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젤 혹은 빌리(Giselle, ou les Wilis) (9/11)

지젤 혹은 빌리(Giselle, ou les Wilis)

나는 지젤이다. 

나는 사랑에 빠진 지젤이다.

나는 인생 최고의 순간에 오른 여자이다.

비록 처참한 추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

1열 가운데의 유일한 빈자리에 앉자마자 극장의 불이 꺼졌다. 필립은 막이 걷히고 무대가 드러나는 걸 지켜보며 피로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대한 어머니의 평가가 하나쯤은 맞는 듯도 하다.

무대는 그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 이건 재능이 아닌 취향의 문제였다.

지난 나흘, 카메라 앞에서 밀라 따위와 사랑에 빠진 남자를 연기하다 다시 무대 아래로 내려와 관객이 되고 나니 이제야 비로소 맞지 않는 옷을 벗은 기분이었다. 맞는 옷을 입으려면 필립이 온전히 자신이 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존재가 등장해야 했다.

오케스트라 연주가 시작됐다. 중세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세 발레리노가 번갈아 뛰어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는 내내 무심하던 그의 눈빛은 문이 열리며 그의 지젤이 등장하는 순간 돌변했다.

필립의 숨이 멎었다. 고작 며칠 만나지 못했을 뿐인 여자에게서 낯선 느낌이 들었다. 집에서 개처럼 구는 것만 보다가 밖에서 사람처럼 구는 걸 보니 색다른 탓일까.

그의 영역에서 벗어나 제 영역을 활보하는 여자를 보고 있자니 가장 먼저 드는 건 위기감이었다. 저 여자가 언제든 다시 목줄을 끊고 도망치려 할 수 있다.

미치겠군.

허리 아래의 반응이 즉각적이라 다리를 꼬아야만 했다. 이건 다분히 생리적인 반응이라지만 팔걸이의 끝을 손끝으로 만지작대는 건 무의식중에 나온 습관이었다.

발랄하게 웃으며 뛰어다니는 여자는 더없이 순수해 보였다. 다시 더럽히고 싶은 충동이 인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웠으나 다른 남자의 손이 여자를 더럽히는 건 달갑지 않았다. 발레리노가 그의 것에 입술부터 몸까지 붙여대는 모습을 지켜보는 그의 눈빛이 싸늘했다.

무용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인 걸 안다. 그렇다면 무용을 관두게 하면 되지만 그럴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필립은 여자가 춤추는 순간을 좋아했다.

여자는 야한 춤을 출 때에도 고상한 데가 있었다. 젖가슴을 저질스럽게 흔들다 다리를 높이 들어 천박하게 뻐끔거리는 구멍을 드러낼 때에도 여자의 몸짓과 표정은 순수하고 우아했다.

상반된 성질을 한꺼번에 표현할 줄 아는 것이다. 그것도 자연스럽게.

필립에겐 단연코 수아가 생애 최고의 무용수였다.

처음 여자의 춤을 보았을 때에는 마음을 불안하게 했던 그 위태로운 분위기에 필립은 어느새 중독되었다. 발레든 현대 무용이든 폴 댄스든 스트립 댄스든. 여자는 무얼 추든 위태로웠다.

폴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순간은 더더욱. 바닥에서 괴물이 입을 쩍 벌리고 있기라도 한 듯이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려 끙끙거릴 때면 목구멍 안까지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 괴물의 이름은 필립이다.

매번 알몸으로 춤추는 모습만 보다 보니 로맨틱 튀튀를 입은 모습은 새로웠다. 몸을 가리고 있으니 톡 치면 툭 부러질 것 같은 위태로움과 도자기 인형처럼 뽀얀 피부와 섬세한 선에서 나오는 우아함으로 더더욱 눈길이 쏠렸다.

갈증이 일었다.

의상의 뒤와 네크라인이 깊이 파여 있었다. 맨살뿐인 쇄골 아래와 등을 보며 테이프는 어떻게 붙였을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이 극장의 관객 천여 명 중에서 필립이 유일할 것이다. 답은 두어 시간여 후에는 알 수 있다. 공연이 끝나고 그걸 떼는 건 그의 몫일 테니.

익숙한 몸을 색다른 시선으로 즐기던 때였다. 무대 한가운데에서 환히 웃으며 요정처럼 사뿐히 춤을 추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여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반가운 기시감이 들었다. 지난여름, 바르나의 극장에서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던 순간도 이러했다.

여자가 곧바로 눈을 돌렸다. 다시 지젤로 돌아간 듯했으나 사라졌던 미소는 돌아오지 않았다.

왜 저러는 거지? 나 때문에 긴장한 건가.

아니면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지 낯빛이 점점 창백하게 질려갔다.

춤의 기교는 지난여름보다 훨씬 좋았다. 그러나 이번엔 그때에는 훌륭했던 감정 연기가 엉망이었다. 감정은 딴 곳에 있고 몸만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바르나에선 보지 못해 고대했던 지젤의 매드 신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었으나…….

“…….”

지젤이 연인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부터 온 극장이 숨죽였다. 필립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로 놀던 여자의 표정과 몸짓이 하나가 되었다. 처절하고, 또 처절하게.

연인이 실은 약혼녀가 있는 귀족의 몸인 것을 숨기고 저를 농락했다는 걸 깨달은 순진한 소녀가 무너지는 순간순간의 충격과 슬픔이 그런 감정을 알 리 없는 필립의 가슴에도 사무치도록 전해져왔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뛰어다니다 기절하고 자살을 시도하고 그러다 홀로 미쳐 춤을 추더니 사랑하는 이의 품에서 희망을 되찾나 싶던 것도 잠시, 여자는 저를 농락한 남자의 품에 안기는 순간 심장이 부서져 죽고 말았다.

지겹도록 본 장면인데도 필립은 처음 본 사람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지젤이 숨을 거두는 순간에는 주변에서 훌쩍이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막이 내려오기 시작하자 신들린 연기에 푹 빠져 있던 관객들이 깨어나며 기립박수를 쳤다. 필립도 따라 일어나 박수를 쳤다. 고대했던 장면이 기대 이상으로 완벽했다. 그러나 다른 관객들처럼 황홀한 표정은 지을 수 없었다.

관객이 아닌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두 번째 막이 올랐다. 배경은 깊은 밤에 잠긴 숲 속, 지젤의 무덤가였다. 지젤은 연인에게 배신당해 죽어 밤이면 사내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원혼이 되어 등장했다.

체력이 상당히 요구되는 춤을 여자는 잘 소화해냈다. 저를 죽음으로 몬 남자를 죽음으로 끌어들이는 춤을 추는 지젤의 감정 연기도 매드 신만큼은 아니었지만 보는 사람이 빠져들 정도로 뛰어났다.

