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 (3/11)

남자

재단 이사장은 고국 밖에서도 국산 차만을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국산을 고집한다는 건 보통은 검소나 애국심을 뜻하게 마련이나 그 국산품이 메르체데스-마이바흐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덕분에 그녀의 비서인 야나는 독일도 아닌 불가리아에서 고급 리무진을 구하느라 진땀을 뺐다.

눈에 익은 은빛 전용기가 바르나 공항의 아스팔트 위에 멈춰 서자 야나는 옆자리의 운전기사에게 눈짓을 했다. 정차 구역에서 대기 중이던 마이바흐에 시동이 걸리고, 미끄러지듯이 나아가다 전용기와 나란히 멈춰 섰다.

야나는 조수석 밖으로 나가 재빠르게 투피스 정장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허리에 힘을 주어 꼿꼿한 자세로 서는 찰나 전용기의 문이 아래로 내려오며 계단이 펼쳐졌다.

전용기 밖으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20대 후반의 금발 미남이었다. 긴 다리를 성큼 뻗어 문밖으로 나온 남자가 장신인 탓에 구부렸던 몸을 펴 똑바르게 서는 순간 꾹 다물려 있던 야나의 입술이 절로 벌어지며 짤막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것은 이룰 수 없는 욕망을 위한 탄식이다.

남다른 신체 조건을 따라 까다롭게 맞춘 휴고 보스의 하이엔드 슈트를 입은 채 해 질 녘의 강렬한 햇빛 속에 선 그는 위험하고도 우아한 검은 재규어를 떠올리게 했다.

야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남자가 눈가에 미소를 띠며 짤막한 눈인사를 했다. 맹수를 연상케 하는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나 행동과 말은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로 따뜻한 남자였다.

그가 알은체를 한 것만으로도 그녀의 무릎 뒤가 떨렸다. 아랫배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남자가 언뜻 보기에는 가벼우나 무게감이 느껴지는 동작으로 뒤에 선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었다. 중년의 여자가 그 손을 잡고 어둠 밖으로 걸어 나오자 야나는 남자에게 두었던 시선을 죄지은 사람처럼 거두었다. 눈인사를 하는 순간, 여자는 네 속이 빤히 보인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잉그리드 폰 알브레히트.

자신의 이름을 딴 장학 재단의 이사장이자, 직원들 사이에선 폰 알브레히트 가문의 뿌리가 독일 서쪽에 있는 것에 빗대어 서쪽의 마녀라 불리는 야나의 고용주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아직도 그녀를 영원한 지젤이라 부른다.

단지 독일 출신에 금발과 미모를 겸비한 프리마 발레리나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자의 능숙한 에스코트를 받으며 계단을 내려오는 잉그리드의 걸음은 여전히 사뿐하고 우아했다.

게다가 세련된 펜슬 스커트와 킬힐 사이의 종아리가 발레리나 시절처럼 탄탄하고 매끈한 걸 보고 있자면 은퇴한 지 서른 해가 넘었음에도 그녀의 팬이 남아 있는 게 그럴 법한 것이다.

하지만 가녀린 것은 몸매뿐, 그녀를 오래 모신 비서실장은 세월이 지날수록 주름이 아니라 독기가 나이테처럼 새겨지는 여자라고 잉그리드 폰 알브레히트를 평했다.

그 독기가 젊음을 유지해주기라도 하는 것일까, 철저한 관리 외에 별다른 시술도, 수술도 받지 않는 잉그리드는 쉰여섯의 나이에도 고작 마흔 정도로 보였다.

사람을 홀리는 외모와 이 불볕더위에도 전율하게 만드는 서늘한 분위기가 닮지 않았더라면 나란히 팔짱을 낀 저 남녀가 열두어 살 정도의 나이 차를 극복한 연인인 줄 알았을 것이다.

운전사가 문을 열어둔 차 안으로 잉그리드를 물 흐르듯 에스코트하는 젊은 미남은 그녀의 스물아홉 난 아들이었다.

필립 폰 알브레히트.

세계에서 손꼽히는 명품 시계 및 보석 브랜드이자 Made in Germany의 자존심인 알브레히트사의 회장.

내로라하는 명품 기업의 대부분이 거대 그룹에 합병된 요즘, 알브레히트는 몇 안 되는 창립자 가문 소유 브랜드였다. 3년 전 선대 회장 막심 폰 알브레히트가 작고했을 때 투자자들과 경영진 사이에서는 고작 스물여섯인 새 회장에 대한 걱정보다는 기대가 앞섰다. 필립은 300유로를 30만 유로로 만든 일화로 어릴 적부터 유명했던 인재였으니까.

그는 사업 감각만이 아니라 사람을 읽는 감각 또한 뛰어났다. 부친의 사후 그가 새로 영입한 CEO와 CMO 모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낸 것도 모자라 그간 알브레히트의 제안을 거절해오던 유명 디자이너를 영입하는 데 성공하기까지. 거대 그룹 브랜드에 밀려나며 휘청하던 알브레히트는 그렇게 고작 3년 만에 다시 우뚝 섰다.

게다가 론칭한 지 20년이 되도록 해외에선 큰 주목을 받지 못하던 와인 브랜드 또한 그가 키를 쥔 후 성장의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능력 있는 남자가 매력까지 있다.

