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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23/26)

Epilogue

때로는 그랬다.

우연히 스치는 바람과 공기 같은 찰나 속에서 문득 무언가에 영혼을 빼앗겼던 순간, 마시멜로처럼 말캉한 피부의 감촉, 입 안을 굴러다녔던 씁쓸한 사탕 맛이 떠오르는 때가 있었다.

아마 아주 어린 시절 기억의 단편이거나, 그냥 허상일지도 모르는 이야기. 그러나 영원히 잊히지 않을 감상이리라.

“다들 인사하세요. 우리 잘생긴 친구, 이름이 뭐라고 했지요?”

선생님의 물음에도 우물쭈물 망설이는 남자아이는 쉬이 입술을 열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각각 시끄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뛰어다니거나 바닥에 나뒹구는 아이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

“여러분, 쉿. 우리 친구 이름이 뭐죠?”

속으로 분을 삭이는 선생님의 눈가가 마그네슘 부족처럼 파르르 떨려왔다. 이놈의 부잣집 애새끼들은 사람이 말을 하면 도통 들어주는 법이 없었다. 사랑스러운 제자들이지만 하루하루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맥주캔의 원흉들이기도 했다.

“범철.”

야트막한 목소리가 어수선한 분위기에 묻혔다. 시골에서 올라와 잠시 서울에 맡겨진 아이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유치원 일곱 살 형들과 견줄 만큼 발육이나 언어 능력이 뛰어났다. 자신의 말투가 다른 아이들과 다른 것을 느끼고 움츠러들자, 곧 짓궂은 장난의 타깃이 되고 말았지만.

“기여 아니여~ 기여 아니여~”

며칠 지나지 않아, 덩치에 비해 성격이 유순한 철을 파악한 유치원 아이들이 그의 사투리를 흉내 내며 밉살스럽게 놀려대기 시작했다.

“하지 말어.”

구석에서 조용히 콩쥐팥쥐를 읽고 있던 철이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해지말어 해지말어~”

퍽, 작은 주먹이 나불거리던 주둥이를 향해 날아가 꽂힌 건 눈 깜짝할 새였다. 그다음은 눈물과 콧물 바다였다. 무려 네 명을 상대로 거둔 압승이다.

부랴부랴 달려온 선생님에게 크게 혼이 나긴 했지만, 철은 상관없었다. 어차피 느자구 없는 놈은 두들겨 패도 된다고 배웠으니까.

그러고 보면 ‘그 애’는 정말이지, 느자구가 먹고 뒤질래도 없었다. 혹시 자신이 사람인 걸 모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아적인 사고에 빠져 본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로봇이라고 생각한다든가. 그렇지 않고서야 그 정도로 못되게 굴 수는 없는 거였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랬다.

그날 어린이용 소변기에 소변을 보던 철은 문득 뒤에서 들려오는 조르륵― 소리에 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머… 머여?”

동시에 철의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잠에 취한 듯, 제 뒤에 서서 나른한 표정으로 하품하는 남자아이는 분명 고추를 꺼내놓고 있었다.

“옘병…!”

당황한 철이 급하게 자리를 피했으나, 이미 늦어버린 뒤다. 노르스름한 액체로 축축하게 젖은 하체가 뜨끈뜨끈하다. 황당한 듯 눈을 휘둥그레 뜬 철을 무시한 채 남은 한 방울까지 툭툭 털어낸 남자아이는 그대로 옷을 정리하더니 유유히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손도 씻지 않고서.

덕분에 그날은 하루 종일 오줌싸개로 오해받아야 했지만, 용서와 관용을 아는 어린이로서 딱 한 번은 실수로 봐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 밖에도 소풍 갔던 날,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큰 개한테 쫓기던 그 애가 자신을 고기 방패로 삼는다든가,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것을 구겨 쓰레기통에 처박은 그 애가 쓰레기를 잘 버린다고 선생님께 칭찬을 받는다든가 하는 일이 일어났다.

낮잠 자고 있을 때 배때기를 밟고 지나가거나, 몸을 치고 가는 바람에 먹고 있던 도시락이 바닥에 엎어졌을 때는 왈칵 눈물이 나올 뻔했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니 아무리 실수라고 여기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여러 번은 실수가 아니라 염병인 것을.

“으허어엉!”

또 어느 날, 동화책을 읽고 있던 철은 울음소리를 들었다. 독서에 방해가 되는 시끄러운 소음은 멈추지 않고 귓가에 울렸다.

“에에에~ 홍서진은~ 공주병이래요~”

“으어어어엉…!”

어찌나 목청이 좋은지. 귀를 틀어막고 애써 무시하려는 철의 시도가 무색했다. 시끄러워도 허벌라게 시끄럽다.

