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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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위험한 욕망을 평생토록 억누를 수 있을 거라 믿었어. 

그런데 네가 나타났지.

***

닷새 후, 결과는 예상대로 1라운드 탈락이었다.

1차 경연 마지막 순간에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고자 2차 경연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역부족이었다.

독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이 비행기에 탄 사람들 모두 콩쿠르에 참가했다가 탈락한 경연자나 그 가족이었으니까.

“폰 알브레히트 여사님께서 별장으로 초대하고 싶으시답니다.” 

40명 안에 들지 못해 낙방이 확정되자마자 후원자의 비서가 대기실로 찾아와 이런 말을 했었다. 그것도 전용기까지 내어주며. 이번 콩쿠르에 참가한 재단 장학생 여섯 명 모두 입상은커녕 1라운드도 통과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돈값도 못 하는 것들이라고 돈줄 확 잘라버려도 모자랄 판국인데.”

수아의 옆에 앉은 엄마가 간식으로 나온 땅콩을 와득와득 씹으며 중얼거렸다. 여긴 다른 한국인이 없어 다행이었다.

“할매가 외로운가 봐.”

엄마의 시선은 복도 끝의 닫힌 문에 있었다. 저 너머는 오너 전용칸인 듯했다.

“럭셔리하긴 하네.”

전용기 내부는 세련된 디자인과 무게감이 느껴지는 색조가 조화를 이뤄 차분한 분위였다. 엄마는 진회색의 고급 가죽 시트를 뒤로 기울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핸드폰 위에서 손을 바삐 놀리기 시작했다.

전용기 안팎이며 웰컴 드링크로 나온 샴페인이며, 엄마는 조금 전부터 계속 사진을 찍더니 수아더러 승무원에게서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알아 오라 했다. 이젠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사진을 보내 자랑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신경란 인생 44년에 이런 것도 다 타보고.”

수아는 엄마를 조용히 곁눈질했다. 엄마의 기분이 좋아 보인다. 어쩌면 무대에서 실수한 일로 얻어맞지 않고 조용히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1라운드 탈락 직후에는 호텔로 돌아가자마자 얼굴로 손이 날아올 운명이었다. 그러나 바로 독일행 비행기에 오르게 되며 그럴 틈이 없어졌다. 수아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전용기의 좌석이 한정되어 있어 가족은 미성년자의 보호자만 따라올 수 있다는 말에 엄마와 며칠이라도 떨어질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바람까지 이뤄지진 않았다.

“유 노, 인 코리아 위 돈, 도터 얼론.”  

엄마는 비서를 붙잡고 영어와 손짓을 섞어 설명했다. 한국에서는 미혼인 딸을 절대 부모 없이 혼자 보내지 않는다고. 그렇게 엄마는 뻔뻔스러운 거짓말로 여기까지 따라왔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나쁘진 않았다. 폰 알브레히트가의 별장은 이 전용기만큼 대단할 테고 그곳에 있는 내내 엄마는 지금처럼 기분이 좋을 테니. 게다가 후원자와 같은 지붕 아래라면 엄마가 남 눈치를 볼지도 모른다.

어쩌면.

제발.

엄마는 한번 눈이 돌아가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학기 마지막 날도 그랬다. 그나마 수아가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은 덕분에 이웃 누구도 경찰을 부르지 않았다.

엄마의 고성만 들렸을 테니 술주정 정도로 생각했는지 다음 날 아침 집 현관문에 입주자 규칙에 따라 밤 10시 이후에는 조용히 해달라는 쪽지 한 장이 붙어 있는 게 다였다.

여느 때와 달리 겉으로 티가 나는 얼굴과 팔뚝을 맞는 바람에 며칠은 집 밖에 나가지 못했다. 콩쿠르를 목전에 앞두고 어쩔 수 없이 연습을 쉬었으나 수아가 연습을 쉬면 엄마가 예민해진다. 무더위로 푹푹 찌는 집 안이 수아에겐 살얼음판이었다.

“넌 꼭 때려야 말을 들어서 내가 손을 안 들 수가 없다니까.” 

손찌검은 수아가 슬럼프를 겪고부터 시작됐다. 머리나 등을 한두 대 맞는 일에 지나지 않던 폭력은 부모님이 이혼한 후로 그 빈도도, 강도도 더욱 심해졌다. 수아에겐 죄가 있었으니까.

“거짓말 처하는 것도 딱 제 애비야, 아주.” 

엄마를 배신한 남자의 딸인 죄. 엄마의 기대에 못 미치는 죄. 엄마의 기분이 심하게 나쁠 땐 태어난 것도 죄였다. 그건 수아가 아닌 엄마의 의지였음에도.

수아가 어른이 되어도 엄마의 손찌검은 멈추지 않았다. 저항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아무리 운동으로 단련된 몸이라 해도 체격 차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한국에 살던 시절, 아마 열다섯 살 때였을 것이다. 한 번은 수아도 눈이 돌아가 엄마의 얼굴을 할퀴고 물건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날 엄마는 경찰을 불렀다.

딸이 저를 죽이려 한다며.

딸에게는 상처가 전혀 없고 엄마에게는 상처가 있다. 경찰이 누구를 가해자로 볼지는 뻔했다.

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가슴이 쿵쿵 뛰었다.

경찰차에 태워져 지구대까지 끌려갔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수아를 범죄자 보듯 했다. 엄마를 상습적으로 폭행하는 것도 모자라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한 딸이 되어버린 수아를 경찰 아저씨들이 무섭게 윽박질렀다. 그 후로 수아는 경찰만 보면 숨을 잘 쉬지 못하게 됐다.

“수아도 신고해. 응? 엄마 깜빵에 보내면 수아는 안 맞고 살아도 되잖아.” 

그리고 엄마는 경찰을 입에 올리며 수아의 기를 꺾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야? 너희 엄마랑 연 끊어.” 

수아와 비슷한 상황이다가 부모와 연을 끊은 사촌은 그런 수아를 답답해하며 연을 끊으라 했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부모와 연을 끊는 건 그 언니처럼 돈과 직장이 있으며 사회에서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사람이나 가능한 것이다.

수아는 아직 스무 살, 아이라고 하기엔 많고 어른이라 하기엔 적은 나이. 게다가 사회 경험이 전혀 없는 학생이었다. 제 손으로 이룬 게 없는 수아에게 세상은 무서운 곳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가지면 그때 할 거야. 돈을 벌기 시작하고 독립도 하면 엄마도 나를 더는 못 때리지 않을까.

“돈 벌어서 독립 같은 소리 하네. 그때부터 네 엄마의 진짜 집착이 시작되는 거야.” 

언니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평생 붙잡혀서 감정 쓰레기통에 지갑 노릇까지 하게 되기 전에 버려.” 

그렇지만 ‘불쌍한 엄마’를 버렸다가 난 어떤 손가락질을 당할까.

아빠가 비서와 바람나며 버려진 엄마. 아빠가 집을 나가버리자 수아를 먹여 살린다고 이른 새벽부터 일하러 나가던 엄마. 사모님 소리를 듣다가 하루아침에 아줌마 소리를 들으며 아득바득 궂은일을 하던 엄마.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오는 길에 농약 한 병을 사 와 머리를 풀어 헤친 꼴로 우리 콱 죽어버릴까, 라고 물으며 울던 엄마.

엄마는 불쌍한 사람이야.

이를 악물고 되뇌었다.

그리고 아픈 사람이기도 해.

마음이 아픈 사람.

엄마도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한테서 그렇게밖에 못 배워서 그러는 것뿐이야. 나를 시샘하는 것도, 엄마는 꿈을 이루지도, 그럴 기회를 얻지도 못했는데 나는 다 누리고 있으니 그럴 만해.

결혼과 잘난 딸, 이 두 가지를 자신의 유일한 업적으로 삼아 버텨오던 사람이다. 그러나 딸의 성공이 무너지고, 뒤이어 결혼마저 무너졌다.

그런 엄마에겐 수아마저 없으면 아무것도 없었다.

수아는 엄마가 자기 연민에 취해 하던 말을 그대로 읊는 것뿐이었다. 이건 주문이다. 매일 수십 번도 외우는 주문.

저 샴페인 플루트를 깨서 엄마라는 이름의 간수를 찌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주문 말이다.

***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에 눈을 뜬 수아는 암막 커튼의 틈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길잡이 삼아 창가로 향했다. 그리고 커튼을 열자마자 말을 잊었다.

어제 별장에 도착했을 땐 캄캄한 밤이었던 탓에 몰랐다. 원혼들이 춤추는 지젤 2막의 배경으로나 어울릴 법한 풍경이 창 밖에 펼쳐져 있다는 것을.

푸르스름한 새벽빛 속에서 희뿌연 물안개가 강물 위로 유령처럼 피어올라 깎아지른 산비탈을 슬금슬금 기어오른다. 일렬로 늘어선 포도나무 사이로 소리 없이 스며드는 모습은 마치 하얀 뱀이 그녀를 향해 은밀히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강 건너 언덕에서 소가 풀을 뜯는다.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는지 청아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풍경이라 할 수 있다. 눈앞의 안개도 구름 위에 떠 있는 것만 같다고 낭만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섬찟하게만 보이는 건 어째서일까.

독일 서부 모젤강에 맞닿은 포도밭, 그리고 그 언덕 위에 자리한 고성이 바로 폰 알브레히트가의 별장이었다.

“저기로 내려가면 된댔지?”

“그런 것 같아요.”

아침 식사 장소는 어젯밤 방으로 안내받으며 들었다. 식당으로 내려가는 길, 수아와 경란은 아는 얼굴과 마주쳤다.

“좋은 아침입니다.”

폰 알브레히트 여사의 비서, 야나였다. 그녀는 별장에 머무는 손님들의 응대 또한 책임지고 있었다.

마침 야나도 아침 식사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함께 고풍스러운 계단을 내려가며 야나는 책임자답게 두 모녀에게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를 물었다.

“잠은 편안히 주무셨나요?”

“네, 덕분에요.”

손님 방의 침대는 여느 호텔보다도 좋았다. 전용 욕실이 딸린 방도 둘이 쓰기엔 과분할 만큼 넉넉했다.

“불편한 점이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제게 말씀해주세요.”

야나는 어젯밤에 했던 말을 다시 한번 친절하게 반복하곤 별장에 있는 시설을 소개했다.

“남관과 동관 사이 1층에는 웰니스 시설이 마련되어 있어요. 실내외 수영장이나 사우나 모두 수칙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하시면 됩니다. 게스트가 출입 가능한 시설 모두 마찬가지고요. 아, 시설 목록과 이용 수칙이 포함된 안내서는 어제 메일로 발송해두었습니다.”

따로 시설 안내서까지 있다니. 5성급 호텔에 온 기분이었다.

“승마할 줄 아시나요? 성 뒤편이랑 강가 산책로가 승마하기 정말 좋거든요.”

야나는 두 사람의 멋쩍은 표정을 보더니 살갑게 웃으며 다른 걸 추천했다.

“발레리나셔서 이건 말씀 안 드리려 했는데…….”

야나가 손날을 세워 입을 가리더니 두 사람에게만 긴한 비밀을 말해주듯이 속삭였다.

“모젤이 와인으로 유명하거든요. 와인도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어요. 아, 사실 폰 알브레히트가에서 무제한이라고 말한 건 아닌데 그것 좀 마신다고 티가 나겠어요? 리슬링, 젝트, 게뷔어츠트라미너, 돈펠더, 뭐든지 말씀만 하세요.”

수아는 와인 무제한이란 말보다는 야나의 익살스러운 태도에 웃었다. 그러나 수아가 해준 통역에 그 뉘앙스까지는 전달이 안 되었는지 엄마에게서 오해를 샀다.

“아침부터 술 처마실 생각에 좋다고 웃었어?”

“아무튼, 여긴 천국이에요. 악마가 세운.”

양쪽에서 다른 언어가 들려온다. 그 탓이었다. 야나가 혼잣말처럼 덧붙인 말은 제 독어가 짧아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물론 제 착각이라고 치부하기까진 시간이 걸렸으니 말을 들은 순간엔 놀라 야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시선을 맞추지 않고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주의하셔야 할 게 있어요. 이 성의 시설을 사용하다가 수칙을 어기거나 소유주의 잘못이 아닌 원인으로 사고가 발생했을 땐 폰 알브레히트가가 책임지지 않습니다.”

꽤나 살벌한 화제였다.

“건강 보험과 배상 책임 보험은 당연히 있으시죠?”

“건강 보험요? 그건 있고…… 어…….”

건강 보험 다음으로 이어진 기나긴 독어는 수아가 모르는 단어였다. 수아가 더듬거리자 야나는 멋쩍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제가 너무 겁을 준 것 같네요. 독일 사람들이 이래요. 입만 열면 보험, 보험 하고 우는 새죠. 저희 부모님은 제 열여덟 살 생일에 변호사 보험을 선물로 사주셨어요.”

모르는 단어가 간간이 섞인 데다 점점 빨라져 알아듣기 어려워지는 야나의 수다에 어설프게 맞장구를 쳐주는 사이 식당에 도착했다. 웨이터가 열어주는 문 안으로 들어갔더니 먼저 와서 식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눈인사를 했다.

세 사람을 테이블로 안내한 웨이터가 손수 의자를 당기고 밀어 넣어주었다. 모녀가 자리에 앉자 야나는 선 채로 설명했다.

“저기서 편하게 가져다 드시고 계란 요리는 웨이터가 주문을 받아 갈 거예요.”

그녀의 옆에 선 웨이터가 공손히 손을 모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수아의 맞은편에 앉은 경란은 딸의 통역을 듣지 않고 식당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다른 요리도 재료가 있다면 가능하니 주문하셔도 됩니다. 그럼 즐거운 식사 시간 되시길.”

창가의 다른 테이블로 향하려는 야나를 엄마가 갑자기 붙잡았다.

“통역해.”

무슨 용건인가 했더니 엄마는 폰 알브레히트가의 모자는 언제 아침을 먹느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 두 사람은 여기 없었다.

이미 두 분은 식사를 하셨을 거라는 대답이 야나에게서 돌아왔다. 통역을 들은 경란이 중얼거렸다.

“내일은 더 일찍 일어나야겠네.”

그제야 수아는 제가 엄마의 의도를 놓치고 질문을 문자 그대로 통역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는 후원자와 같이 식사를 할 수 있을 걸로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아침 식사는 따로 하실 겁니다.”

다시 고쳐 묻자 이런 대답이 다소 겸연쩍은 표정과 함께 돌아왔다. 그 말을 듣고 다시 보니 식당은 사적인 공간이라기보단 공적인 접객 공간의 분위기를 노골적으로 풍기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일정 안내를 안 드렸네요.”

야나는 식당 가운데로 가더니 목청을 높여 모두의 이목을 이끌었다.

“오전 10시에는 성 투어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참여하시려면 식당 앞 로비로 모여주시면 됩니다. 점심 식사는 투어 후에 실외 수영장 옆 라운지에서 제공됩니다. 그 후론 오후 3시에 본관 2층 테라스에서 카페 운트 쿠헨(Kaffee und Kuchen, 독일식 티타임)이 있을 예정이며…….”

“알브레히트도 오냐고 물어봐.”

엄마는 수아의 통역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 물었다. 야나에게서 그건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엄마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다들 어디 갔대?”

계속해서 후원자에 대해 묻자 야나가 하실 말씀이 있으면 전해드리겠다고 제안했지만, 엄마는 손사래를 쳤다.

“무슨 집주인이 손님을 초대해놓고 코빼기도 안 비쳐?”

입에 안 맞는 식사를 하던 경란이 혀를 차며 구시렁거렸다.

“이거 설마 이별 여행 이런 건가?”

뜬금없는 소리에 수아의 눈이 커졌다.

“왜, 요즘은 남친이랑 헤어질 때 칼 맞을까 봐 안전 이별해야 한다며? 대회 떨어지자마자 후원 끊으면 욕먹을 것 같으니까 초대해서 위로한 다음에 조용히 후원 끊으려는 수작인가?”

경란은 콩쿠르에 낙방했다고 알브레히트가 후원을 끊는 건 아닌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후한 대접도 그 걱정의 불씨를 꺼트리지 못했다.

“그래서 손님 뒤치다꺼리는 직원들한테 시키고 본인들은 코빼기도 안 비치는 것 같잖아. 불안하게.”

“설마…….”

수아는 ‘설마요’라고 대답하려 했으나 입 밖으로 나온 건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였다.

말도 안 되는 생각 같지만 계속 듣고 있으니 그럴듯하게 들린다. 알브레히트는 제 한심한 실력을 보고서 돈을 낭비했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걱정하던 사람에겐 더더욱 그럴싸했다.

불안은 불길과 같다. 불길이 만나 화마가 되듯. 엄마의 불안이 수아의 불안을 만나는 순간 공포로 번졌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닌 두 가지.

수아는 한편으론 후원이 끊기면 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기대하는 못된 아이였다.

“할매한테 잘 보여. 응?”

“네, 그럴게요.”

없는 자신감을 꾸며내 대답하자마자 더 어려운 과제가 떨어졌다.

“그 아들한테 잘 보이든가.”

그 순간 수아는 떠올렸다. 저를 보며 입맛을 다시던 짐승의 눈빛을.

이젠 가슴이 쿵쿵, 부서지려 했다.

***

해가 나자 안개는 봄눈처럼 삽시간에 녹아 흩어졌다. 음산한 기운이 걷히고서야 성은 비로소 한가롭고 따사로운 휴양지의 느낌을 물씬 풍기기 시작했다.

밝을 때 보니 왜 따로 투어 시간을 마련했는지 알 만했다. 고풍스러운 문양으로 장식된 아치형 창문과 하늘을 찌르는 첨탑들을 올려다보는 수아의 눈이 휘둥그렜다.

투어는 손님 전용 공간인 서관 앞의 광장에서 시작되었다. 일반인의 관광도 예약제로 이뤄지는 곳이라 그런지 성에는 전문 가이드까지 있었다.

“Welcome to Castle Rosental. Oder auf Deutsch. Willkommen in Schloss Rosental.”

로젠탈 성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는 가이드의 2개 국어 환영 인사와 함께 투어가 시작되었다. 손님 아홉 중에서 독일어를 알아듣는 사람은 둘뿐이기에 설명은 영어로 진행되었다.

“이 지역은 한때 장미의 계곡이라 불렸습니다. 그 때문에 성 이름이 로젠탈이죠. 이 성은 1327년부터 폰 알브레히트가의 거점이었습니다.”

고딕 양식의 웅장한 고성은 14세기에 지어진 것이었다. 직사각형 구조로, 중앙에는 큰 광장이, 한쪽 끝에는 뾰족한 첨탑 두 개가 하늘 높이 치솟은 성당이 자리했다.

“언덕 위에 축대를 쌓아 지었고 넓은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좋은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성은 강이 크게 굽이치는 자리에 세워진 탓에 남쪽과 서쪽이 강을 향해 있었다. 방어 시설을 둘러보는 동안 노련한 가이드는 손님들이 지루해하지 않도록 이곳의 역사에서 자극적인 부분만을 추려 소개했다.

“이곳은 어둡고도 으스스한 역사가 있는 자리입니다.”

가이드가 멈춰 선 곳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축대의 다른 곳은 비탈진 포도밭으로 이어지지만, 절벽에 토대를 쌓은 이곳은 아래에 검푸른 강물뿐이었다.

“여긴 17세기에 당대 폰 알브레히트 백작의 정부가 몸을 던진 장소거든요.”

개인의 비극은 대중을 위한 야사가 되어 흥밋거리로 전락했다. 백작이 어느 귀족 아가씨와 결혼을 앞둔 어느 날 농노였던 백작의 정부가 여기에서 뛰어내렸다는 이야기를 해주며 가이드는 음모론까지 덧붙였다.

“그런데 그게 과연 자살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아직도 남아 있죠. 아무튼, 그때부터 난간을 설치하게 되었고요.”

축대 가장자리에 세워진 난간은 독일인들의 몸집에 비해선 턱없이 낮아 보였으나 경란처럼 키가 작은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추락하는 걸 막기엔 충분해 보였다.

“아이고, 간 떨려라.”

경란은 난간을 붙잡고 돌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절벽과 모든 걸 집어삼킬 듯 거칠게 몰아치는 강물을 내려다보다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서 떨어지면 한 번에 죽는 게 차라리 호상이네.”

“저기 있는 문은 뭐죠?”

누가 축대 가운데에 난 낡은 나무문을 가리켰다.

“아, 저건 성의 지하와 이어지는 문이에요. 왜 강 위의 절벽 한가운데에 문을 내어놨는지는 아무도 모른답니다. 성에서 탈출해야 할 때를 대비해 만들어두었다거나 성에 사는 유령을 속이려고 만들었다는 설이 있죠. 또 저기가 지하 감옥이 있는 자리라 시신을 쉽게 처리하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데 쓰던 문이란 추측도 있고요.”

흥미로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해가 높아져만 갔다. 날이 더워지기 전에 외부 관람을 끝마친 가이드는 모두를 내부로 안내했다. 손님 전용인 서관에는 가문의 유물과 수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어머, 수아야. 이 그릇 좀 봐.”

엄마가 수아를 붙잡더니 벽에 걸린 장식용 접시를 가리켰다. 가장자리에 레이스 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진 도자기 접시의 가운데에는 누군가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런 거 떼다가 한국에다 팔면 하나에 몇백씩 받을 수 있겠다.”

엄마가 자꾸만 전시된 골동품을 보며 가져가서 팔면 얼마일지를 궁금해하자 수아는 불안해졌다. 머릿속에서는 몇 달 전 엄마와 어느 유명 카페에 갔던 일이 스쳐 지나갔다. 엄마는 수아에게 망을 보게 시키더니 테이블에 있던 값비싼 찻잔과 받침을 가방에 넣었다.

그때 일을 떠올릴 때마다 수아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런 일이 또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숨까지 턱 막힌다. 박물관에 전시된 것까지 훔칠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니리라 믿었다. 하지만 방이나 식당에 있는 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여긴 변기도 빌레로이 앤 보흐야. 찻잔만 그런 줄 알았더니.” 

그러다 어젯밤 엄마가 한 말이 떠오르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난 찻잔 본 적 없는데.

어젯밤 이 성에 도착하자마자 방으로 갔으니 엄마가 찻잔을 본 곳은 방이어야 했다. 그러나 수아가 아는 한 방에는 찻잔이 없었다. 그러나 찻잔이 있었을 자리는 보았다. 방 한쪽의 사이드보드에는 생수병과 전기 포트부터 티스푼과 티백까지 갖춰져 있었다.

그런데 찻잔이 없었을 리가.

엄마가 이미 챙겼다는 뜻이었다.

“유민이 엄마, 한국 지금 몇 시야? 내가 바쁠 때 전화한 거 아니지? 아니, 저거 봐봐. 자기 그릇 좋아하잖아. 생각나서 전화했지.”

한편 경란은 수아가 가방을 뒤져 엄마가 훔친 물건을 찾아 빼돌리고 방에 있는 장식품을 모조리 치워버릴 계획을 몰래 세우는 줄도 모르고 지인과의 영상 통화에 몰두했다.

- 백조의 성인가 거기야?

“응? 아니. 성은 맞는데 수아 후원자네 별장이야. 놀러 오라고 해서 왔어.”

경란이 아닌 척을 섞어가며 자랑을 하는 대상은 수아의 어릴 적 영재원 동기 엄마였다. 얼마 전에 이 여자가 1박에 백만 원이 넘는 비싼 풀 빌라에 다녀온 사진을 톡으로 보내며 자랑을 했었다. 에어컨도 없는 낡은 아파트에서 푹푹 쪄지다가 그걸 보곤 누굴 놀리나 싶어 얼마나 열을 받았던지.

아직도 속이 뒤틀리던 차에 갚을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분이 우리 수아를 얼마나 예쁘게 봐주시는지…….”

- 아, 그러고 보니까 바르나 콩쿠르는 어떻게 됐어?

2라운드가 한창일 때에 휴가 중인 걸 보면 답을 다 알면서 묻는 것이다. 좀 갚아줄라치면 그걸 못 참고 아픈 구석을 콕 집어서 후벼 파는 게 아주 불여우 같은 여자였다.

“유민 엄마야, 우리 지금 와인 셀러 있는 지하에 들어가야 해서 인터넷 끊긴다. 나중에 다시 톡할게.”

경란은 전화를 냉큼 끊어버렸다. 딴 데 팔렸던 정신을 되찾아 온 그녀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이래서 저거 혼자 어디 못 내놓는다는 거야.’

눈을 뗀 그 잠깐 사이에 딸에게 날파리가 들러붙어 있었다.

“When I first saw you, I thought you were one of those K-pop girls.”

(너 처음 봤을 때 한국 아이돌인 줄 알았잖아.)

함께 온 장학생 중에는 영국인 발레리노 한 명이 껴 있었다. 남자애 혼자라 뻘쭘하겠다 싶었더니 비행기에서부터 여자애들한테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분위기를 주도했다.

스물세 살짜리 남자애가 듬직하지 못하고 뺀질거리는 게 경란은 마음에 영 안 들었다. 게다가 입성을 봐도 잘사는 집 애 같지는 않았다. 올리버라는 이름도 촌스럽다.

“Thanks.”

(고마워.)

