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창가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는 사진)
좋아해요.
그 사람을 왜 좋아하는지 또박또박 이유를 댈 수 있다면 그게 좋아하는 건가요?
계산이지.
그냥 좋아요.
마음으로 끌려요.
무. 조. 건.
노란 장판이 깔린 좁은 방구석. 의자에 두 다리를 올리고 앉아 하드를 쪽쪽 빨던 서진이 천천히 마우스 스크롤을 내렸다. 며칠 전 할아버지 댁에 드디어 인터넷 통신이 연결되었기 때문에 그는 한창 미니홈페이지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지난번에 좁은 창틀에 궁둥이를 간신히 걸치고 찍은 사진이 꽤나 마음에 든다. 거기에 어디선가 떠도는 감성 글귀를 복사, 붙여넣기만 하면 우물처럼 퍼다 나르는 글 완성.
김연희: 퍼가요~♡
우연주: 꺄아악~~~ 〉_〈 간지 좍살ㅋㅋㅋ
김영미: 네 계산 못하는 수학 0점 홍서진 씨
박유정: 퍼가요~♡
전은지: 오빠 지대 잘생겼어여ㅜㅜ
이찬희: 씹할 살아 있는 반휘원 그 자체....
얼마 전 사고를 핑계 삼아 요양이라는 명목으로 시골로 내려온 서진은 여전히 문명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회사를 그만두면서 미니홈페이지 금지령도 사라진 까닭이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히죽히죽 웃으며 사진첩 댓글을 읽던 중, 무언가를 발견한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김추단: 옵빠 셔츠 단추 두 개만 더 풀어봐염 유후
↳김봉철: 성희롱으로 신고합니다.
박새근: 꺅 〉_〈 목젖 보셈 쌔끈빠끈~!ㅋ
↳김봉철: 쌔끈빠끈 신고합니다.
조선시대 암행어사야 뭐야.
서진의 미니홈페이지 부활과 동시에 다시 나타난 해커 소녀 김봉철은 사이렌처럼 눈에 불을 켜고 부적절한 댓글(봉철 기준)을 신고하기 바빴다.
하다 하다 이제 쌔끈빠끈까지. 쌔끈은 참아도 빠끈까지는 용서할 수 없다는 건가. 덕분에 전보다 은근히 댓글 수가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은 그저 기분 탓이 아니었다.
서진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미니홈페이지를 닫자, 앞서 켜놓았던 인터넷 창에 ‘남자친구가 이상해요’라는 제목의 질문 글이 나타났다.
남자친구가 이상해요.
뽀대 작살나는 남친이랑 사귄 지 한 달 정도 됐구여.
옛날에 한 번 안 좋게 깨졌다가 다시 만났는데요.
그런데... 먼가 바꼈다고 해야 되나여? ㅠㅅㅠ
머라 말할 순 없지만 암튼 묘하게 예전이랑 달라졌어욥-_-;;
시간이 갈수록 사람이 점점 피폐해 보인달까ㅠ
무슨 힘든 일이 있는 걸까여...?
그리구 사실 이것 때문에 질문 글 올리는 건데여.
예전엔 잠자리를 하루 종일 해도 계속 덤벼서 힘들었는데...
사귀는 동안 제가 졸라서 딱 한 번 했어여;; 이상한 거 맞져? (참고로 저는 남친 없이 못 사니까 헤어져라 하지마셈-_-)
그 한 번도 디게 짧게 끝났…….
“아, 안 나오고 뭣 하냐.”
얇은 문풍지 너머 들려온 할아버지의 호령에 놀란 서진이 엄지발가락을 이용해 컴퓨터 전원 버튼을 꾸욱 눌렀다.
틱― 소리가 나며 모니터 화면이 암전되고, 날렵하게 몸을 일으킨 그가 거울을 보며 최종 점검에 들어갔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드라이한 머리, 언뜻 보면 거적때기처럼 보일지 모르나 티셔츠와 바지 모두 이태리 명품이다. 서진은 마지막으로 앞머리를 슥슥 정리한 다음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끼익― 낡은 경첩 소리가 울리고 마당에 있던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친다.
“그지 새끼여 뭐여.”
바로 예상한 반응이 날아와 귀에 꽂혔다. 아무래도 이 동네 사람들은 간지를 그지라고 표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할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시선을 돌리던 서진의 동공에 금세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게 떠올랐다. 한참 동안 공들인 드라이가 무색하게 마당엔 할아버지 뿐이었기 때문이다.
“언능 가.”
할아버지의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트럭에 시동이 걸리자 서진은 얼른 신발을 신고 쭐레쭐레 조수석에 올라탔다.
철과 연애를 시작하고, 서울에서 짐을 싸서 내려와 할아버지 집에서 지낸 지 벌써 2주일째. 매일 새벽닭처럼 찾아오던 남자가 아침부터 찾아오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괜히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이 일렁인 서진은 애꿎은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철이 어쩌다 한 번 찾아오지 않은 건 큰 문제가 아니지만, 솔직히 지난 2주간 그의 행동이 예전과 묘하게 달라진 건 사실이니까.
건드리면 터지는 폭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나치게 과잉보호하는 건 그렇다 쳐도, 밥 처먹고 있는데 멍하니 쳐다보고 있질 않나. 갈수록 말수는 줄고, 눈 밑은 퀭하고.
‘혹시 같이 살자는 제안을 거절해서 마음 상한 건가. 아니면 막상 사귀어보니 별로여서 후회라도 하는 건가. 나 요즘 쎄이월드 인소 가상 캐스팅 1순위인데…….’
연락이라도 해볼까 하는 생각에 한참 폴더폰의 매끄러운 화면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창밖에 익숙한 초록 밭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필이면 며칠 후에 있을 장마에 대비해 쌔빠지게 삽질하는 날이라고 했던가.
짙은 한숨을 내쉰 서진은 할아버지를 따라 뒤 칸에서 삽을 꺼내 들고 털레털레 밭으로 향했다.
곧바로 밭에 삽을 처박는 순간, 땅이 푹 꺼지는 느낌에 흠칫한 그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일렬로 심어진 고추나무 사이에 이미 물고랑이 깊게 패어 있었으니.
“아따, 사람 말 안 듣네.”
별안간 낮은 목소리가 고막에 달라붙는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커다란 남자에게 손에 든 연장을 부지불식중에 빼앗겼다.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과 마주한 서진의 얼굴에 더없이 환한 기색이 감도는 반면, 철의 낯빛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서진에게 이미 밭에 나오지 말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던 탓이다.
벌겋게 익은 남자의 얼굴과 날카로운 턱선을 타고 뚝뚝 흐르는 땀이 얼마나 오랜 시간 뙤약볕 아래에서 삽질을 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무거운 공기를 감지한 서진이 입 안의 혀를 굴리다가 입술을 열었다.
“물고랑 파버려야 된다고 해서….”
“거진 다 파브렀은께, 니는 집 가서 쉬고 있어.”
철은 힘없이 씩 웃으며 빼앗은 삽을 휙 던지더니 서진을 환자 부축하듯 조심스레 자신의 차로 데려갔다.
곧 두 사람이 탄 차 바퀴가 작은 자갈을 밟으며 굴러가기 시작했다.
서진은 어쩐지 피곤함에 전 옆모습을 보며 쉬이 입술을 떼지 못하고 괜히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이윽고 달리던 차가 커다란 한옥 앞에 멈춰 서고, 먼저 차에서 내린 철은 성큼성큼 걸어가 대문을 열어주었다.
“쉬어.”
“…어. 금방 올 거지?”
“기여.”
묻는 말에 짧은 대답을 남기고 몸을 돌린 남자는 바로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출발한 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건 순식간이었다. 전처럼 입술을 쪽쪽 대는 키스나 포옹도 없이.
지져쓰 크라이스트. 홀리 쓋. 얼굴빛이 시멘트색으로 굳은 서진은 헐레벌떡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말도 안 돼……. 초조하게 일렁이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철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원래 위기 상황엔 다수의 조언이 필요한 법. 지체할 것 없이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 전원을 빛의 속도로 눌렀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다리를 떠는 동안, 인터넷 창이 화면에 떠올랐다.
다행히 새벽에 사이트에 올렸던 질문 글에 벌써 답변이 세 개나 달려 있었다. 기대감 섞인 타액이 목구멍을 타고 꼴깍 넘어간다.
달칵.
Re : 남자친구가 이상해요. 질문 글에 대한 답변입니다.
「안타깝지만 남친에게 님은 이미 지나가는 개똥만도 못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쯧쯧 ㅋ 걍 헤어지는 게.....」
「알콩달콩해도 모자란 때에ㅡㅡ^ 확 헤어지세요!! 솔찍히 연애 초기부터 그런 남자는 언제든지 바로 다른 여자랑 사귈 수 있어요!! 만남이 가벼운 남자거등요!!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습니다~~^^ 」
“씹….”
기대했던 것과 다른 답변에 짜증이 난 서진의 잇새에서 욕이 흘러나왔다. 자기들이 뭘 안다고.
「사귄 지 한 달 만에 변했다구요?ㅋㅋ
싹수가 노란 놈일세~~
그놈 눈에 님이 여자로 안 보인다에 손모가지 검ㅋㅋ 어차피 여친 있어도 뒤에서 딴 여자 보면서 딸 치는 게 남자란 동물입니다ㅋ
옛날엔 쎅1쑤머신이었는데 이젠 앤이 졸라서 딱 한 번? ㅋ;; 그건 성욕이 없는 게 아니라 님이 쌔끈하지 않아서 그런거구여ㅋㅋ
그런 놈들이 뒤에선 딴짓 잘만 하던데ㅋㅋㅋ
알고 보면 질문자님 혼자만 사귀고 잇을 수도 있음ㅋ
그냥 저한테 오실? 전 18 男~★ 女 N 괌 ☆ (내 마눌만 보는 男子 ^-^ㅋ)
싫으면 님도 그냥 야동이나 보면서 딸이나 치셈~
야동 사이트 추천 www.yadong……….」
“씨발 새끼….”
자기가 한 질문에 돌아온 답변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는 급기야 화를 참지 못하고 키보드를 주먹으로 쾅쾅 내리쳤다. 서둘러 인터넷 창을 꺼버렸지만, 들은 적도 없는 재수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그건 성욕이 없는 게 아니라 님이 쌔끈하지 않아서 그런거구여ㅋㅋ 그런거구여ㅋㅋ 구여ㅋㅋ 구여ㅋㅋ…….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 지난번에 올린 사진에 쌔끈빠끈 하다는 댓글이 몇 개나 달렸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하.”
애써 코웃음을 치던 서진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신 건 순간이었다.
며칠 전 유난히 불타오르던 성욕을 주체할 수 없던 밤, 온갖 염병 블루스를 추며 벽창호 같은 애인을 유혹했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남자의 단단한 중심부를 주무르다 어르고 달래서 기어코 결합에 이르렀을 때….
“미안.”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급하게 양물을 빼내며 사과했었다. 그땐 그냥 조절에 실패해서 그런 줄만 알았는데.
‘정확히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한 번 더 하고 싶지 않아서? 나한테 전처럼 성욕이 생기지 않아서? 더는…… 쌔끈빠끈 하게 느껴지지 않아서?’
쾅, 핏줄이 불거진 주먹이 책상 위에 꽂혔다.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머릿속에 먹구름처럼 끼어 판단력을 흐리게 했다. 철의 성욕이 얼마나 혈기 왕성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애초에 사내란 그런 짐승이 아닌가. 잡아놓은 물고기엔 개미 먹이도 안 준다는 느자구 없는 새끼들. 게다가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순수한 자신과 달리 철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놈이었으니.
제 인생의 유일한 사랑이 뒤에서 딴 주머니를 찰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이루 말할 수 없이 조악한 감정이 매캐하게 피어올랐다.
