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집
나를 따라와.
깊이, 더욱 깊이.
발 닿지 않는 곳까지.
***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수아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는 찰나 담요가 무릎 위로 툭 떨어졌다. 멀쩡히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수아는 안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의 모양새며 침대 옆의 바퀴 달린 테이블이며, 여긴 병실이었다.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본 수아는 멈칫했다.
혼자가 아니었다니.
창가의 의자에 그녀의 후원자가 긴 다리를 꼰 채 앉아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아…….”
놀라 저도 모르게 바보 같은 소리를 내자마자 남자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눈매가 느슨해졌다. 그는 태블릿을 테이블에 놓고 몸을 일으키더니 수아에게 다가왔다.
“괜찮습니까?”
남자의 물음에 대답할 경황은 없었다. 그가 팔꿈치 위로 접어 올렸던 흰 셔츠 소매를 느긋하게 풀어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저 단정한 손이 제게 한 저질스러운 짓이 떠올랐던 것이다.
수아는 그제야 느꼈다. 원피스 속이 허전하다.
“헉…….”
내려다보니 하늘색 저지 원피스가 가슴 끝의 모양대로 툭 불거져 있었다. 허둥지둥 담요를 목까지 끌어 올렸다. 속살까지 비치지 않은 건 그나마 다행이지만 창피해서 남자와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속옷을 벗긴 건 간호사니까 걱정 마세요.”
“아, 네…….”
“차에서 묻지 않고 속옷을 푼 건 미안해요. 마음이 급해서. 숨을 못 쉬길래.”
“아…….”
응급조치일 뿐이었구나.
제정신이 아닌 저를 남자가 추행하려는 줄 안 것도, 처음에 여기서 눈을 뜬 순간 호텔 침대는 아닐까 의심했던 것도 모두 부끄러워졌다.
“감사합니다.”
수아는 여전히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늘 경찰서까지 와주시고 병원에도 데려와주시고……. 바쁘실 테니 제가 깰 때까지 기다려주시진 않아도 됐는데…….”
꽤 오래 기다렸는지 남자는 슈트 재킷을 벗고 넥타이와 셔츠 단추 두어 개도 푼 모습이었다. 테이블에는 빈 일회용 커피 컵 두 개가 포개어진 채 놓여 있기까지 했다.
이미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갔어도 진작에 돌아갔어야 하는 바쁜 사람이 저와 엄마의 일 때문에 아직 로젠탈 성에 머무는 것도 모자라 병실까지 지켜준 것이다.
“그리고 변호사도 감사해요. 정말 감사한데 너무 죄송하네요. 이미 신세를 지고 있는데 또 신세를…….”
“그래서 상의 없이 데려왔어요.”
“네?”
“당신이 내게 변호사를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할 리가 없을 테고.”
정확한 생각이었다.
“내가 변호사를 선임해주겠다고 미리 말했으면 거절했을 테니까.”
이 또한 당연했다.
“기분 나쁘지 않았으면 하네요.”
“아, 아뇨, 전혀 나쁘지 않았어요.”
그제야 눈을 맞추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더니 남자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말이 잘 통하지도 않고 믿을 사람이라곤 없는 타국에서 범죄 용의자로 몰리는 건 가혹한 일이죠. 그리고 내 집에서 난 사고이니 일말의 책임감도 들고 말이죠.”
“그렇게 느끼실 필요 없는데…….”
성에서의 첫 아침에 야나가 한 말을 수아는 떠올렸다.
“소유주의 잘못이 아닌 원인으로 사고가 발생했을 땐 폰 알브레히트가가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게 보통이다. 그런데 책임감을 느낀다니.
속은 언뜻 보기엔 차가운 겉과 많이 다른가 보다.
“아까는 겁을 많이 먹은 듯하더군요.”
“아…… 실은 제가 경찰을 무서워해서…….”
남자는 다행히 왜냐고 묻지 않았다. 의문이 생기긴커녕 해소된 표정을 잠시 지었을 뿐이었다.
“무서울 만도 하죠. 자살일 수도 있는 걸 경찰이 타살로 몰아가고 있으니.”
남자는 보온 주전자에 담긴 차를 일회용 컵에 손수 따라 수아의 손에 쥐여주더니 침대 발치에 걸터앉았다. 수아는 따뜻한 컵을 쥐고 한참을 내려다보다 입을 뗐다.
“……그런데 저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무슨 생각, 말이죠?”
“타살……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요. 근거도, 증거도 없고 엄마를 죽이려 할 사람도 없는데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어요.”
“어째서죠?”
“엄마가 자살할 사람은 아니어서요.”
“흠…….”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나 싶더니 엄마가 자살을 시도했다고 믿는 사람들과 같은 소리를 했다.
“사람들은 정신적인 충격을 크게 받거나 술과 약에 취하면 안 하던 짓을 해요.”
“그건 말이 되지만, 그 수면제가 말이 안 돼요. 엄마는 수면제를 먹을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수면제를 사려면 병원에 가서 처방전을 받아야 하잖아요. 엄마는 독어를 못 해서 그걸 혼자 할 수가 없어요.”
“평소에 어머니께서 어울리던 한국 교포들은 없었습니까?”
“아…… 있지만 엄마는 정신과 약을 먹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 사람들에게 그런 부탁을 했을 리가…….”
“한국인 의사도 있을 테고. 만하임은 모르겠지만 내가 사는 프랑크푸르트에는 한국인 의사가 꽤 있습니다.”
“아.”
“그리고 부모라도 자식에게 모든 걸 밝히진 않죠.”
그럼 설마 나 몰래 약을 얻어 온 건가. 엄마가 정말 그랬을까?
다시 생각에 잠기기 시작한 수아를 남자가 갑자기 불렀다.
“수아.”
프라우 정이 아니라 이름으로.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조금 전보다 확연히 무거워 보였다.
“사실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기다렸어요.”
“뭔가요?”
남자는 곧바로 묻지 않고 애프터셰이브 냄새에 취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는 수아의 얼굴을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혼란스럽다 못해 눈앞이 핑 도는 찰나에야 남자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당신이 한 짓이 아닌 게 맞습니까?”
덜컥, 심장이 추락했다.
그 수사관이 유별난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 수사관과 가장 반대편에 선 남자마저 수아의 짓이냐고 묻는다.
이 사람도 나를 의심해? 나를, 나를 믿어주는 줄로만 알았는데.
변호사까지 구해준 사람이니 다른 사람은 수아를 의심해도 이 남자만은 의심하지 않는 줄 알았다. 아니, 어쩌면 수아가 한 짓이라고 믿기에 변호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그럼 실은 모두가 나를 존속살해미수범으로 생각하는 걸까.
“아, 아니에요. 제가 엄마를 죽이려 했다면 엄마가 자살할 리 없다는 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자살이라고 결론 나는 게 저한테 유리하니까요.”
아까 경찰서에서 이렇게 말할걸.
수아는 뒤늦게 후회했다. 그러나 또 경찰 앞에 서면 머릿속이 하얘지며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논리적인 반박도 남자의 의심을 잠재우지는 못한 듯했다.
“인간에겐 과시욕이 있습니다. 살인마저 내가 한 짓이라고 과시하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오랜 세월 당해온 피해자라면 가해자에게 복수했다는 걸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마련이에요. 그래서 자살할 리 없다는 말을 할 수도 있죠.”
“제가 한 짓이라고 믿으시는 거예요?”
그럼 살인 미수범 따위를 왜 도와주시는 거예요?
격앙된 감정을 실어 따져 물으려던 수아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난 당신 어머니가 자살하려 했다고 믿고 싶어요.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우리에게 복수하려고.”
수아의 말문이 더욱 막혔다. 저를 의심하는 듯 굴더니 믿는다 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모순은 ‘우리’라는 말 앞에서 잊혔다.
후원자와 발레리나, 이 사회의 기득권자인 억만장자와 이곳의 영원한 이방인일 가난한 유학생, 태어난 순간부터 성공한 상류 인생과 마지막까지 실패의 내리막길을 차근차근 밟아갈 하류 인생.
모든 것이 이질적이며 동떨어진 두 사람을 ‘우리’로 묶는 이 남자의 뜻밖의 말에 수아는 엉뚱하게도 허를 찔렸다.
그렇지만 엄마에겐 필립 폰 알브레히트나 정수아나 똑같은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수아는 언제나 보복의 대상이었으며 이 남자는 신고했으니 보복해야 마땅한 대상이다. 엄마는 늘 받은 걸 갚아줘야만 하는 성격이었다.
“……그렇죠? 그런가 봐요.”
그래, 엄마는 자살하려 한 거야.
여전히 미심쩍지만 타살 의혹을 부추겼다가 살인 미수범으로 몰리느니 수아는 편하고 안전한 길을 택했다.
“당신 때문이라고 자책하지는 말아요.”
나 때문에 자살하려 한 거야. 나 때문에?
속에서 개미가 우글거리듯이 불편한 감정이 들끓는다. 죄책감, 원망, 분노. 감정의 이름은 제각각이었으나 모두 하나같이 개미 떼처럼 수아를 갉아 먹었다. 앞에 사람이 있는 것도 잊고 한참을 잠식되어 있다 한숨을 쉰 찰나, 아무렇게나 늘어뜨려둔 손에 남자의 손이 겹쳐졌다.
“걱정 말아요, 내가 도와줄 테니. 다시는 당신이 무서워하는 경찰을 만날 일 없도록 해줄게요.”
“감사해요.”
염치가 없지만 거절할 여유도 없다. 자칫하다간 말도 잘 안 통하고 돈도 없으며 법도 모르는 타국에서 살인자로 몰리게 생겼으니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때에 이 남자가 내민 건 튼튼한 구명줄이었다.
“감사하다는 말, 수백 번 해도 모자라네요. 제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으면 좋을지…….”
