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오늘은 확실히 기이했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태국영이 발정기 짐승처럼 이승도의 뒤꽁무니를 쫓는 게 정상이었 다. 그러나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나 가주님 패션을 외치 는 유모 곁엔 계속 이승도가 부록처럼 따라붙었다. 원가 할 말이 있는 건지 내리 뭐 마려운 강아지 꼴이었다.
슈트 차림을 구경하려고 그러나 보다 하며 내버려 두 고 있었지만,급기야 열두 번째 셔츠를 갈아입기 직전에 는 뒤통수가 따끔거려 오기 시작했다. 그냥 둬서 해결될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태국영은 그제야 뒤를 돌았다.
이승도는 스툴에 앉아 제 원 맨 패션쇼를 구경하며 견 과류를 가득 올린 브라우니를 먹고 있었다. 근 한 달 동안 물만 먹어도 토할 만큼 심한 구역질에 시달리더니만,속 이 씻은 듯 잠잠해진 그제부터는 한풀이라도 하듯이 하루 종일 먹을 것을 달고 살았다.
그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던 유모 역시 덩달아 신 이 난 상태다. 이승도의 입에 들어가는 것을 전부 홀로 책
임지고 있는 유모는 제 수준급 요리 실력을 봄낼 수 있는 이 기회를 기꺼워했다. 요즘 하루의 대부분을 주방에서 지 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냥저냥 먹을 만한 음식에 길들어 있던 싱글남 이승도 는 유모의 감격적인 요리 앞에서 번번이 무너졌다.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아도 주방에 알짱거리는 적이 많았고,그 럴 때마다 유모는 이것저것 맛난 것을 한가득 안겨주곤 했 다. 덕분에 홀쭉해졌던 뺨이 금세 돌아와 보기 좋았다.
태국영은 새 셔츠를 받아 팔을 꿰며 이승도에게 다가갔 다. 막 수제 두유를 마시던 이승도가 잔을 테이블에 내리 며 눈을 들었다. 태국영은 깊이 허리를 숙여 이승도의 입 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할짝할짝 걷어냈다. 지독하게 달아 혀가 얼얼할 정도였다. 입술에 남은 두유까지 말끔하게 할 아 먹은 태국영이 눈웃음을 지었다.
“우리 승도 왜. 서방님이 뭘 어떻게 해 주면 돼?”
이승도는 당황하지 않았다. 다만 내리 졸졸 따라다니 며 무언으로 ‘나 할 말 있음’을 외친 것이 뒤늦게 조금 쑥 스러워졌을 분이었다.
“너 혼자가?”
태국영은 상체를 깊이 숙인 그대로 단추를 끼우며 조 금 미묘한 낯을 했다. 갑작스런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기
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오늘 종가모임?”
“응.”
“우리이경이도 같이가지.”
‘‘응! 나도 가요!”
의자를 딱 붙여 놓고 이승도의 곁에 앉아 있던 태이경 이 씩씩하게 한 손을 번쩍 올리며 맞장구를 쳤다. 부릅뜬 눈과 희미하게 주름진 미간이 어떠한 결의를 비추었다.
“오늘은 나븐 애가 괴롭혀도 안 울 거야. 이젠 동생도 생길 거니까 의젓하게 형 될 준비해야 돼. 내가 꼭 이길 거 야.,,
“그게 무슨 말이야? 울다니?”
처음 듣는 소리에 놀란 이승도는 본래 목적도 잊고 태 이경을 끌어당겨 다리 위에 앉혔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데 도 요즘 잘 먹어서인지 별로 힘이 들지 않았다. 아니,그 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우리 이경이 저번에 아빠랑 모임 갔을 때 울었어?”
【어떤 놈이야? 누가 널 괴롭혔어? 왜 그랬는데? 뭐라 고 했는데?】
태이경의 허벅지에 고개를 걸치고 앞발 하나는 이승도 의 허벅지에 올린 상태로 노글노글 바닥에 앉아 있던 여은
태 역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추궁했다. 드물게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녀석은 제법 험악한 기세를 흘렸 다.
태이경은 당황해서 데굴데굴 눈을 굴리다 힐긋 태국영 을 올려다보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녀 석 대신 태국영이 대답했다.
“별건 아니야. 엄마 없다고 꼬맹이 하나가 시비 걸었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거짓말보다는 이렇게 진실 섞은 은폐가 좋은 법이었다. 그래야 나중에 걸려도 어느 정도 둘러대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이승도는 미 안함에 낯빛을 흐렸고 여은태는 흥분해서 펄쩍펄쩍 뛰었 다.
【뭐 그런 놈이 다 있어? 뉘 집 자식이야? 내가 다음에 만나면 아주 찰떡처럼 만들어 주겠어!】
뉘 집 자식인 줄 말해 주면 네가 아나. 태국영은 오버하 지 말라며 녀석의 귀를 잡아당겼다.
“내가 이미 제초작업 다 했거든. 네 몫은 조금도 안 남 았으니까 신경 끄시지.”
【이경이가 울었다잖아. 아빠가 돼서 애가 울 때까지 괴 롭힘당하는 동안 어디서 뭘 했어?】
“이경이는 온실 속 화초가 아니야. 내 피를 이어받은 내 아들이지. 제 또래 아이들과의 싸움에서 밀리는 것까 지 내가 통제할 수는 없어. 싸워서 이기지 못하는 건 이경 이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야.”
【완전 냉정해. 이렇게 예븐 애를 좀 애지중지해 주면 덧 나?】
“모르는 소리. 내가 애들 말싸움까지 관여해서 싸고돌 면 이경이한테 돌아오는 건 등신 머저리 취급밖에 없어. 우리 세계 그 어떤 아이도 그렇게 아빠 품에 의존해서 자 라지 않으니까.”
여은태는 불만스러웠지만 더 반박하지 못했다. 이승도 역시 그저 침묵한 채 태이경의 머리만 조심조심 쓰다듬고 있었다. 엄마 애기에 상처받고 울었을 아이가 너무 가엾 고 애릇했다.
“이경이는 약하게 태어났어. 하지만 그래도 내 아들인 건 변함이 없지. 아무리 강한 상대를 눈앞에 뒀다 하더라 도 약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단 말이야. 녀석은 그걸 깨 우치고 시비 걸어오는 상대를 깔아뭉개는 데에 익숙해져 야 해. 그렇지 않으면 평생 교활한 놈들에게 상처받으면 서 살게 될 거야. 넌 이경이가 그렇게 살길 바라나?”
내가 지켜주면 되잖아,그 말이 목구명까지 치솟았으
나 여은태는 애써 내리눌렀다. 아빠에게 의존하건 다른 누 구에게 의존하건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 다. 그 정도 논리적인 생각은 갖췄다.
“우리 이경이 속상했구나. 많이 울었어?”
이승도는 태이경의 얼굴을 살짝 들어서 눈을 맞추며 물 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니 제가 말실수했다고 안 절부절못하던 녀석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격렬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잠깐 화나서 울다가 금방 그쳤어요. 그리고 아빠가 다 혼내줬으니까 진짜 괜찮아요.”
여은태는 뒤늦게 이상함을 깨달으며 태국영을 빤히 올 려다보았다.
【애들 말싸움 관여 안 한다면서 이경이 괴롭힌 애들 다 처리했다는 건 원데?】
“내가 개입해도 될 만큼 좀 심한 구석이 있었어. 더 묻 지 마.”
태국영은 그쯤에서 선을 그었다. 이승도가 듣는 앞이 아니더라도 그 구질구질한 일을 누구에게 더 옮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의 태도에 대략 상황을 깨달은 이승도는 태이경을 꼭 끌어안아 정수리에 뺨을 묻었다. 저번에 왜 그리 큰 싸
움이 났나 했더니만,역시나 제가 원인이었던 모양이다. 막연히 예상했던 것을 진실로 맞닥뜨리게 되니 마음이 착 잡했다.
【이경아. 나중에는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알겠지? 내 가 무서운 표정 짓고 있으면 아무도 너한테 못된 소리 못 할거야.】
“응. 형아 손 꼭 잡고 있을게. 그래도 이젠 이길 자신 있 으니까 걱정 마. 그땐 처음이라 내가 너무 어린애처럼 굴 었어.”
【괜찮아. 넌 진짜 어린애니까 그래도 돼.】
놀고들 있네,태국영은 또 내심 혀를 차며 여은태를 흘 겨보았다. 나중에 태이경의 곁에 다른 누군가가 서 있을 거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녀석에게 특별히 연좌제를 씌울 생각은 없지만,그렇다고 여군호에게 쌓여 있는 앙금이 깨끗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예븐이들,나는 국영이랑 할 말이 있으니까 잠깐 둘이서 놀고 있을래?”
이승도는 태이경을 바닥에 내려두며 말했다. 안 그래 도 어떻게 하면 말을 돌릴까 고민하던 태이경은 냉큼 ‘응!
’하고 대답하며 여은태의 몸에 폴짝 뛰어올라 앉았다.
“형아,우리 정원 숲에 가서 놀자.”
【그래. 알았어. 선생님,우리 밖에 있을게.】
신나게 뛰어나가는 아이들의 뒤로 유모가 당부했다.
“도련님! 가주님 옷 다 고르면 도련님 차례니까 목욕해 야 할 정도로 뛰어놀지는 마세요!”
“응! 예쁘고 깨끗하게 놀고 있을게!”
타닥타닥.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자 이승도는 태국영 의 팔을 끌어 가장 가까운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태국영 이 흐리게 웃으며 농을 쳤다.
“설마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야한 짓 해주려는 건 아 닐 테고.”
이승도는 채우다 만 태국영의 셔츠 앞섶에 손을 댔다. 그러나 태국영의 미약한 기대와는 달리 그 단아한 손끝은 풀어져 있는 단추들마저 곱게 채워 놓았다.
“국영아. 오늘 나도 같이 가도 돼?”
길게 휘어 있던 눈시울이 그대로 정지했다. 태국영의 웃는 얼굴이 서서히 기묘한 표정으로 변해 갔다. 돌아올 반응을 기다렸으나 그의 입술은 꾹 닫힌 채 움직이지 않았 다. 이승도는 관자놀이를 긁다 혈색 좋게 물오른 입술을 다시금 우물거렸다.
“곤란해? 나 가면 안 되는 자리야?”
아니,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사실은 곤란한 게 맞았다.
오늘 작정하고 난장판을 칠 계획인 태국영은 일순 무슨 말 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꼭 가고 싶은 건 아니니까 안 되면 안 된다고 해도 돼.
그답지 않게 말문이 막힌 기색이라 먼저 여지를 주었 다.
“가자. 유모 기다리겠다.”
태국영은 돌아서려는 이승도의 팔을 붙잡아 돌렸다.
“내년에.”
불시적인 대꾸에 이승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어 그 를 올려 다보았다. 그의 입술은 오묘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 고,그의 눈동자는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 럼 반질거렸다.
“삼월엔 우리 아기 나올 테니까 몸조리 잘하고,오월쯤 간단히 식 올리자. 그런 다음에 유월 되면 또 정기 모임 있 으니까 그때 내 아내로 가. 올해는 집에서 여 가 꼬맹이랑 놀아주고.”
이승도는 대답 없이 주먹으로 태국영의 가슴을 툭 밀어 내기만 했다. 태국영은 순순히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기 다렸다는 듯 돌아서서 방을 나가는 이승도의 귓바퀴가 발 그레했다. 적막한 공간에 홀로 남은 태국영은 소리 없이
긴 웃음을 지었다.
태국영의 본질이 무엇이나고 누군가 묻는다면 이승도 는 망설임 없이 짐승이라고 하겠지만,매끈한 인간의 거죽 도 그의 것임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 둘 중에 무엇이 더 아름답나 하면 아마 주저하지 않고 지금의 껍데 기를 꼽을 것이다. 새카맣고 윤기 흐르는 털을 가진 짐승 이 못나서가 아니라,그만큼 그의 지금 모습이 너무나 근 사했기 때문이었다.
태국영은 남자에게 쓰기 부담스러운 수식어들도 잘 어 울렸다. 미인이라든지,매혹적이라든지,그런 표현조차 감탄스럽게 긍정하게 되는 것은 아마 그의 깊은 눈매와 육 감적인 모양의 입술 때문인 것 같았다.
시원하게 트인 눈시울엔 길고 숱 많은 속눈썹이 촘촘 히 박혀 있었고,이마에서 뺨까지 이어지는 입체적인 굴곡 은 그의 눈빛을 더 깊어 보이게 했다. 길게 빠진 눈꼬리에 미소라도 한 줌 매달면 아마 누구라도 순간이나마 넋을 놓 을 것이다. 입술은 주름 하나 없이 열은 장밋빛이었는데, 단지 비틀린 웃음을 지어도 픽 관능적인 인상을 주었다.
그 눈과 입술을 배면,태국영은 거의 남성적이거나 동 물적인 인상을 주었다. 제가 좋아하는 그의 등을 비롯해 온몸이 그러했다. 그래서인지 이전에 그가 딸 애기를 끼냈 을 때 구체적인 외형을 떠올리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지 금,이승도는 얼추 태국영을 닮은 딸이라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눈앞에 그려졌다.
“안녕하세요,당숙모님. 임신 축하드립니다.”
평소라면 낯선 호칭에 어색하게 웃었을 이승도였지만 지금은 조금도 반응하지 못했다. 공손히 인사를 해 오는 태현리의 미모가 너무도 눈부셨던 탓이었다. 머리가 쥐가 난 듯 명했다. 말을 잃은 채 크게 뜬 눈을 끔뻑이기에 바빴 다.
“당숙모님? ■■■아,혹시 몸이 안 좋으신가요?”
보다 못한 태국영이 커다란 손으로 시야를 가렸다. 눈 앞이 캄캄해지자 이승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거친 날 숨을 연거푸 내뱉었다. 모르는 사이 숨마저 멈추고 있었 던 모양이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이승도는 태국영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눈앞에는 여전 히 천상의 미모를 가진 아가씨가 서 있었다.
“현리 양이 너무 예뻐서 놀라서 그래요.”
익숙한 말인 듯 그녀는 가볍게 목례만 한 번 해 보였다. 웃음기 없는 얼굴은 도도한 한 떨기 꽃처럼 매혹적이었다. 태국영 이외의 누군가에게 매혹적이라는 표현을 주저 없 이 쓰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말했잖아. 우리 가문 딸내미들은 다 한 미모 한다고.”
태국영이 씩 웃으며 말했다. 태이경을 번쩍 안아 든 태 호연이 호쾌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우리 제수씨 딸 욕심 있나 봅니다. 셋째도 보셔야겠네
요.,,
“…생각 중이에요.”
이승도는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뱉어내 버렸다. 태국영 을 닮은 딸이라,정말 황홀하기는 했다. 어릴 때는 또 얼마 나 귀엽고 예블까 상상하니 현기증마저 났다. 저 멀찍이 접어두려 애썼던 딸에 대한 로망이 다시금 불길처럼 가슴 을 덮쳐 왔다.
“엄마,나도 여동생 낳아 줄 거예요? 신내 완전 신나!”
태이경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기뻐했다. 세상을 다 가 진 듯 활짝 웃는 얼굴은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줏대 없이 흔들리던 마음이 더 긍정 쪽으로 기우는 건 당연했다.