“You don’t believe me, do you? I really mean it.”

(내 말 안 믿는 거지? 난 진심인데.)

저놈, 경란이 잠시 딴짓을 하던 틈을 타서 수아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건 더 꼴 보기 싫었다. 수아에게도 어제부터 말을 건다 싶긴 했는데 투어를 하면서부터는 계속 흘끔흘끔, 호시탐탐 말 걸 기회만 노리는 게 보였다. 왜 갑자기 그러는지야 뻔했다.

아침을 먹고 잠시 방에 올라갔을 때 경란은 수아의 옷을 갈아입혔다. 가슴이 푹 파인 끈 원피스로. 평소엔 가슴골이 보이지 않게 안에 탱크톱이나 티셔츠를 받쳐 입거나 위에 카디건을 입게 했지만 이번은 예외였다.

“가슴 뒀다 어디 써?” 

남자 꼬실 때 써먹지.

경란도 제가 경리로 일하던 회사 사장님이었던 수아의 아빠를 몸으로 꼬셨다. 남자 새끼라 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대가리에 그 짓만 든 건 똑같을 테니 꼬일 것이다.

그러니까 할매의 아들을 꼬시라고 헐벗겼다. 그랬더니 이거 좀 보라는 이 집 아들내미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날파리나 꼬이고 있는데 화딱지가 안 나겠나.

“좋다고 처웃는다.”

그걸 받아주고 있는 수아도 거슬렸다. 경란의 말을 알아들은 수아의 표정은 굳었으나, 양놈은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아직도 실실 처웃고 있었다. 놈은 경란이 사이에 확 끼어들고서야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머쓱해하며 딴 무리에게로 갔다.

야나의 말대로 지하에는 와인 병이 줄줄이 눕혀진 선반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지하 와인 저장고까지 구경한 후에는 다시 광장으로 나왔다.

성은 손님용과 주인용 공간이 구분되어 있었다. 그쪽은 개방하지 않는지 가이드는 손님용 서관만 구경시켜주고 투어는 여기까지란 말을 했다.

“성당은 안 보나요?”

어느 발레리나의 엄마가 광장 반대편을 가리키며 물었다. 폰 알브레히트가의 전용 공간 외에 보지 못한 곳이 또 한 곳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저기도 출입 금지인데…….”

가이드가 곤란해하나 싶더니 눈을 찡긋하며 흔쾌히 성당으로 향했다.

“밖에서만 살짝 보여드릴게요.”

가이드는 수아의 키 두 배는 족히 되는 듯한 정문의 한쪽만 열었다. 차례차례 돌아가며 안을 기웃대는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제 차례가 되어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본 수아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성당 안은 상상보다 훨씬 웅장했다. 아치로 연결된 높다란 기둥이 좌우를 길게 내달린다. 아치 위마다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솟아 있었으며 그 사이사이에서는 끝이 뾰족한 아치가 수없이 돋아나 맞은편의 아치와 이어지는 구조로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불을 밝히지 않은 성당은 어두웠으나 단 한 곳만은 아니었다. 정면을 차지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햇빛이 장의자 사이의 긴 통로를 휘황찬란한 오색으로 물들인다. 신을 믿지 않는 수아도 경건해질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뒷덜미가 서늘해지며 소름이 아스스하게 돋았다. 안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찬 탓은 아니었다. 천장으로 둥글게 솟아 가운데에서 매듭을 지으며 일렬로 모인 아치가 갈비뼈와 척추를 닮았다는 생각이 문득 든 탓이었다.

거대한 뱀의 배 속 같다. 멋도 모르고 발을 들였다가 육중한 문이 쾅 닫히며 평생 수아를 삼켜버릴지도. 그 속에서 수아는 저를 잃고 서서히 녹아 이 뱀의 일부로 흡수될 것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해버린 수아는 소스라치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저 뱀 아가리 속이 경이로워 보이기만 했나 보다.

“정말 멋있네요. 그런데 여긴 왜 출입 금지죠?”

다들 대화에 빠져 있어 수아의 낯빛이 좋지 않은 걸 눈치채지 못한 건 다행이었다.

“여기도 사적인 공간이어서요. 세례식, 장례식, 결혼식 같은 행사가 있을 때에만 외부인에게 열리거든요.”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결혼식에 딱이네요. 혹시 대관은 하지 않나요?”

어느 학부모가 묻자 가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대관은 하지 않아요. 오직 폰 알브레히트가만 여기서 서약을 할 수 있죠.”

“그럼 여기서 결혼하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인 거네요.”

어느 장난기 많은 20대 중반의 발레리나가 의미심장한 농담을 던졌다. 폰 알브레히트가의 유일한 미혼남과 결혼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뜻을 알아들은 여자들 사이에서 은근한 미소가 번졌다. 다들 그 세련되고 젠틀한 미남을 떠올리는 중인 것이다.

남들과 다를 바 없이 그를 떠올리면서도 웃지 않는 여자는 수아와 가이드뿐이었다.

가이드는 웃고 있긴 했다. 멋쩍은 미소라 그 종류가 달랐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직원들 사이에서 몇 년째 도는 필립의 결혼에 관한 소문을 떠올렸다.

“뭐…… 머지않은 미래에 여기서 또 결혼식이 열리지 않을까 직원들은 고대하고 있네요.”

저기서 결혼식이라니. 수아는 사절이었다. 뱀 아가리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섬찟한 기분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도 뜬금없이 뱀을 떠올렸었다. 수아의 뒷덜미가 또 서늘해지는 찰나였다.

“아, 마침 오시네요.”

으르렁거리는 듯한 엔진음과 함께 바퀴가 돌길을 오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벤틀리 한 대가 광장으로 들어섰다. 지붕이 열린 카브리오에는 그 남자 혼자였다. 금발이 바람에 물결처럼 흐트러졌다. 창턱에 걸쳐진 손에선 차와 맞먹을 가격의 플래티넘 시계가 정오의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짙은 선글라스 아래에서 일자로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일행을 발견하는 순간 시원스러운 호선을 그렸다. 차의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흐트러진 금발을 커다란 손으로 쓸어 넘기곤 손을 들어 알은체를 했다. 가문의 개인 공간인 성당을 구경시켜준 가이드는 나쁜 짓을 하다 들켰다는 듯이 웃고, 수아 또한 나쁜 짓을 한 사람처럼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그러자마자 엄마의 손에 앞으로 떠밀렸다.

“저흰 아무 짓도 안 했답니다.”

가이드가 넉살 좋게 농담을 건네자 남자는 사람 좋게 받아주었다.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핸들이 부드럽게 꺾이고 차가 그들의 앞을 미끄러지듯이 지나쳤다. 그 순간 따스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남자의 입매가 차갑게 굳은 건 착각일지도 모른다. 짙은 선글라스 뒤의 보이지 않는 눈이 저를 스치고 지나갔다는 직감 또한 착각일지 모르겠으나…….

움찔.

차디찬 뱀 비늘이 발목을 휘감고 지나간 듯한 섬찟한 느낌만은 진짜였다.

“와…….”

“장난 아닌데?”

성당 왼편의 기다란 차고 문이 자동으로 열리자 일행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고에는 고가의 세단과 SUV, 스포츠카도 모자라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클래식 카까지 세워져 있었다.

남자는 빨간 클래식 카와 검은 세단 사이의 공간에 흰 벤틀리를 단번에 주차했다. 그대로 차고의 문이 닫힐 줄 알았으나 그는 차에서 내려 일행에게로 다시 다가왔다.

온다. 온다. 온다.

남자가 자꾸만 발을 떼는데 땅바닥에 붙은 제 발은 떨어지질 않았다.

난 왜 도망치고 싶은 걸까. 무해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저 남자에게서.

단추를 두어 개 푼 흰 셔츠와 네이비색 슬림 핏 치노 팬츠는 휴가에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갈색 보트 슈즈 또한 휴양지다우나 자로 잰 듯 대칭으로 묶은 끈이 여유로워 보이는 걸음과 다소 대조적이었다.

요트라도 타다 온 걸까.

남자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수아의 코끝에서 강바람의 내음이 강렬해지는 것도 같았다.

일행 앞에 선 남자는 선글라스를 벗어 셔츠 주머니에 꽂았다. 아무래도 콩쿠르 첫날 무대에서 본 그 눈빛은 착시였던 게 틀림없다. 겉으로 드러난 청회색 눈동자는 다소 차갑긴 하지만 평범했다.

눈매가 부드럽게 휘며 눈동자가 안으로 숨었다. 변덕이 심한 엄마와 살며 느는 건 관찰력뿐이다. 수아의 눈에 남자의 미소는 그가 손목에 찬 시계와는 달리 모조품으로 보였다.

저렇게 웃지 않으면 오만하다는 오해를 종종 받을지도. 타고난 외모가 차가운 탓에 미소로 온기를 덧씌운다고, 수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즐겁게 보내고 계십니까.”

남자는 손님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수아의 차례가 다가올수록 귀를 울리는 심장 소리가 커졌다. 상대의 손을 가볍게 쥘 때마다 힘줄이 도드라지는 커다란 손등을 물끄러미 보며 저 손에 잡힌 제 손을 상상해보자니 수아의 손바닥이 못 견디게 간질간질해졌다.

“카타리나, 손님들께서 보석 박물관도 좋아하실 것 같네요.”

그러나 수아의 차례를 코앞에 두고 남자는 가이드에게로 몸을 돌렸다. 악수는 거기서 끝이었다. 손님들과 가벼운 담소를 나누기만 하던 그가 가버리자 수아는 허무한 손을 등 뒤로 숨기며 몰래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는 알브레히트 보석 박물관이 있습니다. 18세기부터 현대까지 브랜드의 변천사를 당대의 대표 컬렉션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곳으로, 여자분들은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자 가이드는 이틀 후 오후 2시로 일정을 잡았다.

“오후 2시예요.”

수아에게는 약속 시각을 두 번이나 강조했다. 알아들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수아의 뺨이 빨갛게 익었다.

날이 점점 무더워진 탓에 사람들은 점심 식사 후 약속이라도 한 듯이 수영장으로 향했다. 시원한 파라솔 그늘 속에 앉은 수아는 진땀을 흘렸다. 방으로 가면 몰래 짐을 뒤져 훔친 찻잔을 찾으려던 계획이 엄마에게 끌려 나오느라 무산된 탓은 아니었다.

“헤이, 수아. 왜 그러고 있어?”

이 더운 날, 수건을 담요처럼 덮고 있기 때문이지.

“추워?”

올리버가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수영장 턱에 몸을 기댄 채로 물었다.

“아니.”

“그럼 너도 들어오는 게 어때?”

수아의 옆에서 흠,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매서웠다. 올리버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지 수아에게 계속 말을 붙였다.

“수영할 줄 몰라?”

“어…… 모르긴 하는데…….”

“내가 가르쳐줄까?”

옆 선베드에 기대어 누워 핸드폰을 보던 엄마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아니, 괜찮아. 난 음악이나 들을래.”

수아가 이어버드를 끼자 올리버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반대편에서 노는 여자애들에게로 가버렸다. 그제야 엄마의 표정이 느슨해졌다.

엄마는 수영할 생각이 없다는 수아에게 비키니를 억지로 입히더니 막상 수영장에 오자 수건으로 몸을 가리게 했다.

“이 집 아들 오면 벗어. 응? 괜히 엉뚱한 놈 눈요기 시켜주지 말고.”

눈요기라고 말하니 벗기 더더욱 싫어진다. 그 남자가 나타나더라도.

조금 전 그가 수아에게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고 가버린 게 엄마의 오기를 자극한 듯했다. 엄마가 이러는 건 처음이다. 무시당하고 오기를 부리는 건 흔한 일이지만 그 대상이 남자인 것 말이다.

사춘기가 시작되고부터 엄마는 수아가 남자를 만나지 못하게 눈을 시퍼렇게 뜨고 감시했다. 덕분에 남들은 다 하는 연애 한번 못 해봤다.

그러더니 이제 와서 갑자기 헐벗기며 남자를 유혹하란다. 마치 이날을 위해 스크래치 하나 없이 보관해온 새 물건에서 비닐을 벗기듯이 옷을 벗겼다. 도구 취급에는 이골이 났지만, 눈요깃거리 취급은 처음이었다.

싫다.

눈요깃거리에서 노리개로 진화하길 원한다면 더더욱 싫었다.

“헉!”

생각의 수면 아래에 깊이 잠겨 있던 수아는 이어버드 한쪽이 갑자기 뽑혀 나가며 현실로 순식간에 끌려 나왔다.

“정수아, 얼굴 예쁘게.”

기분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던지 엄마가 타박을 놓더니 핸드폰을 수아에게 내밀었다.

“안내서나 읽어줘봐.”

엄마의 핸드폰에는 수아의 아이디로 로그인된 이메일 앱이 열려 있었다.

“그나저나 학교에서 캐스팅 메일은 언제 오는데?”

“교수님이 바쁘신가 보죠.”

아직도 학교 정기 공연 캐스팅이 정해졌다는 건 털어놓지 못했다. 털어놓기 좋은 때란 없지만 나쁜 때는 있는 법이다. 실은 모든 때가 나쁜 때라 덜 나쁜 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수아는 제가 읽은 적 없는데도 읽은 걸로 되어 있는 메일 중에서 야나의 메일을 찾아 시설 안내서를 열어 읽기 시작했다. 잠자코 듣던 엄마가 되물었다.

“사우나?”

반색하는 목소리였다.

“여기서도 벗어야 해?”

“……그렇네요.”

사우나 이용 수칙을 확인해보고 대답하자마자 활짝 폈던 엄마의 얼굴이 뚱해졌다.

독일에서는 사우나에 나체로 들어가야 했다. 목욕탕이랑 같은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남녀 공용이란 점이었다.

옷이나 수영복을 입는 것이 안 될 뿐이지 수건을 몸에 두르고 있는 건 된다. 그러니 내 알몸을 보이진 않아도 된다만 남의 알몸은 볼 수밖에 없었다. 수아와 엄마는 지난겨울 처음으로 독일 온천에 갔다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체로 사우나 구역을 활보하는 남자들을 보고 기겁해 다시는 갈 엄두를 내지 못하던 차였다.

“아휴, 찜질방 가고 싶다.”

정해진 수순대로 엄마의 입에서 찜질방 소리가 나오자 익숙한 대화가 수아의 뇌리에서 되풀이됐다.

“우리 딸.” 

“……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독일에 집 지어서 엄마 찜질방 만들어줘. 알았지?”

엄마가 또 말도 안 되는 요구로 부담을 주기 전에 수아는 말을 돌렸다.

“이따가 밤에, 사람 없을 때 가봐요.”

필립은 책상 위의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하러 오신 건 아닌 것 같군요.”

그의 로젠탈 성 집무실로 드문 행차를 한 어머니의 손에는 대낮부터 위스키 잔이 들려 있었던 것이다.

“필립, 회장은 너란다.”

회사 일은 제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감사하기 짝이 없다.

어머니가 회사 일에 손을 대는 위인이었더라면 가족 놀이는 진작에 끝났을 테니.

“흠…….”

모친은 창가에 서서 창 밖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아래에 흥미로운 볼거리가 있다는 듯이 이따금 콧소리를 내고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려 애를 쓰는 게 거슬렸다.

필립은 모른 척으로 일관했다. 모친의 수작에 말려들어봐야 좋을 것이 없는 탓이다. 물론 홀로 있을 때 저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았던 것도 한몫했다.

결국 어머니는 좀 더 노골적인 수로 전략을 바꿨다.

“왜 슬럼프를 겪는지 알 만하더구나.”

어머니는 주어가 없는 말을 꺼내며 필립에게 시선을 흘깃 던졌다.

“발레리나답지 않은 몸매.”

자문에 친절히 자답을 이어준 덕분에 주어를 묻지 않아도 된 걸 감사히 여겨야 할까.

“너도 보았을 테니 누굴 말하는지 알겠지.”

그 말대로였으나 필립은 일에 집중하는 척 화면을 응시한 채 고개를 저으며 무지와 무관심을 고수했다. 화면 너머에서 모친의 입매가 한층 더 비틀렸다.

“넌 연기에는 재능이 없어.”

“네, 그래서 연기가 아니라 사업을 하고 있으니 이만 나가주시죠.”

“가족이라고는 모친뿐이더구나.”

형제자매는 없다. 부친은 몇 해 전 자살했다. 집착과 통제가 심한 모친 때문에 남자친구는커녕, 친한 친구조차 없다. 어머니는 나가라는 말을 무시하곤 묻지도 않은 정보를 흘렸다. 필립이 절대로 주워 갈 생각 없는 정보를.

“모친만 없다면 완벽히 혼자라는 뜻이지.”

완벽히. 혼자.

어머니는 그 두 단어에 힘을 주었다. 조금 전, 집착과 통제라는 말에 그랬듯.

그 여자는 완벽한 사냥감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암시였다.

그제야 필립은 시선을 들어 어머니와 눈을 마주했다. 눈빛에 평소의 온화함은 없었다. 상대의 목적이 뚜렷하게 드러나자 필립도 제 본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콩쿠르를 훌륭하게 망쳐준 장학생들에게 상을 내리거나 그들이 더더욱 망가져가는 모습을 로열석에서 관람하고자 그들을 초대한 줄 알았더니.

정작 모친이 관람하려던 사람은 그였다.

이젠 어머니가 연기를 해야 하는 차례였다. 그녀는 필립의 눈이 무엇을 추궁하는지 모르는 척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아들의 본성을 꺼리기는커녕 기꺼워하는 모친은 좋은 사냥감의 자질이 엿보이는 여자들을 그의 영역에 밀어 넣는 장난질을 곧잘 치곤 했다. 그런 짓은 항상 그가 모르도록 은밀히 이루어졌다. 표적의 프로필을 노골적으로 읊어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여자에게 흔들린 걸 알아챈 걸까.

예감이 좋지 않다.

잉그리드는 장성한 아들에게서 20년 전의 소년을 보고 있었다.

제멋대로이던 고양이를 끝내 개처럼 길들이고, 쟁쟁한 집안의 아이들만 다니는 사립학교에서도 친구들을 수족처럼 부리던 소년.

죽은 남편은 아들에게 지도자의 자질이 있다 했지만, 잉그리드의 눈에 그건 지도자의 자질이 아니었다. 지배자의 자질이지.

필립이 열 살이던 해에 잉그리드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필립의 피아노 선생이 저택에서 귀금속을 훔치다 들켰다. 잉그리드가 심은 것이었다. 남의 남편에게 다리를 벌리는 일이야 그 여자의 사생활이라지만 잉그리드의 자리를 넘보는 건 사생활 존중의 경계를 넘었다.

제가 한 짓이 아니라는 발악은 오래가지 못했다. 늘 고고하게 턱을 쳐들고 다니던 여자가 산발을 한 채 무릎 꿇고 잉그리드의 앞에서 자비를 빌었다. 그걸로 용서가 될 리가. 결국 여자는 잉그리드의 말 몇 마디에 멍청히 넘어가 그녀를 공격하려다 수갑이 채워진 채 경찰에게 끌려 나갔다.

그녀의 것을 노린 자에게 걸맞은 굴욕적인 퇴장이었다.

필립은 그 촌극을 말없이 지켜보았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두꺼운 옷을 입고도 두드러지는 몸의 반응이 말해주었다.

모든 게 끝나고, 눈이 마주친 찰나 필립은 나쁜 생각을 들켰다는 듯이 뛰어 도망쳤다. 그때 비로소 저도 눈을 뜬 듯했다.

아이들이란 어찌나 무모한지.

어린 필립은 나쁜 생각을 나쁜 행동으로 옮겼다.

같은 학급의 여자아이가 그 표적이었다. 필립은 저를 좋아해서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던 여자아이에게 완전한 복종을 강요했다.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고 허락받게 했다. 제 말을 어기면 벌을 주었다. 필립의 핸드폰에서는 그 여자아이가 목에 개 목줄을 걸고 네발로 기는 사진까지 나왔다.

순진한 여자애는 제가 뭘 당하는지도 모르고 당했다. 그러니 당연히 둘 사이에 합의는 없었다.

아직 거기까지 싹트지는 않았는지 성적으로는 아무 일이 없어 입막음이 수월했던 건 다행이었다. 그 아이의 부모도 도덕적으로는 몰라도 법적으로 범죄라고 하기엔 모호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이 시끄러워져 소문이 나면 딸에게 추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것도 꺼렸을 테고.

그렇게 그 일은 돈 몇 푼에 없는 일이 됐다.

발칵 뒤집힌 후로 필립은 제 지배 성향을 숨기고자 천사의 가면을 쓰게 되었다. 권력을 행사해도 정당한 관계에만 제 욕구를 감질나게 푸는 것이다.

얼마나 감질나겠어.

잉그리드의 눈에 필립은 시한폭탄이었다. 째깍째깍. 기폭점을 향해 내달리는 초침 소리가 귀에 선했다.

필립이 노려본다. 지하실에 묻은 시체를 들킨 자의 눈으로.

잉그리드는 웃었다.

이런. 왜 그토록 두려워하니, 아들아. 난 네 은밀한 취향을 약점으로 삼을 생각이 없단다. 난 소박한 사람이거든.

그녀는 그저 제 분신이 누군가를 죽여 묻는 것을 구경하게 해준다면, 그걸로 족했다.

***

독일 사람들은 시간에 있어 칼 같다.

엄마는 그 점에서 유난히 독일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오늘 투어도 약속 시각보다 15분이나 늦었었다. 가이드가 다음 투어 시간을 두 번이나 수아에게만 따로 강조한 건 그 때문이었다.

“엄마, 늦었어요.”

그래서 엄마에게 미리 당부했건만 3시에 있는 커피 타임에도 벌써 늦었다. 시곗바늘은 3시 5분을 지나고 있었다.

“아, 왜 이렇게 안 먹어, 오늘따라.”

엄마는 화장이 마음에 안 든다며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느릿한 손을 지켜보고 있는 수아만 속이 타들어갔다.

이번에 또 늦으면 면목 없다. 게다가 이번엔 폰 알브레히트가도 참석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재촉했던 게 엄마의 심기를 거슬렀던 걸까.

“조금만 더 빨리 가요.”

겨우 방에서 나와 복도를 걷는데, 채근하자마자 엄마는 보란 듯이 더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복도에 걸린 거울 앞에 멈춰 서서 멀쩡한 머리를 다듬기까지 했다. 엄마는 눈 한 번 안 마주치더니 거울에 비친 딸의 얼굴이 울상이 되고서야 수아를 표독스럽게 노려보며 물었다.

“그냥 노는 자린데 그거 좀 늦는다고 큰일 나? 정수아, 넌 엄마가 중요해, 생판 남한테 잘 보이는 게 중요해?”

오늘 아침, 그 생판 남한테 잘 보이라는 말을 한 사람은 엄마였다. 게다가 독일이건 한국이건 약속 시간을 지키는 건 기본적인 예의이다. 그러나 그런 말을 했다간 엄마를 기본 예의도 모르는 무식한 여자로 몬 싸가지 없는 년이 된다.

“배고프단 말이에요.”

“젖소같이 뒤룩뒤룩 가슴이나 찐 게. 살찌는 건 먹지 마.”

차라리 철없는 년을 택하고서야 엄마가 비싼 걸음을 뗐다.

자식이 받는 후원금에 빌붙어 사는 기생충 주제에.

수아는 몰래 이를 갈다 또 엄마는 불쌍한 사람이라는 주문을 외웠다. 그러지 않으면 뭐라도 저지를 것만 같았으니.

역시나 수아는 아침과 똑같은 상황을 마주했다. 본관 2층 테라스로 들어서자 테라스 가운데의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커다란 테이블에서 빈자리는 둘뿐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수아는 자리에 앉으며 모두에게 사과했다.

“찾기 어려웠니? 야나를 보낼 걸 그랬나 보구나.”

다행히 폰 알브레히트 여사는 언짢은 기색 하나 없이 인자하게 웃었다. 수아는 그제야 제 자리가 그녀와 테이블 모서리 하나만 사이에 두었을 정도로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그럼 설마…….

후원자의 주변을 슬쩍 둘러보다 결국 테이블을 끝까지 훑어보고서야 박동이 느려졌다. 또 다른 후원자는 여기 없었다.

호스트가 눈짓하자 테라스 구석에서 대기하던 웨이터들이 다가와 잔을 채웠다. 가장 먼저 서빙된 건 뜻밖에도 독일식 스파클링 와인인 젝트였다. 기다란 샴페인 플루트에 담긴 금빛 액체에서 진주 같은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수아는 화들짝 놀랐다.

“아, 죄송합니다.”

엄마의 잔에 젝트를 따르려다 수아의 머리를 팔꿈치로 스칠 뻔한 웨이터가 정중히 사과했다.

“아니에요.”

친 것도, 심지어 스친 것도 아니었다. 머리 옆을 지나갔을 뿐인데 수아가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엄마가 머리를 때리기 시작한 후로 수아는 머리에 손이 다가오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겸연쩍게 웃고 시선을 돌리다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폰 알브레히트 여사와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저를 조각조각 해부하는 듯한 눈이라 또 괜스레 움츠러들던 찰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수아.”

수아는 또 한 번 놀랐다. 10년 가까이 후원을 받아오며 만날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폰 알브레히트 여사가 수아에게 먼저 말을 건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실 이름을 기억하는 줄도 몰랐다.

