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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돌아오는 길] (1) (72/112)

에필로그. [돌아오는 길] (1)

한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여러 책상이 딱딱하게 줄지어진 희미한 공간. 앞에는 깔끔하게 지워진 진녹색 칠판이 보였다. 책상을 따라 나열된 큰 창문에서는 추억의 노을색 햇볕이 춤추는 커튼을 따라 책상을 살랑살랑 희롱했다.

텅 빈… 교실? 하여튼 한적하고 따뜻하다. 평화롭기만 한 이곳에 그는 왜 앉아있더라.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낯선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단정한 단발머리 소녀가 책상에 책을 올려두었다. 책의 제목은 알 수 없다. 다만 그녀와 단둘이 있는 지금이 낯설었다. 공존의 괴로움인가. 꺼림칙함을 지우지 못한 그때 그녀가 나지막이 전했다.

[일어나. 일어나서 내가 다시 죄를 짓지 않게 해줘. 부탁이야.]

죄? 무슨 죄를 저질렀는데? 인기척이 사라지기 전에 물으려는 찰나 눈이 절로 떠졌다. 환상 같던 장소 대신 눈에 담긴 것은 새까만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어린 소녀의 얼굴이다.

“정말… 뭐야, 아침부터 성가시게! 아세미가 언제부터 깨웠는데.”

바지런하게 싸돌아다니곤 하는 어린아이가 부루퉁하게 타박했다. 햇빛이 눈을 간질였던 것도 모를 정도로 자버렸다니 전혀 몰랐다. 그가 미적거리자 답답했던 아이가 코를 들이밀었다.

“벌써 해가 중천에 떴다고! 류제 오라버니는 부지런한데 왜 너는 맨날 늦잠 자는 거야! 다들 진작 일어났어. 어서 일어나! 틀어박혀 있지 말고 일어나서 움직여!”

몸이 아파 아침 해가 떠오를 때쯤 진통제의 힘을 빌려 간신히 눈을 감곤 하는데 깨우는 소리도 못 들을 만큼 깊은 수면을 이룬 게 얼마 만인가. 이상한 꿈을 꿨지만 평소처럼 잠을 설치지 않았더니 머리가 개운했다.

“윽.”

꿈속을 헤매며 뒤척거리다 현실의 가혹한 고통이 그를 덮쳤다. 뗄 수 없는 아픔으로 정상적인 몸이 무엇인지조차 생소하다. 아파하는 모습을 아세미가 볼세라 그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루나 언니가 밥 먹으러 빨리 내려오래. 다시 자지 마!”

재경이 깬 것을 확인한 아세미는 자기 말만 하고 쀼루퉁하게 사라졌다. 조그마한 애가 방문 밖 계단을 통통거리며 내려가는데 트윈 테일이 강아지 귀처럼 털썩털썩 움직여도 귀염성 하나 없다.

아세미의 머리통이 안 보일 때까지 기다리던 재경이 계단을 힐끗거렸다. 얕게 한숨을 내쉰 그는 이불을 거두었다.

그새 식은땀을 뚝뚝 흘린 재경은 쭈뼛 선 소름을 쓰다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짹짹 나무 위에서 그들만의 사회를 이룬 새들이 정답게 노닐었다. 재경은 멍청하게 햇빛을 만끽했다.

이곳에서 생활한 지 벌써 3개월째. 고아원을 운영하는 교회 신부 손에 이곳으로 오게 된 그는 낯선 이들과의 생활이 여전히 어색했다.

그들의 말로는 그는 이 고아원 출신 또래의 지인인 것같다. 이 방도, 침대도 모두 어릴 적 류제 신리라는 이가 쓰던 것이라고 한다. 친구라고 말해도 잘 모르겠다. 그에게는 최근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건 사람에 관한 기억은 물론이고 세간 사람들이 상식이라고 부르는 다양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관절을 조심하며 발을 내린 그는 일어서기 전 고통을 인내하는 시간을 가졌다. 옷 사이로 보이는 살갗 대부분이 붕대로 감겨 밤새 생긴 진물로 축축했다.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데 발목에 무리가 가면 걷기가 힘들어 목발이 없으면 꼼짝도 못 한다. 오른쪽 얼굴과 어깨, 팔까지 내려오는 상처는 그보다 더 심각해서 반신이 거추장스러운 수준이다.

이 상처들은 2년 하고도 3개월 정도 전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있던 것이다. 상처란 건 본디 딱지가 지고 새 살이 돋기 마련인데 여태 아물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 의사 처방과 다르게 회복이 더뎌지는 병인가?

“…아차.”

벽을 더듬거리던 재경은 자기 전 침대 옆에 기대놓았던 목발을 쳐버리고 말았다. 신부가 나무를 깎아 만든 목발이 미끄러져 바닥을 굴렀다. 왼쪽 눈으로만 보는 세상은 원근이 비틀려서 지금처럼 바로 옆에 있는 물건을 잘못 잡은 적이 허다했다.

어쩌다가 이런 중상을 입었는지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의 손목에 차인 팔찌를 보고 ‘어빌리터’니, ‘마족’이니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래서 대충 다른 나라와 전쟁이 있었고 종족 간의 싸움에서 그가 있는 나라가 이겼다는 것만 알았다. 그때 휘말려서 이렇게 된 듯하다.

목발을 짚어 몸을 일으킨 그는 방에 놓인 거울 안 자신을 응시했다. 붕대로 덕지덕지 상처를 덧댄 모습은 보면 볼수록 역겹다. 미라처럼 칭칭 감겨 간신히 보이는 왼쪽 얼굴. 나머지 절반은 의사의 노력에도 회생 불가라 이 꼴로 거리를 다니면 사람들이 구울 같다며 수군거렸다.