야나는 차가 출발하는 순간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필립은 차에 타기 전 그의 비서가 전해주었던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집중할 때면 그의 서늘한 눈매가 짙은 눈썹과 한층 가까워진다. 제 숨통도 그만큼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뒤로 향한 목적을 잠시 잊었던 야나는 시선이 느껴지자 퍼뜩 눈길을 돌렸다. 아들의 옆에 앉은 잉그리드는 창 밖을 보는 듯하지만 시야의 가장자리로 비서를 지켜보고 있을 게 뻔했다. 야나는 텁텁한 목을 한 번 가다듬고서야 물었다.

“두 분, 비행은 어떠셨습니까?”

“편안했습니다. 물어봐줘서 고마워요.”

필립은 화면에서 잠시 시선을 떼 굳이 눈을 맞추며 대답해주었다. 반면 잉그리드는 여전히 창 밖에 시선을 둔 채로 픽 조소했다.

차는 바르나 시내를 가로질러 발레 콩쿠르가 열리는 공연장으로 향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발전은커녕 낙후되어가는 듯한 바깥 풍경은 잉그리드의 눈에 가시와도 같았다. 눈을 달래고자 그녀는 적막한 차 안으로 시선을 돌려 해를 거듭할수록 완벽에 완벽을 더해가는 제 작품을 감상했다.

졸작이 창조해낸 걸작.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가차 없는 그녀는 과거의 자신마저 졸작이라 폄하하길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그 여자의 마지막 발악은 훌륭했다. 그 덕에 그녀는 왕자를 낳아 비천한 꼴을 면하고 여왕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으니.

알브레히트의 왕자.

필립이 고가의 브랜드에 걸맞게 곱상하고 우아한 외모와 분위기를 가진 덕에 붙은 별명이나, 그의 부친은 왕자라는 자리에 대해 남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왕자란 장차 군주가 될 몸이니.

필립은 그자가 마흔이 넘어서야 본 유일한 자식이었다. 그런 탓에 그는 아들의 말문이 트이자마자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경영자 교육에 힘을 쏟았다.

열 살 생일에는 고작 300유로(현재 환율로 40만 원)를 던져주고 앞으론 이걸 알아서 불려 용돈으로 삼으라 했다. 필립은 그 돈으로 캔버스 원단을 염가에 사 오더니 지역 신문에 광고를 내어 미싱을 쓸 줄 아는 노인들을 구했다. 필립이 할머니들을 고용해 만든 건 고작 장바구니였다.

남의 아이였다면 귀여웠을지도 모른다. 아이답지 않던 아들의 아이다운 시시한 짓에 잉그리드는 실망했다. 그러나 막심의 평가는 달랐다.

마침 환경 보호에 대한 의식이 제고되며 비닐봉지의 사용을 줄여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던 때였다. 필립은 사회의 변화를 노린 아이템을 선택한 것이었다.

필립이 가진 통찰력의 진수는 그 아이가 택한 마케팅 기법에 있었다. 감성과 이성을 한꺼번에 자극하는 마케팅 말이다.

은퇴 후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소외되어 있던 할머니들에게 새 직업을 준다는 스토리텔링으로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고, 비닐봉지 사용이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통계로 이성을 자극했다.

필립은 마케팅이라는 슈가 코팅을 입혀 원가가 헐값 수준인 물건을 벼룩시장에서 고가로 팔아 이윤을 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귀여운 수준이었으나 필립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브랜드 홈페이지를 만들고는 제 아비의 허락을 받아 법인까지 세웠다. 그다음으로 이어진 광고와 인터뷰가 세간의 관심을 열 살짜리가 만든 친환경 감성 기업으로 끌어모았다.

자본금 300유로로 시작한 회사는 눈 깜짝할 사이에 3만 유로의 투자를 얻어냈다. 필립은 그걸 1년도 안 되어 어느 유통 그룹에 30만 유로를 받고 팔았다. 남의 손에 넘어간 지 몇 년 되지 않아 필립의 첫 회사는 무너졌지만, 그래서 사업 신동으로서 그 아이의 명성은 더더욱 견고해졌다.

그렇게 필립은 1년 만에 부모에게 손 벌릴 필요가 없을 만큼의 용돈을 모았다.

그 아이만 이득을 본 건 아니었다. 신분제가 무너진 지 오래인 사회민주주의 국가에서 아직도 귀족의 잔재인 ‘폰’을 성에서 떼지 않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폰 알브레히트가가 어린 필립 덕분에 사회 지도층으로서의 의무에 앞장서는 사회적 기업가 가문이라는 이미지를 새로이 얻었다.

그저 열 살짜리가 가진 배짱과 자질을 시험해보려 한 것뿐인 막심은 크게 감탄했다.

“폰 알브레히트의 핏줄답게 사업 감각을 타고났군.” 

그러나 잉그리드는 필립이 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기적인 사욕을 이타적인 선행으로 포장하는 수법에서 그녀는 자신을 보았다. 이성과 감성 모두를 자극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교묘히 부리는 습관 또한.

잉그리드의 시선은 아들의 손에 들린 태블릿에 머물렀다. 필립은 저와 이견을 보이는 CMO를 설득하는 메일을 쓰는 중이었다.

저걸 읽는 이는 뒷덜미가 서늘해질 것이다. 그러나 부드러운 어조와 표현뿐인 저 메일의 어디가 위협적인지를 쉬이 포착해내지 못하고 필립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강요당하는 줄도 모르고 제 스스로 복종한다 착각하며.

잉그리드는 그녀의 아둔한 비서가 상관이 듣고 있는지도 모르고 분수에 맞지 않는 흥분을 섞어 내뱉었던 말을 문득 떠올렸다.

위험하고도 우아한 한 마리의 검은 재규어.

재규어라니. 뭘 모르는군.

