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지플레이
나 같은 남자를 좋아하지 마.
무서워해야지.
***
“수아도, 어머님도 출국 못 해요.”
“어째서요?”
“아직 수사가 끝나지 않았잖아요.”
하지만, 하지만 난 이번 달 내로 출국해야 하는데. 못 하면 다신 기회가 없는데. 그럼 적어도 아파트라도 팔아서 오게 보내줘. 내가 빚더미에 깔려 죽기 전에.
매주 오는 거액의 청구서를 떠올리니 또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핑 돌았다.
“수아!”
턴을 돌던 수아는 교수의 외침에 화들짝 놀라 발을 멈추었다.
“그게 아니라고 했잖니. 이젠 그나마 잘하던 표정 연기까지 무너지고 있어.”
교수가 암담한 얼굴을 한 손에 묻었다. 연습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에 잠겼다. 고개를 숙인 채로도 느껴지는 학생들의 시선도 정적만큼이나 차가웠다.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다시 뒤로 가려는 수아에게 교수가 멈추라 손짓하더니 물었다.
“어머니 때문에 그래?”
한계까지 치민 짜증을 꾹꾹 억누르고 심기가 허락하는 한 다정하게 대해보려 애쓴 듯한 목소리였다. 가족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인 수아를 위해서인지, 그런 학생을 몰아세웠다가 깎일지도 모를 자신의 평판을 위해서인지.
“아뇨.”
더는 엄마 일을 핑계로 삼는 여우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자마자 교수의 목소리에서 다정함은 흔적도 없이 말라버렸다.
“그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연습실까지는 가져오지 말렴.”
“죄송합니다.”
수아가 교수에게서 훈계를 듣는 사이 잠시 연습을 멈췄던 학생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간의 기척과 열기로 가득한 공간에서 수아는 혼자보다 더한 외로움을 느꼈다.
공연 배역이 부당하게 바뀐 걸 두고 불만의 목소리가 커졌다. 누군가는 투서를 넣었다. 사태가 크게 번질 조짐이 보이자 결국 교수가 배역이 변경된 이유를 밝혔다.
“프라우 정의 어머니께서 얼마 전 사고로 사경을 헤매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은 프라우 마이어가 학우를 응원하고자 관대하게도 배역을 먼저 양보해주었습니다. 여러분도 프라우 마이어를 본받아 힘든 시간을 보내는 프라우 정을 응원하길 바랍니다.”
거짓으로.
엄마가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걸 그렇게 모두가 알게 되었다. 대부분 처음엔 수아를 동정했으나 얼마 가지 않았다. 양보했다던 이본의 태도는 양보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앞뒤가 안 맞는 급조된 핑계라는 걸 다들 알아보았을 것이다.
이본에게 수아가 직접 해명하고 사과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네 말 믿는다고 웃으며 사과를 받아준 이본은 제 친구들 앞에서는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이본은 이따금 그때처럼 웃으며 수아에게 말을 건다. 그럴수록 학생들 사이에서 수아는 염치없는 여우가 되고 이본은 마음 넓은 천사가 되었다.
모두의 동정 어린 눈빛은 당연히도 수아가 아닌 이본에게로 옮겨갔다. 이본과 친한 무리는 이본과 떠들다 수아가 들어오면 입을 다문다. 이젠 다른 무리들도 그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학교에서 고립되어가는 수아의 편에 서줄 사람은 없었다. 그간 엄마 때문에 친구를 전혀 사귀지 못했었으니까.
결국 버티다 못해 며칠 전에는, 제게 알브레히트의 회장과 사귀는 게 사실이냐고 물었던 그 눈치 없고 입 가벼운 친구를 따로 만났다. 그 아이는 굉장히 신이 나 있었다.