붕대를 풀었을 때 옅은 주근깨가 있던 피부를 떠올리면 분명 참전하기엔 어렸다. 루나 말로는 어디 학생이라고 했던가. 이 나라는 학생도 나가서 싸워야 할 만큼 궁지에 몰렸었나 보다.

아하, 그래서 오늘 낯선 교실이 꿈에서 떠올랐던 걸까.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적인 신호였으면 좋겠다.

오늘 깨울 때도 내내 새침하게 굴던 아세미는 그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끔찍한 몰골이라 겁에 질려 엉엉 울었던 아이다. 그때 충격을 받아 저런 태도를 취하는 거라면 한창 자라날 어린애한테 정신건강에 나쁜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미안했다.

숨을 힘껏 들이마신 재경이 아세미가 내려갔던 계단을 천천히 더듬어 내려갔다.

고아원 아이들은 진작 식사를 마치고 두세 명의 자원봉사자들과 바깥 놀이를 하는 중이다. 멀리 산속에 나무를 하러 간 신부님은 늦은 오후쯤에나 돌아올 것이다. 오늘도 여름을 희롱하는 매미 소리가 싱그러웠다.

“일어났구나. 아세미가 깨우러 가줬니?”

다 끝난 식사의 뒷정리를 하던 수녀 루나가 오늘도 반갑게 인사했다. 딴생각을 하다가 계단에서 멈추어 섰던 재경이 꾸벅 고갯짓을 했다. 마지막 계단에 목발을 댄 그가 1층 바닥에 발을 조심스레 내디뎠다.

“몸 상태는 어떠니? 어제보다는 나았으면 좋으련만.”

“…그저 그래요.”

“나쁘지 않은 것에 감사의 기도를 해야겠구나. 떠오르는 건 있고?”

땀을 닦는 루나에게 그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꿈에 나온 교실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낯선 소녀와 단둘이 교실에 있었다는 기억만으로는 루나에게 괜한 희망을 줄 뿐이다. 게다가 녹색 머리칼이라니. 그녀가 보여주었던 사진에는 없던 인물이지 않은가.

신부의 손에 이끌려 고아원에 온 재경이 루나와 처음 인사한 날, 기억을 잃었다고 말해도 그녀는 재경이 이곳 출신 어빌리터인 류제 신리와 친구라며 열렬히 과거를 주절거렸다.

그를 부축하던 신부가 쩔쩔매었지만 앨범을 뒤진 루나는 기어코 사진을 한 장 그에게 보여주었다. 바랜 비취색 바다를 배경으로 한 유쾌한 단체 사진은 생소했다.

타고시아 해변이라고 했었나. 전쟁 전에 놀러 가 찍은 사진인데 사진에는 활짝 웃는 루나와 쀼루퉁한 아세미도 있었다. 금발에 비싼 보석 장신구를 주렁주렁 고정시킨 여자와 그 옆에 칼을 든 사람이 현 황제와 그 호위라고 한다. 붉고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사람은 귀족 가문의 영애라고 말하는데 어쩌라는 건지 알 게 뭐람.

배경과 닮은 푸른색 머리의 조그마한 애는 유명한 상단의 따님, 어른스러운 이분은 학교 선생님이라고 설명하지만 역시 본 적 없는 자들이었다. 자빠질 듯이 웃긴 표정을 짓고 있는 지푸라기 머리 소년이 자신이라는 것도 루나가 지적해서 알았으니까.

그는 사진 가운데에 있던 류제 신리와 그 옆에 어깨동무한 자신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하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옆에서 함께 사진을 보던 아세미가 ‘너 같은 오징어랑 류제 오라버니는 절대 친구가 아냐!’라고 말했으니 전부 루나의 착각일 거다.

루나는 아세미가 옛날과 다른 그에게 괴리감을 느껴서 심술부리는 거라고 달랬지만 그들을 하나로 모아줄 증거는 고작해야 사진 한 장뿐이 아닌가. 지금도 그녀가 류제가 있다는 학교 기숙사로 편지를 보내는데 한 번도 답장이 없으니 그는 딱히 류제란 인물에게 중요하지 않았을 거다. 분명 그럴 거였다.

“어제는 잘 때도 날이 선선했지? 더 더워지기 전에 연락이 닿았으면 좋겠구나. 어서 밥 먹으렴. 네 몫이란다, 렌아.”

묽은 죽을 따로 준비해 준 루나는 그가 식사하는 동안 새로 갈 붕대를 마련했다. 계속 저어 차갑게 식힌 묽은 죽은 이가 부러져 잘 씹지 못하는 그에게 가장 먹을 만한 식사였다.

“아그……!”

광대에서 입가까지 찢어진 상처가 지끈거려 입을 벌리다 상처를 건들면 찌릿했다. 입을 벌릴 때 붕대에 스쳐도 아팠다. 죽을 먹는 것조차 고역이지만 굶어 죽을 수는 없기에 짧은 비명은 식사를 할 때마다 일례 행사 같은 것이다.

“무리하지 말렴. 시간은 많단다.”

입가에 흘린 죽을 닦아주는 루나가 안쓰러워했다. 내일은 더 나은 날이 찾아온다던 그녀는 재경이 아픈 모습을 보일 때만 슬픔을 내비쳤다.

“수녀님, 루나 수녀님! 큰일 났어요. 잠깐 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재경의 식사를 도와주던 루나를 자원봉사자가 찾았다. 알아보니 수도가 말썽이라 빨리 끝날 것 같지 않은 일이다. 식사가 끝나면 붕대를 갈아주려던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다가 재경이 괜찮다고 가보라고 하자 미안하다며 성급하게 자리를 떴다.

막내였던 아세미가 시니어가 되어버린 만큼 전쟁으로 쉰 명이 넘는 아이들이 이곳에 새롭게 들어왔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갓난아기부터 미들 스쿨에 입학해야 하는 사춘기 아이들까지 천차만별이다.

