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착각 (8/11)

착각

개는 조용하다 싶으면 사고를 치지. 

***

우리에 갇힌 짐승으로 전락한 계기이자, 이 우리에서 나가려면 죽어야만 하는 존재는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엄마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는커녕 당당히 바라보지도 못하고 등진 채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한 지 벌써 10분은 지났을 것이다.

녹을 텐데.

에코백을 움켜쥔 손을 초조하게 꼼지락거렸지만 좀처럼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정수아, 엄마만 없으면 넌 자유로울 수 있어. 그런데 왜 못 해?

수아는 이제 인간이 아니었다. 짐승이니 사람을 죽이지 못할 건 뭔가. 죽이지 않으면 제가 먼저 죽을 거라면 더더욱.

돈이 필요했고 사랑을 원했다. 노력하면 둘 다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남자가 열어준 길에 발 들인 지 한 달 만에 깨달았다. 저를 단단히 오해해버린 남자는 둘을 한꺼번에 주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 굳이 그 남자의 사랑이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빚이 발목을 잡는 한 수아는 다른 남자와의 사랑도 엄두 낼 수 없었다.

그러니 이제 돈과 사랑은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 그래서 원치 않는 걸 없애기로 했다.

돈이 필요한 건 엄마 때문이다. 고로 엄마가 없으면 돈도 필요 없다. 간단한 논리였으나 멀쩡한 정신으로는 낼 수 없는 결론이다.

남자에게 혹독하게 시달린 그날부터 며칠 동안 수아는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축난 탓이었다. 그러나 침대에 온종일 누워서도 잠은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지쳐갈수록 텅텅 빈 마음속에 끝없이 메아리치는 목소리는 더더욱 뒤틀려갔다.

차라리 죽어. 왜 고생시켜. 차라리 깔끔하게 죽어버리지 그랬어. 나더러 칠칠치 못하다고 욕할 자격 있어?

정작 저를 짐승 취급하는 자는 그 남자이나 제가 그를 어찌할 수 없으니 비겁하게도 화살이 엄마에게로 향했다.

아니지. 비겁하다니 무슨 소리일까.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건 엄마 잘못인데.

자살할 거면 제대로 하지 그랬어?

그랬더라면 밑 빠진 독에 부을 돈을 벌겠다고 몸 파는 데서 아등바등 일하다가 강간당하지도 않았을 테고, 온갖 치욕스러운 짓을 하며 저한텐 한 푼 돌아오지도 않을 돈을 구걸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 그 남자와 개와 주인이 아니라 평범한 연인이, 어쩌면 그냥 평범한 남이라도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 이 모든 건 엄마의 잘못이었다.

수아는 눈을 번쩍 뜨고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뒤돌아 현실을 직시했지만 그러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린다. 여기서 도망치고 싶지만 도망은 곧 우리에 갇히는 길. 도망이라 부를 수도 없었다. 수아는 이를 악물고 엄마를 노려보며 마음을 모질게 다졌다.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은 엄마의 죗값이야. 난 할 만큼 했어. 저렇게 살면 뭐 하는데? 산 것도 아니잖아. 움직임도, 의식도 없는 말 그대로 식물 신세. 내가 고작 식물을 살려두려고 남자에게 몸을 팔아야 해? 엄마가, 아니, 저, 저게 알아서 말라 죽을 때까지? 그게 언제인 줄 알고?

이대로 내 인생 허비하기 싫으면 난 해야만 해.

그렇게 섹스 클럽에 첫발을 들이던 순간처럼 저를 설득해야만 했다. 물론 사람을 죽이는 데는 더 기나긴 설득이 필요하다.

난 자유롭고 싶어. 난 자유롭고 싶어.

수아는 마음이 다시 흔들리기 전에 벽에 부착된 상자에서 라텍스 장갑 두 개를 뽑아 꼈다. 에코백에서 텀블러를 꺼내자 안에 가득 든 얼음이 잘그락거렸다.

들키지 않고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문득 떠올린 순간은 정말 뜬금없었다. 열심히 훈련받겠단 약속대로 남자를 입으로 만족시켜주던 중이었다. 귀두가 목구멍에 박힌 채 끅끅대는데 중학교 때인가 읽은 추리 소설이 생각났다.

밀실에서 발견된 시체. 그러나 살인 흉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정답은 얼음이었다.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흉기 말이다.

얼음으로 된 페니스로 목구멍을 틀어막히면 어떻게 될까. 질식해서 죽을까? 당장 질식하지 않아도 녹으면 기도로 물이 흘러 들어가 익사할 것이다. 운이 좋아도 폐렴은 걸릴 테고. 살인 흉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저번에 엄마가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맨 건 튜브로 준 유동식이 기도로 역류해서 그랬다던가? 한 번 그랬던 적 있으니 이번도 그런 줄 알 것이다.

텀블러를 열고 안에 든 걸 꺼냈다. 아이스크림 틀에 얼린 기다란 얼음 막대였다. 수아는 얼음 막대를 들고 엄마에게로 다가가며 초등학교 2학년 때 들었던 말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목소리와 톤 그대로 따라 했다.

“수아는 참 기억력이 좋구나. 한번 들은 대사를 척척 외우다니. 응용력도 정말 좋아서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 가지를 하고. 수아 어머니, 이번에 드라마 아역 배우 오디션이 있는데 나가보는 건 어떠세요?”

엄마가 한 대답도 똑똑히 기억난다. 우리 수아는 발레밖에 모르는 애예요. 그때 수아는 오디션이 너무 보고 싶었는데.

네, 저는 기억력이 참 좋아요. 응용력도 좋고요. 어릴 때 책에서 본 걸 기억하고 응용해서 엄마를 죽일 정도로요. 책에서는 들켰던데, 전 완전 범죄면 좋겠네요.

잠든 엄마의 입을 열었다. 혀를 누르자 까만 목구멍이 들여다보인다.

자유. 내 자유를 위해. 난 이제 자유야. 자유야.

그 새까만 수렁에 얼음 막대를 꽂아 넣으려는 찰나였다.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반사적으로 얼음 막대부터 등 뒤로 숨겼다. 누군지 뒤늦게 확인한 수아는 막대처럼 얼어붙은 채 차가운 땀을 흘렸다.

저 남자가 왜 왔지?

그는 비밀스러운 짓이라도 하는 양 복도를 조심스레 살피곤 문을 닫더니 수아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오며 물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엄마 면회…….”

“거짓말도 규칙 위반이라고 했어.”

그렇지만 엄마만 죽으면 그 지긋지긋한 규칙도 더는 없어. 왜 지금 나타난 거야.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안 거야. 내가 뭘 하려던 건지는 도대체 어떻게 안 거야.

눈이 뒤집혔다. 제 손에서 얼음 막대를 빼앗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남자의 멱살을 잡고 물으려 했지만 그가 먼저 꺼낸 말에 수아는 남자를 향한 모든 의문과 원망을 잊어버렸다.

“또 죽이려 해?”

……또?

“네가 한 짓을 덮어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 한 번은 숨겨줘도 두 번째는 나도 못 해.”

내가 한 짓을 덮어줬다. 지금이 두 번째가 될 것이다. 뭘?

“저번 일도 아직 수사 중인데 이런 짓을 또 벌이면 어쩌자는 거야. 감옥에 가고 싶어서 그래? 최소 징역 10년이야. 내 곁에 있느니 감옥이 나아?”

그 말을 하며 남자는 상처받은 듯한 눈을 했다. 그러나 수아는 아직도 지나간 말에 매여 눈만 멀뚱히 깜빡였다.

“가해자를 죽여서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네 심정, 이해해. 나는 이해하지만 세상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

얼어붙어 있던 몸이 휙 딸려갔다. 수아를 끌어안은 남자의 몸이 정말 얼음을 안은 것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네가 여기서 어머니를 죽이면 난 널 더는 지켜줄 수 없게 돼. 그래도 정말 그러고 싶어? 수아, 난 널 잃고 싶지 않아. 제발 그만해줘. 날 위해서라도.”

이 모든 말의 전제가 너무나 분명한데 그걸 인정하고 입 밖에 내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엄마를 밀었어요?”

“……기억이 안 나?”

남자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수아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마치 거짓말의 증거를 찾으려는 듯이. 그럴수록 수아는 더더욱 겁에 질려갔다.

“뭐, 뭘 본 거예요? 내가 모르는 뭘 아는 건데요?”

그제야 남자가 해준 이야기는 수아를 머리끝까지 공포의 늪 속으로 처박아 넣었다.

사고가 있던 날 새벽, 성의 보안 요원이 술 취한 사람처럼 비척거리며 돌아다니는 수아를 광장에서 발견하고 방으로 데려다주었단다. 그때 수아는 실내용 슬리퍼를 한 짝만 신고 있었다고.

“얼마 전만 해도 네가 하필 그 시각에 그 장소를 돌아다니던 건 우연일 뿐이라고 믿으려 했어. 그랬는데…….”

남자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달싹거리는 입술 새로 한숨만 뱉는 남자의 낯에 절망의 빛이 짙어질수록 수아의 낯에선 핏기가 사라졌다.

“난간 앞에 떨어져 있던 슬리퍼 한 짝 기억나?”

더러운 슬리퍼 한 짝이 돌바닥에 덩그러니 엎어져 있던 건 기억난다. 그리고 이제야 그 순간엔 잇지 못했던 두 개의 조각이 맞춰졌다. 그날 아침, 제 슬리퍼 한 짝이 보이지 않아 방 안을 뒤졌던 사실이 떠오르는 순간 두 다리에서 힘이 빠지며 수아는 남자의 품으로 추락했다.

“지난달에 변호사에게서 연락이 왔어. 그 실내화에서 네 DNA가 나왔다고.”

DNA란 말을 듣자마자 비슷한 말을 들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프라우 신의 손톱 밑에서 프라우 정의 DNA가 나왔습니다.” 

그땐 분명 전날 밤 엄마가 저를 때렸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젠 엄마가 제게 저항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 하지만 난 그날 밤 기억이 전혀 없는데……. 눈을 감았다가 떴더니 침대에 잠들었을 때랑 똑같이 누워 있었는데……. 꿈까지 꾸면서 잤는데…….”

횡설수설하며 제가 범인이라는 걸 부정하는 수아를 남자는 잠자코 응시했다. 진실과 거짓을 감별해내려는 듯이 냉철한 눈 앞에서 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렸다.

“저, 정말이에요.”

“난 여태 네가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어.”

“아, 아니에요.”

“그런데 최근에 야나에게서 들었지. 그날 네게 수면제를 진통제와 함께 줬다고.”

“……네?”

“아마 그 수면제 탓일 거야. 만취했을 때처럼 충동적인 행동이나 기억을 잃는 부작용을 일으키는 걸로 유명한 약이라.”

만취했을 때처럼.

사람들은 술에 취해 범죄를 저지르곤 한다. 그러곤 술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런 기사를 볼 때마다 수아는 생각했다. 실은 하고 싶었던 일이면서. 술의 힘을 빌려놓고 술 탓을 하다니.

위선자들.

수면제 탓을 한다면 수아도 다르지 않은 위선자였다. 남은 속여도 자신은 못 속인다. 엄마를 죽이고픈 충동에 시달리며 살아온 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수아는 알았다. 그리고 지금만 해도 그 충동을 못 이겨 죽이러 온 것 아닌가.

“내가 그랬어…….”

결국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내 잘못이었어.

“어머니와 같은 방을 썼기 때문에 실내화가 섞인 것 아니겠냐고, 변호사가 일단은 반박해뒀다니까 너도 그렇게 알고 있어. 너를 본 보안 요원의 입막음은 내가 그날 미리 해뒀어. 혹시 네가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릴까 봐 숨긴 건데 정말 네가 범인이라니 나도 곤란해졌군.”

내가 그랬다는 말만 멍하니 중얼거리며 남자가 하는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었다. 그러다 그가 수아의 눈을 피하며 한 혼잣말에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이제라도 경찰에게 솔직하게 말할까 고민했지만, 그러면 수아가 곤란해지고…….”

“아, 안 돼요. 제가 뭐든 할게요. 제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뭐든 할게요.

그새 몸에 습관이 붙은 수아는 남자의 앞에 무릎 꿇었다. 여기가 어딘지도 잊고 그의 벨트를 잡아 풀어 헤치던 때였다.

“잠깐.”

남자가 수아의 어깨를 잡았다.

“저 아직도 못 해요? 그럼 다른 거라도 뭐든 해드릴 테니까 제발 비밀로 해주세요.”

눈물이 줄줄 흐르는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지만 그의 시선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수아의 뒤, 엄마가 죽은 듯 누워 있을 게 분명한 자리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대체 뭐가 있길래.

남자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서린 건 처음 보았다. 일어서서 뒤돌아본 수아도 결국 같은 눈을 했다.

엄마가 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도 스스로 눈을 뜨고 움직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뭔가가 달랐다. 한참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서야 수아는 다른 점을 찾아내곤 소스라쳤다.

눈에 초점이 있다. 그 초점이 수아를 따라 움직이고 뒤에 선 남자에게 향했다가…….

“……엄마?”

엄마를 부르는 순간 수아에게로 돌아오기까지 했다.

“서, 설마 내 말 알아들었어요?”

수아를 빤히 바라보며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은 마치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만 같았다.

식물인간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니, 열흘 전에 면회 왔을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그사이 의식이 돌아왔다는 뜻이었다.

“그럼 우리가 하던 말도 다 알아들었…….”

당황한 나머지 엄마가 독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잊었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뒷걸음질 치던 수아의 등에 단단한 것이 부딪쳤다. 제 것이 아닌 심장이 수아의 몸을 쿵쿵, 거칠게 두드렸다. 남자가 수아에게로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눈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넌 감옥에 가게 될 거야.”

헉, 새파랗게 질려 도망치려는 수아를 남자가 붙잡았다.

“다신 경찰 만날 일 없게 해준다는 내 약속 기억하지?”