그 남자가 제 연인도 아니고, 배역을 빼앗아달라고 한 적은 더더욱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 친구는 믿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어 보였다. 그 애가 동기들 사이에서 수아의 편을 들어주고 다니는 것 같진 않았으니까. 그냥 이 가십에 끼어드는 게 재밌을 뿐인 건 수아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저 그 애가 저를 이용하는 만큼 저도 그 애를 이용할 수 있길 바랐다.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진심은 통하고 진실은 승리한다는,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들의 말을 믿은 것도 순진했다. 내가 진심으로 아니라고 해봐야 다수의 남이 맞다는 것이 진실이 되는 곳이 현실이었다.
수아는 이 이상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제 분수에 맞지 않는 배역은 제 발에 맞지 않는 토슈즈만큼이나 괴롭다. 빼앗은 배역, 얼마나 잘하나 두고 보자는 시선의 벽이 사방에서 수아가 설 곳을 좁혀온다. 숨이 콱 막힌다. 눈앞이 울렁울렁 일렁거린다. 축제의 여왕이 된 소녀를 연기하느라 활짝 펴두었던 어깨가 움츠러든다.
“수아!”
“우욱.”
저를 부르는 교수를 뒤로하고 입을 틀어막은 채 정신없이 뛰쳐나갔다. 화장실 문을 벌컥 열자마자 참지 못하고 신물을 바닥에 울컥 토해버렸다. 시야의 끝에 청소부의 장화가 보이자 수아는 울먹이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모두. 나도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 여기 있고 싶지도 않아.
제발 믿어달란 말이야.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는 적막한 차 안에서 수아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오늘 하루 어땠어? 난 집으로 가는 길이야.]
수아는 잠금 화면에 뜬 메시지를 보자마자 화면을 끄고 다시 어두운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와인 한 잔 어때?]
답을 하지 않았더니 또 온다. 본심을 드러내며.
이번에도 수아는 답하지 않았다.
지금 저 남자가 유일하게 제 편에 서줄 사람이건만 수아는 그에게 가지 않는다. 의도가 선하건 말건, 결과적으로 수아가 학교에서 따돌림당하게 만든 사람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수아를 대하는 그의 의도 자체가 불편했기 때문이지.
남자는 분명 수아에게 성욕을 느끼고 있었다. 설령 마음이 있어 몸도 동하는 거라 해도 받아줄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마음도 부담스러운 때에 몸은 더더욱 부담스러웠다.
수아는 고작 스무 살, 남자 경험은 손 한 번 잡아보긴커녕 데이트도 못 해봤을 정도로 전무했다. 스킨십에 기대와 환상만큼이나 두려움도 많을 수밖에.
그런데 그는 기회만 보이면 잘 생각인 걸 숨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남자가 이상한 사람인 건 아니지 싶었다. 문화 차이일 뿐이지.
첫 학기 때 동기들과 클럽에 가보곤 얼마나 기겁했던지. 한참 놀다가 화장실에 갔더니 옆 칸에서 섹스를 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였다. 여자의 목소리는 분명 수아의 친구였고 남자는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알고 보니 독일에서 그런 건 별스러운 일이 못 되었다. 바람피운 것만 아니라면 비난받을 일도 아니란다. 그 사람의 자유니까. 그리고 이곳에서 사랑과 섹스는 별개니까.
그러나 수아는 사귀기부터 하고 탐색기를 갖다가 믿을 만하다 싶으면 자는,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섹스는 무서우니까.
“섹스가 왜 무서워?”
동기가 예전에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리는 덴 섹스만 한 게 없어. 아, 물론 잘생기고 크고 잘하는 사람이랑 해야 하지만.”
잘생기고 크고……. 그럼 스트레스가 한 방에 날아가?
지이잉.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다. 아마 그 남자일 것이다. 와인을 마시자거나 같이 넷플릭스를 보자거나. 남자가 이런저런 제안을 해오는 걸 며칠째 이 핑계, 저 핑계로 거절했다.
오늘도 거절할 핑계를 지어내야 하는 머릿속 한구석에서 ‘오늘은 거절하지 말까?’ 하는 나쁜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어차피 나쁜 년이 된 김에 엄마 말대로 발랑 까진 년도 되어볼까 싶었다.
