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권-에필로그. [돌아오는 길] (3) (74/112)

에필로그. [돌아오는 길] (3)

혼자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재경을 끌어안은 류제는 재경을 기숙사 방까지 귀하게 데려다주었다. 본의 아니게 공주님 안기로 치욕을 준 주제에 방에 들어오려고 하자 재경은 류제를 당장 내쫓았다.

“혼자서는 힘들잖아!”

대답 없이 쾅 닫힌 소리에 코끝이 찡하게 부딪혔다. 류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양이가 되었던 렌이 남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단단한 벽을 뚫고 들어갈 수 없다. 화난 게 아니라고? 차라리 화가 나서 저러는 거면 낫지 전쟁 전의 기억을 잃었다니 그건 더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아.”

온 힘을 다해 거절당한 류제는 기껏 강한 척을 해오던 다리가 휘청거렸다. 한계가 온 그는 그 자리에서 잠시 허리를 숙였다. 어지러울 정도로 머리가 복잡한 건 오랜만이다.

렌이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지금껏 혼자서 무슨 고생을 해온 거야. 렌을 찾기 위해 쥐 잡듯이 단서를 뒤져왔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전쟁에서 이기는 길만이 렌을 지키는 수단이라고 여겼는데 헛짓거리를 했다는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1년간 렌을 찾기 위해 하루도 잠들지 못했던 류제는 렌이 살아있다는 안도감과 기억을 잃어버릴 정도로 고통받았을 상처에 대신 머리가 아팠다. 마족을 놓아주어야 했을 때도 이렇게 슬프지는 않았다.

“제길.”

결국 닫힌 문밖에 주저앉은 류제는 참아왔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를 따르는 공기 속 드라코니스 입자가 동요했다.

그는 감정을 꾹꾹 억눌렀다. 렌을 찾기 위해 키아나트리체를 헤매던 때에도 포기하고 울면 렌이 죽었을 거라고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다며 버텼는데 살아있음에도 슬프다.

“멍청한 자식.”

이런 힘을 가졌는데도 참 무능력하다. 그는 그때 불꽃 앞에서 맹세했던 그 어떠한 것도 지키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참견하는 게 우습다는 건 알았다. 등잔 밑을 찾지도 못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어 보이는지도 말이다.

한 종족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마왕이라고 한들 인간일 때와 똑같다. 그는 여전히 유약하고 렌을 사랑했다. 인간을 증오하는 게 아니라 너무 사랑해서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천 년에 달하는 마왕의 기억은 증오밖에 없어 이다지도 쓸모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은 류제는 성큼성큼 걸었다. 그에겐 해야 할 일이 남았다.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벌기 위해 1층 출구를 통해 빙 둘러 A동 기숙사 건물을 나서던 류제는 자신의 옛날 기숙사 주소에 편지가 산더미처럼 와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쩐지 아세미라는 글자가 밟힌다.

“편지…….”

그래서 렌이 퉁명스러웠구나. 루나는 그가 학교에 있을 거라고 여긴 것이다. C동으로 바뀐 기숙사 주소도 말해주지 않았으니 유네나 비키도 당연히 편지를 못 봤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아무 편지나 뜯어보니 아세미가 바보 메기가 이상하니 빨리 오라고 조금은 어른스러운 글씨로 적었다. 루나도 렌의 상처가 심하니 방법이 없겠냐고 물어보는 등 몇 통이나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수십 통이 넘는 남은 편지는 돌아왔을 때 읽기로 하고 그는 원래 볼일이 있었던 니냐롯트를 찾았다. 시간이 늦었으나 늦어지는 이유를 니냐롯트도 짐작했을 것이다. 안 그랬더라면 통신으로 독촉을 했겠지.

용인의 신체 능력을 이용해 학교 옥상에 도착한 류제는 은하수가 흘러내리는 뻥 뚫린 하늘 아래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니냐롯트와 마주했다. 은장도로 잘라버려 삐뚤빼뚤했던 머리가 이제는 조금 길었는지 반듯하게 찰랑거렸다.

“렌 지미와 만났나?”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성큼성큼 다가오는 류제의 말투에는 배신감과 분노가 조금 담겨있었다. 렌에게 죄책감이 있는 니냐롯트가 잔인한 짓을 못한다는 건 알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제 그가 학교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말해줄 수 있다만.”

“렌이 살아있다는 건 그전부터 알았을 거 아냐!”

“그걸 알렸다면 그대는 당장 조사를 멈추고 렌 지미가 있는 곳으로 향했겠지. 그대는 렌 지미를 숨겨줄 것이고. 그렇다면 그는 재판을 받을 수 없다. 진정한 범법자가 되어버리는 길이 빤히 보이는데 알면서도 말해줄 수는 없었다.”

니냐롯트가 렌 지미의 생존을 안 건 한 학도병의 보호자가 보낸 편지가 학교에 도착했던 때였다. 알라마니 기술관을 통해 분석한 결과 동봉된 슬렉터의 마지막 사용자가 렌 지미라는 것을 알아냈다.

누군가가 도용한 것일 수도 있으니 본인이 올 때까지는 반신반의했지만 어제 그를 만나 직접 확인한 니냐롯트는 렌 지미의 무죄를 위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에서 가장 필요한 자는 마왕의 힘을 가진 류제 신리였다.

“렌 상태 못 봤어? 저런 몸으로 어떻게 군사재판을 따라가! 아무리 작전 포기니 뭐니 해도 너 설마 그 말을 그대로 믿는 거야?”

“그대는 렌 지미가 그대가 지켜낸 땅에서 떳떳하지 못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가? 그 몸으로 평생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숨어 살기를 바라? 아니면 제대로 된 치료도 못 받고 숨어 지내며 점점 죽어가길 바라는가?”

류제는 할 말을 잃었다. 정의로운 니냐롯트의 성격은 안다. 하지만, 하지만 재판이라니. 렌이 탈영을 한 이유는 몰라도 절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니냐롯트가 저런 말을 하겠지만 도무지 그를 증명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넌 황제잖아. 재판을 막을 수 없어?”

“그대도 지금 궁지에 몰린 귀족파들이 내 흠을 잡으려고 한다는 걸 알겠지. 선황 폐하께서 갑작스레 승하하셨으니 내 기반은 제대로 다져지지 않았다. 나는 외줄타기를 원하지 않아.”

지금 그녀가 단지 친우라는 이유로 한 군인의 죄를 눈감아주려고 한다면 그들은 옳다구나 하고 어빌리터를 포함해 그녀를 물어뜯을 것이다. 니냐롯트는 그 재판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쓰고 싶었다.

“그가 피난민들을 두고 그냥 도망갔을 리는 없다는 걸 알지만 그걸 남들에게 증명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증거가 필요하다. 나는 그대가 그 증거를 확실히 모아주기를 바랐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게 렌 지미의 명예를 되찾게끔.”

그동안 렌과 접점이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조사하고 다녔던 그 자료가 류제의 손에 있었다. 이제는 한 권이 꽉 찬 다이어리를 펼쳐본 류제가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별것 없는 내용을 닫았다.

“내가 아는 건 렌이 부대를 떠나는 그 순간까지야. 단지 그 사실만 가지고는 오히려 야비한 사람처럼 보이겠지. 유일하게 진실을 알고 있을 렌은… 기억이…….”

“사라져버리고 말았지. 전쟁을 막지 못한 우리가 가질 죗값이라는 것처럼.”

니냐롯트도 홀로 감당하기엔 거대한 왕좌에 앉아버린 탓에 조그마한 그만을 보살필 수 없다는 한계가 마음 쓰라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당장 가진 무기로 렌 지미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지키기 위해 이 힘이 있는 만큼 그녀는 전쟁을 막기 위해 순수하게 노력했던 렌 지미를 지켜내고 싶었다.

“그대만이 할 수 있어. 부탁한다. 재판 전까지 그 증거를 찾아주기를 바란다.”

“부탁하지 않아도 할 거야.”

렌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재판을 위해 렌의 기억을 되찾고 몸을 고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마족의 계획을 막고 싶었던 렌을 위해 류제가 나설 차례다.

학교 옥상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그는 아래에서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고 있는 루이나를 지나쳐 렌이 있을 A동 기숙사로 향했다.

* * *

그날 저녁, 침입하려는 류제를 내쫓고 기숙사 방을 사수한 재경은 드디어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문을 닫기 전 그에게 거절당한 류제는 생긴 것답지 않게 침울해 보였다. 내 몸이 아프다고 분풀이에 너무 이용한 건가 조금은 미안하다. 하지만 역시 반성의 기미가 없는 류제 신리의 행태는 못마땅했다.

미적미적 신발을 벗은 그가 목발을 내려두고 책상으로 향하려는데 부재중일 동안 방에 도착한 과거 기숙사 짐들이 발에 챘다.