“네, 폰 알브레히트 여사님.”

“이런, 그 호칭은 지나치게 딱딱하고 길구나. 그냥 잉그리드라고 부르렴.”

독일은 나이와 상관없이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잉그리드가 장학생에게 수작을 부릴 때 밟는 첫 단계라는 걸 수아는 알 턱이 없었으니까. 그걸 아는 야나만이 마녀의 뒤에서 몰래 눈살을 찌푸렸다.

“한국에서는 잔을 부딪칠 때 어떤 말을 쓰지?”

“건배.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잉그리드는 두어 번 되물어가며 연습해보더니 꽤 자연스러운 발음으로 외치며 잔을 높이 들었다.

“건배.”

“건배.”

두 사람의 잔이 부딪치는 동시에 시선이 부딪쳤다. 잉그리드의 눈매는 너무나 부드러웠으나 눈빛은 여전히 해부용 메스처럼 날카롭게 보였다. 이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진다.

„Prost.“

“Cheers.”

다른 사람들도 옆자리의 사람들과 각자의 언어로 건배를 나누고 잔을 기울였다. 좋은 와인인지 몇몇이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술맛을 잘 모르는 수아의 마음에도 들었다. 술기운이 괜스레 예민해져 있던 신경을 누그러트려주어서.

한두 모금을 더 마시는 사이, 따뜻한 커피와 차가 서빙되고 테이블에 이미 올라와 있던 디저트 접시의 덮개가 열렸다. 차려진 것을 본 수아는 실망한 한편, 잉그리드는 기대에 찬 미소를 지었다.

“모두 부디 어제의 일은 훌훌 털어버리길. 스트레스 해소에는 잘 자고 잘 노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먹는 것도 빼놓을 수 없지.”

윤기가 반드르르한 초콜릿을 입은 자허토르테, 생크림이 두껍게 발린 체리 케이크 따위의 독일식 디저트부터 에클레어와 밀푀유 같은 프랑스식 디저트까지. 부호의 티테이블답게 화려하고 고급스러웠지만, 몸매 관리를 숨 쉬듯이 해야 하는 발레리나에겐 최악의 식단이었다.

수아만이 아니라 다른 무용수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은 자리를 생각해 디저트를 조금씩 접시에 덜었지만 먹는 시늉만 내고 거의 손대지 않았다. 실력 부족으로 중요한 콩쿠르에서 떨어진 직후이니만큼 고삐를 느슨히 풀긴커녕 채찍질을 해야 할 때였다.

혹은 우울의 늪에 빠져 자포자기하거나. 마리나 카민스카처럼.

어제오늘 내내 유난히 말이 없고 표정이 어둡던 마리나 홀로 디저트를 입에 욱여넣고 또 넣었다. 스트레스성 폭식이라는 걸 눈치챈 사람들이 멋쩍은 눈빛을 교환했다.

“마리나, 입에 맞니? 잘 먹어주니 기쁘구나.”

잉그리드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마리나를 예뻐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손주를 편애하는 할머니처럼.

그때부터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두 가지 욕망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몸을 관리하는 것과 발레계의 큰손에게서 호감을 사는 것. 어느 것이 먼저일까. 답은 쉬웠다.

살은 빼면 되지만 한번 잃은 호감은? 되찾기 수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세 가지가 충돌하는 수아에겐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접시와 식기를 뒤집어 보는 데 정신이 팔린 엄마는 지금의 분위기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수아가 머뭇거리는 사이 마음을 재빠르게 정한 몇몇이 포크를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뭇한 눈으로 그들을 돌아보던 잉그리드의 시선이 수아에게서 멈췄다.

“맛이 없니? 입에 맞지 않으면 먹지 않아도 괜찮아.”

“아, 아뇨, 정말 맛있습니다.”

진심이었다. 그러나 보란 듯이 잉그리드의 눈앞에서 생크림 케이크 위에 장식된 체리를 입에 넣은 건 제 말보다는 잉그리드의 오해에만 힘을 실어주었을 것이다.

“억지로 먹지는 말렴. 부담 주고 싶지는 않구나. 대신 좋아하는 걸 말해보려무나. 내일은 그걸로 준비할 테니.”

잉그리드의 너그러운 미소에 쓸쓸한 기색이 번지는 순간 심장이 덜컥하며 수아는 저도 모르게 아이처럼 하소연을 시작해버렸다.

“실은, 이것도 저것도 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건데요…….”

먹었다간 엄마한테 혼날 거예요.

그 말을 할 차례가 오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난 아이가 아니야. 스무 살 성인이 남 앞에서 하기 남사스러운 말이다.

그럼 요즘 살이 쪄서?

그렇게 말하면 지금 디저트를 입에 넣고 있는 다른 무용수들에게서 눈총을 사기 좋다.

“제가 사실…….”

위염을 앓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려는 찰나였다.

“왜? 뭐래?”

엄마가 수아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치며 물었다.

“아, 그래서 그랬군.”

그 때문에 사정을 들켰다. 잉그리드는 가련하다는 눈으로 수아를 보더니 엄마에게 여기 머무는 동안에는 딸을 잠시 풀어주는 게 어떠냐는 말을 했다.

풀어준다.

제가 엄마에게 귀속된 존재임을 뜻하는 그 표현에 수아의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지금껏 있었던 대화를 모두 통역해주자 엄마의 얼굴도 벌게졌다.

“먹어.”

허락이 아닌 명령이 떨어졌다. 듣지만 이해하지는 못하는 귀를 의식해 엄마는 상냥한 말투로 험악한 말을 퍼부었다.

“눈치껏 먹지 왜 엄마 나쁜 사람 만들어? 센스 없기는.”

그랬다가는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엄마에게서 돼지 같은 년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수아가 무얼 하든 욕을 듣는 건 똑같았다.

조금 전에 감질나게 먹을 땐 맛있었던 케이크가 역하다. 시한폭탄을 삼키는 기분으로 케이크를 목구멍 속에 밀어 넣었다. 그러곤 도로 올라오려는 것을 술로 가라앉혔다.

성 주변의 포도밭은 그저 장식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성에 딸린 와이너리에서 직접 생산한 와인을 차례차례 시음하는 호사를 누렸다.

“리슬링인가요?”

“적당히 쌉싸름한 끝 맛이 좋네요.”

와인을 잘 아는 듯한 어른들이 수아는 잘 모르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는 이야기였더라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술기운이 머리끝까지 올라 집중력이 뚝뚝 끊어졌다.

“복숭아에 재스민…… 느껴지는 것 같고…….”

“그 가수가 인터넷에 올린 걸…… 이게 한 병에…….”

멍하니 있던 수아는 이름 하나만이 유독 선명하게 들리는 순간 술이 깨어버렸다.

“와인은 필립이 사랑하는 화제인데 아쉽군. 초대했는데 왜 오지 않았을까.”

잉그리드는 분명 혼잣말을 하고 있었으나 시선은 수아에게 향해 있었다. 가슴이 조마조마해진다. 나쁜 생각을 들킨 사람처럼.

“수아.”

이번은 혼잣말이 절대 아니었다.

“넌 그를 사랑하게 될 거야.”

“……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 아뇨……. 그런 생각은 절대로…….”

당황한 나머지 입에서 한국어가 튀어나오는 찰나 잉그리드의 짙푸른 눈동자가 와인이 든 잔을 가리켰다.

“아.”

그제야 수아는 제 바보짓을 깨달았다. 와인도, 남자도 독어로는 남성형이다. 남성을 지칭하는 대명사, ‘그’에 의심 한번 없이 그 남자를 떠올렸다는 것이 또 다른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려앉았던 심장이 미처 올라붙기도 전에 덜컥, 흔들린다. 이번의 충격은 그 여파가 유난히 길었으나 수아는 들킬세라 다급히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대답했다.

“이미 마, 마음에 듭니다.”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걸까. 잉그리드의 미소가 다소 얄궂어 보였으나 이어지는 말이 딴소리인 걸 보니 착각인 게 분명했다.

“난 너만 할 때 하루 세끼를 다 먹고 케이크까지 두 조각씩 먹었단다.”

“네?”

수아만 할 때 신이 내린 몸을 가진 발레리나로 이름을 떨쳤던 이의 입에서 나오리라 생각 못 한 말이었다.

“비결이 궁금하니?”

“네.”

“먹자마자 움직여주는 것.”

너무나 당연한 소리에 허탈해졌지만 수아는 별것 아니지 않냐고 먼저 선수를 치며 웃는 잉그리드를 따라 그저 웃었다.

“지금도 충분히 몸 관리를 잘하고 있는 듯하다만 그래도 걱정이라면 잠시 산책을 다녀오는 건 어떠니?”

“아, 네. 그럼…….”

화제가 뜬금없는 방향으로 흘러갔으나 조금 전의 그 이름만 다시 나오지 않는다면 어떤 이야기이든 반가운 수아는 수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 자리에서 도망칠 기회가 왔다는 데 정신이 팔려 있는 것도 한몫했다.

어째서일까. 도망치고 싶었다.

눈치채지 못한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손님들에게는 영어만 고집하던 잉그리드가 수아에게 독어를 쓰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앉은 이 대부분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저쪽의 오솔길을 따라가면 포도밭을 한 시간 동안 빙 둘러 성으로 돌아올 수 있단다.”

그런 탓에 수아를 그 길로 보낸 이가 잉그리드라는 사실을 다른 이들은 알지 못했다.

결국 조금 전 삼킨 건 시한폭탄이 맞았다.

“우욱-.”

“다 나왔어?”

엄마는 산책 정도로 안심할 성격이 아니었다. 나가서 걷겠다는 수아를 붙잡아 방으로 끌고 오더니 변기 앞에 무릎 꿇고 목구멍 깊숙이 손가락을 밀어 넣게 했다.

수아가 몰래 케밥을 먹고 걸렸던 날처럼. 그날, 이미 소화가 다 되어 나올 것도 없는 속을 게워내고 얻어맞았다. 적어도 오늘은 엄마의 허락을 받고 먹었으니 맞는 일은 없을 것이다. 수아는 변기에 얼굴을 처박으며 안도했다.

“한 번 더 해.”

“흡, 우욱-. 하아.”

“흠, 됐어.”

신물조차 나오지 않게 되어서야 그만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기회다 싶어서 아주 신나게 처먹고 마시더라? 돼지 같은 년.”

세면대에서 이를 닦는데 뒤통수로 험악한 말이 쏟아졌다. 수아는 고개를 푹 숙여 이르게 거품을 뱉어냈다. 얼굴에 찬물까지 끼얹었다. 이 순간의 제 표정을 엄마가 볼 수 없도록.

수아는 엄마가 불쌍했다. 불쌍하기만 했다. 사랑하지는 않는다. 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지만 증오하는 감정을 애증이라 한다. 그렇다면 애정의 자리에 편리한 동정만이 있으나 증오하는 감정은 무엇이라고 부르는 걸까.

생각만큼이나 발길도 두서없었다. 속이 비어버리니 술기운이 더더욱 오른 탓이다.

“넌 그를 사랑하게 될 거야.” 

네, 그렇네요.

이제부턴 와인을 사랑하게 될 것 같다. 한 잔은 엄마를 날뛰게 하지만 다섯 잔은 엄마를 잠재운다는 것을 배웠으니.

순식간에 곯아떨어져버린 엄마를 두고 수아는 홀로 빠져나왔다. 몽롱한 취기로 흠뻑 젖은 눈망울이 흐렸다.

“넌 그를 사랑하게 될 거야.” 

그리고 그 사랑이 독이 되어 너를 죽이겠지.

오솔길을 따라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던 잉그리드가 입매를 비틀었다. 계획이 반만 성공한 까닭에 미소는 고작 반쪽짜리였다.

혼자군.

모친과 함께 가길 기대했는데 말이다.

어쩔 수 없지.

덫을 완성해줄 도구가 제 구실을 못 할 때를 대비해 마련해둔 스페어를 쓸 때였다.

“올리버라고 했나?”

잉그리드는 여자애 무리에게 추근대는 발레리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아, 알브레히트 여사님.”

“잉그리드라고 부르렴.”

녀석은 수영장에서 그 여자에게 수작을 걸던 순간 남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건 꿈에도 모르는 얼굴로 후원자에게 아부를 쏟아냈다. 의심 없이 테라스 난간까지 잉그리드를 따라온 것을 보면 부른 의도도 모를 것이다.

“……덕분에 벌써 힘이 납니다. 저를 후원해주신 일이 헛되지 않도록 더 좋은 기량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더 좋은 기량으로 보답할 필요는 없단다. 내 어깨까지도 오지 않던 게 고작 몇 년 전 같은데 훌쩍 컸어. 요즘 남자아이들 같지 않게 매너 있고 착하게 말이지.”

“감사합니다.”

자격 없는 칭찬을 뻔뻔스레 받아먹는다.

양심 없는 것. 아주 잘 골랐어.

잉그리드는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나저나 영국 어디 출신이라고…… 아, 저 아이는…….”

“어?”

녀석의 시선을 끄는 데 성공했다.

“수아 아닌가?”

녀석의 입에서 이름까지 정확히 나오자 잉그리드는 생각해둔 대로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이런, 여자 혼자 걷기엔 위험한 길인데. 술에 취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면 더더군다나.”

포도밭과 숲 사이의 오솔길을 따라 걷는 여자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새끼 사슴처럼 비틀거렸다.

포식자들이 가장 군침을 삼키는 손쉬운 사냥감 아닌가.

잉그리드는 이미 저 짐승의 속에서 들끓는 식욕을 조금, 아주 조금 북돋워주는 것뿐이었다.

“이 성이 안전해 보이지만 그렇진 않아. 10년 전이었나, 저 길에 버려진 예배당에서 끔찍한 일이 있었거든.”

“끔찍한 일이라면 어떤…….”

관능적인 빛깔의 입술과 혀가 ‘강간’이란 단어를 소리 없이, 그러나 노골적으로 그렸다.

“아침에 조깅을 하다 끌려들어 간 거야. 그 여자애, 무슬림이었던가. 부모님이 엄해서…….”

저 여자처럼.

“당한 사실도, 범인에 대한 이야기도 끝내 입을 다물었어.”

그러니 저 여자도 입을 다물 거야.

넌 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저 길은 더더군다나 사람이 다니지 않아서 목격자도 없는 바람에…….”

이번에도 없지 않겠니? 신이 네 편이라면. 그런데 아마 내 편일 거란다.

“결국 범인은 잡히지 않았지.”

애초에 있지도 않은 사건이니까.

잉그리드의 거짓말은 벌써 눈에 띄는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길이 꺾이며 우거진 수풀 뒤로 사라져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녀석의 목울대가 적나라하게 들썩였다.

놈이 갈등하느라 눈을 떼지 못하는 사이 잉그리드는 그의 다리 사이를 흘끔 내려다보았다. 목울대가 저리로 떨어져 박히기라도 한 듯한 꼴이었다.

“돌아오면 혼자 가는 건 삼가라고 일러줘야겠어.”

여자를 따라가보라는 말 한마디 누구에게도 하지 않고 잉그리드는 제자리로 가버렸다. 잠시 후 도둑처럼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는 짐승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탄식했다.

“안타까운 일이야.”

이제 일어날 일을 내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는 게.

소심할지언정 탈출은 탈출이다. 그러고도 해방감이 느껴지지 않는 건 주어진 길을 힘없이 터덜터덜 걷는 게 내 삶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표류하자 수아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화가 나는 줄 알았더니 이젠 울고 싶다. 감정도 멋대로 표류했다. 이래서 술이 싫다. 발레도 싫고 엄마도 싫고 나도 싫고…….

“다 싫어!”

목이 쓰라리도록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속은 여전히 답답했다. 속이 울렁거린다. 토하고 싶다. 그러나 수아가 정작 토하고 싶은 건 속에서 오랜 세월 딱딱하게 응어리진 터라 아무리 게우고 또 게워도 목구멍에 걸려 숨통만 틀어막을 뿐이었다.

지긋지긋해. 그런데 왜 남이 시키는 대로 걷고 있지?

의문이 드는 찰나 힘없이 질질 끌던 다리를 멈췄다. 몽롱한 눈을 왼쪽으로 돌렸다. 길옆은 포도나무가 줄지어 선 푸른 비탈로, 비탈은 회색빛 강으로 이어졌다.

길에서 벗어나보자.

충동에 취해 길옆에 무릎 높이까지 우거진 잡초 속으로 무턱대고 발을 들이던 때였다.

“수아.”

불청객이 나타났다.

“……올리버?”

올리버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더니 수아의 앞에 섰다.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날숨에 실린 와인 냄새가 똑똑히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른 걸 올리버가 듣진 않았을까 부끄러웠던 건 얼마 가지 않았다.

“너 취했잖아.”

무서워졌다.

취기 때문에 헛것을 보는 걸까.

그 말을 하는 올리버의 표정은 걱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꾸만 흐트러지는 초점을 애써 모아 다시 보아도 올리버의 얼굴에 번진 건 다름 아닌 희열이었다.

“혼자서 뭐 해? 위험하게.”

너야말로 왜 혼자서 따라왔어? 위험해. 내가 위험해.

“나, 나 혼자 있고 싶어. 그렇게 해줄래?”

“혀가 다 꼬여서 뭐라는지 안 들려.”

그 정도일 리가 없는데.

안 들린다니 손짓으로 가라고 했지만 그래도 가지 않고 버티는 걸 보면 거짓말 같았다.

“얼마나 마신 거야? 걸을 순 있겠어?”

허리를 남자의 손이 움켜쥐는 순간 술이 깼다. 그러나 깬 건 정신뿐, 몸은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허리를 우악스럽게 당기는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수아의 손은 힘없이 미끄러지기만 했다. 올리버가 이끄는 방향으로 휘청이며 제 의지와 다르게 한 걸음씩 발을 내디딜 때마다 수아는 수렁에 한 발씩 빠져드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갔다.

“내가 데려다줄게.”

데려다주는 게 아니다. 성과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다. 끌고 가서 나쁜 짓을 하려는 거다.

맑은 정신으로 똑똑히 알아채고도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고 있자니 막막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제발! 이거 놔!”

“왜 그래? 힘들어? 그럼 저기 잠깐 앉았다 갈까?”

올리버가 손으로 가리키는 길가에는 입구의 부서진 성모상만이 예배당이었다는 걸 알려주는 작은 건물이 곧 쓰러질 것 같은 꼴로 서 있었다. 온 벽과 지붕이 담쟁이덩굴과 이끼로 뒤덮여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저곳은 완벽한 밀실이었다.

그녀를 질질 끌고 간 올리버가 다 삭아 빠지고도 두껍기 짝이 없는 나무문을 밀쳤다. 어두컴컴한 내부가 눈에 보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놓아줘!”

뿌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도망치는 덴 실패했다. 곧바로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져버렸다가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엉덩이 걸음으로 도망치는 수아에게 놈은 여유롭게 다가오더니 더러운 손을 뻗었다.

“왜 이래? 너도 나한테 관심 있었던 거 아냐? 너희 엄마가 없는 지금이 기회일 텐데.”

“과, 관심이…….”

있었던 건 맞지만 그게 자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겁에 질려 자꾸만 끊기는 목소리를 쥐어짜는데 말을 가로채였다.

“그래, 관심 있잖아. 너도 하고 싶잖아. 처음이라 그래? 막상 해보면 너도 좋을걸?”

올리버는 그와 자고 싶지만 망설이는 여자의 등을 가볍게 떠미는 듯이 가증스럽게 굴며 수아의 팔뚝을 억세게 쥐었다.

“놔!”

단숨에 일으켜 세워졌다. 발이 땅에 제대로 닿기도 전에 몸이 휙 딸려갔다.

“하, 하지 마, 제발.”

이대로 끌려가면 꼼짝없이 당할 것이다. 온갖 끔찍한 상상이 이어졌지만 그 무엇보다도 무서운 건 엄마에게 이 일을 들켜 멍청한 년, 발랑 까진 년, 더러운 년, 온갖 년 소리를 들으며 평생 얻어맞을 빌미를 주는 것이었다.

“싫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 찰나였다.

눈이 마주쳤다.

굽이진 오솔길 끝에서 검은 말을 몰고 나타난 남자와.

길바닥에 주저앉아 파들파들 떠는 여자. 그리고 여자의 가느다란 팔뚝을 우악스럽게 움켜쥐는 남자.

필립은 남녀를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보다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누가 보아도 범죄가 일어나기 직전에 들이닥쳤다. 머릿속에선 어머니가 점심 즈음 집무실에서 저 발레리노를 가리키며 흘린 가십이 되풀이되었다.

“그거 아니. 올리버 터너, 성범죄 전과가 있어.” 

아무 목적 없이 흘렸을 리가.

알아챘군.

저 여자에게 흔들린 걸 어머니가 알아챈 것이 맞았다.

어머니는 무대에서 직접 뛰는 연기자보다는 각본가와 연출가가 적성에 맞는 사람이었다. 이 범죄 현장도 어머니가 꾸민 무대이다. 그가 승마를 하는 시간에 그가 늘 찾는 길에서 열리는 무대.

저 녀석은 소품일 뿐이었다. 여자가 굴복당하는 모습을 필립의 눈앞에서 연출해줄 소품. 필립이 반응할 트리거를 당겨주는 장치 말이다.

이런, 어쩌나. 타이밍이 안 맞았는데.

여자는 겁에 질려 제대로 반항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항부터 굴복, 그러다 반격, 그리고 끝내는 복종으로 이어지는 시나리오를 그는 사랑하지만, 지금 저 여자는 그 극의 도입부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저 여자가 당하며 자비를 비는 순간이었더라면 그는 완전히 휘말려 어머니의 구경거리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그전에 나타났으니 신이란 것이 있다면 그의 편인 게 분명했다.

“놔!”

굳게 다문 필립의 입매 사이로 나직한 신음이 새어 나갔다. 가벼운 반항도 충분히 자극적인 건 사실이다.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그의 욕망이 잠에서 깨어 꿈틀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 탓에 그는 울부짖으면서 끌려가는 여자를 지켜보기만 하며 고민했다.

“하, 하지 마, 제발.”

그러나 그는 모친처럼 타인의 악몽을 즐기는 악마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싫어!”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 건 처음부터 선택지에 없었던 필립은 말의 옆구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말이 한 걸음 전진하는 순간 여자와 먼저 눈이 마주쳤다. 구세주를 만난 사람 같지 않게 여자의 눈은 도망치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저를 강간하려는 악마가 아닌, 그에게서.

수치스러운 거겠지.

필립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가갔다. 말이 투레질 소리를 내고서야 남자는 그를 돌아보았다. 낭패라는 기색이 놈의 낯에 적나라하게 떠올랐다.

“아, 안녕하세요.”

올리버는 여자에게 뻗던 손을 황급히 거두며 때에 맞지 않게 경쾌한 투로 인사를 건넸다. 윤기 나는 흑마의 등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빛은 범죄를 목격한 사람답지 않게 무심했다.

가진 게 많아 잃을 것도 많은 자들이란 그렇지.

자신의 별장도, 장학 사업도 불미스러운 일로 시끄러워지는 건 질색일 테니 조용히 묻고 넘어가려 할지도 모른다. 조용히 묻고 넘어가고 싶은 건 올리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잽싸게 머리를 굴려 판을 깔았다.

“승마하시던 중에 죄송한데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뭘 도와달라는 겁니까?”

귀찮다는 목소리에 올리버는 좋은 예감을 느꼈다. 필립이 단숨에 말에서 내려 다가오자 올리버는 사람 좋게 웃으며 아직도 땅바닥에 볼품없이 주저앉아 훌쩍이는 여자를 가리켰다.

“저 애를…….”

“강간하는 걸?”

심드렁하던 목소리가 돌변했다. 싸늘하게.

그 순간, 모든 것이 얼어붙은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아, 억울하네…….”

멍청하게 서 있던 올리버는 훌쩍이던 여자가 크게 흐느끼는 찰나에야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냥 적당히 넘어갈 것이지.

올리버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헝클어뜨리며 되레 화를 냈다.

“취해서 데려다주려고 한 것뿐인데, 이 여자도 그러더니 알브레히트 씨도 오해를 하시는군요.”

“오해?”

까드득.

검은 승마 부츠가 모난 자갈을 밟아 부수는 소리가 위협적이었다. 다가오는 필립을 피해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더니 그는 올리버를 그대로 지나쳤다.

멱살이라도 잡으려는 줄 알았네.

안도하는 찰나…….

휙.

공기를 날카롭게 찢는 소리가 들리더니 승마용 채찍이 터질 듯 발기해 있던 올리버의 사타구니를 후려쳤다.

“억!”

“난 제대로 이해한 것 같은데.”

필립은 사타구니를 감싸며 주저앉는 놈을 내버려두고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습니까?”

“네, 네. 감사, 합니다.”

수아는 부축을 받아 일어서자마자 아래로 흘러내린 원피스와 브라 끈을 급히 끌어 올렸다. 옷매무새는 흐트러지고 치마와 다리에는 흙먼지가 묻은 제 꼴이 너무나 초라해 차마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흙을 털어내는데 남자가 셔츠의 단추를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왜?’

벌어지는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티셔츠가 얇디얇아 가슴팍과 복근의 윤곽이 다 드러난다. 놀란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는 수아에게 그는 셔츠를 벗어 내밀었다.

