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뱀 또는 개 (10/11)

뱀 또는 개

당신이 쥔 카드를 백지로 만들 거야. 

하나씩, 하나씩.

당신이 패자가 될 때까지.

***

벌에 감정을 싣지 말 것.

필립의 새로운 규칙이었다.

실수를 인정했다. 한겨울에 알몸으로 물속에서 벌을 준 건 확실히 지나쳤다.

여자는 밤새 떨며 앓았다.

필립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에게 화를 낸 적은 많았지만 통제 수단이었을 뿐, 진심으로 화가 났던 적은 없었다. 여자가 통제를 벗어나려 하면 허리 아래는 성이 나도 위는 그저 즐거웠다. 그러나 요 며칠은 제멋대로 구는 여자에게 진심으로 분노했다.

충동에 굴복하더라도 감정의 고삐는 놓친 적 없었던 그는 크게 당황했다. 여자만큼이나 자신도 망가진 것만 같았다.

떨어져 있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자정이 지나서야 겨우 잠든 여자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깜빡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 여자는 그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이 곁에 없었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또 반항인가 했다.

이번엔 목줄을 조이는 게 아니라 놓아버리는 척으로 통제해야겠다. 그렇게 결심했지만 먼저 놓아버린 쪽은 여자였다.

거칠게 흐르는 강 위로 솟은 절벽 앞에 가지런히 벗어둔 슬리퍼 한 쌍, 그리고 끊어진 초커. 눈에 들어온 찰나 머리끝이 쭈뼛 섰다.

여자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수색을 맡은 경찰은 모젤강 하류나 라인강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고 했다. 썩어 문드러진 시신 따위 보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론 여자의 몸뚱이가 제게서 벗어나 닿지 않는 곳을 떠돌아다닌다고 상상하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경찰은 자살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어머니와 밀라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살이라 믿었다. 자살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사람은 필립 혼자였다.

죽은 척이라니. 유치하군.

벌을 준 보복이랍시고 죽은 척을 하다 기분이 풀리거나 돈이 떨어지면 나타날 줄 알았다. 그러나 하루가 이틀이 되고, 한 달이 두 달이 되도록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으로 도망쳤나?

그러나 핸드폰은 고사하고 여권도, 돈도, 옷도 하나 챙기지 않고 맨몸으로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출국 기록은 없었으며 만하임의 학교와 한국의 주소지에서도 여자를 본 사람은 없었다.

필립은 그제야 믿기 시작했다.

여자는 죽었다.

내가 그날 몰아붙여서 홧김에? 아니, 어쩌면 계획적이었을지도.

새벽, 절벽 앞의 흰 슬리퍼. 여자는 그가 누명을 씌우기 위해 쓴 연출을 그대로 재현해두고 자살했다.

다 알아버렸나? 그런데 복수할 방법이 없어서 울분을 참지 못하고 내게 줄곧 반항하다 결국 그 자리에서 나 보란 듯이 뛰어내린 건가?

그런 결론에 다다르고 보니 많고 많은 휴양지를 두고 굳이 시골에 처박힌 고성을 고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처음부터 그 여자는 모든 일이 시작된 곳에서 끝을 맺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죽음으로 복수하겠다고.

바보 같은 게. 네가 죽어 없어지면 난 고맙거든.

고마워 미칠 지경이다.

얼마 후 필립은 꿈에서 여자를 보았다.

……라고 말하면 거짓이다. 그의 발치에 누운 건 여자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일 뿐이었다.

‘네까짓 게 뭔데.’

필립은 더러운 흙이 묻은 구둣발로 여자의 비석을 밟아 짓이기며 죽은 여자를 모욕했다.

‘감히 나를 버려?’

그가 먼저 버리려 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여자가 먼저 그를 버렸다.

‘그래봤자 네가 내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비석을 밟아 모욕하는 걸론 부족했다. 필립은 무덤을 맨손으로 파헤쳤다. 관 뚜껑을 잡아 뜯어 열고 텅 빈 속을 마주하는 찰나에야 그는 꿈에서 깨어났다.

익숙한 천장, 그리고 익숙한 냄새. 술 냄새.

필립은 또 술에 취해 여자의 침대로 기어들어 왔다. 그보다 더 기가 막힌 건, 이젠 개도 없는데 여전히 개집으로 걸음 한다는 사실이었다.

개가 죽었는데 개 목줄이 왜 필요해.

그래서 여자가 죽은 지 두 달이 지나 여자의 모친은 병사로 조용히 처분했다.

개가 죽었으면 개집도 필요가 없다. 목줄은 잘만 버렸으면서 이 펜트하우스도, 여자가 쓰던 게스트 스위트도 그대로 두는 자신이 우스웠다.

심지어 야나가 성에서 여자의 짐과 함께 챙겨 온 선물도 여기 그대로 있었다. 침대 옆 협탁에 덩그러니. 크리스마스에 죽은 여자가 열어보지 못한 선물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주인을 기다리며 먼지를 두껍게 입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라는 듯이.

나더러 죄책감이라도 느끼라는 건가.

쿵.

상자를 쓰레기통에 처박아 넣었다. 그래보았자 자기기만이다. 여긴 청소부가 못 들어오게 했으니 쓰레기통은 영영 비워지지 않는다.

잠시 후, 필립은 선물 상자를 다시 주워들었다. 구겨진 리본을 펴고 먼지를 털어내 협탁에 다시 고이 올려두었다.

주인이 돌아오게 하면 되지.

시체라도 찾아서 여기 가져다두면 될 일 아닌가.

그는 꿈의 끝자락에서 주문처럼 외던 다짐을 되풀이했다.

‘넌 죽어서도 내게서 못 벗어나.’

그러나 여자가 죽은 겨울이 끝나고도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여자가 제게서 영원히 도망쳤다는 게 기정사실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았다.

“이번 달부터 후원하기 시작한 아이란다.”

어머니는 필립을 불러 새 장난감을 선물했다. 독일에서 유학 중인 일본인 발레리나. 그 여자와 외모는 달랐으나 분위기가 비슷했다.

“개는 개로 잊는 법이지.”

독어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여자의 앞에서 어머니가 이런 말을 하자 필립은 홀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어머니를 신뢰한 적은 없으나 그날 후로 불신의 이유가 달라졌다.

저 여자가 손을 쓴 건가.

필립이 망가진 첫 장난감을 버리지 못하자 몰래 갖다 버린 건지도 모른다. 지난여름 성에서 여자의 모친이 투신한 후로 여자는 우울증을 앓았던 데다 공연을 망쳐 자해를 한 적까지 있었다는 말을 직접 나서 경찰에 전하며 여자의 사인을 자살로 몰고 간 사람은 다름 아닌 필립의 모친이었다.

필립에겐 여자가 제 모친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뛰어내렸을 거라며 자살로 몰고 갔다. 이 모든 게 갈수록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자를 그 모친과 같은 수법으로 죽였다는 게 앞뒤가 맞지 않았다. 필립의 의심을 살 테니. 그가 어머니라면 다른 식으로 처리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밀라가 수상했다. 그날, 답지 않게 필립의 눈치를 보며 위로의 말까지 건넸었으니.

“말하면 자살할지도 모르겠다.” 

그 말대로 밀라가 약혼 사실을 말해서 여자가 자살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의심을 키우다 보니 그날 그곳에 있었던 모두에게로 번졌다. 뚜렷한 근거가 없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망상의 끝은 허상이다. 길에서, 펜트하우스에서, 심지어는 여자가 온 적 없는 그의 사무실에서도 필립은 여자의 환영을 보곤 했다.

그날 밤은 소개 자리를 박차고 나오자마자 저를 괴롭히는 기억과 치킨게임이라도 하듯이 클럽 로프 버니에 갔다가 환영을 마주쳤다. 하필이면 폴 댄스를 추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도망치던 모습으로. 쫓아가 붙잡는 순간 여자는 꿈처럼 사라졌다.

그의 모든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던 여자가 꿈이 되었다. 지난 모든 시간마저 꿈이었으면 차라리 쉽게 깨어날 수 있었을까. 여자가 있던 자리에 남은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 말하는데 여자만 꿈이 되었다.

필립은 한꺼번에 밀어닥친 분노를 이기지 못했다. 게스트 스위트로 돌아가 여자의 물건을 갈기갈기 찢었지만 정작 찢어 죽이고 싶은 여자는 여기 없었다.

여자를 어떻게든 살려내 제 손으로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못 살려내면 제가 죽어 지옥까지 그 여자를 쫓아가면 그만이라는 도를 넘는 생각까지 했다.

펜트하우스의 테라스에서 뛰어내리기 직전에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그는 미쳐가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기 전에 그 여자의 망령을 버려야 했다.

개는 개로 잊는 법이다.

그래서 모친이 소개해주었던 발레리나를 개집에 들여다놓았으나 사흘도 버티지 못하고 내쫓았다. 그가 버티지 못했다. 제가 한 미친 짓에.

새 개에게 죽은 개의 옷을 입고 죽은 개처럼 굴라고 강요했다. 제가 시켜놓곤 새로운 개가 죽은 개의 옷을 입는 것도, 어쭙잖은 흉내를 내는 것도 괘씸해 견딜 수가 없었다.

네가 뭔데 감히 그 여자가 되려 해.

그 여자의 빈자리는 그 누구도 채우지 못했다. 아니, 감히 채우려 해선 안 됐다.

이미 늦었다. 그는 돌이킬 수 없이 미쳐버렸다.

때론 광기가 현실을 대하는 올바른 방법일 수도 있다.(It is sometimes an appropriate response to reality to go insane. 출처: Philip K. Dick, VALIS)

어릴 적,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유명 작가의 책에서 읽은 문구였다. 물론 여자를 잃은 현실을 광기로 버티는 남자를 묘사하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자가 죽은 지 벌써 다섯 달째. 오늘 밤도 그는 술에 취해 펜트하우스로 향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늘 밤도 어김없이 여자의 환영이 그를 기다리는 펜트하우스로.

이번엔 그의 드레스 룸 구석에 웅크려 앉아 잠들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도망간다. 쫓아가 붙잡으면 사라진다. 필립은 조용히 문을 닫고 여자가 깨지 않도록 천천히 다가갔다. 한 걸음을 남겨두곤 더 다가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난 왜 박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여자를 고작 보기만 하겠다고 이 짓을 하는 걸까.

우습다.

자조하는 찰나 여자가 흠칫, 잠에서 깨더니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잠이 덜 깬 눈으로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던 여자가 벌떡 일어서기에 도망칠 줄 알았다.

“필립.”

그러나 여자는 그에게 달려와 안겼다. 환영 속에선 도망치기만 하던 여자가 제게 먼저 안겨왔다. 처음이었다.

필립은 떨리는 손을 제게 매달린 여자의 몸에 대어보았다. 사라지지 않는다.

환영이 아니다.

“앗!”

필립은 여자를 바닥에 쓰러트렸다. 옷을 잡아 찢어발기고 그가 잘 아는 나체를 품에 욱여넣고 으스러트릴 듯이 끌어안았다.

“아파요.”

아프다는 말에 필립은 안도의 웃음을 터트렸다. 소리를 낸다. 익숙한 살 냄새를 풍긴다. 숨을 쉬느라 부풀고 꺼지며 그의 몸에 문대어지는 가슴은 부드러웠고, 기억 그대로 그를 조이는 배 속은 뜨거웠다.

여자는 살아 있다.

넌 이제 죽어서도 내게서 못 벗어나.

반년 가까이 손도 대지 않았던 서랍을 열고 족쇄를 꺼냈다. 알몸에 흰 체액을 덕지덕지 묻힌 채 바닥에 널브러져 헐떡이는 여자의 발목을 쥔 찰나 필립은 멈칫했다. 발목을 푸르스름한 멍이 띠처럼 두르고 있었다. 제가 아닌 누군가가 여자를 묶은 자국이었다.

그제야 여자가 울며 웅얼거리는 말이 똑똑히 들렸다.

“그들이 나를 죽일 거예요.”

“나 도망간 게 아니라 납치당했어요.”

여자가 털어놓은 사정은 충격적이었다.

크리스마스 새벽에 성에서 납치당했단다. 머리를 짧게 깎고 땅딸막하고 다부진 체형에 낯선 말을 쓰는 낯선 남자들에게.