서진은 진정할 기미가 없는 심장을 추스르며 다시 인터넷 창을 열었다. 더블유 더블유 더블유 쩜….
www.yadong……
아까 보았던 주소를 입력하고 엔터를 누르자 연주황색 향연이 화면 가득 펼쳐졌다. 지난 몇 년간 수도승이나 다름없는 시간을 보낸 서진은 빨간 비디오를 끊은 지 오래였지만, 오랜만에 접하는 야한 동영상에 흥분은커녕 철이 동영상을 보는 장면이 자꾸만 떠올라 기분이 구렁텅이에 처박히는 것 같았다.
국가별, 장르별로 정성스레 나누어져 있는 카테고리를 빠르게 훑으며 스크롤을 내렸다. 해저 2만 리 심해 밑바닥에 있는 [GAY] 카테고리를 발견하고 긴 호흡을 내쉬었다.
이 구역 섹스킹에게 뭐라도 배우고 나면 집 나간 패왕색기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 부풀었다.
달칵, 마우스 왼쪽 버튼을 누르는 순간 남정네들의 헐벗은 몸뚱이가 시야를 빼곡히 채웠다. 벌써 발끝에서부터 끈적한 불쾌감이 기어오르는 것 같다.
서진은 더러운 기분을 애써 박박 닦아내며 ‘HARD FUCK’이라는 제목을 클릭했다.
그리고 잠시 후.
“으읍….”
그는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구역감을 꾸역꾸역 삼키며 미간을 구겼다.
영상 속 서양 남자들은 말 그대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두 명만 제정신이 아니라면 모를까. 한 영상에 등장인물만 대략 여덟 명이다.
특히 네 커플이 동시에 엉덩이를 흔들며 난교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음으로 고른 영상은 등장인물이 두 명이었지만 온갖 도구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 “Oh, yeah! Come on baby…! Come on!!” 」
「 “You like that? Huh?” 」
항문에서 동그란 구슬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질 않나, 빨래집게로 젖꼭지를 집지를 않나, 밥 푸는 주걱으로 엉덩이를 철썩철썩 때리질 않나.
설마 이런 걸 보면서……. 이런 걸…….
“우욱.”
서진은 다시 한번 급박하게 쏠리는 토기에 입을 틀어막았다. 내용을 떠나 다른 새끼의 헐벗은 몸뚱이를 성적인 시선으로 봐야 하는 게 구역질 난 탓이다.
영상 속 인물이 교성을 내지르며 바닥을 굴러다닐수록 개똥밭에서 앞구르기 하는 기분이었다.
정말로… 이런 걸 본다고…….
“서진아.”
“어어억!!”
서진은 별안간 등 뒤에서 벌컥 문이 열리며 들려온 목소리에 무작정 모니터 화면부터 꺼버렸다. 급하게 뛰어왔는지 문 앞에서 연신 가쁜 숨을 고르던 철이 씩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여서 뭣 하고 있어.”
“…어?”
당황한 서진의 목구멍이 꽉 막힌 순간, 그를 대신해 대답하듯 스피커에서 열락에 들뜬 남정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Oh Fuck, cum inside my ass…! Fuck…!” 」
그 소리에 비릿하게 눈썹을 구긴 철이 방 안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뭔 소리여?”
남자의 시선이 컴퓨터에 꽂히려는 찰나,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난 서진이 그를 끌고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어 배고파’ 따위의 추임새로 오디오를 덮으면서.
사라진 두 사람 뒤로, 까맣게 암전된 모니터 안에서는 여전히 ‘HARD FUCK’ 동영상이 연속 재생되고 있었다.
***
단정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남자가 소매를 걷어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새벽 두 시. 저벅저벅 흙길을 걸어 고풍스러운 인터폰을 누르자 묵직한 대문의 잠금장치가 툭 풀리는 소음이 울렸다.
머리를 포마드로 넘긴 이 40대 남성은 학계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저명한 정신과 의사였다. 곧 만날 환자가 오늘은 또 어떤 염병을 늘어놓을는지. 아름다운 정원을 가로지르는 발걸음이 무겁다.
재벌 총수와 같은 VVIP들은 진료 시간과 장소가 널뛰는 편이긴 했지만, 이 환자는 늘 정도가 심했다. 물론 그 이유가 데이트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지극히 정상적인 일로 다가왔지만.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자기 애인을 너무 사랑해서 정신과 치료를 받는 유일한 환자였으니.
“제가 숫자를 세는 동안, 그날을 떠올리는 겁니다. 애인이 사고당한 그 날을요.”
커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20대 남성과 마주 앉은 의사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그딴 짓을 왜 합니까.”
전에 없이 싸늘하게 얼굴을 굳힌 남자가 낮게 목을 울렸다. 가라앉은 눈에서 시꺼먼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다. 의사는 솜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온몸의 세포가 저 새끼 조심하라고 외쳐대는 것 같았으니까.
“크흠, 치료 과정의 한 부분이지만… 정 힘들면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예.”
한 발짝 물러나는 의사를 보며 그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답했다. 이건 남자가 상담 과정에 우호적이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이 미친놈은 상상으로라도 애인을 아프게 하느니 치료고 나발이고 차라리 눈앞의 의사를 족치겠다는 거다.
의사는 광기에 휩싸인 공기를 느끼며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입 안을 얼그레이로 적셨다. 잠시 후, 남자가 작성한 간단한 설문지를 돌려받은 의사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 떠올랐다.
1. 새벽에 연인의 집 앞에서 밤을 새운 적이 있습니까?
: 매일.
2. 연인의 미니홈페이지와 그 사람의 이촌 미니홈페이지를 하루에 몇 번 접속했습니까?
: 허벌라게.
3. 연인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강도를 최저 1부터 최고 10으로 체크해 주세요.
: 120
4. 만약 연인이…….
상담을 시작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환자와 의사가 함께 치료에 열의를 불태운 결과는 비참했다. 개미가 씹다 뱉은 껌만큼도 환자의 병은 차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치료 목적으로 어마어마한 포상금을 내건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연인상’은 시간이 갈수록 머나먼 우주를 유영하듯 떠나가고 있었다.
어떻게 한 인간이 한 인간을 이토록 정신 줄 놓고 사랑할 수 있을까. 지난번 검사에서 일편단심 호르몬이라는 바소프레신 수치가 높게 나오긴 했지만, 이 환자는 그 정도가 심했다.
아니, 애초에 명제 자체가 이미 뒤틀린 시작이었다. 일반적인 정신과 상담이 환자 본인을 위한 과정인 반면 이 남자의 경우엔 이유도, 목적도 그 사람을 위해서다. 하다못해 내뱉는 숨까지 그 사람을 위해 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몇 가지 그림을 보여주며 질문을 던지던 의사가 이번엔 새빨간 잉크가 뿌려진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어떤 색으로 보이시죠?”
의자에 등을 기댄 남자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종이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시뻘겋네요.”
흐음, 야트막하게 미간을 구긴 의사가 말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선생님께선 사랑하는 사람의 사고를 목격한 트라우마로 인해 외상 후 스트레스와….”
“이쯤 하죠잉.”
어느새 오전 세 시를 가리키는 시곗바늘을 바라보던 남자가 의사의 말을 끊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네?”
당황한 의사의 시선이 몸을 일으킨 커다란 남자에게 꽂혔다. 이제 보니 머리도, 옷차림도 방금 세팅한 것처럼 말끔한 것이 집에서 취침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차 키를 손에 든 그를 향해 의사가 물었다.
“어디 가실 데가… 있으신가요?”
“예.”
모두가 잠든 새벽 세 시. 간단하게 대답을 뱉은 남자는 그간 봐왔던 얼굴 중에 가장 밝은 표정이었다. 마치 데이트하러 가는 것처럼 묘한 설렘마저 느껴지는……. 설마 하는 머릿속에 설문지 1번 문항이 떠올랐다.
‘1. 새벽에 연인의 집 앞에서 밤을 새운 적이 있습니까? 매일.’
무심하게 뒤돌아 걸음을 옮기던 남자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의사에게 한마디 남겼다.
“아. 다음부턴 안 오셔도 됩니다.”
넌 해고라는 뜻이다. 넓은 거실을 가로질러 밖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던 의사가 다급하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네? 선생, 선생님? 익스큐즈 미!”
상담 한 번에 일주일 수입을 대신할 수 있는 고액의 일자리가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의사의 절박한 목소리를 뒤로한 채 바깥으로 빠져나온 철은 성큼성큼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런 놈도 의사라고. 뉴욕 타임스에 실린 저명한 정신과 전문의 어쩌고라고 하길래 기대했더니. 한심한 사대주의적 발상이었다.
철은 다시 거지발싸개 같은 짓거리로 시간 낭비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두 개의 헤드라이트가 깜깜한 시골길을 밝게 비춘다. 익숙한 길을 내달리는 동안 두려움과 설렘으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머지않아 도착한 곳에서, 급하게 시동을 끄고 긴 호흡을 내쉬는 남자의 커다란 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매일 이 시간마다 죽고 싶을 정도로 무서웠다. 온갖 혼탁한 감정을 뒤로하고 낡은 초가집에 초점을 맞췄다.
댓돌 위에 엉망으로 놓인 명품 운동화를 보는 순간, 고양된 감정이 잦아들고 피식 행복한 미소가 번진다. 꿈이 아니다. 얇은 문짝 너머에 그 사람이 싸질러져 있다. 쌕쌕 콧소리를 내거나 이따금 뒤척이면서.
철은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시트에 느른하게 등을 기댔다. 서진이 병상에 있던 지난 시간, 정신을 놓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편지 덕분이었다.
「철아, 오뎅끼데쓰까?
참. 지난번에 말한 ‘나는 잘 지내요’는 ‘와따시와 오뎅데쓰’가 아니라 ‘와따시와 뎅끼데쓰’래. 어제 또 일본 영화를 봤는데……….」
「오뎅끼데쓰까?난 이번 명절에 꼬치전을 너무 많이 먹어서 살이 4키로나 쪘어. 운동은 언제 하지.」
「오뎅끼데쓰까? 오늘은……….」
영화 〈러브레터〉를 감명 깊게 봤는지 한동안은 말머리가 늘 같았다. 잘 지내냐는 일본어 인사를 오뎅끼데쓰까로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랑스러운 연인을 보며 참지 못하고 몇 번…… 사실 수십 번 편지를 손에 들고 자위하기에 이르렀다.
예쁜 종이에 쓰인 동그란 글씨는 삐뚤빼뚤하고, 기분에 따라 휘갈겨 쓰기도 하고, 간혹 오탈자가 있기도 했지만, 미치게 사랑스러워서 오래된 잉크 위에 입술을 처박을 수밖에 없었다. 하얀 종이 위에 빼곡하게 답장을 적으며 나중에는 글씨체마저 그를 닮아갔다.
그리고 서진이 깨어났을 때.
감히 형용할 수 없는, 빨가벗고 미쳐 날뛰고 싶은 환희와 끔찍한 양가감정이 동시에 공존했다. 드디어 돌아버려서 보는 환영일까 봐. 전부 꿈일까 봐. 환희만큼의 두려움이 온몸을 엄습했다.
점점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하기 어려워 매일 밤 잠들지 못하고 살아 있는 그를 확인해야 했다.
갓 태어난 제 새끼를 보는 것처럼 섬섬옥수 같은 손가락이 열 개나 달려 있는 것도, 쬐깐한 발가락이 꼼지락거리는 것도 사랑스러워서 숨이 턱 막혔다.
움직이면 바스락 소리가 날 것 같은 속눈썹이나 매끄러운 콧대에 한 번이라도 손끝이 닿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신보다 그를 섬겼다.
“우리 이제 진짜 첫 연애 하겠다.”
그런 사람이 제 연인이라니. 가본 적도 없는 천국의 냄새가 느껴지는 살결에 마음껏 코를 박을 수 있다. 어떤 비단보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빙글 돌아버린 광신도가 ‘평범하고 좋은 애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 바닥이 드러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토록 한쪽으로 기울어지다 못해 하나는 천상에, 반대편 하나는 지구 내핵까지 파고 들어간 연인 관계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그 사람 앞에선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법조차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순진한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사회에서 정해놓은 규범이나 질서 같은 것들은 희미해지고 이성을 담당하는 뇌 기관이 녹아내렸다.
