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어둠 속에 희부연 담배 연기가 흐드러졌다. 도둑고양이 들조차 피해 다닐 법한 울창한 숲이었다. 대형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만한 오솔길이 이곳까지 뻗어 있었으나 제 가 알기로 한 달 가까이 그 길을 이용한 자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중에 완전한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가로등조차 없는 곳에서 태국영은 마치 공기의 일부처 럼 어둠에 녹아 있었다. 그의 발치엔 불씨 잃은 담배꽁초 가 대여섯 개 쌓인 채였다. 너저분한 그 위로 새롭게 생을 다한 담배가 꺾인 채 떨어져 내렸다.
어둠 속에서 모호하게 빛나는 그의 두 눈은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의 그것처럼 오로지 한 군데에 고정해 있었다. 깎인 산등성이 아래 고즈넉이 자리한 별장 한 채였다. 현 대의 으리으리한 인테리어가 아닌 세모꼴 나무지붕이 덮 인 옛날식 별장이었다.
족히 2천 제곱미터는 되어 보일 법한 너른 부지에 흉흉 한 울타리가 경계를 가른 그 안에는 별장 두 채만 덩그러
니 솟아올라 있었다.
태국영은 손목시계를 힐긋 확인했다. 자정이 조금 넘 은 시각이었다. 번화가는 막 시끌벅적 취객들이 쏟아져 나 올 때였지만,어둠 깔린 이곳엔 생활소음이 거의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혀로 축인 입술에 새 담배 하나를 물었을 때였다. 청각 을 잔뜩 곤두세운 그의 귀가 못마땅한 소음을 감지하고 느 리게 꿈틀댔다. 그는 별장을 주시하고 있던 시선을 처음으 로 거둬 어둠 속을 스산하게 노려보았다.
왔군.
긴 머리를 산발로 풀어헤친 여자가 맨발로 뛰어오고 있 었다. 여름 끝자락에 접어든 공기가 너덜너덜한 옷을 물 고 뒤흔들었다. 그녀는 마치 중세시대에서 날아온 듯했다. 코르셋으로 허리를 잘록하게 조이고 치마는 풍성하게 퍼 지는 드레스 차림이었다. 어깨와 쇄골을 고스란히 드러낸 네크라인과 부챗살처럼 퍼진 소매는 레이스가 박혀 있었 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고풍스러운 드레스는 제 모습을 거의 잃은 채였다. 핏빛으로 군데군데 물든 드레스는 본래 디자인을 잘 알아볼 수 없을 만치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가녀리게 나 풀거렸다. 생채기 무수한 다리가 찢어진 치맛자락을 다급
히 가르고 있었다. 겁에 질린 얼굴엔 번진 화장이 유화처 럼 뭉그러진 곡선을 그렸다.
여자는 순식간에 태국영의 앞을 지나쳤다. 그리고 그녀 의 뒤를 건장한 남자가 후끈한 열기를 부리며 쫓았다. 두 남녀는 태국영의 기척을 조금도 읽어내지 못했다. 마치 세 상에 둘 분인 마냥 서로에게만 바짝 신경을 곤두세운 채였 다.
피투성이 맨발이 불뚝 튀어나온 바위에 걸렸다. 가녀 린 몸이 달빛에 식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여자는 절 망적인 비명을 질렀고 남자는 악귀처럼 웃으며 여자를 덮 쳤다. 커다란 손에 짓뭉개진 여자의 입에서 기이한 흐느낌 이 흘러나왔다.
찢어진 치맛자락을 야만적인 손이 거둬낸다. 반항하려 는 여자의 뺨으로 불같은 손이 내리꽂혔다. 부질없는 몸부 림이 순식간에 잿더미처럼 변했다. 남자는 여자의 가느다 란 목을 손아귀에 쥔 채 다른 손으로 제 허리춤을 풀어냈 다-
저속한 언어는 그녀에게 강간의 올가미를 실체화해서 보여준다. 여자는 무기력하게 눈물만 흘릴 분이었다. 그녀 의 힘으로는 남자를 1센티도 밀어낼 수가 없었다.
이 사기극 같은 추적 놀이는 남자의 유희에 지나지 않
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여자는 금방 남자에게 붙들렸을 것 이다. 가녀린 목덜미를 꺾는 데까지도 눈 깜박할 시간이 면 충분했다.
손바닥 반만 한 여자의 팬티가 남자에 의해 찢겨나갔 다. 만월에 가까운 이 시기,남자의 체취는 지독하게 짙었 다. 그에게 겁간당할 여자는 비참하게도 그 냄새에 반응 해 역시 야릇하고 자극적인 유혹의 향기를 붐어냈다.
태국영의 입술 사이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던 담배가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웃는 듯 희미하게 휜 입술은 한순 간 흥분한 짐승처럼 사납게 일렁거렸다.
태국영은 은신을 풀고 걸어갔다. 구듯발 소리는 격렬 한 반항과 제압을 반복하는 남녀에게 뒤늦게 전해졌다.
남자가 먼저 흠칫 놀라 번개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러 나 그는 등 뒤를 엄습해 온 뜨거운 덩어리의 정체를 파악 할 길이 없었다. 가볍게 허공을 가른 태국영의 구두 밑창 이 그의 목덜미를 바닥으로 메다꽂았다.
“크악!”
남자가 돼지 멱따는 비명을 내질렀다. 태국영은 거칠 게 갈라지려는 숨을 애써 정제했다. 목뼈가 부러져 컥컥거 리기 바빴던 남자가 그제야 경악한 눈을 홉떴다.
“태,태국영……?,,
“응. 나야. 네이름이一이광운이었나?”
남자,이광운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 일순 까 마득한 공포가 깃들었다. 몸서리치듯이 극렬하게 몸을 들 썩였다.
“이거 놔!”
태국영은 그의 저항을 어린애 제압하듯 간단히 눌렀다. 재생을 시작한 부러진 목뼈를 손아귀에 움켜쥐고,그의 양 허벅지는 무릎으로 짓눌러 뼈를 짓이겼다. 그것은 방 금 전까지 이광운이 여자를 유린하려던 자세와 매우 흡사 했다.
이광운은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러나 변이도 맘처럼 되질 않았다. 털이 피부에서 돋아나 기 무섭게 사라지고 있었다. 재생에 힘을 쏟는 몸뚱이가 의지를 받쳐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하얗게 질린 낯빛으로 동료들을 부르기 위해 피 끓는 고함을 외쳤다. 그러나 태국영은 동요 없이 잔잔하 게 눈매를 휘었다.
“죽을 때까지 소리쳐 봐. 아무도 네 목소리를 듣지 못 할 테니까.”
“나한테,왜,왜 이러는 거지?”
이광운은 고통과 공포에 전신을 떨었다. 비릿한 피가
축축한 흙 사이로 스며들었다. 태국영은 그의 질문을 무시 하며 싸늘한 눈초리로 여자를 돌아보았다.
“이 새끼 어떻게 해줘?”
여자는 공황상태에 빠져 아무 말도 못 했다. 혼탁하게 흐린 눈은 초점이 완전히 나가 있었고,목을 울리는 것은 여전히 귀곡성 같은 울음소리분이었다.
흐음,코를 울린 태국영은 온기 없는 얼굴로 이광운을 내려다보았다. 태국영과 여자를 번갈아 보느라 바븐 그는 그제야 제 앞에 드리운 사신의 낫을 섬뜩하게 깨달은 표정 이었다.
태국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휘둘렀다. 이광운의 두 개골 한쪽이 부서졌다. 돼지 멱따는 소리가 태국영이 틈 없이 조인 공간 속을 처절하게 울렸다. 태국영은 다시금 여자에게 힐긋 시선을 주었다.
“원하는 걸 말해. 나는 그걸 이뤄줄 능력이 있으니까.”
흐리명덩한 눈이 겨우 태국영을 마주 보았다. 울컥 솟 아오른 눈물이 창백한 뺨에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다섯 셀 동안 말하지 않으면 너는 복수의 기회를 영영 잃게 될 거야. 난 사실 깔끔한 걸 좋아하거든. 고문하듯이 죽음의 조각을 조금씩 먹이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지만,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줄게.”
태국영은 나긋하게 숫자를 옮었다. 셋을 불렀을 때,여
자는 젖은 눈과 립스틱 번진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고통스럽게.”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마치 바람이 속삭이듯 희 미한 음성이었으나 태국영의 예민한 귀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방울처럼 흐르던 눈물이 폭포수처럼 그 부피를 늘 렸다.
“태어난 걸 저주할 정도로 고통스럽게! 내가 그런 것처 럼!”
여자는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리며 바닥에 몸을 숙였 다. 상처투성이 손이 흙바닥을 헤집고 그 위로 해쓱한 얼 굴이 묻혔다. 훤히 드러난 다리와 젖가슴을 가릴 정신도 없이,그렇게 섧게 울부짖었다.
태국영은 나직이 한숨지었다. 그리고 이광운을 내려다 보며 어렴풋이 웃어 보였다.
“어쩌지. 그렇다는데.”
“이,이러고도 무사할 줄……아악!”
태국영은 가차 없이 주먹을 휘둘러 이광운의 늑골을 뚫 었다. 단숨에 폐가 뚫리며 시벌건 피가 샘솟았다. 이광운 은 끅끅 바람 새는 소리를 흘리며 턱을 젖혔다.
“나는 당연히 무사하지. 혹시 누가 널 구하러 올까 기대
하고 있어? 그래,간절하게 기도해 봐. 그놈도 네 지옥 가 는 길동무로 딸려 보내줄 테니까.”
태국영은 비릿하게 조소했다. 핀에 꽂힌 곤충처럼 사지 를 움직일 자유를 잃은 이광운은 목에서 피거품을 붐어냈 다.
태국영은 갈고리처럼 구부러진 손가락 끝으로 그의 뚫 린 늑골 사이를 휘저었다.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하는 뼈 와 피부조직은 태국영의 해부에 너무나도 무력하게 다시 금 벌어지길 반복했다.
“아가씨. 안볼 거야?”
태국영이 다감하게 속삭이듯 건넨 말에,여자의 눈이 어둠 속에서 궤적을 남기며 떠올랐다. 두려움과 분노,안 도와 증오,온갖 감정들이 어지러이 얽힌 눈동자였다.
“맨손으로 산짐승 내장 휘저어 봤어? 이거 되게 불쾌 해. 아가씨 때문에 내가 이 짓거리 하고 있는데 똑똑히 봐 야지.”
태국영은 피가 뚝뚝 흐르는 손을 허공에 올리며 미간 을 찌푸렸다. 그의 손은 마치 검붉은 장갑을 낀 듯했다.
“보,볼게요…… 볼게요. 볼 거예요.”
이윽고 그녀는 마치 각오한 것만 같았다. 전신을 발작 하듯 떨면서 대답했다. 실핏줄이 터지고 명들어 부은 눈꺼
풀에 바짝 힘을 주었다.
태국영은 착실하게 이광운을 분해했다. 손가락뼈를 하 나하나 으스러뜨리고,턱을 부숴 이를 뽑아내고,배를 뚫 어 장기를 끊어냈다. 이광운은 산 채로 도축당하고 있었 다. 그 와중에도 심장은 멀정하게 살아 있어서 재생은 끊 임없이 이뤄졌다. 고통은 영겁처럼 이어질 듯했다.
급기야 이광운은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걸했다. 벌레처 럼 바르작거리며 손상된 부위에 피를 보내지 않으려 애를 썼으나,그것은 의도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멀정한 정신으로 저 아가씨를 겁탈하는 동안, 낄낄거리고 웃기나 했겠지. 본능대로 좆 질이나 하면서 말 이야.”
비참하게 꿈틀대는 이광운을 내려다보는 태국영의 눈 은 도살자처럼 무감하고 냉정했다.
“세상사 참 재밌지. 그 본능이 이제는 널 맘대로 죽지 도 못하게 하고 있으니.”
이런 걸 자승자박이라고 하던가.
태국영은 천사처럼 웃으며 악마처럼 잔인한 눈을 번득 였다. 그의 손은 이광운의 하복부를 뚫었다. 이광운은 이 제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태국영의 손이 칼날처럼 그 의 아랫배를 갈라 내렸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반쯤 발기
해 있던 성기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뭉개졌다.
잔혹한 고문이 길게 이어지는 동안 그 누구도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단풍이 물들기 전의 초가을이긴 했지만 낮에는 여전히 더웠다. 폭염이 휩쓸고 간 여운이 9월 중순을 훌쩍 넘어서 까지 이어지는 중이었다. 몸에 열이 많은 아이들은 낮 동 안 야외 풀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이사를 오던 첫날부터 오늘까지 사흘 내내 꼬박 그랬다.
이제 여은태는 수준급으로 물살을 갈랐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수영장 밑바닥을 잠영으로 부드럽게 헤치고 다니다 허공으로 근사하게 솟아오르기도 했다. 에메랄드 빛 물방울을 사방으로 부리고 다시 수면을 뚫고 들어가는 은빛 짐승에게 태이경은 지치지도 않고 찬사를 보냈다.
“형아 최괴 되게 멋있어!”
물론 여은태는 그럴 때마다 더 신이 났다. 태이경이 그 큰 눈에 반짝반짝 선망을 담고 박수를 짝짝 치는 것만 봐 도 힘이 났다. 물속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응원에 힘입어 한참 물 쇼를 해 주다 녀석에게 헤엄쳐 갔다. 그리고 풀장
위에 걸터앉아 있던 녀석의 발목을 아프지 않게 물어 끌어 내렸다.
푹 빠졌다가 수면 위로 올라온 태이경은 제 다리 사이 를 파고드는 짐승에의 등에 몸을 실었다. 쭉 뺀 고개를 얼 싸안자 여은태는 부드럽게 물을 가르며 너른 풀장을 유유 히 헤엄쳤다.
“우리 집 좋지,형아?”
[응. 좋아.]
진심으로 좋았다. 적막에 익숙한 혼자만의 시간이 이곳 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주변은 신기한 것들로 가득했 고,전력으로 질주할 수 있을 만큼 광활한 정원도 있었다. 힘껏 도약해서 뛰어올라도 앞을 가로막는 것이 없었다.
방문 교수와 태이경이 공부를 할 때에도 곁에 있을 수 있었다. 옆에서 동그마니 몸을 말아 함께 수업을 듣고,함 께 낮잠을 잤다. 처음에는 저를 별세계 외계인처럼 보던 고용인들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제법 자연스러운 태도 를 보였다.
“도련님. 이제 그만 나오세요. 삼십 분 뒤에 교수님 올 시간이에요.”
유모가 멀찍이에서 소리쳤다. 여은태는 태이경을 등 뒤 에 태우고 풀장 위로 뛰어올랐다. 태이경이 훌쩍 내려와
유모에게 달려갔다. 커다란 타월을 가지고 나온 그녀가 아 이의 작은 몸을 돌돌 말아주고는,곁에 선 고용인이 들고 있던 다른 타월을 가져와 여은태의 등허리에 올려주었다. 몇 차례 몸을 흔들어 물기를 날리기에 열중해 있던 여은태 는 이제 익숙하게 그 손길을 받았다.
“자,두분 도련님 씻으러 갑시다.”
유모가 앞장서고 두 아이가 그 뒤를 따르려 할 때였다.
“여 가 꼬맹이는 두고 가.”
묵직하게 날아온 저음에 셋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3 미터 깊이의 풀장에서 홀로 고고하게 수영을 즐기던 태국 영이 풀장 테두리의 타일에 팔짱 낀 팔을 올려두고 있었 다-
물기에 젖은 얼굴은 태양광을 반사하며 빛이 났다. 머 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진 물이 그의 쇄골에 고였다가 흘러 내리는 순간,그는 한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우아하게 물 에서 나왔다.
확실히 잘 나기는 무지 잘 났다니까.
여은태는 속으로 쳇 혀를 차며 생각했다. 무늬 없이 새 카만 수영복 하나 달랑 입은 그의 몸을 질투 섞어 노려보 았다. 그의 온몸에 붙은 근육들은 단단함은 물론이고 이상 적인 비율과 중량을 갖고 있었다.
“아빠,형아는 왜요?”
“뭐 좀 테스트해 볼 게 있어서. 넌 유모랑 들어가서 수 업 준비해.”
“알겠어요. 형아,이따 봐.”
[응. 공부 잘하고 있어. 원지 모르겠지만 끝나면 바로 갈게.]
유모가 태이경을 데리고 들어갔다. 태국영은 그 자리에 서 젖은 몸을 대강 타월로 훔쳐낸 뒤 가운을 걸쳤다. 그가 앞장서서 걸었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동여매지 않 은 앞섶이 양쪽으로 나풀거렸다. 테라스 문으로 향하는 그 의 뒤를 따르며 여은태는 의아한 듯 물었다.
[왜 들어가? 나 변이하는 거 봐 주려는 거 아니었어?]
“아니. 오늘은 네가 좀 해 줘야 할 게 있어. 따라와.”
문밖에서 한 번 더 자잘한 물기까지 털어낸 여은태는 잠자코 태국영의 뒤를 쫓아갔다. 그는 2층의 시어터룸으 로 들어갔다. 어제 이승도와 애니메이션을 볼 때 한 번 와 봤던 터라 여은태는 더욱더 어리둥절했다.
[설마 나랑 오붓하게 영화 보자는 건 아닐 테고,뭐야?]
촤아악.
태국영은 에어컨을 가동시킨 뒤 암막 커튼으로 창을 꼼 꼼하게 가리고 돌아섰다. 인간의 시력으로는 사물의 윤곽
조차 분간 못 할 아득한 어둠이었다. 그러나 특별히 안력 을 돋울 것도 없이 태국영의 눈엔 심드렁하게 뒷발로 귓가 를 긁는 녀석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은신해 봐.”
뜬금없는 말이었다. 여은태는 고개를 갸웃했다. 태국영 은 폭신한 가죽 소파 등받이에 엉덩이를 걸터앉아 팔짱을 꼈다.
“해 봐. 뚫는 법좀 찾아보게.”
[왜? 아버지나 형이랑 싸울 일 있어?]
“그럴 수도 있고,아닐 수도 있고.”
대놓고 너희 가문 비기 약점 좀 찾자 하면서 참으로 당 당한 태도였다. 그러나 어차피 가문 따위 제 알 바도 아니 었고,두 쪽이 싸운다면 저는 당연히 태국영을 응원해야 했다. 지키고 싶은 것들이 온통 그에게 속해 있으니 떨떠 름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은태는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터럭 하나 안 남기 고 완벽히 자취를 감췄다. 몇 달 내내 변이에 애를 먹고 있 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정말 하나도 안 보이네. 냄새도 감쪽같이 없어지고.”
태국영이 못마땅하게 중얼거렸다. 가늘게 뜬 그의 눈에 서 서슬 퍼런 예기가 흘렀다. 몇 번이나 감각을 곤두세워
보아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너,움직여 봐.”
[움직이면 금방 알 걸? 발소리는 못 숨겨.]
“너만 못하는 건아니고?”
여은태는 불쾌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제껏 똑똑한 척은 혼자 다하더니 왜 갑자기 명청한 소리야? 은신의 기본은 현혹이야. 말 그대로 속여서 숨는 거지 내 몸을 진짜 없애는 게 아니라고.]
“여제운은잘 숨기던데.”
[이렇게 적막한 곳은 아니었겠지. 이 지경으로 방음공 사를 철저히 한 곳에 데려와서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이 정도로 소리를 분산시킬 소음이 없는 곳에서는 절대 당신 귀를 속일 수 없어. 그건 내가 아니라 여 가의 누구라도 마 찬가지일 거고.]
짜증 나게 하고 있어,여은태는 토라진 듯 투덜대며 제 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님을 토로했다.
[생각을 해 보라고. 그렇게 완벽한 은신이 존재했다면 아마 여 가의 가주는 내내 황제처럼 공포정치를 해 왔을 거야. 실체마저 없앨 수 있다면 살기라고 못 숨기겠어? 맘 만 먹으면 누구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는데 무서 울 게 뭐가 있겠나고.]
태국영은 팔짱 낀 그대로 한 손만 올려 턱을 쓰다듬었 다. 여은태의 덧붙인 말들은 모두 그럴싸해서 절로 고개 가 끄덕여졌다.
미행과 암살에 특화된 능력이긴 했으나 분명 저 같은 놈들을 상대로 결정적인 한 방을 휘두를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살기를 드러내 습격을 하는 순간 노출이 되기 때문이다. 그 짧은 간극을 붙들어 역공을 하는 것은 어렵 지 않았다.
은신의 기본은 현혹이다. 실체는 없애지 못한다…… 저희들이 냄새를 숨기는 것도 그런 원리이기는 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태국영은 다시 창가로 걸어가 커 튼을 반쯤 걷어냈다. 빛이 쏟아져 들어오자 엉덩이만 붙이 고 앉아 있던 여은태의 모습이 낱낱이 드러났다.
태국영의 눈에 비치는 여은태는 마치 얼룩진 유령 같 은 형상이었다. 중간중간 실체가 얼핏 보이다가도 그 부분 이 사라지면 다른 곳에서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다.
“빛이 있을 때는 현혹이 불가능한가?”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어. 아주 열은 그림자라도 나 는 몸을 욱여넣어 숨을 수 있고. 그런데 다들 그런지는 모 르겠어.]
“한번 해 봐.”
여은태는 태국영의 그림자로 풀쩍 뛰어들어갔다.
[어때? 감쪽같지?]
정말 감쪽같았다. 태국영은 신기한 장난감을 발견한 어 린애처럼 발을 툭툭 굴러 보았다. 그러다 이리저리 움직여 도 보았는데,도대체 무슨 수를 쓰는 것인지 터럭 하나 발 견할 수가 없었다.
이건 아마 여은태라서 가능한 정도일 거다. 여제운도 여군호도 이 빛 속에서라면 절대로 이렇게 완벽하게 숨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실체는 없앨 수 없다… …
다시금 그 말을 곱씹던 태국영은 짧게 공기의 파동을 만들어내 주변으로 날려 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태국 영의 짙은 눈시울이 일순 조금 커졌다가 다음 순간 갸름하 게 좁아들었다. 제가 불시에 뒤틀어 놓은 공기의 흐름이 부자연스럽게 꺾이는 곳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모든 감각은 속여도 실체는 그 자리에 있는 법이 지.,,
불완전하긴 하지만 적어도 의심스러운 곳을 탐색을 할 방법은 찾은 것 같았다.
[이제 끝났으면 나도 좀 봐줘.]
