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내게 익숙해질 생각 마. 그럼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싶어지잖아.
그거 알아? 난 내 한계를 몰라.
네 한계? 내 알 바 아니지.
***
긴 한숨이 욕실 거울에 뿌옇게 번졌다. 수아는 그걸 몸을 닦은 수건으로 훔쳐내고 초커에 엉킨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풀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초커의 열쇠를 남자가 가져가버렸다. 그래서 샤워를 할 때마저 이 성가신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어야만 했다.
이 목걸이가 뭐길래.
목 뒤의 자물쇠에 걸린 머리카락을 풀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건 무슨 의도로 준 걸까.
체인과 작은 자물쇠를 더듬으며 생각에 잠겨가던 수아의 표정이 어두워졌으나 곧 원래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이 목걸이를 준 사람은 그 남자가 아니라 잉그리드였다. 그러니 그때부터 그가 제게 이럴 속셈이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망상이었다.
머리를 대충 말리고 드레스 룸으로 나간 수아는 서랍장에 올려두었던 핸드폰부터 확인했다. 남자의 메시지는 없었다. 언제 오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관뒀다. 그는 그런 메시지에 답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수아도 헛수고를 관두었다.
옷장을 열었다. 실크나 레이스 한 장으로 된 가운과 슬립만 잔뜩 걸린 구석을 뒤지다 가장 무난한 흰색인 실크 가운을 골라 알몸에 걸쳤다.
집에서는 그가 사준 슬립이나 가운 한 장만 입을 것. 속옷은 금지. 언제든 천 한 장만 들추면 박을 수 있게.
그게 집주인이 정한 ‘입주자 규칙’이었다. 물론 그게 전부일 리 없었다.
짤랑.
서랍 첫 칸을 열자 안에 든 방울들이 수아를 대신해 울었다. 가지런히 놓인 핀과 집게, 끈 따위를 물끄러미 보다 제일 작은 금빛 링 한 쌍을 골랐다. 그나마 이게 덜 창피했다.
어디에 있는지 어디서든 듣고 알 수 있게 몸에 방울을 달 것. 남자는 목 같은 무난한 부위를 골라주지 않았다.
거울 속 수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는다. 납작한 젖꼭지를 제 손으로 세우는 건 남자가 보고 있지 않을 때에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엄지와 검지로 잡아당겨 주무르다 적당히 서자마자 링을 끼우고 사방의 굵은 나사를 조였다. 너무 헐거워 링이 떨어지지 않도록, 살을 너무 쪼여서 아프지 않도록 적당히.
젖꼭지는 두 개이니 이 짓을 다른 쪽에도 반복해야 한다. 반대쪽에 채우는 내내 한쪽에 매달린 방울이 짤랑거렸다.
알브레히트의 로고가 버젓이 새겨져 있는 방울. 니플 링은 진짜 금으로 주문 제작한 것이었다. 심지어 젖꼭지를 조이는 나사까지도 금이었다.
양쪽에 링을 다 채운 수아는 고개를 들었다. 금방울을 몸에 매단 애완 인간과 눈이 마주치자 가운 자락을 퍼뜩 여미고 거울 앞을 벗어났다.
짤랑짤랑. 수치심에서 빠르게 도망치려 할수록 수치스러워질 뿐이다.
남자의 취향과 욕구에 맞추는 게 이런 것일 줄은 몰랐다. 침대 안에서의 일을 말하는 줄 알았지만 침대 밖에서도 그는 수아에게 제 취향과 욕구를 강요했다.
학교 갈 때 입을 옷, 연습복, 특히 속옷도 그 남자의 허락을 받고 입어야 했다. 학교에 있을 때 그는 시시때때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세 번에 한 번은 반드시 받아 화장실이나 탈의실 구석에서 자위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 이상 받지 못하면 규칙 위반이었다.
집에서 천 한 장만 걸친 몸에 방울을 달지 않아도 당연히 규칙 위반. 혼자 있을 땐 입고 싶은 대로 입다가 그가 집에 올 때에만 이 꼴을 하면 될 것 같지만 남자는 언제 집에 오는지 절대 말해주지 않았다.
규칙 위반은 곧 병원비 청구서 반려였다. 그럼 더한 대가를 치러야 남자는 청구서를 다시 받아주었다. 숲에서 알몸으로 묶여 있기엔 요즘은 너무 추웠다.
“배고프다.”
게스트 스위트 주방의 냉장고를 뒤져보았지만 한식 재료들뿐이었다. 밤에 떡볶이는 좋은 생각이 아니다. 수아는 밖으로 나가 남자의 주방으로 갔다.
그 남자의 좋은 점은 엄마랑은 다르게 수아가 먹는 것을 간섭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제한하는 사람이 없다고 고삐를 풀고 먹어대진 않았다. 수아도 제 체중에 예민할 수밖에 없으니까.
남자의 냉장고에서 신선한 블루베리를 꺼내 씻어 뮤슬리를 섞은 그릭 요거트 한 그릇에 투하했다. 그 위에 꿀 한 스푼과 호두, 피스타치오 따위를 잔뜩 뿌린 게 요즘 수아가 즐겨 먹는 야식이었다. 오늘은 특별히 메이드가 낮에 들여놓은 듯한 잘 익은 무화과도 두 알 썰어 곁들였다.
남자는 집에서 식사를 거의 하지 않으니 사실 이건 수아더러 먹으라고 사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 먹고 빈 그릇과 스푼을 식기 세척기에 넣고 돌아선 수아는 깜짝 놀랐다.
“아, 오신 줄 몰랐어요.”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주방 입구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방울 소리로 수아가 어디 있는지 알지만, 수아는 그가 인기척을 내지 않으면 집에 온 것조차 알 길이 없었다.
남자는 팔짱을 풀며 오른손 검지를 까딱거렸다. 방울 단 개처럼 소리를 내며 다가갔더니 남자는 수아를 부르는 데 쓴 손가락으로 엉덩이 바로 밑까지 오는 가운을 들쳐서 팬티를 입지 않은 것부터 확인했다. 그러고서야 굳은 표정을 풀고 다정하게 인사했다.
“학교는 재밌었어?”
이제 남자는 수아의 이마에 입을 맞출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매번 수아의 뒷덜미를 한 손으로 쥐고서 그녀를 제 입술로 당겼다. 수아는 오늘 밤도 온몸이 뻐근하도록 까치발을 들고 그에게 매달려 키스를 받아내야만 했다.
거만한 태도와 달리 다정한 키스에 수아는 전율했다. 그 키스는 매일 밤이면 시작되는 은밀한 일과의 신호탄이었으니.
기대감에 몸이 떨린 건 물론 아니었다.
“흐읍…….”
수아는 숨넘어가는 신음과 타액을 삼키며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지탱하려 안간힘을 썼다. 자꾸만 초점이 흐려지는 눈은 김 서린 유리문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두 발에 고정되어 있었다.
남자가 샤워를 하는 사이 수아는 샤워 부스 앞에 깔린 깔개에 개처럼 네발로 엎드려 기다려야 했다. 다리 사이에 굵다란 바이브레이터를 박은 채.
“아, 흐읏…….”
갈 것 같아.
그러나 남자가 허락할 때까지 참아야만 했다. 수아는 물소리가 끊어지면 기대감, 그러다 다시 시작되면 실망감 사이를 오갔다. 제발 어서 끝나라.
오늘 건 유난히 참기 힘들었다. 안에 박힌 바이브레이터는 가만히 떨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앞뒤로 왕복 운동까지 하며 배 속을 혼자 쑤셔댔다. 가지처럼 밖으로 뻗어 나온 쪽은 클리토리스에 붙어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
“으으응…….”
수아는 아래에 힘을 주었다. 바이브레이터가 떨어지진 않게 조심, 조심.
“하아…….”
살이 조여들어 실리콘 봉을 밀어내면서 클리토리스를 빨아대던 쪽이 떨어지자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남자의 밑에 깔려 지낸 지 한 달 만에 수아는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던 근육을 쓰는 법을 배우고 싶지 않아도 배우게 되었다.
달칵.
언제 물소리가 멎었을까. 유리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수아는 바들바들 떨리는 고개를 힘겹게 들었다. 눈앞으로 젖은 발 한 쌍이 다가오더니 멈춰 섰다. 수아는 벌게진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며 빌었다.
“아흐, 가, 가게 해, 주세요.”
남자가 수아를 지그시 내려다보다 입매를 휘어 올렸다. 조르는 강아지라도 보는 듯이. 그래서 기대를 품었건만 남자는 단호하고도 잔인했다.
“안 돼.”
그가 몸을 숙이더니 수아의 엉덩이로 손을 뻗었다.
