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신음 소리에 잠에서 깼다. 이승도는 먹먹한 머리를 채 정리할 시간도 없었다. 불덩이 같은 체온에 허둥지둥 뒤 를 돌았다. 이제는 제법 성장통을 잘 견디는 녀석이었지 만 만월의 아래에서는 여지없이 고통스러워했다.
“괜찮아,은태야. 선생님 여기 있어.”
이승도는 녀석의 커다란 덩치를 덮어 누르듯 끌어안았 다. 매끈한 털이 반바지 하나 덜렁 입은 몸에 파고들었고, 불덩이 같은 체온이 고스란히 품에 들어왔다. 관절 비틀리 는 소리가 선득했다.
하아. 하아.
짧은 숨이 밭게 허공에 흐트러졌다. 이승도는 안쓰러움 에 피곤함도 잊고 열심히 녀석의 몸을 주물렀다. 비틀린 관절을 정성스레 어루만지고 요동치는 배도 제 몸통으로 크게 뒤덮었다.
헐떡이던 호흡은 차춤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나 녀석 이 괜찮아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기침이 시작되었다. 한
번 터진 기침이 쉬이 멎지를 않아 결국 몸을 일으켰다. 여 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간절기,저를 덮쳐온 감기 기운 은제법 끈질겼다.
“마서.”
어둠을 가르고 온 태국영이 잔을 내밀었다. 이승도는 침대 아래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잔을 받아들었다. 뜨끈 한 온기가 손 안에 감겨 왔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한 모금 씩 넘겼다.
“년 왜 가을에 그렇게 매번 감기로 골골대.”
“그러니까. 지겨워 죽겠어.”
태국영은 이승도가 넘겨준 빈 잔을 티 테이블에 아무렇 게나 놓아둔 뒤 돌아왔다. 그의 손이 이마를 크게 덮었다.
“허약하기는. 내일 주치의 불러줄 테니까 영양제나 하 나 맞아.”
그는 밉살스레 말하면서도 곁에 앉아 품을 내주었다. 이승도는 그의 가슴에 가볍게 안긴 채 숨을 골랐다. 인중 위로 흘러내리는 숨결이 더웠다. 일주일 째 떨어지지 않 는 감기에 생전 처음으로 약을 먹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일 해열제라도 가져달라고 할까?”
그러나 이승도의 질문에 태국영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
“감기약 같은 건 세상에 없어. 그냥 잘 먹고 잘 쉬어야 낫는 거야. 정 힘들면 하루 반차라도 내라니까.”
제약에 관한 지식에 통달해 있는 그가 하는 말이었다. 이승도는 응,하며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레까지만 참으면 돼. 세미나 끝나면 바로 올 거니까 그때 푹 쉴게. 넌 괜찮아? 어디 아픈 데는 없어?”
“네 걱정이나 하시지.”
어차피 대보름도 아니고 애도 아닌데 안 괜찮을 리가 없었다. 몸에 열기가 휘돌아 조금 짜증 나는 정도였다.
“얼른 더 자.”
“응.”
이승도는 다시금 두 아이 사이에 몸을 뉘었다. 그러나 자꾸만 끙끙대는 녀석들 때문에 깊은 잠을 기대할 수는 없 었다. 결국 그날 미미하게 이어져 오던 감기는 독감으로 번지고 말았다.
벚꽃이 휘날리고 있었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향긋하고 여린 꽃잎을 싣고 몰려왔다. 이승도는 무언가 아련하고 아
득한 기분에 휩싸여 그 꽃길을 따라 걸었다. 그림자 없는 발밑은 깨끗하고 하안 모래사장이었다.
모래사장에 벚꽃이라니.
이승도는 어렴풋이 의문을 느꼈으나 그것은 너무나 하 찮은 것으로 전락했다. 저 멀리 작은 것이 꼬물거리며 바 닥에 발톱을 박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음에도 너무나 작게 보이는 것이 영락 없이 어린 짐승이었다.
이승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살아 움직이는 것은 그 저 철 지난 꽃잎을 허공에 부려대는 나무들분이었다. 아이 의 어미는 어디에 있나,살피던 눈은 곧 체념으로 굳어졌 다. 아무래도 버려진 아기 같았다.
이승도는 아주 느린 걸음으로 녀석에게 다가갔다. 작 게 보이던 녀석이 점점 가까워질 때마다 이유를 알 수 없 는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녀석은 마치 두끼비집을 만드는 것만 같았다.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그 위로 흙더미를 열심히 끼얹었다. 파닥파닥 움직이는 엉덩이와 뒷발이 온통 새카 맣고 윤기가 흘렀다.
녀석은 잠시 뒤 고개를 살그머니 배내지만,물기 없는 모래는 금방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녀석은 실망하
지 않고 다른 자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지 시작했다. 조금 더 잘 뭉쳐지는 바닥이 어디에 있을까,그렇게 고심 하는 듯 영리한 눈동자가 여기저기 헤매다가 제게 고정되 었다.