그들은 그녀를 창문이 가려진 캠핑카에 태우고 어딘가로 향했다. 사흘 정도 지나 남자들이 멈춘 곳은 인적이 드문 시골 농가였다. 제가 국경을 넘어 폴란드에 있다는 건 독어와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납치범에게서 듣고야 알았단다.

“거기서 뭔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어요.”

그사이 그들은 여자를 노예처럼 부렸다. 청소와 빨래 같은 가사부터 그 집에 사는 아이들의 뒤치다꺼리까지. 잠은 지하실에 갇히고 묶인 채로 자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오더니 그들이 여자를 다른 남자들한테 팔아넘겼단다. 그 후론 이름도 모르는 도시의 아파트에 갇혔다. 그곳엔 그녀처럼 팔려 온 듯한 여자들이 갇혀 있었다. 씻으라더니 야한 옷을 입혀서 프로필 사진 같은 걸 억지로 찍기도 했단다. 성매매를 시키려는 게 뻔했다.

“그런데 밤에 저를 차에 태워서 어딘가로 데려가는 거예요. 그러다 사고가 났는데 그 틈에 도망쳤어요. 안 그랬으면 난 지금쯤…….”

여자는 말이 통하지 않는 폴란드에서 돈도 없이 탈출해서 프랑크푸르트까지 왔단다. 히치하이킹은 무서워 도저히 엄두를 못 내고 무작정 걷다 독일행 기차에 무임승차를 거듭하며 여기까지 겨우 왔다는 것이었다.

있을 법한 일이나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여자의 구체적인 말뿐만 아니라 몸도 여자의 이야기가 사실임을 증명해주었다.

그가 찢어버린 옷에는 폴란드어 라벨이 붙어 있었다. 발목에는 묶여 있었던 자국이 남아 있었으며 걷고 또 걸었다는 말대로 발에는 물집이 수없이 잡혀 있었다. 거기다 몇 달이나 노예 취급을 받으며 고생한 게 정말인지 원래보다 비쩍 마른 데다 실크 같던 머리카락도 푸석푸석했다.

“너무 무서웠어요. 말도 안 통하는 데에 갇혀서 평생 성노예로 사는 줄 알았어요.”

알몸을 웅크리고 오들오들 떠는 여자를 보고 있자니 문득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그자들이 네게 몹쓸 짓도 했어?”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는지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던 여자가 번뜩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당신이 하던 짓요?”

“…….”

여자의 순진무구한 눈빛에 그를 비난하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필립은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믿기지 않았다.

“내가 널 버릴까 봐 하는 거짓말이면…….”

“그럼 버려요.”

“……뭐?”

“차라리 나를 버려주세요.”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흡, 보내줘요.”

“정신 차려. 넌 이미 그들에게서 벗어났어. 그런데 어디로 보내달라는 거야?”

그의 품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인데 어디로 가겠다는 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거듭하는 여자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를 뒤적였다. 다시 밖으로 나온 필립의 손끝에는 피임링이 걸려 있었다.

반년 전에 그가 넣어둔 물건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은밀한 부위에 다른 사람이 남긴 자국도 없었다. 그제야 안도했다.

“제발 나 그냥 보내줘요.”

필립은 이젠 제 구실을 못 할 링을 버리고 아직도 헛소리를 하며 울먹이는 여자를 품에 안았다.

“잘 돌아왔어. 착해.”

절대 이뤄질 수 없을 줄 알았던 꿈이 이루어졌다. 잠들면 다시 꿈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야심한 시각이지만 여자를 재울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식사는 했어? 그전에 먼저 목욕부터 시켜줄까?”

경찰에 신고하는 건 내일로 미뤄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여자가 범인을 알려주며 신고는 필요 없어졌다.

“당신 결혼할 거잖아요! 그러니까 보내줘요!”

필립은 울부짖는 여자를 안아 들다 멈칫했다.

“그건 어디서 알았어?”

“나를 납치한 남자가 그랬어요. 내가 당신의 결혼에 걸림돌이 돼서 치우라고 했대요.”

“누가?”

“그건 말해주지 않았어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듯했다. 범인은 어머니와 밀라, 이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일 것이다.

처리 방법이 전문적이다. 어머니가 예전에 가지고 놀던 남자에게 쓴 방법일지도. 어쩌면 밀라가. 어머니나 밀라나 약에 손을 대느라 질 나쁜 인간들과 연줄이 닿아 있었다. 함께 손을 잡고 벌인 짓일 가능성도 충분했다.

감히 내 것에 손을 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용의자가 용의자인 만큼 경찰 수사로 밝히는 건 어려워졌다. 그의 선에서 증거를 잡아 조용히 처리하는 편이 나았다. 그 둘의 약점이야 수없이 쥐고 있으니 응징은 어렵지 않았다.

“무서워요. 집에 보내주세요.”

생각에 잠긴 필립에게 여자가 거듭 애원했다.

“무슨 소리야. 여기가 네 집이야.”

여자는 전혀 듣지 않고 막무가내로 떼를 썼다.

“나 차라리 자수하고 감옥에 갈게요. 그럼 당신 결혼에 걸림돌 안 되는 거 맞죠? 네? 그럼 더는 나를 안 건드릴 거잖아요.”

경찰이 무섭다는 여자가 자수라니. 농담처럼 듣고 넘기던 때였다. 여자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그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필립은 긴급 전화 버튼을 누르는 여자의 손목을 다급히 낚아챘다.

“네 모친은 몇 달 전에 사망했어. 수사는 그대로 종결됐고. 뭘 자수하겠다는 거야?”

단번에 이해가 되지 않는지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여자가 되물었다.

“엄마가…… 죽었어요?”

슬퍼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야 제 모친이 짐스럽기만 했을 테니. 그렇다고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럼 나 이제 출국할 수 있어요? 한국에 갈래요. 나 다신 여기 안 올 거예요.”

그럼 살 수 있어. 여자는 혼자 미치광이처럼 중얼대며 그를 밀어내고 품에서 벗어났다.

“돈은.”

“한국에 아파트 있어요. 그거면 돼요. 그리고 나 이제 발레 안 할 거예요.”

필립은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어머니가 죽고 수사가 종결됐다는 말을 한 건 제 손으로 여자의 목줄을 끊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출국할 수 있다는 걸 여자가 알아버렸다. 제 발로 자수하겠다는 여자에게 경찰에게 넘긴다는 협박은 통하지 않는다. 빚이 사라졌으니 여자는 그의 돈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고, 발레를 관둘 테니 그의 후원이나 입김도 아무 소용 없었다.

여자를 붙잡아둘 수단이 모두 동나버렸다. 필립은 절박한 마음에 여태 하찮게만 여겨 짓밟아 버려두었던 걸 주워들었다.

“……나를 사랑한다며?”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요.”

폭탄이 눈앞에서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귀에 이명이 울렸다. 폭언의 포화는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고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나 이제 당신 사랑하지 않아요. 사랑했던 것도 후회해요. 당신보다 내가 더 소중해요.”

원하지도 않았던 게 사라졌다니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어야 한다. 그래, 그런 기분이었다. 앓았던 자리가 허전했다. 구멍이 뻥 뚫려 찬바람이 살을 에는 것처럼.

네가 뭔데 감히 내게…….

그런 와중에 사랑했던 건 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일말의 위안을 찾는 자신이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네가 뭔데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건 더더욱 비참했다.

그를 만신창이로 만든 여자가 몸을 일으키더니 더욱 잔인한 소리를 했다.

“난 내 여권이랑 물건을 찾으러 온 것뿐이에요. 그래도 마지막 인사는 하려고 기다렸던 건데 인사했으니까 내일 해 뜨면 바로 출국할 거예요.”

“아니, 넌 아무 데도 못 가.”

문으로 걸어가는 여자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 자리에 철컥, 족쇄가 채워졌다. 경악에 찬 눈으로 저를 돌아보는 여자의 앞에서 필립은 잘 보란 듯이 족쇄의 반대쪽을 채웠다. 그의 발목에.

“넌 이제 내게서 못 벗어나.”

“프라우 위르겐마이어의 딜러는 쿠르드계라 동유럽 마피아들과는 전혀 친분이 없었습니다. 베를린에서 자주 출입하는 클럽은 레드 마피아가 운영하는 곳인데 그쪽이 폴란드에도 업소를 광범위하게 두고 있어서…….”

필립은 탐정의 보고를 경청했다. 결론이랄 건 없는 밀라의 뒷조사 결과를 전한 탐정은 다음 대상으로 넘어갔다.

“모친께 주로 약을 공급하는 딜러는 폴란드계 갱단과 연관이 있는 게 맞습니다만 여자분을 납치한 인신매매범들과 연관이 있는지는 정보가 부족해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은연중에 들었던 이름이라거나 장소 이름의 일부라도 좋으니 기억하게 되면 꼭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죠.”

모친 쪽도 결론이랄 건 딱히 없었다. 양쪽 다 의심은 가나 어느 쪽도 확신은 가지 않는다. 처리해야 할 사람이 있다는 식으로 밀라와 모친을 떠봤지만 철저히 시치미를 떼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소득은 전혀 없었다.

탐정이 보고를 마치고 떠나자 필립은 펜트하우스 현관문의 잠금 장치를 하나씩 걸어 잠갔다. 원래는 이중이었던 장치는 다섯 개가 되어 있었다.

게스트 스위트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마찬가지라는 건 부정확한 표현이다. 여긴 밖의 침입이 아니라 안에서의 탈출을 막는 게 목적이니.

게스트 스위트의 문을 열자마자 필립은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나갈 땐 어둑했던 거실이 환했다.

“커튼 열지 말라고 했잖아.”

여자가 돌아온 건 비밀이어야 하니까.

게스트 스위트의 거실 창은 건너편의 펜트하우스와 마주 보는 구조였다. 잉그리드, 그 여자가 수상한 점을 눈치챘다면 분명 여길 들여다보려 할 것이다.

필립은 여자를 지나쳐 두꺼운 커튼을 치고서야 커다란 화분을 두 손으로 높이 들고 서 있는 여자의 괴상한 꼴을 본 척했다.

“유리는 커튼을 쳐도 깰 수 있어. 그럼 파편이 네게 튀지 않을 테니 다칠 일도 없지.”

필립은 뒤로 물러나 벽에 기대어 섰다. 그런 그를 여자가 얼빠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말릴 줄 알았어?”

“…….”

“내가 왜? 네가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했잖아.”

“여기서 나가는 것만 빼고.”

“잘 아네.”

필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깨봐. 어서.”

여자가 이를 악무는지 자그마한 턱이 어렴풋하게 도드라졌다. 저 조그만 게 오기를 부리는 모습은 항상 참을 수 없이 깜찍했다. 흐뭇하게 웃었더니 무거운지 그새 아래로 처진 화분을 고쳐 안고 창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잠자코 지켜보던 필립은 여자가 창문 앞에서 화분을 높이 드는 찰나에 물었다.

“40층에서 내려갈 방법은 생각해뒀고?”

“뛰어내릴 거예요.”

하.

오기인지 치기인지 광기인지 모를 대답에 웃음이 나왔다.

“죽으면?”

“살겠다고 한 적 없어요.”

하.

이번엔 한숨이었다. 필립은 여자에게 순식간에 다가가 화분을 빼앗았다.

“살든 죽든 여기서 나가는 건 안 돼.”

사실 납치는 여자의 거짓말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도망쳤다가 돈이 궁해 돌아오려니 면목이 없어서 만들어낸 핑계라고.

그러나 여자가 지난 열흘 동안 해댄 짓 덕분에 일말의 의심마저 사라졌다. 그가 자리를 비운 잠깐 사이에 여자는 온갖 시도를 다 했던 모양이었다. 문의 잠금 장치는 날카로운 것으로 긁혀 있었다. 그런 거야 망가져도 새걸로 바꾸면 그만이지만 여자는 아무것과도 바꿀 수 없었다.

“이걸 뒀다간 피부에 상처 나.”

필립은 잠금 장치를 뜯어내려 애쓰다 망가진 듯한 손톱을 버퍼로 곱게 다듬으며 여자를 곱게 타일렀다.