남자는 수아의 손 정도는 단번에 삼킬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손으로 손등을 다독이며 그저 웃을 뿐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난 왜 이토록 자비로운 남자에게서 무례하고 무자비한 짐승의 악취가 난다고 생각했을까.
***
그가 약속을 지킨 걸까? 경찰서에서 더는 연락이 없었다. 수사가 완전히 종결되었다는 통지서를 받아봐야 알겠지만 휴가 마지막 날의 비극적인 사건은 한 여자의 실패한 자살 시도로 종결 날 가능성이 크다고 변호사에게서 전해 들었다.
엄마는 결국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식물인간이 되었다.
그 사건으로부터 2주 후에 눈은 떴으나 말을 하지도, 움직이지도, 눈을 맞추지도 못했다. 말 그대로 식물이나 다름없었다.
의사는 이것도 나름대로 호전이라고 했지만 수아는 이럴 바에야 악화를 바랐다. 차라리 숨을 멈췄더라면, 적어도 뇌사라도 되었더라면 내가 이 고생을 할 필요가 없는데. 그녀가 그토록 나쁜 바람을 품었다는 걸 아무도, 특히나 아직도 제게 일말의 의심을 품고 있을지도 모를 그 남자는 절대 몰라야 했다.
기약 없는 장기 입원이 시작되었는데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에 계속 있을 순 없으니 엄마를 옮겨야 했다. 비용은 다행히도 건강보험에서 내주었고 이송에 관한 일은 고맙게도 야나가 도와주었다.
그런데 엄마는 만하임이 아니라 기차로 한 시간 거리인 프랑크푸르트의 한 요양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만하임에는 남은 병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강 건너 루트비히스하펜도 사정은 마찬가지라는 말을 야나는 수아가 묻기도 전에 했다.
실망스럽지만 거기까지 알아봐주었다는 것만 해도 고마웠다. 그래서 더는 아무 말 못 했다. 제 비서도 아닌 야나에게 프랑크푸르트보다는 가까운 다른 도시의 병원도 모두 수소문해달라는 부탁을 할 수는 없으니까. 제가 직접 알아보자니 통화밖에 방법이 없는데 부족한 독어 실력으로 전화는 너무나 어렵고 이송 수속에 쓰이는 용어는 더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 야나가 알아봐준 병원으로 엄마를 옮기고 저는 만하임의 아파트에서 지내며 왔다 갔다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들어오세요.”
후원자의 호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폰 알브레히트 씨?”
엄마를 근교의 요양 병원에 입원시키자마자 야나를 따라 프랑크푸르트 시내의 어느 고층 빌딩으로 왔다. 그리고 그 꼭대기 층에 홀로 다다랐을 때 펜트하우스에서 나온 사람은 수아의 후원자였다.
왁스를 바르지 않아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금발에는 물기가 어렴풋이 어려 있었다. 게다가 집에서나 입을 법한 가벼운 옷차림에 늘 차던 시계가 사라져 허전한 손목까지. 편한 복장을 보건대 여긴 이 남자의 집이었다.
“어…… 야나가 선물이 있다고 해서 올라왔는데…….”
“네, 맞아요. 선물이라는 말은 거창하지만…….”
남자는 서늘한 눈매를 접으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쑥스러울 일이 없을 것 같은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듯 잘 어울리는 미소에 더더욱 호기심이 일었다. 어쩌면 홀린 건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수아는 순순히 따라 들어갔다.
장신인 남자의 머리 위로도 수아의 키만큼이 남는 높은 천장, 은은한 간접 조명과 진짜 대리석인 듯 맑은 광채가 나는 바닥과 벽, 벽을 따라 이어지는 격자 모양의 거울 장식까지, 단조로운데도 고급스럽지 않은 것 하나 없는 복도를 지나며 수아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여기가 저 남자의 집이 정말 맞나?
생활감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부자의 집이란 직원들이 머리카락 하나 없도록 쓸고 닦아둘 게 뻔한데도.
복도를 따라 걸어가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수아는 남자의 갑작스러운 말에 깜짝 놀랐다.
“앞으로 여기서 지내도록 해요.”
“……여기서요?”
수아가 걸음을 멈추자 남자도 멈추더니 가던 길을 천천히 되돌아와 수아를 마주 보았다.
“만하임은 병원에서 머니까.”
“아, 그건 괜찮…….”
“유일한 가족이니까 보고 싶을 텐데.”
“…….”
“그간 쌓인 앙금이 있겠지만 수아도 어머니가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잖아요.”
보고 싶지 않냐는 말에 재깍 대답하지 못한 게 이상했을까. 남자는 생각의 단계를 여러 개 건너뛰어 물었다.
“……전혀, 아니죠.”
제가 했던 나쁜 생각을 후원자에게 들킬세라 수아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통학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런데 여긴…….”
“내 집이에요.”
“그런데 제가 여길…….”
왜 사적인 공간에 나를 들이지? 그것도 한집에서 같이 살자니 과한 호의 아닌가? 과하게 잘해주는 이유가 뭐지? 어떻게 거절하지?
경계심에서 돋아난 질문이 복잡하게 뒤엉키는 사이 남자는 복도 끝으로 훌쩍 걸어가버리더니 현관문처럼 생긴 고급스러운 나무문 앞에 섰다. 수아의 눈앞으로 들어 올린 길쭉한 손가락 사이에는 흰 카드가 꽂혀 있었다.
“게스트 스위트를 쓰도록 해요.”
남자가 카드키로 문을 열었고, 호기심에 따라 들어가본 수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통유리창이 난 거실과 작은 주방, 욕조까지 있는 욕실과 드레스 룸이 딸린 더블베드 침실. 문 너머는 아파트 안의 아파트였다.
펜트하우스의 입구만 같이 쓸 뿐, 공간은 완벽히 분리되어 있다. 카드키는 한 장뿐이며 안에는 잠금 장치가 따로 있단다. 그러니 사생활도, 보안도 보장된다는 말을 하며 남자가 덧붙였다.
“내가 여기 같이 산다고 해서 걱정할 건 없어요.”
“아, 아뇨. 걱정하지 않아요.”
걱정한다고 하면 그를 의심하는 셈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는다고 대답해버렸더니 여기에 사는 게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수아는 한 손을 주머니에 찌른 채 카드키를 내미는 남자에게 조심스레 손사래를 치며 현관 쪽으로 슬며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계속 도움 받기가 죄송해서 더는…….”
“게스트 스위트. 손님이 오면 쓰는 곳이란 뜻인데 손님이 자주 오지 않아서. 이 방도 제 용도로 쓸 때가 있어야겠지. 내게 프라우 정은 손님이고.”
남자의 말투가 순식간에 딱딱하게 변했다. 거리가 좁혀지는 건 부담스럽더니 멀어지자마자 초조해진다. 남자가 수아보다 먼저 게스트 스위트 밖으로 나가며 툭 던진 말이 휘청거리던 수아의 마음을 결국 한쪽으로 꺾어버렸다.
“불편하면 없던 일로 하죠.”
그 말이 더 불편했다.
수아는 뒤쫓아가 남자가 복도의 콘솔에 던지듯 놓고 가버린 카드키를 주워들었다. 엄마가 가장은커녕 짐 덩어리만 되는 지금, 저 남자의 후원마저 없던 일이 되면 수아는 빈털터리로 거리에 나앉아야 했다.
손님. 그래, 손님일 뿐이야. 저 남자가 내게 사심이 있겠어?
저번에 말한 것처럼 이번 일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껴 이러는 것뿐이다. 호의를 기쁘게 받는 것도 호의이며, 상대가 마음의 짐을 덜 기회를 주는 것 또한 빈털터리 수아가 그에게 되돌려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호의였다.
“잘 쓸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남자는 수아의 인사에 손만 잠시 들어 보이곤 복도 끝으로 사라지려나 싶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되돌아왔다.
“잊은 게 있어서.”
그가 치노 팬츠의 주머니에서 얇은 사슬 같은 걸 꺼냈다. 사슬은 복도의 은은한 조명에도 요란스럽게 반짝였다. 설마 수백만 원짜리 명품을 케이스도 없이 주머니에 넣고 있었던 건가 싶었더니 정말 수아가 사우나에서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
못 보던 것도 있었다. 목걸이의 고리가 있던 자리의 손톱만 한 자물쇠, 그리고 남자의 손바닥에 놓인 열쇠.
“고리가 헐거운 것 같아서 바꿨어요.”
“아, 감사합니다.”
“내가 걸어줄게요.”
보관만큼 돌려주는 방식도 가벼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남자는 수아의 목에 초커를 친절하게 손수 걸어주었다.
“흣…….”
초커를 채우고 물러날 줄 알았던 손가락이 사슬과 목덜미 사이로 파고든다. 불시에 낯선 손길이 닿아 놀란 수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남자는 멈추지 않고 손끝을 사슬에 건 채 수아의 목덜미를 길게 훑었다.
이상해.
깡마른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잘 어울리네요.”
남자는 마침내 수아에게서 손을 떼며 단정한 미소를 지었다. 단단한 손톱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는 손이 사라지고도 얼얼했다.
“……감사합니다.”
입꼬리가 굳어 잘 올라가지 않는다. 남자가 말없이 웃기만 해 다행이었다. 귀를 울리는 심장 소리 때문에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듣지 못했을 테니까.
이 남자를 마주할 때면 의문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든 질문은 오로지 하나로 귀결됐다.
‘당신, 내게 왜 이러지?’
‘넌 이제부터 나의 개니까.’
필립은 기대와 두려움이 섞인 의문이 노골적으로 비치는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눈매를 접어 웃었다. 손은 초커에서 완전히 떨어지지 못하고 폰 알브레히트가를 상징하는 들장미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알브레히트의 개.
그걸 상징하는 목걸이를 하필이면 이 여자에게 선물로 준 어머니의 고약한 장난질을 비난했던 필립은 이제 없었다.
여자에게 제 손으로 개 목걸이를 걸었다. 그다음은 목줄, 그리고 그다음은 길들이기.