거기에 달린 이상한 고양이 캐릭터 고리가 거슬렸다. 알지도 못하는 과거가 물질적으로 알짱거리니 공연히 싫다는 감정이 앞섰다. 류제 때문에 풀릴 심술도 풀리지 않는 건가 재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재경은 본목적을 위해 책상에 앉아 스탠드를 켰다. 재판도 재판이지만 그의 치료를 전담할 세라에게서 부정적인 소식들만 들으니 울적하다. 지금 가장 걱정할 루나에게 근황을 담은 편지를 보내는 것조차 머뭇거려질 만큼 마음이 무거웠다.

아무리 최첨단 시설을 소유한 제립학교라도 그의 몸은 망가져가고 재판은 유죄가 된다. 미래가 없는 그에게는 희망이 끊어졌다.

그럼에도 재경은 누구와 다르게 편지를 쓰겠다고 다짐했다. 유치하다고 말해도 좋다. 잡동사니가 든 가방 안을 뒤적거리다 쓸 만한 공책을 꺼낸 그는 별 이상한 내용이 쓰인 낙서장을 차르르 넘겼다.

마지막으로 글자가 적힌 부분까지 넘기니 날 선 글씨체가 위협적이다. 그 날짜가 전쟁 전인 재작년 2월이라는 게 재경은 생소했다.

과거의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중간부터 공책을 훑어보던 재경은 과거의 알쏭달쏭한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히로인’이니 ‘호감도’니 소름이 끼쳐 읽다 포기한 그는 공책 빈 부분만 찢어 가방 안에 던져 넣었다.

왼손으로 어색하게 필기구를 쥔 재경은 막상 편지를 쓰려니 자신이 완벽한 오른손잡이였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막 글씨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어색하게 힘이 들어가도 성실하게 빈 종이에 흑연을 댄 그는 무슨 말부터 꺼낼까 고민했다. 아가타에는 잘 도착했다? 오늘 처음 전담 치료를 받았다? 류제 신리를 만났다? 뭘 써도 루나는 걱정만 할 것 같다.

―12시가 되었습니다. 밝은 내일을 위해서 일찍 잠이 듭시다. 소등합니다. 이상.

벌써 소등할 시간이다. 책상에 앉아 한참을 고민하던 재경은 연필을 놓았다. 오늘은 포기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겠지. 상황이 좋아질 수도 있는 거고.

절망적인 미래가 기다린다지만 오늘은 괜찮았다. 상처가 조금 아물어 몸이 가볍고 아픔이 덜하다. 그래도 아침이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진통제를 한 움큼 삼킨 그는 무겁게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있으려니 소등 방송이 나오며 불이 저절로 꺼졌다.

새까매진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니 눈이 암순응하여 어렴풋이 사물이 보였다. 해가 떠서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맞이해야 하는 미래가 어둡다. 이대로 잠들어서 영영 깨어나지 않는다면 좋을 텐데.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어두운 밤 열린 베란다 창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커튼을 툭 쳤다.

한여름 열대야가 기승인 나날이 지속되다 보니 끓어오르는 상처로 체온이 올라 잠을 설치곤 했는데 오늘은 시원하다. 차가워서 기분 좋아.

아픔이 덜해 오랜만에 푹 잠이 든 재경은 언뜻 밝아진 방에 미적거리듯 눈을 떴다. 기상 방송은 아직 안 나왔나.

고아원이 좋았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바로 아침이 왔을 때다. 학교에 가기 싫어 꾸물거리던 그는 뒤척거리다가 침대에 그 말고 서늘한 무언가가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흠칫 놀란 재경이 벌떡 일어났다.

“우아악, 뭐야?”

뭔가 했더니 어제 봤던 그 류제 신리가 누워서 자고 있었다. 분명 문을 잠갔는데? 식겁한 재경이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재경의 잠버릇 때문에 뒤집힌 류제의 앞머리 사이로 맨얼굴이 보였다. 이른 아침이지만 인간답지 않은 완벽한 모습이 현실감을 방해했다. 요사스러운 것에 홀린 눈동자가 갈 길을 잃었던 재경은 류제 신리가 거의 맨몸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고 빼액 2차로 소리 질렀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으윽. 아침부터 기운이 좋구나, 너? 건강하네.”

더 이상 자는 척은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크게 하품을 한 류제가 눈을 떴다. 전혀 졸려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진작 일어났던 모양이다. 명백한 사생활 침해 공작에 불쾌해진 재경이 벽에 찰싹 달라붙으며 꿍얼거렸다.

“도대체 어디로 들어온 거야?!”

“어디긴.”

류제는 눈짓으로 열린 베란다를 가리켰다. 반나신의 남정네가 밤새 침투해 함께 자는 기가 막힌 자태를 아침 댓바람부터 경험한 재경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긴 5층인데.

“참견은 어제만으로 충분하잖아. 귀찮게 굴지 말고 네 방으로 돌아가!”

“더운데 열 내지 마.”

“우악!”

아직 이른 시간이었기에 더 자라고 재경을 침대로 끌어당긴 류제는 차가운 몸으로 상처 부위를 식혀주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 침대에 누워있는 재경은 밤새 시원하다고 생각한 게 딱딱한 죽부인 같은 류제의 몸임을 깨달았다. 파충류도 아니고 뭐 하는 놈이야 진짜.

“비켜!”

“뭐야. 부끄러워? 여름에는 자주 이러고 잤는데 새삼스럽네.”

재경의 새빨개진 귓불을 만지작거린 류제가 질겁한 등에 이마를 비볐다. 간질간질한 기분에 재경이 움찔거렸다. 그렇게 말한다고 한들 기억이 안 났지만 차가운 걸 피부에 대니 기분이 좋기는 했다.

어제부터 느꼈지만 한여름 사람 피부가 어떻게 이만큼 차가울 수 있지. 이것도 어빌리티인가 뭔가 그런 건가. 아, 근데 진짜 살 것 같다.

“난 누구랑 같이 안 자! 거짓말하지 마.”

조금 본능에 말릴 뻔했어도 화가 풀린 게 아니었던 재경은 능청스럽게 구는 그를 침대에서 밀쳐냈다. 발에 차여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류제는 바닥에 거꾸로 처박혀 쩝 입맛을 다셨다.

밤새 상태를 살피고 있었던 거지 별로 태평하게 숙면을 취했던 게 아니다. 류제는 자는 내내 더워서 끙끙거리며 식은땀을 흘리던 렌을 떠올렸다.

“이전에 같은 방 썼던 건 사실인걸. 지금은 사정상 내가 C동 배정이라 헤어졌지만. 근데 걱정 마. 오늘부터 나도 이 방으로 옮길 거야. 허락도 받았지.”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서 났는지 모를 서류를 팔랑거린 류제가 상쾌하게 웃었다. 목적을 알 수 없는 지긋지긋한 참견에 재경이 당장 베란다를 가리켰다.

“그럼 C동으로 돌아가! 거기가 시설이 더 좋을 거 아냐. 왜 굳이 내 방에 와서 난리야?”

“너랑 방 쓰는 게 더 좋거든.”

같은 방을 썼던 시절, 한때 류제는 그의 감정을 봐주지 않고 무시하던 렌에게 질려 도망쳤었다. 그것조차 기억 못 하는 재경을 보며 그는 남몰래 씁쓸함을 삼켰다.

동상이몽으로 류제가 더 좋은 C동 방을 두고 굳이 이곳에서 생활하겠다는 말에 재경은 아리송했다. 뭐지?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라도 하려는 건가? 미덥지 못했다.

“아아, 그러셔.”

싱글거리는 류제가 짜증 났지만 재경은 별다른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은 기숙사 시스템을 모르는 그가 불리했다. 공연히 투덜거리던 재경은 보란 듯이 머리를 넘겨 정리하는 류제를 힐끗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옆에 버젓이 있는 다른 침대를 두고 남정네 둘이서 붙어 자려고 하다니 비위도 좋다. 붕대에서 더러운 게 묻어나올지도 모르는데 비위생적이라고 생각 안 드나.

“왜?”

“…아무것도 아냐.”

재경이 팩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서 내려오는 재경을 흘러내리는 앞머리 사이 무감각한 눈으로 흘기던 류제는 부끄러운 티를 드러내는 렌에 순수하게 기뻐하진 못했다. 넋을 잃고 바라보는 시선은 익숙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얼굴만큼은 썩 그의 취향이었던 모양이니.

책상에 올려둔 목발을 잡기 위해 헛손질을 한 재경에게 목발을 넘겨준 류제가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문득 눈에 밟히는 게 있었던 그는 방에 몰래 들어왔던 때부터 궁금했던 사실을 물었다.

“짐 정리는 안 해?”

어제부터 내버려 둔 과거의 짐들이 여전히 방에 굴러다녔다. 어차피 오래 머무르지 않을 테니 그가 떠나면 알아서 처분해 달라 하려던 재경이 신경 쓰지 말라며 핀잔했다. 류제는 가만히 가방에 달린 액세서리를 흘겼다.