착하게, 바르게. 그렇게 사는 것도 여유가 있을 때 부리는 사치지. 되는대로 살래. 내가 어떻게 살든 누가 걱정이나 해?
누구에게 향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반항심이 목 끝까지 차오른 스트레스를 뚫고 치밀었다. 반항은 그렇게 숨통을 틔운다. 이 숨 막히게 하는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리려면 제대로 된 반항이 필요했다.
그러나 저답지 않은 미친 짓을 저지르는 데에는 큰 결심이 필요하다.
한참을 망설이다 어렵사리 메신저 앱을 열어본 수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안녕, 수아. 잉그리드란다. 오늘 잠시 만날 수 있을까? 할 이야기가 있어.]
날카롭게 치밀던 반항심이 사그라든다. 잠시나마 트였던 자리를 두려움이 콱 틀어막았다.
프랑크푸르트 시내의 어느 호텔 바에서 만난 잉그리드는 투피스 트위드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저건 엄마가 어렵게 구했다고 자랑하던 진짜 같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일 것이다.
지금 저 손에 들린 레드와인을 수아의 면상에 끼얹다가 옷에 튄다면 돈 몇백이 몇만 원 같을 부자도 아까워할까?
수아는 금발의 외국인과 마주 앉아 한국 아침 드라마에나 나올 장면을 떠올렸다. 여기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땐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다는 말이 진짜일지도 모른다.
잉그리드는 시킨 술이 나오고도 한참이나 용건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학교생활이나 엄마 일 같은 의례적인 안부를 전혀 묻지 않는 걸 보면 무슨 용건인지 알 만했다.
우리 아들과 헤어져.
‘죄송합니다. 사귄 것도 아니고 걱정하시는 일은 없었어요. 아파트에서는 곧 나가겠습니다. 저도 나가고 싶었어요.’
수아는 오는 길에 준비한 말을 머릿속으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한 달에 2천 유로(약 270만 원) 정도인 후원금으로 엄마 병원비에 제 생활비까지 감당하는 건 어림도 없지만 그것마저 끊기면 수아가 빚더미에 깔려 죽는 날이 눈앞으로 앞당겨질 것이다.
잉그리드는 와인 잔이 다 비어갈 때가 되어서야 말문을 열었다.
“아파트며 변호사며 차량에 기사까지. 아주 색다른 후원을 받고 있던데, 이 후원은 내가 아니라 내 아들이 한다는 걸 알고 있니?”
역시나. 용건은 수아의 예상대로였다.
“죄송합니다. 사귄 것도 아니고 걱정하시는 일은 없었어요. 아파트에서는 곧 나가겠습니다. 저도 나가고 싶었어요.”
미리 준비한 말을 그대로 쏟아냈지만 돌아온 대답은 수아의 예상과 완벽히 어긋났다.
“나갈 필요는 없단다. 네 사정이 딱하니 살 곳을 지원해주는 건 나도 찬성이야. 내 아들이 같이 사는 게 마음에 걸릴 뿐이지.”
“다행히 걱정하실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내 아들 쪽에서도 그런 일이 없었니?”
“…….”
“대답을 못 하는구나.”
잉그리드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트위드 재킷 주머니에서 작고 납작한 금빛 상자를 꺼내 열었다. 담배 상자였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담배가 반 넘게 타들어가고서야 후원자는 매캐한 연기를 한숨과 함께 뱉으며 물었다.
“필립이 네게 왜 이런 걸 아낌없이 주는 것 같니? 남자가 여자에게 대가로 바라는 건 하나뿐이야. 조심하렴.”
수아는 의아해졌다.
보통은 내 아들에게서 떨어지라고 수아에게 경고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잉그리드의 말은 아들이 아니라 남의 딸을 걱정하는 것처럼 들렸다.
“엄마면서 왜 아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나, 왜 엉뚱하게 수아를 걱정해주나 싶겠지.”
잉그리드의 입에서 수아의 속내를 읽은 듯한 말이 나왔다.