“쓸데없이 힘만 빼는 짓은 그만하면 안 될까? 난 널 지켜주려는 거잖아.”

“필립.”

제 딴에는 무게를 잔뜩 잡고 그를 부른다. 픽, 웃음이 나왔다.

“주인님이라고 불러야지.”

“우리 거래는 끝났어요.”

느슨하던 필립의 얼굴이 돌연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 멈췄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손톱 끝을 가는 손놀림이 확연히 위협적이었다.

“아, 아파요.”

여자가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고 손을 비틀었지만 필립은 놓아주지 않았다.

“네겐 이게 거래야? 난 아니거든.”

“나 이제 필요 없잖아요. 나도 당신 필요 없어!”

난 네가 필요한데, 넌 필요 없단다.

“당신은 결혼할 거잖아요. 난 당신 결혼 때문에 동유럽에 성노예로 팔려 가게 생겼단 말이에요! 나도 내 인생 살게 제발 놔줘요!”

여자는 오늘도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했다. 필립도 다를 바는 없었다.

“범죄자를 숨겨주겠다고 내가 무슨 짓까지 했는지 벌써 잊었어? 다 끝나자마자 잊으면 안 되지. 난 네가 이렇게 이기적이고 고마워할 줄 모르는 여자인지 몰랐어. 실망이야.”

“내 몸으로 다 갚았잖아요.”

“그건 병원비였지.”

“그럼 한국에 있는 아파트를 팔아서라도 갚으면 되잖아요.”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아? 네 그런 태도가 실망스럽다는 거야.”

필립은 여자를 제게 옭아맬 수단이 모조리 사라졌다는 걸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바닥난 걸 뻔히 알면서 바닥을 긁어 바스러진 먼지라도 손에 쥐고 휘두르려는 제 꼴이 우스운데 관둘 수가 없다.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틀어 여자의 손을 씻겨주었다. 버퍼도 씻어 카운터에 놓아두고 욕실에서 나왔더니 여자는 드레스 룸 바닥에 주저앉아 어느 서랍 안을 뒤지고 있었다. 섹스 토이가 담긴 칸이었다.

그와 질펀하게 뒹굴며 놀 기분은 전혀 아닐 것이다. 무슨 꿍꿍이인지 궁금해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더니 가지런히 정리된 물건을 뒤적이던 여자가 뭔가를 집어 잘 보라는 듯이 들어 올렸다. 검은 가죽 입마개. 막대나 공 대신 긴 딜도가 재갈로 달린 물건이었다.

“이걸로 질식해서 죽으면 경찰이 비웃겠죠?”

섹스 토이로 자살해 그의 사회적 명성에 치명적인 흠집을 남길 거란 협박이었다. 협박이라니. 깜찍하기도 하지. 내가 이래서 널 버리질 못해.

“해봐.”

필립은 여자가 그에게 내민 재갈을 밀었다. 여자의 굳게 다물린 입술을 향해.

“네가 죽으면 내가 놓아줄 것 같아?”

“…….”

“넌 공식적으론 실종자고 비공식적으로는 사망자야. 넌 애초에 없는 사람이란 소리지. 그러니까 네가 여기서 자살해봤자 아무도 널 찾지 않을 테고, 난 아무런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 널 여기 평생 가둬둘 수 있어.”

필립은 몸을 숙여 덜덜 떨기 시작하는 여자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짝 가져다대고 속삭였다.

“내가 말했잖아. 넌 이제 죽어서도 내게서 못 벗어나.”

입마개를 빼앗아 방 저편으로 던졌다. 겁에 새파랗게 질려 일어서지도 못하고 엉덩이 걸음으로 제게서 도망치는 여자의 발목을 한 손으로 틀어쥐고 다른 손으로는 서랍 안을 뒤졌다.

“이번엔 뭘 쓸까.”

단번에 으스러트릴 수 있을 만큼 작은 몸을 헐벗고 떨면서 도망치려 하는데 가둬두고 박고 싶어지는 건 당연한 반응이다. 필립은 가죽 끈과 사슬 따위를 닥치는 대로 움켜쥐며 발목을 빼려 안간힘을 쓰는 여자를 훅, 당겼다. 가벼운 몸이 주르르 딸려와 그의 발밑에 널브러지자 단숨에 번쩍 들어 어깨에 걸쳤다.

“싫어! 이거 놔!”

발버둥 치는 몸뚱이를 침대 한가운데에 던졌다. 여자는 어지럽다며 침대에 널브러져 사지를 하느작대면서 신음했다. 흘러내리고 말려 올라가 제 기능을 못 하는 슬립의 위아래에서는 그의 흔적이 울긋불긋한 뽀얀 가슴이 들썩이고 희고 가느다란 다리가 바르작거렸다.

찰그락.

손에 쥐고 있던 걸 침대 귀퉁이에 떨어트렸다.

어디부터 어떻게 묶을까.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이 여자는 정신을 차렸다. 그러곤 열흘 내내 했던 소리만 똑같이 하며 저항하기 시작했다.

“제발 놔줘요!”

“얌전히 있어.”

“결혼한다면서요. 성욕은 그 여자한테나 풀면 되잖아!”

“내 강아지, 질투하는 거야?”

“웃기지 마! 당신 줘도 안 가져.”

여자의 거부에 필립은 마음도, 몸도 모두 성이 날 대로 났다. 예전처럼 마음이든, 몸이든 달라고 무릎 꿇고 다시 애원할 때까지 여자를 놓아줄 일은 없었다.

자꾸만 도망치려는 여자와 몸싸움을 해댄 끝에 주름 하나 없던 침대 시트는 금세 엉망으로 구겨지고 슬립은 찢겨 넝마가 되었다. 어깨끈 하나만 팔에 아슬아슬 걸쳐진 걸 뜯어서 바닥으로 버렸다.

“싫어! 하지 마.”

알몸에 닥치는 대로 키스를 퍼부었더니 여자가 몸을 비틀다 못해 그의 얼굴에 발길질까지 해댔다. 단숨에 두 발목을 낚아채 가죽 끈으로 한데 묶자 저항이 반으로 줄었지만 완전히 멎지는 않았다.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는 여자를 붙들고 가죽 하네스를 하나씩 입히는 건 까다롭지만 그래서 더 즐거운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손을 등 뒤로 돌려 허벅지를 감은 가죽 끈에 묶었다.

그렇게 사지를 결박해두고 멀찍이 떨어져 제 걸작품을 감상했다. 여자가 끈을 풀겠다고 덧없는 몸부림을 치면서 흰 대리석 조각처럼 뽀얀 온몸의 곡선이 살아 부드럽게 물결쳤다.

“네 몸은 예술이야.”

그의 다리 사이는 외설이지만.

좌우로 흔들리는 우윳빛 살덩이 두 쪽을 한꺼번에 우악스럽게 쥐고 손가락 사이로 볼록 밀려 나온 유두를 한입에 삼켰다. 민감한 돌기를 입으로 빨고 혀로 치댔더니 여자가 죽을 것처럼 자지러지며 울부짖었다.

죽을 것처럼? 아니, 처음처럼. 처음의 황홀했던 감각이 되살아나자 필립은 끝을 모르고 흥분했다.

여자의 저항도 그날처럼 끝이 없었다. 사지가 묶이고도 온몸을 비틀며 그의 아래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몸싸움을 벌이다 결국 램프가 협탁에서 떨어지며 침대 밑으로 굴러 들어갔다.

유일한 불빛이 사라지자 두꺼운 커튼이 쳐진 침실은 새카만 어둠에 잠겼다. 쫓고 쫓기는 숨소리가 쉴 새 없이 뒤섞이다 짧은 비명을 끝으로 드르륵, 침대 난간에 사슬이 감기는 섬뜩한 소리가 이어졌다.

숨을 헐떡이는 소리만 가득하던 정적을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리는 쇳소리가 깨트렸다. 삐걱삐걱 침대가 흔들리는 소리와 같은 박자로 젖은 살이 부대끼는 소리가 침실에 메아리쳤다. 신음과 가쁜 숨소리, 그리고 여자가 우는 소리가 마구잡이로 뒤엉켰다.

“믿어.”

필립은 제 밑에 깔린 여자의 저항이 잦아들자 귓가에 속삭였다.

“널 지켜줄 사람은 나뿐이야.”

“아니야!”

멎었던 저항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가 원하던 저항이 아니었다.

“난 당신 때문에 팔려 갔어!”

여자가 두려워하길 바라긴 했으나 이런 식을 원한 건 아니었다. 여자는 이제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의 곁을 두려워했다.

“당신은 날 지켜주지 못해.”

“두고 봐.”

네가 오로지 나만을 믿던 때로 되돌릴 거야.

“널 위협하는 건 모조리 없애버리면 되잖아.”

삐걱삐걱, 침대의 비명이 다시 시작되자 흐느낌도 함께 터져 나왔다.

남자는 흐느낌인 줄 알겠지. 실은 억눌린 웃음인 건 꿈에도 모를 것이다.

새카만 어둠 탓에 수아가 줄곧 입꼬리를 활짝 올리고 있었다는 것도, 남자는 모를 것이다.

남자가 모르는 것이 어디 그뿐일까.

남자는 밤에 자다 깨어 수아가 곁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지치는지 요즘은 서로의 발을 묶어두고 잠들었다. 수아는 떠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적어도 지금은.

이건 다 연기일 뿐이다.

최고점이 높지만 위험한 연기, 그리고 최고점은 낮지만 안전한 연기. 수아는 후자를 택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전자를 택했다. 모든 것을 걸고.

그런 만큼 수아는 연기에 제가 가진 모든 지식을 동원했다.

“싫어!”

“하아, 읏!”

남자는 반항할수록 이성을 잃고 흥분한다.

그럼 철저히 반항해주지. 이성을 잃고 당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을 스스로 저지를 때까지. 내가 그랬듯이.

당신 손으로 내 복수를 해. 방해물을 하나씩 치우고 당신이 가진 걸 모조리 내게 바치는 거야. 개처럼 엎드려 내게 사랑한다고 빌어.

이미 목줄이 매인 걸 깨달았을 땐 늦었을 거야. 아니지. 깨달을 틈이 과연 있을까?

“난 당신 생에 다시는 없을 완벽한 브랫일 테니까.”

수아가 울음을 섞어 한 말을 남자는 알아듣지 못했다. 굳이 울음을 섞지 않았어도 남자는 못 알아들었을 것이다. 한국어였으니.

“있잖아, 흑, 그거 알아?”

과시욕은 수아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과시를 꼭 상대방이 알아듣게 하란 법은 없었다.

“나 그날 새벽에 자살한 것처럼 꾸며두고 야나를 찾아갔었어.”

울부짖다 튀어나온 의미 없는 욕설인 줄 알 것이다. 의미가 있어도 남자는 수아가 뭐라든 안중에도 없이 허리만 흔들었다.

“그날 내내 야나의 방에 숨어 있었던 거 몰랐지?”

다섯 달 동안 프랑크푸르트 교외의 아파트에 숨어 지낸 것도. 가끔 그의 앞에 나타나 환영인 척하며 정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간 것도.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도. 그가 제게 더더욱 미쳐가는 걸 이 방의 감시 카메라로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도. 예전의 그 남자가 죽은 게 확실해지자 이 꼭두각시 인형극의 막을 올리러 왔다는 것도.

발목의 결박흔과 발의 물집은 일부러 만들었다는 것, 자작극의 배경으로 폴란드를 택한 건 야나에게서 잉그리드의 마약 딜러가 폴란드계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란 것, 그리고 야나가 아직도 수아를 도와주고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오늘 거실 창문 앞에는 일부러 서 있었다는 것까지.

“당신은 꿈에도 모를 거야.”

***

“결혼식은 무기한 연기하겠습니다.”

펜트하우스에 틀어박혀 있던 필립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폭탄선언을 던졌다. 두 달밖에 남지 않은 결혼을 갑자기 무기한 미루겠다니. 잉그리드는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 여자가 무슨 소리를 했길래 이러니?”

필립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를 추궁하듯이 노려볼 뿐.

잉그리드도 똑같은 눈으로 아들을 쏘아보았다.

“난 네가 너무 틀어박혀 있길래 걱정이 되어서 본 것뿐이야.”