그래서 마음 한가운데를 차지한 불안감을 한구석으로 밀어두고 편히 감상하기 시작했건만, 마지막에 다다라 여자의 연기가 다시 무너졌다. 지젤이 지칠 때까지 춤을 추어 남자를 죽이라는 다른 원혼들의 압박을 거부하고 결국 사랑의 힘으로 연인을 살리는 장면부터였다.

사랑하는 사내를 구원하고 원혼이 될 뻔한 자신의 영혼도 구원한 지젤이 무덤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에서는 극에 달했다. 지젤은 마치 사내를 죽이고 싶어 미치겠으나 각본이 그리 시키니 마지못해 살리는 것만 같았다.

연인을 잃고 홀로 남은 사내가 비탄에 젖자 극이 막을 내렸다. 기립박수가 이어지다 커튼콜이 시작되자 또다시 우레와 같이 쏟아졌다. 특히나 마지막에 지젤이 등장했을 때에는 그의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처음과 마지막은 미흡했지만 지젤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장면을 매우 인상적으로 해냈으니 관객들은 만족한 듯했다. 그러나 정작 찬사를 듣는 발레리나는 제 커리어가 끝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또 자학 중이군.

필립은 제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학교 관계자들을 적당히 상대해주고 무대 뒤편으로 향했다. 대기실 앞 복도에 서서 여자를 기다리는 사이 시간이 꽤 흘렀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저를 찾을 줄 알았지만 여자는 떠나는 무용수들의 행렬이 뜸해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이라도 찍어주려 했더니, 발레리나는 진한 분장을 지운 말간 얼굴에 튀튀 대신 후드 티와 레깅스를 입은 학생으로 돌아가 있었다.

표정이 어둡기 이를 데 없었다. 공연을 완전히 망쳤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실은 왜 저와 눈을 마주친 후로 집중을 못 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여자의 상태를 보니 좋지 않은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게 나을 듯했다.

“나의 지젤, 정말 훌륭했어.”

여자의 손등에 입을 맞춰 다른 남자의 흔적을 덮고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러나 여자는 꽃을 받지 않고 그의 손에 제 손을 포개더니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며칠 만에 많이 그을렸네요.”

그의 구릿빛 피부는 여자의 창백한 피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출장’ 전보다 더더욱.

“출장은 즐거웠어요?”

여자가 웃으며 물었다. 그 순간 필립의 직감이 말했다.

여자가 달라졌다.

그날 밤 둘이서 작은 파티를 열자는 말에 여자는 피곤하다며 제 침대로 곧장 향했다. 그러곤 주말 내내 나오지 않았다.

여자는 미동도 없이 누워만 있었다. 아프다는데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물으면 입을 다물었다. 병원에 보내주겠다고 해도 고개를 저었다. 열은 없었다. 겉으로도, 안으로도.

“출장은 즐거웠어요?” 

그때 든 의심대로 출장의 정체를 알게 된 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핸드폰 기록을 뒤져봐도 약혼 소식이나 사진을 본 흔적은 없었고 감시 카메라를 다 돌려봐도 수상한 움직임은 없었다.

게다가 여자는 그의 요구에 얌전히 응했다. 그가 다른 여자와 약혼해서 반항하는 거라면 관계를 거부하거나 적어도 싫어하는 티는 내야 할 것 아닌가.

그럼 공연이 제 욕심만큼 풀리지 않아 의기소침한 건가.

여자를 망가뜨리고자 빼앗아 준 배역이었으나 이런 식으로 망가뜨리라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가 알 바 아니건만 껍데기만 남은 사람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온종일 허공만 보고 있는 꼴이 계속해서 눈에 거슬렸다.

그래서 물었다. 크리스마스 쇼핑을 하러 갈까? 갖고 싶은 건 뭐든지 사주겠다고 했지만 여자는 그런 게 없다고 했다.

물만 마시며 굶기에 비서를 시켜 한국 식당에서 한식을 포장해 왔지만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기분이 더러워져서 버리려다 결국 냉장고에 처박아뒀다. 제가 그랬단 것도 이상하게 기분이 더러웠다.

누가 이기나 두고 봐.

여자는 자기 자신과 싸우는 중일 텐데, 필립은 여자와 싸우고 있었다. 저는 안중에도 없는 여자와.

참다 참다 크게 선심을 써서 네가 원하던 대로 입술에 키스라도 해줄까, 라는 말을 먼저 꺼냈을 땐 머저리라도 된 기분이었다. 여자가 성의 없이 고개만 저어 거부했을 땐 정말 머저리가 되었다.

네 주제에 나를 거부해?

내가 왜 너 따위의 비위를 맞춰야 해.

역할이 바뀌었다.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그날은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가 잘못했다고 빌 때까지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결심은 하루도 가지 못했다. 밤에 게스트 스위트에서 나가버린 여자가 한참이나 감시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다. 핸드폰도 전혀 쓰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돌아와서 본 여자의 꼴은 그의 불길한 상상대로였다. 여자는 거실 옆 화장실의 차디찬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들어 올려도 축 늘어져 반응이 없기에 자살 시도라도 한 줄 알았다. 결과적으론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은 걸로 드러났지만 멍청한 짓을 저지르긴 했었다.

거실에는 그가 냉장고에 처박아두었던 식사를 꺼내 먹은 흔적이 있었다. 뭘 좋아하는지 몰라 종류별로 하나씩 사 오라 했기에 혼자 다 먹을 수 없는 양이었다. 입이 짧은 이 여자라면 더더욱.

그러나 여자는 그걸 미련하게도 모조리 먹어 치우고 게워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거실 바닥에는 빈 와인 병이 두 개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자살은 아니었으나 자해였다.

고작 공연을 망친 것 때문에?

저는 안중에도 없는 여자가 필립은 더없이 괘씸해졌다.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이 이 여자를 쥐고 흔든다. 그의 영역을 침범당했다.

그래, 그래서 불쾌한 거다.

***

여자의 상태는 바닥을 치고도 올라오지 않았다. 환경이 바뀌면 공연 따위 잊을 거란 생각에 크리스마스 방학 동안 함께 휴가를 다녀오자고 제안했다. 드디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나 싶더니…….

로젠탈 성?

여자는 수많은 호화 휴양지와 리조트를 두고 후보에도 없던 그곳을 골랐다. 이유를 물었더니 경치가 예뻐서 겨울에도 가보고 싶었단다.

정말 미쳐버리기라도 한 걸까. 제가 어머니를 살해하려 했다는 곳에서 태연하게 휴가를 보내겠다니.

이륙을 준비하는 전용기 안에서 여자와 마주 앉은 지금도 꺼림직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거기다 뱀파이어들까지 달라붙어서 더욱 꺼림직했다. 필립은 통로 건너편에 앉은 어머니와 밀라에게서 몸을 돌리고 창 밖을 보고 있었지만 그들의 신경이 온통 여자에게 쏠려 있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밀라가 따라온 이유야 그 빌어먹을 호기심 때문일 것이고, 어머니가 따라온 건 ‘장학 사업’의 일환일 게 뻔했다. ‘말렸는데도 기어코 아들과 붙어먹은 여자’가 못마땅한 척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속으로는 여자가 큰 무대를 망치고 실의에 빠진 걸 통쾌해하고 있을 것이다.

