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 찬가
“…….”
마차에 올라탄 루페는 어느 때보다 긴장한 상태였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가 없단다.”
함께 있던 파르두스 후작이 어린 아들을 위로했다. 커다란 손이 잘 빗어 넘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하지만요, 아버지….”
루페가 창밖을 힐끔거렸다. 어느새 마차는 목적지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보레오티 영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크고 무시무시한 저택.
“보레오티 저택에 가는 거잖아요….”
“보레오티 저택이 무서운 거야, 아니면 보레오티가 무서운 거야?”
“다, 당연히 보레오티죠!”
루페가 즉답했다.
“맹수의 송곳니는 아주 위험하고 무서운 거잖아요.”
“나는 한번 꿰뚫려 보고 싶은데….”
“그러면 죽어요!”
“그렇게 죽는다면 정말 기쁜 일이란다….”
파르두스 후작이 행복한 꿈을 꾸듯 미소를 지었다. 루페는 저만 심각한 것 같아 미칠 지경이었다.
“작위는 형님이 이어받으실 건데….”
어느새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러나 루페는 차마 내리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제가 갈 이유가 있나요?”
“있지.”
파르두스 후작이 기어코 제 막내아들을 안아 들어 마차에서 내리게 했다.
“이곳에 네가 모실 분이 있단다.”
“모실, 분이요?”
바닥에 내려져서도 후작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루페가 저택을 빤히 응시했다. 무서운 맹수가 사는 곳답게 음산하기만 했다.
“보, 보레오티 공작님은 아니죠?”
만약 그런 거라면 당장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칠 작정이었다.
“외로운 맹수지.”
파르두스 후작은 아들과 함께 저택에 들어갔다.
“그분의 편이 되어 주렴.”
* * *
쾅, 소리와 함께 서재 문이 요란스럽게 열렸다.
“펠리오!”
경쾌한 구두 소리와 함께, 레지나가 검은 머리칼과 샛노란 치맛자락을 흩날리며 달렸다.
“펠리오 있어?”
고요한 서재는 단번에 활기차졌다. 하나 서재에 먼저 와 있던 소년은 저를 찾는 순진무구한 목소리가 마냥 달갑지 않았다. 오히려 저를 찾지 못했으면 했다.
“어, 여기 있었네?”
그러나 소년의 기대는 언제나처럼 물거품이 되었다.
“왜 이렇게 깊고 으슥한 곳에서 책을 읽는 거야?”
레지나가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물결처럼 굽이치는 검은 머리칼이 소년의 짧은 것과 똑같았다.
“…레지나.”
독서는 끝이군. 펠리오가 책을 덮었다.
“서재에선 조용히 해야 해.”
“헤헤, 알았어. 다음부터는 조심할게.”
“그 말만 벌써 몇 번째인 줄 알아?”
“으음, 몰라!”
“…….”
할 말을 잃은 펠리오는 일순 레지나가 몇 살인지 떠올렸다. 분위기를 읽는 눈치를 우르마리티 저택에 버리고 왔나, 싶을 정도로 답답한 사촌 동생은 저보다 두 살이 어렸다.
펠리오는 올해 11살이었으니.
‘아홉….’
자신의 아홉 살 시절을 떠올려 봤지만, 레지나처럼 눈치 없이 굴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날 왜 찾았는데?”
“있잖아. 파르두스 후작이 왔대.”
“그래서?”
“인사하러 가야지! 어른이 온 거잖아.”
레지나가 펠리오의 팔을 부여잡았다.
펠리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막무가내로 잡아당기는 팔이 아프면서도 철딱서니 없는 소리가 답답하기만 했다.
“우리는 보레오티야.”
소년이 팔을 뿌리쳤다.
“파르두스는 보레오티보다 아래야. 굳이 찾아가서 얼굴을 마주할 필요는 없어.”
더욱이 파르두스라면 대외적으론 보레오티와 대척점에 있는 관계로 보여야 했다. 아무리 저택 내에서 이뤄지는 만남이라고 해도 신중해서 나쁠 건 없었다.
“아니면, 아버지가 우리보고 내려오래?”
“아니.”
가서 인사하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은 오로지 레지나의 개인적인 의견이었다. 펠리오는 내 그럴 줄 알았단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볼일 다 봤으면 나가.”
“나도 여기 있으면 안 돼?”
“조용히 할 자신 있어?”
“있어!”
이거 보라며 레지나가 근처에 있던 책 한 권을 들었다. 자신도 이곳에서 책을 읽겠단 뜻이었다. 펠리오는 그러든 말든 읽던 책을 다시 들어 창가에 기대듯 앉았다.
“…….”
“…….”
그렇게 조용한 평화가 다시 찾아오나 싶었으나.
“…펠리오.”
레지나가 책을 옆으로 치우고는 펠리오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 책은 재미있어?”
“어.”
“무슨 이야긴데?”
“영지 경영.”
펠리오는 책에서 시선조차 떼지 않고 답했다.
“어려운 거잖아!”
레지나가 입술을 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참다못한 펠리오가 마지막 인내를 끌어모아 말했다.
“…나 지금 공부하는 거야.”
보레오티 공작이 읽으라고 준 책은 지금 읽는 것 말고도 두 권이나 더 있었다.
“제발 부탁인데, 조용히 좀 있어.”
“외숙부님이? 왜애?”
“그거야….”
천진난만한 질문에 펠리오는 말문이 막혔다.
“…후우.”
펠리오가 들끓는 속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몇 번인지 모를 설명을 오늘도 해야 했다.
“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작이 되어야 해. 그러니까 공부하는 거야.”
“흐응, 펠리오는 열심이구나.”
이해를 전혀 못 했군. 설명하면서도 펠리오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조용하길 바랐다.
“그럼 펠리오는….”
그러나 레지나는 쉬지 않고 질문했다.
“안 놀고 싶어?”
“책 다 읽으면 놀 거야.”
“그럼 빨리 읽어!”
“그럼 조용히 해.”
“응!”
레지나가 입을 꾹 다물며 창가 아래에 기대듯 앉았다. 그렇게 조용해지나 싶었더니.
“…….”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레지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산만하게 움직였다.
“…….”
이 역시 예상한 바인지라, 펠리오는 제게 쏟아지는 관심을 무시하며 책 읽는 데 집중했다.
펠리오는 외동이다. 보레오티의 유일한 후계이니, 부모가 금이야 옥이야 하며 소중히 여겨도 이상하지 않을 귀한 분이셨다. 거기다 역대 보레오티 중 가장 강한 이능을 지녔다.
‘그런데 왜….’
카라는 도련님의 옷들을 정리해 옷방 서랍에 차곡차곡 쌓으며 생각했다. 그녀의 손길이 닿은 곳은 무척 정갈해졌다.
옷방에서 나온 카라는 방 청소도 이어 시작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카라는 사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주인님과 마님께선 그토록 무정하신 걸까.’
그러다 결국엔 동작마저 멈췄다.
본래 카라는 펠리오의 유모였다. 그전에는 남편인 줄 알았던 인간에게 버림받고 혼자 생계를 꾸리던 미혼모였다. 궁핍한 삶을 보내던 중, 아들인 트라가 펠리오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면서, 젖먹이 유모로 저택에 입주했다.
카라에게 펠리오는 저희 모자를 굶주림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준 고마운 은인이면서 감히 아들 같다고 생각되는 분이었다. 카라는 이에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다. 펠리오가 다른 사용인들에겐 매몰차도 제 말을 잘 따라 주는 걸 알고 있다.
하나 그런 사실이 기쁘면서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개 유모일 뿐인 자신이 아무리 챙겨 준다고 해도, 부모의 사랑과 비교하면 턱도 없었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분이신데….’
카라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조금이라도 그분을 살펴 드리는 것뿐이었다.
“카라.”
문득 들리는 소리에 카라가 흠칫하며 뒤를 돌아봤다.
“어머, 도련님.”
카라가 먼지 묻은 손을 앞치마로 닦으며 다가갔다.
“무슨 일이신가요?”
무릎을 꿇어 시선을 마주하니, 펠리오가 머뭇거리며 주머니에 있던 것을 꺼내더니 쓱 내밀었다.
“이거 줄게.”
카라가 받은 건 이름 모를 작은 꽃이었다. 새하얀 꽃잎은 체온에 짓눌려 살짝 누렇게 되었지만, 꽃 자체는 아직 생기를 잃지 않았다.
“책에서 봤는데.”
펠리오가 여전히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했다.
“동부 너머 이국에는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서 선물을 주곤 한대. 그래서 주는 거야.”
카라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귀한 걸 어찌 한낱 유모에게 주세요….”
감사한 마음이 너무도 컸지만, 그래도 이 꽃의 주인은 주인님 부부여야 했다.
“주인님들께 주셔야지요. 그분들이 도련님의 부모님인데.”
“그 사람들은 됐어.”
펠리오의 입에서 나온 호칭은 마치 남을 지칭하는 것처럼 무척이나 삭막하고 메말랐다.
“아버지랑 어머니는 저택에 없어.”
레지나랑 외출했어.
“아….”
카라가 할 말을 잃었다.
“괜찮아.”
도리어 그런 카라를 펠리오가 덤덤히 위로했다.
“나도 조금 전에 알았거든.”
“…….”
“있잖아. 나 배고파.”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점심시간이네요.”
카라가 애써 웃으며 펠리오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카라, 트라도 같이 먹으라고 해.”
“안 됩니다. 트라는 기사단 시동이잖아요. 그곳에서 밥을 먹어야지요.”
“뭐 어때.”
밥 먹는 놀이나 하지, 뭐. 펠리오의 말도 안 되는 고집으로 얼떨결에 불려온 트라는 펠리오와 함께 점심을 먹게 되었다. 카라는 제 아들과 떠들며 식사하는 펠리오를 보며 다시 생각했다.
역시 이 집안은 뭔가 좀 이상하다고.
* * *
아버지를 따라온 뒤, 루페는 매주 두 번씩 펠리오의 친구라는 명목으로 보레오티 저택에 방문했다. 그렇게 방문한 지 벌써 2년이나 되었다.
이제 루페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보레오티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처음 왔을 때 만났던 보레오티 공작님은 여전히 무섭지만, 그래도 자신이 모실 펠리오 도련님은 무섭지 않았다.
물론 성질은 좀 더러웠지만.
“루페!”
때마침 뒤에서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지나 님.”
돌아서는 루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레지나는 외출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는 언제나처럼 반으로 나눠 묶인 채였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루페도 잘 지냈어? 요즘 날이 엄청 추워졌지?”
이것 보라며 레지나가 허공에 입김을 호호 불었다. 따스한 입김은 차가운 공기와 만나기 무섭게 뿌옇게 얼었다.
“옷 따뜻하게 입고 다녀. 감기 걸릴라.”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겨울은 북부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 같아, 그치?”
루페는 천진난만한 레지나를 무척 좋아했다. 보레오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량함과 순진무구함이 보는 사람마저 절로 행복하게 했다.
“그런데 어디 나가시나요?”
“외숙부님과 외숙모님이랑 외출해.”
레지나가 가리킨 곳에 보레오티 공작 부부가 있었다. 루페는 그들을 보자마자 서둘러 꾸벅 인사했다. 물론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어? 펠리오 님도 함께 가나요?”
“으으응.”
레지나가 고개를 저었다.
“펠리오는 공부해!”
“아….”
순간 루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외로운 맹수지.’
그래. 루페는 레지나를 배웅하면서 생각했다. 역시 이 집은 조금 이상했다.
“넌 레지나가 좋아?”
“예?”
예상치 못한 질문에 루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작 질문한 펠리오는 대수롭지 않은 질문이란 듯이 한 번 더 확인 사살을 했다.
“레지나만 보면 네 얼굴이 붉어져서 말이야. 인중은 두 배로 늘어나고.”
“아, 안 그런데요…?”
당황한 루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러는데?”
펠리오가 트라에게도 물었다. 트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치만 레지나 님은 상냥하고 예쁘시잖아요. 그러니 좋아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저, 저도 그런 거 때문에 호감을 지닌 것뿐이에요.”
“핑계는,”
세 소년은 공을 한 번씩 발로 차고 받으면서 노는 중이었다.
“근데 이거 재밌으세요?”
루페가 물었다.
“잡생각 안 나고 좋네.”
펠리오가 공을 루페에게 넘기며 답했다. 뻥, 하고 제법 멀리 날아간 공은 루페의 머리 위를 넘어갔다. 루페는 재빨리 공을 찾으러 달려갔다.
“…트라 너도 그래?”
펠리오는 트라에게도 물었다.
“레지나가 좋아?”
“으음….”
잠시 생각하던 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기야 하죠.”
하지만 딱히 결혼하고 싶다거나, 그런 종류의 감정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레지나는 그냥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었다.
“그래?”
“아마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난 싫어하는데.”
펠리오가 공을 가지고 달려오는 루페를 보며 말했다.
“…얼마나 싫어하시는데요?”
트라는 놀란 속내를 애써 감추며 물었다.
사실, 펠리오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었기에 그가 레지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인 카라조차도 제게 펠리오 앞에선 레지나와 너무 친근하게 지내지 말라고 조언할 정도였다. 하지만 설마 본인 입에서 저런 말을 직접 들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글쎄….”
