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22/26)

8.

누군가 창문을 열어 놓았는지 피부를 스치는 따스한 공기가 느껴졌다.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푸른 새싹이 싹트고 연분홍색 벚꽃잎이 허공에서 춤을 추는 봄이었다. 만년설도 적당한 때를 만나면 사르르 녹아내리듯이, 따뜻한 봄기운이 서진의 얼어붙은 몸을 녹였다.

옅은 화장품 냄새와 깨끗하게 드라이 된 명품 옷의 섬유 유연제 향이 콧속을 파고든다. 어렸을 때 제 몸에서 나던 향과 같은 향이다.

오랜 시간 딱딱하게 굳어 있던 서진의 눈꺼풀이 미세한 떨림을 품었다. 살짝 굽어든 손가락이 바깥쪽을 향해 움칠거리는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에 여자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다.

“어머, 선생님!”

만개한 봄꽃보다 더 화사한 여자가 병실로 들어서는 의사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래전 은퇴한 배우가 아니냐며 병원을 수런거리게 했던 미모의 여성은, 동시에 입고 있던 명품 코트를 벗어 뒤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오늘도 반응이 전혀 없던가요? 눈꺼풀이 떨린다거나, 손가락을 조금 움직인다거나.”

엄……마…….

바깥으로 내뱉어지지 않는 목소리가 서진의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별안간 얼굴 위로 떨어진 코트 때문에 눈을 뜨자마자 눈앞이 다시 깜깜해졌다. 하필이면 앙고라 소재로 만든 코트였는지 온 얼굴이 가느다란 털로 간지러워 죽을 맛이다.

“전혀요.”

여자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그런데… 지금 환자분 얼굴에 코트를 올려둔 건가요?”

“어머…!”

앙고라 입지 말라니까…….

화들짝 놀란 여자가 곧바로 코트를 걷어냈을 땐, 이미 서진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 뒤였다. 원래 서진의 어머니는 배고픈 북극곰과 길고양이를 보며 눈물을 훔치다가도 여우와 밍크로 만든 모피 코트를 사랑하는 해맑은 뇌의 소유자였다.

그다음 어렴풋이 정신이 들었을 땐, 불편하게 목구멍을 꽉 막고 있던 호흡기가 사라진 상태였다.

범철…….

가장 먼저 떠오른 그 이름 대신, 다른 두 사람의 심각한 대화 소리가 병실을 채운다. 남자가 잔뜩 성난 목소리를 내뱉으며 병실 문을 향해 돌아섰다.

“아무래도 저 김 간호사 녀석, 당신을 쳐다보는 눈이 음흉한 게 내가 가서 한마디 해야겠어요.”

아……빠…….

이번에도 단어가 완성되는 대신 잔뜩 쉰 소리가 서진의 목을 긁었다.

“어머, 그럴 리가요. 내 나이가 벌써 몇 갠데.”

흥분한 남자를 붙잡은 여자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발갛게 붉힌다.

“내 눈엔 아직도 틴 에이지 같은데요.”

“당신도 내 눈엔 빌 게이트처럼 생겼어요.”

빌 게이츠.

다시 눈을 감아버린 서진이 속으로 이름을 고쳐 주었다. 그런데, 빌 게이츠처럼 생겼다는 것도 칭찬인가…….

결국 부모님의 염병 천병에 희끄무레하던 정신이 다시 새까만 수렁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다음 서진이 눈을 떴을 땐, 서늘한 에어컨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랑거리고 나뭇가지에 붙은 매미가 맴맴 울어대기 시작한 초여름이었다.

“선생님… 선생님…!!”

환호성에 가까운 목소리로 선생님을 외치는 여자가 다급하게 병실 밖으로 뛰쳐나간다. 이어서 등장한 가운을 입은 의사가 손가락을 딱딱 튕기며 입을 열었다.

“환자분? 홍서진 씨. 내 말 들립니까?”

“…철…….”

“철…? 이거 몇 갠지 대답할 수 있겠어요?”

의사가 눈앞에 손가락 네 개를 펼쳐 보이며 바보 같은 질문을 던졌다.

“…죽을… 사….”

생각한 것보다 더 명확한 대답에 의사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감돌았다. 바로 한 사람을 떠올린 서진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가며 그를 찾기 위해 바삐 움직인다.

수개월 만에 깨어난 정신은 상황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갑자기 자신이 왜 병원에서 눈을 뜨게 됐는지는 물론이고 오두막에서 있었던 일과 마지막에 있었던 사고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근데 나 왜 여기 있어요…?”

***

눈을 뜨고 퇴원하는 데는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 서진은 예후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빛의 속도로 몸이 회복되어 며칠 만에 혼자 걷기 시작하다가, 고작 몇 주 만에 가볍게 뛰는 것까지 가능해졌으니.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쩌다 사고가 났는지 기억이 안 난다는 거였다. 사실 4개월간의 혼수상태로 인해 일시적으로 혼란이 온 것뿐이지만, 주변에서는 이미 그가 역행성 기억 상실증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딱 한 달만 나랑 살자.’

분명 마지막으로 그 애랑 한 달 동안 같이 살기로 했던 것 같은데…… 다음 기억은 무슨 대파 썰듯이 댕강 잘려 나갔다.

게다가 그 녀석은 제가 입원해 있는 동안 높으신 콧대도 한번 비추지 않았다. 핸드폰을 잃어버렸으니 연락해 볼 수도 없고.

“와, 홍시. 너 깔끔하게 산다?”

“…어?”

멀끔하게 정리된 집 안을 본 김영미가 눈썹을 치켜떴다. 염병 천병을 떨던 부모님은 며칠 전 미국으로 돌아가고, 해외여행 중에 한국까지 날아온 랜선 마누라가 병원에서 집까지 데려다준 것이다.

퇴원하고 처음으로 영미와 함께 제집을 찾은 서진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바닥과 침대에 널브러져 있어야 할 옷가지 대신 번쩍번쩍 윤이 나는 바닥이 두 사람을 맞이했으니까.

“우리 남편, 이제 장가가도 되겠어.”

잠시 후 낄낄거리며 놀려대던 영미가 떠나고, 서진은 초면인 것처럼 어색한 집 안에 홀로 남아 지친 몸을 침대에 맡겼다. 왠지 낯선 공기 중에 묘하게 익숙한 향기가 섞여 있는 것 같다. 시원한 숲 내음 같은.

심지어 침대 시트나 이불에선 방금 세탁한 것 같은 뽀송뽀송한 햇볕 향이 난다. 어쩌면 부모님이 청소업체를 불렀을 수도 있고.

청소업체…….

번뜩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오뚝이처럼 몸을 펄떡 튕겼다. 설마 그것도 버렸으려나. 바로 바닥에 몸을 붙이고 침대 밑을 들여다본 그가 희한한 광경에 눈을 끔뻑거렸다.

정말로 박스가 없어졌다. 그런데 없어진 박스 대신 처음 보는 커다란 박스 두 개가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서진은 의아한 얼굴로 묵직한 박스 하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박스 뚜껑을 열자마자 한계까지 꽉 차 있던 편지 봉투가 후드득 흘러넘쳤다.