역겹기 짝이 없었다.

공연은 망치지 않았는데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말해봐야 여자는 새겨듣지 않지만.

고개만 꼭두각시 인형처럼 끄덕이곤 다시 끈 떨어진 인형으로 돌아가 텅 빈 눈으로 허공만 응시하는 것이었다.

“잊어. 모두 여기 두고 떠나는 거야.”

비행기가 이륙을 위해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하자 필립은 여자에게만 들리도록 소리를 낮춰 다독였다.

수아도 잊고 싶었다. 그러나 남자가 말하는 것을 잊고 싶은 게 아니었다.

진실을 모르던 때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한번 알고 나니 모든 것이 그 진실에 맞추어 보이기 시작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수아는 묘한 긴장감이 도는 객실의 건너편으로 눈을 굴렸다. 잉그리드는 약혼녀가 있는 아들에게 거머리처럼 붙은 내연녀를 보는 눈을 하고 있지만 그럼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며 따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여태 아무 말이 없었다. 아마 이번 휴가 내내 말해주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필립이 네게 왜 이런 걸 아낌없이 주는 것 같니? 남자가 여자에게 대가로 바라는 건 하나뿐이야. 조심하렴.” 

그때 왜 잉그리드가 갑자기 끼어들어 수아를 위하는 척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낳은 아들을 두고 이런 말 하는 거 우습지만 필립은 괜찮은 남자는 못 된단다. 조심하렴.” 

내가 순순히 다리를 벌릴까 봐. 브랫 테이머인 아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줄 브랫으로 만들려고.

수아를 위한다며 한 짓은 결국 아들과 자신을 위한 짓이었다.

“네 후원자가 구원자처럼 구니? 잊지 마. 후원도, 구원도 공짜가 아니야.” 

그건 잉그리드의 자기소개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모르고 수아는 철저한 착각에 빠졌었다. 저 남자는 나를 순수하게 좋아했었는데 그 모친의 과민한 견제에 속아 그를 오해했다고.

진실을 아는 눈으로 돌아보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저 남자는 애초에 날 좋아한 적도 없을 텐데.

아니야.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쓰겠어.

우울의 늪에 빠진 저를 남자가 외면했더라면 판단은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도 스스로 한 발을 늪에 들이고 같이 허우적대고 있으니 남자의 진심이 대체 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있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건너편에서 핸드폰 소리가 울렸다. 반사적으로 돌아간 시선을 사로잡은 건 핸드폰을 든 밀라의 왼손이었다.

왼손 약지의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는 분명 저번에 클럽에서 처음 만났을 땐 없었던 물건이었다. 약혼 사진 속의 그 반지가 맞았다.

당신의 약혼녀는 사랑해요?

잠든 척하는 남자에게 갑자기 바보 같은 질문을 하고 싶어졌다. 저 반지에 그가 담은 의미는 무엇이냐고.

수아는 무심결에 초커를 만지작거렸다. 반지는 여자가 남자에게 귀속된다는 의미를 갖는다던가. 그러나 반지는 적어도 인간 취급은 해준다. 제 목에 매인 건 개 목걸이였다.

핸드폰을 보고 있던 여자가 불쑥 고개를 들며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밀라는 환하게 웃었다. 클럽에서 보인 미소와 다를 게 하나 없었다.

그럼 밀라도 내가 폰 알브레히트가의 개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그때나 지금이나 불편한 호기심과 우월감이 비치는 눈으로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수아는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안전벨트를 풀고 일어섰다.

저 사람들은 나를 구경하러 온 거야.

관람객을 피해 동물원 우리 구석에 머리를 박는 짐승처럼 수아는 이 밀실에서 숨을 공간을 찾아 나섰다.

제 전용기도 아니니 마음대로 다른 칸의 문을 열고 돌아다닐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다 겨우 찾은 곳이 갤리 옆의 화장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놀라 멈춰 선 수아를 누가 안으로 떠밀었다. 같이 들어온 사람이 등 뒤에서 문을 닫더니 철컥, 잠금 장치까지 채웠다. 수아는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밀실을 순식간에 가득 메운 남자의 향수 냄새가 의문을 해소해주었으니.

둘이 함께 서기엔 좁은 공간이었다. 수아는 등에 맞닿은 남자의 가슴팍이 크게 들썩인 것뿐인데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했다. 벽을 두 손으로 짚고 보니 눈앞으로 흰 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마일하이 클럽이라고 들어봤어?”

얼떨결에 변기 위로 몸을 숙이게 된 수아의 엉덩이에 하체를 붙이며 남자가 물었다. 들어봤다. 비행기에서 하는 섹스를 일컫는 은어라던가.

“오늘 같이 가입하는 거야.”

남자가 몸을 숙여 수아의 귓바퀴를 잘근대며 물었다.

“어때?”

언제 그에게 수아의 동의가 필요했던가.

“싫어요.”

그에게 필요한 건 거부였다.

수아의 치마가 걷혀 올라가고 레깅스와 팬티가 한꺼번에 무릎까지 끌려 내려왔다. 겉으로 드러난 음부에 닿는 공기가 차가웠다.

‘저 위로 떨어지면 푹신할 것 같네.’

등 뒤에서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내내 수아는 텅 빈 눈으로 창 밖의 구름만 응시했다.

“흣…….”

뜨거운 게 살 틈에 닿자마자 안으로 쑥 밀려들어 왔다. 앞으로 몸이 흔들렸다. 엉덩이를 퍽, 치받는 힘에 떠밀려 창문에 머리를 박을까 봐 수아는 힘을 주고 버텼다.

등허리를 짓누르고 있던 손이 스웨터를 걷었다. 제 성기가 들락날락하며 솟아오르고 꺼지는 아랫배를 그는 잠시 어루만지더니 위로 더듬어 올라와 브라를 수아의 목까지 끌어 올렸다.

브라 밖으로 쏟아진 두 살덩이가 남자가 흔드는 대로 출렁거렸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가슴은 곧 남자의 두 손아귀에 붙들려 무자비하게 짜부라졌다.

“흡…….”

수아는 신음을 죽이려 애썼다. 살이 찰싹찰싹 맞부딪치는 소리는 제가 억누를 수 없으니 비행기 소리가 묻어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화장실에서도 바깥의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띄엄띄엄 들리는 걸 보면 저들에게도 이 소리가 들릴지도 몰랐다.

“하읏!”

“얌전히 있어.”

엉덩이를 비틀며 그를 밀어내려다 우악스럽게 붙들려 배꼽 아래가 얼얼할 정도로 거칠게 꿰뚫렸다. 수아는 한 번 만에 체념했다. 도망칠 곳도 없으면서 도망치려고, 체면도 없으면서 지키려고 쓸데없이 힘만 뺐다.