그 과정은 꽤나 즐거울 것이다. 기대만으로 바지 앞섶이 부풀었다.
“다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요.”
“뭔가요?”
“폰 알브레히트 씨라는 호칭, 마음에 안 드는군요.”
“아, 그럼…….”
“필립이라고 불러요, 일단은.”
일단은.
곧 주인님이 될 테니.
제 침실로 돌아간 필립은 리클라이너에 기대어 앉으며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협탁의 거치대에 세워둔 핸드폰이 짤막하게 울리며 켜졌지만 그의 시선은 태블릿 화면 속에서 움직이는 여자만을 따라갔다.
핸드폰에 나타난 메시지는 대로 건너편 빌딩의 펜트하우스에서 어머니가 보낸 것이었다.
[개가 개집을 마음에 들어 하든?]
여긴 그의 집이 아니다. 개집이었다.
***
얼굴부터 발가락까지 모든 게 앳되고 가냘프기만 한 여자의 몸에서 가슴만은 성숙한 암컷의 것이었다. 이질적이다. 어디를 보나 외설적이기 짝이 없는 가슴의 끝만은 순진한 분홍빛으로 발그레하게 번들거리는 것도 이질적이었다.
꽤 도발적이기도. 순진한 색이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건 처음이다. 그쯤 되니 얼굴부터 발끝까지 설익기만 한 여자가 농익어 보인다. 어디를 깨무나 저 우윳빛 살에서 음란한 살 내음 진동하는 유즙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가냘픈 손이 묵직한 살덩어리를 받쳐 올리나 싶더니 꾹 눌러 짓뭉갠다. 실소가 작게 터졌다. 마른 손이 파들거리는 걸 보면 힘주어 누르는 데 가슴은 납작해지긴커녕 동그랗고 봉긋한 제 모양 그대로였다.
안쓰럽다 못해 도와주고 싶을 지경이지만 필립이라고 별다른 수는 없을 것이다. 남자의 악력으로 눌러도 저 탄력 넘치는 살덩이는 제 모양을 고집스럽게 지킬 테니. 그래도 언젠가는 제 손으로 움켜쥐어볼 것이다. 보들보들하고 말랑하겠지. 짜부라들다 말고 내 손을 밀어내며 반항하는 느낌은 어떨까.
반항은 언제나 그의 몸을 달아오르게 한다. 담배 끝을 잘근거리던 입술 사이로 목이 졸리는 듯한 신음이 새어 나갔다. 필립은 여자를 훔쳐보면서도 소리를 죽이지 않았다.
여자는 자꾸만 위아래로 삐져 나가는 가슴을 작은 손으로 붙들려 애를 쓰며 다른 손으로는 미리 잘라 서랍장 끝에 붙여둔 테이프 한 가닥을 떼어 들었다. 삐져나온 젖꼭지를 목이라도 조르듯이 끼우고 있던 손가락 두 개가 넓게 벌어졌다. 주변의 우윳빛 살이 눌리며 조금 전보다 붉어진 유륜까지 유두와 함께 불룩 튀어나왔다. 필립은 잇새에 낀 담배 끝을 콱, 끊어 먹을 듯 깨물었다.
담배 대신 물고 싶은 살점은 아쉽게도 곧 눈앞에서 사라졌다. 여자는 젖꼭지에서 같은 편의 쇄골 아래까지 이어지도록 테이프를 길게 붙였다. 반대편에도 똑같이 또 한 번.
그러곤 또다시 젖꼭지에서 시작하지만 이번에는 아래로 향한다. 젖꼭지 양쪽에서 명치를 X자로 교차해 갈비뼈가 끝나는 반대편 옆구리까지 테이프를 팽팽하게 붙인다. 이쯤 되면 형체도 못 알아보게 짓눌린 젖꼭지가 안쓰러워졌다.
그렇게 살이 위아래로 출렁대지 않게끔 고정하고 나면 또 가슴을 손으로 납작하게 짜부라트리곤 테이프를 가로로 촘촘히 붙였다. 붕대라도 감듯이.
여자는 매일 아침 드레스 룸의 거울 앞에 서서 가슴에 테이프를 감는다. 필립은 그 모습을 거울에 숨겨진 카메라로 감상한다. 여자가 등교하기 시작한 후 생겨난 아침 루틴이었다.
발레리나답지 않은 몸매를 감추는 발레리나. 참을 수 없는 광경이다. 저토록 철저히 싸매어 감추는 것을 그가 멋대로 훔쳐보고 있다는 걸 알면 여자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지금 제 표정과는 분명 다르리란 생각이 들었다.
“야무지게 감추는 게 귀엽기도 한데…….”
그러나 가장 솔직한 감상은 그의 입이 아니라 아랫도리에서 나왔다. 사정액이 스민 검은 정장 바지가 희끄무레했다.
필립의 잇새로 신음이 나직이 샌다. 기분이 정점과 저점을 동시에 친다.
오늘은 그럴 시간이 없어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처럼 발기한 페니스를 무시했다. 그런데 건드리지 않고도 터지다니. 이러다 저 여자와 눈만 마주쳐도 오르가슴을 느끼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나쁘지 않지. 궁금한데.
그가 늘 제 앞에서 발기해 있는 걸 알면 여자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도 궁금해졌다.
오늘은 여운을 즐길 시간이 없다. 필립은 TV를 끄고 리클라이너에서 일어섰다. 불을 붙이는 쪽은 멀쩡한데 입에 무는 쪽이 터지고 젖고 너덜너덜해진 담배가 재떨이에 내던져졌다. 재떨이에는 불붙이는 걸 잊고 잘근잘근 씹다가 못 피우게 된 담배가 이미 수북했다.
잘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산 건 여자를 지켜보고 있자면 입이 심심해지기 때문이었다. 물고 빨고 깨물고 싶다. 뒤늦게 구강기 결핍이라도 겪는 건가. 아직은 여자의 젖꼭지 대신 엉뚱한 담배가 그 희생양이었다.
필립은 옷을 갈아입고 나가 게스트 스위트의 문을 두드렸다.
“잠시만요.”
옷을 입는 모양이지. 오기 직전에 태블릿으로 보니 여자는 속옷 바람으로 얼굴에 뭔가를 찍어 바르는 중이었다.
“아, 좋은 아침입니다.”
그새 얇은 티셔츠와 레깅스를 껴입은 여자가 문을 열었다. 제 알몸부터 일거수일투족까지 그가 이미 다 본 줄은 꿈에도 모르는 여자에게 필립은 무구한 가면을 쓰고 인사했다.
“아침 같이 할래요?”
회색빛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주방에는 메이드가 다녀갔는지 이미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와 연노란 홀란데이즈 소스를 동그란 수란과 두꺼운 훈제 연어 위에 잔뜩 끼얹은 에그 베네딕트는 먹음직스러워 보였지만 긴장한 수아는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었다.
커피를 홀짝이면서도 눈은 자꾸만 아일랜드 카운터에 나란히 앉은 남자를 곁눈질했다. 제 코앞에 있는 건 커피인데 남자의 은은한 향수 냄새가 더 진하게 느껴진다. 아는 향이라 그럴지도. 지난번에 차에서 안겨 있었던 일 후로 이렇게 몸이 가까운 건 처음이었다.
남자는 일이 바쁜지 집에 잘 머물지 않았다. 게다가 생활공간이 완전히 분리되니 마주치고 싶어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가끔은 인사라도 해야 하나 싶었지만 남의 공간에 허락 없이 들어가기도 그렇고 펜트하우스의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개처럼 뛰어나가 반기는 건 웃긴 짓이었다.
수아는 커피 머그를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포크와 나이프를 다시 잡았다. 남자는 식사엔 거의 손대지 않고 커피만 마시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은 정면에 있었다. 옆선이 거칠게 깎아 세밀하게 다듬은 조각 같다.
입에 들어가는 음식의 맛이 느껴지지 않는 건 비단 숨이 멎게 만드는 미남과 단둘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갑자기 아침을 같이 먹자길래 할 말이라도 있나 싶었지만 남자는 여태 안부를 나눈 것 외엔 별말이 없었다.
용건이 있는 게 분명한데, 늦어질수록 꺼내기 어려운 말이란 뜻이지 않을까?
미안하지만 나가달라? 후원을 중단하겠다?
이미 마음을 정한 수아의 입장에선 어느 쪽도 크게 낙담할 건 없지만, 스스로 물러나기 전에 밀려 나가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은 못 된다. 어쩌면 그 어느 쪽도 아닌 말이 나올지도 모르고.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며 입맛이 떨어지던 때였다.
달칵. 남자가 대리석 카운터 위에 커피 잔을 놓더니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한 말을 꺼냈다.
“왜 갑자기 아침을 먹자고 하나 싶었을 텐데 별다른 용건은 없어요. 혼자는 외로워서.”
“아.”
“긴장했어요?”
남자가 장난스레 눈매를 접어 웃으며 수아에게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팔꿈치를 카운터에 기댄 그가 손마디에 턱을 괴고 수아를 바라본다. 저 눈앞에서 벌거벗겨진 듯한 기분이 들며 긴장의 끈이 풀리자마자 바짝 조여들었다.
“같이 산 지 두 달이나 지나서 이런 걸 묻는 건 우스운데…….”
“……네?”
“불편한 건 없어요?”
무슨 질문일까 초조해한 게 허무하리만치 평범한 질문에 맥이 탁 풀렸다.
“이것 봐요. 별것 없잖아요.”
조마조마했던 게 다 티가 났나. 수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수아는 왜 나만 보면 긴장하는 걸까.”
남자는 섭섭하다는 듯이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그의 눈은 수아에게 답을 묻고 있었다. 그러나 늘 같은 질문을 하는 수아도 답을 몰랐다.
두근두근. 이건 설렘일까, 두려움일까. 이토록 혼란스러운 감정은 수아도 처음이란 것만 분명했다.