태국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장 등을 켰다. 자연광을
짓누르는 인공조명이 실내를 환하게 밝혔다. 여은태는 몸 을 낮추고 신중하게 정신을 집중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 던 기혈이 점차 인위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요즘 저 커다란 발바닥으로 낑낑대며 인체해부학 책을 유심히 보더니만,확실히 인간에 가까운 흐름을 보이고 있 었다. 여은태는 미간을 콱콱 좁히며 뒷발을 들썩였으나 결 국 오늘도 가장 마지막 문턱은 넘지 못했다. 녀석은 시무 룩하게 몸을 세우며 물었다.
[뭐가 문제인 것같아?]
“잘하고 있어. 이론적으로는 아주 근접하게 가서 더 연 습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다만 이제부터 너는 등대가 필 요해 보여. 승도 일 관두면 품에 안겨서 열심히 노력해 봐. 그때그때 어긋나는 곳이 생기면 승도는 본능적으로 그걸 알아. 아마 그 균열의 정체가 원지는 모르겠지만 바로바 로 잡아줄 수는 있을 거야.”
[선생님이 그런 것도 해줄 수 있어?]
“달리 등대겠어?”
[역시 우리 선생님 최고다.]
태국영은 픽 웃으며 방문을 열었다. 여은태는 먼저 나 간 그를 훌쩍 앞질러 튀어 나갔다. 또 하나의 희망을 발견 한 녀석은 활기차게 태이경의 공부방을 찾아 들어갔다.
독서토론 중일 태이경의 곁에 동그마니 몸을 말고서 줄 기차게 꼬리를 흔들 녀석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심심하 지도 않고 귀동냥으로 학문적 지식도 얻을 수 있으니 녀석 에게는 일석이조일 터였다.
어디 갖다 붙일 데가 없어 여가 놈을,태호연이 분개하 던 목소리가 불현듯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그러게,왜 하 필 여 가나. 태국영은 혀를 찼다.
건방진 내숭쟁이이긴 하지만 여은태는 최상등품 수컷 이었다. 강한 피를 가진데다가 겉껍데기도 출중했다. 이승 도의 보살핌이 녀석의 정신을 건강하게 만들어 주고 있 고,태이경의 사랑스러운 에너지가 그에 더 긍정적인 영향 을 끼치고 있었다.
녀석의 유일한 홈은 여군호의 아들이라는 것.
태국영은 오늘 저녁 만나기로 약속을 잡아 둔 여군호 를 떠올리며 미간을 그었다. 그 홈이 너무 컸다.
이승도는 조금 울적했다. 현실적으로는 되도록 발리 관 두는 편이 낫다는 걸 알면서도,일사천리로 진행되는 퇴사 가 너무 아쉬웠다. 사직서를 낸 지 하루 만에 후임 수의사
가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보통은 정식으로 채용공고를 내고 며칠간은 면접을 보 는 것이 정상이었다. 이승도도 인수인계까지 넉넉히 3주 는 잡고 있었다. 그러나 원장은 굳이 그럴 필요 없다며 다 음 날 바로 제 대학 후배를 직접 꽂아 넣었고,이승도는 어 제부터 급작스레 인수인계를 시작해야만 했다.
‘이재혁입니다.’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수의사는 초등학 생 자녀가 있는 30대 후반의 남자였다. 체구가 크고 성격 은 서글서글한 편이었다. 저처럼 낯가림도 없어 사육사들 과도 금방 친해진 그는 배우는 것도 발라 가르쳐주는 것들 을 잘 기억했다. 확실히 뒷일을 맡기고 떠나기에는 적임자 였으나 그만큼 동물들과 일찍 이별해야 했기에 마음이 영 심란했다.
“태산아,안녕.”
이재혁은 그 큰 덩치를 쪼그려 앉아 태산이에게 인사했 다. 녀석은 낯선 인간의 모습에 잔뜩 털을 세우며 이쪽을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몇 걸음 뒤에서 힘없이 서 있던 이 승도는 어설피 웃으며 손만 흔들어 보였다. 태산이는 이재 혁을 못마땅하게 올려다보다 비잉 돌아 달려왔다.
[선생님!]
이승도는 얼른 바닥에 앉아 팔을 벌렸다. 그새 또 우람
해진 녀석은 이제 몸집이 거의 태이경만큼이나 커졌다. 이 제 녀석이 제대로 긁으면 살점이 떨어져 나갈 수도 있을 정도였다.
“태산아.”
[보보!]
저놈은 어째 끝까지 저러나며,따라왔던 사육사가 혀 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승도는 조금 눈치를 보면서도 녀석의 주둥이에 쪽쪽 입을 맞췄다. 그저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녀석을 보자니 기쁘면서도 마음이 어수선했 다.
[응? 선생님,냄새가 이상해.]
녀석이 가슴팍에 코를 묻고 킁킁거렸다. 아마 뱃속에 서 조금씩 움트고 있는 아기 때문일 것이었다. 역시 짐승 들의 본능은 예민했다.
이승도는 속으로 괜히 뜨끔했지만 겉으론 빙그레 웃기 만 했다. 보는 눈이 많아 의심스런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마지막 작별의 날에는 꼭 홀로 동물원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인사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놀자. 놀자. 응?]
“놀고 싶어도 오늘은 안 돼. 선생님이 바빠.”
무난히 대꾸를 해 주고 녀석을 다시 안으로 옮겨두었
다. 방금 있던 자리에 놓아두자 녀석은 싫다는 듯이 옷자 락을 물어 왔다. 이제 새 수의사에게 적응을 해야 하니 평 소처럼 응석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이 또한 마음을 무겁 게 하는 요소였다.
이제 이 분이 네 건강을 봐 주실 거야.
이승도가 속으로 우울하게 중얼거린 말을 사육사들이 대신 전했다. 이재혁 역시 눈도장을 찍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태산이는 오매불망 이승도만 바라보며 안아달라 고 떼를 썼다. 보통 동물들은 이놈이 저놈이고 저놈이 이 놈이라,이렇게 유별나게 구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나 마 나래의 치타 새끼들과 태산이,영웅이,수달 밤톨이 부 부가 제일 극성스럽고,나머지 중 일부는 저를 특별히 좋 아하는 정도였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그랬다. 제가 좋다고 하는 애들 이 더 예쁘고 애릇한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안 떨어 지려는 녀석을 억지로 떨어내 놓고,나머지 아이들도 한 번씩 돌아본 뒤 진료실로 돌아왔다.
“아우. 원장님한테 얼핏 말은 전해 들었는데 정말 유독 동물들이 잘 따르네요.”
“어……제가 좀만만한가 봐요.”
이승도는 진료차트를 끼내 들며 그저 어색하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이재혁은 경손이 지나치다며 어깨를 툭 쳤
다.
“한때 유명하셨잖아요. 이 선생 얼굴 꽤 알려졌던데.”
“……금방 잊혔는데요,뭘.”
이승도는 조금 얼굴을 붉혔다. 아가들 상태를 보느라 왔다 갔다 하는 동안 관람객이 우연히 찍은 것 같았다. 그 사진이 한동안 조금 돌아다니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일 정 도도 아니었다.
“일단 애들 병력 기록들부터 말씀드릴게요.”
이승도는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이재혁은 네에,하며 집중했다. 경력도 오래되었고 기억력도 좋은 편이라 한 번 설명해 주고 차트를 통째로 넘겨주었다.
“설명해 드릴 건 대강 한 것 같은데,여기 자료 좀 둘러 보세요. 궁금한 건 물어보시고요.”
“아. 어디 가시게요?”
“네. 배가 좀 고파서 뭐 좀 먹고 올게요.”
원래 근무 중이라면 눈치 보일 일이지만 이제는 후임 을 구한 예비 퇴사자였으니 이 정도는 괜찮았다. 이재혁 은 소처럼 끔뻑이는 눈으로 벽시계를 힐긋 보았다. 점심 먹은 두 시간밖에 안 됐는데,하는 속내가 훤히 읽혀 조금 민망했다. 점심을 어마어마하게 먹고서도 부족해 매점에
서 군것질을 하던 모습을 어리벙벙하게 보던 그였다. 이승 도는 ‘제가 요새 살이 찌려는지 계속 배가 고프네요.’ 대 강 둘러대고 진료실을 나왔다.
“우리 둘째정말잘 먹네.”
아직 손발도 제대로 안 만들어졌을 녀석이지만 잘 먹으 니 그래도 부듯했다. 이경이 때엔 오히려 너무 입맛이 없 어서 문제였던 터라 지금은 마냥 행복했다. 이승도는 미 리 점찍어 둔 식당으로 가볍게 발을 옮겼다.
“성문 씨. 돈가스 먹어요?”
서너 걸음 뒤를 따르던 태성문이 탁탁 다가와 곁에 섰 다. 말을 걸었다는 것은 동행하자는 의미였다.
“음. 식용유 느낌을 딱히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먹긴 합 니다.,,
“다행이다. 그럼 같이 먹어요. 내가 사줄게요.”
“예에. 형수님께서 사주신다면 풀이라도 뜯어 먹어야 죠.,,
이승도는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밖에서는 그런 호칭 삼가주세요. 되게 민망하네요.”
형수님을 형수님이라 부르지 못하게 되었지만 태성문 은 그대로 수긍했다. 둘은 식당으로 가 자리에 앉았다. 날 이 선선해지니 실내는 조금 복작거렸다.
“저 스테이크 먹어도 됩니까?”
스테이크가 있었나 싶어 이승도도 새삼 메뉴판을 보았 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젓고 말았다.
“이거 떡갈비인데요,별로 맛없어요. 여긴 돈가스가 제 일 나아요.”
“그럼 그걸로 하겠습니다.”
계산은 이승도가 했지만 받아오는 것은 태성문이 했다. 태성문은 조금 입에 안 맞는지 두어 조각 먹다가 제 것까 지 드시라며 넘겨주었다. 이전 같았다면 제 몫만 깔끔하 게 해치우고 식기를 놓았을 텐데,지금은 2인분 정도는 가 분하게 여겨졌다.
“성문 씨 어머님도 저처럼 잘 드셨다고 하던가요?”
작게 목소리를 죽여 묻자 태성문은 씨익 웃었다.
“제 어머님은 저희 과입니다. 우리 태 가는 보통 혼혈 을 잘 안 만들거든요. 당연히 매일매일 도착하는 신선한 소고기를 드셨지요.”
“아,그게 전통인가요?”
“글쎄요. 전통이라기보다는 좀 미신에 가깝나? 그냥 우 리끼리 결합해야 더 강한 아이가 나온다,뭐 그런 생각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이승도의 어머니는 생전에 많은 지식을 남겨주진 않았
다. 그저 그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끝없이 주지시키는 것 에 치중했다. 그녀의 일생 목표는 그들과 연관되지 않는 것이었다.
만의 하나를 대비해 많은 것들을 배워두었더라면 더 좋 았을 테지만 이제 와 부질없는 생각들이다. 이승도는 입 에 착착 감기는 돈가스를 열심히 집어 먹으며 고심하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말문을 열었다.
“저,궁금한게 있는데…….,,
“네. 뭐든.”
“제가 그쪽으로는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등대를 각인 하면 그건 영원히 가는 건가요?”
태성문은 물을 마시다 다소 황당한 표정을 보였다.
“하늘 아래 영원한 게 어디 있답니까. 인간들 사이에 오 고 가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물론 그것에 비하면 저희들 쪽이 훨씬 진득하 긴 해도요.”
이승도는 저도 모르게 포크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사실 이런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는 조금도 예측하지 못했 다.
“하지만 국영이는…….,,
“에이. 가주님을 일반화에 포함하시면 곤란합니다. 그
분은 정말 여러모로 되게 별종이시니까요. 저도 가문의 역 사서를 보진 않았으니 자세히는 모릅니다만,우리가 고대 부터 철저하게 일부일처제였다는 건 확고부동한 사실입니 다. 등대에게 감화된 모든 금수들이 등대를 절실히 사랑했 더라면 우리 일족은 이미 멸족했겠죠. 등대가 아니면 혼인 도 하지 못했을 거고,아기도 낳지 못했을 테니까요.”
“물론 아주 심각하게 감화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 다. 사실 그런 애들은 등대들이 작정하고 홀린一 홈,아 니,그러니까 유대감이 꽤 깊어진 경우였고,정말 정신 줄 놓고 사고를 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는 합니다만.”
태성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니까 말씀드렸잖습니까. 인간들의 사랑처럼 쉽게 변질되지는 않지만,사실 그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요. 우리도 얼마든지 연애를 하고 헤어지고 그중에서 잘 맞는 상대와 혼인을 합니다. 이혼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 만 아예 없지도 않고요.”
이걸 기뻐해야 하나. 아니면 불안해해야 하나.
이승도는 막상 대답을 들었으나 갈피를 잡을 수 없었 다. 태국영이 저에게 지고지순하게 쌓아온 감정들이 그저 본능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기뻤다. 그러나 반대
로,그것이 영원을 담보로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버렸다.
아,인간의 마음이란 참 간사하구나.
그 맹목적인 애정의 계기를 우울해하면서도 변하지 않 을 것을 굳게 믿으며 안심했던 스스로를 깨닫는 것이었다. 태국영에게는 나밖에 없다,그렇게 자만했던 것이 사실은 언제든 부서질 수 있다는 소리였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이렇게 비겁하고 형편없는 인간이었다.
갑자기 식욕이 떨어져 포크를 완전히 내려두었을 때였 다. 호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파르르 진동했다. 생각 없이 꺼내 들었다가 발신자를 보고 조금 놀랐다.
이 타이밍에 애가 전화를 했어. 이거 우연일 리가 없겠 지?
이승도는 미간을 찌푸리며 태성문을 힐긋 노려보았다. 태성문은 유리벽 너머 먼 산만 보며 딴청을 피웠다. 그 태 도로 확신했다. 저 몸 어딘가에 또 도청기 따위가 숨어있 는 게 분명했다.
‘‘왜,이 프로 스토커야.”
괜히 무뚝뚝하게 전화를 받았다. 태국영은 나직이 웃었 다.
《우리 승도,서방님 변심할까 달달 떨고 있을 것 같아
서 전화했지.〉〉
역시나였다. 이승도는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이며 자리 에서 일어났다.
“너 자꾸 이렇게 엿들을래? 하루 종일 나만 스토킹해?”
《아나. 나정말가끔 들어. 진짜야.〉〉
“…정말이야?”
《응. 통화하긴 좀 그렇고 목소리는 좀 듣고 싶네 이럴 때?》
문을 열고 나오자 셔츠 사이를 파고 들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이승도는 곧장 진료실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 기며 말했다.
“그래서 만족했어?”
《오늘은 아주 만족. 나중에 우리 승도 질투하는 것도 볼 수 있으려나 기대 중이야. 그간 잡아 놓은 물고기라고 너무 홀대를 받아서 말이지.》
“…내가 언제.”
《네가 말하면서도 좀 찔리긴 하지?》
뒷덜미를 간질이는 감미로운 목소리엔 웃음기가 가득 했다. 이승도는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리 떳떳 하지 못할 처지는 아니었다.
“나 너 구박할 자격 있었어. 이제 와서 그거 가지고 투
정 부리는 거 반칙이야.”
《이런. 이 기회에 우리 승도 미안해서 애교부리는 거 좀 볼까 했더니 다 틀렸네.〉〉
“…애교는 무슨. 끊는다.”
《끊지 마.》
태국영이 부드럽게 말했다. 귀에서 떨어뜨린 휴대폰을 그대로 다시 가져왔다. 이승도는 말없이 산책길을 따라 걸 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송보송한 구름 사이로 화창 한 햇발이 뻗어나오는 오후였다.
《그런 걸로 불안해하면 나 정말 화낼 거야.》
《배고프면 참지 말고 그때마다 지금처럼 뭐 사 먹어. 오 늘은 내가 갈 데가 있어서 성문이랑 애들이 에스코트할 거 니까 그렇게 알고.》
“…어디 가는데?”
《꼬맹이네 아빠 만나러. 늦지는 않겠지만 기다리지 말 고 먼저 밥 먹어. 오늘 유모가 해산물 잔뜩 들여왔는데 물 좋다고 아주 신났어.》
“알았어. 잘 다녀와.”
전화를 끊고 난 뒤 이승도는 그 자리에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소리 없는 비명이 손아귀 안에서 멤돌았다. 제가
방금 얼마나 어린애 같은 투정을 부릴 뻔했는지 깨달은 탓 이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발갛게 굳어들었다.
오후 늦게 동물원이 발칵 뒤집혔다. 영웅이가 우리를 탈출해서 사라졌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전담 사육사가 실 수로 문단속을 하지 못했고 그 틈을 타서 빠져나간 것 같 았다.
직원들은 헐레벌떡 동물원 안을 뒤지고 다녔다. 하필이 면 폐장시간 가까이에 벌어진 일이라 관람객은 드물었고 목격자 또한 나오지 않았다. 이승도를 포함한 모두가 녀석 을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119 안전신고 센터에서 뜻밖의 전화가 걸려온 것은 1 시간가량 헤매고 다녔을 때였다. 인근 산에서 원숭이 한 마리가 활보를 하고 다닌다는 등산객들의 제보가 이어지 고 있다며,혹시 동물원에서 잃어버린 원숭이가 없느냐 묻 는 내용이었다.
직원들은 곧장 제보가 들어오는 장소로 출동했다. 이승 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성문은 아주 멀찍이에서 따라붙 었다. 그가 너무 근접해 있으면 맹수 과의 냄새에 유독 예
민한 영웅이를 생포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저쪽으로 가 보세요. 저는 이 길을 쭉 따라 올라갈게요.”
이승도의 말에 이재혁은 네,하며 그 곰 같은 덩치로 민 첩하게 뛰어갔다. 이승도 역시 목이 쉬도록 영웅이의 이름 을 부르며 산길을 올라갔다. 가을을 맞은 산은 싱그러운 빛과 따뜻한 색깔이 공존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즐길 여유 는 없었다.
“영웅아! 선생님이야!”
곧 있으면 일몰이 닥쳐올 시각이었다. 어둠이 산을 집 어삼키면 찾기가 더 힘들어질 터라 마음이 조급했다. 겁 이 많은 영웅이는 숨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수준급이라 날 이 저물면 어디로 틀어박힐지 예측할 수 없었다.
우우우우웅
긴 진동이 호주머니 안에서 울렸다. 이승도는 상관하 지 않고 탐색에 박차를 가하려다가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 각에 얼른 전화를 받았다.
《형수님. 지금 계신 곳에서 오른쪽 대각선 위로 조금 올 라가면 그 원숭이 놈 있을 겁니다.》
냄새를 쫓아 뒤를 밟고 있던 태성문이었다. 태국영도 놀라울 만한 후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도 참으로 대단했
다. 이승도는 고맙다고 인사한 뒤 전화를 끊고 그의 말을 따라 걸음을 발리했다.
“영웅아! 어디 있내 선생님 왔어!”
연신 이름을 부르며 녀석을 찾아 헤맬 때였다. ‘선생 님……’하는 지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승도는 반색하 며 소리가 난 쪽으로 뛰어갔다. 영웅이는 높은 나무 꼭대 기에서 그렁그렁 눈물 매단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 었다. 이승도는 조심스레 접근하며 두 팔을 위로 뻗어 올 렸다.
“영웅아,선생님이야. 착하지? 이리 내려와.”
《선생님. 나 선생님이랑 갈래.》
“그래. 선생님이랑 가자. 이리 와.”
영웅이는 나무기둥에 사지를 동여매고서 서럽게 울었 다.
《나 선생님이랑 갈래. 나도 데려가. 선생님 없는 데는 싫어.》
이승도는 영웅이의 ‘데려가 달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 늦게 깨우쳤다. 헤어짐을 예감한 녀석의 투정에 가슴이 아 려왔다.
영웅이는 아무래도 수의사가 바뀐다는 걸 명확하게 인 지하고 있는 듯했다. 원래부터 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무조건 경계하고 피해 다니던 녀석이었다.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 영영 떠난다고 하니 동물원으로 돌아가 는 것이 너무나 싫은 것이었다.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될 만큼 건강이 좋지 않은 녀 석들 같은 경우에는 수의사인 제가 집에 데려가 돌볼 수 가 있지만,그것도 한시적인 허가였다. 영웅이는 집에서 키우는 것에 제약을 받는 원숭이는 아니었지만,태국영의 집은 녀석이 살기에 적절한 환경은 아니었다. 지나치게 강 한 맹수 과의 짐승들의 냄새가 진동하는 곳이었다. 지금이 야 저를 따라가겠다 고집을 피우고 있지만 막상 데려가면 스트레스로 시름시름 앓을 것이 분명했다.
“영웅아. 일단 내려오자. 해 지면 선생님 가야 해. 여기 무섭잖아. 곧 깜깜해질 텐데 혼자 여기에 있을 거야? 여 기 막 호랑이 사자 이런 거 나올지도 모르는데?”
이승도는 결국 거짓말을 섞어 회유했다. 영웅이는 맹수 들이 거론되자 금방 겁을 집어먹었다. 깜깜해지는 하늘을 부산스레 올려다보던 녀석은 슬그머니 나무기둥을 부둥켜 안은 팔에서 힘을 뺐다.
“옳지. 우리 영웅이 착하지.”
이리 온,이승도는 망설이는 녀석을 다정한 말로 격려 했다. 영웅이는 침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막 아
래로 뛸 태세였던 녀석은 별안간 번개같이 뒤쪽 나뭇가지 로 옮겨가더니 바짝 털을 세웠다. 벌벌 떨면서도 하악 하 악 경계하는 녀석이 의아해 왜 그러나 물으려던 때였다.
그 찰나의 순간 이승도는 영웅이가 나무기둥에 몸을 숨 기고 제 뒤쪽을 훔쳐보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뒤에서 엄습해오는 것도 느꼈다.
바늘 같은 소름이 척추를 따라 내달렸다. 이승도는 제 뒤를 점령한 것의 정체를 알았다. 본능적으로 온몸의 근육 이 수축했다.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려 입을 벌렸다.
터억.
그러나 작은 비명 하나 내뱉지 못한 입술은 커다란 손 바닥에 갇혔다. 등을 감싸고 허리를 감싼 남자의 체온은 태국영만큼이나 뜨거웠다.
이승도는 긴장으로 정처 없이 떨리는 눈을 내렸다. 가 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검은색의 광택 없는 장갑이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감각에 걸려든 것은…….
남자의 더운 숨결이 닿을 수 없는 살갗 대신 목덜미 위 를 배회했다. 그는 연신 큰 들숨을 마셨고,한 줌의 공기 가 그의 기도를 넘어가는 소리는 마치 목울음 같았다. 전 신을 뒤덮은 떨림은 조금씩 잦아들었으나 흔들리는 눈동 자는 일몰 근처의 어스름을 헤매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두려움은 증발했다. 공허를 채운 것은 얄팍한 동정과 걱정분이었다. 이승도는 딸꾹질을 하듯 불규칙한 숨을 한 참 목 뒤로 넘긴 뒤에야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러나 이승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고,그저 움찔거리던 입 술을 도로 닫아버 리고 말았다.