항상 굳게 닫혀 있던 커튼이 걷히자 나타난 게 아들이 아니라 죽은 여자였을 때 얼마나 기겁했던지. 곧이어 들어온 아들과 여자가 창문 앞에서 대치 중인 걸 망원경으로 지켜보며 의문을 품었었다.

죽은 게 아니었어?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 설마 필립이 여자를 치우라는 잔소리에 질려서 자작극을 벌이고 내내 저기 숨겨뒀나? 아니면 여자가?

그런데 결혼을 미룬다니.

자작극을 벌인 쪽은 여자라는 방향으로 추가 기울었다.

“넌 지금 그 여우 같은 것에게 속고 있어.”

“당신은 그럼 그 여우 같은 위르겐마이어에게 무슨 약점을 잡힌 건지.”

필립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도리어 여자를 비난한 잉그리드를 곧바로 공격하기까지 했다.

“그 애가 뭐라고 했니? 맞혀봐? 나나 밀라가 저를 해코지하려 했다고 그랬겠지.”

“자백으로 들리는군요.”

“세상에, 그걸 믿어? 그 애가 네게 무슨 짓을 하긴 제대로 했구나.”

그 여자는 아들의 정신을 이미 단단히 지배하고 있는 듯했다.

“필립, 정신 차리렴.”

그러나 필립은 듣지 않고 일방적인 통보만 던진 후 나가버렸다.

잉그리드는 이마를 감싸 쥐고 신음했다.

“잡아먹으랬더니 잡아먹혔어.”

둘을 붙여놓았을 땐 아들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본 여자가 어떻게 요리조리 빠져나가는지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여자가 계속해서 일방적으로 휘둘리기만 하니 흥미가 떨어지던 차에 판이 서서히 뒤집혀가는 조짐이 보였다.

여자가 아들에게서 빠져나가는 건 재미난 구경거리이지만 아들이 여자에게 진심으로 빠지는 건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위기였다. 치워버릴 방법을 생각해두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 여자에게 돈이나 쥐여주고 한국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죽음을 위장해서 집착의 싹을 잘라버리는 건 좋은 생각이다만 ‘자백’이 필요한 범죄까진 계획에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저 혼자 죽었다던 게 살아 돌아오더니 잉그리드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운다. 그새 아들을 단단히 제 꼭두각시로 만들어두기까지.

필립을 낳아 기른 저도 못 하던 짓이다. 어떻게 한 거지? 보이는 것만큼 멍청하진 않았던 건가.

순한 양인 줄 알았더니 여우 같은 년.

사람을 잘못 봤다.

주제에 명문가의 안주인 자리라도 노리는 듯했다. 저러다 필립이 정말 밀라와 파혼하면…….

밀라의 손해야 그녀의 알 바가 아니다. 잉그리드는 끝장이었다.

그 후로 며칠간, 잉그리드는 길 건너 게스트 스위트를 주시했다. 여자는 몇 번 홀로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저번처럼 자살하려 하진 않았다. 기회가 수두룩한데도.

역시 수상쩍었다.

걸림돌은 스스로 치우는 수밖에 없다.

결론에 다다른 잉그리드는 대책을 고심했다.

저기서 끌어내 한국에 보내버릴까? 그러나 빼돌려봐야 여자가 되돌아오거나 필립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곤 여자의 자작극도 잉그리드의 짓이라고 뒤집어씌울 게 뻔했다.

뒷말 없이 깔끔하게 처리하는 방법이라곤 하나뿐이었다.

죽여야겠어.

테라스에서 떨어트리고 자살로 위장하면 되겠다. 그 여자는 과음으로 쓰러져 의사를 부른 기록이 있으니 정신이 불안정하다는 증거가 있다. 게다가 여자는 이미 자살 의심을 받는 실종자 아닌가. 그러니 경찰은 자살로 믿을 것이다.

가둬둔 여자가 이미 자살 소동을 벌인 전적이 있으니 필립도 속지 않을 리가. 눈앞에 시체가 있으면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란 망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필립이 펜트하우스를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일은 아무도 못 믿으니 홀로 처리해야 하건만 아들을 밖으로 유인하는 데는 남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필립의 차가 건물을 떠나자마자 잉그리드는 미리 불러둔 열쇠 수리공을 데리고 건너편의 펜트하우스로 향했다. 늦봄에 장갑을 끼고 머리를 틀어 올려 모자를 쓴 잉그리드를 열쇠 수리공이 자꾸 흘끔댔다.

“얼른 따기나 해.”

잠금 장치는 다섯 개나 되는 데다 전부 다른 구조였다. 남자가 자꾸만 어눌한 독어로 불평을 해댔다. 웃돈을 더 얹어준다는 말을 두세 번 더 했을 때에야 현관문이 열렸지만 예상대로 그게 다가 아니었다. 게스트 스위트의 잠금 장치까지 풀었을 때에는 웃돈이 원래 출장비의 다섯 배가 되어 있었다.

“잘했어. 가봐.”

거기에 팁까지 두둑하게 얹어주었더니 남자가 깍듯이 인사를 하며 떠났다. 열쇠 수리공은 터키인 불법 체류자였다. 여기서 오늘 여자가 죽었다는 뉴스를 봐도 신고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여기엔 둘만이 남았다. 그런데 나머지 하나는 어딨을까.

분명 열쇠를 따는 소리를 다 들었을 텐데 여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니 곧바로 주방으로 가 식칼을 빼 들었다. 그러나 거실에도, 침실에도 여자는 없었다. 드레스 룸과 욕실도 비어 있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자 막막해졌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설마 데리고 나간 건 아니겠지? 미치지 않고서야.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 다음 계획을 고심하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였다.

삐걱. 잘그락.

침대 밑에서 짤막하게 울린 건 분명 사슬 소리였다.

침대 밑을 가만히 들여다본 잉그리드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여기 있었어?”

여자가 사슬을 끌어안은 채 엎드려 떨며 잉그리드를 노려보았다.

“잠깐. 웃을 일이 아니지.”

여자의 발목에 매인 사슬의 반대편 끝은 벽에 나사로 단단히 부착되어 있었다. 가서 당겨봤지만 여자의 힘으로 그걸 잡아 뜯는 건 무리였다.

그럼 풀어야 하는데, 여자의 손이 닿지 않는 범위 내의 서랍과 가구를 다 뒤져봐도 열쇠는 나오지 않았다.

열쇠공을 부를까?

그러나 그자는 이미 쌩하니 가버린 후였다. 핸드폰 같은 건 당연히 가져오지 않았다.

잉그리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상태론 못 떨어트리겠네.”

번지 점프도 아니고. 고작해야 뼈만 좀 부러지려나. 공중에 매달려 있다가 사람들이 발견하고 구급차를 부를 테고 여자는 살 것이다.

이럴 때를 대비해 생각해둔 게 있지.

잉그리드는 손에 든 식칼을 바라보다 칼날만큼이나 서슬 퍼렇게 웃었다.

필립은 결혼을 무기한 연기한 일로 밀라와 그 부친에게 호출을 당했다.

“전화로 될 일이 아니란 건 자네도 알지 않나.”

맞는 말이다. 제가 미친놈인 건 맞지만 인간 구실은 해야 했다. 대신 장소는 필립이 정했다. 펜트하우스와 가까운 호텔 카페로. 언제든지 일어나 돌아갈 수 있도록.

“그럼 말해보게. 초대장도 다 돌리고 준비가 거의 다 끝난 결혼식을 갑자기 기약 없이 미뤄야겠다는 이유가…….”

필립은 상대의 말을 듣다 무심결에 또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죽으면 시체라도 끼고 살겠다는 말을 한 후로 여자는 자살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자살은 포기했어도 도망은 포기 못 했을 테니 족쇄를 채워두고 왔다. 잠시 나갔다 올 테니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오늘은 밖에 데리고 나와준다는 약속에 여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러니 걱정할 건 없는데 불안해서 핸드폰을 잠시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볼까?

감시 카메라 앱을 또 열려는데 목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밀라의 부친은 입을 굳게 다물고 불도그 같은 표정으로 필립을 노려보고 있었다. 차라리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는 편이 나았다.

“밀라가 중대한 계약 위반을 저질렀다는 제보가…….”

핸드폰을 치우려던 찰나였다. 꺼두었던 화면이 켜지더니 메시지가 나타났다.

[야나 하트만: 지금 당장 펜트하우스로 오셔야 합니다. 프라우 정이…….]

핸드폰을 열고 잘린 메시지를 확인해본 필립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야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주 앉은 밀라와 그 부친이 인상을 쓰는 건 안중에도 없었다.

“무슨 일이죠?”

- 어머님께서 펜트하우스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가셨어요. 프라우 정에게 뭔가를 하려는 것 같은데 문이 닫혀 있어서 저는 못 들어가고 있어요. 빨리…….

“알겠습니다.”

야나가 와달라는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필립은 전화를 끊었다.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데 그를 따라온 밀라가 성가시게 매달렸다.

“너 뭐 하는 거야? 우리가 우스워?”

“내 것에 손대지 말랬지.”

이건 경고가 아닌 선고다.

왜 만나자고 졸라댔는지 알겠다. 밀라는 어머니와 한통속이었다. 그 여자를 제거하는 건 어머니의 몫, 필립을 펜트하우스 밖으로 유인해내는 건 밀라의 몫이었던 것이다.

넌 이제 끝장이야.

필립은 밀라를 거칠게 뿌리치며 선고를 내렸다.

“파혼해.”

여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파혼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콸콸 쏟아지는 물소리가 끊어지는 찰나에 수아의 심장 박동도 잠시 멎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침실로 돌아온 잉그리드의 손에서는 식칼이 여전히 위협적으로 번쩍였다.

“나와.”

칼로 협박해도 침대 밑에서 나오질 않으니 잉그리드는 사슬을 당기기 시작했다. 순순히 끌려 나갈 리가. 수아도 사슬 반대쪽을 잡고 버티길 얼마나 했을까, 당기는 힘이 갑자기 사라지더니 사슬이 바닥으로 주르르 떨어졌다.

“그럼 불을 질러볼까?”

여기서 불이 나면 꼼짝없이 갇혀 죽을 것이다. 알면서도 버텼지만 잉그리드는 정말 라이터를 가져와 침대에 불을 지를 것처럼 굴었다.

눈앞의 여자는 미치광이였다. 한때 너그럽고 인자한 후원자라고 믿었던 때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웅크리고 있는 수아에게 라이터를 뻗어 몸을 지지려 하기까지 하자 결국 버티지 못하고 순순히 침대 밖으로 기어 나왔다.

당장 나를 찔러 죽이진 않을 거야.

잉그리드가 뭘 하려는 건지는 수아도 알았다. 이젠 손에 수갑까지 찬 채 칼끝에 몰려 뜨거운 김이 가득한 욕실로 들어갔더니 예상대로 욕조에 물이 반쯤 차 있었다. 그렇게 뻔히 알면서도 떨리는 목구멍에서 소리를 쥐어짜내 물었다.

“나를 욕조에 넣고 그 칼로 손목을 그어서 자살로 위장하려는 거예요?”

“잘 아는구나.”

“저항한 흔적이 제 몸에 남을 텐데 그건 어쩌려고요?”

“시간 없으니 입 닥치고 들어가기나 하렴.”

“약이라도 먹여야 하지 않아요?”

“네가 약을 먹고 죽으면 내 짓인 걸 아들에게 들키거든.”

“그러지 말고 이 족쇄 풀어주시면 한국으로 도망가서 다신 안 나타날게요.”

“웃기지 마. 수작 부려서 시간 끄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잘 아시네요.

언제 와?

수아는 욕조 앞에서 발목의 사슬을 걷어 올려 안는 척하며 카메라가 있을지도 모르는 쪽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감시 카메라로 목격하든가, 야나가 눈치채고 연락해주든가. 아무튼 남자가 이 꼴을 보고 달려오기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수아는 이런 날이 올 줄 이미 알고 있었다. 거실 창 앞에서 미끼처럼 계속 알짱대며 잉그리드를 자극한 건 수아였으니.