펠리오가 잠시 고민했다.
“만약에 갑자기 레지나가 죽거나 사라져도.”
슬퍼하지 않을 거 같아. 펠리오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방계 출신이지만 맹수의 송곳니를 지닌 특이한 존재. 그리고 제 고모님의 혈육. 그러나 매사 제 심기를 건드리고 귀찮게 구는 사촌.
“차라리 남이었으면….”
뒷말은 생략되었지만, 트라는 펠리오가 무어라 말하고 싶었는지 확실하게 알았다.
‘정말 싫어하는구나.’
트라는 새삼 감탄했다. 펠리오의 말대로 정말 남이었다면, 레지나는 분명 크게 혼났을 거다. 아니, 혼나기만 하면 다행이었다. 때마침 루페가 공을 가져왔다. 하지만 소년들의 공놀이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이상한가?”
펠리오가 둘에게 물었다. 느닷없는 질문에 놀란 루페에게, 트라가 저 없는 동안 나눈 대화 내용을 간단히 전달했다.
“왜 그렇게 싫어하시는데요?”
루페가 물었다.
“혹시 공작님이랑 마님께서 레지나 님을 조금 더 챙기셔서 그런 건가요?”
“아니.”
그런데 펠리오의 대답이 의외였다.
“눈치가 없어서 싫어.”
가끔은 너무 답답하고 짜증 나서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라는 말을 끝으로, 펠리오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루페와 트라도 그 뒤를 따라갔다.
그날 이후, 둘은 다시는 펠리오 앞에서 레지나를 언급하지 않았다.
* * *
“왜 공작님은 펠리오 님을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
그날 밤.
루페는 제 잠자리를 보러 와 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들이 누운 침대에 걸터앉은 파르두스 후작이 다리 하나를 우아하게 꼬았다.
“네 눈에도 이상하더냐?”
“아버지랑 어머니는 저를 좋아하시잖아요.”
“무척이나 사랑하지.”
파르두스 후작이 루페의 머리칼을 넘겨 주며 말했다. 괜히 부끄러워진 루페가 멋쩍은 듯이 쓰다듬어진 제 머리를 벅벅 쓸었다. 이제 이런 부모님의 애정 표현이 부끄러울 나이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아들을 웃으며 지켜보던 후작이 입을 열었다.
“나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구나.”
파르두스 후작은 보레오티를 존경하지만, 같은 부모로서는 참으로 상종하기 싫단 생각을 종종 했다.
“루페, 네가 볼 땐 어떠하더냐?”
후작이 물었다. 루페가 신중히 단어를 골랐다. 어쩐지 보레오티 공작을 욕하는 거 같아 괜히 무서워졌지만, 그래도 표현을 해야 할 거 같았다.
“펠리오 님을 꼭 훈련시키는 거 같았어요.”
“…….”
“그러니까, 으음….”
“사냥개처럼?”
“네.”
보레오티 공작 부부는 아들에게 분명 최고의 환경을 제공했다. 입는 옷이며 먹는 음식, 하물며 손에 닿는 모든 것을 가장 비싸고 고급스러운 것으로만 주었다. 그리고 늘 시간을 내어 아들을 직접 가르쳤다.
“만약 제가 펠리오 님이었다면, 아주 힘들었을 거 같아요.”
“왜?”
“공작님이랑 공작 부인은 레지나 님만 좋아하니까요.”
어린 루페가 보아도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보레오티 공작 부부는 항상 레지나를 챙기고 예뻐했다. 하나 정작 제 친아들에겐 그런 애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관심은 있어 보였다. 다만 그 관심은 말 그대로 후계자가 제대로 된 공부를 했는지, 훈련은 잘 했는지에 대한 것에 한정되었다.
“보레오티는 원래 그래요?”
“당연히 아니란다.”
아들의 질문에 후작이 쓰게 웃었다.
“선대 공작님과 공작 부인께서 얼마나 다정하셨는데.”
돌아가신 그분들이 지금 제 아들 내외가 하는 꼴을 보면 뒷목을 붙잡고 기함할 게 분명했다. 특히 공작 부인이라면 구두 굽으로 아들 부부의 정수리를 찍어 피를 봤을 거다.
“근데 저는요.”
루페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레지나 님이 좋아요.”
“그러냐.”
“착하고 예쁜 분이잖아요.”
“착하기야 하지….”
후작이 입꼬리 끝을 비틀었다.
“잘 자라.”
루페가 눈을 감고 잠든 걸 확인한 뒤, 파르두스 후작이 복도로 나왔다. 파르두스 후작은 자식에게 차라리 말을 하지 않을지언정,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전에도 루페에게 비밀 하나를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엔가.
‘우리 며느리는 아들이 무서운 모양이야.’
돌아가신 선대 공작은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손자를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도 친자식이지 않습니까.’
‘맹수의 송곳니는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힘이지.’
그러다 보니, 아이를 멀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물론 그런 경우는 무척 적은 편이었다. 있더래도 타 가문에서 결혼해 온 부모가 대다수였다. 예를 들면 타 가문에서 시집온 보레오티 공작 부인 같은.
‘그럼 공작님은 왜 그러시는 겁니까?’
‘그놈은.’
근심으로 안색이 어두워진 선대 공작이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보레오티는 오만해야 하지만, 자칫하면 아주 큰 우를 범할 수가 있어.’
‘큰 우를 범한다는 건….’
‘자만.’
타인에게 오만해야 하는 건,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정점에 서는 이들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그리해야만 시답잖은 것들이 귀찮게 굴지 않았다.
‘우리에게 오만은 경고 수단에 불과하네. 우리가 세상 만물 중 가장 우월하단 뜻이 아니야.’
물론 우린 우월하지만. 재미없는 농담을 덧붙인 선대 공작은 여전히 웃지 않았다.
‘그런 착각에 빠지는 순간 편협한 머저리가 될 뿐이야.’
‘현 공작님이 그러하단 말씀이신가요?’
‘유감스럽게도.’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완벽하다고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날을 비웃듯, 역대 최강의 보레오티가 그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치 자만하던 맹수의 코를 납작하게 하려는 신의 철퇴처럼.
‘그래서 둘 다 레지나에게 그러는 게지.’
하나 그마저도 선대의 눈엔 괴이한 ‘가족 놀이’처럼 보였다.
‘보레오티라고 다 완벽하진 않군요.’
‘그 역시 착각이지.’
주름이 자글자글 진 노신사의 얼굴이 쓸쓸하게 그늘졌다.
‘보레오티도 사람인지라, 후회와 미련을 항상 가슴속에 품고 다닌단다.’
아들을 조금 더 살폈다면 저렇게 안 자랐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우리 꼬마 맹수가 외롭게 자라지 않았을 거고. 그러나 죽은 딸이 남긴 레지나도 아픈 가시였던지라.
선대 공작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거기다 괜히 자신이 끼어들어 중재했다간 도리어 펠리오에게 폐가 될 수 있었다. 아들을 자극해서 좋을 게 없었다.
‘파르두스 꼬맹이.’
‘예, 선대.’
‘너는 그리 살지 말거라.’
그렇게 나눈 대화가 선대와의 마지막이었다. 선대는 저 대화를 끝으로, 얼마 뒤에 숨을 거두었다. 선대 공작 부인이 죽고 나서, 항상 곧 만나러 가겠다고 농담처럼 내뱉더니 정말로 따라가 버렸다.
“여보?”
그리운 사색에 잠긴 후작이 흠칫했다.
“뭐 하고 있어요?”
“여보.”
파르두스 후작 부인이 잠옷 차림으로 나왔다.
“루페 재우고 온다더니, 아주 그냥 침대를 만들었네.”
쌀쌀맞은 핀잔에 후작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우리 막내가 부인을 너무 닮은 거 같아서요.”
“그럼 가서 더 보고 오지 그래요? 마누라는 독수공방하게 놔두고.”
“무슨 섭섭한 소리를.”
아내의 허리가 추울까, 후작이 서둘러 팔을 두르며 침실로 안내했다.
* * *
“와아! 펠리오!”
레지나가 들뜬 목소리를 냈다. 텅 빈 훈련장에서 맹수의 송곳니를 훈련하던 레지나의 등 뒤로 하늘색 송곳니가 선연하게 번뜩였다.
“네 개 다 꺼냈어!”
처음으로 성공하는 레지나의 나이는 열셋이었다.
“노력했네.”
그리고 레지나의 훈련을 지켜봐 주던 펠리오는 열다섯이 되었다. 펠리오의 체격은 이미 제 또래보다 한참이나 더 컸지만, 아직 얼굴은 소년의 티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나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검은 눈동자는 차갑다 못해 아파 보였다.
“헤헤, 노력했어!”
레지나는 자신이 꺼낸 송곳니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있잖아, 외숙부님이 송곳니 네 개 다 꺼낼 수 있게 되면 선물 사 주신다고 했어.”
“잘됐네.”
“펠리오는 뭐 받았어?”
“기억 안 나.”
심드렁히 대답했지만, 사실 펠리오는 선명히 기억했다. 자신이 처음 송곳니를 완벽하게 꺼낸 건 다섯 살 때였다. 사실 그전에도 꺼낸 적이 있었지만, 부모님이 싫어할 것을 뻔히 알아서 시킬 때까지 못하는 척했다.
물론 꺼내 보라고 해서 꺼냈던 어린 날에도 내심 기대했던 칭찬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마땅찮은 시선만 받았다.
“펠리오.”
“왜.”
“우리는 맹수의 송곳니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잖아.”
“엄청나긴 무슨.”
펠리오가 바닥에 덩그러니 있던 목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대화하기 싫단 뜻으로 목검을 크게 휘둘렀지만, 레지나는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이어 말했다.
“이걸로 뭔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목검이 허공에서 멈췄다.
“레지나.”
펠리오는 저것도 재능이면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저와 함께 가문의 역사를 배우고, 황실과의 악연도 귀에 딱지가 앉을 마치 들었을 텐데.
“그건 불가능해.”
“어째서?”
레지나는 여전히 머리에 꽃밭으로 가득했다. 언젠가 카라가 이렇게 말했다. 레지나는 너무 착해서 모두가 사이좋은 세상을 꿈꾸는 거라고. 하지만 펠리오의 생각은 달랐다.
이건 착한 게 아니었다.
펠리오가 오랫동안 본 바, 레지나는 자신이 ‘보레오티’란 자각이 없었다.
“보레오티는 함부로 나서선 안 돼.”
즉, 보레오티라면 응당 가져야 할 책임감이 없었다.
“왜?”
레지나가 되물었다.
“그치만 힘을 지닌 자가 일어나서 행동해야 세상이 변한다고 했어. 우린 그런 힘을 가졌잖아.”
그러니 나쁜 사람을 혼내 주고 마물을 다 없애 버리면 평화로워질 거라 주장했다.
“…….”
펠리오는 일순 제 손에 쥔 목검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걸로 제 뒤통수를 후려치면 이 멍청한 대화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기절이라도 해야 저게 입을 다물지 않을까.
그래도 끝끝내 인내를 발휘해 레지나에게 설명해줬다.
“보레오티는 작위를 받는 조건으로 북부의 자치권을 얻어냈어.”
그건 알지? 펠리오가 혹시, 하고 물으니 레지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북부 골수 귀족이 여전히 보레오티에 귀속되어 있잖아. 우리 아빠가 그렇고.”
친부인 우르마리티 백작 덕에 그 정도는 알고 있는 듯했다.
“맞아. 하지만 우리는 작위를 받은 이상, 황실에 위협이 될 법한 일을 해선 안 돼.”
“안 하잖아.”
“네가 하려고 했어.”
“내가?”
레지나가 전혀 모르겠단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순진무구한 표정이, 펠리오는 이따금 폭력보다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악명 높은 북부 산맥도, 레지나의 저 유해한 순수 앞에서는 감히 이름도 못 내밀 터였다.
“…우리는 그래선 안 돼.”
황실은 보레오티를 무서워했다. 건국 초, 초대 황제가 북부를 종속시키지 못하고 끊임없이 패배했다. 인간의 범주를 초월한 맹수의 송곳니 때문이었다. 그 탓에 그들은 보레오티의 움직임에 예민했다. 황궁 안에 북부와 연결된 게이트를 집어넣어 법으로 사용을 금지한 것이 그 일환이었다.
“맹수의 송곳니는 마물을 사냥할 때, 그리고 상대가 먼저 주제도 모르고 설칠 때만 써야 해.”
“으응….”
잠자코 듣던 레지나의 입술이 살짝 튀어나왔다. 이해는 어느 정도 했으나, 그런데도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듯했다.
“황실과 손잡고 해도 안 돼?”
“황실과는 손도 잡아선 안 돼.”
펠리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심지어 보레오티와 황실은 혼약도 금지되어 있어.”
“어, 진짜? 왜?”
놀란 레지나가 물었다.
“황실에 보레오티의 이능이 이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
“맹수의 송곳니는 직계….”
“직계가 아닌 방계도 가지고 태어날 수 있어.”
그 예가 바로 너고. 기어코 펠리오의 언성에 노기가 서렸고, 눈치가 없는 레지나마저 어깨를 움츠렸다.