함께 있을 땐 지금이 몇 시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시공간마저 아득해지면서 그저 무한한 사랑을 느끼는 초월적인 존재가 된 기분에 빠져들었다. 모든 것을 잊게 하는 정신적인 오르가슴에.
결국 우주처럼 팽창하는 제 사랑에 짓눌려 ‘평범하고 좋은 연인’이라는 놈은 시꺼먼 동굴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매 순간 품에 안고 온몸을 빨아 젖히고 싶은 충동을 눌러야 했다. 아무도 모르는 깊은 방공호에 그를 숨겨두고, 될 수 있으면 영원히 그 안에서 둘만 뒹굴고 싶었다. 바깥은 핵전쟁이 일어나 영원히 나갈 수 없다는 개소리나 씨불이면서.
남자가 느끼기에 자신은 허벌라게 가난했다. 그가 뱉은 침이라도 핥아 먹기 위해 기꺼이 바닥에 엎드리는 거지새끼나 다름없었다. 뼛속까지 침투한 가난함은 금세 정신을 갉아먹었다.
이런 미친놈이 정말 그의 연인이 될 자격이 있을까. 제 비이성적인 사랑이 그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까. 어쩌면 그 사람은 아직도 병원에 누워 있고, 모든 것이 미쳐서 보는 환상이 아닐까.
이토록 비렁뱅이 발톱에 낀 때처럼 가난한 남자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실체를 알게 되는 순간 도망치려 할 것이다. 더러운 쓰레기처럼, 신발에 붙은 껌딱지처럼, 흰옷에 묻은 얼룩처럼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을 터였다.
그리고 금세 다른 사람 품에 안길 게 뻔하다. 혼자인 그를 가만두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내가 전에 만났던 미친 스토커 이야기해 줄까?’ 하며 구질구질한 과거사로 누군가의 귓가에 풀어질지도 모른다. 그 씹새끼는 서진의 동그란 머리통에 입 맞추면서 ‘앞으로는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라는 개소리를 지껄일 거고.
하지만 그놈은 어떻게든 서진의 매끈한 다리 사이로 한번 기어들어 가고 싶어서 안달 난 씹변태 새끼일 거다.
철은 어떻게든 그 새끼를 찾아내서 대가리와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 조사버리겠다고 다짐하며 핸들에 몸을 기댔다. 당장 저 방문을 열고 쳐들어가서 부드러운 살결에 코를 박은 채 뒹굴 수 있다면…….
그저 서진에게 계속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될 수 있으면 아주 오래, 남은 생과 사를 바쳐 곁에 머물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사람보다 오래 살기로 약속했는데, 그에게 버림받으면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 같다.
그날 밤.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한 남자는 여느 때처럼 그의 집 앞에서 밤을 새웠다. 결국 푸른빛이 감도는 새벽 무렵, 산책하는 척하다가 마주친 할아버지에게 오늘 고추밭 물고랑을 판다는 계획을 엿들을 수 있었다.
철은 밭에 나오지 말라는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서진의 모습이 떠올라 하는 수 없이 차에 올랐다. 또 가느다란 손목때기로 삽질한다고 나서기 전에 제가 먼저 파 놓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고추밭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해가 중천에 뜰 때쯤 어제보다 더 아름다운 낯을 한 서진이 밭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따, 사람 말 안 듣네.”
철은 그에게 다가가 냉큼 삽부터 빼앗았다. 연장을 빼앗긴 서진이 말간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물고랑 파버려야 된다고 해서….”
살짝 상기되어 불긋한 볼에 머물던 남자의 시선이 어느새 목 부분이 느슨한 티셔츠 사이로 슬쩍 드러난 쇄골로 옮겨갔다. 평생 저 우묵하게 팬 골에 고인 이슬만 받아먹고 살아야 한대도 행복할 것이다.
아프로디테도 그의 옆에 서면 썩어 문드러진 감자 같을 게 뻔했다. 이 완벽한 피조물을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뙤약볕 아래에 심장을 꺼내놓은 것처럼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것 같다.
“거진 다 파브렀은께, 니는 가서 쉬고 있어.”
치졸한 욕심이 불쑥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결국 남자는 쳐다보는 것조차 아까운 보물을 제집에 숨겨둔 다음, 밭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포클레인에 빙의해 미친 듯이 흙을 퍼냈다.
그리고 잠시 후.
“서진아.”
“어어억!!”
빛의 속도로 밭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철이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서재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서진이 게거품 물며 경기를 일으켰다.
“여서 뭣 하고 있어.”
“…어?”
뛰어오느라 가쁘게 숨을 고르던 철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물었다. 샤워부터 하고 올 걸 그랬나. 땀에 젖은 셔츠를 보며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오는 순간, 어디선가 희한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 “Oh Fuck, cum inside my ass…! Fuck…!” 」
그 소리에 눈썹을 구긴 철이 방 안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뭔 소리여?”
“어어! 배고파, 밥 먹자.”
동시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서진이 빨리 밥이나 먹으러 가자며 그를 재촉하더니 바깥으로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그날도 밤늦은 시간까지 데이트를 즐기고 집에 돌아온 철은 환상에 가까운 황홀감에 취해 있었다.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는 극한의 만족감과 쾌감. 이 순간과 비교하면 천국 나부랭이는 지옥 거시기나 다름없이 형편없을 것이다.
그렇게 남자는 기분 좋게 샤워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짧은 머리를 드라이한 다음 입고 나갈 옷을 고심해서 골랐다.
잠시 후 풀벌레도 잠들었을 새벽 무렵.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서려던 찰나, 적막한 집 안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희미한 소음에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소리의 근원지는 문이 열려 있는 서재였다.
아무래도 오전에 서진이 컴퓨터를 끄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남자는 서재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그의 목덜미 뒤로 서늘한 소름이 일었다.
「 “Oh…! Oh! Fuck…!” 」
웬 끈적한 신음과 더불어 무언가가 리드미컬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든다. 퓨즈가 나간 것처럼 동작을 멈춘 남자는 그 자리에 바위처럼 굳었다.
분명 외출하기 전 서진이 보고 있던 화면 그대로일 터. 이 순간에도 야릇한 신음은 날카로운 쇠창살처럼 그의 고막을 후벼파댔다.
철썩! 철썩! 간헐적으로 울리는 타격음과 비명은 분명 야한 동영상보단 사람을 후려칠 때 나는 소리에 가까웠다.
철은 무언가에 홀린 듯, 꺼져 있는 모니터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이 잘생긴 얼굴을 어스름하게 비춘다.
「 “Yes! Oh, yes...! Fuck!” 」
네모난 화면 속에선 ‘GANG BANG’이라는 제목의 30분짜리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
남자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서진이 보고 있던 동영상을 이어서 시청하기 시작했다. 거시기한 제목답게 한 영상에 여러 명의 사람이 동시에 등장했다.
영상 속 주인공은 밧줄로 온몸을 포박당한 채 희한한 자세로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복면을 쓴 여러 명이 그를 고문하며 돌아가면서 박아대다가, 마지막엔 세 명이 그의 주둥이와 후장에 동시에 박아대는 게 내용의 전부라고 할 수 있겠다.
영겁 같던 시간 동안 재생되던 동영상이 끝나고 화려한 엔딩 크레딧이 화면을 장식하는 순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긍정적인 감정을 빼앗긴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린 남자의 얼굴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한 절망만이 가득히 떠오를 뿐이었다.
***
「 “사랑? 웃기지 마. 이제 카드로 사겠어. 한도 얼마면 돼.” 」
「 “한도 얼마나…… 해줄 수 있는데요? 나…… 카드 필요해요….” 」
빽빽한 눈썹과 미간이 울컥 찌푸려지더니 고동색 눈동자에 촉촉한 물기가 감돈다.
“하아….”
한껏 집중하느라 벌어진 입술 새로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더운 날씨를 피해 집에서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기던 오후. 서진의 시선이 꽂힌 곳은 거실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TV 브라운관이었다.
“은서 어떡하냐.”
화면에서는 요즘 인기리에 방영 중인 〈여름동화〉가 한창이다. 불치병에 걸린 시한부 여주인공이 ‘친오빠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친오빠가 아닌 남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신선한 스토리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드라마다.
사실 주인공이 너무 예쁘고 멋있어서 연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드라마가 워낙 흥미진진해 참지 못하고 함께 소파에 앉아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서진은 철의 탄탄한 허벅지 위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 있었다. 사락사락, 다정한 손길이 검은 머리칼 사이를 부드럽게 유영한다.
“철아.”
여전히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서진이 손을 뻗어 더듬거리자 따뜻한 살결이 만져졌다. 느긋한 손길로 탄탄하게 근육이 붙은 남자의 팔을 쓰다듬다가, 도드라진 핏줄을 타고 내려와 커다란 손등을 살살 간지럽혔다.
“은서 수술비 후원해 줄까.”
키득키득 웃으며 드라마 주인공의 수술비를 대신 내주자는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봤지만, 서진의 머리칼을 살랑살랑 넘기는 남자는 아무 대답이 없다.
그의 손등을 간지럽히던 서진이 손가락이 벌어진 틈 사이로 제 손가락을 우악스럽게 끼워 넣더니 빈틈없이 맞물리게끔 깍지를 꼈다. 그 상태로 장난스럽게 흔들어봐도 여전히 잠잠한 적막만 돌아올 뿐이었다.
“철아. 듣고 있어?”
결국 참다못한 서진이 고개를 휙 돌리는 순간, 멍하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잘생긴 얼굴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철은 아예 텔레비전을 보고 있지도 않았는지 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
채널 돌리면 안 잔다고 중얼거리는 아빠도 아니고. 어째 시한부 불치병인 주인공보다 낯짝이 더 피폐한 것 같다. 한 달 동안 잠 못 잔 사람처럼. 서진은 안타까운 마음에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지다가, 불현듯 상체를 일으켜 쪽 입술을 맞댔다.
보드라운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자 파리했던 남자의 얼굴에도 점차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행복한 미소를 띤 철이 고개 숙여 서진의 입술을 머금었다.
말캉한 젤리 같은 감촉이, 설탕보다 달콤한 맛이 사랑스럽다. 세상에 둘만 남은 것처럼, 주변 풍경이 녹아내리고 사방이 고요해지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잠시 부드럽게 입술을 맞대던 행위가 눈 깜짝할 사이에 거칠어졌다.
“읍….”
이윽고 젖은 소리가 적막을 뚫고 귓가를 축축하게 적셨다.
“흡.”
서진은 생각보다 거센 키스에 적응하기도 전에 호흡까지 빼앗겨 버렸다. 철이 별안간 허겁지겁 빨아당기는 탓에 주둥아리가 뽑혀 나갈 것 같았다.
도톰한 입술이 정신없이 달라붙었다 움직이길 반복했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입술을 막무가내로 벌리고 들어온 혀는 서진이 미처 받아들이기도 전에 입 안을 마구 쑤시고 휘저어댔다.
춥, 추읍, 난잡하게 혀가 오가고. 철은 당장 뒤져버릴 사람처럼 절박하게 서진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키스할 때 그는 늘 참을성이 없는 편이긴 했지만,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일말의 여유도 없이 조급하기만 하다.
“끄읍….”
뼈가 바스러지는 게 이런 느낌일까. 커다란 품에서 빈 깡통처럼 찌부러진 서진의 숨이 점차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흐트러진 티셔츠는 가슴 밑까지 올라와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복부에 서늘하게 닿았다. 탄탄한 살결을 아프도록 문지르던 남자의 커다란 손이 티셔츠 속 가슴팍까지 불쑥 침입했다.
“크헉! 잠, 깐…!”
