가 낯익은 이름을 듣고 누군가를 떠올렸다.
“마님께서 재정부에서 근무하실 때 친해지셨던 친구지요?”
“정확히는 공작님이 감시하라고 보낸 제 부하입니다.”
트라가 입을 쩍 벌렸다.
“…그때부터 주인님의 집착이 시작된 겁니까.”
그 아빠에 그 딸이었구나, 트라가 숨겨진 진실에 적잖게 감탄했다. 펠리오가 바리아에게 보이는 애정에 종종 놀란 적은 많지만, 설마 그렇게 섬뜩한 짓을 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거 범죄 아닙니까?”
트라가 심각하게 물었다.
“…뭐.”
잠시 고민하던 루페가 해명을 포기했다. 당시엔 올로르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바리아를 감시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루페는 굳이 이 사정을 자신이 설명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기엔 저는 오늘 정신적으로 타격이 너무 컸다.
‘거기다…….’
지레 겁먹은 루페가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다. 실컷 떠들고 난 뒤에야, 루페와 트라는 이 대기실에 자신들만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떠올렸다.
바로 이 깜짝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랑이 있었다.
“…….”
펠리오는 검은색 예복을 멀끔히 차려입은 채로 삐뚜름하게 앉아 있었다. 선호하지 않는 화려한 장식을 기꺼이 감수하고, 연회 때나 반쯤 넘기던 머리를 오늘은 전부 뒤로 넘겼다.
연회 때보다 더욱 치장한 탓인지, 그 화려함에 타고난 차가운 분위기까지 더해지니 오늘의 펠리오는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그러나 세상 무료한 표정은 변함없었다.
아니, 오히려 무슨 생각인지 더더욱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긴 했어.’
놀란 건 둘째 치고, 루페는 레오니에의 행보에 동의하는 쪽이었다. 저 역시 펠리오에게 결혼식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몇 번이고 건의했었다. 대귀족의 결혼식은 말 그대로 식 그 이상의 뜻을 지녔다.
“…너희 둘은.”
그렇게 조용히 있던 펠리오가 드디어 굳게 다물렸던 입을 열었다.
“이걸 언제부터 알았지?”
“저, 저는 일주일 전에 알았습니다.”
“저는 아가씨께서 편지로…….”
루페와 트라가 이실직고했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이어 물어보는 말에 두 남자는 아이처럼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루페와 트라가 ‘결혼식은 이렇게 끝나는 건가…….’라고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던 찰나.
“…그랬단 말이지.”
펠리오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페와 트라는 큰 충격에 빠졌다. 당장 머리를 흐트러트리고 목에 두른 크라바트를 내동댕이칠 줄 알았더니.
‘우, 웃었어?’
‘실성하셨나?’
큰딸의 막무가내에 화를 내는 게 어찌 보면 정상일 터인데, 펠리오는 오히려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축제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다지?”
찰나의 웃음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펠리오는 루페에게 영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물었다. 이에 루페는 아침에 올라온 보고를 서둘러 떠올렸다.
“호응이 좋다고 합니다. 특히 얼음 조각 축제는 귀족과 평민 양쪽에서 큰 호평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보스그루니 가문에서 협력한 찻잔 만들기 체험은 평민들에게, 케라타 가문의 순록 돌보기는 아이들에게 인기라고.
“그리고…….”
루페가 잠시 숨을 골랐다.
“아가씨께서 쇄빙선 조선과 겨우내 폭설 고립을 관광 상품으로 만드는 것을 건의하셨습니다.”
펠리오는 또다시 웃었다. 아까보다 선명한 미소는 흡족한 기분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걸.”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펠리오의 목소리엔 기쁨이 짙게 깔려 있었다.
“아무도 몰랐다라…….”
“저, 공작님.”
루페가 겁에 질린 심정을 최대한 감춘 채 말했다. 그는 펠리오가 이런 것도 파악하지 못했느냐고 제게 질책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가씨께선 공작님과 공작 부인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을 준비하셨을 겁니다.”
“글쎄.”
펠리오가 비아냥거렸다.
“내가 보기엔 레오 저가 결혼할 때 방해될 핑계들을 제거하려고 이 사달을 낸 것 같은데?”
적나라한 간파에 루페가 끙, 하고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저게 정답이었다. 레오니에가 졸업만 하면 무조건 결혼하겠다고 노래를 부르던 걸 떠올리면, 이 결혼식에 사심이 없다곤 말하기 힘들었다.
“하나 고작 그런 마음으로 이렇게까지 할 순 없습니다.”