류제가 같은 방에서 생활하겠다고 말한 건 농담이 아닌 모양이다. 이만하고 돌아갈 줄 알았던 재경은 씻는 걸 도와주겠다며 화장실에 들이닥치거나 붕대를 갈아주겠다며 사사건건 간섭해 대는 류제가 굉장히 성가셨다.

“너 진짜 어제부터 왜 그래?”

“도와주고 있는데.”

“도움 따위 필요 없어. 동정할 거라면 저리 꺼져!”

“동정? 내가 왜 널 동정해?”

젖은 머리를 닦아주다 말고 불쑥 고개를 내민 류제의 눈빛이 사뭇 진지했다. 응시당하는 재경은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시선에 몸이 얼어붙는 착각이 들었다.

당연히 그의 몸이 엉망인 데다 불명예스러운 미래만을 남겼으니까. 루나에게 신세를 진 류제가 재경이 학교를 떠날 때까지 착한 척 돌봐주는 우등생 노릇을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널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곁에 있는 것 같아?”

류제가 재경의 지푸라기 같은 머리칼을 헤집었다. 어떻게 한 건지 물기가 남았던 머리가 스르르 말라 풀어졌다.

그게 아니라면 편지는 왜 안 받은 건데. 제립학교에 오기 전에는 무시로 일관하다가 태도가 싹 달라졌으니 짐작 가는 건 저런 것뿐이잖아.

어차피 밝혀진바 그는 누구나 동정할 법한 불쌍할 대로 불쌍한 놈이 아닌가. 무연고자에 기억도 잃고 몸은 죽어가는 데다 명예조차 없다. 그런 그를 경멸하든가 동정하든가 둘 중 하나겠지. 불쌍해서가 아니라면 뭔데? 착한 척이라도 하려면 남들 눈에 보이는 밖에서나 하든가.

그렇게 말했다가는 안 될 것 같아 재경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검은색 장막 아래에서 보였던 저 푸른 눈동자에 붉은 기가 보였던 것 같다.

“…아…알았으니까 좀 떨어져.”

잘 모르겠지만 부담스러운 얼굴을 들이밀다니 참을 수 없었다. 재경이 밀어내니 류제는 얌전히 밀려나 주었다. 앞머리로 가려진 얼굴이라면 마음껏 심술부릴 수 있는데 눈이 보이면 어쩐지 시선을 마주칠 수 없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

금세 표정이 바뀐 류제는 쌈박하게 말하며 다 마른 재경의 머리를 정리했다.

이런 것처럼 어딘가 수상한 류제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던 재경은 머리를 굴리다 생각이 번뜩였다. 류제더러 아침과 점심에 먹을 빵을 기숙사 식당에서 받아오라 명령한 재경은 류제가 사라진 틈을 타 잽싸게 옷을 갈아입었다. 빨리 도망치든가 해야지.

빈 가방을 메고 겨드랑이에 목발을 짚은 채 잽싸게 문을 연 재경은 그 짧은 시간 식당에 다녀와 문 앞에 보란 듯이 서있는 류제를 보며 눈가를 실룩거렸다. 호러 장르도 아니고. ‘지금 가게?’라며 호쾌하게 웃은 류제는 등교나 하자며 영차 재경을 끌어안았다.

“이거 놔. 놓으라고! 내가 알아서 갈 거야!”

“지금 나가면 네 걸음으로는 지각할 텐데?”

“그러니까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고!”

“서로서로 돕고 살아야지.”

“안 도와줘도 돼!”

싫다는 재경을 들고 굳이 수치를 주는 류제가 활기차게 걸었다. 이런 꼴로 등교하다니 제정신인 건가 싶었던 재경이 놓으라면서 빽빽 소리를 지르다 늦잠을 자서 후다닥 학교로 달려가는 학생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하나같이 짐 덩이처럼 실려 가는 재경과 소문의 류제 신리를 번갈아가며 흘겼다.

세상에, 이런 부끄러움은 또 처음이다. 몸 둘 바를 몰라 재경이 고개를 푹 숙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무리해서 걷지 않아도 되니 편하기는 하다. 하지만 걷고 싶은 건 또 내 마음이란 말이지. 선생님도 누워만 있으면 욕창이 생기고 근육이 사라져 몸에 부담이 생길 거라고 했고.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자기 마음 편하자고 하는 짓이라면 민폐야!

“이야. 같이 등교하는 것도 오랜만이네.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

류제가 감회에 젖거나 말거나 어디까지 가나 싶어 내버려 두니 류제는 학교 건물까지 들어가 1학년 교실 앞에서 재경을 내려주었다. 사정없이 노려보아도 그 시선조차 즐기는 류제가 잘 들어가라며 친근하게 손을 흔들었다.

설마 교실까지 들어오진 않겠지. 재경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달래며 절뚝절뚝 제자리로 돌아갔다.

“어? 꺄악!”

교실 문 앞에 제립학교에서는 보기 힘든 남자 선배가 있어서 슬쩍 살피던 학생이 소문으로만 듣던 류제 신리를 보고 감격의 비명을 질렀다.

순국한 포르테 들라크루아를 이을 인류의 영웅으로 신문사마다 칭송받는 데다 폐하와도 교제한 적 있다고 해도 의심 없이 납득할 만큼 대단히 훤칠한 3학년 선배가 무려 1학년 교실에 찾아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 엄마야!”

비명 소리에 뒤를 돌아본 여학생들도 저마다 감탄사를 내질렀다.

굳이 신문이 아니더라도 어빌리티 척도가 매우 높았던 류제는 제립학교 선생님들 입에서 자주 오르내렸다. 마족도 반할 만큼 잘생겼다지. 들었을 때는 과장도 심하다 했는데 그의 미모는 앞머리로 절반이 가려졌음에도 후광으로 빛났다.

“응? 왜 그래?”

“서…선배! 아… 으…….”

한마디 했을 뿐인데 심지어 부모님을 연호하며 졸도까지 하는 학생까지 있었다. 조그마한 여학생들이 앞길에 알짱거리자 귀찮아서 적당히 웃어준 류제는 책상에 가방을 거는 재경에게 크게 외쳤다.

“다음 쉬는 시간에 올 테니까 몸 안 좋으면 언제든지 말해.”

“오지 마!”

질겁한 재경이 거세게 반박했다. 류제 신리와 있으면 큰 소리가 안 나올 수가 없다. 이번에는 시선이 재경에게로 향했다. 수많은 눈빛에서 화살이 집중되자 그가 움찔했다.

뭐야, 불쌍한 날 이용해서 여학생들한테 인기 좀 얻어보자는 건가. 그런 짓 안 해도 충분히 인기 넘칠 것 같은데.

시선을 외면하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쓰러진 여학생은 아랑곳없이 류제는 떠난 후였다.

“…뭐야, 저 자식.”

왠지 이대로 있으면 같은 반 여학생들이 아는 사람이냐고 물어볼 것 같아서 당장 책상에 엎드린 재경은 빨리 아침 조회가 시작하는 종이 울리기를 기도했다. 고통은 참을 만하지만 저건 도저히 못 참겠다. 재경은 출석만 하면 곧바로 양호실로 도망갈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1학기 내내 보이지 않다가 오랜만에 등교한 류제는 반으로 가는 길에 드라코니스 입자를 변형해 3학년 교복으로 옷을 바꾸었다. 어제오늘 마법을 꽤 썼으니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사람이 나오겠지. 귀찮아지겠지만 렌을 위해서라면 괜찮았다.

“류제!”

예비 종이 울릴 때쯤 배정받은 3학년 교실로 들어가니 같은 반이었던 비키와 유네가 당장 자리를 박차고 다가왔다.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게 그녀들도 어제 누군가에게서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너, 왜 우리한테 말 안 했어? 렌이 학교로 돌아왔다며!”

“어. 맞아. 엊그제 돌아왔대.”

“그럼 바로 말해줬어야 할 거 아냐!”

행방불명된 렌을 찾기 위해 셀로니아 가문의 힘을 류제에게 준 건 자신인데 왜 류제 신리가 아니라 지인에게서 소식을 들어야 하냔 말이다. 어처구니없었던 비키가 마왕이 되었건 말건 무책임한 그를 쏘아붙였다.

어쩐지 어제 자신이 세라에게 했던 데자뷔가 느껴진 류제가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래서 지금 말해주려고 온 거잖아. 나도 어제 알았어.”

“그걸 말이라고 해? 렌은 어디 있어! 같이 온 거 아냐?”

“1학년 교실에. 그쪽으로 편입됐대.”

“왜? 공백의 2년이 2학년으로 대체되었던 거 아냐?”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 하여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손을 내저은 류제는 새 학기 때부터 텅 비어있던 지정석에 앉았다. 화난 얼굴로 졸졸졸 그를 따라온 비키와 유네는 말은 평범해도 안색이 가라앉은 류제를 살피고 불길함을 삼켰다.