“받아요.”

“가,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노출이 심한 제 원피스가 부끄러웠던 수아는 거절하지 않고 셔츠를 받아 걸쳤다. 그랬더니 남자가 이번에는 눈물을 닦으라며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수아는 네모반듯하게 각이 잡힌 천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나를 일으켜 세우자마자 손을 놓아버리더니.

말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볼 땐 올리버 대신 그가 이 자리에 서서 그녀를 외딴곳으로 끌고 가고 싶다는 듯이 열 오른 눈을 하기도 했다.

매몰차게까지 느껴지던 그 차가운 남자와 난폭한 욕망을 조용히 억누르던 남자, 그리고 지금의 한없이 다정한 남자는 모두 다른 사람 같았다. 위화감이 들었다.

“받아도 괜찮아요.”

셔츠 단추를 초조히 매만지고 있던 손을 남자가 붙잡더니 제 쪽으로 끌어당겨 빈손에 손수건을 쥐여주었다. 그의 잔상이 아직도 뜨거운 곳에 손이 또다시 닿았다. 애써 잊으려 했더니 이렇게 닿아버리자 조금 전처럼 심장이 철렁했다.

수아가 무슨 일을 당할 뻔하던 상황인지도 잊고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올리버의 변명이 계속됐다. 술에 취해서 부축해주려던 것뿐이라며 억울한 투로 항변하는 올리버에게 필립은 독어로 물었다.

„Kannst du Deutsch?“

독어를 할 줄 아느냐고.

올리버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걸 확인한 그는 수아에게 독어로 말을 걸기 시작했다.

“경찰을 불러드리겠습니다. 제가 증언도 해드릴 겁니다.”

“네? 경찰이요?”

손수건을 쥐고 멍하니 있던 여자가 경찰이라는 말에 몸을 흠칫 떨었다. 경찰을 부르는 건 당연한 절차인데도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아, 아뇨. 됐어요. 괜찮아요.”

고개를 가로젓는 여자의 낯빛이 두려움으로 새파랗게 질려갔다.

경찰을 두려워해야 하는 사람은 따로 있지 않나.

필립은 절뚝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강간 미수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쉽진 않겠지.

강간 미수도 명백한 범죄이나 범죄를 당했다는 물적 증거가 부족하고 그가 목격한 것만으로 범죄 사실이 성립할지는 미지수였다. 지금처럼 저자가 도와주려 했던 것뿐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여자가 고소 절차에 소극적이라면 더더욱. 게다가 두 사람 다 외국인이었다.

쉽지 않은 걸 여자도 알아서 거절하는 건지.

“경찰이요?” 

아니면 경찰이 무서운 건지.

쓸데없이 과하게 겁에 질린 얼굴을 보고 있자니 지난한 법적 분쟁이 아니라 경찰 그 자체가 두려운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됐어. 거기까지.

필립은 돌연 고개를 드는 사적인 호기심을 억누르며 핸드폰을 꺼내어 들었다. 경찰에 신고하는 줄 알았는지 두 사람 다 놀란 눈을 했으나 필립이 전화를 건 사람은 로젠탈 성의 집사였다.

“올리버 터너 씨는 예정보다 일찍 떠나겠다고 하시는군요. 당장 그자의 짐을 싸서 서관 문 앞에 내어놓도록 하세요.”

놈이 알아듣게 영어를 썼다. 처음엔 경찰을 부르지 않는다는 걸로 안도하나 싶더니 전화를 끊을 즈음엔 사색이 되어 다가왔다.

단지 여기서만 쫓겨나는 게 아니라 장학생 명단에서도 제명될 운명인 걸 예감했을 테니. 발레계의 큰손인 알브레히트의 눈 밖에 나면 제 커리어에 가시밭길이 펼쳐진다는 착각 또한 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 실력으론 유명 발레단의 솔리스트가 되는 건 이미 그른 주제에.

“알브레히트 씨…… 제가 취해서 실수를…….”

“할 말이 많아 보이는데 그건 재단 담당자와 하도록 하고 내 사유지에서 당장 떠나세요, 터너 씨.”

필립은 놈의 말을 끊고 성으로 가는 길을 채찍 끝으로 가리켰다. 우물쭈물하다 추하게 매달리기까지 하던 녀석은 그가 경비를 부르기 위해 다시 핸드폰을 꺼내고서야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여자와 단둘이 남기 무섭게 필립은 말의 고삐를 당겼다. 놈이 허튼짓하지 않고 성으로 향하는지 감시라도 하듯이 일정 거리를 두고 따라 걸었다. 하지만 그의 신경은 딴 데 가 있었다.

말발굽이 땅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음에 그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불규칙적으로 섞여든다. 거슬린다. 무게감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온 신경을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그 소음은 느려진다 싶더니 느닷없이 빨라졌다. 발소리가 등 뒤로 바짝 다가오자 필립은 강도에게 급습이라도 당하는 사람처럼 옆으로 몸을 틀며 돌아보았다.

“아, 저…….”

여자는 당황하더니 아시아식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필립은 미소를 지었으나 실은 조소였다. 저에게 보내는.

저 여자는 그저 인사를 하려 한 것뿐인데 뭘 두려워하거나 기대한 건지 긴장한 자신이 우스웠다. 저 보잘것없는 여자가 뭐라고.

술에 취해 어설프게, 헤프게, 그러다 예쁘게 웃어버리는 여자가 대체 뭐라고.

여자는 여전히 미인이었지만 화려한 무대용 화장을 지운 얼굴은 수수하기 짝이 없어 인상이 흐릿했다. 그것이 그의 구미를 더욱 자극할 줄이야.

누구의 손때도 타지 않은 하얀 도화지 같은 얼굴에서 도톰한 입술만 유난히 붉었다.

마치…… 마치 이건…….

필립은 고개를 단호히 돌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일정 거리를 두고 이어지는 발소리에 온 신경을 쏟은 채 그는 후회했다.

말을 타고 갔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왜 걸었을까. 그것도 저 여자와 보조를 맞춰가며 걸었다.

이건 도덕적인 인간이라면 응당 해야 하는 일이기에 한 것뿐이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이 여자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 일이 평소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워진다.

“젠장할.”

남자가 갑자기 욕설을 뱉으며 몸을 돌렸다. 그의 발끝만 보고 걷던 수아가 화들짝 고개를 드는 순간 채찍을 쥔 손이 불시에 다가와 턱 끝을 붙들었다.

느닷없는 난폭한 행동에 놀라 눈을 크게 뜨자마자 찡그렸다. 엄지 끝이 아랫입술 한가운데를 꾹 짓누르며 아릿한 통증이 파문처럼 번진 탓이었다.

“저 녀석이 널 아프게 했나?”

지금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은 당신인데.

위압적으로 돌변한 태도에 기가 눌린 수아는 숨만 할딱일 뿐, 대꾸하지 못했다.

단단하지만 거칠지는 않은 손끝이 입술 끝에서 끝으로 말캉한 살을 스치고 지나간다. 한바탕 불이라도 지르고 간 것처럼 입술에 뜨거운 잔열이 남았다.

수아는 뒤늦게야 올리버가 제게 키스했냐는 물음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런데 왜 화가 났을까.

그럴 이유가 없는데 아무리 보아도 화가 난 눈이었다.

시야 한가운데에 박힌 청회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이글거린다. 목구멍까지 그 열기로 말라버리기라도 한 듯 갈증이 났다.

마른침을 삼키다 실수로 입을 벌리자마자 남자는 수아의 아랫입술을 젖혀 내려 젖은 살을 손끝으로 문대었다. 헉, 짧은 숨이 터져 나왔다. 남자의 입술이 제 것만큼 벌어지더니 붉은 혀끝이 그의 아랫입술을 훑었다. 입맛을 다시는 뱀처럼.

무릎 뒤가 파들파들 떨려왔다.

흠칫 몸을 떨며 뒷걸음질 치는 찰나 남자가 술에서 깬 사람처럼 손을 떼고 물러났다. 그러나 남자에게서 나는 건 향수 냄새뿐, 술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린 채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후회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한참을 침묵하다 물었다. 이젠 아무도 없는 길 끝을 채찍으로 가리키며.

“저 남자가 프라우 정에게 억지로 키스했냐고 묻는 겁니다.”

반말을 존댓말로 고쳐 다시 정중하게 물었으나 숨 막히는 위압감은 그대로였다. 수아는 제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취조당하는 용의자처럼 자백했다.

“아, 아뇨. 저 하, 한 번도 키스 같은 거 아, 안 해봤어요. 정말이에요.”

그의 손이 닿았던 자리를 무심결에 더듬어보았더니 입술이 퉁퉁 부어 있었다. 어쩌다 오해를 샀는지 깨닫게 된 수아는 늦을세라 해명을 덧붙였다.

“아, 이건. 입술이 부어서.”

차마 토했다는, 억지로 토해서 부었다는 말은 부끄러워서 할 수 없었다.

“어쩌다, 그냥 어쩌다가…….”

바보같이 말을 더듬는다. 키스해본 적 없다는 것까지 얼떨결에 털어놓아버렸다.

내가 왜 이러지?

엄마 앞에서 겁을 먹었을 때에도 머리는 어김없이 빠르게 돌아갔는데 지금은 멈추다 못해 새하얗게 되어버렸다. 마치 저를 통제할 권한이 딴 사람에게 있는 것처럼 제가 제 말을 듣지 않았다.

“젠장.”

필립의 입에서 잘 쓰지 않는 욕설이 흘러나온 건 오늘만 두 번째였다.

어눌한 발음으로 저는 순결하다고 호소한다.

그걸 왜 내게.

거기다 어리숙한 단어 선택과 고분고분한 말투, 그리고 할 말은 하고 말면서도 그의 눈치를 보는 태도까지. 마치 어떻게 해야 그의 입맛에 맞는지를 이 여자가 훤히 알고 있는 것만 같아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한마디로 여자는 그가 제 주인이라도 되는 양, 제가 그의 것이라도 되는 양 굴고 있었다. 이러니 자신의 것도 아닌 여자에게 기꺼이 벌을 주고 싶어진다.

이 한낮의 숲길 한가운데에 발가벗겨 세워둘까. 단추를 고지식할 정도로 끝까지 채운 셔츠를 뜯어 벌리고 한낱 얇은 천 쪼가리에 불과한 면 원피스를 아래로 훌렁 벗겨 내려버리자.

여자가 그의 명령에 복종하느라 알몸을 가리지도 못한 채 수치심에 훌쩍이고 파르르 떠는, 해선 안 될 상상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멋대로 형체를 만들어간다. 아무 잘못 없는 여자를 무릎 꿇려 잘못했다고 빌게 하고픈 그는 괴물이었다.

“헉…… 왜 그러세요?”

그러나 지금은 그가 무릎을 꿇었다. 수아의 심장이 덜컥하는 찰나 오른쪽 종아리에 손이 느껴졌다.

“아!”

손길이 부드럽게 스치는 자리가 따끔했다. 내려다보니 그 자리가 두드러기처럼 붉게 부풀어 있었다.

„Brennnessel.“

“네?”

필립의 말을 여자는 알아듣지 못했다.

이 단어는 모르는 모양이지.

그는 길가에 무성하게 난 잎이 넓은 잡초를 가리켰다. 쐐기풀이었다.

“스치면 붓습니다.”

마치 채찍에 맞은 것처럼.

필립은 장밋빛으로 길게 부어 열감이 도는 살갗을 만지작거리며 쐐기풀은 SM 플레이에 쓰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펨돔(도미넌트 성향의 여성)에 사디스트 성향까지 있는 그의 친구는 색다른 놀잇감을 찾다 찾다 길가에 핀 잡초까지 뜯어 와 그걸로 제 파트너에게 채찍질을 해댔다. 그 꼴을 로열석에서 관전할 땐 그저 꼴사나워 보일 뿐 별다른 감흥이 없었으나 이번엔 쐐기풀이 이 뽀얀 살갗에 붉게 영역 표시를 남기는 순간을 직접 본 것도 아닌데 몸부터 마음까지 동했다.

자꾸만 더듬어대는 게 불편한지 여자가 몸을 살짝 뒤틀었다. 어쩌면 손길에 담긴 의미가 불편한 걸지도.

“아, 아까…….”

“숲으로 들어갔습니까?”

조금 전부터 이 여자를 숲으로 끌고 들어가 알몸으로 나무에 묶어두고 채찍질하는 광경이 눈앞을 어른거렸다. 손에 쥔 채찍 끝이 안달하듯이 떨었다. 배 속의 뱀이 몸을 뒤튼다.

“길 밖으로…… 나가긴 했었어요.”

“숲엔 함부로 들어가지 말아요. 독초도, 진드기도 많으니까.”

“앗.”

수아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터져 나온 건 남자가 갑자기 발목을 감아쥐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손이 남는 건 수아가 마른 탓일까, 이 남자의 손가락이 긴 탓일까.

낯선 남자가 허락도 없이 제 발목을 쥐고 플랫 슈즈를 벗기는 것도 모자라 발을 그의 무릎 위에 올리기까지 하는데 수아는 저항 한번 할 생각을 못 했다. 도리어 중심을 못 잡고 휘청이다 그의 단단한 어깨를 짚어버리곤 깜짝 놀라 손을 떼며 사과하기까지 했다.

“왜…….”

뒤늦게야 왜 이러는지를 물었더니 수풀에는 진드기가 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물렸을 수도 있다며 남자는 수아의 발가락에서 발목을 지나 종아리까지 주의 깊게 살폈다. 눈만이 아니라 손으로도.

발가락을 만지작거리다 발바닥을 쓸어 올린다. 수아는 이상야릇한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몸을 비틀었다.

손끝이 복숭아뼈 옆의 우묵한 골을 덧그리다 종아리 선을 타고 올라온다. 마찰은 아래에서 일어나는데 그 반대쪽의 낯이 뜨거워졌다. 옛날엔 어째서 발을 숨기고 남자에게 보이면 안 됐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 이제야 부끄러워졌던 수아는 발가락을 오므렸다. 발끝이 곱아들며 네이비색 치노 팬츠 위로 탄탄하게 불거진 허벅지를 스치는 순간 남자가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흣…….”

종아리를 타고 오르던 손가락이 무릎 안쪽으로 들어왔다. 연약한 살을 더듬는 손길이 간지러워 몸이 비틀리고 신음이 나오려 했다. 이상하게 보일까 봐 꾹 참는데 무릎 뒤를 지분거리던 손이 셔츠 아래로 불거진 연녹색 치맛자락 속으로 들어왔다.

설마 다른 목적이 있는 건가. 다 가진 남자가 보잘것없는 내게 왜?

허벅지에 단단히 힘을 주며 의심하는 순간, 손이 스륵 빠져나갔다.

“방으로 돌아가면 물린 자국은 없는지 꼭 확인해보세요.”

남자는 이 모든 게 사사로울 데가 없는 일이었다는 듯 사무적인 투로 조언을 하며 구두를 손수 신겨주고서야 몸을 일으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올리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 숲에는 둘뿐이었다.

수아는 말을 끌고 걷는 남자의 뒷모습을 조마조마한 눈으로 살폈다.

왜 화가 났지?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저 남자가 화났다는 사실뿐이었다.

화가 많은 엄마와 살며 화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잦다 보니 타인의 분노는 수아가 풀어야 할 과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생판 남의 분노까지 제 책임인 양 떠맡아 해소하지 않으면 불안한 것이다.

그 탓에 남자가 왜 저를 만졌는가 하는 의문과 의심은 뒷전으로 밀려나버렸다.

“폰 알브레히트 씨? 혹시…….”

수아는 결국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불안을 참지 못하고 토해냈다.

“화나셨어요?”

속을 들여다본 듯한 말이 저를 관통하자 필립은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 여자를 내려다본 그는 이미 들킨 속을 건조하게 뱉어냈다.

“네, 화가 났어요.”

“아, 죄송…….”

“당신이 아니라 그자에게.”

아니, 내게. 지독하게.

배 속의 뱀에게 주도권을 내어주고 이 여자를 덮치려던 자와 똑같은 인간 말종이 되는 상상을 했다. 결국 더러운 상상에 그치지 않고 여자를 만지기까지 했다. 절대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죽이고 싶네요.”

내 속에 도사린 이 뱀을.

“네?”

불분명하게 씹어 뱉은 말을 잘 못 알아들은 여자에게 필립은 거짓말을 했다.

“집주인으로서 책임지고 그자를 쫓아낼 테니 안심하세요.”

눈꼬리를 접어 사람 좋게 웃으면 사람들은 속는다. 여자는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보는 시간이 길긴 했으나 곧 따라 웃으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당신은 대체 뭐지?

필립은 가녀린 다리로 곧 쓰러질 듯 위태로운 걸음을 옮기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손에 힘 한번 주면 발목이든 어디든 부러지고 말 듯 연약한 여자에게 그는 속절없이 떠밀리고 있었다. 욕망의 구렁텅이로.

그는 무대 위의 여자에게서 완벽한 피지배자의 자질을 읽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지난 일주일 지독하게 곱씹어온 터라 종이였더라면 너덜너덜하게 닳고 말았을 것이다.

대도시에서 성 박람회가 매년 성대하게 열리며 심야 시간대에 TV를 틀면 BDSM(성적 취향의 한 분류. 구속(Bondage) 및 훈육(Discipline), 지배(Dominance) 및 복종(Submission), 가학(Sadism) 및 피학(Masochism)의 약어이다.) 르포가 심심찮게 나오는 이 나라에서 지배자, 즉 도미넌트 성향은 흠이 아니다.

그러나 필립은 침실 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 끝나는 시시한 플레이가 아니라 침실 밖에서도 이어지는 현실을 원한다는 게 문제였다.

여자가 삶의 모든 것을 매 순간 그에게 지배당하는, 합의 없는 도미넌트-서브미시브 관계. 세이프 워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이건 범죄였다.

제 완벽한 인생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기에 비틀린 욕망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미 오점을 남길 뻔한 일이 있지 않았나.

필립은 혈기 왕성하던 사춘기와 20대 초반을 거치며 충동을 다스리는 법을 익혔다.

그럼에도 타고난 성향은 어찌할 수 없는 터라 서브미시브 성향을 보이는 여자들에게 미약하게 반응하는 일은 이따금 있었다. 하지만 충동을 억누르지 못한 건 저 여자가 처음이다. 마치 저 여자가 제 주인인 것처럼 배 속의 뱀이 날뛰었다.

아니다. 이 욕망은 곧 주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니 저 여자는 주인이 될 수 없다.

트리거. 그래, 트리거라 부르자.

그의 음험한 욕망에 위험한 트리거가 생겼다.

필립은 욕실로 들어서자마자 식은땀으로 젖어 몸에 달라붙은 흰 티셔츠를 머리 위로 끌어 올렸다. 욕실 반대편의 빨래 바구니 속으로 티셔츠를 내던지는 거친 몸짓에 감정이 여과 없이 실려 있었다.

바깥으로 드러난 온몸의 근육이 분노도, 욕정도 못 이겨 씨근대며 뚜렷한 요철을 만들어낸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부푼 근육은 그의 하복부에 길쭉한 몸체를 바짝 세우고 세모꼴의 머리에서 독액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검붉은 독사.

제 속에 자리 잡은 비틀린 욕망을 뱀이라 부르는 건 그 욕망이 깨어날 때마다 뱀을 닮은 저것이 고개를 쳐들기 때문이다.

필립은 여자의 발목을 쥐었던 손으로 제 성기를 쥐어보았다. 그 발목, 제 손에는 한 줌이었으나 그의 것은 여자의 손에 버거울 것이다.

가느다란 발목을 쥐고 쓸어 올렸던 순간을 흉내 내며 페니스를 쓸어 올려보았다. 이걸로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다.

한계까지 발기하며 형체도 없이 바짝 펴진 포피를 기어코 끌어 올렸다. 뭉쳐낸 살 껍질에 귀두를 끼워 문지르며 도톰하고 빨갛게 부은 여자의 입술이 이걸 물고 빠는 느낌을 상상했다.

말캉하고 따뜻했었다. 촉촉하기도. 그 끈적한 살점이 귀두에 달라붙어 쪽쪽거리고 그 살점의 주인은 숨을 쉬지 못해 꺽꺽댈 걸 생각하니 벌써 아랫배 깊은 곳이 찌르르했다.

“하아…….”

위험한 상상을 하며 자위를 하던 자신과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자괴감이라는 찬물을 맞은 정염이 식어버렸다.

뭐 하는 짓이지.

자위는 욕망을 죽이기에 좋은 방법이다. 자괴감 없이 주기적으로 써왔으나 그 여자를 떠올리며 하는 자위는 욕망을 죽이긴커녕 살리는 자충수였다.

트리거가 사라지고도 일촉즉발이라니.

이 빌어먹을 뱀. 목을 졸라버리고 싶다. 꼴 보기 싫게 꺼떡거리며 선액을 울컥 토해대는 귀두의 아래를 숨 막히는 고통이 느껴질 때까지 손으로 비틀고 옥죄었다.

죽어. 제발 죽어.

부질없는 짓이다.

결국 손을 놓고 샤워 부스로 들어가 온도 밸브를 오른쪽 끝까지 돌려 찬물 세례를 맞았다.

꽤나 오래도록 얼음장 같은 물 아래 서 있었다. 그러고도 몸이 후끈해 목욕 가운 대신 수건 한 장만 허리 아래에 두르고 나왔다가 불청객을 마주했다.

“샤워가 길구나. 딴짓이라도 한 것처럼.”

아들의 드레스 룸에 멋대로 들어와 오토만에 앉은 어머니가 자세만큼이나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밖에서는 별일 없었니?”

있었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휘둘렸죠. 기쁘시겠군요.

그러나 휘둘리는 건 여기까지. 고작 아들의 반응을 보고자 강간을 사주하느냐고 따지는 건 무용했다. 감정적으로 반응하면 어머니만 즐겁게 만드는 셈이라 필립은 무감한 태도를 취했다.

“궁금하면 직접 와서 보시지 그러셨습니까.”

말해주지 않겠다는 무심한 대꾸에 위로 비틀려 있던 어머니의 입매가 아래로 뒤틀렸다. 궁금해 미쳐가는 저 얼굴을 보자 뒤틀려 있던 그의 속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작지만 확실한 보복이었다.

“그 여자, 서관으로 들어가는 걸 봤어. 제 몸엔 맞지도 않는 흰 셔츠를 입고 있던데 네가 오늘 흰 셔츠를 입었던가?”

캐내려는 집요함이 가상하다. 등을 돌린 채 옷을 꺼내어 입던 필립은 초점을 그 여자와 자신에게서 제3자에게로 돌렸다.

“그 강간 미수범은 당신 침실에 들이려고 데려오신 줄 알았더니.”

“약점을 쥐기 전엔 아니지.”

이제 덕분에 약점을 쥐었으니 그자를 착취하겠다는 뜻이었다.

필립은 범죄자가 범죄를 당하는 데 동정심을 느낄 만큼의 박애주의자는 아니었다. 이기주의자라 어머니가 그자를 함정에 빠트리는 데에 저를 이용했다는 사실이 불쾌할 뿐.

“이 일로 제게 빚을 지셨다는 걸 잊지 마시죠.”

“그래서 갚고 있잖니.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내 다리 사이의 발정 난 개 한 마리에는 네 다리 사이의 순한 강아지 한 마리로.”

그렇게 초점은 다시 그 여자에게로 옮겨갔다.

“그 정도면 미인이지 않니? 몸매도 부러질 듯 가냘파서 정복욕을 일으키는 동시에 육감적이라 성욕을 자극하겠지. 발레리나라 몸도 유연하겠구나. 어떤 자세든, 어디에 어떻게 묶든 잘 버티지 않겠어?”

필립은 노골적인 충동질을 못 들은 척하며 드레스 셔츠의 단추를 채워 나갔다.

“배경 같은 건 중요하지 않겠지. 과시용도 아니고 잡아먹을 개의 혈통을 따지는 사람은 없으니 그만하면 완벽…… 아, 네게 경쟁자가 있는 게 걸리긴 한다만.”

경쟁자?

그 말에 단추를 채우던 손이 멎었다.

“모친에게 학대당하는 듯하더구나.”

그건 필립도 눈치챈 바였다. 바르나를 떠나던 날, 공항 라운지에서 그 여자는 겁먹은 강아지처럼 제 모친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 헤어지며 여자는 그에게 부탁했다.

“오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모친에게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너도 본능적으로 알아봤겠지. 길들여지는 데 익숙한 여자라는 거.”

그래서 일을 핑계로 대고 콩쿠르 1라운드의 나머지는 보지 않은 거니? 고작 오늘 하루만 해도 네 방에 틀어박혀 있거나 나다니며 손님들과 엮일 일을 자꾸만 피하더구나. 그 여자와 다시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게 안쓰러울 정도야. 그럼 내가 손수 자리를 주선해줄 거란 예측 정도는 너도 했을 텐데 너무 쉽게 당한 것 아니니?

어머니가 제 머릿속을 난도질하는 사이 필립은 여유로운 태도로 셔츠 단추를 마저 채우고 서랍을 열어 소매에 채울 커프스단추를 한가롭게 골랐다.

“완벽한 서브. 욕심나지 않니?”