잉그리드가 수아를 죽이려다 잡히면 자연스레 ‘납치’의 범인이 될 테고, 그럼 남자가 알아서 이 여자를 처리해줄 것이다. 제 엄마에게 그랬듯 남의 엄마에게도 수아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복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남자 너무 늦다.

그녀의 속을 읽은 잉그리드가 코웃음을 치며 수아의 등을 욕조로 떠밀었다.

“미안하지만 네가 기다리는 남자는 오지 않는단다. 밀라와 함께 있거든.”

질투라도 하라고 밀라를 입에 올렸나 본데 남자에게 밀라는 여자가 아니라 경쟁자나 다름없다는 걸 잘 아는 수아에겐 그저 우스웠다.

“그런데 여기 감시 카메라 있는 거 모르시나요? 마이크도 있는데.”

마이크가 있으니까 녹음되지 않게 이 말은 일부러 욕조에 발을 첨벙 담그며 이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혹시나 해서 던져본 말인데 잉그리드는 전혀 몰랐는지 곧바로 사색이 되었다.

“제가 왜 당신이 나를 죽이려 한단 말을 크게 했을까요? 그 남자 핸드폰에 이 장면이 다 저장되고 있을 테니까요. 어쩌면 보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제야 수아가 간절히 바라보던 쪽을 잉그리드가 돌아보았다. 수아는 제게서 시선이 떨어진 틈을 놓치지 않고 손에 쥐고 있던 사슬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아악!”

쨍그랑.

사슬에 후려쳐진 잉그리드의 손에서 식칼이 떨어졌다. 잉그리드가 손을 감싸 쥐고 신음하는 사이 달려가 식칼을 집으려던 수아는 머리채를 붙잡혔다.

“이거 놔!”

“이 여우 같은 것이 어디서 수작을 부려?”

끌려가며 발길질을 해 식칼을 겨우 차서 세면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머리를 욕조에 담그려는 여자와 몸싸움을 벌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수아는 욕실 바닥에 엎드린 잉그리드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남자는 아직도 오지 않는다. 이 여자를 제압하고 목숨을 건질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눈이 돌아갔다.

“그거 알아? 나 목 많이 졸려봤어. 그래서 어떻게 졸라야 하는지도 잘 알아.”

바닥에 늘어져 있던 사슬을 집어 잉그리드의 목에 감고 양손으로 조였다.

“끅…….”

버둥대던 몸뚱이가 잠잠해지다 못해 무겁게 축 늘어지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헉…….”

손을 떼고 물러났다. 목에 감긴 사슬이 저절로 풀려나가고도 잉그리드는 움직이지 않았다. 영화에서 많이 봤다. 확인 사살을 하지 않으면 저렇게 죽은 척을 하고 있다가 방심할 때 벌떡 일어나 덮친다. 수아는 구석으로 기어가 세면대 밑의 식칼을 주워들었다.

그렇다고 찌를 생각은 없었다. 방어용일 뿐. 수아는 욕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덜덜 떨며 새하얗게 변해버린 머릿속을 정신없이 뒤적였다.

어떡하지? 나 어떡하면 좋아.

남자가 처리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제가 처리해버렸다. 목숨을 지키고 나자 일신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내 계획이 어그러지면 안 되는데.

욕조 앞에 늘어진 몸뚱이를 눈이 빠질 것처럼 아프도록 주시하던 수아는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칼을 손에 쥔 채 조심스레 다가갔다. 코앞에 웅크려 앉아도 잉그리드는 반응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틈을 보일 때를 기다리는 건지 몰라.

잉그리드가 눈을 번쩍 뜨고 제게 손을 뻗는 상상을 하며 수아는 손에 든 칼을 고쳐 쥐었다. 그러곤 다른 손을 쇠사슬 자국이 나타나기 시작한 목덜미에 가져다대었다.

느껴진다. 맥박이었다.

아직 살아 있어.

혹시나 하는 기대가 맞아떨어졌다. 안도하는 한편으로는 정말 잉그리드가 깨어나 저를 덮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들어 후다닥 물러나려는 때였다.

밖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묵직한 구둣발 소리가 이쪽으로 곧장 다가오기 시작했다. 남자의 발소리였다.

어쩌지? 어쩌지?

금세 시끄러워진 머릿속에서 좋은 아이디어 하나가 번쩍 떠올랐다.

처리는 여전히 남자의 몫이다.

칼을 욕조에 풍덩 빠트리는 찰나 남자가 욕실로 들어왔다. 수아는 눈앞의 광경에 잠시 허를 찔린 남자에게로 달려가 와락 안겼다. 남자는 제 모친이 바닥에 죽은 듯이 엎어져 있는 걸 뻔히 보면서도 벌벌 떠는 수아를 품에 안아 어루만지며 그녀가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말을 안도의 한숨과 함께 속삭였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속삭이지 않았다.

“네가 죽인 거야?”

힐끔 올려다보았더니 남자의 입꼬리가 어렴풋이 올라가 있었다. 다시 목줄을 채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나 착각일 것이다. 수아는 미친 여자처럼 매달리며 울부짖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얼른 구급차 불러서 살려요! 살려서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해요!”

“죗값? 무슨 죗값.”

“내가 엄마를 죽이려 한 게 아니었어요. 당신 어머니가 죽이려 했대요. 그리고 나도 죽이려 했어요.”

남자의 입꼬리가 일자로 굳었다. 그는 그렇게 오래도록 입을 다물고 있다가 물었다.

“그런 말을…… 어머니가 했어?”

수아는 고개를 재깍 끄덕이곤 그가 곤란해질 만한 질문을 도리어 퍼부었다.

“잉그리드가 저희 엄마는 왜 죽이려 한 거예요?”

“…….”

“설마 당신도 알고 있었던 건 아니죠?”

“그럴 리가.”

필립은 고개를 저으며 한 손으로 하관을 감쌌다. 충격받은 척이었으나 사실 연기는 필요 없었다.

저 인간이 과시욕에 찌든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로 멍청할 줄이야.

“내가 그 일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당신 어머니라도 난 절대 용서 못 해요.”

여자가 두 주먹을 쥐며 이를 악물었다.

“구급차 불러줘요. 살려야 해요!”

글쎄? 내가 왜.

어머니는 죽는 편이 나았다.

어머니가 살아서 수사를 받게 되면 필립도 무사하지 못했다. 대체 뭔지는 몰라도 위르겐마이어에게 약점을 잡혀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인간은 집안에 없는 편이 그에게 유리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 여자를 버리라고 종용하던 것도 모자라 죽이려 하기까지.

살아서 필립에게 도움 될 게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을 여자가 죽여준 건 그에겐 여러모로 행운이었다.

덕분에 네게 다시 목줄을 채울 수 있게 되었으니.

살인자.

넌 이제 평생 내게 잡혀 살아야 해.

으스러지게 끌어안았으나 여자는 몸을 비틀어 그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그러곤 바닥에 엎어진 시체로 달려가 목덜미를 절박하게 더듬어대기 시작했다. 필립은 다가가 여자의 어깨를 쥐며 만류했다.

“수아,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어.”

“아직 살아 있어요.”

“…….”

죽어야만 했다.

중년의 여자는 알몸에 실크 가운 한 장만 입은 꼴이었지만 방을 오가는 경찰들 앞에서 몸을 가리지 않았다. 두 손이 뒤로 결박된 채 무릎을 꿇고 있는 탓인 것 같아 보이지만 두 손이 자유로웠어도 손을 쓰진 못했으리라.

지이잉.

적막한 가운데 불편한 소리가 계속 이어지자 방 안을 확인하던 경찰들이 돌아가며 헛기침을 했다. 현장 감식 요원이 여자의 허벅지 사이에 낀 바이브레이터를 발견하고 전원 버튼을 누르고서야 적나라한 진동음이 멎었다.

목에 감긴 사슬을 확인하던 요원이 여자의 얼굴에서 입마개를 조심스레 빼냈다. 입에서 딜도가 나오는 순간, 여자의 아들이 못 봐주겠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고인의 명예를 위해 조용히 마무리해주셨으면 합니다.”

그의 증언을 받던 경찰은 남자의 부탁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사망자가 유명 기업 소유주의 가족인 데다 본인도 유명 인사이니 사인이 자기색정질식사라는 게 공개되면 사람들이 득달같이 달려들 것이다. 회사 이미지에도 타격이 클뿐더러 유족은 또 얼마나 괴롭겠나.

경찰의 눈에는 사고사가 확실해 보였다. 비서의 증언이 아니었더라도 온갖 기구와 장비가 가득한 섹스 룸을 두고 있는 것만 봐도 고인의 성적 취향이 유별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경찰이 모르는 건 필립도 못지않게 유별난 취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창 관음에 빠져 살던 시절에 자기 자신을 제 손으로 결박하고 질식시켜 성적 쾌감을 얻는 이들을 수없이 지켜보았다. 그 말인즉, 스스로 결박하면 밧줄 매듭과 사슬이 어떤 모양이 되는지 법의학자들이나 수사관들만큼이나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눈앞의 장면은 그가 사고로 연출한 살인이라는 걸 들키지 않을 것이다.

“사실 정신을 잃으신 걸 제가 발견하고 구해드린 적이 몇 번 있었어요.”

야나는 거짓 증언을 하며 잉그리드를 흘끔 훔쳐보았다. 필립은 분명 비밀로 할 테니 수아에게 말해주는 건 제 몫일 듯했다. 인간을 우습게 보던 사람이 어떻게 우습기 짝이 없는 최후를 맞이했는지를.

***

“잉그리드는 어떻게 됐어요?”

필립은 입술 사이에 물고 있던 여자의 음순을 뱉어내며 대답했다.

“죽었어.”

“설마 당신이…….”

“그럴 리가.”

여자의 음부에 박혀 있던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했다.

“혼수상태로 병원에 있다가 사흘 후에 사망했어.”

거짓말이면 내 마음의 창을 이렇게 활짝 열고 할 수 있겠어? 그래, 할 수 있더라고.

“납치는 어머니가 한 짓이었어. 그러니 이제 넌 안전해.”

“그런데 왜 아직도 가둬둬요?”

납치는 어머니 짓이란 거짓말, 여자가 더는 떠난단 소리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입막음이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가둬두냐는 엉뚱한, 그렇지만 일리 있는 반박이 돌아왔다.

그 이유가 뭘 것 같은데?

“아흣…….”

입을 벌리곤 말 대신 여자의 음핵을 빠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근래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다.

“으응, 그만…….”

여자가 다리 사이에 박힌 그의 머리를 밀어내려 안간힘을 쓰며 헛소리를 지껄였다.

“이제 그만 나를 놔줘요.”

“너를 해치려던 그 마녀는 죽었다고 했잖아.”

“누가 날 해칠까 봐 무서운 게 아니에요. 난 이제 당신이 싫어요.”

필립의 입술이 뚝 멎었다.

그는 물고 있던 걸 뱉고 고개를 들며 셔츠 소매로 젖은 입가를 훔쳤다.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누운 여자의 좌우로 손을 짚고 위로 올라타 말없이 내려다보았더니 여자가 안절부절못하며 눈을 피했다.

“다시 말해봐.”

“다, 당신은 날 못 지켜.”

바들바들 떨면서도 할 말은 다 한다. 귀엽다고 가만히 뒀더니 여자의 투정은 도를 몰랐다.

“나를 지켜준다고 약속했잖아요. 그런데 당신 어머니가 이 안전한 당신 집까지 들어와서 나를 죽이려 했잖아! 당신이 나를 구하길 했어, 뭘 했어!”

여자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나 필립은 눈을 질끈 감고 지끈거리는 미간을 쥔 채로 잠자코 버틸 뿐,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틀린 말은 없었으니.

“미안해. 그래서 이젠 한시도 안 떠나잖아.”

잘못을 빌었으나 여자는 그를 용서해주지 않았다.

“난 이제 당신 못 믿어. 사랑하지도 않고. 필요도 없어.”

어쩌다 개와 주인이 바뀌었을까.

겨우 생겼다 싶었던 목줄을 다시 제 손으로 끊어야 했다. 패배감과 별개로 석연치 않은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내가 엄마를 죽이려 한 게 아니었어요. 당신 어머니가 죽이려 했대요.” 

욕실 마이크에는 그런 대화가 잡히지 않았다. 어쩌면 마이크가 없는 방에서 했을지도.