“렌이 왜?”

“기억을 못 해, 우리를.”

“기억을 못 한다니?”

청천벽력에 유네가 당황했다. 렌이 학교로 돌아왔다는 소문이 진짜라니 잘되었다고 기뻐하던 속내가 지금은 찌릿하게 주물럭거렸다.

“말 그대로야. 전쟁 중에 무슨 사건을 겪었는데 큰 부상을 당한 그 후부터 기억이 없나 봐. 게다가 그 상처가 힐링 팩터의 부작용인 것 같다고 세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어. 부상 때문인지 사람을 더 경계하더라고. 갑자기 쳐들어가면 무서워할걸. 나처럼.”

“렌 군이 류제 군을 무서워해? 게다가 다쳤다고? 마…많이 아프대?”

“기억이 없으면 재판은 어떻게 되는 거야?”

비키가 책상을 내리쳤다. 물론 그녀도 렌이 도망을 쳤다느니, 작전을 포기했다느니 무책임한 행동을 했다고 하는 공무원의 판단은 믿지 않았다.

상처는 둘째 치고 렌이 살아있음이 기쁘다. 점점 죽어갈 거라는 잔인한 현실을 모르는 비키는 렌의 더 먼 미래가 걱정되었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는 진실을 밝혀내야 할 재판이 흐지부지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하아, 진짜 난 뭘 하고 다녔던 걸까.”

재경의 앞에서는 차마 표현하지 못한 절망감에 밝은 척을 그만둔 류제가 깊게 한숨 쉬었다. 렌이 바랐던 대로 전쟁이 승리로 끝났지만 그 보상은 가혹했다

“재판은… 정작 렌이 그 이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니 기억에 의존할 수가 없어.”

“다른 방법이 없을까?”

“재판 전까지 증거를 더 모아야 해. 왕녀도 그렇게 요청했고.”

“지금까지 모은 걸로는 부족해?”

“터무니없지. 미싱 링크가 너무 길어.”

근 10개월간 렌이 소속된 부대의 거의 모든 관련자들을 찾아다녔지만 렌이 2년여 전 마지막에 어디로 향했는지는 여전히 장막에 숨어있다. 렌이 학교로 돌아온 지금 끊어진 끈의 마지막을 붙잡았다. 희망적으로 생각하자면 렌의 발자취를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뭐든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렌 군이 우리를 무서워한다니 믿을 수 없어. 그러면 우리도 지금처럼 거리를 두어야 할까? 묻고 싶은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그게 뭐야. 너만 만나다니 치사해!”

“만나는 것까진 상관없는데 각오는 해.”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가 인간이 아니라고 할지언정 소중한 사람에게 거부당하는 건 당연히 상처받는다. 싫다고 밀어내고, 삶에 대한 의욕도 없이 싸늘한 시선은 잘못된 선택을 한 그에게 내리는 형벌 같았다.

“그때 일을 사과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나…나도. 그때 렌 군을 믿어주지 못했으니까. 렌 군에게 제대로 미안하다 하고 싶었어. 그런데 그러면…….”

가장 친했던 류제가 저런 말을 할 정도면 두 사람도 만만치 않게 벽이 쳐질 것이다.

마족에게 세뇌당한 미노타가 키아나트리체를 침공했을 무렵, 제립학교 내 렌 지미의 평가는 땅에 처박혔다. 생각해 보면 반 분위기가 비틀려서 격양된 감이 있었다. 렌을 경계하던 미나 때문이었겠지.

렌이 니냐롯트와 말다툼을 하던 시발점도 그로부터 전제되었다. 그 상황 속에 전쟁은 발발했다. 그대로 렌과 만나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렀다.

“힘들더라도 그때 있었던 일을 기억해 주면 좋았을 텐데.”

그래야만 비로소 사과할 수 있으니까.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환멸한 거라면 어쩌지.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그토록 바란 그는 승리를 보기 전에 좌절하고 만 건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어떻게 해? 끝까지 모르는 척해야 할까?”

“이…인사만이라도 하자. 나… 그 1학년 앨범을 가지고 있거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생각이 날지도 모르고…….”

“아.”

사진. 류제는 자신이 불태운 그것들을 떠올렸다. 그것만큼 과거를 명확히 증명하는 것도 없다. 희망적인 말을 해보는 유네도 확신은 없지만 직접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기억을 떠올리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럼 오랜만에 점심이나 같이 먹을까?”

두 사람에게 제안한 대로 류제는 점심시간에 맞춰 1학년 교실로 향했다. 교실 밖에서 렌을 부르는데 그새 도망친 건지 보이지 않았다. 쉬는 시간마다 가서 얼굴을 비쳤더니 그 전에 발을 뺀 건가 싶다.

“안 보이는데?”

오랜만에 오는 1층 1학년 교실 밖에서 기웃거리던 비키가 꽁지발을 들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있어봐. 짐작 가는 곳은 있거든. 옥상에 먼저 가있어.”

“아, 류제 군!”

3학년이 아래 교실까지 찾아오자 달아오른 얼굴로 힐끗거리던 1학년 학생을 제친 류제가 비키와 유네를 두고 어디론가 달렸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렌이 그대로 사라졌으면 어쩌나 비키와 유네는 서로 마주 보며 걱정을 표했다.

머뭇거림 없이 학교 뒤편 쓰레기장이 내려다보이는 장소에 도착한 류제는 창문에 머리를 들이밀고 외쳤다. 이 장소도 오랜만이라서 새로웠다.

“점심 먹자.”

“으악!”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 안도하던 재경이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언제쯤 알아차릴까 기다리던 류제는 이내 재경이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턱을 괴던 류제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조용히 점심을 먹고 싶었던 재경은 세상 끔찍했다.

“어떻게 안 거야, 진짜! 뭐 하는 놈이야?”

오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영문을 모르겠네. 어렵지 않게 렌을 찾은 류제는 펄쩍 뛰어내렸다. 떨어지면 신체 어디는 박살 날 듯한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착지하자 털이 쭈뼛 선 재경이 점점 영문을 모르겠는 류제의 능력에 물음표가 대여섯 개 떴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기억 안 나?”

“뭐? 뭔 소리야? 날 리가 없잖아.”

“너 화나면 여기 자주 왔거든.”

다 제 손바닥 안이라며 히죽거리는 게 열 뻗친다. 콧방귀를 뀐 재경이 픽 고개를 돌렸다. 마저 빵을 한입 먹으려던 그를 류제가 잠시 저지시켰다.

“오늘은 같이 먹을 사람이 있어. 시간 좀 내줄래?”

“싫어. 왜 네 멋대로 정하고 난리야?”

“안 가면 그 애들이 슬퍼할 거야. 루나 누나처럼. 그 애들은 나랑 달리 착하거든. 만나러 가줄 거지?”

류제가 슬픈 눈동자를 글썽거리며 재경의 손을 잡았다. 협박하는 건가? 힐끗거리며 경계하지만 저 자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오늘도 조용히 지내기는 글렀다고 판단한 재경은 빠르게 포기했다. 기대놓은 목발을 짚은 그는 불편할 텐데도 끙차, 능숙하게 일어섰다.

“따라줘서 고마워. 가는 데까지 좀 도와줄까?”

“됐어. 혼자서도 할 수 있어. 네 참견은 과해.”

저놈한테는 특히 약한 사람 취급받고 싶지 않았다.

이런 걸 보면 기억을 잃은 지금이나 잃지 않았을 때나 똑같다. 아침에도 그 난리를 쳤던 것을 떠올린 류제가 피식 웃었다.

“근데 네가 도망간 바람에 점심시간이 부족해서 말이지 옥상까지는 나한테 맡겨줘.”

“어? 끄아악!”

답을 듣기도 전에 극약 처방으로 높은 곳까지 점프한 류제는 꽤액 비명을 질러대는 우렁찬 목소리에 만족했다.

재경의 걸음으로는 이십 분이 족히 걸릴 거리를 한달음에 이동한 류제는 비키와 유네가 기다리는, 왕녀가 이따금 차 한잔을 즐겼던 신관 옥상에 도착했다.

설마 이럴 줄은 몰랐던 재경이 눈물을 찔끔 흘리며 류제를 꽉 붙들었다. 차라리 쪽팔린 게 낫지 이렇게 급발진하는 게 어디 있어.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 같으니. 나는 환자라고, 환자!

“이 미친 자식아, 갑자기 뭐 하는 짓이야!”

류제가 손을 놓자 미끄러지듯 바닥에 착지한 재경이 목발로 류제를 후려갈겼다. 잘못하다 사람 떨치면 어쩌려고 난리야!

“왜, 주마등이라도 스쳤어? 높은 곳이 무서워?”

