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돌아오는 길] (2)
“자, 주목. 너희 3년 선배인데 부상으로 입학이 늦어진 렌 지미 학생이다.”
오늘 남학생이 새로 온다는 소문에 아침부터 술렁거렸던 1학년 교실은 그가 들어오자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스무 명이 넘는 학생들이 전부 여학생인 반에서 재잘거리던 그녀들의 기대감이 훅 가라앉은 걸 보면 편입생의 몰골을 보고 놀란 것이겠지. 나이도 다른데 자기소개는 무슨.
귀찮아진 그는 가장 맨 뒤 구석진 자리에 빈 가방을 걸고 책상에 엎드려 시간을 때웠다. 새벽 늦게 간신히 잠이 든 데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진통제를 먹었더니 피곤했다.
“3년 위라면… 1학년 때 참전한 선배인가 봐. 그럼 3학년으로 가야 하는 거 아냐?”
“뭔가 사정이 있나 본데. 폐하와 같은 학년이었던 건가? 아는 사이일까 궁금하네.”
“설마 아는 사이겠어. 상처 아프겠다. 힐링 팩터 쓰려고 다시 입학한 걸지도 몰라. 밖에서는 구하기 힘들댔으니.”
“불쌍해.”
“아냐, 내가 교무실에 갔다가 우연찮게 들었는데 작전 이탈로 부대원이 전멸했대. 피난민들을 버리고 도망갔댔나. 그러면서 치료까지 받으러 온 거면 좀 괘씸하지 않아?”
“하지만 전쟁이 저 선배 책임도 아니고… 저렇게 다쳤는데 도망칠 수도 있잖아.”
재경은 귀를 막을 수 있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른쪽 귀는 붕대로 막혀도 왼쪽 귀는 뚫려있으니… 그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거라면 딱 좋겠다.
첫날부터 교사들 눈에 나봤자 좋을 게 없으니 출결을 위해 등교한 재경은 기숙사에 혼자 처박혀 있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사람들과 어울리기는 또 싫었다. 저번에 꿈에서 교실이 나왔으니 뭐라도 떠올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틀렸고 학교에 애정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책상에 엎드려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점심시간이 되었다. 같은 반 후배가 같이 밥을 먹으러 가자며 착하게 나섰다. 흉측한 그의 몰골을 보면서도 딴에 큰 용기를 냈겠지만 제립학교의 급식처럼 자극적인 음식은 먹을 수 없는 그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필요 없으니까 신경 꺼.”
행동거지가 불편하고 섭식이 편치 못하니 함께 어울리는 무리가 있다면 편하겠지만 그는 낯선 이에게 도움을 청할 성격은 못 되었다. 나약한 참견은 그녀들도 나중에는 귀찮아질 거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혼자 있는 게 낫지. 타인들 앞에서 흉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절뚝거리며 목발을 짚은 그는 교실에서 나와 아무도 귀찮게 굴지 않을 적절한 장소를 찾았다. 발걸음이 가는 대로 가다 보니 그의 마음에 쏙 드는 한적한 장소가 하나 보였다. 학교 뒤편 삼면이 막혀있는 쓰레기장인데 점심쯤에는 학년별로 쓰레기가 배출되지 않아 깨끗했다.
새소리가 짹짹거리는 게 고아원처럼 조용하니 편하고, 그 근처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그는 긴장했던 숨을 후 내쉬었다.
아침에 나온 빵을 점심으로 하나 남겨두었던 그가 조금씩 뜯어서 잘근잘근 짓이겨 먹었다. 소화기관에 문제가 생긴 건지 죽이나 수프가 아닌 음식을 먹으면 위장이 소화를 못 시켜 배가 아팠다.
이런 조그마한 빵 하나도 한 시간은 붙잡고 우물거려야 하는데 괜히 루나처럼 1학년 학생들까지 괴롭힐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고로 사람이 오지 않는 이곳은 그에게 가장 마음 놓이는 장소였다. 만약 목발을 짚지 않아도 될 만큼 걸을 수 있었다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오른쪽 팔이 덜 망가졌더라면, 적어도 얼굴 한쪽이 괴물처럼 녹아내리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자존감이 없지는 않았을 텐데.
보급된 가죽 신발을 지나친 개미들이 기계적으로 앞을 따라 이동했다. 물끄러미 관찰하던 재경은 등교 중에 봤던 3학년 학생들 중 부상을 당한 학생을 떠올렸다.
그들은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새롭게 개발한 슬렉터 의수 모드를 이용하여 일상생활에 적응하고 있다고 한다. 그도 의수를 원했지만 재판을 기다리는 그에게는 살상 무기가 될 수도 있는 슬렉터를 내어줄 수 없어서 한동안은 이대로 있어야 한단다.
제립학교에 오면 목발 정도는 떨쳐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역시 기대는 안 하는 편이 속 시원하다.
전부 귀찮아. 이 꺅꺅거리는 웃음소리나 모두가 행복한 것 같은 이 세상에서 빨리 사라졌으면 좋겠다. 재판이고 뭐고 아무래도 좋다.
몸을 타고 오르는 새까만 개미 한 마리를 발견한 재경은 무감각한 표정으로 튕겨냈다.
점심시간이 끝나는 예비 종이 쳤을 무렵이었나. 교실로 들어가려던 재경은 인기척에 잠자코 고개를 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그가 살짝 동요했다.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던 곳에 누군가가 가만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난 그대의 무죄를 반드시 증명할 것이다.”
금발 단발머리가 바람에 흩날리며 오묘한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뜨거운 태양 볕이 반짝이는 나무 그림자 아래에 선 그녀가 한 말이 귀에 도달하지 못할 만큼 아름다웠다. 이런 쓰레기장에서조차 고고한 사람은 처음이다. 말문이 막힌 재경이 눈을 끔벅거리고만 있었다.
“그러니 그대도 뭐든 떠올려라.”
온갖 것이 담긴 은색 눈동자는 무척 슬퍼 보였다. 그녀가 슬픈 이유는 뭘까. 그의 몰골이 불쌍하나? 저런 아름다운 사람과 비교하니 그는 쓰레기장조차 과분한 인간 같았다.
그가 먼저 시선을 외면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날 아는 사람인가? 내가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알았다고? 그럴 리가. 어제 제립학교로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엔 그는 저 여자를 분명 어디선가에서 본 적이 있었다. 기억을 잃은 이후의 일이다. 그래, 루나가 보여주었던 사진에 있던 사람이었다.
“넌…….”
마침내 정체를 알아챈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그녀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마침 오후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쳤다.
꿈이라도 꾼 것처럼 멍청하게 일어선 그는 홀린 듯 절뚝거리며 교실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느지막이 점심용 약을 먹은 그는 책상에 엎드렸다.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기억을 떠올리라고? 말은 쉽다. 미래가 없는 그가 오로지 기다리는 건 오늘 방과 후 양호실에서 있을 어빌리티 치료 시도다. 그마저도 안 되면 진정으로 그에게는 미래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서쪽으로 기우는 태양은 죽어가는 그를 보는 것처럼 처량했다.
* * *
백 년 만에 부활한 마왕은 끝내 인간과 어울리는 길을 택했다. 그것이야말로 유일한 화합의 길이지만 인간의 입장에선 류제를 내버려 두는 건 스스로 재앙을 품는 것과 같았다.