“…….”

침을 꿀꺽 삼킨 서진이 바닥에 떨어진 봉투를 하나 집더니 안에서 하얀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서진아.

오늘은 날씨가 많이 풀렸어.

병원 근처 텃밭에 자란 취나물을 수확하기 좋을 때야.

그전에 잡초부터 뽑아버려야 하는데 주인이 뽑지를 않네.

그리고 정진물산 황 부장은 공금 횡령으로 깜빵에 처넣어브렀……

흰 종이에 빼곡하게 적힌 단정한 글씨는 별것 아닌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새로운 편지를 열고 또 열던 그는 어느 순간, 이 내용들이 자신이 철에게 썼던 편지의 회신이란 것을 깨달았다.

오는 길에 인동초꽃이 피어 있었는데, 바람에 꽃잎이 흔들리는 게 이뻤어.

서진이가 깨어났을 때도 이 꽃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좋은 꿈 꾸고 있어?

서진은 황당해졌다. 어찌 된 게 지난 6년 동안 쓴 편지 양보다 많은 답장이 돌아왔으니.

너는 어떤 모습도

너무 아름다워서 난 항상 사랑을 절감하게 돼.

넋을 놓고 편지를 읽던 서진의 머릿속에 불현듯 댕강 잘려 나갔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눈 내리는 차 안에서 같이 잠들었던 것. 함께 오두막을 청소하고, 밥을 먹고, 짐승처럼 흘레붙었던 것. 썰매. 그리고…….

서진아.

나는 정말, 정말로.

정말로 난 허벌라게 너를 좋아…

이런 씹.

급브레이크 걸린 듯이 서진의 손에 갑작스레 구겨진 편지지가 휴지통 위로 휙 던져졌다. 심장이 뜀박질한 것처럼 쿵, 쿵, 내달리기 시작했다. 허억, 별안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이 나쁜…….

그러고 보면 왜 깨어나고 나서는 한 번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을까.

설마… 진짜 뒤져버린 건…….

충격받은 몸뚱이가 중심을 잃고 기우뚱 흔들렸다. 어지럽다. 눈알이 빙그르르 뒤집어지는 것 같다. 그 자리에서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 서진은 신발조차 신지 않은 채 바로 현관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나쁜 새끼. 나쁜 새끼. 울분 섞인 흐느낌이 잇새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영원히 떨어져 있다 해도, 다신 못 만난다 해도 어디선가 그가 잘 지내기만을 바랐으니까.

“으…흐윽…….”

목적지는 따로 없었다. 계단을 미끄러지듯 내려간 다음 골목길을 두리번거리며 발길이 닿는 데로 정처 없이 그를 찾아다녔다. 후덥지근한 여름 바람이 피부를 스친다. 평일 낮, 한적한 주택가엔 참매미가 맴맴 울어대는 소리만 가득하다.

“철이야… 철아…….”

꼴딱꼴딱 넘어가는 숨을 삼키며 달리는 차를 맨발로 쫓아갔던 어린아이처럼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흐응, 지금은 눈물 콧물이 줄줄 흐르는 것도 남에게 미친 새끼로 보이는 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스팔트에 널브러진 유리 파편과 돌멩이에 쓸린 발바닥이 따끔거린다. 지나가다 정신 줄 놔버린 남자를 발견한 학생들이 재미난 구경거리라는 듯 낄낄대기 시작했다.

“와 미친놈인가 봐. 신발도 안 신었어.”

“야야, 보지 마.”

큭큭, 비웃는 소리도 시끄러운 매미 울음에 묻혀 흩어졌다. 그 상태로 한참 싸돌아다닌 서진이 터벅터벅 집으로 향했을 땐 이미 땅거미가 지고 난 뒤였다.

피로 물든 상처투성이 발바닥이 원룸 입구의 차가운 돌계단에 착착 달라붙는 소리와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계단을 울렸다.

누구와 통화 중인 건지 아픈 사람이 없어져브렀다며 성을 내는 목소리엔 불안과 초조함이 그득하다. 서진은 멍한 얼굴로 소음의 진원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는 501호를 들여다보자, 산처럼 커다란 남자가 흥분을 참지 못하고 좁은 공간을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현관에는 제 하반신 크기만 한 커다란 해바라기 꽃다발이 떨어져 있다.

“싸그리 다 뒤져보세요.”

인기척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잔뜩 흥분한 남자의 얼굴엔 두려움과 묘한 공포감마저 서려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숨을 연거푸 내뱉으며 뒤돌아보는 순간, 문 앞에 서 있는 서진과 눈이 마주치고 동작을 멈춘다.

“…시방 찾았네.”

그 말과 동시에 바로 핸드폰을 닫아버리고 철의 얼굴 근육이 유하게 풀어졌다. 얼음이 녹아내리듯이 굳어 있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서진…….”

미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퍽, 미약한 주먹이 남자의 아래턱에 날아가 꽂힌다. 워낙 불시에 날아든 공격이라 전혀 대비하지 못한 철의 낯빛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때리는 줄 알았으면 맞아서 아픈 척이라도 해줬을 텐데, 죽방을 정통으로 맞았는데 고개가 꿈쩍도 하지 않으니 꽤 당황스럽다. 비실비실 매가리가 없는 것이 아직 몸이 낫지 않았다는 증거 같아 심장이 저릿해진다.

“…누구세요.”

유약한 주먹을 날린 그의 입에서 냉랭한 질문이 흘러나왔다. 벌써 두 계절이 지났건만 서진의 시간은 여전히 오두막에서 뛰쳐나갔던 그 날에 멈춰 있었다.

질질 짜면서 찾아다닐 땐 언제고, 막상 남자를 마주하니 요동치는 분노가 이성을 지배했다. 사실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철이 자신을 영영 저버리려고 했다는 배신감과 공포감이 분노로 표출된 건지도 모른다.

잠시 멈춰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서진이 다짜고짜 허리를 숙이고 현관에 놓인 슬리퍼를 양손에 움켜쥐었다.

그리고.

“도둑이야, 도둑, 도둑…!”

한 음절 한 음절 끊을 때마다 검은색 삼선 슬리퍼로 커다란 몸을 여기저기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아, 아!”

“나가! 나가!”

난생처음 슬리퍼로 두들겨 맞는 와중에, 상처투성이가 된 맨발을 발견한 철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뭐여.”

바로 낮은 목소리가 으르렁 목을 울렸다.

“누가 이랬…….”

“나가라고.”

기어코 남자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한 서진이 쾅! 현관문을 닫아버린다. 새까만 복도에 센서 등이 환하게 켜졌다가 홀연히 어둠에 휩싸였다.

월월월, 어디 사는지 모를 개 짖는 소리가 유유히 적막을 갈랐다. 그 순간, 꽉 닫힌 문이 다시 열리는가 싶더니 가져가라는 듯 해바라기 꽃다발이 철의 발밑에 툭 던져졌다.