마을 사람들은 전흔을 없애고 올해를 보낼 농사를 짓느라 바쁘기에 고아원은 고작 한 명의 수녀와 신부, 번갈아 가면서 오는 두어 명의 자원봉사자로만 돌아갔다.

기계치인 루나가 수도를 고쳐야 할 만큼 일손이 부족해서 아침부터 모두 잠들 밤까지 쉬지 못했다. 50명의 아이들의 빈자리를 채워주어야 하는 루나는 오늘도 재경만 돌봐줄 수 없었다.

남아서 식사를 하는 그는 분주한 이곳에 어울리지 못하는 떠돌이 같았다. 짐이라는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 고아들 말고도 부상자나 노인들도 치료를 위해 교회로 오곤 해서 마땅한 휴식 시간도 없는 그들에게 재경의 존재는 손이 너무 많이 갔다.

루나의 말대로 빨리 류제 신리와 연락이 닿아 아가타로 갈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다. 이곳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들었다.

마을 사람들 왈, 제립학교는 키아나트리체에서 손꼽히는 최첨단 시설이라고 한다. 그곳에 돌아가면 루나도 짐을 덜 것이다. 그의 진짜 가족에 대한 기록도 볼 수 있겠지. 부상을 입은 그가 제립학교로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식사를 마친 그는 진물이 흥건한 붕대를 풀어 상처를 소독하고 새로 갈았다. 팔이 안 닿는 부분이 있지만 혼자서도 능숙하게 해낼 수 있다.

새까맣게 썩은 것 같은 상처를 완벽하게 가린 그는 발목 아킬레스건의 상처도 부목을 대고 붕대로 꽉꽉 묶었다. 더러운 붕대는 버려두면 신부가 돌아와 쓰레기와 함께 태울 것이다.

몸이 성치 않은 그의 하루 일과는 별것 없었다. 북적북적한 고아원에서 손을 빌릴 수 없는 그가 바쁜 자원봉사자들의 눈에 들었다간 괜히 그들의 시선과 일손을 빼앗을지도 몰랐다. 폐를 끼치기 싫었던 그는 고아원에서 나와 뒷동산 공터 벤치에서 시간을 때웠다. 다리가 좋지 않은 그가 여기까지 오는 건 힘들었지만 나름의 재활 운동이다.

그가 이곳에 자주 온다는 걸 안 신부는 여름이 오기 전 그늘막을 만들어주었다. 이따금 늙은 들개가 와서 냄새를 맡고 간다만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구름 한 점 없어 한적한 바람이 태양에 달궈져 뜨거웠다. 여름 매미 소리가 시끄럽다.

벌써 여름인가. 세상이 멈춘 듯한 광활한 하늘 아래 앉은 그는 그저 열렬한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이대로 있으면 세상과 단절된 채 무의미하게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적을 깨는 것은 돌연 찾아오는 고통이다. 차례차례 순회하듯 쑤셔오는 상처가 아프다. 그의 얼굴, 움직이지 않는 팔, 발목. 왜 그만 고통받아야 하는 걸까. 끔찍한 상처를 달고 살아날 거면 차라리 명예롭게 죽을 것이지. 어린 나이에 낫지도 않는 상처를 달고 평생 살아가라고 말한다면 누군들 절망을 느낀다.

“제길, 젠장. 왜 나만.”

챙겨왔던 진통제를 한 움큼 목구멍에 쑤셔 박았다. 누군가가 그러길 그는 참전 군인이라 했다. 신문에서 보면 같은 참전 군인이라도 류제 신리는 영웅이 될 운명이니, 황제 폐하의 오른팔이니 떠들어댔다. 똑같이 적과 싸웠을 그는 이게 뭔가. 어빌리티라는 것도 발현 안 되고 몸은 점점 죽어간다.

이곳 사람들은 그런 자신과 류제 신리를 비교하지 않을 만큼 착하다. 마구간 이끼보다 쓸모없는 그는 은혜를 돌려줄 수 없는데도 도움을 주려 한다.

연결 고리는 고작해야 류제 신리와 친구라는 것뿐인데 기억을 잃은 그는 막상 류제 신리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신문에서 보는 그는 사진에서 보는 것보다 더 멀었다. 좁혀지지 않는 격차가 둘 사이에 존재했다.

마족을 완전 소멸시킨 데에 일조했다는 류제 신리가 친구? 아니지. 아세미가 말했던 것처럼 실제론 어떤 사이도 아니고 착한 루나의 착각일 뿐이다. 전쟁이 끝난 지 1년이 지났고 그가 이 고아원에 온 지는 3개월이 되었지만 타고시아 해변의 사진에 있던 사람들 중 그를 찾는 사람은 누구도 없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새로운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는 게 낫지 않아? 그 금발 여자가 그렇다며. 자기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무례를 떠올린 재경은 하, 콧방귀를 뀌었다. 고귀한 그녀가 그따위를 기억하고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애초부터 없었을 것이다.

오늘도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그는 해가 질 무렵 자리에서 일어섰다. 슬슬 다시 붕대를 갈아주어야 할 때다.

고아원으로 돌아가면 저녁 배식이 끝났을 것이다. 아이들이 먹다 남긴 잔반을 먹고 다락방으로 올라갈 그는 새벽 내내 오지 않을 잠을 청하며 진통제를 주먹째 삼키겠지.

“어머, 돌아왔니? 날씨가 참 좋았지? 하늘이 푸르더구나.”

“네. 뭐.”

“산책은 어땠니?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면 말해주렴.”

“평소랑 똑같았어요.”