“헉!”
바이브레이터 손잡이의 버튼을 눌러 강도를 높이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남자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몸 밖으로 튀어나온 걸 다시 푹 쑤셔 넣기까지 했다.
“참아.”
“흐악! 하, 하으읏!”
잠시 떨어졌던 바이브레이터 끝이 클리토리스에 다시 붙자마자 수아는 자지러지며 무너졌다. 그쪽은 흡입식이었다. 수아의 몸은 흡입형 바이브레이터에 유난히 약했다. 수아가 그걸 안다는 건 남자도 안다는 뜻이었다.
동그란 흡입구가 신경이 몰린 돌기를 쏙쏙 빨아 당기는 충격에 숨이 꺽꺽 넘어간다. 눈앞이 새하얘지며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가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냉정한 목소리는 똑똑히 들렸다.
“못 참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겠지?”
“끅…….”
참아. 참아.
이젠 신음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한계까지 몰린 몸에 수아는 악착같이 힘을 주며 버텼다. 가슴 끝에 매달린 방울이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따라 잘게 짤랑거렸다. 아랫입에 신경을 쏟느라 벌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윗입에서는 개처럼 침이 줄줄 흘렀다.
올이 긴 깔개를 쥐어뜯을 듯이 움켜쥐고 제 손보다 작은 기계 하나와 사투를 벌이는 사이 남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며 몸의 물기를 닦았다. 그가 잠시라도 입을 열 때마다 기대를 품으며 간절한 눈으로 애걸했던 수아는 남자가 결국 허락해주지 않고 드레스 룸으로 나가버리자 좌절했다.
“흡, 흐흡…….”
가고 싶어. 가고 싶어 미치겠어.
밀려오는 절정의 물살을 빈약한 몸뚱이로 막으며 버틴 지 한참이 지나서야 욕실로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머리맡에서 멈추자 수아는 깔개에 처박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눈물로 아롱진 시야 속에 흐릿하게 번진 남자는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은 채 수아를 삐딱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무엇이 마음에 안 든 걸까.
“흑, 제발…….”
“잊었어.”
눈망울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똑 떨어지며 남자의 표정이 보이고서야 알아챘다. 남자가 저를 잊을 뻔했다는 소리가 아니라 제가 잊은 게 있다는 뜻인 걸 말이다.
“주, 주인님.”
“가.”
“아흐흑!”
허락과 동시에 온몸의 힘이 탁 풀렸다. 그 순간 둑이 무너지며 몸 안팎에서 쾌감이 휘몰아쳐 들어와 수아의 몸을 한입에 집어삼켰다. 개처럼 엉덩이와 고개가 바짝 쳐들리고 등허리가 움푹 팼다. 방울이 짤랑, 한 번 크게 떨고는 정적이 계속됐다.
툭.
고요한 가운데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바이브레이터가 벌어진 무릎 사이로 떨어지며 솜털 보송보송한 허벅지와 종아리에 애액을 흩뿌렸다. 이건 수아의 의지로 뱉은 게 아니었다.
바이브레이터가 빠져나간 후에도 질구가 제멋대로 뻐끔대고 엉덩이는 절로 씰룩거리며 남자의 성기를 받을 때처럼 군다. 절정은 여느 때보다 강렬하고도 길었다.
“하아, 하아…….”
가장 큰 물살이 지나가고 나서야 수아는 소리 내 헐떡일 수 있었다. 팔은 아직도 후들거린다. 이걸 짚고 일어설지 그대로 바닥에 엎어질지 고민하는데 그녀를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남자가 손을 뻗었다.
“흣…….”
그는 수아를 한 손으로 가뿐히 감아 들어 제 가슴팍에 등을 기대고 서게 했다. 거울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자리였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발그레하고 몽롱한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수아는 질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드러난 목덜미를 입술로 지분대며 올라온 남자가 귓불을 가볍게 깨물곤 속삭였다.
“나의 지젤, 오늘 연습은?”
“했어요.”
“그래? 오늘은 집에 일찍 왔나 보군.”
숨을 고르는 척, 대답을 피하며 여기서 더 거짓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수아의 귓가에 남자가 사근사근하게 속삭였다.
“거짓말도 규칙 위반인 건 알지?”
“…….”
“셋.”
“…….”
“둘.”
“……안 했어요.”
결국 수아는 연습실로 순순히 끌려갔다.
연습실이란 남자의 펜트하우스에 딸린 피트니스 룸이었다. 그는 운동 기구를 한쪽으로 몰아 무용 연습을 해도 좋을 만큼 큰 공간을 만들고 스트레칭용 바를 설치해주었다. 호의 같으나 발레리나에겐 필요 없는 폴 댄스 봉까지 설치한 건 결코 그렇다 할 수 없었다.
“이젠 네 전용 연습실이 생겼으니 학교에 오래 남아 있을 필요 없겠지.”
이 또한 호의처럼 들리지만 아니었다. 그날부로 연습을 핑계 삼아 집에 늦게 들어올 수 없게 되었으니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걸로.”
남자는 수아를 스트레칭 바 앞에 세우곤 바에서 칵테일을 주문하듯이 발레리나에게 자세를 주문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자세란 바트망 데벨로페(Battement Développé). 바를 잡고 한 다리로 서서 다른 다리를 앞, 옆, 뒤로 높이 드는 자세였다.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거울에 기대어 앉아 유일한 관객이 되었다. 무대에 오른 건 얇고 헐렁하고 짧은 실크 가운 한 장만을 걸친 헐벗은 꼴로 후원자의 취향에 맞춰 아주 천천히, 그리고 적나라하게 다리를 벌리는 발레리나였다.
발 포지션 5번. 두 발을 교차해 앞뒤로 딱 붙이고 서서 우아하게 모은 손끝을 밖으로, 안으로 하느작 내저으며 발끝을 위로 끌어 올렸다. 다리를 앞으로 높이 들며 쭉 펴는 내내 남자의 시선은 위로 들린 가운 자락 밑에 있었다.
“제대로 벌려.”
이건 다리를 드는 자세이지 벌리는 자세가 아니다. 수아는 그의 지시에 얼굴을 붉히며 자세를 잠시 유지하기만 하곤 다리를 다시 내렸다.
남자가 저를 뭘로 취급하든 수아는 발레리나여야만 했다. 발레리나를 연기하는 스트리퍼라 해도.
다시 5번 포지션으로 발을 모았더니 다리 사이가 마찰하며 질컥거렸다. 남자가 애액을 닦는 걸 허락해주지 않은 탓이었다.
손과 발을 또 한 번 끌어 올리곤 이번엔 옆으로 다리를 활짝 들어 올렸다. 할 수 있는 한 높이 드느라 상체가 자연히 옆으로 기울었다. 스륵,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덮고 있던 실크 자락이 흘러내리며 헐렁한 앞자락이 벌어졌다. 가슴이 드러나자 남자가 무릎 위에 걸쳐둔 손의 모양이 변했다. 담배를 사이에 끼운 모양새로. 담배도 없는데.
그다음 자세는 다리를 뒤로 들어야만 했다. 몸이 앞으로 기울며 가슴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옷자락이 더더욱 벌어졌다.
“멈춰.”
큰 살덩어리 두 쪽이 아래로 쏟아질 듯이 매달린 자세 그대로 멈췄다. 남자는 수아를 외설스러운 꼴로 두고 박물관에서 조각상을 감상하듯이 몸을 아래에서 느긋이 훑어보았다.
“아…….”
손을 대기도. 목덜미를 타고 내려온 손끝이 동그란 선을 타고 미끄러지다 정점에 턱 걸렸다.
“흣…….”
짤랑.
젖꼭지를 한 번 크게 굴린 손끝이 계속해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뚜렷하게 도드라진 갈비뼈를 하나하나 덧그리더니 허리께에서 걸리적거리는 끈을 풀어 던져버렸다. 옷자락이 사락, 벌어지며 배 아래가 남자의 눈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손끝이 다시 살에 닿는다. 배 한가운데의 옴폭 들어간 골을 타고 질주하기 시작한다. 무서운 속도로.
“헉…….”
그대로 잔털 하나 없이 매끈한 둔덕에 처박혔다. 한 개도 아닌 두 개가. 두 손가락이 벌려놓은 밀지를 향해 남자가 고개를 비스듬히 젖혔다. 아직도 여운이 가시지 않아 움찔움찔 박동하는 돌기가 그의 눈에 적나라하게 보일 것이다. 수아는 후들거리는 팔다리에 힘을 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널 보니 생각나는 작품이 있어.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 여자의 음부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유화지. 여기를 말이야.”
“아흣!”