“아무튼, 불편한 건 없어요? 필요한 거라도.”
“아뇨, 전혀요.”
여기가 편하다 못해 만하임의 아파트에서 짐을 다 빼 왔을 정도였다. 실은 다달이 나가는 월세가 아까웠던 게 크지만.
이젠 독일에서 갈 곳도 없는데 저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나가라고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안 한 건 아니다. 분명 며칠 전까지는 했었지만 이젠 필요 없는 걱정이 되었다.
수아는 곧 여기서 나갈 테니까.
엄마의 천문학적인 병원비는 독일 어학 비자를 받으며 가입한 사설 건강보험에서 거의 대부분을 내주고 있다. 그래서 다행이지만, 불행한 건 그 보험이 이번 달 말에 만료된다는 사실이었다.
보험을 갱신하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청천벽력 같았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기업 입장에서 한 달에 고작 5만 원 정도를 받고 몇백에서 몇천만 원을 죽을 때까지 내주는 건 손해 보는 장사이다. 그렇다고 공보험이 병원비를 내줄 리가. 엄마는 이 나라 국민도 아니고 세금 한 번 낸 적 없으며 깨어날 가망도 없는 외국인이었다.
그러니까 타국에서 빚더미에 앉기 싫으면 엄마를 하루라도 빨리 한국으로 이송해야 한다. 여기 보험이 만료되기 전에. 독일 보험에서 이송 비용을 전액 지원해준다니까.
그나마 숨 쉴 구멍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한국에 가면 병원비는 어떻게 내지?
산 넘어 산이었다.
아파트를 팔아야 할까. 지금 반전세 줬는데 그 월세로 되려나? 그럼 나는 뭘 먹고 살지? 발레를 관두면 후원도 끊길 텐데. 그럼 결국 아파트를 팔아야 하나. 세입자가 있는데 팔아도 돼? 그런데 엄마 명의인데 내가 팔 수 있나? 설마 멋모르는 사회 초년생 여자라고 사기당하면 어떡하지?
공부와 무용만 한 스무 살짜리는 답을 모르는 질문이 끝없이 이어졌다.
다른 수도 있긴 했다. 엄마가 한국에서 들어둔 생명 보험 말이다.
수아는 멍하니 대리석 무늬를 응시하던 시선을 들었다. 남자는 여전히 수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지 궁금하다는 눈이었다.
“저, 아직 수사는 안 끝났죠?”
“변호사가 말하길,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고 하네요.”
“아…….”
“한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여기 공무원들의 일처리는 매우 느려요. 어쩌면 수사할 게 아직 남은 건지도 모르고.”
수사할 게 아직도 남았다면…….
“자살로…… 결론 나겠죠?”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
다시 정적이 시작됐지만 수아의 머릿속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자살 시도로 수사가 종결된다고 이젠 마냥 기뻐할 수 없다. 맹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살 시도라면 생명 보험에서 보험금을 주지 않을 것이다. 절박한 마음에서 인터넷에 검색해봤더니 자살 시도를 했더라도 만취한 상태라면 심신상실이라 보험사에 소송을 걸어서 보험금을 받아낼 가능성도 있단다.
꼭 받아야만 하는데 그 돈을 받아내는 데 필요한 돈이 수중에 없었다. 받아낸다는 보장도 없고.
다시 아래로 축 처진 시선의 가운데에서 거스러미도, 굳은살도 하나 없는 매끈하고 단정한 손끝이 대리석의 모난 테두리를 만지작거린다. 이젠 톡, 톡, 단단한 손톱 끝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날 선 신경이 더더욱 날카로워진다.
두 달 만에 병원 청구액이 5천만 원을 넘었다. 아무리 처음엔 검사와 치료할 것이 많아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지만 고작 두 달이 이러면 앞으로는 얼마나 될까. 기약도, 가망도 없는 투병을 홀로 뒷바라지해야 한다니. 사방이 막힌 것처럼 숨이 가빠온다.
저를 가둔 사람이 사라진 줄 알았는데 수아는 여전히 감옥에 갇힌 신세였다. 엄마는 그 꼴이 되어서도 여전히 수아의 발목을 잡았으니.
고통에 잠긴 수아는 대리석 모서리를 두드리는 손끝이 멎은 걸 몰랐다.
“아!”
손목을 휙 낚아채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남자가 수아의 손목을 틀어쥐고 있었다.
“수아, 그거 자해예요.”
수아의 손가락 사이에는 머리카락 몇 가닥이 끼어 있었다.
“아, 죄송해요.”
무심결에 또 머리를 뽑았다. 그것도 남 앞에서. 자해를 들킨 게 민망해 고개를 푹 숙이자 남자는 손목을 놓아주며 물었다.
“자살이 아니라고 결론 날까 봐 걱정돼요?”
“아뇨, 제가 왜.”
내가 엄마를 죽이려 한 것도 아닌걸요.
네가 범인으로 몰릴까 봐 걱정되냐는 뜻 같아 얼떨결에 아니라고 대답해버렸다. 오히려 자살 시도가 아닌 걸로 종결되면 보험금을 받을 수 있으니 수아에겐 유리한데, 혹시 모를 의심 앞에서 제 결백을 증명하는 게 더 절실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자살 기도가 아니라면 보험금을 받을 수 있어요. 이 말도 의심스럽게 비치기 좋았다. 그럼 여태 자살이 아닐 것 같다고 주장한 게 결국 돈 때문이었던 걸로 보일 테니.
저는 어느 쪽이든 결백하건만 이상하게 저 남자 앞에선 죄지은 사람처럼 움츠러들었다. 수아는 더는 식사를 넘기지 못하고 일어섰다.
“잘 먹었습니다. 저는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오늘이 마지막 등교예요. 그동안 차와 운전기사까지 지원해주셔서 편하게 다녔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연습했던 말을 하려던 차였다.
“오늘은 같이 가죠.”
이따금 아침에 마주치면 “학교 잘 다녀와요”라고 하던 남자가 오늘은 다른 말을 했다.
“나도 만하임에 볼일이 있어서.”
성큼 일어나 수아보다도 먼저 밖으로 나가던 남자가 불현듯 걸음을 멈췄다.
“그런데.”
“네?”
“목걸이는 왜 안 했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마주 보는 남자의 눈매도, 목소리도 웃고 있는데 어째설까? 수아의 등줄기에 소름이 서늘하게 돋아 올랐다.
“마음에 안 들어요?”
아뇨. 잃어버릴까 봐. 그리고 춤출 때 거추장스러워요.
제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데 입이 얼어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입이 떨어졌더라도 이게 버릇없는 소리라도 되는 양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걸로 줄 테니 편하게 얘기하란 말에 마음이 불편해진 수아는 제 방으로 돌아가 목걸이를 목에 걸고 나왔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는 길, 수아는 보란 듯이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엄마에게 그랬던 습관이 몸에 붙어 슬금슬금 눈치를 보았지만 남자는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서서 정면만 바라볼 뿐이었다. 수아에게 눈길 한 번 안 주고.
화가 난 건 아니겠지?
저도 모르게 자꾸만 흘끔흘끔하는데 무표정하던 남자가 갑자기 입꼬리를 올렸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시선을 정면으로 퍼뜩 돌렸다가 반질반질한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
남자는 여태 저기로 수아가 하는 짓을 다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이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시선을 아래로 피했더니 정면으로 똑바르게 향해 있던 검은 구두가 수아에게로 방향을 트는 것이 보인다. 고개를 슬며시 들자 남자가 수아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 목걸이 잘 어울려요.”
“가, 감사합니다. 제가 보기에도 잘 어울려요.”
“그렇게 생각해요?”
재깍 고개를 끄덕였더니 남자가 눈매를 느슨히 휘었다. 재롱떠는 강아지라도 보는 눈빛이라 멋쩍어지는 동시에 안도했다.
오늘따라 엘리베이터가 왜 이렇게 느린 것 같지?
남자의 기분이 좋아 보인다 해서 초조하게 술렁이던 마음이 완전히 가라앉은 건 아니었다. 그는 눈을 돌리지 않고 수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게 시선이 닿는 곳마다 옷 아래의 살갗이 못 견디게 간질거린다. 남자가 투시라도 해서 수아의 맨살을 보고 있기라도 하는 듯이 불편한 감각이다. 몸을 비틀어 뒷걸음질 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수아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그나마 눈이 보이지 않아 마른침 정도는 삼킬 만큼 긴장이 풀렸지만 빈틈없이 꼿꼿한 자세와 단정하고 세련된 옷차림에서부터 위압감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거리게 되었다.
남자는 늘 정장 차림으로 나가는데 오늘은 유난히 세련됐다. 검은 스리피스 정장이라니 중요한 자리에라도 가는 건가.
아마 사업 이야기겠지?
무슨 협상을 하려는 건지 모르지만 이미 그가 이긴 게임 같아 보였다. 누구든 이 남자를 마주하면 그저 달라는 대로 다 바칠 수밖에 없을 테니.
남자는 눈에 띄려 애쓰지 않는데도 그 존재만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비단 얼굴과 몸매가 모두 매력적인, 보기 힘든 미남인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조용히 사고를 옭아매는 무언가가 남자에게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래서 난 이 남자 앞에만 서면 떠는 걸까.
의문만 여전히 이어질 뿐, 답은 모호했다.
굵게 도드라진 목울대에서 시작된 시선이 너른 가슴팍을 지나 허리 아래까지 무심결에 미끄러지던 찰나였다.
헉.
시야로 불쑥 침범한 손이 수아의 턱 끝을 밀어 올렸다. 움찔, 뒤로 물러서며 손이 떨어졌지만 곧바로 다시 붙잡혔다. 남자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손만 뻗었을 뿐이었다.