“처음 봬요. 저는 서하경이라고 합니다.,,
심플한 검정색의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다가와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태호연의 아내였다. 이승 도는 그녀의 존재를 뒤늦게 인식할 만큼 태현리에게 넋 놓 고 있었던 것이 굉장히 민망해졌다.
“네. 반갑습니다.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현리 양이랑 자 매라고 해도 믿겠어요.”
“과찬이시네요. 이경이야말로 엄마를 닮아 그렇게 귀엽 고고왔던 거네요.”
닮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남의 입으로 들으니 더 기 분이 좋았다. 이승도는 빙긋 웃으며 태이경을 바라보았다. 태호연의 품에서 둥개둥개 놀던 녀석이 바닥으로 훌쩍 내 려와 이승도의 허리에 매달렸다.
“응. 나 엄마 많이 닮았어요. 우리 엄마랑 똑같애. 그렇 죠,엄마?”
“닮긴 했지만 우리 이경이가 훨씬 더 예쁘지.”
이승도는 다정하게 웃으며 태이경의 작은 머리를 삭삭 매만졌다. 녀석은 복사꽃처럼 사랑스러운 빛으로 뺨을 물 들였다. 어느 모로 보나 저보다는 아이가 훨씬 더 예뼜다. 이승도는 쪼그리고 앉아 태이경을 꼭 안아주며 말했다.
“이경이 씩씩하게 아빠 손잡고 잘 다녀오?. 엄마는 집에 서 형아랑 놀아주고 있을게. 아빠 말 잘 듣고,나 없는 데 서 울면 속상하니까 울면 안 도?. 알지?”
“응. 씩씩하게! 난 울보 아니니까요. 걱정 말아요.”
태이경은 작은 가슴을 쫙 펴 보이며 활기차게 대답했 다. 그리고 여은태에게 인사를 하겠다며 멀찍이 달려갔다. 낯선 이들의 등장에 거리를 두고 있던 여은태는 심드렁하 게 뒷발로 귀를 탁탁 털어대다가 태이경이 날듯이 뛰어오 자 벌떡 일어나 꼬리를 흔들었다.
“형아. 나 다녀올게. 엄마랑 재밌게 놀고 있어.”
【응. 누가 괴롭히면 꼭 이름 적어 놔. 내가 나중에 아 주 혼쭐을 내 줄게.】
“알았어. 고마워,형아.”
태이경은 여은태의 목을 끌어안아 매끄러운 털에 얼굴 을 묻어 비볐다. 풍성한 꼬리가 더 큰 곡선을 그리며 허공 을 갈랐다.
태국영은 인사를 끝내고 돌아온 태이경을 한 팔로 가분 하게 안아 올렸다. 태호연의 가족과 함께 현관으로 이동하 는 그를 이승도가 현관까지 배웅했다. 태국영은 반듯하게 놓인 구두를 신으며 돌아보았다.
“뭐 바깥음식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전화해. 올 때 사올 테니까.”
“말만 하면 유모가 다 해 주는데 뭘.”
태이경에게 로퍼를 신기던 유모가 으쓱으쓱 콧대를 올
“그럼요. 우리 승도군이 주문만 하면 뭐든 하지요. 온 갖 요리책이 내 머릿속에 있답니다.”
“그래도 가끔 불량식품 같은 거 먹고 싶을 때 있잖아. 조미료 가득한 떡볶이라든지 설탕 맛 나는 족발 같은 거.” “아니,몸에 좋지도 않은 걸 왜 굳이 사 와요. 제가 얼마 든지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데.”
“건강이고 나발이고 입에 당기는 거 먹는 게 최고야.” 아무리 그래도,하고 불만스럽게 미간을 좁히는 유모 뒤에서 이승도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一나 족발. 매운 거랑 마늘 맛이랑 반반으로.
태국영은 눈동자가 다 파묻힐 만큼 짙은 눈웃음으로 대 답을 대신했다.
“이게 그래도 제일 괜찮은 것 같은데.”
남강우는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노출이 거의 없는 의상 을 하나 골라 들었다. 팔과 다리를 완벽히 덮는 크림색 원 피스였는데 가슴 윗부분부터 무릎까지는 완전히 불투명 한 천으로 가려지고 나머지는 모두 시스루 무늬가 가리는
디자인이었다. 쇄골과 어깨,팔과 종아리는 무늬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날 분 속살을 훤히 내비치지는 않았다.
송재희는 피부는 고운데 여기저기 생채기가 많았다. 게 다가 워낙 뼈가 드러날 만큼 말라서 섹시하고 화려한 것 은 도리어 초라해 보일 위험이 있었다.
“입고 나와 봐.”
송재희는 얌전히 옷을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파우 더룸으로 들어가 갈아입고 나온 그녀의 모습은 꽤 봐줄 만 했다. 허리만 잘록하게 잡아주고 가슴과 엉덩이는 덜 붙 는 터라 볼품없는 몸매가 크게 부각되진 않았다. 도리어 사내의 보호본능을 조금은 자극하는 것 같았다.
“이게 괜찮군.”
남강우는 고개를 주억이며 손가락을 튕겼다. 미리 불 러 대기시킨 미용사들이 그녀를 화장대에 앉히고 손을 바 삐 놀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화장을 하는 동안 남강우는 창가의 소파에 앉아 술병을 땄다.
막 첫 잔을 기울일 때 태국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꾸 며서 데려오라는 둥,연기 확실하게 하라는 둥,실수해서 판 깨면 이번에야말로 기어코 목을 따 버리겠다는 둥,태 국영은 집착 심한 시어머니처럼 여러 가지 잔소리를 한참 늘어놓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지긋지긋한 새끼.”
남강우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빠르게 두 병을 동 냈을 즈음 미용사 한 명이 다가와 준비 가 끝났다고 알렸다. 남강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송재희 에게 다가갔다.
송재희는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영 어색한지 조금 경 직된 표정으로 일어섰다. 남강우는 무표정한 낯으로 그녀 의 면모를 훑어보았다. 웨이브 넣은 머리를 업스타일로 땋 아 보석 헤어드레스를 고정해 두니 마치 어린 신부처럼 화 사했다. 색조가 진하지 않은 화장도 제법 잘 어울렸다.
“예쁘네. 일어나,바로 출발할 거니까.”
송재희는 미용사들이 챙겨준 수정 메이크업 도구들을 클러치에 채워 넣고 남강우의 뒤를 따라 나갔다. 남강우 는 마치 진짜 연인처럼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보조석에 태 웠다. 운전석에 앉은 그가 안전벨트를 매 주며 무심히 물 었다.
“네가누구라고?”
송재희는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 다.
“남강우의 약혼자요.”
“그래. 네가 끔찍해 하는 놈들 앞에서도 그것만은 잊으
면안 돼.”
“노력해 볼게요.”
송재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강우는 자세를 바로 하고 운전대에 한 손을 올린 채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나는 종종 너를 연회장에 홀로 풀어놓을 거야. 그럼 아 마 쥐새끼들이 틈을 엿보고 달려들지도 모르지. 그럴 때 는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게 말해. 내 약혼녀라고.”
무심결에 상상해 버린 송재희의 창백한 손끝이 힘없이 떨렸다. 끊임없이 자기암시를 하고 있었지만 두려움을 채 떨칠 수가 없는 거였다.
“정 무서워서 못 참겠으면 내게 달려오!■. 모두가 보는 앞 에서 내게 키스하고 내게 교태를 부려. 너를 모욕했거나 네게 함부로 손댄 놈들을 내게 일러바쳐. 내가 어떻게 생 각할지 그런 걸 걱정하지는 마. 네가 어떤 방식으로 안겨 와도 나는 충실한 기사처럼 너를 품어줄 테니까.”
그게 내 역할이고.
남강우는 담담한 목소리로 일러두었다. 꽉 쥔 두 주먹 을 내려다보던 눈이 어느새 옆으로 향해 남강우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눈 속에 진탕처럼 휘도는 감정들 의 정체를 남강우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중에 가장 짙
은,서러움만은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등대들은 기묘하다. 무심결에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진 남강우는 내심 쓰게 웃고 말았다. 이승도가 그러 했듯 이 어린 아가씨도 속을 뒤집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눈을 끄는 미인들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시선을 떼기가 힘이 드는지.
살갗이 닿은 부위에서부터 다시금 서늘한 쾌감이 흘러 들어왔다. 그것은 늘 분출구만 찾아다니는 마그마 같은 몸 뚱이를 기분 좋게 잠재웠다.
“그렇게 보면 못 쓴다.”
남강우는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고는 손을 거두었다. 그가 기어를 옮기고 액셀을 밟았다. 따끈하게 데워진 엔진 이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옅어진 햇살이 비추는 도시가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저 볼품없는 회색 건물들 이 대부분인데,송재희의 눈에 그것은 마치 바람결에 뒤 로 날려가는 꽃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오빠,미안해.
저만 이렇듯 평온하여 그것이 죄책감을 부채질했다. 송 재희는 다시금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오늘만 잘하면,무 사히 잘 넘기기만 하면 머지않아 박해인 역시 그 지옥에 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었다. 태국영이,남강우가 그렇
게 말했다. 그때까지 박해인이 잘 버텨주기만 한다면 반드 시 구해주겠다고.
송재희는 그 두 남자를 신뢰했다. 다시는 누구도 믿지 않으리라 했던 다짐은 과자처럼 부스러졌고,그 잔재들마 저 개미떼들이 저들의 굴로 실어가 버렸다. 이번만큼은 믿 어도 될 것 같았다.
차창에 어렴풋이 비친 남강우의 모습을 길게 응시했다. 그는 대체로 무표정했다. 간혹 비치는 미소도 흐리게 지나 가 버려 작은 잔상도 남기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 안겨 와도 충실한 기사처럼 품어준다던 그의 말이 자꾸만 뇌리를 멤돌았다. 그 한마디는 그의 미 소처럼 찰나만 남기고 사라졌으나,그 잔상은 흉터처럼 남 아 아주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여제운은 진땀을 배고 있었다. 저를 보자마자 한달음 에 달려와 찰싹 달라붙은 작은 아이 때문이었다. 그는 여 느 때처럼 무심한 얼굴을 고수했지만 그 누구와도 이렇게 친근한 스킨십을 나눠본 적이 없는 탓에 속으로는 굉장히 당혹해하고 있었다.
“그런데요 아저씨,잠깐만 귀 좀.”
아이,태이경은 고사리 같은 손을 작게 팔랑거렸다. 여 제운은 눈을 굴려 태국영을 찾았다. 그러나 태국영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나 몰라라 레어로 익힌 스테이크나 집 어 먹고 있었다.
여제운은 도리 없이 쪼그려 앉아 태이경에게 귀를 내밀 어야 했다. 작은 목소리가 속닥속닥 귓속을 파고 들어왔 다.
“은태 형아한테 형아면 저한테도 형아 아니에요? 그런 데 아저씨는 우리 아빠보다 세 살이나 많구,그래서 호칭 을 바꿔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에요. 저 어떡할까요?
귓속말이 필요했던 이유는 여은태의 이름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그래 봐야 귀 밝은 것들이 이쪽에 집중하고 있 다면 이 작은 목소리라도 놓칠 리가 없었다. 딱히 누군가 엿들어도 괜찮은 내용이라 그것이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다만 뜬금없는 생각이 뇌리를 얼핏 스치고 지나갔다.
등대의 배를 빌려 나온 일족의 아이들은 다들 이렇게 자라나는 건가. 이렇게 작고,연약하고,사랑스럽게.
저를 빤히 보는 눈은 알 수 없는 친근함을 또랑또랑하 게 담고 있었다. 아마도 형제처럼 부대끼며 자라고 있는
여은태의 영향일 것이었다. 여제운은 잠시 녀석을 물끄러 미 보다 입을 열었다.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도 돼.”
태이경은 제법 어른처럼 팔짱을 끼고 미간을 좁혔다. 골똘히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또렷하고 큰 눈매와 동그랗 게 모은 입술이 부드럽게 시야를 어지럽혔다.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았던 열병은 점차 사그라지고 있 었지만 완전히 끼질 기미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이 아 이가 제 아이라면,그렇게 생각하는 스스로가 한심해서 여 제운은 작게 한숨을 지었다.
“그럼 그냥 형아라고 할게요. 은태 형아는 형이라고 부 르는데 저는 아저씨라고 하면 되게 이상하잖아요.”
“그래. 그렇게 해.,,
기분 좋은 듯 방긋 웃은 녀석이 주위를 둘러보다 어딘 가로 손가락을 뻗었다.
“저기,저기! 형아네 아빠 저기 계신데요? 나 인사하러 가도 돼요?”
“그래. 가 봐.”
“어…… 그런데 저 아저씨 조금 무서운데. 같이 가 주 시 면 안 될까요?”
태이경은 여제운의 팔을 붙잡아 흔들며 배시시 웃었다.
둥그스름한 눈매가 초승달처럼 어여쁘게 접혔다. 여제운 은 무심결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그런 스스로의 모 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냉큼 손을 잡고 앞장서는 녀 석을 황망히 따라가며 생각했다.
뭐지,이 꼬맹이는.
여제운은 진심으로 이 작은 아이가 무섭다는 생각을 했 다. 피식,유독 크게 울리는 실소가 귓전을 스쳤다. 반사 적으로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고깃덩이를 느긋이 씹는 태국영의 입술이 비딱하게 휘어 있었다. 여제운은 미 간을 접으며 곧장 고개를 바로 했다. 원가 한껏 말린 기분 이 들어 영 찜찜했다.
“안녕하세요,아저씨. 저 기억하세요?”
이미 제게 다가오는 기척을 잡아낸 여군호는 자연스레 태이경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래. 기억하지. 반갑다.”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태이경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 았다. 이미 무심한 아빠에게 면역 내공을 몇 갑자나 쌓아 둔 탓이었다. 녀석은 총총 다가가 여군호의 손끝을 제 작 은 손으로 꼭 말아 쥐었다.
“사모님은 살이 좀 생기셨어요?”
사모님이란 단어가 그 작은 입술에 참으로 어울리지 않
았다. 여군호는 픽 웃었다.
“그래. 요즘은 체중이 조금 늘었지. 생각해 보니 그게 다 네 덕이구나. 고맙다.”
“우아. 정말 다행이에요. 사모님은 되게 예본데 너무 살 이 없어서 덜 예뻐 보였거든요. 우리 엄마도 동생 생기고 뺨이 홀쭉해져서 맘이 아팠는데요,아빠가 매일 쪽쪽 하면 서 예뻐해 주니까 잘 먹고 잘 자면서 다시 살이 올라왔어 요. 그러니까 아저씨도 사모님 많이 예뻐해 주시면 사모님 이 더 예뻐질 거예요.”
“그러마.”
“아 그리고一……아저씨,잠깐 귀 좀.”
태이경은 또 목소리를 낮추며 작은 손을 팔랑거렸다.
제 아들처럼 말리기 싫었던 여군호는 근엄하게 대꾸했다.