이승도는 용기를 내어 뒤를 돌았다. 마치 까마귀처럼 온몸을 검게 칠한 남자가 연인처럼 가깝게 서 있었다.
차이나 칼라의 재킷과 푹 눌러쓴 모자,그리고 마스크 까지 더해져 그의 피부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모자와 마 스크 사이에서 강렬하게 빛나는 생명의 증거가 자신을 또 렷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천천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의 눈길이 셔츠 속에 가려진 이승도의 복부를 더듬었다.
물 같은 시선은 끈적거림 없이 고요했다. 이승도는 무심결 에 태아가 자리 잡은 하복부를 한 손으로 덮어 눌렀다. 느 낌 탓인지 응고된 열기가 손금을 찔러왔다.
“건강해 보여 다행입니다. 당신도,당신의 아기도.”
짙게 갈아놓은 먹처럼 불투명한 감정을 담은 눈동자가 다시금 곧게 마주쳐 왔다. 그는 한 손으로 모자를 벗고 마
스크도 뜯어내듯 벗어내었다. 그리고 아주 정중하게 고개 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이승도는 이 남자의 정수리를 이렇게 내려다보게 될 줄 은 몰랐다. 강직하고 단단하게만 보였던 목덜미가 훤히 드 러났다.
“당신을 직접 만나 꼭 이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미안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요.
이승도는 그것을 물으려 했지만 의지를 배반하고 튀어 나간 말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약속해 주실 수 있나요.”
너무 함축적인 말이었나 싶었지만 그는 용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가 굽혔던 상체를 바로 하며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즉답했다.
“볼품없는 담보지만 제 이름 석 자를 걸고 약속드립니 다. 당신께서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한,절대 당신께 손 을 뻗지 않겠다고.”
“믿을게요.”
수려하게 빚어진 가면 같았던 그의 얼굴에 일순 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때 문득 기이할 정도로 바람 같았
던 그에게서 체취가 전해져 왔다.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 이 하살처럼 스쳐 지나갔다.
“고맙습니다.”
그는 다시금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홀연히 자취를 감 추었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수분이 바짝 마른 낙엽들이 바스러진 채로 나뒹굴었다. 20초도 채 머물지 않았던 남 자의 흔적은 가을바람이 빠르게 지워나갔다.
“형수님.”
이승도는 멍한 얼굴을 돌렸다. 태성문이 딱딱하게 굳 은 안색으로 다가와 있었다. 태 가의 핏줄들에게서는 기본 적으로 불 냄새가 났다. 뜨겁고 어두운 화염이었다. 반면 그간 제가 만나 보았던 여 가의 핏줄들에게선 눈 냄새가 났다. 그래서 태국영과 여은태를 양쪽에 끼고 있으면 불 과 물의 냄새가 동시에 났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태성문은 지금 굉장히 불쾌한 상태였지만 그보다는 간 담이 서늘했다. 여제운이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존재를 감 추는 것에 능했기 때문이었다.
태성문이 여제운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그가 ‘고 맙습니다.’라고 말하기 직전에서였다. 한 순간 여제운은 무언가를 계기로 동요했고,그로 인해 마음의 평정이 흔들
리며 그의 공간이 산산조각 난 것이었다. 태성문은 그를 감지한 순간 미친 듯이 쇄도했으나 도착했을 때 여제운은 희미한 체취만 남기고 사라진 뒤였다. 만약 여제운의 심기 가 흔들린 계기가 살기였다면,자신은 그를 막을 수 없었 을 것이었다.
태성문은 매우 반성했다. 남강우의 접근을 족족 저지하 며 제가 오만해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승도가 아무리 부 탁을 하더라도 이 정도로 거리를 두는 것은 삼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뇨…… 없어요.”
“다행입니다. 놈이 무슨 짓을 하지는 않던가요.”
“그냥…… 아니에요. 별거 없이 그냥 돌아갔어요.”
태성문은 약간 미심쩍은 듯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승 도는 의연하게 그를 마주 보았다. 탐색하는 듯했던 눈초리 가 온화하게 바뀌고,그가 말했다.
“저는 형수님 곁을 떠날 수가 없으니 다른 애들 시켜서 놈을 찾겠습니다. 저 원숭이는 제가 수거할 테니 이만 내 려가시지요.”
그렇게 말하고 영웅이를 포획하려 막 몸을 돌렸던 그 의 소매를 이승도가 다급하게 잡아챘다. 태성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국영이한테…… 오늘 일 국영이한테 보고하실 건가 요?”
“그야 당연하죠.”
이승도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즉답하는 그의 소매 깃 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제가 할게요.”
태성문은 멀뚱히 눈만 깜박였다. 얼핏 무슨 말인지 이 해가 안 가는 눈치였다. 이승도는 한 단어 한 단어에 또박 또박 힘을 실어 말했다.
“제가 직접 말할게요. 그러니까 성문 씨랑 다른 분들은 그냥 가만히 계셔주시면 안 될까요.”
태성문은 잠시 침묵했다가 대꾸했다.
“저는 형수님께 일어난 일을 가주님께 모두 보고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혹시 놈을 감싸주시려는 겁니까.”
“아니,그런 건 아니에요.”
이승도는 고개를 흔들었다.
“단지 제가 직접 말하고,직접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 래요.”
“정말이에요. 하나도 빠짐없이 말할게요. 저도 성문 씨
나 다른 분들 속이는 거,저 때문에 국영이한테 또 혼나는 거 싫어요. 그거 다시는 안 할 거예요. 그러니까 저를 믿 고 제게 맡겨주세요. 이번 한 번만.”
고심하는 듯 미간을 좁히고 한참을 서 있던 그는 결국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 소매를 잡 은 이승도의 손을 부드럽게 떨어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가주님께 말씀드려 주십시 오. 숨길 일이 아닙니다. 숨겨서도 안 될 일이고요.”
“네. 네,그럴게요.”
태성문은 표정을 풀고 ‘저 원숭이는 어쩔까요.’하고 물 었다. 이승도는 까맣게 잊고 있던 영웅이를 그제야 떠올리 며 고개를 들었다. 영웅이는 울지도 않고 나무기둥에 딱 붙어 달달 떨고 있었다. 태성문이 이 자리를 떠나도 경계 심 많은 녀석이 곧바로 내려올 리가 없었다.
“성문 씨가 좀 잡아다 주시겠어요?”
“기꺼이.”
태성문은 대답과 동시에 땅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영 융이는 귀가 찢어지도록 울며 잽싸게 도망치려 했으나 결 국 태성문의 손에 달랑 붙잡혀 오고 말았다. 이승도는 인 계받은 녀석이 필사적으로 품에 파고들어 오는 것을 내려 다보며 긴 한숨을 지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에게 강제
로 연행해 오라고 시킬 걸 그랬다.
“이 말썽쟁이 녀석. 다시 집 나가면 혼나.” 영웅이는 겁에 질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차는 뭘로?”
“얼음물이나 한잔.”
태국영의 대꾸는 무례할 정도로 짧았다. 여군호는 고용 인에게 얼음물 한 잔과 국화차를 가져오라 했다. 고용인 이 나가자 여군호는 푹신한 팔걸이에 팔을 괴었다.
“내일이나 모레 와도 됐을 것을,왜 굳이 오늘 보자고 했지?”
“주말은 가족들과 보내야죠. 우리 종주님도 아내분과 알콩달콩 쇼핑도 나가고 외식도 하고 그러는 게 낫지 않습 니까? 화창한 햇살 아래 저하고 껄끄러운 애기 나누는 것 보다는.”
태국영은 빈틈없이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여 군호 역시 미소로 답했다.
“껄끄러운 애기를 하겠다는 선전포고 같군.’ “그렇게 들렸나요?”
“충분히.”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우리 종주님 감 좋으신 거 하 루이틀 보나.”
“자네만 하겠나.”
긴 다리를 꼬고 마주앉은 두 남자 모두 얼굴에 단단한 외피를 뒤집어썼다. 눈과 입매의 웃는 모양은 무의미했다. 서로를 탐색하는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치며 몇 번이고 불꽃이 튀었다.
날 선 정적은 고용인이 돌아오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 다. 여군호의 앞에는 양각 무늬가 들어간 옥색의 다기세트 가,태국영의 앞에는 유리잔과 얼음이 담긴 자그마한 스테 인리스 통,그리고 물이 든 유리주전자가 자리했다. 태국 영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냥 물 한 잔 달랬더니,이거 다 처먹고 떨어지라는 거 야 뭐야.
정말 쓸데없이 갑갑한 집구석이었다. 애 같은 반항심 에 얼음만 하나 집어 어금니로 아작아작 깨물어 먹었다.
그에 비해 여군호는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손놀림으로 차를 따랐다. 말린 국화 꽃잎이 뜨거운 물에 불어나며 은 은한 향내를 붐어 냈다.
“자네 안사람이,一홈. 이렇게 불러야 되나?”
“뭐 이 새끼 저 새끼만 아니면 대강 편할 대로 부르셔 도 됩니다. 우리 승도가 왜요.”
“이름을 직접 부르는 건 너무 하대하는 것 같으니,그 럼 이 선생이라고 부르지. 어쨌든 이 선생이 내 아내와 간 혹 연락을 주고받더군. 아이들 사진도 가끔 전송해 주고. 덕분에 아내가 아주 활기차졌어 . 고맙다고 전해주겠나.” 어쩐지 현관에서 저를 맞는 그녀의 얼굴이 이전보다 훨 씬 밝아 보인다 싶었다. 살도 조금 오른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식사는 했나요?’하고 묻던 목소리에 친근함이 철 철 넘쳐 이게 무슨 어이없는 일인가 싶었는데,그런 속사 정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우리 승도가 쓸데없이 착하고 예븐 짓을 했네요.”
태국영은 빈 잔에 물과 얼음을 채워 휘휘 몇 번 돌린 뒤 그대로 비워냈다.
“저를 납치 사주한 게 누군 줄도 모르고 말이죠.”
태국영은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얼음 하나를 더 부숴 먹었다. 벨 것 같은 시선에도 여군호의 낯가죽은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았다.
“타이밍이 아주 절묘하지 뭡니까. 내가 좆 같이 뛰어갈 만큼 다급하게 몰아가면서도 딱 제대로 구할 수는 있을 정 도로. 와,계산 정확하시더라고. 아주 감탄했다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군.”
“그래요? 그럼 말을 바꿔 봅시다.”
태국영은 꼬고 있던 다리를 반대로 했다. 여군호는 그
무례한 태도를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마치 어린아이의 방 만함을 그저 수용 범위까지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였다.
“최가 놈들이 등대 둘을 찾아 매춘을 벌이고 있는 건 아 십니까.”
“얼마 전에알았지.”
“알면서도 그놈들을 그냥 내버려 둔 이유는 뭡니까.”
“내가 뭘 해야 하나?”
“아. 그럼 그냥 그 꼴을 지켜만 보시겠다. 그게 종주님 입장입니까?”
여군호는 여유롭게 눈가를 접었다.
“내가 어떤 길을 택하건 그걸 자네에게 알려야 할 의무 는 없는 걸로 아는데.”
“아. 물론 그렇지요. 그럼 내 멋대로 해석하죠. 종주님 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으니 그 일에는 조금도 관심 없는 걸로. 내가 중간에서 무슨 개 같은 짓거리를 해도 우 리 종주님 화낼 자격 없는 겁니다. 맞습니까?”
여군호의 매끄러운 혓바닥이 잠시나마 굳어들었다. 저 울추를 들여다보는 그의 눈이 싸늘한 빛을 발했다. 반면
태국영의 얼굴은 냉정한 미소를 되찾았다.
“내가 당신 시커먼 속내를 정말 모를 것 같아? 아니면 알면서도 휘둘려줄 만큼 내가 만만하게 보였어?”
“난 단 한 순간도 자네를 우습게 본 적이 없다. 도리어 늘 경계하고 주시했지.”
“날 경계하고 주시해야 될 대상으로 보는 것 자체가 좆 같은 자격지심이야. 우리 안에 잘 틀어박혀서 살고 있는 나를 들쑤셔서 결국 피를 보게 만드는 것도 결국 당신 같 은 놈들이 갖는 자격지심이고.”
“인정해. 이건 자격지심이 맞네. 또한 자네가 이제껏 손 에 피를 묻힌 일들이 모두 상대방의 과오에서 비롯된 일이 었다는 것도.”
더할 나위 없는 깨끗한 인정이었다.
“하지만 자네를 견제할 수 있는 존재는 친위대를 가진 종주가 유일하지. 현 종주인 내가 자네를 주시하는 건 선 택이 아니라 의무라는 걸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태국영은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미간을 좁혔다. 여군호가 무심코 내뱉은 말이 요 며칠 저를 몹시 궁금하 게 했던 한 가지 의혹에 관한 해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가 있었다. 여군호가 최 가를 없애고 싶었더라면 친위대를 풀면 그만
이 아니었나,하는 문제였다. 최 가는 아주 작은 가문은 아 니었지만 특별히 위협적인 세력을 가진 가문도 아니었다. 종가의 친위대 정도라면 약간의 소모전만 감수하면 깔끔 하게 일을 처리했을 것이다.
헌데 여군호는 굳이 태국영 자신을 끌어들이는 악수를 두었다. 그만큼 완벽하게 처리할 자신이 있었을까,아니 면 친위대의 힘이 예전만 못한 것인가,이런저런 가설들 을 세워 보아도 뾰족하게 들어맞는 것이 없던 참이었다.
그래. 이제 알겠군.
저를 시한폭탄 보듯 하는 여군호가 마지막 보루로써 친 위대를 보존하기로 결심한 것이 틀림없다. 저로부터 그의 가문을 지키건,아니면 이 세계의 규율을 지키건,어느 쪽 이건 그런 이유에서라면 말이 된다. 그의 말처럼 저를 견 제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종가의 친위대가 유일할 테 니까.
태국영은 추론의 결과물을 속내에 묻으며 대꾸했다.
“그래. 뭐 백번 양보해서 그게 종주의 의무라고 쳐. 그 런데 마당에서 활개 치는 버러지들 제 손으로 잡기는 껄끄 러우니 남한테 떠넘기려고 간교한 수작질이나 부리는 것 도 종주의 의무라고 내가 이해해야 돼?”
여군호는 한쪽 입꼬리를 모호하게 비틀며 고개를 기울
였다. 잔주름 하나 없이 수려한 얼굴은 그 나이를 쉽게 짐 작할 수 없게 했으나 깊은 눈매 안에서 잔잔히 일렁이는 세월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어떤 일들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 지. 이미 다른 의견 다른 시각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 는 자네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여군호는 뜨겁게 데워둔 찻잔을 손에서 완전히 내려놓 으며 반문했다. 기가 찰 정도의 뻔뻔함이었다. 태국영은 처음으로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천 년 묵은 뱀처럼 잘도 혀를 놀리는군. 네가 말하는 다양한 시각은 결국 각자 저 좋을 대로 갖다 붙인 핑계에 불과해. 엿 같은 포장지 벗겨내고 남는 진실 하나가 내게 중요할 분이고.”
“자네가 믿는 진실이 뭐지?”
“네가 승도를 납치해서 나를 엮은 다음 이용해 처먹으 려고 했다는 거.,,
“그를 어떻게 확신하나?”
“그야 물론 당신의 잘난 장남 덕분이지.”
여군호는 탄식처럼 짧은 한숨을 뱉어냈다. 높은 확률 로 그럴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확인 사살은 역시 나 뼈아팠다.
“하나만 물읍시다.”
날짐승의 위협 같은 목소리에 여군호는 본능적으로 어 깨 근육을 수축시켰다.
“그거 누구 아이디어나고 물으면 또 무슨 소리나고 잡 아뗄 테니까 종주님 방식대로 말을 좀 꼬아 볼까. 우리 승 도 납치해서 발정 난 개새끼 입 안에 살짝 담갔다가 배자 고 하는 아이디어는 종주님 방식에 잘 맞아요?”
“이미 귀를 닫고 있는 거 아니었나. 내 대답이 그다지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귀는 닫았어도 눈은 이렇게 열려 있지 않습니까. 나는 눈이 아주 밝아요. 당신이 어느 정도를 상상하건 그 이상 으로.”
태국영의 동공이 바늘 끝처럼 변했다. 검은 눈동자는 온도 낮은 짐승의 비늘과도 같았다. 감정적 격양 상태에 빠져 이성의 끈을 절단해 낸 자의 것은 분명 아니었다. 여 군호는 탄탄한 근육이 붙은 다리를 느긋이 꼬았다.
“그건 내 방식에서 너무 나간 것 같군.”
태국영은 모호한 음성으로 ‘그래요?’하고 물었다. 관찰 자의 차가운 시선이 여군호의 미세한 흔들림마저 할듯이 긁어갔다. 속눈썹 한 올,입가의 근육이 움직이는 모양, 체온과 심장박동의 변화까지 놓치지 않을 기세였다.
“나는 어떤 일을 도모하건 가장 이상적인 길을 찾는 데 에 재주가 좋아. 그러나 백전백승의 전적을 가졌다 하여 나 자신을 완벽히 신뢰하지도 않지. 나는 반드시 내가 실 패했을 때의 후일을 그려본다네. 발정 난 개한테 내 여자 가 상처받았다면 그 어떤 사내가 관용을 베풀겠나. 나는 그 정도도 예측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 않아. 또한 내 것 이 귀한 만큼 남의 것 역시 귀한 것도 잘 알고 있지.” 여군호가 지시한 것은 김정구가 이승도를 납치한 것처 럼 상황을 위장하는 것까지였다. 여홍재가 직접 신분을 숨 긴 채 이승도를 납치해 김정구의 오피스텔에 두는 것까지 는 여군호가 직접 개입한 것이 맞았다. 그러나 김정구와 이승도가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상황은 의도한 바가 아니 었다. 여군호가 의도한 대로라면 김정구는 이승도와 만나 기 전에 태국영에게 발각이 되었어야 했다.
「그게 더 확실하지 않습니까.」
어째서 그랬느냐 묻는 말에 여홍재가 한 대답이었다. 다분히 사심이 섞인 행보였음을 눈치챘으나 여군호는 그 림처럼 웃어 보였을 분 질책은 한마디도 끼내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하자면,우리 종주님이 시킨 건 아닌데 딱 히 금제를 걸지도 않았다,이 애기네요.”
태국영이 날카롭게 의표를 찔렀다. 여군호는 물론 그
어떤 호응도 돌려주지 않았다. 여홍재가 중간에서 농간질 을 하긴 했으나 제 책임이 아주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 임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여홍재는 태국영에 대한 콤플렉스가 이루 말할 수 없 을 만큼 큰 남자였다. 그런 그에게 독립적인 의사결정권 을 준 것은 모든 변수를 다 감안하고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를 시험하기 위한 의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여홍재 는 한 가문을 맡길 그릇은 되지 못했다. 제 깜냥을 모르고 한없이 만용을 부려서 가문에 누를 끼치기 전에 되도록 억 눌러 놓으려 했는데,누를수록 반발해서 튀어 오르니 이 제 슬슬 그 싹을 제거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이 들었을 분 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번 정황은 굉장히 아귀 맞추기 좋은 재 료였다. 단 여제운이라는 변수가 없었더라면 말이다.
“나도 남의 여자 건드는 건 정말 싫었는데 그건 좀 다행 이긴 하네요. 내가 그날은 진짜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치 는 바람에 별별 생각을 다 했지 뭐예요. 이 집 사모님 사지 를 잘라서 매음굴에 팔아넘길까 하다가 겨우 참았는데,고 맙지 않아요?”
여군호의 눈끼풀이 순간적으로 뒤틀렸다. 아주 찰나 간 에 스친 반응이었으나 집요하게 관찰하던 태국영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반응을 보려 했던 거다. 만약 그가 가당치 않게도 격분해서 들고 일어났더라면 태국영의 인 내도 거기에서 종말을 맞이했을 터였다. 그러나 여군호는 제 아내를 욕보인 말을 감내했다.
사실 이건 조금 의외였다. 십중팔구는 ‘네놈이 감히.’따 위의 분노가 터져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간 여가주를 지냈던 남자들의 성향을 토대로 보면 그랬다. 그들은 모 두 제 가문의 영달만이 중했고,그를 위해서라면 일족의 패망도 아랑곳 않는 야비한 족속들이었으며,남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도 제 손톱 아래 박힌 가시에 발끈하는 이기적 인 종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 비해 여군호가 그나마 양 심이라도 있는 정도지,그가 한 짓을 두고 보면 역시 호감 이라고는 조금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우리 종주님 잘 참으시네. 이러면 내가 더 깔짝거리는 것도 모양새가 좀 나빠지겠는데.”
“자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그러나.”
“뭐,그건 그렇지만.”
픽 웃은 태국영이 ‘어쨌든.’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 물어볼게요. 실패했을 때의 후 일을 충분히 그려보신다는 종주님,앞으로 제가 어떻게 나
올 것 같아요?”
“글쎄. 그건 좀 예측하기가 힘들군. 솔직히 말하자면 오 늘 자네의 태도는 조금 의외인 면이 없지 않거든.”
“그러게요. 내가 이렇게 친절하게 해명의 기회까지 주 는 놈은 아니었는데. 이게 다 여우 같은 마누라랑 토끼 같 은 자식 때문이죠.”
태국영은 착한 가장 노릇하기가 이렇게 힘이 든다며 어 깨를 으쓱해 보였다. 여군호는 거의 방치되어 있던 찻잔 을 들었다. 뜨거웠던 잔은 어느새 미지근한 온도로 풀어 져 있었다. 그는 다기 주전자를 기울여 더운물을 채웠다. 그리고 막 얼음 하나를 씹어 먹고 있는 태국영을 빤히 응 시하며 청했다.
“기왕 착한 가장 노릇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하니,자네 의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들려주지 않겠나. 앞으로 자 네가 무엇을 할 것인지.”
“홈. 그야 뭐 어렵지 않죠.”
태국영은 천진하게 웃으며 맨손으로 얼음통 안을 휘저 었다. 여군호는 그 미소에서 잠자리 날개를 뜯으며 눈을 빛내는 어린아이의 순수 악을 떠올렸다.
“최 가는 멸망하게 될 거예요. 종주님이 친히 명분도 만 들어 주셨는데 그거 썩히는 건 좀 아깝잖아요. 그런데 남
의 손바닥 위에서만 노는 짓거리는 영 성미에도 안 맞고, 우리 승도가 막 심장 뛴 아기 잘못 될까봐 울고 있던 거 떠 오르면 자다가도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치고.”