“…어쨌든 그런 거야.”
펠리오가 서둘러 감정을 갈무리했다.
“그러니 제발.”
펠리오가 레지나에게 처음으로 부탁했다.
“나 없는 동안.”
며칠 뒤면 펠리오는 수도로 내려가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잘 지내.”
괜히 무슨 일 저지르지 말고. 펠리오의 짧은 부탁에는 보레오티에 제발 폐를 끼치지 말라는 간절함이 담뿍 담겨 있었다.
“펠리오…!”
그러나 레지나는 역시 뜻을 알아채지 못했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겉말에만 감동해 펠리오를 와락 끌어안았다.
“방학 때마다 올 거지?”
“아마.”
사실 마음 같아서야 방학 내내 수도에 머무르고 싶었다. 하나 그랬다간 아버지가 황태자와 친분이라도 쌓으라고 할 것 같아서 그냥 올라가기로 했다. 그 멍청한 새 새끼보다야 레지나가 조금은 나았으니까. 아주 조금 나았다.
“펠리오 못 볼 생각하니 서운하다….”
난 아닌데. 적어도 펠리오는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날을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3년 후.
폭우가 내리던 여름밤.
레지나는 사라졌다.
* * *
그날은 펠리오가 여름방학을 맞아 북부로 돌아온 날이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카라가 현관 입구에서부터 펠리오를 맞이했다.
“수도는 일찌감치 더웠지요?”
“거긴 사람 살 곳이 아니야.”
여름의 초입을 잠시 겪었을 뿐인데도 펠리오는 수도의 여름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렇다고 옷을 이리 얇게 입으시면 어쩌십니까.”
카라가 펠리오의 옷차림을 가볍게 나무랐다. 펠리오는 얇은 직물로 만든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다부진 체격이 옷감 속에서 희미하게 비쳤다.
“잔소리는.”
펠리오가 듣는 척도 하지 않으며 방으로 올라갔다.
“이젠 이 유모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시지요?”
“내 나이면 반항 한번 할 때도 되었지.”
“그러다 제 속이 타들어 갈 겁니다.”
“겨울에 따뜻하고 좋네.”
한마디를 지지 않는 도련님 덕분에 카라가 끝내 실소를 터뜨렸다. 오로지 이 두 사람이기에 가능한 대화였다.
“그런데.”
방으로 들어온 펠리오가 물었다.
“집이 너무 조용하군.”
원래도 조용한 곳이지만, 오늘은 유독 그 삭막함이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펠리오는 그 이유도 대충 눈치챘다.
“레지나는?”
저택에 오면 그날 하루 내내 졸졸 따라다니며 아카데미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는 사촌 동생이 없었다.
“그게….”
카라가 시선을 피하며 말을 아꼈다.
“…아니, 되었어.”
펠리오가 질문을 철회했다. 안 들어도 뻔했다.
‘운명의 상대를 만났어!’
‘그 사람은 날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것 같대. 너무 낭만적이지 않아?’
‘외숙부님께 들켰어.’
‘처음으로 혼이 났어. 어째서 외숙부님은 내 마음을 몰라 주시는 거지? 우린 서로 사랑한단 말이야…!’
‘하지만 괜찮아.’
사랑은 역경이라잖아!
자신이 아카데미에 있었을 때도 레지나는 굳이 편지에다가 제 사랑의 역경과 고난을 구구절절 적었었다. 레지나가 직접 제 귀에다가 낭독해 주는 기분이어서, 펠리오는 늘 편지를 읽은 뒤엔 소각장에다 태워 버렸다. 개중 몇 통은 뜯지도 않은 채였다.
“갈아입을 옷만 꺼내 놓고 나가 봐.”
편지 내용을 떠올린 펠리오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도련님.”
“그 녀석도.”
카라가 무어라 청하기 전에, 펠리오가 먼저 일축했다.
“세상이 마냥 꿈같지 않다는 걸 알아야지.”
어린아이 치기를 언제까지 받아줄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나 아가씨는 아직 어리시잖습니까. 이제 고작 열여…!”
“열여섯이면 더더욱.”
기어코 펠리오가 몸을 돌렸다. 매서움을 품은 검은 눈동자엔 단호함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시선은 닫혀 있는 방문 너머를 향했다.
“정체도 모르는 방랑 기사인지 뭔지 하는 놈과 만나게 해선 안 되는 것 아닌가?”
“물론 저도 그리 생각하지만….”
카라라고 레지나의 어리광을 마냥 받아들이는 건 아니었다. 사실 펠리오의 말이 맞았다. 레지나는 방랑 기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아니, 레지나 말고 그 기사를 직접 본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늘 레지나가 혼자 외출할 때만 우연을 가장해 만난다고.
나이도, 이름도, 출신지도 정체불명인 외지인. 그런 인간에게 보레오티의 귀한 영애가 가당키나 할까.
“그래도 여태 도련님 말씀은 잘 들었잖습니까.”
“…….”
“조금만 설득해 주시면….”
“설득이 가능한 머리였다면 이런 사달도 안 일으켰지.”
노골적인 일침에 카라가 입을 꾹 다물었다.
‘도련님 말씀이 맞아.’
유감스럽게도 카라 역시 이번만큼은 레지나가 미련스럽게 느껴졌다. 이성보다 감정을. 현실보다 이상을. 레지나는 몸만 자랐지, 정신은 아직도 철부지 꼬마였다. 아무리 옳은 말로 설득해도,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는다며 슬퍼할 뿐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뭐라고 하시지?”
“마님은 충격으로 자리보전 중이십니다. 주인님께선 아가씨께 언성을 높이셨고요.”
“저런.”
펠리오가 탄식했다. 그렇게나 예뻐하던 애완견이 저토록 속을 썩이니, 그 마음이 어찌 괴롭지 아니할까. 마냥 남의 일처럼 구는 펠리오의 얼굴엔 비릿한 조소만 걸려 있을 뿐이었다.
“…….”
그런 펠리오를 말없이 지켜보던 카라는 결국 그가 시키는 대로 갈아입을 옷을 챙겨 왔다.
“저는 이만….”
카라가 나가려던 찰나.
“잘 들어.”
펠리오가 느닷없이 말했다.
“여긴 보레오티야.”
“도련님…?”
당황한 카라가 멈칫하였으나, 이미 뒤돌아 옷을 갈아입던 펠리오의 눈에는 그런 유모가 보이지 않았다. 부스럭 소리와 함께 셔츠가 바닥에 떨어졌다. 펠리오는 갈아입을 새 셔츠를 집어 들었다.
“제 딴엔 억울하겠지.”
펠리오는 레지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뻔히 꿰뚫었다. 유치한 연애 소설에나 나올 법한 기사와 공주의 사랑,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는 사랑.
“자신이 그런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을 테고.”
꾸준한 단련으로 만들어진 갈라진 복근 위로 단추가 아래서부터 채워졌다. 상의를 갈아입은 펠리오가 다시 몸을 돌렸다.
“이 시련을 극복해서 사랑을 쟁취하곤 싶은데.”
“저, 도련님…?”
“뜻대로 안 돼 답답하지?”
카라를 지나친 펠리오가 문을 벌컥 열었다. 그곳엔 레지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홀로 서 있었다.
“…….”
차마 펠리오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치맛자락을 꽉 쥔 두 손은 분에 겨운 듯 파르르 떨고 있었다. 바닥에는 눈물만 뚝뚝 떨어질 뿐이었다.
펠리오가 레지나의 기척을 맹수의 송곳니로 눈치챘듯, 레지나 역시 펠리오를 느끼고 이곳에 왔을 거다. 그래서 펠리오는 굳이 목소리를 내어 말했던 거고.
“아가씨!”
카라가 레지나에게 향하려 했으나, 펠리오가 팔을 뻗어 앞을 가로막았다.
“두 번 말 안 해.”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레지나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 마음은 접어라.”
“왜, 다들….”
레지나가 힘겹게 물었다.
“우릴 반대하는 거야?”
“그거야 널 생각해서….”
“날 생각한다면!”
기어코 악에 받친 목소리가 애먼 펠리오를 조준했다.
“아무나 좋으니까 한 번쯤 응원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억울한 마음에 치켜든 얼굴은 눈물로 흥건하게 젖은 채였다.
“…응원하면?”
그런 사촌누이를 무심히 내려다보던 펠리오가 물었다.
“응원하면, 어떻게 되는데?”
“그럼 우리 다 행복해지는 거잖아.”
“우리?”
“나와 그 사람은 물론이고, 외숙부님이나 외숙모님도….”
레지나가 이때다 싶어 제 입장을 강하게 피력했다.
“두 분 다 내가 행복하기를 원하시잖아. 내가 행복하려면 좋아하는 사람과 맺어져야 하는데….”
요컨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져서 행복해져야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이야기였다.
‘세상에…!’
옆에서 같이 듣던 카라는 충격에 말을 잃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카라는 황급히 펠리오를 살폈다. 막 태어난 아기였을 때부터 제 젖을 먹여 키운 도련님이었다.
“…….”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알 수 있었기에, 카라는 기어코 눈을 질끈 감았다.
펠리오는 저를 노려보는 레지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피할 이유도 없었고, 도리어 그 시선을 응시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결론은 금방 도출됐다.
‘맞아, 나는 네가….’
귀찮아.
사사건건 귀찮게 굴고, 눈치도 없고, 바빠 죽겠는데 알짱거리고, 입만 살아선 늘 허황된 것만 나불거리니까.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었다. 어쨌건 명목상 가족이었고, 무엇보다 같은 보레오티니까 자신이 지켜야 하는 울타리 안에 들어가는 존재였다.
그래서 펠리오는 레지나에게 단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이런 제 진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참고 넘어가는 게 편했다.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어리광을 지는 척 받아주기도 했다. 머리가 꽃밭인 애한테 말을 해 봐야 제 입만 아팠으니, 그냥 그렇게 지내는 게 합리적이었다.
한데 저렇게까지 울타리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니.
“…….”
펠리오는 이제 제 인내심의 한계에 직면했다. 바로 이 순간이었다.
“카라.”
우선 펠리오는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카라를 불렀다.
“아버지께 곧 인사하러 가겠다고 전해 줘.”
“네, 도련님.”
카라는 가던 와중에도 펠리오와 레지나를 걱정스레 살폈다.
그리고 카라가 완전히 사라진 뒤.
“레지나, 넌 가족이야.”
예상치 못한 펠리오의 말에 레지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살짝 벌어진 입에선 내심 감격한 듯한 벅찬 숨이 흘러나왔다.
“네가 아무리 귀찮게 굴어도, 내가 널 가만뒀던 이유는 네가 보레오티의 일원이기 때문이었어.”
그것만 아니었으면 넌 벌써 세상을 하직했을 테지만. 펠리오는 눈치껏 뒷말을 꺼내진 않았다.
“펠리오….”
하지만 그의 사촌 누이는 눈치를 발휘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럼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날 응원하고 도와주면 안 돼?”
“정체도 모르는 괴한과 사랑하라고?”
“괴한 아니야! 그 사람은…!”
반박하려던 레지나의 목소리가 점점 침묵에 잠겼다.
“그 사람 이름은 뭔데?”
“…….”
“나이는?”
“나, 나보단 연상이랬어….”
“출신은?”
“기사라고 했는데, 글라디고는 아니니까 서부 아니면 수도….”
레지나는 모두가 자신의 사랑을 반대하는 이유를 빼놓지 않고 제 입으로 내뱉었다.
“그래도 우린 서로 사랑해!”
다만 고집스럽게도 그걸 인정하지 않을 뿐이었다. 펠리오는 그런 레지나를 처음으로 낯설게, 그런데도 아주 익숙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럼 해.”
“…어?”
반대할 것처럼 굴던 펠리오의 입에서 응원이 튀어나왔다.
“네 마음대로 해.”
하나 눈치 없는 레지나도, 이번만큼은 저 말이 저를 위하는 마음이 없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대신 ”
그리고 역시나.
“보레오티와 등질 각오는 해야 할 거야.”
“…왜?”
매몰찬 경고에 레지나는 상처 입은 표정을 지었다. 이미 실컷 우느라 퉁퉁 부은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왜,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건데!”
레지나는 억울했다. 그냥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진 것뿐인데, 그게 무슨 큰 죄라고 가문에 버림까지 받느냔 말이다. 왜 모두 반대하냔 말이다.
그리고 왜.
“…왜 그렇게 봐?”
다른 무엇보다도, 레지나는 저를 관조하는 듯한 펠리오의 눈이 두려웠다. 정말로 저를 당장 내쫓을 것 같은 눈이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걱정하거나, 화를 내거나, 답답해하는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가, 가족이잖아….”
레지나가 서둘러 펠리오의 손을 붙잡았다.
“네 입으로 가족이라고 했잖아. 근데 왜 그렇게 봐? 왜 내쫓으려고 해? 그냥 날 무섭게 하려고….”
“겁박이 무슨 소용이야.”
펠리오는 절 잡은 레지나의 손을 뿌리치거나 붙잡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 일도 없단 듯이 무심히 말했다.
“한다고 한들.”
말투는 무척 시렸다.
“들어 먹지도 않는데.”
펠리오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목 아프게 애써 잔소리하거나 조언하고 싶지 않았다. 제 수고를 허비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흑!”