“이대로 말해도 괜찮다. 새나갈 소리를 걱정하는 거라 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래도 비밀 애긴데요…… 귓속말로 해야 되는 데……■,,
태이경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며 손가락을 꼼 지락거렸다. 올려다보는 눈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했 다. 잠시 갈등하던 여군호도 결국 눈빛 공격을 매정하게 무찌르지 못해 무릎을 굽혀 앉고 말았다. 태이경은 잔뜩
주변을 경계하며 속닥거렸다.
“이거 진짜 비밀인데요,요즘 형아가 인간으로 변하려 고 되게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오늘도 엄마 품에 꼭 안 겨서 끙끙거렸는데,아빠가 금방 될 것 같다고 했어요. 아 빠는 이유 없이 칭찬 안 하거든요. 그러니까 정말 금방 변 할 것 같아요. 형아가 인간으로 변할 수 있게 되면 손 꼭 붙잡고 아저씨 집에 놀러 갈게요.”
뜻밖의 말에 조금 놀란 여군호가 한쪽 눈을 크게 떴다.
“은태가 변이를 연습 중이라고?”
“네! 엄마가 형아랑 소풍 가고 싶어 해서 아빠가 되게 열심히 가르쳐줬어요. 형아는 똑똑해서 금방 배우고 있고 요. 나중에 보면 꼭 칭찬해 주셔야 해요. 아셨죠?”
“…그래. 알았다.,,
“넵.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태이경은 마지막으로 배꼽 인사를 꾸벅하고는 제 아빠 를 찾아 상쾌하게 뛰어갔다. 아이가 사라진 자리는 작은 태풍이 지나간 것만 같았다. 여군호는 무심결에 앉은 자 세 그대로,태이경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말았다.
태이경은 제 아빠에게 달려가다가 그 옆에서 팔을 벌리 는 태현리에게로 선회했다. 태현리는 그 특유의 표정 없 는 얼굴로 아이를 안아 들었다.
一뭐 먹고 싶은 거 없니?
一누나,나 케이크. 딸기케이크.
一보자. 딸기케이크가 있으려나. 없으면 사다 줄게. 한 번 돌아보자.
태현리는 태이경을 안은 채 홀을 크게 돌았다. 인간들 이 먹는 디저트 종류는 많지 않았지만 다행히 딸기케이크 는 준비되어 있었다. 태현리는 포크로 조각낸 케이크를 아 이의 입에 직접 떠먹여 주었다. 태이경은 순한 아기 새처 럼 자연스레 받아먹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굉장히 이상한 광경이었다. 저 나이 또래의 아이가 누군가 먹여주는 걸 스스럼없이 받아들이 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괴이한 것은 아이분만이 아니었 다. 태현리도 마찬가지였다.
열렬한 수컷들의 시선이 그녀의 뒤꽁무니를 따라 파도 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구애할 타이밍 만 보는 남자들 따위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종주님. 일어나시죠.”
여군호는 들려온 소리에 반사적으로 반응해 고개를 들 었다. 그리고 뒤늦게야 아직까지도 제가 무릎을 굽혀 앉 은 자세로 있었음을 깨달았다. 여군호는 짐짓 아무렇지 않 은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미세하게 일그러진 눈으
로 힐긋 태이경의 뒷모습을 흘겨보았다.
저거 아주 요물일세.
여군호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그때,연회장 입구 에서 남강우가 나타났다. 곁에는 한 줌에 부러질 것 같은 여자를 대동한 채였다. 여군호는 그 어울리지 않는 조합 을 동요 없이 지켜보았다.
태국영은 벽에 한쪽 어깨를 기대고 다리를 교차로 놓 은 채 비딱하게 서 있었다. 매사에 무관심한 듯 의미 없는 시선을 움직이는 듯했지만,사실 그 어느 때보다 장내의 모든 소리를 집중해서 귀에 주워 담고 있는 중이었다. 지 금까지 연회장에 도착한 이들 중에서 송재희를 아는 자는 없었다.
一영애야. 저거 뭐니? 지금 강우 오빠가 여자 데려온 거야? 그것도 인간을? 너 뭐 들은 애기 없어? 오빠랑 친하 잖아.
一아니. 나도 아는 거 하나도 없어. 가끔 인간 여자하고 도 노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애인이랍시고 옆구리에 끼고 있 는 건 처음 보는데?
一너 오빠랑 밀당 중인 거 아니었어?
一…미친. 저런 변태랑 누가! 난 지고지순 고분고분한 남자가 좋거든?
一아우,계집애.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소리는 지르고 그 래?
신영애. 남강우에게 관심이 조금은 있어 보이지만,그 렇다고 목맬 정도는 아닌 듯. 그 외 신영애 무리의 아가씨 들 역시 마찬가지.
태국영은 간단히 정리한 뒤 슥 눈을 굴렸다. 그의 곁눈 이 향한 곳은 내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가만히 시간의 소모를 즐기고 있던 여홍재였다.
먼지처럼 가볍게 떠돌아다니는 소문에 의하면 여군호 가 여제운의 기반을 더 튼튼히 하기 위해 해외로 뺑뺑이 를 돌렸다는데,아무리 뜯어 봐도 그래야 할 만한 가치를 찾기는 힘들었다. 본신을 투시해 봐도 별 볼 일이 없고,행 동거지가 품위 있지도 않고,그렇다고 껍데기가 번지르르 하나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저건 뭘 믿고 저렇게 나한테 호승심을 불태우나 의아할 정도였다.
여홍재는 눈이 마주치는 순간마다 안광을 희번덕였다. 열렬하면서도 차갑고,이끌리는 듯 적대적인 눈이었다. 그 의 얼굴조차 기억에 남겨두지 않았던 저로서는 황당하고
불쾌한 경험이었다.
태국영은 그의 불순한 눈빛이 다시금 충돌해 오기 직전 에 그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어차피 놈을 처리하는 것 은 나중 일이다. 고통 없이 깔끔하게 보내줄 생각은 조금 도 없었다. 그것조차 여군호의 계략에 놀아나는 꼴이었으 나 찝찝하다고 빚을 청산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빚이라 함은 물론 이승도의 납치에 관한 일이었다. 태국영은 여러 정황을 짜 맞춰 봤을 때 그것이 여홍재의 농간질이 아니었을까 강하게 의심만 하고 있었는데,바로 오늘 그 의심에 쐐기를 박을 수 있었다.
여군호의 수족들은 모두 그를 신처럼 떠받드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가솔들을 다스리는 여군호의 카리스마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으나,그보다는 가주를 구심점으로 단단하게 집결하는 여 가 특유의 성향 때문이었다.
태 가의 가주가 가솔들에게 ‘힘세고 든든한 우두머 리’로서 인식된다면,여 가의 가주는 가솔들에게 ‘우리를 안락하게 품어줄 어버이’로서 인식된다. 경외를 기반으로 복종해야 하는 우두머리와 애정을 담아 경배하는 어버이 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헌데 그런 전통을 역행하다 못해 자칫 큰 싸움으로 번 질 만한 사건을 멋대로 일으킬 놈이 누구인가 하면,사실
여홍재밖에 없었다. 다만 여군호에 대한 반감으로 사고를 쳤다기에는 그 동기가 조금 불완전한 감이 없지 않아 확신 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허나 저 꼬라지를 보아하니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홍재는 태 국영 자신에게 극도의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태국영은 부디 이 느낌이 제 자뻑 섞인 착각이길 바랐 다. 이게 착각이 아니라면,저 덜떨어진 놈이 저를 마치 불 구대천의 라이벌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라이벌이라니.
“저 정도면 하늘이 내린 지랄병이지.”
태국영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왠지 저런 거한테 그런 취급을 당했다니 몸에서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애 써 마음을 비우고 신경을 다른 곳으로 쏟았다. 바로 오늘 무대에서 나름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여군호를 향해서였 다-
여군호는 아직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그러나 무알코올 칵테일을 기품 있게 기울이는 그의 시선 은 내내 남강우와 송재희를 주시하고 있었다.
천하의 여군호도 송재희가 남강우의 손에 있을 거라고 는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실종을 제 짓으로 확신 했을 그의 머릿속이 바삐 움직이는 것이 훤히 보였다.
“아빠. 저 누나 인간이에요?”
태국영은 힐긋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홀로 여기저기 잘 도 활개를 치고 다니던 녀석이 허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말간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딱 보면 아는 걸 뭘 물어.”
“나 저 누나랑 인사해도 돼요?”
“그런 거 일일이 묻지 말랬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네. 저 다녀올게요!”
냉큼 대답하고 뒤돌아 달려가는 모습이 들떠 보였다. 오늘은 시비 거는 애도 없고 다들 제 애교를 잘 받아 주니 물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난 모양이었다. 제 새끼지만 오지 에 떨어뜨려 놔도 원주민 살살 녹여 잘 살 녀석이다. 녀석 이 꾸벅 배꼽 인사를 하며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다.
一안녕하세요. 저는 태 가의 장남 태이경입니다.
남강우와 송재희의 시선이 동시에 제게로 날아왔다. 송 재희는 얼떨떨한 표정이었고 남강우의 눈빛은 참으로 기 묘했다. 이전에 분명 사진으로 한 번 보여줬음에도 불구하 고,이게 정말 네 씨를 받은 게 맞느냐는 듯 불경한 눈초리 였다.
태국영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슬쩍 이를 드러냈다. 그 사이 송재희에게 방긋방긋 웃으며 접근한 녀석은 허락도
없이 그녀의 손을 덥석 그러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녀석 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一어……? 어어?!
태이경은 놀랐는지 얼른 손을 떼고 작게 뒷걸음질을 쳤 다. 제 어미 외에 등대는 처음 맞닥뜨렸으니 당황할 법도 했다. 작게 숨을 몰아쉰 녀석이 다시 다가가 그녀의 한 손 을 꼭 감아쥐었다. 송재희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부리 치지 못했다.
태국영은 내리뜬 눈으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쯤 이면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다. 그는 흥미 없는 눈으로 방 관하고 있는 남강우와 눈이 마주치자 고갯짓을 해 보였다.
一여기에 잠깐 있어. 어디 가지 말고.
남강우가 말했다. 송재희는 불안한 듯 손끝을 움직거리 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태국영은 곁으로 다가온 남강우 에게 나직이 일러두었다.
“아마 곧 최가 놈들이 올 거야. 그때까지 재 혼자 둬.”
고개를 끄덕인 남강우는 때마침 앞을 스쳐 지나가는 직 원에게 위스키 세 병을 주문했다. 군소리 없이 고개를 숙 이고 사라진 직원이 술을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대화는 일 절 없었다.
남강우는 한 병을 따 샴페인 잔에 콸콸 따라 부으며 말
문을 열었다.
“아들이 꽤 귀엽네. 네 애인을 닮았나 보지.”
“뭐,애 엄마를 많이 닮은 건 맞아. 우리 승도가 저렇게 해맑고 귀여운 타입은 아니지만. 나도 줘. 같이 마셔 줄 게.,,
태국영이 잔을 들어 내밀었다. 남강우는 피식 웃으며 그의 잔에 술병 주둥이를 기울였다. 캐러멜 색의 액체가 느긋이 잔을 채웠다. 태국영은 술 한 모금을 머금어 와인 처럼 혀 위로 굴린 뒤 목구명으로 넘겼다. 여전히 비리고 자극적인 맛이었다.
“재희랑 많이 친해졌어?”
“친해지긴. 나만 보면 온몸이 딱 굳어서 바보처럼 버벅 거리기 바본데.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손은 안 댔지?”
“방금 내가 한 말 어디로 들었나. 답답해 죽을 지경인 데 건드리긴.”
“상처 많은 애들이 겁 많은 건 당연하지. 각박하게 굴 지 마. 조금씩 다가가면서 예쁘다 예쁘다 해 줘. 그럼 언젠 가는 천천히 경계를 풀고 슬금슬금 다가올 테니.”
남강우는 심드렁한 눈으로 태국영을 곁눈질했다.
“꼭 겪어본 것처럼 말하는군.”
“내가 미혼부 신세를 여직 못 면하고 있는 건 다 이유 가 있는 거거든.”
태국영은 무심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때 그의 호주머니 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확인한 그 가 잔을 테이블에 놓아두며 말했다.
“로비 지났대. 이제 지켜보자고.”
최명욱은 내내 저기압이었다. 송재희의 행방을 쫓는 최 경엽은 아무런 소득도 없고,늘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숙이 던 박해인은 정말 오늘만 살아도 상관없다는 듯이 굴었다. 그나마 한동안은 윤봄이의 신경질적인 패악을 겪지 않아 도 된다는 것만이 작은 위안이었다.
송재희가 사라진 뒤 윤봄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행패 를 부렸다. 약도 늘었고 잠도 못 자고 하루 종일 불안해서 앉아있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모두가 날카로워진 시기에 수시로 기름을 들이부으니 최경엽도 더 이상은 못 참는 지 경이 되었고,결국 여행이라도 좀 다녀오라며 그녀를 반강 제로 해외로 내보낸 상태였다.
“얼굴 좀 펴라.’
앞장서서 로비를 가로질러 가던 최경엽이 어깨를 툭 치 며 말했다. 최명욱은 곧장 그 손을 부리치며 인상을 그었 다.
“내가 지금 얼굴 피게 생겼어? 상황이 다 개 같은데?”
“그렇다고 네 멋대로 성질부리고 깽판이나 칠 자리는 아니다.,,
“그쯤은 나도 알아. 그래도 이유 없이 실실거리기는 싫 으니까 그냥 놔둬.”
종가모임이라는 것은 제멋대로 걷어찰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함부로 굴어도 좋은 자리 역시 아니었다. 비 교적 자유분방한 성격을 띠고 있지만 일족 사이에도 나름 의 규칙이 있었다.
그 최소한의 것조차 지키지 못하는 이들은 무리에서 내 쳐진다. 전쟁보다 두려운 것이 고립이다.
“알면 오늘 조용히 있어라. 여제운이고 김정구고 떠보 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최경엽이 단호하게 일렀다. 최 명욱은 낮게 욕설을 뇌까렸다.
“철저히 해. 뭐가 됐건 그 계집년 잡으면 내가 가만 안 둬.,,
박해인은 윤봄이의 출국 전날까지도 수시로 쥐어 터져
서 몇 나절을 침대에서 끙끙 앓는 것이 일상이었다. 시든 채소처럼 매가리 없이 구는 그전의 모습도 못마땅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말대꾸를 하다가 얼굴이 퉁퉁 붓는 것 도 꼴 보기 싫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송재희만 돌아오면 박해인은 이전처럼 다시 얌전해질 것이었다. 송재희만 찾으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갈 게 분명했다.
그 계집애만 다시 잡아오면.
엘리베이터 디스플레이에 목표 층수가 새겨졌다. 밀폐 된 공간이 느리게 개방되었다. 최경엽과 최명욱은 카펫 깔 린 복도를 걸어 연회장에 들어섰다.
최경엽은 가장 먼저 여군호를 향해 걸어갔다. 그 뒤를 따르던 최명욱은 느리게 주변을 둘러보다 어느 순간 그대 로 멈추었다.
코끝에 진하게 엉겨 오는 낯익은 향기가 있었다. 그 향 기에 이끌려 고개를 돌렸다. 또렷한 시야에 심플한 원피스 를 입은 여자가 들어찼다.