여군호는 매우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승도의 뱃속에서 새 생명이 자라고 있었을 거라고는 그조차 예측하지 못했 던 일이었다. 과거의 일에 ‘만약’은 늘 의미 없는 짓거리이 지만,그래도 만약 그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맹세코 그 를 어떤 일에도 끌어들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끝까지 부인은 하겠으나 양심의 가책까지 모른 체할 수 는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건 보상해 주겠다는 생각만큼은 확고했다. 다만 그 보상이 무엇이 되었건 태국영이 받을 것 같지 않아 구체적으로 고심해 보지 않았을 분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어떻게든 망쳐야 직성이 풀릴 것 같 아서 내가 거의 사흘 밤낮을 꼬박 고민을 했거든요. 상석 에 앉아 주둥이 하나로 여기저기 다 들쑤셔 놓은 종주님 을 어떻게 엿 먹여야 자이언트 사이즈 엿을 먹였다고 일 족 전체에 소문이 짜하게 날까.”
달그락. 달그락. 태국영의 커다란 손 안에서 모서리 마 모된 얼음들이 부드럽게 마찰했다. 화염 같은 체온은 탁 자 위에 금세 물 자국을 늘려갔다. 그 모양이 유난히 거슬 려 여군호가 막 눈가를 찡그렸을 때였다.
“그러다 떠오른 게 바로 재네들이거든.”
태국영의 눈이 음산한 어둠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와 동시에 그를 중심으로 짧은 돌개바람이 일어 사방으로 뻗어져 나갔다. 세차게 펄럭이는 옷소매를 힐긋 내려다보 던 눈을 바로 하고 나서야 여군호는 태국영의 손끝에서 뻗 어 나가는 섬광을 발견했다.
대체로 관망하듯 여유로웠던 여군호의 낯에 처음으로 짙은 감정이 서렸다. 그는 번개같이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 다.
“영아!”
섬광은 다도실 한쪽의 어둠 속으로 빠르게 쏘아져 나갔 다. 기척을 숨기고 있던 호위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 다. 저들을 향해 날아온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 이 수도를 휘둘러 부숴냈다. 잘게 바스러진 얼음 결정들 이 생의 끝에 다다른 물고기 떼처럼 허공을 날았다.
그들은 물기가 채 카펫을 적시기도 전에 여군호의 곁 에 바투 붙어 섰다. 상황파악은 그 다음 일이었다. 네 쌍 의 눈이 자신들의 흔적을 면밀하고도 빠르게 훑었다.
태국영은 방금 전,빛이 들지 않는 곳에 은신해 있던 모 두를 정확히 감지해서 급소를 겨냥했다. 만약 그의 손에 서 뻗어져 나간 것이 녹아가는 얼음조각이 아니었고 태국
영이 진지하게 살의를 가지고 있었더라면,아마 그들 중 누군가는 바닥을 나뒹굴고 있을 것이었다.
“종주님이 입고 계신 막강한 갑옷부터 뜯어내 볼까,구 석까지 몰려서도 그렇게 성인군자 같은 낯짝을 유지하고 계시려나,그런 생각이 들더란 말이지.”
도끼처럼 찍어오는 호위들의 날 선 안광에도 태국영은 홀로 태연자약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티슈를 몇 장 봅아 젖은 손을 닦아내는 움직임은 여유롭고 우아했다.
“전쟁의 시작이 종주님 특권은 아니잖아요? 여기저기 꽁꽁 숨어있는 재들,이렇게 내가 먼저 찾아내서 잡아 족 치면 그땐 어쩌실 거?”
여군호는 카펫 위의 검은 물 얼룩들을 지그시 보다 눈 을 들었다. 태국영은 긴 속눈썹이 촘촘하게 박힌 눈시울 을 가늘게 접으며 일어섰다.
“우리 승도 눈물 값비싸요. 그거 어떻게 다 갚아줄지 차 근차근 고민 좀 해 봐요. 오래는 안 기다립니다.”
여군호는 의아스러운 눈빛을 했다. 설마 태국영의 입에 서 먼저 타협의 여지를 듣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변화가 그의 말대로 아내와 아이 때 문인지,아니면 그저 정치적인 수를 계산할 만큼 정신적 인 성장을 이뤘기 때문인지는 불분명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태국영에게도 자신에게도,또한 일족 전체에도 이로운 변화라는 사실이었다.
“아참. 착한 남자 흉내 내는 김에 하나 더.”
태국영이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빙글 상체를 틀었 다.
“혹시라도 내가 재들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실 까 봐 알려드리는 건데,그거 다 종주님 차남의 공이에요.
여군호의 안면 근육들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태국영 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유쾌한 미소가 걸렸다.
“아들들 참 잘 키우셨어. 장남은 열심히 공들인 일 초장 에 박살 내고,차남은 못 믿을 놈한테 가문의 비기까지 술 술 알려주고.”
코미디다,코미디야.
태국영은 노래를 옮듯이 낮게 뇌까리며 사라졌다.
예보에 없던 가을비가 촉촉하게 대지를 적셨다. 시원했 던 밤공기가 쌀쌀하게 무르익어 감에 따라 아이들은 물 만 난 고기처럼 활기를 되찾았다. 특히나 여름 내내 전자레인
지에 돌린 인절미처럼 바닥에 붙어있기 일쑤였던 여은태 는 더 심했다. 얌전히 앉아있을 틈 없이 여기저기 뛰어다 니는 녀석은 털 밀릴 위기가 사라져서 더 기븐 듯했다.
이승도는 여름이면 대대적으로 털갈이를 시작하는 동 물들의 털을 밀어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온 집안이 털 천국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올여름도 마찬가지였다. 바리캉 하나 들고 집에서 돌보는 강아지와 고양이들을 차 례로 붙잡고 능숙하게 싹싹 밀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는 데,그때 마주쳤던 여은태의 눈빛을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었다. 늘 ‘선생님. 선생님.’하며 애교 부리던 녀석이 저 를 천하의 몹쓸 불한당처럼 보던 순간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거다.
「싫어,선생님. 난 안 해. 그거 안 할 거야.」
지레 겁먹고 고개를 흔든 녀석은 뭐라 말을 건네기도 전에 그대로 도망쳐 버렸었다. 어차피 꿀벌 옷 사건에서 제 겉모습에 매우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에 녀석에게까지 바리캉을 들이밀 생각은 애초에 없었는 데 말이다.
“와아아아! 와아아아! 난다아아아! 엄마! 형아가 날아 요!,,
여은태의 은빛 털이 인공조명을 길게 가로질렀다. 빗물
에 숨이 바짝 죽었는데도 눈부시게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 태였다. 녀석이 자부심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었다.
“형아,이번엔 저쪽으로! 저쪽으로!”
태이경의 성원에 잔뜩 신이 나 있는 여은태는 특별한 목적 없이 광활한 정원을 이리저리 활보했다. 작정하고 도 약했을 때 녀석이 보여주는 체공시간은 몇 번이나 보아도 놀랍기 그지없었다. 느긋하게 튀어 오르는 듯싶은 순간에 도 2?30 미터는 가분히 날아가는 것 같았다.
우리 국영이는 얼마나 잘 뛸까.
이승도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태국영의 원래 모습을 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이제는 그 크기가 얼만 했는지조 차 가물가물했다. 지금 여은태의 두 배는 조금 넘을 것 같 긴 하지만 확신하기는 힘들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태국영의 가슴 속에 대못처럼 박 힌 그 기억을 녹여주고 싶었다. 사실은 그래서 몇 번이고 그것을 시도해 보려고 했는데,막상 말을 끼내려고 하면 혀가 굳어들었다. 혹시라도 그 새카만 짐승을 보고서 제 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감정이 공포일까 봐,그로 인해 태 국영이 다시금 상처받게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꼭-
겁쟁이는 늘 그렇게 후일만 기약하고 있었다.
[선생님! 나 멋져?]
싱그러운 기력으로 가득한 목소리에 이승도는 서둘러 상념에서 벗어났다.
“응. 멋지다,우리 은태.”
홑날리는 빗줄기도 아랑곳 않고 광활한 정원을 뛰어노 는 두 아이는 종종 3층까지 껑충껑충 뛰어오르며 재롱을 피웠다. 그리고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구경하러 발코니에 나와 있는 이승도는 그때마다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준비 해 둔 날 소고기를 가볍게 던져 주었다. 방향도 거리도 제 멋대로일 수밖에 없었지만 여은태는 매번 용케 받아먹고 또 저만치 뛰어가곤 했다.
“아이들 노는 것만 봐도 행복하지요?”
문득 들려온 말소리에 이승도는 어깨너머 고개를 돌렸 다. 열린 발코니 문 너머 유모가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었 다. 그녀의 곁에서 달콤한 냄새가 풍기는 트레이카트가 둔 탁하게 번들거렸다.
“네. 참 좋네요.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것 같아 부듯하고요.”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그렇죠?”
“맞아요. 우리 이경이 어른 되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다
큰 거 상상하면 괜히 찡하고 섭섭하고 그러네요.”
유모는 후후 웃으며 테이블에 따뜻한 홍차와 간식 접시 들을 올렸다. 슈거파우더가 예쁘게 부려진 베이비슈와 먹 음직스럽게 기름기가 도는 크로켓이었다.
이승도는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베이비슈부터 베어 물 었다. 딱 좋은 정도로 얼린 생크림이 입 안에서 사르르 녹 아들었다. 많이 먹어요,하며 카트를 도로 가져가려던 유 모가 멈칫 서며 물었다.
“옷차림이 얇네. 춥지 않아요? 승도 군 추위 많이 타잖 아요.”
“아,괜찮아요. 우리 둘째가 워낙 건강해서 저까지 요 새 힘이 막 넘치는 걸요. 체온변화도 굉장히 좋아졌고요.”
“아휴. 우리 아기씨가 벌써부터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 나 보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니트 하나는 가져다줄게 요. 승도군 감기라도 걸리면 가주님 불호령 떨어질라 겁나 요.,,
“네. 고마워요.”
이승도는 서글서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트를 밀 고 나간 유모가 곧 다시 돌아와 보들보들한 니트 카디건 을 안겨주었다.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군소리 없이 꿰 입었다.
“유모오오! 나도 슈! 슈!”
멀찍이에서 태이경의 목소리가 물보라처럼 떠밀려왔 다. 막 완전히 자리를 떠나려던 유모가 ‘어서 오세요! 많아 요!’하고 대답했다.
태이경은 붕 날아오더니 가분하게 발코니 안으로 안착 했다. 아이의 뒷덜미를 물어 던졌던 여은태도 난간을 훌 쩍 넘어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엉망으로 흐트러진 아이 들에게 채신머리없다고 나무랄 사람은 없었다.
태이경은 유모가 감싸준 타월로 얼굴부터 물기를 닦아 냈고,여은태는 발코니 구석으로 가 힘차게 몸을 흔들었 다. 덩치가 큰 만큼 사방으로 튀어 나가는 빗물이 어마어 마했다. 그 덕에 이승도의 앞에서 타월 벽을 만들어 주느 라 덩달아 젖은 유모도 흙장난하는 어린아이처럼 낭랑하 게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아一
대강 몸을 닦은 태이경이 타월을 망토처럼 두른 채로 달려와 입을 벌렸다. 처음에는 조심히 눈치를 보며 적정선 을 가늠해 보려던 아이가 이제는 스스럼없이 어리광을 부 리고 있었다. 그 변화가 반갑고 미안했다. 이승도는 베이 비슈 하나를 조심히 쪼개서 녀석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녀석은 몇 번 오물거리기가 무섭게 유모에게 쪼르르 달려
가두손 엄지를 마구흔들어 보였다.
“맛있어! 역시 우리 유모 손은 최고야!”
“흐응. 저야 물론 우리 태 가가 자랑하는 금손이지요.”
“응. 응! 우리 엄마도 유모 덕에 맛있는 거 잘 먹어서 얼 굴에서 막 빛이 나. 분명 별이도 엄청 예쁘게 태어날 거야.
“어휴 우리 도련님,어찜 이리 말을 예쁘게 하실까. 이 유모가 뭘 더 해 드려야 도련님이 더 기쁘고 행복할까요?” “난 지금 충분히 기쁘고 행복해. 우리 집에 엄마 냄새 랑 유모가 만드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가득하잖아.”
태이경은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마법을 부릴 줄 알았 다. 거기에 홀랑 넘어간 유모는 하트가 뚝뚝 흘러내릴 것 같은 눈으로 녀석을 품에 꼭 안고 보보세례를 퍼부었다.
[이경이는 하는 짓마다 참 예쁘네. 좀 덜 해도 되는데. 저러다 유괴라도 당하면 어쩌지,선생님?]
남은 고기 한 덩이를 우아하게 삼킨 여은태가 곁에서 나름 심각하게 속닥거렸다. 이승도는 실소처럼 웃으며 녀 석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물기가 남아 축축한 털이 매끄 럽게 손금을 간질였다.
“이경이한테는 강한 아빠도 있고,앞으로 더 강해질 우 리 은태도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오늘처럼 국영이가 자리
를 비우면 우리 은태가 지켜주면 되지?”
[응. 옆에서 떼 놓지 말아야겠어.]
여은태는 태이경을 빤히 바라보며 다짐하듯 말했다. 이 승도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빙그레 웃고 말았다.
태국영이 돌아온 것은 목욕을 빙자한 물놀이에 아이들 이 심취해 있을 때였다. 참방참방 물장구치던 태이경이 벌 떡 일어나더니 ‘어? 아빠다!’하고 소리쳤다. 온탕에 들어 앉아 아이들을 채근 없이 지켜보던 이승도는 몸을 일으켰 다.
“우리 이경이가 형아 잘 씻겨줄 수 있지?”
“응. 내가 형아 샴푸도 해 주고 보송보송 말려 놀게요.” 이승도는 씩씩하게 대답하는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 욕실을 나왔다. 수영복 반바지를 발래바구 니에 넣고 물기를 닦으면서,애써 잊고 있던 걱정들이 다 시금 뇌리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말해야 모두에게 평화롭고 행복한 엔딩을 만들 수 있으려나.
솔직히 말하면 이승도는 아직 생각을 다 정리하지 못했 다. 아이들이 노는 모양을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종종 고민 해 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진 않았다.
맘 같아서는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고 넘어가고 싶었
다. 비록 저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가 쉬이 약속을 깨고 상대를 기만할 남자가 아니라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만남을 위해 그가 얼마나 많 은 시간 제 곁을 멤돌았을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다만 위 험을 무릅쓰고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 그저 감정적인 이 유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입을 틀어막았던 장갑의 가죽 냄새가 아직까지 찌끼기 처럼 감각에 남아 있었다. 풀 길이 없는 짝사랑이나 등대 에 대한 갈망을 해소하고 싶었더라면 그런 차림새를 하고 서 나타났을 리가 없었다. 그가 저를 뒤에서 결박하듯 끌 어안았을 때조차도,살갗의 접촉은 조금도 없었다. 그가 훔쳐간 것은 제 목덜미에 흐르던 열은 살 냄새분이다.
「미안합니다.」
그의 애초 목표는 그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불 투명했던 눈이,차분하고 냉담한 목소리가 온 마음을 다 해 진심을 전해 왔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이승도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언제 들어온 건 지 태국영이 등 뒤에 바짝 서 있었다. 웃는 듯 마는 듯 미 묘한 표정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
“아. 그렇게 갑자기 부르니까……■,,
“갑자기는 무슨. 문밖에서 노크도 하고,들어와서 이름 도 부르고 나름 매너 다 지킨 남자야.”
하나도 못 들었다. 이승도는 짧은 숨과 함께 어깨를 늘 어뜨렸다. 티셔츠에 한쪽 팔만 끼워놓고 명하니 서 있던 걸 그제야 알았다. 이승도는 나머지 팔도 티셔츠에 넣어 입은 뒤 태국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태국영은 고개를 이 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하면서도 잠자코 따라왔다. 이승도 는 응접실로 가 소파로 그를 인도했다.
“국영아. 너 나한테 거짓말 안 하지?”
태국영은 뜬금없는 질문에 한쪽 눈썹을 꿈틀 올렸다.
막 넥타이를 끌러 내리려다 멈춘 그의 얼굴은 몹시도 의아 한 표정을 띠었다.
“은근히 기분 나쁘네. 혹시 나 뭐로든 의심받고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게 아니면?”
“내가 지금부터 너 기분 나블 말을 하게 될 텐데,솔직 하게 네 생각을 듣고 싶거든. 네가 어떻게 나올 건지 걱정 도좀 되고……
태국영은 넥타이를 매듭째로 풀어 탁자에 던졌다.
“우리 승도 눈치 보는 거 내가 좆같이 싫어하거든? 밑
밥 깔 필요 없이 너는 그냥 너 하고 싶은 말을 해. 따로 살 자 각방 쓰자 뭐 이런 것만 아니고서야 웬만큼 수용 가능 하니까.”
태국영은 완전히 돌아앉아 등받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윗단추를 헐렁하게 풀어놓은 셔츠 사이로 곧 은 빗장뼈가 불거져 나왔다. 뾰루지 한 번 나본 적 없는 매 끈한 피부와 근사한 목선이 시야를 훔쳤다.
이승도는 상황에 안 맞게 손을 뻗고 싶은 스스로의 내 심을 조금 구박하며 입을 열었다.
“그게,사실은 아까……■,,
이승도는 가혹하다 싶을 만큼 기억을 탈탈 털어서 그에 게 고스란히 전했다. 숨길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적나라 한 편이 나았다. 그래야 뒤탈이 없고 이 자리에서 그의 반 응을 지켜볼 수 있었다.
눈치 보지 말란 말을 미리 들었다 하지만 자꾸만 그의 기색을 살피게 되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는 그의 얼굴은 표정변화가 없어 감정을 읽기 힘들었다.
태국영은 자신의 속을 감추는 것에 도가 튼 남자였고, 그때마다 시종 웃거나 시종 무표정한 가면을 능숙하게 뒤 집어쓰곤 했다. 다만 그가 모르는 것이 있는데,이승도 자 신이 그의 가공된 외피를 구분하는 것에 매우 익숙해져 있
다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 질긴 껍데기 안에 든 알맹이의 본질까지 꿰뚫어볼 수 없을 분이었다. 그를 그런 사내로 키운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승도 자신이었기에 그것을 책망할 자격이 없었다.
이 남자의 십수 년,유아기와 청소년기를 몽땅 집어삼 킨 자신은 그에게 늘 위협이고 공포였다. 그는 늘 불안해 했고,불안정했고,두려워했다. 생에 애착을 가지는 단 하 나의 이유였던 자신이 늘 그에게 차가운 등만 보였기 때문 이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차분하게 늘어놓은 설명이 끝난 뒤 태국영의 첫 반응 은 그거였다. 표정도 말투도 담담하고 부드러웠다. 이승도 는 조금 실망했다.
“그게 아니야. 난 네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그걸 알고 싶은 거라고.”
태국영은 고인 턱을 몇 번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다 애 매한 음성을 흘렸다.
“왜. 말잘듣는 남편 싫어?”
포인트가 묘하게 엇나갔다. 이승도는 미간을 살짝 찌푸 렸다. 그 반응에 그는 ‘농담이야.’라며 한쪽 어깨를 으쓱했
“혹시 내가 질투하는 게 좋아?”
그 두 번째 질문 때문에 첫 번째 질문도 농담이 아니었 음을 확신했다. 이승도는 기가 막혀 잠시간 말을 잃었다. 막연히 막막했다. 사회화가 한참 덜된 어린애와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애를 어쪄면 좋지.
“잘 들어 봐,국영아.”
이승도는 태국영의 두 손을 차곡차곡 모아 쥐며 운을 뗐다. 턱을 조금 끌어당긴 태국영이 힐긋 눈을 내렸다. 눈 씹이 슬쩍 꿈틀거리는 모양은 지금 무슨 상황이나 묻는 듯 했다.
“나한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노력하고 있는 거 잘 알 고,아주 고마워하고 있어. 하지만 나는 그 과정에서 네가 스트레스받는 요소가 생기는 걸 원하지 않아. 네가 화를 내는 게 당연한 상황이라고 생각이 든다면 화를 내고,내 가 바라는 것이 너에게 너무 무리다 싶다면 그것도 솔직 히 말을 해 줘. 서로 생각이 다른 부분은 충분한 대화로 중 심을 맞추는 게 서로에게 좋으니까.”
“요약하자면,눈치 보지 말고 어느 때고 할 말 있으면 해라이거네.”
“응. 비슷해.”
“후회할 텐데.”
태국영의 입술이 미묘한 곡선으로 휘었다. 별로 낯설
지 않은 질 나븐 미소였다. 근원 모를 찝찝함이 목덜미를 스쳤다. 이승도는 그가 헛소리를 내뱉기 전에 냉정하게 선 수를 쳤다.
“이 상황에서 섹스 애기 끼냈다가는 나 진짜 화내.”
태국영은 쯧 혀를 찼다. 영 재미없다는 표정이었다.
“너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라고 해 봤자 그런 것밖에 없 는데 뭐 어쩌라고. 할 말은 해라,하지만 내가 듣고 싶은 말만해라,뭐이런 거야?”
“말장난으로 논점 틀지 마.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하라 는 게 아니라 내가 듣고 싶은 부분에 대해서 애기를 해 달 라는 거잖아.”
“그런 대답이라면 이미 한 걸로 아는데.”
“그게 아니라니까. 나한테 맞춰주는 거 말고一”
“아니,승도야. 년 지금 나한테 이상한 거 강요하고 있 어. 네가 그걸 깨닫지 못하면 대화는 계속 돌고 돌아 지금 처럼 원점으로 돌아올 거야.”
태국영은 드물게도 이승도의 말허리를 냉정하게 잘라 냈다. 그의 손이 제 손 안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 다소 낯 설었다.
“내가 좀 아까 너한테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나고 물었 잖아. 그건 이 상황에서 네가 나한테 무엇을 바란다고 해 도 나는 불만 없이 들어줄 수 있는 상태라는 뜻이야. 기분 이 조금 좆같긴 하지만 ‘아 이 새끼 당장 죽여야겠구나’하 는 생각이 들 만큼 분이 끓지는 않는다는 거지.”
오늘 여제운의 기행은 그리 놀라울 것이 없었다. 융통 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목석같은 놈이었다. 그의 머릿 속은 매우 투명하게 보여서 다른 의심의 찌끼기를 건져낼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내가 종종 네 눈치를 살피는 건 맞아. 예쁘게 보이려 고 조금 애쓰는 것도 맞고. 그 와중에 내가 스트레스를 받 느나고?”