위험하다는 평은 틀리지 않았다. 필립은 잉그리드의 지배 성향과 통제광 기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니. 물론 그걸 알 리 없는 비서는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아들은 뱀이다. 먹잇감에게 부지불식간에 접근해 목을 휘감아 조이고 혈관에 독니를 박아 넣는다. 당한 걸 깨달았을 때에는 너무 늦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중독되어 제가 당한 것조차 모를지도.

야생에서 맹수를 만나면 가까이 다가가는 머저리들이 있듯이, 위험한 남자인 걸 알면서도 그 우아함에 매혹되어 다가가는 여자들이 있다. 필립에게도 물론.

훌륭한 독사를 낳아 키운 어미로서 잉그리드는 겁도 없이 다가온 여자들이 심장을 처참히 물어뜯기고 한입거리로 전락하는 꼴을 구경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필립은 제 본성을 감추고 여자를 멀리했다.

여자와 엮일 만한 상황을 일부러 만드는 수고까지 했으나, 아들은 그녀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제 어미가 던져둔 고깃덩이를 얄밉도록 자연스럽게 피해 갔다.

기껏 아까운 재능을 물려주었건만 사업에만 쓰다니. 시시하기 짝이 없지.

전용기 안에서도 필립은 한시도 쉬지 않고 일을 손에 잡고 있었다. 이번 일정은 엄연히 말해 휴가인데도 말이다.

“네가 아시아를 돌다 오더니 역병이라도 옮아온 모양이구나.”

“그 말, 인종 차별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난 일 중독을 말한 것뿐이란다.”

“여전히 부적절합니다.”

“올바른 척. 어설프기 짝이 없구나.”

어머니와는 대화보다 침묵이 편안하다. 필립은 반응하지 않고 태블릿 화면 위로 손가락을 놀렸다. 모친의 코웃음을 끝으로 차 안에는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필립은 동아시아 3국으로 열흘간 출장을 다녀온 직후였다. 세계 최대이자 가장 변화무쌍한 명품 시장인 동아시아에서의 브랜드 프레전스를 제 눈으로 확인하고 지사를 독려 및 점검한다는 게 명목이었다.

어머니는 필립이 아시아 출장을 간다는 말에 당혹감과 흥미가 뒤섞인 묘한 표정을 지었었다. 부친에게 아시아 출장은 남의 돈으로 즐기는 유흥과 동의어였으니.

제 비뚤어진 욕망을 아들을 통해 채우고자 하는 모친에게는 딱한 일이지만 필립은 오로지 비즈니스에만 몰두했다.

알브레히트의 커스텀 보석이나 시계를 갖고자 하는 부자들의 대기 명단만큼이나 부티크를 입점시키고자 하는 유통 업체의 줄도 길다. 각 지역 유수의 유통 업체 대표들을 만나고 새 부티크 오픈 행사를 참관하며 현지 언론과 인터뷰도 하는 등, 그는 관광이나 유흥 따위는 비집고 들어올 틈 없는 시간을 보냈다.

실은 사업만이 목적인 건 아니었다. 출장 일정을 어머니가 반년의 아프리카 휴양을 마치고 그가 사는 프랑크푸르트의 펜트하우스로 돌아오는 일정과 겹치게 잡았다. 모친과 격돌하지 않으면서 그녀의 불편한 소리를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닷새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차는 대로를 벗어나 녹음이 울창한 공원으로 접어들었다. 공산주의의 흔적 기관인 듯 투박하고 거대한 동상을 지나자 정돈된 화단이 이어지더니 샛길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퇴색된 보도블록이 깔린 광장이 나타났다. 운전기사는 중앙 화단의 비쩍 마른 나무가 호화 저택의 분수대라도 되는 양 빙 돌아 광장 가장 안쪽에 자리한 낮은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바르나 여름 극장은 2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건물 계단을 내려와 두 사람을 맞이하는 남자는 2년 전보다 노쇠한 듯했다.

“바르나 발레 콩쿠르에 오신 것을 두 팔 벌려 환영합니다.”

두 팔을 과장되게 내저으며 영어로 인사를 건네는 불가리아계 남자는 이 행사의 주최인 국제 발레 콩쿠르 재단의 이사장이었다. 그가 손등에 입까지 맞추려 하자 잉그리드는 붙잡힌 손을 잽싸게 빼며 세 음절을 중얼거렸다. 이사장은 너털웃음으로 머쓱한 분위기를 환기하더니 필립에게 악수를 청했다.

“알브레히트 씨, 오랜만입니다. 유능한 회장 덕분에 사업이 나날이 번창하더군요. 최근에 두바이 공항에 갔더니 면세점에서 알브레히트의 매장 앞에 줄이…….”

이사장은 아첨을 한바탕 떨고서야 잉그리드에게 제 팔꿈치를 내밀었다. 귀빈석까지 손수 모시겠다는 뜻이었다.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 무대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는 길에도 너스레는 이어졌다.

“불가리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에 알브레히트 여사님을 다시 모실 수 있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잉그리드의 얼굴이 조소를 띠며 일그러졌다.

“세 번째는 명성이라 할 수 없죠. 수치일 뿐.”

“과연 이 바르나의 골드 메달리스트다우신 말씀이군요.”

이사장은 모욕이 될 법한 말에 능청스러운 아첨을 되돌려주었다.

잉그리드 폰 알브레히트. 결혼 전 이름, 잉그리드 랑게. 젊은 시절에는 로잔 그랑프리와 바르나 콩쿠르 골드 메달리스트, 영국 로열 발레 스쿨, 그리고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을 거치며 프리마 발레리나의 왕도를 걸었던 발레 스타였으나 불의의 사고로 최전성기에 무대를 떠나야 했던 비운의 발레리나.