이승도는 열 걸음 정도를 남겨둔 채 그 자리에서 굳었 다. 곧게 눈이 마주친 아기 짐승 역시 마찬가지였다. 덜 여 문 발톱을 포슬포슬한 바닥에 콱 박아 넣은 녀석은 커다래 진 눈으로 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 눈동자가 너무도 맑고 깊어,마치 탐색당하는 듯했다.
一아가,너 혹시 국영이니?
묘한 벅참에 음성이 떨려 나왔다. 저 아기는 처음 만났 던 때의 태국영에 비해 훨씬 작았지만 그 모습이 너무나 흡사했다. 아련하고 먹먹함에 눈가가 젖어들었다.
그 아기를 내가 너무나 매정하게 내쳤어.
후회로 점철된 과거가 잔잔한 파도를 대신해 저를 덮 쳐 왔다. 차악,차악,정숙한 물결만이 귓가를 간질였다.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붙박여 서 있었다.
一아니야.
잠시 뒤 녀석은 조금 토라진 어투로 고개를 픽 돌리며
대답했다.
一내 이름은 그게 아니야. 나는 아직 이름이 없어.
■아니야?
一아니야!
녀석은 꽤 당돌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저 멀리 수평선 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계속해서 힐긋힐긋 이쪽을 향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다시 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망 가진 두끼비집의 잔해를 앞발로 마저 툭툭 무너뜨리면서 도,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는 별빛이 들어찬 듯 화려 하게 반짝거렸다.
이승도는 미어지던 가슴을 가만히 달래었다. 너무나 닮 아서 아무래도 착각을 했지 싶었다. 하지만 그런 착각이 아주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제 두 손바닥을 합친 크기에 도 못 미칠 만큼 작은 녀석은 흑표범 새끼와 흡사하나 무 늬가 조금도 없는 것이 딱 태국영 어릴 적과 판박이였다.
이승도는 녀석이 놀라지 않게 조심조심 다가가며 물었 다.
一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었어?
네 엄마는 어디에 있나 묻지 않았다. 어린 짐승이 이런 곳에 덩그러니 있다는 것은 거의 버려진 경우가 많았다. 간혹 어미가 찾으러 오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이토록 주 변에서 먹이를 찾기 어려운 환경에 놔둘 리는 없었다.
一집을 만들어.
一응. 내가 안전하게 살수 있는 집.
조그마한 몸을 작게 웅크린 녀석은 약간 쑥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아니,그것은 미안해하는 몸짓이었을까. 그 미 세한 차이를 구분하기 힘들었다. 이승도는 한 걸음 떨어 진 곁에 슬쩍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一하지만 여기서는 집이 잘 지어지지 않아. 두꺼비집 을 만들고 싶으면 저기 바닷가에 젖은 모래들로 만들어야 돼. 사실 그것도 금방 무너져 버리지만.
공연히 바닥을 긁던 아기가 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 다.
一알아.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살아남아야 해.
무슨 말이나 물어도 녀석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모 은 앞발을 꿈지럭거리기만 했다. 꽤나 과묵한 아기이지 싶 었다. 이승도는 어쩔까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 다. 담담해 보였던 아기의 눈동자에 얼핏 당혹이 깃들었 다. 마치 ‘어디가?’하고 묻는 것만 같았다.
一잠깐만. 내가금방물 떠올게.
이승도는 재발리 달려가 바닷물을 두 손 안에 한가득 받아왔다. 마음이 다급해서 손가락 사이로 많이 흘러내렸 지만,아기가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반절은 남아 있는 상
태였다. 이승도는 남은 물을 아이가 세우고 아이가 망쳐 놓은 두끼비집 위에 부려주었다. 그렇게 멀찍한 해변과 그 자리를 몇 번 왕복하니 모래는 흠뻑 젖었다.
一이제 해봐. 아까보다 훨씬 더 단단하게 모양이 잘 잡 힐 거야.
하지만 녀석은 어쩐 일인지 반응이 없었다. 축축하게 젖은 바닥을 한참 내려다보던 아기가 불쑥 고개를 쳐들었 다. 멀리서도 총명하게 빛나던 두 눈을 보자 근원을 알 수 없는 애릇함이 가슴에서 끓어올랐다.
아니라고 했지만,어쪄면 이 아이는 태국영일지도 몰랐 다. 꿈을 꾸고 있다는 자각이 어느덧 선연하게 저를 파고 들기 시작하자 그런 의심부터 치밀었다.
하지만 사실 이 아기가 무엇이건 큰 상관은 없었다. 그 저 잘해 주고 싶고,상처받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더 좋 은 보금자리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은 그 절실한 마음 이 발로가 되었다.
一왜? 아직도 마음에 안 드니? 내가 다른 데에 데려다 줄까? 포근한 집도 있고 먹을 것도 많은 그런 곳에.
다감하게 낮춘 음성으로 묻자 왠지 조금 시무룩해져 있 던 아기가 잠시 망설이다 타박타박 걸어왔다. 그 걸음은 녀석에게 다가가던 제 걸음의 조심스러움과 비슷했다.