깊이 허리를 숙이고 있는 여자는 어린아이와 정답게 대 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에게 집중한 여자도,종주에게 거의 근접한 최경엽도 아직 제 기세를 눈치채지 못했다.
최명욱의 짙은 먹빛 눈동자가 험악한 안광을 흘렸다.
그는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이를 갈며 선득한 웃음을 지었다.
‘‘하. 저년이여기가어디라고.”
싸늘한 살기가 그의 전신을 뒤덮었다. 그는 송재희가 왜 저런 모습으로 이곳에 있는지 그것을 논리적으로 생각 할 여유가 없었다. 그것은 그의 타고난 성정도 영향을 미 쳤을 테지만,계속 심리적으로 수세에 몰린 탓이 더 컸다.
최명욱은 자꾸만 눈엣가시처럼 걸리는 박해인을 향한 제 감정을 명확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저 간 헐적으로 오장육부를 쓸고 가는 불덩이가 못 견디게 불쾌 했으며,박해인을 변하게 만들어 괴롭게 하는 모든 요소들 을 뜨겁게 증오했다.
최명욱은 빠드득 이를 갈며 앞뒤 재지 않고 몸을 날렸 다. 황토색의 갈기가 그의 뒷덜미부터 등까지 빠르게 뒤덮 었다. 폭발하듯 터진 살기에 장내의 소음이 멎으며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명욱아!”
최경엽이 다급히 소리쳤다. 묵직한 경고와도 같은 그 목소리는 최명욱의 청각을 뒤흔들지 못하고 허무하게 스 러졌다.
최명욱의 손끝에서 칼날 같은 손톱이 길게 뽑혀 나왔
다. 허공을 가르고 쇄도해 들어가는 섬뜩한 날은 송재희 의 어깨를 노렸다. 생명에는 지장을 주지 않는 부위에 고 통스럽게 제 흔적을 남길 생각이었다.
송재희의 눈이 공포에 잠식당했다. 움칠 뒷걸음질 치 던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순간 그녀의 앞을 작은 것이 가로막았다.
“뭐 하시는 거예요!”
어린아이였다. 짧은 팔을 양옆으로 활짝 벌린 아이의 눈은 단호했다. 제 손톱 하나 부러뜨리지 못할 미약한 기 운,최명욱은 그 아이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고작 발길질 한 번에 몸 어딘가가 필히 으스러질 아이다. 제 앞을 가로 막을 자격은 없었다.
최명욱은 입술을 뒤틀어 웃었다. 계집이고 애새끼고 단 번에 어딘가를 절단 내서 피 분수를 뒤집어써도 이 분이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갈고리처럼 끝이 휘어들어간 손톱 이 아이의 옆구리를 단번에 베어낼 기세로 휘둘러졌다.
그 모든 것은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무언가 가 강하게 충돌해 와 최명욱이 나가떨어진 것도 누구도 예 상치 못한 일이었다.
최명욱은 본능적으로 저를 향해 화살처럼 꽂혀오는 살 기를 부수려 했다. 그러나 습격자는 너무도 유연하게 그
공격을 피하며 뒷덜미를 잡아챘다.
쿠응!
최명욱의 한쪽 안면은 고스란히 기둥에 짓눌렸다. 금 간 기둥은 곧 와르르 무너졌다. 꺄악,누군가의 비명 소리 가 먼지 속을 희부옇게 부유했다. 으스러진 콘크리트 잔해 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최명욱은 쿨럭 피를 토해내는 와중에도 격렬하게 팔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공격은 원천 봉쇄되었다. 가볍 게 허공에서 막힌 팔꿈치가 반대방향으로 꺾였다. 뚜둑, 부드러운 관절이 부자연스러운 방향으로 파열되었다. 실 로 무자비한 손속이었다.
최명욱이 목 안으로 기포 끓는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습격자는 동요하지 않고 연이어서 오른쪽 견갑골 위를 거 세게 찍어 내렸다.
‘‘크옥!”
불규칙하게 부러진 뼈 절단면이 내장을 찔러 왔다. 최 명욱은 충혈 올라온 눈을 곧 떨어져 나올 듯 크게 떴다. 기 침과 함께 핏물을 토해내는 그의 귓가로 나른한 음성이 번 졌다.
“이 새끼가 눈에 뵈는 게 없나.”
최명욱은 순간적으로 그것이 누구의 음성인지조차 분
간하지 못했다. 제 몸을 뒤덮은 강렬한 체취도 인식할 수 없는 상태였다. 뒤로 꺾인 어깨가 으스러지며 격통으로 정 신이 혼미해져 있던 탓이었다.
“그만둬,태국영! 이게 무슨 짓이나!”
최경엽의 호통이 태국영의 등을 엄습했다. 태국영은 무 릎으로 최명욱의 등을 찍어 누른 채 느리게 고개를 돌렸 다. 평소 느슨하게 풀려 있던 그 특유의 표정은 온데간데 없었다. 써늘한 살기만 가득한 가면 같은 얼굴이 최경엽 을 빤히 노려보았다.
“야.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이야. 방금 이 새끼가 내 아 들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내가 이 짓거리 못 할 게 뭐가 있 는데.”
태국영은 보란 듯이 무릎에 닿은 최명욱의 척추를 으스 러뜨렸다. 최명욱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숨을 껄떡거 렸다. 그의 젖혀 든 목과 이마로 터질 듯 혈관이 부풀어 올 라 꿈틀댔다. 최경엽의 얼굴이 울분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억지 부리지 마. 대항할 힘도 없으면서 무턱대고 가로 막은 네 아들 잘못은 없다고 생각하나? 다칠 걸 알면서 끼 어들었으면 그 책임은 네 아들이 지게 해야지!”
“이 씹새끼가 터진 입이라고 개소리 작작 씨부리네.” 태국영은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입술에 피처럼 붉은 미소가 걸렸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그거 아주 좋은 논리잖아."
뚜벅. 한걸음 내디딘 구둣불이 최경엽의 코앞으로 다가온 건 눈 한번 깜빡할 사이였다. 시퍼런 안광이 기척없이 훅 가까워지자 최경엽은 본능적으로 뒤로 몸을 물렸다. 그러나 태국영의 손은 어렵지 않게 그의 멱살을 끌어 잡았다.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최경엽은 내심 긴장한 기색을 숨기며 태국영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있는 힘껏 악력을 실었으나 태국영은 꿈쩍하지 않았다. 짙은 속눈썹 아래 그늘 잠긴 눈동자는 온도 높은 날짐승의 광기가 퍼렇게게 일렁거렸다.
"대항할 힘도 없으면서 무턱대고 끼어든 건 너니까. 어디 한 번 네 잘난 논리로 네가 책임지고 감당해봐."
최경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악독한 의도를 간파하고 황급히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니 그 전에 알았더라도 아마 피하지 못했을 ㅓㅅ이다.
태국영의 빈손이 반대쪽 허공으로 느리게 치켜 올라갔다. 퇴경엽은 뒷걸음치며 저항했다. 그러나 멱살 쥔 손은 바위처럼 단단해 어느 방향으로 몸으 트어도 그의 리치 안에 있었다..
태국영의 손등이 최경엽의 뺨을 후려쳤다. 둔탁한 것 이 부서지는 소리가 무시무시하게 정적을 갈랐다. 장내로 는 숨 삼키는 소리 한 줌 흐르지 않았다. 흥미로운 이벤트 를 관망하는 듯했던 일족들 사이로 경직된 침묵이 굳어졌 다.
“이,씹! 미친……!,,
일격에 광대뼈가 함몰된 최경엽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 으로 신음을 삼키며 거칠게 발길질을 했다. 맵시 있게 슈 트를 걸친 태국영의 옆구리에 정확히 충격이 들어갔다. 허 나 태국영은 마치 어린애의 반항을 목도하는 것처럼 가소 롭다는 눈웃음만 지었다.
“억울하면 너도 니네 아빠 부르든지.”
그리고 가차 없이 뺨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손등과 뺨 으로 번갈아 얼굴을 후려치자 최경엽의 얼굴은 금세 무너 지기 시작했다. 안면 뼈가 으스러지고 살갗이 터지며 온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고통보다 굴욕감을 더 극심하게 하는 일방적 폭력이었 다. 최경엽은 발악하듯 사지를 휘둘렀다. 규칙 없이 허공 을 가르는 주먹과 발은 간혹 태국영의 몸에 물리적인 타격 을 주기도 했지만,의미 없는 바르작거림에 그쳤을 분이었
자비 없는 폭력은 십 수초 계속되었고,어느 순간 최경 엽의 저항이 수그러들었다. 완전히 얼굴이 망가진 그는 축 늘어져 쿨럭쿨럭 피만 뱉어냈다.
이걸 그냥 이 자리에서 명줄을 끊어놓을까,그렇게 고 민하며 태국영은 다시금 손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막 내리꽂히기 전에 누군가 곁에 다가와 손목을 잡아챘다.
“그만하지. 그 정도 했으면 충분하지 않나.”
침착한 낯의 여제운이 제 외곽 시야를 파고들어와 있었 다. 그 기척을 이미 읽고 있던 태국영은 태연하게 고개를 돌려 혈겁게 웃어 보였다. 도자기처럼 매끄럽고 하안 얼굴 에 튀어있던 핏방울이 또르르 굴러 내리며 그 미소를 발갛 게 물들였다.
“네가 애 아빠야?”
“무슨 그런 끔찍한 농담을.”
여제운은 회유하듯 그의 팔을 끌어내렸다. 태국영은 그 것을 부리치는 동시에 최경엽 역시 바닥에 패대기쳤다. 최 경엽은 거친 날숨을 거푸 뱉어내며 한 손으로 피떡이 된 얼굴을 감쌌다. 부득,부득,부서지고 어긋난 뼈가 느리 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태국영은 재킷을 벗더니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끼냈
다. 피 묻은 손을 닦아낸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최명욱은 막 재생을 끝내고 바득바득 이를 갈며 주저앉아 있었다. 증오와 모멸감이 섞여 보기 좋은 눈이다.
“왜. 억울해?”
태국영은 눈썹을 살짝 들며 그를 오만하게 내려 다보았 다. 최명욱은 하얗게 도드라지도록 이를 악문 채 대답하 지 않았다. 수치심을 비롯한 지저분한 감정들이 그의 얼굴 에 배곡히 뒤엉켰다. 그는 벌떡 일어나 어딘가로 성큼성 큼 걸어갔다.
“이 쌍년,이리 안 와?!”
그의 울분은 만만한 송재희에게 돌아갔다. 태국영은 한 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건방진 놈은 좋아하지만 비열한 놈은 정말이지 질색이다.
결국 저 악랄함은 저보다 약한 상대 한정이로군.
그러나 애석하게도 저쪽 역시 안심할 처지는 못 되었 다. 그곳에는 남강우가 덫을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제 가 더는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
태국영은 가까운 의자에 더러워진 재킷과 손수건을 버 리듯 내려두었다. 조용했던 연회장에 웅성웅성 다시금 소 음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남강우가 송재희의 앞을 막아 섰기 때문이었다.
태국영은 피 묻은 소매 단추를 점잖게 풀어내며 말했
다.
“태이경. 이리 딱와.”
태호연의 곁에 꼭 붙어서 불안한 듯 눈치를 살피고 있 던 태이경이 슬금슬금 걸어와 앞에 섰다. 공손하게 손을 모은 녀석은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태국영은 풀어낸 소 매를 착착 걷어붙이며 엄한 눈을 했다.
“너 아빠가 다른 일에 정신 팔려 있었으면 어쪄려고 그 랬어.”
“끼어들 곳 못 끼어들 곳 구분도 못 해? 누굴 지키기는 커녕 저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꼬맹이 주제에 아빠 믿고 까부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태국영은 풀죽은 녀석의 귀를 바짝 비틀어 올렸다. 아 야얏,태이경은 허우적거리다 태국영의 손목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눈물을 찔끔 쏟았다.
“하,하지만! 저보다 저 누나가 더 약하잖아요!”
이잉,태이경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젖은 눈을 똑바 로 들어 대꾸했다. 허,태국영은 기막힌 실소를 터뜨렸다. 어이가 없고 괘씸해서 더 아프게 비틀었다.
“너보다 약한 상대 대신에 샌드백이 되어도 좋다고? 이
게 무슨 웃기지도 않는 소리야.”
“으앗! 아,아파요!”
“이 정도에 아프다고 어리광이야? 저 새끼한테 맞았으 면 더 아팠을 텐데,그거 각오하고 끼어든 거 아니었어?”
“하지만 아빠가 날 꼭 지켜줄 거라고 믿었으니까! 아 앗,아얏! 저 누나는 다치면 오래 아픈데 나는 금방 나을 거구!”
그제야 태국영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설득당한 것이 아니라 제가 아무리 혼을 내도 고집을 안 꺾을 것이 뻔하 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태이경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새발개진 귀를 두 손으 로 열심히 문질렀다. 너무 아파서 귀가 떨어져 나간 줄 알 았는데 다행히 그 자리에 그 모양 그대로 있었다.
“너 각오해. 오늘 일 엄마한테 다 이를 거야.”
태국영은 녀석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아주 잘 꿰고 있었기에 제일 효과적인 강수를 꺼내 들었다. 역 시나 녀석은 울먹울먹하던 눈을 화들짝 들어 태국영을 올 려다보았다.
“압,아빠……?,,
“어떤 미친 새끼가 죽일 기세로 달려드는데 아빠 믿고 까불다가 죽을 뻔했다고 다 이를 거라고.”
“저,저기요,아빠……?,,
“네 엄마 화나면 엄청 무서운 거 알지? 화난 엄마 마음 풀어주려고 내가 몇 년 동안 죽도록 고생한지도 잘 알 테 고.,,
물론 태이경은 제 아빠가 아주 큰 잘못을 해 지지리 고 생했던 역사를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저는 그 냉담한 시 선을 견딜 자신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태이경은 벌떡 일어 나 태국영의 허리를 꼭 부여안았다.
“아빠,제가 잘못했어요. 엄마한테는 제발 비밀로 해 주 세요.”
“웃겨. 방금 전까지 저 잘했다고 바락바락 말대답하던 게. 어디 네 엄마 앞에 가서도 그렇게 우겨 봐.”
“제발요,네?”
태국영은 바늘 끝도 안 들어갈 것처럼 냉랭한 얼굴이었 다. 태이경은 풀쩍 뛰어 그의 목에 매달렸다. 원래 아빠한 테는 어색해서 잘 안 보여주던 애교였으나 위기에 몰리자 절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녀석은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단단하게 동여매고 목에 뺨을 비벼댔다.
“아빠,응? 다신 안 그럴게요. 나 엄마한테 혼나기 싫어
요.,,
“기각.,,
“아빠아……
새끼코알라처럼 착 붙어서 보보세례를 퍼붓고 아양을
떨어댔으나 씨알도 안 먹혔다. 그 광경을 곁에서 지켜보 던 태호연은 못마땅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태이경의 애교 로 못 녹이는 놈은 망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망종이 제 사촌 동생이자 태이경의 친부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 다.
“야. 애가 그렇게 예븐 짓을 하는데 좀 봐 줘. 제수씨한 테 혼나면 이경이 정말 울지도 모르잖아.”