“안 스쳐! 안 무서워! 애도 아니고 높은 곳이 무서워서 그러겠냐? 날 뭘로 보는 거야?”

깜짝 놀라 벌렁거리는 심장에 심호흡을 몇 번 하던 재경은 류제가 좀 실망한 눈치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놀리는 거야 아니면 도와주고 싶은 거야.

“렌 군, 안녕?”

빽 소리를 치는 통에 몰랐는데 옥상에는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비키와 유네가 인사했다. 붉은 포니테일에 노란색 리본을 쫑긋 세운 학생과 오늘 하늘 같은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은 조그마한 여자애는 루나가 보여주었던 사진에 있던 그대로였다.

“류제! 주마등이 스치니 뭐니 그게 친구한테 할 소리야? 해도 되는 말이 있고 안 될 말이 있지. 어쩜 배려가 없어?”

저보다 훨씬 거대한 류제에게 겁도 없이 다가온 비키가 정강이를 걷어차며 나무랐다. 얼굴도 잘나서 꺄꺄 비명 소리만 몰던 류제가 1학년 교실에서와 달리 타박받으니 재경은 좀 쌤통이었다.

몰래 히죽거리던 재경은 새초롬하게 생긴 예쁜 애가 이번엔 그에게 향하자 웃음을 멈칫했다. 본능인지 모르겠지만 그에게도 소리칠 것만 같았다.

“뭐…뭔데?”

3학년 교복을 입은 여학생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몸짓은 위축된다. 비키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재경이 눈을 질끈 감았다. 걱정과 반대로 상식인 비키는 류제 대신 그에게 사과를 전했다.

“미안, 렌. 이 짜증 나는 녀석은 사정상 인간으로서의 감각이 이상해졌거든. 괜찮아? 고소공포증도 있는데.”

대화 한번 해본 적 없는 사람이 아는 척하는 것도 어색한데 그녀에게는 그를 대했던 사람들에게 항상 내재되었던 당황이나 안쓰러움이 읽히지 않았다.

붕대투성이 몰골에도 아무렇지 않아 하니 저 녹색 눈이 어딘가 잘못된 게 아닐까 기분이 이상하다. 뭐든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품을지라도 면전에서 불쌍하다는 듯이 굴지 않으면 관계없었다.

“고…고소공포증? 별로 높은 곳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갑자기 날아서 깜짝 놀란 거지.”

서먹해진 재경이 시선을 피할 곳을 찾다가 류제가 점프한 높이를 실감하려는 듯 옥상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점심시간을 만끽 중인 학생들을 시큰둥하게 흘긴 그는 분명 높은 곳에 올라가면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았던 옛날과 달랐다.

“고소공포증이 나은 거야?”

“어? 모…몰라.”

예쁘장하게 생긴 애가 무턱대고 얼굴을 들이미니 면역이 없었던 재경이 떨떠름하게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실수로 왼쪽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질 뻔한 걸 뒤에 서있던 류제가 벽이 되어 받아주었다.

“왜 높은 곳을 무서워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거겠지.”

“그냥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글쎄.”

재경이 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도와주며 류제가 적당히 얼버무렸다. 고양이였을 때에도 기억이 없었지만 높은 곳은 싫어했다. 그때와도 다른 건가. 쯧, 혀를 찬 그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류제 말대로 학교로 돌아온 렌이 정말로 기억을 잃어버렸음을 실감한 비키와 유네는 어두워진 낯빛을 숨겼다.

“이렇게라도 하면 뭐라도 떠올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대실패야.”

“그것 때문에 굳이 싫어하는 짓을 하다니. 바보 아냐? 하아, 머리 아파. 류제 행동에 일일이 상처받지 마, 렌. 다 자기 손해거든.”

무모함에 질린 비키가 손사래 쳤다. 재경은 비키의 말에 십분 동감했다. 제멋대로에 귀찮게 굴기까지 한다. 어제오늘 시달렸던지라 자기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는 착각으로 재경은 류제를 이해해 버렸다.

류제 흉으로 뭉쳤던 두 사람은 이제 할 말이 없어서 멋쩍게 섰다. 서로 대화를 이끌어내는 성질이 아니라 눈치만 보게 된다.

그러자 붉은 머리 여자애 뒤에 있던 조그마한 여자애가 고개를 내밀었다. 사람을 무턱대고 위협하지 않을 만큼 순진하게 생겼다.

“렌 군을 다시 학교에서 볼 수 있다니 기쁘다. 내 이름은 유네 나르타야.”

“아, 아차. 류제 때문에 실수했네. 자기소개도 아직이었지. 비키 셀로니아야. 다시 만나서 반가워.”

“아, 그… 렌 지미야.”

얼결에 재경도 자기소개를 했다. 대관절 이 상황은 뭘까. 소개를 한들 저들은 이미 그를 알고 있을 텐데 굳이 소개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실수한 기분이었다.

반면 드디어 렌과 만난 두 사람은 폭주하지 않기 위해 이야기를 되새겼다. 기억이 없는 렌에게 부담스럽게 다가가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특히나 마음 약한 유네는 아픈 그를 안고 반갑다고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을 자제했다.

“서있지 말고 앉아. 네 자리도 준비해 뒀어.”

“뭐야, 세 개뿐이잖아. 내 의자는?”

“너는 서서 먹어. 망할 류제.”

어울리지 않게 상냥한 목소리를 흉내 내던 비키가 류제를 상대로는 거침없었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와서인지 렌은 긴장한 채다.

실수한 비키가 헛기침을 했다. 그들의 생각보다 기억이 없는 렌의 경계심은 심했다. 의자에 앉은 재경이 한눈을 판 사이 류제는 두 사람에게 ‘거봐, 그렇지?’라며 슬퍼했다.

“다들 너무하네. 렌만 반가워하고.”

의자도 없이 다리에 힘을 푼 류제가 앉는 흉내를 내자 그들이 앉아있는 것과 똑같이 생긴 의자가 생겨났다. 슬렉터의 원리와 똑같이 만들어진 의자는 원래부터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의자가 생겨나니 무슨 마술인가 싶었던 재경이 눈을 끔벅거렸다.

“그거 마구 사용해도 되는 거야?”

“뭐 어때.”

비키가 지적했지만 류제는 귀찮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 초커 때문에 마법을 사용하면 알라마니 기술관으로 알림이 가 복잡한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어쩐지 저번에 만났을 때보다 마법을 무차별하게 사용했다.

“또 시작이네. 렌, 그거 알아? 류제 쟨 생긴 것도 멀끔하고 매사 침착한데 여유가 없어지면 다른 것들에 무관심해지고 한 가지 일에만 열중하는 거. 지금 쟤 엄청 귀찮아하는 거야.”

“렌한테 괜한 소리 하지 마.”

“그게 창피한 건 아나 보지?”

“알았으니까 그만해!”

렌이 그의 감정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의연한 모습만 보이고 싶은 류제는 비키의 폭로가 부끄러워 괜히 큰 소리를 질렀다. 렌은 신경 안 쓸지 몰라도 행동 하나하나에 동요하는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흥, 제발 무관심했으면 좋겠네.”

류제의 참견이 싫었던 재경은 류제 때문에 뭉개져 버린 빵을 뜯었다.

매사에 무관심하다면 제발 나한테도 신경 좀 끄고 얼마나 좋아. 자기들끼리 아는 이야기나 시시덕거리며 즐기라지. 왜 날 이런 데까지 끌고 오는 건데. 좀 내버려 둬.

재경이 속으로 불평을 곱씹고 있노라니 맞은편에 앉은 유네가 조리사에게 급히 부탁해서 받아온 도시락을 빼 들었다.

“에이. 렌 군, 그건 무리야. 류제 군이 무리하는 건 보통 렌 군을 위해서인걸. 마족과 싸울 때도 류제 군 항상… 아, 이런 이야기 하면 별로지?”

반가운 나머지 자꾸 옛날이야기가 나와 버리는 유네는 민망해서 어벙하게 웃었다. 2년 반 만에 재회했지만 기억이 없는 렌에게 그녀만 아는 이야기만 주절거리기도 애매하다. 유네는 적당히 경계심을 풀어줄 만한 가벼운 주제를 꺼냈다.

“학교생활은 어때? 1학년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힘들지 않아? 나이 차이도 3살이나 나고.”

“그냥 그런데. 어차피 난 2학기만 들어도 된대서.”

재판에 따라 2학기 수업도 못 들을 수도 있고. 처음 보는 애한테 재경은 굳이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재경 대신 저 여자애는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혼자서도 조잘조잘 잘도 떠들어댔다.

“그렇구나. 우리는 다음 주면 기말고사라서 큰일이야. 연구원으로 갈 게 아니면 성적이 중요하진 않지만 2년 만에 다시 공부하려니 머리가 굳어버렸어. 하아, 시험은 언제나 부담스러운 것 같아. 류제 군은 괜찮아?”

“나? 뭐가.”