젖은 마찰 소리가 나는 순간 엉덩이가 펄쩍 튕겨 오르고 꼿꼿이 들려 있던 고개가 절로 홱, 꺾였다.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 대한 열띤 논쟁을 일으킨 문제작이지.”
허벅지와 무릎 안쪽이 파들거리며 수아의 중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남자는 손장난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난 네 몸을 볼 때마다 궁금해져. 예술과 외설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 걸까.”
수아는 답을 알지만 말하지 않았다. 당신의 뱀이 깨어나는 그 순간이 예술과 외설의 경계라는 걸.
“그 그림의 모델이 발레리나였다는군. 매춘을 겸하던.”
너처럼. 남자가 하지 않은 말이 들린다.
오기가 생긴 수아는 이대로 가지 않고 끝끝내 버텼다. 음핵의 감각이 둔해진 걸 눈치챈 남자가 손을 떼더니 그녀가 다시 중심을 잡자 명령했다.
“처음부터 다시.”
가운은 입으나 마나였다. 움직일수록 흘러내리고 벌어지고. 결국은 팔꿈치와 손목 사이에 걸린 천 쪼가리로 전락하며 수아는 완전한 알몸이 되었다.
다리를 다시 옆으로 들 때였다.
“더 벌려.”
한계까지 올렸지만 남자는 만족을 몰랐다.
“아, 잊었군. 넌 돈을 줘야 다리를 벌리지. 입은 게 없어서 팁을 꽂을 데가 안 보이는데……. 여기 꽂아줄까?”
“흣…….”
“열어야지.”
발레 레슨 선생이라면 무릎이나 어깨 같은 골격을 열라는 말일 테지만 저 남자가 열라는 건 다른 곳이다. 손가락이 뻐끔대는 살을 젖혀 벌리며 하나씩 파고들어 왔다.
“힘 빼.”
수아가 느끼기에도 그는 평소보다 고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힘을 주어야만 이 자세로 서 있을 수 있는데 빼라는 건 가혹한 지시였다.
“하읏!”
결국 남자가 제힘으로 기어코 파고들어 왔다. 그는 길쭉한 손가락 두 개를 끝까지 꽂은 채 바트망 데벨로페를 세 번 더 하라고 요구했다. 당연히 손가락은 얌전히 꽂혀 있지만은 않았다. 다리를 움직이는 순간이면 제가 일으킨 마찰까지 더해져 움찔, 하던 동작을 멈추기 일쑤였다.
“흐읍…….”
“자세가 흐트러지잖아.”
“아흐, 자, 잠깐…….”
“힘줘. 내 손가락 부러뜨리고 싶은 사람처럼.”
손가락 끝이 음핵과 가까운 안쪽 어딘가를 문지르다 툭툭 두드렸다. 질벽을 조이라고. 그의 말대로 이를 악물고 부러뜨릴 듯이 꽉 물었다. 자연히 복근과 골반 근육에 힘이 들어가며 휘청하던 몸이 꼿꼿이 섰다.
설마 자세를 잡아준 건가 싶었지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나마 안에 파묻힌 채로 까딱거리기만 하던 손가락이 이젠 안팎으로 들락거리며 속살을 쑤시기 시작했다. 힘이 탁 풀리며 도저히 자세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아흑, 그만, 아흐흑…….”
팔다리부터 아랫배까지 온몸의 근육이 부들부들 떨린다. 결국 제힘으로 몸을 지탱할 수 없어 두 손으로 바를 잡고 상체를 숙여 기대다시피 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음부를 받치듯이 감싼 남자의 손바닥에 체중을 싣기까지.
“헉!”
물론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두툼한 손바닥 아래쪽이 둔덕을 열고 들어와 음핵을 뭉근히 짓누르고 굴리기 시작했다. 눈높이에서 흔들리는 가슴을 나무에 매달린 열매를 따 먹듯이 입으로 애무하던 남자가 니플 링을 뽑아내 연습실 구석으로 뱉어버리더니 사나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다리 그대로 들고 있어.”
수아는 뒤로 높이 들고 있던 다리를 내리려다 말고 다시 올렸다. 가슴 끝을 빨던 입술이 점점 아래를 지분대며 내려오자 겁에 질려갔다.
“아!”
그러다 남자가 기어코 음부에 입을 대는 순간 작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흠칫 떨었다.
싫어. 이건 정말 싫어.
고개를 돌렸더니 제 다리 사이에 남자가 얼굴을 묻고 혀로 음순을 젖혀가며 짐승처럼 핥는 끔찍한 꼴이 거울에 적나라하게 비치고 있었다.
츕. 쯔읍.
“으응…….”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다. 보지 않는다고 해서 벗어날 순 없었다. 입술이 음핵을 물고 빠는 소리가 연습실에 크게 메아리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과 귀는 막는다 해도 피부로 느끼는 감각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음핵을 비비던 혀가 아래로 스멀스멀 기어 내려간다. 넓게 퍼진 혓바닥이 음핵과 요도구를 한꺼번에 덮고 은근히 굴리자 수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간질간질, 요의 같기도 한 느낌이 아랫배에 차오른다. 이러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된 후론 거북하기보다 무서워졌다.
뾰족하게 뭉친 혀끝이 소변이 나오는 구멍을 후비려 들 때가 그 어느 때보다 소름 끼쳤다. 버티다 혀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 안도하자마자 질구에 박힌 손가락 두 개가 벌어졌다. 그 틈으로 말캉한 게 쑥 들어와 안을 쑤시다 나갔다. 수아의 신음에 콧소리가 더욱 섞여들었다.
“하아, 으으응…….”
한층 미끄덩해진 살덩이가 다시 음부를 핥아 올리더니 음핵을 툭, 쳐올린다.
“아, 으응, 싫…….”
이 기분 나쁜 짓을 당하면서 기분 좋아하는 자신이 무엇보다도 싫었다.
“주인님, 흑, 제발…….”
수아는 바에 몸을 기댄 채 파들파들 떨며 애원했다. 주인님이라고 아무리 불러도 남자는 입 한 번 떼지 않고 애무의 강도만 더욱 높였다. 머리끝까지 소름이 오싹 돋아 오르고 눈앞이 까맣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수아는 흡입식 바이브레이터에 유독 약하다. 그런 바이브레이터는 입으로 빠는 애무를 흉내 낸 거라고 남자가 그랬다. 그 말인즉, 수아는 입으로 하는 애무에 유난히 약했다. 그걸 남자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붙여 음핵 주변의 살까지 넓게 빨아 당기고 모조리 혀로 굴려댔다. 저 혀가 제 머릿속도 휘젓는 것만 같았다. 부끄러움 많은 저답지 않게 자꾸만 야한 소리를 내고 머릿속 한구석에선 더, 더, 라는 제 뜻에 반하는 속삭임이 들려오는 걸 보면.
“아흐, 아으응…….”
잘게만 떨리던 무릎이 이젠 크게 후들대며 꺾이려 했다. 넘어지지 않고 서 있겠다고 있는 대로 힘을 주어 조여든데다 흥분해 피까지 몰려 부풀 대로 부푼 속살을 손가락이 마구잡이로 쳐올리고 휘저어대기까지 하자 수아는 도저히 참지 못했다.
“하으윽!”
힘을 탁 풀고 몰아치는 쾌락의 해일에 몸을 맡기는 순간 요도구에서 핏, 맑은 물을 뱉는 느낌이 생생했다. 기분이 하늘 높이 솟구치자마자 바닥으로 철퍼덕 추락했다. 남자는 그제야 입을 떼더니 팔뚝의 갈라진 틈을 타고 흐른 걸 길게 핥아 올리며 맹수 같은 눈으로 수아를 응시했다. 그럴수록 수아는 더더욱 울상이 되어갔다.
“너도 곧 좋아하게 될 거야.”
남자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수아도 좋아하게 될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다. 한 가지에 익숙해졌다 싶으면 더한 것이 시작됐으니까.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으려는 수아를 일으켜 세우더니 바에 발목 한쪽을 걸게 했다. 등 뒤에서 바지 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흣!”
중심을 잡자마자 다리 사이에 굵다란 페니스가 처박혔다. 젖어도 소용없었다. 벌써 숨이 턱 막힌다. 좁은 구멍을 빠듯하게 벌리고 배 속으로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이 무지막지한 길이와 크기에도 절대 익숙해지지 못할 것 같았다.
“더 숙여.”
남자는 수아의 날개뼈 사이를 눌러 몸을 앞으로 숙이게 하곤 적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박아대기 시작했다.
“아! 읏……. 사, 살살…….”