***

솨아, 찬물을 쏟아내던 수도꼭지를 끽 잠갔다. 투명한 물이 날카로운 턱을 타고 뚝뚝 흘러내린다. 욕실 거울을 쳐다보던 서진이 쯧, 혀를 굴렸다.

밤새도록 처우느라 시뻘겋게 짓무른 눈이 가관이다. 대체 왜 울었나 싶기도 했지만, 대충 배신감과 안도감 그 중간 어디쯤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나쁜 놈.

서진은 하룻밤 사이에 나쁜 새끼에서 나쁜 놈으로 바뀔 만큼 분노가 옅어진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구멍이 숭숭 뚫린 바구니에 목욕용품을 챙겨 담았다.

누군가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한 그루의 고추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하지만 서진은 나무를 심는 대신 이 한 몸 사우나에 바칠 것이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사우나를 한 번도 가지 못해 온몸이 찌뿌둥했다. 수술한 지도 벌써 수개월이 지났고, 이젠 완치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는 이참에 제대로 씻기로 마음을 먹었다.

육중한 현관문을 밀고 바깥으로 나온 순간, 뜨거운 여름 태양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점점 나이를 먹는 것도 서러운데 두 계절이 숭덩 잘려 나갔다니 더 억울해진다.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기던 그는 ‘24시 크리스탈 옥 참숯 불가마’라는 재료가 다소 장황하게 나열된 간판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대인 한 명이요.”

카운터 아주머니에게 현금 만 원짜리를 내밀고, 거스름돈과 로커 키를 받았다. 라커룸에서 옷을 훌러덩 벗어 던진 다음 곧바로 남탕 문을 잡아당겼다.

백수가 좋긴 좋구나.

평일 낮이라 그런지 텅 빈 목욕탕이 그를 맞이했다. 후미진 구석에서 샤워기를 틀어놓고 대충 샴푸를 하다가 트리트먼트를 처덕처덕 처바른 채 보디워시를 손바닥에 짜냈다.

씻는 동안 어느새 사람이 하나둘 차기 시작했는지 바로 옆자리에 웬 아저씨가 자리를 잡는다. 아직도 휑하게 비어 있는 공간을 생각하면 다분히 불편한 위치 선정이었다.

원래 소변 볼 때도 바로 옆으로는 안 오는 법인데.

“저기 총각, 그건 뭐예요?”

옆자리 남성이 대뜸 말을 건넸다.

“예? …보디워시요.”

허벅다리를 문지르던 서진이 어색하게 답했다. “어어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인 남성은 대단한 신문물이라도 본다는 양 서진의 몸을 훑어보았다. 목마른 사람처럼 혀로 입술을 축이기도 하면서.

욕탕 열기만큼 축축하고 습한 시선에 몸 둘 바를 모르게 된 서진이 대충 속도를 높여 샤워기로 거품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물줄기를 타고 비눗물이 흘러내리며 뽀얀 살결이 드러난다.

동시에 옆쪽에서 사각형 비누가 미끄러지듯 그의 발아래로 던져졌다.

“저기 총각.”

불현듯 습기를 머금은 시선보다 더 축축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비누 좀 주워줄래요…?”

누가 봐도 고의로 던진 게 확실했기에 “아저씨가 주우…”라고 입을 떼려는 찰나,

“개이새끼가.”

바로 어디선가 갑자기 날아온 발길질에 채인 남성이 “억” 소리를 내며 미끄러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씨벌 변태 새끼야.”

대체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갑작스레 등장한 철은 허리에 수건 한 장만 두른 채, 바닥에 고꾸라진 남성에게 발길질을 쏟아부었다. 이미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눈동자에 한 줄기의 이성조차 비치지 않는다.

억! 소리를 끝으로 목구멍이 꽉 막힌 남성은 그저 사지를 웅크린 채 볼품없이 구부러들었다.

“철수야!!”

이러다 일내겠다 싶은 서진이 철에게 달려들어 말리고 나서야, 목욕탕 나체 폭행 사건은 종국을 맞이할 수 있었다. 결국 어수선한 소란을 듣고 달려온 직원에 의해 참숯 불가마에 발가락도 넣어보지 못한 채 쫓겨나고 말았지만.

커다란 남자와 함께 대로변으로 나온 서진의 시선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남자를 향했다. 후우, 할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키고 뒤돌아서 걸음을 옮기다가 참다못해 목소리를 키웠다.

“회사 팔더니 다시 내 스토커로 전업했냐?”

“기여.”

자연스럽게 자신을 따라오는 철의 당당한 태도에, 말문이 막힌 서진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그리고 너 뭐야. 너 뭐, 깡패야? 왜 사람을… 왜 모르는 사람을 때려?”

말하던 도중 어제 그에게 슬리퍼를 휘두른 전적이 떠올라 모르는 사람이라고 사족을 붙였다. 그 말에 꽉 다물린 남자의 턱 근육이 툭 불거진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색이 짙은 동공이 더 까맣게 가라앉는 착각까지 들었다. 서진이 말리지 않았다면 그 새끼 눈깔을 뽑아서 당구를 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아. 김철수 씨는 아무나 막 후드려 패도 될 만큼 돈이 남아돌았죠?”

서진 역시 남자에게 분이 풀리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순간 머릿속에 유언장이 스쳐 지나가며 잔뜩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다시 만난 후로는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존댓말 하며 거리 두는 버릇이 생긴 탓이다.

“그렇게 돈이 남으면 같이 좀 씁시다. 유산 같은 거 남기지 말고, 멀쩡하게 숨 쉬고 있을 때 싹 다 써버리자고요.”

서진이 ‘유산’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자, 의아하게 여긴 남자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차 어디 세웠어요?”

무시하고 그의 손에 들린 차 키를 뺏어 든 서진이 키를 빙글빙글 돌리며 묻는다.

“내가 운전할께.”

낯빛을 굳힌 철이 다시 키를 가져가더니 주차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사고로 예전 SUV는 폐차했는지 대신 처음 보는 세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쭐레쭐레 그의 뒤를 따라 조수석에 올라탄 서진이 삼선 슬리퍼를 벗어 던지더니 시트에 발을 올리고 앉는다. 일종의 꼬장에 가까운 행동이었지만, 옆에서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을 보던 철은 꾹 참는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여기서 유턴. 어, 저기.”

운전하는 철에게 길을 알려주던 서진이 목적지를 가리켰다. 가리킨 곳은 압구정 로데오에 위치한 ‘파션쓰’라는 백화점이었다.

화려한 건물 외관을 보던 철의 얼굴에 한 줄기 당혹감이 비친다. 지난겨울에 인수한 JS유통 계열사 백화점인데, 아마 서진은 아직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왜요.”

그의 반응에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 올린 서진이 운전석 쪽을 향해 상체를 내밀고 물었다.

“쫄았어요?”

갑자기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 긴장한 철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거렸다.

“…허벌라게 이뻐서요.”

남자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솔직했다. 서진은 신기할 만큼 귓불이 금세 달아오른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가 바로 얼굴을 굳히고 빨리 주차나 하라며 재촉해댔다. 이곳에서 제 손으로 주차하는 게 처음인 남자는 주차장을 찾아 약간 헤매기도 했다.