레지나가 울음을 터트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억울함이 가득한 흐느낌을 구슬피 흘렸다. 동정을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레지나는 그저 자신의 이 처지가 너무도 안타깝고 슬퍼서 순수하게 울 뿐이었다.
“…….”
하나 그 행동이 도리어 펠리오의 마지막 인내를 끊어 버렸다.
“넌 네가 비련의 주인공 같겠지.”
여태 감정이 묻어 있지 않던 펠리오의 말투에 환멸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같잖은 착각이야.”
차디찬 조롱에 레지나의 얼굴이 수치로 붉어졌다.
“네가 입고 있는 옷이며, 지금 한 장신구.”
식사를 거부하는 대신에 먹었을 간식이나 홍차. 눈물을 훔쳐 닦았을 이불이나 손수건.
“하물며….”
펠리오는 일부러 레지나가 여태 붙잡고 있던 팔을 들었다. 긴 손가락이 레지나의 구불거리는 머리칼을 스치듯 건드렸다.
“머리에 바른 향유도.”
“…….”
“전부 보레오티가 준 거야.”
레지나의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은 전부 보레오티였기에 가능한 사치였다.
“사랑하면 행복해진다고?”
펠리오는 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대놓고 비웃었다.
“그건 네가 부족한 없는 삶을 살고 있으니까 할 수 있는 착각이야.”
“부족했어!”
레지나가 울부짖었다.
“나도 힘들고 슬펐어!”
“네가 뭘?”
“나, 나도 아버지랑 같이 살고 싶었어! 하지만 아버지는 계모님과 재혼했고, 그 여자 사이에서 아이도 낳았어.”
아버지가 새로 꾸린 가족들을 위해 자신이 포기한 것도 분명 있다고 주장했다.
“맹수의 송곳니 같은 거, 나도 안 갖고 싶었어!”
“…….”
“이럴 줄 알았으면 보레오티 따윈 되고 싶지도…!”
절규에 가까운 말을 끊임없이 내뱉던 레지나가 아차, 했다. 서둘러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었다. 북받친 감정 탓에 멋대로 튀어나온 헛말에 스스로 소름이 돋았다.
“아니야.”
이건 진심이 아니야.
“그게 아니라….”
레지나가 뒤늦은 사과를 덧붙이려고 했다. 하나 저를 내려다보는 차디찬 시선에 몸이 얼음장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넌 그런 말 할 자격 없어.”
펠리오는 잘도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구나, 싶었다. 딱히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을 레지나의 탓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원망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넌.”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어린 기억 하나가 펠리오의 아둔해진 외로움을 건드렸다. 아버지께 선물 받은 인형을 팔에 안은 채, 어머니가 읽어주는 동화책을 들으며 웃던 레지나. 벽난로에 불을 지펴 환하고 따뜻했던 그 공간.
서재에서 고른 동화책을 두 팔로 꼭 쥐고 복도를 홀로 걷다가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펠리오. 하필 눈보라 탓에 어둑했던 그 공간.
“그딴 말을 해선 안 돼.”
이제는 희미해진 그날의 기억이 쓸데없이 아련했다.
* * *
“비가 많이 내리네요.”
이부자리를 살피러 온 카라가 시커먼 창밖을 보며 말했다.
“하루만 늦게 오셨어도 큰일 날 뻔하셨어요.”
늦은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어느새 폭우가 되어 매몰차게 내리고 있었다. 북부에선 상당히 보기 드문 날씨였다.
“카라.”
펠리오는 휴식용 소파에 기댄 채 책을 읽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해.”
애초에 펠리오는 이부자리 살핌을 받을 만큼 어리지도 않았다. 그러니 카라가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방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할 말이 뭐가 있겠습니까.”
카라는 베개에 진 주름을 손으로 툭툭 필 뿐이었다.
“이번에는 레지나 아가씨가 뜻을 굽히셔야 할 때니까요.”
“굽힌다라….”
펠리오가 비아냥거렸다.
“내일 또 난리나 안 피우면 다행이지.”
“도련님은….”
앞치마 뒤로 손을 숨기며, 카라가 물었다.
“아가씨가 싫으신가요?”
“싫은 것도 좋아했어야 가능한 거야.”
펠리오가 책장을 넘기며 덤덤한 어조로 대답했다.
“좋아한 적이 없으니, 싫어할 리가 없지.”
“후우.”
예상을 뛰어넘는 매정한 답에 카라가 한숨을 감추지 못했다. 어렸을 적부터 둘이 함께 지내고 자랐는데, 그 긴 시간이 참으로 부질없게 느껴졌다.
“제가 없는 동안, 두 분이 무슨 대화를 나누셨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유모가 하라는 대로 했어.”
펠리오는 모든 인내를 끌어모아 레지나를 설득했다.
‘우리가 왜 그런 힘을 지니고도 조용히 지내겠어.’
‘보레오티는 비밀이 많은 가문이야.’
‘정체도 모르는 외지인과의 접촉은 최대한 자중해야 해.’
나름 최대한 차분하게 타이르고 설득을 했다. 물론 레지나가 과연 그것을 받아들였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삐쳤는지 그냥 가더라고.”
“도련님.”
카라가 쓰게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표현을 쓰는 펠리오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번엔 카라도 레지나의 편을 들 수 없었다.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을 기르는 거죠.”
카라 역시 사랑이라고 믿었던 인간에게 크게 상처 입었던 적이 있었다.
“유모랑 그 녀석이랑 같아?”
유모는 전남편 직접 처리했잖아.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압니다.”
카라가 정정했다.
“사고사였습니다.”
보레오티 영식의 유모로 일한다는 소식에 돈 좀 달라고 뻔뻔하게 찾아온 쓰레기. 그래도 아들 아빠라고, 카라는 돈을 챙겨 줬다.
“돈 받자마자 술 마시고, 그러다 열쇠 잃어버려서 집 앞에서 동사한 것밖에 더 됩니까.”
“열쇠는 어디 있었더라.”
“제가 주웠지요.”
그 인간 주머니에서.
“돌려주려고 했답니다.”
내일 돌려주려고 했는데 그리된 걸 어쩌겠는가. 하늘에 대고 맹세하긴 싫지만, 그 인간의 술버릇이나 성격을 고려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유모는 재밌다니까.”
“사람 죽은 이야기가 뭐 재밌다고요.”
펠리오가 읽던 책을 덮으며 작게 하품했다.
“이젠 정말 주무세요.”
밤이 늦었다며 카라가 잔소리하려던 찰나였다.
“도련님!”
다급한 목소리가 펠리오를 찾았다. 카라가 침대에서 도로 일어나는 펠리오를 확인한 뒤에 문을 대신 열었다.
“…트라?”
카라가 놀란 눈을 끔뻑거렸다. 문 앞에는 홀딱 젖은 아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심상찮은 조짐을 느낀 펠리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곤 냅다 겉옷 한 벌을 챙기곤 밖으로 나가버렸다.
“설마…!”
카라가 믿을 수 없단 눈으로 제 아들을 바라봤다. 트라가 비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께서 사라지셨습니다.”
보레오티 공작의 집무실로 가는 길. 펠리오는 트라에게 사정을 빠르게 전해 들었다.
“아는 사람은 누구지?”
“현재로선 저와 케레스 경입니다.”
“알게 된 경위는?”
“정원사 중 한 명이 폭우 때문에 정원을 살피러 나갔다가….”
그리고 카라와 트라, 두 사람에게 명령했다. 트라에겐 그 정원사를 지하 감옥에 몰래 구속하도록, 카라에겐 지금 당장 레지나의 방에 가서 안을 확인한 뒤, 집무실로 와서 레지나의 유무를 알리라고.
“도련님….”
“쉿.”
어느새 집무실 문 앞이었다. 펠리오는 제 차림새를 빠르게 정돈했다.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빗으며 뒤로 넘겼다.
“모든 결정은.”
마지막으로 곧추세운 등.
“가주께서 내리실 거다.”
펠리오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 * *
“아버지.”
예를 갖춘 펠리오가 책상 앞에 걸터앉은 부친을 응시했다. 자신의 미래를 보는 듯한 중년의 사내는 잠결에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빗어 넘겼다. 조금 전 펠리오가 하던 행동과 똑같았다.
핏줄임에도 타인처럼 느껴지는 사람인데, 펠리오는 저런 모습을 볼 때면 참으로 어색했다.
“레지나가 사라졌다지.”
보레오티 공작 역시 자던 중에 상황을 전달받았는지, 잠옷 차림에 긴 가운 하나를 걸친 채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모노가 있었다. 모노가 펠리오에게 짧은 고갯짓으로 예를 대신했다.
“다급한 상황이라 판단하여, 정원사의 신병을 확보해 지하 감옥에 가두라고 명했습니다.”
“레지나는 확인했나?”
“제 유모를 보냈습니다.”
말하기 무섭게, 카라가 집무실을 찾았다.
“아가씨께서….”
카라는 자신이 본 것을 전부 말했다. 방은 도둑이라도 든 것처럼 엉망이었다고 한다. 레지나는 당연히 없었고, 옷가지며 물건들이 바닥에 어지럽혀져 있었다고.
‘머리를 썼군.’
답지 않게 말이지, 펠리오가 속으로 조소했다.
“없어진 건 있던가?”
보레오티 공작의 물음에 카라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패물이 전부 없어졌습니다.”
“하아….”
한숨을 길게 내쉰 공작이 어둑한 창밖으로 몸을 돌렸다. 빗줄기는 점점 사나워졌지만, 다행히 바람은 조금씩 잠잠해지고 있었다.
“…어쩌실 겁니까.”
펠리오는 대답을 기다렸다. 상황은 이제 확실해졌다. 레지나는 가출했고, 정체불명의 방랑 기사에게 갔을 게 분명했다.
“글라디고의 지휘권을 주마.”
찰나의 고민 끝에, 공작이 명했다.
“조용히 진행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공작이 최악을 가정했다.
“…도주의 정황이 보인다면, 수색을 포기해도 좋다.”
* * *
수색은 난항을 겪었다. 바람이 잠잠해졌다곤 해도 빗줄기는 여전히 굵직했다. 오후부터 내렸던 탓에 흙탕물로 가득한 땅은 이동에 큰 방해가 되었다. 심지어 한밤중이라 시야 확보도 어려웠고, 수색을 위해 차출된 인원도 극소수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저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 근처에서 오래되지 않은 흔적이 발견되었단 점이었다. 펠리오가 고개를 들어 바퀴가 남긴 흔적을 따라갔다.
“…숲으로 들어갔군.”
펠리오를 비롯한 기사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지금 강물이….”
모노가 중얼거렸다.
숲 안에는 북부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강이 있었다. 상류에 속하긴 해도 강의 원천이 만년설이라 수온이 차고 수심마저 깊었다. 거기다 현재 보레오티 영지에는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는 중이었다. 강물이 범람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제발 아니어야 한다.’
펠리오와 함께 숲으로 들어간 모노가 간절히 기도했다. 그들은 빗물에 흔적이 지워지기 전에 서둘러 따라갔다. 그 끝은 낭떠러지였다. 오래전 지반이 무너지면서 길이 끊긴 탓에 생긴 낭떠러지 아래에는 폭우로 범람한 강물이 사납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
모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도련님.”
그때, 수습기사 한 명이 펠리오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흙투성이가 된 숄이었다. 이를 건네는 잿빛 단발머리의 여기사가 펠리오의 눈에 익었다.
“멜레스 레비페스라 합니다.”
“레지나의 호위를….”
“부족한 실력임에도 종종 맡았습니다.”
멜레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대가 사과할 일이 아니다.”
“하나…!”
“그것도 일단 보레오티였어.”
애가 워낙 맹한 인상이라 그렇지, 기사들 따돌리는 것 정도야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었다.
상황은 점점 맞춰졌다.
“…….”
마차의 흔적은 낭떠러지에서 사라졌고, 그 아래에는 유속이 빠른 강물이 위협적으로 흐르며, 숄은 레지나의 것이었다.
“내려간다.”
펠리오가 기사들을 데리고 내려와, 강가를 수색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강가에 처박혀 있는 마차 한 대를 찾아냈다.
“세상에…!”
누군가가 경악에 가까운 탄식을 흘렀다. 마차는 형체를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반파된 상태였다. 만약 안에 사람이 탔다면 결코 무사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친 물살에 맥없이 흔들리는 두 문짝이 활짝 열려 있었다.
한참 말없이 마차와 주변을 살피던 펠리오가 입을 열었다.
“마차가 눈에 익는데.”
“북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대여용 마차입니다.”
“케레스 경, 여기 위치를 지도에 표시할 수 있겠나?”
“예.”
대답을 들은 펠리오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은커녕 달조차 가린 어두운 먹구름은 여전히 비를 뿌리고 있었다. 하물며 수색을 하는 동안 멈췄던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하는지, 나뭇잎 부딪히는 으스스한 소리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강물 역시 계속 범람하는 중이었다.
“…돌아간다.”
수색은 그렇게 끝났다.
* * *
“…….”