一아니야. 조금 힘들지만 나는 여기가 좋아.
자그마한 몸통과 더 자그마한 머리가 제 발목을 작게 비비적거려왔다. 짧은 검은색의 털이 윤기가 자르르 흐르 는 채로 크게 울렁거렸다. 짤따란 꼬리가 허공에서 꼼틀거 렸다.
애교를 부리는 걸까,기분 좋은 의문을 떠올린 이승도 는 녀석을 천천히 안아 들었다. 겁먹지 않도록,해치지 않 는다는 걸 충분히 느끼도록 느린 움직임이었다.
一여기가 좋아?
一응 ■
一하지만 여긴 환경이 너무 나빠 보이는걸. 먹을 것도, 쉴 곳도 없는 게.
눈치를 살피며 가슴에 품으니 녀석은 그저 얌전히 몸 을 말아 맡겨왔다. 동그랗게 구부러진 척추가 찰싹 살갗 에 붙었다. 그제야 이승도는 제가 알몸이라는 것을 깨달았 다. 그러나 주변에 보는 눈이라고는 이 작은 아기분으로, 조금도 부끄러울 이유가 없었다. 물렁한 발톱을 최대한 숨 긴 발이 살포시 제게 기대왔다.
一그래도 난 여기가 좋으니까 여기에서 살아남을래.
고집이 대단했다. 더 권유할 수가 없었던 이승도는 아 기의 몸을 더 편하게 추슬러 안으며 매끄러운 정수리에 입
을 맞췄다.
一그래. 네가 정 좋으면 더 안 말릴게. 그래도 원가 힘 든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줄래?
一…말하면?
一내가 들을 수 있을 때면 언제든 달려와서 들어줄게. 배고프면 먹을 것 가지고 오고,졸리면 재워주러 오고.
작은 머리를 한껏 쳐든 녀석이 이내 조금 웃는 듯했다. 표정이라는 걸 빤히 읽을 수 없는 짐승의 얼굴이라 확신 할 수는 없었다. 그저 녀석은 애교를 부리듯 목 안으로 그 르렁거리며 몸을 비벼왔을 분이었다.
이승도는 잠 덜 깬 눈을 무겁게 깜박였다. 원가 굉장히 기분 좋은 꿈을 꾼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저 작고 까만 짐승만 흐린 기억 속에 묻혀 있었다. 되짚어 보려 했으나 열이 오르고 띵한 머리가 의지를 따라주지 않 았다.
이번 독감의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발열과 두통,콧물, 몸살,오한에 목감기까지 이렇게 다양해도 되나 싶을 만 큼 온갖 증상이 한끼번에 몰려왔다. 수액도 맞아 봤지만
큰 차도는 보이지 않았다.
태국영은 보름이 지나자마자 이승도를 아이들과 강제 로 격리시켰다. 아이들도 제발 편히 자라며 등을 떠밀었 다. 이승도도 굳이 그 호의를 마다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감기에 옮을 리는 없지만 발리 나아야 더 잘 돌볼 수 있다 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천 근처럼 느껴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린 이승도 는 태국영의 품 안이라는 사실을 느리게 인지했다. 목은 여전히 부은 듯 아프고 머리도 묵직하게 흔들렸다.
쉬이 일어나지 못하고 숨만 색색 내쉬고 있을 때,뜨끈 한 뺨이 이마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승도는 흐릿 한 눈을 들었다. 잠기운 없는 말끔한 얼굴이 자신을 깊이 굽어보고 있었다.
“열은 대강 내렸어. 유모 와 있으니까 죽 먹고 가.”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국영은 물수건을 가져와 땀 흘린 몸을 닦아주고 옷도 입혀주었다.
“국영아.”
먼저 방을 나가려던 그가 돌아보았다. 이승도는 걸터앉 아있던 침대 가에서 일어나 그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팔 크게 벌려.”
태국영은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두 팔을 벌렸다.
이승도는 그의 허리를 부드럽게 부둥켜안고 그의 목에 얼 굴을 기댔다. 바람처럼 웃는 기척이 이마 위로 홑어졌다. 그가 어깨를 마주 안으며 귓바퀴를 물었다.
“우리 승도 아프면 애교 부려?”
“몸이 으슬으슬해서 그래. 년 정말 훌륭한 이동 난로거
드 ”
“밤새 안아줘서 따끈따끈한데 뭘. 더 그럴듯한 핑계를 대봐.”
“무슨 핑계가 좋아?”
“밤새 간호해준 서방님이 사랑스러워서?”
“그럼 그걸로 해.”
이승도는 아릿아릿한 눈꺼풀을 비비며 그의 품에서 빠 져나왔다. 태국영은 그 손목을 재발리 잡아채 다시 가슴 에 품었다.
“우리 승도 다 나으면 나 또 상 받아?”