잠시 후, 차에서 내린 서진은 성큼성큼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김철수 씨 돈, 남김없이 다 써줄게요.”

다시는 유언장에 유산인지 뭔지 그딴 소리 못 쓰게. 뒷말은 목구멍 뒤로 삼켰다.

묵묵히 그의 뒤를 따르던 철의 얼굴이 조금 황당한 빛으로 물들었다. 세상 물정에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아마 제가 JS유통을 얼마에 매각했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으니.

이미 팔아넘긴 백화점인데 여기서 어떻게 그 돈을 다 쓰게 한다는 건지 약간 궁금하기도 했다. 백화점을 통째로 사줄 수도 있는데.

서진은 망설임 없이 진짜 명품관이라 불리는 EAST 관으로 슬리퍼를 끌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 사장을 발견한 직원들이 여기저기서 수런거리더니 어디선가 매니저가 바람처럼 달려 나온다.

“사장…….”

그가 입을 떼기도 전에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댄 철이 가까이 오라는 듯, 손을 까딱거렸다.

“나 말고 저 사람 맡으세요. 쟈가 오늘 여기 털어불란께.”

낮게 속삭이는 말에 매니저가 눈빛을 환하게 빛냈다. 탕진할 곳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서진에게 부리나케 달려간 그가 연신 허리를 굽혀가며 인사를 건넨다.

VVIP 룸인지 VVVIP 룸인지, 아무튼 V가 허벌라게 많이 들어간 곳으로 모시겠다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서진은 1층 매장으로 향했다.

어울리는 물건을 셀렉 해서 볼 생각이 아니라 진짜로 다 털어버릴 생각이었으니까. 첫 번째 타깃은 명품 중 명품으로 유명한 주황색 매장이다.

“여기, 괜찮지?”

괜한 질문에 철이 눈썹을 위로 들썩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미 작정을 끝낸 서진은 한쪽 손에 목욕 바구니를 들고, 삼선 슬리퍼를 질질 끌며 명품관으로 들어섰다.

참숯 불가마에서 방금 나온 듯한 옷차림이 등장하자 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레 뜨인다. 아랑곳하지 않고 물건이 진열된 벽면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손가락으로 쓸어내린 그가 입을 열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네…?”

“저기 쇼윈도에 있는 것들도 싹 다 벗겨주시고요.”

“…….”

표정 관리에 실패한 직원들 사이에서 어수선한 눈빛이 오고 갔다. 그러나 곧바로 서진의 뒤에 서 있는 철을 발견하고는 태세를 바꿔 이마가 무릎에 닿을 듯이 고개를 숙이더니 부리나케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시간이 갈수록 대리석 바닥 위에 주황색 쇼핑백과 상자들이 하나둘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쌓여갔다.

“쇼윈도에 있는 것도 다 벗겨달라니까요.”

유유히 소파에 앉아 음료를 마시던 서진이 아직도 옷을 두르고 있는 마네킹을 가리켰다.

“네 고객님. 저쪽은 전부 여성 라인인데, 혹시 여자 친구분께 선물을 하시는 걸까요?”

직원이 손짓하는 곳에 치마를 입은 마네킹이 띄엄띄엄 늘어서 있다. 질문을 들은 철이 눈살을 찌푸리는 동시에 서진이 퉁명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입을 건데요.”

사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오기로 한 대답이었겠지만, 머릿속으로 서진이 착용한 모습을 떠올린 철의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쿵쿵 뛰어대기 시작했다. 그저 상상으로 살짝 엿봤을 뿐인데 순식간에 남자의 얼굴이 목덜미까지 발갛게 달아올랐다.

생각지도 못한 진보적인 대답에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직원이 다시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여자 친구에게 선물할 거냐고 물었던 직원이 옆을 지나치는 순간, 철이 나직하게 한마디 던졌다.

“패션 브랜드에서 일하는 사람이 유니섹스도 모릅니까.”

“유니섹…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거꾸로 봐도 뒤집어 봐도 유니섹스라고는 볼 수 없는 여성복 디자인이었지만, 직원은 마치 트렌드에 굉장히 뒤처진 사람이라도 된 양 고개를 푹 숙였다. 원래 명품관은 자본주의와 일맥상통하니 돈을 많이 주는 사람 말이 맞는 거였다.

한참 후 매장에서 빠져나왔을 땐, 양손 가득 주황색 쇼핑백과 박스를 든 직원들이 줄지어 따르고 있었다.

목욕 바구니를 손에 든 채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던 서진은 명품 중에서도 하이엔드 브랜드만 쏙쏙 골라 같은 짓을 반복했다.

옷, 가방, 신발 같은 잡화에서 보석 매장까지 들어가 눈에 보이는 대로 쓸어 담았다.

‘이 정도면 후회되겠지.’

하지만 노란 바탕에 검은 말이 뛰노는 로고가 상징인 고급 스포츠카 가격을 웃도는 시계를 결제하는 순간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철을 보자 서진의 팔뚝에 잔잔한 소름이 일었다.

종국엔 차에 짐을 다 실을 수 없어 집으로 가져다 달라고 하고 백화점 매니저에게 집 주소를 남겨야 했다. 자신의 원룸은 발 디딜 틈도 없을 걸 알았기에 대신 철의 집 주소를 알려주는 것으로 마무리한 다음, 다시 차에 오르니 사위가 어둑어둑해졌다.

고된 쇼핑이 피곤했는지 금세 곯아떨어진 서진의 고개가 사방으로 춤을 춘다.

그 모습을 가만히 감상하던 철은 차를 세워두고 실없이 웃었다. 지갑이 털린 것쯤은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머리를 얹혀놓은 곳이 따끈따끈했다. 천국에 있는 것처럼 포근함에 휩싸인 서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따뜻하고, 안락하고… 편안하고…… 왠지 태초부터 이 상태로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완벽하다.

은은한 숲 내음이 후각을 자극했다. 백화점에 있던 고가 브랜드 향수가 영 싸구려처럼 느껴질 만큼, 그 어디서도 맡을 수 없는 유일한 향. 어떤 단어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황홀한 향기였다.

사랑해.

사랑해 홍서진.

사랑해 사랑해…… 서진아 사랑해…….

사랑을 고백하는 목소리엔 물기가 묻어 있었다. 단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것처럼,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되풀이됐다.

새까만 밤부터 여명이 밝아올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계속….

창가 사이로 들어온 어스름한 새벽빛이 새하얀 침대를 비추었다. 희미한 빛에 게슴츠레 눈을 뜬 서진이 눈꺼풀을 끔뻑거린다.

남자의 단단한 팔을 베고 누워 있던 서진의 눈앞에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마주 보고 누운 철은 울고 있었다. 투명한 눈물이 얼굴을 그득하게 적셨다.

얼마나 오랫동안 울었는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시트가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그야말로 허벌라게 울고 있었다.

“……왜 울어?”

잔뜩 잠긴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아주 대성통곡을 했네….”

꿈결인지 현실인지 아직 구분하지 못하는 서진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리더니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돌아브리는 줄 알았어.”