언제라도 마왕이 마음을 바꾸어 마족을 만드는 일은 없어야만 하니 류제는 자처하여 키아나트리체의 집중 관리 대상이 되었다. 과도할 수 있지만 평범한 인간이 가질 불안감은 류제 신리 본인도 인정하는 바였다.
이때다 싶었는지 귀족파는 인류의 미래를 빙자하며 당장 마왕을 없애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마족과 손을 잡았던 주제에 마왕이 니냐롯트의 힘이 되어줄 것 같으니 불행의 씨앗이 될 마왕의 핵을 파괴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모인 것이다.
정치로 국가가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대 입장이 필요하다. 직접적으로 그녀를 살해하려 했던 멜가로스크 자작과 죄를 그 입으로 시인한 백작 부인을 제외한 귀족파 일당들은 직위를 유지하되 조세를 대폭 걷는 방향으로 역모죄를 정리하려던 니냐롯트는 한때 류제에게 그 결심을 후회한다고 사적인 감정을 담아 토로했다.
마족과 다름없는 뿔과 날개를 자랑하는 류제가 저자세로 나오니 귀족파는 그가 키아나트리체 왕궁을 헤집는 걸 괘씸하다 여겼다. 류제의 행동에 사사건건 의미를 부여하는 귀족파는 생트집을 잡거나 행로를 방해했다.
하찮은 인간들이 귀찮았지만 류제가 별도로 주제 파악 시키지 않아도 귀족파 대부분이 역모죄에 연루되어 있어 깊게 수사에 들어가자 하나둘 목이 날아갔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발언권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 예정이다.
인류는 마족이 생겨난 이유를 더 이상 모르는 척할 수 없기에 핍박은 화를 부를 뿐임을 기억하라며 니냐롯트는 정계에 남은 자들에게 연거푸 강조했다.
류제 신리가 마왕이라고 할지언정 이전 마왕은 이미 죽었고 새로 태어난 그는 마족을 무찔러 키아나트리체를 위해 공을 세운 영웅이었다. 전생은 전생일 뿐이다. 이미 죽어 없어진 전생의 죄를 끌고 와서는 안 된다. 모든 마족을 없앤 그 결심을 알라며 니냐롯트가 그들을 설득했다.
일은 그렇게 일단락되는가 싶었지만 중도파도 그녀를 따랐던 구 왕녀파(현 황제파)도 오랜 세월 동안 공포의 대상이었던 마왕의 건재를 두려워했다.
백번 양보해 마왕을 포용한다면 그들은 절차상이라도 좋으니 마왕을 통제할 브레이크가 있기를 바랐다. 지금은 온화한 그가 마음을 바꾸어 키아나트리체가 하룻밤 사이에 쑥대밭이 된다면 그건 분명 이를 알면서도 수수방관한 지도부의, 니냐롯트의 책임이 되기 때문이다.
한시라도 빨리 자유의 몸이 되고 싶었던 류제는 알라마니 기술관과 협의해 용인의 힘을 사용할 시 기술관으로 위치 정보가 전송되는 장치를 달겠다고 항복했다.
물론 초커처럼 생긴 브레이크는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뜯어낼 수 있었다. 렌의 일로 정신이 없는 류제는 귀찮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면 끊어진 목줄 따위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2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겨울이 지나 이듬해 3월, 1학년을 함께했던 학생들이 새롭게 3학년으로 진학했다. 이어 빈 2학년 대신 새로운 어린 어빌리터들이 제립학교에 입학했다.
다시 찾아온 입학식 날, 돌아온 학생들을 보니 전쟁의 상처는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류제도 친구였던 8반 학생들 중 세 명이 전투에 휩쓸려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렌의 수학여행 같은 조 친구 중 한 명도, 한때 유네를 괴롭혔던 학생도, 그들과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평범한 친구도 있었다.
전쟁을 겪는 동안 몸과 마음에 모두 큰 상처를 입은 학생들은 마지막 학년을 건강한 생활로 돌아가기 위한 계단으로 사용했다.
3학년에 올라가 여전히 우수한 학업성적을 유지 중인 비키는 나라카의 비밀을 파헤치고 싶다는 새로운 열망을 품었다.
졸업 후 탐사대에 들어가겠다는 그녀는 선택과목으로 전환된 기간트리카 실전 수업을 들으며 율폰이 인간이었을 시기의 기록을 찾았다. 또한 셀로니아 후작가의 후예로서 정치를 배워 니냐롯트를 돕기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왕궁으로 향했다. 다시 바빠진 그녀는 류제를 도와주지 못한다는 점에 항상 미안해했다.
부모님과 싸우고 고집을 부려 참전한 유네는 처음으로 어긴 엄마의 명령이 하필이면 참전처럼 중요한 일이라 종전 후 집으로 귀환했어도 여전히 냉전이었다. 당시 막 아이를 낳은 직후였던 그녀의 엄마는 다음 년에 제립학교에 복귀하는 것도 반대해서 유네는 올해 3월에 거의 가출하다시피 나와 기숙사에 들어왔다.
다행히 아빠와는 여전히 사이가 좋아 유네의 학업 원조는 아빠가 해주는 실정이다.
유네가 렌을 좋아하는 걸 알기도 하고 납치 사건에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은혜를 갚는 거라고 아빠를 설득한 유네 덕분에 나르타 상단을 통해 렌 지미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역부족이다. 태어난 동생도 있어서 아빠도 수색에 집중하기 힘들고 그녀도 결국엔 가문의 도움이 없으면 힘을 쓸 수 없었다.
브레이크에 관한 정계의 싸움이 진정되고 본격적으로 키아나트리체 곳곳을 돌아다니는 류제는 니냐롯트와 비키, 유네의 정보력을 바탕으로 실종된 렌을 찾는 중이다.
류제의 소속은 제립학교로 되어있어 비키나 유네와 마찬가지로 졸업을 위해서는 수업을 들어야 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사라진 렌을 찾는 것이 어떤 것보다 절실했다.
“여기도 아닌 건가.”
니냐롯트의 호출이나 알라마니 기술관의 요청이 없다면 아가타에 부재하는 류제는 최남부 나이엔힐리아를 기점으로 사람들이 군집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들러 렌의 행방을 수색해 왔다. 수첩을 빼 든 류제는 이번 마을에도 X표를 그었다.
그가 든 구깃구깃한 지도에는 남쪽으로부터 동쪽에 이르는 모든 도시에 표식이 그어져 있었다. 지금까지 키아나트리체 구석구석을 훑었지만 단서는 희박하다. 이제 남은 건 서쪽과 미노타 근방인 북쪽인데.
그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걸 작년 9월에 알았으니 벌써 열 달 가까이 헤맸다. 갈피를 못 잡다가 운이 좋게도 소속 부대에 관련되었던 사람들의 증언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한밤중에 나타난 한 마족으로 기간트리카 부대가 전멸한 사건을 입에 담았다.
첫 번째로 만난 목격자에게 기간트리카 부대가 마족에게 전멸했다는 말을 들었던 류제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절망적인 소식에도 ‘행방불명’이라는 단어에 희망을 버리지 않고 추적을 이어나가던 류제는 어떤 아이에게서 추가적인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오빠 알아요.”
새로 자리 잡은 마을에서 새콤달콤한 사탕을 빨던 소녀가 어른들이 없을 때 류제에게 몰래 전했다. 그때가 올해 1월, 남쪽에도 싸락눈이 내리던 겨울이었다.