이승도는 가만히 태국영을 올려다보다 까치발을 들었 다. 열기에 메마른 입술이 육감적인 볼름을 자랑하는 입술 을 지그시 눌렀다. 가벼운 키스 뒤에 이승도는 태국영의 허리를 한 번 꽉 끌어안았다 놓았다.
“응.”
대답은 짧았으나 태국영은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그
는 나긋나긋 풀어진 낯으로 이승도를 따라 거실로 나왔다. 고소한 냄새가 거실을 휘돌고 있었는데 반쯤 코가 막혀 그 정체를 알 수는 없었다. 거실의 대형침대 위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뒤엉켜 놀던 아이들이 벌떡 일어나 뛰어왔 다.
“엄마,좀 괜찮아요?”
[선생님. 아직도아파?]
이승도는 그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아이들을 한꺼 번에 안았다.
“견딜 만해. 우리 은태랑 이경이,잘 잤어? 간밤 아픈 데는 없었고?”
아이들은 동시에 고개를 흔들었다. 예븐 아이들에게 번 갈아 모닝키스를 해 주고 있을 때 주방에서 유모가 나왔 다.
“승도 군. 이 유모가 완전 신선한 전복 가지고 죽 끓였 어요. 한 그릇가득 먹고 가요.”
깔깔한 입 안에도 신기하게 군침이 돌았다. 고기보다 해산물을 더 좋아하는 이승도에게 지금 그만한 보양식은 없었다.
“아. 맛있겠다. 잘 먹을게요.”
이승도는 모처럼 식욕이 돋아 얼른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막상 입에 떠 넣은 전복죽은 맛을 거의 느낄 수가 없었다. 지금 상태로는 식초를 한 사발 마셔도 모를 것 같 은 상태이니 당연했다. 남기기는 미안해 한 그릇을 억지 로 비웠다.
“이런. 식은땀 좀 봐. 오늘 하루 일 쉬면 안 돼요? 감기 는 무엇보다 푹 쉬어야 잘 낫는데.”
가방을 챙겨 나왔을 때 유모가 걱정스레 말했다. 부드 럽고 가녀린 손이 그새 땀이 맺힌 이마를 훑어냈다. 이승 도는 괜찮다고 고개를 흔들며 곁눈질을 했다. 나갈 준비 를 끝낸 태국영과 달리 태이경은 아직 잠옷 차림 그대로였 다.
“이경이는? 오늘은 같이 안가?”
“응. 엄마 아프니까 오늘은 뒷좌석에서 편히 누워서 가 요. 난형아랑 놀게요.”
“그래도 아빠 나가는 길에 나가야 오전 수업 시간에 맞 출수 있지 않아?”
“오전엔 어차피 책 읽고 애기하는 거라 괜찮아요. 하루 미루고 다음에 나눠서 해도 되고. 집에 가면 심심해요. 엄 마도 없구,형도 없구.”
요 근래 틈만 나면 동생 타령을 하던 녀석이 오늘은 그 냥 그쯤에서 말을 삼갔다. 아무래도 이 집에는 저도 있고
여은태도 있어 신나게 놀 수 있는데 집에 가면 아무도 없 으니 조금 울적해지는 모양이었다. 기혼인 사육사들에게 없는 조카를 핑계로 년지시 물어보니까 이게 그리 드문 일 도 아닌 듯했다.
이승도는 무릎을 굽혀 앉아 아이와 같은 높이에서 눈 을 맞췄다.
“나는 우리 이경이가 너무 예뻐서 이경이만 있어도 되 는데,우리 이경이는 그래도 동생 있었으면 좋겠어?”
녀석의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폭삭 안겨든 녀석이 목에 팔을 감아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작은 속삭임이 귓가 에 번졌다.
“나두 그래요. 근데 형아가 나 예뻐하는 것처럼 나도 동 생 생기면 좋을 것 같긴 해요,예뻐해 주고도 싶구……
처음에는 태국영의 반 협박으로 시작했지만,언젠가부 터 태이경은 진심이 되어 버렸다. 엄마가 꼬물꼬물 귀여 운 아가를 낳으면 얼마나 예블까 상상만 해도 행복했다. 매일매일 보살펴 주고 예쁘다고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집 에 가면 외롭다는 것도 거짓이 아니었다. 그곳엔 저를 예 뻐해 주는 이들이 많았지만,재밌게 놀 수 있는 상대는 없 었으니까.
“그럼 동생 말구,엄마랑 은태 형아랑 우리 집에서 다
같이 살면 안 돼요? 나랑 같이 공부하고 놀고 같이 낮잠 자고 그럼 좋을 것 같은데.”
고비를 하나 넘으니 다음 고비가 닥쳐왔다. 이승도는 또다시 난감해져 버렸다. 요즘 둘이 어울려 놀더니 떨어지 기 싫은 건 비슷한지,여은태 역시 비슷한 뉘앙스를 자주 비쳤다.
“일단,엄마가 아주 열심히 생각 좀 해 볼게. 우리 이경 이랑,우리 은태랑,다 같이 안 외롭고 행복해질 수 있게. 기다려줄 수 있지?”