트라가 또 다른 정론을 말했다.
“주인님과 마님을 향한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건 주인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
“이런, 제가 괜한 말을 했을까요.”
“아니.”
자리에서 일어난 펠리오가 하얀 면장갑을 고쳐 썼다.
“그게 진실이지.”
때마침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빠! 아빠 있어?”
“아버지, 저 루피예요.”
“아빠 없어? 안에 있는데?”
송곳니 있는데?
트라가 문을 열자, 벨레아니와 루피가 안으로 쏜살같이 들어왔다.
“아버지, 어머니가 엄청 예뻤어요.”
조금 전까지 신부 대기실에서 인세레아와 함께 있던 루피가 재잘거리며 자신이 본 것을 자랑했다.
“그리고요, 공작 부인께서도 무척이나 아름다우셨어요.”
“네 아들이 너보다 낫군.”
펠리오가 칭찬했다.
“와아…….”
벨레아니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더니 몸을 흔들었다.
“아빠 너무 예뻐!”
“설마 그걸 이제 안 건 아니겠지?”
저렇게 잘나기도 쉽지 않은데, 루페가 트라에게만 들리게끔 소곤거렸다.
“그럼 아주 섭섭해.”
“아빠는 레아를 뭐로 보고! 당연히 알고 있었지!”
“레아도 아주 예뻐.”
“아빠도 그걸 이제 안 건 아니겠지?”
눈을 새초롬하게 치켜뜬 벨레아니가 팔짱을 꼈다. 그 모습에 펠리오와 어른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우리 예쁜 요정께선 여기에 왜 왔지?”
펠리오는 벨레아니를 안아 든 동시에, 저가 ‘요정’이란 단어 좀 사용했다고 기겁하는 루페의 발등을 지그시 밟아 줬다.
“레아는 요정이 아니라 전사야.”
화동이란 그런 숙명을 타고난 것인 게야. 벨레아니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저, 공작님.”
루피가 대신 말했다.
“이제 식이 시작된다고, 레오니에 님이 공작님을 불러오라고 하셨어요.”
“아, 맞아. 언니야가 불렀어.”
그제야 세 어른은 대기실 밖이 아까보다 분주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 * *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다냐…….”
자리에 앉은 카니스는 아직도 정신이 혼미했다. 사실 식장에 모인 하객들 대다수가 카니스와 비슷한 감상을 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 갑작스러운 결혼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중이었다.
“우피 넌 알았으면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지 그랬어.”
아비페르가 원망이 살짝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그랬다가 레오 언니가 날 살려 뒀을까요?”
우피클라는 억울했다.
“말하면 우리 집안 말아먹을 거라고 했단 말이에요.”
“하긴, 레오 누나라면 그러고도 남지.”
부쩍 자란 피누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우리 가문의 상단이랑 항구를 흡수했을지도 몰라.”
“그거면 다행이게?”
우피클라가 몸서리를 쳤다.
“그래도 누나는 좋겠다. 재밌는 거 했잖아.”
“나의 비극은 남에겐 희극일 뿐이지…….”
대답하는 우피클라의 눈동자엔 그간 얼마나 고생했는지 고스란히 내비쳐졌다.
“와, 내가 진짜…….”
카니스가 묵묵히 딸의 어깨를 도닥였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공부는 됐지?”
“그거야…….”
그 점은 우피클라도 인정하는 바였다. 레오니에가 지시한 꽃 납품을 직접 해 보면서, 우피클라는 상단이 어떻게 움직이고, 긴급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몸소 체험했다. 글과 말, 단순한 견학으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것이었다.
“겨울에 하는 결혼인데도 이곳만 봄 같네요.”
“꽃이 너무 아름다워요.”
“서부에서 올라온 꽃이라죠?”
“겨울에도 이토록 싱싱한 꽃을 키울 수 있군요.”
게다가 하객들이 식장을 장식한 꽃 장식을 칭찬하는 덕분에, 우피클라는 자신의 성과가 인정받는 것 같아 뿌듯했다.
“확실히 레오 언니는 대단해요.”
“공작님과 공작 부인께선 참으로 복 받으셨어요.”
아비페르의 말에 카니스가 따라 웃었다.
“아빠 이번에는 안 울 거예요?”
“아빠가 왜 울어?”
“넌 그때 어려서 모르겠지만, 아빠가 예전에 북부에 놀러 갔을 에 엉엉 운 적이 있어.”
“아아, 누나가 공작님한테 결혼하자고 했다가 차였던?”
“야! 그래도 내가 찼거든!”