“결국 둘 다 같은 길이란다. 수아를 위하는 길이 내 아들을 위하는 길이야. 난 하나뿐인 아들이 나쁜 길로 가는 걸 원치 않아. 물론 네가 나쁜 길이라는 뜻은 아니지.”
잉그리드는 재떨이에 담배를 다소 신경질적으로 짓눌러 끄며 한숨과 실소를 함께 터트렸다.
“내가 낳은 아들을 두고 이런 말 하는 거 우습지만 필립은 괜찮은 남자는 못 된단다. 조심하렴.”
“네, 알겠습니다.”
수아가 재깍 고개를 끄덕이자 잉그리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웨이터에게 와인 한 잔을 더 시켰다. 그렇게 한탄이 시작됐다.
“발레리나가 실력을 뽐내야 할 곳은 무대란다. 침대가 아니라.”
후원자와 추잡스러운 관계를 맺는 발레리나, 그리고 발레리나와 후원자의 관계를 불순하게 보는 세상. 그들 때문에 순수하게 예술에 헌신하는 발레리나들이 도매금으로 묶여 더러운 시선을 받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이야기였다.
“우린 매춘부가 아니야. 필립에게 배신감마저 드는구나. 제 모친이 발레리나인데 발레리나를 몸 파는 여자 취급하다니.”
“아, 그럼…….”
마음이 있는 듯했던 건 역시 그런 척일 뿐이었을까. 수아를 좋아하는 듯이 굴었던 건, 그가 억지로 안겨준 ‘선물’처럼 그저 수아와 한 번 자보려는 미끼였을지도 모른다.
결국 대가로 몸을 달라고 그 모든 짓을 했구나.
차가운 와인 세례라도 받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게 성매매와 뭐가 다를까.
그와 자서 손해 볼 것 없다던 제 생각이 짧았다.
“발레리나로서의 자존심이 있지.”
수아는 잉그리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굳게 다짐했다.
난 몸 파는 여자가 아니야. 절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야.
“이야기가 잘 통해 다행이구나. 그럼 이만.”
잉그리드가 먼저 일어서자 수아는 배웅을 하러 호텔 입구까지 따라갔다. 대기 중이던 세단에 타려던 잉그리드가 수아를 돌아보더니 다시 한번 당부했다.
“네 후원자가 구원자처럼 구니? 잊지 마. 후원도, 구원도 공짜가 아니야.”
***
잉그리드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눈은 고요한 분노를 불태웠다. 아들은 말 한마디 없이 숨 막히는 공기만으로 그녀의 목을 조르는 중이었다.
아들이 본성을 드러내면 잉그리드도 별수 없었다. 목구멍까지 떨면서도 꼴깍 군침을 삼키는 자신은 정말이지 신도 구원 못 할 말종이었다.
그녀는 아들의 저와 닮은 모습만을 사랑했다.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하던가. 아들을 향한 사랑의 이면에선 동족 혐오와 경쟁심을 느꼈다.
아마 자식도 제 어미에게 다를 바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으리라.
잉그리드는 그걸 잘 알면서도 자극했다. 원래 내 손의 금 딸랑이보다 남의 손에 쥔 나뭇가지가 재미있어 보이는 법이라서.
필립은 안락의자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자연히 위로 들린 발이 까딱까딱, 잉그리드의 눈앞에서 흔들린다. 그럴 때마다 어두운 방의 유일한 조명 아래에서 검은 구두 끝이 쇳덩이처럼 번쩍번쩍 빛났다. 눈을 시리도록 찌르는 게 위협적이었다.
이 늦은 밤에 내기의 대가를 바치러 온 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제 모친이라 하더라도 걸림돌이 되는 순간 저 발로 걷어차서 치우겠다는 뜻은 몸짓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러나 필립은 위협을 그치지 않고 또 다른 걸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딱. 딱. 딱.
짧게 깎인 손톱 끝이 그의 손에 들린 기다란 원통을 두드린다. 그 규칙적인 울림이 째깍째깍, 시한폭탄의 초침 소리처럼 들렸다.