“눈물 쏙 빠지게 혼나기도 해 봐야지. 너무 예쁘다 예쁘 다만 하다가 버릇 나빠져.”
태이경은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굴렸다. 결국 결정적 인 한 방이 아니면 태국영은 분명 제가 내뱉은 말은 기어 코 지키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엄마한테 오늘부터 따로 자자고 할게요. 보름 때만 배 구.,,
가슴은 쓰렸지만 비장의 카드를 끼내 들 수밖에 없었 다. 태국영이 태이경을 잘 아는 것처럼,태이경 역시 태국 영을 잘 알았다. 내내 시큰둥하게 무시하던 태국영의 눈 이 힐긋 돌아왔다.
“어차피 이제는 낮에도 엄마가 내내 집에 있으니깐,밤
에는 편히 자라고 하면 되잖아요. 나랑 형아랑 자다가 엄 마 배 발로 찰까봐 무섭다고 하면 엄마도 들어줄 거예요.”
태국영은 잠시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겼다. 그러나 뭘 로 보나 제가 아쉬울 게 없는 협상이었다. 그렇다면 받는 것이 맞았다.
“거래 성립.”
태이경은 통한의 한숨을 흘리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 다.
“약속해요.”
태국영은 망설임 없이 그 작은 손가락에 제 것을 얽었 다. 씩 웃는 그의 얼굴이 알미웠으나 지금은 도리가 없었 다. 당장 오늘부터 포근했던 엄마 품에 안겨 자는 것을 포 기해야 할 처지에 놓이니 그저 심란했다. 태이경이 연거 푸 나이에 안 맞게 무거운 한숨을 지었을 때였다.
휘익.
태이경은 갑자기 몸이 둥실 떠오르는 느낌에 어리둥절 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정수리 위로 강한 힘이 억눌 러오며 움직임을 봉쇄했다. 단단한 어깨에 얼굴이 아플 정 도로 짓눌렸다. 뭐예요,하고 묻기도 전에 무언가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태이경은 어깨를 웅크린 채 숨죽였다. 보지는 못했지
만 상황파악은 쉬웠다. 또 싸움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무언가가 날아오자 아빠가 저를 안고 보호한 것이었다.
“이 씨발 새끼! 남의 걸 가로채 가 놓고 뻔뻔하긴!”
“가로채? 누가,내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도통 모르 겠네.”
“모르는 척하지 마! 저년은 내가 발견하고 내가 데려왔 에 훔쳐가 놓고 발뺌하면 단 줄 알아?”
“증거도 없는 주제에 생각 좀 하고 말하지 그래. 난 뭘 훔친 적이一”
뻐억!
엄청난 타격음이 울렸다.
“없다고,이 새끼야.”
그리고 그 뒤로는 난장판이었다. 악에 받쳐 달려드는 최명욱과 싸늘한 남강우가 몇 번이고 뒤엉켰다. 금세 재생 을 마친 최경엽까지 그 판에 끼어들어 치고받고 난리가 났 다. 긴장감에서 벗어난 구경꾼들이 투덜거리거나 장난스 럽게 응원하기 시작했다.
태국영의 바로 옆 테이블 위엔 남강우가 주문했던 위스 키가 놓여 있었다. 태이경을 한 팔로 안아 든 태국영은 빈 손으로 잔에 술을 채우고 느긋이 홀짝이며 눈앞에 벌어지 는 아름다운 광경을 음미했다. 그러나 그 흥미로운 관람
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만들 두지 못해!”
여군호가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 소리는 호랑이의 포효처럼 짙은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세 남자의 싸움이 정지 버튼을 누른 스크린처럼 딱 멈추었 다.
“아주 이놈이고 저놈이고 건수만 생기면 치고받기 바쁘 군.,,
그 이놈 저놈 중 한 놈이 된 태국영은 불쾌하게 눈썹을 꺾어 올렸다. 그러나 저와 최가 놈들의 마찰을 여군호가 어느 정도 묵인했음을 알고 있었던 터라 일단 그냥 넘어가 기로 했다.
“종주님! 저 여자는 분명 저희 겁니다! 남강우 이 새끼 가 제멋대로 저년을 배 간 거란 말입니다!”
최명욱이 송재희를 거칠게 손가락질하며 고함을 쳤다. 여군호와 그 외 상관없는 이들까지 송재희에게 시선을 집 중했다.
쏟아지는 시선들 속에서 송재희는 창백한 낯으로 오들 오들 떨고 있었다. 서 있는 게 용할 정도였다. 배꼼 고개 를 들었던 태이경 역시 태국영의 시선을 따라가다 그녀를 발견했다.
“아빠…… 저 누나 혼자 너무 힘들어 보이는데……
태이경은 동물원 원숭이처럼 구경거리로 전락해 홀로 서 있는 그녀가 너무 안타까웠다. 방금 전 쓸데없이 끼어 들어서 혼쭐이 났음에도 도무지 외면하기가 힘들었다. 그 리고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 하는 태국영이 조금은 신기하 기도 했다.
엄마랑 같은 등대였다. 저는 그녀가 곤란해지니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을 만큼 안타까운데,왜 아빠는 저리 무감 응한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뭐.”
“…가서 말 좀 걸어주면 안 될까요? 혼자 저러고 있으 면 너무 외롭고 무섭잖아요. 나중에 엄마 데려왔을 때도 아저씨들이 저러면一”
이게 미쳤나,내가 승도를 왜 저렇게 놔둬,다소 날카롭 게 대꾸하려던 때였다. 태국영은 호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끼냈다. 액정을 확인한 그의 눈이 의외롭다는 듯 조금 크게 열렸다.
“어? 엄마다!”
태이경은 발리 받으라고 닦달했다. 방금 전까지 신경 쓰던 송재희는 까맣게 잊은 눈치였다. 역시 속이 아무리 깊다 해도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태국영은 전화를 받았다.
‘‘응. 왜?”
그러나 수화부는 잠잠했다. 그쯤 최명욱과 최경엽이 합
세해서 종주에게 항의하는 목소리는 거세게 타오르고 있 었다. 여기저기서 뭉치는 웅성거림도 그 정도가 높아져만 갔다.
《구,국영아……■》
꺼질 듯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태국영은 한쪽 귀를 막 고 휴대폰에 집중했다. 마치 우는 것처럼 흔들리는 목소리 였다.
“왜 그래. 승도야,무슨 일이야?”
이승도는 침묵했다. 불안감이 불꽃처럼 가슴을 쓸고 지 나갔다. 머릿속으로는 수만 가지 안 좋은 생각들이 교차했 다. 변고가 생긴 건가. 그러나 이승도가 집 밖으로 나갔다 는 보고는 듣지 못했다.
“승도야. 우는 거 아니지?”
《으,응……■》
“그래. 무슨 일이야? 집에 있는 거 맞아?”
《집,집인데…… 그게……■》
헐떡이는 숨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어왔다. 주변의 소 음은 더 심하게 들끓었다. 청각이 예민한 그였지만 이렇 게 시끄러워서야 개미 발자국 소리보다 더 작은 소리를 잡
아내는 게 영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아,씨발! 다들 좀 닥쳐!”
태국영은 벼락같이 일갈했다. 유리창이 파르르 떨리다 멈추었다. 무심결에 입을 다문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쏟아 져 들어왔다. 태국영은 조용해진 틈을 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천천히 말해 봐. 왜 그러는데. 무슨 일 생겼어?”
《그게…… 은태가…은태가…….》
“그래,꼬맹이가 왜. 어디 아파? 잘못됐어?”
이승도는 침착하려고 애쓰는 듯 한참 불규칙한 숨을 내 뱉었다. 태국영은 초조함에 마른 입술을 연신 축이며 한 자리만 뱅글뱅글 돌았다. 이승도가 어느 순간 기습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은태가……! 변했어!〉〉
태국영은 묘하게 미간을 좁히며 발을 멈추었다. 단번 에 이해할 수 없는 막연한 말이었다. 휴대폰에 악착같이 귀를 붙이고 있던 태이경 역시 덩달아 고개를 갸우뚱했다.
《은태가 변했다고! 인간이 됐단 말이야! 국영아,나,
나,어떻게 해야 돼? 뭐 해야 돼?〉〉
다급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딱히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음을 안도하면서도,태국영은 사납게 웃으며 이를 갈
“이 자식이,너 지금 고작 그런 걸로 날 이렇게 놀래켰 어?”
너 진짜 죽고 싶나.
정말로 쏘아붙이고 싶었던 말은 목 안에서 애써 잠재웠 다.
《하지만,국영아,나 어떻게 해야 될지 진짜 모르겠단 말이야. 걸음마부터 시켜야 돼? 아니면 이대로 안아줘야 돼?》
‘그냥 알아서 해!’ 그렇게 소리치려던 입술이 잠시 멈 칫 굳었다. 조금 전에 막 변이를 끝냈다면 여은태는 지금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알몸일 터였다. 태국영은 단호하 게 말했다.
“옷부터 입혀.”
그게 가장 시급했다.
이승도는 허둥지둥했다. 혼이 쏙 빠진 채로 다급히 유 모를 불렀으나 그녀 역시 거의 공황상태였다. ‘선생님. 나 좀 안아줘.’하고 애교를 부려서 오냐오나 하며 품에 들였
을 분이었는데,한참 몸을 부르르 떨며 끙끙거리던 녀석 은 갑작스레 불덩이처럼 몸이 들끓기 시작했다.
더럭 겁이 났다. 원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왜 그래, 은태야,왜 그래,계속 바보처럼 그 말만 되풀이하며 녀석 의 몸을 되는대로 주물럭거렸다. 접촉부에서는 아주 이상 한 반응이 감지되었다. 특히나 관절 쪽이 심했는데,이승 도는 마치 두더지 잡기 하듯이 괴이쩍은 뒤틀림을 찾아내 바로잡아 주느라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녀석이 폭발했다.
아니,마치 폭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겁했다. 작은 공간에 억지로 화기를 채워 넣은 것이 기어이 터지는 것 만 같았다.
너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순간이나마 화상을 입을 것 같은 위기를 느꼈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렸을 때 제 몸은 너무나 멀정했다. 화상은커녕 어디 한군데 그을린 곳조 차 없었다. 다만 체온이 급격히 올랐고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 리고 있었다.
「으,은태야……?」
목을 비집고 나온 목소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 같았다. 이승도는 방금 전까지 제 품에 안겨 있던 은 빛 짐승이 사라지고 대신 안겨 있는 남자아이를 넋 나간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애는 누구지?
이승도는 명하니 의문을 떠올렸다. 여은태의 털 색깔 과 꼭 같은,연한 은빛의 머리카락이 제 가슴 위에 흐드러 져 있었다. 고열에 시달리듯 색색 내뱉는 숨은 뜨거웠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그 중간의 어중간한 곳에 머물러 있 는 듯 엣된 소년이었다.
이승도는 순수하게 충격에 사로잡혔다. 태현리를 보았 을 때와 맞먹는 정도의 충격이었다. 무슨 남자애가 이렇 게 어여븐가 싶었다. 국영이도 어릴 때 변했으면 이렇게 예뻤을까,그런 아쉬움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짓기도 했 다-
녀석의 피부는 백옥처럼 희고 매끈했다. 작은 모공조 차 없이 촉촉하게 빛나는 뺨이 백열등 아래 눈부셨다. 눈 을 감고 있음에도 공들여 깎은 듯한 이목구비는 넋 놓고 보는 것이 당연할 정도였다.
이것이 누구인가,그런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머리 카락을 비롯해 눈썹과 속눈썹까지 온통 반짝이는 은빛을 가진 이 아이가 방금 전까지 커다란 몸을 제게 맡기고 있 었던 여은태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승도는 흔들어 깨우려 했으나 여은태는 정신을 차리
지 못하고 온도 높은 숨만 연거푸 내뱉었다. 눈을 뜨지 못 하고 헐떡이는 아이를 보다 못해 태국영에게 전화를 걸었 던 거였다. 그러나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옷이나 입히 고 몸을 살펴주라고만 했다.
이승도는 유모가 가져온 반바지와 반팔 티를 녀석에게 입혔다. 순리를 거스르고 처음 변이를 겪은 녀석의 몸은 불덩이 같았다.
조심조심 추슬러 안아 아이 달래듯 한참을 도닥거렸다. 불덩이 같던 열은 차춤 내려앉았다. 다급했던 날숨도 느리 게 잦아들었다.
“은태야. 괜찮아?”
이승도는 여은태의 뺨을 떨리는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 리고 그때,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태국 영처럼 숱 많고 촘촘한 속눈썹 아래 투명한 은색 홍채가 드러났다. 그 빛깔은 은빛보다 백색에 가까워 마치 더럽혀 진 적 없는 만년설 같았다.
“선생님……?,,
여은태가 끼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승도는 녀 석의 상체를 더 꼭 끌어안으며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선생님 여기 있어! 정신이 들어?”
‘‘……응. …근데 뭐야? 나 기절했어?”
여은태는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되는 듯 명한 반응이었 다. 늘 크르르 목을 울리던 제 소리가 오롯이 인간의 언어 를 쓴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승도는 유모 에게 거울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유모는 놀라우리만 치 후다닥 달려가더니 전신거울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왔 다.
“은태야. 저기 볼래?”
습관처럼 이승도의 품을 파고들어 눈만 깜박이던 녀석 이 응?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숨을 멈추 었다.
아주 긴 침묵이 흘렀다. 여은태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 이 명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승도는 전신거울에 비치는 여은태를 상기된 표정으로 응시하고만 있었다. 두근두근 터질 듯 고동을 울리던 것이 마침내 위험수위까지 차올랐 을 때,품에 안겨 있던 녀석이 느리게 움직였다.
여은태는 유모가 들고 온 전신거울로 다가갔다. 짐승처 럼 네 발로 걷듯 기는 모양새였다. 신중하게 거울로 접근 한 녀석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를 움직여 제 전신을 빠 짐없이 훑어보았다. 바닥을 짚은 오른손이 천천히 올라와 거울 표면을 툭 두드렸다.
“선생님…… 이거 나야?”
“응. 은태야,그거 너야.”
이승도는 기쁘게 대꾸했다. 그리고 녀석처럼 네 발로 기어가 곁에 몸을 붙였다.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마저 날 것 같았다. 가끔씩 멀찍이에서 홀로 외로워하던 그 눈빛 을 이제는 더 보지 않아도 되었다. 난 괜찮으니까 이경이 데리고 놀러 나가라고,의젓한 척 꾸며내던 목소리도 더 듣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 은태 너무너무 예쁘네. 선생님이 상상했던 것보 다 훨씬 더.”
이승도는 얼떨떨해하는 여은태를 끌어와 으스러져라 끌어안았다. 여은태는 이승도의 품에 안겨서도 명하니 거 울만 응시했다.
“내가해냈어?”
“응! 우리 은태가 해냈어!”
“나 이제 선생님이랑 이경이 손잡고 소풍 갈 수 있어?”
“응. 응. 얼마든지 가자. 같이 소풍도 가고,쇼핑도 가 고,놀이공원도 가고,바다 보러 여행도 가고.”