결국 숨이 막힌 서진은 컥컥 숨을 내뱉으며 남자를 양손으로 세게 밀쳐내고 말았다. 폐부로 훅 들어오는 공기와 해방감에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이 크게 팽창하다가 가라앉았다.
불도저 같은 기세와 달리 종잇장처럼 밀려난 남자는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었다. 곧바로 서진의 원망 섞인 눈초리가 남자에게 향했지만,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금세 수그러졌다.
분노, 절망, 상처 같은 모든 어두운 감정이 압축된 표정. 지금껏 여러 모습을 봐왔건만 또 낯선 느낌이다. 아마 끝없는 개똥밭에서 구르다가, 절망이라는 말뚝으로 심장이 꿰뚫린 표정이 있다면 저런 얼굴이지 않을까.
‘대체 뭐가 문제지…….’
이제 아무리 우겨도 이 연애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그렇게 염병 천병 해놓고 사귄 지 고작 한 달만이라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뭐가 됐든 지금 바로잡지 못하면 언젠가 헤어지는 평범한 연인 중 하나가 될 것만 같았다. 그를 놓아줄 마음은 추호도 없는데.
“아, 맞다. 깜빡하고 말 못 했는데, 나 내일 서울 가.”
찬찬히 숨을 고르던 서진이 별스럽지 않게 입을 열었다. 차에 문제가 생기면 카센터를 찾듯, 연애에 문제가 생기면 전문가를 찾아야 하는 법.
“…설은 뭣 하러.”
남자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힘들 만큼 날카로운 목소리에 서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영미랑 약속 있어.”
“으디서, 뭔 약속.”
“어어…. 강남에서 밥 먹으려고.”
사실 깜빡한 게 아니라 방금 정한 거였지만. 어차피 김영미는 연애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 24시간을 25시간으로 늘려서라도 시간을 만들어낼 작자니까.
철은 또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아무 말 없이 서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급작스레 적막에 휩싸인 공기가 따끔하게 피부를 찌른다. 이내 복잡한 심경을 갈무리하려는 것처럼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철이 입을 열었다.
“왜 말 안 했냐잉.”
“어어…. 미안.”
서진은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은 편이었으나 그럼에도 철은 그의 거짓말을 알아채지 못했다. 서진이 거짓말하는 능력보다 철이 서진의 거짓말을 알아채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탓이었다.
평소엔 귀신같이 눈치가 빠른 남자도 서진과 관련된 일이라면 언제나 이성을 잃고 작은 손바닥 위에서 신명 나게 놀아날 뿐이다. 불안과 집착, 질투 따위의 까만 안개는 눈을 가려 멀쩡한 사람을 장님으로 만들었다.
“화난 거야?”
어쩐지 어색해진 공기에 갈피를 못 잡던 서진이 걱정스레 질문을 던졌다.
“…뭣 하러 씅을 내.”
매가리 없이 미소 지은 철은 되레 사과를 건네더니, 별안간 어지러운 듯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놀란 서진이 남자의 시퍼런 안색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괜찮냐?”
모르긴 몰라도 제대로 잠을 못 자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두 눈은 퀭하고 다크서클은 턱 밑까지 내려온 꼴이 좀비가 따로 없다. 아무래도 시한부 여주인공을 제치고 당장 앰뷸런스에 올라야 할 것 같은 모습이다.
“좀 쉬어. 오늘은 먼저 집에 갈게.”
서진은 여태껏 하루도 쉬지 않고 새벽마다 자신을 만나러 온 연인에게 숨 돌릴 틈을 주고 싶었다. 차마 연인이 쌍코피 터지면서 쓰러지는 모습을 볼 순 없는 노릇이니.
서진은 극구 사양해도 기어코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주려는 철에게 제발 쉬라고 당부하며 내일은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말라는 금족령을 내렸다.
초가집으로 돌아온 그는 방문을 닫자마자 핸드폰부터 꺼내 들었다.
[김영미]
마누라라는 저장명은 철과 연애를 시작하자마자 갖다 버렸다. 아무리 영혼의 단짝 친구라고 해도, 그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았으니까.
뚜르르 뚜르르.
신호음이 길어질수록 응답을 기다리는 목구멍이 버썩 말라비틀어진다. 생각해보면 진즉에 전문가를 찾았어야 했는데, 애써 문제를 외면하려고 했다. 사귄 지 얼마 안 된 만큼 염병 천병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이게 무슨 염병인지.
역시 같이 살자는 제안을 거절하는 게 아니었다. 평소에 청소 안 하고 사는 걸 들킬까 봐 거절했던 건데. 지금부터라도 24시간 꼭 붙어서 그를 감시해야…….
- 미친 거 아니야?
잠시 후, 수화기 너머 자칭 타칭 연애 전문가님으로부터 서울로 올라오라는 명을 받을 수 있었다. 서진은 내일 아침 일찍 떠날 준비를 미리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닫힌 눈꺼풀을 뚫고 들어온 한 문장이 머릿속을 맴돌며 단잠을 방해했다.
안타깝지만 남친에게 님은 이미 지나가는 개똥만도 못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게…… 말이 되나……?’
사실 전에는 그의 사랑이 휘발유를 퍼부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불과 같다고 생각했었다. 가끔은 그 사랑에 짓눌려 질식사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영원히 타오를 것 같던 불이 시꺼멓게 소각된 걸까. 사귄 지 고작 한 달 만에 지나가는 똥개도 아니고 개똥이란다.
결국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참을 뒤척이던 그는 벌떡 일어나 대뜸 할아버지 트럭에 올랐다. 철이 운전대에 손도 못 대게 하는 바람에 자신의 차는 팔아버린 탓이다.
조용한 시골 밤, 낡은 트럭이 덜덜대는 소리가 누군가의 불안감만큼 크게 울린다. 미리 가서 기다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그냥 이불 위에 퍼질러져 있기엔 마음이 불안했다.
이렇듯 다 큰 성인일지라도 첫사랑은 어린애처럼 엉성하고, 수시로 삐거덕거리기 마련이었다.
***
“하― 내 이럴 줄 알았어. 이거 봐, 남자는 다 쓰레기….”
접시 바닥을 숟가락으로 싹싹 긁고 있던 서진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이윽고 기다란 눈매가 게슴츠레 가늘어진다.
“…그럼 나도 쓰레기라는….”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영미는 대충 얼버무리듯 손사래 치며 호탕하게 웃더니, 얼굴에 올려놓은 허여멀건 팩이 삐뚤어질세라 얼른 손가락 끝으로 모양을 맞췄다.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식사가 느글거렸던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영미 집으로 와 김치볶음밥으로 입을 헹구던 중이었다. 식탁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영미가 돌연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여튼 처음엔 다 그래.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어? 그래 놓고 얼마 지나면 입 싹 닦는 놈들 태반이라니까. 그러다 상대가 지쳐서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길 기다리는 놈들.”
“…….”
“근데 뭐, 한 달? 기막혀. 한 달 만에 단물 쪽쪽 다 빨아먹었다 이거지. 씹던 껌처럼 뱉어 버리겠다 이거야.”
“…….”
“어? 낙첨한 복권처럼 찢어 버리겠다, 다 쓴 아이라이너처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시겠다. 한두 번 갖고 놀던 장난감처럼 처박아 버리겠다는 거….”
“크흠흠!”
듣다 못한 서진이 헛기침으로 끼어들자, 영미가 속사포처럼 나불거리던 주둥이를 슬며시 손으로 가리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녀의 비유가 너무 리얼한 나머지, 아직 차이지도 않았는데 벌써 서진은 100리터짜리 쓰레기봉투에 처박혀 버려진 기분이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영미가 무언가 결심한 듯 얼굴에서 팩을 떼어내더니, 한층 비장해진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홍시. 내 말 잘 들어.”
이미 입맛이 뚝 떨어진 서진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기로 했다.
“지구에 인구가 60억이 넘는대. 한국만 해도 거의 5천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눈을 껌뻑거리던 서진이 물컵으로 손을 옮기며 물었다.
“그래서… 인구 폭발, 뭐 그거다?”
“아니. 헤어지라고.”
푸흡. 컵에 입을 대자마자 뿜어진 물이 분무기처럼 허공에 흩뿌려졌다. 곧바로 당황과 황당함이 적절히 섞인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고작 이런 조언을 듣자고 야밤에 서울까지 올라와 전문가를 찾은 게 아닌데. 이래선 인터넷에 올린 질문 글의 답변하고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서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짧게 한숨을 내쉰 영미는 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겹치며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진짜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그냥 툭 까놓고 냉정하게 말할게.”
멀쩡한 사람을 쓰레기봉투에 처박아 놓고도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더 남았다는 사실에 사뭇 공포감마저 느껴졌다. 바싹 타오르는 긴장감에 마른침이 식도를 타고 꼴깍 넘어갔다.
“네 남친, 이미 딴 놈이나 딴 년 숨기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면 둘 다. 이성애자보다 확률이 두 배인 거지. 거의 한 80프로…….”
거기까지 말한 영미는 눈을 가늘게 좁히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마지막 문장을 다시 정정했다.
“아니…… 거의 나인티나인 퍼센트 확실.”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던 서진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듣던 중 가장 웃기는 소리였다.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서진이 피식 웃으며 가볍게 핀잔을 놓자 영미의 얼굴이 한층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얘는 나이가 몇 갠데 아직도 이렇게 순수해. 너 트랜스퍼 연애라고 들어는 봤냐?”
“트랜스퍼면 환승…… 환승 뭐?”
“트랜스퍼 연애. 갈아탈 사람이 이미 따로 있는 거.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원래 애인한테 점점 소홀해지고, 한쪽은 상대가 갑자기 변했다고 느끼게 되는 거지.”
연애 학자처럼 전문 용어를 늘어놓는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서진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명백한 갑을이 존재하는 연애의 먹이 사슬을 침까지 튀겨가며 열과 성을 다해 설명했다. 표현이 다소 과격할지 몰라도, 제 소중한 단짝 친구가 웬 놈팡이에게 당하는 꼴을 눈 뜨고 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유복한 가정 환경과 칠렐레팔렐레한 성격 탓인지 서진은 어렸을 때부터 뒤에서 알게 모르게 호구 취급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영미는 머리에 레이더를 켜고 쓰레기 같은 놈들을 감별해줬다.
그리고 지난 27년간 그녀의 기민한 레이더망으로 거르지 못한 남자는 극히 드물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만 해도 대부분 돈이나 외모, 아니면 잠자리가 목적이었으니.
물론 그녀도 어릴 땐 멋모르고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가기도 했다. 하물며 연애가 처음인 서진은 오죽할까. 보나 마나 순진한 홍서진을 가지고 노는 후레자식일 게 뻔하다. 차라리 착하고 순수한 여자를 만나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녀의 단짝 친구는 호모였다. 정작 본인은 깨닫지 못한 것 같았지만, 어릴 때부터 여자애들에게 인기는 많아도 여자 친구는 한 번도 없었기에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다.
“그러니까 네가 먼저 선수 쳐버려.”
한참 동안 열변을 쏟아내던 영미가 내린 결론은 차이기 전에 먼저 선빵을 날리라는 것이었다.
서진은 더 이상 표정을 관리하기 어려웠다. 연애 박사나 다름없는 그녀에게 완벽히 설득당한 그의 얼굴은 어느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철의 신변 보호를 위해 연인에 대해 깊게 얘기하지 않아서 그런지, 영미는 서진이 평범하게 이별을 극복해낼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극복은커녕 이젠 그와 헤어지면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다. 어딘가에 처박혀 울다가 제가 흘린 눈물에 익사하는 결말을 맞이할 게 뻔하다.
“나한테 좋은 생각 있으니까 핸드폰 줘봐.”
그런 마음은 눈곱만큼도 모르는 영미가 의뭉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식탁 위에 올려놓은 서진의 핸드폰을 쏙 빼앗아 들었다.
[❤ 부재중 전화 7건]
저장명이 앞뒤 잘라먹고 [❤]인 것을 보아하니 애인이 틀림없다.