아들의 뒤로 보이는 건 길 건너편의 펜트하우스였다. 여자의 거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아들의 손에 들린 건, 잉그리드가 저곳을 훔쳐볼 때 쓰는 천체 망원경이었다.
툭, 툭.
이젠 망원경의 경통을 야구 배트처럼 쥐고 손바닥을 때린다. 당장이라도 부술 것 같지만 그건 걱정할 게 못 된다. 망원경 하나 얼마 한다고. 실은 모른다. 잉그리드는 알 필요 없었다.
내기의 대가는 필립에게서 이야기만 듣는 것이었다. 그러니 허락 없이 훔쳐보았다고 위협하는데, 잉그리드는 섭섭해서 눈물 연기라도 하고 싶은 심경이었다.
망원경이라니. 언제 적 방식인지. 고리타분한 아날로그식으로 훔쳐보기만 해야 하는 이 어미가 불쌍하지는 않니? 어차피 아직은 볼 것도 없던데.
웃는 눈으로 빈정대는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던 아들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나직이 뱉은 첫마디에 잉그리드는 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펜트하우스를 팔까 생각 중입니다.”
“그래, 그 애를 만났어.”
이젠 암묵적으로 엿보게 해주는 것마저 하지 않겠다는 말이었으니까. 어차피 그 여자애의 기사에게서 들어서 알 테니 처음부터 발뺌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스스로 다리를 벌릴지, 무릎을 딱 붙이고 버틸지. 갈림길에 선 중요한 시기 아니니. 네가 큰맘 먹고 들인 첫 장난감인데 네게 먼저 다리를 벌리면 못 쓸 물건이 되어버리니까 아깝잖아? 재밌게 오래오래 갖고 놀라고 이 어미가 아주 조금 손봐준 것뿐이란다. 흔들리는 마음이 일말이나마 있었더라도 오늘 만남으로 꺾였을 거야.”
고해성사인 척하는 변명을 줄줄이 쏟아내는데 필립은 듣지 않고 제 핸드폰만 꺼내 만지작거렸다.
“아무튼 난 널 방해한 게 아니라 도와준…….”
핸드폰 화면이 제게로 향했을 때 잉그리드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이 늦은 시각에도 불을 켜두고 뭘 하나 했더니 여자는 부동산 사이트에서 만하임 시내의 방 한 개짜리 아파트를 알아보고 있었다.
이게 도움이냐는 비난을 잉그리드는 코웃음으로 일축했다.
“그 애가 무슨 돈이 있어서.”
“남의 돈으로 사셔서 시세를 전혀 모르시나 본데 매월 2천 유로의 후원금이면 방 한 칸짜리 보증금은 내고도 남습니다.”
“아닐 거다. 제 모친의 병원비는 어쩌고. 그리고 나가더라도 어차피 다시 들어오게 만들 거 아니니. 왜 고작 이런 일로 안달하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조바심 내다 일을 그르치는 법이란다. 초보들이란, 쯧.”
아쉽게도 그녀의 아들은 도발과 깎아내리기에 넘어가지 않고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잉그리드를 응시하기만 했다. 역시 그녀의 아들이었다.
“난 펜트하우스에서 나갈 필요 없다고 했단다.”
“그 결과가 이거군요.”
“…….”
“그럼 감사합니다 하고 남의 집에 엉덩이 붙이고 있는 여자인 줄 아셨나 봅니다. 그건 본인 아닌가?”
아들의 삐딱하고 무례한 비난에 잉그리드는 쾌감과 불쾌감을 동시에 느끼며 입매를 심기만큼이나 묘하게 비틀었다. 제 실수인 걸 끝까지 부인할 수 있었더라면 불쾌감은 없었을지도. 그 여자,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문화 속에서 크지 않은 걸 잠시 잊었다.
“상대의 배경과 심리도 파악 못 하시다니. 실력이 녹슨 건지, 벌써 치매가 오는 건지. 아무튼 재단 일에서도 은퇴하실 때가 되었군요.”