오토만이 삐걱이더니 부러질 듯 가느다란 굽이 두꺼운 카펫을 짓이기는 위태로운 소리가 필립의 주위를 포위하듯 맴돌았다.

“이미 갇힌 새, 새장만 바꾸면 되겠어. 그 여자는 네가 그 비루한 새장의 문을 열어주면 또 다른 새장에 갇히는 줄도 모르고 네게 기꺼이 날아들겠지.”

“나무가 아까운 저질 소설을 즐겨 읽으시더니 표현력이 한층 진부해지셨군요.”

“아들아, 설마 새장 문을 어떻게 여는지까지 이 어미가 가르쳐줘야 하니?”

모를 리가. 알아도 열 생각이 없는 걸 본인도 알면서 도발하느라 자존심을 긁는다. 허튼짓이었다.

서랍을 열어 넥타이를 고르던 필립의 시야에 검은 매니큐어를 바른 손이 나타났다. 어머니는 서랍 위에 놓인 필립의 핸드폰을 뾰족한 손톱 끝으로 긁었다. 그렇게 그린 숫자는 110이었다.

“전화 한 번이면 아주 손쉽게 주인을 바꿀 수 있어. 현장은 내가 기꺼이 만들어주마.”

핸드폰을 손수건으로 훔쳐 숫자를 지우고 슈트 팬츠의 뒷주머니에 넣어버리는 필립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어머니가 입매를 또 한 번 비틀었다.

“아니면 좀 더 복잡하고도 위험하지만 아주 확실한 방법도 있지.”

어머니는 필립이 꺼내는 넥타이를 낚아채어 가더니 묶었다. 올가미 모양으로.

올가미와 그 뒤, 모친의 기대에 찬 낯을 노려보는 필립의 눈빛이 갈수록 싸늘해졌다.

대체 어떤 수렁까지 자식을 밀어 넣으려는 건지.

그는 이쯤에서 더는 참지 못했다.

“현실을 잊으신 것 같아 상기시켜드리자면 상대는 고작 열아홉 살입니다.”

“법적으로 섹스에 동의할 수 있는 연령은 열네 살이란다.”

동의라니. 그의 성향에는 맞지 않는 헛소리였다.

“외국인. 그것도 내가 후원하는 학생. 그루밍 범죄 혹은 위력에 의한 범죄로 세상은 정의하겠죠.”

“그루밍은 미성년자에게 할 때나 범죄란다. 그리고 위력에 의한 범죄? 거래라고 고쳐 부르렴. 세상은 그렇게 정의한다니, 네 정의는 아니란 뜻이구나.”

어머니는 필립의 우려를 듣는 족족 반박하더니 대단히 즐거운지 말문이 막힌 그의 앞에서 목청이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들보다도 어린 남자들을 그루밍하거나 위력으로 눌러 착취하는 일에 관록이 붙을 대로 붙은 위인인지라 몸을 사리는 필립이 우스운 것이다.

“필립, 어릴 때 저지른 실수 때문에 이러니? 넌 그만큼 철저해졌지 않니.”

“그래서 철저하게 참는 길을 택했죠.”

“아아, 내 아들. 넌 생각이 지나치게 많아.”

“많을 수밖에요. 분에 넘치는 아들 하나 잘 낳아 평생 놀고먹는 당신과 달리 난 이 가문과 사업체를 어깨에 짊어진 수장이니까.”

필립이 잉그리드의 코앞까지 불시에 다가왔다.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내려다보는 태도가 위협적이기 짝이 없었다. 새빨갛게 핏발이 오른 눈이 살벌한 적의를 감추지 않는다.

그래, 이래야 내 아들이지.

어울리지도 않는 신사의 가면을 마침내 벗어던진 아들의 맨얼굴로 잉그리드는 두 손을 뻗었다. 오만하게 들린 턱을 가장 아끼는 보물인 양 감싸자마자 필립은 제 어미의 손이 역겨운 오물인 양 거칠게 쳐냈다. 말은 갈수록 신랄해졌다.

“아들도, 가문과 사업도, 어느 쪽에도 애정은 없으니 몰락하든 말든 본인 알 바 아니겠죠. 그런데 본인의 사치스럽고 안락한 삶도 그런 식으로 무너뜨리겠다?”

잉그리드는 저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노려보는 아들을 더없이 황홀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정신이 나간 건지 지능이 나쁜 건지. 어느 쪽이든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건 확실하지만.”

오랜만에 제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아들을 좀 더 오래 감상하고 싶건만 필립은 더 말을 섞는 건 시간 낭비라는 듯이 몸을 돌려 나가버리려 했다. 잉그리드는 필립의 팔을 덥석 붙잡아 매달리며 표정을 불쌍하게 일그러뜨렸다.

“무료해. 사는 게 무료해서 이러는 거야.”

“다음 세대의 장밋빛 미래를 가시밭길로 만드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인생은 충분히 즐거울 텐데.”

“그것도 20년 넘게 해오면 질리기 마련 아니겠니.”

“그럼 관두시죠.”

“필립, 내 아들.”

잉그리드는 필립이 허리에 두 손을 짚으며 생긴 틈으로 팔을 주저 없이 밀어 넣어 다 큰 아들의 품에 안겼다.

“너를 대단한 가문의 후계자로 낳아준 내게 그 정도 보답은 해줄 수 있는 거 아니니?”

필립은 그녀를 한 손으로 매몰차게 밀어내고 몸을 돌렸다.

“손님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뵙겠습니다.”

드레스 룸을 나서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비서의 번호를 누르는데 등 뒤에서 답지 않게 비장해서 우습기까지 한 한마디가 들려왔다.

“내기.”

핸드폰을 귀에 대며 흘겨보듯이 비스듬한 시선을 던졌더니 팔짱을 끼고 문틀에 기대어 선 어머니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떠니?”

그 여자에게 넘어가느냐, 넘어가지 않느냐를 두고 하는 내기인 건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실이니 어머니는 부연 없이 곧장 조건부터 읊었다.

“기한은 이 휴가가 끝나는 날까지.”

“토마스, 지금 당장 프랑크푸르트로 갈 테니…….”

“네가 이기면 다신 이런 짓 하지 않으마. 널 내버려둘게.”

“공항에 전용기를 대기시켜주세요.”

“네 어쭙잖은 가짜 양심에 걸리적거리는 장학 사업에서도 나는 손을 떼마.”

그를 내버려둔다는 가장 솔깃한 대가도 들은 척하지 않자 어머니는 안달이 나 대가를 이것저것 내걸기 시작했다.

저 약은 사람이 어쩐 일인지.

협상 기술이 형편없었다.

“또 뭘 갖고 싶니? 네가 원한다면 뭐든 줄 테니.”

줄 것도 없는 처지면서 많은 걸 가진 척 여유롭게 웃는다. 어머니가 이 거래에서 열위에 선 입장이라는 건 바짝 다가와 매달리듯 기댄 몸이 말해주는데. 필립은 비서가 들을까 핸드폰을 멀리 떼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가는?”

“별거 아니란다. 내가 이기면 구경 정도만 하게 해주렴.”

이 거래에 응할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굳이 물은 건 어머니가 가진 카드를 모두 무참히 찢어발겨버리고 싶었기 때문일 뿐이었다. 다시는 이런 말 꺼내지 못하도록.

“내가 이기면 귀찮은 파리를 쫓아버리는 정도의 미미한 보상, 내가 지면 사생활 침해라는 막대한 손해. 밸런스를 맞춘다는 초보적인 성의도 없는 게임에 누가 응한다는 건지.”

핸드폰을 다시 귀에 대려는 찰나, 목에 두 팔이 휘감겼다. 발끝을 들어 눈높이를 맞춘 어머니는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이미 질 걸 아는 눈이구나.”

“…….”

“솔직히 말해봐. 그 여자 앞에서도 철저히 참았니?”

어머니는 필립의 경직되어가는 턱을 쓰다듬으며 그의 귓가에 간사한 유혹을 속삭였다.

“너도 궁금하지 않아? 네 자제력이 어디까지인지.”

***

로젠탈 성에서의 마지막 밤, 만찬 식탁에 앉은 장학생들의 앞에는 알브레히트의 브랜드 로고가 금박으로 새겨진 상자가 놓였다. 후원자가 주는 선물이었다.

모두 같은 것일 줄 알았더니 제각기 달랐다. 수아의 상자에 든 건 백금으로 만든 듯한 초커였다. 얇은 사슬 모양의 체인 가운데에 알브레히트를 상징하는 들장미 펜던트가 달린 심플하고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엄마야, 세상에. 통도 크네.”

엄마의 턱이 떨어질 것처럼 벌어졌다. 알브레히트의 보석 박물관에 다녀온 후로 하나쯤 갖고 싶다고, 나중에 돈 벌면 사달라는 말을 엄마는 며칠 내내 돌림노래처럼 부르던 차였다.

“근데 내 건 없어?”

정작 알브레히트를 하나쯤 갖고 싶다던 엄마의 앞에는 상자가 없었다. 통 큰 선물은 장학생에게만 주는 것이었다.

“엄마 할래요? 난 이런 거 갑갑해서 잘 안 하는데 엄마한테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거짓말을 섞어가며 엄마에게로 민 상자가 도로 밀려왔다.

“너 줬는데 내가 걸면 우습잖아.”

엄마가 다른 사람들 쪽을 눈치 보듯 곁눈질했다.

“알브레히트 씨, 감사드려요.”

“실은 어머니의 아이디어입니다.”

“감사합니다, 알브레히트 여사님.”

“내 작은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작다뇨. 그 알브레히트인걸요.”

다들 감사 인사를 하며 받은 걸 몸에 걸쳤다. 수아도 눈치껏 상자에서 초커를 꺼내어 목에 감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잉그리드에게만.

“왜? 잘 안 돼?”

“고리가 안 잡혀서…….”

한참 헛손질을 하다 엄마의 도움을 받아 겨우 초커를 채웠다. 고개를 들자마자 수아는 초커를 훔친 사람처럼 움츠러들며 고개를 푹 숙여야 했다.

며칠 전 수아를 구해주었던 남자와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하필이면 마주 앉게 자리가 배정됐다.

그러고 보니 시선이 겹치자마자 남자도 눈을 피하지 않았나? 그런데 눈이 마주쳤다는 건 저 남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는 뜻 아닐까.

쿵쿵, 심장 소리가 귓전을 울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왜 나를 기분 나쁘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을까.

찰나에 본 것이라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순간 뒷덜미에 짜르르하게 소름이 돋아 오른 건 진짜였다. 목걸이를 만지는 척, 소름이 돋은 목덜미를 가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옆에서 불만에 찬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줄 거면 쟤 거처럼 좀 예쁜 걸 주지, 왜 개 목걸이 같은 걸 줘? 딱 봐도 얼마 안 하게 생겼…… 엄마야…….”

옆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엄마가 이것 좀 보라며 수아를 잡아끌었다. 엄마의 폰에는 수아의 목걸이 사진이 나와 있었다.

엄마가 보라는 건 그 아래에 적힌 가격이었다.

개 목걸이 같다고 뚱하던 엄마 얼굴이 어쩌다가 갑자기 활짝 폈는지 이제야 알겠다.

“이거 중고로 팔자. 너 이런 거 갑갑해서 잘 안 한다며? 넌 비싼 거 필요도 없고. 준 사람 눈이 있으니까 오늘만 걸어. 기스 안 나게 조심하고.”

엄마는 다른 아이들이 받은 것도 하나씩 알브레히트의 공식 사이트에서 가격을 찾아보더니 더더욱 싱글벙글하기 시작했다.

“다른 애들 거보다 네 거가 훨씬 비싸. 급이 달라. 네 건 0이 하나 더 붙어.”

물론 엄마의 싱글벙글은 오래가지 않았다.

“설마 딴 애 줄 걸 헷갈린 건 아니겠지.”

잉그리드가 수아에게 잘 어울린다는 칭찬을 하고서야 엄마는 안심했다.

“우리 수아, 언제 할매 눈에 들었어? 후원 안 잘리겠네. 아니지. 안전 이별 선물인가?”

엄마의 두서없는 말을 듣고 있자니 올라오는 한숨을 수아는 젝트와 함께 되삼켰다.

내일이면 만하임으로 돌아가야 한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엄마와 단둘이, 그 감옥 같은 아파트로.

엄마는 부풀 대로 부푼 풍선이다. 콩쿠르에서 탈락한 딸을 향한 분노,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서 느끼는 열등감, 낯선 이들의 시선에 일주일 내내 노출되며 가식을 벗지 못해 쌓인 스트레스까지 저 속에 쌓일 대로 쌓여 분출할 틈만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남의 눈이라는 외부의 압력에 억눌리고, 호화로운 휴가가 속에 쌓인 열기를 식혀주고 있지만 그 모든 게 사라지는 순간 터질 게 뻔했다.

집으로 가자마자 손찌검을 날리거나, 얼마나 사소하든 실수 하나만 저지르길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겠지. 그 푹푹 찌는 아파트를 살 떨리는 살얼음판으로 만들며.

천국 같았던 휴가를 마치고 지옥 같은 현실로 돌아갈 생각에 우울한 건 수아만이 아니었다.

“흐흑.”

디저트가 식탁에 오르고 모두 함께 비운 와인이 다섯 병에 달할 즈음이었다. 마리나 카민스카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울음을 터트렸다. 식탁에 아슬아슬한 정적이 살얼음판처럼 번졌다.

마리나는 휴가 내내 의기소침과 예민을 오갔다. 그나마 오늘은 밝아 보이는가 싶었더니 식사 도중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은데.

수아의 시선이 카민스카에게서 굳게 닫힌 문으로 향했다.

메인 디시가 식탁에 올랐을 때였다.

“바르나 콩쿠르에서 메이지 젠슨이 그랑프리를 수상했다고 합니다.” 

저 문으로 야나가 들어오더니 이 말을 잉그리드에게 전했다. 어째서인지 독어가 아닌 영어로. 그래서 카민스카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메이지 젠슨은 로잔 콩쿠르에서 마리나와 은근한 경쟁 구도에 있었으나 결국 마리나를 이기지 못했었다. 한때는 저보다 뒤처졌던 발레리나가 입상할 수준의 경연자가 없으면 주지 않는 그랑프리를 거머쥐었다는 소식은 슬럼프를 겪는 스무 살짜리에게는 낭보가 아니다.

“마리나, 왜 그래? 괜찮아?”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어깨를 들썩이는 마리나를 옆자리에 앉은 발레리나가 달래기 시작하며 불편한 정적이 깨어졌다. 수아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냅킨을 반듯하게 접어 테이블에 놓으며 일어서는 찰나였다.

상석에서 의자를 급히 미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나.”

잉그리드가 마리나에게 다가가더니 친딸을 대하듯이 품에 안고 손수 달래기 시작했다.

“이런, 이런.”

등을 부드럽게 도닥이던 잉그리드가 그 아이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 순간 마리나의 흐느낌은 오열이 되었다. 분명 위로나 격려의 말이었을 텐데 그게 눈물의 물꼬를 더욱 터트린 걸까.

의아한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던 수아는 고개를 든 잉그리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잉그리드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딱한 내 아이들.”

후원자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모두를 돌아본다. 딱한, 낙오자들을. 수아도 마리나처럼 울고 싶어졌다.

잠시 복도로 나갔다 돌아온 필립은 그새 장례식장이 되어버린 식당 안을 질린 눈으로 응시했다. 제가 일부러 정신을 쥐고 흔들어 울린 사람을 달래는 잉그리드의 가식에 질린 표정을 짓는 건, 그를 뒤따라 들어온 야나도 마찬가지였다.

“심사위원이라는 자들이 너희 같은 훌륭한 원석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내 눈엔 너희들이 훨씬 뛰어났으니까 너무 낙심하지 말렴. 안타깝게도 세상은 항상 정의롭고 공평하지는 않단다.”

언뜻 들으면 위로 같은 잉그리드의 말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을 흐리는 것이 목적이다. 심사 과정에 부정이 있어 부당한 일을 당한 거라는 착각까지 안겨주며.

달콤한 말은 그렇게 독이 되었다.

나는 못 하지 않았어. 아니, 잘했어. 이 빌어먹을 세상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뿐이야. 그러니 저 자리는 내 자리였어야 해. 난 내 자리를 빼앗긴 거야. 억울해. 난 억울한 일을 당한 거야.

비대해진 자만심과 자기연민을 부력 삼아 하늘 끝까지 오른 이들의 추락이 더욱 처참하도록.

야나는 정작 저 수법에 당할 땐 몰랐다. 천직인 줄 알았던 발레리나 생활을 접고 제 후원자의 비서로 취직했을 때에야 알았다. 제 꿈을 망친 사업에 가담하는 대가는 달콤하고도 씁쓸했다.

“마리나, 언젠가 넌 보란 듯이 성공할 거야. 나를 능가하는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어주겠다는 약속, 아직 잊지 않았겠지?”

마리나를 위로하는 잉그리드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이가 한 명 더 있었으니.

“할매가 도도하게 생긴 거랑 다르게 정이 많네.”

경란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아가 보아도 잉그리드는 정 많고 사람 좋아하는 호인처럼 보였다.

“어이구…… 완전히 여우네. 연기하는 것 좀 봐.”

엄마가 말하는 여우는 마리나였다.

“마음 약한 할매 구워삶아서 아들까지 홀랑 먹으려나 봐.”

마침 그 남자마저 마리나에게로 다가간 차였다. 그가 모친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귓속말을 했다. 무슨 말을 한 건지, 잉그리드는 내키지 않는 듯하면서도 마리나를 안고 있던 손을 풀고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정수아, 너도 연기 좀 해봐.”

옆에서 엄마가 수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잘하잖아.”

좋은 말에 인색한 엄마의 입에서 나온 건 칭찬이 아니라 사실일 뿐이다. 수아는 관찰력이 좋고 관찰한 것을 모방하는 것도 잘했다.

발레로 길이 정해지기 전엔 엄마의 손에 붙들려 아역 배우 에이전시와 오디션장을 들락거렸고 광고나 방송도 여러 번 찍었다. 발레 실력이 퇴보를 거듭하는 동안에도 교수님들에게서 연기력과 표현력 하나만은 수준급이라는 칭찬을 받아왔다. 그 정도로 수아는 연기에 재능이 있었다.

차라리 연기자를 해야 했나.

이제 와서야 후회한다.

지금이라도 길을 틀기엔 늦지 않았지만 그러자니 엄마의 등쌀이 더 심해질 것 같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연예계 스폰 같은 흉흉한 이야기를 때때로 접하면 더더욱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 집 아들 오면 벗어.” 

이런 말을 하며 딸을 헐벗기는 엄마라면 발정 난 늙은 수퇘지들이 득시글거리는 호텔 방에 딸을 주저 없이 밀어 넣을 것 같았으니까.

잘하고 오라며. 뭘?

그래서 지금의 후원자가 중년의 여자와 그 젊고 점잖은 아들인 게 다행이었다.

제게 관심이 없는 남자 말이다.

아마도.

“카민스카 씨,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야나가 방까지 모셔다드릴 겁니다.”

남자는 마리나의 의자를 빼주더니 일어설 수 있도록 손까지 잡아주었다. 그 모습에 그가 숲에서 제 손을 잡아 일으켜주던 순간이 겹쳐지자 수아의 심장이 철렁 흔들렸다.

그제야 뒤로 제쳐두었던 의문이 다시 펼쳐졌다.

그날 숲에서 저 남자는 무슨 생각으로 나를 만졌지?

사무적인 예의인 줄 알았으나 아닌 것 같기도 했던 행동을 다시 곱씹는 데 정신이 팔려 실수를 저질렀다.

수아는 눈이 마주치고서야 제가 그를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청회색 눈동자는 빙산의 빛깔을 닮아 있었다. 수면 위에서는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비밀을 수면 밑에 숨긴 빙산 말이다.

시린 시선을 받고 있자니 말아 쥔 손안에 땀이 차오른다. 수아가 얼어붙은 사이 남자가 먼저 눈을 뗐다. 그제야 수아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야나, 내가 하도록 하죠.”

야나에게 마리나를 데려가라던 남자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직접 데려다주겠다고 나섰다.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으로 수아는 또다시 몰래 시선을 옮겼다. 눈은 며칠 전 저를 만졌으나 지금은 마리나를 부축하는 손에 있었다. 제게 닿았던 손도 지금 저 손처럼 사무적인 예의만을 담았을 것이다.

지금의 후원자가 저 남자라 다행이다. 제게 관심이 없으니. 조금도.

하나의 의문이 해소되자마자 수아는 또 다른 의문을 품었다.

나는 왜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남자 앞에서 이토록 떠는 걸까.

[엎드려.]

전신에 붙는 검은 라텍스 슈트를 입은 여자가 명령했다.

휙.

[윽!]

몸이 불편한지 곧바로 엎드리지 못하고 꾸물대는 남자의 둔부를 승마용 채찍 끝이 매섭게 후려쳤다.

[당장.]

[하아, 죄송합니다.]

화면이 흔들리더니 이미 꽤나 얻어맞았는지 붉고 푸르게 얼룩진 살갗이 클로즈업되었다가 사라진다. 바닥에 네발로 엎드린 남자는 목에 초크 체인만 걸친 알몸이었다.

여자가 새빨간 킬 힐을 신은 발 한쪽을 남자의 앞에 내민다. 남자는 뼈다귀라도 받은 개새끼처럼 여자의 발등에 게걸스러운 키스를 퍼부었다.

잘그락.

[컥!]

초크 체인의 끝을 여자가 가차 없이 당겼다. 불시에 목이 졸린 남자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목줄을 쥔 여자가 방 안을 걷기 시작하자 남자는 개처럼 끌려가면서도 눈앞을 교차하는 새빨간 하이힐에 입을 맞췄다.

[앉아.]

여자는 제 앞에 유순히 무릎 꿇은 남자의 다리 사이로 한 발을 불쑥 넣었다. 화면은 하이힐의 뾰족한 코에 희롱당하는 남자의 음낭과 그 위에서 넋을 놓아가는 낯짝에 초점을 맞추었다. 급소를 때리고 차는데도 남자는 황홀한 눈을 하곤 헐떡이며 신음했다.

[윽, 제발, 아흑, 여왕님, 제발…….]

남자의 애걸은 불분명했으나 무얼 원하는지야 뻔했다. 조금 전 둔부를 클로즈업했을 때 한가운데에 꽂힌 애널 플러그도 화면에 잡혔었다. 공처럼 걷어차이는 음낭의 위에 우뚝 선 음경에는 금속 요도 플러그까지 꽂혀 있었다. 사정 컨트롤 중인지.

플러그로 틀어막힌 요도구의 좁은 틈으로 정액처럼 희뿌옇지만 훨씬 묽은 전립선 액이 줄줄 새어 나와 여자의 발등을 적신다.

짝.

여자가 남자의 뺨을 사납게 올려붙였다.

[감히 내 허락 없이 흘려?]

[흑, 죄송, 죄송합니다.]

[내 발에 떨어진 거, 말끔하게 핥아. 어서!]

시키는 대로 복종한 남자는 손을 덜덜 떨며 여자의 눈치를 보다 애걸했다.

[여왕님, 제, 제발 싸게 해, 주세요.]

손가락만큼 굵고 중간에 구멍이 없는 요도 플러그를 쓴 건지 남자는 사정 직전까지 몰린 얼굴을 하고도 온몸을 덜덜 떨며 참고 있었다. 저대로 싸면 안으로 역류할 것이다. 그런다고 별일이야 없겠지만 가는 입장에서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고 들었다.

[으헉!]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나더니 남자의 몸이 번쩍 튀어 올랐다. 강도를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올린 건지, 몸 안에 깊이 박힌 애널 플러그의 진동 소리가 선명히 녹음되었을 정도였다.

남자의 눈이 점점 풀려갔다. 벌어진 입에선 타액이 줄줄 흐른다. 결국 참지 못했는지 요도 플러그의 끝이 불쑥 솟아오르더니 그 틈으로 정액 한 덩어리가 울컥 새어 나왔다.

[컥!]

푹. 여자가 손가락 한 마디만큼밖에 빠져나오지 못한 플러그를 무자비하게 밀어 넣자 남자가 눈을 까뒤집으며 자지러졌다.

[제발, 억, 제발…….]

여자는 그 후로도 남자를 괴롭히다가 요도 플러그 끝의 고리에 손가락을 걸었다. 깊숙이 박혀 있던 스크루 모양의 막대가 희뿌연 액을 뭉텅이로 퍼 올리며 딸려 나온다.

[허억!]

클라이맥스를 목전에 두고 필립은 영상을 껐다. 권태로운 한숨이 적막한 방 안에 쏟아지다 흩어졌다.

필립은 채팅 앱을 켜 M이라고 되어 있는 채팅방을 열었다. S 주제에 이니셜은 M인 영상의 주인에게 그가 보낸 건 별 하나였다. 다섯 개 만점에 하나.

이것도 아까우나 노고를 생각해서 준 것이었다.

필립은 뒤이어 평가를 써나갔다.

[이보시죠, 여왕님.]

저번 녀석은 여신이더니 이번엔 여왕인가.

여신이나 여왕이나 제3자에게는 눈살 찌푸려지는 호칭이나 이번에만 유독 거슬리는 건 여자의 새 파트너가 어설프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새 광대의 연기력은 형편없으며 타성에 젖은 여왕 폐하께서는 더더욱 형편없으십니다.]