영원한 지젤이라 불리나 그녀의 사생활은 순박한 시골 처녀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잉그리드는 스포트라이트 밖으로 밀려나자마자 악착같이 되돌아왔다. 골드 메달리스트에서 골드 디거(돈을 노리는 구혼자)로.

영화배우였던 본부인을 밀어내고서 부유하고 명망 높은 폰 알브레히트가의 새 안주인 자리를 차지하는 데에는 미모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미모는 여전하시군요.”

물론 성격도.

이사장은 속내 위에 사람 좋은 웃음을 덧씌웠다. 잉그리드 폰 알브레히트는 발레계의 큰손이었다. 재단과 불가리아 발레 유망주들의 주머니 사정이 이 마녀의 심기에 달려 있다.

“자, 이쪽입니다.”

개막식이 머지않았음에도 가장 앞쪽의 귀빈석은 거의 텅 비어 알브레히트의 전용석이나 마찬가지였다.

“편안하게 감상하실 수 있도록 주변은 비워두었습니다.”

거짓말이다. 귀빈들 대부분이 아직 오지 않았을 뿐.

시간이 곧 돈인 자는 시답잖은 1라운드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최고의 경쟁자가 수준 높은 공연을 펼치는 마지막 라운드만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대부분인 가운데, 오직 1라운드만 감상하고 떠나버리는 잉그리드는 굉장히 별난 스폰서였다.

바르나 국제 발레 콩쿠르.

세계 최초의 무용 콩쿠르로서 전설적인 무용수를 수없이 배출해낸 유서 깊은 대회.

그 개막을 알리는 트럼펫 소리가 들려온다.

파운데이션 스펀지를 쥔 수아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껏 공들여 화장한 눈썹을 손으로 뽑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듯이 살갗에 스펀지를 짓눌렀다.

밖에서는 개막식이 한창인 가운데, 대기실은 개막식 직후 진행될 1라운드 준비로 부산스러웠다. 콩쿠르 스태프와 출전자 스태프가 바삐 오가는 가운데 출전자들은 하나같이 긴장한 얼굴로 각자의 순서에 맞춰 분장을 점검하거나 몸을 풀었다.

솔로 출전자의 경우 1라운드에선 주최 측에서 정한 발레 바리에이션(독무) 중 두 가지를 선보여야 한다. 수아는 어제 1라운드 순번 추첨식에서 첫 공연은 3번을, 두 번째는 122번을 뽑았다. 그 말인즉 5일간 열리는 1라운드에서는 첫날과 마지막 날에 출전한다는 뜻이었다.

3번을 뽑았을 때 수아는 크게 당황했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그 문자 그대로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생각이었다.

경연은 밤에 실시된다. 밤이 깊어질수록 컨디션이 저조해질 것이다. 세 번째는 긴장을 떨치고 출전하기엔 너무 이른 순서지만 마지막 날의 뒤 순서인 2차 바리에이션보다는 나았다.

그래, 이게 나아.

스스로를 다독이며 화장을 마친 수아는 토슈즈를 신고 리본을 꼼꼼히 여민 후 거울 앞에 섰다. 첫 바리에이션은 지젤인지라 수아는 소매를 은방울꽃 모양으로 부풀리고 가슴 아래와 허리까지는 연녹색 조끼 모양으로 덧댄 천 사이를 끈이 X로 교차하는 의상을 입었다. 종아리까지 오는 겹겹의 흰 스커트는 지젤에 걸맞은 로맨틱 튀튀였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자신은 사랑에 빠진 행복한 아가씨라기보다는 초야권을 행사하는 영주 앞으로 끌려와 새파랗게 질린 농노 같았다.

제 안색을 보니 더 긴장된다. 수아는 얼굴에 초점을 두지 않으려 애쓰며 머리와 의상이 제대로 고정되었는지 확인하자마자 도망치듯이 거울 앞을 떠났다.

밖에서는 팡파르 소리가 멎은 지 오래였다. 스태프가 첫 출전자의 이름을 부르는 가운데 수아는 대기실에 마련된 연습 공간에서 막바지 몸풀기에 돌입했다.

주변에서 몸을 푸는 출전자들이 자연히 눈에 들어오자 수아의 입안이 바짝 말랐다. 모두 저보다 월등히 뛰어나고 자신만만해 보였다.

실은 신청서를 넣기 전부터 이곳이 제가 낄 자리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실력만이 문제가 아니다. 늘 돈에 쪼들리는 수아에게 의상비와 레슨비, 그리고 여행 경비에 수백이 깨지는 콩쿠르는 부담스러웠다.

“상금으로 메꾸면 되지.” 

엄마는 이런 말을 하며 접수가 시작되기 몇 달 전부터 수아를 닦달했지만, 지금까지 들인 비용은 그랑프리 상금 정도는 되어야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는 언젠가 수아가 스포츠 만화의 주인공처럼 고난과 역경을 극적으로 극복하고 무대를 휩쓰리라 기대하는 듯했다. 이따금, 아주 가끔, 분노가 치밀곤 했다. 엄마의 현실과 동떨어진 욕망에 왜 내가 원치 않는 꼭두각시 노릇을 해야만 하는가.

그럴 때면 수아는 저답지 않게 지독한 욕망을 키우곤 했다.

남들 앞에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망쳐버릴 거야. 엄마가 더는 콩쿠르라는 말도, 발레라는 말도 꺼내지 못하게.