몸이 거칠게 흔들리자 수아는 바를 두 팔로 껴안다시피 하며 매달렸다. 바가 휘청거린다. 이러다 제 체중과 남자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기라도 할까 조마조마했다. 결국 제힘으로 서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얼굴 돌리지 마.”
팔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는데 턱을 잡혀 옆으로 홱 돌려졌다. 저질스러운 자세로 한데 엉겨 붙은 몸뚱이가 눈에 들어오자 수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런 그녀를 집요하게 바라보는 남자의 눈동자는 열기를 더해갔다. 배 속을 짓쳐 올리는 허리 짓도 거칠어져만 갔다.
연습실에서 섹스를 할 때면 거울을 보고 있을 것. 또 하나의 규칙이었다. 수아는 제 몸에 일어나는 일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울고 남자는 그런 수아를 지켜보며 흥분했다.
“흑…….”
엉덩이를 한껏 내밀고 남자가 흔드는 대로 가슴 두 쪽을 엇박자로 흔드는 제 꼴이 너무나 끔찍했다. 이번엔 음부가 거울을 보게 서 있어 제 한가운데에 구릿빛 성기가 콱 처박혔다가 훅 뽑혀 나오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살이 맹렬히 문질러지며 애액이 흰 물거품을 일으키는 것도, 남자가 귀두 턱까지 뽑아 당길 때면 붉은 속살이 조금 딸려 나오는 것도 차마 눈 뜨고 못 볼 광경이었다.
“착해. 점점 잘 버티고 있어.”
아니, 이건 시간이 지나도 절대 못 버틸 것이다. 남자가 말하는 건 자세였다. 오늘은 남자의 거친 몸짓을 버티고 있지만 며칠 전엔 허리 짓 몇 번에 주저앉아버렸다.
수아의 시선이 거울 한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 비친 건 운동 기구 사이에 매달린 검은 끈과 밴드 따위였다. 운동 기구인 척하지만 저건 섹스용 스윙이었다.
며칠 전에야 그 용도를 알았다. 그날 남자는 제 다리로 서지 못하는 수아를 저기에 눕혔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니 편할 줄 알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지를 묶인 채 공중에 매달려 남자가 하는 짓을 얌전히 받아들이고 있자니 사지 잘린 인형이 된 기분이었다.
규칙을 어겼을 때에는 개가 되어야 했다. 그는 산책을 시켜준다더니 여기서 멀리 떨어진 숲으로 끌고 가 옷을 벗기고 개 목걸이만 맨 수아를 피크닉 테이블 위에 엎드리게 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목줄과 엉덩이 깊숙이 박힌 페니스 사이에 껴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그를 받아내는 내내 누가 오지는 않을까 개처럼 귀를 쫑긋 세운 채 우거진 숲을 두리번거렸었다.
지난 일요일에는 또 다른 것이 되었다. 여기서 요가를 하고 있던 때였다. 다리를 쭉 펴 엉덩이를 위로 들고 머리를 아래로 숙인 다운도그 자세로 숫자를 세는데 갑자기 레깅스 밴드가 엉덩이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귀에 이어버드를 끼고 있던 수아는 누가 연습실로 들어온 줄도 몰랐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며 이어버드가 귀에서 빠져나가고서야 위에서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움직이지 마.”
남자는 치켜든 엉덩이에 성기를 그대로 쑤셔 박았다. 변기에 소변을 보듯이, 그렇게 성욕을 배설하고 갔다. 인터넷에서 말로만 듣던 육변기 취급이 이런 건가 싶었다.
개, 인형, 변기, 스트리퍼, 창녀……. 수아의 역할은 끝이 없었다. 어떤 게 그나마 나은지 모르겠다. 그래도 가끔은…….
“아, 아응, 하으윽!”
생각의 끈이 어느 순간 뚝 끊겼다. 무아지경에 빠져 교성을 내지르고 저 스스로 엉덩이를 돌리며 안에 박힌 귀두에 잘 느끼는 지점을 문대기까지 했다. 그러다 환희에 차 전율했다. 조금 전만 해도 제 처지를 서글퍼하던 사람이니 말 그대로 무아지경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 정수아라는 한 인간은 오로지 육체의 쾌락만을 위해 존재했다.
“윽…….”
수아에 이어 남자도 목이 졸리는 신음을 내며 절정에 도달했다. 배 속 깊은 곳에 뜨뜻한 것이 고이는 느낌이 몸서리쳐지도록 생생했다.
뿌리까지 박혀 있던 성기가 단숨에 뽑혀 나갔다. 제 몸이 바로 닫히지 않는 걸 보고 놀라 아래를 조이자 질구가 오므라들며 침이라도 뱉듯이 희뿌연 덩어리를 투두둑 밀어냈다. 그대로 떨어진 것과 수아의 다리를 타고 흐른 정액과 애액이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치워.”
남자가 벽장에서 수건을 뽑아 수아의 발치에 던졌다.
오늘 밖에서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는 기분을 풀듯이 수아에게 성욕을 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유독 빈정대고 혹독하게 군다 싶었다.
‘그래도 가끔은…….’
갑자기 찾아온 절정 탓에 끊겼던 생각을 수아는 다시 악착스럽게 이어 붙여보았다.
‘연인처럼 대해주기도 하잖아.’
남자는 지킬 앤드 하이드 같았다. 다정하다가도 싸늘하고, 달콤한 말을 하다가도 못된 말을 퍼붓는다. 한 사람의 기분이 급변하는 걸 늘 겪으며 살아온 수아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익숙하다 해서 버겁지 않은 건 아니다.
수아는 발아래에 고인 더러운 흔적을 망연히 내려다보며 언젠가 남자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
“이제 네 말대로 대가 없는 도움은 없어.”
아니, 그 말을 한 건 나였지.
수아는 찬 바닥에 주저앉아 정사의 흔적을 수건으로 훔치며 매일같이 제게 하는 말을 되새겼다.
정수아, 넌 엄마 같은 얌체가 아니잖아. 정수아, 돈 받는 만큼 해야지.
***
“가슴이 더 커졌어.”
“흣…….”
“성장기가 아직도 안 끝난 건가.”
수아는 남자의 손아귀 사이로 삐져나온 살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붉혔다. 확실히 살이 더 붙었다. 주물럭대는 자극을 못 견뎌 몸을 비틀었더니 손아귀가 살덩이를 떼어낼 듯이 움켜쥐고 당겼다.
“아!”
“이 짓도 묶어놓고 하길 원해?”
무의미한 저항은 관뒀다. 남자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자꾸만 휘청대는 몸을 옷장 문에 기대어 세워놓은 채로 한참을 가지고 놀고서야 테이프를 길게 떼어 이로 끊어냈다.
“앗!”
“가만히.”
발딱 선 젖꼭지를 손가락이 짓누르기 무섭게 그 위로 테이프가 달라붙었다.
아침마다 수아의 가슴에 테이프를 붙이는 건 남자의 일이 되었다. 테이핑을 끝낸 가슴에 남자가 손바닥을 대더니 흔들었다.
“흣…….”
흔들리는 건 수아의 무릎뿐. 이 짓을 5년 넘게 해온 수아보다 남자가 더 잘한다는 건 부인할 수 없었다.
“앗…….”
젖꼭지가 숨은 자리를 찾는 것도 실력이라면 남자는 이것마저 잘했다. 움찔하며 가슴을 움츠렸더니 남자가 손을 떼며 물었다.
“청구서는.”
“침대 옆에 있어요.”
남자가 수아의 드레스 룸 밖으로 나가 협탁에 올려둔 병원비 청구서 봉투를 뜯어 열었다.
이번엔 대가로 뭘 해야 하는 걸까.
남자가 원할 때마다 다리를 벌리고 성욕을 채워주는 게 거래의 조건이지만 청구서가 올 때에는 평소와 다른 뭔가를 또 대가로 치러야만 했다.
“침대로 와서 누워.”
스포츠 브라를 꺼내 입고 팬티에 막 발을 넣으려는 찰나였다. 남자가 팬티를 치우라는 눈짓을 했다. 결국 반라로 나가 침대에 누워 잠시 밖으로 나간 남자를 기다렸다. 시킨 대로 다리를 활짝 벌리고 제 손으로 음핵을 문지르면서.
내가 올 때까지 젖어 있게 만들어.
남자는 이런 말도 했다.
뭘 하려는 걸까. 지금 대가를 치르기엔 수업 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창 밖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손을 놀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남자가 돌아왔다. 손에는 엄지 정도 길이에 날렵한 계란 모양인 분홍색 물체가 들려 있었다.
그제야 왜 젖어 있어야 한다고 했는지 수아는 이해했다.
낯익은 그 물체는 바이브레이터, 그것도 끝에 카메라와 조명이 달린 바이브레이터였다. 알아본 순간부터 수아는 울상이 되었다.