고아원 낡은 부엌에서 어른스럽게 설거지를 도와주는 아세미와 물기를 닦은 그릇을 정리 중인 루나, 옆 건물 교회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책을 읽어주는 신부의 전경은 일상적이었다. 녹아들지 못한 그만이 썩은 기름처럼 둥둥 떠있다.

“끝. 이제 아세미도 갈래.”

마침 설거지가 끝난 아세미는 물기를 툭툭 털었다. 재경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메롱 하고 혀를 내민 그녀는 도망치듯 밖으로 달려 나갔다.

오빠의 친구 흉내를 내고 다니는 게 저만큼 싫은가. 난 흉내 낸 적도 없고 루나가 그렇게 주장할 뿐인데 새파란 어린애 주제에 심술궂기도 하다.

“아세미도 참. 네 저녁도 챙겨줘야 한다면서 어찌나 극성인지. 오늘 수프에 고기가 들어갔는데 아이들이 싹싹 긁어먹으려는 걸 절대 안 된다고 말리지 뭐니.”

다 널 위해서겠지. 저래 보여도 심성은 착하단다. 식힌 수프를 내어주며 루나가 말했다. 저작 운동이 쉽지 않은 그를 위해 잘게 자른 고기도 아세미의 솜씨라고 했지만 재경은 잘 모르겠다. 이 고아원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남에게 신세를 지고 있어 마음만 무거웠다.

어디선가 내 진짜 부모님들도 저들처럼 날 걱정하지 않을까. 그런 있지도 않는 고향 따위를 생각하면서 그는 마지못해 숟가락을 들었다.

내일도 모레도 이것의 반복. 해가 뜨고 지며 무료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의 몸은 나을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점점 상처가 벌어져 갔다.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의사가 문진을 왔을 때는 처음 보는 병이라며 아리송해했었지. 어쩌면 그의 어빌리티의 대가일지도 모른다고 말한 그는 가망이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건 대가 같은 게 아니라 질병이다. 병이 낫지 않는 병 같은 거다.

며칠 후 루나가 근방 대도시로 나가야 할 일이 생겼다. 일 때문에 바빴다가 오랜만에 관공서로 교회 지원 요청을 갔던 루나는 머나먼 아가타의 새 소식을 전해 들었다. 제립학교 학도병임을 증명할 수 있다면 학업을 유지하며 치료와 요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번에 왔을 때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잖아요!”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계속 걸려있던 거예요.”

그렇게 말한다면 루나는 할 말이 없었다. 고아원이 있는 마을은 대도시에서도 근교라고 말할 수 없는 한참 떨어진 외딴 농촌이라 마을 회관에도 공문이 붙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전쟁이 끝나고 고아원 일로 바빠서 대도시에 나올 생각을 못 했는데 이걸 놓쳤다니. 루나는 귀환 날짜가 지난 공문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목적도 잊어버리고 곧바로 마차를 빌려 타 하루를 꼬박 달려 고아원으로 돌아온 루나는 류제에게 보내던 편지를 이번엔 제립학교 측으로 바꾸었다.

다음 날 대도시로 물건을 팔러 나가는 짐차에 올라타 편지를 붙이려니 담당 공무원은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이 아이들을 위장시키는 경우가 있어 신분을 증명할 증거품이 동봉되어야 한다고 거부했다. 보통은 특수 처리된 군번줄이면 된다고 한다.

렌에게는 군번줄이 없었다. 찾아봤지만 처음부터 없었다고 한다. 싸움에서 소실된 모양이다. 루나는 집을 뒤져 재경을 발견했을 때 손목에 차고 있던 망가진 슬렉터를 동봉했다. 군번줄은 아니지만 뭔가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편지를 보낸 그녀는 매일 밤늦게까지 기도했다.

몇 주 후 답장이 왔다. 집배원에게서 편지를 받은 루나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지를 뜯었다가 원치 않는 내용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늦은 밤 신부와 상담을 했다. 탁자에 편지를 두고 몇 번이고 곱씹은 그들은 적힌 내용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무슨 날벼락이냔 말인가. 전쟁 때문에 다친 아이가 어째서. 루나는 등불 아래에서 코를 훌쩍거렸다.

이름 : 렌 지미

‘렌 지미’ ‘학생’에 관한 학교 ‘복귀’ 명령서.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소속으로서 참전했던 위 학생은 ‘작전 수행 중 임무 포기 및 탈영’에 관한 처분으로 ‘보호 관찰’이 필요하므로 속히 제립학교로 복귀 바람. 불이행 시 재판에 불리할 수 있음.

“분명 뭔가가 잘못된 거예요. 재판이라니. 군 재판은 엄하기로 유명하잖아요. 저 애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류제한테는 왜 여태 연락이 없는 건지. 이럴 줄 알았으면 학교로 편지를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틀로 찍어낸 듯한 딱딱한 공문을 읽는 루나가 소리를 억눌러 울었다. 기한 내까지 복귀하지 않는다면 숨겨준 사람까지도 공범으로 연루될 가능성을 언급하는 경고문도 있었다.

어린 렌은 마족과 싸우는 게 무서웠을 것이다. 부상까지 입었는데 작전 수행은 차치하고 살기 위해 도망치는 게 당연한 거지. 그러니 뭔가가 잘못된 것이다. 그녀는 폐하께 직접 가서 부탁할 거라고 고집을 부렸지만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그날따라 진통제가 들지 않아 밤새 잠을 못 이루던 재경은 화장실을 가기 위해 내려가다 말소리를 듣고 계단에 멈춰 섰다.

항상 웃던 루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훔쳐 들은 재경은 모르는 척 방으로 돌아갔다. 희망을 지워야 현실을 살아갈 수 있다.

이 상처는 명예가 아니라 도망친 그가 해야 하는 추악한 속죄인가. 류제 신리와 그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뼈저리게 느낀다. 그 격차는 좁혀질 수 없다.