한참 정신을 놓고 있던 여은태가 불현듯 크게 환호했 다. 둘은 서로를 얼싸안고 한 덩어리가 된 채로 바닥을 굴 러다녔다. 이승도는 꽃이 만개하듯 활짝 웃는 여은태의 얼 굴에 여러 번 입을 맞췄다. 여은태 역시 잔뜩 흥이 돋아 이
승도의 뺨을 열심히 할아 올렸다.
“저기,두분기븐 것은 알겠지만……■,,
유모가 점잖게 끼어들기 전까지 둘만의 세계에 흠뻑 빠 져 있었다.
“지금 이 광경을 우리 가주님께서 보시면 매우 화를 내 실 듯합니다. 그러니 자제하시는 게 어떨지요.”
이승도는 뒤늦게 저희 둘이 매우 부적절한 상태로 뒤엉 켜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지금은 그저 오랜 염원을 이룬 듯 기뻐하는 여은태와 함 께 마음껏 이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다만 한 가지 일러두 기는 했다.
“은태야. 이제 우리 은태 인간 됐으니까 막 할고 이러 면안 돼.”
‘‘응? 왜?”
“그럼 우리 국영이가 질투해. 이렇게 얼굴을 막 할는 건 결혼하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사이에서 해야 되는 거 야. 보통은 이렇게一”
이승도는 녀석의 뺨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이 정도로 친애의 감정을 표현하는 거야.”
“아아. 이렇게?”
여은태는 입술을 모아 이승도의 뺨에 꾹 눌렀다. 이승
도는 간지럽다는 듯 I[웃음토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 은태는 황홀할 정도로 예븐 얼굴 위에 그린 듯한 미소를 띠었다. 반쯤 파묻힌 눈동자는 여전히 투명한 빛깔이었다. “우리 은태 일단 일어나 볼까? 걸음마 잘하나?”
이승도는 여은태의 몸을 조심스레 일으켰다. 여은태는 이승도에게 체중을 반쯤 실은 채 똑바로 서 보았다. 부자 연스러움은 약간 있었으나 여은태는 금방 걷는 것에 익숙 해졌다.
“선생님! 나 두 발로 걷고 있어!”
“와아,굉장하네!,,
이승도는 마치 유치원생에게 호응해주듯 격하게 반응 해 주었다. ‘굉장하네요,은태 군!’ 그 곁에서 유모도 방청 객처럼 요란하게 박수를 쳤다.
“우리 은태 뛸 수도 있어?”
“응! 할 수 있어!”
처음에는 삐걱삐걱,그 다음에는 털썩털썩,그러다가 껑충껑충 방 안을 활보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이것 봐! 나 잘 뛰지?”
폴짝폴짝 뛰는 움직임은 마치 나비처럼 가벼워 보였다. 인간의 보폭 밸런스를 잘 맞추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거 야 서서히 적응을 하게 될 거고,어차피 이 안에서는 이상
하게 볼 이도 없으니 당장 정정해 줄 필요는 없었다. 잘못 된 것을 바로잡아주는 것에 앞서서 지금의 행복을 한껏 누 리게 해 주고 싶었다.
“은태야,우리 정원에 나가서 놀까?”
“응!”
이승도는 기세 좋게 일어났다가 깜짝 놀랐다. 곧게 서 있는 여은태의 키가 생각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었다. 정면 에 서서 바라보았는데 눈높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가만있어 보자. 내가 지금 175 정도 되니까…….
녀석은 대략 170이 조금 안 되는 것 같았다. 이승도는 빠르게 암산을 끝내고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우리 은태 키 엄청 크구나?”
“그래? 나 커?”
여은태는 천진하게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비현실적으 로 조각 같은 이목구비에 체모가 모조리 농도 열은 은색이 라 마치 천사가 강림하신 듯했다. 이승도는 또다시 불시 에 녀석을 와락 안았다.
“우리 은태 정말 잘 생겼구나. 세상에,내가 괜히 다 부 듯하네. 그렇지요,유모?”
“네. 은태 군 나중에 크면 정말 엄청난 미남이 되겠어
유모도 부듯하게 손뼉 치며 맞장구를 쳤다. 여은태는 이승도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조심스레 물었다.
“이경이도 좋아할까?”
“당연하지. 아마 지금쯤 발리 집에 오고 싶어서 엉덩이 를 썰룩거리고 있을걸?”
이승도는 여은태의 양 볼을 감싸 쥐어 올렸다. 빤히 올 려다보는 눈은 기분 좋게 휘어 있었다. 그저 신기하고 또 신기해,자꾸만 얼굴 여기저기를 조몰락거리는데도 녀석 은 얌전히 몸을 맡기고 있었다.
“장하다,우리 은태. 정말 잘했어. 이따가 이경이 오면 우리 근처에 나들이 가자. 오늘은 같이 밤의 별을 보고,내 일은 낮의 태양을 보고. 우리 은태 가고 싶은 데 다 가 보 자.,,
“응.”
여은태는 이승도의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고마워,선생님. 다 선생님 덕분이야.”
둘은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를 부둥켜안고 기쁨을 누렸
주변의 심각한 상황도 아랑곳 않았다. 태이경은 이 기 븐 소식을 여 가에 알려주고 싶어 했지만 태국영은 그를 허락지 않았다. 지금은 아주 중요한 시점이었다. 최가 형 제의 고객들도 속속 도착해 그쪽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중 이었다.
“준호 아저씨 따라 집에 가서 놀고 있어. 아빠도 여기 상황 정리되는 대로 갈 테니까.”
‘‘응! 나 먼저 갈게요!”
태이경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태준호가 아이를 데 리고 사라지자 태국영은 다시금 유심히 상황을 주시했다.
“남강우는 제 가문의 영역을 허락 없이 침입해 저 계집 을 배 갔습니다. 심지어 그 현장에 있던 이광운은 갈가리 찢긴 채로 발견되었고요. 이건 무슨 이유를 대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이광운이라면 이원표 가문의 아이를 말하는 건가. 작 년에 성년식을 치렀던.”
“네. 그 이광운이 맞습니다. 이가주. 뭐 해,설명하지 않
고.,,
최경엽이 멀찍이 서 있던 이원표를 돌아보며 인상을 썼 다. 이원표는 제삼자처럼 흘러가는 양상을 지켜보고 있던 참이었다. 갑작스레 지목되었음에도 그는 동요 없이 담담
한기색이었다.
“뭐 하나니까?”
최경엽이 답답하다는 듯이 채근했다. 그럼에도 딱히 미 동 없이 서 있던 이원표는 여군호가 손짓해 부르자 그제 야 움직였다.
“이원표. 최경엽이 말이 사실인가.”
여군호는 곁에 와 반듯하게 선 이원표에게 물었다. 이 원표는 차분하게 응대했다.
“제가 확인시켜 드릴 수 있는 사실은 광운이가 참혹하 게 살해당했다는 사실 분입니다. 그것이 남강우의 짓인 지,그때 실종된 여자가 저 여자가 맞는지는 제가 증언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나. 너도 분명 이광운이 살해당했던 현장을 봤으면서!”
최경엽이 어이없고 분한 듯 소리쳤다. 이원표는 묘하 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빤히 쏘아 보내는 눈빛은 무색 무취했다. 감정을 쉬이 읽기가 힘든 눈을 느리게 깜박이 던 그가 나직이 대꾸했다.
“네 말 그대로다. 나는 모든 일이 끝난 뒤의 현장을 보 았을 분이지. 그 이전의 일은 무엇도 목격하지 못했다. 그 런 나에게 왜 네 발언에 힘을 실어달라는 듯이 다그치는
지 나는 좀체 이해가 안 가는데.”
“저기! 사라졌던 계집이 버젓이 서 있는데 뭐가 더 필요 하지?”
“너는 내게 그 실종되었다는 여자의 사진 한 장 보여준 적이 없었다. 너는 지금 본 적도 없는 여자를 나한테 확인 시켜 달라고 하는 건가?”
이원표의 빈틈없는 반문에 최경엽은 대응하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저는 어떠한 외형의 여자가 사라졌는지 말로 만 설명했을 분이었다. 이원표에게 협력을 요청한 부분은 이광운의 살해범을 찾는 데까지였다. 이원표가 혹여 다른 마음을 품고 중간에서 송재희를 배돌릴까 의심했기 때문 이었다. 결국 이원표의 도움을 포기한 최경엽은 다시금 여 군호에게 호소했다.
“종주님. 제 집에 저 계집이 제 것이었다는 증거가 있습 니다. 시간을 주신다면 충분히 입증할 수 있습니다. 남강 우의 곁에 저 계집이 있다는 것 자체가 놈의 짓이라는 증 거가 아닙니까?”
틀린 주장은 아니었다. 여군호는 슥 눈동자를 굴려 남 강우를 바라보았다. 해명을 바라는 시선이었다. 남강우는 얼굴에 점 찍힌 핏물을 엄지로 가볍게 닦아냈다. 그의 대 답은 간단명료했다.
“개소리가 명백합니다.”
“증명할 방법이 있나?”
“제가 그걸 왜 증명해야 합니까.”
남강우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절 천하의 개잡놈으로 모는 쪽에서 증거를 내놔야 하 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만치 서 있던 진짜 천하의 개잡놈의 낯이 슬쩍 일그 러졌다. 고까운 태국영의 시선을 느꼈으나 남강우는 모른 체했다.
“그건 그렇군. 최경엽,남강우가 이광운을 죽였거나,남 강우가 저 여자를 납치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나?”
물론 물증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솜씨가 귀 신처럼 깨끗하더라니,확실히 남강우라면 그 정도로 깔끔 하게 처리할 능력이 있었다. 느닷없이 실종된 김정구는 그 저 미끼였을 것이다. 최경엽은 송재희를 쏘아보았다.
“내 별장에 쳐들어와 널 채간 새끼가 이거 맞지?” 송재희는 파리한 얼굴을 애써 오연하게 치켜들고서 대 답했다.
“아닙니다.”
“거짓말하지 마. 그럼 그날 너를 데려간 건 누구지?”
“김정구라는 남자였어요. 당신이 날 팔아넘긴 남자 중
하나였죠.”
“이 쌍년이 개소리를!”
최명욱은 사납게 이를 갈며 큰 보폭으로 송재희에게 다 가갔다. 그러나 그 걸음이 채 그녀에게 닿기 전,남강우가 먼저 맹렬하게 바닥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멈칫 선 최명욱의 낯빛이 급변하며 반사적으로 한 팔 을 올렸다. 그를 중심으로 짧은 소용돌이가 확 터져나갔 다. 바람을 가르고 날아온 남강우의 주먹이 그의 팔뚝 위 에 꽂혀들며 둔탁한 충돌음이 울렸다.
최명욱은 이를 악물며 무릎을 굽혔지만 그의 구듯발은 매끈한 바닥을 긁으며 뒤로 떠밀려갔다. 남강우는 재차 주 먹을 휘둘렀다.
황급히 고개를 틀어서 피한 최명욱의 뺨에 긴 자상이 남았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반대쪽 얼굴에서도 선혈이 터 졌다. 남강우의 발이 그의 뺨을 사납게 후려친 탓이었다.
“큭 !,,
최명욱은 제대로 된 반격 한 번 못 해보고 저만치 날아 가 처박혔다. 최경엽이 눈에 불을 켜고 남강우에게 달려들 었다. 또다시 난장판이 되려는 찰나,여군호가 점잖게 그 들을 제지했다.
“그만들 해라.”
막 뒤엉키려던 두 남자가 동시에 멈췄다. 최경엽은 남 강우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남강우는 최경엽이 내지른 주먹을 아주 가볍게 한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최경엽은 일그러지려는 안면에 힘을 주어 버텼다. 거 센 악력이 손가락뼈를 으스러뜨릴 듯 조여 왔다. 고통을 감내하는 최경엽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꿈틀거렸다. 흐트 러진 앞머리 사이로 남강우의 눈이 검붉게 번득였다.
“마지막 경고다. 한 번만 더 내 여자한테 쌍욕 짓거리 해 보?. 아무리 종주님이 말려도 기필코 네 심장을 뽑아 네 아가리에 처넣어 테니.”
삭막하게 얼어붙은 목소리는 실내 모든 이들의 귓속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남강우는 마지막으로 최경엽의 손목 을 가볍게 꺾듯이 떨어내 버렸다. 더러운 것에 닿은 마냥 손을 몇 번 털어낸 두I,그는 서 있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송재희에게 다가가 허리를 둘러 안았다.
“내게 기대 있도록 해.,,
바싹 마른 나뭇가지 같은 몸뚱이가 사시나무처럼 떨리 며 기대왔다. 남강우는 그녀의 등을 몇 번 토닥여주고는 여군호를 향해 돌아섰다.
“제 행동에 문제가 있었습니까.”
여군호는 흐리게 웃었다. 남강우가 태국영과 모종의 관
계를 맺고 쇼를 벌이고 있음은 훤히 보였지만 그를 파헤 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없다. 네 여자의 명예를 지키는 건 어디까지나 네 권리 니까.”
“종주님. 다른 건 몰라도 김정구는 아닐 겁니다.”
뜻밖에 이원표가 끼어들었다. 여군호는 한쪽 눈썹을 슬 쩍 올리며 물었다.
‘‘왜지?”
“기습적으로 목숨을 노린다면 모를까,김정구에게는 그 렇게 잔인하게 광운이를 도륙할 능력이 없습니다.”
“기습적으로 급소를 노려서 전투불능으로 만들었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않나.”
“김정구에게는 그 능력마저도 없습니다.”
“이광운 역시 그리 강한 피를 타고나지 못했던 걸로 알 고 있는데. 내 말이 틀렸나. 나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납득할 만한 근거가 나오지 않는다면 남강우에게 무엇도 추궁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안 그런가?”
이원표는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다 짧게 고개를 끄덕였 다.
“네. 종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때 씩씩거리며 돌아온 최명욱이 항의했다. 저 여자
는 본래 저희들 것이었다,그렇게 주장했다. 여군호는 불 쾌하게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자꾸 듣자 하니 귀에 거슬리는군. 이 아가씨가 왜 너희 들것이나.”
최경엽은 당당하게 눈을 치뜨며 대답했다.
“제가 가장 먼저 발견했으니 금제를 걸 권리가 있습니 다. 저 여자는 정식으로 제 아내의 호적에 이름을 올린 상 태니 제 가문의 소속이기도 하고요. 제 허락 없이 배앗아 간다면 그건 갈취고 도둑질입 니다. 안 그렇습니까?”
“뻔뻔하기 그지없군.”
남강우는 픽 비웃으며 중얼거렸다. 도끼눈 두 쌍이 제 게 꽂혀들었다. 눈 하나 깜빡할 이유가 없었다.
“재희는 평범한 인간도 아니고,우리 세계에 아주 밀접 한 관련을 맺고 있는 등대다. 네 멋대로 납치해서 네 멋대 로 구속하고 네 멋대로 써먹어도 좋을 소모품이 아니란 말 이지.”
심상찮은 동요가 연회장 안을 가득 채웠다. 여기저기 서 호기심 어린 눈이 송재희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여군호는 시치미를 딱 떼며 ‘등대라니.’하고 물었다. 정 말 두끼운 낯이었다. 연기력 하나는 끝내줬다.