또 어쩌면, 어머니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을지도.

필립은 말간 얼굴을 응시했다.

어리고 어리석기만 한 여자의 모든 말과 행동이 실은 능수능란한 연기라면? 전말을 알고 그를 파멸로 몰아가기 위해 하는 연기라면?

진실을 밝혀줄 사람이 있었으나 그가 죽여버렸다. 진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살아 있기는 하나…….

“수아, 내 어머니가 정말 네 어머니를 죽이려 했다는 말을 했어?”

여자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가.”

“나를 엄마처럼 높은 데서 떨어트리려 했는데 족쇄가 묶여 있어서 못 한다고 불평했었어요.”

넌들 빤히 눈 마주하고 거짓말을 못 할까.

필립은 여자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다 픽, 웃었다.

진실을 밝힌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이젠 아무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어.”

여자를 쥐고 흔들던 모친도, 그를 쥐고 흔들려던 그의 모친도 이젠 없다. 그리고 그의 것을 호시탐탐 노리던 밀라도 치워버렸다.

그의 파혼 선언에 밀라 쪽에서 드디어 모친의 약점이 뭔지를 드러냈다. 십여 년 전에 섹스 파트너를 실수로 죽이곤 약물 과다 복용으로 처리한 적이 있었나 보다. 하필이면 그 자리에 함께 있다가 증거를 확보해둔 사람이 밀라의 모친이었다.

“터트리시죠.” 

파혼을 재고해주면 비밀을 무덤까지 안고 가겠다고 협박하는 밀라의 부친은 필립의 태도에 곤혹스러워했다.

“이미 죽은 모친의 치부를 한번 터트려보시죠. 그럼 저는 아직 살아 있는 당신 딸의 동영상을 퍼트릴 테니.” 

그의 드라이브에는 밀라가 코카인을 흡입하는 장면이 찍힌 섹스 동영상이 수두룩했다. 밀라는 멍청하게도 제 약점을 손수 그에게 보냈었다. 과시욕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그렇게 파혼은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필립은 제게서 벗어나려는 여자를 끌어안고 다독이며 자유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물었다.

“난 이제 결혼 안 해. 좋지 않아?”

“아뇨. 당신이 뭘 하든 이제 나랑은 관계없어요.”

“그럼 관계있는 사이가 되길 바라? 다 끝났다는데 아직도 반항하는 이유가 뭐야. 아, 알 것 같아. 나와 결혼하고 싶지?”

여자가 이를 악물며 사탕이라도 문 듯이 볼록 튀어나온 턱이 바들바들 떨렸다. 귀엽게도.

“그래서 결혼하자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올 때까지 앙탈을 부려대는 건가?”

“아뇨. 결혼은 나랑 급이 맞는 남자와 할 거예요.”

“하.”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딴 소리를 해.

언젠가 여자가 결혼을 바라기 시작하면 그가 하려던 말을 여자가 먼저 했다. 선수를 빼앗기고 허를 찔리기까지.

“그래, 네가 급이 낮은 걸 알아서 다행이야.”

뒤늦게 빼앗긴 주인으로서의 권위를 되찾으려 해봐야 비참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보내주세요.”

“이런, 어쩌지? 네가 관계없다니까 난 너랑 관계있는 사이가 무척이나 되고 싶거든.”

오늘 밤은 느긋하게 즐기겠다는 마음이 사라졌다. 그와 아무 사이도 되고 싶지 않으니 놔달라는 여자의 다리를 벌리고 분노에 찬 허리 짓을 시작했다.

“아, 아읏, 아파, 아파요.”

“너 기분 좋으라고 하는 짓 같아?”

필립은 여자의 턱 아래를 한 손으로 감아쥐고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그에게서 돌리지 못하게 짓누른 채로 다리 사이를 퍽퍽 소리가 울리도록 치받았다.

“네가 나를 버리면 안 되지.”

“흡…….”

“네가 감옥에 갈 뻔한 걸 내가 구해줬잖아. 목 졸라 죽일 뻔한 건 징역 몇 년인지 알아?”

“그건…….”

“정당방위? 웃기지 마.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

“그럼 이건 몇 번 자주면 되는데요?”

순수하게 잔인한 질문에 허리 짓을 한 박자 놓쳤다. 정작 성기를 쑤셔 박아 틀어막아야 하는 건 이 아랫입이 아니라 윗입일지도 몰랐다.

“창녀처럼 굴지 마.”

“나 당신한텐 창녀잖아요.”

“아니, 넌 이제부턴 내 아이를 밴 여자야.”

여자가 삽시간에 사색이 되는 걸 보자 이게 정답이란 확신이 들었다.

“나, 그리고 내 아이를 배서 어쩔 줄 모르는 여자. 그게 이제부터 우리 관계야.”

돈, 권력, 양심, 마음, 그리고 협박까지. 모든 목줄이 다 끊어지고 더는 채울 게 남지 않았을 때 필립은 가장 그답지 않은 수단을 손에 쥐었다. 탯줄도 줄이다.

“당신 미쳤어!”

여자가 그에게 깊이 꿰뚫린 채로 몸을 뒤틀더니 침대 가장자리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아악!”

필립은 도망치는 여자의 엉덩이를 붙잡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그의 굵기대로 벌어져 발름대던 살 구멍이 한 뼘도 넘는 살 기둥을 한입에 꿀꺽 삼켰다. 일부러 자궁구를 찔러댔더니 여자가 질겁하며 애원했다.

“내가 뭐든 할 테니까 제발 멈춰주세요! 임신은 싫어요!”

그래, 제발 싫어해.

싫다고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오르가슴과 맞먹는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그에게 붙들려 암캐처럼 엉덩이를 쳐들고 박히는 와중에도 여자는 침대 시트를 쥐어뜯고 침대 난간을 잡고 버티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빠져나가려 엉덩이를 흔들고 빼려고 조여댈수록 그의 끝과 제 끝장만 앞당긴다는 걸 모르는지.

“하아, 입으론 싫다는 게 몸으론 내 정액을 빨아 먹지.”

질컥질컥. 살 섞는 소리가 달라지자 여자가 울음을 터트렸다. 웬만한 명곡보다도 듣기 좋았다.

“정말, 흑, 안에 했어요? 거짓말이죠?”

“못 믿겠다면 보여줄까?”

침대 옆의 서랍을 열고 분홍색 바이브레이터를 꺼내자 여자가 움찔했다. 벌써 겁을 집어먹는 걸 보니 제대로 겁을 줄 순간이 더더욱 기대됐다.

여자의 질을 마개처럼 틀어막고 있던 성기를 뽑았다. 확 잡아 빼지 않고 나름대로 조심한 편인데도 성기 끝에 딸려 나와 흘러내리는 게 제법 됐다. 거기다 구멍이 좁아들며 뱉어내기까지.

“힘주지 마.”

그래도 여자가 말을 듣지 않자 필립은 제 손가락 두 개를 질구에 걸고 벌렸다. 씩씩대듯이 그의 손가락을 씹어대는 붉은 살 틈으로 여자의 음순 사이에 고인 것과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것까지 손가락으로 훔쳐 다시 밀어 넣었다. 그러곤 바이브레이터를 마개처럼 틀어박고서야 손을 뗐다.

엉엉 우는 여자의 얼굴 앞에 그의 핸드폰을 가져다댔다. 질겁하며 고개를 돌리기에 뒷머리를 틀어쥐었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화면 속의 광경을 지켜보게 된 여자가 달달 떨기 시작했다. 배 속에 묻힌 바이브레이터처럼.

질벽이 떨리며 그 주름 사이사이에 맺혀 있던 정액이 흘러내리다 자궁구로 모이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네 자궁이 내 정액을 기꺼이 마셔대는 꼴은 이미 본 적 있잖아. 그런데 왜 우는 거야.”

이번엔 피임링이 보이지 않으니까.

분홍빛 자궁구에 흰 체액이 덕지덕지 달라붙는다. 마치 저 자그마한 구멍 속으로, 그러다 이 여자의 세포 속으로, 끝내는 자궁벽으로 파고든 그의 일부가 아이가 되어 여자에게 달라붙어 자라날 것을 예고하듯이.

“잘 먹네.”

필립은 서럽게 우는 여자의 뺨을 핥아 올리며 그의 씨가 잔뜩 든 아랫배를 문질렀다.

“더 먹여줄게. 배가 터질 것처럼 부를 때까지.”

바이브레이터가 빠져나가고 허전함을 느끼기도 전에 남자의 성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수아는 침대 시트에 고개를 박은 채 들쑤시는 힘에 속절없이 흔들리며 끝없이 떠들었다.

“아, 흡, 싫어…….”

아, 좋아.

속에 박힌 살 기둥이 이보다 더 단단해질 수 있다니 놀라웠다. 거기다 마찰이 더 빨라지기까지. 너무 좋아서 머리털이 다 쭈뼛 설 정도였다.

“아흣, 아파요.”

아, 그래. 거기.

기분 좋은 곳을 남자가 쑤시고 가버리면 아프다고 한다. 그럼 남자는 그곳만 집요하게 치댔다. 환상적이었다.

“임신하기 싫어요. 제발, 그만…….”

“임신하고 싶어질 만한 이야기를 해줄까? 잘 들어. 넌 내 아이를 낳는 순간 내게서 다달이 양육비에 내가 죽으면 내 재산의 일부를 받을 수 있는 권리까지 얻는 거야. 내 재산이 얼만지 알아?”

그건 이미 알지. 양육비를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도 알고. 여기로 돌아오기 전에 다 알아봤거든.

“네겐 로또나 다름없어. 이젠 좋지 않아?”

처음부터 좋았어.

“그래도, 흑, 싫어요.”

애초에 싫다는 말도 이 남자 머릿속의 청개구리를 조종하기 위해서 했다.

수아는 쉼 없이 흔들리며 복수를 결심했던 날부터 오늘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일을 극의 하이라이트를 감상하듯이 흐뭇하게 되짚어보았다.

계획대로 안 될 때도 있었다. 눈치가 빠른 남자에게 제 목적을 들킬 뻔한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론 목표를 모두 훌륭하게 달성했다.

첫 번째, 남자가 쥔 카드 빼앗기.

수아가 없는 사이 남자는 엄마를 죽이면서 가장 큰 실책을 범했다. 돈부터 누명, 출국 금지까지. 제 손으로 그 수많은 카드를 백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프리마 발레리나로서의 미래든, 사랑이든. 이젠 그가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그녀에게 남자가 내밀 수 있는 카드는 단 한 장도 없었다.

두 번째, 복수.

잉그리드는 결국 제가 장난감 취급하던 장학생에게 당해 우스운 꼴로 죽었다. 남자는 제가 개 취급하던 여자에게 길들여져 개가 된 걸 아마 모르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 제게 길들여진 남자에게 목줄을 채우기.

남자는 모든 카드를 잃고 이 게임에서 패한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지금도 절박한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다. 더는 남은 수단이 없으면 인간은 단순해진다.

내게 거는 목줄이 실은 제 목줄인 건 알까?

벌써 승리감에 도취하는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런데 과연 길이 잘 들었을까? 내가 어디로 가든지 쫓아올 만큼.

남자도, 수아도 치러야 할 마지막 시험이 남았다.

***

남자는 그날 후로 틈만 나면 수아를 침대에 묶어두고 정액을 넣었다. 예전엔 변기 취급 같던 짓이 이젠 번식을 당하는 가축 취급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한 달 반이 지났을 즈음 수아는 임신했다.

그 후로 몇 달이 또 흘러 계절은 가을이 되었다. 제가 사라졌던 날이 벌써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자 수아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뜻이었다. 날씨는 온화하고 몸은 무겁지 않으니 움직이기 적당한 때였다.

요즘 들어 남자는 펜트하우스 안이라면 어디든 돌아다니게 해주었다. 도망쳐서 중절 수술을 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난 데다 이 몸으로 도망쳐도 대책 없을 거라 생각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물론 수아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굴긴 했다.

남자도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가는 걸 허락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처럼 산전 검사를 받아야 할 때 말이다.