뺨을 맞던 순간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찰나였지만 예민한 필립의 몰입을 깨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저 패턴, 익숙하다. 장면마다 이제 어떻게 흘러갈지가 빤히 예상되니 시시하다.

메시지의 전송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그는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문제는 영상의 주인이 아니라 제게 있는지도 모른다.

이젠 보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 건가.

이따금 잠에서 깨어 몸부림을 치는 뱀을 다스리는 방법은 관음이었다.

세상엔 이상 성욕자가 넘쳐난다. 이쯤 되면 이상과 정상의 정의가 바뀐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필립처럼 지켜보는 걸 좋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보여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상류층 전용인 회원제 SM 클럽에서는 관전자를 구하는 이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고, 그의 친구는 제 플레이를 브이로그처럼 찍어 그에게 보내주며 자랑해댔다. 그러니 뱀을 잠재울 묘약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리 만족이라고 해야 할까.

다른 도미넌트가 서브미시브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모습을 보며 손 닿지 않는 곳의 가려움이 잠시나마 해소되는 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오늘은 느껴지지 않는다.

더 자극적인 걸 시도해야 하나.

필립은 요 며칠 관음이 효과가 없는 이유를 알면서도 자극의 역치값이 높아진 탓이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관음 이상을 시도해본 적은 있었다. 명령에 복종하도록 길들이는 플레이였다. 접촉은 없었다. 결벽증이 있어 다른 남자가 손댄 여자는 만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관음과는 비할 데 없이 만족스러웠으나 단 두 번에 그쳤다. 플레이가 끝나자마자 수직 관계가 수평 관계로 변하는 것이 흥을 깬 탓이었다. 결국 그는 잠깐의 연극이 아닌 현실을 원한다는 것을 또다시 확인받기만 한 셈이었다.

[M: 고작 하나?]

별 하나에 대한 답이 오고서야 필립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니, 또 다른 상념이 시작됐다.

M은 대형 미디어 그룹 회장과 한때 전설적이었던 모델의 외동딸인 밀라 위르겐마이어의 이니셜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이 필립의 부모님과 오랜 친구 사이였기에 두 사람도 어릴 적부터 어울리게 되었다.

억지로.

동족 혐오라 해야 할까, 둘은 거만하고 지기 싫어하는 서로를 끔찍이도 싫어했다. 전혀 맞지 않을 것 같던 두 사람이 뜻밖의 공감대를 발견한 건 열넷이 되던 해였다. 프랑스 남부의 별장에서 부모님들이 잠든 사이 몰래 술을 마시다 밀라가 느닷없이 제안했다.

“필립, 섹스할래?” 

“개처럼 기어봐. 그럼 한 번은 박아줄지도.”

“박게 해주는 건 어때? 물론 너한테.”

도발처럼 주고받은 대화 끝에 둘은 서로의 성향만 확인하고 섹스는 하지 않았다. 같은 도미넌트끼리 붙을 이유가 없으니.

그래서 여태 은밀한 취향을 공유하면서도 파트너였던 적은 없었다. 심지어 밀라의 알몸을 본 적도, 성적으로 접촉한 적도 없다. 필립은 누구와도 성적으로 접촉해보지 않았다.

“알브레히트 씨, 잠시만 같이 있어주시면 안 될까요?” 

조금 전, 그 발레리나가 눈물을 미끼 삼아 제 방으로 들어오라고 유인했던 것처럼 유혹을 받는 일은 잦았으나 유혹 앞에서 필립은 아무런 욕구를 느끼지 못했다.

우습게도 저를 유혹할 생각이 조금도 없는 여자에게는 욕구를 느끼다 못해 갈급증이 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를 원치 않는 여자가 이 성벽의 첫 번째이자 필수 조건이었으니.

야나에게 맡겨도 될 것을 모친의 장난감을 손수 방까지 에스코트한 건 정수아, 그 여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그 찰나 필립은 저항이라도 하듯이 딴 여자에게 손을 뻗었었다.

몇 시간만 더 참으면 그의 승리로 끝날 내기를 잠깐의 충동에 흔들려 질 순 없다. 그는 지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다.

핸드폰의 시계가 12시 9분으로 바뀌었다.

파티는 파한 지 오래이자 모두가 잠들었을 시각이니 내기는 그의 승리로 끝났다 해도 좋을 것이다.

필립은 밀라에게 답장하지 않은 채 핸드폰을 끄고 누웠다. 두서없이 이어지던 생각이 그 발단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여자로 끝내 결말지어진 건 자각하지 못한 채였다.

쉽게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해소되지 않은 욕망은 한여름 밤의 폭염과 맞먹었다. 몸 안팎에서 끓는 열기를 결국 이기지 못하고 필립은 몸을 일으켰다.

수영이나 지칠 때까지 할 생각이었다.

“아, 시원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며 시원하단다. 아무리 몸이 독일에 있어도 수아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자쿠지 한쪽에 있는 버튼을 누르자 잠잠하던 물에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수아는 벽면에 난 노즐에 몸을 가져다대었다. 세차게 뿜어 나오는 물줄기가 며칠 전 그 더러운 짐승과 몸싸움을 하다 무리가 간 근육을 노곤하게 풀어주었다.

비키니 브라의 끈도 풀리는 것 같다. 스파에는 저 혼자뿐이지만 수아는 느슨해진 끈을 다시 질끈 조여 맸다.

괜한 짓이긴 했다. 곧 제 손으로 풀어버렸으니.

사우나 구역으로 들어가는 문 옆에는 여기서부터는 옷을 벗어야 한다는 사인이 걸려 있었다. 수아는 안으로 들어가 사람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역시나 시간이 늦어 아무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여기에 머무는 손님이라곤 여자뿐인데 왜 걱정한 걸까.

수아는 비키니를 벗어 바구니에 넣어두고 수건 하나를 챙겨 사우나로 향했다. 유리문을 열자 상쾌하고 알싸한 나무 향을 가득 실은 더운 공기가 훅 덮쳐왔다. 한국에 살 때 가끔 가던 찜질방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자 수아의 얼굴에 드물게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사우나는 혼자 쓰기 민망할 정도로 넓었다. 회색 벽돌과 검은 돌을 운치 있게 쌓은 오븐을 가운데에 두고 나무 벤치가 좌우 2단으로 뻗어 있었다. 그 끝에는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통유리로 된 창이 나 있어 탁 트인 뷰를 자랑했다. 사우나가 여러 곳인데 여기를 택한 건 저 뷰 때문이었다.

수아는 한쪽 벤치의 상단으로 올라가 땀이 나무에 묻지 않게 수건을 깔고 알몸으로 엎드려 누웠다. 머리는 문을 등지고 창으로 향해 있었다. 가슴 때문에 편히 엎드리지는 못하고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두 손에 턱을 괴니 시선은 자연스레 창문 밖으로 향했다.

창 밖은 사람이 지나갈 수 없는 깎아지른 비탈이었다. 칠흑처럼 새카만 수풀 아래로 드넓은 강이 펼쳐져 있었다. 검푸른 강물에 거친 붓 터치로 그은 듯한 황금빛이 너울거린다. 성의 불빛이 비친 모습이었다.

“와…….”

한 폭의 유화 같은 풍경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혼자서라도 오길 잘했다. 일주일 내내 사우나 염불을 왼 사람은 엄마였지만 정작 매일 밤 일찍 곯아떨어져버리는 바람에 여태 한 번도 오지 못했다.

오늘도 엄마는 잠깐만 눈을 감는다더니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었다. 수아 혼자 오는 건 썩 내키지 않았지만 마지막 날이라 아쉬운 마음에 용기를 낸 것이었다.

“오길 잘했어.”

으응.

다리를 길게 쭉 뻗자 기분 좋은 신음이 절로 나온다. 뜨끈하게 달아오른 살갗에서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무섭게 증발했다. 노글노글하니 기분은 좋은데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고 있자니 코 안이 따가워졌다.

일어나서 오븐 옆에 놓인 나무 물동이를 들여다보았더니 안이 비어 있었다. 수아는 물동이를 들고 사우나 밖으로 나갔다.

레인 샤워 옆의 수도꼭지에서 찬물을 양동이에 반쯤 찰 때까지 받았다. 수도꼭지를 껐는데 어째서인지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귀를 기울여보니 사우나 구역의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설마 누가 왔나? 이 시간에?’

라운지 벽에 걸린 시계가 12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밖에서는 물보라를 거칠게 일으키는 듯한 소음이 이어졌다.

‘수영장 펌프 소리인가?’

기계처럼 규칙적이라 사람이 내는 소리 같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가 멎더니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수아는 안심하고 사우나로 돌아갔다.

촤륵.

물을 끼얹자 사우나 오븐 위에서 달궈진 검은 돌들이 치이익 끓으며 흰 수증기를 안개처럼 피워 올렸다. 단 세 번 만에 사우나가 김으로 가득 찼다. 코가 촉촉해지는 느낌은 좋았지만 눈에는 난감했다. 시야가 희뿌예지는 바람에 제자리로 돌아가다 넘어질 뻔했으니.

“아무도 없는데, 뭐.”

수아는 결국 벤치에 편히 등을 대고 누웠다. 눈을 감고 나른한 한숨을 내쉬던 찰나였다. 발치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든 수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짙은 안개를 곧게 뻗은 다리가 가르고 들어온다. 증기가 걷히는 순간, 물에 젖은 금발을 쓸어 올리던 다리의 주인과 눈이 마주치고서야 수아는 깨달았다.

이곳에 남자가 한 명 더 있다는 걸 잊었다.

남자의 하체를 가리던 수증기마저 옅어졌다.

수아는 충격적인 윤곽을 저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다 뒤늦게 저도 저 남자처럼 알몸이라는 걸 기억했다.

“앗…….”

미쳤어.

급하게 몸을 일으키고 웅크려 앉았다. 바닥에 깔아둔 수건을 몸에 감는데 손이 파들파들 떨려 헛손질을 몇 번이나 했다. 늑장을 부리는 사이 저 남자가 제 나체를 다 보았을 거라 생각하니 부끄러워 울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수아를 보고 잠시 멈칫하기만 했을 뿐, 아무렇지 않게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Abend.“

„A-Abend.“

짤막한 밤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가 무미건조했다. 저는 태연하게 굴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는 게 수치심에 더욱 불을 지폈다.

그러나 부끄러워하는 건 한국 사람인 수아뿐, 저 남자에게 이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친구들과 작년 여름에 호숫가에 놀러 갔을 때 남녀 할 것 없이 꽤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알몸으로 일광욕을 하는 걸 보았다. 경악하는 수아에게 친구들은 여긴 나체를 보이는 데 거리낌 없는 사람이 꽤 많다는 말을 해주었었다.

남자도 수아의 앞에서 몸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허리에 감은 것도 아니고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펼치더니 수아가 앉은 자리의 바로 아랫단에 깔았다.

‘어째서?’

여자의 눈을 스치듯 보았을 뿐인데 이렇게 묻는 목소리가 필립의 귀에 들리는 듯했다. 반대편이 텅 비어 있는데 굳이 여자의 아래를 택한 건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대편에 누우면 오늘 저녁 식탁에 마주 앉았을 때 그랬듯 그의 시선이 여자에게로 자석처럼 이끌려 갈 게 뻔하다. 그러나 발밑이라면 단차가 있어 굳이 일부러 보려 하지 않는 한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여자를 등진 채 모로 누워 창을 응시하는 필립의 눈빛은 저 밖의 검은 강물만큼이나 거칠게 일렁였다.

내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알몸의 여자와 맞닥뜨린 찰나 그는 의심했다. 이것도 설마 어머니의 짓일까.

얌전히 두고만 볼 리 없다 생각했건만 지난 며칠 어머니의 행각은 그간의 집요함을 초월했다. 그의 일상 곳곳에 덫을 촘촘히 흩뿌려 저 여자와 스치고 엮일 만한 일을 만들어냈다. 어머니의 술수에 이골이 난 필립은 보란 듯이 버티며 단 한 번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건 지는 일을 못 견디는 어머니의 절박한 마지막 시도일까.

이 또한 덫이라면 보란 듯이 버텨야 한다. 그래서 나가지 않았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 그도 지는 일을 못 견뎠다.

나갈까.

수아는 뒤늦게 후회하며 망설이는 중이었다. 당장 나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불편해서 피하는 것처럼 보일까 걱정이었다.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 나갈 적당한 핑계를 찾던 수아의 눈에 벽에 걸린 모래시계가 들어왔다.

이거다.

수아는 15분짜리 모래시계를 거꾸로 돌렸다. 5분이 적힌 눈금까지 모래가 떨어지면 나가야겠다고, 나는 여기 5분만 더 있을 생각이라고, 누가 묻지도 않은 계획을 급조해 홀로 되뇌며 무릎을 두 팔로 꼭 감싸 안았다.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자연히 제 발밑에 누운 남자에게로 눈이 간다. 그럼 조금 전 들었던 물보라 소리는 저 남자가 수영을 하던 소리였을까. 격한 운동을 하다 피가 몰렸는지 어깨와 팔뚝부터 등 근육까지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무용수를 위한 해부학 수업에 써도 좋을 만큼 뚜렷하게 쪼개어지고 불룩 솟은 근육은 제각기 살아 숨 쉬는 생물인 양 불끈거리고 움찔 맥동했다. 수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몰래 감탄했다.

운동을 평소에 얼마나 하는 걸까.

무용을 하다 보니 어깨가 역삼각형으로 딱 벌어지고 몸에 군살 하나 없는 남자는 심심찮게 본다. 몸이 곧 생계의 수단이자 예술 작품이라 온종일 단련에 매달리는 남자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몸을, 아니, 그보다 더 예술 같은 몸을 저 남자가 갖고 있었다.

수아는 제 비루한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운동만 하고 살아도 깡마른 몸에 볼품없이 아슬아슬하게 붙은 근육이 전부인 수아로서는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부러워서. 그래서 실례라는 걸 까맣게 잊고 몸 구경을 하는 것뿐이다. 그런 것뿐이었다.

어깨부터 등허리까지, 땀으로 젖어가는 피부 위에서 시선이 미끄러진다. 조명 탓인지 짙은 구릿빛인 살갗을 굵은 땀 한 방울이 타고 흘렀다. 무심코 따라가던 시선이 허리를 타 넘고서야 수아는 깜짝 놀라 눈을 뗐다.

남자는 수아를 등지고 누운 터라 뒤와 옆은 보여도 앞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야만 하는 각도인데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 보인다. 너무나 선명하고, 크게.

고개를 돌려도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뚜렷하게 도드라지는 크기였다. 멋모를 땐 괜찮았는데 한번 의식하고 나니 자꾸만 그리로 시선이 쏠린다. 눈을 질끈 감았지만 부스럭 소리가 나자 덜컥 겁이 났다.

여기서 설마 날 덮치진 않겠지.

그 예배당처럼 비명을 질러도 아무도 듣지 못할 외딴곳의 완벽한 밀실. 그날처럼 남녀 단둘이.

숨이 턱 막혔다.

수아는 눈을 번쩍 떴다. 잘못 건드리면 터지는 지뢰라도 발밑에 둔 양,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측면만 보이는 얼굴을 살피고 보니 남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게다가 조금 전 봤을 때 분명 페니스의 끝이 포피로 덮여 있었다. 남자가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한심하다, 정수아.

저 남자는 제게 흑심은커녕, 관심조차 전혀 없는데 아무 남자에게나 겁을 집어먹다니. 올리버의 일 때문에 과민해진 게 틀림없었다.

머리는 그렇게 생각해도 마음은 아니었다. 마음만이 아니라 몸도 여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가슴이 쿵쿵 뛰고 발가락이 도망치고 싶어 안달 난 것처럼 곱아든다.

나는 왜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남자 앞에서 이토록 떠는 걸까.

떨림을 일으키는 감정은 크게 두 가지이다. 두려움 혹은 설렘.

그렇다면 저 남자 앞의 나는 어느 쪽일까.

흔들다리 효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인간은 신체 반응에서 자신의 감정을 추측하기 때문에 반응이 같은 감정을 헷갈리기도 한다. 즉, 두려움을 설렘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도 가능하지 않을까? 설렘을 두려움으로 착각하는 것 말이다.

간질간질하다. 붉게 부풀었던 자국은 이미 자취를 감춰 가렵지도 않은 종아리를 수아는 더듬었다.

저 남자가 시킨 건지 그날 야나가 연고를 가져왔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어쩌다 그가 알게 된 건지 궁금할 법도 한데 야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야나가 궁금할 법도 한데 묻지 않았던 게 두 가지나 더 있었다. 저 남자의 셔츠. 그리고 손수건. 야나에게 세탁해서 폰 알브레히트 씨에게 감사하단 말과 함께 돌려달라 부탁했었다.

주인에게로 돌아갔을까.

모래시계는 너무나 더디고 숨은 자꾸만 급해졌다.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다 못해 수아는 머리에 떠오른 의문을 입 밖에 냈다.

“저…… 셔츠랑 손수건은 잘 받으셨죠?”

“네.”

거짓말이다. 버렸으니까.

손수건은 특유의 무늬가 있으니 한눈에 알아볼 수밖에 없다 해도 아무 특징 없는 흰 셔츠 십여 장 중에서 여자가 입었던 것이 유난히 눈에 띄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지독한 세제 냄새 덕분에 저 여자의 체취가 느껴질 리 없는데. 없어야 하는데.

지금도. 자작나무 향이 진동하는 곳에서 여자의 살 냄새가 느껴지는 것만 같다. 속옷 한 장 걸치지 않고 살을 뽀얗게 드러낸 몸이 손 닿는 곳에 있으니 당연할 법도 하다.

사우나에 들어오며 뜻하지 않게 보았던 몸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발레리나다운 길고 가냘픈 팔다리와 발레리나답지 않게 살집이 좋은 가슴과 엉덩이가 손 닿는 곳에 있다.

손 닿는 곳에.

뱀이 또다시 몸을 뒤튼다.

여자를 단숨에 낚아채 쓰러트리고 내 밑에 깔아뭉개버릴까.

모든 게 너무나 순식간이라 여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제 배 속으로 허락도 없이 침범한 뱀이 사납게 들락날락하고서야 알아챌 것이다.

저항해봤자…… 아니, 저항해주면 더 고맙지. 비명도 질러주면 더 좋을 텐데. 순결이 죽어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으로.

젠장할.

저 여자가 없는 곳에서나 하던 상상을 이젠 버젓이 뒤에 두고 한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저 여자를 덮치려던 자와 똑같은 인간 말종이 되는 상상을 한 자신에게 분노했었다. 이젠 분노는커녕 죄책감조차 무뎌진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쉽고, 세 번째는 당연한 일이 된다. 상상이 이렇다면 실전은 더더욱 난이도의 낙차가 클 것이다.

“더는 못 하겠어.”

“네?”

“시간, 다 됐습니다.”

멍하니 앞만 바라보던 수아는 남자의 말에 깜짝 놀라 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 그의 말대로 시계의 모래는 모두 아래로 떨어져 내린 뒤였다. 느닷없이 불룩 솟은 그의 목 빗근부터 등 근육, 그리고 힘이 들어가는 듯 움푹 팬 둔부를 홀린 듯이 구경하느라 15분이 다 가버린 걸 까맣게 몰랐다.

저기선 안 보일 텐데. 어떻게 알았지?

그럼 제가 쳐다보고 있던 것도 설마 알까 싶어 얼굴이 화끈해졌다.

얼른 가자.

여기서 내려가려면 아랫단을 밟고 가야 하는데 사람을 밟고 내려갈 순 없으니 엉덩이 걸음을 하다 남자의 발치에 제 발을 내렸다. 수건을 한 번 더 단단히 여미고 몸을 일으키던 찰나였다.

“앗.”

목에 걸고 있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초커가 풀려 나갔다. 은빛 체인은 가슴골과 배를 타고 미끄러져 내리다 수아의 발목을 한 번 휘감고 나무 벤치로 떨어졌다.

짤랑.

“아, 어쩌지.”

하필이면 벤치의 좁은 틈에 빠졌다. 손가락을 넣어보았지만 거리가 제법 되어 어림도 없었다.

바닥으로 내려가 벤치를 보니 옆면은 바닥부터 한 뼘 정도 트여 있었다. 저기로 손을 넣으면 될 것 같았다.

“앗!”

쪼그려 앉으려다 여며둔 수건이 풀렸다. 벌어지는 앞섶을 다급하게 붙잡으려던 수아의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 뒤로 넘어갔다.

“헉.”

엉덩이가 아파야 하는데 팔뚝이 아프다. 뒤로 넘어가던 몸이 도중에 멈췄다. 고개를 들자마자 언제 몸을 일으켰는지 앉아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손은 수아의 팔을 감아쥐고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으며 벤치를 짚자마자 남자가 손을 뗐다. 수아는 넘어지면서도 놓지 않았던 가슴 앞의 수건 자락을 더욱 세게 쥐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나저나 넘어지는 순간에 잡아주다니. 다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왜 그러죠?”

아닌가.

“선물 주신 목걸이를 떨어트려서…….”

수아의 시선을 따라 벤치 아래의 목걸이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싸늘했다. 휴식을 계속 방해하고 있으니 짜증이 날 만도 하다. 그렇지만 선물받은 걸, 그것도 고가의 주얼리를 선물 준 사람 앞에 버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난감해 입도, 발도 묶여 있는데 남자가 중얼거렸다.

“악취미지. 하필이면 개 목걸이 같은 초커를 주다니.”

“네?”

“저희 직원이 꺼내 내일 떠나시기 전에 전해드릴 겁니다.”

“아, 감사합니다.”

분명 목걸이를 두고 뭐라 한 것 같지만 잘못 들었을지도 모른다. 제대로 들은 거라면 목걸이를 흘려 사람을 귀찮게 한다는, 그런 말이었겠지.

얼른 나가자.

수아는 손자국이 남을 만큼 세게 잡히는 바람에 얼얼한 팔뚝을 문지르며 문으로 향했다.

다들 알브레히트의 젊은 회장이 신사적이라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

수아를 강간당할 위기에서 구해주고 몸을 가릴 옷과 눈물을 닦을 손수건을 주었다. 약속대로 그날 일을 소문내지 않았으며 상처에 바를 약도 보내주었다. 그리고 오늘은 넘어지는 걸 잡아주기까지.

그렇게 도움만 받았으면서 신사적이지 않다고 하면 수아는 염치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예의 바르고 친절한 신사에게서 무례하고 무자비한 짐승의 악취가 난다.

나 왜 이러지?

수아는 저를 탓하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막혔던 숨통이 트였다.

문이 닫히는 순간, 부지불식간에 덫에서 무사히 살아 나온 먹잇감의 등 뒤에선 짐승이 민낯을 드러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사이 강에서 피어오른 밤안개가 포도밭까지 스며들었다. 수아는 드문드문한 불빛에 의지해 귀뚜라미조차 숨죽인 스산한 밤길 위로 발을 재촉했다.

유령이 튀어나올 것 같아.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저벅.

짙은 안개로 뒤덮인 길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수아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지만 상대는 멈추지 않았다.

노란 불빛이 뿌옇게 번진 안개를 헤치고 다가오는 인영이 보이고서야 수아는 뼈저리게 느꼈다. 유령보다 사람이 밤길에 마주치기엔 더 무서운 존재이다.

남자만 아니어라.

그러나 남자보다 더 무서운 것을 마주칠 줄이야.

“……엄마?”

안개 사이로 나타난 건 분노로 눈이 뒤집힌 엄마였다. 수아를 발견하자마자 엄마의 두 눈이 희번덕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라는 건 굳이 말로 확인받지 않아도 경험이 말해주었다.

어차피 일이 터지리라는 건 알았다. 집에 갈 때까지만 참아주길 바랐고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오늘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엄마의 기분은 무척이나 좋아 보였으니까.

그런데 대체 왜, 어쩌다 화가 난 걸까. 자리를 비운 한 시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어, 엄마, 왜…….”

“너 어디 갔었어.”

“잠깐 사우나에…….”

“가면 간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폰도 안 처들고 가고!”

엄마가 손에 들고 있던 수아의 스마트폰을 길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바닥에 귀퉁이가 콱 처박혔다가 튕겨 오른 핸드폰은 잔디밭으로 떨어졌다.

수아는 제 폰을 주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엄마에게서 눈을 떼선 안 된다. 주우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엄마의 손에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갈 게 뻔했다.

도망칠까?

수아는 뒷걸음질 치려다 멈칫했다.

그러다 건물 안에서 잡히면 잠든 사람들을 모두 깨우고 남들 앞에서 얻어맞게 될 것이다. 맞는 건 버텨도 남들의 눈은 못 견딘다. 몸의 상처는 사라져도 마음의 상처는 영원하니까.

그리고 그랬다간 사람들이 경찰을 부를 것이고…….

경찰을 떠올리자마자 중학교 때 경찰서로 끌려갔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엄마가 저번처럼 내게 모든 걸 뒤집어씌워서, 그래서 경찰이 엄마가 아니라 나를 체포하면 어떡하지?

그럴 리 없다는 걸 이성적으로는 모를 수가 없는데, 사고는 깊이 각인된 트라우마의 골을 타고 비이성적인 방향으로만 흘러갔다.

그럼 여기서 조용히 맞고 끝낼래.