알아봤다는 건 남자가 이미 제게 저걸 썼다는 뜻이다. 클럽에서 쓰려던 순간에 도망쳤던 탓인지 남자는 이걸 넣고 나서야 카메라가 달렸다는 걸 말해주었다. 아니, 보여주었다.
“수아는 겉도 예쁘지만 속은 더 예뻐.”
남자의 핸드폰 화면 가운데에서 옴죽거리는 동그란 분홍빛 살덩이가 제 자궁의 입구라는 걸 깨닫자마자 수아는 질겁해 눈을 돌렸었다.
“내가 망가뜨릴까 무서웠다면, 잘 봐. 멀쩡해.”
그는 진동 모드를 켜고 수아가 절정에 오를 때 자궁구가 어떻게 박동하는지, 속살은 어떻게 물결치며 어떨 때 애액이 흘러나오는지를 빠짐없이 지켜보게 강요했다. 수아가 몸서리칠수록 남자는 즐거워했다.
지금도 그때만큼이나 즐거운 눈이었다. 이제야 시작인데.
“벌려.”
“아, 읏…….”
기분 나빠.
단단한 물체가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보다 이어질 일이 기분 나빴다.
그렇지만 시간이 없으니 짧게 끝나겠…….
“옷 입어.”
“…….”
남자는 바이브레이터를 안에 넣자마자 나가버렸다. 닫힌 문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던 수아는 뒤늦게 학교에 이걸 넣고 가라는 뜻이란 걸 알아채고 그를 붙잡으러 갔지만 남자는 이미 펜트하우스를 떠난 후였다.
누가 알까. 배 속에 바이브레이터를 넣고 발레 수업을 들으러 온 학생이 있다는 걸. 진동이 시작되면 알게 될지도 모른다.
이건 남자가 앱으로 원격 조종하는 물건이라 언제든 예고 없이 켜질 수도 있었다. 연결은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 수아가 알 리 없었다.
“헉…….”
바이브레이터를 넣은 채 다리를 찢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걸 다급히 조여 붙잡았다. 그 자세 그대로 주변에서 수다를 떨거나 저처럼 몸을 푸는 학생들을 조마조마한 눈으로 흘끔거렸지만 다들 시선이 딴 데 있었다.
아무도 제게 관심 두지 않는데 수아는 무용실에서 조용히 빠져나가 화장실로 갔다. 소리야 어떻게 무마한다 해도 이게 몸 밖으로 빠져나오면 수습할 길이 없다. 바 수업이라 다리를 계속 들어야만 하는데 다리 사이를 감싼 레오타드와 타이츠가 얇고 타이트해 그 윤곽이 적나라하게 보일 테니까. 생각만으로도 피가 마르는 것처럼 손이 차가워졌다.
뭐라도 아래에 덧입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었다. 슈라이버 교수는 복장에 깐깐하기 그지없어 타이츠와 레오타드 외엔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제 손으로 바이브레이터를 질 끝까지 밀어 넣고 무용실로 돌아왔다. 빼는 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뺀 걸 남자에게 들키면 이보다 더한 짓을 해야 한다. 적어도 이건 오늘 세 시간만 더 남들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끝이었다.
어느 정도까지 움직여도 되는지 확인할 겸, 수아는 수업 전 자투리 시간에 거울 앞에 서서 지젤 바리에이션을 잠시 춰보았다. 확인만 해볼 생각이었는데 꽤 할 만했다. 잠시 춘다는 게 결국 끝까지 추다 교수가 온 걸 뒤늦게야 알았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인사를 하고 줄줄이 세워진 바의 구석 자리로 조용히 도망치려는데 교수가 수아를 붙잡았다.
“중심이 저번 주보다 훨씬 안정적이야. 요즘 운동을 열심히 하나 보네.”
운동이란 말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남자의 강도 높은 수업을 버티면서 악명 높은 슈라이버 교수의 수업은 식은 죽 먹기가 되어버렸다. 덩달아 교수의 한숨도 줄어들었다.
“턴아웃도 좋고. 그런데 표정이 왜 안 좋니? 어디 아픈 사람처럼.”
그야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품고 있으니까.
“……동작에 집중하느라 표정엔 신경을 못 썼습니다.”
“그럼 음악에 한번 제대로 맞춰볼까.”
교수가 구석의 오디오 기계 위에 놓인 리모컨을 집어 드는 찰나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양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학교 홍보 포스터에서나 가끔 봤을 뿐인 총장이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실까요.”
슈라이버 교수가 놀라더니 문 앞까지 총장을 반갑게 맞으러 갔다. 의외의 인물이 그를 따라 들어오자 교수는 또 한 번 놀란 눈을 했다.
“폰 알브레히트 씨에게 학교를 안내해드리는 중인데 무용과를 후원하셨으니 무용 수업을 한번 보고 싶으시다기에…….”
함께 온 젊은 미남을 알아본 학생들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수아를 흘끔거렸다. 학교에 온다는 말을 그에게서 전혀 듣지 못했던 수아는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얼떨떨하게 눈만 깜빡였다.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여기서 조용히 구경만 하다 사라지겠습니다.”
“아뇨, 손님을 그렇게 박대할 순 없죠.”
남자는 조용히 참관만 하겠다는데도 슈라이버 교수는 수업을 뒷전으로 미루고 직접 무용실을 구경시켜주며 무용과의 홍보 대사처럼 굴었다. 불과 두어 달 전 제 교권을 침해했던 남자를 자존심 센 교수가 환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직접 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잘되었네요.”
학교 공연은 극장 성수기인 연말에 예정되어 있는지라 외부 극장을 잡지 못하고 학교 강당에서 열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번엔 이 지역의 가장 큰 극장에서 막을 올리게 되었다. 다 저 남자가 힘을 쓴 덕분이었다. 더 많은 관객 앞에서 더 큰 무대를 선보이게 된 교수로선 그가 달리 보일 수밖에.
더 많은 관객과 더 큰 무대는 실력 없이 주역을 맡은 수아에겐 부담스러울 따름이지만.
세 사람이 이쪽으로 올 기미를 보이자 수아는 반대편 구석의 바로 도망쳤다. 같은 바를 쓰는 동기가 고개를 돌려 수아에게 시선을 힐끔 던졌다. 수아는 못 본 척하며 동작을 연습했다.
그러는 사이 세 사람은 무용실을 천천히 빙 돌아 수아의 근처까지 왔다.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문으로 갈 줄 알았으나 남자는 수아가 선 자리에서 발을 멈췄다.
바 워크에 집중하는 척하며 등 뒤에서 오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학과 자랑과 유명 발레리나였던 남자의 모친을 향한 찬사같이 뻔한 이야기뿐이었다. 수아가 원하는 실마리가 전혀 없었다.
뭘 하러 온 거지?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바쁜 사업가가 아무 목적 없이 이 먼 학교까지 찾아왔을 리는 없을 것이다.
내 학교생활이 궁금했을까? 바이브레이터를 넣고 하는 학교생활이 궁금했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플리에(Plié: 다리를 벌리며 무릎을 구부리는 동작)를 하다 말고 다리를 바짝 오므리고 선 찰나였다.
‘헉…….’
바를 잡고 있는 손에 커다란 손이 겹쳐졌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남자는 여전히 수아에게 등을 보이며 교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며 손만 뻗어 수아의 손을 잡은 것이다. 이쪽을 마주 보는 교수와 총장의 얼굴엔 못 본 척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모두의 이목이 여기로 쏠리는 중인 걸 남자도 알 텐데 그는 대담하게 수아의 손가락을 어루만지기까지 했다. 하나씩 떼어내 얽으려 했을 땐 결국 참지 못하고 수아가 먼저 손을 빼버렸다.
“프라우 정.”
그 광경이 본인에게 무슨 기회로 보였는지는 몰라도 슈라이버 교수가 수아를 굳이 불러 화제로 삼았다.
“프라우 정은 요즘 가장 놀라운 성장세를 보이는 학생이랍니다. 앞날이 매우 기대되죠.”
교수가 여태 한 번도 듣지 못한 칭찬을 이본에게나 보이는 눈빛과 함께 이 남자 앞에서야 퍼붓는 이유는 알 만했다. 교수의 눈에는 두 사람 사이가 각별해 보일 것이다.
남자의 손장난 한 번이 수아가 그의 연인이라는 오해에 쐐기를 박았다. 그런 소문이 도는 걸 모르더라도 남들 앞에서 이런 짓을 하면 오해를 사는 걸 남자도 알 텐데, 왜 굳이 찾아와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남자에게 저란 존재는 대체 무엇인지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이본.”