“뭐긴. 기말고사 준비. 알고서 말하지만 너 전혀 관심 없지? 하기야 렌 찾는다고 계속 남부에 있었으니 수업은커녕 준비할 시간도 없었겠지만. 공백의 2년은 꽤 크니까 졸업 준비는 제대로 해 둬.”

빈자리에 앉은 비키도 자신 몫의 점심 식사를 꺼냈다. 렌에게 부담이 될까 봐 일부러 말 안 하고 있었는데 비키 저 눈치 없는 자식이 굳이 사실을 입에 담았다.

재경의 귀가 번뜩였다. 류제가 계속 남부에 있었다고? 루나 누나는 류제가 제립학교에 있을 거라고 했었는데. 재경이 류제를 노려봤지만 류제는 외면했다.

“중간고사처럼 시험은 치려고. 보충 때문에 귀찮아지긴 싫거든.”

“류제 너 진짜 대책 없구나. 한 번도 수업 들은 적 없으면서 3학년 내용을 따라갈 수 있어? 네 천 년의 기억에도 제립학교 교육과정 내용은 없을 텐데?”

렌이 보지 못하는 시야각에서 제발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말라며 류제가 입 모양으로 경고했다. 류제의 의도를 알아듣지 못한 비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답답한 류제는 편두통이 오는 머리를 짓눌렀다. 그걸로 끝나나 했더니 아무것도 모르는 유네도 옆에서 거들었다.

“류제 군, 출결 거의 안 해서 출석 일수도 모자라지 않아? 보충은 그렇다 치고 2학기 진급은 가능해?”

“그건 뭐 어때. 진급 못 하면 내년에 렌이랑 같이 다시 학교 다니면 되지.”

차라리 그게 좋겠다며 류제가 하하 웃어넘겼다. 별생각 없이 빵만 먹고 있는 재경의 눈치를 살핀 류제는 ‘그럴 거면 시험도 치지 말까?’라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보충 듣기는 싫은데.

듣다 못한 재경이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저 제멋대로 대마왕 같은 놈이랑 내가 왜. 꿈도 꾸지 마.”

“대마왕? 아하하. 렌, 너 사람 보는 눈 있구나.”

친구를 욕했다고 싫어할 줄 알았더니 비키가 깔깔 웃으며 동감했다. 재경은 점점 더 이해가 안 갔다. 이 세 사람은 도대체 무슨 사이인 거지? 1학년 애들처럼 류제의 얼굴만 보고 픽픽 쓰러지는 관계는 아닌 것 같은데. 그때 그 사진에 있던 사람들이니 유달리 막역한 사이인 건가?

“영광스러운 별명이구나, 류제. 개과천선한 제멋대로 대마왕님이라고 불러줄까?”

“시끄러. 아까부터 놀릴래? 진짜. 렌한테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마.”

“하, 웃기네. 뭔데? 왜 내 앞에서는 말 못 하는데?”

자기만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그들이 괘씸했던 재경은 어차피 말 안 해줄 걸 알고 개기는 심정으로 윽박질렀다. 그에게 관심을 보이자 잠시 눈동자를 굴리던 류제가 금세 마음을 바꾸고 진지하게 물었다.

“볼래?”

“어? 뭐…뭘?”

“류제, 너 진심이야? 장난이라면 그만둬.”

“뭐 어때.”

장난기 싹 뺀 말투가 어쩐지 무섭다. 보여준다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뭐든 류제가 뭔가를 한다는 건 그를 피곤하게 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의 몰골에도 별 반응이 없던 두 여자애가 눈에 띄게 동요해서 더 불안하다.

“뭐…뭐 하려는 건데?”

류제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재경은 지레 겁을 먹었다. 보면 안 되는 걸 봐야 할 것 같아 괜히 트집을 잡았나 싶다.

“별로 네 앞에서 말 못 할 것은 아냐.”

사글사글 입꼬리를 올린 류제가 기지개를 켰다. 렌이 그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건 뭐든 좋은 계기가 될지도 모르니까. 유네와 비키가 아직 이르다며 말리기도 전에 류제는 숨기고 있던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이 모습으로 돌아온 건 거의 1년 만인가. 인간들과 어울려서 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숨겼던 것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귀 옆에 돋아난 악마의 뿔이나 세 쌍의 날개를 시작으로 푸른 눈동자 가운데에 루비처럼 박힌 샐쭉한 붉은 동공이 빛났다.

가려져 왔던 그의 진짜 모습을 본 재경은 놀라 몸이 경직되었다. 위압감 있는 모습은 인간일 때와 달랐다. 재경은 저게 바로 사람들이 일컫는 마족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기억을 잃은 그를 돌봐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간이 마족과 싸워 승리했다는 말을 들어왔다. 인간 말고 다른 종족도 있구나 막연히 생각해 왔던 재경은 류제도 당연히 인간이라 여겼다. 하지만 저걸 보라. 그게 아니라면 류제는 정체가 뭐지? 마족? 인간? 인간과 어울리는 마족?

“류제!”

재경이 감당 못 할 거라고 확신한 비키가 류제를 뜯어말렸다. 재경은 납득 못 하는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다. 외관이 변했다고 해서 내면이 바뀐 건 아니지만 그런 사실조차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류제가 낯설었다.

인간이 아닌 류제를 인정해 주던 마음마저 잊었다. 나락보다 더한 나락이 있을 줄이야. 머리로는 알았던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류제는 추락하는 기분을 달래며 진짜 육체를 구축하던 입자들을 박탈시켰다.

류제에게서 위압감이 사라지고 아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렌이 당연히 받아들여 줄 거라고 희망한 것도 어리석었지. 침묵 후에 류제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궁금해하기에 보여줬는데 좀 무서웠나?”

“너무 성급하잖아. 무슨 생각인 거야!”

“하지만 안 보여주면 자기만 따돌린다고 렌이 토라질 것 같아서.”

“진짜 단순 무식!”

고소공포증이 있던 렌을 높은 곳까지 들어 무섭게 하는 등 막무가내로 구니까 렌이 더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거 아닌가. 비키는 이만큼 여유가 없는 류제를 처음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 모습을 렌한테 보여준다고? 마족을 멸할 때도, 그의 정체를 입에 담을 때도 그는 신중했다. 침착하고 누구보다 이성적이었단 말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렌이 되어버리니 류제는 이성을 담당하는 회로 하나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굴었다.

“미안해, 렌. 놀랐지?”

안 그래도 상처 때문에 안 좋은 안색이 더 창백해진 재경은 닿기 싫다는 듯 주춤거렸다. 마냥 귀찮은 놈인 줄 알았던 자식이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었다니 혼란스러웠다.

장난쳐서 미안하다고 달래주려던 류제는 재경을 만지려던 손을 물리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른하게 의자에 기댄 모습이 이전 마왕과 아주 빼다박았다.

“지금은 딱히 나쁜 마음 먹은 건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벼…별로. 아무래도 상관없어.”

압박감이 사라지자 숨을 돌린 재경은 미궁 속으로 들어간 류제의 정체에 수많은 의문을 품었다. 저게 마족인가? 근데 지금은 인간이잖아. 신문에서는 류제를 마족을 없앤 영웅이랑 비견했는데 저 모습은 뭐지? 어빌리터인 두 사람은 왜 마족을 보고도 동요가 없는 건데? 무찌르지 않아도 돼?

“시…신고하면 잡아가?”

머리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던 재경은 혼자서는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아 소용돌이 속에 몰아치는 질문을 한마디 꺼내버렸다. 류제는 아주 좋다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신고하고 싶어? 네가 신고하면 잡혀줄 거긴 한데.”

“재미없는 농담 하지 마. 네가 없으면 누가 렌의―”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마. 오랜만에 만난 건데 즐겁게 대화하자고. 렌이 진심으로 그런 소리를 한 거겠어?”

또 비키가 괜한 이야기를 할까 류제가 그녀의 입을 막고 얼버무렸다.

거참, 서로 스킨십에 거리낌이 없는 사이다 싶었는데 비키가 류제의 손을 내친 다음 꺼지라며 그의 발을 사정없이 밟았다. 괴이한 정체를 드러냈음에도 거리낌이 없으니 놀라울 지경이다. 재경은 무슨 장단에 맞춰야 하나 어리둥절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이 나라의 높으신 분들은 다 알고 있어. 그리고 너도 알고 있었어, 렌.”

“내…내가? 그 모습을?”

“그래, 처음부터 알았지. 네가 무서워하다니 의외여서 상처받았어.”

“웃기고 있네. 날 놀린 거잖아. 내…내가 그깟 거에 무서워할 줄 알아?”

실은 엄청 무서웠지만 재경이 센 척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상처받았다고 제 입으로 농담하다니 뻔뻔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결국 류제의 정체는 뭐인 건데?