“싸움이 끝나더니 가버렸어요.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갔는지 알아?”
“몰라요. 미안하다면서 사라졌거든요. 다른 어빌리터 아줌마들은 다 죽어서 우리는 슬퍼하고 있었는데 그 오빠라도 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우리를 버리고 가버렸어요. 그 오빠가 울어서 저도 조금 슬펐어요.”
시무룩하게 답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류제는 고맙다며 그녀에게 같은 종류의 사탕을 쥐여주었다.
마족과의 전투에서 기간트리카 부대는 전멸했지만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렌이며 전투 후에 그가 사라졌다는, 즉 ‘행방불명’이라는 군 공무원의 판단은 옳았다.
이후 가까운 마을에 정착한 다른 피난민들에게서도 비슷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한밤중에 마족이 쳐들어왔던가. 짐 챙기고 난리여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납니다. 그때 습격한 마족을 막으려다 기간트리카 부대가 전멸하고 간신히 그 애만 살아남았을 겁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죠. 그 어린애가 어빌리터라고 다르겠어요?”
“그럼 그 이후로 어디로 갔는지는 아십니까.”
“모르죠. 아무도 몰라요. 2년이나 지난 일인데.”
하아. 류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똑같다. 피난민들을 중 렌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모두 모른다는 말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혹시나 수배 때문에 숨겨주는 거라면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해도 사람들은 한사코 입에 담기를 거부했다.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기술관에서 사유를 시시콜콜 물어봐서 지양하는 편이지만 이따금 거동이 수상쩍은 사람에게 용인의 눈으로 속내를 꿰뚫어 보았는데 그들의 말이 사실로 확인될 뿐이었다.
일반군 보병 부대에 속했던 장교들이나 징집 군인들은 렌의 이탈이 벌 받을 짓임을 알기에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경우가 있었다. 탈영을 보고도 눈을 감아준 그들에게도 벌이 내려질지 몰라 무서워하는 것이다.
어쨌든 렌이 어디로 향했는지 모르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기억을 들여다보면 렌은 불타는 짐들 뒤로하고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채 반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곳에 자신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기억에 불과한 순간에 손을 내밀지만 렌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들의 씁쓸한 감정과 그의 감정이 섞여서 똑같은 기억이지만 몇 번이고 볼 때마다 눈물이 나왔다.
“그런 사람은 몰라요.”
“그럼 혹시…….”
“미안합니다만 모릅니다. 모른다는데 자꾸 여기저기 쑤셔대면서 마을 분위기 흐리지 마세요.”
거대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건장한 청년이 새까만 앞머리로 얼굴을 반절 이상 가리고 사람들을 위협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은 마을 청년이 농기구를 들이밀며 경계했다.
알았다며 두 손을 들어 보인 류제는 그들이 떠나가자 포기한 듯 바위에 걸터앉았다.
없다. 이곳도 없다. 아무 데도 없다.
“하아.”
렌, 보고 싶어. 널 위해서 모든 걸 버렸는데 네가 없으면 어떻게 길을 찾아야 할까. 내가 뭘 위해 싸운 건지도 이젠 잘 모르겠는데.
하늘을 향해 드러누운 그의 앞머리가 뒤로 넘어갔다. 수려한 용모가 윤곽을 드러냈다.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린 얼굴에서 앳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용인의 육체로 뒤바뀐 후로도 같은 모습을 유지 중인 그의 맨얼굴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잘난 얼굴을 드러내고 다닌다면 수사가 수월할지도 모르겠으나 별 관심 없던 탓에 스스로 어려운 길로 돌아가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디에 있는 거야… 렌.”
이젠 만났던 시간보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배로 늘었다.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다. 만나지 못해도 좋으니 무사하다는 것 하나만 알았으면 좋겠다.
사람도 죽일 것처럼 뜨거운 볕 아래에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귀신같은 몰골로 정신을 추스른 류제는 다음 마을을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그의 슬렉터로 신호가 왔다. 집중력이 깨진 류제는 신경질적으로 통신을 받았다.
“뭐야.”
―폐하의 명령이시다. 학교로 복귀하도록.
“이유가 뭔데.”
―렌 지미에 관련된 소식이라고 하시는군. 자세한 건 모른다.
“알았어.”
키아나트리체의 지도자가 된 후 더 바빠진 니냐롯트도 짬을 내서 수색을 돕지만 고작해야 비슷한 인상착의를 가진 사람의 목격담 정도였다.
증발해 버렸다는 말이 비유가 아니듯 렌은 그 순간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그 흔적도 따라 사라지기 전에 증거를 모아야 하는데도 고분고분 니냐롯트의 말을 들어주는 이유는 그녀가 아가타까지 그를 호출할 때는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이다.
뻐근한 목을 늘린 그가 다시 눈을 뜨자 샐쭉한 붉은 동공이 드러났다. 이윽고 ‘강화’ 어빌리티를 썼던 때처럼 가볍게 도약한 그가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까마득한 하늘까지 올라온 그는 먼 거리를 단시간만에 이동해 아가타에 도착했다.
“이번엔 또 왜 부르는 거지.”
직접 아가타로 호출하는 것은 오랜만이다. 하늘 아래에 거대한 왕도가 보이자 추락하듯 몸을 꺾은 그는 가까운 가로수에 발을 디뎌 착지했다.
돌풍이 거리를 휩쌌다. 힐끗거리는 사람들을 무시한 류제가 머뭇거림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렌을 찾는 것도 이렇게 수월했으면 좋겠건만.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에서 바늘을 하나 찾는 기분이다.
초커를 통해 그가 아가타로 왔다는 신호가 갔는지 또다시 슬렉터로 연락이 왔다.
“또 뭔데?”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방문을 요구했다. 지난달에 안 들렀지?
“아 알았다니까. 루이나, 네가 말 안 해도 들르려고 했어.”
그러나 루이나 이 자식은 대답도 듣지 않고 끊어버렸다. 건방진 인간 주제에. 귀찮았던 나머지 마왕일 때의 성격이 나온 류제가 아무도 듣지 않는 불평을 내뱉었다.
나라카가 무너지고 마기가 흩어졌으니 리엔달로니아 근처에 있던 알라마니 기술관은 본관 건물을 이전했다. 빼곡한 건물과 건물 사이를 가볍게 뛰어 본관으로 바뀐 알라마니 기술관 아가타 지부 앞에 착지한 류제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최신식의 보안 기술을 신경질적으로 뛰어넘은 류제를 오랜만에 보는 연구원들이 가볍게 인사했다. 지금 류제는 인사를 받아줄 만큼 상냥하지 않았다.
“제멋대로 굴기는.”
아가타의 일정을 빨리 해치우고 내일부터 서쪽을 돌아봐야겠다. 서쪽에는 류제 신리의 고향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네. 수색지를 옮긴다면 가장 먼저 고아원을 방문할까 고민하던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기술관장이 있는 연구실의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바쁜 사람을 데려다.”
“지난달에도 안 왔잖아. 이건 폐하와의 약속이야. 바쁘더라도 아가타에 왔으면 응당 우리 연구실에도 들러야지. 아까 사용한 마법에 대해서도 보고해 줘야 하고.”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보고서를 휘갈기던 알라마니 기술관장이 서류를 치우며 류제를 환영했다.
마기의 원천이자 어빌리티에 반응하는 드라코니스 입자를 연구해서 어빌리터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에 협조하는 것도 협약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류제는 아가타에 들러 종종 이런 귀찮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가타로 오려고 쓴 마법인 거 알잖아요. 또 뭐가 궁금한데요.”