그러나 독한 각오도 잠시일 뿐, 수아는 비뚤어진 생각을 실천으로 옮길 만큼 모질고 모나지 못했다. 이 자리는 다른 누군가가 간절히 원했던 자리이다. 남의 기회를 빼앗으며 출전하게 된 만큼 최선을 다해야 도리였다.

1라운드라도 통과하자.

이번 라운드에서는 130명 중 40명만이 살아남는다. 달리 말해 이 자리에 있는 출전자 세 명 중 한 명만 다음 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었다.

대회 전에는 몸이 가벼워야 한다며 엄마는 오늘 수아에게 물과 스포츠음료밖에 허락하지 않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배가 뒤틀릴 정도로 너무나 고팠으나 지금은 다른 의미로 배 속이 조여오며 배고픔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아-.”

수아는 숨을 크게 들이켜 질주하는 심장을 억누르고 다짐했다.

“어젯밤처럼만. 어젯밤처럼만.”

어젯밤 무대 리허설에서 수아는 제 기량을 완벽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펼쳤다. 무대가 잘 맞는 데에다 요즘 컨디션도 꽤 괜찮으니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수아야!”

대기실 입구에서 누가 목청껏 소리를 지르자 모두가 눈썹을 추켜올리며 그쪽을 돌아보았다. 엄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애써 가라앉힌 마음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내가 있으면 스트레스밖에 더 되겠어? 안 그래? 사라져줘야지.” 

머리를 해주자마자 이런 말을 하며 나간 엄마가 본인의 말을 어기며 되돌아왔다. 대회를 앞두고 극도로 예민해져 있던 수아의 속에서 짜증이 날카롭게 치밀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엄마도 못지않게 예민하다. 수아는 긴장으로 굳은 얼굴 뒤로 짜증을 감추고 엄마를 향해 짤막하게 손을 흔들었다. 이젠 시선이 제게로 쏠린다. 무대를 업으로 삼아야 하는 발레리나답지 않게 숨고 싶어졌다.

“왔어.”

엄마는 곧장 다가오더니 주변 사람들이 한국어를 못 할 거라 장담하는지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말했다.

“그 할매 왔어.”

엄마는 수아의 후원자를 할매라고 불렀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나 겉모습만 보았을 땐 엄마와 나이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데 말이다.

나이가 어찌 되었든 할매는 무례하고 경박한 호칭이다. 화장대 앞에서 아이라인을 그리던 한국인 출전자가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 수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저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지를 모르기만 바랐다.

“내가 나가서 귀빈석을 쭉 보고 왔는데…….”

“엄마, 잠깐만요.”

흥분한 엄마가 후원자의 이름까지 덜컥 말할까 봐 겁이 난 수아는 그녀를 대기실 밖 복도로 끌고 나갔다.

“옆에 앉은 남자는 아들인 것 같더라. 그 회장. 인터넷에서 본 사진이랑 똑같이 생겼어.”

그래봐야 소용없는 짓이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기쁨과 긴장 탓에 점점 커지며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후원한 애들 잘하나 보러 왔나.”

“콩쿠르 후원사잖아요.”

“시계 하나에 억 소리 나더니 돈이 진짜 썩어나긴 하나 봐. 애들 수십 명씩 돈 주고도 남아돌아서 대회 후원도 하고.”

무대에서 뛰기도 전에 식은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주변의 눈치를 보는 수아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엄마는 면목 없는 소리를 당당히 했다.

“그럴 거면 우리 수아나 더 챙겨주지.”

네가 좀 더 잘했으면 후원자한테 당당하게 손 벌릴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엄마의 말버릇이었다.

“걔도 오늘이라며.”

엄마가 말하는 걔는 수아와 동갑인 폴란드 출신 발레 유망주 마리나 카민스카였다. 다른 말론 수아의 경쟁자. 이 세상에서 엄마 홀로 그렇게 믿었다. 로잔 콩쿠르에서 입상한 그 카민스카와 이름 없는 군무 발레리나가 경쟁자라니 온 세상이 비웃을 일이었다.

엄마의 집요함은 수아에게만 한정된 게 아니었다. 그 애의 개인 SNS까지 알아내더니 최근 한 달간은 올라온 내용을 수아에게 매일같이 중계했다. ‘할매’가 카민스카를 비싼 휴가에 데려갔다며.

“알브레히트가 얘도 후원해? 하, 뒷골 땡겨.” 

카민스카가 올린 휴가 사진이 엄마의 질투심에 부채질을 했다. 딸의 경쟁자라고 생각하는 발레리나가 딸의 후원자에게 초대받아 개인적인 휴가를 함께 보냈다. 그것도 후원을 받는 수많은 발레 유망주 중 혼자.

“불안하네. 할매가 아낀다고 걔한테 상 주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요.”

어제오늘, 카민스카는 입상이 내정된 사람 같지 않았다. 어제 순번 추첨 때 1번을 뽑고 그 자리에서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었다. 오늘 대기실에서도 불안정해 보였다.

몇 해 전 로잔에서 처음 만났을 땐 어른스럽고 여유롭던 아이였다. 신체 조건도, 기량도 정말 발레를 하려고 태어난 것만 같은 애가 왜 불안해하지? 그럼 그 발끝에도 못 미치는 나는?

수아도 불안해지려는 찰나 엄마가 불가능한 것을 요구했다.

“너 걔보다 잘해야 해.”

“…….”

“너도 이번에 할매한테 확실히 눈도장을 찍는 거야.”

엄마가 스트레스를 주고 사라졌다. 충동을 못 이기고 반듯하게 다듬어둔 눈썹을 쥐어뜯으려던 찰나였다.