다시금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턱을 괸 태국영이 입술 을 비틀어 웃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있나. 내가 집요하게 네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면서 목줄 좀 잡아달라고 애원하긴 했지만,너한 테 굴종을 맹세할 생각은 없어. 치열함이 느껴질 정도로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나는 결국 하고 말 거야. 만약 네 가 그걸 싫어할 게 빤하다면 네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철저 하게 안배를 해 두겠지. 지금처럼 네 의견을 묻는 병신 짓 도 절대 안 할 거고.”
이승도는 그가 한 말을 무리 없이 이해했고,뒤이어 방 금 전 제가 아집의 틀에 그를 구겨 넣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애초 바랐던 대로 그는 그의 속에 있는 것들을 날 것으로 뱉어냈다. 그것을 지레 상한 고기 취급 하며 혀끝조차 대 보려 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 제 불찰이 었다.
“미안. 내가 경솔했어.”
이승도는 진솔하게 사과하며 그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 다듬었다. 그는 조금 멋쩍은 듯 뺨을 긁적이다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뒤틀린 맥락을 지적하려 했을 분,불쾌하게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너는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 태국영은 다시금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왔고,마침내 이 승도는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이번 한 번만 그냥 모른 척 넘어가 주면 안 될까. 불순 한 짓을 한 것도 아니었고,다시는 오늘 같은 일이 없을 거 라고 약속도 받았으니까…….,,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굳이 놈에게 마지막을 당 부한 건 나를 설득시키기 위해서였을 테니까.”
“맞아. 그래서였어.”
“놈의 말을 믿어?”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의심하지도 않아. 적어도 그 순간만 면피하려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 남자는 아닌 것 같아 보였거든.”
“어째 개가 나보다 더 신뢰받는 것 같네.”
태국영은 시큰둥하게 투덜거렸다. 이승도는 그의 이마 를 꾹 눌러서 가볍게 밀쳤다.
“네가 그동안 나한테 깔짝깔짝 시비 걸던 걸 생각해 봐.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 못 할 소리를 수년 동안 들었더 니 나도 가끔 네 속이 햇갈린다고.”
“아,그건 인정. 짝사랑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내가 종 종 못되게 굴기는 했지.”
“종종?”
“홈. 자주?”
그는 깨끗하게 인정하며 긴 눈웃음을 지었다. 풍성한 속눈썹이 그의 눈 밑에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이승도는 픽 실소하며 그의 눈가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태국영은 나른하게 미소를 풀며 두 눈을 감았고,뺨으로 내려온 이 승도의 손등을 제 손으로 크게 감싸 덮었다.
“하나 확실히 해. 나도 여제운이 더 돌발행동을 할 거라 고 생각하지는 않지만,만약 오늘 같은 일이 또 생기면 그
가볍게 닫혔던 눈시울이 가느다란 틈을 벌렸다.
“오늘처럼 내가 네 의견을 묻는 일은 없을 거야.” 이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만족스레 미소 지으 며 고개를 비틀어 내렸다. 곧 손목 안쪽에 화인 같은 입맞 춤이 찍혔다. 그에게 붙잡힌 손끝이 움찔 떨렸다. 뜨거운 숨결이 길게 머물다 사라진 곳에는 희미하게 붉은 자국이 남았다.
그것은 마치 짐승의 영역표시 같았다. 그 집요함의 흔 적이 이승도는 새삼 마음에 들었다.
여군호는 아주 오랫동안 서재의 창가에서 정원을 내려 다보고 있었다. 깊이 생각에 잠겨있는 그는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까만 밤이 몰려올 때까지도 한 자세로 그렇듯 동 상처럼 서 있었다.
서재에 있는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친위대의 수 뇌들도 함께였다. 부름을 받고 모인 그들은 재촉 없이 여 군호의 뒷모습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여군호가 마침내 입을 연 것은 깊은 밤이 무르익어 있을 때였다.
“충호야:
충호라 불린 남자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네,하고 대답했다. 그는 태 가의 피를 계승한 암살대의 수장이었 다. 여군호는 여전히 깊어진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는 채 로 물었다.
“친위대의 전력이 태 가와의 전면전에서 승리할 수 있 으리라 보느냐.”
“자신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시기와 전략이 잘 갖춰진다 면 불가능하지만은 않습니다.”
냉담한 목소리만큼 냉정한 평가였다. 여군호는 고개를 끄덕이다 자조했다. 어차피 다 계산이 끝난 것을,굳이 묻 는 게 참 저답지 않았다.
“혹 전면전을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아니다.”
딱 자르는 말에 충호는 의아해졌다. 여군호는 친위대 를 향해 완전히 돌아섰다.
“전쟁은 어느 시대에서건 비극이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지. 더구나 승리를 장담할 수 없 다면 더더욱 그러하지 않겠니.”
“저는 종주님께서 태국영을 끌어들이기로 결심하셨을 때 전면전을 염두에 두신 걸로 이해했습니다. 제가 틀린 겁니까?”
“아니. 그렇게 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었 다. 다만 실패할 리가 없다고 자신했고,그럼에도 불구하 고 실패를 한다면 너희들분만이 아니라 내 가문 역시 그 책임을 질 각오는 하고 있었던 거지. 헌데 태국영이 의외 로 점잖게 나오고 있는데 내가 나서서 불씨를 키워서야 되 겠느나.”
“점잖다니요. 절대 아닙니다,종주님. 오늘 태국영의 언 행은 어느 모로 보나 지나쳤습니다.”
영은 평소와 달리 조금 감정적인 낯빛으로 고했다. 여 군호는 흐리게 웃으며 그를 보았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성 장하는 모습을 지켜본 아이라 스물이 훌쩍 넘었음에도 여 전히 아이 같아 보이는 것은 도리가 없다.
“모든 것이 내 이기심으로 인해 생겨난 일이고,그걸 다 알아챈 태가주로서는 충분히 인내한 것이다. 그 점은 인정하려무나.”
영은 대답 없이 입을 닫았다. 수긍하지 않는 눈치였다. 여군호는 책상에 걸터앉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자존심은 가치 있게 지켜야 하는 덕목이다. 허나 쓸데 없는 곳에서까지 드높이려 드는 것은 아둔한 짓이지. 또 한 내 조상들이 쌓아 놓은 업이 나를 그렇게 방자하게 만 들 길을 아예 막아 놓았으니 어쩌겠느나.”
“업이라니요?”
“생각해 본 적 없느냐,충호야. 친위대는 피가 강한 만
큼 일백 년에 적어도 두셋은 제왕의 재목이 난다. 일이백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다른 가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치지. 그러나 그를 성체로 키워줄 이가 없으니 너 희들은 결국 세상의 빛을 막 본 그 아이들의 숨통을 미리 끊어 놓지 않느냐. 만약 내 조상들이 욕심에 눈이 멀어 등 대들을 그렇게 몰살시키지만 않았다면,지금의 친위대는 그 어느 가문보다 훨씬 더 강한 집단이 되어 있을 거다.
태 가와의 전면전에 승산이 있느냐 묻는 것도 우스울 만 큼.,,
등대가 사라지고 일족의 힘은 하향 평준화가 되었다. 등대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제왕의 재목들도 함께 사 라졌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었던 집단은 여 가도 태 가도 아닌 바로 종가의 친위대였다. 순혈 보존을 위해 근친혼만을 이어가니 그 강력함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 을까.
그러나 수백 년간 공고하게 이어져 왔던 그 권력의 판 도는 뒤틀렸다. 기적적인 인연을 만나 살아남은 태국영 이,그 한 남자가 이 세계에 지각변동을 몰고 왔기 때문이
이 기막힌 상황을 만든 것은 누구인가. 다른 누구도 아 닌 과거 여 가의 남자들이었다. 여군호는 쓰게 웃었다.
“자업자득. 인과응보니라.”
그때 내내 가만히 듣고만 있던 이들 중 하나가 한 발자 국 앞으로 나섰다. 이 자리에 참석한 수장들 중에 유일한 여자의 몸으로,참모대의 수장을 맡고 있는 연희였다.
“그럼 이후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저희들은 무엇 을 하면 되겠습니까.”
“너희들은 그저 세력을 키우면 된다. 그래도 명색이 친 위대인데 한 가문보다 약해서야 쓰겠느나. 이후의 종주들 에게 일족을 다스릴 힘을 실어주려면 너희들이 더 강해질 수밖에.”
“세력을 키우라 하시면……
“지금은 그렇게만 알아 두거라.”
여군호는 그것을 끝으로 모두를 물러가게 했다. 호위대 까지 어둠으로 은신하고 나서야 그는 참았던 한숨을 터뜨 렸다. 저라고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종주라는 자는 가끔 독재를 감수하고서도 일족을 억누 를 힘이 있어야 한다. 지금의 자신에게는 그 결정적인 힘 이 결핍되어 있었고,태국영을 견제하기 위해 친위대를 섣
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처지에 놓인 상태였다. 그랬기에 최 가의 악행을 처벌하기 위해 도리어 악수를 둘 수밖에 없었고,그것이 실패함으로 인해 역풍을 맞게 된 것이었 다.
그 녀석이 제 몫을 할 거란 기대는 애초에 물 건너갔고.
여군호는 여은태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녀석은 태어나 는 순간부터 단 한 번도 희망이었던 적이 없었다. 도리어 어떤 방법으로 아내를 납득시켜야 발리 저 화근을 없애버 릴 수 있을까,그런 근심만 안겨주던 아이였다. 헌데 그런 와중에 이승도가 아이를 맡아 키워준다고 했을 때,여군호 는 처음으로 여은태를 대상으로 어떤 가능성을 읽었다.
태국영의 오해처럼 여은태를 칼로 키워 가문의 번영을 꾀함은 아니었다. 여군호가 엿본 가능성이란,바로 여은태 가 성체가 되어 이승도를 각인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두 수컷이 서로 물고 뜯다 어느 한쪽이 죽는 다 해도 저에게는 하등 손해 될 것이 없었다. 여은태는 어 차피 등대 없이는 살아남지 못할 아이였으니.
그러나 아내를 대동하고 녀석을 만나러 갔던 날,여군 호는 그 생각을 완전히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승도와 여 은태 사이에 오고 가는 감정은 지극히 친밀한 부모와 자 식 사이의 것이었고,여은태는 엉뚱하게도 이승도의 아이
에게 정신이 팔려 그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느라 바빴다.
내 맘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군.
여군호는 혀를 찼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저 여은태가 무사히 성년식을 치르는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가 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족의 균형을 위해서다.
비록 녀석의 정신적인 의존도는 여 가가 아닌 태 가를 향하겠지만,헌신적으로 돌보아 주는 등대의 품에서 건강 한 심신을 갖춘다면 훗날 아주 좋은 재목이 될지도 모르 는 일이다.
제 시대는 이미 저물어가고 있었다. 종주로서,또한 여 가의 가주로서 다음 세대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 지 명확히 인지해야 할 때였다.
여군호는 금고에서 종주의 인장을 꺼내 책상 의자에 앉 았다. 만년필에 잉크를 채운 그는 고민했던 시간과는 달 리 일필휘지로 백지를 채워나갔다.
그리고 그 하루 뒤,종주의 인장이 찍힌 봉투가 각 가문 에 전해졌다. 봉투 안에 든 서신은 종가승계의 시작을 알 리는 연회가 음력 9월 그믐에 열릴 것이니 일족의 모든 가 주와 그 가주의 직계형제자매들은 필히 참석하라는 내용 을 담고 있었다.
『적어도 내년 하반기에는 다음 대 여 가의 가주,혹은 그 대리자 역시 확정 지을 것이니 그 자격이 있다고 생각 하는 자는 내게 그 능력을 보여라. 나는 이전 가주들이 그 러했듯 침묵으로 너희를 시험할 것이다.』
여 가에만 따로 전해진 이 짧은 문구는 여 가 전체에 적 잖은 동요를 불러왔다. 여제운이 차기 가주 자격을 완전 히 박탈당하고 제로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도 충격적이었 지만,그보다는 종가승계의 서막이 오른다는 대목 때문이 었다. 여군호가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날 계획을 밝힌 것이 다-
여군호는 아직 50대에 접어들지도 않았다. 은퇴하기 엔 너무 젊었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가주의 자리에 앉은 뒤로 오랜 시간 동안 믿음직스럽고 든든한 기둥으로 존재해 왔던 그가 이렇듯 갑작스레 은퇴를 선언하게 될 줄 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바였다.
“숙부가 의외로 간이 작다니까. 이렇게나 발리 꼬리를 말다니.”
여홍재는 오늘 오전 받은 소식을 다시금 상기하다 코웃 음 쳤다. 서신에 적혀있지는 않지만 여군호가 그런 결정
을 내린 계기가 무엇인지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태국영이다. 그날 여제운의 흔적을 감지한 그가 어떤 식으로건 여군호를 압박했을 것이다. 태산처럼 드높고 위 압적으로 느꼈던 여군호가 지금은 이발 빠진 호랑이처럼 여겨졌다.
만약 여군호조차 손을 쓰지 못했던 태국영을 제가 꺾 어 누른다면.
도취감에 판단력이 마비된 여홍재는 얼핏 뇌리를 스치 는 생각에 눈을 빛냈다. 그렇게만 된다면 다음 대의 가주 는 필시 만장일치로 자신이 될 것이다. 또한 여군호의 은 퇴선언을 기점으로 친위대들이 종주 후보들을 면밀히 살 피기 시작할 테니 그들의 눈에 띄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 였다.
태국영의 아킬레스건이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만 잘 절단해 내면 아무리 강한 그라도 속절없이 무너 질것이 자명한 일.
똑똑.
여홍재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사색에 잠겨 있 는 동안 방문밖에는 익숙한 기척들이 자리해 있었다. 당연 히 누구나 물을 필요는 없었다.
“들어들 와: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여홍재의 친동생 인 여홍원이었다. 애초에 가진 재능이 그리 크지 않아 여 군호의 경계범위에서도 벗어나 있는 남자였다. 그가 성큼 성큼 다가와 콧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형님. 좋아 보이는군요.”
“갑자기 웬 존대나. 앉아.”
여홍재가 넉넉히 웃으며 고갯짓을 해 보였다. 여홍원 의 뒤로 여현덕과 여치영이 차례로 들어와 여홍재의 맞은 편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여현덕과 여치영은 평소 여제운 의 특권을 매우 시기하던 이들로,여홍재의 귀국을 기점으 로 뭉치게 되었다.
“종주님께서 은퇴하시면 이제 형님께서 그 자리에 오르 시겠군요.”
“그거야 더 두고 볼일이지.”
“그럴 리가 있습니까. 여제운이야 이미 그 어리석음이 낱낱이 드러나 알거지가 될 판인 걸요. 다음 대 여 가의 가 주가 될 분은 형님밖에 없습니다.”
여홍재는 여치영의 아부가 내심 기분 좋은 듯 한쪽 입 꼬리를 올렸다.
“가주가 무슨 대수나. 나는 친위대의 눈에 들 생각이다.
“친위대요? …혹시 종주를 노리십니까?”
“왜. 내가못할 것같으나?”
여치영은 그것은 아니라며 재발리 고개를 저었다. 여홍 원이 피식 웃으며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었다.
“아무래도 친위대가 종주를 선택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아는 이가 없으니까. 뾰족한 공략법이라도 세워 놓고 그 런 말 하는 거야?”
“뭐,정확하게는 알 수 없어도 선례를 보고 대강 성향 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
“그래서 그 파악이라는 것은 끝난 겁니까?”
여현덕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여홍재는 매우 간단히 대답했다.
“적어도 숙부님처럼만 하면 되지 않겠나? 지금은 이발 빠진 호랑이 신세지만 전대 종가승계에서 엄연히 친위대 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던 분 아니나.”
“종주님처럼 한다는 것은……
“숙부께선 정적들을 교묘하게 제거해 나갔지. 친위대 는 그걸 알면서도 숙부를 종주로 택했다. 어떤 부분인지 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 숙부님의 방식이 그들의 마 음에 들었던 걸 거야. 그러니 나도 그럴 작정이다.”
경직된 침묵이 짧은 순간 남자들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
다. 여홍원은 당황한 낯에 어색한 미소를 끼얹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 후보가 누가 될지 모르는데,미리부터 그렇게 급 하게 생각할 건 없지 않아?”
“맞아. 일단 여제운은 거의 확실하고,태국영도……■,,
“내가 그놈들한테 질 거라는 말이나?”
여홍재가 불쾌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헌데 그에게 적 당히 아첨하던 여치영마저 이번에는 선뜻 아니라고 답하 지 못했다. 그들의 뇌리를 꽉 채운 불안감의 실체를 눈치 챈 여홍재가 차갑게 쏴붙였다.
“종주가 어디 무식하게 힘만 세다고 될 수 있는 자리나. 걱정들 마라. 놈의 약점은 이미 내가 훤히 꿰뚫고 있으니 까.,,
“글쎄…… 무식하게 힘만 센 걸로도 충분히 위협적이 지 않나……
그나마 이 자리에서 가장 솔직할 수 있는 여홍원이 속 내를 끄집어 보였다. 여홍재가 그런 그에게 무시무시한 안 광을 쏘아 보냈다. 여홍원은 슬쩍 허공으로 시선을 피하 며 생각했다.
우리 형님이 놈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 같아 걱정이 다,라고.
“은퇴?”
태국영은 더러운 걸레 다루듯 엄지와 검지로 귀퉁이만 집어 올려 읽고 있던 문서를 떨떠름하게 응시했다.
“왜 오버하고 지랄이야. 사정 좀 아는 놈들은 내가 핍박 해서 쫓아냈다고 하겠네.”
“뭐가 또 불만이나. 종주가 작정하고 판 깔아줬는데.” 태호연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때마침 회사 서 류를 챙겨 들고 방문해 있던 참이었다. 태국영은 무슨 개 소리나는 듯 힐긋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 유치한 종가승계에 나도 참전하란 소리잖아. 판 깔 아주는 척하면서 지금 나 엿 먹이고 있구만.”
“종주 경쟁이 유치하다고 하는 놈은 너밖에 없을걸.”
“나만 배고 다 병신들인가 보지. 고작 허울분인 감투 하 나 쓰겠답시고 마지막 한 놈 남을 때까지 서로 모략 질에 드잡이질 반복하는 게 그럼 안 유치해?”
“허울 분은 아니지. 친위대의 막강한 충성이 있잖아. 왕 처럼 대접받고 싶은 놈들에게 그보다 더 황홀한 자리가 또어딨겠어.”
“그래서,형님도 그자리가 탐나시나?”
가주 넘겨준다는 말에도 칠색 팔색했던 태호연은 말문 이 막히고 말았다. 태국영은 혀를 차며 눈썹 끝을 올렸다.
“그 왕 대접 좀 받는 대가로 분쟁 있을 때마다 찡찡거리 는 소리 들어야 도I지,일족 대소사는 모조리 관리해야 되 지,말 안 듣는 놈들 일일이 단속시켜야 되지,또 뭐가 있 나. 一아,그 친위대란 놈들 다 거둬 먹이기도 해야 되네. 그러고 보니 개들 도대체 몇 명이지?”
“글쎄. 많아 봐야 이백도 안 될 텐데 그거 거둬 먹이는 것도 싫으냐. 돈도 많은 게.”
“누가 돈 때문이래. 그 많은 놈들이 날 엄마오리처럼 바 라볼 걸 상상하면 두드러기가 날 것 같아 그러지.”
차마 부정할 수 없는 말이다. 친위대는 공식 석상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으면서 종주 곁만 평생을 멤도는 집단이 다. 태 가의 수컷들은 태생적으로 그 맹목을 너그러이 품 을 만한 족속들은 되지 못했다.
“씨발. 이걸 덥석 받기는 배알이 뒤틀리고,안 받으려 니 일이 꼬일 게 분명하고. 진짜 짜증 나 죽겠네.”
태국영은 한껏 미간을 찌푸린 채 초대장을 박박 찢어 바닥에 부렸다. 그것을 묵묵히 보던 태호연이 다시 부추겼
“당연히 받아야지. 여군호가 찔러준 히든카드는 조커 야.,,
“말은 바로 해. 우리 형님도 지금 여군호가 굽히는 척하 면서 그 와중에 머리 굴리고 있는 거 빤히 읽고 있잖아.”
태호연은 싱긋 웃으며 그에 관해서는 대답을 아꼈다. 여군호가 깨끗하게 백기를 흔드는 모션을 취하는 와중에 도 실리를 긁어가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과연 그 자리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자식농사만 말 아먹지 않았더라면,아마 지금쯤 모두 그의 손에서 놀아나 고 있을 게 분명했다.
윤봄이가 태국영에게 원한이 사무쳐 있는 것,최가 형 제들에게 붙잡혀 있는 등대들이 좀체 원하는 아기를 낳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그들을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있 는 태국영,이렇게 어우러진 삼박자는 여군호가 꾸미려던 농간질에 소름 끼치도록 잘 어울리는 조각들이었다. 제아 무리 감 좋은 태국영이라 할지라도 그 간계를 파훼하는 것 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태국영은 필시 그 사건을 의심의 여지없이 윤봄이와 최 가 형제의 합작품이라고 오해했을 것이고,빌미가 생겼으 니 그날부터 당장 놈들을 때려잡기 시작했을 것이다. 한
번 발톱을 끼내 들면 목적지까지 기관차처럼 달리는 놈이 라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상황을 돌아볼 여유 따위는 더더 욱 없었을 것이고.
“너무 고깝게만 보지 말고 그냥 딱 네 입장만 두고 생각 해 봐라. 네가 여기에서 뒷짐 지고 가만히 있으면,다음 대 종주가 결정되는 순간부터 년 평생 폭탄을 안고 가게 되는 거랑 진배없어. 그건 여군호의 은퇴가 훨씬 뒤로 미 뤄졌어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야.”
태국영은 늘 없는 듯이 굴었지만 어디에서건 눈에 띄었 고,제 심기를 제대로 쥐어짠 놈이 나타나면 반드시 잔인 한 끝을 보고야 마는 남자였다. 직간접적으로 그런 일들 에 연루된 이들은 태국영에게 원한을 가질 씨앗을 하나씩 다 가지고 있는 셈인데,그 수가 두 손 두 발 다 동원해도 반도 세질 못할 정도였다.
“다음 대 종주가 친위대한테 인장 던져주면서 태국영 의 가족들을 죽이라고 명령하면 어쩔래.”
“내가 먼저 찾아내서 씨를 말리면 되겠지.”
“그게 얼마나 걸릴 줄 알고? 한 달? 일 년? 십 년?”
“십 년은 좀 오버잖아.”
태국영은 미간을 찡그리며 반박했고 태호연은 코웃음
을 쳤다.