“급하게 굴지 말고 차근차근하게 하자고. 날도 더운데 열 내지 말고.”
“이따가 왕녀와도 만나야 해서 바쁘니 되도록 빨리 처리해 주세요.”
류제가 앞에 있는 의자에 아무렇게나 앉아 다리를 뻗었다. 니냐롯트가 황제로 등극한 지가 언제인데 여전히 왕녀라고 부르는 그에게 그 누가 태클을 걸쏘냐.
그러거나 말거나 부채를 열심히 부치던 관장은 류제에게 드래곤과 용인의 비밀, 이윽고 어빌리터의 비밀과 드라코니스 입자의 논문 포스트를 보여주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새 나온 가설들을 읽어본 류제는 틀린다고 지적한 부분에 대한 관장의 궁금증을 풀어주느라 몇 시간을 허비했다.
결국 그가 이곳에서 얻은 이득은 예전 기술관장에게 넘겨주었던 쪽지를 돌려받은 것뿐이다. 렌을 찾느라 바쁜 류제가 쪽지의 암호 해독을 기술관장에게 맡겼지만 그도 암호의 특성상 본인이 아니면 알 수 없다고 해독을 포기했다고 선언했다.
“어디서 본 것 같기는 한데.”
지금 그를 움직이는 건 류제 신리로서의 기억이 메인이지만 천 년에 달하는 기억들이 우후죽순 머릿속에 파고들어 류제 신리가 알았던 사실을 떠올리기 힘들다. 구겨진 쪽지를 살피던 그는 먼 옛날 인간들이 쓰던 말이었나 뒤집어 보았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졌을 무렵 류제는 기술관을 나와 제립학교로 향했다. 경비병을 통과하지 않고 높은 담을 뛰어넘어 오랜만에 학교로 귀환한 그는 추억을 떠올릴 새도 없이 슬렉터로 루이나에게 통신을 전달했다.
“도착했어. 어디로 가면 돼?”
―그대와 처음 티타임을 가졌던 곳이라고 말하면 될까.
들려오는 목소리는 니냐롯트의 것이었다. 그가 아가타를 떠난 이후로는 바빠서 루이나를 통해 통보식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오랜만에 직접 통신을 한다.
―느긋하게 와도 좋다. 오랜만에 학교로 돌아왔으니 주변을 둘러보는 건 어때.
알았다고 말하려는데 그쪽에서 먼저 끊었다. 느긋하게 와도 좋다고? 국정 일로 바쁜 것 아니었나. 별일이네. 왕궁으로 오라고 하면 될 걸 굳이 제립학교로 오라고 한 이유는 뭘까. 학생 중에 렌을 봤다는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느긋하게 오래도 그릴 생각은 없었다. 류제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니냐롯트와 처음 티타임을 가진 장소는 밸런타인데이 때 렌이 유네에게 주라던 초콜릿의 처치 방법을 몰라 헤매던 그가 왕녀의 손에 이끌려 올라갔던 신관 옥상이었다. 그때와 비슷한 하교 시간이라 다른 학생들은 기숙사로 돌아간 건지 학교는 조용했다.
이래서 오기 싫었다. 하나하나 렌과 어울렸던 추억들이 남아서 그를 괴롭혔다. 렌이 지금 이곳 어딘가에 있다는 헛된 망상으로 허탈했다.
신관으로 가기 위해 먼저 본관으로 들어온 류제는 중앙 계단을 통해서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을 택했다. 렌을 떠올리면 심장이 지끈거리니 쪽지의 암호로 마음을 달래던 류제는 먼저 계단을 올라가던 어떤 학생을 가까이 가서야 인지했다.
시간이 이런데 아직 하교를 안 한 학생이 있었구나. 교복을 보아하니 1학년인가? 뒷모습에서도 붕대가 보일 정도인 걸 보니 전쟁으로 심한 상처를 입은 모양이다.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뒤따라 계단을 오르려던 그때 류제는 그 뒷모습에 익숙한 감각이 일었다.
신관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있는 문에서 추억 속에서 봤던 노을이 들어왔다. 그가 좋아하는 마른 지푸라기색 머리…카락이 빛났다.
새하얘진 머리와 시간 감각이 다른 팔다리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운명의 시간이라도 다가온 것 같다.
그럴 리가 하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학생의 팔을 잡아챈 후였다.
“레… 우악!”
다리가 불편해 잘 걷지 못하는 데다 하필이면 아픈 팔을 잡혔던 재경이 일순 목발을 놓치고 휘청거렸다. 놀란 눈동자가 밀쳐진 방향대로 넘어갔다. 한쪽 얼굴은 엉망진창 붕대로 묶여있었다.
류제는 면포의 섬 반대편에 조각처럼 떠있는 마른 흑색 눈동자를 발견했다. 중심을 잡지 못한 재경이 그대로 발을 헛디뎠다.
“조심해!”
굴러떨어질 뻔한 그를 부드럽게 받은 류제는 충격이 가지 않도록 계단 아래에 사뿐히 착지했다.
재경이 소리 소문도 없이 다가온 인물에 벌렁거리는 심장을 억누르고 있으려니 웬 더벅머리 남자가 아는 척을 해댔다.
“렌? 렌 맞지?”
남자도 두근거릴 법한 낮은 미성이 맞닿은 피부에서 울렸다. 앞머리로 얼굴이 가려진 데다 사진보다 더 크고 어른스러워진 몸뚱이에 그가 누구인지 못 알아봤던 재경이 오른쪽 어깨가 욱신거려 얕은 비명을 질렀다.
그리움에 사무친 나머지 환각이라도 보는 걸까? 실물에 놀란 류제의 귀에는 비명이 닿지 못했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존재가 어디도 아닌 제립학교에 있었다. 기쁨과 놀라움과 혼란스러움에 마음에 요동쳤다.
“지금까지 어디서 뭐 하고 있던 거야? 학교는 언제 왔어?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탈영했다는 말은 거짓말이지? 몸은 왜 이렇게… 이렇게……!”
환상처럼 사라져버리면 어쩌나 도망가지 못하도록 끌어안은 류제는 2년 반 만에 보는 그를 조곤조곤 몰아붙였다. 납치 사건 때 다쳤던 부분이 병원에서 봤던 것처럼 붕대로 감겨있었다.
무사하기를 바랐기에 부상은 상상으로 그쳤으면 했는데…….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학교로 왔다면 비키나 유네가 알았을 텐데 왜 몰랐지?
류제가 한쪽 얼굴을 가린 면포에 떨리는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픈 건 재경인데 왜 그가 울 것 같은 표정일까. 치부가 드러나는 것 같았던 재경은 상처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렸다.
“렌… 렌……! 무사해서 다행이다. 살아있었구나. 제대로 살아있었어.”
몸을 떨며 번거롭게 끌어안고 마는 류제가 재경은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이 한여름에 감정으로 끓어넘쳐야 하는 피부는 차갑기 짝이 없었다. 루나가 몇 번이고 편지를 보냈지만 답하지 않았던 주제에 학교에서 마주치니 그제야 걱정하는 척을 하는 거다.
설마 선생님이 말해줬나? 쓸데없는 짓이다. 평생 몰라도 괜찮았다. 위대한 전쟁 영웅 류제 신리와 직접 마주해서 더 초라해지길 바라지 않았다.