리네 남매는 이 좋은 날 또 개처럼 으르렁거렸다.
“당신 이번에도 울 거야?”
아비페르가 여전히 철없는 자식들을 뜯어말리며 물었다.
“글쎄…….”
마침 주례석에 누군가가 자리했다. 카니스는 한눈에 알아봤다. 저와 펠리오를 가르쳤던 스트리지 스승님이었다. 주례석에 선 노부인은 여전히 정정했다.
“그 녀석은 이제 내 걱정 따윈 없어도 돼.”
펠리오의 가정사를 알기에, 그의 가슴 깊이 박힌 외로움을 알고 있기에, 카니스는 펠리오에게 가족을 만들라고 여러 번 권하기도 했다.
“그놈을 위해 이런 멋진 결혼식을 준비해 주는 가족이 있잖아.”
언젠가, 카니스는 어린 레오니에의 손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었다.
‘영애께서 펠리오의 가족이 되어 주어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내가 울 필요가 없어.”
카니스는 기뻤다.
저의 소중한 친구는 이제 외롭지 않으니까.
* * *
“하객 여러분.”
사회석에 선 카텔이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
“저는 레오니에 보레오티 공작 영애의 우수한 비서인 카텔입니다. 오늘 이 결혼식의 사회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레오니에 님의 비서는 저인데요?”
루피가 입술을 삐죽였다.
“너는 아직 어리니까, 그때까지 저 사람이 영애의 비서가 될 거란다.”
파르두스 전 후작이 손주를 다독였다. 루피는 레오니에의 비서가 될 운명으로 태어났으나, 나이차 때문에 당장 비서가 되어 모시기엔 힘들었다.
‘아마 보레오티 영애의 자식 분을 모시게 될 테지.’
아직 조그마한 게 벌써 충성심으로 질투하다니, 파르두스 전 후작은 마냥 뿌듯하고 기특했다.
“이 기쁜 날, 이토록 뜻깊은 자리에 귀한 걸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텔은 오늘 진행될 결혼식을 간략히 소개했다.
“…그리고 답례품은 꼭 챙겨 가십시오.”
보레오티 영애께서 손수 구상하신 시계. 한정판이고, 매장에서 판매될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카텔의 이어지는 설명에 하객들이 들뜬 반응을 보였다.
레오니에의 시계 브랜드는 귀족들조차 쉬이 살 수 없는 귀중품이었다. 예약을 하고도 몇 달을 기다려야 겨우 살 수 있었다. 한데 그것을 결혼식 답례품으로, 심지어 레오니에가 직접 구상했다면 값어치가 몇 배나 오르는 것을 받게 되었으니.
하객들이 기뻐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진짭니까? 진짜입니까!”
그리고 식장 문밖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루페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어우, 난 자기가 이러면 참 귀여우면서도 창피하더라.”
인세레아가 이제 그만 좀 하라며 남편을 말렸다.
“레오니에 님께 당신 몫도 챙겨 달라고 했으니 걱정 마요.”
“여보…!”
감격한 루페가 아내를 와락 껴안았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펠리오는, 루페 네 녀석이 레오에게 ‘호구’라 불리는 걸 아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럼, 들러리들이 입장하겠습니다.”
“저희 불렀어요!”
인세레아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리코스 자작 부부가 먼저 입장하고.
“트라, 어때요? 나 오늘 괜찮아요?”
“예, 아름답네요.”
“영혼 없는 칭찬…….”
레스가 투덜거리며 트라와 함께 입장했다.
다음 순서를 기다리던 펠리오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레아.”
조금 전까지 호기롭던 아이는 조금 전 열린 문 너머로 보인 사람들 탓에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아빠…….”
벨레아니가 펠리오의 바짓자락에 얼굴을 문질렀다.
“괜찮아.”
펠리오가 응원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푸딩이야.”
펠리오가 벨레아니의 머리에 입을 쪽 맞추며 속삭였다.
“헤헤, 푸딩?”
긴장하던 벨레아니의 얼굴에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천하의 맹수가 고작 푸딩 따위에게 기죽어서 되겠어?”
“레아는 포식자라서, 푸딩을 다 먹어!”
“바로 그거야.”
다시 기운을 차린 벨레아니가 거친 콧숨을 내뱉었다.
“오, 이제 곧 아빠 차례네?”
신부 대기실에서 나온 레오니에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다가오는 딸의 모습에 펠리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때, 아빠? 오늘 당신의 큰딸이 멋 좀 부려 봤어. 근사하지?”
레오니에가 멋들어진 미소를 곁들이며 물었다.