어차피 저들은 두 사람이 함께 화장실로 들어가는 걸 봤을 것이다. 뭘 하는 중인지 다 알 텐데. 어차피 저들도 수아가 알브레히트사 회장의 전용 창녀인 걸 아니까. 적어도 저들에게 창녀의 섹스 쇼를 구경시켜주지 않는 걸 고마워해야 할까.

밖에서 밀라와 잉그리드가 살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들으며 제 밑의 변기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들에게 나는 평생 이런 취급이겠구나.

화장실의 변기. 인격은 없고 기능만 있는 물건.

“아흐흑!”

수아가 불시에 울부짖으며 자지러지자 남자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녀를 팔까지 한꺼번에 으스러트릴 듯이 끌어안고 허리를 크게 짓쳐 올리고 또 올렸다. 발정 난 종마처럼. 입은 쉴 새 없이 밭은 숨과 신음을 내뱉으며 목덜미의 살갗을 빨아 젖혔다.

돌아온 후로 섹스를 할 때면 남자는 이랬다. 온종일 무반응으로 일관하던 수아가 격한 반응을 보이면 흥분을 감당 못 하고 자제력을 잃었다.

그런데 남자는 알까. 그날 후로 수아는 단 한 번도 절정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도 가는 척일 뿐이었다. 그럼 서러워 엉엉 우는 걸, 너무 좋아 우는 줄 알 테니까.

“출장은 즐거웠어요?” 

그때처럼 울분을 불쑥 내뱉어서 제가 진실을 알고 있다는 걸 들켜선 안 된다. 복수든 도망이든 용서든 체념이든, 진실을 안 이상 선택을 해야 한다는 건 아는데 제가 뭘 해야 하는지 도저히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증거도, 확신도, 계획도 없이 무작정 따지고 드는 게 방법이 아닌 건 잘 알았다.

수아는 창 밖의 울창한 숲을 내려다보며 빌었다.

차라리 이대로 비행기가 추락해 전부 죽어버렸으면. 그럼 복수든 도망이든 용서든 체념이든 수아에게 억지로 주어진 의무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건 수아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편해지고 싶은 마음에 다른 길은 제쳐두고 용서라는 길부터 먼저 타진해보고 싶어졌다. 언젠가 성급하게 면죄부를 써주었던 적이 있으니 두 번째도 못 할 것 없었다.

“필립.”

수아는 그를 주인님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러보았다.

“사랑해요.”

남자가 준 그 모든 거짓된 것 속에서 수아가 키운 감정은 서글프게도 진짜였다. 이것마저 농락하고 비웃으면 더는 못 버틸 것이다.

“필립, 사랑해요. 당신도 나를 사랑해요?”

저를 사랑해서 그랬다면 그가 용서를 빌지 않아도 용서해줄 수 있었다. 비틀렸어도 사랑은 사랑이라는 핑계로.

그러나 수아의 사랑 고백에 남자가 보인 반응은 한 박자 어긋난 허리 짓이 전부였다.

“다시는, 다시는 묻지 않을 테니 단 한 번만 진실되게 대답해줘요.”

남자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나를 사랑해요?”

“사랑받고 싶어?”

“네.”

단말마의 절규처럼 터트린 대답에 돌아온 건…….

“그럼 내가 널 사랑할 수 있게 굴어봐.”

농락이었다.

성급하게 썼던 면죄부는 그렇게 흔적도 없이 버려졌다.

“넌 내가 좋은 구경이나 하러 따라온 줄 알겠지.”

성에 도착해 둘만 남는 순간 잉그리드는 필립 못지않게 싸늘한 태도를 드러냈다.

“난 좋지 않은 구경을 해서 따라온 거란다.”

며칠 전, 필립의 개집을 엿보다 의사가 드나드는 걸 보았다. 필립에게 물으면 엿본 것으로 책만 잡힐 테고, 필립의 비서를 불러 잘 구슬렸다. 물론 거부할 수 없는 제안으로.

그렇게 듣게 된 자초지종은 기가 막혔다. 공연을 망친 여자가 방황하는데 왜 필립이 안달복달하는지.

이건 위험 신호다. 상하가 반전될 조짐이 보인다. 이건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초심자인 네가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말리러 왔지. 뭘 말하는지는 너도 알겠지.”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은지 필립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너무 오래 가지고 놀지는 말렴. 애착이 애정이 되면 곤란해. 그러다 개의 이름 뒤에 네 성을 붙이는 건 아닌가 모르겠구나.”

필립은 실소했다.

“사랑하지도 않고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여자와의 결혼이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사람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필립은 불쾌한 화제에서 자연스레 벗어났다.

“아, 물론 밀라가 제게 도움이 될 거란 확신은 아직도 들지 않는군요.”

“그래도 그 애의 부친이 언론사를 여럿 갖고 있잖니. 게다가 밀라는 팔로워가 많지. 요즘 세상에서 미디어는 곧 힘이잖니.”

틀린 말은 아니나 맞는 말도 아니었다. 알브레히트는 혼맥으로 미디어와 연줄을 맺어야 할 만큼 미디어가 필수인 사업도 아니었다.

저쪽은 사정이 완전히 다르지만.

하나뿐인 자식이 변변찮아 자존심이 상한 밀라의 부모는 딸이 모델로 자리 잡는 데 실패하자 목표를 바꿨다. 유서 깊으며 부유한 가문의 안주인으로.

그들에겐 필립이 완벽한 표적이었다. 그러나 이미 서로를 이성으로 보는 건 불가능한 단계에 이르렀으니 당사자가 아닌 부모를 공략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 전략도 딱히 통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필립의 아버지는 밀라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도 전 부인들부터 현 부인까지 모두 연예계나 예술계 종사자였지만 적어도 밀라 같은 무명은 아니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무능하고 멍청한 여자와 결혼해 똑같이 무능하고 멍청한 후손들이 가문의 이름을 이어받는 건 눈 뜨고 볼 수 없다는 말까지 했다.

게다가 위르겐마이어가는 폰 알브레히트가와 급이 맞지 않는다. 이건 돌아가신 부친만이 아니라 모친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러는 잉그리드 랑게는 중산층도 못 되는 집안 출신 주제에.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러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전까지는 관심이 없어 보이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필립을 노골적으로 설득하려 했다.

“네게 도움이 될 거야. 네 아버지가 옛날 사람이라 이해를 못 한 거지.” 

모친은 시치미를 뚝 뗐지만 필립은 어머니의 말이 아니라 제 직감을 믿었다. 모친은 밀라의 부모에게 큰 약점을 잡혔다. 그게 뭔지는 아직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러니 밀라와의 약혼을 거부했을 때 그게 사업과 가문에 얼마나 큰 리스크가 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결국 필립은 잠시 백기를 들기로 했다.

미디어가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사랑에 뜻이 없는 그에게 결혼이란 사업 수단일 뿐이다.