소식을 듣고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페는 도착한 펠리오를 보자마자 굳어 버렸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펠리오는 그저 조용히 서 있었다. 비에 젖은 겉옷을 채 벗지도 않은 채, 그저 피곤하고 만사가 귀찮은 얼굴로 어딘지 모를 땅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펠리오 님….”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펠리오가 느리게 시선을 올렸다.
“파르두스 후작과 왔나?”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께선 공작님을 알현 중이십니다.”
때마침 카라가 두꺼운 수건을 들고 다가왔다. 비에 젖은 채 돌아온 그들에게 수건을 건네고, 따뜻한 물을 준비해뒀으니 서둘러 몸을 덥히라고 말했다.
“도련님도 어서 몸을….”
따스하게 덥히라고 걱정하던 카라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유모.”
펠리오가 손에 쥐고 있던 흙투성이의 숄을 수건으로 감추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쉬어.”
그리곤 흐느끼는 유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뒤에 집무실로 올라갔다.
‘정말로 아가씨가….’
뒤따라가던 루페는 참담함에 머리가 아찔했다.
‘우르마리티 영애가 가출했다는구나.’
굵은 빗줄기를 뚫고 도착한 전보는 무척이나 끔찍했지만, 파르두스 후작은 침착하다 못해 아주 태연했다. 오히려 아주 잘 되었단 듯이 후련한 모습처럼 보였다. 루페는 그런 아버지가 참으로 매정하다고 생각했으나, 한편으로는 오죽하면 저럴까 싶어 이해도 갔다. 최근 레지나의 비상식적인 행보를 생각하면 더더욱.
“펠리오 님.”
루페가 물었다.
“레지나 아가씨는, 정말로….”
“루페.”
문득 걸음을 멈춘 펠리오가 뒤를 돌아봤다.
“레지나는 이제 보레오티가 아니다.”
루페는 눈에 띄게 지친 펠리오의 얼굴을 말없이 지켜봤다.
“보레오티가 싫다고 제 발로 나갔어.”
그렇다면 이제 펠리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무언가를 해야 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아마 이번만큼은 제 부친도 저와 같은 생각일 터였다.
“죽었든 살았든.”
“…….”
“이젠 우리가 신경 쓸 바가 아니야.”
그 말을 끝으로, 펠리오는 집무실로 향했다. 비에 젖어 추적추적한 발소리와 창문을 두드리는 시끄러운 빗소리. 귀를 조금 더 기울이면, 천둥마저 멀리서 울렸다.
날을 넘긴 새벽.
보레오티 저택의 어수선한 밤을 채우는 건 굉음뿐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밤새 내리던 폭우는 거짓말처럼 그쳤다. 화창한 하늘 아래, 보레오티 저택 역시 여느 때처럼 분주하게 하루를 맞이했다. 보레오티는 평온했다.
아직까진.
“레지나 아가씨 어디 계시는지 아직 못 봤어?”
“쉿, 카라 님이 방 가까이에 가지 말라고 하셨어.”
“왜?”
“벌 받는다고. 주인님께서 아가씨한테 엄청 화내셨잖아.”
“아아, 그 기사님이랑….”
물론 전날 밤의 사정을 아는 이들은 그러하지 못했다. 펠리오는 아침 식사를 마친 뒤, 트라에게 어제 지하 감옥에서 심문한 정원사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그러니까.”
펠리오는 자신이 들은 보고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정원사가 레지나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는데, 방랑 기사와 도피하는 걸 도왔다고?”
펠리오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트라를 노려봤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트라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사람 마음이란 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게 뭔데?”
“좋아하니까 돕고 싶고, 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너도 어이가 없지?”
“예….”
트라가 순순히 인정했다. 그 또한 이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어쨌건 그 덕에 침착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정원사는 기사에게 돈도 조금 받은 모양입니다. 그 대가로 두 사람이 몰래 만날 수….”
“잠깐.”
일순 펠리오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만남을 주선했다고?”
“본인 말로는 저택 밖이라고 했습니다.”
펠리오가 눈을 질끈 감으며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만약 레지나와 그 방랑기사가 저택 내에서 만났다면, 정체도 모르는 외지인이 보레오티에 들어왔다면.
“아버지는 뭐라셨지?”
“도련님께 전임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펠리오가 비소를 지었다. 그렇게 예뻐하던 애완동물이 배신하고 도망쳤는데, 뒷수습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시다니.
“이토록 무책임하신 줄은 오늘 처음 알았군.”
짧은 감상을 끝으로, 펠리오는 루페를 불러 마차 인양을 명령했다.
“제가요?”
“그럼 네가 가야지.”
“아니, 전 아직은 파르두스….”
“연습이라고 쳐.”
루페는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펠리오의 비서가 될 예정이었다.
“아, 그리고.”
당황하는 루페에게 펠리오는 마저 지시했다.
“마차는 어젯밤 폭우를 틈타 보레오티 사용인 중 한 명이 패물을 훔쳐 도망쳤다가 난 사고다.”
그러니 지하감옥에 있는 정원사를 데려가.
“죽여.”
* * *
“너 그거 들었어?”
입방정으로 유명한 하녀 한 명이 동료들을 모았다.
“내가 아까 카라 님이 도련님께 하시던 이야기를 들었거든?”
정원사 한 명이 비품 등을 오랫동안 빼돌려 팔았는데, 하필 그걸 어제 순찰 중이던 글라디고 기사에게 걸렸대. 하녀의 말에 사용인들이 다들 깜짝 놀랐다.
“미친!”
“그거 완전 용자네….”
“그래서 어떻게 됐대?”
“그게 말이지….”
엄청난 기밀인 것처럼, 하녀가 숨죽이며 말했다.
“비 오는 밤중에 마차를 몰고 숲으로 도망쳤다가, 강물에 휩쓸려 죽었대!”
하녀는 자신이 훔쳐 들은 것을 마치 진짜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했다. 사용인들은 죽은 정원사를 동정하기는커녕 죽을 만했다고 수군거렸다.
“내가 그 인간 그럴 줄 알았지.”
“예전에 저기 그, 뭐다냐….”
“술집에 그 소란 말이지?”
오히려 정원사와 관련된 소문들을 전부 기억해내 깎아내리기 바빴다. 정원사는 원래도 평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도둑의 최후보다 더욱 뜨거운 이야기가 보레오티저에 삽시간에 퍼졌다.
“레지나 아가씨께서 서부로 요양 가셨대!”
바로 레지나의 요양이었다. 심지어 벌써 갔다는 사실에 사용인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주인님 부부께서 아가씨를 얼마나 아끼셨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거야?”
“마치….”
누군가가 차마 말을 끝내지 못했지만, 그 뒷말이 무슨 뜻인지는 대충 알았다. 이건 유배였다. 그리고 사용인들은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했다.
“하긴, 그 사랑이 이뤄지겠어…?”
“주인님께서도 엄청 화내셨잖아.”
“그러고 보니 아가씨께서 요 며칠 계속 방에만 계셨지?”
사랑하는 사람과 이뤄지지도 못했는데, 벌로 먼 곳으로 요양까지 간다니.
“안되셨어.”
“그러게….”
사용인들은 레지나를 동정하고 불쌍히 여겼다. 그리고 이들의 반응은 펠리오의 귀에도 들어왔다.
“다들 놀라는 눈치지만, 대체로 이해하는 듯했습니다.”
카라가 미지근한 차를 건네며 사용인들의 반응과 분위기를 보고했다.
“잘됐군.”
소파에 반쯤 기대 누운 채로 책을 읽던 펠리오가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레지나의 요양, 정원사의 도둑질. 이 모든 것은 펠리오가 꾸민 계획이었다. 보레오티 공작에게 레지나의 수색을 전임받은 뒤, 펠리오는 레지나를 포기하는 것으로 빠르게 결정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레지나는 보레오티에 엄청난 폐를 끼쳤다. 외부인이 보레오티에 접근하도록 틈을 만들었고, 보레오티로서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을 망각하고 도망쳤다.
레지나는 보레오티의 수치로 전락했다.
그래서 펠리오는 레지나의 존재를 없애는 것으로 결정했다.
정원사를 죽여 혹시 모를 밤중의 소란을 해결했고. 손수 비품 장부까지 조작했다. 레지나의 행방을 요양으로 감추기 위해 서부 외진 별장에 관리인을 파견하고 아무도 안 탄 마차까지 보냈다.
“쥐새끼 솎아 내는 건?”
보레오티는 현재 사용인 전원을 검문하는 중이었다.
“현재로선 없습니다.”
카라가 피곤에 겨운 눈가를 애써 끔뻑이며 대답했다.
“으음….”
하나 펠리오는 그 결과를 쉽사리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애당초 검문은 정원사의 도둑질을 도운 공범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대외적인 명목하에 진행되었다. 보레오티를 배신한 자를 찾기엔 한계가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 내쫓아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어머니가 걸리는군.’
레지나와 관련된 뒷수습을 일임받긴 했으나, 가문 내 사용인들을 고용하고 살피는 건 안주인의 권한이었다. 지금 모친은 레지나가 사라졌던 사실에 충격으로 드러누운 상태였다. 그런 모친에게 사용인들을 관리할 권한을 잠시 달라고 말하기엔 도의상 문제가 있었다.
“…피곤하시죠?”
“딱히.”
걱정하는 카라 덕에, 펠리오는 그제야 손에 들고 있던 미지근한 차를 한입 겨우 마셨다.
“피로에 꿀이 좋다지요.”
방학인데도 쉬지 못하고 계속해서 바쁜 그를 걱정해 내온 꿀물이었다.
“혹시 많이 달면….”
“아니.”
펠리오가 단번에 차를 비우며 빈 잔을 건넸다.
“딱 좋아.”
카라가 단 걸 싫어하는 펠리오의 취향을 고려한 덕에, 펠리오는 차를 수월히 마실 수 있었다.
하나 조금이라도 쉬길 바라는 카라의 바람과 달리, 펠리오는 방학 마지막 날까지 계속해서 바빴다. 그중 가장 힘들었던 건, 우르마리티 백작과 만나 레지나와 관련해 입을 맞추는 일이었다.
딸을 잃은 백작은 보기 힘들 정도로 초췌한 몰골이었다. 이미 전처의 하녀와 재혼을 하고 아이까지 다시 보았지만, 그는 시간이 나면 레지나를 보러 종종 왔었다. 어린 펠리오는 두 부녀의 화목했던 순간을 숨어 지켜봤었다.
“슬픕니까?”
그래서 저도 모르게 물어봤다. 펠리오로서는 그 기분이 어떠한지 상상이 잘 안 갔다. 만약 제 가족이 레지나처럼 사라진다고 해도 저렇게 세상 무너질 것처럼 슬퍼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만 해도, 레지나가 사라진 것에 슬픔을 느끼기보다는 귀찮음과 약간의 후련함만 느낄 뿐이었다.
“슬프기만 하면 다행이지요.”
“질문이 이상했군요. 배려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우르마리티 백작이 힘겹게 웃었다.
“그래도 보레오티 영식은 이런 고통을 모르시길 바랍니다.”
평생 모를 것 같은데. 펠리오는 결국 흔한 위로 한마디조차 건네지 못했다.
그리고 아카데미 개학을 위해 수도로 떠나는 전날. 펠리오는 만남을 요청한 파르두스 후작과 밖에서 접선했는데, 그에게서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조사를 금지했다고?”
“예.”
보레오티 공작은 방랑 기사에 대한 조사를 처음부터 금지했다. 레지나에게 접근할 때도, 하물며 레지나가 실종된 후에도.
“그나마 내린 지시라곤 우르마리티 영애와 관련된 추문이 나도는 걸 막으라는 지시뿐이었습니다.”
수색에 도움이 될 어떤 명령도 없었다고 한다. 펠리오는 기가 막혔다.
“노망이라도 드셨나.”
가문에 접근했을 가능성이 큰 외지인을 지켜만 봤다고?
“후작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지금 나만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나?”
“제가 뭐라 감히 평할 입장이 되겠습니까.”
“엮이기도 싫단 소리군.”
파르두스 후작은 펠리오의 비아냥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 역시도 공작의 결정이 의아하긴 했다.
“영식,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파르두스는 보레오티 공작의 명으로만 움직였다. 공작의 지시가 없다면, 후작이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그래.”
이렇게 되면, 펠리오가 할 수 있는 것도 딱 하나였다.
“둘 다 죽었기를 바랄 수밖에.”
“시신은 아직 못 찾으셨다지요.”
“루페가 마차를 인양하면서 기사단들과 주위를 수색했지만, 나온 건 없다더군.”
숲에서는 숄이라도 발견했지만, 강에서는 옷 한 자락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물고기 밥이나 되면 다행이지.”
“불쌍하진 않으십니까?”
후작이 물었다.
“누가?”
돌아가려던 펠리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우르마리티 영애 말입니다.”
“후작이 농도 할 줄이야.”
진심에도 없는 말은 하지 말라며, 펠리오가 대놓고 비웃었다. 후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후작은 레지나를 동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전 펠리오의 반응으로 아주 조금 불쌍해졌다. 물론 저 반응도 영애의 자업자득인지라 어쩔 수 없지만. 아니, 오히려 잘못을 따지자면 공작 부부가 가장 큰 죄인이었다.
펠리오가 손으로 앞머리를 힘겹게 넘겼다. 피곤이 짙은 눈은 초점이 흐릿했다.