“와아, 언니야 멋쟁이!”
“역시 우리 근육이가 뭘 좀 아는군.”
예이, 자매가 주먹을 맞대며 킥킥거렸다.
“…이럴 수가.”
펠리오가 헛웃음을 흘렸다.
“넌 정말 날 많이 닮았어.”
남들이 자신들을 보고 빼닮았다고 말할 땐 당연하다고 여겼으나, 오늘 이렇게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지금의 레오니에는 펠리오의 소년 시절을 연상케 했다. 펠리오조차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저와 비슷한 예복 차림이라 더더욱 그랬다.
“나도 요즘은 거울 볼 때마다 식겁해.”
“감동해서 식겁했나 보군.”
“젠장, 아빠가 잘생긴 건 사실이라 반박할 수가 없네.”
레오니에가 오늘은 봐주겠다며 기꺼이 한발 물러났다.
“…네 엄마는?”
펠리오가 굳게 닫힌 신부 대기실을 바라보며 물었다.
“주인공은 항상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지.”
“그러다 다 망치는 수가 있어.”
“이런, 경험담이신가?”
이어 식장 내에서 신랑 입장을 소개했다.
“나중에 봐.”
레오니에가 기사단들의 예도 관문을 통과하며 먼저 가는 펠리오를 배웅했다.
“아가씨.”
코니와 미아가 바리아를 모시고 나왔다.
“엄마!”
벨레아니가 쪼르르 달려갔다. 미아가 들고 있던 꽃바구니를 벨레아니에게 전달해 줬다.
“보통은 신부 아버지가 함께 들어가지만…….”
엄마의 친정 가문을 몰락시킨 장녀가 손을 내밀었다.
“엄마를 아빠에게 처음 데려다준 게 나이듯, 이번에도 내가 엄마를 아빠에게 데려다줄게.”
“그리고 레아가 꽃 뿌린다요!”
사람들 얼굴이 푸딩으로 보인 벨레아니가 의욕을 내뿜었다. 내민 손을 붙잡은 바리아가 레오니에를 올려다봤다.
“언제 이렇게 컸어…….”
“아주 듬직하지?”
“덩치가?”
벨레아니가 물었다.
“…넌 지금 결혼식인 걸 다행인 줄 알아라.”
레오니에의 위협에 벨레아니가 혀를 메롱, 하고 내밀었다. 사이좋은 자식들의 모습에 바리아의 눈가에 또 눈물이 맺히려고 했다. 코니가 서둘러 이를 손수건으로 훔쳤다.
“이제 울면 안 돼.”
레오니에가 숨을 가볍게 내쉬곤 앞을 바라봤다. 어느새 끝까지 도착한 펠리오가 드디어 뒤를 돌아봤다. 바리아를 발견했는지 눈이 살짝 커진 것이 보였다.
“이야, 누구 남편인지 몰라도 더럽게 잘생겼네.”
“바로 내 남편이지.”
바리아가 코를 훌쩍이며 자랑했다.
“그리고 너희의 아빠고.”
곧 사회가 신부 입장을 알렸다.
글라디고 기사단들이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가 뽑아서는 새로운 예도 관문을 만들었다.
“그럼 엄마, 이제 가 볼까?”
“가자요!”
“그래.”
믿음직스러운 두 딸과 함께, 바리아가 걸어갔다.
* * *
신부 입장의 시작은 화동이었다. 보온성을 위해 두툼한 속치마를 안에 덧대어 입은 벨레아니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꽃의 요정이었다.
“…….”
꽃의 요정은 나비처럼 사뿐사뿐 걸었다. 하지만 바구니에 담긴 꽃잎을 한 움큼 집어 바닥에 패대기치는 모습은 먹이를 사냥하는 맹수와 다름없었다. 더욱이 자신이 맡은 소임을 다하겠다는 옹골찬 표정이 정점을 찍었다.
하객들은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응?”
그러던 중에 바구니 꽃잎이 다 떨어졌고.
“어라…?”
당황한 벨레아니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근처에 있던 테이블에 장식된 꽃장식을 뜯어 바닥에 흩뿌렸다.
“전사는 포기하지 않아!”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에 하객들은 터지려는 웃음을 황급히 참았다. 여기서 웃었다간 자신들의 피로 물들 결혼식이 될 판이었다.
“…네 처제 좀 봐라.”
크리세토스 황제가 스칸디아에게 속삭였다.
“벌써 장난이 아니구나.”
“참으로 귀엽지 않습니까.”