“참 나. 떨어져 있으니까 갑자기 똥줄 좀 타나 본데?”
부재중 전화를 보더니 가소롭다는 듯 조소를 흘린 그녀는 “이미 늦었지~”라는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문자 메시지함에 들어갔다.
[서진아 이거 보면 전화 줘]
[서진아]
영미는 재미 대가리도, 애정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 문자를 보며 짧게 혀를 차더니 바로 답장 버튼을 눌렀다.
“아, 뭐 하냐?”
그제야 정신을 퍼뜩 차린 서진이 의자에서 펄쩍 뛰어오르며 핸드폰을 빼앗기 위해 팔을 뻗었다. 가볍게 몸을 틀어 그의 손길을 피한 영미는 음침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빠르게 엄지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불현듯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탓이다.
“이 몸께서 다 알아서 하신단다.”
제 친구를 가지고 노는 나쁜 놈을 혼내 줄 순간이 목전에 다가와 있었다.
잠시 후,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영미가 핸드폰을 주인에게 넘기며 말을 뱉었다.
“옜다.”
황당한 얼굴로 핸드폰을 받아 든 서진은 대수롭지 않게 화면을 확인했다.
[나 요새 애인이랑 안 좋은데 나이트나 갈래? ㅋㅋ]
발신 메시지함에 떡하니 자리 잡은 문자를 보며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말도 안 되는 메시지의 수신자가 [❤]다. 자신이 철에게 보낸 문자였다.
“…너 미쳤어?”
당황한 서진이 급하게 [아닝야 친구가 장난ㅊㅣ]까지 타자를 친 순간, 영미가 다시 핸드폰을 쏙 빼앗아 갔다.
“요새 TV도 안 보고 사냐? 이거 깜짝 카메라잖아. 저번 주에 나왔던 소잰데. 문자 잘못 보낸 척 애인 반응 떠보기.”
“어?”
“나태해진 사이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거지. 이제 네 애인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자고. 진실은 나중에 밝혀도 늦지 않아.”
듣고 보니 요새 일반 연인들을 대상으로 한 깜짝 카메라 프로그램이 유행이라고 들은 것도 같다. 묘하게 설득력 있는 그녀의 말에 서진의 마음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지난주에 프로그램에 나왔던 소재라면 나중에 제대로 해명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래…?”
머쓱한 듯 뒷덜미를 만지작거리던 서진은 다시 자리에 궁둥이를 붙였다. 기왕 해보는 거, 최근 들어 자신에게 소홀해진 연인의 반응이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어떻게 나올까. 요즘 따라 낯설게 느껴지는 남자의 반응이 쉬이 예측되지 않았다. 당장 전화가 걸려 와서 불같이 역정을 내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그가 다른 사람 말고 자신에게 화내는 모습은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철이라면 화내는 것도 섹시할 것 같았다.
어쩌면 당장 이곳에 찾아올지도 모른다. 원래 스토커 같은 놈이니까. 제 손목때기를 잡고 끌고 나가서 뜨겁게 키스를 나눈 다음 근처 호텔에서………. 상상만으로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음흉한 미소는 시간이 흐를수록 먹구름 낀 하늘처럼 흐려져 갔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잠잠한 폴더폰을 노려보던 서진은 마침내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다.
“씹, 제대로 보낸 거 맞아?”
이미 이 사건에 흥미를 잃어버린 영미는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을 한번 쓱 쳐다보더니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벌써 수십 번째 핸드폰을 열어 확인하던 서진이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안테나 안 터지는 거 아니야? 한 번 더 보낼까?”
“추하다, 홍서진.”
아예 핸드폰 안테나를 뽑아 들고 집 이곳저곳을 누비며 천장에 갖다 대는 친구를 바라보는 영미의 얼굴이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한참 동안 그 짓을 반복하던 서진이 급기야 이성을 잃고 문자 메시지함을 열더니 [오늘 나이트클럽에서 쌔끈빠끈하게 놀아보자ㄱ]까지 적었을 땐, 그녀가 온몸을 날려 전송을 막아야 했다.
아까 보낸 문자에 기겁할 땐 언제고, 눈을 회까닥 뒤집은 채 말리지 말라며 지랄 염병하는 서진을 보니 마음이 아려왔다. 그런 문자에도 무반응인 애인이라니. 경험상 이런 걸 ‘나가리’라고 하던가.
영미는 측은한 눈빛을 보내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힘내. 세상에 남자는 많아.”
이제 헛된 망상에서 깨어나 진실의 종을 울릴 시간인데, 여전히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화답하는 나사 빠진 친구를 보면서 영미는 마음 한편이 짠해지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보면 남들은 길어봐야 며칠, 몇 달이면 잊어버리는 전 남자 친구를 못 잊어 몇 년 동안 울고불고 자빠질 만큼 나약한 녀석이 아니던가.
결국 그녀는 목구멍에 맴도는 말을 애써 참으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서진이 상처받지 않을 만큼 예쁘게 돌려 말해주기로 결심했다.
“아무래도 차인 것 같다.”
그리고 촉촉하다 못해 축축하게 젖은 눈망울로 바라보는 서진의 어깨에 손을 얹고 한마디 덧붙였다.
“게임 오버. 좆됐다고.”
***
〈남자친구가 이상해요〉 질문 글의 작성자가 채택한 답변입니다.
「Re : 사귄 지 한달만에 변했다구요?ㅋㅋ
싹수가 노란 놈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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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동 사이트 추천 www.yadong……….」
질문자의 인사 한마디: 凸(-_-)凸
똑똑, 서진은 갑자기 문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서둘러 인터넷 창을 종료했다.
“서진아, 주스 줄까?”
철은 웬일로 방 안에 들어오지 않고 문밖에 서서 말을 건넸다. 의아하게 여긴 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응. 주스 줘.”
서진의 말에 남자는 씩 웃으며 “기여.” 하고 대답하더니 부리나케 주방으로 향했다. 이윽고 드르르륵, 믹서기 소리가 울려 퍼진다.
철과 동거를 시작한 지 사흘째. 서울에 다녀왔던 그 하룻밤 사이에 엄청난 일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밭에 나가 있는 동안 서진의 방 지붕이 폭삭 내려앉은 것이다.
볏짚으로 인 초가집 지붕은 1년마다 볏짚을 다시 이어야 했는데, 이번엔 새로 인지도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별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할아버지가 밭일을 마치고 집에 왔을 땐 먼저 와 있던 철이 인부들과 함께 정리 중이었다고 했다.
공사를 마치는 날까지 철의 집에서 지내기로 한 서진은 걱정이 앞섰다. 연인 사이의 문제는 대부분 같이 살면서 생긴다던데. 신비로운 베일을 한 꺼풀 벗겨내고 나면 이미 자신이 나이트클럽에서 쌔끈하게 놀든 말든 상관없는 남자가 어디까지 무관심해질 수 있을는지.
편안함에 잠겨 권태로 이어지는 관계는 서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이곳에 온 뒤로 할아버지 댁에서 지낸 것도 나름 연애 초기의 신비주의를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남자와의 동거는 지나치게 완벽했다. 지난 사흘 동안 철은 서진이 집에서 삼 보 이상 걸어 다닐 필요가 없을 정도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웬일로 밭일도 나가지 않고 온종일 옆에 딱 붙어 있었다.
결국 서진은 그간 철의 행동이 수상했던 건 다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소파에 앉아 있던 서진의 앞에 예쁜 컵에 담긴 주스가 놓였다. 철에게 간단한 인사말을 건넨 서진은 컵을 들어 꿀꺽꿀꺽 주스를 마셨다.
“크흡! 써…!”
그는 한두 모금 넘기자마자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컵을 내려놓았다. 인삼인지 산삼인지 삼 향이 너무 강하다.
“에헤이, 몸에 좋은 것을.”
철이 아쉽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사실 서진의 몸에 잘 받는다는 약재를 조사해서 전부 때려 넣은 건강 주스였다.
입 안에 남은 잔향을 없애기 위해 타액을 허공에 퉤퉤, 뱉어대는 서진의 입술 위로 도톰한 입술이 부딪혔다. 벌어진 틈새로 들어온 혀가 대신 입 안을 정리해주듯 구석구석 핥고 안에 남은 액체를 쪽쪽 빨아 먹는다.
살짝 입술을 떼어낸 철이 황홀한 얼굴로 속삭였다.
“달달한디.”
영락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연인처럼. 마치 둘 사이엔 어떤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입을 맞추는 철을 슬쩍 밀어낸 서진이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근데…… 그날 문자 안 갔어?”
서울에서 돌아온 날은 초가집 지붕이 무너져 정신이 없었고, 그 후로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그의 행동에 아예 물어볼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아무리 봐도 애인이 몰래 바람피우는 문자를 받은 사람 같진 않아 보였으니까.
“뭔 문자?”
철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나 서울 갔던 날… 문자 보낸 거 있잖아.”
“암껏도 안 왔는디.”
뜬금없는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웃음기를 머금은 대답이었다.
“…아무것도 안 왔다고…? 핸드폰 줘봐.”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자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철이 대수롭지 않게 서진에게 건넸다. 서진은 재빨리 버튼을 누르며 문자 메시지함에 들어갔다. 그가 못 본 거라면 지금이라도 삭제해야 한다.
[❤: 철아, 동생이랑 형이랑 싸우는데 다 동생 편만 드는 걸 뭐라 하는지 알아?]
[모르겠어. 뭐라고 하는데?]
[❤: 형편없다ㅋㅋㅋ 난 잔다~]
[ㅋㅋㅋㅋㅋ 잘 자 서진아]
통화 기록부터 수신함까지 샅샅이 뒤져봤지만 벌써 일주일 전에 수신된 [형편없다ㅋㅋㅋ 난 잔다~]를 끝으로 자신이 보낸 문자는 찾을 수 없었다. 허무 개그가 유행이라 철을 웃겨주려고 보낸 거였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형편없어 보였다.
서진은 앞으로 저딴 문자는 보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철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아무래도 안테나가 제대로 안 터진 모양이다. 기지국에서 일을 안 했거나. 어느 쪽이든 다행이었다.
“그날 설에서 재밌게 놀구 왔냐잉.”
핸드폰을 받아 든 철이 무심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어어. 잘 놀고 왔지. 친구랑 바, 밥 먹고, 차 마시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하는 건데도 그날 영미와 했던 대화가 다시금 떠오른 서진은 말을 더듬었다.
“다, 다음엔 너도 같이 놀러 가자. 여럿이서 놀면 더 재밌잖아.”
서진은 괜히 긴장한 나머지 묘하게 높아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여럿이?”
그 말에 흰자위를 형형하게 드러내며 눈을 치켜뜬 철이 되물었다.
“어. 맨날 둘이서만 놀면 심심할 수도 있고. 그 뭐냐…… 백지 수표도 맞들면 낫다는 말, 알지?”
여전히 머릿속으로 영미와의 대화를 반복 재생 중인 서진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횡설수설하며 말을 이었다.
“뭐든 여러 명이 같이하면 더 좋잖….”
“고만.”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뒷말을 잘라먹은 철은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커다란 몸이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꽉 맞물린 어금니에서 빠득 소리가 났다.
“고만 씨부리싸.”
조용히 말을 건넨 철이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서진이 먹다 남긴 주스를 치우려는 듯 허리를 숙였다. 어찌나 힘을 세게 주었는지 손에 컵을 쥐자마자 쩌어억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유리에 금이 생겼다.
영문을 몰라 황당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서진을 뒤로한 채 남자는 삐거덕거리며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진은 억울해졌다. 아무 문제 없는 것 같다가도 한 번씩 철이 저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마음이 너무 불안했다. 영미가 했던 말이 떠올라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 순간 답답한 그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한 가지 스쳤다.
***
분에 넘치게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그만큼의 불행이 따르는 법이다.
“씨벌.”