“이번 일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우르마리티 백작이야.”
“공작님과 공작 부인께서도 슬퍼하시지 않습니까.”
“글쎄….”
아들이 직접 본 부모님은 분명 화를 내고 슬퍼하셨다. 하나 그것은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도망친 애완동물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것에 더 가까웠다.
‘그래….’
가족놀이를 하려고 데려온 살아 있는 장난감. 그리고 자신은 그런 장난감조차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참.”
파르두스 후작이 침묵하던 펠리오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바쁜 방학이셨군요.”
“그래.”
그해 여름방학은 펠리오에게 딱 그 정도일 뿐이었다.
* * *
펠리오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날.
드디어 보레오티 세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가족이란 뭘까요.”
아들이 부모님께 물었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어둑한 방안에 놓인 관 두 개. 펠리오는 부모님이 누운 관 머리맡 사이로 의자 하나를 끌고 와 앉았다. 다리를 꼰 자태가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가슴에 달린 브로치는 이제 그가 보레오티의 주인이고, 북부의 수장이라 말하고 있었다.
장례식 전날.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아들은 부모님께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적어도 우리는 아니었을 겁니다.”
어둑한 내부 때문인지, 덤덤한 목소리로 제 생각을 밝히는 외아들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졌다.
“내가 당신들에게 자식이 아니었듯, 당신들 역시 내겐 부모가 아니었죠.”
보레오티 공작 부부는 여행 중에 마차 사고를 당해 죽었다. 그것도 아들의 졸업식 날에.
펠리오는 원망은커녕 적잖게 감동했다.
“두 분의 사이가 이렇게나 각별하셨을 줄이야.”
맹수의 송곳니를 썼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공작은 그러지 않고 아내와 함께 사망했다. 나중에 수습된 시신의 상태를 보니, 공작은 공작 부인을 끌어안고 있었다고 한다.
“보레오티가 애처가 가문이었네.”
돌아가신 조부도 먼저 간 아내를 따라갔는데, 설마 부친마저 아내를 위해 그런 선택을 할 줄이야.
모친은 보레오티의 힘을 무서워했다. 그 탓에 송곳니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고, 역대 공작 부인 중에서 송곳니에 대한 면역이 가장 떨어졌다.
‘만약 아버지 당신께서, 사고 당시에 맹수의 송곳니를 썼다면 살 수도 있었을 텐데.’
하나 그랬다간 모친이 죽거나 크게 다칠 가능성이 컸다.
“…낭만적이군.”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혼잣말에 펠리오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설마 제 입에서 이런 꿈 같은 단어가 나올 줄이야.
“그것도 오늘로 끝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펠리오가 잘 다듬어진 꽃 두 송이를 관 위에 하나씩 바쳤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당신들께 딱히 원망은 없습니다.”
기대를 저버린 지가 오래니, 그런 사사로운 감정이 들 리가 있을까.
“하지만 전 제대로 된 가정을 가지지 못할 테지요.”
보고 배운 것이 없고, 자신은 더더욱 없고. 하나 자신은 이제 유일한 보레오티가 되었으니, 언젠가는 결혼을 반드시 해야 했다.
“…….”
잠깐이나마 자신이 누군가와 결혼해 아이를 가지고 가정을 꾸리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러나 그 추상적인 상상은 꿈보다도 막연해서 도리어 기분만 이상해졌다. 신기루보다 더한 허상이었다.
“영면에 드십시오.”
그러나 지금부터 홀로 살아갈 자신의 모습은 현실이었다.
검은 맹수는 혼자였다.
펠리오가 공작이 되자마자 처음 한 일은, 저택에서 근무하던 모든 사용인을 내쫓는 것이었다. 그것도 추천장 없이.
“도련, 아니, 주인님!”
그리고 이 갑작스러운 행보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사람은 새 공작의 유모였던 카라뿐이었다. 사실 카라가 유일했다.
“마침 잘 왔군.”
펠리오는 새로 단장한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중이었다. 선대 공작 부부의 장례식과 함께 작위 계승까지 더해지니 할 일이 태산이었다.
“잘 온 게 아닙니다! 갑자기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시면….”
“다 안 내쫓았어.”
“저와 펠리카 부인 빼고 다 내쫓았습니다.”
실제로 이 저택에 남은 이들 중엔 펠리오와 카라, 그리고 하녀 중 고참인 펠리카 부인 이렇게 셋이었다.
“게다가 집사님까지 내쫓다니요!”
“돈은 줬어.”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노령의 집사가 저택과 가문을 위해 노력한 것을 생각하면, 결코 이럴 수 없다고 따지려던 찰나.
“이제부터 유모가 집사야.”
“그래요, 제가 집…!”
네? 한참을 조목조목 따지려던 카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얼마나 놀랐는지, 눈을 너무 크게 떠서 안경과 닿을 정도였다. 그런 유모를 멀뚱히 지켜보던 펠리오가 다시 말해줬다.
“이제 유모가 집사야.”
“실례지만, 제정신으로 하시는 말씀인가요?”
카라는 콧등에서 흘러내린 안경을 추슬러 올리며 물었다. 너무 놀라서 안경을 고쳐 쓰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귀에 들리는 말마저 마냥 환청 같았다.
“나는 어느 때보다 제정신이야.”
“주인님, 저는 집사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받아.”
빠른 시일 내로 사람을 붙여 주겠다고 펠리오가 깔끔하게 정리했다. 강제로 승진 당한 카라는 넋이 나가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펠리카 부인은 하녀장으로 승격할 테니, 둘이 알아서 사람들을 고용해.”
“주인님….”
뭐라 한마디 하려던 카라가 끝내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이 문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쉬이 따질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당장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추천장은 어떻게 하신 겁니까?”
갑작스러운 해고도 문제지만, 그만두는 이들에게 추천장을 단 한 장도 주지 않는 건 더더욱 문제였다. 추천서는 다른 귀족 저택에 취직할 때 아주 중요했다. 추천장 여부가 전 직장에서 그 사람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느냐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펠리오의 이유는 당당했다.
“줄 필요성을 못 느껴서.”
“…….”
“정 불만이면 집사가 대신해.”
호칭마저 유모에서 집사로 완전히 바뀌었다. 펠리오는 여전히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실제로 그는 고개를 들 여유도 없을 만큼 바빴다.
“…….”
그런 주인님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카라가 끝내 체념의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부족하지만, 성심성의껏 주인님과 가문을 모시겠습니다.”
“기대가 커, 집사.”
그제야 펠리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이제 저택 관리와 사용인들….”
“주인님.”
집사로서, 카라는 감히 주인님께 간언을 올렸다.
“저와 펠리카 부인이 최대한 저택을 보살피고 나름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그래, 그게 그대들의 일이지.”
“아닙니다.”
카라가 정정했다.
“주인마님의 의무입니다.”
순간 펠리오는 불쾌한 예감이 들었다.
카라를 집사로 선택한 건, 이 저택에서 저에게 저런 잔소리를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자신이 오늘처럼 말도 안 되는 짓을 한다면 당장 제동을 걸 수 있는 귀한 존재였다.
“…카라.”
그 탓에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했다.
“벌써부터 결혼 잔소리는 하지 마.”
“지금부터라도 해야 10년 뒤에는 하지 않겠습니까.”
유모의 잔걱정이 북부 산맥만 하다는 걸.
“이제 주인님은 보레오티의 유일한 존재십니다. 대를 이어 가문을 지키실….”
돌아버리겠군.
펠리오는 쏟아지는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기술을 발휘했다.
* * *
예상치 못하게 공작 작위를 물려받았으나, 펠리오는 원래 제 것인 것처럼 막힘없이 책무를 수행했다. 어릴 적부터 혹독하게 받은 후계 교육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그조차 몰랐다.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르는 거군.’
정말로.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펠리오는 눈앞에 앉아 있는,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에게 저의 진심을 고백했다.
“공작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티그리아 황태자비가 호호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당연히 나오지요.”
펠리오는 감히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고, 황태자비는 그런 공작이 웃겨 미칠 지경이었다.
“어쩜 날이 갈수록 얼굴이 그리 흉악해질꼬?”
“제 얼굴은 그대로입니다.”
“그럼 저건 뭘까?”
황태자비가 가리킨 곳은 두 어른이 앉은 곳에서 멀찍이 떨어진 장식장 아래였다.
“흑, 흐윽….”
“으애앵….”
거기엔 금발과 은발의 꼬마 남매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훌쩍이고 있었다. 어머님의 손님이 오셨다고 해서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엄청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자신들을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봤다.
“괴물, 괴무울….”
“거, 걱정 마…! 이 오라버니가, 히끅, 지켜 줄게!”
“응, 으응….”
사이 좋은 두 남매를 지그시 바라보던 펠리오가 황태자비에게 물었다.
“닮았군요.”
이벡스 경과.
“귀엽죠?”
황태자비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사내아이예요.”
“조금 전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렇겐 못 하지.”
그대가 우리 둘째의 대부인데.
“이것도 다 그대의 은덕입니다.”
“심술이었습니다.”
그저 어쩔 수 없이 참석한 전시회 행사에서 황태자를 보고 있자니 짜증이 확 난 상태였다. 한데 마침 그 자리에 이벡스 경이 있었다. 옛 연인을 그리워하여 몰래 찾아온 듯했다. 그래서 펠리오는 황태자비와 이벡스 경의 만남을 주선했다.
한데 그 주선에서 아이가 생겼을 줄이야. 심지어 사내아이라니.
“얘들아.”
황태자비는 겁먹은 아이들에게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아이들은 머뭇거리면서도 겨우겨우 모친의 품에 도착했다. 그러면서도 펠리오와 시선을 안 마주치려고 눈을 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스칸.”
자애로운 목소리가 둘째 아들을 불렀다.
“저분은 이 어미의 은인이시란다.”
“으응?”
“좋은 사람이란 뜻이란다. 그러니 인사해야지?”
아이는 허둥거리며 황태자비와 펠리오를 번갈아 보았다.
“…….”
그리곤 용기 내 손을 붕붕 흔들더니, 냅다 황태자비의 무릎에 얼굴을 박았다.
내 얼굴이 그렇게 무서운가? 펠리오는 괜히 제 얼굴을 손으로 더듬다가 이내 그만뒀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걱정해 주는 건가요?”
“이젠 어쩔 수 없이 해야겠군요.”
그러지 않으면 자칫 북부에까지 불똥이 튈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펠리오는 경고했다.
“치마폭으로 감싸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남들에겐 어리광을 받아주면 안 된다고 돌려 말하듯이 들릴 터이나, 펠리오의 말은 직설이었다. 황태자비가 둘째를 여자로 키우는 건 두 가지 이유였다. 첫째의 황위 계승의 전통성을 지키기 위해서고, 둘째에게 쏟아질 관심을 최대한 떨어트리기 위해서.
“나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럴까요….”
황태자비가 아이들의 얼굴을 한 번씩 쓰다듬으며 서글피 중얼거렸다. 그런 황태자비에게, 펠리오는 이상하리만치 동정심을 느낄 수 없었다.
“…공작도 알겠지만.”
황태자비는 어느새 자신의 다리에 머리를 베고 꾸벅꾸벅 조는 아이들을 자애로운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내가 좀 성격이 더럽잖아요?”
펠리오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아이들이 다 자라면….”
첫째는 황제가.
둘째는 헤스페리 후작이.
두 아들이 무사히 자라 지엄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순간.
“그놈의 목에 내 검을 박을 거예요.”
목구멍에서 핏물이 분수처럼 쏟아지고, 그 역겨운 얼굴에 자신의 피거품을 토하는 꼴을 반드시 보고 말리라. 그리고 숨통이 끊기는 순간까지, 제 두 눈으로 끝까지 지켜볼 것이다.
‘착해빠졌긴.’
그렇게 금방 죽여서 무슨 재미가 있을까.
펠리오가 빈정거렸다.
* * *
황제가 서거했다. 그리고 부족해 마지않는 황태자가 황제가 되고, 펠리오는 3년간 수도에 발이 붙잡힌 상태였다.
그 탓에 북부도 피해를 적잖게 봐야 했다. 특히 마물 사냥을 펠리오 없이 글라디고 기사단끼리만 해냈기 때문에 마물의 개체 수 증가 여부가 큰 문제였다. 하나 펠리오가 불쾌했던 이유는 비단 이 때문이 아니었다.
“뭘 믿고 나댔던 걸까?”
카니스가 술잔을 따르며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오늘, 3년 동안 이어진 지긋지긋한 귀족 회의를 끝낸 기념으로 함께 모여 술잔을 기울였다. 하나 마냥 좋아하기엔 꺼림칙했다.
“올로르의 행보가 전례 없는 거라 더 이해가 안 가네.”
“확실히….”
펠리오가 술을 가볍게 넘기며 답했다.
남부의 정세가 기괴했다. 청옥의 고래가 오랫동안 지켜온 푸른 바다 위에 흉측한 붉은 백조가 감히 수면 위에 앉아 주인처럼 행세했다. 하나 펠리오가 그보다 더 이상하게 여기는 건.
‘왜 가만히 있지?’
남부의 진짜 주인인 아우스트와 메리디오의 침묵이었다.