태이경은 꽃처럼 활짝 웃으며 응! 하고 대답했다. 그 곁 에서 유심히 대화를 경청하던 여은태도 덩달아 앞발을 폴 짝거리며 좋아했다.
“다녀올게. 우리 예븐이들 보보.”
양 뺨에 녀석들의 보보를 받고 태국영과 차고로 향했 다. 태국영이 운전석에 앉았고 이승도는 등받이를 최대한 눕힌 보조석에 거의 눕다시피 몸을 실었다.
출근길 정체는 쏟아지는 비로 인해 극심했다. 모두 정 답게 기어가는 차량들이 서로의 꼬리를 무느라 바빴다. 자 주 들리는 경적 소리는 유독 신경질적이었다. 이승도는 태 국영의 옆얼굴을 바라보다 꾸벅꾸벅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저를 빤히 내려다보
고 있는 태국영의 얼굴이었다. 자연광을 거의 부리지 못하 는 어둑한 배경을 두고도 그의 이목구비는 조각처럼 빛이 났다.
“다 왔어?”
태국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더 쉬어. 오분은 더 있어도 되니까.”
둔중한 소음 속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낮은 울림을 품고 귓속에 스몄다. 이승도는 느긋이 손을 뻗어 그의 뺨 을 쓸었다. 비현실적으로 매끈한 살결의 감촉이 손끝에 엉 겨왔다.
태국영은 눈꺼풀을 나른하게 무너뜨리며 고개를 꺾어 손목에 입술을 비볐다. 뜨거운 숨이 동맥 위에서 부서졌 다. 그의 눈동자는 부스러진 열기를 꽉꽉 눌러 담은 듯했 다-
세찬 빗소리가 전면유리를 거칠게 난타했다. 와이퍼를 가장 발리 돌려도 한껏 일그러진 세상은 거의 변하는 것 이 없었다. 편안히 시간을 죽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어깨 를 덮고 있던 담요가 허벅지로 흘러내렸다. 뒷좌석에 놓아 둔 가방을 끌어와 어깨에 멨다. 우산을 집어 들려는 손을 그가 잡아챘다.
“미련하게 굴다 정말 탈 나지 말고. 세미나 중간에라도
아파서 견디기 힘들어지면 성문이한테 전화해서 병원 가. 내가데리러 갈게.”
“응. 걱정해줘서 고마워.”
이승도는 가벼운 키스를 끝으로 차에서 내렸다.
어차피 동물원에는 미리 조퇴서를 작성해 둔 상태였 고,이제 와 그것을 철회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세미나 후에 돌아오면 적어도 5시는 넘어있을 테니 어차피 두 시 간 차이였다. 그래도 자리를 비운 동안 문제가 생기지 않 게 최대한 신경을 쓸 생각이었다.
오전 일찍부터 분주히 움직여 전체적으로 회진을 돌았 다.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는 동물들은 꼼꼼하게 진찰하고 엑스레이도 찍어 살펐다. 앉을 시간 없이 내내 그러고 돌 아다녔더니 몸 상태는 더 말이 아니었다. 옷이 푹 젖을 정 도로 땀이 나 마주치는 사육사들마다 걱정할 정도였다.
샤워를 하고 미리 챙겨둔 새 옷으로 갈아입었더니 태국 영의 냄새가 말끔하게 사라졌다. 이승도는 가물가물한 정 신을 가까스로 수습하며 가방을 챙겨 나섰다. 컨디션이 너 무 나빠 웬만하면 건너뛰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으나, 야생동물을 주제로 한 세미나는 자주 열리지 않았기에 조 금 더 기운을 내 보기로 했다. 정 못 버티겠다 싶으면 두 번째 섹션은 포기하고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주차장으로 나가니 태성문이 차를 대 놓고 대기해 있었 다. 보조석에 앉아 우산을 뒷좌석에 놓고 안전벨트를 맸 다. 그가 기어를 옮기며 말했다.
“주무셔도 됩니다.”
“고마워요. 위치는 아세요?”
“압니다.”
대답한 그가 곧장 출발했다. 빗줄기는 여전히 드셌다. 이승도는 중간중간 그에게 말을 걸어볼까 고민했으나 그 생각도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호시탐탐 덮칠 기회를 노리 는 암흑 같은 잠기운이 새까맣게 몸을 뒤덮었다.
『식사는 어디서 하시겠습니까.』
첫 번째 섹션이 끝나고 넉넉히 5분 정도가 지났을 시점 에,태성문은 이승도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세미 나가 열리는 대학 정문 바로 앞의 카페에 있었다. 마시지 도 않는 커피를 주문해 놓고 찬물만 들이키고 있었지만 그 는 꽤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생각이 없어요. 전 괜찮으니 맛있는 거 드세요.』
5분여 만에 날아온 답장을 힐긋 확인한 태성문은 두 시
간 동안 대부분 손에 쥐고 있었던 휴대용게임기를 내려두 고 그에게 답신했다.