그럼에도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재경은 이곳에서 나가 짐을 덜어줄 수 있으면 재판을 받더라도 상관없었다.

“혼자서 갈게요. 아가타로. 류제는 없어도 돼요.”

다음 날 아무렇지 않은 척 아침을 준비하는 루나에게 재경이 말했다. 덤덤한 말투에 설거지를 하던 루나의 손이 멈추었다. 듣고 있었구나. 눈물이 흘러나온 루나는 울컥한 마음을 잠재우려고 애썼다.

“루나 언니, 왜 그래?”

자원봉사자들을 도와 빨래를 걷던 아세미가 한 아름 수건을 들고 오다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식사를 다 끝내진 않았지만 불편해서 음식이 목구멍에서 막힌 재경이 먼저 자리를 떴다.

“울지 마, 언니.”

혹시 재경이 루나를 괴롭힌 건가 싶었던 아세미는 끼어들 때가 아님을 어린 마음에도 알아차렸다. 아세미도 루나를 따라 울고 싶어졌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답장이 없는 그녀의 오빠가 그날따라 너무 미웠다.

아가타로 향해야 하는 그의 운명을 지시하는 것처럼 명령서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까운 대도시의 기차역 보수가 끝났다. 전쟁으로 망가진 선로가 수복되어 아가타행 기차가 정상 운행되었다.

신부와 루나의 고심 끝에 재경의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행 날짜가 정해졌다.

함께 가겠다고 설득해도 재경은 멀고 먼 수도 아가타까지의 여정을 혼자서 할 수 있다며 고집을 부렸다. 루나는 그의 몸 상태가 건강한 편이 아니고 재판은 분명 잘못된 일일 테니 사정을 설명하면 복귀를 미룰 수 있을 거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군 재판은 반대일 가능성이 높고 무슨 판결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그들과 함께했다 짐이 되고 싶지 않았던 재경은 단호했다.

“날이 너무 덥지 않으면 좋으련만.”

가까운 대도시까지 향하는 마차 안.

루나가 챙겨준 주전부리와 별것 없는 잡동사니가 들어있는 가방을 끌어안은 그는 붕대로 감긴 흉측한 얼굴을 가리기 위해 후드가 달린 상의를 푹 눌러썼다.

사람들이 많은 곳은 그가 고아원에 오기 전 있었던 민간 부상자들을 위한 임시 시설 말고는 1년 만인 것 같다.

걱정으로 잠 못 이룬 루나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해 마차 밖 전경만 살피던 재경은 전쟁이 끝난 지 어언 1년, 전흔에서 회복하여 활기를 되찾아 가는 대도시를 목격하고 우울해졌다. 화창한 태양 아래 걸어가는 건강한 사람들과 점점 죽어가는 자신이 태양 아래 그림자처럼 선명하게 비교되었다.

“정말 혼자서 갈 수 있겠니? 다음 주면 교회에서 사람이 나와줄 수 있다고 했는데 그때까지만이라도…….”

“괜찮으니까 돌아가세요. 자리를 오래 비우면 안 되잖아요. 애들… 아세미도 있고.”

혼자서 갈 수 있다고 그렇게나 타일렀는데 루나와 신부는 기차를 타는 모습까지는 확인해야 한다면서 굳이 한나절이 넘게 걸리는 이곳까지 따라왔다. 그러면서도 재경을 끝까지 말리려고 한다.

목발을 짚었지만 도움을 거부하고 혼자 힘으로 마차에서 내린 그는 애써 루나를 안도시켰다. 그들이 필요한 사람은 재경이 아니라 남겨지면 아무것도 못 하는 전쟁고아들이다. 자신에게 애정을 쏟아봤자 아무것도 돌려줄 수도 없고 시간 낭비가 될 테니 부담스러웠다.

“부디 길 잃은 어린양이 향할 길을 보살펴 주시길. 진실은 밝혀질 겁니다. 걱정 마세요. 그곳에는 류제도 있으니까 분명 힘이 되어줄 겁니다.”

재경은 신부의 기도에 비정한 코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지금껏 답장도 없던 류제 신리를 들먹일지언정 기대하지 않는다.

신부가 재경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두 사람도 그런 재경의 마음을 알면서 모르는 척했다. 그들은 재경을 누군가의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필멸하는 인간으로서 연민을 느꼈다. 해주고 싶은 것들투성이지만 지는 짐이 많기에 고아원을 비울 수 없는 입장에 한탄했다.

“꼭 편지하렴. 아세미도 걱정할 거야. 안 된다면 교회를 통해서라도. 알았지?”

“네.”

“약속해요.”

루나가 재경 대신 기차표를 끊어 건네주며 손을 꼭 붙들었다. 무심한 성격 탓에 편지를 잘 안 하는 류제를 의식해서인가 더욱 필사적이다.

고개를 끄덕인 재경은 아주 오랜만에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얼굴을 뒤덮은 붕대 사이로 어색한 반쪽짜리 미소를 본 루나는 그를 상냥하게 안아주었다. 류제를 홀로 아가타에 보낼 때는 냇가에 갓난아기를 보내는 심정이었는데 그때보다 더 걱정이 된다.

재경은 마차를 타고 꼬박 여섯 시간이 걸리는 역까지 배웅해 준 신부와 루나에게 짧게 작별 인사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바쁜 그들의 시간을 잡아먹은 것도 죄스러운데 그는 전쟁에서 도망친 범죄자가 아닌가. 이런 그를 위해 고생한 그들에게 미안해서 얼굴을 볼 낯이 없었다.