“넌 뭐 아는 거 없어?”
카니스가 물었다.
“…전혀.”
펠리오가 아예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나 카니스는 믿지 않았다.
“그래도 공작끼리 연락하는 게 있을 거 아냐.”
“마지막으로 만난 게 7년 전이야.”
선대 공작 부부가 죽은 뒤. 작위를 계승한 펠리오는 남부로 내려가 아우스트 공작을 만났었다.
‘우리 꼬마 맹수가 벌써 공작이 되다니.’
‘그 꼬마란 칭호 좀 안 쓰시면….’
‘그대의 조부님이 섭섭해하실 텐데?’
‘이미 죽은 사람인데 뭐가 섭섭하답니까.’
자상한 노부인은 펠리오를 제 손주처럼 다정히 대했다. 펠리오는 그런 공작에게서 잠깐이나마 그리운 추억을 떠올렸다. 하나 두 공작이 나눈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각자 신비한 이능을 비롯해 커다란 비밀을 지니고 있었다. 서로의 안전을 위해 최소한의 안부 빼고는 묻지 않고, 친분 역시 대외적으로는 맺지 않는 게 오래된 약속이었다.
“알아서 하겠지.”
솔직히, 펠리오는 남부에 관심이 없었다.
“너는 올로르가 짜증도 안 나냐?”
“나.”
하지만 귀찮았다.
펠리오는 지친 상태였다.
“북부에 피해만 없다면 굳이 나설 필요를 못 느끼겠어.”
요컨대, 건수만 잡히면 제대로 조질 의향은 있었다.
“제발…!”
카니스가 두 손 모아 올로르가 펠리오의 눈에 띄어 세상을 하직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때.
“아빠아.”
불쑥 나타난 어린아이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자랑하며 안으로 난입했다.
“피누!”
놀란 카니스가 서둘러 아들을 품에 안았다.
“혼자 왔어? 누나는?”
“누나, 코오.”
“어이고, 우리 아들도 자다가 깼어? 머리가 엉망이네.”
카니스가 어린 아들의 머리를 손으로 정리해 줬다. 그리곤 제 소매로 입가에 묻은 침도 닦아 줬다.
“…….”
펠리오는 그런 친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참, 방금 들었지?”
조금 전까지 정계 문제로 골 아파하던 카니스의 얼굴이 못 봐줄 정도로 헤실거렸다.
“어제 우리 아들이 말을 했어!”
“지금 했는데?”
“어제부터 했는데, 오늘도 말을 했어!”
미친놈.
펠리오의 가늘어진 눈이 바싹 메말라 갔다. 한때 레보오 기사단의 미친개로 악명을 떨쳤던 놈이, 이젠 자식 자랑에 열불 올리는 가정견이 되었다.
‘성대결절이 나도 안 이상할 거 같은데.’
저렇게 목에 핏줄까지 세우며 자랑하는데, 언젠가 한 번은 피를 토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우피는 말이지….”
카니스가 장녀를 자랑하는 동안, 피누는 펠리오에게 빵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펠리오는 저를 보고 울지 않는 피누의 대범함에 내심 감탄했다.
“근데 넌 언제 결혼할 거냐?”
“너 죽거든.”
“난 너랑 사돈 맺고 싶은데!”
펠리오는 제 하나뿐인 친구와 드디어 절교할 때가 찾아온 건가 싶었다.
그 뒤로도 카니스는 한참이나 가족의 위대함과 자식의 귀여움을 설파했다.
“아빠란 존재는 참으로 숭고하지.”
물론 펠리오의 눈에는 그리 말하는 카니스가 썩 숭고하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징그러운 축에 속했다.
“…….”
하지만 펠리오는 그저 묵묵히 들어 줬다. 그냥 피곤해서, 그래서 귀로 흘러들어오는 대로 묵묵히 들어 줬다.
“…정말 귀엽다고! 왜 내 말을 안 믿어!”
“거울 좀 봐라.”
믿게 생겼는지.
“나 말고 우리 애들!”
카니스는 듣다 못해 결국 돌아가겠다는 펠리오의 뒤통수에 마지막까지 열변을 토했다.
“나중에 아비랑 애들하고 같이 북부에 한번 놀러 갈게.”
“환영할게. 너만 빼고.”
“너 이러다 나 울면 어쩌려고 그러냐….”
리네 저택에서 나온 펠리오는 마차에 올라탔다.
“하아….”
그제야 피곤이 섞인 한숨이 가까스로 튀어나왔다.
‘이번에 북부로 올라가면….’
몇 년 동안은 북부에 틀어박혀 지낼 생각이었다.
‘마물 사냥 전에 눈보라가 치니 그때 좀 쉬고, 마물 사냥은 3년을 내리 못 갔으니 한 달은 각오하고.’
북부에서도 바쁜 건 매한가지였으나, 수도에서 지내는 것보단 훨씬 나을 거라고 스스로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
펠리오는 별생각 없이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을 응시했다. 오늘따라 유독 거리에 가족들 모습이 많이 보였다.
‘뇌리에 박혔나 보군.’
카니스의 자식 자랑을 너무 들어서 저런 것들만 눈에 보이는 듯했다.
‘…저리도 좋을까.’
카니스도 그러더니. 펠리오는 창틀에 머리를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마차는 거리를 빠르게 벗어나 보레오티 저택에 도착했다.
“주인님, 오셨습니까.”
글라디고 기사단을 그만둔 트라는 수도 저택의 집사가 되었다. 이제 주인님을 마중하는 그의 솜씨는 꽤 능숙했다.
“아, 공작님.”
마침 펠리오를 찾았던 루페가 다가왔다.
“다녀오셨습니까. 아침에 말씀하셨던 대로 서부 게이트를….”
루페는 펠리오에게 간단한 보고를 하며 내일 있을 출발에 대해서도 전했다.
“아니.”
펠리오가 눈을 느리게 떴다.
“예?”
북부로의 여정을 술술 설명하던 루페가 멈칫했다.
“무슨 문제라도….”
다른 일정이 생기셨나. 루페가 물었지만, 펠리오는 혼자만의 생각에 푹 빠진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아주 잠깐.
“고아원에 들르지.”
뜬금없는 폭탄 선언에 루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후원 명목으로 대충 들르면 되겠군.”
“잠깐, 예? 고아원이요?”
뜬금없는 결정에 루페를 비롯해 트라나 다른 이들도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고아원은 무슨 일입니까?”
“당연한 걸 묻지 마라.”
펠리오가 귀찮게 구는 벌레를 내쫓듯이, 여상한 목소리로 충동적인 결정을 내렸다.
“아이를 입양한다.”
* * *
레오니에는 레지나의 딸이었다.
그 사실에 펠리오는 적잖게 놀라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아이는 레지나를 전혀 닮지 않았다. 오히려 보는 사람마다 얼굴은 물론이고 성격까지 펠리오 판박이라며 감탄했다.
레오니에와 가족이 된 뒤로, 펠리오는 많은 것이 변했다. 최우선순위는 레오니에가 되었고, 맛있거나 좋은 것을 보게 되면 아이를 먼저 떠올렸다.
레오니에의 재잘거림은 듣기 좋았고, 제 다리에 기대 칭얼거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으며, 아이가 기뻐하면 저 역시도 기뻐졌다.
심지어 속 썩이는 짓을 해도 실망은커녕 걱정이 먼저였다. 아니, 실망은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존재만으로도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존재가 있다니.
물론 늘 예쁘진 않았다. 가끔은 내 허파를 뒤집어 암살하려는 건가, 싶을 정도로 어이가 없을 때가 많았다. 오늘이 딱 그랬다.
“아따, 술이 들어간다!”
쭉, 쭉쭉쭉!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내 빗장뼈를 봐!
“삐꾸 됐…!”
“시끄러워.”
듣다 못한 펠리오가 딸내미의 볼을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꿱.”
신나게 노래를 부르던 레오니에의 입술이 붕어처럼 툭 튀어나왔다. 아가 맹수는 눈을 밉지 않게 흘기며 입술을 뻐끔거렸다.
“우웅! 으으으으!”
“뭐라고?”
“으응으웅!”
“너는 나이가 일곱인데 아직도 말을….”
“이거 놓으라고!”
자력으로 빠져나온 레오니에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노는데 방해하지 마!”
아기 맹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아빠가 애처럼 놀라고 해서 큰맘 먹고 놀고 있잖아.”
“네가 뭘 놀아.”
정작 소파에 누워 빈둥거리던 아빠 맹수야말로 이 상황에 대해 진지하게 논해 보고 싶었다. 펠리오가 아예 몸을 일으켰다.
“레오 네가 여태 한 인형 놀이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냐.”
자신을 장난감 취급하며 무시하는 상대를 견디다 못해, 임신을 숨기고 도망쳤다가 붙잡히는 이야기. 심지어 둘 다 남자였다.
“나름 재밌다고 생각했는데?”
“창조적인 내 새끼 같으니….”
“아이, 뭘 또 그렇게 칭찬해.”
레오니에가 귀를 붉히며 수줍어했다. 펠리오는 이 비아냥을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딸아이의 정신상태가 심히 의심되었다.
“레오, 남자는 임신 못 해.”
“‘오메가’는 할 수 있어!”
“그건 또 뭔….”
“그렇게 편협한 정신머리로 어떻게 북부를 다스린다고!”
도리에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혼냈다.
“하지만 뭐, 사람마다 취향은 다르니 이해할 수 있어.”
효녀는 아빠의 손을 토닥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펠리오는 기꺼이 저를 이해해 주겠다는 딸이 아주 얄미웠다.
“그래서 아빠가 좋아하는 술로 인형 놀이를 하잖아.”
“나는 술을 조용히 마시는 걸 좋아한다만.”
“에이, 술이라면 응당 춤과 노래지.”
어느새 소파 위로 올라온 레오니에가 들고 온 인형을 펠리오의 얼굴 앞에 불쑥 들이밀었다.
“혼자 깨작깨작 마시면 뭐가 즐거워.”
인형이 어깨춤을 들썩거렸다.
“나중에 내가 크면 아빠랑 같이 마셔 줄게!”
“언제 크려고.”
펠리오가 대놓고 놀렸다.
“흥, 두고 봐라. 아빠보다 더 클 거야!”
“안 크면 어쩌려고.”
“아 좀 그냥 넘어가!”
기어코 인형이 펠리오의 얼굴과 박치기를 하고 말았다.
* * *
레오니에와 함께하는 매 순간은 행복했다. 속 뒤집히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마저도 나중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다.
펠리오는 저에게 이 이상의 행복은 없다고, 오히려 바란다면 그것이야말로 주제도 모르는 욕심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레오니에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대단한 효녀였다. 아이는 제게 또 다른 행복을 만나게 해줬다. 하지만 문득 걱정이었다.
“레오.”
그래서 어느 날엔가. 펠리오는 레오니에에게 물었다.
“내가 정말 바리아와 결혼해도 괜찮겠어?”
“닷새 합방도 한 주제에 뭐래.”
별 시답잖은 걸 물어보네. 펠리오는 진지했건만, 정작 아이는 코를 후비며 헛소리할 정신이 있으면 재산이나 물려달라고 빈정거렸다.
“왜 아빠 결혼을 나한테 물어?”
“그거야 네가….”
“상처라도 받을까? 아니면 서운해할까?”
제 걱정을 들킨 펠리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제야 아빠가 저를 진지하게 걱정하고 있단 걸 알게 된 레오니에도 코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치웠다.
“아빠.”
아이는 코 묻은 손가락을 슬그머니 펠리오 옷에 문지르며 말했다.
“아빠 인생이야.”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레오 너야.”
“아니야.”
레오니에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다부지게 반박했다.
“나에게도 아빠는 무척 소중해.”
우린 가족이니까 소중한 거야, 아기 맹수가 드물게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하지만 아무리 서로가 중요하고 소중해도, 결국엔 각자의 인생을 사는 거야.”
레오니에는 저 때문에 펠리오가 무작정 희생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아빠가 엄마를 사랑한다고, 나를 향한 걱정과 마음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달라지는 건 전혀 없었다. 그저 펠리오의 행복이 훨씬 더 커질 뿐이지. 레오니에가 씩 웃었다.
“아빠는 지금보다 훨씬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
“…….”
“그러니까 이젠 예쁜 아내랑, 훨씬 더 예쁜 딸이랑 같이 오순도순 살자고.”
“맹랑하긴.”
펠리오는 그런 딸을 꼭 안아줬다. 귓가에 부끄러운 웃음을 키득거리며 제 등에 팔을 두르는 아이의 체온 덕에, 펠리오는 새로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어쩌면.
자신은 생각보다….
“…….”
펠리오가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거렸다.
‘언제 잠들었지.’
잠깐 쉬겠다고 소파에 누워 있었더니, 저도 모르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오래된 꿈을 꾼 것 같은데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빠.”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내리니, 소파 아래서 저를 빤히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펠리오의 입꼬리가 느슨하게 풀렸다.
“꼬마 이 녀석.”
펠리오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할아버지라 불러야지.”
“나 꼬마 아닌데.”