가지런히 모은 손가락이 수아의 턱 끝을 가볍게 쥔다. 엄지가 턱선을 부드럽게 쓸며 입술을 향해 올라왔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던 수아는 얇은 티셔츠 너머로 엘리베이터 벽의 냉기가 스미는 순간 흠칫 떨었다. 여긴 밀실이다. 피할 곳 없는. 그런 현실을 더 선뜩하게 만드는 건 입꼬리를 꾹 짓누른 채 둥글게, 느릿하게 문지르는 엄지 끝이었다.
“왜, 앗…….”
입술을 벌리자마자 손가락이 미끄러지며 아랫입술의 젖은 안쪽을 스윽 훑고 떨어져 나갔다.
“상처, 사라졌네요.”
불순한 의도가 있는 줄 알았던 게 창피하리만치 남자는 맑고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신경 쓰였거든요.”
“아, 신경 써주셔서 감사…….”
“남이 남긴 자국이라서.”
“네?”
“먼저 나가시죠.”
목소리가 교차하며 잘 듣지 못해 되물었으나 남자는 때마침 열린 문을 손짓했다. 수아는 매너 있게 물러서는 남자에게 얼떨떨한 미소로 화답하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에선 또 의문이 맴돌았다.
원래 여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아무렇게나 만지는 걸까. 전혀 안 그럴 것 같은데 말이다.
오늘 수아를 태운 차는 늘 등교시켜주던 벤츠가 아니라 남자의 마이바흐였다. 저번에 이 뒷좌석에서 있었던 일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만하임까지 가는 데 걸리는 한 시간이 기나길게 느껴질 것만 같은 예감이 벌써 들었다.
“오늘 점심은 위르겐마이어 퍼블리싱 그룹의 빅터 위르겐마이어 회장님과…….”
조수석에 앉은 남자의 비서가 상사에게 오늘 일정을 보고하는 사이 수아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와 바쁘게 연락을 주고받는 척했다. 정말 연락해야 하는 데가 있긴 했다.
[야나, 잘 지냈어요? 미안하지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도와줄 수 있을까요?]
이송 비용이나 절차를 두고 독일 보험사랑 병원과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수아의 지금 독어 실력으론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야나에게 또 염치없이 부탁한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하라는 말을 야나가 했었지만 한두 번도 아니니 미안해서 마지막으로 딱 한 번이라는 사족을 붙였다.
출국하기 전에 선물이라도…….
메시지를 보내두고 답을 기다리며 뭘 사면 좋을지 고민하는 수아의 눈앞에 남자가 뭔가를 내밀었다. 수아의 손바닥 크기를 조금 넘는 상자였다. 겉에는 최신형 스마트폰의 브랜드명과 모델을 상징하는 알파벳이 크게 새겨져 있었다.
“이건…….”
“받아요. 어차피 핸드폰 바꿔야 할 텐데.”
남자의 시선은 엄마가 땅바닥에 던지며 화면에 거미줄처럼 금이 간 수아의 핸드폰에 있었다.
“겉만 이렇지 멀쩡해서요. 바꿀 생각은 없는데…….”
“내 눈에 거슬려서 그래요.”
남자가 눈매를 좁히며 상자를 재차 내밀었지만 수아는 받지 않았다. 눈에 거슬린단 말, 핑계 같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자주 보실 일 없을 거라…….”
“아, 얼마 전에 한국에 출장을 갔을 때 들었는데 한국에선 상대가 주는 걸 두세 번은 거절하고 받는 게 예의라던가요. 그래서 주는 쪽도 두세 번 권해야 한다고 하던데. 독일은 안 그래요.”
“저도…….”
예의상 거절하는 게 아니라고, 진심으로 부담스럽고 죄송해서 거절한다는 말을 남의 나라 말로 듣기 좋게 꾸미느라 머뭇대는 사이 남자는 상자를 열어 스마트폰을 꺼내버렸다.
“수아가 자꾸만 거절하니까 재차 권해야 하는 것도 피곤하고, 이번엔 어떤 못된 말로 수아의 부담을 덜어줘야 하나 고민하는 것도 골치 아프고. 자꾸만 나 나쁜 사람 만들지 말고 받으세요.”
넌 엄마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버튼이라도 눌린 듯이 뇌리에 깊이 각인된 말이 떠오르며 수아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남자의 말투와 표정에 귀찮다는 기색이 점점 뚜렷해지는 것도 신발 안에 뾰족한 돌이 든 것처럼 몸과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감사, 합니다.”
결국 주는 대로 받기로 했지만 남자는 핸드폰을 주지 않고 도리어 빼앗아갔다. 그는 수아의 손에서 금 간 핸드폰을 가져가더니 심 카드를 빼서 새 핸드폰에 넣고 둘 다 돌려주었다. 남자가 웃는 걸 보고서야 쿵쾅대던 심장이 가라앉았다.
“오늘, 늦어요?”
“저녁에 공연 연습이 있어서 늦을 것 같아요.”
오늘따라 이건 왜 묻는 걸까. 얼떨결에 대답하고 나니 서로 집에 오는 시간을 확인할 만큼 가까운 관계라도 된 것 같아 묘해졌다. 그건 왜 알고 싶어 한 건지 걱정이 된 수아는 괜스레 쓸데없는 말을 줄줄이 이어 붙였다.
“학기 말에 학교에서 공연이 있거든요. 이번 학기는 지젤인데 저는, 어, 군무를 맡았어요. 아무튼, 맡은 역할엔 최선을 다해야죠.”
정말 괜한 소리까지 나온다. 고작 군무를 맡았다는 이야기를 발레 잘하라고 돈 주는 후원자에게 당당하게 하며 초라해 보이기 싫어서 씩씩한 척까지 하는 제가 참 못났다. 그런데 남자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가만히 듣고 있기만 하더니 차분히 입을 열었다.
“내 눈엔 수아가 지젤이에요.”
격려의 말인 줄 알았다.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죽는 여자에게 빗대는 게 미안하긴 하지만 그만큼 아름답다는 뜻으로 들어줬으면 해요.”
격려가 아닌 건가.
남자가 한 말에서 앞의 절반은 아름답다는 말을 듣는 순간 잊어버렸다. 수아는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수아를 지그시 바라보는 눈은 더없이 진지했다.
핸드폰부터 살 곳, 차와 운전기사까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내어준다.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하나 하는 의심이 드는 건 당연하지만 주제넘기도 했다. 그래서 이렇게 단정했다.
이 잘난 남자가 나를 왜 좋아하겠어.
그러나 서서히 그 말끝이 미묘하게 변해간다.
이 잘난 남자가 나를 왜 좋아하지?
두근두근. 그럼 지금의 이 떨림은 설렘일까.
“감사합…….”
인사를 하고 내리려는데 남자도 차에서 내렸다. 지나가던 동기들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수아에게 그는 물었다.
“총장실이 어디죠?”
만하임의 어딘가가 아니라 이 학교에 볼일이 있었던 걸까.
총장실이 있는 층까지 남자를 안내하고 강의실이 있는 층으로 가려는데 남자가 수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는 말, 지키길 바라요.”
격려처럼 들리지만 그렇다기엔 미묘하게 엇나간 말을 하고 회색빛 복도를 비서와 함께 걸어가는 남자를 수아는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어째서였을까. 총장실이 어디냐는 남자의 물음에 교수실이 어디냐고 묻던 엄마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엉뚱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늘의 첫 수업까진 40분 정도 시간이 있었다. 간단히 몸을 풀 생각으로 연습실로 갔더니 탈의실에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여자 동기들이 몰려와 호들갑을 떨며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수아, 아까 그 남자 누구야?”
“진짜 말이 안 나오게 잘생겼어. 몸매도 끝내주던데. 모델이야?”
“뭐 하는 사람이야? 부자 같아 보이던데.”
“틴더로 만났어? 그 사람 친구는 없대?”
“매일 너 데려다주고 데리러 온 사람이지? 역시 만나는 남자가 있었구나.”
전차를 타고 다니던 수아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1억이 훌쩍 넘는 벤츠 세단을 타고 다니기 시작하자 별의별 소문이 다 돌았었다. 아랍 왕자의 연인부터 숨겨진 한국 재벌 딸까지. 그러고 보면 만나는 남자 정도는 양호한 편이었다.
덕분에 이상한 소문은 오늘부로 사라지겠지만 그 남자를 두고 또 다른 헛소문이 돌 것 같아 수아는 고개를 저었다.
“만나는 사이 아니야.”
매력적인 남자이긴 하지만 수아의 남자는 아니다. 그 남자가 저를 좋아하는 것 같다 해도. 분에 넘치는 욕심으로 자신을 갉아 먹은 엄마의 밑에서 배운 게 제 분에 넘치는 건 탐내지 않는 법이라.
“그냥…….”
후원자야.
그 관계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라 수아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연인이 아닌 후원자가 고급 승용차와 운전기사를 지원해주다니. 스폰이나 원조 교제처럼 들릴 것이다.
뭐라고 얼버무리지?
차라리 숨겨진 한국 재벌 딸이 나으려나? 머리를 굴리는데 다행히 구세주가 나타났다.
“이본. 잠시만.”
교수가 연습실까지 찾아와서 이본을 데려가자 학생들이 조용히 흩어졌다. 그제야 수아는 조용히 몸을 풀 수 있었다.
왜 안 오시지?
이본을 데려갔던 교수는 오늘 수업이 있는 걸 잊기라도 했는지 10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강의실 책상에 앉은 학생들의 자세가 점점 흐트러지고 목소리는 높아진다. 그러고 보니 저 안에서 이본이 안 보인다.
얘기가 길어지는 건가.
수아도 오늘 교수님과 할 이야기가 있는데 말이다.
‘교수님, 저 자퇴하려고 합니다.’
수아는 어제 독어로 써둔 긴 말을 머릿속으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자퇴 절차는 생각보다 간단해도 너무 간단했다. 학과 사무실에 자퇴서만 내면 그날 바로 처리해준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학생 비자도 무효가 되므로 자퇴서는 출국 전에 와서 낼 생각이었다.