서진의 손에 제 커다란 손을 겹쳐 잡은 철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치는 줄 알았어….”

여전히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이 미리 남겨진 궤적을 따라 흘러내린다.

“니 잃어버릴까 봐.”

서진이 병상에 누워 있는 매분 매초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발악해야 했다. 단언컨대, 세상에 이보다 괴로운 감정은 없었다. 어떤 단어로도 형용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그가 깨어나는 것만 바랐다.

남자의 얼굴을 감싼 고운 손이 금세 축축해졌다.

“물건이냐.”

절절한 고백에 서진은 짧게 답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덧붙여 묻는다.

“철아… 내가 네 돈 다 썼으니까… 너 이제 거지지?”

픽, 코웃음 친 철이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나 원래 그지여.”

실제로 그랬다. 서진이 없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니까.

“…남길 유산 같은 것도 이제 없는 거지?”

뜬금없는 질문에 남자의 손이 허공에 멈춰 섰다.

“그럼 다시 돈 벌어야겠네, 그치….”

이어서 자본주의에 찌든 대사를 내뱉은 서진이 눈꺼풀을 꾹 감았다. 머지않아 속눈썹 사이로 보석같이 빛나는 눈물이 비치더니 매끄러운 콧대를 타고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흘러나온 말은, 철이 평생 살면서 꿈에서라도 들을 거라고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나 버리지 마, 철아….”

다시는 못 만난다고 해도. 영원히 떨어져 있어도 되니까. 네가 없는 세상에 남겨두지 마.

“나 버리지 마, 제발….”

댐이 무너져내리듯 눈물을 터뜨린 서진은 끄윽, 끅, 흐느끼며 몇 번이고 버리지 말아 달라며 그를 끌어안고 애원했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남자는 전원이 나간 것처럼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어떻게…….

다 알고 있었다. 죽으려고 했다는 것도. 그에게 유산을 남기려고 했다는 것도.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서진의 머리통에 눈에 입술에 입을 맞추고 눈물 콧물을 핥고, 볼을 비비다가 다시 정수리에 쪽, 쪽, 입을 맞췄다.

“……누가 내 대가리 잘라브러도 다시 붙여서 니보다 오래 살께.”

상당히 확고한 남자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꼭 끌어안은 채 잠에 빠져들었다. 어스름하게 비추는 푸른빛 새벽녘 속에서.

색이 옅은 커튼을 비집고 아침 햇살이 드리워졌지만, 색색 서로의 숨결을 자장가 삼아 철은 단꿈을 꾸었다.

아주, 아주 먼 훗날.

주름진 손을 맞잡고, 한날한시에 함께 눈을 감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꿈을.

그리고 창문을 넘어온 태양 빛에 방 안이 환하게 물들 무렵.

남자가 단꿈에서 깨어났을 때.

Deer. 철이

“…….”

따뜻한 온기 대신 텅 비어 있는 옆자리를 채운 것은 ‘사슴 철이’라는 글자로 시작하는, 오래된 자백이 담긴 쪽지 한 장이었다.

여름

맴매앰맴―

나뭇가지에 앉은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후덥지근한 더위를 피해 나무 밑에 쪼그리고 앉은 서진은 아이스크림을 까먹으며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일단 택시를 타고 마을로 들어오긴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 시골도 강산이 바뀌는 거라 했나.

이건 뭐, 눈만 돌리면 논이랑 밭밖에 안 보이는 것이 도대체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 되잖아.

주르륵.

“아 씹…!”

별안간 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고 화드득 몸을 일으켰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기억난 탓이다.

나무 밑에 있을 때 위에서 투명한 물이 후드득 떨어지면 그건… 매미 오줌이라는 걸. 6년 전 그 애가 알려줬으니까.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털어내던 서진은 흙바닥에 처박힌 아이스크림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시내에서 사 온 마지막 식량이었는데…….

반듯한 미간을 왈칵 구긴 그가 하는 수 없이 뙤약볕 아래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위가 논밭으로 둘러싸인 구수한 시골 풍경이 오랜만에 돌아온 그를 반겼다.

도망 같은 건 아니었다. 도망칠 거였으면 애초에 이곳으로 오지도 않았고, 평소에 할아버지를 찾아뵙고 싶기도 해서 온 것이다.

힘없이 흙길 위를 걷고 있을 때 멀리서 덜거덕거리는 경운기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뭐여. 저, 저저…….”

운전석에 앉은 영옥이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치켜들자, 경운기에 앉아 있던 순자와 정숙이 무슨 일이냐는 듯 동시에 손가락 끝을 바라보았다.

“……저, 저거 염병 총각 아니여…?”

“오메… 맞는 거 같은디…?”

터덜터덜 신발을 끌며 걸어가는 반가운 인영이 눈에 들어온다.

“왐마 염병, 염병 총가악!”

멀리서 울리는 반가운 목소리에 서진이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영옥 아주머니!”

뙤약볕에 벌겋게 익은 얼굴에 태양만큼 환한 화색이 돌았다. 곧바로 허겁지겁 경운기를 향해 달려가더니, 다시 만난 세 사람과 부둥켜안고 강강술래 하듯 방방 뛰어댄다.

“아따 이게 누구여. 허벌라게 이뻐져 브렀네.”

“아주 기냥 한 번을 안 찾아오구. 우리가 을매나 기둘렸는디.”

여름날, 밭일 새참 메이트들이 한자리에 모여 못다 한 인사를 나눴다.

“죄송해요… 근데, 우리 할아버지 어딨는지 아세요?”

“…응? 그 영감태기는 염병 총각 기둘리다가 꼴까닥 뒤져브렀제.”

“네…?”

황당한 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서진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깔깔거리며 능청을 떠는 아주머니들은 대수롭지 않게 경운기에 한 자리를 내어주었다.

“하이고, 표정 보소. 타. 델따 줄란께.”

시끄러운 경운기가 익숙한 초가집 근처에서 멈춰 섰다. 경운기에서 내린 서진이 어쩐지 못마땅한 얼굴로 눈썹을 찌푸렸다.

어째 낡은 부분을 보수하거나 새로 지을 생각도 없었는지 옛날보다 더 후져진 초가집이 버려진 폐가처럼 느껴지기까지 했으니.

일단 영옥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다음 마당으로 들어선 순간, 왈칵 차오르는 눈물에 입을 틀어막았다.

“아이구 이게 누구여. 아가…!”

툇마루에 앉아 콩나물 대가리를 까던 할아버지가 서진을 발견하고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그릇이 댕그랑 소리를 내며 그대로 흙바닥에 엎어졌다.

“…할아버지이…….”

“아이구 서진아.”

콩나물이 엎어진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순식간에 달려 나온 할아버지는, 서진의 손을 양손으로 꼭 붙들며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못 찾아봬서 죄송하다는 안부 전화를 할 때마다 쓸데없이 오지 말라고 야단치던 거짓말쟁이는 예기치 못한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나이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주름진 손과 전보다 더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가 훌쩍 흘러버린 지난 세월을 일깨워준다.

“니 좋은 대로. 니 쪼대로 살어. 알긋냐잉.”