“여기 송재희와 박해인 두 명의 등대는 저기 최가 형제
에게 납치되어 매춘은 물론 번식까지 강요당했습니다. 이 후안무치한 짓을 용납해 주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송재희는 입술 안쪽을 피가 나도록 짓씹었다. 수치스러 운 과거가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적나라하게 까발려지 자 발밑이 무너지는 듯했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당당해도 돼.’ 수도 없이 쓴 약 들이켜듯 씹어 삼켰던 각오 는 너무나 허무하게 바스러졌다.
알고 있었다. 어차피 숨길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죽 을 때까지 저를 추격할 최가 형제들에게서 벗어나는 방법 은 이 방법이 유일하다는 것을.
송재희는 저를 바라보는 시선들을 혹독하게 견디며 남 강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그때,표독스러운 독설이 창살처럼 날아왔다.
“와 나 이 씨발! 이 개 쓰레기 새끼야!”
송재희는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거 놔! 내가 저 새끼들 낯짝에 손톱자국을 내 버릴 거니까!”
“영애야. 이건 네가 끼어들 문제가 아닌 것 같一”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저 또라이 새끼들이 인간들 상대 로도 모자라서 우리 일족 남자들도 쓰레기로 만들고 있는
육감적인 몸매를 새파란 드레스로 감싼 여자가 주변의 만류를 사납게 부리치고 있었다. 화려하게 치장한 아가씨 들은 그녀의 독기에 결국 말리기를 포기하며 뒤로 물러났 다. 파란 드레스의 여자는 사나운 암사자처럼 다가와 목소 리를 높였다.
“종주님! 재들 그냥 두실 건가요? 저건 지금 당장 추방 당해도 할 말 없는 거 아니에요?”
“네가 뭘 안다고 끼어들어?”
최경엽은 이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신영애는 냉담하게 웃으며 드레스의 긴 치맛자락 옆을 손톱으로 찢어냈다. 마 치 수틀리면 금방이라도 달려들 낌새였다.
“너나 네 동생 새끼가 아주 천하의 개새끼라는 건 알겠 다. 여자 파는 것도 가업이랍시고 대물림하는 것부터 천박 한 족속들이라는 건 알아봤지만,정말 이 정도일 줄은 꿈 에도 몰랐네. 너 설마 인간 여자들도 납치해서 억지로 몸 팔게 하니? 응?”
“알지도 못하면서 헛소리하지 마라. 몸 팔겠다고 알아 서 기어들어오는 년들만 해도 충분히 돌아가. 저 계집은 등대야. 원래 우리들한테 몸을 팔기 위해 태어난 종족이라 고. 권력의 구도만 바뀌었지 예전과 하나 다를 바 없단 말 이다. 명청하게 굴다가 또 목줄 걸린 짐승들처럼 살아가
게 될 바에는 그냥 처음부터 창녀로 길들이는 게 낫다고, 이 멍청한 계집!”
신영애와 최경엽의 짧은 시간 치열한 말싸움 공방을 했 다. 닥닥 이가 갈릴 만큼 혐오스러운 눈으로 신영애가 뭐 라 더 쏘아붙이려는 찰나였다.
투명하게 이글거리는 정체불명의 덩어리가 그녀의 곁 을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퍼억!
누구도 인지하지 못했다. 남강우조차도 피 보라가 허공 으로 부려지기 직전에야 싸늘하게 정제된 살기를 느꼈을 분이었다. 소란스럽게 웅성이던 장내가 순식간에 얼어붙 었다.
꾸역꾸역 솟구치는 피 분수가 느리게 포물선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얼굴의 반쪽이 완전히 터져나간 시 신은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한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온기 조차 식지 않은 몸뚱이가 의지 없이 경련을 반복했다.
사태를 명하니 관망하던 시선들이 하나둘 움직였다. 이 런 짓을 저지를 유일한 용의자는 예상대로 그 자리에 우 뚝 서 있었다.
“주둥이 잘못 놀리면 이렇게 돼요. 말로 해서 못 알아 처먹는 것 같으니 어쩔 수가 없네.”
태국영은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신영애 는 힐긋 돌아보는 그의 얼굴을 넋 놓고 올려다보았다.
도자기처럼 매끈하고 음영이 또렷한 이목구비는 붉게 젖어 있었다. 베스트와 셔츠도 무사하지 못했다. 뺨 위를 느리게 흘러내리는 피를 손끝으로 슥 훔친 그가 물었다.
“영애 양,손수건 있으면 좀 빌려줄래?”
신영애는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 겨우 집 나간 정신을 찾아왔다.
“어,응? 아.,,
이 자식은 정말 잔인한 만큼 근사했다. 하마터면 진심 으로 반할 뻔했다. 신영애는 클러치 안에서 손수건을 끼 내 그에게 내밀며 부러 퉁명스레 말했다.
“가져. 돌려주지 않아도 되니까.”
“고마워. 잘 쓸게.”
태국영이 손수건을 받아 얼굴을 한 번 닦아냈을 때,최 명욱이 짐승처럼 그르렁대듯 피맺힌 목소리를 토해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지? 이유도 없이 즉결로 누군가 를 죽이는 건 그 누구도 용서받을 수 없어!”
“염병. 네 용서 같은 건 줘도 좆같아서 안 받아,새끼야.
태국영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혀를 차며 대꾸했다. 웃
는 낯이었으나 빤히 쏘아 보내는 눈빛은 빙설처럼 차디찼 다. 최명욱의 얼굴은 곧 터질 듯 붉으락푸르락했다. 그의 항의는 여군호를 향했다.
“종주님. 똑똑히 보셨으면서 왜 아무 말씀 안 하십니 까? 태국영의 안하무인은 도가 지나쳤습니다!”
여군호는 태국영을 지긋이 응시했다. 마치 ‘내가 이렇 게까지 숙여줬는데 너 이렇게 나올 거나.’라고 묻는 듯했 다. 태국영은 담담히 그 눈길을 튕겨낼 분이었다. 여군호 의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태가주. 모두를 납득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뒷일은 네 게 아주 불리해질 것이다.”
“왜요. 내 여자의 명예를 지키는 건 내 권리 아닙니까? 분명 방금 전에 그렇게 말씀하신 걸로 아는데?”
“최경엽이 네 여자의 명예를 더럽혔나.”
“내 아이의 엄마이자,현재 내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 고,내년에 정식으로 혼인을 올리게 될 내 약혼자를 저 더 러운 놈이 몸 팔기 위해 태어난 종족이라고 싸잡아 매도하 는데,내가 못 죽일 이유가 있습니까?”
“이 간사한 놈! 끼워 맞추는 것도 정도껏 해!”
최명욱은 이를 갈며 쏘아붙였다. 태국영은 빙긋 웃으 며 그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 기세가 화마로 변질
되기 직전의 불길처럼 흉험했다. 최명욱은 무심결에 뒤로 물러나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내가 뭘 끼워 맞춰. 너희 알고 있었잖아. 내 약혼자도 등대라는 거. 알면서도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뜬 곳에서 개 소리 작작 씨불였으면 감당할 각오도 했어야지.”
태국영은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리며 최명욱의 코앞에 서 걸음을 멈췄다. 가십 좋아하는 아가씨들이 저들끼리 빠 르게 속닥대는 소리들은 모두 희미한 배경으로 미뤄두었 다. 찍어 누르듯 살기 어린 시선이 내리 꽂혀오자 최명욱 은 이를 갈았다.
“우린 네 마누라 따위 관심도 없었어. 고작 상황이나 모 면하려고 근거도 없는 헛소리나 늘어놓다니,아주 치졸한 새끼였군.”
“그러는 넌 언제 근거나 내놓고 남강우한테 여자를 훔 쳐갔느니 어쩌느니 했나 봐?”
최명욱은 말문이 막혔다. 이건 명백한 실언이었다. 분 노에 떠밀려 앞뒤 없이 내지른 말이 제 정당성을 훼손시켰 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너처럼 증거도 없이 판부터 까는 머저리 로 보여?”
태국영은 그의 뺨을 손바닥으로 툭 건드리며 물었다.
모욕적인 손짓에도 최명욱은 입술만 부르르 떨 분이었다. 논리에서 밀린 그 대신 여군호가 대신 되물었다.
“그 증거라는게 뭐지.”
“음. 일단 그거 집에 있긴 한데…… 아,이 자리에서는 우리 여제운이가 아마도 증언을 해줄 수도 있겠네요.” 난데없는 지목에 여제운은 멀뚱히 눈만 깜빡였다. 태국 영은 그를 돌아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안 어울리게 명청한 표정 그만하고 네가 애기 좀 해 보h 최경엽 마누라가 찾아와서 태국영한테 복수하게 해 달 라고 구구절절 네 바짓가랑이 붙들던 거 말이야.”
여제운은 의연하게 한숨을 지었다. 낭패감을 느끼긴 했 으나 당황할 이유는 없었다. 도리어 태국영이 여제운을 지 목하며 초조해진 것은 최명욱이었다. 윤봄이가 여제운을 만난 것은 분명 사실이고,태국영에게 함께 복수하자며 사 탕을 흔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초조함과는 상관없이 여제운은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사실이다. 최경엽과 최명욱은 네 아내가 등대라는 걸 알고 있었고,최경엽의 아내 윤봄이는 너에게 복수하고 싶 다며 나를 찾아 왔었다. 그 자리에서 윤봄이는 제안했지. 네 아내인 이승도 씨를 사로잡을 기회를 어떻게든 만들어 만 준다면 그 다음은 본인이 알아서 하겠다고.”
담담하게 쏟아진 증언의 파장은 컸다. 거의 모든 이들 이 최명욱을 경멸 섞인 놀라움으로 흘겨보았다. 아까까지 그를 옹호하던 그의 고객들마저 발을 배고 멀찍이에서 몸 을사릴 정도였다.
물론 최명욱은 기를 쓰고 부인했다.
“거짓말이야! 너희 둘이 짰지? 너희 둘,거기에 남강우 까지 죄 한통속이었어!”
여제운은 흐리게 인상을 그으며 받아쳤다.
“네 말은 지금,내가 내 명예를 깎아먹으면서까지 거짓 말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무슨 이유로?”
“남강우는 송재희를 낚아채 가고,너는 박해인을 강탈 해 가서 혼자 독점하려는 속셈이겠지! 이 뱀 같은 자식들!
윤봄이가 꼬드기려던 뱀은 제 목을 물 독사였다. 최명 욱은 여 가의 음흉한 피를 고스란히 타고난 여제운을 분 한 듯이 노려보았다. 그의 의심은 어쪄면 여군호 역시 이 일에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에까지 그 범위를 넓 혔다.
“나는 비록 실수로 판단을 잘못 내린 적이 있지만,그래 도 내 값싼 명예 앞에서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았다. 내가 한 말은 한 치의 꾸밈없이 날 것 그대로의 진실이야.”
여제운은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처럼 침착했다. 이로써 이 자리에 있는 일족의 모두가 저와 윤봄이의 비밀회동을 알게 되었으나,그런 것은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제가 순간적으로 판단력이 흐려진 탓에 야기된 일이었다. 무턱대고 진실을 숨기고 싶을 생각도 없을분더 러,그것이 가능할 거라 어리석게 믿을 생각도 없었다.
“자. 언쟁은 이쯤에서 그만두도록 하지.”
여군호가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손사래를 쳤다.
“가장 확실한 것부터 처리하는 게 좋겠군. 최명욱. 네 가업을 무시할 생각은 없으나 누군가를 강제로 억류하여 매춘도 모자라 출산까지 강요하는 것은 지나쳤다. 짐승의 피를 타고났다 해서 야만적인 짓들이 정당화되지는 않아. 네가 무슨 오해를 하더라도 나는 네 행동을 용납할 수가 없다. 저기 아가씨는 남강우의 약혼녀로,네가 그녀를 뺏 고 싶다면 그녀의 마음부터 배앗아야 할 것이다. 치정 싸 움까지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리고 네가 구금 중인 다른 등대에 대한 소유권도 억압에 의한 것이니 현재 로써는 인정할 수 없다.”
최명욱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모두가 저희들을 토끼몰 이하기 위해 작당한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군호는
그의 생각을 훤히 꿰고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다음 달 둘째 주말에 각 가문의 가주들을 모아 나머지 일들은 결말을 짓도록 하지. 그때까지 너는 내가 종주의 권한으로 보내는 감시자를 박해인의 곁에 두도록. 육체적 으로건 정신적으로건 그 어떤 작은 학대도 용서하지 않겠 다. 또한 윤봄이 양 역시 상시 감시자를 곁에 두어야 할 것 이다. 그 이유는 따로 말 안 해도 알겠지.”
“대답해라. 이건 권유가 아닌 명령이다.”
최명욱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는 제가 이미 빠져나 갈 곳 없이 함정을 판 곳에 걸려들었다고 결론을 지은 뒤 였다. 여기에서 더 강경하게 우긴다고 해서 제게 득 될 것 은 없었다. 도리어 독이 될 요소만 산재해 있었다. 그는 덜 덜 떨리는 턱을 채 추스르지 못한 채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다만 형수는 지금 해외에 있으니 돌아오 는 대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군호는 고개만 한 번 끄덕인 뒤 태국영을 향해 돌아 섰다. 그에게도 생각한 바를 근엄하게 내뱉으려던 입술이 불시에 굳어들었다. 거하게 일을 벌여 놓은 놈이 만사태평 하게 남강우와 술잔을 부딪치는 꼴을 보아 버렸기 때문이 었다. 여군호는 험악하게 일그러지려는 안면을 제어하느
라 꼬H 힘겨웠다.
나는 정말 저놈이 싫다.
그는 새삼 속으로 생각하며 애써 목소리를 낮췄다.
“태가주. 그 증거라는 걸 가주 모임에는 꼭 가져오도록. 그래야 오늘 네 행동의 정당성을 증명할 수 있으니.”
태국영은 그 특유의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알밉게 경례 하는 시늉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군호는 드물게 지긋지 긋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일족의 모두에게 알 렸다.
“소란을 정리한 뒤 종가승계를 알리는 만찬이 있을 것 이다.,,
최명욱과 몇몇을 제외한 모두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대 답을 대신했다.
“형아?”
태이경은 눈도 입도 크게 벌린 채 한껏 고개를 꺾고 있 었다. 너무 놀라서 숨이 할딱할딱 넘어갔다. 현관을 들어
서자마자 신발을 벗어 던지고 헐레벌떡 뛰어오느라 가슴 은 연신 콩닥거렸다.
“진짜 형아야?”
여은태는 응,하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이경 은 빛 가루를 둘러쓴 듯한 여은태의 모습을 넋을 놓고 바 라보았다. 머릿속에 큰 종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무슨 생 각이 들라치면 종소리가 연신 울려 그것을 죄 홑어놓았다. 다섯 해 짧은 생애 동안 저토록 예쁘게 생긴 것을 처음 보 았다.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一선생님. 이경이가 이상해!
여은태는 결국 초조함에 떠밀려 이승도를 바라보며 간 곡한 눈을 했다. 늘 활기 넘치던 아이가 정신 놓고 서 있기 만 하니 초조해진 듯했다. 이승도는 마냥 귀엽다는 듯 웃 고 있다가 태이경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이경아. 형아 예쁘지?”