영차영차 소파 위로 올라온 페델이 펠리오의 옆에 딱 앉았다. 펠리오는 그런 손주의 입에 딸기우유 맛 사탕을 하나 까서 넣어 줬다. 페델은 눈을 반짝이며 사탕을 오물거렸다.
“근데 왜 왔어?”
“으응!”
페델은 뒤늦게 자신이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떠올렸다.
“할아버지, 어서 가야 해.”
“왜? 어딜?”
“어, 그건 비밀인데….”
비밀이라 말할 수 없다며 페델이 당황했다. 유순한 인상이 곤란해하며 점점 울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한테는 좋은 거야!”
페델이 짧은 두 팔을 최대한 크게 벌리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럼 한 번 가 볼까?”
못 이기는 척하며 일어나니, 그제야 페델이 안도했다. 펠리오는 뭐 때문에 저를 찾았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나만 믿어!”
“허세는.”
제 엄마 판박이네.
펠리오는 페델을 품에 안은 채로 복도로 나왔다. 손주와 함께 걷고 있으니, 지나가며 마주치는 사용인마다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그리고 펠리오는 그들의 인사를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간단히 받아 줬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이런 놀라운 변화는 또 있었다.
“그러고 보니.”
펠리오가 페델에게 말했다.
“고양이가 오늘 새끼를 낳았더구나.”
이제 동물들은 펠리오를 봐도 겁에 질리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실제로, 펠리오는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와 직접 키우고 있었다. 순찰 중에 다친 녀석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은 보레오티의 또 다른 식구가 되었다.
“와아! 나도 볼래!”
“그럼 오늘 저녁에 레니 삼촌이랑 같이 보러 갈까?”
“정말? 정말?”
페델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
“그래, 약속.”
펠리오도 제 손가락을 내밀어 고리를 걸었다. 페델은 부친인 스칸디아를 닮아 전체적으로 유순하고 차분한 인상이었다. 성격도 참을성이 강하고 신중했다. 제 모친인 레오니에와 닮은 거라곤 검은색뿐이었다.
“참, 할아버지 그거 알아?”
하지만 말할 때의 입 모양이나 목소리, 재잘거리는 모습은 그 시절의 레오니에를 떠오르게 했다. 레오니에도 이때 즈음엔 말이 참 많았다.
“아빠가 할아버지 주려고 서부에서 엄청 쓴 차….”
“그럼 우리 꼬마는.”
“응?”
페델이 멈칫했다.
“우리 꼬마는 뭘 준비했지?”
“어….”
재잘거리던 꼬마의 입이 꾹 다물렸다. 이런, 펠리오가 풀 죽은 손주의 등을 토닥였다. 풀이 죽은 모습을 보아하니, 선물을 고르고 고르다 끝내 결정하지 못한 듯했다.
“다 왔네.”
펠리오가 익숙한 인기척들이 모여 있는 어느 방문 앞에 섰다. 그리고 문을 여니.
팡-! 팡팡!
“짜잔! 생일 축하해요!”
“여보, 생일 축하해요.”
“아빠 축하해!”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이 종이 폭죽을 터트리며 펠리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놀래라.”
펠리오가 머리에 묻은 종이 꽃가루를 떼어내며 싱거운 웃음을 지었다.
“하나도 안 놀란 얼굴인데?”
재미없게 진짜, 벨레아니가 입술을 삐죽이며 금붕어처럼 끔뻑거렸다.
“페델! 너 아빠한테 생일 축하하는 거, 비밀로 한 거 맞아?”
레니우스가 의심의 눈초리로 동갑내기 조카를 노려봤다.
“비밀로 했어. 그치, 할아버지?”
억울해진 페델이 펠리오를 바라봤다.
“그래. 난 아무것도 모르고 왔어.”
“아닌 거 같은데….”
펠리오는 아들의 야무진 말투나 의심하는 눈초리가 아내를 쏙 빼닮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아들은 누굴 닮아 이리 의심이 많을까?”
“뭐, 아님 말고!”
레니우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페델과 함께 벽난로 근처에 앉았다.
“우리 꼬마들은 무슨 선물 샀어?”
벨레아니도 따라 옆에 앉았다.
“작은누나는 선물 뭐 샀어?”
“언니야의 도움을 받아 괜찮은 거로 준비했지.”
후훗, 기대하라며 벨레아니가 자신했다.
올해 열여섯이 된 벨레아니는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었다. 겨울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온 둘째는 일기를 자주 쓰시는 아빠를 위해 질 좋은 잉크를 준비했다.
“에이, 큰누나 도움을 왜 받아.”
“그거야 내 맘이지? 억울하면 너도 받던가.”
“정정당당하지 못해!”
괜히 까불거리던 막내는 끝내 작은누나에게 분홍 머리를 깨물리고 말았다.
“당신 잤어요?”
바리아가 펠리오의 검은 머리가 살짝 눌린 걸 발견하곤 손으로 살살 빗어 정돈해 줬다.
“잠깐 쉰다는 게 좀 자 버렸군요.”
“오늘 밤에 잠 설치면 어쩐담?”
“우리 부인께선 오늘도 잠을 설치시겠는데.”
은근한 놀림에 바리아가 눈을 가볍게 흘겼다.
“능글맞기는.”
나잇살 먹고 주책만 늘었다며 핀잔하는 바리아의 얼굴에는 웃음이 만연했다. 여전히 사이좋은 두 부부는 벽난로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그러고 보니 레오랑 스칸은?”
펠리오가 자리에 없는 둘을 찾았다.
“둘은 아직 의원한테 진찰받는 중이에요.”
“언니야도 참 대단해.”
남동생을 괴롭히던 벨레아니가 넌지시 감탄했다. 그 틈에 레니우스는 펠리오의 등 뒤로 도망치더니, 귓속말로 고자질했다. 작은누나가 나 괴롭혀.
“설마 임신한 몸으로 마물 사냥을 다녀왔다니.”
레오니에의 임신은 바로 얼마 전, 마물 사냥 도중에 알려졌다.
‘나 임신한 거 같은데?’
송곳니가 잘 안 나와.
함께 마물 사냥에 나섰던 벨레아니는 아빠의 입버릇인 ‘허파가 뒤집힐 것 같다’라는 말뜻을 처음으로 통감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왔더랬지. 결국 레오니에는 사냥 내내 펠리오에게 혼이 나야 했고, 사냥에서 돌아와서는 스칸디아에게도 엄청나게 혼이 났다.
“형부가 그렇게 소리치는 것도 처음 봤어.”
평소에 착한 사람이 한번 돌아버리면 정말 무섭다더니, 벨레아니는 딱 그랬다며 회상했다.
‘야! 나 혼자 임신했냐!’
물론 레오니에도 보통 성질머리가 아니라서 바로 반박했지만.
“언니야는 언제 철들려나.”
정말 못 말린다며 벨레아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그리고 그런 둘째를, 펠리오와 바리아가 배신감 어린 시선으로 흘겨보았다. 저 망나니 같은 둘째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생각하면 첫째는 효녀 중 효녀였다.
“어, 다들 벌써 모였네?”
“늦어서 죄송합니다.”
진찰을 마친 레오니에와 스칸디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 아빠!”
페델이 우다다 달려갔다.
“아이고, 예쁜 내 아들!”
머리를 단발로 짧게 친 레오니에는 달려오는 아들을 향해 두 팔을 번쩍 펼쳤다.
“녀석.”
그러나 스칸디아가 아들을 가로채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엄마한테 뛰어들고 그러면 안 돼.”
“왜? 엄마 아파?”
“배에 동생이 있으니 조심해야지.”
스칸디아가 한 팔로 페델을 안고, 다른 팔로는 레오니에의 허리를 감싼 채로 자리에 앉았다.
“오, 우리 사랑하는 아빠.”
레오니에가 펠리오를 가볍게 포옹하며 볼에 입을 맞췄다.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리곤 가져온 고깔모자를 머리에 얹어 줬다.
“큰누나, 진짜로 배에 아기 있어?”
레니우스가 아빠 머리에 있던 고깔모자를 훔쳐 쓰며 물었다.
“근데 왜 배가 안 뚱뚱해? 책에서 봤는데, 아기를 가지면 배가 엄청 커진대.”
“시간이 지나면 커질 거야.”
레오니에가 레니우스의 콧등을 손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괜히 부끄러워진 막내는 엄마 품에 얼굴을 숨겼다.
“의원이 뭐래니? 괜찮대?”
바리아가 물었다.
“당연하지! 나도 아기도 둘 다 건강해.”
“어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엄마는 걱정도 탈이다!”
“이게 진짜 덜 혼났군.”
펠리오가 혀를 짧게 찼다.
“우리가 레오 네 덕에 제 명에 못 살 듯싶다.”
“욕 많이 먹어서 장수할 테니 걱정 마슈.”
레오니에가 씩 웃으며 펠리오에게 선물을 예고했다.
“이번에도 역작이 탄생했지.”
레오니에는 어릴 적부터 펠리오의 생일 선물로 편지와 크로키를 선물로 준비했다.
“장녀한테 축하 받으니 좋지?”
“축하하기 전에 쓰러질 뻔했다.”
끊임없는 잔소리에 레오니에가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스칸.”
펠리오가 한숨과 함께 사위를 불렀다.
“내 누누이 말하지만, 우리 집에 이혼은 없다.”
“예, 걱정 마십시오.”
“뭐야? 왜 둘 다 내 욕하면서 친목 다지는 거야?”
레오니에가 으르렁거렸다.
“자아, 이제 다 모였지?”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바리아가 가족들에게 말했다.
“이러다 네 아빠 생일 축하하기도 전에 하루 다 가겠다.”
그랬다. 오늘은 펠리오의 생일이었다. 평소 그가 사람 많고 복잡한 연회 따위를 싫어하는 탓에, 생일날에는 가족들끼리 모여 조촐한 축하를 나눴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준비한 선물을 뜯고.
하지만 그중 가장 인기가 있는 건, 펠리오가 쓴 레오니에의 육아일기를 함께 모여 읽는 것이었다. 펠리오는 자신이 죽거든 읽으라고 말했으나, 이젠 그의 육아일기는 보레오티 가족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이젠 좀 그만 읽어.”
정작 일기의 당자사는 부끄러워했다.
그도 그럴 게.
“언니야는 아빠가 쓴 거 읽을 때면 만날 운대요.”
“울보래요, 울보래요!”
동생들이 기다렸단 듯이 놀렸다. 다른 사람들은 육아일기를 읽으면 배꼽을 잡고 웃지만, 레오니에는 항상 눈물을 흘렸다.
“이것들이 감히 가주 무서운 줄 모르고.”
레오니에가 시건방을 떠는 두 동생을 위협했다.
레오니에는 3년 전, 오랫동안 간절히 바랐던 공작 작위를 드디어 계승했다.
“에이, 말은 똑바로 해야지.”
벨레아니가 손가락을 까닥이며 쯧쯧, 혀를 찼다.
“공작 작위만 받았지, 우리 집 가주는 아직 아빠잖아.”
“맞아! 아빠가 대장이야.”
레니우스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엄마가 더 강하니까 엄마가 대장이지.”
“오오, 그건 또 그래.”
동생들의 까불거림에 레오니에는 한숨만 푹 내쉬었다.
“아빠, 큰누나가 이불에 쉬야 한 거 읽어 줘!”
“아니야, 기사단에 몰래 잠입해서 술 훔쳐 마시고 기절한 거 읽어 줘.”
추천은 끊임없이 이어졌으나, 정작 펠리오가 펼친 곳은 아주 짧은 문장 세 줄이 전부였다.
“페델.”
펠리오가 손주를 불렀다.
“네가 읽어 볼래?”
페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아버지한테 주는 선물로, 페델이 일기를 읽어 주면 좋겠는데.”
“그래도 돼?”
“아주 근사한 선물이 될 거다.”
페델이 환히 웃으며 부모님을 바라봤다. 그래도 되느냐는 뜻이었고, 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펠리오는 제 허벅지에 손주를 편히 앉혔다.
“언니야 벌써 울어?”
“에헤, 운대요!”
“저 쥐똥이들이 진짜…!”
동생들의 놀림에 레오니에가 코를 훌쩍이며 짜증을 냈다.
“페델, 어서 읽으렴.”
스칸디아가 아내의 눈가를 손수건으로 닦아 주며 말했다.
“짓궂긴.”
남편의 손을 조용히 쥐던 바리아의 목소리도 살짝 젖은 채였다. 펠리오는 그런 아내의 볼에 입을 맞추며 싱긋 웃을 뿐이었다.
딱히 심술궂은 의도는 없었다. 이 나이 먹고 장성한 큰딸을 놀려서 뭘 하겠는가.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이날의 기억을 추억하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벽난로 속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타고, 가족들이 두런두런 모여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이 순간. 펠리오는 이제 외롭지 않았다. 외로울 틈이 없었다.
이 낯간지러운 훈기들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 저의 빈틈을 완전히 채웠으니까.
“레오가….”
곧 페델이 일기를 읽었다.
꼬마 맹수가 읽는 구절 따라, 펠리오의 머릿속에는 그 당시의 풍경이 머릿속에서 새록새록 떠올랐다.
* * *
x월 x일
레오가 아빠라고 불렀다.
세상은 변했다.
아름다웠다.
[남주의 입양딸이 되었습니다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