불현듯, 할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가 머리를 스쳤다.

쪼대로 살기는커녕 남 눈치 보느라 보고 싶은 사람 한번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흘러버린 세월이 야속하다.

인제 보니 정말 돌아가신 다음 장례식에나 찾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 왜 이렇게 늙었어요. 진짜 영감탱이 다 됐네요….”

그해 여름보다 등이 굽은 남자를 끌어안은 서진이 꽉 막힌 콧물을 크응! 삼키고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 죽으면 꼬추밭 누구 건지 알죠…?”

바로 몸을 떼어내더니 낡아빠진 초가집을 가리킨다.

“그리고 집이 이게 뭐예요. 그냥 부수고 다시 짓는 게 더 낫… 악!”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정강이에 매서운 발길질이 떨어졌다. 별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한 건지 아직 힘만 정정해 보인다.

“옘병. 느자구 없기는.”

쯧쯧, 혀를 차던 할아버지는 다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몸을 돌리더니 떨어진 콩나물을 줍기 시작했다.

***

“철이는 으짜고.”

“몰라요. 어디선가 잘 살겠죠 뭐.”

“지랄허네.”

마루에 작은 밥상을 펴놓고 함께 밥을 먹던 할아버지가 웬일인지 서진에게 철의 안부를 묻는다.

시금치 무침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서진이 멍하니 생각에 잠기더니 말문을 열었다.

“할아버지. 저 쪼대로 못 살았어요. 남 눈치 보느라요.”

밥 한 숟가락을 크게 떠서 입에 넣은 다음 웅얼웅얼 말을 잇는다.

“근데 인제 제 쪼대로 살려고요.”

씩 미소를 머금은 할아버지가 드물게 칭찬을 입에 담았다.

“기여. 잘 생각했다.”

할아버지와 식사가 끝나고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서진은 오랜만에 동네 구경도 할 겸, 소화도 시킬 겸 홀로 산책에 나섰다.

아직 까만 밤이 아님에도 풀벌레 우는 소리가 가득한 시골길에는 이전에는 못 보던 가로등까지 띄엄띄엄 자리 잡았다.

서진은 평화로운 길을 걸으며 찌르르 찌르르, 울리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았다.

이게 방울벌레 소리라 했나… 쓰르라미 소리라 했나…. 예전에 그 애가 알려줬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대나무 소쿠리를 머리에 이고 엉덩이를 실룩이며 걸어가는 영옥을 발견한 서진이 그녀에게 다가가 살갑게 말을 걸었다.

두 사람은 서로 길동무가 되어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지난 시간의 회포를 풀기 시작했다.

“아 맞다. 재숙이는 잘 지내요?”

“하이고오… 아주 연애한다고 옘병천병 난리도 아니여. 내일 재숙이도 한번 봐야. 갸가 염병 오빠 온 거 알믄 난리 날 건디.”

“진짜요?”

돌고래 영화를 보며 눈물 흘리던 어린 소녀를 떠올린 서진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재숙이가 열여덟 살이었나. 그러면 지금 스물…….

간단한 산수를 하느라 손가락을 꼽아보던 서진의 시선이 처음 보는 풀밭에 꽂혔다.

무릎 정도까지 오는 풀들이 빼곡히 수 놓인 밭은 그 끝이 안 보일 만큼 규모가 엄청나다.

“와 엄청 넓네. 저건 무슨 풀이에요?”

“차암내… 보믄 몰라?”

별걸 다 묻는다는 듯 코웃음을 내뱉은 영옥이 말을 이었다.

“해바라기. 난중에 한두 달 있으믄 싹 피어 불랑께. 이뻐.”

생각지 못한 대답에 그 자리에 뚝 멈춰 선 서진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물에 잠겨버린 그 장소 말고, 여기선 분명 해바라기밭을 본 적이 없었는데.

“…해바라기를 왜 심어요…?”

의문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럴 리는 없지만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조금씩 뒤엉키기 시작했다.

“낸들 알어. 철이 갸가 해바라기 심은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주 기냥 병이여, 병. 해바라기 병.”

질린다는 듯 영옥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철이 이걸 심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어 다시 영옥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철이 해바라기를 심었다고…… 해바라기를…….

어떻게?

왜.

“…철이는 계속 서울에 있었는데… 어떻게 여기서 해바라기를 심어요?”

어떻게. 왜. 어째서…….

“아 왜 못 심어. 봄마다 와서 심어브렀제. 갸가 서울 가서 대기업 사장인지 뭔지 해싸도 농부 피는 못 속인당께.”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었다. 자신은 그에게 하와이에서 찍은 신혼여행 사진까지 보냈었으니까.

아무리 세상 바보 천치라고 해도 그럴 수는 없는 거였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런데도 혹시…… 하는 기대가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럼 작년에도요? …재작년에도?”

거친 흙밭을 여린 새싹이 뚫고 나오듯, 흘러넘치는 감정이 심장을 뚫고 나온다.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괜한 물음을 건네는 눈앞이 흐릿해졌다.

“기여. 여 해바라기 심기 시작한 게 한 5년도 넘었…….”

어느 순간부터 옆에 따라오지 않는 남자를 알아채고 뒤돌아본 영옥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뭐여. 염병 총각… 또…?”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황당한 상황에 헛웃음을 터뜨린 그녀가 “나 환장하겄네. 또 처울어 또.” 하고 중얼거리더니 손을 위로 흔들며 인사를 던졌다.

“그라믄 나는 들갈란께. 열씸히 울어싸.”

도망치듯 멀어지는 영옥의 뒷모습을 확인한 서진은 그 자리에 무너지듯 앉아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새로 생긴 전봇대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서. 해가 지고, 어둠이 까맣게 내릴 때까지.

하염없이 울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흘려보낸 지난 세월이 아쉬워서.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 아프게 한 게 더 가슴 아파서. 바보 천치일 정도의 순애가 가슴에 와닿아서.

산들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초록색 풀들이, 사랑을 어떻게 하는 건지 제게 가르쳐주어서.

꺼이꺼이 울음을 토하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좋은 사람하고 같이 있기도 짧은 게 인생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뜻을 알기에 서진은 어렸다. 서툴고, 어리석고, 누구보다 순수했기에 아름다운 시절을 눈물로 흘려보내야 했다.

더 누를 수 없는 감정이 마침내 둑을 뚫고 나온다. 바깥으로 흘러넘친 감정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크기가 컸다. 더는 제어할 수도, 막을 방법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서진은 그 자리에서 목이 쉬도록 오열하며 흐느꼈다.

어느새 옆에 익숙한 남자가 와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흐으… 언제…부…터.”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옆에 앉아 있던 철을 겨우 발견한 서진이 황급하게 콧물부터 닦기 시작했다.

“서진아. 백설 공주님. 왜 울어.”

똑같이 흙바닥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은 남자가 조심스럽게 서진의 대가리를 감싸더니 자신의 어깨에 기댔다.

새끼 양처럼 덜덜 떨리는 목을 겨우 진정시킨 서진은 이상한 변명을 내밀었다.

“……이게 쓰르라미 소린지… 흐윽, 방울벌레 소린지 몰라…서….”