필립이 제 무릎 위의 망원경을 먼지라도 털듯이 쳐냈다.
파삭.
대리석 위로 떨어진 경통이 파열음을 내더니 데구루루 굴러가다 멈췄다.
“필립.”
바닥만 쳐다보던 잉그리드는 스쳐 지나가는 아들의 소맷자락을 손을 뻗어 붙잡았다.
“오랜만에 소녀처럼 설레서 설친 건 인정해.”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와중에도 자기변호를 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은 냉담했다.
“설렐 만한 건 너도 인정하잖니.”
그간 필립의 주변에 여자라곤 밀라뿐이었다. 소꿉친구인 데다 침대 안팎의 모든 면에서 경쟁자나 마찬가지인 그 애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필립에게 제 심장을 내어주지 않을 녀석이었다. 그래서 도무지 잉그리드의 심장을 뛰게 하는 구석이 없었다.
그런데 모든 면에서 밀라와 반대인 완벽한 먹잇감이 나타났으니 설레지 않을 리가. 손을 뻗지 않고 배길 리가 있을까.
“생각이 짧았던 건 맞다만 난 경험자로서 도움을 주려 한 것뿐이야.”
“도움?”
필립이 손을 뿌리치며 코웃음을 쳤다.
“남이 종이배를 띄워둔 연못에 돌을 던지고 도움이라고 우겨보시죠. 그 물결에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거나, 침몰하거나, 어차피 남의 배라 본인은 상관없는 주제에.”
“너도 딱히 상관없잖니. 또 구하면 그만인 장난감일 뿐인데.”
“말 돌려서 빠져나가려는 수, 빤히 보입니다. 그 여자가 장난감이든 뭐든 내 것이고, 당신은 남의 것 탐내지 말고 당신 장난감이나 질릴 때까지 쓰다 조용히 남몰래 폐기 처분하면 됩니다. 싫으면 여기서 나가시든지.”
“좋아. 다신 그러지 않으마.”
잉그리드가 고집을 꺾고 백기를 들자 필립은 등을 돌리며 살벌한 시선을 거뒀다. 그녀는 아들이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참았던 조소를 터트렸다.
“세 살 때랑 달라진 게 없어.”
제가 아끼던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던 아이에게 필립이 무슨 짓을 했더라? 그때부터 싹이 보이긴 했다.
그토록 아꼈던 장난감은 지금 어디 있을까? 쓰레기통에 처박혀 사라진 지 오래일 테지.
그 여자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평생 한 장난감만 가지고 노는 아이는 없다. 언젠가 필립이 싫증 나 여자를 버리지 않을까. 첫 장난감에는 각별한 애착을 가질 테니 버리는 데 시간에 꽤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그럼 장난감 신세를 못 견딘 여자가 먼저 손목을 그어 끝내버리려나.
잉그리드는 어느 쪽이든 기꺼이 기쁘게 지켜볼 생각이었다.
어느 쪽이든, 포식자를 알아보고도 잡아먹힌 암캐의 말로인지라 더욱 비참하기 이를 데 없을 테니.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최상층을 향해 빠르게 올라가는 숫자를 응시하던 필립은 눈을 질끈 감으며 뻐근한 뒷덜미를 한 손으로 주물렀다.
허리 아래가 아닌 곳이 뻐근한 건 오랜만이다.
문득 그가 고작 제게 발기했다는 데 충격을 받아 여자가 물에 빠졌던 순간이 떠올랐다.
순진하긴.
열흘도 넘은 일이지만 떠올릴 때마다 픽, 웃음이 나왔다.
그 후로 필립은 제 욕구를 숨기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갖은 핑계를 어설프게 대며 그를 피했다.
겁이 많네. 마음에 들어. 나를 편하게 느끼지도, 좋아하지도 말고 계속 무서워하도록 해.