“Competitor Number eleven! Ms. Sua Jung from South Korea!”

스태프가 그녀를 호명했다.

흑해에 접한 야외 공연장에는 독일에서는 맡기 힘든 바다 냄새가 감돌았다. 해가 지고 한여름의 열기가 식자 대기하고 있던 비서가 다가와 잉그리드의 어깨에 감청색 캐시미어 숄을 둘렀다.

웅장함과 화려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공연장이다. 로마 시대 건축물을 본뜬 원형극장의 무대 뒤편에는 담쟁이덩굴을 감은 아치 기둥과 벽이 우뚝 서 웅장한 시늉을 하고 있으나 저것도 아이들 장난 같기만 할 뿐이었다.

그나마 해가 지고 조명으로 눈속임을 하니 볼 만한 수준은 되었다.

“어쩜 이곳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질 않는지. 물론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는 필립은 개막식이 진행되는 무대만 바라볼 뿐 대꾸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좌석 주변에 사람이 없으니 어머니는 편히 떠들었다. 지나치게 편히.

“필립, 알고 있니? 네 가문의 옛 조상 중에 발레리나 후원에 미친 사람이 있었다는구나. 물론 그렇게 키운 발레리나들의 무대는 그자의 침대였겠지.”

필립은 쓴웃음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네 아버지란 사람도 그랬던 걸 보면 가문의 전통인가 보구나.”

그 피를 물려받은 너도 언젠가는 그렇게 되지 않겠니?

필립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의미심장한 눈에서 하지 않은 말도 들리는 듯했다.

필립은 그제야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으니 그 또한 편히 떠들지 못할 것 없었다.

“그 말은 제가 아니라 거울을 보면서 하셔야겠군요.”

얼마 전에도 발레리노 애인을 갈아 치우신 분 아닌가.

폰 알브레히트의 피를 이어받지 않은 어머니가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은 건 우스운 일이다. 조금 전 그의 쓴웃음에 담긴 의미는 이것이었다.

“참가 번호 54번, 마리나 카민스카, 폴란드.”

첫 경연자의 소개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순간, 권태롭기만 하던 어머니의 낯빛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후원하는 발레리나인 모양이지.

필립은 제가 후원하는 학생들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재단의 돈이 제 돈이기도 하나 그는 사업체 운영으로 바쁜 탓에 후원 프로그램의 운영은 모친에게만 전적으로 맡겨두었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만개해 있었다. 인자함의 전형인 저 미소에 많은 이들이 속는다. 그러나 뛰어난 발레리나는 뛰어난 연기자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내 헌신의 결과물을 마침내 보는구나.”

이 말 또한,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필립의 왼손을 쥔 어머니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를 절정에 오르는 여자들처럼 떨게 만든 건 필시 Schadenfreude, 타인의 불행에서 느끼는 쾌감이리라.

이즈음에서 필립은 지금 무대로 나오는 발레리나를 기억해냈다.

차세대 프리마 발레리나로 점쳐지는 유망주라던가.

절벽에 걸친 외나무다리와도 같은 성장기를 무사히 지난 것도 모자라 한창 기량에 물이 오르는 중이라 했다. 그 말을 하던 어머니는 제가 키운 인재가 승승장구해 기쁜 사람과 거리가 멀었다.

“자신감이 넘쳐. 주제에. 지나치게.”  

지난달, 어머니는 휴가를 함께 보내자는 핑계로 저 여자를 아프리카 세이셸까지 초대했단다. 불러서 무엇을 했을지는 뻔했다. 아는 걸 굳이 확인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곳으로 오는 전용기에서 어떻게 저 여자의 정신에 비관과 자기불신의 씨앗을 교묘하고도 은밀히 심었는지를 지나치게 자세히 읊었다.

“내 헌신의 결과물을 마침내 보는구나.” 

어머니는 이 대회가 타인을 휘두르는 제 실력을 평가받는 자리인 양 기대에 차 있었다. 굳이 평가가 필요한가. 지금껏 수없이 증명해왔으며, 지금 무대 가운데에 선 여자의 자신 없는 눈빛만 보아도 이건 어머니가 이긴 게임이었다.

음악이 시작되고, 여자가 경직된 팔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발레리나의 평소 기량을 알지 못해 상대적인 평가는 불가능하다. 어릴 때부터 수준급의 발레를 감상해온 눈으로 절대적인 평가를 해보건대 저 여자에게 차세대 프리마 발레리나라는 찬사는 과분했다.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기 전에는 저렇지 않았을 터.

“튀튀 입은 불곰이 따로 없군.”

어머니가 코웃음을 섞어 조롱을 조용히 읊조렸다. 휴가를 보내며 체중이 불었는지, 스트레스 탓인지 발레리나는 몸이 무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인간을 망가뜨리는 실력은 올해도 그랑프리이시군.

질린다는 눈으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으나 그의 눈빛은 어린 발레리나에게 붙은 어머니의 망령을 위한 것이었다.

다른 후원자들이 만개한 프로 무용수에게로 몰려갈 때, 아픈 과거를 딛고 일어서 응달 속의 새싹들을 홀로 키우는 진정한 발레계의 대모. 그것이 잉그리드 폰 알브레히트에 대한 세간의 평가이지만 그들은 철저히 속고 있다.

이 후원의 목적은 발레계의 새싹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꺾는 것이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다른 이들이 이루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남들도 겪어야만 했다. 그의 모친은 비틀릴 대로 비틀린 인간이었다.

정상에서의 은퇴라는 그 고통이 남 탓도 아니었다. 제가 일으킨 차 사고로 인한 부상이 원인이었으니.