그는 죽을 것처럼 온몸을 떠는 수아를 끌어안고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수아에게 안전한 곳은 이 남자의 그늘뿐.

가까스로 연 문을 제 손으로 닫았다. 그렇게 다시 우리에 갇혔다.

***

머리를 풀어 헤치며 바닥에 주저앉은 수아를 누군가가 감싸 안았다.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드는 순간 비탄에 찬 눈빛을 마주했다.

‘우리 딸, 정말 나를 죽이려 했어?’

소스라치며 뒷걸음질로 도망쳤다. 몸을 돌려 엄마의 시선을 피하는 순간, 남자들과 마주쳤다.

‘어머니를 잃은 수아를 격려할 겸 배역을 주시죠.’

‘하지만 본인이 한 짓 아닙니까.’

공포에 질려 그들을 피해 도망친다는 게 하필이면 동기들에게로 돌진했다.

‘들었어? 수아가 자기 엄마를 죽이려 했대.’

‘뭐? 걔 그걸로 동정표 사서 배역 빼앗았잖아.’

‘독한 애다, 정말.’

동기들의 경악에 찬 시선이 제게로 쏟아지자 수아는 고개를 푹 숙이며 두 귀를 틀어막았다.

네가 죽이려 했잖아. 이 수렁에 빠진 건 다 네 잘못이잖아. 그런데 뻔뻔스럽게 엄마 탓을 해? 그 남자에겐 네가 저지른 일의 뒷수습을 떠맡기면서 넌 그를 원망했어? 그 엄마에 그 딸이구나.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비난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신랄해져갔다.

“뭐 하는 거야?”

슈라이버 교수의 성난 목소리가 수아의 사방에서 웅성거리던 목소리를 몰아냈다. 넓은 스튜디오에 메아리치는 음악이 들리는 순간 수아는 아연실색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알브레히트 역을 맡은 발레리노와 지젤의 어머니 역을 맡은 발레리나가 수아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공연 연습 중인 걸 까맣게 잊었다. 지젤이 연인에게 속은 걸 깨닫고 광기 어린 춤을 추는 매드 신(Mad Scene)의 도중에 홀로 멈춰 정말 미친 여자처럼 굴었다.

“수아.”

음악이 뚝 끊겼다.

“설마 딴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니?”

“죄송합니다.”

“하…… 공연 연습 중에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는 사람은 처음 봐.”

교수가 리모컨을 쥔 손으로 골이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잘하나 싶더니 요 며칠은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하지? 공연은 이제 겨우 2주 남았어. 이건 망치면 너 하나만 망하는 시험이 아니야. 함께 준비한 모두가…….”

그 후로 날카로운 질타가 한참을 이어졌다. 함께 공연을 준비하던 학생들의 눈빛이 저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에는 실력도 안 되면서 배역을 빼앗은 여우를 보는 눈이었다면 지금은 살인 미수범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아니야. 저 애들은 모를 거야.

아니야. 저 애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

요즘도 어떤 애들은 수군대다가 수아가 쳐다보면 입을 다물고 눈을 피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심장이 덜컥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다들 내가 엄마를 죽이려 했다고 수군대는 거야. 저번처럼 탈의실 구석에 숨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야만 해.

“그전까진 아주 좋았어. 그래서 더 기가 막히는 거야. 아, 한 가지 더. 정말 지젤이 미친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미친 연기의 방향이 틀렸어.”

말아 쥔 손에 식은땀이 차오르는 사이 교수의 질타는 지적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머리를 풀어 헤치라고 했지 진짜로 쥐어뜯으라고는 안 했어. 지젤은 그런 종류의 미치광이가 아니야.”

그제야 제 손가락 사이에 낀 머리카락이 수아의 눈에 들어왔다. 또 자해를 해버렸다.

“아까 그 장면부터 다시.”

이번엔 다행히 정신을 놓지 않았다. 무난한 피드백을 들은 후, 교수가 다른 학생들에게도 피드백을 주는 사이 잠시 숨 돌릴 시간이 생겼다.

수아는 창가에 둔 가방에서 생수병을 꺼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목을 축이며 자신을 질타했다.

정수아, 왜 이래? 정신 차려야지. 찬 공기라도 맞으면 정신이 번쩍 들까.

창문을 열려던 때였다.

경찰이다.

도로변에 세워진 경찰차 밖으로 네이비색 제복을 입은 남자 둘이 나오더니 이 건물로 곧장 걸어왔다. 그중 하나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는 찰나 수아는 바닥에 허둥지둥 웅크려 앉으며 창턱 밑에 몸을 숨겼다.

무릎을 끌어안고 그 사이에 얼굴을 숨긴 채 덜덜 떠는데 어젯밤 남자가 한 말이 기억났다.

“몇 년 전에 한국에서 엄마를 죽이려 한 적이 있었다며?” 

독일 경찰이 그 기록을 한국 경찰에게서 받았다는 소식을 변호사에게서 들었단다. 그게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그거, 그거 아니에요. 난 그런 적 없는데 엄마가 그렇게 우겨서……. 제발 믿어주세요.” 

그런데 정말 죽이려다 붙잡힌 사람의 말을 누가 믿어줄까.

“왜 내게 말 안 했어?” 

입장이 더 곤란해졌다는 남자에게 수아는 제 손으로 다리 사이를 벌렸었다.

“날 버리지 말아주세요.” 

이 쓰라린 자리가 아물기도 전에 남자가 나를 버린 걸까. 아니면 엄마가 결국 말한 걸까.

“수아, 왜 그래?”

어깨에 손이 닿는 순간 흠칫 고개를 들었다. 수아만큼이나 놀라 손을 떼는 사람은 상대역을 맡은 발레리노였다. 작은 소란에 주변의 시선이 수아에게로 쏠렸다. 사람들의 눈에서 목소리가 또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경찰이 안 보여? 너 잡으러 온 거야. 늦기 전에 자수해.

“시, 싫어.”

네가 했잖아. 우린 다 알아.

“나, 난 아니야.”

“뭐가?”

발레리노가 묻는 찰나에야 다시 정신을 차린 수아는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한 시간여 후, 수아는 프랑크푸르트의 명품 거리인 괴테슈트라세(Goethestraße)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눈앞의 고풍스러운 건물에는 창문마다 알브레히트라는 글씨가 금박으로 고급스럽게 새겨진 미색 차양이 드리워 있었다. 겨울의 초입이라 바람이 찬데도 부티크 입구에는 입장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길었다.

수아는 줄을 서지 않고 모퉁이를 돌아 다른 입구 앞에 섰다. 벽에 달린 명패는 두 개였다

잉그리드 폰 알브레히트 재단. 그리고 그 위에 달린 명패의 Albrecht GmbH는 알브레히트사의 오피스, 즉, 남자의 사무실이 있는 곳이었다.

아마도.

여긴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어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찾았다. 남자가 매일 출근하는 곳이 맞기만을 바라며 무거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작지만 우아한 로비 안쪽에서 여직원이 리셉션 데스크 뒤에 앉은 채로 물었다.

“폰 알브레히트 회장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이름은 정수아라고 해요.”

“방문 약속은 하셨나요?”

“네.”

수아는 당당히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리셉셔니스트는 수아의 말에 넘어가지 않고 컴퓨터로 뭔가를 확인해보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약속하신 게 맞으신가요?”

“네.”

수아는 또 거짓말을 했다. 죄가 커질수록 벌도 커질 테니.

“잠시만요.”

여자가 무선 전화를 들더니 어딘가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제야 학교에서 나올 때 꺼둔 핸드폰이 생각났다. 주머니에서 꺼내 켜자마자 보인 건 발신자가 필립 폰 알브레히트인 부재중 전화가 열두 통이나 왔었다는 메시지였다.

그 남자가 나를 찾았어. 미치도록 찾았어.

입술이 일자가 되도록 입을 꾹 다물며 미소를 숨기는 찰나였다. 손안의 핸드폰이 요란스레 진동하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기쁘게도 그 남자의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 핸드폰은 왜 꺼둔 거지?

“저 로비에 와 있어요. 회사 로비요.”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남자가 명령했다.

- 허튼짓하지 말고 거기서 얌전히 기다려.

전화를 끊자마자 전화기를 귀에 댄 채 묘한 눈으로 저를 보던 리셉셔니스트와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돌렸더니 리셉셔니스트가 하던 통화를 대충 얼버무리며 끊었다. 그러곤 달리 말을 걸지 않았다.

수아는 엘리베이터 두 대를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었다. 다리 사이도 조용히 젖어들어갔다.

벌써 왔어?

오른쪽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거기서 나온 유일한 사람은 그 남자가 아니었다.

“……수아?”

잉그리드의 비서인 야나였다.

남자를 곤란하게 할 생각으로 오긴 했는데 여기서 저를 아는 사람을 마주치는 바람에 제가 곤란해질 건 생각을 못 했다. 수아는 그 탓에 당황했으나 야나마저 눈에 띄게 당황하는 이유는 뭘까. 분명 엘리베이터에서 나올 땐 밝았던 야나의 얼굴은 수아를 발견하자마자 어두워졌다.

“아, 안녕하세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나면서도 인사를 했더니 야나가 다가오며 물었다.

“어떻게 지내요?”

그러곤 목소리를 낮춰 질문 두 개를 더 퍼부었다.

“아직 그 펜트하우스에서 살죠? 별일 없어요?”

멍하니 야나를 바라보던 수아는 흠칫했다. 야나의 눈은 마치 뭔가를 아는 눈 같았다.

설마 내가 엄마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걸 야나도 아는 건가.

얼어붙은 수아에게 야나는 더욱 바짝 다가오더니 귓속말이라도 하듯이 속삭였다.

“혹시 무슨 이야기든 편하게 나눌 사람이 필요하면…….”

그제야 번쩍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한 짓은 뒷걸음질이었다.

“아.”

겁에 질린 수아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야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탄식했다.

“세상에…….”

그때 야나의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남자의 구둣발 소리를 들은 야나가 갑자기 얼굴에서 경악을 지우고 미소를 그리더니 뒤돌아 인사했다.

“폰 알브레히트 씨, 안녕하세요.”

그러곤 야나가 곧장 건물 밖으로 나가자 수아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야나를 쫓아준 게 아니더라도 요즘 수아는 남자의 얼굴만 보아도 안심이 됐다.

그런데 저를 여기서 기다리라던 남자는 수아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리셉셔니스트의 인사만 받아주더니 그대로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수아는 눈치껏 입을 다문 채 그를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갔다. 큰 보폭을 따라잡느라 뛰다시피 해야 했다.

남자는 회사 건물이 있는 거리에서 길을 두 개나 건너 어느 주차 빌딩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하고 으슥한 곳에 오고서야 그는 수아를 개처럼 잡아끌고 그의 애스턴 마틴 조수석에 짐짝처럼 던져 넣었다.

“여긴 왜 왔어. 내 허락도 없이.”

남자가 운전석으로 들어와 문을 닫자마자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학교에 있을 시간이잖아.”

“오늘 학교에 경찰이 왔었어요.”

“그래서?”

경찰은 다른 일로 온 거였다. 그래도 그걸 알게 될 때까지 심적 압박이 얼마나 심했는지 모른다. 쌓이고 쌓여 터질 것처럼 부푼 압박감을 배출해야만 했다. 수아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남자의 품에 와락 안기며 애원했다.

“학교 다니기 싫어요. 공연도 싫어요. 그냥 집에 있을래요.”

이런 충동이 들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정말 모든 걸 관두고 숨어 살 생각까진 없었다. 이건 남자를 자극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가 수아의 몸을 알게 된 만큼 수아도 남자에 대해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남자는 사실 수아의 반항을 즐긴다. 지금도 그의 바지 앞섶은 눈에 띄게 부풀어 있었다. 아마 수아가 핸드폰을 끄고 연락을 받지 않은 순간부터 벌을 줄 방법을 생각하느라 아랫도리가 근질거렸을 것이다.

남자가 저를 버리지 않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반항하는 법도 어느새 눈치챘다.

전화를 꺼두고 받지 않는다. 남들 눈에 띄지 말아야 하는 사이인 걸 알면서도 무턱대고 회사로 찾아온다. 학교를 무단으로 이탈한다. 그러곤 애처럼 투정이나 부린다.

이 사소한 반항 하나하나가 모여 남자를 폭발하기 직전으로 몰고 간다. 하지만 그 폭발의 끝에서 남자는 저를 버리는 게 아니라 벌할 것이다.

제 구명줄을 쥐고 있는 자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지 않고 거스르는 건 벌, 오직 그 하나 때문이었다.

‘벌을 주세요, 제발.’

심적 고통은 육체적 고통으로 덮는다. 육체의 고통에서는 쾌감이 느껴진다. 고통이 클수록 쾌감도 커진다. 간단한 공식이었다. 그 이면의 심리는 수아가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것이었지만.

그래서 마음이 힘들 땐 머리카락을 뽑았다. 그러나 이젠 머리카락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 틈을 채운 것이 남자였다. 과격한 섹스와 플레이에서 오는 극단적인 고통은 극단적인 쾌감을 낳았다.

목을 조르다가 기절 직전에 놓아줄 때에는 또 얼마나 황홀한지. 그 직전까지만 해도 수아를 괴롭히던 모든 생각이 휘발해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까만 어둠만 남을 때의 해방감이란.

남자는 좋은 자해 수단이었다. 벌써 중독된 수아는 자해가 필요할 때 그의 손을 빌리기 시작했다.

“학교 다니기 싫어요.”

벌을 달라 애걸하면 남자는 절대로 벌을 주지 않는다. 받고 싶은 걸 주지 않는 것이야말로 벌이라며.

“다 싫어요.”

그래서 이 작은 쇼를 꾸민 것이다.

“어린애처럼 굴지 마.”

남자는 제게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수아를 거칠게 떼어내더니 수아가 듣고 싶어 마지않았던 말을 했다.

“버릇을 고쳐야겠어.”

“시, 싫어요.”