“놔. 아파, 류제 신리.”
“아, 미안.”
거부하는 차가운 말투에 흠칫한 류제가 손을 놓았다. 세게 잡지 않았는데 약해진 몸은 아픔을 호소했다. 류제를 뿌리친 재경이 땅에 구르는 목발을 줍기 위해 헛손질을 했다. 류제가 대신 주워주자 빼앗듯이 건네받은 재경은 그를 노려보다 계단을 올랐다.
감동스러운 재회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처음 보는 사람처럼 쌀쌀맞은 태도는 이상했다. 생존 여부만 알았으면 좋겠다는 소원에서 분에 넘치지만 류제는 이 상황을 설명받기를 원했다.
“렌, 나랑 이야기 좀 해.”
“참견하지 말고 네 갈 길이나 가.”
말하기 싫어하는 그와 달리 전쟁 동안 어떻게 마족을 없애고 인정받을 수 있었는지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류제는 끈질겼다. 옆에서 알짱거리며 재경을 따라가던 류제는 절뚝거리는 그가 넘어질 뻔한 것을 부축했다.
“괜찮아? 다리는 어쩌다가 다친 거야.”
“알아서 뭐 하게.”
기억이 안 나니 모른다. 류제가 달갑지 않은 재경은 무시하기로 했다. 솔직히 잡힌 부위가 아파서 신경 쓰기 싫었다. 지금 와서 거짓으로 위해도 신용하지 않을 거다.
짜증스럽게 목발을 짚고 나아가는데 상처가 비틀린 건지 어깨 붕대에서 핏물이 비쳤다.
“윽……!”
또야. 제기랄. 아파서 이를 악문 재경이 헉헉 심호흡을 하며 몸을 수그렸다. 도움을 주고 싶던 류제가 다정하게 물었다.
“도와줄게.”
“내버려 둬. 어차피 양호실로 가고 있었어.”
“렌, 저번 일로 아직 화난 거야?”
류제는 그때 자신이 했던 말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렌이 힘들어하는 이유를 몰랐던 그는 제멋대로 마음을 고백한 주제에 거절당하자 심한 말로 난도질했다.
류제의 깊은 죄책감을 느낄 새도 없는 재경은 귀찮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내 말을 좀 들어줘, 렌.”
없는 사람처럼 무시해도 류제는 실망이나 화를 보이지 않았다. 분풀이를 해서 화가 풀린다면 얼마든지 좋았다. 렌이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 이전까지 뭘 했는지 말해주지 않으니 모르겠으나 지금 중요한 건 렌이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양호실로 간다고 했지?”
“잠깐, 뭐 하는 거야! 이거 놔!”
류제는 싫다는 재경을 안아 들고 곧바로 양호실을 찾았다. 신관 다리를 건너 양호실로 가는 내내 짐승의 등에라도 올라탄 것처럼 식겁해서 몸을 웅그린 재경은 류제의 행동에 영문을 몰랐다. 이 운동신경이 인간의 것이 아닌 것 같아서 더 무서웠다.
“내 말 안 들려? 내려달라고 했잖아!”
“화난 건 알겠는데 네가 힘들지는 않았으면 좋겠거든.”
“뭐? 하, 실컷 내버려 뒀던 주제에―”
1학년 학기 초, 기간트리카 컨트롤에 능숙하지 않아 부상이 잦았던 렌이 수시로 들락거렸던 양호실은 맞이할 손님을 위해 활짝 열려있었다.
어제 렌 지미가 제립학교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세라가 양호실 밖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담당 교사에게서 전해만 들었던 재경의 몰골을 직접 본 그녀는 울컥하는 심정을 삼켰다.
“렌 학생, 오랜만이네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붙어있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니. 재경을 안고 양호실로 다가오는 류제를 세라가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그녀는 그들을 끌어안고 싶은 심정을 한 발짝 떨어뜨렸다. 두 사람도 옛날처럼 쓸데없는 일로 티격태격 다투던 순수했던 때와 다를 것이다.
“세라 선생님?”
“류제 학생도 오랜만입니다.”
류제가 놀라는 걸 보니 그녀가 학교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여태 듣지 못한 모양이다. 하긴 사라진 렌을 찾기 위해 드넓은 키아나트리체 온갖 곳을 돌아다녔을 테니 몸이 두 개가 아닌 이상 학교 일에는 깜깜했겠지.
류제가 가만히 서있는 틈을 타 재경이 내리라면서 버둥거렸다. 팔꿈치로 광대뼈를 얻어맞은 류제가 알겠다며 재경의 발을 얌전히 땅에 붙여주었다.
“렌의 상처가 벌어져서요. 시간이 늦었는데 치료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것 때문에 기다렸던 거랍니다.”
어제 렌의 상태를 전해 들은 세라도 당장 소중한 제자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기억이 없는 렌은 제립학교 관계자들을 향한 경계심이 상당했다. 담당 교사는 괜한 두려움을 살 거라고 경고했다.
그토록 말썽을 부렸던 렌 지미가 세라 밀로니를 경계한다라. 상상도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찾아가겠다는 걸 담당 교사는 스케줄대로 그가 제 발로 양호실에 찾아갈 때까지 기다려달라 부탁했다.
이 시간까지 어찌나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참았는지 지금도 심장이 떨린다. 붕대로 가린 상처에 그녀를 반기지 않는 눈빛을 보자니 그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침통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죠.”
어른스럽게 양호실로 인도한 세라는 하얀 가운을 펄럭거렸다. 도와준다는 류제를 거부한 재경은 목발을 짚고 발을 절며 세라를 따라 들어갔다.
그길로 돌아갈 줄 알았던 류제가 멋대로 함께하자 재경은 울컥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아까부터 남의 일에 참견이 심하다.
“선생님을 다시 학교에서 볼 수 있다니 꿈만 같네요. 양호 선생님으로 들어오신 건가요?”
“아직은 임시지만요. 류제 학생도 아시다시피 올해부터 점진적으로 기간트리카 부대를 줄여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 덕분입니다.”
기간트리카를 장갑하는 목적은 마족을 상대하는 것에 한해야 했다. 마족이 사라진 지금 기간트리카 부대를 키우는 것은 인간과 전쟁을 하겠다는 의지다.
그리하여 키아나트리체를 필두로 한 대마족 인류 연합은 인류 평화 연합으로 이름을 바꾸고 가트 회의는 각국의 기간트리카 부대를 줄이는 방향으로 의제를 정했다. 니냐롯트는 솔선수범하여 키아나트리체의 기간트리카 부대 소속 어빌리터들의 희망 제대를 지시했다.
그때 제립학교 학생들을 전담할 치료 계열 어빌리터 양호교사가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 지원해서 올해부터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던 세라는 이곳에서 전쟁으로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가진 학생들을 돌봐왔다.
부상당한 학생들은 병원 치료 끝에 제립학교에서의 재활로 상태를 호전시켰다. 그중엔 근거리에서 산탄총을 맞은 재경처럼 어쩔 수 없이 ‘힐링 팩터’를 처방받은 학생들이나 사지 결손으로 의수를 사용하여 주기적인 관리가 필요한 학생들이 다수였다.