차라리 남의 잘못이었으면 이토록 비틀리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한 건 갚아야만 하는 성미이나 제 탓은 죽는 날까지 할 위인이 아니었으니 보복의 감정을 풀 데가 없어 결국 모두의 뺨을 치고 다니는 것이다.

토슈즈에 면도날을 넣는 이들은 하수이다. 잉그리드 폰 알브레히트는 몸이 아닌 정신을 해쳤다.

발레에 두각을 보이는 신동들만 모아 돈과 함께 헛된 희망을 주입한다.

너는 천재야. 너는 역사상 최고의 발레리나가 될 거야.

그렇게 아이들에게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한계까지 부풀려둔다. 그들을 하늘 끝까지 떠오르게 했던 그 기대가 차디찬 현실과의 압력 차를 이기지 못하고 터져버리는 순간, 자비로운 후원자는 그들의 추락을 한없이 기쁘게 지켜볼 것이다.

후원은 어머니의 길티 플레저. 아니, 틀렸다. 죄책감은 전혀 느끼지 않으니.

악취미. 그 정도가 맞겠다.

재단의 장학생이다가 꿈을 접은 발레리나인 야나를 자신의 비서로 고용해 곁에 두고 괴롭히는 것도, 그리고 하필이면 바르나로 보내 콩쿠르와 관련된 일을 맡기는 것도 악취미였다.

적어도 그의 목적은 모친과 달리 순수했다. 가끔 어머니의 집요한 방해 공작을 이겨내는 무용수가 탄생할 때마다 그는 기꺼이 축하했다. 그 축하가 무용수의 성공을 향한 것인지, 어머니의 실패를 향한 것인지는 모호하지만.

인상적인 구석이 전혀 없는 공연이 끝났다. 관객에게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 출구로 향하는 경연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진다. 옆에서는 만족스러운 탄식이 들려왔다. 절정이 소강상태에 접어들 때 여자들이 내뱉는 숨소리와 비슷하게 들리자 필립은 불쾌감에 미간을 구겼다.

“어떠니, 필립? 내 실력 아직도 여전하지 않니?”

두 번째 경연자는 재단의 장학생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무대를 보지 않고 필립에게 말을 걸었다. 제 비틀린 속내를 이처럼 아들에게는 여과 없이 드러낸다. 필립은 경연자에게 매너를 지키고자 무대에 시선을 둔 채 나직이 읊조렸다.

“가끔은 저를 불편하게 여겨주셨으면 좋겠군요. 제가 당신을 불편하게 여기는 만큼.”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어머니의 입매가 휘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내가 불편하니?”

어머니가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귓가에서 숨이 느껴지자 필립은 눈살을 구겼다.

“아니란다, 필립.”

어머니는 아이를 타이르는 투로, 그러나 아무도 들어서는 안 될 비밀로 그를 협박하듯이 간사하게 속삭였다.

“넌 너를 불편해하는 거야.”

필립의 목울대가 들썩였다. 알아채기 힘든 미세한 반응이었으나 숨 닿는 거리에서 지켜보던 어머니는 그의 동요를 간파하고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거울을 보라 했니? 네가 나의 거울이란다, 아들아.”

잉그리드는 끝끝내 시선을 맞추지 않는 아들을 보며 입매를 더욱 비틀었다.

“또한 나는 너의 거울이지. 내가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추하니? 넌 거울 속 추한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피하는 거야.”

“저는 타인의 몰락에서 쾌락을 느끼지 않습니다.”

“아, 물론 그건 온전히 나만의 취향이지.”

어머니가 몸을 뒤로 물렸다. 순순히 물러나나 싶었던 것도 잠시, 필립의 가슴팍으로 다가온 손이 넥타이를 움켜쥐었다. 아래로 당겨질수록 끈이 목으로 파고들었다.

“그렇지만 지배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는 네 피에도 진하게 흐를 텐데.”

아들이 어릴 적 그 기질을 드러냈던 순간들을 잉그리드는 떠올렸다.

“필립, 네 회사의 노예들이 제 의지를 버리고 네 입맛대로 움직일 때 기분이 어떠니? 제멋대로이던 것이 길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 어때?”

“그건 전문 용어로 인재 경영이라고 합니다.”

사적 욕망의 충족을 위한 지배와 통제 따위가 아니라.

필립은 넥타이를 쥔 손을 다소 거칠게 뿌리쳤다. 베스트에서 삐져나온 넥타이 끝자락을 안으로 단정히 밀어 넣고 매듭을 바로 고치는 사이 어머니는 흡족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평소에 보이지 않는 거친 면모에 놀라거나 언짢아하기는커녕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기쁘다는 표정이었다. 아들을 그른 길로 내모는 것 또한 어머니의 악취미였다.

나는 잉그리드 폰 알브레히트가 아니다. 절대 어머니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필립은 다짐을 되새기곤 굳어 있던 얼굴을 부드럽게 이완시켰다. 예술을 사랑하는 대부호를 연기하며 무대를 지켜보는 아들을 지그시 관찰하던 잉그리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들아, 잘 들으렴.”

“…….”

“연기는 네 천직이 아니란다.”

네 기질을 평생 숨기진 못할 것이라는 저주를 모친이란 이름의 마녀가 내리던 찰나, 다음 경연자가 소개되었다.

“참가 번호 11번.”

그 뒤로 이어진 이름은 아시아계였으나 알아듣기 힘들었다. 필립은 사회자가 발음을 몰라 뭉뚱그린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똑똑히 들을 수 있었던 건 대한민국이란 국적뿐이었다.