사냥감에게 겁을 주는 놀이는 즐길 만큼 즐겼다. 이제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던 차에 모친이란 이름의 방해꾼이 끼어들어 그의 사냥터에 제멋대로 덫을 치니 기꺼울 리가.
어머니가 개입해 겁을 주지 않았더라도 여자는 돈을 달라며 먼저 다리를 벌릴 성격은 못 되었다. 필립이 제안했을 때 거절을 못 하겠지. 그리고 그는 제안을 부드럽게 할 생각이 없었다.
가장 거칠게, 굴욕스럽게, 가혹하게.
기분 좋은 상상으로도 뒷덜미의 뻣뻣함이 풀리지 않는다. 필립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으로 향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여자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착해.
도망쳐 숨을 곳을 찾는 건 관둔 건지, 여자는 욕실에서 옷을 벗는 중이었다. 착하게도.
알몸이 된 여자가 샤워 부스로 들어간다. 샤워 헤드부터 뽑아 들더니 아래에 갖다댄다. 레버를 돌린다. 끝까지. 날카로운 물줄기가 연한 살을 무자비하게 두드리도록.
목덜미에 머무르던 뻣뻣한 긴장이 그의 아래로 쏠린다. 여자가 제 몸에서 샤워기를 가져다댄 부위와 같은 곳으로.
필립은 현관으로 들어와 복도 끝의 굳게 닫힌 문을 욕망이 뜨겁게 끓어오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당장 저 문을 열고 들어가 여자를 덮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그의 관자놀이에 굵은 핏대가 섰다.
처음 입주할 때만 해도 여자는 제 몸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그래서 절정이 뭔지 전혀 모르는 몸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여자는 스트레스가 늘자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욕실에서 자위부터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욕실에는 유일하게 마이크를 심었다.
[아, 아!]
텅 빈 복도에 숨넘어가는 교성이 크게 울려 퍼진다. 여자는 지금 제 음탕한 목소리가 문밖에서도 메아리치며 남자의 거친 숨소리와 섞이는 줄 모를 것이다.
샤워기를 음부에 대고 흔드는 손이 갈수록 빨라진다. 저것만으론 감질 난다는 듯, 매끈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내 손은 박자를 잃고 물줄기를 불에 타 죽는 사람처럼 절박하게 몸에 갈겨댔다.
[으응, 아흥…….]
여자가 교태를 부리듯이 몸을 크게 뒤틀었지만 테이프로 꽁꽁 싸매어둔 젖가슴은 제대로 들썩이지도 않았다. 그 가운데가 뾰족하게 튀어나오는 것이 어렴풋이 눈에 보인다. 겹겹의 두꺼운 테이프도 숨기지 못하는 흥분의 증거가 제법 자극적이라 그의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한편으론 그의 지도 없이도 저토록 흥분했다는 사실이 괘씸하기도 했다.
[하윽!]
어느 찰나 여자가 고개를 뒤로 꺾으며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자지러졌다. 덜컹. 여자가 놓친 샤워 헤드에서 물이 분수처럼 솟구친다.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여자의 몸이 힘없이 주르륵 미끄러진다. 다리를 활짝 벌리며.
내 앞에서는 오므려. 벌리는 건 내 몫이니까.
쩍 벌어진 틈으로 물방울이 주르륵 흐르는 분홍빛 음부를 보고 있자니 그의 허리 아래에서도 물이 울컥 터졌다.
착하고도 나쁜 암캐.
그의 기분을 풀어준 건 착하지만 허락 없이 느끼는 건 나쁜 짓이라는 걸, 저 방종한 암캐에게 가르칠 날이 머지않았다.
핸드폰 구석의 시계가 00:00으로 바뀌었다. 보험이 만료되었다.
여자가 빚이란 이름의 목줄을 목에 거는 순간이다.
잡아먹어 없애려던 주인을 살려둔 건 분명 실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론 훌륭한 목줄이 되어주었다. 예전 주인의 가죽을 벗겨 목줄로 삼은 셈. 제 주인의 체취가 주변을 망령처럼 떠도니 암캐는 도망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얌전히 엎드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인이 그새 바뀐 줄도 모르고.