그르르 그르르, 철이 풀벌레 소리에 잠시 귀 기울인다.

“이건 여치 소리여.”

쓸데없이 정확한 답을 내놓는 남자를 보며 할 말이 없어진 서진은 그와 똑같이 여치 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르르 그르르르륵.

아무도 없는 평온한 시골 풍경 속에 철과 함께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신기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아진다.

서진은 다시 차분히 숨을 추스른 다음 입을 열었다.

“……쪽지 봤어?”

“봤제. 디어 철이.”

철의 손아귀에 쥐여주고 떠난 쪽지에는 그간 모든 행적의 자백이 담겨 있었다.

그의 어머니한테 돈을 받고 집안의 빚을 갚은 것. 그 대가로 다시는 안 만나겠다고 약속했던 것. 일부러 확실히 떼어내고 싶어서 결혼했다고 거짓말했다는 사실까지.

어깨에 기댄 머리를 살며시 들어 올린 서진이 남자와 눈을 맞춘다.

“…안 미워?”

어차피 답을 알고 하는 질문이었다.

“오히려 더 좋아.”

이쯤 하면 되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아직 꽃망울도 보이지 않는 해바라기 풀밭을 앞에 두고, 그르르 우는 여치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눈빛을 교환하던 두 사람은 부드럽게 입술을 포갰다.

아주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다가 자연스럽게 손깍지를 꽉 낀다. 환한 가로등 아래, 울퉁불퉁한 흙바닥에 앉은 채로. 정말 사랑에 빠진 평범한 연인처럼.

이제 누가 본다고 해도 상관없다. 후진 것들 눈치 보지 말고 니 쪼대로 살라는 할아버지 말을 따르기로 했으니.

서진의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던 철이 커다란 손으로 그의 뒤통수를 감쌌다. 잠깐 떨어진 틈을 타 숨을 들이쉬자마자 다시 입술을 부딪쳐온 철은 벌어진 서진의 입술 틈새로 혀를 밀어 넣고 입 안을 부드럽게 탐닉했다.

눈을 살짝 떠보면 세상에 둘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눈꺼풀을 감고 키스에 열중하는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하고 완벽한 밤이다. 아주 빙글빙글 돌고 돌아, 인제야 얻게 된 행복이었다.

한참 그대로 입을 맞추고 있으려니 서진의 반소매 사이로 초여름 밤바람이 쌀쌀하게 팔뚝을 스쳤다. 그가 추워한다는 걸 기민하게 알아차린 철이 바로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양손을 서진의 겨드랑이에 끼고 일으켜 세웠다.

곧바로 두 사람은 철이 가져온 차로 향했다. 어디로 간다는 말 없이 출발한 차가 익숙한 길을 내달린다. 오랜만에 달리는 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던 서진의 눈에 낯익은 한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

커다란 돌담에 둘러싸인 대궐 같은 한옥은 6년 전 그대로였다. 차를 세우고 먼저 차에서 내린 철이 대문을 열자마자, 들뜬 얼굴로 안으로 뛰어 들어간 서진은 넓은 정원을 둘러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이 집은 어떻게 그대로야.”

그는 정원에 알록달록하게 핀 이름 모를 꽃들을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화단 근처에 유유히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들이 동화 같은 낭만을 더했다.

어릴 적 잠깐 놀러 갔던 시골에서 부모님께 반딧불이를 잡아달라고 부탁해 서울에 데려간 적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반딧불이의 자그마한 불빛이 스러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 반딧불이는 공기가 좋은 곳에서만 살 수 있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으니 억지로 가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제가 그곳에 머물면 되니까. 이래서 다들 시골에 사는 건가 보다.

“…예쁘다. 이건 이름이 뭐야?”

정원을 구경하던 서진이 뒤에 서 있던 남자를 향해 물었다. 화려한 색으로 물든 이름 모를 꽃들이 핀 화단 밑에, 수수하게 피어난 작은 꽃이 가장 예뻐 보였다.

“바람꽃.”

씩 미소 지으며 대답한 철의 낯이 별안간 조심스러워졌다.

“…서진아.”

“응?”

하얀색 바람꽃을 구경하던 서진이 고개를 돌렸다.

“니한테 보여줄 사람이…….”

“범철.”

그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끼어든 목소리가 정원을 갈랐다. 가운데 커다란 한옥 채에서 걸어 나오는 여자는 서진도 아는 얼굴이었다.

“니 시방 이딴 거 보여줄라고 엄마 여까지 불렀냐잉.”

기가 찬다는 듯 짧은 숨을 탁 내뱉은 어머니는, 화단 앞에 쪼그리고 앉은 서진을 한 번 쳐다보더니 못 볼 꼴을 보았다는 것처럼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이런 씹.

당황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서진이 몸을 펄떡 일으키더니 어디로 숨어야 할지,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색하기 시작했다.

물론 앞으로 남 눈치 안 보고 살기로 마음먹긴 했지만, 이렇게 바로 어머니를 맞닥뜨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말조심.”

허둥지둥 도망가려는 서진을 가볍게 붙잡은 철이 분노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딴 취급당할 사람 아니여.”

“뭐?”

어머니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야는 나 싫다고 때리고 밀쳐내는디, 내가 니 없으믄 뒤져븐다고 매달리는 입장이라고.”

그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 서진이 더없이 황당한 얼굴로 철을 쳐다본다.

이 자식이 미쳤나… 엄마 앞에서.

아예 말문이 꽉 막혀버린 듯 두 눈을 끔뻑거리던 여자의 시선이 이윽고 서진을 향했다.

“허! 서진 씨…?”

“난 이 사람이 내 목숨보다 소중한께.”

하지만 서진 대신 끼어든 남자는 악마의 주둥아리를 멈출 줄 몰랐다.

“다시는 그딴 식으로 따로 불러서 건들지 마소.”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저 주둥이를 꿰매버리고 싶은 건 서진이었으니. 하는 수없이 팔 한쪽을 등 뒤로 숨기고 그의 탄탄한 등짝을 주먹으로 툭툭 치기 시작한다.

“당신 아들 뒤지는 꼴 보기 싫으믄.”

그러거나 말거나 후레자식 폭주 기관차는 마지막 대사로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어, 어머니.”

곧 거품 물고 눈알이 뒤집어지기 직전인 여자의 모습을 보던 서진이 냅다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신 자신이라도 무릎을 꿇지 않으면 진짜 쓰러질 것 같아서.

“뭐여, 하지 말어.”

그마저도 바로 다시 일으켜 세우고 몸을 낮춰 무릎까지 툭툭 털어주는 남자 때문에 더 복장 터지는 상황만 연출됐지만.

결국 서진은 그냥 서 있는 상태로 말문을 열었다.

“어머니… 아드님 저 주세요.”

“서진 씨!”

정신을 번쩍 차린 여자가 눈을 부릅뜬다.

“……결혼하겠다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같이 있어 볼게요. 딱 한 번만 만나볼게요. 서로 진짜, 진짜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그냥 연애 한 번만 해보려고 하는데… 허락해 주시면 안 될까요?”