거친 욕을 뇌까린 철이 핸들에 주먹을 처박았다. 눈앞이 시꺼멓게 물들었다. 평일 낮에도 활기찬 강남 바닥은 저마다 비싼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한 무더기로 쏟아져나와 거리를 점령했다. 타들어 가는 철의 속과 달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사뭇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때 저 멀리서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흐느적흐느적 느긋하게 걸어오는 인영을 발견한 철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소리쳤다.
“씹팔 새끼야. 싸게싸게 안 빼냐잉.”
살벌한 어조에 흠칫 놀란 남성이 갑자기 허둥지둥 뛰어오더니 잽싸게 자신의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차를 잠깐 세워 놓고 서진을 찾아다니는 동안 웬 좆같은 새끼가 차 앞을 가로막고 주차해 놓고는 인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철은 빨리 꺼지라는 듯 빠아앙, 클랙슨을 울렸다. 이윽고 앞을 꽉 막고 있던 차가 빠른 속도로 꺼지고, 주차장을 빠져나온 철은 복잡한 도로를 달렸다.
서진이 사라졌다.
잠깐 서울에 다녀올게.
달랑 쪽지 한 장만 남기고서.
진즉에 위치 추적기를 심어놓는 건데. 같이 살면서 자신이 24시간 붙어서 감시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게 패착이었다. 철은 안일하게 생각했던 지난날 자신의 대가리에 총을 갈기고 싶었다. 씨벌 씨벌 욕이 절로 나왔다.
얼마 전 서진이 서울에 갔던 날. 철은 얌전히 쉬고 있으라는 연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를 스토킹하는 대신 집에서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도착한 문자 메시지는 남자를 미치고 팔짝 뛰게 했다.
[❤: 나 요새 애인이랑 안 좋은데 나이트나 갈래? ㅋㅋ]
안 그래도 서진이 보고 있던 거시기 동영상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운 상태에서 훅 날아든 어퍼컷이었다. 퓨즈가 끊긴 철은 그길로 서진의 방으로 달려가 모든 물건을 자기 집으로 옮긴 다음 사람을 불러 간단한 조치를 취했다.
이제 서진을 제 품에 가두는 것 말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단 한 순간도 그에게서 눈을 뗄 생각은 없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을 터였다. 영원히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거머리처럼 딱 달라붙은 채 관까지 따라 들어가 순장될 작정이었다.
물론 같이 있는 동안 서진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냐고, 미쳐 돌아버리는 꼴을 보고 싶은 거냐고 따질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랬다간 그가 바람을 피운 게 정말 현실이 되어버릴 것 같으니까. 그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는 것만으로 피가 새까맣게 타들어 갈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붙어 있기로 다짐해 놓고도 동거한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안일하게 대처했다. 새벽에 마트까지 장을 보러 갔다 온 사이 서진이 또다시 사라진 것이다.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드는 손이 벌벌 떨렸다. 이 모든 상황에 거시기 동영상과 문자 메시지가 점철되면서 그의 영혼은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리고 서진과 연락이 닿지 않는 지금, 철은 무작정 강남 일대를 뒤지며 제 연인을 찾아다녔다. 핸들을 꽉 틀어쥔 손가락엔 핏기가 하나도 없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죽도록 보고 싶을 뿐이었다.
만약 서진이 다른 연놈이랑 뒹구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그땐 살인자가 된 자신의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방법은 없다. 그게 운명이라면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우웅, 순간 느껴지는 진동에 철이 급하게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기호 5번]
고용한 사설탐정 중 5번에게서 온 전화였다. 지체할 것 없이 갓길에 차를 세운 철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예.”
- 저어…… 제가 지금 찾은 것 같은데요.
***
두 사람만으로 가득 찬 좁은 방 안, 은은하게 빛나는 촛불이 어두운 공간을 낭만적으로 밝혀주었다. 짙은 보라색 커튼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인테리어 소품들이 묘한 신비로움을 더했다.
“뒤집으세요.”
여자는 화려한 네일 아트를 뽐내듯 기다란 손톱으로 테이블을 탁탁 두드렸다. 침을 꼴깍 삼킨 서진은 그녀의 명령에 따라 마지막 카드를 뒤집었다. 이윽고 서진이 뒤집은 카드를 내려다보는 여자의 미간이 희미하게 구겨졌다.
“저런….”
여자의 입에서 무심코 흘러나온 말에 서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사실 그림만 봐도 이미 해답을 들은 것 같은 느낌이다. 카드 앞면에 웬 사탄 같은 놈이 간악한 미소로 자신을 비웃고 있었으니까.
“……이게 무슨 카드인데요?”
“서진 씨 애인은 현재 몹시 위태로운 상태……. 음, 잠시만요. 애인의 머릿속을 한번 들여다보죠.”
거기까지 말한 여자는 갑자기 테이블 밑에서 LED 수정 구슬을 꺼낸 다음 그 위로 손가락을 휘젓기 시작했다.
“…….”
“……이럴 수가…… 한 명… 두 명…… 아니 세 명, 아니 네 명…!”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중얼거리던 여자가 감았던 눈을 부릅뜨더니 100m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거칠게 호흡을 골랐다. 잠시 후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금 그 사람 머릿속에 여러 명과 동시에 관계하는 장면이 보였어요.”
“관계…라면….”
“섹스요. 쓰리썸… 아니, 포썸.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은 밧줄로 묶여 있고 나머지 남성들이 동시에…….”
“여기까지만 하죠.”
듣던 중 가장 정신 나간 소리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서진은 복채를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올려놓았다. 곧바로 우중충한 커튼을 거칠게 걷어 젖히고 ‘타로 천궁’을 빠져나온 그는 터덜터덜 대학가 거리를 걸었다.
제일 용한 집이라고 하길래 세 시간이나 기다렸는데. 온종일 연애 타로, 궁합 사주를 보러 돌아다니느라 지친 다리가 쑤셔온다. 무엇보다 참혹한 결과에 상처받은 마음이 가장 쓰라렸다.
이제 막차가 끊기기 전에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지만 이런 기분으로는 철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평소엔 좋아하지도 않는 소주가 당긴 서진은 근처에 있는 ‘맛나 포차’로 향했다.
“아저씨. 여기 어묵탕이랑 소주 한 병이요.”
파란색 플라스틱 테이블에 혼자 자리를 잡고 대충 아무 메뉴나 주문했다.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어묵탕과 소주가 앞에 놓이고, 소주잔에 투명한 액체를 쪼르륵 따른 서진은 잔을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나쁜 새끼.’
꽉 채운 소주잔을 빠르게 비워낼수록 그의 눈시울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변해…. 나쁜 새끼.’
어느새 차갑게 식은 어묵탕엔 입도 대지 않은 채, 빈 소주병만 테이블 위에 하나둘씩 늘어 나뒹굴고 있었다.
연애를 시작할 때만 해도 철과 사귀면 모든 게 잘될 줄 알았다. ‘두 남자는 오래오래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렇게 끝맺음 짓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쨍그랑! 술에 잔뜩 절어 헛손질을 했는지 바닥에 떨어진 소주병이 산산조각이 났다. 깨진 유리가 노란 조명을 받아 예쁘게 반짝인다.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하게 되면 마냥 행복할 줄만 알았던 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 씹….”
천천히 허리를 숙여 깨진 유리 조각을 주워 담던 서진의 손가락에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아이고, 학생! 그거 그냥 둬. 치워줄 테니까.”
부리나케 청소 도구를 들고 달려온 포장마차 주인이 서진을 말렸다.
“아니에요. 제가 다시 붙일 거예요….”
“붙이긴 뭘 붙여!”
“강력 본드로 다시 붙일 거라구요.”
서진은 유리 조각에 손이 베여 피가 뚝뚝 흐르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억지를 부렸다. 실랑이 끝에 결국 주인아저씨는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으러 떠나고, 혼자 남은 그는 열심히 깨진 조각들을 주워 담았다.
술에 취해서 시야가 흔들리는 건지 안구에 습기가 차올라서 눈앞이 뿌옇게 번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깨진 조각을 주워서 원래대로 맞추면 왠지 철이 예전처럼 돌아올 것 같았다.
그 순간. 으드득, 유리가 잘게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눈앞에 나타난 커다란 신발이 서진을 가로막았다.
“아저씨, 발 치워요…….”
서진은 흐리멍덩한 발음으로 중얼거리며 피 묻은 손으로 남자의 발등을 툭툭 쳤다.
“아저씨 발…….”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그의 몸이 쑤욱― 위로 들어 올려졌다.
“…….”
남자와 마주친 순간. 서진은 흐릿한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철수야….”
철은 생전 처음 보는 표정으로 서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뛰어왔는지 땀을 흥건하게 흘리며 가쁜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나와.”
그 짧은 한마디에도 가느다란 떨림이 느껴졌다. 철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테이블 위에 현금을 대충 내려놓은 다음 막무가내로 서진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아…!”
남자의 손에 끌려가는 동안 서진은 괜히 앓는 소리를 내며 엄살을 부렸다.
“아프다고!”
서진이 길에 우뚝 멈춰 서며 그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자, 그제야 서진의 손 상태를 발견한 철의 눈빛이 까맣게 가라앉았다.
“누가 이런….”
그는 서진의 손을 들어 올리더니 요리조리 살피며 욕을 짓씹었다.
“놔. 안 갈래.”
술에 취한 서진은 제 부모에게 서운한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그 말에 철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힘을 잔뜩 준 목에 핏대가 빳빳하게 섰다. 굳어 있던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서진을 짐짝처럼 들어 올리고는 자신의 차로 걸음을 옮겼다.
차 앞에 도착한 철이 조수석 문을 열어젖히자 그의 예상과 달리 서진은 별다른 저항 없이 차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문을 닫아주고 한 바퀴 돌아온 철이 운전석에 올라탔을 땐 혼자서 주섬주섬 안전벨트까지 매고 있었다.
조용한 거리에 시끄러운 배기음이 울리고, 차가 출발하자마자 시트에 몸을 기댄 서진이 여트막하게 중얼거렸다.
“안 가. 안 갈 거야. 너희 집 안 가.”
조금 전 행동과는 상반되는 말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철은 대답이 없었다. 서진은 어쩐지 그의 단단한 어깨가 약하게 떨리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디로 가는지 한마디 언급조차 없이 차가 빠르게 도로를 가로질렀다.
“서진아.”
잠시 후 잔뜩 잠긴 목소리가 두꺼운 정적을 깨뜨렸다.
“니 바람피웠냐잉.”
마치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는 듯한 말투에 서진은 자신이 취기로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하며 철을 바라보았다. 그는 에어컨을 빵빵하게 튼 차 안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꼭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겁먹은 것 같았다.
“괘안애. 다 괘안은께… 인자 나랑만….”
“참 나.”
이어지는 황당한 소리에 서진의 입에서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샜다.
“바람은 니가 피웠겠지. 섹스도 안 해주면서.”
서진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구시렁거리듯 불만을 늘어놓았다.
“……뭐?”
“나 몰래 이상한 야동이나 보고.”
취중 진담이라더니, 서진의 주둥이는 평소보다 솔직했다.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철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정작 그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서진은 자신에게 은밀한 사생활을 들켜버린 남자가 변명거리를 찾고 있다는 생각에 울컥 열이 뻗쳤다.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내가 나이트클럽에서 쌔끈하게 놀든… 빠끈하게 놀든… 관심도 없으면서.”
결국 닭똥 같은 눈물이 서진의 뺨을 타고 뚝뚝 흘러내린다.
“왜 문자 못 본 척해! 그거 김영미가 보낸 건데…… 흑, 걔가 날 얼마나 우습게… 흡.”
고양된 감정으로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서진은 고개를 돌리며 황급히 눈물을 닦아냈다. 쪽팔리게. 아무리 한 살 차이라지만 그래도 동생 앞에서 술 처먹고 눈물이나 질질 짜는 형이 되고 싶진 않았다.