수아를 결박하듯이 안전벨트를 채우던 남자가 갑자기 눈을 감았다. 깊이 숨을 들이쉬며 무언가를 삭이는 듯했다. 남자의 목울대가 크게 들썩이며 울리는 순간, 숨죽이고 있던 수아는 걷잡을 수 없이 떨기 시작했다. 이건 설렘이 분명했다.

남자가 눈을 떴다.

차가 으르렁거리며 어딘가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남자가 택한 장소는 익숙한 곳이었다.

클럽 로프 버니.

아는 얼굴이 있을까 봐 후드를 푹 눌러쓰고 몸을 움츠렸지만 수아가 일하던 야간 시간대가 아닌 탓인지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직 시간이 이른지라 플로어나 소파는 텅 비어 있고 음악도 클럽답지 않게 잔잔했다. 남자는 플레이룸을 빌리려는지 수아를 우두커니 세워둔 채 바로 향했다. 그때 어딘가에서 카랑카랑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누구야?”

고개를 돌려 보니 스파에서 젊은 남녀가 나오고 있었다. 여자는 일행을 두고 바로 곧장 걸어가더니 남자의 옆에 바짝 붙어 바 카운터에 몸을 기댔다.

“세상에, 여기 정말 오랜만에 온 거 아냐? 이제 클럽에선 영영 못 보는 줄 알았지 뭐야.”

남자랑 아는 사이인 걸까. 여자는 수아를 한 번 흘끔 돌아보고 활짝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초면인데도 저쪽은 수아를 아는 듯한 눈빛이라 마음이 불편해졌다.

여자가 남자에게 친한 척을 하는 건 더 불편했다. 수아는 가까이 다가가 견제라도 하듯이 남자의 옆에 섰다. 그사이 여자는 제 일행이 저를 따라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던 걸 이제야 발견했다는 듯이 손뼉을 치더니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기야, 오늘 즐거웠어.”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일행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을 하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여자는 미소를 깡그리 지우며 살벌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다음은 없을 거야.”

바텐더는 여자가 주문한 술을 바에 올리는 동시에 어깨와 귀 사이에 끼고 있던 무선 전화를 끊으며 남자에게 말했다.

“룸 준비에 5분 정도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남자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여자가 끼어들었다.

“술 한잔하면서 기다리면 되겠네. 내가 살게. 이쪽은 젝트…….”

“차 가져왔어.”

“아, 그럼 넌 됐고. 거기 귀여운 여자분은?”

수아는 뭘 마실 생각이 없었으며 남자를 잘 아는 듯이 구는 저 여자에게서 얻어 마실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눈매를 우스꽝스럽게 구기며 남자를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뭐야. 술 한 잔도 주인님의 허락을 받아야 해? 지독하다.”

수아가 제 귀를 의심하는 사이, 남자는 날카롭게 눈매를 좁히고 여자를 노려보다 싸늘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꺼져.”

그는 길거리에서 귀찮게 하는 집시라도 쫓듯이 여자를 떼어내곤 수아의 손목을 쥐었다. 수아는 순순히 끌려가는 내내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주인님?

여자가 그런 말을 했다. 마치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아는 것처럼. 남자와 아는 사이가 맞는 것 같은데 그가 말한 걸까. 설마 그럴 리가. BDSM 클럽에 플레이룸을 빌리러 오는 사이라면 뻔한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어쩌면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에서 티가 났을지도 모른다.

“앉아.”

남자는 시야가 차단된 구석의 소파에 앉더니 수아를 발치에 개처럼 앉혔다. 지금은 이 굴욕이 너무나 기꺼웠다.

사람을 죽이려 한 저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 마땅했으니.

차라리 개라면 면죄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의 무릎에 순한 개처럼 턱을 얹고 쓰다듬어주길 얌전히 기다리는 것도 기꺼웠으나 여자가 술잔을 든 채 따라와 남자의 옆에 앉는 순간 이 모든 게 싫어졌다.

수치스러워서 남자의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눈을 감았지만 여자가 술을 홀짝이며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 게 오감으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치 저를 감상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저 여자 쫓아내줘요.

말로는 못 하고 남자의 무릎에 얼굴을 비비며 몸으로 애원했다.

멍청한 짓이지.

수아가 고통스러워할수록 즐거워하는 남자라 방법을 잘못 택했다 싶었던 순간이었다.

“일어나.”

남자가 수아를 일으켜 앉혔다. 소파도 아니고 그의 무릎 위에.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가장 비천한 존재에서 얼떨결에 가장 귀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가슴이 마구 쿵쾅거렸다.

여자가 그런 둘을 재밌다는 눈으로 구경하며 계속 술잔을 기울였다. 막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여자에게선 샴푸와 향수 냄새가 진동했다.

여자도 플레이룸을 쓴 걸까. 아까 그 남자는 여자의 파트너인 걸까. 그런데 이 남자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일까.

수아도 호기심에 자꾸 흘끔댔더니 여자가 대뜸 손을 내밀었다.

“밀라 위르겐마이어예요.”

얼떨결에 악수를 해버렸다. 성은 빼고 제 이름만 소개하고 시선을 돌리려 했더니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TV에서 본 적 없어요? 아니면 SNS에선?”

그러고 보니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얼굴이긴 했다. 어디서 봤더라.

“작년 시즌 프로미 빅 브라더는?”

“아…….”

그제야 수아는 여자를 기억해냈다. 독일어로 프로미(Promi)라고 불리는 유명 인사의 서바이벌 리얼리티 쇼에 나왔던 모델이었다. 전설적인 모델의 딸이라던가. 광고에서도 몇 번 봤던 것 같다. SNS는 잘 안 봐서 모르지만 말이다.

“역시 알잖아.”

으스대는 밀라를 남자가 곁눈질하며 짤막하게 비웃었다.

“필립이 내 얘기 해준 적 없어요?”

“없어요.”

“섭섭하네. 우리가 어떤 사인데.”

“……어떤 사인데요?”

남자가 또 한 번 밀라에게 시선을 던졌다. 조금 전보다 살벌하게.

“우리?”

여자는 남자의 험악한 눈빛을 마주하면서도 조금도 기죽지 않고 씩 웃기까지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먼저 말을 뱉은 쪽은 남자였다.

“밀라, 적당히…….”

“소꿉친구.”

“…….”

“왜? 내 말 틀렸어?”

남자가 대답 대신 사나운 시선을 밀라에게서 거두며 고개를 돌렸다.

“엄마들끼리 친한 데다 같은 해에 태어나서 거의 같이 크다시피 했어요. 학교도 김나지움까진 같은 데로 다녔고. 그래서 서로 비밀도 알고 약점도 알고…….”

이젠 수아의 눈빛에서 모가 나기 시작했다. 조금 전 바에서 남자가 주로 마시는 주종을 잘 아는 게 심상치 않다 싶었더니 상상 이상으로 가까운 사이였다.

이미 회사에서 남자가 제겐 요즘 보여주지 않는 다정한 태도로 야나와 리셉셔니스트의 인사를 받아주어 속이 상해 있었다. 그런데 저보다 남자를 더 잘 아는 여자까지 눈앞에 나타나자 속을 날카로운 못이 긁어대는 기분이었다.

수아는 남자의 목에 팔을 감고 몸을 찰싹 붙였다. 상보다는 벌을 받아야 하는 때였지만 남자는 다행히 수아를 밀어내지 않았다. 밀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손가락이 제 몸을 더듬기까지 하자 수아는 더더욱 우쭐해졌다.

조금 전만 해도 밀라는 두 사람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관찰했다. 그러나 지금은 묘하게 못마땅한 눈빛이었다.

“수아는 어디 출신이에요?”

“남한이요.”

“남한이면 김용운? 그 사람 있는 데 아니죠?”

“김정은요?”

독일 사람들은 J를 Y로 발음했다. 그래서 TV를 보다 보면 J가 들어간 한국 사람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골이 날 정도라 수아는 다 알아들었으면서도 아닌 척 되물으며 일부러 고쳐주었다. 그러나 밀라는 전혀 무안해하지 않고 떠들었다.

“아무튼 그 헤어스타일 괴상한 독재자 있는 나라 말고 K-pop으로 유명한 나라 맞죠?”

“네.”

“그리고 성형 수술도.”

“…….”

“TV에서 봤는데 강남? 그 옛날 노래에 나온 거기가 성형 수술로 유명한 동네라면서요? 맞아요?”

“네, 맞아요.”

“어때요? 거기 의사들 잘해요?”

“저는 수술 받아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어머, 정말? 난 또…….”

생략한 말은 아마 수술한 얼굴인 줄 알았다는 소리일 것이다.

“예쁘다는 칭찬으로 들을게요.”

그렇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해주다니 착하네요.”

“…….”

생각이 짧은 사람인 건지, 일부러 시비를 거는 건지. 어쨌거나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수아는 입을 다물었다. 여태 입을 다물고 있던 남자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기분 나빠하지 마. 쟨 저 원숭이 귀 재수술받아야 해서 그래.”

그 순간 밀라가 제 귀 한쪽을 숨기듯 손으로 덮으며 잔뜩 골이 난 눈으로 남자를 쏘아보았다. 수아는 크게 웃고 싶은 걸 참았다.

남자가 저를 대신해 한 방 먹여주었다. 통쾌했다.

남자가 저를 저 여자보다 아낀다는 뜻이다. 가슴이 미칠 듯이 쿵쾅댔다.

우쭐해질 대로 우쭐해진 수아는 안 하던 짓을 했다. 다른 팔로 마저 그의 목을 감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남자를 향해 숙였다. 코끝이 스치고 이젠 입술이 닿아야 할 때, 수아의 입술을 누른 건 남자의 입술이 아니라 손가락이었다.

“가서 샤워하고 테이프 떼고 와.”

남자는 수아를 밀어내며 여자에겐 들리지 않는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태도가 삽시간에 돌변했다.

아, 벌받는 중이었지.

잠깐의 달콤함에 잊었다.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먼저 포문을 연 사람은 밀라였다.

“프라우 융. 이름대로 진짜 어리긴 하네.”

어디서 저 여자의 성이 어리다는 뜻의 Jung과 같은 철자란 걸 주워들었는지 밀라는 그걸 꼬투리 삼았다.

“프라우 정. 외국어에서도 J를 Y로 발음하는 멍청함은 의사도 못 고치나 보군.”

필립이 발음을 정정해주며 도리어 꼬투리를 잡자 밀라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너 좀 웃긴다. 많이 웃겨.”

“너야말로.”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몰라? 나를 견제한다고 너한테 치대는데 그걸 넌 받아주더라? 필립, 내가 선배로서 조언 하나 해주자면…….”

이 여자나 저 여자나.

마지막 말을 모친의 목소리로 수없이 들었던 기억이 되살아나자 필립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버릇 나빠져. 개 주제에 자기가 사람인 줄 알아. 잠깐, 설마…….”

밀라가 불쾌할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더니 주제에 뭐라도 되는 듯이 매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경고를 던졌다.

“개가 아닌 건 아니지?”

이쯤에서 필립이야말로 주제넘은 간섭을 하는 자에게 경고해야 했다.

“내 개야. 내 개를 남이 가지고 놀거나 주인 노릇 하는 거 난 절대 봐주지 않아.”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나도 새 파트너가 생기면 너한테…….”

“유급이나 하던 머리라서 벌써 잊었나 본데. 난 네 개 사육에 간섭한 적도, 네 개를 가지고 논 적도 없어. 똑같은 선을 지켜달라는 게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요구인가?”

“너 진짜 못돼 처먹었어.”

“알면 건드리지 마.”

으르렁대는 두 마리의 개처럼 서로를 노려보다 먼저 백기를 든 사람은 밀라였다.

“그래, 첫 강아지한테 애착이 오죽하겠어. 처음은 다 그렇지.”

밀라는 물러나 소파에 몸을 기대더니 술잔 속으로 빈정거렸다.

“그런데도 학교는 계속 다니게 한다며?”

필립이 전혀 한 적 없는 말이 밀라의 입에서 나왔다. 그의 모친에게서 말을 전해 듣는다는 게 분명해졌다. 밀라와 그럴 정도로 친한 것도 아니면서 왜 그의 사생활을 흘리는지.

경고를 받을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

“못 다니게 하라는 간섭이 아니라 폰 알브레히트 씨의 위대한 계획이 궁금해서 그러죠.”

그의 표정을 살피던 밀라는 몸을 사리면서도 비아냥대는 건 포기하지 않았다.

“스스로 알아낼 때까지 궁금해해.”

치사하다는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사실 그 여자가 계속 학교에 다니게 하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필립은 개를 원하기는 하나 온종일 집에서 그만 기다리는 개가 아니라 그를 주인으로 섬기는 개를 원했다.

한마디로 그는 집착이 아니라 복종을 바랐다.

“똑같은 선을 지키란 말은…….”

밀라는 꺼질 생각이 전혀 없는지 계속해서 버티고 앉아 말을 걸었다.

“네가 했던 건 나도 해도 된다는 말인가?”

뭘 말하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았다.

관음.

“난 보여줬잖아.”

“넌 보여주는 취향이 있었으니까. 난 그런 취향은 없어.”

내기에서 이긴 사람에게도 관음은 허락하지 않았는데 밀라는 어림없는 소리를 했다. 물론 그의 모친은 허락 없이도 보려 하겠지만 애석하게도 좋은 구경은 전혀 못 했을 것이다. 길 건너의 펜트하우스를 마주하고 창이 난 곳에선 아무 짓도 하지 않으니. 굳이 급하면 창문에 커튼을 치거나.

“너 정말 지독하다.”

정작 지독한 인간은 밀라였다. 그에게 연이어 모욕을 당하고도 꺾일 줄 모르고 간섭을 해대니까.

“피임은 하지?”

필립은 머저리 취급에 머저리를 보는 눈으로 응수했다.

“중절 수술을 네 번이나 하신 분의 입에서 내가 그런 말을 들어야 하나?”

“…….”

“기한은 3년이야. 그사이에 소식 없으면 우리 거래는 없는 거야.”