서로의 성벽을 잘 아는 건 편리했다. 결혼해도 미혼일 때처럼 각자 자유롭게 파트너를 두고 살기로 합의하는 건 수월했다.

게다가 결혼을 한 번만 하라는 법도 없었다. 이혼을 당할 밀라라면 몰라도 그는 이혼한다고 해서 가치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슬슬 결혼식 계획도 세워야 하지 않겠니?”

밀라의 부모가 결혼식 후에야 그 약점을 놓아주기로 했는지 어머니는 약혼 전부터 결혼식 계획을 입에 올렸다.

“식은 여기서 하는 걸로 합의가 된 듯하다만 밀라는 여름이 좋겠다는데 난 날이 풀리는 대로 하는 게…….”

“그건 여자들끼리 상의하시죠.”

제게 불리한 화제에서 신경을 돌린 틈에 자리를 뜨려 했건만, 그의 모친은 집요했다.

“그 여자, 당장에 버리고 싶진 않다면 안전거리는 두렴. 다른 장난감도 구해보거나.”

대답 없이 방에서 나왔다. 홀로 복도를 걸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필립은 밀라의 목소리가 들리자 멈춰 섰다. 목소리는 복도 끝 계단 위에서 들려왔다.

“TV에서 봤는데 한국에서는 정말 문어를 산 채로 그대로 잡아먹어요?”

밀라는 대화 중이었다. 내용만 들어도 상대가 누구인지는 뻔했다.

“……문어요? 아…… 그렇게 통째로 먹지는 않아요.”

“그래도 살아 있는 채로 먹기는 하는 거잖아요.”

“그렇죠.”

밀라의 약은 조롱에 여자는 답답할 정도로 친절하게 대답해주고 있었다. 그가 아닌 남에게도 순순하게 구는 게 불쾌했다. 필립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성큼 옮겼다.

“와, 한번 꼭 보고 싶어라. 그럼 한국엔 언제 가는 게 좋아요?”

“아무 때나 가셔도 돼요.”

“수아는 언제 시간 돼요? 수아가 가이드 해줘요. 비용은 시세 두 배로 줄게요.”

계단 아래를 향해 서 있던 여자가 필립을 먼저 발견했다. 여자의 눈이 커지자 그제야 밀라가 뒤돌아보았다.

“필립, 수아랑 셋이서 한국에 가는 건 어때? 네가 싫다면 우리 둘만…….”

“내가 경고했지.”

필립은 밀라에게 얼굴을 바짝 맞대고 나직이 위협했다.

“내 영역 침범하지 마.”

필립은 아무 일 없었던 척 밀라를 지나쳐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유일한 주인이니 저 외에 다른 사람의 말에는 고분고분히 굴지 말라고 가르쳐야 했으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는 화를 죽이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여기서 뭐 해?”

“갑갑해서 구경 중이었어요.”

여기서까지 침대에 틀어박혀 있지 않는 건 그나마 고무적이었다.

“마음껏 돌아봐. 밖은 추우니까 나가지 말고.”

“네.”

필립은 계단을 내려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비행기에서 사랑을 운운한 후 또 투정을 부리겠구나 싶었더니 조용했다. 그러니 거슬릴 게 없는데, 이상하게도 거슬린다.

여자가 사라지자 필립은 그새 도망가버린 밀라를 쫓아갔다.

“뭐야?”

눈앞에 그의 핸드폰을 들었더니 밀라가 화면과 필립의 얼굴을 한 번씩 확인하곤 뚱하게 물었다.

“이게 왜?”

화면에 띄운 건 밀라가 제 SNS 페이지에 어젯밤 올린 스토리였다. 짧은 영상에는 밀라가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클럽에서 술을 마시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앞뒤가 안 맞는 멍청한 소리를 멋있는 척 지껄여둔 캡션은 술에 취해 썼는지 오타가 난무했다. 눈 뜨고 보기 힘든 꼴이었다.

“지워.”

“때 되면 알아서 사라져.”

“품위 유지도 계약 조건이야.”

“계약서에 야한 옷을 입은 사진을 술에 취해 SNS에 올리지 말 것이란 조항이 있었어? 내가 알기론 없는데?”

밀라는 조금 전에 저를 위협했다고 심사가 뒤틀렸는지 계약 위반인 걸 알면서도 오기를 부렸다.

“통제광 짓은 네 개한테나 해.”

“글쎄? 그 여자에겐 얌전하고 우아하게 굴라고 할 필요가 없거든.”

필립의 응수를 들은 밀라가 코웃음 쳤다.

“지금 걔가 나보다 상류층 사모님에 걸맞다는 거야?”

“…….”

“그럼 걔랑 결혼하든가.”

“누구랑 하든 너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이 슬슬 들려 해.”

약혼을 파기할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필립을 씹어 먹을 듯이 노려보던 밀라가 제 핸드폰을 꺼내 스토리를 지우고 그에게 확인까지 시켜주었다. 용건은 끝났으니 가려는 필립을 밀라가 붙잡으며 물었다.

“그런데 왜 걔한테 우리 결혼 얘기는 안 해? 평생 숨길 순 없잖아.”

“아직 그걸 받아들일 만큼 길든 건 아니니까.”

게다가 지금의 상태라면 더더욱 밝혀선 안 됐다.

“하긴…….”

밀라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더니 중얼거렸다.

“말하면 자살할지도 모르겠다.”

그 말이 스위치라도 된 것처럼 조금 전 복도를 걸으며 하던 생각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 가지고 놀지는 말라.

어머니의 조언이 그새 바뀌었다. 분명 몇 달 전에는 며칠 만에 망가뜨리기 싫으면 새 장난감은 아껴 쓰라는 말을 들었는데 말이다. 이젠 아껴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뜨렸다는 뜻이었다. 필립은 적당한 선에서 자제할 줄 몰랐던 제 실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필립, 사랑해요. 당신도 나를 사랑해요?” 

어머니는 개의 입에서 사랑이란 말이 나오면 버려야 할 때라 했다. 사랑을 목줄로 삼을 수도 있다만 그건 어떤 식으로든 주인도 옭아맨다는 것이다. 그딴 건 질색이었다.

그러나 선뜻 버리자는 결심은 서지 않았다.

제가 가진 능력을 잘 알고 내 모든 판타지를 현실로 만들어주는 데 필사적으로 헌신하는 여자를 어떻게 버리겠어.

어머니의 우려대로 필립은 첫 장난감에 애착이 대단했다. 여자가 요즘 제멋대로 굴며 역할이 바뀌었는데도 기강을 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그가 비위를 맞췄다.

그럴수록 버려야 한다는 걸 잘 안다. 그러나…….

“말하면 자살할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여자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 문제였다.

버리진 않아도 거리는 필요하다. 서서히 거리를 두고 홀로 서려 할 때쯤 자연스럽게 놓아주면 될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 순간 문득 의문이 들었다.