수아는 일종의 미끼일 뿐이었는지 슈라이버 교수는 가장 아끼는 제자를 불러 남자에게 손수 소개했다. 주역에서 엑스트라로 밀려날 때였다. 수아는 조용히 물러나 다시 바를 잡았다. 신경은 온통 뒤에서 오가는 대화에 쏠려 있었다.
“프라우 마이어도 프라우 정 못지않게 기대되는 재원이죠. 재능도, 실력도, 노력도 흠잡을 데 없답니다. 날개를 달아주면 무대 위를 날아다닐 발레리나예요. 꼭 한번 소개해드리고 싶었어요.”
수아 같은 밑 빠진 독 말고 이본 같은 유망주에게 후원하라는 소리로 들렸다. 그러나 남자는 노골적으로 거절했다. 이미 밀려난 수아를 화제만이 아니라 자리로도 다시 끌고 가는 것이었다.
“감사합니다만 저는 저의 지젤을 격려할 겸 잠시 들른 것뿐이라.”
“그럼 프라우 정의 지젤을 보고 가시는 건 어떨까요? 그러지 않아도 마침…….”
“저는 그걸 매일 보는 행운아이니 그러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제가 귀한 수업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고 있군요.”
“아.”
교수가 어색한 미소를 짓자 수아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뺨이 화끈거렸다.
“아무튼, 공연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교수와 악수로 작별 인사를 나눈 남자가 수아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수아의 어깨를 팔로 감싸며 이마에 입을 맞추곤 속삭였다.
“밖에서 기다릴 테니 잘하고 와.”
이번엔 수아를 당기지 않고 그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그건 보는 눈이 있기 때문이었다 해도……. 아니다. 보는 눈이 있으면 하지 않으면 된다. 게다가 오직 수아만 들을 수 있는 귓속말은 왜 연인처럼 다정하게 한 걸까. 말투만이 아니라 내용도 연인 같았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다니.
이럴 때면 그가 실은 아직도 저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남자가 나가고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수아는 짝, 박수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슈라이버 교수가 거울 앞의 공간을 눈짓하며 손에 들고 있던 리모컨을 눌렀다.
얼떨떨한 가운데, 지젤 1막의 바리에이션을 음악에 맞춰 추기 시작했다. 이따금 확인해본 교수의 표정이 여느 때에 비할 바 없이 좋았다.
난 잘하고 있어.
자신감이 붙자 몸도, 입꼬리도 한층 가볍게 느껴졌다.
“잘하고 와.”
나도 잘할 수 있어.
어젯밤, 외설의 수단일 뿐이었던 정수아라는 한 인간은 이 순간 오로지 예술을 위해 존재했다.
움찔.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는 그 남자가 서 있다.
바이브레이터가 켜진 건 발끝으로 서서 다리를 뒤로 높이 들어 올린 찰나였다. 움찔하며 축이 잠시 흔들렸다. 가까스로 동작을 마무리하곤 다음 동작을 하며 교수의 눈치를 살폈다. 매서운 눈을 가진 교수라 실수를 못 봤을 리가 없는데 끝까지 보고 평가할 생각인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몸을 움직이는데 배 속의 떨림은 멎을 줄 몰랐다. 지이잉. 몸을 울리는 소리는 음악이 덮어주어 제 귀에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진동 그 자체가 문제였다. 춤이 클라이맥스로 치달을수록 몸도 클라이맥스로 몰아가겠다는 듯이 진동이 세졌다.
“흡…….”
수아는 겉으론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론 야릇한 교성을 삼켰다. 안이 젖어가는지 몸을 움직일수록 점점 아래로 미끄러지는 이물질을 꽉 붙들 때마다 수아가 느끼는 자극은 맹렬해졌다. 춤에, 흥분에, 걱정까지 더해 숨이 세 배로 가빠져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헉…….’
턴을 연속으로 도는 사이 조금씩 아래로 밀려 내려간 바이브레이터가 레베랑스를 위해 무릎을 꿇는 순간, 질구 밖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수아는 바닥이 갈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하체에 힘을 주며 벌떡 일어섰다.
음악이 멎었다. 수아는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기어코 끝냈다. 그러나 남자는 끝내지 않았다.
음악이 사라지자 미세한 진동 소리가 몸 밖에서도 들렸다. 수아는 교수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평가를 기다렸다.
“훈련을 열심히 한 게 눈에 보여.”
교수가 입을 열자 안도했다. 호평을 들은 것보다는 넓은 무용실에 교수의 목소리가 울리며 진동 소리가 묻힌 게 다행이었다.
교수의 평가가 계속되는 사이 수아는 평소보다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다리를 바짝 모으고 섰다. 허벅지 힘으로 바이브레이터를 안으로 밀어 넣으려 애쓰는 중이란 건 아무도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그래, 다 좋은데 표정이 문제야.”
수아는 바닥에 붙이고 있던 시선을 그제야 들어 교수를 바라보았다. 늘 표정 연기만은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던지라 제 특기로 혹평을 들은 건 예상 밖이었다.
“첫사랑이 아니라 첫 섹스의 환희에 취한 여자 같아.”
교수의 독설에 수아의 심장이 덜컥, 박동을 한 박자 놓쳤다. 학생들이 입술을 오므려 웃음을 참거나 키득대는 게 보였다.
숨기려 그렇게 애를 썼는데 얼굴에 다 티가 나고 있었을 줄이야.
제 얼굴이 삽시간에 벌겋게 익는 게 똑똑히 느껴졌다.
제발 이것까진 모르길.
다리 사이를 가리듯 모은 손이 조바심을 이기지 못하고 꼼지락거렸다.
“아, 그리고 하나 더. 뛸 때 왜 그렇게 몸에 힘을 주니? 나쁜 버릇 하나가 사라지니까 다른 나쁜 버릇이 생겼어.”
이것만 빼면 사라질 버릇이다.
나도 잘할 수 있었는데. 나도 한 번쯤은 완벽하게 할 수 있었는데. 그 남자가 망쳤다.
음악과 함께 수업이 시작되고 제자리로 돌아가 바를 잡은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몸속의 떨림도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바 워크를 하며 다리를 들어야만 하는데 아래가 축축이 젖어가는 느낌이 생생했다. 처음엔 열이 올랐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 싸늘해졌다.
죽고 싶다.
수아는 몰래 눈물을 삼켰다.
결국 수업이 끝날 때까지 버티지 못했다. 수아는 교수가 한눈을 판 틈에 몰래 빠져나와 탈의실 구석에 숨었다.
제발, 제발 받아.
전화를 세 번이나 걸었지만 남자는 받지 않았다.
[어디예요?]
당신 미쳤냐고, 악을 쓰고 싶었지만 화를 꾹꾹 누르고 사정했다.
[제가 뭘 하면 멈춰줄 거예요?]
[주인님, 제발 그만해주세요.]
[소리 다 들려요. 다리 들 때마다 젖은 거 보일까 봐 미치겠단 말이에요.]
무용 수업은 한 번 더 남았다. 이 상태로 계속 하다가는 들키고 말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후원자를 유혹해 배역을 빼앗은 여우 소리를 듣는데, 앞으론 바이브레이터를 넣고 춤을 추는 색정광이란 소리까지 들을지도 모른다.
[섹스해요.]
결국 코너로 몰리다 못해 제 입으로 자자는 말까지 했는데 남자는 답이 없었다. 억눌린 화가 설움이 되어 뺨을 하염없이 타고 흘렀다. 그러는 사이에도 배 속을 울리는 진동은 멎지 않았다.
“남자 쪽이 더 홀딱 빠진 것 같던데 어떻게 꼬셨을까?”
갑자기 탈의실 문이 열리더니 누가 우르르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아는 목소리인 걸 보니 수업이 그새 끝난 모양이었다. 수아는 탈의실 구석에 숨긴 몸을 더욱 웅크렸다.
“어릴 때부터 후원받았대.”
“그럼 설마 어릴 때부터…….”
“설마.”
“찾아보니까 남자는 우리보다 나이 꽤 많던데. 걔가 어릴 때면 그 남잔 이미 어른이었을걸?”
“으, 역겹다. 그만.”
동기들은 제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다.
“남자는 숨길 생각이 전혀 없더라.”
“불륜도 아니고 숨겨야 할 이유는 없잖아.”
“이본에게 한 짓이 있는데 떳떳할 이유도 없지 않아?”
“이본이 정확히 그랬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랬다고 어떻게 떠들고 다니겠어. 앞날을 생각하면 입조심해야겠지.”
“맞아.”
“아, 걘 좋겠다. 남자친구가 웬만한 국내 발레단엔 알아서 넣어주겠네.”