서로의 약점을 잘 안다. 조금 전 밀라가 한 그 말은 필립에게도 맞는 말이었다.

밀라는 입을 다물고 뾰로통하게 플로어 반대편을 노려보더니 담배를 꺼내 물며 화제를 돌렸다. 그가 지독하게 모욕을 주는데도 참는 이유로 말이다.

“파티 준비는 거의 다 됐어.”

열흘 후 모리셔스에서 파티가 열린다. 밀라는 장소에 대해 리조트 측과 오간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빌려둔 대형 요트가 이젠 구형이라 마음에 안 들어서 바꿔야겠다며 그에게 핸드폰으로 사진을 보여주면서 어느 게 더 나은지를 물었다.

“그런 건 어머니와 상의해.”

파티의 호스트인 필립은 게스트처럼 굴었다.

“아, 데니스 노이만 알지?”

필립은 흰 목욕 가운 차림으로 스파에서 나오는 여자에게 시선을 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이만은 밀라의 모친과 친분이 있는 사진작가였다. 알브레히트의 컬렉션 화보를 찍은 적도 몇 번 있었다.

“오기로 했어. 손님이 아니라 사진작가로.”

피사체가 되는 건 질색인 필립의 눈빛에 날이 서자마자 밀라가 덧붙였다.

“그날 하루만 참으면 되잖아? 아, 물론 언젠가 또 참아야 하는 날이 한 번 더 있겠지만.”

“한 번? 정말 그걸로 끝낼 생각은 아닐 텐데.”

“알겠지만 SNS 업로드는 나도 양보 못 해. 난 그걸로 먹고살아.”

밀라는 자신을 모델이라 소개하지만 실은 인플루언서에 가까웠다. 모친의 후광을 입고 하이패션에 진출했으나 형편없는 실력 탓에 커머셜로 밀려났고, 커머셜에서조차 뜨지 못해 한물갔다는 수식조차 못 붙일 수준이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는 SNS 인플루언서로 약삭빠르게 전향하더니 뜻밖에도 성공했다.

“그리고 너도 내 SNS 계정 덕에 먹고살잖아?”

작년 글로벌 매출액이 14억 유로(약 1조9천억 원)인 기업의 소유주는 연 수입이 그의 1%에도 못 미치는 인플루언서에게 미친 사람 보는 눈빛을 던졌다.

“아, 정확히 말하면 네 와인 사업이지만.”

와인 사업은 일반 소매점에서 구할 수 없는 신비주의형 하이엔드 와인을 브랜딩 전략으로 삼았다. 홍보 전략은 그 이미지에 걸맞아야 했다. 밀라의 부친이 소유한 하이패션 잡지에 소개하는 걸로 시작해 2년 전에는 팔로워가 200만 명인 밀라의 SNS 피드에 그의 와인 브랜드를 꾸준히 노출한 효과는 만족스러웠다.

유명해지고도 생산량과 유통량은 그대로 유지했다. 구하기 힘들수록 소유욕과 경쟁심을 부채질하게 마련이다. 공급은 그대로인데 수요가 오르면 가격이 오른다. 소비자는 비싼 것을 좋은 것으로 인식한다.

그 후론 홍보가 달리 필요 없어졌다. 부를 과시하고 싶은 이들이 스스로 제 돈을 주고 그의 명품 와인을 사서 SNS에 자랑해대니까.

와인 사업의 성장에 밀라의 가족이 도움을 준 건 사실이다. 그러나 덕분에 먹고산다는 건 완벽한 헛소리였다. 이미 수십 년째 견실하게 유지해오던 사업이었으니.

게다가 필립에게 와인은 취미로 하는 사업일 뿐이다. 당장 내일 망해도 아쉽기만 할 뿐, 손해 볼 건 없으나 밀라의 가족은 저희가 망해가던 필립을 구해준 것처럼 굴었다.

뱀파이어들.

취미의 규모를 키운 것치고 그가 치르는 대가는 지나친 감이 있었다.

“아무튼, 내 사업에도 협조 바라. 우리 계약에도 명시돼 있잖아?”

“대신 네가 상류층에 걸맞게 이미지를 바꾸는 것도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다는 점, 잊지 마.”

필립은 점점 이쪽으로 가까워지는 여자에게 시선을 둔 채 목소리를 낮춰 경고했다.

“독어 꽤 잘하니까 입조심해. 다신 볼 일 없어야 하겠지만.”

“룸 준비 다 됐대요.”

그의 깜찍한 강아지는 주인 앞에 서자마자 쭈뼛대며 어서 벌받고 싶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가 뭘 하려는지도 모르면서 겁도 없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여자는 오는 길에 바텐더에게 룸이 준비됐는지 묻고 왔다. 얼굴을 드러내고 제 입으로 그런 걸 물을 만한 숫기는 없을 텐데 밀라를 그렇게나 떼어내고 싶은 건지.

필립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때였다. 밀라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진료실?”

여자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먹구름처럼 드리웠다.

“맞죠? 필립은 의사 놀이를 좋아하거든요.”

“……네?”

“강압적인 거라면 뭐든 좋아하지만.”

“그, 그걸 어떻게 알아요? 혹시 두 사람 잔 적 있어요?”

“난 네가 유일하다고 몇 번이나 말해.”

여자를 끌고 가려는데 밀라가 또 주둥이를 놀렸다.

“잔 적은 없지만 언젠간 자야 할지도 모르지?”

필립의 손에 가볍게 딸려오던 여자가 갑자기 휘청하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밀라에게 물었다.

“지, 지금 무슨 소릴 한 거예요?”

밀라는 제가 친 사고의 수습이랍시고 술잔으로 허공을 쑤시는 척을 하며 필립에게나 허튼소리를 했다.

“잊지 마. 박는 쪽은 나야.”

“닥쳐, 네 주둥이에 그 술잔을 박아버리기 전에.”

밀라가 마침내 입을 다물자 여자가 입을 놀렸다.

“저 여자 뭐예요? 많이 친해요? 자본 적 없는데 왜 그런 취향까지 저 여자가 알아요? 언젠간 자야 할지도 모른다는 건 무슨 소리예요?”

플레이룸으로 가는 내내 여자는 답을 졸라댔다. 이건 그가 혐오해 마지않는 집착이다.

“헉!”

진료실로 들어가자마자 그는 여자의 턱을 한 손으로 쥐었다. 별것 아닌 힘에도 속수무책으로 벌어진 입속에 벽에 걸려 있던 재갈을 쑤셔 넣고서야 평화가 찾아왔다.

“웁…….”

수아는 너무 깊이 쑤셔 박힌 고무공을 반사적으로 손에 뱉어버리곤 흠칫했다. 쨍한 수술실 조명을 등지고 서서 수아를 내려다보는 남자에게서 위험한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평소 느끼던 포식자의 위험한 분위기와는 다르다. 머릿속에서 경고가 울렸다.

수아는 재갈을 다시 입에 얌전히 물었다.

지금 그녀가 선 곳이 바로 버림과 벌의 선이었다.

남자는 스리피스 정장에서 재킷만 벗고 소매를 접어 올린 단정한 모습이었으나 수아는 두 다리를 다리걸이에, 엉덩이는 의자 끝에 걸친 완전한 알몸이었다.

“흐읍…….”

진료용 의자에 사지가 묶여 누운 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맨살에 닿는 진료실의 공기가 싸늘한 탓일까? 실은 그 여자 때문에 화가 나서? 어쩌면 광기에 사로잡힌 의사처럼 내 몸을 열고 당기고 찌르는 남자가 두려워서? 아니면 저 남자가 오롯이 내게만 집중한다는 사실이 설레서?

그러고 보니 남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수아는 일관되게 떨림을 느꼈었다. 그럴 때마다 설렘인지 두려움인지를 물었으나 이젠 무엇이든 상관없어졌다.

설렘도, 두려움도 나를 망가뜨릴 힘을 가진 것에게 느끼는 감정이니까.

제 위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선 남자를 올려다보는 수아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떨렸다.

“읍…….”

어쩌면 절정을 수없이, 쉴 틈 없이 느낀 후여서 떨림이 멎지 않는지도 모른다.

수아는 또 한 번 몸통만 들썩거리며 전율했다. 남자가 재갈을 아직도 풀어주지 않은 탓에 억눌린 신음은 타액과 함께 다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남자는 만족한 듯 신음 같은 한숨을 나직이 내쉬었다. 리모컨이 부드럽게 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수아의 몸 곳곳에 달린 바이브레이터가 꺼졌다.

비로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지만 입을 틀어막힌 채 코로만 들이쉬어야 한다. 격한 몸부림 끝에 지친 몸 곳곳에 산소가 돌긴 무리였다. 눈앞이 계속 까맣게 점멸했다.

수아가 호흡을 천천히 되찾는 사이 남자는 바퀴 달린 의자를 당겨 그녀의 다리 사이에 앉았다. 아래를 무언가가 헤집는다. 시야가 다시 밝아지자 모니터 화면을 가득 채운 분홍빛 살 주름이 빠르게 옴죽대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남자는 수아를 의자에 묶자마자 쇠로 된 새 부리처럼 생긴 질경부터 넣어 안을 벌렸었다. 그다음은 저번에 수아가 도망치는 바람에 쓰지 못했던 얇은 내시경 카메라였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유축기처럼 생긴 물건을 수아의 가슴에 매달았다. 반구형의 실리콘 컵을 가슴 끝에 씌우고 한쪽에 달린 펌프를 누르고 있던 손을 떼자 젖꼭지가 유륜까지 한꺼번에 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있지도 않은 젖이 쭉 빨려 나가는 느낌. 흡입력이 남자가 젖꼭지를 물고 빨 때와 비슷했다.

투명한 컵 안에서 젖꼭지와 유륜이 컵의 모양대로 볼록하게 솟다 못해 퉁퉁 부은 게 똑똑히 보였다.

그가 내 가슴을 한껏 빨 때에도 저런 모양일까.

상상하자니 다리 사이로 피가 더더욱 몰렸다.

흥분해서 저도 모르게 아래를 조여버리는 찰나, 음부에 붙은 흡착기가 크게 들썩였다. 클리토리스에도 똑같이 생긴 것이 붙어 있었다. 빨아 당기는 힘에 볼록 튀어나온 동그란 살점이 평소보다 배는 커 보였다.

무서워서 보기 싫은데 눈을 뗄 수 없다. 이젠 두려움에서도 쾌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몸을 완전히 못 쓰게 만들거나 사라지지 않는 흉을 남기는 게 아니라면 남자가 새로운 걸 시도하는 게 요즘은 기대되기까지 했다.

이번 건 또 어떤 색다른 고통을 줄까.

수아의 심장이 음핵과 같은 박자로 두근두근 박동했다.

“가업 때문에 포기했지만 난 사실 의사가 되고 싶었어.”

라텍스 장갑을 낀 손가락 끝으로 허벅지 안쪽을 스치며 수아의 감도를 관찰하던 남자가 폭풍 전야 같던 정적을 깼다. 말을 멈추고 내쉰 한숨에서 흥분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안 된 게 다행이지. 그렇지 않아?”

수아는 마음속으로 동의했다. 남자는 미치광이 같았다. 그러나 미치광이의 손에 제 몸을 고스란히 쥐여주고 흥분하는 자신은 더한 미치광이일지도 모른다.

딸깍.

“흡!”

남자는 민감의 극을 달리는 몸이 다시 둔해질 시간도 주지 않고 버튼을 눌렀다. 흡착기의 정점마다 달린 작은 바이브레이터가 지이잉, 울기 시작하는 순간 수아는 반쯤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무서워. 그래서 설레.

또 한 번 몸을 부술 것만 같은 고통의 폭풍을 견디면 그 끝엔 압도적인 쾌락의 해일이 몰려올 것이다.

흡착기의 안쪽에는 실리콘 돌기들이 빽빽하게 돋아나 있었다. 그게 피가 몰린 젖꼭지와 클리토리스를 감싼 채로 바이브레이터의 진동을 따라 부르르 떨었다.

수십 개의 작은 촉수가 성감대에 치덕치덕 달라붙어 빨판으로 살을 쪽 빨아 당기고 비비적비비적 문질러대는 것만 같았다. 수아는 지독한 간지럼을 못 견뎌 온몸을 비틀고 들썩였지만 제게 붙은 빨판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제 할 일에만 몰두했다.

딸깍.

남자가 리모컨 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진동이 더욱더 강해졌다.

“읍, 으읍!”

재갈만 없었으면 복도까지 퍼질 정도로 비명을 내질렀을 것이다. 간지러움이 지나치면 고통이 된다. 진동을 따라 온몸이 파스스 부서져 내리며 금이 가는 것만 같았다. 안에서 벌겋게 끓어오른 욕망이 그 틈으로 터져 나가려 한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자극에 정신을 놓아가는 사이, 가장 큰 틈에 준 힘이 느슨해졌다. 찔끔, 요도구로 물이 새어 나오자 수아는 기겁하며 아래를 조였다.

그때였다. 안에 깊이 박힌 카메라를 남자가 뺀 건.

그 자리를 곧바로 손가락 두 개가 차지했다. 남자는 요도구 바로 아래의 질벽을 받치듯이 밀어 올리더니 문질문질 부드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요의 같기도 한 충동이 삽시간에 치밀어 눈앞이 아찔해졌다.

“으으읍!”

싫어.

딸깍.

남자가 또 한 번 버튼을 눌렀다. 수아의 몸이 활처럼 휘어 오르며 딱딱히 굳었다. 그 바람에 도드라진 갈비뼈를 타고 손이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더니 머리 쪽으로 쏠린 가슴을 쓸어 모아 쥐었다. 배 속에는 다른 손이 여전히 박혀 있었다.

“흡!”

싫어.

요도구 아래를 문지르는 압박감이 강렬해지다 결국 한계점을 넘어버렸다. 그 찰나 수아는 여태껏 참고 또 참던 욕구를 방출해냈다.

픽, 요도구에서 쏘아낸 물줄기가 남자의 손바닥을 적셨다. 심적인 압박감도 함께 배출한 양 몸과 마음 모두가 시원했다.