결국 분노가 쌓일 대로 쌓인 철의 얼굴이 볼썽사납게 일그러졌다. 인제 참을 만큼 참은 것이다. 읽고 있던 그림책을 내던진 철은 그대로 목표물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뭐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눈깔이 회까닥 뒤집힌 채로 달려들었다.

퍽! 이윽고 허공에 미약한 타격음이 울려 퍼진다.

“으아아! 엄마아!!”

귀에 거슬리던 그 애의 울음소리는 곧바로 다른 아이의 울음소리로 바뀌어 버렸다.

“그 주둥이 그쳐.”

주먹이 향한 곳은 계속 서진을 놀려대던 놈팡이 같은 놈의 턱주가리였으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 아이가 여자애랑 소꿉놀이를 하거나, 인형 놀이 따위를 할 때마다 훼방을 놓기 시작한 게. 또 놀림당해서 질질 짤 게 뻔한데, 그 꼴을 또 볼 순 없는 거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아마도.

돗자리 위에 아기자기하게 살림을 차려놓은 꼬락서니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턱 막히고 심장이 쿵쿵 뛰어댔으니까.

“철이야.”

며칠이 지나고, 익숙한 목소리에 시선을 돌린 철은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가느다랗게 눈을 접은 그 애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말을 이었다.

“눈 감고 아, 해봐.”

자신을 사람 취급도 안 하던 아이가 이름을 불러주었으니. 이장님 댁 닭 계순이가 저를 알아보는 것과 비슷한 감상일까.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건 처음이라 그런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자세히 보니 피부가 백설기처럼 새하얀 것이 동화책에서 보던 백설 공주를 닮은 것 같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머리카락, 고동색 눈동자는 특출난 게 없는데도 햇빛으로 반짝여서 그런지 어딘가 각별해 보였다.

눈 감기 싫은데……. 하는 수없이 게슴츠레 눈을 감은 철이 입을 벌리는 순간, 달그락 동그란 고체와 함께 짭조름한 손가락이 입 안을 침범했다. 잠시 후 눈썹을 찌푸린 그 애가 입을 열었다.

“손가락은 왜 빨아.”

“으응….”

저도 모르게 쫍쫍 소리 내며 입 안에 들어온 손가락을 빨고 있던 철이 그것을 놓아주자, 바로 쌉싸름한 솔잎 맛이 예민한 혀를 자극했다. 씨익 입꼬리를 올린 서진이 물었다.

“맛있어?”

토할 것 같다. 당장 맛대가리 없는 덩어리를 퉤퉤 뱉고 싶었지만, 말간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입에서 전혀 다른 대답이 흘러나왔다.

“기여.”

그 대답이 흡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인 서진이 불룩한 양쪽 주머니에서 솔잎 맛 캔디를 가득 꺼내 들더니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너 다 먹어.”

두 손 가득한 사탕. 어쩌면 화해의 의미일 수도 있고, 어쩌면 친구 하자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철은 말없이 손안에 쏟아진 초록색 봉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사실 서진은 유치원 선생님을 졸라서 사탕을 잔뜩 받아낸 다음, 먹어보고 맛대가리 없어서 처치가 곤란해진 것을 싫어하는 녀석에게 처리한 것뿐이지만, 철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사탕을 친구 하자는 의미로 결론 내린 철은 그 애가 좋아하는 앞치마를 두르고 마론인형을 손에 든 채 먼저 말을 건넸다.

“나랑 같이 놀…자.”

그 순간 얼굴을 와락 구긴 그 애가 앞치마를 잡아 뜯을 듯이 벗겨낸다.

“바보! 멍청이! 돼지! 찔찔이!”

인형까지 빼앗아 던지는 서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지만, 큰 타격은 없었다. 염병이 워낙 익숙해진 탓이다.

그날 집에 돌아간 철은 바닥에 드러누워 바비 인형을 사달라고 이모에게 생떼를 썼더랬다. 결국 며칠 동안 조르고 졸라 도착한 장난감 가게에서 그 애가 좋아할 만한 예쁜 인형을 고심해서 골랐다.

“너 나랑 놀고 싶어? 그럼 나한테 메텔이라고 불러.”

새로 산 바비 인형이 먹힌 건지, 그날부터 그 애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엄마, 너는 아기인 거야.”

“응.”

인제 인형 놀이도, 소꿉놀이 상대도 이름 모를 여자애가 아닌 자신의 차지였으니. 두 꼬마는 항상 붙어 다니면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둘만의 비밀기지를 만들기도 했다. 비록 가끔씩 막말을 한다거나,

“철이야. 이것도 먹어.”

도시락을 먹을 때 맛없는 반찬이나 완두콩을 골라서 제 밥 위에 쏟아내기도 했지만.