『형수님 굶기지 말라고 했는데요. 저 혼납니다.』
진짜 혼난다. 태국영은 저에게 에스코트를 맡기며 절 대 굶기지 말고 맛있는 거 사 먹이라고 신신당부했었다.
『먹었다고 할게요. 아침에 먹은 게 체했는지 뭘 먹으면 토할 것 같아서 그래요.』
태성문은 미간을 좁히며 잠시 고민했다. 속에서 안 받 는 걸 억지로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 끝에 ‘그 냥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일단 차가운 거 하나 마시고 조금 쉬어 볼게요. 저도 반쯤 돌아갈까 생각 중이에요』
『네. 연락기다리겠습니다.』
태성문은 태국영에게 전화를 걸어 그대로 알렸다.
“형님. 형수님 체기 있어서 뭐 드시면 토할 것 같다고 버티시네요. 식사를 못 챙겨드렸습니다.”
〈〈알았어.〉〉
“그래도 전 배고파서 뭘 먹어야겠습니다.”
《누가 들으면 내가 너 굶겨가면서 일 시키는 줄 알아.
너 혼자 지키는 것도 아닌데 밥들은 제때 먹어. 서로 자리 비울 때 교차 보고만 잘하고.》
“예에,예에. 사랑합니다,형님.”
《거절한다.》
태국영은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태성문은 후문 에서 대기 중이던 태준호에게 자리를 비운다 알린 뒤 게임 기를 챙겨 들고 카페를 나섰다.
정오임에도 불구하고 날은 어둑하고 폭우는 송곳처럼 우산을 때렸다. 물비린내가 온 천지에 가득했다. 태성문 은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았다. 허공을 씻어내는 빗줄 기가 많은 냄새를 땅에다 처박아 주변을 경계하기 까다로 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리 검색해 둔 근처 레스토랑으로 가 레어로 구 운 스테이크 5인분을 먹었다. 기대보다 육질이 좋아 더 시 킬까 하다가 참았다. 점심은 소식을 해야 아무래도 활동하 기 더 좋았다. 그래서 저희 종족들은 보통 아침과 저녁을 엄청나게 투자하고 그 사이는 조금씩 자주 먹는 것이 일반 적이었다.
아쉬움을 달래며 레스토랑은 나온 그는 아까 죽치고 있 던 카페로 돌아갔다. 시계를 보니 12시 50분,두 번째 섹 션까지는 1 시간도 넘게 남아 있었다. 부재중 전화도 메시 지도 없어 그는 다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형수님.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러나 10분이 지나도록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는 다 시 ‘형수님 주무십니까.’하고 보냈다. 이 역시 응답이 없었 다.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그조차도 받지 않았다. 10분 더 기다리던 그는 고민 없이 다시 카페를 나가 정문을 지 나쳤다. 곧장 수의과대학 건물로 가 소회의실을 찾았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자리는 반쯤 차 있는 상태 였다. 그러나 어디에도 이승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에 미간이 싸늘히 굳어들었다.
그는 빠르게 눈을 굴렸다. 곧 시야에 이승도의 가방이 눈에 띄자 날듯이 뛰어가 빈자리를 살펐다. 가방과 필기도 구,음료 캔,심지어 휴대폰까지 테이블 위에 반듯이 놓여 있었다.
“여기 있던 분 언제 나가셨는지 아십니까?”
태성문은 뒤쪽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물었다. 나란히 앉아 있던 둘은 서로 아는 사이인지 눈빛을 교환하다가 거 의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우린 이십 분쯤 전에 식사하고 들어왔는데 그 때부터 비어 있었어요.”
태성문은 소회의실 안을 돌아다니 며 모두에게 같은 질 문을 했다. 그들은 거의 비슷한 말을 했고,그중 한 명이 ‘저 밥 먹고 들어오니 두 명밖에 없었어요. 그때가 열두
시 삼십 분쯤? 그 정도였는데 저 자리는 비어 있었어요.
’라고 말했다.
그 시각이면 저는 막 주문한 스테이크가 나오길 기다리 며 게임기에 열중해 있을 때였다. 태성문의 낯은 납을 바 른 듯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소회의실을 나가며 황급히 휴대폰을 들었다.
“준호 형. 형수님 사라지셨는데 혹시 짐작 가는 바 없습 니까?,,
《…뭐?》
“거의 사십 분 동안 자리를 비우셨다는데,휴대폰도 가 방도 모두 그대롭니다.”
《아니야. 정문에도 후문에도 다 있었어. 나가시는 거 누구도 못 봤고!》
이승도의 뒤를 은밀히 따라다니는 것은 태성문을 포함 해 총 셋이었다. 물론 제가 비운 자리를 하나가 채웠을 것 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확실한 건 형수님이 행선지 보고도 없이 사라 지셨다는 겁니다. 일단 제가 이 안을 샅샅이 뒤져 볼 테니 까 그동안 형은 뭐 놓친 게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태성문은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은 뒤 미친 듯 대 학 내를 돌아다녔다. 수의과대학 건물은 물론 대학 건물
전부를 이 잡듯 뒤졌으나 이승도의 머리카락 한 올 발견 할 수가 없었다.