오래 참을수록 배출의 쾌감은 크다. 애액인지 소변인지 모를 것이 주르륵 흘러내려 제 엉덩이와 의자를 엉망으로 적시는 느낌은 순식간에 무뎌지고 온몸의 신경이 불붙은 도화선처럼 불꽃을 타닥거리다 쾌감을 한꺼번에 터트렸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절정이 찾아왔다.

싫은 건 좋은 것이다. 죽음 같은 고통만이 그녀를 살게 했다. 몸이 묶인 채로 정신의 해방을 만끽했다.

수아에겐 남자만이 유일한 해방구였다. 고통이 담긴 제 눈물이 남자에게 조금이나마 보답이 되길 바랄 뿐이었다.

초점이 풀린 눈에서 눈물이 샘솟아 관자놀이를 타고 주르르 흐르기 시작하자 남자가 수아에게 제 몸을 겹쳤다. 두꺼운 혀가 살갗 위로 유연하게 미끄러지며 눈물을 핥아 마셨다.

“하아…….”

드디어 남자가 재갈을 풀어주었다. 풀어준 건 재갈뿐이었다.

“네가 대답하는 걸 봐서 하나씩 풀어줄 거야.”

“아흣!”

남자는 가슴 끝에 달린 흡착기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럴 때마다 아직 절정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몸이 자지러졌다.

“핸드폰은 왜 허락도 없이 껐지?”

당신을 미치게 하고 싶어서.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면 제 작은 꾀를 들키게 된다. 수아는 일부러 정신을 못 차리는 척하며 숨만 몰아쉬었다.

“대답해.”

“그렇지만, 하아, 그런 규칙은 없, 아흑!”

뻑.

남자는 클리토리스에 붙어 있던 흡착기를 잡아 뜯어냈다. 소리만큼이나 고통은 컸다. 눈앞이 핑글 돌 정도로. 그렇게, 딴소리를 하며 말대꾸를 한 효과는 톡톡히 보았다.

쨍그랑.

질경이 뽑혀 나가더니 쇠로 된 트레이에 내던져졌다. 질벽이 오므라들기도 전에 그 속으로 남자가 파고들었다.

삐걱삐걱.

바닥에 단단히 고정된 육중한 의자가 울 정도로 남자의 허리 짓은 거칠었다.

“아, 아응, 아직은 안, 하읏!”

안 된다고 하면 남자는 질 끝을 퍽, 쳐올렸다. 수아는 울먹이는 표정 뒤로 미소를 숨기며 빌었다.

“흑, 잘못, 했어요. 앞으론 안 그럴, 게요. 제발, 흐앗, 그, 그만…….”

“빈다고 죄가 없어질 것 같아?”

벌은 받으라는 뜻이었다. 바라는 바였다.

“아흑! 아파요!”

엄살을 부리면 남자는 더더욱 발정 난 종마처럼 날뛰었다. 굵다랗고 묵직한 둔기가 좁은 구멍을 마구잡이로 쑤셔댄다. 단단한 살갗이 연한 속살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달라붙은 살 사이로 불꽃이 파드드득 튀는 기분이었다. 수없는 절정 끝에 한계까지 예열된 질벽에 곧바로 불이 붙은 건 당연했다.

“저, 흣, 저 가고 싶…….”

“참아.”

남자는 악문 잇새로 냉정하게 명령했다. 참겠다고 아래에 힘을 주자 남자는 수아의 다리 사이를 더욱 거칠게 치받았다. 좁아든 속살 틈이 속절없이 꿰뚫렸다.

“흡…….”

아래도 모자라 온몸에 힘을 주고 참느라 얼굴이 빨개지도록 숨도 못 쉬었다. 남자는 수아가 끙끙거리는 모습을 열 오른 눈으로 한참이나 감상했다.

“자, 잘못했…….”

“가.”

“아흐흑!”

가, 불시에 내던진 그 한마디를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길든 몸이 먼저 반응했다. 팽팽하던 긴장이 탁 풀리고, 수아는 엉덩이를 높이 치켜올린 채 자지러지며 가버렸다. 이번엔 정말, 복도까지 교성이 울렸을 것이다. 제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다른 곳은 전혀 애무하지 않고 삽입만 하는 단순한 행위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도구가 어느 것보다도 무지막지하니 고통도, 쾌감도 무지막지했다.

남자의 몸이야말로 최고의 자해 도구인 것이다.

“잘 참았어. 착해.”

남자가 칭찬을 하며 강아지처럼 쓰다듬어줄 때에는 다른 종류의 쾌감이 느껴진다. 남자는 한결 기분이 좋아 보였다. 수아처럼 속에 쌓인 걸 시원하게 배출한 사람 같았다.

내가 쓸모 있었구나.

보람됐다.

이 남자에게도 내가 최고의 도구이자 유일한 도구였으면. 이 쾌락은 오직 나만이 그에게 줄 수 있었으면. 오직 그에겐 나뿐이었으면. 내게 이 남자뿐이듯이.

“하아…….”

남자는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잠시 숨을 돌리더니 틈이 생겼던 아래를 다시 맞붙였다. 함께 절정에 달했는지 안이 질컥거렸다. 제 절정에 취해 남자가 제 안에 사정하는 순간의 표정을 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그는 페니스를 수아의 배 속 깊이 묻은 채로 다리걸이를 젖혀 다리를 완전히 벌리게 했다. 바닥에 있는 레버를 밟았는지 의자가 뒤로 더욱 기울었다. 수아가 엉덩이를 위로 치켜든 꼴이 되고서야 성기가 천천히 빠져나갔다.

왜 그러는지는 곧바로 알게 되었다. 움찔움찔, 허전해 어쩔 줄 모르고 오물대는 배 속으로 새 질경이 파고들어 왔다.

차가워.

“얌전히 있어.”

깜짝 놀란 수아의 엉덩이가 번쩍 튕겨 오르자 남자가 아랫배를 한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수아가 얌전해지자 남자는 질경을 벌리고 카메라를 넣었다.

“내 흔적, 잘 봐.”

남자가 모니터를 보며 물었다. 그의 말대로 남자의 성기가 제 속에서 난폭하게 날뛰기 전과 후의 차이는 극명했다.

조금 전은 분홍빛이던 속살이 지금은 피가 몰려 선홍빛이었다. 살이 부풀어 있기까지. 질벽 군데군데 실핏줄이 터져 빨간 점이 점점이 맺힌 자리는 남자의 거친 마찰이 남긴 흔적이었다. 섬뜩해 보이기만 하던 것이 이젠 야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주름 사이사이에는 희끄무레하고 끈적한 체액이 맺혀 있었다. 자궁구 아래의 우묵한 자리에는 한가득 고여 있기까지 했다. 화면 속으로 흰 라텍스 장갑을 낀 손가락 하나가 들어왔다. 남자가 정액을 한껏 퍼 올려 자궁구에 치덕치덕 바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아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자궁의 입구가 남자의 정액으로 흠뻑 젖어 번들거렸다. 동그란 분홍빛 살덩어리 가운데의 좁은 구멍에 남자의 씨가 잔뜩 맺혀 있다는 뜻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저대로 빨아들여 제 자궁에 품고 싶었다.

“가슴 빨아주세요.”

충동적으로 뱉은 요구였다.

수아보다 남자가 더 놀란 듯했다. 그녀가 자진해서 야한 짓을 요구한 건 처음이었으니.

“뭘 잘했다고 상을 달라는 거지?”

분명히 혼내는 말투인데 목소리가 묘하게 들떠 있었다.

“주인님, 빨아주세요.”

이번엔 가슴을 내밀며 주인님까지 붙여 애걸했다. 흔치 않게 교태를 떠는 수아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은 얼떨떨해 보였으나 그의 허리 아래는 기꺼워 보이기만 했다.

흡착기가 가슴 끝에서 부드럽게 떨어져 나갔다. 퉁퉁 부은 젖꼭지가 속박에서 벗어나자마자 따뜻하고 말캉한 입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 흣…….”

수아는 젖가슴을 아기처럼 빠는 남자를 바라보며 제게서 젖이 나오는 상상을 했다. 상상 속에서 제 젖을 빠는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그를 빼닮은 아기였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임신은 생각하는 것조차 끔찍한 일이었다는 걸 수아는 까맣게 잊었다. 이 남자의 아이를 배고 싶어졌다. 그에게 빌붙는 거머리가 하기엔 주제넘은 생각인 걸 알면서도 폭주하는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

자궁구를 족쇄처럼 옥죄고 있는 저 흰 고리를 빼버리고 남자의 아이를 제 자궁에 품고 싶었다. 그럼 이 남자와 더더욱 특별하고도 유일한 사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밀라, 그 여자보다도.

침대 밖에선 단정하고 품위 있는 남자가 침대 위에선 저질스럽고 난폭한 짐승으로 돌변한다. 처음엔 싫었으나 이젠 기뻤다. 저만 아는 비밀이라 믿었으니.

그런데 그 여자도 알고 있었을 줄이야. 제 영역을 침범당한 짐승의 기분이 이럴까. 제 남자를 빼앗긴 기분마저 들었다.

수아는 이 남자를 독차지하고 싶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오로지 제 품 안의 남자를 독점하고자 하는 욕망에 눈이 먼 수아는 깨닫지 못했다. 제가 고작 몇 달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첫 약탈의 현장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

“올라가.”

남자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욕실 카운터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카운터에 재깍 엉덩이를 걸치자마자 수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맨살에 닿는 대리석의 냉기에 소름이 돋았다.

빨리 끝내고 싶어 주저 없이 슬립 자락을 배꼽까지 걷고 다리를 M자로 활짝 벌려 남자에게 제 음부를 보여주었다.

수아는 그 자세 그대로 바로 옆의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 남자를 지켜보았다. 손톱을 짧게 깎고 다듬은 단정한 손끝, 곧고 길며 손마디가 적당히 도드라진 손가락, 그리고 티 없이 매끈한 피부에 굵은 힘줄만 돋아 있는 손등. 남자답고도 깨끗한 손을 보고 있자면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손을 닦으며 제 다리 사이에 설 때에는 더더욱.

바스락.

남자가 콘돔 포장을 닮은 걸 이로 찢었다. 그러나 안에서 나온 건 콘돔이 아니라 플라스틱 링이었다. 오늘은 새 피임용 링을 넣는 날이었다.

“흣…….”

남자의 오른손이 수아의 음부로 향했다. 납작하게 접힌 링이 질구로 쑥 들어오더니 검지와 중지가 질구를 벌리며 안으로 파고들어 링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남자의 페니스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건만 손가락 두 개도 수아의 몸엔 버거웠다.

짤랑.

손가락이 깊숙한 곳 어딘가를 지그시 밀어 올리는 찰나, 흠칫 몸을 떠는 바람에 가슴 끝에 매달린 방울이 날카롭게 울었다. 교성이라도 내지른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가만히 있어.”

“아흐…….”

말과 달리 남자의 엄지는 짓궂게 음핵을 꾹 짓눌렀다. 속살이 절로 조여들며 그의 손가락을 꽉 물었다. 덕분에 링을 펴서 자궁구에 걸기 위해 안을 헤집는 손길이 더욱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몸은 달아오르는 한편 마음은 식었다. 피임하기 싫다. 지난주에 시작된 생각은 그저 그 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충동일 줄 알았지만 아직도 그의 아이를 갖고 싶은 걸 보면 욕망으로 단단히 뿌리내린 모양이었다.

남자는 링을 자궁구에 걸고 질 끝까지 꼼꼼하게 밀어 넣기까지 하고서야 손을 뺐다. 그 짧은 사이에 애액이 번질번질 묻은 손을 그가 씻는 사이, 수아는 카운터에서 내려와 주변을 정리하고 새 수건을 꺼내 남자를 기다렸다.

손을 다 씻은 남자에게 수건을 내밀자 그가 건네받으며 수아의 이마에 입술을 부드럽게 눌렀다. 얼굴이 금세 화끈해졌다.

수아는 나가지 않고 카운터 위에 벗어놓은 은빛 손목시계를 다시 차는 남자의 뒤에 우두커니 섰다. 그가 가도 좋다고 허락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오늘은 주말인데 뭘 할 생각인지 묻고 싶었던 게 더 컸다.

그러나 물을 필요 없어졌다. 묻기도 전에 대답을 들었으니.

“난 해외 출장이 있어서 오늘 오후부터 집을 비울 거야.”

“네? 그럼 언제 돌아오는데요?”

“닷새 후에.”

남자는 시계의 버클을 채우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날은 학교 정기 공연이 막을 올리는 날이었다.

그럼 공연에는 못 온다는 건가? 당연히 올 줄 알았는데.

시무룩해진 그녀를 지나쳐 욕실 밖으로 나가던 남자가 한 한마디에 수아는 화색이 되었다.

“극장에서 봐.”

수아는 그를 드레스 룸까지 쪼르르 따라가 물었다.

“그럼 크리스마스는요?”

그날로부터 며칠 후면 크리스마스였다. 여긴 크리스마스가 가족의 날인 것 같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란 수아에겐 아직 연인의 날이었다.

“글쎄, 올해는 집에서 조용히 보낼까 싶은데.”

그렇다는 건 둘이서만 보내겠다는 뜻이다. 수아의 얼굴이 더욱 활짝 폈다. 남자는 옷장에서 출장용 캐리어를 꺼내다 그런 수아를 흘깃 보더니 물었다.

“선물로 받고 싶은 거라도 있어?”

있다. 그러나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더니 남자가 재촉했다.

“가격은 신경 쓰지 마.”

그게 문제가 아닌데.

수아는 잠시 쭈뼛대다 남자의 인내심이 닳기 전에 운을 뗐다.

“사실 돈은 안 드는 건데…….”

“뭔데?”

“키스받고 싶어요.”