세라가 담당한 학생들과의 스케줄은 학기 초부터 배정되어 수정이 불가했기 때문에 근무 시간이 끝난 방과 후부터 재경을 위해 시간을 비워놓았다. 어빌리터가 있는 군용 병원은 전흔 치료로 인해 예약이 빈틈없이 차 있고 어빌리터가 없는 일반 병원에서 치료받는 것보다는 제립학교의 시설이 훨씬 훌륭했다.
올 때가 되었는데 점점 늦어지니 양호실에 앉아있지 못한 세라가 문밖을 서성이던 참이었다.
“그럼 계속 학교에 계시는 건가요?”
“그렇죠. 기간트리카 수업보다는 이게 더 적성에 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세라는 환자를 위한 의자 옆에 의자를 하나 더 가져다주었다.
재경의 착석을 도와주는 동안 1여 년 만에 회포를 푸는 두 사람이 친분을 과시했다.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재경은 소외감에 주눅 들었다. 류제 신리의 목적은 저 양호교사였던 건가.
“시원한 물이라도 한잔 드릴까요? 날이 참 덥죠?”
류제가 억지로 안고 달리는 바람에 놀라 벌렁거렸던 심장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던 재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새 옆자리에 류제가 앉았다. 재경은 좀 가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선생님은 렌이 학교에 있는 걸 알았죠? 렌은 어쩌다가 다친 거죠? 선생님이 계셨는데도 왜 렌의 상처는 아직도 이 상태인 건가요?”
“궁금한 게 많겠지만 진정하세요, 류제 학생. 유감스럽게도 저도 아는 게 많지 않습니다.”
차가운 물을 따르고 렌과 관련된 서류를 책상에 가져온 세라가 양호교사 자리에 앉았다.
민감한 질문을 해대며 쓸데없이 참견하는 모양새가 싫었던 재경은 류제가 입을 다물자 드디어 살 것 같았다. 뜨거운 속을 달래려는 듯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던 그는 물이 기도로 잘못 들어가 거친 기침을 터뜨렸다.
“괜찮아?”
“으… 아파.”
왼쪽 입가의 살갗이 찢어져 붕대에서 피가 흘렀다. 진료 전, 세라가 어빌리티로 그를 살폈다. 어쩐지 회복 능력이 잘 듣지 않아 병명을 추측했던 세라는 불안을 내비치지 않았다.
“이 몸으로 혼자 학교까지 왔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을 도와준 사람이 누군가 있을까요.”
“아야… 네, 명령서를 받아서 왔는데 신세 지고 있는 분한텐 폐 끼치고 싶지 않아 혼자… 윽.”
“아프죠? 미안합니다. 조금만 참아주세요.”
한번 상처가 벌어지면 피가 잘 그치지도 않고 그친다 할지언정 진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게 재경의 몸이다.
그래야만 하는데 지금은 세라의 손에 고통이 사라졌다. 상처가 나아가자 재경이 안도했다. 그도 드디어 나을 수 있을 가능성이 보였다.
“누가 너한테 명령서를 보냈어? 신세 지고 있는 사람은 누군데?”
류제는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힘을 사용하기에 제약이 많았다지만 인간들과 비견 불가능한 능력을 소유한 그보다 더 빨리 렌을 찾은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그의 뒤에는 니냐롯트와 셀로니아 후작가, 하물며 나르타 상단의 정보력까지 있는데 명령서를 보냈다면 분명 그의 귀에 소식이 들렸어야 했다.
“렌 학생도 어제 막 제립학교에 복귀해서 모르는 것들이 많을 겁니다. 이야기는 지금부터니 그만 앉으세요. 류제 학생.”
“어제? 렌, 너 계속 학교에 있던 게 아니었어?”
“렌 학생은 저와도 지금 처음 만났습니다. 류제 학생도 누군가에게 전달을 받고 학교로 돌아온 게 아닌가요?”
류제는 주변을 둘러보라는 이상한 말을 했던 니냐롯트의 통신을 번뜩 떠올렸다. 아아. 그는 니냐롯트가 왜 굳이 제립학교로 불렀는지 알아차렸다. 렌을 찾은 것은 그녀다.
그 녀석, 렌이 살아있는 걸 알았으면 왜 내게 먼저 알리지 않았던 거지? 무슨 속셈이야?
“치료하기에 앞서 당신께 질문할 것들이 몇 개 있습니다. 천천히 해도 좋으니 답해주세요.”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나오지 않자 손을 거둔 세라는 담당 교사의 소견과 지금 재경의 상태가 적힌 서류를 내밀었다.
어째서 그가 다친 상태로 제립학교로 왔는지 세라도 몰랐다. 그러나 저 상처가 오래된 것임은 담당 교사가 쓴 렌 지미의 진술이 아니더라도 어빌리티로 몸을 진찰해서 알 수 있었다. 거기에 적힌 전생활 혹은 심인성 기억상실증이라는 추가적인 정보를 세라는 확인해야만 했다.
“렌 학생, 절 알아보시겠어요? 제 이름이 뭔지 기억하시나요? 저는 당신의 무엇이었죠?”
당연히 알고 있을 질문을 물어도 재경은 답하지 못했다. 낯선 이와 마주한 재경의 눈에는 그녀를 향한 두려움이 섞여있었다. 이 여인은 류제와 마찬가지로 그 사진에 있던 인물이다. 하지만 세라가 원하는 대답은 그게 아닐 터였다.
“모르겠나요? 류제 학생도?”
신문에서 말하는 류제나 루나와 아세미가 말하는 류제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재경이 알고 있는 류제는 없었다. 침묵이 이어지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재경이 죄책감에 고개를 숙였다.
재경에겐 그들과 함께한 추억이 텅 비었다. 아무리 살갑게 아는 척해도, 재경이 괜히 류제에게 심술을 부려봐도 생면부지의 타인이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왜… 왜 그래, 렌. 세라 선생님이잖아. 우리 1학년 8반 담임이었던. 제대로 대답을 해야지.”
류제가 예상치 못한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독려했다. 세라 선생님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차라리 농담이라면 좋겠다. 재경은 난감하다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의 표정에는 거짓이 없었다.
“렌, 정말로 내가 누군지 몰라? 아까 날 제대로 불렀잖… 아.”
감탄으로 말을 끝낸 류제는 방금 렌이 그를 성까지 이어 불렀음을 떠올렸다.
단순한 렌은 절대 사람을 그런 식으로 부르지 않았다. 단지 그에게 화났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달랐다. 전쟁은 승리했고 마족이 사라졌으며 류제 그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았던 시점에서 렌은 배포가 큰 만큼 이전의 일에 화가 났더라도 다시 만난 류제를 한 대 때리는 것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했을 것이다.
“렌, 대답해 봐!”
“시끄러워. 소리 지르지 마.”
어쩐지 침착하고 기운 빠지는 목소리다. 재경이 부정하지 않으니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류제의 눈에 슬픔이 얽혔다.
쀼루퉁하던 재경은 류제가 언제까지 착한 척하며 사정을 모르는 척할 수 있을까 떠보려다 괜한 감정싸움임에 먼저 지쳤다. 지금껏 편지를 보내도 무시하던 류제와 그가 얼마큼 친한 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재경은 아무래도 좋은 사실을 알려주었다.
“네 이름은 루나 누나가 알려줬어.”
“루나라니. 수…수녀 누나? 잠깐만. 너 우리 고아원에 있었던 거야?”
가증스러운 말을 하는 이유는 저 양호교사 때문인가. 류제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니 재경은 쓸데없이 주절거렸다며 후회했다.