재경에게 물음표가 더 많이 뜨기 전 류제의 헛짓거리를 막아야 했던 비키는 유네에게 가져온 것을 꺼내라며 쿡쿡 신호를 보냈다.

“무…뭐 언젠가 렌 군도 기억나겠지. 지금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잖아.”

자연스럽게 바통을 이어받은 유네가 아래에 두었던 앨범을 꺼냈다. 그건 유네가 1학년에 입학하고 나서 학교에서 나눠주거나 팔았던 사진을 모아놓은 사진첩이었다. 옆에서 비키가 모르는 척 말을 맞추었다.

“오…오, 유네. 그게 뭐야?”

“우리 1학년 때 찍은 사진들 모은 사진첩. 렌 군도 이걸 보면 감회가 새로울 것 같아서 가져왔어.”

“봐도 어차피 모를 텐데.”

“적어도 우리가 렌 네 친구였다는 사실은 믿을 거 아냐.”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안 건지 비키가 재경의 의자를 멋대로 유네 쪽에 붙였다. 갑자기 렌이 가까워지니 쑥스러웠던 유네가 얼굴을 붉히며 앨범을 펼쳤다. 첫 장은 남자 교복을 입고 있는 유네 위주로 사진이 붙어있었다.

“어, 잠깐. 너 남자야?”

“에?”

재경이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던 유네는 아아, 탄식의 감탄사를 질렀다. 지금은 여자 교복을 입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남장을 했던 유네는 이건 기억을 잃은 렌이 알 수 없는 사실임을 의식했다.

“내가 미들 스쿨 때 여자애들한테 심한 따돌림을 당해서 트라우마가 있었거든. 여긴 학생들이 대부분 여자잖아. 임시방편으로 남장을 했는데 부질없었지. 친구들한테 거짓말하는 것도 기분 안 좋고. 지금은 밝혔지만 이때는 남장을 했을 때야.”

곱게 자랐을 것만 같은 귀여운 애가 왕따를 당했다니 왠지 믿기질 않는다. 슬픈 기억을 가졌다고 면전에서 말한 애에게 매몰차게 굴기 미안했던 재경이 삐죽삐죽 유네의 말을 경청했다.

“이때랑, 이때도 남장을 했을 때네. 체육대회 때 치어리더 한 차림도 있어. 아하하.”

“이래가지고 용케도 안 들켰다.”

입학식 사진부터 시작해서 행사마다 찍었던 사진을 설명하며 유네가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옆에서 비키와 류제도 말을 덧대며 끼어들었다.

“정말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이러면서 류제랑 같은 방 쓴 거 알아? 진짜 대담하다니까!”

“에헤헤. 근데 류제 군은 내가 여자란 걸 끝까지 눈치 못 챘어. 그게 더 대단하다고 생각해.”

“뭐야, 너 오늘 나한테 나랑 같은 방이었다고 했잖아.”

“유네가 여자란 걸 밝힌 후부터 같은 방이었어. 거짓말 아니니까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좀 쳐다봤다고 찔리냐?”

옛날처럼 괜히 툴툴거리는 태도가 감동으로 다가왔다. 지금 곁에 함께한다는 게 실감 난다.

두 사람을 부르길 잘했어. 혼자만으로는 이끌어낼 수 없는 렌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으니. 렌이 겁먹는 바람에 풀 죽었던 주제에 류제가 잘도 히죽거렸다.

시간 순서대로 별별 이상한 사진들을 수집한 유네 덕분에 추억 회상도 쉬웠다. 렌 지미는 얼마나 정신 사나운지 제대로 찍힌 사진이 별로 없었다. 그중 비키가 한 사진을 가리켰다.

“아, 이때 기억난다. 체육대회 계주 때였지. 내가 달리다 넘어졌는데 네가 역전해서 우리 반이 이겼거든.”

“맞아, 이때 렌 군 정말 멋졌어.”

“그렇게 말해도 모른다니까.”

“뭐 그랬다는 거지. 라우라 축제 때 여장 사진도 있네. 여자인 네가 남장한 상태에서 여장을 또 하다니.”

“그때 받은 상품을 보면 얼마나 찔리나 몰라. 렌 군 이때 사람들 앞에서 노래해서 2등 했어! 밴드부에서도 보컬로 데려갈 만큼 잘 부르거든.”

“아, 그래?”

지금도 별 의미 없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게 버릇이긴 하다. 근데 여장하고 노래를 불렀다니 기억을 잃기 전 나도 어지간히 제정신이 아니었구만.

그것 말고도 수학여행 때 벚꽃을 배경으로 한 단체 사진, 유네네 집에 놀러 갔을 때 메이드들이 찍어준 삼총사의 사진, 타고시아 해변에서 찍은 루나가 들고 있던 것과 같은 사진. 수신제 때 메이드와 집사 커플로 류제와 찍은 사진도 있었다. 유네가 고양이 수인이 되어버린 사진도 있지만 나머지 피해자들의 사진은 구하기 힘들어서 앨범에는 없었다.

“아아, 아쉽다. 그건 류제 군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보다 렌 네 사진은 류제한테 더 많이 있었어. 둘이서 찍은 사진은 류제 네가 주로 구매했지? 렌 넌 짠돌이라서 절대 안 샀거든.”

“아, 하하… 그게 그 사진 전부 잃어버렸어.”

“뭐어? 그걸 말이라고 해? 진짜 류제 저 바보. 도움이 안 된다니까! 어쩌다가 잃어버렸는데?”

“묻지 말아 줘. 유구무언이네.”

기억이 사라진 렌에게 류제도 그와 함께한 추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렌을 포기하겠다고 참전 전에 가진 사진을 모두 태워버렸다.

유네와 렌이 함께 찍은 사진을 모아보니 류제는 자신과 렌의 관계를 증명할 물질적인 수단이 없어 조바심이 났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렌을 포기하겠다며 사진을 불태우던 자신을 때려서라도 말리고 싶었다.

“아, 벌써 끝나버렸다. 이것보다 더 많은 일이 있는데 보여주질 못하네. 렌 군이랑 비키 양이랑 입학식 날 선생님들 몰래 기간트리카 대결했다가 혼난 것도 있고. 아무래도 그건 사진이 없지.”

“그 이야기는 부끄러우니까 하지 마.”

얼굴이 머리색만큼이나 빨개진 비키가 꿍얼거렸다. 그 이야기는 질리지도 않고 나오는 그녀의 흑역사였다.

“류제 군의 사진은 인기가 많아서 선배들이 다 가져가 버렸고.”

“저 덥수룩한 앞머리에 심드렁한 표정이 뭐가 좋다는 거지. 나도 다른 사진이 있나 유모한테 앨범 보내달라고 부탁해 볼게.”

“됐어. 어차피 기억 안 나.”

앨범을 보며 이야기를 듣는 내내 달아올랐던 재경이 현실을 깨닫고 거절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어느새 녹아들었던 그는 저도 모르게 순응할 뻔한 즐거움에 떨떠름했다. 혼자 있는 것보다 배는 좋았지만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과거의 자신은 활기차고 자신감이 넘쳐 지금의 자신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저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인간이었던 듯했다. 아무것도 없는 지금의 그와는 달랐다. 기껏 분위기가 좋아져 내심 기뻐하던 비키가 반박했다.

“보다 보면 날지도 모르잖아. 그냥 보는 것일 뿐인데 부담 가지지 마.”

“안 나. 나한테 뭘 기대하는 건데?”

떠오르는 게 없는 그만 죄책감을 가질 뿐이다.

전부 렌을 위해서인데 잘하다가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내내 슬픈 심정을 참아왔던 비키는 그 반향이 울컥 솟아올랐다. 항상 승부욕을 자극했던 렌의 나약한 태도가 보기 싫었던 그녀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비키를 막아선 유네가 나긋나긋하게 달랬다.

“에이, 이런 건 재미로 보는 거지. 렌 군도 재미있었지?”

“그냥저냥.”

괜히 심술을 부린 재경은 입을 비죽거리며 다 먹은 빵 봉지를 구겼다.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던 유네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두 손을 마주쳤다.

“그런데 렌 군은 빵으로 배가 차?”

“어느 정도.”

“내일은 내가 렌 군 몫까지 도시락 싸 올게. 이제 내가 부장이라서 요리 동아리실 마음대로 쓸 수 있거든.”

“너 아직도 동아리 하고 있었어?”

“으응, 졸업하면 관련 사업을 해볼까 해서. 엄마는 왕실로 가라고 하지만 절대 싫어. 나중엔 꼭 카페를 차려보고 싶거든.”

그가 학교에 없는 동안 유네에겐 그런 변화가 있었던 건가. 요리에 대한 유네의 진지한 열정에 류제는 의외다 싶었다. 어렸을 적부터 사업적인 모습에 자주 노출되다 보니 꿈이 그쪽으로 기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요리를 못 했는데 렌 군이 하는 요리가 너무 멋져 보여서 배우기 시작했거든. 렌 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먹고 싶은 거라. 재경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늘 입가에 맴도는 맛이 딱 하나 떠올랐다.