기차표를 내고 자리에 탑승한 그는 벽에 기댄 목발처럼 몸을 뉘었다. 주변 사람들이 안쓰럽게 쳐다보는 눈길은 무시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난잡하게 부딪히는 시선은 온갖 감정을 두들겼다. 연민, 반발심으로 자신이 한없이 낮아진다. 그는 도망자다. 불쌍하게 생각할 가치도 없단 말이다.

기차는 정시에 출발했다. 떠나는 기차를 보며 손을 흔든 루나와 신부는 괜찮기를 바라며 기도했다.

기차가 점점 속도를 내자 진통제를 한 움큼 삼킨 재경은 눈을 질끈 감으며 의자에 기대었다. 이제부터는 혼자서 해나가야만 하는 여정에 앞길이 캄캄했다.

기차가 마차보다 빠르고 승차감이 좋다고는 하나 아가타까지의 여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되었다. 해뜨기 전에 고아원에서 출발해서 11시 기차를 탄 그는 다음 날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중간 환승 지점까지 도착했다.

붕대는 갈아야 하지, 시간이 늦어 사람은 없지, 괜히 혼자서 가겠다고 한 건가. 진물을 억누를 분말 파우더를 두드린 그는 진땀을 빼고 다음 기차를 갈아탔다.

우여곡절 끝에 좌석에 앉아 진통제를 다시 한 움큼 삼킨 그는 피곤해진 몸으로 해가 뜨는 모습을 보다 꾸벅 잠이 들었다.

잠깐 존 것 같은데 기차는 어느새 아가타 역에 도착했다. 하마터면 내릴 역을 놓칠 뻔한 그는 부리나케 내리다가 사람과 어깨가 부딪혔다. 부딪힌 사람이 꼴사납게 넘어져 바닥에 나뒹군 그를 일으켜 세워주다가 그의 몸이 성치 못하자 혀를 내둘렀다.

재경은 비명을 삼켰다. 붕대에 피가 번지자 사람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그를 역내 보건소로 데려다주었다.

“목적지가 어디신데요? 알려주시면 저희가 데려다드릴게요.”

“알아서 할 테니까 내버려둬요.”

보건소에서 정신을 차린 재경은 간섭하는 간호사들을 거부했다. 뙤약볕이 쏟아지는 날에 어디를 간다는 건지. 난감해진 그들이 재경을 마치 병자를 다루듯(병자는 맞았지만) 굴어서 마음에 안 들었다.

부딪힌 어깨에서는 상처가 또 도져 피가 흘러나와 말썽이다. 항상 이런 식이다. 유리보다 못한 몸. 재판은 받을지언정 그때까지 시간이 있을 테니 제립학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면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참견해 대는 간호사들의 도움으로 붕대를 간 재경은 제립학교 역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 떠났다. 그 뒤로 관계자들이 수군거렸다. 저들끼리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떠들어대는 가정은 비교적 정확했다.

어린애가 저 정도로 다쳤다면 학도병이거나 갓 졸업한 어빌리터 참전 군인이겠지. 그렇다면 저 아이는 저래 보여도 기간트리카로 마족을 토벌하던 제립학교 출신이다. 제립학교에서 학생들의 치료를 전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그들은 재경의 상처가 잘 낫기를 기도했다.

제립학교행 지하철은 생각보다 사람이 적었다. 평일 점심시간이라서 그럴지도 몰랐다. 많은 것보다는 나았지만 기차와는 다르게 옆으로 움직이는 지하철의 낯선 분위기가 마음을 불편하게 찔렀다. 힐끗힐끗 그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싫다. 재경은 괜히 가방을 끌어안으며 학교까지 남은 역의 개수를 되뇌었다.

하나, 둘 모르는 사람들이 지하철을 타고 내렸다. 지하철은 목적지를 향해 감정 없이 내달렸다.

뜨거운 공기를 가로지르던 철체가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나오자 창문 밖에는 전쟁이 일어났다기엔 이상향처럼 아름다운 아가타 중심 전경이 내려다보였다. 햇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왕도에 재경은 일순 넋을 잃었다. 기억을 잃기 전에 내가 이런 곳에서 생활을 했었다고? 실감이 안 났다.

이윽고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역’에 도착한 그는 보건소 직원이 쥐여준 팸플릿과 비교하다 목발을 짚어 절뚝절뚝 출구로 빠져나갔다.

나를 지나치는 이들 누구도 나를 불쌍하다 붙잡지 말기를. 또 오지랖 넓은 누군가에게 연민당하고 싶지 않았다.

바깥으로 나가니 그가 있었던 먼 외지 고아원에 비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시끌벅적 떠들어대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멀리 보이는 제립학교 건물이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다.

이제는 저 학교에서 기간트리카를 배우는 게 의무가 아니라서 다른 이름으로 바뀐다고는 하는데 전쟁 전에는 학교를 둘러싼 불투명한 무지개색 돔이 참 예뻤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팸플릿을 집어넣은 그는 멀고도 험한 정문을 향해 걸었다. 뜨거운 햇볕의 응원은 달갑지 않다.

학교를 다닐 적 그가 자주 지나쳤던 상가도, 주말에 심심할 때 류제와 유네와 함께 산책하던 길도, 라우라 축제의 퍼레이드가 지나쳤던 길목도,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던 광장도 그에겐 없는 기억이다.

이런 아름다운 도시와 활기찬 사람들이 재경은 질투가 났다. 이곳에 살았던 기억은 모르겠거니와 더 이상 그가 누릴 수 없는 것이겠지. 신 포도가 부러워 짜증 나 죽겠는데 날은 구름 한 점 없이 뜨겁기만 하다.

특히나 상처 때문에 남들보다 열을 품은 그에겐 여름은 쥐약이었다. 몸에 고인 열기로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제립학교 정문에 도착한 그가 방문자를 반기는 기둥을 짚고 흐르는 땀을 닦았다. 폐가 아플 만큼 숨이 턱까지 차 어지럽다.