맞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다.

결국 남몰래 맞는 길을 택하고 축축한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엄마, 말 안 하고 가서 미안해요. 폰 안 들고 간 것도 잘못했어요.”

엄마는 수아가 전화를 바로 받지 않으면 수십 통을 연이어 걸다 분을 못 이겨 머리채를 잡을 때가 있었다. 다른 이유 없이, 단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이번에도 그런 건 줄로만 알았다.

“야, 정수아. 네가 말 안 한 게 그것뿐이야? 내가 씨발, 쪼잔하게 그딴 걸로 꼭지 돈 줄 알아?”

“……뭔지는 몰라도 제가 잘못했어요.”

“뭔지 모르면서 뭘 잘못했다는 거야?”

트집을 잡으려 작정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트집거리이다. 트집을 잡힐까 입을 다물면 입을 다문 것 또한 트집거리였다. 그래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해도 트집거리이다.

“왜? 거짓말한 게 너무 많아서 뭘 걸린 건지 모르겠다, 이거야?”

“엄마, 악!”

불시에 머리채를 틀어 잡혔다. 번쩍 들린 시야에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던 제 핸드폰이 어느새 엄마의 손에 붙들린 채 들어왔다. 거미줄처럼 금이 간 화면이 켜지며 나타난 건 익숙한 이름들이 적힌 명단이었다.

학교 정기 공연의 출연자 명단.

저게 왜 엄마의 손에, 저게 왜 내 핸드폰에 있지?

“너 뭐랬어. 아직 안 나왔어요?”

명단 위쪽에 적힌 날짜는 학기 마지막 날이었다.

“이년이 이젠 낯빛 하나 안 바꾸고 거짓말을 하네. 이제 네가 왜 맞아야 하는지 알겠어? 이 꽉 깨물어, 이년아.”

“어, 엄마…….”

자비를 비는 수아에게로 살집 두꺼운 손이 자비 없이 날아왔다.

필립은 오른손을 질끈 쥐다 풀었다. 무슨 짓을 해도 감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여자의 잔상이 화상처럼 남은 오른손은 아직도 얼얼했다.

열을 식히러 왔다가 더 끓어오르기만 하다니. 스파 밖으로 나와 눅눅한 안개 속을 걸어도 열이 식지 않는다. 몸속에 붙은 불을 무슨 수로 밖에서 끌까.

처음부터 어리석은 발상이었다.

잠자코 눈이나 감을 것을.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괜한 짓을 하는 바람에 더더욱 뜬눈으로 지새우게 됐다.

어머니의 방으로 가 수면제라도 훔쳐 와야 할까. 그러나 그 마녀는 약이 하나가 빈 걸 못 알아챌 리 없을 테고, 잠 못 든 이유가 빤히 보인다는 눈으로 필립을 꿰뚫어 보며 승자의 비소를 지을 것이다.

우습지. 버텼으니 그가 승자인 것을.

비록 여자가 먼저 나가게 만들었지만, 그 여자도 나가고 싶은 눈치였으며 그가 먼저 도망친 것이 아니니 그는 지지 않았다.

“하.”

필립은 실소했다. 그도 알았다. 이겼다면서 패배자처럼 굴고 있다. 승자라더니 지지 않았다고 슬그머니 말을 고쳐 후퇴한다. 자신이 없었으니.

그는 오른손을 다시 질끈 쥐었다.

몇 시간만.

몇 시간만 더 참으면 날이 밝아올 테고, 여자는 떠난다. 멀리, 그와는 다시 마주칠 일이 없는 곳으로.

그의 빌어먹을 뱀은 먹잇감의 체취가 영영 사라지면 다시 깊은 잠에 빠질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는 완벽한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오직 몇 시간만 더.

주먹 쥔 손을 풀어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수영장과 포도밭을 구분 짓는 담장의 게이트를 지나쳤을 때였다.

짝.

거친 소리가 적막한 정원에 울려 퍼진다. 이건 그에게 너무나 익숙한 소리, 뺨을 치는 소리였다.

“흡…….”

억눌린 울음소리가 뒤따랐다.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짙게 밴 정의감을 따라 몸이 움직였다. 그러나 소리의 주인공들이 짙은 안개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 선천적인 쾌감이 후천적인 정의감을 앞섰다.

돌바닥을 기어 도망치는 여자의 헝클어진 머리를 억센 손이 휘어잡는다. 억눌린 울음만 고집스럽게 흘리던 피에 젖은 입술이 개화하며 고통에 찬 외마디 절규를 터트린다.

“아!”

동시에 필립의 입에서는 탄식이 터졌다. 저 절규의 맛은 꿀처럼 달콤하겠으나 그는 그 맛을 보지 못할 것이다.

여자가 다시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자 우악스러운 손이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힘없이 딸려 간 여자가 비틀거리던 다리에 힘을 싣기도 전에 공중으로 크게 휘둘러진 손이 여자의 머리를 후려치고 지나갔다.

무절제한 구타는 그의 취향이 아니다. 잠시 났던 흥이 깨어졌다.

다행이군.

이제 정의감을 앞세워 눈앞의 상황을 끝낼 수 있다고, 머리는 생각했으나 발은 무언가를 고대하는 사람처럼 그 자리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얻어맞은 여자의 머리와 다리가 동시에 꺾인다. 여자가 털썩 무릎을 꿇는 순간, 모친의 손에 붙들려 있던 블라우스가 투두둑 소리를 내며 찢어졌다.

뽀얀 살덩이가 비키니 브라 밖으로 왈칵 쏟아져 나올 것처럼 출렁였다. 모친이 축구공이라도 차듯이 무자비하게 걷어차려 했다. 여자는 두 팔로 가슴을 가리며 몸을 이리저리 피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여자는 제 모친, 아니, 주인에게로 개처럼 네발로 기어갔다. 반라의 암캐가 제 주인의 발치에 무릎 꿇고 두 손을 비빈다.

울음 섞인 애원의 말이 낯설어 머리로는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몸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국의 주술이라도 되는 양 잘그락, 사슬 뱀이 고개를 바짝 쳐든다. 구갈이 나 말라붙은 목구멍을 거칠게 스치는 듯한 소리가 머릿속을 사특하게 울렸다.

저건 연기가 아닌 현실이야. 네가 바라던 현실이 고작 열 걸음 앞에 있어.

주인을 밀어내고 저 자리를 차지하고파 안달 난 몸이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듯이 불끈거린다.

난 굴복하지 않아.

필립은 사지에 힘을 주고 버텼다. 하지만 의지로도 막을 수 없는 곳이 군침을 흘리며 그의 허리 아래를 질펀하게 적셔갔다.

이건 의지의 한계를 넘어선 자극이다. 야윈 손을 비벼 자비를 비는 순종적인 행위를 따라 무참히 뜯어진 속옷 사이로 젖가슴이 흔들리는 모습은, 모순의 교본이라 할 정도로 도발적이었다.

정작 저 몸뚱이가 말끔히 벌거벗겨진 채 제 앞에 먹기 좋게 차려졌을 때에는 참을 만했던 허기인데. 저 어수선한 꼴에는 사람이라도 잡아먹을 수 있을 것처럼 극한의 허기가 치미는 것이 제 기벽을 아는 필립으로서도 당혹스러웠다.

어차피 그의 충동은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해를 포기한 머리 한구석에서 의문이 간사한 고개를 들어 이성의 숨통을 뱀처럼 콱 물어뜯었다.

저 뽀얀 속살의 끝은 여자의 발갛게 부푼 입술과 같은 빛깔일까. 어느 쪽이든 그에게 빨리고 짓씹히고 뜯기게 되리라.

벼락같은 전율이 배 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그의 몸을 관통한다. 온몸의 세포가 파드드 깨어나 맥동한다. 찰나 그가 아는 절정감에 비할 데 없는 쾌락을 느꼈으나 사정감은 전혀 없었다.

생에 처음 도달해본 드라이 오르가슴이었다.

넘는 것은커녕 찾기조차 어렵다는 쾌락의 관문을 신체적 자극 없이, 오로지 시청각적 자극과 짤막한 상상만으로 단숨에 넘은 것이다.

평생을 억눌렀던 위험한 욕망을 제 손으로 풀어줄 만큼 쾌락은 강렬했다.

저 여자가 완벽하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은 어쩔 수 없는 구제불능이라는 것을 필립은 이쯤에서 인정해야만 했다.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발을 뗐다. 그가 향한 곳은 앞이 아닌 뒤였다. 스파로 돌아가 리셉션 데스크 앞에 선 필립은 무선 전화를 들고 단축 번호를 눌렀다.

“나예요.”

전화를 받은 보안실 담당자에게 그는 지시했다.

“경찰을 부르세요.”

잘그락.

배 속에 도사린 사슬 뱀이 요동친다.

더는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

경찰이 왔다는 야나의 보고에 잉그리드는 짤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가 뒤로 넘어가며 샹들리에 귀걸이에 매달린 다이아몬드들이 짤랑, 부딪치는 소리는 노예들이 눈치를 보며 주인을 따라 웃는 소리를 연상케 했다.

잠옷 차림이어야 할 시각에 그녀는 저녁 파티 때와 다름없이 이브닝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그야 휴가의 대미를 장식해줄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당신은 무대에서 직접 뛰는 연기자보다는 무대를 꾸미는 각본가와 연출가가 적성에 맞을 텐데 왜 발레리나가 되었는지.” 

언젠가 필립이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비난 섞인 비아냥거림이었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신이 내기에서 이기기를 잉그리드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리는 없었다. 야나를 시켜 그 여자의 뒷조사를 했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여자의 모친이 올해 초 딸이 학교 공연에서 배역을 받지 못하자 교수를 찾아갔었다니.

그 순간부터 극의 얼개가 잡히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네가 다니는 곳은 학기마다 공연이 있지 않니? 돌아가면 공연 준비로 바쁘겠구나.” 

그 모녀만 따로 부른 자리에서 물었더니 여자가 사색이 되었다. 좋은 조짐이었다.

“꼭 오시라고, 지젤은, 지젤은…….” 

여자는 제 모친이 한 말을 통역하다 끝을 얼버무렸다.

“아무튼 시간 되시면 꼭 와주세요.” 

무슨 말을 하려다 만 건지는 모친의 자신만만한 얼굴과 여자의 주눅 든 표정만 봐도 뻔했다. 모친은 제 딸이 이번엔 지젤일 것이라고 했을 테고, 이미 결과를 아는 여자는 차마 그 말 그대로 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직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군.’

군무 무용수인 걸 들키면 큰일이 나는 모양이지.

잉그리드가 원하는 바로 그 일 말이다.

야나를 시켜 만하임 음대 무용과의 다음 정기 공연 명단을 얻어내는 건 전화 한 통이면 되는 일이었다. 학교 메일을 가장한 익명의 메일 주소로 그 파일을 여자에게 보내는 것도 잉그리드는 시키기만 하면 끝이니 어려울 것 없었다.

그러나 기다림은 어려웠으니.

하루도 잉그리드에겐 길었다. 딸을 밀착 감시하는 여자라면 딸의 핸드폰도 뒤지게 마련인데 오늘 밤까지도 아무런 일이 없었다.

내일 아침이면 저들은 떠난다. 기다리며 요행을 바라는 불확실한 일 따위 잉그리드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결국 야나를 그 여자가 머무는 방으로 보냈다. 내일 떠나는 일정을 메일로 보냈는데 확인 부탁한다는 헛소리를 막 잠에서 깬 듯한 여자의 모친에게 시키는 대로 했단다. 야나처럼 멍청한 그 꼭두각시도 시키는 대로 딸의 핸드폰에서 메일을 뒤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눈에서 잠기운이 싹 달아났다는 것이다.

야나가 돌아와 그 여자가 딸을 찾다 스파로 향하더라고 보고하자 잉그리드는 서관과 스파 사이의 길을 내려다보는 방 창가에서 기다렸다. 창문을 조금 열어둔 채.

그렇게, 무대의 막이 오르는 시끌벅적한 소리부터 잉그리드는 로열석에서 감상했다.

오랜만에 심장이 뛴다. 혈관을 타고 희열이 손끝부터 발끝까지 몸을 저릿하게 감돈다.

드디어 극이 시작됐군.

경찰과 직원들이 뒤섞여 어수선한 스파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잉그리드는 필립부터 찾았다. 예상대로 그녀의 아들은 바디 타월을 몸에 두르고 머리는 산발을 한 채 소파에 겁먹은 쥐새끼처럼 웅크려 앉은 여자의 곁에 있었다.

또각.

부러 큰 소리를 내며 다가가자 필립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을 옭아맨 찰나 잉그리드는 눈으로 말했다.

‘경배하렴, 이 내기의…….’

승자의 미소를 지으려 했으나 선수를 빼앗겼다. 감히 패배자가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폰 알브레히트 씨, 찾아왔습니다.”

스파 안에서 나온 남자 직원이 필립에게 건넨 건 여자가 사우나에 떨어트렸던 초커였다. 원래는 저 개 목걸이를 버리고 예의상 다른 것을 주고 말 생각이었으나 마음이 바뀌었다.

개 목걸이를 받았다. 이번엔 제 손으로 여자의 목에 채울 생각을 하는데 경찰관이 다가와 여자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저 여자가 프라우 정의 어머니이고 폭력을 행사한 것이 맞습니까?”

경찰이 온 후로 줄곧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던 여자가 드디어 얼굴을 들었다. 입술이 터지고 뺨이 퉁퉁 부은 꼴을 마침내 본 경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여자의 시선은 경찰이 아닌, 로비 반대편에 앉아 있는 제 모친에게 있었다.

여자의 모친은 조금 전의 광기는 어디로 갔는지 새파랗게 질려 울먹이며 떨고 있었다.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기가 팍 꺾인 꼴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쪽이 피해자인 줄 알 것이다.

“프라우 정?”

경찰이 대답 없는 여자에게 재차 물었다. 경찰은 목격자인 필립에게서 상황을 모두 전해 듣고 야나가 방에서 가져온 두 사람의 여권에서 신원과 체류 자격까지 확인했다.

“저 여자가 프라우 정을 때린 것이 맞습니까?”

그러니 경찰서로 가기 전, 피해자 본인에게 확인차 하는 의례적인 질문일 뿐인데 여자는…….

“아뇨.”

뻔한 거짓말로 필립의 허를 찔렀다.

“엄마는 아무 짓도 하지 아, 않았어요.”

“그럼 프라우 정의 얼굴이 이렇게 된 것과 옷이 찢어진 건…….”

“제, 제가 호, 혼자 넘어져서 다친, 거예요.”

아무도 속지 않을 거짓말을 여자는 어떻게든 그럴싸하게 만들 궁리를 하는지 눈을 좌우로 굴리다 줄줄이 덧붙였다.

“아, 안개가 너무 짙어서, 앞이 잘 안 보여서 그랬어요. 엄마는 저를 찾으러 온 것뿐이었고…….”

경찰은 현장을 보지 못했으니 목격자와 본인의 증언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 본인이 계속해서 아니라고 우기면 아무리 경찰이라도 가해자를 체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일단 어머님을 풀어는 드리는데…….”

경찰이 재킷 안에서 명함 한 장과 작은 브로슈어를 꺼내 수아에게 내밀었다. 가정 폭력 상담 안내 책자였다.

“마음이 바뀌면 이쪽으로 연락 주세요.”

“네.”

필요 없다는 고집을 부리며 여전히 무서운 경찰 앞에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얼른 이 자리를 뜰 생각만 하며 떨리는 손으로 종이 쪼가리 두 개를 받아 일어서는데 제 옆에 앉아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수아는 혼란스럽고 수치스러운 와중에도 남자가 유난히 다정하다 느꼈다. 유난히 가깝고 유난히 스스럼없고. 그래서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그 불길하리만치 따뜻한 남자는 온데간데없었다. 맹렬한 비난을 담은 싸늘한 눈빛이 제게 꽂히자 수아는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증인이 있으니 제가 도리어 가해자로 몰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엄마의 체포를 막는 이유는…….

‘엄마를 결국 내 손으로 꺼내줘야 할 테니까.’

저 남자에겐 신고가 끝이지만 수아에겐 시작이다. 저 남자에게 엄마는 다신 안 볼 남이었다. 그러나 수아에게 엄마는 가족, 그것도 싫든 좋든 평생 보고 살아야 하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다. 법도, 사회도 가족이란 울타리는 선뜻 넘지 못하고 주춤한다. 그러니 엄마는 어떤 처벌을 받든 수아에게 되돌아온다. 그때 수아는 지금보다 더 심한 보복을 당할 게 뻔했다.

당신은 이게 옳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겐 아냐. 나를 비난하지 마.

그러나 필립은 옳은 일을 하고자 경찰을 부른 것이 아니었다.

“전화 한 번이면 아주 손쉽게 주인을 바꿀 수 있어.” 

어머니의 제안대로, 여자의 소유권을 적법하고 자연스럽게 넘겨받을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개의 기질을 타고난 여자의 충성심은 놀라울 정도였다.

개는 저를 잡아먹으려는 주인에게도 꼬리를 흔든다더니.

아직도 지배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아니면 좀 더 복잡하고도 위험하지만 아주 확실한 방법도 있지.” 

그 순간 마주친 어머니의 눈이 말했다.

방법은 주인을 잡아먹어 없애는 것뿐이다.

***

“가해자와 피해자를 같은 방에 둘 수는 없다고 하시네요.”

폰 알브레히트가에서 그랬단다.

단 하룻밤이지만 방을 따로 주겠다는 야나의 말에 수아는 토 달지 않고 옆방으로 옮겼다.

“필요할 거예요.”

남의 집에서 분란을 일으킨 게 죄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데 야나가 따뜻한 차와 알약 두 개를 내밀었다.

“오늘 일은 잊고 푹 자도록 해요.”

잘 기분이 들 리가. 창피스러워서 바로 여길 떠나고 싶지만 밖은 깜깜했으며 이 외딴 성은 차도 없는 수아가 떠나고 싶다고 떠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저 건네주는 걸 얌전히 입에 털어 넣고 침대에 누웠다.

달칵.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언제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을까. 유리창을 세차게 때리는 비바람 소리가 을씨년스러웠다.

그러나 수아가 잠에서 깬 건 비 때문이 아니었다.

“이젠 돌이킬 수 없어. 난 내 욕망에 굴복했으니까. 너 때문에. 그러니 네가 이제 내게 굴복할 차례야.”

낯선 속삭임이 들려온다.

‘누구지?’

같은 순간, 다리 사이에선 낯선 손이 느껴졌다.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어 와 맨살을 쓸어 올리고 내리는 손길이 소름 끼쳤다. 발목을 잡아 다리를 더욱 벌리는 손에서는 정체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배꼽 아래를 문지르던 손이 불시에 하의 속으로 파고든다.

시, 싫어. 만지지 마.

살 틈에 파묻힌 손가락이 까딱, 어딘가를 때리고 움찔, 몸이 반사적으로 튀어 오르는 순간.

“하아.”

뜨겁고 거친 숨이 수아의 목덜미로 쏟아졌다. 성적으로 흥분한 남자의 숨소리라는 건 경험이 없어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수아는 더더욱 겁에 질려갔다.

‘누구야? 하지 마!’

가위에 눌리기라도 한 걸까. 목소리를 쥐어짜보아도 나오지 않았다. 저도 만져본 적 없는 곳을 제 것처럼 벌리고 더듬어대는 손을 떼어내고 싶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누군지 보고 싶어 눈을 뜨려 해도 무거운 눈꺼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열리지 않는 입술을 힘주어 달싹이는데 낯선 것이 입을 틀어막았다. 말랑하고 도톰하며 끈적한 그 무언가가 입술이라는 건 입을 강제로 벌리고 밀려들어온 혀 덕분에 알았다.

“읍…….”

비릿한 쇠 맛이 난다. 아래를 헤집는 손만큼이나 배려 없는 마찰에 겨우 붙었던 입가가 다시 찢어진 것이다.

역해.

남자에게도 역할 텐데 그는 도리어 기껍다는 듯이 상처를 빨아댔다.

“흡!”

입술만이 아니라 몸도 포개어진다. 가슴을 무자비하게 짓누르는 무게에 폐가 쪼그라들고 두꺼운 혀가 뱀처럼 들락거리며 목구멍을 틀어막는다. 좀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끅…….”

숨이 막히다 못해 넘어갈 즈음이 되어서야 정체 모를 남자는 수아를 놓아주었다. 그러고도 아쉽다는 듯이 피 맺힌 입가를 지분거리고 핥아대는 혀는 집요했다.

“이게 네 첫 키스야.”

욕망의 농도가 짙은 속삭임이 귓속으로 끈적하게 파고들었다.

“강제로 빼앗긴 기분이 어떻지?”

싫어.

말 대신 밭은 숨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갔다.

“여기도 처음인가?”

팬티 속에 아직도 파묻혀 있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남자는 더욱 깊숙이 파고들더니 무언가를 찾듯이 다리 사이를 더듬어대다 어딘가를 두 손가락으로 활짝 벌렸다. 두 손끝이 둥글게 덧그리는 곳은 질구였다.

“여기도 곧 입술처럼 억지로 벌려야 할 거야.”

싫어.

다리를 오므리고 싶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정말 가위에 눌린 걸까.

“흣…….”

꿈쩍도 않던 몸은 손가락 끝이 연약한 살 틈을 가르고 박혔을 때에야 들썩거리며 움직였다. 몸이 제 몸이 아닌 것 같아 배신감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파.

아무것도 들인 적 없는 곳을 낯선 것이 쑤석인다. 그럴 때마다 느껴본 적 없어 무엇인지 모를 감각이 찌르르하게 내달리며 아랫배까지 뻐근해져왔다. 얕은 자극이 일으킨 파문은 깊었다.

질컥, 젖은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못 견디게 두렵다. 남자는 다른 의미로 못 견디겠는지 억눌린 신음이 그의 가슴 깊은 곳을 울리다 맞닿은 수아의 가슴까지 퍼졌다.

싫어. 싫어.

이러다 다른 걸 넣을 거야.

눈물이 터지려 할 즈음에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이 자리에 이제 다른 걸 넣으려는 걸까.

겁에 질려 굳은 수아에게서 남자가 멀어졌다.

그러나 수아에게로 파고든 건 남자의 몸이 아니라 굵은 목소리였다.

“첫 키스도, 첫 섹스도 네가 원하던 것과 다르겠지. 이제 네 인생에서 그 어떤 것도 네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오늘부터 네 주인은 나니까.”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이어진다.

“그러니 다음번엔 내게 무릎을 꿇어야 할 거야. 그즈음엔…….”

끈적한 손이 입술의 찢어진 상처를 더듬는다. 손길에서 분노가 느껴졌으나 무자비한 것으로 보아 수아의 고통에 공감해 분노한 것 같지는 않았다.

“타인의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내 것만 남겠지.”

“흣…….”

불시에 축축한 살이 포개어진다. 손만큼이나 무자비한 입술이 찢어진 입꼬리를 빨아 당기고 짓뭉개다 떨어져 나갔다. 그 자리가 불에 달군 인두로 낙인이라도 찍은 것처럼 화끈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끈적한 손이 이번엔 목에 감겼다.

“너도 죽이고 싶어.”

“끅…….”

손이 조여든다. 남자는 고작 손 하나로 수아의 목을 부러트릴 듯 쥐고 졸랐다.

살려줘.

죽을 위기에도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는 손발은 시트를 긁는 게 전부였다. 끅끅, 숨넘어가는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며 의식을 잃어가는 사이 남자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이어갔다.

“너만 없었어도. 너만 없었어도 내 완벽한 세상에 너 같은 오점을 만드는 일은 없었을 거야. 너와 더럽게 시작했으니 더럽게 끝날 거란 예감이 벌써 들어. 그러니까, 언젠간, 이렇게.”

“끄윽…….”

결국 시트를 긁던 손이 축 늘어질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지고서야 가느다란 목을 꺾을 듯 조르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날까진, 좋은 꿈 꿔.”

악몽이 좋은 꿈을 꾸라는 말을 하기 무섭게 수아는 다시 죽음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짧은 찰나, 방 밖에서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은 것도 같았다.

***

수아는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어젯밤보다 울긋불긋, 울퉁불퉁 엉망이었다.

원래 맞은 날보다 다음 날이 부기와 멍이 더 심해진다. 없던 상처가 드러나는 것도 늘 있는 일이었다. 그저 찢어지기만 했을 뿐이었던 입 가장자리는 그 주변의 살갗까지 핏줄이 터졌는지 검붉은 멍이 엄지 끝만 하게 들어 있었다.

이 더운 날, 수아는 파운데이션을 얼굴 곳곳에 두껍게 발라 상처를 숨겼다. 목에 선명하게 남은 엄마의 손자국은 진한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아 핸드백 손잡이에 감아둔 스카프를 풀어 목에 둘러야 했다.

멍은 가려도 피딱지와 부기는 방법이 없다. 그저 남의 호기심과 걱정 어린 시선이라도 제 눈에 들어오지 말라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서 짐을 챙겼다.

챙길 것도 사실 없었다. 어젯밤에 따로 방을 얻어 나오며 챙긴 걸 거의 꺼내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니 여기서 제 물건을 잃어버렸을 리도 없는데 수아는 온 가구 밑을 샅샅이 뒤졌다.

“어디 갔지?”