“어째서 남부에 있어야 할 네가 서쪽에 있는 건데? 부대에서 떠나고 네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몰라.”
돌아오는 답은 퉁명스럽다. 무슨 일이 있었건 알려주고 싶지도 않고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재판을 피할 수 없고 기억을 못 하는 이상 그는 죄인이다. 그전에 빨리 이 아픔에서 자유로워질 수만 있다면 결과는 상관없었다.
“사람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을 겪었을 때 기억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군요. 2년이라는 세월 동안 렌 학생의 머릿속에 우리들의 존재는 아주 깊게 가라앉은 것일까요.”
그녀도 류제처럼 불합리한 감정에 벅차서 현실에 반박하고 싶었다. 침착하려는 세라는 그가 기억을 잃었다는 담당 교사의 상담 진술을 읽었을 때 그게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렌의 거짓말이길 바랐다. 실제로 만나도 제발 그랬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 깊은 어딘가에 분명 있을 거예요.”
활기차고 희망의 꿈을 꾸었던 작별의 순간의 렌과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그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착잡했는지 류제가 앞머리를 쥐어뜯듯 뒤로 넘겼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는 류제의 맨얼굴을 재경은 그때 처음 보았다.
또래라고 생각될 수 없을 정도로 덩치도 크고 몸이 단단해서 다친 자신과 더욱 비견되었는데 몸뿐만 아니라 얼굴이 생각했던 것보다, 아니 상상을 넘어서는 비현실적이었다. 단순히 잘생겼다는 말도 모자랄 만큼 어쩜 사람이 저렇게 생겼을까 얼이 빠졌다.
저도 모르게 넋이 빠져라 구경하다가 류제와 눈이 마주치자 재경이 휙 고개를 돌렸다. 아세미가 왜 그와 류제 신리가 친구가 아니라고 단언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기억을 떠올리는 건 경과를 보고 오늘은 몸 상태를 점검하지요. 류제 학생, 붕대를 푸는 걸 도와주시겠어요?”
“맡겨주세요.”
“렌 학생, 상의를 벗어볼게요.”
재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드디어 상처를 치료하는 시간이다. 류제가 복잡한 심정으로 재경의 몸에 손을 댔다. 미안하다며 작게 속삭인 류제는 재경의 와이셔츠를 끌러 몸을 휘감은 어깨 쪽 붕대를 조심히 풀었다.
드러난 살갗에는 보통과는 형태가 다른 흉측한 상처가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몸이 상처를 회복시키려다 실패한 흔적들이 낭자하다. 이 더운 여름에 땀과 함께 진물로 불어터진 살갗, 딱지가 엉망으로 얽혀 점점 썩어가는 몸은 지독한 냄새로 코와 눈을 괴롭혔다.
붕대를 풀면서 드러나는 상처들에 반응하지 않으려 류제가 차분하게 움직였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건지, 이렇게 될 때까지 왜 학교로 오지 않았는지. 더 빨리 렌을 찾지 못한 무력감은 용인의 힘을 깨달은 이후로 처음이라 목울대가 저려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상처를 촉진하며 어빌리티를 발현한 세라는 가장 심각해 보이는 어깨부터 팔목까지 손끝을 대고 훑었다. 깊은 곳에서부터 삭아가는 상처는 조금 스치기만 해도 고통이 클 것이다.
“상처가 오래도록 낫지 않으신다고요. 언제부터 이랬나요?”
“낫지 않는다뇨?”
지금이라도 세라를 만나 치료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안도하던 류제가 되물었다. 잠시 류제를 저지한 세라는 대답을 유보하며 다시 물었다.
“언제부터 다친 상처가 낫지 않았는지 기억나시나요?”
“재작년에… 눈을 떴을 때부터요.”
처음에는 재경도 살아는 있으니 언젠가 아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어떤 약을 발라도 몸은 회복을 거부했다. 오히려 깨어난 이후로 상처 범위가 점점 늘어나서 여기까지 번졌다.
역병이라도 감염된 것 같은 모양새라 시설에서 쫓겨날 위기였던 그를 우연찮게 신부가 발견하고 고아원에 데려다주었다.
“어쩌다 다쳤는지는 기억이 없으시고요.”
“네.”
“수녀 누나는 뭐라셔?”
왜 렌이 고아원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마음 여린 수녀가 렌의 몰골을 보고 눈물을 보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꼬치꼬치 캐묻는 걸 렌이 불쾌해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류제는 물었다.
“편지로 물어보지 그래?”
재경은 대답을 회피했다. 그야 그렇겠지. 류제는 한숨을 삼켰다. 기억 속에 부재하는 자신을 부정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현실이 아팠다.
세라는 벌어져 가던 상처를 조금씩 이어 붙였다. 그녀의 손이 훑은 자리는 고통이 점차 줄어들었다. 어떤 의사가 살펴도 호전이 없었는데 학교로 오길 잘했다고 재경은 생각했다.
세라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세라는 어빌리티로 몸을 완전히 치료하는 대신 굳은 진물을 천천히 박탈시키고 제거되지 못한 각질을 살살 긁어내 조심스레 소독약을 발랐다.
그건 세라의 어빌리티에 한계가 와서 치료를 유보하는 게 아니었다. 회복 어빌리티마저 저 몸에서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썩은 냄새가 나는 상처를 덜 독한 소독약으로 툭툭 두드린 세라는 이를 질끈 악물고 고통을 인내하는 재경을 보고 이런 부분은 타고난 천성이구나 싶었다.
다음엔 얼굴이었다. 류제는 세라의 치료 방식에 의문을 느꼈지만 일단 그녀를 도와 재경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붕대를 풀었다. 어깨의 상처를 생각하면 이곳도 희망적이지는 않았다. 각오를 마친 류제가 한 겹, 두 겹 붕대를 걷어냈다.
“그쪽 눈은 전혀 보이지 않는 건가요?”
“네.”
하관을 고정시키는 붕대가 벗겨지니 발음이 샜다. 검게 물든 오른쪽 눈은 찢어진 상처에서 나오는 진물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광대를 따라 입 안쪽까지 난 상처에 보는 이도 아팠다.
어깨와 마찬가지의 조치를 취한 세라는 그나마 덜한 왼쪽 아킬레스건의 상처를 마지막으로 붕대를 자르던 가위를 내려놓았다. 요술처럼 한 번에 나을 거라고 당연히 생각하지 않았던 재경은 가벼워지고 아프지 않은 몸에 희망을 가졌다.
“이대로 끝인 건가요, 선생님?”
류제가 물었다. 산처럼 쌓인 붕대를 버리던 세라가 곰곰이 헤아렸다. 그녀의 치료 스타일과 다른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음을 류제도 알 것이다.
말을 해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불쌍하다고 진실을 숨기면 렌은 몸이 천천히 죽어가는 것도 모르고 지낼 것이다. 자리에 앉은 세라는 기분이 나아 보이는 재경의 손을 조심스레 마주 잡았다.
“아픈 것은 어떤가요?”
“많이 나아졌어요. 감사합니다. 어떻게 한 건가요? 이게 어빌리티인가?”
“그래요, 제 어빌리티 중 하나입니다.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죠.”
아까보다 들뜬 말투에 옛날 생각이 난 세라가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재판을 앞둔 아이에게 슬픈 소식을 전해주어야 하니 책임이 막중했다.