저번에 클럽에서는 벌받는 중이라 안 해준 줄 알았다. 그런데 되짚어보니 남자는 처음 저와 잤던 날 빼앗듯이 했던 키스 후로 입술에 키스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이 펜트하우스라도 달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보다 더 뻔뻔스러운 걸 달라고 한 죄책감이 들었다. 죄지은 사람처럼 움츠러든 수아를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에, 미묘한 눈으로 응시하더니 물었다.

“키스는 사랑하는 사이에나 하는 거 아닌가?”

질문 같은 거절이었다. 잔인한 말에 상처받았지만 하필이면 그가 사랑을 말한 탓에 수아는 더더욱 포기할 수 없어졌다.

“이미 한 적 있잖아요.”

“아, 그건…….”

남자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그저 픽 웃곤 짐을 챙기는 데 열중할 뿐이었다.

“키스해주세요.”

한 번 더 조르는 순간에야 남자는 수아에게 눈길을 주었지만 결코 곱지 않았다.

“요즘 내가 너무 풀어줬나?”

평소라면 이쯤에서 고집을 꺾고 잘못했다고 빌었겠지만 수아는 버티고 서서 물러나지 않았다. 남자가 기가 막힌다는 듯 실소하더니 벨트와 바지의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빨 게 필요하면 이거나 빨아.”

남자는 한 손으로 뻣뻣하게 발기한 성기를 꺼내 들며 다른 손으로는 수아의 머리를 아래로 짓눌렀다.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앞에 무릎 꿇자마자 수아의 입술을 뜨겁고 말캉한 살덩이가 짓뭉갰다. 그토록 원했던 입술일 리가 없었다.

남자는 벌써 쿠퍼액으로 찐득하게 젖은 귀두를 수아의 입술에 문지르며 요구했다.

“여길 입술이라고 생각하고 빨아봐. 마음에 들면 생각해보지.”

고집스럽게 닫혀 있던 입술이 기꺼이 벌어졌다. 수아는 두 손으로 남자의 성기를 움켜쥐고 끝을 물고 빨며 속으로 되뇌었다.

당신은 날 사랑해. 인정하지 못할 뿐이야.

“왜 나를 숨겨줬어요?” 

수아는 제가 엄마를 벼랑으로 민 범인이라는 걸 알게 된 날 밤, 남자와 나눴던 대화를 되새겼다.

“처음엔 널 믿고 싶었어. 그러다 내 믿음에 어긋나는 증거가 하나씩 나오고 발을 빼야 할 때란 걸 알았지만 그러지 못했지.” 

“……어째서요?”

“그러게. 고민했어. 난 왜 너를 숨겨주는 걸까. 나도 자멸하는 길인데.”

“…….”

“널 처음 봤을 때 내 모든 처음이 될 여자라는 직감이 들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느꼈던 두근거림은 지금도 생생했다.

“그래서 놓지 못했던 것 같아.” 

남자는 수아가 미치도록 갖고 싶었다고 했다. 살면서 평생 못 가진 게 없었는데 여자를 갖고 싶었던 건 처음이었단다. 갖고 싶었던 게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는 것도 처음이었다고 했다.

그러다 욕심이 지나쳐 결국 해선 안 될 짓을 저질렀단다. 후회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잘못된 방식을 써서라도 수아를 차지해서 기뻤다고 했다.

누가 나를 이토록 원해주었던 적이 있었나.

수아는 그의 뒤틀리고 폭력적인 집착이 트로피처럼 느껴졌다.

“수아, 내가 널 위해 내 모든 것을 걸고 있다는 걸 잊지 마.”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든다. 가진 자가 가진 것 없는 내게 왜 모든 걸 걸겠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남자의 말과 행동이 아귀가 맞지 않는다고 느끼던 적이 있었다. 마치 인격이 둘인 사람처럼.

특히나 클럽에서 수아를 범했던 날에는 상처받아 미쳐버린 남자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그저 그 상황이 즐거워 미쳐버린 남자 같기도 했다. 마치 범할 빌미를 기다려왔던 사람처럼. 그러곤 그 일을 뉘우치는 듯하다가도 돌변해 수아에게 올라타곤 했었다.

저를 정말 좋아한 건 맞는지. 그즈음엔 의심이 들어서 묻기도 했었지만 이젠 의심의 여지가 없어졌다.

처음부터 몸이 목적이었다면 수아가 엄마를 죽이려 했다는 걸 숨길 필요 없었다. 오히려 그걸 빌미로 협박했다면 수아의 다리를 단번에 벌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잖아.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거야.

그런 답을 내리고 보니 맞지 않던 아귀가 맞아들어가기 시작했다.

사회적 기업가이자 모범을 보여야 할 사회 지도층이 범죄자를 사랑한다. 양심상 쉽게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수아를 어떤 식으로든 단죄해야만 곁에 둘 수 있는 것이다. 범할 빌미가 아니라 벌할 빌미가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남자가 제게 내내 벌을 주듯이 굴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단순한 취향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내 사랑을 갖고 싶어?”

남자가 묻자 수아는 그의 성기 끝을 입에 문 채로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널 사랑할 수 있게 굴어봐.”

그에게 단죄의 의무를 안겨준 주제에 사랑해달라고 요구한 저는 정말 염치가 없었다. 그 엄마에 그 딸. 타고난 피는 억누를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그딴 짓만 안 했어도 난 이 남자에게 떳떳하게 사랑받았을 텐데. 그도 당당하게 나를 사랑했을 텐데.

이 관계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건 모두 수아의 잘못이었다.

여자의 고개가 수그러드는 게 똑똑히 보였다. 여자의 고집처럼.

“그럼 내가 널 사랑할 수 있게 굴어봐.” 

책임을 전가하는 익숙한 수법에 여자는 오늘도 속아 넘어갔다.

“키스는 사랑하는 사이에나 하는 거 아닌가?” 

“이미 한 적 있잖아요.”

깜찍하게도 그의 허를 찌를 땐 언제고.

여자에게 키스를 한 적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건 영역 표시였을 뿐이었다. 완전히 그의 소유물이 된 여자에게 굳이 또 영역 표시를 할 이유가 있을까.

짐승이 몸을 제 땅에 비벼 체취를 묻히듯이 하는 키스라도 받고 싶은지 여자는 필사적이었다. 성기 끝을 감싸 물고 머리를 흔드는 데 열중하느라 슬립이 흘러내린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뽀얀 두 젖가슴 끝에 달린 방울이 여자의 몸부림을 따라 쉼 없이 흔들렸다.

풍만한 살덩이가 규칙적으로 물결치는 모습을 감상하던 그는 돌연 눈을 질끈 감았다. 허리 아래의 자극이 지나쳤던 탓이었다.

여자는 확실히 실력이 좋아졌다. 평생 몸 쓰는 법을 익히는 걸 업으로 삼고 살아온 덕인지 섹스 기술도 한 번 가르치면 순식간에 제 걸로 만들었다. 그걸 넘어 그가 가르친 것 이상의 스킬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필립은 그저 이가 닿지 않게 이를 입술로 감싸 물고 빨라고 했을 뿐이다. 이에 입술을 덮곤 아래로 당겨진 포피를 물어 위로 끌어올리는 건 가르친 적 없었다. 그렇게 제 입술에 그의 포피까지, 귀두에 가하는 마찰을 두 배, 아니, 그 이상으로 만들어 필립을 빠르게 절정으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읏.”

귀두를 뽑아 먹을 듯이 흡입하곤 터질 듯이 부푼 살덩이를 혀로 마구 치대기까지.

필립은 둔부에 힘을 주며 여자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끈덕지게 빨던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미간이 일그러진 이유를 단단히 착각했는지 낯빛이 사색이 되며 입에 문 걸 빼려 했다.

문득 저 표정을 본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저 아직도 못 해요?” 

그날 병원에서 여자는 제 모친을 버젓이 같은 방에 두고는 창녀처럼 굴려 하더니 그가 말리자 지금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며 겁먹은 토끼처럼 굴었었다.

꽤 귀여웠다. 심각한 척하는 중이라는 걸 잊고 웃을 뻔했었다. 여자의 모친이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식물인간이 아니라 의식이 또렷한 잠금 증후군(Locked-in syndrome)이었을 줄이야. 게다가 눈을 움직이거나 깜빡여 의사를 표현할 줄도 아는 듯했다.

그걸 그가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천만다행이었다.

병원을 옮겼다. 병원이라 하기 힘든 곳으로. 교외의 단칸방 아파트에 넣어두고 그 여자가 하지 못하는 독어밖에 모르는 간병인을 붙였다. 소통할 수 없게. 간병인의 눈에는 여자가 눈을 깜빡여도 무의미해 보이도록.

그러나 목줄 역할을 하려면 숨은 붙어 있어야 하니 건강에 신경은 각별히 쓰도록 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여자는 엉뚱한 짓을 했다. 필립은 여자가 뒤로 젖힌 고개를 낚아채듯이 한 손으로 쥐고 그에게로 당겼다. 조금 빠져나왔던 성기가 다시 쑥 밀려들어 갔다. 그는 여자의 볼이 울룩불룩 튀어나오도록 귀두를 말캉한 볼 안쪽 살에 처박고 문질렀다.

“흡!”

“하아, 벌써 가고 싶진 않은 것뿐이야.”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나서야 성마른 허리 짓을 멈추며 말하자 여자가 생글생글 웃었다. 야만스럽게 생긴 성기가 달콤한 아이스크림이라도 되는 듯이 뿌리부터 구멍까지 혀로 길게 핥아 올리면서. 보이지 않는 꼬리가 여자의 등 뒤에서 흔들리는 환영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복슬복슬한 꼬리가 달린 애널 플러그라도 박아둘 걸 그랬을까.

여자가 다시 성기를 입에 물고 빨기 시작했다. 눈치껏 느릿하게. 그럼에도 필사적인 건 여전했다.

병원에서의 그날 후로 여자는 이렇게 매사 필사적이었다. 스트리퍼는 아니라더니. 이젠 시키지 않아도 그의 앞에서 옷을 하나씩 벗으며 폴 댄스를 췄다.

눈에 띄게 발전한 섹스 실력에는 폴 댄스 실력도 포함이었다. 며칠 전에는 피날레를 폴에 거꾸로 매달려 장식했다.

여자는 바닥을 손으로 짚고 물구나무를 선 자세로 한쪽 발을 폴에 걸쳤다. 그러곤 다리를 그의 앞에서 활짝 벌리더니 애원했다.

“여기에 싸주세요.” 

여자는 자신을 변기 취급했다. 꽤나 지독한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건지.

필립은 그날 물구나무선 여자의 구멍에 아래로 쑤셔 박는 내내 만족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자기 의심에 시달렸다.

방법이 너무 과했나.

언젠가 목줄을 끊고 도망치려 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했었다. 그때를 대비해 미리 정해둔, 여자가 다신 도망칠 궁리를 하지 못할 방법을 계획대로 쓴 것뿐이었다.

그게 여자의 정신에 미칠 영향이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여자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개 취급을 한 건 맞지만 개가 되란 뜻은 아니었다. 인간을 개 취급하는 데 재미가 있지 개를 개 취급하는 데 무슨 재미가 있을까.

요 며칠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복종만 하더니.

“키스해주세요.” 

반항이 참신해졌다. 성가시기 짝이 없는 방향으로.

키스는 사랑의 표현이라는 핑계로 거부했는데도 계속 조르는 건 사랑을 달라는 소리였다.

사랑 같은 소리 하네.

마음을 주겠다는데 거부하더니 뒤늦게 욕심을 내는 건 염치없지 않나? 물론 여자는 그의 유도대로 행동했지만 말이다. 좋아했던 척하며 여자에게 이 관계가 틀어진 책임과 죄책감을 뒤집어씌워서 여자를 입맛대로 조종하는 수법에 이런 부작용이 있을 건 예상했다.

그래서 제 모친을 죽이려 했다는 치명적인 누명을 씌워 그딴 욕심, 엄두도 내지 말라고 싹을 잘라버린 줄 알았는데.

사랑이라니.

개 주제에.

얌전히 집이나 지킬 것이지.

집을 비우는 김에 목줄을 한번 조여줄 필요가 있었다.

필립은 열정적으로 머리를 흔드는 여자를 내려다보다 서랍장 위에 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젠장할.”

여자가 관심을 보이자 그는 잠시 지친 한숨을 쉬어 뜸을 들이다 마지못해 말해주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자가 또 돈을 요구해.”

보안 요원이 입막음 값을 계속 요구한다. 그 말에 여자는 기대대로 불안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괜찮아. 넌 걱정할 것 없어. 내가 해결할 수 있으니까.”

넌 내 거짓말에 죄책감과 공포만 진실되게 느껴주면 돼.

필립은 낯빛이 어두워지는 여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당부하는 척했다.

“내가 없는 사이에 그자가 너를 찾아오려 할 수 있어. 그러니 운전기사 없이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학교와 집만 다니도록 해.”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개는 주인이 없어도 개장에 얌전히 갇혀 있을 것이다.

널 버리지 않을 테니 분명 천천히 하라 했는데. 더더욱 절박해진 여자의 혀 놀림을 이길 길이 없었다.

“하아…….”

눈치 빠른 여자가 입을 크게 벌리자마자 필립은 붉고 촉촉한 혀 위에 희뿌연 정액을 뭉텅 싸 갈겼다. 목줄을 조인 직후라 그런지 유난히 시원스러운 절정이었다.

여자는 제 입에 고인 정액을 삼키곤 혀로 페니스 기둥을 따라 흐른 것도 싹싹 핥아먹었다. 그러곤 귀두를 샅샅이 쓸어 닦고 갈라진 틈까지 청소하는 기특한 여자를 필립은 지그시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갖고 싶은 거 있어?”

남자는 하필이면 정액이 맺힌 입술 끝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물었다. 잘했으니 약속대로 키스라도 해줄 것처럼.

그러나 이젠 키스해달라고 당당히 요구할 수 없었다.

“선물은 없어도 괜찮아요. 내겐 당신이 선물이에요.”