사실 허락 안 해줘도 할 거였지만.

“허… 난 서진 씨 요로코롬 영악한 사람인 줄 몰랐는디… 보기보다 더 속이 시꺼머네.”

그 말에 바로 악마의 주둥이를 달싹이려는 철을 가로막은 서진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약속 못 지켜서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로 지키려고 했는데요…. 진짜 많이 노력했는데, 그런데도 안 됐어요. 아무래도 그 약속이 실수였던 것 같습니다. 근데 저도 스물한 살이었거든요, 그때.”

고개를 푹 숙이고 진심으로 사과를 건넨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렸습니다. 돈은 이자까지 쳐서 다 갚을게요.”

더 할 말이 없어진 여자가 차분하게 숨을 가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그라믄 그 연애를 뭐 을매나 하겠단 거여.”

“영원…….”

또 한 번 남자의 말을 끊은 서진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사람 일이라는 게 다 한 치 앞도 모르고 그런 거니까요. 얼마 못 갈 수도 있는 거고… 그러다 잘 맞으면, 뭐… 검은 머리가 파프리카 될 때까지 만날 수도 있는 거고….”

상식을 벗어난 어휘력에 기함한 어머니가 빠듯하게 혈압이 오른 목덜미를 잡았다.

“뭐… 뭐, 검은 머리 파프리… 오메, 기막힌 거. 오메, 속 터져브리는 거!”

어머니는 그대로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저벅저벅 걸어 넓은 정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비장의 카드를 꺼낼 시간이었으니.

“……기여. 인자 너거들 알아서 해라잉. 난 너거들 다시 볼 생각 없응께.”

“들가소.”

마지막 오기로 남긴 말에 대수롭지 않게 인사를 건넨 철은 그대로 서진을 데리고 집 안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던 여자의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샜다. 아들내미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었나 보다.

이래서 제 주변 사람들은 다 딸이 최고라고 하는 거였다. 쯧쯧, 혀를 차던 그녀는 결국 성난 걸음으로 대문 밖을 나섰다.

“…이래도 돼?”

“괘안애.”

화산처럼 인성이 폭발하던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 부드러운 목소리로 서진을 달래주었다. 넓은 대청마루를 지나 오랜만에 들어선 집 안 역시 그 시간에 멈춰 있는 듯했다.

왠지 옛날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에 가슴이 야트막하게 설렜다. 밭에서의 첫 만남을 떠올리면 여전히 눈앞이 아찔하긴 했지만.

“여기도 다 그대로네.”

고개를 돌리니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양팔을 벌려 철의 목을 끌어안은 서진에 맞춰 그가 상체를 낮춰주었다. 쪽, 쪼옥 도톰한 입술이 맞닿는다.

서진의 허리에 살포시 손을 두른 철은 정신없이 입을 맞추며 가까운 소파로 직행했다. 가벼운 몸을 받친 다음 쿠션에 조심스럽게 눕히고, 여기저기 키스를 퍼붓다가 뺨까지 비비적거렸다.

쪽, 쪽, 귓바퀴에 입술이 닿는 순간 파르르 몸을 떨던 서진이 남자의 짧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 진짜 첫 연애 하겠다.”

청천벽력 같은 말에 무아지경으로 입을 맞추던 철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전에도 했잖애.”

“영미가 한 달 미만은 연애 아니라던데.”

“왜.”

그래도 서진과 연애했던 짧은 추억으로 지옥 같은 시간을 버텼는데. 영미란 여자가 그 소중한 추억을 연애가 아닌 거로 치부해 버렸다.

충격이 넘실거리는 철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서진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럼 한 거로 치자. 그럼… 넌 진짜 첫사랑 누구야?”

사실 진짜 목적은 이거다. 분명 자신을 열아홉에 처음 봤다고 했으니까, 그전에도 한 명 정돈 있었을 텐데.

“몰라서 묻냐.”

황당한 웃음을 뱉은 남자가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넘겨주었다.

“난 있는데. 국민학교 때 담임선생님.”

호기심을 참지 못한 서진은 대어를 낚기 위해 열심히 낚싯대를 휘둘렀다.

“그 선생님이 나만 엄청 예뻐했거든. 따로 불러서 몰래 과자도 주고.”

“니가 겁나게 이쁜께 그라제.”

철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 맞장구쳤다.

쬐깐한 서진이 얼마나 이뻤을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아릴 지경이다. 아마 제가 담임선생이었어도 따로 과자를 골백번은 챙겨주었을 것이다.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울 엄마한테 촌지를 받았더라고.”

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의 끝은 일그러진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뒷면이었으니.

“그래서… 넌?”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 가슴 아픈 기억까지 끄집어낸 서진이 남자를 재촉했다.

눈을 끔뻑거리며 머뭇거리던 대어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텄다.

“그렇게 치믄 나는 메텔….”

이름과 지나치게 부합하는 대답에, 서진의 입에서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이 샜다.

“……참 내…, 누가 철이 아니랄까 봐. 너도 은하철도 구구구 좋아했냐?”

“그게 뭐여.”

“은하철도 구구구. 주인공 이름이 메텔이잖아.”

“아닌디. 갸는 진짜 사람이었는디.”

“진짜 사람 이름이 메텔이라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질문에 철이 짙은 눈썹을 들썩이며 무언의 긍정 신호를 보냈다.

세상에. 별 해괴한 이름도 다 있네.

씨익, 음흉한 미소를 입에 건 서진이 손가락으로 그의 잘생긴 뺨을 톡톡 두드리더니 소름 돋을 만큼 유치한 질문을 건넸다.

“그래서 메텔이 좋아… 내가 좋아?”

“으딜.”

미간을 왈칵 구긴 남자가 서진의 손가락을 잡더니 손끝마다 쪽쪽 입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시방 앞에 있으믄 갸는 갖다 던져블지.”

충족한 대답을 들은 서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찬찬히 시선을 올려 남자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짙은 눈썹도, 높은 콧대도, 잘빠진 눈도 도톰한 입술도 모두 제 것이었다.

사랑이 뭔지, 사랑을 어떻게 하는 건지 가르쳐준 사람. 겁 많은 거북이처럼 딱딱한 등껍질 안에 숨어버린 이를 위해 심장도 폐도 꺼내놓고 모든 걸 내던진 사람.

“난 니밖에 없어.”

철은 서진의 뺨을 살살 어루만지며 행복하다는 듯 눈가를 접었다. 흔한 연인들이 하는 말도 이 남자가 하면 심연보다 깊이 있었다.

진정한 사랑은 우리의 오감 속 어딘가에 깊이 새겨진다.

오랫동안 완벽히 잊은 줄 알고 살다가도,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 우연히 잠시 스치게 된다고 해도, 깊은 감정을 쉬이 반추하게 한다.

그 감정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보석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보석을 손에 쥔 사내의 입가에 더할 나위 없이 충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야말로 꼬추밭 그 사나이의 완연한 승리다.

바깥에선 방울벌레인지, 쓰르라미인지, 여치인지 모를 풀벌레가 울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긴 여름을 알리는 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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