“전혀 오버가 아닐걸. 년 친위대 애들 얼굴은 물론 개들 이 몇 명인지조차 몰라. 너분 아니라 종주를 제외한 우리 일족 모두가 마찬가지지.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 네가 백 명을 잡아 죽이건 이백 명을 잡아 죽이건 이 싸움이 과 연 정말로 끝났는지 죽을 때까지 모를 거고,죽을 때까지 의심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야. 그리고 년 아마 평생 제수씨와 네 아이들이 네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순간마다 불안해하겠지. 모든 순간을 곁에서 지켜볼 자신이 있다 면,그래,네가 지켜줄 수도 있을 거야. 아예 바깥출입도 못 하게 막으면 가드는 더더욱 쉬워지겠지. 하지만 너 그 렇게 할자신 있나?”
“네 입으로도 전에 그랬지. 제수씨 활동적으로 몸 쓰면 서 일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라 집구석에 처박아 놓으면 우울증 와서 시들시들 말라갈 거라고.”
하나하나 옳은 말만 하니 태국영은 그저 귀만 열어놓 을 수밖에 없었다. 여군호의 면전에서 친위대를 급습해 협 박을 하긴 했지만 그건 지극히 감정적인 충동에서 나온 행 동이고,그 끼림칙한 놈들과 진지하게 맞붙을 생각을 하 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태호연의 말이 맞다. 그들은 종주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서라면 죽은 듯이 자취를 감추어 십 년도 인내할 수 있는 집단이었다. 바로 그것이 친위대와의 싸움을 반드시 기피해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내가 이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태호연이 빈정거리는 눈빛을 쏘아 보냈다.
“도대체 뭘 걱정하는 거냐,너는. 개들이 ‘제발 우리들 의 종주가 되어 주십시오.’하면서 따라다닐 거라고 대단 한 착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태국영의 눈썹이 꿈틀 꺾여 올라갔다. 마치 그게 당연 한 미래 아니었나는 신색이었다. 가주 좀 하라고 스토커처 럼 쫓아다니던 태 가의 원로들이 저 착각의 원흉이라고, 태호연은 혀를 찼다.
“마셔줄 생각도 없는 김칫국은 좀 넣어 둬라,가주야. 네가 받은 초대장은 딱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고. 친위 대 애들은 뭐 밸도 없는 줄 아나? 자기들 보는 앞에서 자 기들이 목숨 걸고 충성하는 종주를 그렇게 깔아뭉갠 놈을 다음 대 주인으로 맞게?”
태호연이 쐐기를 박듯 강하게 단언했다. 태국영은 미묘 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더니,이내 깨달음을 얻은 듯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랬다. 친위대가 저를 절대 반기지 않을 것임은 지극
히 상식적인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더는 고민할 이유가 없 었다.
최명욱은 무표정한 낯으로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 었다. 그는 쑥대밭이 된 방 안을 느리게 훑어본 뒤 고개를 바로 했다. 침대 위에는 박해인이 새우처럼 몸을 말고 끙 끙 앓는 중이었다. 그러나 엉망으로 터지고 부은 얼굴에 고통스러움보다는 후련함이 가득했다 .
최명욱은 방금 전 상황을 가만히 반추했다.
「그 년 어디 숨겼어? 넌 알지? 알잖아! 여제운이랑 짰 지? 네가 그 새끼 홀려서 송재희 배돌렸지? 반응 없다더 니 다 연극이었어. 그래,그럴 줄 알았다고! 어디야? 그 년 어디 있어? 당장 말해!」
실종된 송재희의 행방에 관한 실마리를 하나도 잡을 수 없었다. 사방으로 가솔들을 풀었으나 일주일 가까이 머 리카락 한 올 찾지 못했다. 윤봄이는 불안증이 극치에 다 다라 하루에도 몇 통씩 약을 비우더니만 결국 오늘 폭발해
서 들이닥쳤다. 쏟아지는 폭력을 막을 길 없는 박해인은 매서운 손찌검에 종이 인형처럼 이리저리 구르고 엎어졌 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도 그녀에게 날을 세웠다.
「억지 부리지 마세요. 내가 그 남자를 유혹했으면 재희 가 아니라 나부터 구해달라고 했겠죠.」
처음 끼내 든 말대답에 윤봄이가 더 눈이 돌아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최경엽이 그녀를 끌어 내고 나서야 소동은 한차례 끝을 맺었다. 그러나 조만간 다시 그 불안증이 위험수위에 다다르면 이곳을 찾을 것이 었다.
최명욱은 짧고 밭게 오르내리는 박해인의 어깨를 노려 보듯 응시했다. 찢어진 옷엔 핏물이 배었고 드러난 살갗 은 성한 곳을 찾는 것이 더 발랐다. 피가 굳은 상처와 붉 고 푸른 명들이 묘연한 한기를 심장으로 불어넣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봐요? 당신도 내가 여제운 씨를 꼬드겨서 재희를 배돌렸다고 생각해요?”
박해인은 새된 숨을 흘리며 꽉 막힌 목소리를 쥐어짰 다. 며칠 동안 쥐 죽은 듯 눈치를 본 결과,송재희는 이들 이 모르는 누군가에 의해 납치가 된 게 분명했다.
윤봄이는 여제운을 의심하고 있었지만 턱도 없는 소리
였다. 그 신중한 남자가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었다.
최명욱과 최경엽은 용의자를 특정 짓지 못하고 있는 상 태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걸어 등대를 보고 싶다 고 징징대던 김정구가 송재희의 실종 시점부터 자취를 감 추기는 했으나,김정구에게는 이광운을 압도적으로 제압 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혹시 무언가 실마리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 최명욱이 김 정구의 자택에 찾아갔을 때,김정구의 아버지와 누이는 최 명욱을 꽤 쌀쌀맞게 대한 것 같았다. 놈이 작정하고 잠수 타서 놀러 다니는 게 어제오늘 일이나,네놈이 그걸 부추 기지 않았느나,뾰족한 냉대만 들었다.
“여제운이 너에게 홀딱 빠졌다면 널 이렇게 두진 않았 겠지.”
최명욱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온기 없는 얼굴은 마치 가면 같았다. 그의 확언이 가슴을 후벼 파는 듯했다. 박해 인은 윤봄이에게 개처럼 두드려 맞을 때보다 그 말 한마디 가 더 뼈아팠다.
“그래요. 나는 당신들이 만든 남창이니까요. 돈만 주면 정액을 받아주는 제게 누가 진심을 주겠어요. 섹스는 나 같은 거랑 하고 사랑은 고귀한 상대랑 하는 게 당신들 방 식일 테니.”
박해인은 힘없이 말하며 돌아누웠다. 온몸이 쑤시고 아
픈 가운데 머릿속은 그저 복잡했다.
재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친남매도 아니었으나 두 사람은 매우 각별했다. 서로 의 처지를 이해해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오롯이 둘 분 이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송재희는 박해인을 오빠 처럼 따랐고,박해인 역시 송재희를 친동생처럼 여겼다.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사심 없이 나눌 수 있는 따뜻 한 체온분이었지만 그게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되었었다.
최가 형제들의 감각을 감쪽같이 속일 만큼 완벽하게 사 라졌다면 납치범은 분명 평범한 인간이 아닐 터였다. 어 딜 가건 의지를 묵살당한 채 몸을 팔아야겠지만,적어도 윤간만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홀 로 독차지하고 싶어 훔쳐갔을 테니 조금은 덜 험하게 다 룰 수도 있을 거라고 안심해야 하는 걸까.
명하니 한심한 생각들을 떠올리고 있을 때,뒤쪽의 매 트리스가 움푹 꺼져들었다. 돌아보지 않는 박해인의 등 뒤 로 나직한 물음이 떨어졌다.
“너도 벗어나고 싶어?”
박해인은 침대가 붙은 벽을 의미 없이 응시했다. 펄 들 어간 벽지의 일정한 무늬가 가물가물한 시야에서 아지랑 이처럼 일렁거렸다. 부은 눈꺼풀이 아리고 매웠다.
“벗어나고 싶다면 보내주실 건가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숨소리조차 없는 완벽한 정적 이었다. 박해인은 제 뒷머리로 꽂혀오는 시선을 느꼈다.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 안에 담길 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 다-
까마득히 쌓인 정적을 깨는 기척이 있었다. 푹 끼졌던 매트리스가 탄력 있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박해인은 떨리 는 입술을 물었다가 놓았다.
“가지 마세요.”
그가 멈추었다.
“도망칠지도 모르잖아요. 감시해야죠.”
말도 안 되는 소리란 걸 그도 박해인도 알고 있었다. 그 러나 최명욱은 웬일로 군소리 없이 다시 그 자리에 앉았 다. 그리고 박해인이 오랫동안 숨만 쉬다 잠이 들 때까지 그렇게 망부석처럼 있었다.
먼지 한 톨 없이 닦인 액자는 족히 여덟 자 길이었다.
그 안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드넓은 설산을 배경으로 느긋
하게 배를 깔고 있었다. 호랑이의 눈빛은 마치 타고난 지 배자의 그것처럼 형형하고 여유로웠다. 하얗게 붐어져 나 오는 입김과 섬세하게 한 올 한 올 묘사된 털은 금방이라 도 유리를 깨고 나올 듯 생동감이 넘쳤다.
남자는 족히 여덟 자는 되어 보이는 그 액자 앞에 서 있 었다. 스며들어 오는 바람도 한 줌 없어 머리카락 하나 흔 들리지 않으니 딱 그림 앞에 세워진 동상의 형국이었다.
가지런한 노크 소리에도 남자는 반응이 없었다. 그저 제 가문의 시조를 형상화한 그림만 사늘하게 응시하고 있 을분이었다.
“가주님. 원로 분들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안에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공손한 목소리가 다시금 제 존재를 알렸다. 간혹 눈을 깜박이는 것 외에 조금도 움 직이지 않았던 남자,이원표의 안면이 그제야 미동을 보였 다. 한쪽 눈썹을 까딱 올린 그가 돌아서며 응답했다.
“들여라.”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남자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겉모습만 보면 마치 초로에 접어든 듯싶 지만,그들 중 가장 적은 세월을 산 자의 나이가 무려 65 세나 되었다.
정력적으로 가문의 일에 뛰어들었던 전성기를 지나 이 제 노년에 접어든 그들은 이제 숱한 경험을 가진 원로로 서 젊은이들에게 지혜를 전해주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리 고 그런 그들이 이렇듯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은 가문에 중 대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과 진배없었다.
이원표가 먼저 상석에 앉았다. 남자들은 테이블을 사이 에 두고 길게 이어진 소파에 각각 착석했다. 고용인들이 따라 들어와 간단한 음료를 세팅하고 사라졌다. 이원표는 빈 컵에 레몬 향이 나는 시원한 물을 채우며 가볍게 안부 를 묻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간 다들 무고하셨습니까.”
“우리야 별다를 것이 있겠는가. 현명한 가주 덕분에 평 화로운 말년을 즐기고 있지.”
형식적인 말들이 잠시 오고 갔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다소 경직된 안면의 남자들은 어느 순간 약속이나 한 것처 럼 입을 다물었다. 이원표는 물기 맺힌 잔을 손 안에서 빙 글 돌리며 짧게 한숨을 지었다.
“말씀들은 그렇게 하셔도 모두 얼마 전 가문을 뒤흔든 비보 때문에 많이 심란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원로님들께 와 달라고 청을 드렸던 건,그간 자칫 미궁에 빠질 뻔했던 그날 사건의 실마리를 잡았기 때문입
모두가 예상했던 화제가 그 실체를 드러냈다. 이원표 는 고개를 주억거리는 원로들의 면면을 살펐다. 그 누구 도 ‘잘 되었다’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사건 현장이 어떠 했는가를 자세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광운은 이경엽 소유의 별장 부지에서 참혹하게 찢긴 채로 발견이 되었다. 뜯겨 나간 사지는 다진 고기처럼 으 스러진 상태였고 몸통은 온갖 군데가 도륙이 나 성한 내장 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정도였다. 뇌와 심장이 멀정하면 끊임없이 재생력을 발휘하는 일족의 특성을 놓고 생각해 보자면,이광운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어마어마한 고 통을 동반한 고문을 당했다는 말이었다.
또한 격렬한 반항의 흔적이 남아있는 그 자리에 범인 을 단정 지을 만한 것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토 록 완벽한 은폐는 곧 불길한 징조였다.
제 존재를 감추는 것에 있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 는 것이 바로 마음의 평정이다. 평정이 깨지면 흔적은 반 드시 남는다.
현장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은 두 가지 가 능성을 시사했다. 범인이 고도의 심신수련을 통해 은폐능 력을 갖추었거나,본래 그 정도로 강하다는 말이었다. 전
자라면 아마도 종가의 친위대 정도가 될 것이고 후자라면 특정할 대상이 그리 많지 않았다.
어느 한쪽도 버겁지 않은 대상이 없을 것이었다. 원로 들은 바로 그 점을 매우 염려하고 있었고,그렇기 때문에 증거를 찾건 찾지 못하건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 오전 회사로 무기명의 퀵서비스가 도착했습니다. 열어 보니 어떤 메시지도 없이 SD카드 하나만 들어 있더 군요. 확인해 보니 소형 캠코더 제품에 들어가는 칩이었습 니다.,,
“캠코더라니요? 그럼 누군가가 직접 현장을 촬영해서 가주님께 넘겨주었다는 말입니까?”
안부 인사에도 침묵을 지키고 있던 원로 하나가 의아하 다는 표정으로 눈가를 좁혔다. 이원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확히 말하자면 현장은 아니고,그 별장 부지의 입구쯤 되는 곳이었습니다. 일단 먼저 보시지요.”
이원표가 가볍게 손짓했다. 뒤편에서 대기 중이던 그 의 비서가 조명을 끄고 프로젝터를 켰다. 암막 같은 스크 린이 벽 한 면에 내려오더니 소리 한 줌 없는 영상을 재생 시켰다.
울창한 숲 어귀에 오물 같은 사체의 조각들이 널려 있 었다. 구름 뒤에 숨은 달이 언뜻언뜻 지상으로 빛을 부릴
때마다 으스러진 생명의 흔적들이 그 형체를 또렷이 했다. 그날 입구를 지키다 비명횡사한 최 가의 가솔들이었다.
광역적으로 주위를 훑던 영상이 어느 순간 쇄도하듯 그 초점을 또렷이 조였다. 참사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 던 촬영자가 목표물을 집어 문 순간이었다.
한 남자가 지저분한 차림의 여자를 짊어진 채 산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지나치게 느긋했고 홈 없이 우아하며 가볍기까지 했다. 영혼이 탈색된 사체 조각 들이 그의 구듯발에 다시금 으스러졌다.
이윽고 남자가 잔 나뭇가지들을 헤치고 넓은 길로 나왔 다. 붉은 핏자국을 훈장처럼 달고 있는 수려한 얼굴이 달 빛 아래 하얗게 드러났다. 남자의 얼굴을 또렷하게 확인 할 수 있었던 그 순간,침묵은 정적으로 굳어졌다.
달이 다시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맹수 같은 눈동자만 이 어스름한 달빛을 받아 짙은 궤적을 남겼다. 그의 뒷모 습이 멀찍이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스크린을 비추던 영상 도 그와 함께 끼졌다.
“보셨다시피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원표의 말이 신호라도 된 듯 천장 조명이 돌아왔다. 이원표는 딱딱한 원로들의 얼굴을 찬찬히 쓸어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제가 왜 원로님들을 소집했는지 이해하시겠지요.
“잘 알겠습니다. 가주님 홀로 어떤 결단을 내리기 힘드 섰겠습니다.”
산발적인 침음성이 나직이 흘렀다.
“헌데 태국영은 왜 광운이를 죽이고 여자를 납치해 갔 을까요?”
이 자리에서 가장 연장자인 이영범이 의문을 제기했다. 이원표는 손끝만 움직여 소파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다 신 중하게 입을 열었다.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합시다. 태국영이 여자를 납치 해 간 것은 맞지만 광운이를 죽였다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 다.,,
“하지만 정황상一”
“심증은 심증일 분입니다. 그것을 옳다고 주장하기 위 해 덧붙이는 살들은 의미가 없습니다. 보다 확실한 정황 을 파악할 수 있는 무언가가 나오기 전까지 속단하는 것 은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반론하려 했던 원로는 선을 긋듯 날카롭게 찍어 내리 는 눈빛에 크흠 목을 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고 있다 해도 이원표는 엄연히 원로들의 윗전
이었고,그 자리에 있을 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는 남자였 다.
“일단 가장 확실한 것부터 짚고 넘어가지요.”
이원표가 낮은 목소리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최경엽은 철저히 비밀리에 등대들을 팔았습니다. 원로 님들도 마찬가지겠지만,저도 그들이 등대들을 사로잡아 매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알게 되었 을 만큼 물밑에서 은밀하게 이뤄진 일입니다. 헌데 저 날 태국영의 행보를 보면 그는 이미 그 매춘행위를 정확히 파 악하고 있었고,예약자들에게만 알려주는 시간과 장소까 지 사전에 입수해 움직인 것으로 보입니다.”
“태 가의 누군가가 최경엽의 고객이었고,그에게서 사 전 정보를 입수했을 가능성이 크군요.”
“아닙니다. 최경엽은 제게 광운이의 죽음을 빌미로 협 력을 요청했었습니다. 그들의 고객 중 하나가 등대를 독차 지하기 위해 이 사달을 낸 것으로 보이니 함께 그들의 뒤 를 캐내 범인을 색출해 내자고요. 그러나 그가 넘겨준 명 단에 태국영은 물론 태 가의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이영범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거 매우 이상한 일 아닙니까. 태국영은 그럼 최 가 의 행태들을 어떻게 알았고,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벌
였다는 겁니까?”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최경엽은 등대들을 직접 데리고 다니며 절대 시야에서 떼 놓지 않았다고 했다. 일족들을 피해 숨어 살고 있는 것 을 직접 끌고 왔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두 가지 요소는 최 경엽이 범행자를 제 고객으로 단언하는 확실한 근거였고, 이원표 역시 그에 동의했었다. 그러나 그 확신이 빗나가면 서부터 이미 모든 것이 물음표투성이로 바뀌어 버린 것이 었다.
“최경엽도 태국영의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알리지 않았습니다.”
“광운이는 태국영과 그 어떤 접점도 없었습니다. 연관 성을 찾으려면 최경엽에게 직접 묻는 것이 가장 확실한 일 이 아닙니까.”
“아마도 그렇겠지요.”
원로들은 언뜻 이해하지 못한 듯한 낯빛을 띠었다. 이 원표는 어느새 비어 버린 잔에 다시 물을 채우며 냉정하 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가 진실이라고 말해 주는 것들을 제가 믿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말씀은……
“최경엽과 최명욱은 믿을 만한 자가 절대로 못 됩니다.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로 그의 말만 듣는 건 좋지 않다 고 판단이 들었습니다.”
“아. 그런 관점에서라면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만……
뒷말을 흘리는 남자를 대신해 이영범이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가 무례를 무릅쓰고 한마디 드리겠습니다.”
“얼마든지요.”
이원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량 넓은 가주에 게 존경의 뜻을 담아 고개를 가볍게 숙인 이영범은 예고대 로 다소 무례한 말을 건넸다.
“혹시 가주님께서는 지금 태 가와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한 구실을 찾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원로들이 짐짓 놀란 표정으로 눈빛을 교환했다. 표현 이 너무 직설적이고 지나치지 않았나 싶은 기색이었으나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누구도 없어 보였다.
이원표의 입가에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깃들었다. 그 는 원로들의 의심이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원로님들 눈에는 제가 아직도 어린아이로 보이시나 보 군요.”
“혹시 불쾌하셨다면一”
“아닙니다. 불쾌하다니요.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
제가 모를 리가 없지요. 가솔들의 안위를 책임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 차대함을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원표는 곧 그 특유의 스산하고 냉정한 얼굴을 되찾았 다. 잠시 말을 멈추었던 그는 작게 고개를 흔들며 짧은 한 숨을 흘렸다.
“무턱대고 감싸기엔 광운이는 너무 부끄러운 짓을 벌였 습니다. 차라리 묻어두고 가는 것이 좋지 않나 싶을 정도 였지요. 그러나 그것 말고도 이번 일은 신중하게 돌아가 야 할 이유가 아주 많습니다. 감정적인 이유로 섣불리 달 려들었다가는 필시 엉뚱한 재앙이 굴러 들어올 겁니다.”
이원표는 소파 등받이에 팔꿈치를 걸치더니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의문을 남긴 채로 다시금 입을 다 문 그는 무언가 고민이 아주 많은 듯한 낯빛이었다.
이영범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가 불현듯 주름진 눈매를 좁혔다. 어떤 깨달음이 하살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 나갔다.
“가주님. 혹시 저희에게도 말하기 껄끄러운 무언가가 있으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깨끗하게 수긍한 이원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직
채 정리하지 못한 의혹들이 머릿속을 격렬히 날뛰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아주 섬세하게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가문의 명운이 달린 일이다. 득과 실을 철저히 계산하 는 동시에 명예 역시 흠집 내지 않을 묘수를 찾아야만 했 다.
그는 거듭 고심했고 원로들은 재촉 없이 그가 스스로 침묵을 끊어내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모두가 물 한 모 금 넘기지 않고 한 자세를 고수한 지 십여 분쯤이 흘렀을 때였다.
“종주님께서 은퇴를 예고하셨지요.”
긴 정적을 깨뜨린 한마디는 모두가 예상치 못한 화제였 다. 원로들은 어리둥절함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응시했다. 굳게 닫혀 있던 이원표의 눈꺼풀은 반쯤 열려 있었고 그 안에 들어찬 눈동자는 싸늘하게 빛났다.
“그 말인 즉 곧 다음 대 종주 자리를 놓고 치열한 종가 승계가 시작된다는 뜻이고요.”
“…그렇지요. 이제 슬슬 친위대들이 다음 종주 재목을 찾아 나설 겁니다. 그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하는 수많은 남 자들은 친위대의 눈에 들기 위해서 기를 쓰겠지요. 헌데 그것이 이번 일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요?”
이원표는 껄끄러운 화제를 피하기 위해 이렇듯 어설피
말을 돌리는 남자가 아니었다. 원로의 의문은 당연한 수순 이었다. 이원표는 조금 늦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나직 이 대답했다.
“아마도 관련이 있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원표의 미간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요.”
구름 뒤로 숨은 달이 찌그러진 채 흐린 빛을 지상으로 부렸다. 오랜만에 쐬는 밤공기는 서늘하고 잔잔했다. 살랑 거리는 바람결이 앙상한 나뭇가지를 이따금씩 스쳐 지나 갔다. 그때마다 빛바랜 나뭇잎들이 나비처럼 바닥으로 내 려왔다.