대신 예쁜 말을 골라 했다. 제가 한 발짝 물러나면 남자가 한 발짝 다가오는 요행을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네가 원하는 게 없다면 출장 다녀오는 길에 내가 알아서 사 올게. 받고 싶으면 사고 치지 말고 집 잘 지켜.”

개에게나 하는 말 같았지만 수아는 섭섭해하지 않았다. 그가 정말 저를 개처럼 침대에 엎드리게 하고 뒤에서 박기 시작했음에도.

“아, 으응, 하읏!”

“나 없는 동안 허락 없이 네 몸 만지지 마.”

“으응, 아으응…….”

“내가 없더라도 규칙은 지켜.”

남자는 목에 걸린 초커에 손끝을 걸어 당기며 박아댔다. 거칠게 치받는 힘에 저를 묶은 사슬이 끊어질까 봐 조마조마해진 수아는 머리를 바짝 쳐들고 목이 아프도록 고개를 뒤로 꺾었다.

끊지 마.

제 목숨줄 같았다.

***

학기 말 공연이 벌써 내일로 다가왔다.

두 시간여에 걸친 무대 리허설을 마치고 슈라이버 교수의 표정을 확인한 학생들은 안도했다. 깐깐하기 짝이 없는 교수의 표정이 굳어 있지 않은 것만 해도 그들에겐 칭찬이었다.

“지젤은 내일 지금처럼만 해주면 소원이 없겠어.”

거기다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는 명백한 칭찬까지.

땀으로 젖은 수아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폈다.

수아의 실력이 이번 학기 초에 비해 월등히 좋아진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교수에게서 질타보다 칭찬을 듣는 날이 늘어갈수록 화장실이나 탈의실에서 학생들이 제 실력을 두고 험담을 하는 걸 엿듣기 어려워졌다.

“내일 드레스 리허설은 오후 3시에 있는 걸 알고 있겠지? 오늘은 다들 무리하지 말고 컨디션 조절 잘하도록.”

그렇게 교수가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번 공연에 참여하는 교수진과 학생들이 거의 떠나고도 수아는 무대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관객석 첫 줄.

내일 그 남자가 저곳에 앉아 저를 지켜보는 장면을 수아는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살인 미수범. 돈에 몸 파는 여자. 이런 떳떳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우아하고 훌륭한 발레리나로 당당하게 그 남자의 앞에 서고 싶었다. 적어도 무대 위에서는.

같은 무대 위의 모두에게도 똑똑히 증명해 보일 것이다. 실력 없는 주제에 몸으로 솔리스트의 자리를 차지한 군무 무용수가 아니라는 걸.

내일 밤.

오래도록 다짐하다 무대 뒤의 대기실로 들어섰을 땐 혼자였다. 수아는 가방을 열어 핸드폰부터 찾았다. 새로 온 메시지나 부재중 알림은 없는 걸 보자마자 위로 한껏 솟아 있던 어깨가 축 처졌다.

지금 뭐 하고 있을까? 거긴 몇 시일까? 거긴 어딜까?

남자는 출장지가 어디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매번 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수아의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전혀 연락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남자는 멀리서도 수아에게 이런저런 명령을 내렸다.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 옷을 벗어보라 요구하는 것도 여전했다. 오늘 아침엔 그렇게 눈 뜨자마자 함께 자위를 했다.

그런데도 모자라게만 느껴져서 오늘 입을 옷, 새로 살 바디 샤워같이 하찮은 걸로 남자에게 허락을 구했다. 시키지 않았는데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기까지 했다.

[저 무대 리허설 끝났어요.]

대기실을 배경으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을 찍어 메시지와 함께 보냈다. 그러나 확인했다는 체크 표시는 아무리 기다려도 뜨지 않았다.

남자의 마지막 메시지는 네 시간 전. 그다지 길지 않은 부재에도 수아는 주인 잃은 강아지가 된 양 불안을 느꼈다.

한숨을 푹 쉬며 가방의 지퍼를 여미려던 수아는 멈칫했다.

이건 뭐지?

안에 제가 넣어둔 적 없는 흰 카드 봉투가 들어 있었다. 누가 잘못 넣어둔 줄 알았지만 앞면에 적힌 이름은 다른 소리를 했다.

Liebe Frau Jung

(프라우 정에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왜 직접 주지 않고 몰래 넣어뒀을까. 이 안에 든 게 무엇이기에. 그리고 누구기에.

주변을 둘러봐도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이 의문을 풀어줄 열쇠는 이 봉투에 담긴 것뿐이라는 걸 인정하고 열어 보았다.

안에 든 건 사진인 듯한 두꺼운 종이 한 장. 위험한 건 없어 보여 내용물을 화장대에 쏟아붓자마자 수아는 굳었다.

사진의 배경은 에메랄드 빛 바다 위의 요트, 인물은 연예인처럼 잘생기고 예쁜 남녀였다. 사진 속에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안은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여자는 카메라를 향해 왼손을 내민다. 왼손 약지에서는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축하할 기분이 들 약혼 사진이었다. 그러나 수아가 그들을 축하할 수 없는 건 커플이 아는 얼굴이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밀라, 남자는 필립.

그대로 사고가 멎었다. 수아의 시간도 멈추었다.

그러니 그 꼴로 얼마나 서 있었는지 알 턱이 없었다.

거울 속의 멍청한 자신과 눈이 마주치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사진을 집어 들었다. 뒤집어보자 뒷면에 글씨가 쓰여 있었다.

당신은 그 남자에게 속고 있다. 

***

당신은 그 남자에게 속고 있다.

어머니를 절벽으로 민 범인은 당신이 아니다.

그 남자는 언제나 당신을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러니 내가 말하고 보여준 어떠한 것도 당신의 핸드폰으로는 찾아보지 말라. 해킹 앱이 설치되어 있다. 펜트하우스의 게스트 스위트에는 감시 카메라와 마이크가 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평소처럼 핸드폰을 쓰고 평소처럼 행동하라.

진실을 더 알고 싶다면 오늘 밤 10시 펜트하우스 건물 앞에서 기다릴 것.

사진은 학교 로커에 두고 왔다. 그런데도 그 뒷면의 문구 하나하나가 뇌리에 가시처럼 박혀서는 게스트 스위트의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지금도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잘 거야. 내일을 위해 오늘은 일찍 잘 거야.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수아는 또다시 눈을 번쩍 뜨곤 핸드폰을 켰다. 밤 10시가 되기 12분 전이었다.

오늘 밤 10시. 오늘 밤 10시.

안 가.

핸드폰을 끄고 다시 이불을 휙 뒤집어썼다. 그러나 또 잠들지 못하고 가시밭 위에 누운 것처럼 몸을 뒤척였다.

누구 짓이지?

처음엔 보안 요원의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 남자에게 그랬듯이 자신을 협박하려 벌이는 짓이라고.

그런데 왜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말을 하겠어.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럼 정말 누구지?

하필이면 공연 전날에 이런 걸 보내다니. 누가 제 컨디션을 망치려고 작정한 것만 같았다.

사진까지 합성해서…….

하지만 그건 갈기갈기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아무리 봐도 조작된 사진이 아니었다.

옛날 사진일까? 예전에 약혼했다가 파혼한 사이인가? 그날 클럽에서 어쩐지 분위기가 미묘했어.

그렇지만 두 사람의 헤어스타일이나 얼굴이 며칠 전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설마 그럼 최근 사진……. 말도 안 돼.

뭐가 말도 안 되는데? 밀라의 SNS에 있을까? 검색해볼까?

눈을 번쩍 뜨고 핸드폰을 덥석 집자마자 뇌리에 박힌 문구가 또 눈앞을 맴돌았다.

그 남자는 언제나 당신을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러니 내가 말하고 보여준 어떠한 것도 당신의 핸드폰으로는 찾아보지 말라.

문득 그 메모의 진위를 확인할 방법이 떠올랐다. 수아는 메신저 앱을 열고 제 상대역을 맡은 발레리노의 이름을 눌렀다.

안녕…… 파비안…… 뭐…… 해…….

채팅방에 메시지를 썼지만 결국 보내지는 못하고 지웠다. 제 컨디션이 망해간다고 남의 컨디션을 망칠 수는 없었다.

차선책으로 택한 건 아무에게도 피해 주지 않을 수단이었다. 앱 스토어에서 제일 위에 있는 온라인 데이팅 앱을 아무거나 찾아 설치했다. 바로 가입 절차를 밟는데 3단계도 가지 못하고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발신자는 몇 시간째 연락이 없던 남자였다.

- 뭐 해.

받자마자 들리는 목소리가 사나웠다.

“네?”

그 이유를 모르는 척 굴었더니 남자가 목을 가다듬곤 다시 물었다.

-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전화했어.

관심의 표현으로 들릴 법한 다정한 말이 지금은 추궁처럼 들렸다.

“자려다가 잠이 안 와서…….”

수아는 일부러 말을 줄이곤 입을 다물었다. 상대의 인내가 닳도록.

- 그래서?

역시나 남자가 못 참겠다는 듯이 재촉했다.

“랜덤 채팅이나 할까 하고…….”

그래서 데이팅 앱을 받았다고 하면 남자는 곧바로 추궁하고 벌을 줄 것이다. 그래서 또 한 번 얼버무렸지만 이번엔 침묵이 아니라 연기를 수단으로 택했다. 수아는 우는 것처럼 훌쩍거리고 어깨를 들썩이다 남자에게 애원했다.

“저 외로워요. 빨리 오세요.”

핸드폰 너머에서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 일찍 자. 자고 일어나면 날 볼 수 있잖아.

“네.”

- 내일 공연 기대하고 있어.

“네.”

분명 그에게서 전화가 오면 보고 싶다는 말을 쏟아내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머리도, 입도 굳어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남자는 정말로 나를 감시 중인지도 모른다. 수아는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다 시계가 21:56으로 바뀌는 걸 보고 몸을 일으켰다.

핸드폰은 의심을 사지 않도록 남자의 침실에 두고 올 것.

사진 뒷면에 추신으로 적혀 있던 말을 기억해낸 수아는 그의 침실에 핸드폰을 두고 나왔다. 외투는 감시 중일지도 모를 게스트 스위트에 있는 제 것이 아니라 남자의 것을 빌려 입고 나왔다.

이상한 사람 같으면 바로 아파트 로비로 뛰어 들어가면 돼.

어두운 대로변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때였다. 수아의 앞에 검은 2인용 스마트 한 대가 멈춰 섰다.

조수석의 창문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보니 수아를 찾아온 사람이 맞는 듯했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여자인 걸 확인하고 경계심을 조금 늦추자마자 깜짝 놀랐다.

“……야나?”

“타요.”

야나는 잠시 내렸던 마스크를 다시 쓰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 수아는 차에 야나뿐인 걸 확인하고서야 조수석에 올랐다.

“야나가 한 짓이에요?”

야나는 수아의 옷 주머니를 뒤지며 딴소리 같은 대답을 했다.

“핸드폰 그 남자 침실에 두고 왔죠?”

“네.”

“왜 전화 안 받았는지, 어디 갔는지 물으면 그 사람 침실에서 잠들었다고 해요. 거긴 감시 카메라가 없으니까.”

그래서 핸드폰을 거기 두고 오라 했던 것이었다.

야나가 차를 몰기 시작했지만 어디로 가느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곳이 필요했는지 같은 블록을 빙 돌아 인적이 없고 어두운 골목에 차를 세웠을 뿐이었다.

수아는 물을 게 너무 많았다. 그 남자가 저를 왜 감시하는지. 밀라와는 무슨 사이인지. 제가 엄마를 밀지 않았다는 건 정말인지. 그 남자에게 속고 있다는 건 대체 무슨 말인지. 그리고 이 모든 걸 야나는 어떻게 알았는지.

묻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아 아무것도 묻지 못했더니 야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덜 충격적인 순서대로 말해줄게요.”

첫 폭로는 그 남자와 밀라의 관계였다.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결혼하기로 예정된 사이였단다. 절망스러웠지만 그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는 폭로가 가장 덜 충격적이란 암시가 더 절망적이었다.

“그저께 모리셔스에서 약혼하고 지금은 파티를 즐기는 중이에요. 수아가 모를 것 같았는데 역시 몰랐나 보네요.”

야나의 핸드폰으로 밀라의 SNS 계정에 올라온 호화로운 약혼 파티 사진을 보고 있자니 배신감과 질투심에서 비롯된 감정이 해일처럼 거세게 밀려왔다.

배신이라니. 우린 연인도 아닌데. 그래, 그 남자가 어떻게 나 같은 거랑 결혼하겠어. 결혼해도 나를 버리지만 말아줘요.

수아는 또 자기혐오로 편리한 도피 행각을 벌였다.

“그래서요? 이런 걸 왜 나한테 보여줘요? 그 남자랑 내 사이를 갈라놔서 뭘 얻으려고 이래요?”

수아가 방어적으로 굴며 도리어 추궁까지 했더니 야나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 남자가 목줄을 단단히도 채워뒀네요.”

“……네?”

“로젠탈 성에서 수아 어머니를 민 사람, 수아 아니에요.”

“……그럼 누군데요?”

엄마를 민 사람이 있는 건 맞다는 인정 같아 물었다.

“둘 중에 누가 밀었는지는 나도 몰라요.”

“둘…… 이요?”

“폰 알브레히트가의 두 사람. 잉그리드와 필립.”

“…….”

“그 두 사람이 한 일인 건 확실해요.”

“……증거, 있어요?”

“뭐부터 얘기해주면 좋을까…….”

증거가 그렇게 많은 건가.

야나는 잠시 고민하고서야 다시 말문을 열었다.

“필립이 거짓으로 경찰에 증언했더라고요. 지하 통로에서 절벽으로 열리는 문의 열쇠는 보안실만이 아니라 소유주도 갖고 있어요.”

야나는 그들이 엄마를 밤에 불러내 술과 수면제를 먹이곤 거기로 끌고 가서 떨어트린 것 같다고 추측했다.

“그날 난 잉그리드의 지시로 수아에게 수면제를 진통제와 같이 줬어요. 그런데 수아의 어머니에겐 안 드렸어요.”