그래도 그전에 교수님들한텐 떠난다고 얘기하는 게 예의 아닐까.
‘한국에 갑자기 돌아가게 되어서…….’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연습하는데 강의실 앞문이 벌컥 열렸다. 이본과 함께 들어온 교수의 얼굴이 굳어 있자 모두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교수는 긴장감과 호기심이 감도는 강의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더니 교탁 뒤에 서자마자 뜻밖의 발표를 했다.
“학기 말 공연 캐스트에 변동이 생겼습니다. 지젤 역은 이본 마이어에서 수아 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럼 늦었으니 바로 수업 시작하도록 하죠.”
모두의 시선이 수아에게로 향했다. 수아의 시선은 교수에게 있었으나 저를 쳐다보지 않자 이본에게로 향했다. 강의실 구석의 빈자리에 앉은 이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입으로 웃고 있었으나 메마른 눈동자는 분명 울고 있었다.
“슈라이버 교수님.”
강의가 끝나자 수아는 교수를 쫓아갔다.
“제게 지젤 역을 주신 건 정말 감사합니다만 왜 갑자기 저로 바뀌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교수는 복도에 멈춰 서서 수아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눈빛이 따갑게 느껴진다. 원래도 매서운 사람이라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걸 제가 괜히 과민하게 해석하는 거라 믿고 싶었다.
“기왕 맡게 된 거 망치지나 말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교수의 입에서 대답이 아니라 뼈 있는 일침이 나오는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수아는 등을 돌려 가버리는 교수를 계속 쫓아갔다.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만 저는 사정이 있어서 이번 달 안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요. 그래서 자퇴한다는 말씀을 오늘 드리려 했는데…….”
교수가 몸을 홱 돌려 수아를 마주 보더니 기가 막힌다는 듯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배역을 받아 가고는 자퇴한다는 거니?”
“갑자기 바꾸신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러실 필요 없으셨어요. 다시 이본이 맡는 게 맞다고 생각…….”
“너 왜 제멋대로니? 기껏 이본을 설득했더니 이런 식으로 굴면 곤란해. 멋대로 배역을 바꿔달라더니 이젠 멋대로 안 하겠다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네? 저는 그런 부탁 한 적 없어요. 누가 부탁한 거죠?”
교수는 수아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싸늘하게 흘겨만 보다 가버렸다.
누구의 부탁인지 어렴풋이 짚였지만 틀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답인 줄 알았던 게 정답이었다.
오후쯤엔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최근에 학교에 거액을 기부한 알브레히트의 회장이 오늘 아침 총장실에 찾아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용과의 학과장인 슈라이버 교수가 총장실로 불려갔고, 그 직후 슈라이버 교수는 이본을 불렀다. 그러곤 지젤 역이 바뀌었다.
그 사이사이 어떤 이야기가 흘렀는지 모를 징검다리 같은 사건을 넘어 모두가 하나의 결론에 발을 디뎠다. 알브레히트의 회장이 기부금을 빌미로 입김을 넣어 학교 공연의 주역을 제가 아끼는 발레리나로 교체했다.
제 등 뒤에서 도는 소문을 알게 된 건 어디나 눈치 없이 입을 여는 사람이 있는 탓이었다.
“아침에 널 데려다준 남자가 알브레히트의 회장이라는 게 정말이야?”
차라리 네가 그 남자에게 졸라 지젤 역을 빼앗은 거냐고 물어봐줘. 아니라고 말할 기회를 줘.
그러나 그런 건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묻지 않는다. 이미 저들 사이에선 기정사실이 되어 있으니 수아의 해명이나 진실 따위 궁금할 리가 없었다.
“수아는 좋겠다. 남자친구가 알브레히트의 오너라니.”
이미 당사자의 인정 한마디 없이 그 남자는 수아의 남자친구가 되었고 수아는 연인을 꼬드겨 친구의 것을 빼앗은 악녀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 가운데 내가 부탁한 적 없다고 묻지도 않은 답을 외쳐봐야 수아만 이상한 사람이 될 게 뻔했다.
그걸 알면서도 새 배역으로 공연 연습을 하는 내내 난 아니라고 외치고 싶은 충동을 견뎌야만 했다.
“수아, 그게 아니야.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하니? 다시!”
슈라이버 교수의 목청이 높아질수록 수아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초리가 차가워진다. 교수가 평소보다 혹독하고 매섭게 수아를 몰아붙이는 건, 교권을 침해당한 불쾌감의 표출만은 아닌 것 같았다.
학생들 사이에서 벌써 잡음이 나오기 시작하니 교수도 곤란한 것이다. 잡음을 불식시키려면 적어도 수아가 이본만큼 잘해야만 했다.
“수아! 집중해!”
그러나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이젠 엄마가 없는데도 수아는 연습 후에 동기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운전기사가 기다리니까.
금요일이라 같이 놀러 가자는 아이들이 어김없이 있었지만 오늘은 저번 주와 그 결이 달랐다. 궁금해서 캐내어보려고. 어쩌면 연줄을 대어보려고. 수아와 순수하게 어울리고 싶은 사람은 이제 없을지도 모른다.
몸과 마음 모두 녹초가 되어 가죽 시트에 몸을 파묻었다. 자리는 편한데, 불편하다. 이 고급 세단의 뒷좌석도, 그 남자의 펜트하우스도, 지젤도. 모두 대단한 자리이지만 그 어느 것도 그녀의 자리는 아니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한 적 없어.
“이런 식으로 굴면 곤란해.”
수아가 아니라 그 남자가 들어야 하는 말이었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예요? 내게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남자는 그토록 몰상식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매너 있고……. 그렇지만 매너가 없을 때도 있었다. 다정한가 싶으면 냉정했으며, 사려 깊은가 싶으면 무심했다.
아아, 이젠 도저히 어떤 남자인지 모르겠다.
창 밖으로 아우토반의 반사판이 번쩍번쩍 점멸하며 줄지어 지나가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며 머리카락을 뽑는 사이 차는 바덴뷔르템베르크주를 벗어나 헤센주로 접어들었다.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면 해야 할 일에 생각이 다다르자 수아의 손이 머리카락을 뽑는 게 아니라 뜯기 시작했다.
‘이본에게 배역을 돌려주세요.’
머릿속의 남자에게 그렇게 말하는 자신을 상상하는 건 쉬웠지만 남자의 반응은 전혀 예상이 되지 않았다. 흔쾌히 번복해줄까? 섭섭해하는 건 아니겠지? 어쩌면 청탁한 적 없다고 발뺌하려나? 기껏 배역을 줬는데 싫다고 해서 화를 낼까? 싸늘하게 굴려나? 도무지 어느 쪽일지 알 수가 없다.
이쯤 되니 수아의 마음은 어려운 길보다 쉬운 길로 자연스레 기울었다.
말없이 자퇴해버리면 지젤은 이본이 자연히 맡겠지. 어차피 발레는 관둘 테니 다들 수아를 나쁘게 보더라도, 안 좋은 소문이 나더라도 상관없었다.
상관…… 없지…….
잠깐 사이에 손가락에 낀 머리카락이 배로 늘었다.
상관없다는 걸 머리론 받아들이는데 마음으론 쉽지 않았다. 엄마처럼 민폐 끼치는 사람이 되지 말자는 게 수아의 신조였는데 과에서 제일 민폐와 거리가 먼, 모두에게서 사랑받는 동기에게 민폐를 끼쳤다. 사실 이건 민폐 정도가 아니라 뒤통수를 친 거나 마찬가지였다.
걘 항상 살갑게 말을 걸어주는데 오늘은 종일 나랑 눈도 안 마주치려 했지.
머리카락을 뜯다 말고 손톱 옆의 거스러미를 뜯기 시작했다. 눈물이 찔끔 나는 아픔 덕분에 마구 들썩이던 불안감이 가라앉는다. 그러나 잠시뿐. 또다시 돌이 든 것처럼 마음속이 덜거덕거렸다.
화 많이 났겠지. 해명도, 사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나 이본에게 연락해보겠다는 생각은 펜트하우스에 들어서는 순간 까맣게 잊게 됐다.
„Abend.“
남자는 이미 집에 와 있었지만 인사를 듣고도 돌아보지 않았다. 심지어 유리에 비친 수아를 흘끔 보고는 가버렸다. 뒷모습이 유난히 차가워 보였다.
이젠 남자마저 수아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왜 화가 났지? 내가 잘못한 거라도 있나? 내가 뭘 잘못했지?
수아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조금 전보다 더 큰 돌이 덜거덕, 덜거덕, 마음을 흔들었다.
지난 두 달, 여자는 게스트 스위트로 돌아오면 곧장 욕실로 향했다. 그러나 오늘은 거실 소파에 오래도록 주저앉아 자리를 뜨지 못한다.
여자는 계속해서 핸드폰을 들었다가 놓았다. 앙다물고 있던 입을 살짝 벌리며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걸 보니 한숨을 쉰 것도 같았다. 할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다.
들릴 리 없는 한숨 소리도, 여자의 생각도 들리는 것 같다. 그가 픽 웃는 찰나 여자가 드디어 결심한 듯 소파에서 일어서더니 창가로 향했다. 여자는 핸드폰을 제 눈높이로 들고 무언가를 하다 고개를 푹 숙이곤 폰을 만지작거렸다.
지이잉.
진동 모드로 둔 그의 핸드폰이 짧게 울린다. 화면이 켜지며 메신저 앱의 로고가 나타났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이 눈에 들어오자 필립은 또 짤막한 비소를 흘렸다.
재밌네.
그의 모친이라는 여자가 왜 사람을 쥐고 흔들다 풀어두고 관찰하는 걸 취미로 삼았는지 이젠 알겠다.
필립은 TV를 켜둔 채 몸을 일으켜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위로 휘어 올라간 입매는 만족감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이론과 실험이 실전에서 빛을 발한 덕이다.