“설탕에 버무린 토마토.”

“그것도 맛있지. 좋았어. 렌 군, 기대해 줘.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올게.”

글러먹은 소갈머리를 진지하게 받아주는 유네에게 미안해서 진짜로 만들기 전에 재경이 지레 말렸다.

“그냥 해본 말이야. 어차피 못 먹어. 자극적인 건 배 아파서.”

“그럼 자극적이지 않게 해볼게. 비키 양, 도와줄래?”

“아서라. 사람 죽이겠다.”

“무…무시하지 마! 나도 요리 많이 늘었거든? 두고 봐. 혀를 내두르게 해주겠어.”

“내두를 혀가 녹을지도 모르지.”

“진짜 저 대마왕 같은 게!”

“같은 게 아니거든.”

비키 골리는 데에 도가 튼 류제가 애처럼 굴었다. 참다못한 비키가 얄미운 류제의 정강이를 차려던 순간 예비 종이 울렸다. 벌써 점심시간이 끝났다.

류제가 당하는 모습에 킬킬거리던 재경도 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떠들어댄 건 처음이었다. 한 움큼 먹어야 하는 진통제는 물론 아픈 것도 잊고 진물이 붕대를 적시는지도 몰랐다.

“렌, 이리 와. 붕대 가는 거 도와줄게.”

류제가 세라에게 받아온 새 붕대를 꺼냈다. 그의 상처를 본 적 없는 두 사람을 힐끗거리던 재경은 거부하려다 얌전히 도움을 받았다. 마음에 안 차는지 표정이 부루퉁한 게 썩 귀엽다.

“오늘은 말 잘 듣네.”

“시끄러.”

의자를 앞으로 끈 류제가 재경의 어깨 붕대를 풀려니 도시락 통을 정리하던 두 사람이 넌지시 다가왔다. 상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재경이 날 서게 흘겼다.

“뭐야, 저리 가.”

“멍청하게 서있는 거 어색해서 싫어. 모른 척하는 것도 웃기잖아. 안 그래?”

그야 그렇다만 흉측한 상처를 굳이 봐서 뭐 하게. 만약 이걸 보고 내가 싫어지면 어쩌나 일순 걱정하던 재경은 차라리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비틀린 생각을 품었다.

생각과는 반대로 정작 그들은 상처를 봐도 혐오하지 않았다. 그의 몸에 흐르는 진물을 고운 손으로 닦아주기까지 했다.

“더…더럽지 않아?”

“왜? 그냥 상처일 뿐인데.”

“생긴 게 기분 나쁘잖아.”

“굳이 단어를 하나 고르자면… 으음, 렌 군은 귀여운걸.”

굳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아하하 하고 농담을 지껄인 유네가 산처럼 쌓인 붕대를 버리려고 돌돌 감았다. 그런 말이 나올 줄 몰랐던 재경이 귓불이 새빨개져서는 버럭 외쳤다.

“귀… 너희 눈깔이 삔 거 아니냐?”

“눈깔이라니 말투가 그게 뭐야.”

비키가 삐죽거렸다. 유네를 도와서 테이블을 마저 정리하던 그녀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도 방금 건 옛날 너 같았어.”

“말하는데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해도 난 기억 안 나. 사사건건 비교하지 마.”

재경이 그에 맞대응했다. 싸울 때 죽이 잘 맞는 걸 보면 렌은 언제 봐도 렌이다.

붕대를 다 갈자 비키는 슬쩍 유네를 살폈다. 혼신의 힘을 담은 농담이었는지 표정 관리가 힘들어 보였다.

기억이 없는 렌을 상대하는 건 확실히 감정 소모가 컸다. 눈물을 참을 수 없는 유네를 감싼 비키가 먼저 인사했다.

“선생님 오시겠다. 우린 먼저 돌아갈게. 류제 넌 이따가 보자. 렌을 부탁해. 선생님껜 말씀드려 놓을 테니까.”

“렌 군, 나중에 봐!”

억지로 밝은 목소리를 낸 유네와 비키가 활기차게 웃으며 내려갔다.

옥상 문이 닫히고 계단 내려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무렵 한쪽 무릎을 꿇고 재경의 마지막 왼쪽 발목 붕대를 갈아주던 류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디어 조용해졌네.”

대충 신발을 신은 재경이 의자에 늘어져 앉았다. 운동장에 나와있던 학생도 어느새 다 들어갔고 적막함만 맴돌았다. 왠지 둘만 남은 게 어색했던 류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때, 렌. 저 두 사람을 만나니 떠오르는 게 뭐라도―”

“왜 학교에 없었다고 말 안 했어?”

가만히 넘어가지 않겠다며 재경이 잽싸게 추궁했다. 저 성격상 역시 물어볼 것 같았다. 삐질 땀을 흘린 류제는 변명하듯 애써 반론했다.

“말한다 한들 널 찾지 못한 건 내 잘못이잖아. 원망을 들어도 별수 없다고 생각했어.”

“난 네가 루나 누나의 편지를 일부러 무시했다고 생각했다고! 그동안 나…날 찾으러 다녔다고 그렇다고 말을 해줬어야지. 너한테 화를 낸 내가 뭐가 되는 거야!”

“그렇게 말해서 네가 기뻐한다면 말할게. 하지만 넌 그런 거 부담스러워하잖아.”

“어쨌든 네 잘못은 아니잖아!”

루나와 그를 이기적으로 상처 입혔다고 류제를 단단히 오해했다. 동정도 연민도 아니라면 류제는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와 준 게 아닌가. 재경은 류제를 의심하며 밀어내려 했던 자신의 좁은 식견이 부끄러워졌다.

“우리 진짜로 친구 맞았구나. 아, 진짜 무슨 착각을 한 거야. 쪽팔려 죽겠네.”

잘난 놈이 못난 그를 가지고 노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얼마나 재수 없었나 얼굴이 절로 빨개졌다.

재경이 류제를 힐끗거렸다. 볼 때마다 느꼈지만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저 얼굴이 정말 감탄이 나왔다. 자꾸 그 안을 파헤쳐 보고 싶어 시선이 간다.

바람에 흩날린 머리칼 사이로 류제와 눈이 마주치자 재경이 딴 곳을 보는 척했다. 언제 다가온 건지 코끝이 맞을 만큼의 거리는 부담스럽다. 류제는 멈추지 않았다.

“난 친구이기 싫어, 렌.”

류제가 말했다. 괜히 친구로 둬서 수발을 들어 귀찮아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재경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귀찮을 거라면 애초부터 참견하지를 말지. 토라진 재경이 그를 밀어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뭐야. 싫으면 그만두든가! 누가 해달라고 했어?”

“렌, 나한테 실망했어?”

“몰라.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기대하지 않았으니 상처를 안 받을 줄 알았는데 알게 모르게 류제에게 기대고 있었나 보다. 몸도 아프고 무연고의 외로운 곳에서 다가와 주던 류제가 그를 위했던 것도 친구로서의 의무감에 불과했다니. 괜히 목울대가 울컥거렸다. 동정이 아니라면 뭐 그런 거겠지.

“렌, 날 봐.”

“싫어.”

몸이 아프더라도 기억이 없더라도 류제는 눈앞에 있는 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했다. 친구라는 틀에 막혀있고 싶지 않았다. 친구라 납득하는 건 과거와 평행선이 될 거짓말이다. 이 사람에게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함께 노력해서 미래를 속삭이고 싶었다.

류제가 재경의 입술 옆 감긴 붕대 위에 가볍게 키스했다.

“친구끼리는 이런 거 못 하잖아.”

재경이 어떻게 생각할지언정 류제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끝나는 거라고 배워왔다. 렌이 그의 마음에 답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답을 준비할 수 있게끔 스스로를 사랑하기를 바랐다. 무너진 탑을 차근차근 다시 쌓는다. 류제가 지금 재경에게 바라는 건 그것뿐이었다.

“자, 렌. 우리도 내려가자. 오늘도 방과 후에 세라 선생님께 갈 거지? 같이 가줄까?”

기습 키스로 사고가 정지된 재경에게 류제가 목발을 넘겨주었다.

아까 류제의 본모습을 봤던지라 잡아먹힐 거라고 생각하던 재경은 영문을 몰라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새빨개진 귓불에 류제는 능청스럽게 웃어 보였다.

더위를 먹은 건가 해롱해롱해진 재경이 걷는 방법도 몰라 비틀거리며 옥상 문으로 홀리듯 걸어갔다. 그 속도에 맞춰준 류제가 천천히 따라갔다.

벌써 5교시가 시작된 지 오랜데 왜 이번만큼은 홀라당 안아 나르는 억지를 부리지 않는 걸까. 그 어떤 때보다 류제를 의식하는 재경은 나란히 걷는 이 시간이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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