여자가 자살하면 내겐 잘된 일 아닌가? 내 죄는 여자와 함께 영원히 묻힐 텐데.

그런데 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여자를 살리는 길을 택하겠다는 걸까.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모두에게서 멀어지고도 수아의 놀란 가슴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남자의 집무실을 몰래 뒤지다 나오자마자 밀라와 딱 마주쳤다. 다행히 수아를 수상하게 보진 않는 듯했다.

낙지로 조롱을 하든 말든 반응을 하지 않으면 재미없어서 가겠지. 그런 생각에 적당히 상대하는데 남자까지 나타났을 땐 정말 심장이 추락하는 줄 알았다.

그가 저를 침실로 끌고 갔더라면 집무실에서 훔친 물건을 꼼짝없이 들킬 상황이었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남자의 목적은 딴 사람에게 있었다.

“내 영역 침범하지 마.” 

그 순간 눈이 번쩍 뜨이는 정보를 얻었다. 그 남자에게 밀라는 동맹이 아닌 경쟁자였다.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아직 결단을 내리진 못했지만.

계단을 끝까지 내려가 기억을 더듬은 끝에 찾아간 곳은 와인 셀러였다. 어두운 지하 창고에 불을 켜고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다. 그러다 보니 남자가 경찰서에서 했던 말대로 안쪽에 문 하나가 있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건가?

굳게 잠긴 육중한 나무문 앞에 선 수아는 여태 후드 티의 주머니에 숨기고 있던 손을 꺼냈다. 손에는 투박한 열쇠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남자의 집무실에서 훔쳐 온 것이었다.

장소만 얼른 확인하고 들키기 전에 갖다놔야겠다. 고리에 걸린 열쇠는 열댓 개는 되었다. 라벨이 붙어 있었지만 약어를 휘갈겨 써서 읽기 어려운 데다 이 문은 뭐라고 부르는지 수아가 알 턱이 없었다. 결국 일일이 자물쇠에 넣어보던 때였다. 셀러 문밖에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열쇠 꾸러미를 주머니에 잽싸게 숨기며 멀리 떨어진 와인 선반으로 향했다. 거기서 와인 병을 아무거나 집어 들고 라벨을 읽는 척하는데 문이 살짝 열리더니 아는 목소리가 들렸다.

“수아?”

“……야나?”

야나는 크리스마스 휴가를 반납하고 성까지 따라왔다. 명목은 잉그리드의 뒤치다꺼리였지만 걱정되어서 온 게 분명했다. 수아를 걱정하는 건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열쇠 줘봐요.”

제가 뭘 하려고 이 성에 온 건지 야나는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난 도와주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서야 열쇠 꾸러미를 넘겼다. 야나는 그중에서 하나를 바로 골라 들곤 잠긴 문으로 향했다. 문은 단번에 열렸다. 둘은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퀴퀴한 먼지 냄새가 나는 좁은 통로를 걷기 시작했다.

남자가 경찰서에서 한 말대로 여긴 미로 같았다. 혼자 들어왔으면 길을 잃었을 것이다. 수아는 손수 안내해주는 야나의 뒷모습을 고마운 눈으로 바라보다 약속했다.

“비밀 꼭 지킬 테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걱정 안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니까 인정할게요. 마음이 놓이네요. 대신 확인하고 싶은 게 있으면 혼자 움직이지 말고 나랑 먼저 상의했으면 좋겠어요.”

“네, 그럴게요.”

두 사람은 머지않아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길 끝을 차지한 건 두꺼운 나무문이었다. 갈라진 틈으로 바람이 윙윙 새된 소리를 내며 새어 들어왔다. 수아가 찾던, 강으로 난 문이었다.

야나가 열쇠를 찾아 문을 열자 겨울의 강바람과 함께 햇빛이 통로로 쏟아져 들어왔다. 수아는 밝아진 통로를 구석구석 둘러보고 문 너머의 깎아지른 절벽을 내려다보았다.

오래된 일이니 증거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 두 사람이 의식이 없는 엄마를 여기로 질질 끌고 와 밖으로 떨어트리는 장면만 덧없이 상상해보는데 야나가 물었다.

“내 말이 믿기 힘들었나 봐요.”

수아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야나를 못 믿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을 못 믿겠어요.”

수아의 시선은 까마득한 아래에서 거칠게 부서지는 물보라에 있었다.

“어떻게 인간이 고작 쾌락을 위해서 이런 짓까지 할 수 있는지가 믿기지 않아요.”

“그러게요. 그렇지만 쾌락 살인마란 괴물도 있는 세상이니까…….”

야나는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수아와 함께 질린다는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미동도 하지 않고 아래만 내려다보는 수아가 걱정스러웠는지 야나가 어깨에 손을 얹으며 격려했다.

“수아,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내가 도와줄게요. 시간이 필요한 건 알아요. 결정은 수아 몫이고요. 언제든 마음 정하면 말해요.”

수아는 고개를 끄덕이다 씁쓸하게 웃었다.

“솔직히 아직도 안 믿겨요. 저 정말 답답…….”

뚫어져라 보면 그날 밤이 보이기라도 할 것처럼 아래에 시선을 둔 채 자조하다 문득 깨달았다.

그날 밤의 진실에 대해 말해줄 사람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야나, 저 잠시 프랑크푸르트에 다녀와야겠어요.”

***

수아는 엄마와 초점이 뚜렷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한 번 깜빡이면 네, 두 번은 아니요예요.”

사실 입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수아뿐이었다.

“알아들었어요?”

엄마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것만으론 엄마의 정신이 또렷한지 확신할 수 없어 수아는 질문을 던졌다.

“엄마 이름은 신경란이에요.”

깜빡.

“여기는 한국이에요.”

깜빡깜빡.

수아는 다음 질문을 기다리는 엄마를 잠시 바라보다 물었다.

“그 남자가 엄마를 밀었어요?”

깜빡.

“하…….”

그러면 안 되는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수아는 미친 듯이 웃다가 뚝 그치곤 말했다.

“나 때문에 그랬대요. 그럼 그것도 사랑의 하나일 거예요. 그렇죠?”

깜빡깜빡. 수아는 엄마의 광적인 부정이 우스웠다.

엄마가 다 너 잘되라고 때리는 거야. 이건 다 사랑의 매야.

자기가 나쁜 짓을 하면 사랑이고 남이 하면 아닌가.

“……사랑인 줄 알았어요. 엄마도, 그 남자도.”

또 목구멍 깊은 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수아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솔직히 말도 안 되는 거 아는데 그렇게 믿고 싶었어요. 고통만 주는 사랑이라도 받고 싶어서. 외로웠거든요.”

눈앞의 엄마는 말을 하지 못하는데 끔찍하게 익숙한 목소리로 폭언이 들려왔다. 배부른 소리 한다. 네가 외로울 게 뭐 있느냐. 엄마 인생이 외롭지. 네가 부족해서 사랑받지 못하는 주제에 누구 탓을 하느냐.