“몸에 좋은 거래. 고맙지?”

“기여.”

메텔. 나의 메텔. 어찌나 느자구 없는지. 그 순진무구함이 좋았다.

“자 여러분, 빈칸에 장래 희망을 적는 거예요.”

햇살이 나른한 오후, 선생님 말씀을 따라 연필을 손에 쥔 아이들이 제각각 하얀 종이 위에 꿈을 펼치기 시작했다. 대통령, 선생님, 마이클 잭쓴 등등. 옆에서 연필이 사각사각 미끄러지는 소리를 듣고 있던 철이 은근슬쩍 메텔 쪽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부자집 재벌삼새」

부모님도 모자라 조부모에게 장래 희망을 의탁해버리는 잔머리가 가상하다. 킥킥 조용히 웃음을 삼킨 철은 작은 손을 움직여 자신의 종이에 글씨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완성된 글자를 보며 씩 미소 짓는다.

「메텔 집 가정부」

네모난 빈칸엔 다소 편견 없는 장래 희망이 적혀 있었다.

***

늘 그렇듯, 아름다운 시절은 우리 곁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특히 힘없는 어린아이의 경우 어른들이 정해놓은 이별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어휴. 야가 왜 이래.”

유치원 바닥에 자빠져 우는 아이는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 일이 무색하게 다시 뒤집어져서 똑같은 말만 수없이 반복해댔다.

“시방 뭐라냐. 메텔?”

아이의 아버지가 뒷덜미를 긁적이며 중얼거린다.

“아버님. 철이 가장 친한 친구가 아직 안 와서 그런 것 같아요.”

유치원 선생님이 당혹스러운 미소를 띠며 말을 건넸다.

“씁! 범철!”

달래도 보고 호통도 쳐봤지만, 어쩐지 우엥― 하고 우는 소리만 더 커질 뿐이다. 결국 참다못한 남자는 바닥에 엎어진 아이의 작은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리더니 클러치 백처럼 옆구리에 아이를 들어 올렸다.

“죄송합니다잉. 인자 갈란께.”

남에게 폐 끼치는 걸 가장 민망하게 여기는 그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차로 향했다. 유치원 밖으로 벗어나려고 하자 더 미친 듯이 발악하는 녀석은 분명 제 아들이 맞는데, 어쩐지 처음 보는 아이 같았다.

평소엔 눈물 한 방울 떨구는 법 없이 의젓하던 놈이 서울 물을 먹더니 이상해진 게 분명하다.

“어허!”

버둥거리며 차에 타지 않으려는 아이를 억지로 구겨 넣은 남자가 바로 운전석으로 달려갔다. 그동안 자동차 키를 쏙 뽑아서 제 주머니에 숨긴 철은 이미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뭐여. 키 으디 갔어.”

운전석에 오르자마자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키를 찾던 남자의 눈이 아이를 향했다.

“범철 이눔 시끼.”

잔뜩 무서운 얼굴을 하고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니 자꾸 이러믄 트랙타 안 태워줘분다잉.”

트랙터 안 태워준다는 말은 녀석에게 늘 절대적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이번에는 눈곱만큼도 통하지 않는다.

돌잡이 때도 벼를 집을 만큼 농사를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서울 물에 확실히 뭐가 있긴 있는가 보다.

결국 한참 동안 자신의 아들과 실랑이하던 남자는, 아이를 숨넘어가게 간지럽힌 뒤에야 작은 호주머니에서 자동차 키를 빼낼 수 있었다.

“안 돼… 메텔…….”

아버지의 간지럽히기에 속수무책으로 까르르 웃던 철은 시동이 걸리자마자 다시 엉엉 울기 시작했다. 또 메텔, 메텔이라는 말만 반복하면서.

매끄러운 아스팔트 위에 커다란 바퀴가 스르르 굴러가기 시작한다. 그 순간, 멀리서 달려오는 꼬마 아이를 발견한 철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메텔, 메텔아……!”

그러고는 창문에 딱 달라붙어서 미친 듯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신발도 신지 않고 짧은 다리로 열심히 쫓아오는 아이는 분명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흩날렸다.

잠시 신호에 걸렸던 차가 아이의 목소리가 닿기도 전에 시꺼먼 매연을 내뿜으며 출발한다.

“메텔아…….”

마지막으로 본 그 아이는 차가운 길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창문에 대고 메텔을 외치며 대성통곡하던 철은 어린 마음에 다짐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면 꼭 울지 않게, 웃게만 해주겠노라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꼬추밭 그 사나이 완결〉

주석

1) 2000년대 초반은 와이파이가 없어 특정 장소 이외엔 전화선을 찾아 온라인 연결을 했다.

2) 병원 도착 시 이미 사망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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