빨리 들어가서 일을 해치우고 싶은 마음에 성급하게 걸음을 디디던 그는 몸을 불쑥 들이미는 경비병들에 놀라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방문 목적을 말하세요. 학생인가요? 지정된 교복이 아닌데.”

아무리 나라카를 개척하고 마족들을 완전 토벌한 키아나트리체일지라도 특이능력을 가진 어빌리터는 소중한 자산이었다. 유네 나르타의 납치 사건도 있으니 학교에 들어오는 검문은 여전히 철저하다는 걸 몰랐던 재경은 더듬거리다가 갑옷 안쪽으로 보이는 시선이 불쾌해서 눈동자를 아래로 굴렸다.

“명…명령서를 받고 복귀했는데요.”

“신분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

“명령서를 받았으면 그걸 보여주십시오.”

신분증이라. 전쟁이 무서워 탈영을 하겠다고 군번줄도 버린 것 같은데 그런 걸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그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동안 뭔가를 알아차린 경비병이 다른 경비병에게 눈짓을 주었다.

이번에는 공문을 제대로 가지고 온 그는 제립학교 복귀명령서를 내밀었다. 내용을 읽어보던 경비병은 공문을 돌려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렌 지미. 확인 완료했습니다. 들어가도 됩니다.”

“학생,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우리가…….”

경비병 중 한 명이 손을 내밀자 몸에 닿기도 전에 재경이 손길을 뿌리쳤다. 괜한 참견에 미간에는 짜증이 차올랐다. 컨디션이 엉망이라서 필요 이상으로 남들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 날 선 눈매로 경비병을 노려보던 재경은 절뚝거리며 정문을 통과했다.

그런 재경의 뒷모습을 보던 경비병이 눈짓을 주었던 다른 경비병에게 물었다.

“왜 그런 거야? 불쌍하대도 근무 중 이탈은 하지 마.”

“너 못 알아차렸어?”

“뭐가.”

너무 많이 달라진 모습에 얼핏 보면 누구라도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할 것이다. 그야 그들이 기억하는 그 학생은 장난꾸러기에 싹싹하게 인사하는 친화력 좋은 꼬마였으니까.

“저 학생 말야. 3년 전엔가 입학식 전날 성인용 잡지를 들고 왔던 그 애잖아. 경비실 안쪽에 네가 나중에 보겠다고 숨겨놓은 그거.”

“뭐? 정말? 저 애가? 아니, 잘못 본 거겠지.”

“이름이 같았어.”

그렇게 보니 머리 색이 비슷했던 것 같다. 얼굴 절반이 붕대에 감겨서 알아보지 못한 데다 저 눈빛은 그런 쾌활한 아이의 것이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복귀명령서에 쓰여있던 내용을 보면 상처 치료 같은 썩 좋은 이유로 학교로 돌아오는 건 아닐 터였다.

“하아, 진짜 싫다. 전쟁이 사람을 바꾸는 거.”

“꼬맹이 주제에 발라당 까진 놈인 줄 알았는데. 어빌리터라고 해도 평범한 어린애인데 말이지. 저런 어린애가 마족과 싸워야만 했다니 씁쓸하구먼.”

“덕분에 폐하께서도 마족을 퇴치했잖아. 마족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니 인간들의 승리라고.”

“하지만 상처를 치료하는 건 남은 사람들의 몫이지.”

한탄하는 그들은 저런 상처를 입었는데도 작전을 수행해야만 했던 기로에 놓인 입장을 떠올렸다. 그들이 지키는 학생들의 운명은 참 가혹했다. 마족이 없어진 지금은 점점 바뀌어가겠지.

고작 문지기에 불과해 해줄 수 있는 게 없지만 그들은 재경의 재판에서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랐다.

제립학교는 현재 여름방학 직전 기말고사를 준비 중인 1학기였다. 재경이 그걸 알게 된 것은 공문서를 들고 헤매다가 본관 2학년 교실 층이 텅 빈 것을 확인하고 다시 계단을 내려가 1학년 교무실에 문의를 하러 갔을 때였다.

하루 내내 무리를 해서 온몸이 쑤셔오는데 담당 교사가 수업 중이라 삼십 분은 넘게 대기해야 했다. 수업 종이 칠 때까지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는 교무실 안에서 기다리던 그는 수업이 없던 교사들이 힐끗거리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참을 수 없었다.

“지미 학생도 참 오랜만이네. 여기까지 오는 데 고생했지? 기다리는 것도 힘든데 이거라도 마셔. 곧 수업 끝날 거야.”

“아… 네.”

시원한 얼음이 뜬 잔을 내민 교사에게 짧게 인사한 그는 질문을 원하는 교무실 인원의 시선을 외면했다. 아무리 상처투성이라 할지언정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게 가장 싫었다.

이후 교무실로 돌아온 담당 교사가 재경을 확인했다. 과거 1학년 때 8반 수업에 들어갔던 교사에게는 일면식이 있는 학생이지만 재경은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다. 행방불명된 학생을 찾았다는 말을 들었지만 몰골이 이럴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한 교사는 착잡한 마음에 한숨을 밀어냈다.

상담실로 들어간 교사는 겁에 질린 재경에게 왜 복귀가 늦었냐, 무슨 전투에서 작전을 미수행한 거냐, 왜 피난민들을 두고 도망간 거냐 조심스레 물었다.

재경은 묵묵부답이었다. 교사는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알아야만 어떻게든 형량을 낮출 수가 있다고 타일렀다.

“제가 알기로는 이탈할 때까진 부상이 없었다 들었거든요. 그 상처는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할 수 있을까요?”

“기억이 안 나요.”

“괜찮으니까 말해보세요. 학교는 당신의 편입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안 나요. 그냥 눈을 떠보니까 이랬어요.”