“응!”
명하던 것이 무색하게 대답은 곧장 나왔다. 그리고 그 것을 계기로 녀석은 폴짝 한 번 뛰어오르더니 쏜살같이 튀 어 나갔다. 여은태는 반사적으로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 아 두 팔을 벌렸다. 활짝 열린 품 안으로 작은 아이가 쏙 담겨 왔다.
“진짜 예쁘다,형아! 보석처럼 반짝반짝해!”
그제야 여은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태이경
이 먼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십 번 전신거울 앞 을 왔다 갔다 했다. 싫어하면 어쪄지,머리칼이랑 눈동자 랑 색깔이 이상하다고 무서워하면 어쪄지,그렇게 불안하 던 마음이 씻은 듯 사라졌다.
“형아 변한 거마음에 들어?”
“응,응! 엄청 예뻐! 동화책에 나오는 아기천사가 몇 살 더 먹은 것 같아!”
“다행이다.”
여은태는 순수하게 기뻐하며 태이경을 훌쩍 안아 들었 다. 늘 등에만 태우고 다니다가 이렇게 품에 안아 드니 실 로 감회가 새로웠다. 태이경은 신기한 듯 작은 손으로 머 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작은 얼굴에 홍조가 어려 있는 것 이 지나치게 탐스러워 보였다.
여은태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무심결에 혀를 내밀었다. 보송보송 복숭아 같은 뺨을 길게 한 번 할아 올렸을 때였 다.
“안 돼.,,
그리고 단박에 제지당했다. 여은태는 아차 하며 이승도 를 힐금 돌아보았다. 뜨끔한 표정이었다. 이승도는 부드럽 게 웃으며 다가왔다.
“선생님이 말했지? 할으면 안 돼. 자,이렇게.”
이승도는 여은태와 태이경의 뺨에 번갈아서 입을 맞췄
다.
“응. 미안해. 자꾸 햇갈려.”
여은태는 순순히 인정하고 태이경의 눈가에 쪽 입술을 눌렀다. 입맞춤을 받은 아이는 활짝 웃으며 엉덩이를 들썩 였다.
“형아,우리 내일 유모한테 맛있는 거 많이 싸 달라고 해서 소풍 나가자. 단풍나무 아래에다 돗자리 펴 놓구,사 람 많은 곳에 돌아다니기도 하구,응?”
“그래. 너 가고 싶은 데 다 따라가 줄게.”
“엄마,괜찮죠?”
“물론 괜찮지. 찾아보면 들꽃 핀 산책길도 많을 거야. 꽃도 보고,다음에는 동물원도 가고,또 다음에는 아쿠아 리움에도 가고,다 하자.”
“와아,신난다!,,
여은태는 녀석의 엉덩이를 팔뚝으로 받치고 조심히 둥 개둥개 얼렀다. 온몸을 실룩거리던 태이경은 다시금 신기 한 듯 여은태의 얼굴을 두 손으로 조몰락거렸다. 체온은 생생했고 내뱉는 숨결도 선명했다. 분명 살아 움직이고 있 는데 이렇게 주물럭거려도 좀체 현실감이 느껴지지가 않
“우리 형아 정말 예쁘다아……
여은태는 눈가를 살짝 붉히며 괜히 고개를 비틀었다. 그러나 쑥스러워 허공으로 도망쳤던 시선은 금세 제 자리 로 돌아왔다. 눈이 마주쳤다. 투명에 가까운 은색 홍채 안 의 동공이 한순간 바늘 끝처럼 조여들었다.
내 눈에는 네가 제일 예뻐.
여은태는 조금 부끄러워서 차마 그 말을 내뱉지는 못했 다. 다만 빤히 마주 보며 다시 보들보들한 뺨에 입술을 붙 일 분이었다.
친위대가 종가승계식에 초대장을 보낸 자는 태국영,여 제운,이원표,남강우,여홍재,이렇게 다섯이었다. 그중 에 긍정의 답신을 보낸 자는 넷이었다. 유일하게 초대에 응하지 않은 한 명은 다음 대 남 가의 가주로 확정된 남강 우였다. 그의 평소 행실과 성향을 보았을 때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가 성년식 교관직을 수락한 것이 사흘간의 휴가 때문 이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자유롭고 방 탕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 남자였고,실제로도 그
런 삶을 표방하고 있음을 당당하게 드러내 왔다.
“태국영과 남강우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음은 분명 해 보입니다.”
보조석에 앉은 비서의 의견에 이원표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 일을 하나하나 반추해 보면 그런 의혹 을 품는 것이 지극히 당연했다.
“여자를 남강우가 데려왔을 때부터 거의 확신했지. 태 국영이 설마 뜬 눈으로 배앗겼을 리는 없으니.”
“게다가 둘이 묘하게 친밀해 보이지 않았습니까.”
이원표는 가까운 친구처럼 술잔을 부딪치던 두 남자를 뇌리에 떠올렸다. 언뜻 생각해 보아도 지독하게 안 어울리 는 그림이었다. 실제로 피 터지게 싸운 전적까지 있었다.
그러나 막상 어울리는 것을 보니 또 저렇게 죽이 잘 맞 는 사이가 어디 있겠나 싶었다. 성질머리 더럽기로 둘째가 라면 서러울 남자들이니 취하고자 하는 영역이 겹치지만 않는다면 환상적인 조합이 될 것이었다.
“남강우가 기존의 입장을 뒤엎고 이번 종가승계에 참여 하겠다고 한 것 역시 태국영과 관련이 있을까요?”
“아마도. 내 추측으로는 태국영이 남강우에게 여자를 넘기며 받은 대가가 아닐까 싶다.”
“남강우가 종주가 되어도 태국영이 얻는 게 없지 않습
“둘 사이에 순수한 친분만 있는 상태라면,얻는 것이 있
을 수도 있지.”
“그게 뭡니까?”
“제게 원한이 있거나 반감이 있는 누군가가 종주가 되 는 것보다는 남강우를 밀어주는 것이 백 배 낫지 않겠나.” 애초에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가 뒤늦게 입장을 번복한 남강우는 그냥 얼핏 봐도 등 떠밀려 나온 듯 내켜하지 않 는 기색이었다. 하기 싫은 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뻗댈 남자가 그렇게까지 할 정도면 빤한 일이었다.
“하긴. 태국영이 확실히 적이 많긴 하니까요.”
“일단 눈 뒤집히면 앞뒤 안 가리고 때려 부수고 다녔으 니 다 자업자득이지.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자신이 원한 살 짓을 일삼았다는 자각은 있다는 정도일까.”
태국영에게 악감정은 없었다. 비록 그가 이광운을 죽 인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는 상황임에도 그러했다. 이광 운은 가문에 있어 매우 수치스러운 상황에 놓인 채로 살해 당했고,그 때문에 어디 가서 억울하다고 하소연을 해 봐 야 그에 동의해줄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원표 또한 그 잔인한 손속에 불쾌감을 느꼈을 분이었다. 그 불 쾌감 사이에 분노는 한 자락도 스며 있지 않았었다.
“지금 중요한 건 태국영과 남강우 사이에 오고 갔을지 도 모르는 무언가를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니다.”
비서는 의아한 기색이었고 운전대를 잡은 남자 역시 룸 미러로 의문을 담은 눈빛을 보냈다. 이원표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느리게 턱을 쓸었다.
“종주님을 중심으로 남강우,태국영,여홍재를 잇는 세 연결고리가 어떠할는지 심도 있게 숙고해야 할 때지.”
차 안은 고요했다. 러시아워 전이라 도로는 한산했다. 유리 너머 빛살에 흠뻑 젖은 풍경이 전력으로 역주행하고 있었다. 비서는 어리둥절해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종주님의 행동이 묘하게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 나.,,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등대 여자가 말했었지. 김정구가 광운이를 죽이고 자 신을 납치했었노라고. 내가 아는 종주님이라면 그 자리에 서 김정구의 직계가 도착해 있는지 그것부터 확인을 하셨 어야 했다. 김정구가 납치했다고 주장하는 여자가 어떻게 남강우의 손에 있는지 그것만 알아내면 누가 거짓을 말하 고 있는지 바로 판별이 될 테니까.”
현장이 수습되고 나서야 도착한 김정구의 부친과 누이
는 여군호의 뒤늦은 질문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 다. 송재희가 사라지던 날 김정구 역시 자취를 감춘 상태 로,저희들도 녀석이 어디에서 뭘 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원래부터 소식 하나 없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나다 니길 좋아하는 철부지였던 터라 언젠가 또 아무 일 없었다 는 듯 집으로 돌아올 거라 생각을 했다고.
차분하게 정제된 목소리로 증언하던 김정구의 누이는 긴장한 낯빛이었다. 표정은 딱딱했고 공손하게 맞잡은 손 에도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무심결에 자꾸 만 누군가의 눈치를 살펐다. 취조자의 눈으로 그녀의 모 든 것을 주시했던 이원표는 그녀가 불안한 듯 두어 번 힐 긋거린 것이 태국영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 둘 사이에도 필시 무언가 있다. 정보가 없는 지금으 로써는 그 정도밖에 유추해낼 수가 없었다.
“또한 내가 김정구는 이광운을 그렇게 압도적으로 제압 할 힘이 없다고 종주님을 떠보았을 때에도 고려하는 기색 조차 하지 않으셨다. 증거는 없어도 충분히 합리적인 의혹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그 말씀은…… 종주님께서 남강우나 태국영의 홈을 덮 어주려 하신다,그런 의미입니까?”
“확실하지는 않아. 지금으로써는 어디까지나 내 추측
이원표는 그 대답을 끝으로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대 화의 단절을 원한다는 뜻이었다. 동승해 있는 두 남자는 그런 그의 태도가 익숙한 듯 그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내달린 차가 톨게이트로 발려 들어갔다. 타이 어 긁히는 소리가 기나긴 침묵을 깼을 때,무겁게 닫혀 있 던 이원표의 눈꺼풀이 느리게 열렸다.
「이번 종가모임 날까지 시간을 주지. 그날 자정까지 연 락이 없으면 우리 사이 거래는 없는 걸로.」
어차피 그 손을 잡기로 결정은 해 둔 상태였다. 다만 변 수들을 조금 지켜보고 싶었을 분.
그는 이정표를 힐긋 올려다보고는 짧게 혀를 찼다. 상 념에 잠긴 사이 시간이 순식간에 증발해 있었다.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짧은 명령에 운전사가 룸미러를 올려다보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그건 이제 정해 봐야지. 어쨌든 차는 왔던 방향으로 돌 리도록 해.”
“알겠습니다.”
이원표는 재킷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 리고 연락처에서 한 남자의 이름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
여군호 부자를 태운 차는 적막했다. 지난번 격렬한 언 쟁 뒤 한 달 넘게 지속되어 왔던 상황이었다. 두 남자 사이 에 사적인 대화는 씨가 말랐고 집안에는 노상 냉랭한 기류 가 흘렀다. 그들이 의례적으로 말을 주고받는 순간이 있다 면 여 가의 안주인인 한수연 앞에서분이었다.
거대하고 고풍스러운 대문을 지나 정원을 달린 차는 현 관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선 두 부자를 맞 은 것은,당황스럽게도 얼굴이 흠뻑 젖을 만큼 엉엉 울고 있는 그 집의 안주인이었다. 웬만해서는 동요조차 하지 않 는 여군호가 드물게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왜 우는 거지?”
여군호는 바닥에 주저앉아 자그마한 체구의 그녀를 품 에 안고 달랬다. 그녀는 평소에도 여린 성품 때문에 눈물 을 많이 비추긴 했지만,이토록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운 적은 없었다.
“수연아”
여군호는 계속 그녀의 이름만 부르며 등을 토닥였고,
그 곁에 선 여제운은 아무것도 못 한 채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군호 씨. 은태가……우리 아이가……■,,
한수연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끅끅거리던 울 먹임은 채 내리누르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는 헐떡이는 호 흡을 잠재우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 했다. 결국 제 손 안에 꽉 쥐고 있어 뜨거워진 휴대폰을 여 군호에게 넘겨주었다.
의아해하면서도 여군호는 그녀의 휴대폰을 받아들었 다. 무엇을 조작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잠금이 풀린 액 정에 곧장 떠 있는 사진이 이 모든 상황을 명쾌하게 설명 하고 있었다.
“우리 은태가……
한수연은 다시금 쉰 목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여군호 는 느리게 손가락을 움직여 갤러리를 넘겨 갔다. 그 작은 기기 안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이한 여은태와 태이경의 모습들이 배곡하게 담겨 있었다. 아직 체모와 눈동자 색깔 까지는 조절할 수 없었던 모양인지 제 가문의 털 색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여은태는,사진들 속에서 시종 작 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투명한 만큼 더 속내를 읽기 쉬운 눈이다. 녀석은 아주
소중한 것을 품은 것처럼 일렁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마치 암컷을 완벽하게 각인한 성체를 보는 듯했다. 여군호 는 마지막 사진에 이승도가 살갑게 실어 둔 메시지를 무겁 게 읽어 내려갔다.
『어머님. 우리 은태가 이제는 이경이랑 더 많은 놀이를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동안 손가락을 못 써서 블록 조립 이나 미술 공부 같은 것은 꿈도 못 꿨는데 이제는 뭐든 가 능해졌어요. 애들이 들뜬 만큼 저도 굉장히 신나네요. 내 일은 아이들 데리고 국영이랑 바깥바람을 쐴 계획이에요. 완구 쇼핑몰에 들러서 새로운 장난감도 잔뜩 사기로 했고 요. 내일도 예븐 사진 찍어서 많이 보내 드릴게요. 그러니 은태 걱정은 마시고 맛있는 거 많이 드세요. 우리 이경이 가 지금도 어머님 걱정 많이 해요. 통통하고 건강한 모습 으로 다음에 봬요. 기븐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여군호는 내심 혀를 찼다. 그 파탄적인 성깔머리의 태 국영은 무슨 복이 그리 많기에 이토록 다 가졌나,그런 괜 한 짜증이 치밀었다.
“그들과 반목하지 마세요.”
한수연은 퉁퉁 붓다 못해 짓무른 눈꺼풀을 힘겹게 올 려 뜨며 중얼거렸다. 간절함에 이끌린 여군호의 눈이 그녀 에게 쏟아져 내렸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여군호는 긴 한숨을 뱉어내며 그러마 대답했다. 그리
고 아내의 젖은 뺨에 눌어붙은 머리칼을 섬세하게 쓸어 넘 겨주며 말했다.
“그래. 당신은 걱정 없이 잘 먹고 건강해지기만 해.”
한수연은 희미하게 웃으며 젖은 얼굴을 어깻죽지에 묻 어 왔다.
“은태가 보고 싶어요.”
작은 중얼거림이 차갑게 단련된 심장을 후벼 팠다. 그 녀를 안아 든 여군호는 작업실을 나서며 여제운에게 지시 했다.
“태국영에게 연락을 넣어 두어라. 이틀 뒤에 직접 본가 로 찾아가겠다고. 시간은 그쪽에서 좋을 대로 정하라고 해.,,
여제운은 네,하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