가쁜 숨을 가다듬던 서진이 입을 다물자 차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됐을 때 옆으로 슬쩍 시선을 돌리니 어쩐지 멍청해 보이는 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늘 그렇듯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직선 도로를 달리던 차가 갑자기 구부러진 길로 들어섰다. 의아하게 여긴 서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두운 창밖을 살폈다.
“남산…?”
얼마간 오르막길을 올라온 차 앞에 커다란 건물이 나타났다. 이 근처에서 가장 큰 호텔이었다. 철은 급하게 핸들을 꺾으며 호텔 입구로 들어섰다. 이윽고 차가 멈춰 서자 부리나케 달려온 도어맨이 차 문을 열어주었다.
“내리자.”
짧은 한마디를 남긴 철은 빠르게 운전석에서 뛰어내렸다. 활짝 열린 문으로 내린 서진은 그의 뒤를 따라 넓은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그가 체크인하는 동안 로비에서 흐르는 음악을 듣는 척 괜히 고개를 까딱이기도 했다.
잠시 후 체크인을 마친 철은 서진을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가 아무 말 없이 20층을 누르자 어색한 침묵이 좁은 공간을 감쌌다. 서진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눈알을 굴리다가 문득 남자의 바지 앞섶이 두툼하게 부풀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띵.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먼저 성큼성큼 걸어 나간 철은 왼편에 있는 커다랗고 하얀 문을 열어주었다.
“…너랑 안 해.”
서진은 여전히 취기가 도는 목소리로 경고하듯 중얼거리며 그가 열어준 방으로 들어섰다.
철컥. 문이 닫히자마자 복도를 걷던 서진의 몸이 허공으로 번쩍 들렸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푹신한 침대에 등이 닿았다. 커다란 손이 서진의 뒤통수를 파고들었다.
서진을 침대 위에 눕힌 철은 열이 오른 것처럼 흐리멍덩한 눈으로 무너지듯 몸을 낮췄다. 곧바로 알코올 향이 나는 입술을 한 번에 삼키고 그 안에 혀를 밀어 넣는다. 질척질척한 혀가 엉키고 뜨거운 숨이 뒤섞였다. 간신히 남자를 떼어낸 서진이 흐트러진 호흡 사이로 입을 열었다.
“너랑 안… 해….”
절절 끓는 눈빛으로 서진을 내려다보던 철은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다친 손가락에 쪽쪽 입을 맞추며 묻어 있는 피를 모조리 핥아 먹었다.
“내가 무릎 꿇을까? 응? 서진아….”
철은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성기를 서진의 몸에 비비적거렸다. 한계까지 달아오른 몸을 더는 통제할 수 없었다.
사실, 철은 서진과 사귀고 처음 관계했을 땐 그의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을까 봐 무서웠다. 그다음엔 서진이 자신에게 질릴까 봐 겁이 나서 피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앞으로 평생을 함께 있을 건데 매일 밤 똑같은 사람과 자는 게 재미없다고 싫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어릴 적 그와 첫날밤을 보내자마자 헌신짝처럼 버려졌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평소에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것은 성스러운 행위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런데 지금은 서진의 예쁜 구멍에 자지를 쑤셔 넣고 납작한 배가 불룩해질 때까지 양껏 싸지르고 싶은 폭력적인 마음뿐이다.
“철아… 나 사랑해?”
다친 손가락에 입 맞추며 어쩔 줄 모르는 철을 보던 서진이 입을 열었다. 술에 취했기에 가능한 유치한 질문이었다. 맨정신이었다면 이딴 대사를 꺼낸 자신의 대가리를 소주병으로 깨버렸을지도 모른다.
“사랑해. 겁나, 겁나 사랑해….”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는 남자의 눈시울이 축축한 물기로 젖었다.
단 1분 1초도 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널 보고 있으면 너무 좋아서 정신을 놓아 버린다고. 어디에도 못 가게 묶어놓고 온종일 네 안에 사정하고 싶다고. 네가 감히 상상도 못 할 만큼 거시기하다고.
철은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친 감정을 사랑이라는 예쁜 포장지에 감싸서 내밀었다.
“내 사랑….”
그는 서진의 목덜미에 얼굴을 박은 채 고백을 쏟아냈다. 철의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로 서진의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었다. 소리 없는 고백을 듣고 있던 서진은 양팔을 벌려 그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
그 한마디에 간신히 잡고 있던 고삐를 놓쳐버린 철은 서진의 옷자락을 잡아 뜯을 듯이 벗겨냈다. 어쩌면 그냥 찢어졌는지도 모른다. 얇은 천 자락이 이리저리 나뒹굴었다. 철은 부드러운 살결을 허겁지겁 더듬으며 머리끝까지 흥분했다.
서진아. 서진아. 보고 있는데도 더 보고 싶어서 계속 그의 이름을 불러댔다. 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사람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는 물론이고 영혼까지 제 정액으로 흠뻑 적시고 싶었다.
커다란 손이 서진의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끌어 내렸다. 반쯤 발기한 성기와 예쁘게 자란 음모가 밝은 불빛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단번에 서진의 허벅지를 잡아 벌린 철은 몸을 숙이고 볼록한 둔덕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아…….”
은밀한 부분에 남자의 입술이 닿자 서진이 몸을 잘게 떨었다. 철은 갈증이 난 사람처럼 혀를 내밀고 분홍빛 구멍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느리게 핥아 올렸다.
그토록 갈망하던 구멍에 입을 맞추는 순간 바지 속에 갇힌 아랫도리가 한층 더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동안 옅게 주름진 피부를 샅샅이 핥던 혀가 오므라진 틈새를 비집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읏…!”
철은 본능적으로 허리를 뒤로 빼려는 서진의 골반을 잡고 더 깊숙이 혀를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자신만 닿을 수 있는 은밀한 곳을 마음껏 탐닉하기 시작했다. 츕, 추읍, 내벽의 미끈하고 부드러운 점막이 혀를 감쌌다.
“하, 으응…!”
“후윽…좋아….”
너무 좋아. 속삭이는 남자의 뜨거운 숨결이 갈라진 둔덕에 닿았다. 평생 서진의 이곳을 빨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리라. 철은 그 생각만으로도 오르가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고개를 처박고 죽고 싶을 정도였다.
“후읏….”
그는 계속해서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무아지경으로 구멍을 빨았다. 혀를 단단히 세운 다음 푸욱, 푹, 피스톤질 하듯 안을 드나들었다.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구멍이 못 견디게 야했다. 질척질척 난잡한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진다.
아직 남아 있는 취기와 진득한 애무에 서진은 정신이 몽롱해졌다. 뜨거운 혀가 밑을 드나들 때마다 요추가 찌릿하게 떨리는 쾌감이 피어올랐다. 분명 몸에서 가장 더럽다고 여겨지는 곳인데도 철은 계속 달뜬 목소리로 좋다고 감탄을 내뱉었다.
“아… 서진아…….”
그 상태로 한참 동안 아래를 빨아대던 철이 커다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가 자신의 바지 지퍼를 내리고 속옷을 끌어 내리자 좆물로 번들번들하게 젖은 성기가 퉁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봐도 경악할 만한 크기에 서진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하, 미안. 못 참겄….”
말을 제대로 끝맺지도 못할 만큼 흥분한 철은 곧바로 뻐끔거리는 구멍에 주먹만 한 귀두를 맞췄다. 그러고는 아직 풀리지 않은 구멍을 우악스럽게 벌리며 밀어 넣기 시작했다.
“아, 아아읏…!”
옅은 주름이 팽팽하게 펴지면서 두툼한 귀두가 조금씩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윽, 서진아. 쪼매만 풀어줘….”
철은 괴로운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애원했다. 쫀득한 구멍이 당장이라도 좆대가리를 잘라먹을 것 같았다. 찢어질 듯 말 듯 한계까지 벌어진 입구가 막 들어온 남자의 물건을 꽉 조였다.
서진 본인도 힘을 풀고 싶었지만, 정신이 혼미해 어떻게 풀어야 하는 줄 몰랐다.
“으읏…! 푸, 풀었어.”
거짓말이다. 그딴 건 모르겠고 그냥 남자가 얼른 제 안에 들어왔으면 했다. 결국 철은 연약한 구멍을 찢을 듯한 기세로 자지를 쑤욱 밀어 넣었다.
“아흐으…!!”
“윽!”
퍽. 서진의 눈앞에 번개가 쳤다. 흉물스러운 기둥이 단번에 뿌리 끝까지 처박힌 것이다. 하아, 서진을 꼭 끌어안은 철의 입에서 신음인지 탄성인지 모를 긴 숨이 터져 나왔다. 몇 번을 넣어도 이 미친 감각은 도무지 적응되질 않았다.
“…씨벌….”
철은 들리지 않게 조용히 욕설을 내뱉었다. 이 와중에도 뜨거운 내벽이 막 들어온 좆을 환영하듯 착 달라붙어 자지를 꽉꽉 물어댔다.
“으윽! 아, 파…!”
서진은 본능적으로 생경한 감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그럴수록 철은 연약한 몸을 잡아당겨 좆을 더욱 깊숙이 쑤셔 넣을 뿐이었다.
“아아, 흐으윽!”
“읏, 서진아! 제발….”
쌀 것 같애. 남자는 정말 사정을 참고 있는 것처럼 이를 악물고 뇌까렸다. 커다란 좆을 품은 서진의 안쪽이 계속 꿈틀거리며 잘게 경련했다. 철은 미칠 듯한 쾌감에 사로잡힌 채 허리를 한 번 더 세게 추어올렸다.
“아응…!!”
뜨거운 방망이에 배 속이 꿰뚫리는 느낌이었다. 서진은 내장이 엉망진창으로 밀려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철은 밭은 숨을 헐떡거리며 점점 더 빠르게 허리를 흔들었다.
“아, 아읏! 하으, 으응!”
퍽, 퍽, 단단한 자지가 구멍 안을 제집처럼 들락날락했다. 미끈한 내벽은 좆이 박히고 빠져나갈 때마다 살덩이를 꽉꽉 조여댔다. 엉덩이와 고간이 부딪치는 마찰음에 맞춰 서진이 끈적한 신음을 내뱉었다.
너무 딱딱한 탓에 서진은 제 밑을 들락거리는 게 살덩이가 아니라 진짜 철근이 아닐까 확인해 보고 싶을 정도였다. 철은 서진이 가장 잘 느끼는 부분을 찾으려는 듯 좆을 뿌리 끝까지 삽입한 채 계속 안쪽을 세차게 찔렀다.
“아, 하아! 으으응…!!”
굵직한 귀두가 배 속 어느 지점에 격렬하게 부딪치자 서진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하얀 시트를 꽉 틀어쥐었다.
“허윽…, 여기?”
철은 일부러 서진이 반응하는 울퉁불퉁한 지점을 짓누르듯이 허리를 꾹 내리눌렀다.
“아흐으읏!!”
시야가 번쩍번쩍 튀고 눈물이 핑 고였다.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르는 쾌감에 서진이 할 수 있는 것은 애처롭게 신음을 질러대는 것뿐이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남자는 서진보다 더 흥분했다. 콱콱, 허리를 있는 힘껏 쳐올리며 개처럼 발정했다.
“아으읏! 아! 아응!”
즈퍽즈퍽, 철은 자꾸만 도망가려는 서진의 골반을 붙들고 무자비하게 자지를 처박았다. 어느새 줄줄 흘러나온 남자의 좆물로 분홍빛 구멍이 애액이라도 뿜은 것처럼 야하게 젖어 있었다. 검붉은 살덩이가 들락거릴 때마다 찔꺽거리는 소리가 호텔 방 안에 가득 울렸다.
“아, 허윽, 좋아…. 서진아, 겁나 좋아….”
넋을 놓아버린 철은 눈에 초점이 없었다. 아예 정신을 놓고 서진의 얼굴을 쪽쪽 빨아 먹다가 머리카락을 씹고 귓바퀴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동시에 허리를 앞뒤로 흔드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하, 아, 아앗! 으응!”