“그때가 언제였죠?”

“재작년… 여름이었나. 모르겠어요.”

“상처가 그때부터 있었단 말씀인가요? 2년이나 지난 오늘까지?”

말도 안 되는 변명처럼 들리기는 한다. 재경은 거짓말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교사가 종이에 뭐라 휘갈기는 것조차 그를 거짓말쟁이로 내모는 착각이 일었다.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던 건가요? 학교로 편지를 보낸 사람은 누구죠?”

“어떤 교회에서 맡아줬어요. 그…그 사람들은 제가 누군지 몰랐는데 그게 제가 기…기억이 없어서…….”

“걱정 마세요. 그들에게 책임을 물려는 게 아닙니다.”

어찌할 바 몰라 재경이 고개를 숙였다. 교사는 이후 침묵하는 그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낫지 않는 상처는 진술이 이상하지만 듣자 하니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다. 교사는 재판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그때까지 천천히 떠올리라고 격려했다.

재경은 끝내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싸우다가 다친 건지, 혼자서 도망치다가 다친 건지 자신을 신뢰할 수 없었다. 상태가 저러니 교사는 더 골치가 아파졌다.

해가 지는 것을 본 담당 교사는 일단 오늘은 고생했으니 가서 쉬라며 기숙사와 배정된 반을 알려주었다. 반은 상관없지만 학년은 1학년이었다.

“류… 아니, 저는 3…학년으로 진급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류제의 이름을 꺼내려던 재경은 괜히 루나와 신부까지 들먹이게 될까 봐 에둘러 물었다. 어차피 재판으로 실형을 받는다면 의미 없는 학년이지만 마음에 걸렸다. 교사는 그런 몸으로도 3학년 교실까지 올라가고 싶을까 불편한 마음 한구석을 달랬다.

“학생은 1학년 2학기 추가시험에서 낙제한 과목이 있어 행정상 1학년에 편입되었습니다. 2학기만 들어도 될 테니 여름방학이 시작될 때까지는 쉬엄쉬엄 교실에 나와도 됩니다. 다만 출결은 꼭 부탁드려요. 보호관찰 대상이니 성실성도 재판에 영향을 받을 수 있어요. 제가 말을 해놓을 테니 지정된 시간부터 양호실에서 치료도 좀 받으시고. 병명을 알 수 있으면 좋겠군요.”

탈영에 대한 죄목 때문에 참전했어도 2학년 교육과정 대체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말을 숨긴 교사는 상처가 아물지 않는 이유가 마족과 관련되었을 수도 있으니 이를 증빙하고 치료하는 기간을 지정해 주었다. 상처가 심각하니 당장 내일 방과 후부터 가능하도록 스케줄을 조절했다.

그 말고도 다른 제립학교 소속 부상자들 또한 꾸준히 치료가 필요해 학교에는 상시 회복계 어빌리터들이 대기 중이다. ‘힐링 팩터’는 학생들에게 지양되는 약품이고 치료 가능한 인원은 제한적이라 제립학교도 난리였지만 최근 군인 중 ‘힐링’ 계열 어빌리티 양호교사가 임시로 들어와서 한결 수월했다.

“뭐라도 기억나면 말해주세요. 원래 큰 충격을 받으면 사람은 그때의 기억을 지워버리거든요. 이곳에 있으면서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면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제 가족들은 뭐라고 하나요?”

잠시 걸음을 멈춘 교사는 정녕 돌아올까 아득할 정도로 기억이 엉망으로 꼬여버렸음을 깨달았다. 그것마저 기억이 나지 않다니. 교사는 머뭇거리다 사실을 입에 담았다.

“학생의 인적은 학교 앞으로 되어있습니다.”

교사는 힐끗 재경의 반응을 살폈다.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건지 기숙사로 갈 때까지 그는 말이 없었다.

가방을 들어주고 A동 기숙사 5층 남학생 구역에 바래다준 교사는 혀를 찼다. 워낙 말썽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데다 전쟁 전에 납치 건에 휘말려서 큰 부상을 입었던 학생이라 전담이 될 때부터 눈에 밟혔다. 그가 저렇게 된 게 국가가 지켜주지 못해서인 듯해 양심에 찔렸다.

짐 정리를 도와줄까 상냥하게 물어오는 교사를 거절한 재경은 낯선 곳에 홀로 남아 별것 들어있지 않은 가방을 던졌다. 내일쯤에 창고에서 그의 짐을 꺼내준다고 한다. 내가 이런 곳에서 1년이나 생활했다고? 전부 연극 대본에 거짓말 같은 이야기다.

“모르겠어.”

학교로 왔어도 어떠한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 사진 속 사람들도, 그를 걱정하던 가족도 전부 그의 망상이었다. 고아원에서 나간다면 뭐든 해결될 거라는 바람과 반대로 이곳도 그에게 어울리는 장소가 아니었다.

까르르 웃고 떠들던 1학년 학생의 웃음소리를 떠올린 재경은 침대에 앉아 붕대를 풀었다.

해가 지는 기숙사 안은 찜통 같은 더위가 머물러 땀이 샤워를 대신했다. 참지 못하고 창문을 연 그는 힘겹게 의자에 걸터앉았다.

내내 무리가 가서인지 상처에서 짓무른 액이 넘쳤다. 루나가 챙겨준 약을 치덕치덕 바르며 찌릿한 고통을 인내한 그는 절대로 낫지 않는 이 망할 상처가 어떻게든 되기를 바랐다.

내일부터 아침에 일어나 규칙적으로 생활하며 등교해야 한다. 제대로 치료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적어도 고아원에 있던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었으면 좋겠다. 진통제를 한 움큼 삼킨 그는 낯선 천장을 보며 간신히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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