누가 할 말을.

머릿속의 엄마를 닥치게 해야 할 때였다.

“그런데 그거 알아요? 그 남자, 내가 갖고 싶어서 엄마를 이 꼴로 만든 거예요. 사실 그게 고맙기도 해요.”

엄마의 눈동자가 부들부들 떨리더니 핏발이 흰자에 벌겋게 서기 시작했다. 수아의 눈에는 핏발과 함께 눈물이 번졌다.

나를 사랑해서 이런 짓을 했다면 고맙기만 했을 것이다.

이럴 때가 아니지.

수아는 감정을 추스르고 입꼬리를 활짝 올렸다.

“아, 그리고 이것도 알아요? 그 남자나 엄마나 똑같은 개새끼인데 나 그 남자는 사랑하지만 엄마는 사랑하지 않아요.”

엄마의 눈빛이 더더욱 사나워지자 수아는 더욱 삐딱하게 웃었다. 나쁜 아이가 되는 건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쉬웠다.

“화나죠? 그래서요? 피멍이 들도록 때릴 거예요? 못 하잖아. 못 하면 욕이라도 해봐요. 아, 그것도 못 하죠? 하하…….”

이젠 어떤 수로도 저를 휘두르지 못하는 엄마의 앞에서 수아는 속에 있는 말을 다 꺼내놓고 속 시원하게 웃었다. 권력이 뒤집히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었나 보다. 엄마는 이 순간이 올 미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다.

“살고 싶어요?”

혼란스러운 눈으로 수아를 바라보던 엄마가 눈을 힘주어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제야 누가 누구의 목줄을 쥐고 있는지 상황 파악이 된 모양이었다.

“왜?”

수아의 질문에 엄마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얼빠진 눈을 했다.

“엄마는 끝까지 자기밖에 모르네요.”

기가 막혀서 실소가 나왔다.

“이해가 아직 안 되나 본데요, 엄마는 그 남자가 나를 묶어두는 수단이에요. 목줄이고, 족쇄라고요. 엄마는 끝까지 내 발목을 잡았다니까요? 죽기 전에 한 번쯤은 딸한테 빈대만 붙지 말고 뭔가를 해봐요. 네?”

그래서 뭘 해야 하냐면요.

수아는 침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어갔다.

“난 엄마를 위해 살았으니까 엄만 날 위해 죽어줘야겠어요.”

도망치든, 복수를 하든 목줄부터 끊어야 하니까.

“그 엄마에 그 딸이란 말 있잖아요. 엄마가 딸한테 몹쓸 짓 하면 딸이 커서 엄마한테 몹쓸 짓 하는 거죠.”

깜빡깜빡깜빡깜빡깜빡깜빡깜빡깜빡.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엄마의 눈이 광적으로 깜빡였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표정 없는 얼굴이 그늘을 드리웠다.

“나를 낳아준 엄마라도 고맙진 않았어요. 다음 생에 다시 볼 일은 없었으면 해요. 그렇지만 인간 된 도리로 이 말은 해줄게요. 잘 가요.”

마지막 인사를 마친 수아는 저를 당장에 죽이려는 줄 알고 공포에 질린 엄마를 남겨두고 나왔다.

더러운 일은 이미 손을 더럽힌 자에게 맡길 것이다.

***

필립은 깜깜한 어둠뿐인 창 너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손끝은 카운트다운이라도 하듯이 테이블 모서리를 두드렸다.

당장 돌아오지 않으면 널 버릴 거야. 한 시간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그대로 내쫓을 줄 알아.

카운트다운을 하는 중인 건 맞았으나 0점이 가까워지긴커녕 점점 멀어졌다. 한 시간, 그리고 또 한 시간. 시한을 거듭해서 늘리고 있으니.

머저리같이.

필립이 닳도록 두드리는 테이블 가운데에는 고급스럽게 포장된 선물 상자가 놓여 있었다. 여자는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인 걸 알면서도 낮에 사라져서 저녁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보안실에 물었더니 낮에 여자 혼자 성 밖으로 걸어 나갔단다. 그의 허락도 없이. 핸드폰도 두고.

쓸데없이 여자의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에서 힘줄이 불끈 튀어 올랐다. 죄 없는 기계가 아니라 그 여자를 그 자리에서 이렇게 움켜쥐고 놓지 말았어야 했다.

보안 요원들을 시켜 주변 마을과 숲까지 다 뒤졌지만 여자는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안 돌아오는 게 아니라 못 돌아오는 걸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그를 갉아먹고 있었다.

툭.

테이블 끝을 때리던 손끝이 멎었다. 밖에서 타이어가 돌길 위를 구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 찰나였다.

곧 창 밖에 헤드라이트 불빛이 나타나더니 택시 한 대가 광장으로 들어섰다. 멈춰 선 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기 무섭게 필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헉!”

수아는 건물로 들어서자마자 남자에게 붙들렸다.

“내가 널 어디까지 참아줘야 해? 왜 내가 너 따위에게 안달해야 해.”

마련해둔 핑계를 꺼낼 틈도 없이 질질 끌려서 간 곳은 스파였다.

여긴 왜.

남자는 스파를 가로질러 밖으로 나갔다. 그러곤 불이 밝혀진 실외 수영장 앞으로 수아를 끌고 가기 무섭게 그 한가운데로 내던졌다.

“아악!”

풍덩 소리가 크게 울리며 수아의 몸이 차가운 물속 깊이 가라앉았다. 물이 눈과 코로 밀려들어 오며 여린 점막을 서릿발처럼 난도질했다.

“어흡…….”

겨우 물 밖으로 빼내자마자 머리가 도로 가라앉았다. 발이 닿지 않는 깊이였다. 수아는 죽을힘을 다해 허우적댔지만 발아래의 땅도, 눈앞의 땅도 멀기만 했다.

구해주세요.

저를 빠트린 남자에게 구해달라 빌었다. 수면 위로 머리가 솟을 때마다 보이는 모습은 한결같았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미동도 없이 서서 얼음장 같은 물만큼이나 차디찬 눈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냥 눈앞에서 콱 죽어버릴까. 그럼 복수가 될까.

죽을힘을 다해 차라리 죽는 게 그나마 쉬운 길이었다.

수아는 눈을 감고 힘을 뺐다. 제가 일으킨 물보라 소리가 잦아들고 주변이 고요하더니 먹먹한 귀를 물살 가르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헉!”

살고자 하는 발버둥을 관두고서야 남자가 수아를 건져 올렸다.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마자 고통을 안겨줬던 남자의 목에 두 팔을 감으며 악착같이 매달렸다.

죽는 게 더 쉽다는 건 착각이었다. 죽겠다고 고집을 부릴수록 살고 싶다는 집념은 더더욱 강렬해졌다.