***
수아는 대로변에 서서 한 블록을 모조리 차지한 낯선 건물을 응시했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이곳은 수아의 새 아파트가 아니다. 수아는 갈 곳을 아직 구하지 못했다.
만하임에 있는 아파트를 알아보는 사이 엄마가 폐렴에 걸리는 바람에 지난주보다 병원비가 배로 나왔다. 결국 이번 달 후원금으로 당장 나가겠다는 계획은 무산됐다.
그사이 그 남자의 연락이 드물어졌다. 그나마도 만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안부를 묻는 정도에 그쳤다. 집에서 마주칠 때 물어도 되는 걸 굳이 메신저로 묻는 건 남자가 요즘 바빠 집에 잘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한동안은 그럴 것 같다는 말에 수아는 안도했다. 남자의 집에 좀 더 머물러도 될 테니. 아파트 보증금을 모을 시간을 벌었다.
지난 일주일, 수아는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았다. 인터넷 사이트부터 지역 신문까지 뒤져가며 독어 원어민이 아니더라도 받아주는 자리면 무조건 이력서를 넣었다. 그러나 연락이 오는 곳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도 면접을 보는 족족 떨어졌다.
하는 수 없이 유학생 사이트에서 다들 말리는 한인 식당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틀을 못 채우고 관뒀다.
80년대에 독일로 건너온 사장은 한국이 아직도 80년대 수준인 줄 착각하고 있었고 수아를 선진국에 눌러살 기회를 찾아 헬조선을 탈출한 후진국 유학생 취급했다. 자기한테 잘 보이면 취업 비자를 준다면서 은근슬쩍 음담패설을 하며 성희롱을 하는 건 덤이었다.
그래도 돈이 급해 버티려다 관둔 건 전에 일했던 한국인 아르바이트생이 덩치 큰 독일인 남자친구를 데리고 식당으로 쳐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사장이 그 아르바이트생의 월급을 석 달이나 떼먹었다고. 수아도 떼먹히기 전에 관두었다.
바로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수소문했지만 학교를 다니며 하자니 시간대가 맞는 곳이 잘 없었다. 그렇다고 학교를 관두자니 그랬다간 학생 비자가 끊긴다. 출국도 금지된 처지라 여기 갇혀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되는 것이었다.
그럼 경찰이 와서 잡아 가는 걸까?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깜깜했다.
오도 가도 못 하던 때에 메이드가 매일 아침 문 앞에 놓아주는 신문에서 이걸 발견했다. 수아가 후드 집업의 주머니에서 꺼내 든 건 분홍색 전단이었다.
전단 위쪽에 그려진 로고는 눈앞의 커다란 회색 문 두 쪽에 그려진 것과 같았다. 귀를 밧줄로 묶은 검은 토끼 머리 실루엣. 그 아래에 새겨진 상호는 ‘클럽 로프 버니’였다.
5성급 호텔부터 영사관 세 곳, 그리고 고급 레스토랑 여러 곳까지. 권위 있는 업체나 단체만 입주한 이 건물에 이질적이게도 클럽이 있었다. 그것도 BDSM 클럽.
수아가 아르바이트 면접을 볼 곳이었다.
수아는 분홍색 전단을 펼쳐 다시 읽어보았다. 보수는 건당 80유로에 팁 별도. 평범한 아르바이트라면 풀타임으로 일해야 버는 돈인데 여긴 하루도 아니고 건당이었다.
결국 발레리나로서의 자존심은 거액의 청구서 앞에서 쉽게 무너졌다. 그래도 몸을 팔 정도로 무너지진 않았다.
폴 댄서 구함
건당 80유로에 팁 별도
- 금, 토, 일 근무
- 근무 시간 밤 10시~새벽 2시(공연 일정에 따라 변동 가능성 있음)
- 초보자 환영
- 무용 전공자 및 외국인 환영
- 성매매직 아님
- 스트립 불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