수아는 게스트 스위트의 드레스 룸에서 나갈 준비를 하다 서랍에 손을 넣고 위를 더듬었다. 서랍 상판에 붙여두었던 여권과 체크카드가 손에 잡혔다.

여권은 수아가 죽은 척했었던 때에 야나가 짐에서 빼돌려준 것이었다. 야나는 수아가 남자에게서 ‘첫 밤의 화대’로 받아 이곳의 금고에 넣어뒀던 돈도 몰래 빼돌려주었다. 체크카드는 그 돈을 넣어둔 통장에 연결된 것이었다.

들켜서 빼앗기면 안 되니 체크카드와 여권은 무릎까지 오는 양말에 넣고 반대쪽 양말에는 야나가 예전에 주었던 구형 스마트폰을 넣었다. 양쪽 다 통이 넓은 바지 자락으로 충분히 가려졌다.

그러곤 남자가 현금과 함께 화대로 주었던 3억짜리 시계를 손목에 당당히 차고 나갔다. 펜트하우스의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그걸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갈 때마다 이걸 차면서 미친 여자처럼 똑같은 소리를 했던 탓이었다.

“납치당하면 이걸 몸값으로 주고 풀려날 거예요.” 

“그럴 일 없지만 그래야 네 마음이 편해진다면 좋을 대로.”

남자는 그렇게 길들여졌다.

“오늘은 아기의 성별을 알 수 있을 거야.”

필립이 차를 몰다 툭 던진 말에 여자가 새파랗게 질렸다. 평범한 연인이나 부부라면 설렐 법한 말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평범하지 않았으며 연인도, 부부도 아니었으니 필립은 괴롭힘의 수단으로 썼으며 여자는 그의 뜻대로 괴로워했다.

“당신은 그게 기대돼요?”

“기대돼.”

네가 질겁할 걸 상상하니.

임신이라니. 고리타분한 수법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세월이 검증해낸 수법 아닌가. 굴복할 줄 모르는 여자의 몸에 제 새끼를 심어 기를 꺾을 때의 정복감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을 것이다.

“난 좋은 아빠니까. 넌 아직 좋은 엄마가 아닌 것 같지만.”

엄마라는 말에 기겁한다. 후드 티로 가려진 배를 쓰다듬어 동그랗게 나온 아랫배가 눈에 띄게 했더니 여자가 더더욱 기겁하며 손을 피했다. 불러오는 배를 싫어할수록 그의 희열은 커졌다.

“난 기대돼.”

기대해봤자 오늘 남자는 아기의 성별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산부인과에서 초음파 검사를 기다리는 사이 소변 검사와 혈액 검사를 먼저 받았다. 수아는 소변 검사를 위해 화장실로 가자마자 양말에서 핸드폰을 꺼내 켰다.

도착은 5분 후.

택시 앱에서 택시를 불러두고 핸드폰을 다시 양말에 넣었다. 일부러 시간을 3분 정도 때우다 나왔다. 채혈을 위해 검사실로 향하며 복도를 지나다 대기실에서 잡지를 보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수아가 검사실로 얌전히 들어가는 걸 보고서야 시선을 뗐다.

남자는 모르는 모양이지만 검사실 창문은 베란다 문처럼 생겼다. 게다가 산부인과는 지상층. 손잡이만 돌려 열면 바로 주차장이었다.

“조금 따끔할 거예요.”

채혈이 끝나고 수아가 반창고를 붙인 자리를 문지르고 벗어두었던 후드 티를 느릿하게 입으며 뭉그적댔더니 간호사가 먼저 뒤처리를 끝마치고 나가버렸다.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창문을 열고 나와 조심스럽게 닫았다. 그러곤 주차장에서 저를 기다리는 택시를 향해 뛰었다. 언제든 뒤에서 손이 나타나 머리채를 낚아챌지도 모른다. 몇 걸음 안 되는 거리가 수백 미터처럼 느껴졌다.

택시에 무사히 오르고도 심장이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에게서 멀어질수록 심장이 더더욱 난폭하게 뛰었다.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수아는 오늘 저녁에 출발하는 인천공항행 항공권을 예약해 체크인까지 끝내버렸다. 이륙까지는 다섯 시간이나 남았지만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보안 검색대로 향했다. 거기까진 수월했으나 출국 심사에서 발이 묶였다.

“학생 비자는 이미 올해 3월에 취소됐는데 왜 지금까지 독일에 있었죠?”

“……네?”

실종된 사이 학교에 등록하지 않아 제적되면서 비자가 취소된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결국 수아는 불법 체류자가 되어 출국 심사대 뒤의 사무실로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아, 그게, 저도 모, 몰라서…….”

네이비색 제복을 입은 출입국 심사관도 경찰이나 다를 바 없어 보여 무서웠다. 머리도, 입도 딱딱하게 굳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말이 술술 나왔더라도 제가 왜 학교에 가지 못하고 반년 넘게 불법 체류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독어가 짧은 척했다. 아니, 실은 눈앞에 네이비색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버티고 있으니 그런 척을 애써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수아와 말이 잘 통하지 않으니 심사관들끼리 어려운 단어를 써가며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수아를 맡은 남자가 책상에 앉더니 어딘가에 전화를 걸며 컴퓨터로 뭔가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수아의 처분을 정하려는 모양이었다.

수아는 남자가 쥐고 있는 제 여권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거렸다.

비행기 타야 하는데. 이런 걸로 감옥에 가진 않겠지? 설마 나가면 평생 다시 못 오는 건 아니겠지? 한국 말고 독일 안에서 도망칠 걸 그랬나?

온갖 무서운 생각을 하던 수아는 가장 무서운 것을 맞닥뜨리곤 숨을 멈췄다.

그 남자다.

남자가 사무실 앞의 복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미간을 구긴 채 출국 심사대 주변을 훑는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자 수아는 잽싸게 후드를 뒤집어쓰고 고개를 숙였다.

제발 여기는 보지 말아라.

다행히 남자는 수아를 보지 못했는지 수행원들을 데리고 사무실을 그대로 지나쳐 사라졌다.

“하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마자 다시 불안해졌다.

내가 바로 출국하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설마 옷에 위치 추적기라도 심어뒀나?

수아의 시선은 한 달 전 남자가 사줬던 운동화로 향했다.

처분은 6개월 재입국 금지였다. 심사관이 주는 서류를 핸드폰으로 번역해 읽어보는 척 느적느적 시간을 끌다 서명을 하고 나오자마자 가까운 화장실에 숨었다.

“신발이 발에 안 맞아서 그러는데 혹시 바꾸실래요? 이거 딱 두 번 신은 프라다인데.”

화장실에 들어오는 여자들에게 신발을 바꾸자고 해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하긴, 아무리 새 명품 운동화라 해도 요즘 같은 세상에, 그것도 공항에서 누가 물건을 바꿔줄까.

하는 수 없이 운동화의 깔창을 들춰보고 밑창까지 뜯어보고서야 손톱만 한 칩을 찾아낼 수 있었다. 칩을 변기에 던져 넣고 물을 내리고도 수아는 화장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비행기는 놓쳤다.

야나에게 물어보았지만 그 남자에게서 연락은 없었다고 했다. 그러니 남자가 그 비행기를 탄 건지, 아직 공항을 뒤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도 한참이 지나 밖으로 나왔을 때 지나가는 모든 독일인이 남자가 풀어둔 사람으로 보였다.

면세점에서 신발과 옷을 죄다 다시 사고 선글라스도 사서 썼다. 그러곤 남자가 여기까지는 손을 뻗지 않았길 바라며 다른 터미널로 넘어가 막 탑승을 시작한 비행기에 올랐다.

수아가 탄 비행기는 엉뚱하게도 터키 이스탄불행이었다.

***

남자는 수아가 한국에 입국했다는 걸 흥신소를 통해 알아냈다. 하지만 흥신소도 수아가 어디로 숨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단다. 알아냈어도 남자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 모든 건 야나에게서 들었다. 남자는 수아를 잡는 데 실패하자 상관이 죽어 할 일이 없어진 비서를 알브레히트의 한국 지사로 보냈다. 회장이 보낸 본사의 첩자가 사실은 회장 내연녀의 추적자인 걸 알면 지사 직원들이 어떻게 수군댈지 궁금했다.

남자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아직 여자를 찾지 못했다고 매일 아침 보고를 올리는 직원이 실은 매일 그 여자와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걸. 그리고 그에게 보고하는 것보다 수아에게 보고하는 그의 동향이 더 길고 자세하다는 걸.

남자는 수아가 아이를 지웠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는 모양이었다. 임신 중기에도 중절 수술을 해주는 산부인과를 수소문하라는 한편으론 산부인과마다 돌며 수아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온 적 있는지를 물으라고 지시했단다.

한국에 산부인과가 어디 한둘인가.

당연히 야나는 산부인과를 돌지 않고 그에게 거짓 보고만 올린다. 매일같이 보고를 받는 시간만 기다리다 실망할 남자를 떠올리면 수아는 즐거워졌다.

남자는 그사이 수없이 한국과 독일을 오갔단다. 그는 여전히 빛이 나고 숨이 막히는 겉껍데기를 자랑하지만 한국에 올 때마다 눈빛이 지난번보다 죽어 있는 게 야나의 눈에도 띌 정도라 했다.

내 눈으로 보고 싶어라.

하지만 못 보겠지. 나를 보는 순간 그는 살아날 테니까.

수아가 죽은 척을 했을 때처럼 미쳐가진 않지만 다르게 미쳐가는 듯했다. 광기의 정도는 비슷한데 양상은 다르다고나 할까. 그때에는 영영 되찾을 희망이 없었고 지금은 있다는 게 차이일 것이다.

그때에도 그랬지만 야나를 통해 남자가 미쳐가는 이야기를 듣는 건 통쾌하기 짝이 없었다.

혹시 모르니 야나에게도 위치를 말하지 않고 숨어 지낸 지 두 달째.

수아는 호텔 로비에 홀로 서 있었다. 기다리기 심심할 땐 SNS 앱을 뒤적거리는 게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밀라의 SNS 피드를 염탐하는 게 습관이 됐다.

두 사람이 파혼했다는 기사는 그동안 추측성 보도만 있다가 얼마 전에야 공식 보도가 떴다. 그동안 SNS에서 무반응으로 일관하던 밀라가 어제야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니체의 명언을 쓴 스토리를 올려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듯한데, 니체의 스펠링이 틀렸다. 직원들이 맞춤법 확인도 안 해주는 모양이었다. 그사이 알브레히트 회장의 약혼녀라는 타이틀 덕에 늘었던 팔로워가 훅훅 빠져나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배달을 받아 객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수아는 그 잠깐의 심심함을 또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열었다가 한숨만 내쉬게 되었다.

화면에 뜬 건 은행에서 보낸 체크카드 결제 승인 문자였다. 한숨을 쉬게 한 장본인은 가장 밑줄의 잔액이었다. 남자에게서 받은 돈이 슬슬 동나고 있었다.

호텔 방으로 들어와 치킨과 떡볶이를 테이블에 펼쳐놓고 TV를 켰다. 살찌는 음식과 TV라니. 거기에 콜라까지. 엄마가 살아 있을 땐 허락되지 않았던 즐거움이었다.

그나저나 언제 욕심이 이렇게 많아졌을까. 매번 이런다. 오늘도 시키긴 욕심껏 시켜놓고 평생 적게 먹던 습관을 이기지 못해서 몇 입 못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임신하고도 살이 별로 찌지 않았다.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 있으면 사람들이 임신한 줄도 모를 정도였다. 길 가다 보면 남자들이 번호를 물어보는데 그럴 때 배를 내밀면 다들 당황하며 도망갔다. 꽤 재밌었다.

수아는 먹던 걸 그대로 두고 침대에 아무렇게나 누웠다. 먹고 바로 침대에 눕는 것도 허락되지 않던 일이었다.

살이 찌면 안 된다고 억지로 움직여야 했었지.

지금처럼 삶이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저는 어른이 없으면 안 될 거라 믿었는데 해보니 할 만했다. 어쩌면 그새 어른이 된 건지도 몰랐다.

세상 물정을 몰라서 혼자 세상에 뚝 떨어지면 험한 일이나 당하다 비참하게 죽고 말 거라고 엄마가 입버릇처럼 말했던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험한 일을 당하다 비참하게 죽을 뻔하고는 세상 물정을 배워버렸으니.