“아, 맙소사…….”
“왜? 무슨 메시진데?”
“러시아에서 공부하는 친구가 그러는데 같은 클래스에 있는 애가 다른 애한테 염산을 부었대.”
헉, 여럿이 동시에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왜 그랬대?”
“뭐겠어. 질투지. 원래 걔가 그 학교 탑인데 요즘 부진했다더라.”
“미쳤어. 아무리 그래도 그런 짓을 해?”
“누군데?”
“어…… 잠깐만……. 마리나 카민스카라고…….”
“헉, 걔 로잔에서 상 받았던 애, 어? 잠깐.”
“응?”
“조용히 해봐.”
모두가 입을 다물어도 탈의실은 정적에 잠기지 않았다.
지이잉.
진동 소리가 멎지 않았으니.
제 처지를 잊고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수아의 가슴이 철렁했다.
“안 들려?”
“들려.”
풋, 작게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무슨 소리인지 알아챈 것이었다.
“뭐야, 이거. 누구야?”
“난 아니야.”
키득거리는 소리 사이로 누군가가 몸을 일으켜 탈의실 안을 돌아다니는 소음이 들려왔다. 제가 숨어 있는 구석으로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수아는 몸을 웅크렸다. 온몸에서 핏기가 가시는 느낌. 기절할 것만 같았다.
“소리, 이쪽에서 나는데?”
“누구 가방에 바이브레이터 켜져 있나 보다.”
“네 거야?”
“아닌…….”
말이 중간에서 끊기더니 잠시 후 수아의 등 뒤 어딘가에서 로커가 벌컥 열렸다. 부스럭, 가방을 뒤지는 소리가 난 후에야 다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야.”
깔깔, 목청껏 웃는 소리가 탈의실에 메아리치던 찰나였다.
지이이잉.
수아의 손에 들린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바닥에 떨어트릴 뻔한 걸 겨우 붙잡았다. 사고가 멈춰 버튼 하나만 누르면 진동이 꺼진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화면 한가운데에 나타난 이름을 바라보며 손을 떨었다.
“아, 누가 핸드폰 두고 갔나 봐.”
동기들은 다행히 카민스카의 이야기를 하다 그냥 나가버렸다. 한숨을 돌리기 무섭게 잠깐 끊어졌던 전화가 다시 왔다. 받자마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왜 울어, 내 강아지. 무슨 일 있었어?
조금 전처럼 너무나 부드러운 목소리. 부드러워서 잔인한 목소리였다.
해가 짧아지는 계절이었다. 아직 오후 5시도 되지 않은 시각이건만 도로는 석양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프랑크푸르트를 향해 아우토반을 질주하는 차 안에서 수아는 운전대를 잡은 남자의 심기를 몰래 살폈다. 남자는 유독 말이 없었다.
화가 난 건가.
정작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자신이건만 수아는 그럴 수 없는 절대 을이었다. 게다가 그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자위하는 모습을 영상 통화로 보여준 후 수아는 허락받지 않고 바이브레이터를 몰래 뺐다. 화가 나서 충동적으로 한 짓이었다. 그러곤 뒷일이 걱정되어 수업이 끝나고 그의 차에 타기 전에 다시 넣었지만 그사이 남자가 카메라를 켜 봤다면 허락 없이 뺐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들키지 않았다는 뜻은 못 된다. 차에 탄 후 20분 남짓 시간이 흐르는 사이 한마디도 없는 건 심상치 않았다.
어색해서 무슨 말이라도 하려던 때였다. 남자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가 센터 콘솔의 스크린을 터치하자 비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잡지며 이런저런 사람들 이름이며, SNS 회사 이름과 브랜드 론칭 같은 말이 오갔다. 모르는 단어와 이름이 너무 많아 무슨 이야기인지는 전혀 파악할 수 없었지만 남자의 심기가 좋지 않다는 건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 적나라하게 전해졌다.
“뱀파이어 같은 것들.”
남자가 전화를 끊자마자 중얼거렸다.
그럼 회사 일 때문에 화가 난 건가?
들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안도하는 한편으론 계속 마음이 불편했다. 화난 사람과 한 공간에 있어서.
어떻게 화를 풀어주지?
고민하며 시트에 조금 전보단 편하게 몸을 묻은 찰나였다. 차가 갑자기 3차선으로 차선을 바꾸더니 속도를 줄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우토반 옆의 공터로 빠져나가기까지.
나무로 빽빽하게 둘러싸인 공터에는 한쪽의 간이 화장실과 피크닉 테이블 따위를 두고 대형 트럭 여러 대와 낡은 캠핑 트레일러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아우토반을 달리다 보면 흔히 나오는 작은 휴게소였다.
여긴 왜.
의아한 눈으로 보았지만 남자는 수아에게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공터의 빈자리에 차를 세우더니 정면을 바라보며 여태 굳게 닫고 있던 말문을 열었다. 남자가 수아에게 한 첫마디는…….
“내려.”
……였다.
그 순간만 해도 그런 생각을 했다.
들켰구나. 그래서 저번에 규칙을 어겼을 때처럼 숲에서 벌을 주려는 거구나.
그러나 여기서 옷을 벗을 순 없었다. 저번만큼 울창하고 깊은 숲도 아니었고 지금은 아무도 보이지 않아도 수시로 차나 사람이 지나갈 만한 곳이었다.
저 많은 트럭의 기사들은 다 어디 있을까. 여긴 식당도, 호텔도 없으니 모두 트럭 안에 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곳이 절대 아니란 뜻이다.
수아는 용서를 빌기로 했다.
“주인님…….”
“주인?”
남자가 조소했다.
“네가 주인이 어딨어? 네 멋대로인 주제에.”
그는 잘못했다고 비는 수아의 안전벨트를 풀더니 문까지 활짝 열어주었다.
“넌 이제 자유야. 잘 가.”
화난 얼굴이 아니라 온화하게 웃으며 그런 말을 했다.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제가 잘못했어요.”
수아는 남자의 팔에 매달렸다. 하지만 그에게 수아를 떼어내는 건 귀찮게 구는 파리를 쫓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옆으로 떠밀리다 못해 차 밖으로 떨어졌다. 아스팔트에 엉덩방아를 찧고도 아픈 줄 몰랐다. 그가 그대로 출발해버릴까 겁에 질려 허겁지겁 차로 기어 올라가 악착같이 매달렸다.
“정말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난 네게 스스로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 시간을 줬어. 넌 그런데도 날 빤히 쳐다보면서 내가 그냥 넘어가주기만을 바라던데. 그건 잘못한 사람의 태도가 아니지.”
그저 질 나쁜 장난질에 잠깐 장단 맞추지 않은 게 왜 진심으로 빌어야 하는 죄가 되는가. 이건 대체 어디까지가 장난이고 어디까지가 진짜인가.
그런 이성적인 의문은 공포로 마비된 머리에 비집고 들 틈이 없었다.
“저도 잘못한 건 아는데, 무서워서 그랬어요. 들킬 것 같아서 뺀 것뿐이에요. 용서해주세요.”
“들키면? 네가 알아서 해야지. 남의 돈을 버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았어? 내 돈 필요 없고, 내 명령 듣기 싫으면 언제든 계약 파기하고 가면 돼. 난 아쉽지 않거든.”
네가 아쉽지.
그가 하지 않은 말이 머릿속을 찡하게 울린다. 제가 뭘 그리 잘못한 건지, 제가 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는 건지 억울해하는 건 사치였다. 돈 얘기에 겁부터 덜컥 집어먹은 수아는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다.
엎드려 남자의 다리 사이로 고개를 숙였다. 제 손으로 그의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남자는 이미 터질 듯 발기해 있었다. 이 상황을 남자는 즐기고 있다. 저를 갖고 노는 중일 뿐이다. 그 빤한 증거를 수아는 놓쳤다.
“웁…….”
드로어즈 밖으로 성기를 꺼내 쥐고 쿠퍼액을 흘리는 귀두를 입에 물자마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강요받지 않고 하는 오럴 섹스는 처음이었다. 항상 남자가 알아서 목구멍까지 쑤셔 박고 허리를 흔들었다. 목구멍 속으로만 비명을 지르다 기절하고 다시 눈을 뜨면 어느새 끝나 있는 게 이 행위였다.
그래서 할 줄 모른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수아는 남자가 제 다리 사이에 하듯이 귀두 끝을 혀로 핥고 입술로 빨았다. 한참을 그랬는데도 남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조바심이 났다.
이러다 쓸모없다고 내쫓을지도 몰라.
결국 긴 살 기둥의 가운데를 한 손으로 쥐고 스스로 머리를 흔들었다. 손이 닿을 때까지만 삼키는데도 굵은 귀두가 목을 콱 틀어막았다. 뱉어내려는 찰나였다.