남자는 수아를 수영장 밖으로 데리고 나가주지 않았다. 그녀의 발이 닿지 않는 자리에 그대로 서서 시린 물속에 목 아래까지 잠긴 채 숨을 헐떡이는 수아에게 더욱 잔인한 짓을 저질렀다.

“시, 싫어요.”

후드 티를 벗기던 순간에는 뭘 하는 건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정신이 번쩍 든 건 그가 치마와 레깅스를 한꺼번에 끌어내렸을 때였다. 남자는 한겨울 맹추위의 물속에서 수아를 알몸으로 만들려 했다.

“제발 그만!”

몸부림치며 그의 손을 떼어놓으려 했더니 남자가 먼저 손을 뗐다. 그러곤 수아를 품에서 떼어 떠밀었다.

“아, 안, 흡!”

또다시 그렇게 발이 닿지 않는 물속에 처박혔다. 다시 건져 올려졌을 때 수아는 그에게 더는 저항할 수 없었다.

잡아 뜯듯이 벗겨 내던진 브래지어가 푸른 물 위를 둥둥 떠다녔다. 그 옆으로 하얀 팬티가 떠올랐다. 완전한 알몸이 된 수아는 온몸을 덜덜 떨며 남자의 뜨거운 몸에 더욱 찰싹 달라붙었다.

“흣!”

허리에 두 다리까지 바짝 감으며 틈을 벌리자 그 사이로 남자가 파고들어 왔다. 이것도 열기라고 저를 강간하는 남자의 성기를 악착같이 붙들어야만 했다. 몸 여기저기에서 역겨운 짓을 하는데도 순순히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저항하다 남자가 손을 놓아버리는 순간 수아는 꼼짝없이 빠져 죽을 테니.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난날 남자가 제게 한 모든 짓의 상징, 그 자체라는 걸.

남자는 조용히 제 길을 가던 수아를 막무가내로 끌고 와 발이 닿지 않는 수렁에 던져 넣었다. 허우적대는 그녀를 살려주는 척하며 제 욕구만 채우는 약탈자를 수아는 구원자인 줄 알고 악착같이 매달렸다. 구원의 대가로 빈털터리인 제가 가진 유일한 것인 몸과 마음을 모두 내어주기까지.

구원의 민낯은 구속인 줄도 모르고.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였다. 이젠 그를 향한 떨림이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혼란스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이건 오로지 분노일 뿐이다.

“끅…….”

남자가 수아를 불시에 떼어 밀쳤다. 가느다란 목을 부러뜨릴 듯 쥔 손이 아니었더라면 또 물에 빠졌을 것이다. 그는 안간힘을 쓰며 팔뚝에 매달리는 수아를 다시 빠트릴 듯이 굴며 경고했다.

“널 참아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

그 한계, 나도 있어.

수아는 이를 악물었다.

내일부터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는 건 당신이야.

***

모두가 잠든 시각, 발레리나는 관객 없는 극의 막을 올렸다.

무대는 푸르스름한 새벽빛으로 물든 광장. 의상은 튀튀 대신 유령 같은 실크 로브, 토슈즈가 있어야 하는 자리에는 흰 슬리퍼 두 짝뿐이었다.

수아는 두 계절 내내 지겹도록 들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음악을 흥얼거리며 발끝을 들었다. 물보라 치는 소리를 향해 사뿐히 스텝을 밟다 하늘로 고개를 든 찰나였다. 빗방울이 뺨으로 떨어졌다.

그제야 수아는 기억해냈다.

엄마가 절벽으로 내던져진 밤, 비가 왔었지. 그런데 그날 밤 비가 오는 광장을 배회했다던 내 몸은 전혀 젖어 있지 않았어.

헛웃음이 나왔다. 앞뒤가 안 맞는 거짓말에 속은 건 그날 밤 잠에서 깨어 들은 빗소리는 꿈인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 ‘꿈’의 끝에서 들었던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음은 엄마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였을까.

진실을 알면서도 속았던 건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지젤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온몸으로 그리던 수아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이 춤을 추며 남자를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날 수아는 남자에게서 저를 잡아먹으려는 포식자를 보았다. 그의 비틀린 욕망을 한눈에 읽어내고도 속았다니.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멍청한 짓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남자의 말과 행동이 아귀가 맞지 않는다고 느꼈던 적이 수없이 있었다. 그가 저를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다고 전제하면 그 모든 것의 아귀가 맞아들어간다고 믿었다. 이제 보니 맞지 않는 조각을 억지로 끼워 맞췄을 뿐이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편한 길만 가려 했던 그때의 자신은 어리석었다. 뒤늦게 직면한 대가는 치명적이었다.

환희에 찬 턴이 광기 어린 스텝으로 돌변했다. 가짜 연인과의 파드되(pas de deux, 쌍무)를 그대로 따라가나 홀로 죽어가는 사람처럼 비척거리는 매드 신이었다. 이미 풀어 헤친 머리가 강바람에 휘날리며 눈앞을 가리는 순간, 겁도 없이 질주하던 수아의 몸이 난간에 턱 걸렸다.

수아는 엄마가 ‘떨어졌다던 자리’에 몸을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미친 여자처럼 큭, 웃는 찰나 눈에 아롱져 있던 눈물이 뚝 떨어져 검은 강물로 추락했다.

여기서 떨어져 죽으려는 생각도 했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아주 보란 듯이. 복수 삼아.

그런데 내가 죽는 게 복수가 되긴 할까?

죽음으로 복수하기엔 수아의 목숨은 저들에게 값쌌고 수아에겐 그 무엇보다도 값비쌌다. 명백한 수아의 손해였다.

그 사람들은 수아가 죽으면 범죄의 증거가 사라졌다고 기뻐하며 샴페인을 터트릴 것이다. 그러곤 정수아라는 인간이 있었단 사실도 잊고 행복하게 살아가겠지. 지젤을 속인 그 귀족 사내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아아, 어리석은 지젤.

수아는 2막의 마지막 장면을 되짚으며 두 손으로 제 목을 긁어내렸다.

어째서 그를 살려주었니? 그는 너를 잊고 행복하게 살아갈 거야.

어리석은 지젤. 아, 어리석은…….

“나의 지젤.” 

웃기지 마.

수아는 남자의 입버릇을 떠올리고 코웃음 쳤다.

당신은 사람을 잘못 봤어. 난 지젤이 아니야.

지금까지 저들이 세운 무대에서 저들이 짜둔 각본대로 춤을 추었던 발레리나, 정수아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었다.

뚝. 목을 긁어 내려간 두 손이 초커를 잡아 뜯었다. 올가미를 끊듯이.

난 더는 지젤이 아니야. 내가 죽었으면 당신도 죽어야지. 그렇게 우린 지옥에서 평생토록 끝나지 않는 파드되를 추며 살아가는 거야.

마지막 춤을 끝으로 발레리나는 그들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새로 막을 올릴 무대에선 연출가와 꼭두각시 무용수가 뒤바뀌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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