스칸디아는 마냥 귀여워 죽겠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옆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헤스페리 후작이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아이고, 라고 중얼거렸다.
“아버지, 레아가 지금 무얼 하는 건가요?”
펠리데아가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화동이란다. 결혼하는 두 연인을 축복하는 일이지.”
“와아, 나도 하고 싶다…….”
펠리데아가 친구를 부러워했다.
“어이구, 우리 막내는 나중에 이 오라버니가 결혼할 때 화동할까?”
황제가 막냇동생을 달래며 히죽히죽 웃었다.
“크리스 너 결혼할 거야? 누구랑?”
“만나는 사람이 있었던 거니?”
정작 헤스페리 후작 부부는 다른 의미로 깜짝 놀랐다. 말실수를 깨달은 황제가 나중에 설명하겠다며 부모님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던 사이.
“와아!”
펠리데아가 환호성을 질렀다.
“신부님이어요!”
드디어 신부가 입장했다. 큰딸의 손을 잡은 채, 막내딸이 뿌린 꽃길을 밟으며 행진하는 바리아의 모습을 모두가 홀린 듯이 바라봤다.
“아름다우시기도 하지…….”
“설마 저거 다 검은 다이아인가요?”
“세상에나, 어쩜…!”
신부를 향한 찬사가 이어진 다음엔, 그 옆에서 함께 걸음을 맞춰 걷는 레오니에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특히 펠리오의 어린 시절을 아는 어른들의 반응이 남달랐다.
“진짜 소름 돋게 닮으셨네…….”
“그렇죠? 딱 아카데미 입학하실 즈음이 떠오르네요.”
“어릴 적부터 남다르긴 하셨지만, 저렇게까지 닮았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집사님, 이 좋은 날 왜 우십니까?”
모두 바리아와 레오니에에게 한눈팔려 있던 사이.
“공작님 좀 보세요.”
용기 내 펠리오를 살피던 유니시아가 오르티오 후작 부부에게 일렀다.
“…어머, 부인께 푹 빠지셨어요.”
“저희처럼 여전히 신혼이군요.”
“당신은 내가 밖에서 그렇게 귀여운 소리 하지 말랬죠?”
그리고 드디어.
“아빠.”
레오니에가 펠리오에게 바리아를 안내했다.
“이 효녀가 엄마를 모시고 왔어.”
“뻔뻔하긴.”
펠리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효녀라는 말로도 벅차지.”
“아, 뭐래. 웬일로 그런 말…….”
펠리오는 바리아의 손을 잡는 대신, 레오니에를 와락 끌어안았다.
“고맙다.”
흘러넘치는 감정을 단 한마디에 꾹꾹 눌러 담았다.
“…알면 잘해.”
레오니에가 씩 웃으며 아빠의 손에 엄마를 넘겼다.
“내가 끝까지 지켜볼 거야. 둘이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못 살면 이혼시킨 뒤에 엄마랑 레아 데리고 나갈 거라며 으름장까지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두 부부는 단상 앞에 섰다.
“…겨울의 창공만큼 푸르고 높은 것이 있을까, 싶었더니.”
스트리지의 얼굴에는 대견함이 가득했다.
“당신들의 아이들이었군요.”
걱정 많았던 제자의 장성함에 도리어 울컥했다.
“보레오티 영애께서 제게 부부의 축복을 빌어 달라고 하셨지만, 이미 축복이 만연한 가족입니다.”
펠리오와 바리아가 서로를 향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오늘처럼 행복한 날이 이어지기를, 설사 힘든 날이 찾아오더라도 이겨 내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진심 어린 주례에 박수가 쏟아졌다. 이어 진행된 예물 교환에선 서로의 손목에 시계를 채웠다. 서로의 남은 시간을 함께하겠단 뜻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맹세의 입맞춤에서 모두가 뜨거운 환호와 박수를 아낌없이 쏟았다.
누구보다 힘차게 손뼉을 짝짝 치던 벨레아니가 문득 옆을 돌아봤다.
“…….”
벨레아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니야…….”
그리고는 홀로 고개를 떨군 채 침묵하는 저의 언니를 꼭 끌어안아 줬다.
“언니야도 행복해서 우는 거야?”
“…….”
“괜찮아, 괜찮아.”
벨레아니가 조막만 한 손으로 언니의 등을 토닥여 줬다.
* * *
보레오티 공작 부부의 결혼식은 많은 이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성황리에 끝마친 축제.
화려했던 결혼식과 연회.
하지만 무엇보다도.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란 소문이 흉흉하던 보레오티 영애의 눈물이 가장 큰 화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