아담한 마당에는 사람 손길을 잃은 티가 나는 작은 꽃 밭이 있었다. 물오른 꽃봉오리는 물론 멀정한 이파리 하 나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고,그마저도 뻔뻔하게 담을 넘 어오는 길고양이들이 파헤쳐 놓아 엉망이었다.
송재희는 낡은 2인용 벤치에 앉아 처참하게 뒤집어진 흙더미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닷새 만에 현관을 열고 나 와 한 것이라고는 이렇게 물처럼 흐르는 시간을 방치한 것
분이었다.
과거의 언젠가는 저 황폐한 꽃밭도 아리따운 꽃을 피우 던 때가 있었을 것이었다. 과거의 제가 싱그럽게 웃던 그 날처럼.
“몸은 좀 괜찮아졌어?”
명하니 넋을 놓고 있던 송재희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 었다. 습격처럼 귓속으로 꽂혀 들어온 목소리에 본능적으 로 온몸이 굳어들었다. 그러나 가로등 불빛을 등진 남자 를 발견하자 굳어진 공포는 잔 떨림으로 녹아내렸다. 남자 의 입에 물려있는 담배 끝에서 불꽃이 발갛게 일어났다.
송재희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가 덮쳐드는 현기 증에 휘청거렸다. 남자가 쯧 혀를 차며 순식간에 다가와 팔을 붙들었다. 뜨거운 손바닥이 가느다란 팔을 감쌌다.
“꽁꽁 얼었잖아. 뭐 좀 걸치고 나오든지.”
그의 열은 코롱 향기에는 알싸한 담배 연기가 녹아 있 었다. 송재희는 그가 이끄는 대로 힘없이 걸었다. 현관을 지나 실내로 들어서자 훈훈한 공기가 떨리는 몸을 감아 왔 다. 그제야 뒤늦게 뼈마디를 죄어 오는 추위를 자각했다.
“준호야. 애 뭐 따뜻한 것 좀 줘.”
조용히 뒤를 따르던 태준호가 ‘네,형님.’하며 재발리 주방으로 사라졌다. 태국영은 송재희가 앉는 맞은편 소파
에 느긋하게 몸을 묻었다.
“이제 정신 좀 차렸어?”
“…네.,,
“밥 잘 안 먹는다며. 잘 먹어야 상처도 잘 나아.”
송재희는 맞잡은 두 손을 불안하게 꿈지럭거리며 고개 를 끄덕였다. 태국영은 홈,하며 느슨하게 다리를 꼬았다. 그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리는 모양이 꼭 겁 잔뜩 먹은 토끼 같았다.
“박해인이 걱정돼?”
송재희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내내 아슬아슬 시선을 피하던 눈이 정확하게 태국영의 얼굴로 향했다.
“내가 널 데려온 뒤로 박해인은 최명욱의 집에서 한 발 자국도 못 나오고 있어. 한동안은 아마 그 상태가 지속될 거야. 밖으로 내돌렸다가는 또 누가 가로챌지 모르니까.”
최명욱은 제 자택에 절대로 고객을 들이는 법이 없었으 니,적어도 한동안 억지로 몸을 팔 일은 없을 거였다. 태국 영 역시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듯했다.
해인 오빠도 구해주시면 안 되나요.
그 간절한 속내를 차마 뱉어낼 수가 없었다. 제 처지에 염치를 따질 때는 아니었지만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 어야 하는 법이었다. 조금이라도 덜 아프기 위해 눈치 보
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린 탓에 자연히 알 수 있었다.
사나흘에 한 번 이 집에 들르는 그의 의도는 이곳에 그 의 냄새를 도배해 두기 위함이었다. 가엾은 저를 돌보아 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태준호가 뜨거운 코코아를 놓고 사라졌다. 송재희는 따 뜻한 머그컵을 두 손에 쥐고 입에 대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런 그녀를 빤히 보던 태국영이 성가시다는 듯 눈가를 찌 푸렸다.
“너 계속 이 상태면 곤란해. 식욕이 없어도 억지로 먹 고,의욕이 안 생겨도 억지로 기운 차려.”
“구월 말에 일족 전체가 참가하는 모임이 있어. 이 꼴 로 갈 생각은 아니겠지?”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는 소리를 그는 너무 담담하게 끼 내 놓았다. 송재희는 일순 등허리를 경련했다. 창백하게 혈색 잃은 입술이 더듬더듬 움직였다.
“제,제가 거길 왜 가요?”
“첫날 말했잖아. 너 쓸 데가 있어서 데려온 거라고.” 송재희의 얼굴이 납빛으로 변했다. ‘왜 절 구해주셨나 요.’하는 질문에 ‘쓸모가 있어서.’라고 했던 그의 대답이 번득 뇌리를 스쳤다. 그녀는 제 안의 실낱같은 신뢰가 와
장창 무너지는 소리를 똑똑히 감지했다.
신뢰라니.
기가 막혔다. 허탈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도 날 그 놈들에게 팔아넘길 생각이었나요,원망을 담은 눈에 물기 가 고였다. 그때 그가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살벌하 게 쏘아붙였다.
“야. 너 지금 무슨 착각해. 날 그딴 새끼들이랑 같은 취 급하지 마. 여자 장사에 손 뻗을 만큼 돈 안 궁해.”
“그게 아니면,원가요?”
송재희는 코끝이 발개질 정도로 눈물을 참으며 물었다. “년 그냥 당당하게 고개만 쳐들고 있으면 도?. 주눅 들지 도 말고,무서워하지도 말고. 할 수 있으면 사랑에 빠진 여 자 흥내를 내면 더 좋겠지만,지금 네 상태를 봐서는 그 정 도는 못 할 것 같으니까 거기까지는 안 바라고.”
“…무슨,말이에요?”
“저기재이제는 좀 익숙하지?”
태국영은 엉뚱한 소리를 하며 아무렇게나 손짓해 보였 다. 송재희는 무심결에 그의 손끝을 따라갔다가 멀찍이 보 초처럼 서 있던 태준호와 눈이 마주쳤다. 태준호는 어리둥 절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고만 있었다. 그조차 영문을 모 르는 눈치였다.
“재 애인 행세 좀 하란 소리야.”
‘‘……네?”
“예에?! 형님,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준호는 기겁해서 순식간에 뛰어왔다. 공기 덩어리가 훅 밀려올 정도로 다급한 움직임이었다.
“형님,아니,가주님. 저 싫습니다. 가주님께서 예뻐하 시는 성문이 시키십시오. 아시잖습니까. 저 좋아하는 아가 씨 있는 거. 혼삿길 막히기 싫습니다.”
그런 중요한 모임에 공식적으로 여자를 데려간다는 건 그 의미가 가볍지 않았다. 참석자 명단에 미리 동반할 것 을 알리는 것은,적어도 후에 제 호적에 올릴 정도로 확신 이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한 마디로 열렬히 사랑하는 약혼자라는 뜻이다. 이미 마음에 둔 여인이 있었던 태준호에게는 기겁할 일이었다.
“이 새끼가. 뭐? 싫어? 네가 지금 내 명령에 토를 달아?
그러나 태국영은 알짤 없이 굴었다.
“너 반성이 덜 됐어? 이번엔 다리가 아니라 대가리 한 번 부서져 볼래? 어디 못 한다는 소리가 나와. 뒤지려고.”
앙금이 남은 듯한 질책에 태준호는 찍소리도 못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지라는 말에 그는 터덜터덜 뒤돌아
서 밖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태국영은 못마땅하게 눈 꼬리를 올리며 다시금 송재희를 바라보았다.
“그 새끼들한테 완전히 벗어나고 싶지?”
여전히 상황파악은 안 되었지만,송재희는 명하니 고개 를 끄덕였다.
“그럼 내 말대로 해. 나만 좋자고 이 짓 하는 거 아니야. 이번 일만 잘 끝내면 박해인하고 너 둘 다 평생 안락하게 놀고먹어도 될 만큼 챙겨 줄게. 원한다면 좋은 일자리,좋 은 혼처도 알아봐 줄 수 있고.”
태국영은 마치 어린 동생을 달래듯 가볍게 눈을 휘었 다. 완벽한 이목구비에 작은 곡선이 끼어들자 소름 끼칠 만큼 매력적인 얼굴이 되었다. 송재희는 갑작스런 제안에 적잖이 혼란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나한테 협조해 봐. 나처럼 좋은 스폰서 찾기 쉬운 거 아니다.”
태국영은 곧 떠날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작별인 사도 없이 사라지려는 그를,송재희는 저도 모르게 일어 나 붙들었다. 태국영은 오?,하며 고개를 비틀어 내려다보 았다.
송재희는 떨리는 입술을 한참 동안 달싹이다 멈칫 팔 을 올렸다. 태국영은 일순 가늘어진 눈으로 제 뺨에 와 닿
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얼음처럼 싸늘하게 얼어붙은 체온 이 순식간에 말초를 틀어쥐었다. 강렬하고 또 자극적인 감 각은 지극히 낯익으면서도 낯설었다.
태국영은 짧게 혀를 차며 송재희의 가느다란 팔목을 낚 아챘다.
“나 이미 목줄 채워진 몸이야. 꼬시려고 하지 마.”
그의 눈은 무생물처럼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불신 과 혼란에 휩쓸린 송재희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험한 꼴 많이 당해서 중심 잡기 쉽지 않다는 거 감안하 고,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 줄게. 다음에 또 이런 일 만 들면 나 진짜 화내.”
송재희는 온몸을 떨며 입술 안쪽을 짓씹었다. 뒤늦게 야 참혹한 부끄러움이 몰려온 탓이었다. 잃어버린 인생을 되찾아주겠다고 약속하는 남자에게 자신은 무슨 짓을 하 려 했나. 일단 체온을 겹치고 접촉이 중첩되면 난폭함이 다소 수그러들고 사탕발림을 부리던 남자들과,이 남자를 같은 취급했다). 이전에 제가 그토록 치를 떨던 방식으 로,강한 남자의 그늘을 갖고 싶어 했던 것이었다. 엣된 얼 굴은 금세 눈물로 엉망이 되고 말았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안녕히 가세요.”
송재희는 몇 차례나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더니 도망치
듯 달려가 2층으로 사라져 버렸다. 태국영은 멀거니 눈만 깜빡였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는 혼란스러운 감정의 찌 끼기들이 먼지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성적인 트라우마는 때로 가치관을 흔들거나 부서뜨리 기도 하는데,송재희는 지금 그 중간 정도에 있지 싶었다. 태국영은 내일 당장 송재희에게 정신과 의사부터 붙여줘 야겠다고 생각했다.
저절로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겨우 7시였다. 기왕 백수가 된 거 늘어지게 낮잠을 자야지 싶었는데,습관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간단히 아침을 때운 뒤 세면을 하 고 출근준비를 하느라 바블 때였지만 오늘부로 그런 일상 은 저 멀리 사라졌다.
어제는 밤늦게까지 송별회가 이어졌다. 퇴직 사유를 건 강 문제로 알렸기 때문에 술잔을 거부하는 것은 어렵지 않 았다. 저만 배고 모두 술에 떡이 되어 정신을 못 차렸다. 그들이 구태여 잡지 않았더라도 어제만큼은 끝까지 있고
싶어서 자리는 꽤 오래 지속되었다.
퉁퉁 부은 눈꺼풀이 무거웠다. 어제는 하루 종일 홀로 동물원을 돌면서 하나하나 다 작별인사를 했다. 이제 선생 님 안 오?,미안해,그 말을 하는 것이 참 힘들었다. 씩씩하 고 의젓하던 태산이까지 원가 다르다는 걸 느꼈는지 처음 으로 엉엉 울며 가지 말라고 할 땐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핑 핑 났다.
이승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으나 아주 따끈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약하게 틀어둔 공기청정 기 바람이 청량하게 머리칼을 간질였다. 이불 속에서 명하 니 있다 몸을 일으키자 가벼운 현기증이 머리를 덮어 눌렀 다.
“국영아. 어디 있어.”
졸음 남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시 뒤 방문이 열리 고 태국영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꽤 큰 원목 트레이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아담한 유리 접시 세 개에 사과와 배,블루베리가 각각 놓였고,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석류 차도 있었다.
“먹고눈 좀더 붙여.”
이승도는 일단 사과부터 하나 집어 우물거렸다. 며칠 전부터 자고 일어나면 공복감이 너무 심해 눈만 뜨면 뭐
든 입에 넣고 봐야 했다. 과일을 다 집어 먹은 뒤에야 찻잔 을 들었다. 새콤달콤한 석류차가 입 안에 기분 좋게 젖어 들었다. 빈 잔을 건네며 물었다.
“애들은?”
“아직 자. 아파서 뒤척이는 기색은 없으니 일어날 때까 지 내버려 둬.”
“나안 졸려.”
트레이를 티 테이블에 올려두고 돌아온 태국영은 명하 니 앉은 이승도를 품에 안고 몸을 뉘었다. 안 졸린다고 버 티던 게 무색하게 이승도는 금방 정신을 놓았다.
색색 고른 숨결이 햇살 속에 녹아들었다. 아기처럼 무 방비한 얼굴은 그간의 피로 때문인지 조금 야위었다. 태국 영은 제 팔을 베고 세상모르게 꿈나라 여행 중인 이승도 의 아랫배를 가만히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왜 너 혼자만 먹나. 우리 승도도 좀 나눠줘.”
애 얼굴이 반쪽이 됐잖아,하는 말에도 뱃속은 잠잠했 다. 아직 태동을 할 시기는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일족의 아기는 대략 30주간 모체의 뱃속에서 성장을 한다. 개월 수로 따지자면 7개월이 조금 넘는 기간이다. 태아가 움직이는 것을 모체가 느낄 정도가 되려면 적어도 12주는 지나야 했다.
태중 기억이 본격적으로 남는 건 마지막 한두 달 정도. 이 시기의 태아는 엄마의 기분을 생생하게 느끼며,엄마 와 아빠의 말소리를 드문드문 기억하게 된다. 세상 밖으 로 나와 점점 논리적인 사고가 가능하게 되면 제 머릿속 에 남은 태중 기억을 정확하게 떠올릴 수도 있다.
태이경의 경우에는,사실 태중 기억이라고 할 것은 하 나밖에 없었다. 무섭고 서러워 늘 괴로워하던 엄마,그 발 치에서 매일 같이 빌던 아빠의 모습이었다. 녀석이 어느 정도 더 자라게 되면 아마도 지금보다 더 완벽하게 그 상 황을 이해하게 될 것이었다.
이승도는 엄마 아빠가 섹스를 하는 것이 아이의 기억 에 남으면 어쪄나 걱정하고 있지만,사실 그 문제는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엄마 아빠가 사랑을 나눈 것은 알아도 무슨 일을 했는지까지 아이가 알 수 있을 리 가 없었다.
당장 여은태만 봐도 그랬다. 녀석에게도 부모가 사랑하 는 태중 기억이 있지만 성에 관해서는 무지한 상태였다. 그나마 요 근래 차근차근 성교육을 시작하고 나서야 ‘아, 그때 그게 그거였구나.’하고 어렴풋이 알아차리는 정도였 다.
“그런데 애가 그걸 알아먹으려나 모르겠네.”
괜한 걱정이 산더미같이 많은 이승도가 그 설득에 넘어 가 줄지가 관건이었다. 위험한 것이 손톱만큼이라도 있다 면 저도 참을 생각인데,이승도는 아무래도 그 방면에 관 해서는 저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살살 꼬드길까 고민하고 있을 때,멀리서 작은 진동이 울렸다. 태국영은 조심히 몸을 일으켜 이승도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소파에 파묻혀 있던 휴대폰을 찾아 들었 다- 음?
태국영은 의외인 이름에 고개를 갸웃하며 전화를 받았 다.
“웬일이야. 전화를 다 하고.”
《한 번 만나지. 저번처럼 시간은 네가 정해. 장소는 내 가정할 테니.〉〉
“용건은?”
《네가 전에 했던 말,그거 받아볼까 싶어서.》
태국영은 작게 코웃음을 쳤다. 남강우가 이제 와서 이 러는 이유는 능히 짐작이 갔다. 놈이 손 한번 잡아 보겠다 고 어제까지 끈질기게 뒤를 밟던 이승도가 오늘부터 완전 히 집에 들어앉아 버린 탓이었다.
“이미 끝난 일이야. 난 분명 한 달을 말했고 그 기한은
지났어.”
《생긴 대로 매정하게 구네. 고작 며칠이잖아. 열흘도 안 됐다.》
“그 고작 며칠 사이에 아주 많은 일이 있었거든. 지금 받으려면 너도 좀 골치 아플걸. 내가 좆같이 열 받아서 사 채를 좀 당겨 썼는데 그 이자가 꽤 될 거란 말이지. 감당 할자신 있어?”
어이없는 기색의 침묵이 넘어왔다. 일족들 가운데서도 손으로 꼽히는 갑부가 갑자기 웬 사채 타령인가 싶은 모양 이었다.
“이제 와 발 들이지 마.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태국영은 대답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화를 끝내 버 렸다. 타이밍이 묘했으나 남강우가 여군호의 사주를 받았 을 거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는 적어도 간교한 술수에 놀아나 줄 만큼 값싼 남자는 아니었다. 그가 긍지 처럼 여기는 자존심이 태국영은 마음에 들었다. 발 들이 지 말라는 충고도 정말 그를 위한 것이었다.
『전에 그 바에서 보는 걸로. 시간은 네가 정하고.』
태국영은 짧게 도착한 메시지를 심드렁하게 응시했다. 예상을 조금도 빗겨나가지 않는 반응이었다. 참 일차원적 이라 마음에 들지만 이 집요에 가까운 집념에는 절로 혀
를 내두르게 되었다. 제 꼴을 까맣게 망각한 태국영은 ‘그 럼 오늘 저녁 일곱 시.’라고 짧은 답장을 보내 두었다.
이승도가 다시 잠에서 깬 것은 오전 10시가 되었을 무 렵이었다. 주말에도 이렇게까지 늦잠을 자본 일이 거의 없 었던 터라 괴상한 죄책감이 들었다. 먹먹한 머리를 문지르 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맡 사이드테이블에는 구운 지 얼마 안 되는 초코 칩 쿠키가 바구니에 소담스레 쌓여 있었다. 버터 특유의 고소한 냄새에 절로 손이 이끌려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 을 때,쿠키가 담겼던 바구니는 작은 부스러기들만 조금 남은 상태였다. 이승도는 실없이 웃으며 아랫배를 통통 두 드렸다.
“우리 별이 얼마나 커서 나오려나.”
태아의 태명은 장장 닷새를 끈 끝에 별이로 낙점되었 다. 그 닷새 동안은 유모를 위시한 고용인들과 태호연을 비롯한 태국영의 친척들이 열변을 토하듯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기 바빴다. 예쁘고 의미 있는 태명들이 너무 많이 쏟아져 도리어 고르기가 힘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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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요만해? 요만한데두 눈,코,입이랑 앞발이랑 뒷발까지 다 있어요?”
“정확한 모양은 아직 다 안 만들어졌을 거야. 그래도 있 을 건 다 있어. 아마 지금도 귀 쫑긋하면서 우리 이경이 목 소리 듣고 있을 거야.”
“정말? 나 그럼 인사할래요.”
이승도는 편안히 상체를 뉘었고 태이경은 냉큼 아랫배 에 귀를 붙였다.
“안녕,별아. 우리 별이 엉금엉금 길 수 있게 되면 내 꿈 에도 좀 놀러 와. 보고 싶어. 기다리고 있을게.”
태이경이 홀로 몸을 배배 꼬며 아기에게 말을 걸고 있 을 때,여은태는 이승도의 다른 쪽 옆구리에 꼭 붙어 앉아 잠자코 그것을 지켜보았다.
이승도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귀엽다는 듯 웃고 말 았다. 표정이란 게 잘 느껴지지 않는 녀석의 얼굴에 확연 히 꽁한 기색이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은태,이경이가 동생을 너무 예뻐해서 질투하는 구나?”
여은태는 흠칫 놀라 댕그랗게 눈을 떴다. 대답 없는 아 기에게 일방적으로 조잘거리고 있던 태이경이 응? 하며 촉촉한 눈망울을 들었다. 여은태는 격렬히 고개를 저었다.
[아,아니야. 나도 별이 예뻐. 질투 같은 건 어린애나 하 는 거지. 난그런 거안 해.]
이승도는 빙그레 웃으며 도로 몸을 일으켰다. 매끈한 녀석의 목덜미를 길게 어루만져주며 말했다.
“우리 은태가 이경이를 너무 예뻐하면 그럴 수 있어. 이 경이가 아기보다 은태를 더 좋아했으면 싶은 거지?”
여은태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앞발로 애먼 시트만 긁었 다.
“우리 이경이는 좋겠네. 형아가 이렇게 예뻐해 주니까.
‘‘응. 좋아요. 나도 형아 좋아.”
태이경은 냉큼 반대편으로 건너가 여은태의 앞다리에 매달렸다. 짧은 팔다리로 동동 둘러매며 방긋 웃음 지었 다. 여은태는 괜히 새침하게 허공을 한 번 보았다가 금방 꼬리를 흔들며 고개를 숙였다. 따끈한 혀가 태이경의 살굿 빛 뺨을 기분 좋게 할아 올렸다.
“질투는 자연스러운 거니까 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 아기 미워하거나 이경이한테 심술부리거나 그런 것만 안 하면 되니까. 알겠지?”
[…응. 알았어.]
“선생님은 우리 은태가 이경이도 예뻐하고,우리 별이 도 이경이만큼 예뻐했음 좋겠다.”
[나도 별이 예쁘다니까. 그래도 이경이가 더 예븐 건 어 쩔 수 없지만.]
여은태는 솔직하게 대꾸하고는 짧은 주둥이로 태이경 의 목을 비비적거렸다. 복슬복슬한 꼬리가 허공에서 물결 쳤다. 태이경은 뒤로 발라당 넘어가며 숨 막힐 듯 웃음을 터뜨렸다. 침대가 워낙 넓어 아이들이 뒤엉켜 노는데도 전 혀 부족함이 없었다.
녀석들도 참.
이승도는 못 말린다는 듯 둘을 바라보다가 기척을 느끼 고 고개를 들었다. 태국영이 문틀에 비딱하게 한쪽 어깨 를 기댄 채 서 있었다. 애들을 토닥토닥 해 주고 나니 다 큰 어른이 나타났다. 그것도 가장 질투 많고 가장 사랑에 목마른 애 같은 어른이.