수업료가 비쌌지.

이제 홀로 설 수 있을 것 같다 해서 계속 이렇게 홀로 서서 버틸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가 왜? 지금까지 험하게 고생한 보상은 받아야지.

수아는 침대에 떨구어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야나, 그 남자 뭐 해요?]

[지금 뉴욕에서 새 컬렉션 론칭 행사에 참석 중이실 거예요.]

온전치 못한 사람이 자기 일은 정말이지 온전하게 하는 게 항상 신기했다. 그것도 훈련의 결과인가?

“뉴욕이라……. 론칭 행사라…….”

검색해보니 비행기를 열다섯 시간은 타야 여기로 올 수 있는 거리이다. 게다가 중요한 일정이 빡빡하게 잡혀 있을 출장 중이라……. 개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좋은 타이밍이었다.

“그럼 휴가는 이만 끝내볼까.”

수아는 호텔 금고를 열어 금빛 손목시계를 꺼냈다.

뉴욕의 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열리는 알브레히트의 컬렉션 론칭 애프터 파티는 모델과 스타들, 그리고 VIP 고객인 부호들로 북적였다.

샴페인이 끝없이 흐르고 미녀들도 끝없이 필립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럼에도 내내 무감하던 그의 청회색 눈은 그 사이에서 동아시아계 여자를 포착하는 찰나에만 날을 번뜩 세웠다.

터무니없는 짓이었다.

그 여자가 여기 있을 리 없으며 배가 저렇게 납작할 리도 없다.

딱. 딱. 딱. 손끝이 테이블의 끝을 초조하게 두드린다.

납작할 리 없어야 해.

필립은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술기운도 이젠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부족한 것 없는 제가 왜 보잘것없는 여자 하나에 목을 매는가 하는 회의감이 들 때가 있다. 지금 제 주변만 봐도 안다. 세상에 여자는 많지 않나.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어보려다가도 자신의 타고난 성향을 깨닫는 순간에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그는 저를 원하지 않는 여자만을 원한다. 그는 사랑받지 않아야만 사랑할 수 있는 남자였다. 필립의 타고난 성향은 여자에게도, 그에게도 잔인했다.

세상에 여자는 많으니 그가 원하는 여자 중에서 그를 원하지 않는 여자를 운 좋게 또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완벽한 여자를 알고 있다면 다른 여자를 찾아 나서는 건 멍청한 시간 낭비가 아닐까. 세상이 더 완벽한 여자를 주겠다고 해도 그는 이미 흥미를 잃었다.

이제 그에게 이 세상에서 여자라곤 그 여자뿐이었다.

필립은 적당한 타이밍에 파티장을 떠나 호텔로 돌아왔다. 침대 앞에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혼자 쓰기엔 넓다. 이 서늘함이 낯설다. 빠진 것만 같다. 그 여자가.

외로움은 결핍에서 기인한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거나 있던 것이 사라져 느끼는 허전함. 그것이 필립이 내리는 외로움의 정의였다.

여자는 정의의 모든 조건에 맞아떨어졌다. 그럼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은 외로움일까. 난생처음 느끼는 감정을 대조할 대상은 없었다.

홀로 누워 잠을 청했지만 그 여자처럼 그의 손아귀를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내일 중요한 일정이 연이어 예정되어 있는데.

아침 9시 반, 뉴욕 지사에서 임원진 미팅, 투자자들과의 점심 약속, 오후 3시에 언론사 인터뷰…….

양을 세듯이 일정을 세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수마에 사로잡힌 지 몇 분이나 됐을까, 핸드폰이 짤막하게 울렸다. 필립은 어렵게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야나: 조금 전에 중고 거래 앱에 찾으시는 물건이 올라왔습니다.]

야나가 함께 보내온 사진은 앱의 스크린샷이었다. 낯선 글자가 적힌 사진의 가운데를 차지한 건 다름 아닌 손목시계였다.

그가 태어난 해에 나온 리미티드 에디션, 그리고 시리얼 넘버까지. 필립의 시계가 맞았다.

여자는 모친이 소유했던 아파트는 아직 팔지 못하고 있었으며 한국 통장에는 돈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언젠가는 돈이 떨어질 테고 그러면 그가 준 시계를 팔 것이라는 예상이 마침내 맞아떨어졌다.

필립은 야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느 지역이죠?”

- 서울 마포 쪽입니다.

“내일 저녁으로 거래 날짜 잡으세요.”

야나와 달리 사정을 전혀 모르는 그의 비서는 갑자기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전용기를 대기시키라는 지시에 당황한 듯했다. 그러나 요즘 이유를 알 수 없는 돌발 행동이 이어지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 테니 되묻지 않고 전용기를 준비시키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전용기 안에서 착륙만을 기다리는 내내 심장이 격하게 고동쳤다. 가슴팍이 뻐근할 정도였다.

지나친 쾌감은 고통이 된다. 지나친 고통은 쾌감이 된다.

여자와 쫓고 쫓기는 게임을 크고 작게 벌이기를 여러 차례, 필립은 고통에서 쾌락을 느끼는 마조히스트를 이해하게 되었다.

숨이 멎은 것 같은 지금, 내 숨인 너를 되찾으면 나는 브레스 컨트롤의 쾌감 또한 알게 될까.

하루 뒤, 필립은 서울의 낯선 길거리에서 그의 모든 고통이자 쾌락의 근원을 마주했다.

반가워서 목이라도 조르고 싶었다.

지하철역 출구 앞에 서서 근처 가게에서 들려오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따라 흥얼거리는 수아를 한 몸처럼 달라붙은 연인들이 지나치고 또 지나쳤다.

독일의 크리스마스는 가족의 날이지만 한국의 크리스마스는 연인의 날이다. 크리스마스에 사라졌던 여자가 크리스마스에 돌아오다니 정말 로맨틱한 이벤트 아닐까.

“정수아, 진짜 너 미쳤…….”

자조하던 수아의 얼굴에서 표정이 단번에 지워졌다. 한국의 길거리에선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 장신의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심장에서부터 뜨거운 희열이 끓어올랐다.

온다. 온다. 온다.

내 개가 온다.

그가 이쪽으로 발을 떼는 찰나 수아는 뒤돌아 뛰었다. 배가 무거워 중심이 앞으로 자꾸만 쏠렸으나 뛰면서 중심을 잡는 건 수아의 특기였다.

인파로 가득한 길거리에서 수아를 놓칠세라 남자는 사람들을 거칠게 헤치며 쫓아왔다. 수아는 그 인파 사이로 요리조리 숨바꼭질하듯 도망치며 그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제가 묵는 호텔이 보였다. 그제야 수아는 그를 거듭 돌아보며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췄다.

“앗!”

인적이 드문 주차장에 막 들어섰을 때 그녀의 손목을 남자가 낚아챘다. 휘청하며 그의 품에 처박히는 찰나, 왼쪽 손목을 남자의 손이 스치나 싶더니 손목에 매여 있던 시계가 풀려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잡았다.”

남자는 수아를 끌어안고 머리에 키스 세례를 퍼부으며 재회의 기쁨을 홀로 만끽했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수아뿐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가난뱅이인 여자는 온 신경이 땅바닥에 떨어진 명품 시계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까드득.

남자의 구두 굽이 시계를 밟는 찰나, 수아의 심장도 시계와 똑같이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수아에게는 3억 원 가치의 고가품이 필립에겐 여자가 도망치게 도와준 괘씸한 공범에 지나지 않았다.

충격 탓에 연기 중인 것도 잊어버린 수아를 앞에 두고 남자는 담배꽁초를 바닥에 비벼 끄듯이 구둣발로 짓이겨 서울 오피스텔 한 채 값을 고물로 만들었다.

“내가 뭐랬어. 순진한 네가 이런 걸 팔러 나오면 나쁜 놈을 만날 거라고 했잖아.”

필립은 아이를 타이르듯이 굴며 아이가 들어 있어야 하는 배를 어루만졌다. 정말 들었다. 이 여자를 평생 제게 묶어줄 목줄이 아직 여기 들었다. 여자를 처음 포착했을 땐 배가 나온 것 같지 않아 아이를 지운 줄로만 알았던 그의 표정이 그제야 온화해졌다.

“흑…….”

수아는 이제야 제정신이 돌아와 눈물 연기를 시작했다. 남자는 인생이 끝장난 사람처럼 서럽게 우는 수아를 못 참겠다는 눈으로 감상하며 목울대를 들썩이더니 돌연 여태 꺼리던 짓을 저질렀다.

“흡…….”

남자가 입술을 포개더니 수아의 것을 잡아먹을 것처럼 크게 빨아들였다. 마치 오랫동안 숨을 참았던 사람이 갈구하듯.

살을 빨아 훔치고 혀로 들치고, 입을 벌리라는 강요가 계속되는데도 수아는 꾹 다물고 응하지 않았다. 결국 남자가 한 손으로 앙다문 턱을 눌러 입을 강제로 벌렸다. 잇새가 벌어지자마자 말캉한 살덩이가 뱀처럼 파고들어 왔다.

콱.

“읏…….”

수아는 그의 혀를 끊어먹을 듯이 깨물곤 실수인 척 선수를 쳤다. 화들짝 놀라 떨어지며 새파란 낯을 하고 오들오들 떨자 깨물린 남자가 도리어 무릎이라도 꿇고 사죄할 기세로 수아에게 매달렸다.

“아니야. 화나지 않았어.”

설레서 온몸이 떨리는데 겁을 집어먹은 탓인 줄 안 걸까.

“미안해. 겁줘서 내가 미안해.”

파르르 떨리는 두 손에 묻은 얼굴은 웃고 있는데 말이다.

이것 봐. 키스했어. 당신은 나를…….

“사랑해.”

이것 보래도.

수아는 웃음 위에 울음을 덧씌우곤 반항하듯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남자의 입매가 비틀렸다. 수아의 눈에는 비웃음이었으나 실은 필립 자신을 향한 쓴웃음이었다.

“네가 뭘 알아?”

필립은 품에 줄곧 넣고 있던 작은 상자를 꺼내 들었다. 알브레히트의 로고가 새겨진 상자가 열리며 큼지막한 다이아몬드가 세팅된 플래티넘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여자의 반응은 갑부의 청혼을 앞두고 보통의 여자들이 보이는 반응과 정반대였다.

그래, 이래서 내가 너를 못 놓는 거야.

“시, 싫어!”

“내가 네게 뭔가를 끼울 때 허락을 구했던 적이 있나?”

그를 뿌리치려 안간힘을 쓰는 여자의 손목을 단단히 틀어쥐고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끊어진 초커를 대신할 속박의 상징이었다.

“잘 생각해봐.”

필립은 아직도 그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여자의 왼 손목을 으스러트릴 듯이 쥐고 코앞에서 눈을 맞춘 채 쓰디쓴 고백을 피라도 토하듯이 뱉어냈다.

“내가 왜 너 따위와 결혼해. 내가 왜 너 따위의 몸에서 나온 아이에게 내 뒤를 잇게 하려 해. 너를 사랑할 만큼 미친 게 아니라면 내가 왜.”

자신을 자신이 아니게 만드는 이 광기에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딴 건 사랑이 아니야!”

“네가 사랑에 대해 뭘 알아. 사랑을 받아보긴 했어?”

찰싹.

뺨을 후려치는 소리가 주차장을 울렸다.

이 여자가 선사한다면 고통도 쾌감이 되어버리는 그에게 이건 키스와 다를 게 없었다.

필립은 언제 기세 좋게 반격했냐는 듯 무력하게 울기만 하는 여자를 안고 속삭였다.

“괜찮아. 이젠 내가 있잖아. 내가 사랑이 뭔지 가르쳐줄게. 내가 네게 주는 건 모두 사랑이야. 그것만 알고 있으면 돼.”

조곤조곤. 여자의 뇌리에 새기듯이.

“당신이 주는 거 다 필요 없어요.”

“이제 넌 그런 말 할 권리가 없어. 네 모든 건 내가 정해.”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오열하던 수아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내게 모든 걸 강요한다고 믿지만 정작 이 모든 걸 강요당한 사람은 자신이란 것도 모르는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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