“저는 언젠가 렌 학생의 절단된 새끼손가락도 붙여준 적이 있습니다. 산탄총에 맞아서 오른쪽 상반신이 망가졌을 때에도 치료했었지요. 놀다가 머리를 부딪쳐 혹이 났을 때에도 낫게 했었죠. 넘어진 상처도, 길거리 한량과 싸우다가 생긴 상처도, 친구와 멋대로 기간트리카 대결을 하다가 정신을 잃었을 때도요. 우리 말썽꾸러기는 참견하는 걸 좋아해 많이도 다쳤습니다.”
세라는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강제로 벌렸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스스로 채찍질을 해서라도 내뱉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렌 학생, 저는 당신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저도 노력하겠지만… 저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겁니다.”
“세라 선생님, 그 말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만 현재 렌 학생의 몸이 스스로 상처를 치료할 힘이 없습니다. 그게 없다면 저도… 저조차도 치료는 불가능합니다.”
그녀의 능력은 상처를 마냥 낫게 하는 게 아니라 회복을 가속시켜 주는 것일 뿐이다. 절대 만능이라고 부를 수 없이 한계가 명확한 어빌리티였다.
“그리고 이런 상처는 보통 힐링 팩터의 부작용으로 유명합니다. 학생은 전쟁 전에 사정이 생겨 힐링 팩터를 맞은 적이 있지요. 단시간에 여러 번 사용하면 이런 증상이 나타납니다. 지금 인류는 이 부작용을 낫게 하는 법을 모릅니다.”
“…….”
“힐링 팩터를… 기억이 있는 동안 사용한 적이 있나요?”
그게 뭔지 모르는 재경이 류제를 힐끗거렸다. 류제는 제발 어떠한 말이라도 해보라는 것처럼 침묵으로 대답을 요구했다. 두 사람의 부담스러운 감정들이 흘러 들어와서 그마저도 마음이 아렸다.
“모르겠어요.”
“의심이 가는 어떤 것도 좋습니다.”
“아무것도 기억 안 나요. 눈을 떴을 때 제가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걸 쓰면 안 되는 건가요? 저는… 제 몸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몸이 제 한계를 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하겠죠.”
상처가 점점 번져서 죽게 된다는 말에 재경은 기억을 잃기 전에 한 행동이 새삼 무서워졌다.
시한부라는 말이 류제는 지독하게 고통스러웠다. 살아있지만 죽어간다는 세라의 판단은 진실이다. 세라마저 불가능하다는 건 용인의 힘으로 강제로 상처를 이어 붙인다 할지언정 렌의 몸은 언젠가 다시 무너질 거라는 의미와 상통했다.
“힐링 팩터의 부작용이라면 그 약물로도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의미인가요?”
“절대 써서는 안 돼요. 처음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건 저 아이의 말라가는 생명력을 쥐어짜서 수명을 단축시킬 거예요. 안 그래도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상태인데 그랬다간 렌 학생은 지금보다……!”
감정이 격해진 세라가 울부짖는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 숨을 멈추었다. 그녀가 울자 재경은 부담스러워서 몸을 움찔거렸다. 자신이 그 정도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듣자 하니 힐링 팩터라는 약물은 사람 몸을 치료하는 마법의 약 같은데 과거의 자신이 그걸 사용한 이유는 그저 죽기 싫어서가 아닐까. 욕심꾸러기라서 자기 혼자 독점했겠지.
“그럼 렌은 손쓰지도 못하고 저대로 주… 상처가 심해진다는 건가요?”
“그게 이 부작용의 무서운 점입니다, 류제 학생. 이건 힐링 팩터를 자주 맞는 노련한 군인에게서도 잘 발견되지 않는 부작용입니다. 어째서 렌 학생이 이런 부작용을 앓고 있을까요. 힐링 팩터를 처방할 수 있는 사람이 이 부작용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렌 학생은 전쟁 전에 그런 일도 당했지 않습니까.”
세니타리 롯의 우두머리인 스콜라 맥도어의 짓으로 크게 다쳤던 렌이기에 류제가 더 그를 후방으로 빼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 때문에 서로 멀리 떨어져 현재의 류제는 베일에 싸인 렌의 과거를 풀어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상처 주변이 쉽게 물러져서 평생 조심해야 합니다. 저의 어빌리티로 치료를 하는 것도 몸이 약해진 렌 학생에겐 힐링 팩터를 사용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약물처럼 독하지는 않겠지만 제 능력도 힐링 팩터처럼 인간이 가진 회복력을 강제로 끌어올리는 것이니까요. 앞으로도 오늘처럼 천천히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치료 경과를 보는 걸로 하지요.”
“의수는요? 그건 사용할 수 있나요?”
불편한 다리 대신 지탱해 줄 것이 필요했던 재경이 그것만큼은 가능하길 바라며 욕심을 부렸다. 세라는 고개를 저었다.
“슬렉터의 의수 모드 말씀하시는 거라면 추천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몸은 아주 약해진 상태입니다. 의수를 사용하려면 재활까지 몇 번이고 연습을 해야 하는데 당신의 다리가 그걸 버텨줄지 모르겠어요.”
들어오는 질문마다 안 된다는 말로 돌려줘야 하는 세라는 괜한 미안함이 들었다. 아까부터 고개를 숙이고 있는 류제는 무력감을 탓하는 것인가. 씁쓸하다.
“힘든 건 알고 있습니다, 렌 학생. 제 욕심일지라도 학교에 있는 동안 사람들을 만나면서 기억을 떠올려보세요. 피난민들을 버리고 도망이라니 절대 아닙니다.”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당신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 거예요. 저도 그렇게 믿고요.”
치료를 하는 동안 벌써 해가 저물었다. 퇴근할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렌을 위해서 기꺼이 시간을 내준 세라는 기숙사로 돌아가는 재경을 깊게 끌어안아 안도감을 전했다.
“전 계속 양호실에 있을 테니까 내일도 이 시간에 와주세요. 이상이 생기시면 언제든지 와도 좋아요. 아시겠죠? 아프다고 참지 마세요. 그게 당신의 가장 나쁜 버릇입니다.”
세라가 걱정하는 심정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재경은 공감하지 못했다. 이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은 과연 기억을 하지 못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기억을 하는 사람일까.
“수고하세요.”
“그럼 내일 또 뵙겠습니다.”
결국은 그의 몸은 점점 죽어갈 거라는 소식만 들은 재경은 세라에게 꾸벅 인사했다. 류제가 세라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 재경은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목발을 짚고 혼자 힘으로 나아갔다. 류제가 놀라 그를 뒤쫓았다.
세라는 처참한 재경의 뒷모습을 보고 참아왔던 눈물을 훔쳤다. 왜 세상은 저 작은 아이에게 이런 거대한 시련을 남겨준 걸까. 이 시련은 저 아이가 견디기엔 버거워 보였다.
“분명 당신에게 극복할 수 있는 시련이 왔을 겁니다. 제발요.”
몸이 아픈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울 텐데 재판이라니. 군 재판이 까다롭다는 건 세라도 알았다. 유네의 납치 사건 때 스탈라 조약을 어긴 사건으로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도 뼈저리게 느꼈다.
이제부터 세라가 할 일은 8월에 있을 재판 때까지 그를 치료하고 왜 그의 몸이 이렇게 되었는지 조사하는 일뿐이었다. 그녀는 깜깜해진 복도를 둘러보다가 정리를 위해 양호실로 들어갔다.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15권에서 계속)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1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