“경찰은 엄마 짐에 그 수면제가 있었다고…….”

“그 파우치에 든 거, 잉그리드가 먹는 수면제와 같아요.”

잉그리드가 가짜 증거를 심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침대 옆에 와인 병이랑 잔이 있었죠? 그날 밤에 수아 어머니는 와인을 달라고 하셨던 적이 없어요.”

야나는 이야기를 듣고도 멍하니 눈만 깜빡이는 수아를 잠시 지켜보더니 쓰게 웃었다.

“이거 다 넘겨짚는 소리 같죠? 그럼 이걸 들어봐요. 충격적이라 각오는 해야 할 거예요.”

야나가 핸드폰에서 녹음 파일을 찾아 열었다. 술에 취한 것 같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돈 주고도 못 들을 강의를 내가 해주지. 네게만 특별히.]

“잉그리드예요.”

잉그리드의 목소리가 끊기는 순간 휙, 무언가가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뭔가를 찰싹 때리는 파열음과 누군가의 억눌린 신음이 뒤섞였다.

채찍과 재갈. 수아아겐 익숙한 소리였다.

“남자는 전에 로젠탈 성에 같이 왔었던 올리버 터너예요.”

“……네?”

저를 강간하려 했던 그 발레리노가 왜 잉그리드와 있는 걸까.

[무슨 강의냐고?]

남자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고 잉그리드의 대답만 들렸다.

“잉그리드는 남자를 결박해놓고 약에 취해서 혼자 떠드는 거예요.”

약이란 말에 수아는 또 한 번 놀랐다. 그런 위험한 것엔 전혀 손대지 않을 것같이 생긴 사람이었다.

[인간을 개로 길들이는 법.]

간간이 들려오는 올리버의 신음을 배경음 삼아 잉그리드의 강의가 시작됐다.

[먼저 목줄을 채워.]

이게 무슨 썰렁한 농담인가 싶지 않냐며 잉그리드 홀로 깔깔 웃었다.

[약점을 잡으란 거야. 빚더미든, 너처럼 범죄를 저지르려던 걸 붙잡든. 그러곤 뭘 해야 할지는 약점마다 다르지만 주변 사람과 이간질해서 고립시켜야 한다는 건 언제나 진리이지.]

잉그리드는 친절히 사례까지 들어 설명하겠다고 했다. 그러곤 등장한 게 수아의 이름이었다.

[내 아들은 그 애가 좋은 개가 될 걸 첫눈에 알아본 거야.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미 주인이 있더군.]

수아를 고립시키려면 엄마를 먼저 없애야만 했단다.

[필립은 경찰이면 될 줄 알았을 거야. 나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그런데 개의 충성심이 어찌나 대단한지. 결국 극단적이지만 확실한 방법을 써야 했어.]

엄마를 죽이려 한 건 그 두 사람이라는 자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게 마련이란 걸 잊지 마. 변수를 잘 활용할 줄도 알아야지. 그 점에서 필립은 훌륭했어. 실수를 도리어 그 여자의 약점으로 만들었으니까.]

엄마를 이용해 수아를 서서히 빚의 늪에 빠트렸단다. 그렇게 그가 친 덫인 섹스 클럽으로 수아를 몰아넣었단다. 운명의 장난질인 줄 알았던 것이 실은 인간의 장난질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원치도 않는 학교 공연의 배역을 빼앗아서 준 것도 수아를 고립시키려는 작전이었다니.

[그렇게 주변에 너만 남게 되면 여자가 네게 의존하기 시작할 거야. 그런데 이 단계가 필립의 취향과는 맞지 않아서 나름대로 응용을 했지. 내 아들은 여자가 복종할수록 식고 반항할수록 달아오르는 남자야. 브랫 테이머라고 들어봤겠지? 반항하는 걸 제 손으로 복종시켜야만 만족하는 타입이지.]

그 말대로, 수아는 제 곁에 그 남자만이 남고도 그를 거부하고 반항하다 억지로 굴복당했다.

[다음 단계, 여자가 모든 것을 네게 허락받게 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지배해.]

차, 기사, 핸드폰, 집, 돈, 변호사. 잉그리드가 줄줄이 읊더니 수아가 그간 호의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이 실은 감시와 지배, 통제의 수단일 뿐이었다고 폭로했다.

[듣자니 기가 막히지 않아?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게 어떻게 통해?]

잉그리드는 묻지도 않은 답을 장황하게 떠들었다.

[그땐 너밖에 없으니까. 세상 모두가 적이고 모두에게서 버림받았는데 어떻게 유일한 네 편을 버리겠니. 거기다 고독이 극에 달하면 그딴 걸 관심과 사랑이라고 착각하기도 하지.]

마지막 말에 수아는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그러고도 목줄을 끊으며 탈출을 시도했어. 가끔 이렇게 돌발 행동을 하는 애들이 나와줘야 재밌긴 하지.]

병실에 누운 엄마를 죽여서 벗어나려 했던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변덕을 부리고 헷갈리게 굴어. 네게 익숙해질 틈을 주지 마. 그리고 왜곡된 현실만 보게 해. 현실을 직접 왜곡할 수도 있고 헛된 희망을 줘서 스스로 현실을 왜곡해서 보게 할 수도 있지. 이건 때에 맞춰서 응용하도록 해. 그러곤 네가 가하는 폭력과 통제와 지배가 모두 제 탓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거야. 제가 지은 죄가 있으니 마땅히 받아야 하는 벌이라고.]

잉그리드의 입에서 나오는 것 모두 제가 겪은 일이었다.

[이 중에 몇 개는 너도 당했으니 잘 알겠지.]

갑자기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핸드폰 스피커에서 터져 나왔다.

[쉬워. 다들 너무 쉬워.]

소름 끼치는 웃음이 끝나자 젠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냐.]

저처럼 능력이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과시를 듣고 있자니 약이 아니라 자아에 도취한 것만 같았다.

[내가 왜 네게 이런 말을 해주냐고?]

억눌린 비명 소리가 희미하게 터져 나왔다.

[누가 너 같은 마약 중독자의 말을 믿겠어?]

녹음 파일을 끝까지 듣고 나니 속이 메슥거렸다. 도저히 입을 열지 못하고 새파랗게 질려 텅 빈 밤거리만 응시했다. 살얼음판 같은 정적을 먼저 깬 사람은 야나였다.

“이게 잉그리드의 본모습이에요. 더럽고 추악한 사람이죠.”

야나의 경악스러운 폭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간 인재 양성을 위해 잉그리드가 벌인 장학 사업이 실은 인재 죽이기였다니.

“믿기 힘들죠? 가진 것도 많은 사람이 왜 이런 짓을 할까. 그건 아무리 가지고 또 가져도 마음속에 똬리를 튼 열등감이 죽지 않아서.”

자기가 잘난 데는 한계가 있으니 남이 못나야만 열등감을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이다.

“잉그리드가 평소에는 안 그런 척하지만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아줬으면 하는 욕심이 커요.”

그 대단한 성취가 설령 나쁜 짓이라도 과시해야만 직성이 풀린단다. 그래서 그걸 제게 절대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떠들고 입을 막는다 했다.

“저한테도 그랬어요. 제 꿈을 접게 만든 수법을 다른 학생들에게 똑같이 쓰곤 제게 웃으며 과시했죠.”

수아의 놀란 눈을 마주한 야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가 갈리지만 어쩌겠어요. 먹고살아야 하는걸. 게다가 상대는 노련하고 교활해요. 직접 폭력을 가해서 은퇴하게 만든 것도 아니고 정신을 은근히 흔드는 수법만 쓰니까 이걸 범죄라고 하기도 어렵죠. 다들 결국은 스스로 토슈즈를 벗었잖아요.”

잉그리드가 했던 말대로 야나도 제 탓을 했단다. 내가 못한 탓이지. 수법에 당한 다른 장학생들도 나약했던 자기들 탓이지. 이렇게.

“그런데 왜 갑자기 생각이 달라졌냐면…….”

야나는 한숨을 내쉬더니 예상치 못한 이름을 꺼냈다.

“마리나 카민스카 알죠?”

수아와 올리버의 전에는 마리나가 잉그리드의 표적이었다고 했다. 그 마녀에게 몰리고 몰리던 마리나는 결국 콩쿠르를 망쳤다. 그렇게 내리막길을 걷다 다른 장학생들처럼 은퇴를 택할 줄 알았더니 마리나는 다른 발레리나에게 염산을 부었다.

“그 소식을 듣고 더는 안 되겠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핑계로 더는 범죄에 가담해선 안 되겠다, 그렇게 마음먹었죠.”

그때부터 증거를 모으기 시작했단다. 그런데 전혀 상상도 못 했던 게 그물에 걸렸다고.

“사실 이건 올리버를 학대하는 정황을 잡으려고 도청한 건데 수아가 학대당한다는 정황이 잡혔어요. 필립 폰 알브레히트, 그 남자에게.”

그제야 돌이켜보니까 두 모자가 수아에게 계속 수상쩍은 짓을 하라고 야나에게 시키긴 했었단다.

“처음은 학교 공연 캐스팅 명단이었어요. 잉그리드가 그걸 얻어 와서 수아의 이메일에 보내두라고 했어요. 수아의 어머니가 보게 하려는 계획이었던 것 같은데 보질 않으니 저를 보내서 다른 핑계로 이메일을 확인하게 만들었었죠.”

그제야 수아는 그날 떠올렸지만 일련의 사건으로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의문을 다시 기억해냈다. 도대체 누가 왜 갑자기 공연 캐스팅 명단을 보낸 걸까. 답은 잉그리드였다.

“그날 수아가 어머니에게서 폭행을 당하는 것도, 필립이 경찰을 부르는 것도 실은 잉그리드의 설계였어요.”

그다음은 모두 그 남자의 설계였다.

“해킹 앱을 심은 핸드폰은 누구에게 가는 건지 몰랐어요. 전에 회사 로비에서 수아가 그걸 들고 있는 걸 보고서야 알았지.”

그 남자가 야나에게 시킨 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거짓말을 시켰단다. 학교 근처에 엄마를 입원시킬 병원이 없으니 프랑크푸르트로 가야 한다고. 그가 사는 곳으로.

사건 수사가 종결되지 않아 출국할 수 없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다. 사건은 이번 학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엄마의 자살 시도로 종결되었단다.

그렇다면 결국 새로 나온 증거며, 경찰과 보안 요원의 연락이며, 이 모든 건 남자의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언어도, 법도 잘 모르는 외국인을 속이는 데엔 그럴듯한 말 몇 마디면 충분했다.

“수아, 정말 미안해요. 난 시키는 일을 한 것뿐이지만 잘못된 짓인 걸 알면서도 했으니까 나도 떳떳하진 못해요. 핑계 같지만 난 정말 이 모든 게 이렇게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필립은 항상 야나에게 화폭에 점 하나를 찍으라고 명령하지만 큰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다 이제야 그 그림을 보고 제가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은 것이다.

“아마 수아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 모자는 수아를 수렁에 빠트려서 가지고 놀 계획이었던 것 같아요.”

“…….”

“잉그리드야 원래 인간을 개미보다 못하게 취급하는 사람이니 그러려니 했지만 필립까지 그럴 줄은 정말 몰랐어요.”

야나가 아는 필립은 모친의 악행을 함께 경멸해주었던 남자였다. 그래서 더 충격이 컸다 했다.

“그 사람은 어머니 같은 괴물이 안 되려는 것 같더니 결국 같은 괴물로 전락했네요.”

야나는 한 번에 소화하기 어려운 수많은 진실을 쏟아놓고 수아에게 물었다.

“수아, 어떻게 하고 싶어요?”

수아는 한참을 있다가 겨우 대답 같지도 않은 대답을 뱉어냈다.

“……모르겠어요.”

“그럴 것 같아서 제가 먼저 변호사랑 상담해봤어요.”

답은 듣지 않고 야나의 낯빛만 보아도 알 것 같았다.

“아까 말했듯이 잉그리드는 노련하고 교활해요. 녹취록엔 수아의 어머니를 죽이려 했다는 자백이나 마찬가지인 말이 담겨 있지만 진짜 자백은 없어요. 물적 증거는 있었어도 지금쯤이면 다 인멸했겠죠.”

수아를 학대한다는 자백이 담겨 있기는 하나, 약에 취해서 한 말이니 잉그리드 쪽에서 망상이었다고 하면 그만이기도 하단다. 이건 사실 증거가 되긴커녕 야나가 오히려 불법 녹음 및 사생활 침해로 고소당할 수 있는 사안이라는 말을 변호사에게서 들었다고.

“독일은 뭐, 정의가 살아 있는 나라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아요.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어느 나라나 부자는 강자고, 여자와 외국인은 약자죠. 안타깝게도 수아는 그 둘에 다 해당하네요.”

야나는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는 수아의 손을 쥐더니 말했다.

“수아, 도망쳐요.”

“…….”

“확실한 방법은 그것뿐이에요.”

“생각해볼…….”

“그럴 시간이 없어요. 그 남자가 없을 때가 기회예요. 전용기는 오후에 돌아오니까 그전에 뜨는 비행기로 출국해요. 비용은 제가 댈게요. 그리고 아마 제게 수아를 찾으라고 시킬 건데 시간을 끌어볼 테니까 한국에 가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요.”

지금까지 제가 믿었던 모든 것과 오늘 들은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서로 맞부딪치다 결국 상쇄되며 머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어버린 듯했다. 무슨 말을 들어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늦은 밤, 제 대답을 끈기 있게 기다려준 야나에게 한 대답이라곤 결국.

“……생각해볼게요.”

야나에게서 연락에 쓸 구형 핸드폰 하나를 받고 나와 홀로 밤거리를 터덜터덜 걸었다. 발길이 수아를 이끈 곳은 남자의 펜트하우스였다.

저를 가둔 우리가 환상이었다는 걸 깨닫고도 우리에서 나가지 못하는 어리석은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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