철퍽! 철퍽! 이제 철은 서진의 양쪽 허벅지를 그러모아 들어 올린 채 야만적으로 성기를 치받고 있었다. 계속되는 마찰로 발갛게 부어오른 결합부가 자지를 한껏 조이며 끔찍할 정도의 쾌감을 주었다. 거세게 쑤실 때마다 질퍽질퍽 소리가 났다.
“하응…! 응…! 흐으읏!!”
서진은 자지러지는 신음을 흘리며 얼굴을 침대 시트에 파묻었다. 극도의 쾌락으로 생리적인 눈물과 침이 줄줄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여린 속살을 뚫고 꽉 들어찬 자지가 내벽을 짓누르다가 주르륵 빠져나갈 때마다 못 견디게 자극적이었다. 서진은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살짝살짝 흔들며 남자의 삽입을 도왔다.
퍼억!
“아아읏…!!”
그 순간, 더는 파고들 수 없는 한계까지 성기가 깊이 처박혔다. 강한 자극으로 허공에 뜬 서진의 두 다리가 파르르 떨렸다. 사타구니에 맞붙은 남자의 음모와 고환이 터질 듯이 꾹 눌렸다. 철은 그곳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을 아쉬워하듯 허리를 살살 돌리며 내벽을 뭉근하게 문질렀다.
“하읏, 아… 서진이 안에 평생 있고 싶어….”
극한의 황홀경에 빠진 남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되는대로 중얼거렸다.
“아흐으, 흐응…….”
“매일… 안에 넣고 싸지르고….”
“하아…! 아흐으, 조, 좋아….”
철이 허리를 돌릴 때마다 팔뚝만 한 기둥이 안쪽을 들쑤시며 배 속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처음 느껴보는 쾌감에 서진은 머리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부르르 떨며 전율했다. 발딱 선 서진의 자지 끝에서 하얀 정액이 픽픽 터져 나왔다.
“아, 아아…….”
철은 잠시 그대로 멈춰서 서진의 사정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의 복근 위에 쏟아진 정액을 멍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허억, 허억….”
서진은 사정의 여운으로 밭은 숨을 할딱이며 축 늘어졌다. 이렇게 잘할 거면서 지금까지 왜 안 해주었냐고 묻고 싶었다. 숨을 몰아쉬던 서진이 장난기 머금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철아… 매일 해줘.”
그 순간 멈춰 있던 자지가 주르륵 바깥으로 빠져나오더니 퍼억! 다시 구멍 안으로 처박혔다.
“아으응!! 아, 직… 잠깐…!”
뭉툭한 귀두부터 구멍에 쑥 빨려 들어가며 순식간에 기둥 끝까지 모습을 감추었다. 절정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시작된 흉포한 움직임에 서진은 고개를 도리질하며 애꿎은 시트를 말아 쥐었다. 지금 당장 처박아달란 뜻은 아니었는데.
어쩐지 더 부푼 것 같은 살기둥이 야들야들한 내벽의 속살을 뭉개며 깊숙이 처박혔다. 푸욱, 푹! 철퍽! 꽉 맞물린 결합부 아래로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탄탄한 고환이 세게 부딪쳤다.
“하읏, 홍서진…….”
철은 게슴츠레 뜬 눈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쉬지 않고 허리를 털어댔다. 귓가에 쏟아지는 서진의 신음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볼기짝을 쫙 잡아 벌리고 좆을 더 깊이 처박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서진의 몸속 가장 은밀하고 깊은 곳에 자신을 밀어 넣고 싶었다. 그것도 모자라 영구적으로 그와 결합해 하나가 되고 싶었다. 주체할 수 없는 소유욕이 남아 있는 이성을 마비시켰다.
“하아… 매일 넣어줄께. 절대 안 뺄께….”
“아흑. 아응! 빼, 빼긴… 빼야 돼…!”
다소 정신 나간 소리에 덜컥 겁을 먹은 서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철은 단단한 몸을 서진의 위로 무너뜨리고 그가 옴짝달싹 못 하도록 온몸을 옭아맸다. 혹여 조금이라도 떨어질세라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 상태로 그는 허리만 들썩이며 자지를 박아대기 시작했다. 즈퍽즈퍽…! 두툼한 좆대가리가 내벽을 마구잡이로 짓이기고 들쑤셨다.
축축하게 젖은 살덩이를 반 정도 빼내고 다시 처박을 때마다 내벽은 살아 있는 것처럼 요동치며 남자의 좆을 씹어 먹을 듯이 조였다.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로 남자의 탄탄한 엉덩이가 오르락내리락 빠르게 움직였다.
“하으, 응! 아, 이, 이상…해!”
“아아, 후윽… 좋아.”
큼직한 귀두가 안쪽 이상한 곳을 짓이기자 점점 쾌감에 뒤섞여 낯익은 감각이 치고 올라왔다.
“아, 아, 잠깐…! 으응! 안, 돼…!”
흔히 요의라고 부르는 감각이었다. 급격하게 차오르는 요의에 서진은 온몸을 버둥거리며 남자의 어깻죽지를 손톱으로 벅벅 긁었다. 그 행위에 철은 오히려 흥분한 듯 숨을 헐떡거리며 더 악착같이 허리를 털었다.
“하으응! 아아! 안 돼! 나 쉬, 쉬 마렵…!”
폭주 기관차 같던 허리 짓이 잠시 멈칫했다. 철은 상기된 얼굴로 서진과 마주 보았다. 꼭 묘한 기대감이라도 섞인 표정 같았다. 다시 구멍 안으로 좆기둥을 미끄러뜨리기 시작한 남자가 서진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입을 열었다.
“괘안애… 여따 싸도 돼, 서진아. 응?”
“싫어! 침, 대 더러워…으응! 하읏!”
서진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기겁하며 그의 단단한 어깨를 주먹으로 밀어냈다. 이 와중에도 멈추지 않는 추삽질에 결합부가 찔꺽거리며 터질듯한 요의를 한층 더 끌어 올렸다.
“괘안애. 괘안은께 싸.”
“으읏! 시트는, 어떡하고……!”
“괘안단께.”
남자는 계속 팔뚝만 한 좆기둥을 퍽, 퍽! 치받으며 방뇨를 독려했다. 이 호텔에서 가장 비싼 프레지덴셜 스위트인데 시트에 오줌 좀 휘갈기면 뭐 어떻단 말인가. 나갈 때 팁이나 좀 두고 가면 그만이었다.
“아, 아흣! 싫, 어…! 차, 창피해!”
서진은 생각만 해도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장성한 성인 남자 둘이 숙박했는데 침대에 오줌이라니.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 치우는 거라고 해도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그는 이미 침대 시트에 정액이 잔뜩 묻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그것만은 안 된다며 고집을 부렸다.
“후읏, 그라믄 나한테 싸. 묵어줄란께.”
“으응! 아! 더 싫…!!”
“쌀 것 같으믄 말해, 서진아.”
그건 더 싫다는 서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완전히 돌아버린 철이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안을 거세게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다. 철퍽철퍽…!! 그는 서진이 자지러지는 곳만 집중적으로 공격해댔다.
거대한 귀두가 연약한 속살을 뚫고 또 뚫으며 배 속을 쿵쿵 찧었다. 납작한 아랫배가 좆 모양대로 불쑥 튀어나왔다가 쑤욱 꺼지길 반복했다. 구멍 안팎을 들락날락하는 기둥의 시퍼런 핏줄이 그가 흥분한 만큼 더 불거졌다. 서진은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눈물을 흘렸다.
“아으, 흐으윽, 아아! 아응!! 나…와……!”
결국 서진의 자지 끝에서 후드득 투명한 물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성기를 빼내고 몸을 낮춘 철이 그의 귀두를 입에 물었다. 이윽고 철의 목울대가 여러 번 들썩였다. 투명한 액체를 꿀꺽꿀꺽, 목구멍 뒤로 넘기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방 안에 울렸다.
서진은 오줌을 내보낼 때와는 전혀 다른 쾌감에 온몸이 찌릿하고 눈앞이 번쩍 튀었다. 부르르 떨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자신의 것을 쭉쭉 빨아당기는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아……흐윽…….”
얼마간의 사출을 마친 서진은 망연자실한 듯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여전히 서진의 아래를 맛있는 사탕처럼 빨아 먹던 철은 사랑스럽다는 듯 몇 번 더 귀두 끝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이제 보니 그는 서진이 내보내는 액을 마시는 동안 아래에 손도 대지 않고 사정한 상태였다.
“흐윽, 흐으….”
“하아….”
두 사람은 밭은 숨을 몰아쉬며 온몸을 감쌌던 쾌감의 여운을 즐겼다. 서진은 부끄러워서 철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구태여 이런 상황을 만든 남자가 약간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냥 화장실에 잠시 다녀왔으면 되는 걸 대체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하… 서진아. 괘안애.”
그런 마음을 들켰는지 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서진을 달래기 시작했다.
“씹, 너 싫어…….”
서진은 여전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중얼거렸다.
“니 건 다 맛있단께.”
사실이었다. 무색무취. 오줌이 아니라 꼭 투명한 물 같았다. 미쳐버린 남자에겐 그 액체가 정말 단물처럼 느껴졌다. 좋아도 너무 좋았다. 손도 안 대고 사정할 만큼 좋아 죽었다.
“아흑….”
철은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얼굴을 가리고 있는 서진의 두 손을 잡아 치워버렸다. 곧바로 머리통, 눈두덩이, 콧대 가릴 것 없이 마구잡이로 키스를 퍼붓다가 입꼬리를 위로 끌어 올리고 물었다.
“확인해 볼래?”
“…….”
서진이 못 미더운 눈으로 쳐다보자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머금은 철이 그의 입술 위에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은 얼마간 뜨거운 호흡을 섞으며 혀를 얽었다. 입 안을 질척하게 감싸는 혀에서는 정말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입술을 떼어낼 땐 두 입술 사이로 이어진 타액이 은사처럼 죽 늘어졌다. 철은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웃으며 손가락으로 서진의 볼을 쿡쿡 찔렀다.
“맞제.”
“…응.”
서진은 민망함에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오줌이 나올 것 같았는데 희한한 일이다. 철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계속 서진에게 입을 맞췄다.
그는 서진의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는 것처럼 뽀뽀하다가 어깨, 팔까지 쪽쪽 입술로 타고 내려오면서 열 손가락까지 다 빨아 먹었다. 내버려 두면 발가락까지 빨아 먹을 기세라 종국엔 서진이 그를 밀어내야 했다.
이런 남자가 변했다고 생각했다니. 서진은 자기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서진이 웃으면 남자는 이유도 없이 따라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는 얼굴로.
서로를 갈급하게 끌어안고 부드러운 살갗을 느낄수록 점점 불안은 잦아들고 깊은 평온이 찾아왔다.
그리고 문득 피어난 예감은 확신이었다. 아마 남자는 평생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랬다.
강한 신념이 척박한 땅을 다지고 그 안에 믿음이라는 씨앗을 뿌렸다. 분명 커다란 숲이 되고 높은 산이 되어 관계를 견고하게 해줄 양분이었다.
오늘의 젊음이 까마득한 기억으로 변하는 날까지. 아마 햇살 좋은 어느 날 생을 다한 몸뚱이가 흙으로 돌아간다 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와중에 또 착실히 크기를 키운 물건이 서진의 허벅지 사이에 비벼졌다.
“…….”
이내 따뜻한 감촉이 매끄러운 뺨을 스치고 입술에 닿았다. 마주친 눈이 곡선을 그리며 휘더니 스르륵 감겼다.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서진도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금세 눈을 감았다. 그러자 피부에 맞닿는 온기가 새까만 세상의 전부가 됐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감정에 어렴풋이 미소가 고였다. 결국 불안과 절망으로 점철되었던 가시밭길도 먼 훗날엔 소중하게 펼쳐보는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될 것이었다. 꽉 붙잡은 손이 영원을 약속해 주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