성에서 준 손님용 슬리퍼 한 짝이 안 보인다. 이런 건 없어져도 상관없겠지만 수아는 빌린 물건을 무조건 되돌려줘야만 했다. 호텔에 가면 가져가선 안 되는 것도 훔쳐 오는 엄마 때문에 생긴 일종의 강박증이었다.

결국 찾지 못하고 찝찝한 마음으로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갔더니 1층 로비에는 이미 야나와 일행들이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안개가 심해서 비행기가 뜰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공항은 사정이 나을 거예요. 취소되진 않았죠?”

그 속에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습관대로 약속에 늦겠거니 생각했다.

약속 시각이 다 되어서도 엄마가 나타나지 않자 초조해졌다. 이건 조금 늦게 시작해도 큰일 날 것 없는 투어가 아니다. 엄마 때문에 모두가 늦어 집으로 가는 비행기를 놓치는 건 큰일이었다.

그러니 늦는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고 출발해버릴 것이다. 그렇게 엄마와 여기 단둘이 남겨지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수아는 창피스러운 걸 참고 야나에게 물었다.

“저희 엄마 혹시 못 보셨나요?”

야나는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아직 방에 있는 건가.

수아는 계단 위를 올려다보며 초조히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럼 제가 한번 가보고 올게요.”

엄마를 마주하기 껄끄러운 수아의 마음을 야나가 고맙게도 눈치채고 먼저 나서주었다. 그런데 잠시 후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안 계시는데요?”

“네?”

그제야 올라가보았더니 방은 야나의 말대로 비어 있었다.

말도 없이 사라지다니.

쫓아와서 빌라고 혼자 짐을 싸서 가버린 건가 싶었다. 엄마라면 그렇게 수아를 곤란하게 만들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엄마의 짐은 그대로였다. 심지어 사람이 들었다가 난 자국이 선명한 침대 옆 협탁에 핸드폰도 놓여 있었다.

거의 빈 와인 병과 바닥에 레드와인이 말라붙어 있는 와인 잔과 나란히.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어제 일로 충격을 받은 엄마가 홧김에, 술김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건 아닐까.

“엄마.”

창문으로 달려가 밑을 내려다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수색은 곧 성 전체로 확대됐다.

대체 어딨는 거야?

모두가 떠나고, 함께 떠나야 했을 수아는 성에 여전히 발이 묶인 채 홀로 덩그러니 남았다. 초조히 창가를 서성이는데 다른 방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이어 청소기 소음이 들려왔다. 메이드들이 손님방을 청소하며 나누는 잡담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방을 비워줘야 하는데.

수아는 엄마의 짐을 가방에 쓸어 넣다시피 챙겨 얼른 나와버렸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짐에서 엄마가 훔친 찻잔은 뺐다. 메이드들의 시선을 피해가며 1층 로비로 내려가던 수아는 멈칫했다. 폰 알브레히트가의 두 모자가 로비 소파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아, 저깄었군.”

수아와 눈이 마주친 잉그리드가 찻잔을 커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어쩔 수 없이 다가가는 수아의 어깨가 갈수록 움츠러들었다.

여긴 손님용 구역이다. 이런 곳에 집주인이 있다는 건 손님 때문인데, 달리 말하면 엄마가 사라져서 여기 와 있는 것이다. 이 두 사람도 오늘 손님들과 함께 공항으로 가 집이 있는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려다가 수아와 엄마 때문에 발이 묶였다.

“앉으렴. 짐은 직원을 시켜 차에 실을 테니 거기 두고.”

잉그리드가 가리킨 자리는 하필 남자의 옆자리였다. 수아는 시키는 대로 같은 소파에 앉되 반대편 끝에 붙었다.

어젯밤 꿈에 나온 남자, 저 남자 같았어.

그런 꿈을 꾸고 가까이 앉자니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 직원들이 곧 어머니를 찾아올 테니 너무 걱정 말렴.”

“네, 감사합니다.”

잉그리드가 다시 찻잔을 들고, 남자는 수아에게 잠시 눈인사를 하곤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으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일하는 중인 듯했다.

바쁠 텐데 우리 때문에…….

더더욱 면목 없어진 수아는 두 사람에게 사과했다.

“어젯밤부터 폐를 끼쳐 정말 죄송합니다.”

“전혀.”

잉그리드는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으나 남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때마침 식당에서 나온 웨이터를 부르길래 노골적인 무시인가 했지만 그는 수아에게 마실 걸 가져다주라는 지시를 웨이터에게 내렸다.

어제 저 남자가 부른 경찰을 거짓말로 돌려보내 화가 난 줄 알았는데. 아닌가.

그전의 다소 과하게 가까웠던 태도는 자취를 감추었다. 원래의 절제된 매너를 보이곤 다시 태블릿 화면으로 시선을 내린 남자를 수아는 도둑처럼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직원들에게 맡기고 떠나도 됐을 텐데 주인이라 함께 남아 있어주나 보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감사하면서도 미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맞는 꼴을 들킨 것도 모자라 엄마의 심술 때문에 여기 사람들을 또 곤란하게 만들다니. 얼굴을 들 수가 없어 고개를 푹 숙이고 웨이터가 가져온 차를 마시는 척했다.

그래, 이건 엄마의 심술이다. 설마 자살은 안 하겠지.

엄마가 자살 협박은 종종 하지만 실천으로 옮긴 적은 없었다. 그건 다 관심을 끌거나 수아를 입맛대로 조종하기 위한 쇼였고, 그러니까 지금도 쇼일 것이다.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어린아이도 남의 집에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지는 않겠다. 마흔도 넘은 어른이면서 제 분을 못 이겨 타인의 일상을 휘젓는 짓은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 어제 그 일로 충분하잖아. 경찰은 내가 부른 게 아니었단 말이야. 내가 참고 살아줬으면 그쯤에서 엄마도 고집을 꺾어주면 안 돼?

지긋지긋해.

차라리 ‘그래, 이번엔 죽어버렸으면’ 하는 못되고 극단적인 바람까지 생각이 치닫던 찰나였다. 1층 로비로 보안 요원이 뛰어 들어오더니 수아를 발견하곤 멈칫했다.

기껏 사람을 찾아놓고 망설일 이유라도 있는 건가.

훨씬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수아의 심장이 뜀박질을 시작했다.

“저…….”

“……네?”

“와서 확인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뭘?

도저히 묻지 못하고 보안 요원을 순순히 따라나섰다. 밖으로 나가 성을 한참이나 빙 둘러 걷고서야 요원의 발이 어느 난간 앞에서 멈추었다. 수백 년 전, 백작의 정부가 몸을 던졌다는 절벽 위였다.

그 자리엔 이미 다른 보안 요원과 직원들 서넛이 모여 있었다. 날씨만큼이나 흐린 눈빛으로 수아를 바라보는 그들이 한 걸음씩 물러서자 바닥에 덩그러니 엎어져 있는 슬리퍼 한 짝이 보였다.

자연히 그 뒤의 난간으로 수아의 새파랗게 질린 시선이 향했다. 끔찍한 상상이, 혹은 못된 바람이 현실이 되려 한다. 어떤 감정을 느껴야 옳은지 모르는 가운데, 오로지 공포만은 뚜렷하고도, 떳떳했다.

보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보고 싶어. 그렇지만 보고 싶지 않아.

한 걸음씩 무언가에 떠밀리듯 내디디고 한 걸음씩 그 무언가에 저항하듯 멈춰 서다 어느새 난간에 다다랐다. 기다리는 시선이 느껴져 뒷덜미가 따갑다. 절벽 아래가 아닌 먼 강기슭만 한참 바라보던 수아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켜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러나 발아래는 허무할 정도로 희뿌옇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당황한 찰나 유령처럼 도사린 물안개가 휘몰아치는 격랑에 밀려났다. 동시에 수아의 폐부가 쪼그라들며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피와 강물에 푹 절어 괴상하게 꺾인 채 절벽의 돌출부에 걸린 건…….

“엄마……?”

혹은 엄마였던 몸뚱이였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굳은 어깨에 감기는 지나치게 다정한 손 또한, 아득했다.

***

엄마는 죽지 않았다.

엄마가 죽었다는 말처럼 죽지 않았다는 말에도 수아는 어떤 감정을 느껴야 옳은지 몰랐다.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안도했다는 건 인정한다. 우습게도.

그래도 유일한 가족이라고.

그러나 그 말에 응당 담겨야 할 가족애는 없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지는 건 무섭다. 아이의 티를 채 벗어내지 못한 수아에겐 어른이 필요한 것뿐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상태로 엄마는 내게 필요한 어른일 수 있을까. 살아 있다고 할 수는 있을까.

절벽의 돌출부에 머리를 부딪힌 게 원인인 뇌출혈과 두개골 및 경추 골절, 그로 인한 혼수상태이며 전신 마비 또한 확실시된다는 게 담당 의사의 진단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거의 모두가 자살 미수라고 단정했다. 난간이 엄마의 키에는 높은 편이라 미끄러지거나 중심을 잃어서 넘는 건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자기 의지로 넘어야만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수아는 자살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건 실족이다.

발을 헛디뎌 가슴까지 오는 난간을 넘는다는 건 말이 안 되지만 엄마라는 사람이 자살을 한다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수아는 엄마를 안다. 진짜 죽을 위인은 못 되고, 머리 좋은 사람도 못 되었다. 그러니 엄마의 어리석은 객기가 결국 사고로 이어진 것이다.

타살 미수는 처음부터 의심해보지도 않았다. 그날 밤 로젠탈 성에 있던 사람 중에서 대체 누가 엄마를 죽이고 싶어 할까. 잘 알지 못하니 죽이고 싶을 만큼의 원한이 있을 리 없는데.

엄마를 죽일 동기가 있는 사람은 수아뿐이었다.

그게 수아를 유일하고도 유력한 용의자로 만들었다. 자살도, 실족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담당 수사관의 책상 앞에 앉은 수아는 죄지은 사람처럼 불안한 눈을 좌우로 굴렸다. 개방된 사무실에 경찰들이 끊임없이 들락날락하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와 전화벨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린다.

TV에서처럼 어두컴컴하고 폐쇄된 취조실도 아니고 조사 분위기도 위압적이지 않은데, 수아는 저 홀로 기가 눌려 있었다. 그 옛날, 경찰서에 끌려갔을 때의 기억과 다르지 않아서.

“아, 제 질문은 그런 뜻이 아니라…….”

“네?”

심장 소리가 쿵쿵, 시끄러워 수사관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간단한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하거나 다시 물은 게 벌써 세 번째였다.

수사관이 마시라고 준 음료는 입에 대지도 못했다. 손이 너무 떨린 탓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사버린 의심만 키울 것이다. 수아는 두 손을 꼭 쥐어 책상 아래에 숨겼다.

“그날 침실을 청소했던 메이드의 증언에 따르면…….”

책상 너머에 앉은 수사관은 슬퍼 보이지 않는 수아의 태도를 미심쩍어했다. 수아는 그저 제게 닥친 일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한 것뿐이었다.

언젠가 슬퍼지는 때가 오겠지만 그렇더라도 엄마에게 닥친 비극이 아니라 제게 닥친 비극을 슬퍼할 게 뻔하다. 하지만 경찰에겐 무엇을 슬퍼하느냐가 아니라 보통의 인간처럼 슬퍼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럼 슬퍼하는 연기라도 할 걸 그랬다. 잘할 수 있는데 경황이 없어 멍청하게 타이밍을 놓쳤다.

“수색이 진행되는 사이에 프라우 정이 혼자 침실에 남아 있다가 어머니의 짐을 챙겼다더군요.”

범죄 현장일지도 모르는 침실에서 증거품일지도 모를 물건들을 치워버린 사람 또한 수아였다.

“그건, 그냥…… 청소를 해야 하는데, 방을 비워줘야 하는데…….”

경찰 앞이라 더더욱 당황한 수아의 입에서 횡설수설, 말이 두서없이 쏟아져 나왔다. 의심을 살 걸 아는데 진정이 안 된다.

“그땐 엄마가 그냥 제게 화가 나서…….”

골탕 먹이려고 숨은 건 줄 알고 짐을 치웠어요. 골탕 먹이다. 숨었다. 그 말을 독어로 어떻게 하지? 한참을 더듬대다 겨우 핸드폰을 꺼내 번역 앱을 열었다. 자꾸만 오타가 나서 지웠다 다시 쓰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있자니 저를 빤히 바라보는 수사관의 눈빛이 더더욱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진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찰나였다.

“제가 좀 늦었군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리더니 명함 한 장을 쥔 손이 수아의 옆을 불쑥 지나 책상 너머에 앉은 수사관에게로 향했다. 경찰은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명함을 받아 읽어보더니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대체 뭐라고 쓰여 있길래.

그 답은 남자가 꺼낸 말에 있었다.

“프라우 정의 변호를 맡은 슐츠라고 합니다.”

수사관에게 볼일이 있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제 변호사란다.

이번엔 수아가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난 선임한 적 없는데. 그럴 돈이 없으니까.

제 변호사라고 주장하는 낯선 남자가 의자를 끌고 와 수아의 옆에 앉았다. 변호사를 멍하니 바라보다 그 너머 창가에 선 남다른 체구의 인영으로 초점이 옮겨갔다. 블라인드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을 등지고 선 남자를 알아본 수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필립 폰 알브레히트.

그 남자가 여기 있다.

왜? 잠깐, 이 변호사는 그럼……. 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남자가 딱딱하던 표정을 잠시 느슨히 풀곤 수아에게 눈인사를 한 순간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떨림이 두려움의 표현이었다면 이번은 명백하게 다른 의미였다.

대체 내게 왜 이렇게까지…….

전혀 기대치 않았던 도움이다. 부탁한 적은 전혀 없으며 조사받으러 간다고 말한 적도 없었다. 성에서 경찰서까지 가는 차편을 빌리려고 야나에게 말한 기억은 있지만 저 남자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으면 모를 일이었다.

그럼 굳이 알려고 한 건가? 왜?

“계속하시죠.”

변호사가 수사관에게 말을 건네고서야 정신이 든 수아는 남자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남자의 시선은 이미 한참 전에 수사관에게로 가버렸는데 혼자서 눈을 못 떼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 흠……. 어디까지 했더라.”

수사관은 창가에 팔짱을 끼고 서서 지켜보는 남자가 알브레히트의 회장이라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참고인 조사를 진행하며 만났었을 테니. 부유한 후원자가 가난한 외국인 발레리나를 위해 변호사를 사 온 게 저 사람에게도 꽤나 놀라운지 멍하니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수사관은 뒤늦게 모니터를 훑어보았다.

“그날 밤부터 아침까지 혼자였습니까?”

조금 전과 다른 질문을 하는 걸 보니 무슨 질문을 하던 중이었는지를 까먹은 모양이었다. 변호사가 대답해도 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제 편을 들어줄 사람이 옆에 있으니 그래도 마음이 놓여 막혔던 말문이 트였다.

“저는 그날 밤에 다른 방으로 옮기자마자 잠들었어요. 일어났을 땐 이미 아침이었고요.”

“자는 데 어머니가 찾아왔다거나…….”

수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거나…….”

그제야 문득 떠올렸다. 그날 밤 방 밖에서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꼭 옆방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하지만 그건 꿈이었어.

꿈이 아니면 말이 안 된다. 병원 일부터 경찰 수사, 그리고 수아가 그사이 머물 곳까지 두루 편의를 봐주고 변호사까지 구해준 선한 남자가 저를 죽이려 했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날 밤 사우나에서 알몸으로 마주쳤고, 저 남자에게서 비난의 눈빛을 받았으며, 엄마에게선 폭행을 당하고 목을 졸렸다. 그 모든 게 뒤죽박죽 뒤섞여 저질스럽고 폭력적인 꿈이 된 것뿐이었다.

아무것도 들은 게 없다고 고개를 저으며 화끈 달아오른 뒷덜미를 손으로 가렸다. 수아가 입을 다물자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프라우 신이 그날 밤에 술을 마셨고 체내에서는 수면제 성분도 검출되었다죠?”

처음 듣는 이야기에 수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저희 엄마는 그런 건 안 먹는데요.”

수사관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어머니의 화장품 파우치에 있던데요. 몰랐습니까?”

전혀.

같은 방을 썼는데, 여태 같이 살았는데 엄마의 파우치에 모르는 약이 들어 있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술과 함께 복용하면 효과가 증폭되고 충동을 억제하기 어렵게 만들어 자살 충동까지 일으키는 부작용으로 유명한 성분이더군요.”

변호사가 자살로 몰아가는 가운데 수아는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타살…….”

“타살이라면 난간 너머로 프라우 신을 밀어뜨리거나 던졌다는 건데 상대적으로 몸집이 왜소하고 체중이 적은 프라우 정이 그러는 건 불가능해 보이지 않습니까.”

변호사가 멍하니 책상을 내려다보는 수아를 눈짓했다. 한눈에 봐도 체격 차이가 극명하지 않냐는 뜻이었다.

“혹시 여기론 접근 가능합니까?”

수사관이 모니터를 돌리더니 사진 하나를 보여주었다. 절벽 아래에서 위를 보며 찍은 구도의 한가운데에는 축대에 난 외딴 문이 있었다. 수아가 저기에서 엄마를 밀어 떨어트렸을 가능성을 생각하는 듯했다.

답을 알 리 없는 변호사가 시선을 던지자 창가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사진을 보더니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이 문은 상시 폐쇄되어 있습니다.”

“누가 그날 열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보안실에 있는 열쇠로만 열립니다. 아무나 접근할 수도 없고요.”

“흠…….”

“무슨 가능성을 떠올리신 건지는 알겠지만, 아닐 겁니다. 여긴 와인 셀러를 지나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창고와 감옥을 지나야만 접근할 수 있습니다. 미로 같은 곳입니다. 손님들이 길을 알 리가 없죠.”

“그럼 난간뿐인 건가……. 일단 보안실에 확인을 해봐야겠군요.”

용의자인 저를 빼고 세 남자가 갑론을박을 펼치는 사이 수아는 이미 화제에서 밀려난 이야기만 곱씹었다.

이상해. 뭔가 이상해.

엄마는 이혼 직후에 불면증과 우울증을 앓았었다. 주변에서 정신과에 가서 상담이라도 받아보라 하면 엄마는 자기를 정신병자로 모는 거냐고 길길이 날뛰었었다.

그런 엄마가 정신과 약을 먹었다?

어쩌면 자존심이 상해 몰래 먹었을 수도 있지만 그 자존심 때문에 정신과 약에는 처음부터 손도 안 댈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엄마는 현재 불면증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친 찰나였다.

“프라우 신의 손톱 밑에서 프라우 정의 DNA가 나왔습니다.”

“그야 그 전날 밤에…….”

이유를 대려던 수아는 멈칫했다. 제 입으로 없었다고 했던 일을 번복해야 한다. 그때에는 폭행 사건이었지만 지금은 살인 미수 사건이고 그때의 피해자 정수아는 이제 용의자이다. 거짓말을 했다는 걸 실토할 것인가, 말 것인가.

수사관은 용의자가 망설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죠?”

당황한 수아는 변호사를 바라보았지만 변호사는 수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도와주지 않지? 이 일은 저 남자에게서 못 들은 걸까?

수아는 주변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결국 굴복해 입을 열었다.

“……엄마가 저를 때렸어요.”

수아는 실토하자마자 선수를 치려 했다.

“그런데 제가 그날 왜 아니라고 했냐면…….”

하지만 뒷말을 잇는 건 쉽지 않았다. 사정을 모르는 이의 눈에는 수아의 거짓말이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비칠 것이다. 가족의 의미가 다른 외국인이라면 더더욱. 남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그것도 남의 나라 말로 설명하려니 말문이 턱 막힌다.

설상가상으로 혀가 꼬이기 시작하더니 머릿속까지 새하얘지며 독어가 생각나지 않기 시작했다. 입만 바보같이 벙긋거리다 해명할 타이밍을 놓쳤다. 그날 밤 출동한 기록을 뒤지는 듯 모니터를 잠시 보던 수사관이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수아를 바라보며 예상대로 추궁을 시작했다.

“그런데 왜 거짓말로 경찰을 돌려보냈습니까?”

“제가 거, 거짓말을 한 건…….”

거짓말을 했으니 내가 엄마를 밀지 않았다는 말도 다 거짓말로 들리겠지?

“거짓말을 한 건 맞는데, 그런데, 그렇지만…….”

난 엄마를 밀지 않았어. 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맞아. 하지만 내가 하지 않았어.

예전처럼 가해자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 겨우 다잡은 정신이 다시, 더욱 큰 진폭으로 흔들린다.

우는 수아를 경찰차에 밀어 넣던 경찰 아저씨, 유치장에 넣어서 다신 이런 짓 못 하게 혼쭐을 내주라고 온 아파트에 울리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엄마, 모범생에서 하루아침에 엄마를 죽이려 한 패륜아가 된 저를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며 혀를 차던 이웃 사람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옛날 일이 떠오르며 눈앞이 깜깜해졌다. 비좁고 어두운 기억의 밀실에 갇힌 수아의 가슴이 답답해지더니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아, 물론 저도 압니다.”

이젠 독어를 듣는 것도 안 되기 시작했다. 수사관의 입에서 의미 없는 소리가 쉼 없이 나올수록 수아의 혼란은 가중됐다.

“가정 폭력 피해자가 보복이 두렵거나 부양자를 잃는 게 두려워 가해자를 감싸는 일은 자주 있죠. 그런데 이 경우엔 폭행 사건 직후에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었으니 의례적으로 조사하는 것뿐이니까 너무…….”

“잠깐.”

다시 창가로 물러났던 남자가 수사관의 말을 가로막으며 수아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몸을 구부려가며 눈높이를 맞추더니 고개 숙인 수아의 턱 끝을 손으로 밀어 올렸다. 배려와 강요라는 모순된 태도를 한꺼번에 보이는 남자가 수아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토, 통역을, 불러, 주, 주세요.”

무언가가 꽉 틀어막은 듯한 목구멍에서 영어를 겨우 쥐어짜내 더듬더듬 부탁하는 순간, 남자가 수아를 다급히 붙들며 수사관에게 요구했다.

“구급차를 불러요.”

“나, 난 괜찮…….”

괜찮다는 거짓말을 끝맺지 못했다. 목구멍까지 떨려온 탓이었다. 남자의 손이 닿은 후로 떨림이 걷잡을 수 없이 심해졌다.

“하아, 하아.”

숨을 짧게 몰아쉬며 헐떡이는 수아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가 격렬하게 요동친다. 저 눈빛이 수아의 숨통을 더욱 조여왔다.

“안 되겠어.”

남자가 수아에게로 몸을 숙였다. 등과 무릎 뒤로 팔이 들어온다 싶은 순간 몸이 번쩍 들렸다. 그는 수아를 안고 건물 뒤편으로 나가더니 주차장에 대기 중이던 차에 그녀를 태웠다.

“가까운 응급실로.”

지시를 받은 운전기사가 차를 몰기 시작했다. 잠시 쉬면 나을 테니 병원까진 필요 없다는 말이 좁아든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는다.

경찰서 밖으로 나오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눈앞이 핑 돌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증세가 심해진 수아는 남자가 시키는 대로 그의 가슴팍에 몸을 기댈 수밖에 없었다.

팔이 몸을 너무 옥죄고 있어 더더욱 숨이 막힌다. 학학댈 때마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며 남자의 단단한 가슴팍에 짓눌려 문대어지는 것도 부끄러웠다. 팔을 조금만 풀어달라고 하려던 찰나였다.

“헉!”

원피스 속으로 남자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남자를 올려다보았으나 그는 조금 전과 똑같이 생각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수아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 그만…….”

끊어질 듯 가는 목소리였지만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똑똑히 들리는 이 거리에서 그가 수아의 애원을 듣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러나 손은 멈추지 않고 위로 올라왔다.

몸을 만지지는 않았으나 수아는 수치심과 두려움을 참지 못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울먹였다. 손이 깊숙이 들어올수록 헐렁한 원피스 자락이 위로 들리면서 남자의 눈앞에 허벅지와 엉덩이가 훤하게 드러난 탓이었다.

그나마 닿지 않았던 손도 등허리에 이르러서는 맨살을 노골적으로 쓸며 올라왔다. 뜨거운 손바닥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소름이 오싹하게 돋아났다.

남자는 브라의 밴드가 잡히고서야 손을 멈췄다. 손끝이 무언가를 찾듯이 밴드를 더듬고 들추고 따라 미끄러진다.

“끅.”

놀란 나머지 딸꾹질까지 시작됐다.

남자는 역시나 브라의 후크를 찾던 중이었다. 등을 배회하던 손이 밴드의 한가운데에서 멈추더니 넉넉히 남은 밴드 끝을 젖히고 고리 세 개를 개수라도 세듯이 더듬었다. 못되면서도 얌전하더니 곧 발정 난 개가 덤비듯 브라 끝을 거칠게 잡아당기기 시작한다.

“시, 싫…….”

남자는 몸을 뒤틀며 피하는 수아의 허리를 더욱 바짝 끌어안으며 귓가에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해. 여자를 벗기는 건 처음이라.”

서툴고 거친 시도를 여러 차례 한 끝에야 후크가 툭, 풀려나갔다. 그 순간 수아의 의식도 툭 끊겼다.

다음 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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