두개골 안을 폭격해오는 생각들은 온통 비관적인 것들 분이었다. 태성문은 마지막으로 다시 소회의실을 찾았다. 이승도의 자리는 여전히 텅 빈 채였다. 그의 신변에 무언 가 변고가 생겼음을 그제야 뼈아프게 인정했다. 태성문은 더 지체하는 것이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태국영에게 전화 를 걸었다.
“형수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적어도 한 시간 이상으 로 추정됩니다. 정문과 후문 어디에도 나간 것을 본 자가 없는데 이 안에도 없습니다. 죄송합니다,형님. 어떻게 할 까요.”
나직이 숨소리가 울렸다. 그 리듬은 점점 사납고 거칠 어졌다. 이윽고 그가 뼈를 씹어 먹는 맹수처럼 으르렁거렸 다.
《찾아. 두 시간 내로 못 찾으면 너희 다 죽을 각오 해.》
태국영은 가장 먼저 최 가의 동태를 보고받았다. 그러 나 윤봄이와 최가 형제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최경엽과 최
명욱은 직장에 있었고,윤봄이는 스트레스를 풀듯이 백화 점을 돌아다니며 쇼핑하느라 바빴다.
여제운과 남강우도 한창 직장에서 구르고 있는 차였다. 이처럼 제가 주시하고 있던 이들은 변화가 없었으나 그것 은 큰 위안이 되지 않았다.
태국영은 차갑게 끓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가 뜨거운 몸을 쉼 없이 할 아 내렸으나 과부하 걸린 머리는 쉬이 식질 않았다. 적으 로 간주해 둔 모두에게서 낌새가 없다는 건 도리어 좋지 않은 징조였다.
이승도는 모든 걸 두고 사라졌다. 이렇게 아무에게도 연락 없이 오래 잠적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승도는 소리 와 진동을 말살한 휴대폰 불빛만으로도 잠에서 깰 만큼 예 민했다. 동물원 일이 바블 때가 아니면 부재중 메시지도 꼼꼼하게 확인하는 편이었다.
마지막 목격 시각인 12시 30분을 기준으로 하면 실종 된 지 두 시간이 넘었다. 그리고 제가 그 사실을 인지한 것 은 대략 1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누구를 찾아가야 할지 갈 피를 잡지 못했다. 머릿속이 폭발 직전의 마그마처럼 울렁 거렸다.
태국영은 잿빛으로 내려앉은 도시 한가운데에 덩그러
니 서 있었다. 이승도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대학부터 시작 해 짐작 갈 만한 곳을 다 들쑤셔 보았지만 그 달콤한 냄새 를 한 자락도 맡지 못했다.
그는 이승도를 노릴 만한 이들 중에 가장 철저하고 가 장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지.》
태국영은 요령 좋은 무료함을 덧씌운 목소리로 물었다.
“여제운아. 우리 승도 어디에 있는 것 같아?”
여제운은 섣불리 반응하지 못했다. 태국영은 젖은 머리 를 한 손으로 길게 쓸어 넘기며 품 안에서 담뱃갑을 꺼냈 다. 그러나 흠뻑 젖은 것들은 불 꼬랑지를 매달 기력이 없 는 상태였다. 방수 기능으로 용케 살아남은 휴대폰만 멀쩡 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엿물처럼 늘어진 침묵 끝에 여제운이 무거운 목소리를 전송해 왔다.
“정말 모르면 다행이고.”
태국영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담배 한 대를 배 필터 를 씹었다. 잔뜩 젖은 담배가 눅눅하게 입술 사이에 매달 렸다. 지포라이터를 켜 그 끝에 대 보았으나 당연한 말로 불이 붙지 않았다.
기준이 필요했다. 그는 마침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 담배를 한 갑 사서 뜯어냈다. 보송보송하게 마른 담배 끝은 열렬히 불꽃을 반기며 새발갛게 타들어 갔다.
이것을 필터까지 다 태운 뒤에는 가장 가까운 곳부터 쑥대밭을 만들 것이다. 그들이 이 사건에 연관이 되어있 건 말건 그것은 상관없었다. 닥치는 대로 털다 보면 어디 선가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었다.
두 번째로 깊이 매캐한 들숨을 마셨을 때였다. 휴대폰 이 울렸다. 목격자를 찾기 위해 이승도의 사진을 들고 대 학 내를 돌아다니고 있던 태성문의 전화였다.
《형님. 방금 여기 학생 하나가 말하기를,엠불런스가 싣고 간 사람 같다고 합니다. 수의과대학 건물 자판기 앞 에서 남자 하나가 쓰러져 있어서 119에 신고했다는데요. 목격자와 목격자 친구들에게 모두 형수님 사진을 보여줬 는데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입술 사이에 짓이겨져 있던 담배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 져 내렸다. 극렬히 타올랐던 불꽃이 허무하게 스러졌다.