저번에 로젠탈 성의 숲에서 처음 느꼈고, 오늘 아침 내내 실험해 검증까지 했다. 여자는 타인의 분노가 제 책임이라고 착각한다. 제 탓이 아닌 게 분명한 상황에서도 주변에 화가 난 사람이 있으면 그걸 해결하지 못해 안달하는 것이다.
변덕스러운 양육자의 눈치를 보며 커온 사람들에게 생기는 나쁜 버릇이었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 나쁜 버릇은 좋은 버튼이다.
말 한마디 할 필요 없었다. 그저 인사를 무시한 것만으로도 여자는 버튼이 눌려 그의 눈치를 본다.
쉽네.
화난 연기는 사실 쉽다. 분노라는 감정에는 익숙하니까.
그럼 외로운 연기는 어떻게 하는 걸까. 평생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의 관점으로 보건대 외로움은 결핍에서 기인한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거나 있던 것이 사라져 느끼는 허전함 말이다. 그러나 필립은 평생 못 가져본 것이 없었으며 사라진 것에 미련을 느낀 적도 없었다.
거울 앞에 서서 외로운 표정을 지어 보았다. 지어본 적은 없어도 본 적은 많으니 지금 제 표정이 틀렸다는 건 알고도 남았다.
필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표정을 지어보았다. 이번엔 꽤 그럴싸했다. 그 여자가 외로워 보일 때마다 지은 표정과 눈빛을 흉내 낸 것이니까.
여자는 친숙한 이 표정에서 그 근원인 감정을 느낄 테고 그의 연기는 성공적일 것이다.
거울 효과도 덤이었다.
인간은 자신과 공통점이 있는 이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래서 가까워지고 싶은 상대가 있다면 그자의 행동을 거울처럼 따라 하는 게 좋다. 그게 거울 효과의 골자였다.
필립은 대학에서 경영학과 심리학을 복수 전공했다. 열성적으로 가르친 이론과 연구 사례를 수석 졸업생이 한 여자의 심리를 조종해 지배하는 데 써먹는 걸 알면 모교의 심리학과 교수들은 개탄할지도 모른다.
이걸로 그 여자와 호감과 유대감을 쌓고 오늘 밤의 끝엔 모두 산산이 무너트릴 생각이었다. 그런 짓을 하는 진짜 목적은 따로 있지만 방심하다 허를 찔리는 여자의 표정을 꼭 보고 싶기도 했다. 그 표정은 그가 따라 지어볼 리 없겠지만. 일종의 전리품일 뿐이다.
연습을 마친 필립은 침실로 돌아가 거치대에서 깜빡이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가 연 건 메신저 앱이 아니라 보안 폴더에 든 라디오 앱이었다. 라디오로 위장한 앱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브라우저 기록’이라고 적힌 메뉴를 열어 훑어보았다. Abmeldung(거주지 등록 해지), Bank Konto Kündigung(은행 계좌 닫기), 한국 항공사의 홈페이지, 아파트 시세인 걸로 보이는 정보가 정리된 한국 웹페이지. 여자는 그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로 그 짧은 시간 동안 몇 건을 더 검색하고 몇몇 사이트를 더 들락거렸다.
이번엔 ‘메신저 앱 기록’을 열어보았다. 연락을 기다리는지 야나와의 채팅방도 여러 번 열고 닫았다. 개의 시답잖은 탈출 시도를 즐겁게 지켜보면서도 조금은 불쾌해지려 했다. 앱을 닫고 메신저 앱을 열었다.
[네, 그렇게 말하겠습니다.]
시각이 오늘 오전으로 찍혀 있으나 아직도 열어보지 않은 야나의 대답이 눈에 들어오자 심기가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그제야 필립은 여자와의 채팅방을 열었다.
[새 핸드폰 정말 감사해요. 사실 정말 갖고 싶었던 모델이었거든요. 카메라도 진짜 좋아요.]
여자는 야경 사진을 메시지와 함께 보냈다. 급하게 찍어 보내느라 못 본 걸까. 사진의 유리창엔 여자의 초조한 표정이 유령처럼 드리워 있었다.
고작 그딴 것에 휘둘리는 게 귀엽기도.
필립은 사진 속 여자의 희미한 얼굴을 손끝으로 짓뭉개듯이 문대다 답장을 썼다.
[지금 와인 한잔할래요?]
착하기도 하지.
답장은 곧바로 왔다.
씻고 나가겠다는 답장이 오자마자 TV 속 여자가 욕실로 들어갔다. 주방으로 가서 와인을 고를까 하던 필립은 리클라이너에 앉았다. 협탁의 태블릿을 켜고 몇 번 두드리자 TV의 화면이 바뀐다. 그의 입술 사이로 아침때와 다름없이 나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벨트 버클이 조용히 풀려 나갔다.
여자가 샤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20분. 뻣뻣이 선 그의 긴장을 푸는 데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난 되도록이면 내 성에서 만든 와인만 마셔요.”
남자는 은은한 금빛 액체가 찰랑이는 샴페인 플루트를 새하얗게 쏟아지는 조명 빛 속에서 원을 그리듯 기울이며 말했다.
“포도밭에서 양조장까지 내 와이너리 특유의 손길만 고스란히 남아 있는 와인. 달리 말하자면 남의 손을 타지 않았거든.”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는 빈처젝트를 바라보던 남자의 청회색 눈동자가 갑자기 수아에게로 향했다.
“여긴 이제 내 손길만 고스란히 남겠지. 내 입맛에 맞게 익어갈 테고.”
와인은 남성형인데 남자는 여자를 뜻하는 대명사를 썼다.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취한 걸까. 그럴 만도 했다. 수아의 눈은 커피 테이블에 놓인 빈 병으로 향했다.
한 잔만 할 줄 알았으나 한 병이었다. 얼떨결에 같이 마셔버린 수아의 뺨이 화끈화끈했다.
남자가 단둘이 술을 마시자고 하면 당연히 거절하는데 이 남자에겐 왜 그랬을까.
사실 기분이 안 좋아 보여 거절하지 못했다. 한편으론 나한테 화가 나서 할 말이 있는 건가 해서 듣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남자는 수아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었다. 부모님 때부터 가까운 사이였던 어느 언론사에서 귀찮게 한다나. 수아에겐 어려운 이야기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지만 남자는 와인 몇 잔에 저절로 화가 풀린 듯 표정이 밝았다.
지금이 타이밍인가?
기분이 좋아 보이니까 미뤄뒀던 수아의 용건을 꺼낼 차례였다. 그러나 상상 속에선 이 남자에게 말을 꺼내는 것까진 분명 쉬웠는데 실전이 되니 그것마저 어려워졌다. 와인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는 척하며 머리를 굴리던 수아는 결국 돌려 묻기로 했다.
“저, 오늘 학교에서 소문이 돌았어요.”
“무슨 소문?”
남자는 손바닥에 턱을 괴고 샴페인 플루트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심드렁하게 물었다.
“학기 말 공연에서 지젤이 저로 바뀌었거든요. 갑자기. 그런데 오늘 필립이 우연히 총장실에 왔다 가는 바람에…….”
“우연 아닌데.”
그는 정면으로 얼굴을 향한 채 시선만 느릿하게 돌려 수아를 바라보았다. 술기운 탓인지 혈색이 짙어진 입술 사이로 다정한 목소리가 나왔다.
“내겐 수아가 지젤이에요.”
정말 이 남자 짓이구나.
수아는 울컥하는 원망을 억누르고 애써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는 건 정말 감사하지만 생각으로 그쳐주셨더라면 더 좋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감사하지 않다는 거네.”
남자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싸늘해졌다. 수아는 목구멍이 얼어붙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번에 바르나에서 지젤 독무를 추다가 실수했었죠. 잘하더니 마지막을 앞두고. 그거 나 때문이죠?”
“…….”
“나 때문이네.”
그걸 저 남자가 알고 있었다니.
창피스러운 데다 그때 느꼈던 이상한 기분까지 되살아나며 수아는 도망치고 싶어졌지만 남자의 눈빛 하나에 못이라도 박힌 듯이 꼼짝할 수 없었다.
“1라운드는 통과하겠다 싶었는데 떨어진 게 내 잘못인 것 같아서 내심 미안했어요.”
“그러실 것까진…….”
“지젤 역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수아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선물이에요. 그런데 이번에도 내 선물이 마음에 안 드나 보죠?”
따끔, 심장에 날카로운 바늘이 파고든다. 분명 말투도, 눈빛도 부드러운데. 서운하다는 저 눈빛에서 수아는 선물할 때마다 저를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던 남자의 말을 떠올렸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그럼?”
“……감사해요. 하지만…….”
“마음에 든다니 기쁘네요.”
“…….”
그는 눈매를 휘어 웃으며 소파에 상체를 느슨히 기댔다. 수아를 향해 몸까지 돌리며 무릎이 닿았다. 또 대수롭지 않은 일로 나쁜 사람으로 만들 것 같아 수아는 피하지 못했다. 두 사람 다 반바지를 입은 탓에 맨살의 온기와 촉감이 그대로 전해졌다. 이상하게도 허벅지 안쪽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공연 꼭 보러 갈게요. 벌써 기대되네요. 바르나에서는 너무 짧아서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매드 신도 볼 수 있겠지.”
저는 곧 떠날 거예요.
이 말은 또 어떻게 하지?
수아가 곤란과 혼란을 오가는 사이 남자의 화제는 어째서인지 그의 마지막 출장으로 옮겨가 있었다. 한국에서 뭘 했는지, 어땠는지 감상을 말하던 남자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내게 뭔가 물었는데 딴생각을 하다 놓친 건가.
갑작스러운 정적에 수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한 질문이었다.
“아…….”
차라리 잘됐다. 이 기회에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되겠다.
그러나 입을 열자마자 다시 다물었다.
남자의 눈이 수아에게 말하고 있었다.
외롭다고.
외로움 같은 건 전혀 모를 것 같았는데. 얼굴에 띤 어렴풋한 미소가 위태롭다.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
“같이 사는데 가끔은 이렇게 어울리며 지내요.”