“우욱…….”
커다란 손이 수아의 뒷머리를 우악스럽게 눌렀다. 타액에 흥건히 젖은 손이 수아의 얼굴에 눌려 뿌리까지 미끄러졌다. 그와 동시에 살 기둥이 반 이상 수아의 목구멍으로 쑥 밀고 들어왔다.
“하아, 웁…….”
머리를 짓누르는 힘이 풀려 고개를 들면 숨 한 번 제대로 삼키기도 전에 다시 짓눌려 성기를 삼켰다. 그 짓을 반복하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가 손을 떼도 머리를 바로 들지 못했다. 그때부터 남자는 정신이 혼미해 굼떠진 수아의 머리채를 잡고 스스로 움직였다.
“이렇게 하는 거야.”
그의 리듬을 따라 숨을 쉬다 보니 정신이 돌아왔다.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안도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남자가 나를 당장 버리지는 않겠구나, 였다.
“하…….”
그때부터 열심히 혀를 놀리기 시작했지만 남자의 성에는 차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수아의 머리채를 위로 당겼다. 입안을 들쑤시던 성기가 완전히 빠져나가고, 수아가 그와 눈을 마주할 때까지.
“이건 아직 훈련이 더 필요하겠어.”
“열심히 할게요.”
수아는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으며 악착같이 매달렸다. 품에 안기려는 찰나 남자가 머리채를 쥔 손을 돌려 밖을 보게 했다. 그의 다른 손이 공터 건너편, 창문이 모두 가려진 캠핑 트레일러를 가리켰다.
“이상하지 않아? 차 없이 트레일러만 덩그러니 있다니.”
갑자기 저건 왜.
수아는 버려진 트레일러 따위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저게 뭔 줄 알아?”
그 찰나 트레일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아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해줄 필요 없는 답을 남자는 귓가에 차근차근 속삭였다.
“이동식 성매매 업소. 장거리 트럭 기사를 고객으로 삼는. 그래서 트럭이 자주 다니는 물류 창고 단지나 아우토반에 있어. 밑바닥 중의 밑바닥이지.”
점점 크게 흔들리는 트레일러에서 고개를 돌리려다 이번엔 더 세게 머리를 붙들렸다. 귓가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입술은 쉼 없이 무서운 말을 속삭였다.
“수아, 네가 저 좁은 데 온종일 갇혀서 푼돈을 받으며 냄새 나고 뚱뚱한 늙은이들에게 몸을 판다고 상상해봐. 지금의 네가 더 낫지 않아?”
“읏…….”
남자가 수아의 뒷머리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창문에 그녀의 얼굴이 짓눌리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돌변했다.
“한 번 더 내 말 어기면 널 저기 가둬버릴 거야. 훈련은 충분히 되겠지.”
“시, 싫어요. 잘못했어요. 다신 안 어길게요.”
“잘 들어.”
남자가 수아의 귓가에 나긋하게 속삭였다.
“네가 내 페니스를 성의 없이 빠는 사이에 저 트럭에서 쉰은 넘어 보이는 남자가 나와서 저기로 들어갔어. 그 남자와 나, 둘 중에서 누가 더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저쪽 실력은 모르겠지만 내가 돈값 못 하는 창녀를 산 건 잘 알겠어. 운도 없지.”
남자가 머리를 던지듯 놓자마자 수아는 레깅스를 아래로 끌어 내렸다. 그를 향해 기어가며 바이브레이터를 끄집어내 남자를 받을 자리를 만들었다.
“이, 이건 잘할 수, 있어요.”
아마 그럴 것이다. 확신은 없지만.
남자를 등지고 무릎 위에 앉아 제 손으로 질구를 벌려 꼿꼿이 머리를 들고 선 귀두를 삼켰다. 천천히, 끝까지 밀려 들어올 때까지 주저앉았다가 성기를 힘주어 붙들었다.
“하아…….”
이건 잘할 수 있다는 게 착각은 아니었는지 남자의 반응이 확연히 달랐다. 엉덩이를 흔들고 돌릴수록 뒤에서 들리는 신음과 목덜미로 쏟아지는 숨이 거칠고 뜨거웠다. 그는 수아를 두 팔로 끌어안고 어깨에 이를 박기까지 했다. 두꺼운 후드 티에 가로막혀도 그 단단함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세게.
“아!”
후드 티 속으로 정신없이 파고들어 온 손이 브라를 젖혀 올리고 테이프를 떼어내는 찰나의 아픔에 수아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온몸을 들썩였다. 턱을 갑자기 쥐고 제 쪽으로 돌리기에 키스를 하려는 줄 알았지만 남자는 수아의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핥아먹고 놓아주었다.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기어코 테이프의 반을 떼어버리고 가슴 한쪽을 손에 넣었다. 접착제 탓인지 끈적하게 들러붙은 손이 커다란 살덩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반대쪽도 손에 넣으려 할 줄 알았더니 남은 손은 수아의 다리 사이에 파묻혔다. 성기가 마찰하며 밀려 나온 애액을 손끝에 묻혀 음핵에 바르고 주위의 점막을 끌어와 젖은 돌기를 문질러댔다.
수아도 즐기길 바라는 걸까, 그저 섹스 토이에 달린 버튼을 누르는 것뿐일까.
어느 쪽이든 수아는 흥분할 여유가 없었다. 언제 맹수가 지나갈지 모르는 들판 한가운데에 서서 수컷을 받아내는 암컷처럼 초조한 눈을 굴려 제 눈앞에 훤히 펼쳐진 공터를 두리번거렸다. 공터 저쪽의 흔들림은 어느새 멎었는데 이쪽의 흔들림은 멎을 줄을 몰랐다.
제발 끝날 때까지 아무도 오지 마라.
찌걱찌걱. 허리 짓이 갈수록 절박해졌다. 윽. 남자의 신음도 절박해졌다. 쿠르릉. 그 순간 땅이 울렸다.
휴게소 옆으로 대형 트럭 한 대가 지나갔다. 노란 헤드라이트 불빛이 일렬로 선 나무 사이로 채찍처럼 쏟아지며 어둠에 숨어 야한 몸짓을 하는 수아를 매섭게 후려쳤다.
그새 해가 졌다. 건너편의 캠핑 트레일러에 불이 켜졌다. 가림막을 쳐둔 창문이 반쯤 열리더니 짙은 매니큐어를 바른 주름진 손이 밖으로 불쑥 나왔다. 손에는 불붙은 담배가 들려 있었다. 뿌옇게 퍼져 나온 담배 연기가 사라지자마자 수아는 검은 아이라인이 사납게 번진 눈과 마주쳤다.
별 해괴한 꼴을 다 봤다는 눈, 그러다 딱하다는 눈.
캠핑카의 여자가 나를 딱하게 생각한다.
수아는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눈물을 왈칵 터트렸다.
“지금의 네가 더 낫지 않아?”
아니.
밑바닥 중의 밑바닥에서 보기에도 수아는 딱하고 해괴한 인생이었다.
***
처음은 돌이켜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몸과 마음의 충격만 놓고 도토리 키재기를 해보자면 첫날이 단연 최악이었다 우겨볼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날엔 행위자 둘만 있었을 뿐, 관객은 없었다.
감정이든 육체든 수챗구멍 취급을 받는 건 익숙하다.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이젠 무뎌져서 하루만 지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타인에게 그 꼴을 전시당하는 건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오가는 길의 구석에 숨어 허리를 흔들다 끝끝내 동정의 눈빛을 샀던 순간, 수아는 제 존재 자체가 거세되는 고통을 느꼈다.
나는 동물원 우리에 갇힌 짐승이다. 더는 인간이 아니다.
한순간에 원치 않는 곳에 묶여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하는 짐승으로 전락했다. 엄마와의 삶을 감옥이라 불렀던 몇 달 전의 자신이 부러워지는 날이 올 줄이야. 감옥에는 형기가 있게 마련이나 짐승 우리는 죽어야만 나갈 수 있다.
죽어야만.
수아는 세제 냄새가 나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아는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간호사들의 눈인사를 태연하게 받아내는 내내 코트 주머니 속에 숨긴 손은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우리의 짐승은 기약 없는 감금을 견디다 못해 탈출을 시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도망치는 건 해법이 되지 못한다는 걸 저번에 깨닫지 않았나. 근본적인 해법이 필요했다. 극단적이거나.
엄마의 이름이 알파벳으로 적힌 병실 문을 열었다. 채광을 위해 커튼을 걷어둔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눈부셨다.
사람을 죽이기엔 너무나 밝고 화창한 늦가을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