이윽고 음악과 함께 등장한 발레리나는 지젤의 의상을 입고 있었다. 주니어 그룹일까. 얼굴이 열여섯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시안은 코카시안보다 동안인 편이라 단정할 순 없었다.

모친의 대각선 뒤에 앉아 있던 야나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그녀의 귀에 무언가를 속닥거렸다.

“아, 그 아이.”

저 여자도 재단이 후원하는 발레리나인 듯했다. 어머니는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묻지도 않은 설명을 시작했다.

“우등생이지. 내 지도 없이도 착실하게 망가지는 중인 우등생.”

너무나 긴장한 그 우등생, 수아의 눈에는 저를 두고 귓속말을 하는 후원자와 그녀의 아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지젤이다. 나는 사랑에 빠진 지젤이다. 나는 축제의 여왕이 된 지젤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이다.

비로소 홀로 남았으니.

수아는 이곳에 저 홀로 있다는 주문을 거듭 걸며 인생 최고의 순간에 오른 여자를 연기하려 애썼다.

‘애는 쓰는데…….’

여자를 지켜보는 필립의 눈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어쩜 저토록 착실한지.”

반면 어머니는 흐뭇한 미소를 만면에 짓고 있었다.

저 발레리나, 감정 연기는 훌륭했으나 발레의 기교는 부족했다. 명랑하고 당당한 표정과 태도만은 축제의 여왕이었다. 그가 여태 본 어느 발레리나보다도 고상한 발레에 어울리는 얼굴을 가진 것 또한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균형을 잘 잡지 못해 보는 이가 불안해지는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다. 특히나 한쪽 발끝으로 서서 뛰며 반대쪽 다리를 휘젓는 동작이 이어지는 내내 필립의 심장이 덜컥거렸다.

발은 사뿐사뿐 움직이나 팔과 다리는 흐느적거린다. 굶기기라도 한 건지 동작에 힘이 없다. 얼굴만 보자면 활기차고 명랑한 지젤인데 몸은 빈사의 지젤이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에게서 기이하게도 머리를 풀어 헤치고 바닥을 기는 위태로운 지젤의 분위기가 풍긴다. 같은 극에 있는 장면이긴 하나 그 춤을 추는 중이 아니지 않나. 게다가 원래는 미쳐가는 지젤이어야 하지만 여자는 광기와 거리가 먼 말간 얼굴을 가진 탓인지 바닥을 기며 애원하는 지젤로 보였다.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저 여자가 바닥을 기며 내게 애원한다. 그 모습을 무심결에 상상해버린 순간, 탁하던 그의 청회색 눈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뱀의 안광과 다르지 않았다.

수아가 위험한 짐승과 눈이 마주친 순간은 하필이면 춤의 클라이맥스였다. 크게 원을 그리며 연속으로 턴을 돌던 다리에서 힘이 탁 풀려 중심이 휘청 흔들렸다.

짙은 금빛 눈썹 아래의 서늘한 눈이 그녀를 꿰뚫는다.

분명 남자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으나 수아는 그가 붉은 혀를 꺼내어 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시는 환영을 보았다. 마치 저를 잡아먹으려는 듯이.

내가 잘못 본 거야.

겨우 중심을 잡고 무사히 턴을 마쳤으나 정면을 바라보며 또다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수아는 레베랑스(révérence, 발레의 마지막 인사 동작)를 할 타이밍을 놓쳤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저 눈은 포식자를 알아본 눈이다.

잉그리드는 제 아들의 가면 아래를 단숨에 꿰뚫어 본 여자에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필립은 여자가 제 변화를 감지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럴 여유가 그에겐 없었다.

스르륵. 섬찟한 감각이 가슴속을 스친다. 금속 같기도, 비늘 같기도 한. 그의 가슴 깊은 곳에 도사린 사슬 뱀이 동면에서 깨어나며 몸을 뒤튼 것이다.

저 여자야. 저 여자의 발목에 나를 감아.

차르륵. 사슬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팔걸이에 가볍게 놓여 있던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가며 그 끝을 바스러트릴 듯 움켜쥔다. 뱀의 목을 틀어쥐는 듯했다.

끼익.

그러나 비명을 지르는 건 뱀이 아닌 팔걸이였다.

죽어.

필립은 제 속에서 저와 함께 커온 뱀이 불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가진 모든 살의를 쏟아부어 뱀의 목을 졸랐다.

여자가 뒤늦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엉성하고 다급하기 짝이 없는 인사를 했다. 순종하는 척 엎드리다 방심한 틈을 타 달아나는 되바라진 암캐처럼.

그 순간 뱀이 더욱 크게 요동쳤다. 조금만 더 깨어나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날뛸지도 모른다.

다행히 여자가 무대에서 나가버리자 뱀은 언제 몸부림쳤냐는 듯 잠잠해졌다. 필립의 손등에 선명히 도드라져 있던 힘줄이 가라앉고 멎었던 호흡이 시작되었다.

다음 경연자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다음, 또 다음 무용수들이 무대를 거쳐가는 가운데 잉그리드는 펫 숍에서 기니피그를 고르듯이 굴었다.

“저 아이, 후원이 필요하겠어.”

어머니가 무대 위의 어린 발레리노를 가리키며 야나에게 지시하는 사이 필립의 생각은 이미 무대에서 내려간 여자에게로 되돌아가고 또 되돌아갔다.

그 여자, 위험해.

다분히 중의적인 결론이었다.

필립은 다섯 살 이후로 단 한 번도 바르나 발레 콩쿠르 관람을 거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올해 처음으로 그는 1라운드를 끝까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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