수아가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못하는 사이 남자는 등 뒤의 유리창으로 시선을 던졌다. 밖은 테라스였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수영장만이 푸른빛으로 고요히 넘실거리고 있었다.
“수영장 써도 돼요.”
“아, 저 수영할 줄 몰라서 괜찮아요.”
탁.
남자는 샴페인 플루트를 테이블에 놓고 일어섰다. 내미는 손을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더니 그가 수아에게로 몸을 숙여 샴페인 잔을 뺏고 손을 가져갔다.
이끌려 테라스로 가며 제 목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흰 티셔츠와 빨간 반바지. 남자가 입은 것도 흰 티셔츠와 검은 반바지. 둘 다 수영할 차림은 아니었다.
“수영복도 안 입었는데…….”
남자가 어깨 너머로 흘긋 시선을 던졌다. 눈이 훑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속살이 간질간질했다. 수아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걸음을 멈추자 그가 손을 당기며 물었다.
“속옷은 입었죠?”
“네? 당연히 입었죠.”
“그럼 문제없네요. 젖은 옷이야 갈아입으면 그만이고.”
테라스 문 앞까지 순식간이었다. 남자가 벽면의 버튼을 누르자 테라스의 정원 등에 불이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순간 후텁지근한 여름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수아를 문밖으로 끌고 나간 그는 바에서 두꺼운 수건 두 장을 꺼내 들더니 선베드에 던져두곤 수영장으로 향했다. 그러는 사이 수아의 손은 단 한순간도 놓지 않았다.
앗, 차가워.
수아도 얼떨결에 남자를 따라 수영장 계단을 내려가 몸을 담갔다. 허리에서 찰랑대는 물이 생각보다 차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
“나만 믿어요.”
“앗!”
남자가 수아에게로 몸을 숙이더니 가볍게 안아 올렸다. 그는 발이 떨어지자마자 무서워 몸을 꼿꼿이 굳힌 수아를 수면에 눕혀 안은 채 물에 뜨는 법을 말로 일러주곤 팔을 서서히 뗐다.
“숨을 깊이 들이쉰 다음에 다 내쉬진 말고 얕게 호흡해요. 몸은 길게 펴요. 힘 풀고.”
남자가 시키는 대로 했지만 몸에서 힘을 푸는 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자꾸만 신경이 쓰인 탓이었다. 얇은 티셔츠가 젖어 배에 달라붙으며 연분홍 살갗과 오목한 배꼽이 선명히 비쳐 보였다. 등 뒤에선 티셔츠 자락이 하늘거리며 위로 딸려 올라간다. 브라 밴드가 있는 곳까지.
그래도 앞쪽까지 걷힐 리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물 아래에서 갑자기 물살이 크게 일더니 옷자락 앞쪽이 훌렁 위로 들렸다.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려버렸다.
“흡!”
삽시간에 얼굴이 물 아래로 잠겼다. 숨을 참으며 버둥대다 반사적으로 남자의 팔을 붙들어버렸다. 물에 잠겨 먹먹한 귀에 바깥의 소리가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하아.”
“괜찮아요. 내가 있으니까.”
그는 가라앉는 수아를 다시 가볍게 들어 올리며 다독였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다시 시도했다. 남자는 수아의 등허리에 손을 닿을락 말락 대고 있다가 가라앉으면 다시 밀어 올려주길 반복했다. 자꾸 못 하면 귀찮을 법도 한데 그는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무릎을 가슴으로 당겨요. 그럼 자연히 하체부터 아래로 가라앉으니까 발로 침착하게 바닥을 디디고 일어서면 돼요.”
남자가 진지하게 가르쳐주기만 하니 제 속살이 보이는 건 점점 신경 쓰지 않게 됐다. 잘 잡아주니 마음도 놓이고 자신감도 생기면서 슬슬 물에 뜨는 게 재밌어졌다.
“쉽죠?”
“네.”
이제야 밤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대도시의 하늘은 볼 것도, 새로울 것도 없지만 물 위에 떠서 보고 있자니 이것도 색다르게 느껴졌다. 차가운 물과 후덥지근한 밤공기가 기분 좋아 스르륵 눈을 감으려는 찰나였다.
“앗.”
뺨을 커다란 손이 감쌌다. 눈을 번쩍 뜨고 보니 검은 밤하늘 대신 음영이 짙게 진 남자의 얼굴이 수아의 시야를 차지하고 있었다. 깜짝 놀라 팔다리를 오므리는데 다른 손이 수아의 등허리를 밀어 올렸다.
오늘만 몇 번째 오해인지.
남자는 키스를 하려던 게 아니었다. 손은 젖어서 뺨에 해초처럼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주고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진득하게 달라붙는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뺨이 달아오른다. 남자의 얼굴에 머무르던 수아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배회하기 시작했다. 수면이 남자의 명치에서 찰랑거리는데 그의 티셔츠는 목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수아가 버둥거리며 물을 튀긴 탓인 듯했다.
반투명해진 천 너머로 보기 좋게 그을린 살갗이 비친다. 군살 하나 없는 상체는 흙으로 빚고 날카로운 칼로 세밀하게 굴곡을 새겨 단단히 굳힌 것만 같았다. 저번에 사우나에서 본 나신을 저도 모르게 떠올리는데 남자가 물었다.
“남자친구 있어요?”
“없, 없어요.”
수아는 화들짝 놀라 시선을 들며 재깍 대답했다. 그런데 이런 건 갑자기 왜 묻는 걸까.
“있었던 적은?”
“없어요.”
“나도.”
“네?”
“나도 없어요.”
“거짓말이죠? 그 얼굴이랑 몸매로 없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 거예요.”
진담 섞인 농담을 할 정도로 그새 그가 편해졌다.
“그거 내가 해야 할 말인데.”
“저는 사실 엄마가 엄해서 연애 못 했어요.”
“그럼 이제 할 수 있는 거네.”
조금 부적절한 말이다 싶었지만 수아는 못 들은 척 넘겼다.
“넌 연애할 생각이 전혀 없어?”
호칭이 어느새 거리감이 느껴지는 Sie(당신)에서 스스럼없는 du(너)로 바뀌었다.
“생각 있어요. 언젠가는 저도 하겠죠.”
지금은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닌 것 같지만.
“독일 남자는 어때?”
노골적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듯한 질문에 수아의 눈이 커졌다.
“어…… 좀…… 낯설고 어색하긴 한데…… 괜찮은 것 같아요. 사실 한국 남자들도 낯설고 어색한 건 마찬가지라서…….”
당신이 괜찮다는 말처럼 들릴까 봐 괜한 소리로 얼버무리는데 물속의 손이 수아의 등허리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이것도 수아는 못 느낀 척했다.
“당신은요?”
저도 du를 써도 되는 건지 잘 몰라 계속 Sie를 썼다. 남자는 아무 말 없었다.
“왜 연애를 안 해봤어요?”
“못 하는 거지.”
“네? 말도 안 돼.”
“내가 까다로워서. 내 입맛에 맞는 여자를 찾기가 힘들거든.”
Geschmack. 취향이라고 해석해도 될 단어인데, 입맛이란 뜻이 먼저 떠올랐다. 저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이 허기져 있어서.
허기진 눈이 수아의 젖은 몸을 노골적으로 훑어 내려간다. 수아는 굶주린 뱀 앞의 쥐처럼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돌연 다리 사이에서 물결이 일었다. 힐끔 내려다보니 물 밖에 있던 남자의 손이 벌어진 다리 사이의 수면으로 들어와 있었다.
뭘 하려는 거지?
대답이라도 하듯이 허벅지 안쪽에 손이 닿았다.
어떡하지?
머릿속이 시끄러워지는 사이 남자는 수아의 허벅지를 숫자라도 세듯이 손끝으로 누르며 더듬어 올라갔다.
“그런데 이젠 찾은 것 같기도 하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물보다 남자가 무서워졌다. 넓게 벌려둔 두 팔을 안으로 내젓자 몸이 물결을 타고 위로 미끄러지며 남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이제 저 혼자 떠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을 대로.”
남자는 수아를 순순히 놓아주고 멀어졌다. 수영장 가장자리를 짚고 물 밖으로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때에 심상치 않은 게 눈에 들어왔다.
턱에 걸터앉아 이쪽을 바라보는 남자의 반바지 한쪽이 크게 위로 솟아 있었다. 얇은 천이 찰싹 달라붙어 독사의 세모꼴 머리를 닮은 살덩어리의 윤곽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 아래 잘록하게 들어간 목도, 굵다랗게 이어지는 기둥도.
남자는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수아를 보며 발기한 상태였다.
“헉, 읍…….”
깜짝 놀라 몸이 뻣뻣하게 굳는 순간 머리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며 코로 물이 밀려들어 왔다. 일어서려고 발을 마구 허우적대어보았지만 바닥에 닿지 않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 깊은 곳까지 흘러왔던 것이다.
“흐읍…….”
수면 위로 잠시 머리가 나온 찰나, 픽 웃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이것 봐. 혼자 못 떠 있잖아.”
어느새 다시 들어온 남자가 수아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지 마.
입을 벌렸다가 물을 잔뜩 먹으며 다시 몸이 가라앉았다. 시린 눈을 감기 직전 커다란 손이 물을 가르고 오더니 수아를 곧 움켜쥘 듯 펼쳐졌다.
“헉!”
남자는 물에 빠져 버둥대는 수아를 단번에 건져 올렸다. 수면 위로 나와 안도하자마자 겁에 질려 발작했다. 남자가 그녀를 끌어안은 것이었다. 콜록거리는 수아의 등을 두드려주는 다정한 남자의 허리 아래는 발정이 아직도 단단히 나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묵직하게 찔러 올렸다.
남자에게 매달리지도,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못하는 수아에게 그가 나직이 속삭인다.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떨림이 걷잡을 수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