“거기서 뭐 해. 이리 와.,,
이승도는 앉은 채 두 팔을 벌려 불렀다. 태국영은 성큼 성큼 다가와 한쪽 다리만 굽혀 침대로 올라왔다. 크게 구 부린 상체가 빛을 가리며 맨 상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뜨거운 손아귀에 뺨이 갇혀들었다. 입술이 부딪치는 순간 이승도는 자연스레 입을 벌렸다.
알콩달콩 엎치락뒤치락 잘 놀던 아이들이 앗,하며 구 르듯 침대를 내려갔다. 녀석들은 우당탕탕 뛰어서 바람처 럼 방 밖으로 사라졌다. 사내아이들의 에너지 폭풍이 지나 간 자리에는 아늑한 고요가 자욱이 내려앉았다.
세차게 얽혀든 혀가 짧게 서로를 갈구하고 떨어졌다. 잔잔히 헐떡이는 입술을 그가 섬세하게 할아갔다. 이승도 는 희미하게 상기된 얼굴을 움직여 빙그레 웃었다.
“좋은 아침.”
쪽,태국영은 가볍게 입을 맞추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 다. 시원하게 트인 눈시울에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 온순 하게 받아준 키스가 그의 불만을 깡그리 녹인 듯했다. 여 은태가 아니라 그를 먼저 교육시켜야 할 판이었으나 아무 리 말을 해도 알아먹을 리가 없는 남자였다. 가정의 평화 를 위해서는 그냥 져 주는 게 최선이었다.
이승도는 안아 들려는 그의 팔을 피해 제 발로 섰다.
“그러지 마. 내가 무슨 환자도 아니고.”
“왜. 임신한 마누라 섭섭하게 하면 평생을 간다고 해서 애지중지해 주겠다는데.”
“일도 관뒀는데 걷기라도 해야지.”
수의사란 직업은 육체적 노동이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 는 직업이었다. 목수 역할도 훌륭히 해내는 사육사들보다
는 덜 하지만 어느 정도 체력이 받쳐줘야만 했다.
“맛있는 냄새 나.”
방을 나서서 드레스 룸으로 향하던 도중 이승도가 코끝 을 찡긋거렸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등 뒤로 찰싹 붙었다.
“우리 승도 몸보신 시키는 데 주력하는 유모가 오늘은 소 갈비찜에 꼬리곰탕에 백숙에 제육볶음에 아주 잔칫상 을 차리고 있거든.”
“맛있겠다.”
“응. 맛있는 냄새.”
태국영은 목덜미에 코를 박아 연거푸 깊은 들숨을 마시 며 속삭였다. 이승도는 낮고 거친 음성이 살갗을 쓸어내리 자 어깨를 움츠리며 그의 머리를 억지로 밀어냈다. 이러 다 또 잔뜩 취해서 정신 못 차리면 하루 종일 제 뒤꽁무니 만 졸졸 따라다닐 게 분명했다.
“어쭈. 이리 안와?”
이승도는 불만스런 그의 말을 무시하고 얼른 드레스 룸 으로 들어갔다. 가장 가까운 장의 유리문을 밀어 잡히는 대로 꺼내 입었다. 흰색 폴로셔츠와 크림색 면바지였다.
태국영은 웃으며 혀를 찼다. 패션에 예민한 유모가 보 면 또 잔소리를 할 게 분명했다. 이사를 오면서 열심히 이 승도 전용의 드레스 룸을 꾸며 주었던 그녀는 이승도마저
옷에 관심이 없어 요새 상심이 대단했다. 그나마 뼈대가 곧고 매끈한 체형이라 아무거나 걸쳐도 잘 어울리니 그것 을 위안으로 삼고 있는 눈치였다.
이승도는 태국영의 팔을 끌어 주방으로 내려갔고,역시 나 유모는 두 남자의 차림에 실망스런 낯빛을 했다. 그러 나 금세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어머,승도 군! 타이밍 딱 좋아요. 얼른 앉아요.”
음식을 막 다 데운 참이었다. 유모는 이승도를 의자에 앉힌 뒤 뜨거운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는 큰 뚝배기를 가 져왔다. 꼬리곰탕이었다.
“잘 먹을게요.”
짧은 감사 인사를 건넨 이승도는 유모가 네,하기도 대 뜸 수저부터 들었다. 보얗게 우려낸 국물에 꼬리뼈와 수육 이 푸짐하게 담긴 모양이 허기를 자극했다.
고용인들은 분주하게 주방과 식당을 오갔다. 식지 않 게 따뜻한 상태로 조금씩 담아 올리는 찬들은 바닥을 보이 기 전에 신속하게 채워졌다. 식사량이 어마어마하게 는 탓 에 몇 번이고 그 일을 반복해야 하지만,고용인들의 얼굴 에는 내내 행복한 미소만 머물렀다.
“승도 군 잘 먹는 거 보니 제 배가 다 부르네요.”
유모가 부듯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둘째 아기씨는 아주 건강한 도련님인 것 같아요.
“음. 딸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태국영의 확언에도 여전히 미련은 남아 있었다.
“전혀요. 우리 첫째 도련님 때야 좀 아리송했지만,이 정도로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아기는 무조건 아들이에요. 그런데 그건 왜요? 승도 군 혹시 딸 갖고 싶어요?”
“특별히 아들보다 딸이 좋은 건 아니에요. 그래도 아들 은 있으니 딸 키우는 재미도 느껴보면 좋겠다 싶은 정도 죠.,,
“아휴. 그럼 나중에 또 낳으면 되죠. 우리 가주님 사십 대까지는 혈기왕성하실 것 같은데 뭐가 문젠가요.”
물론 태국영이야 40대 아니라 50대가 되어서도 충분 히 아기를 만들 능력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그가 아닌 이승 도 자신이었다. 그만큼 늙어서 늦둥이를 볼 생각은 조금 도 없었다.
“우리 가문은 이상하게 딸이 귀해. 성비가 아주 극악으 로 불균형하지. 아들이 다섯 나오면 딸은 하나 나올까 말 까야.”
태국영은 ‘그러니까 딸 보고 싶으면 한 다섯 낳든지.’하 고 기함할 소리를 덧붙였다. 안 그래도 애 돌보는 것이 얼
마나 기력 발리는 일인지 요즘 심각하게 체감하는 중이었 다. 이승도는 아들만 네다섯일 상황을 상상했다가 낯빛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좋지 않은 생각인 것 같아. 딱 별이까지만 낳자.”
태국영은 혀를 차며 손아귀에 쥔 얼음물을 잘랑잘랑 흔 들었다.
“아쉽네. 우리 딸이면 분명 절세미인일 텐데. 우리 승 도,현리 못 봤지? 호연 형님네 외동딸.”
“응. 못 봤지. 왜?”
“개가 엄청 미인이라 종가모임에 딱 나타나면 수컷들 이 미친놈들처럼 페로몬을 붐어내기 바쁘거든. 현리분만 아니라 태 가 아가씨들은 나오는 족족 경국지색으로 유명 해. 그런데 거기에 날 닮기까지 하면 얼마나 예쁘겠어.”
태국영이 오만하게 내뱉은 말은 지극히 사실적이라 조 금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승도는 저도 모르게 태 국영을 쏙 배닮은 경국지색의 미녀를 상상해 보았다. 그러 나 뚜렷한 이미지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다만,그를 닮았 다면 엄청난 미인이지 않을까 싶긴 했다.
아니. 미인이건 아니건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동 물원 동료들 중엔 유독 딸을 가진 이들이 많았는데,그들 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자연히 딸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에피소드들이 참 많았다.
“나중에 가서 다시 생각해 보자.”
결국 가능성을 열어두며 그렇게 대답하면서도,역시 셋 째는 무리지 않을까 속으로 재차 생각하긴 했다.
라이브음악이 흐르는 환상적인 분위기의 실내는 그대 로였다. 눈꽃이 흘러내리는 반투명 유리도 마찬가지였다. 남강우는 미리 와서 이미 양주를 네 병이나 비운 상태였 다. 손도 대지 않은 과일 안주에서 사과는 이미 누렇게 변 색이 되어 있었다. 태국영은 혀를 차며 맞은편에 앉았다.
“나 방금 술 처먹다 급사하는 최초의 일족이 네가 될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거 재밌겠네.”
남강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희미하게 휘 는 눈시울에 열은 미소가 걸렸다.
‘‘한잔할래?”
“응. 줘.”
태국영은 마다하지 않았다. 여전히 원 맛으로 먹나 싶 긴 하지만 좀 익숙해져서 이승도와도 가끔 한 잔씩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술 취한 인간의 행동변화는 꽤 흥미로웠고,이승도는 특히 더 그랬다.
좋아한단 고백을 처음 한 것도,배란기도 신경 쓰지 않 고 넣어 달라 떼를 쓰던 것도 다 주정뱅이가 저지른 쾌거 였다. 한 방에 아기가 생겼는데도 후회하는 기색이 없는 걸 보면,속으론 은근히 둘째를 바라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말하자면,평소에는 조금 쭈뼛거리던 걸 취했을 때 살 짝 풀어놓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섹스에서도 그 랬다. 반가운 변화였다.
태국영은 깨끗하게 닦여 벨벳 천 위에 뒤집어져 있던 얄팍한 잔을 들어 내밀었다. 남강우가 술병을 기울여 잔 을 채우며 무감응한 어투로 물었다.
“오늘부로 백수 된 네 애인은 잘 있나.”
“이제 웬만하면 관심 좀 끄지. 이 거머리야.”
태국영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손이 다 떨릴 지경이야. 이 정도로 집착했는데 성과가 전무했던 건 처음이거든. 한이 남을지도 모르겠어.”
남강우가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태국영의 입 가에 실소가 가볍게 머물다 사라졌다. 파스텔 톤 조명이 그의 매끄러운 뺨을 굴렀다. 그가 반쯤 눈을 내리깔며 가
득 찬 술을 느리게 비워냈다. 바늘처럼 날카로운 속눈썹 그늘이 그의 눈 밑에 드리웠다.
“뭐,우리가 이 이상 더 안부 묻고 그럴 사이는 아니고.
남강우는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두며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그 사채이자라는 건 도대체 뭐냐. 뭘 당겨 쓰셨어?”
“일단그 전에 하나만 물을게.”
남강우는 고개만 한 번 까닥해 보였다.
“너 여군호랑 작당할 생각 있어?”
“갑자기 종주님 애기는 왜 나와?”
“그냥 딱 말해 봐. 종주가 어느 날 널 불러서 묻는다고 치자고. 우리 한 번 쎄쎄쎄 해서 태국영 뒤통수 한 번 치 자,이렇게. 그럼 넌 뭐라고 답할래?”
느슨한 어투였지만 빤히 꽂혀오는 눈은 물 샐 틈 없이 치밀했다. 희미한 미동마저 잡아낼 듯 집요하고 끈질긴 시 선이었다.
남강우는 영문을 몰라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태국영이 농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얼핏 짐작 가는 바로는,아마 도 여군호와 원가 마찰이 있었거나 앞으로 있을 예정인 게 아닐까 싶었다.
사전 협박에도 불구하고 별로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나 왔던 남강우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태국영이 굳이 이 자리 에서 여군호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오늘 일이 그 마찰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걸 대놓고 알려준 것과 다름없었다.
이제 와 발 들이지 말라던 충고가 과연 이런 것이었나.
남강우는 고요히 반병을 비웠고 태국영은 그동안 담배 한 대를 느리게 피웠다. 흡연석이 따로 없는지라 여기저 기 연기가 뭉쳐 다녔으나,기묘하게도 그 둘이 앉은 자리 는 청량한 공기가 투명하게 휘돌고 있었다.
확실히 썩히긴 아까운 능력이야.
남강우는 자연스럽게 그를 빗겨가는 공기의 흐름을 주 시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조금 엉뚱 한 호기심이 일었다. 과연 태국영은 여군호를 상대로 어 떤 판을 기획하고 있는가,하는 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생각은 순식간에 매듭이 지어졌다.
“종주님 방식은 나와 분명히 어긋나. 아마도 거절하겠 지.,,
“너 저번 종가모임 때는 여제운이 등 떠미니까 나 치러 왔잖아.”
“뭐 그런 거랑 비교를 하나. 그때는 마침 심심하고 지겹 던 차에 자극적인 이벤트니까 참가를 했던 거지. 목표가
딱히 너였던 건 아니었다고.”
홈,태국영은 작게 코를 울렸다. 흠집 하나 없이 희고 고운 손가락이 먹색의 테이블 위를 일정한 리듬으로 두드 렸다. 웃는 듯 곡선을 그리다 만 입술은 한참을 굳게 닫혀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걸리는 것이 있어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거침없는 성격의 그를 망설이게 하는 게 무엇일까 의아해질 무렵이었다.
태국영이 불쑥 자리에서 일어나 까닥 고갯짓을 했다.
“따라오?. 자세한 건 가서 애기해 줄 테니.”
남은 술을 아쉬운 듯 힐긋 본 남강우가 도리 없이 자리 를 털고 일어섰다. 습관처럼 카운터로 가 계산을 하려는 태국영을 어깨로 밀어냈다.
“됐다. 이번엔 내가 내.”
“맘대로.”
태국영은 쿨하게 양보하고 나와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주차장으로 내려간 두 남자는 각자 자기 차에 몸을 실었 다. 내려오는 동안 남강우에게 주소를 알려준 태국영은 빠 른 속도로 차를 몰았다. 송재희를 숨겨둔 곳은 제 자택에 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유사시 제가 직접 나설 때 를 대비해 둔 거리였다.
차고 문은 열려 있었다. 미리 연락을 받은 태준호가 밝
은 얼굴로 나와 있었다. 태국영과 남강우는 거의 동시에 도착해 차에서 내렸다.
“오셨습니까,형님.”
태준호는 기븐 낯을 조금도 감추지 못했다. 꼼짝없이 송재희의 약혼녀로 끌려가야 할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자 전에 없이 깍듯한 태도였다. 그는 남강우 에게조차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했다가 태국영에게 엉 덩이를 걷어차였다.
“아무 데다 굽신거려. 이게 혼나려고.”
“죄송합니다. 너무 기뻐서 그만.”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충격은 꽤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태준호는 싱글벙글했다. 태국영은 쯧 혀를 차며 앞장섰 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니 진한 초콜릿 향기가 실내 가득 했다. 단내를 좋아하지 않는 남강우는 콧등을 찌푸렸다. 태국영이 슬쩍 언질을 놨다.
“애라서 그래. 성인이 된 지 이 년도 안 됐거든.”
남강우의 콧등 주름이 더 깊어졌다.
“나 어린애는 취미 없는데.”
“누가 너더러 재 책임지래? 적당히 장단 맞춰 놀기만 해.,,
말해 놓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국
영은 힐긋 뒤돌아보며 단호하게 말을 정정했다.
“진짜로 눈이 맞아 배도 맞추건,비즈니스 커플처럼 연 기나 하다 헤어지건 그건 둘이서 알아서 해. 상관하지 않 을 거니까. 하지만 강간은 절대 안 돼.”
“야. 강간은 더 취미 없어. 그 정도로 궁하지도 않고.” 남강우는 굉장히 불쾌한 투였다. 태국영은 느른히 웃으 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냥 미리 경고 차원에서 한 말이야.”
이승도를 두고 몇 달 동안 뺑뺑이를 돌렸는데도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선은 지킨 남자였다. 실제 접촉이 있었을 때 약간 참기 힘들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남강우의 인내 심이 그리 쉽게 무너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최 소한의 신뢰가 없었더라면 애초에 여지도 주지 않고 잘라 냈을 거였다.
멀리 걸어갈 것도 없이 송재희는 응접실 소파에 꼿꼿하 게 허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살이 조금은 올랐지만 창백 한 낯은 여전했다. 바짝 얼은 전신에 간헐적으로 흐리게 스쳐 지나가는 떨림도 마찬가지였다.
지척에 다가섰을 때,태국영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 어 보였다.
“재희 안녕. 여기 옆에 오빠한테 인사해.”
큰 눈을 슴벅거리던 송재희는 쭈뼛쭈뼛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남강우는 심드렁한 낯으로 한 손을 올 려 답했다. 두 남자가 맞은편에 자리하고 나서야 송재희 는 다시 어색하게 앉았다.
“준호보다 더 적임자가 나타나서 내가 데려왔어. 어때, 잘생겼지?”
송재희는 겁먹은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어쩔 수 없 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딱히 진심이 깃든 긍정은 아닌 것 이 확연히 티가 났다. 남강우는 픽 웃으며 건들건들 다리 를 꼬았다.
“억지로 장단 맞춰 줄 필요는 없어.”
딱히 탓하는 것은 아니었다. 짐승 같은 남자들에게 가 장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짓밟힌 과거가 있는 여자였다.
그 상처의 깊이를 가늠할 수는 없으나 단시간 내에 치료 가 될 법한 성질이 아니라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자기 의지 없이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 는 아가씨는 까다롭다. 앞으로 자꾸 움츠러들 그녀보다, 연약한 생명체를 다독이고 달래는 것에 영 소질이 없는 스 스로가 조금 걱정이었다.
“아무튼 만나서 반가워.”
남강우는 대뜸 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송재희
는 가느다란 어깨를 쪼그라뜨리며 태국영을 바라보았다. 태국영은 원가 한심한 변태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남강우를 일별하더니 뒤이어 송재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손좀 잡아줘. 가여워 죽겠다.”
괜찮은가요,송재희는 불안하게 눈을 깜박이며 주저했 다. 태국영의 깊은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걱정 마. 이 새끼가 눈 돌아서 덤비면 내가 허리를 분 질러 줄게.”
태국영은 정말 특이한 남자였다. 살벌한 말을 아무렇지 도 않게 늘어놓으면서 어린애처럼 웃을 줄 알았다. 그런 데 그것이 천진난만해 보이지 않고 무언가 오싹하게 하는 매력이 있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송재희는 마른침을 삼 키며 남강우의 손에 제 손을 조심스레 겹쳤다.
태국영은 태준호가 가져다준 얼음물을 시원하게 넘기 며 곁눈으로 남강우를 주시했다. 악수를 하는 순간 남강우 의 표정이 아주 미묘하게 달라졌다. 웃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괴상한 곡선이 눈과 입술에 흐리게 매달린 채였 다-
남강우는 불현듯이 잡은 손을 끌어왔다. 거리가 꽤 있 었던 탓에 송재희는 앞쪽으로 끌려와 다른 손으로 티 테이 블을 짚어야만 했다. 그녀는 당황이 역력한 표정으로 태국
영을 바라보았다. 태국영은 남강우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 다.
송재희의 손가락은 가느다랗다고 표현하기도 모자랄 만큼 뼈가 앙상했다. 매끈한 일족들의 손에 비하면 투박하 고 거칠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촉감은 그다지 중요하 지 않았다.
남강우는 가늘게 뜬 눈으로 신중하게 큰 들숨을 마셨 다. 그럴 때마다 그의 몸에 꼭 맞게 붙은 셔츠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속살이 보일 만치는 아니었으나 단단히 매달린 단추들이 어쩌면 떨어져 나갈지도 모를 정도로 그의 가슴 이 크게 부풀었다 돌아오길 반복했다.
폐부를 들쑤시고 들어오는 냄새는 아주 짙고 청량했다. 만개한 꽃의 느낌보다는 아직 작고 여린 봉오리처럼 열은 매혹의 향기도 잔 가루처럼 떠돌았다.
남강우는 이승도와의 불가사의했던 접촉을 비로소 완 성했다. 그때 찰나 느꼈던 얼얼한 해갈의 느낌이 온몸을 흠뻑 물들이고 있었다. 늘 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무 지근한 두통도,분출구를 찾지 못해 몸 안에서 뜨겁게 요 동치던 염화도,빠르게 잦아들었다.
어떤 고통도 없었다. 매우 평화로운 방법으로 무장해 제 되었다. 남강우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점막으
로 마약을 흡입하는 인간처럼 집요하게 냄새를 맡는 것에 심취해 있었다. 너무 열중한 나머지 다가오는 손을 피하 지 못했다.
타악.
태국영이 사납게 그 연결을 끊어냈다. 강경한 제지가 남강우의 손목을 틀어쥐어 그 안에 포박되어 있던 송재희 의 손을 구출해 냈다.
“다음번에도 이러면 곤란해.”
남강우는 일순 명하게 눈을 깜박이다 하,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소파 등받이에 거칠게 몸을 기댄 그는 미묘하 게 고개를 꺾으며 중얼거렸다.
“와. 이거 굉장한데.”
태국영은 낚아챈 손을 가볍게 놓아주며 송재희에게 고 갯짓했다.
“재희 올라가서 쉬어.”
“……네.,,
송재희는 허둥지둥 일어나 2층으로 달려갔다. 긴 머리 카락이 잠시 휘어 감고 떨어져 나간 얼굴이 새발겠다. 면 원피스에 카디건을 덧입은 뒷모습을 남강우는 신기하다 는 눈으로 따라갔다. 그녀가 완전히 계단을 올라가 사라지 자 태국영은 남강우의 정강이를 가볍게 후려 찼다.
“만나자마자 세우고 지랄이야. 진짜 참을 수 있는 거 맞 아?”
‘‘응? 내가?”
남강우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 듯했다. 슬쩍 아래를 내 려다본 그가 황당하다는 듯이 목을 울려 웃었다.
“아니. 이건 좀 불가항력이었던 것 같은데. 진짜 흑심 은 없었어.”
그는 진심으로 유쾌해 보였다. 물론 그간 쌓인 스트레 스를 한 방에 날렸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을 만치 기분이 좋 을 것이었다. 그것이 어쩌다 성적 흥분을 야기했다 해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물을게. 재 억지로 안 건드린다 고자신할 수 있어?”
“물론.”
남강우는 선뜻 두 손을 허공으로 들어 보였다. 거의 허 무한 웃음만 짓던 입술이 큰 곡선을 매끈하게 그렸다. 태 국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 한 대를 물어 불을 붙였다.
“잘해 줘. 책임질 자신 없으면 애가 유혹해도 넘어가 주 지 말고. 난 네가 그 정도 중심은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 각해.”
“황공하군. 태국영의 신뢰라.”
“그래. 아무한테나 값싸게 넘겨주는 신뢰 아니니까실 망시키지 마.”
남강우는 태국영이 테이블에 툭 던지듯 놓아둔 담뱃갑 을 들어 저도 한 대 물었다. 두 남자가 피우는 연기가 매캐 하게 허공에 녹아들었다. 멀찍이에서 열심히 귀를 쫑긋거 리고 있던 태준호가 소리 없이 환호하는 기척을 둘 다 무 시했다.
남강우가 먼저 운을 뗐다.
“그럼 이쯤에서 내가 대납해야 할 네 사채 이자가 원지 정확히 풀어놔야 할 때인 것 같은데.”
“그래. 그걸 애기해야 할 때지.”
태국영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