“정문 후문 지키던 새끼들은 앰불런스가 드나든 걸 빤 히 봤으면서도 이제껏 떠올리지도 못했다는 말이야?”
《…죄송합니다. 예상을 못 하고 있던 방향이라 연계 짓
지 못한 듯싶습니다.
“변명 따윈 나중에 듣지. 실어간 병원부터 알아봐.” 《당장 찾아 알려드리겠습니다.》
태국영은 거친 벽에 등을 기댔다. 안식 같은 안도가 찾
아왔음에도 표출할 곳 없는 울분이 온 혈관에 휘돌았다. 교살시킬 듯 꽉 쥔 핸드폰이 재차 진동했다. 칼날 같은 시 선으로 그것을 흘겨보았다.
모르는 번호였다. 기이하고 강렬한 예감에 수신을 누르 고 귀에 가져다 댔다. 연결된 통화를 잠시 인지하지 못했 던 상대방은 잠시 편안히 숨을 쉬다 어느 순간 어,하고 희 미한 목소리를 냈다.
지리멸렬했던 장맛비가 차츰 가늘어지고 있었다. 척척 한 물기 홑날리는 허공에 희미한 볕이 물보라처럼 번져갔 다. 태국영은 소리 없이 이를 갈며 목표 없이 전방을 노려 보았다.
《국영아……저기,혹시 나 찾았어?〉〉
씨팔.
태국영은 속으로만 욕설을 내뱉으며 입술 안쪽 점막을 씹어 물었다. 분노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세차게 뛰었 다. 한참 눈치를 보던 이승도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 했다.
《엄청 찾았구나. 정말 미안해. 난 그냥,음료 뽑으러 갔
는데,갑자기 머리가 핑 돌아서…… 깨 보니까 병원이고, 간호사가 실려 왔다고…….》
“어디야.”
태국영은 소름 끼치도록 무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승 도는 잔뜩 움츠러든 듯 웅얼거렸다.
《여기 한강 병원응급실…….》
“아무 데도 가지 말고 거기에 그대로 있어.”
태국영은 대답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했 다. 그는 빗속을 달려가며 태성문에게 연락을 취했다.
“우리 승도 지금 한강 병원 응급실에 있어. 내가 도착 할 때까지 일인실로 옮기게 조치해 두고,당장 그쪽으로 다 튀어가.”
태성문은 충성서약을 하는 것처럼 세찬 목소리로 대답 했다. 운전석의 고급 가죽 시트가 물기에 흠뻑 젖어들었으 나 개의치 않았다. 태국영은 미친 듯이 액셀을 밟았다.
이승도는 응급실에서 눈을 떴다. 눈부시게 쏟아져 내려 오는 백열등 불빛에 눈이 아렸다. 몽롱한 머리가 시야를 자꾸만 조각냈다. 온몸이 기이할 정도로 뜨거웠고,특히
하복부에 열이 심하게 뭉쳐 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태국 영의 체온과 맞먹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평소 제 체온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으 나,그 의혹은 머지않아 흐트러졌다. 불편한 침대에서 몸 을 굴려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는 것이 우선이었다. 마지 막 기억이 흐릿하게 뇌리를 스쳤다.
이온음료나 한 캔 마시고 그래도 정신이 깨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자고 다짐하며 자판기를 찾아갔었다. 챙겨 온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려고 몸을 움직이는데,그때 위압적인 현기증이 정수리를 광 짓눌러 왔었다. 시커먼 암 흑이 몰려와 통째로 저를 씹어 삼켰다.
그 뒤 상황은 충분히 유추가 가능했다. 그대로 실려 온 게 분명했다. 어수선한 주변을 정신없이 둘러보다 벽시계 를 찾았다. 시곗바늘은 2시 40분을 막 지나가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승도는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초조하게 기억을 더듬 었다. 마지막으로 받은 태성문의 문자를 떠올리려 애썼으 나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만약 제가 실려 온 뒤 그가 저를 찾았다면. 대답이 없어 서 확인하러 왔는데 제가 없어졌다면.
이승도는 다급히 침대에서 내려오려다 통증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내려다본 팔은 링거 바늘이 꼽힌 채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고민할 것 없이 그것을 해체하려 는 순간 간호사가 달려왔다.
“뭐 하시는 거예요!”
호통치는 소리는 뇌를 통째로 뒤흔드는 듯 날카로웠다. 그녀가 무어라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하나도 귀에 들어 오지 않았다. 이승도는 손을 휘저으며 부탁했다.
“저,일단 병실로 좀 옮길 수 있을까요. 전화도 좀 쓰고 싶은데요.”
“여기 꼼짝 말고 있으세요.”
간호사는 들은 척도 않고 그냥 휙 돌아가 버렸다. 조금 얼이 빠져 명하니 있는데 사라졌던 간호사가 다시 와 신상 을 털어갔다. 마치 잠재적 범죄자를 대하듯 추궁하는 투 라 약간 기분이 상했지만 순순히 협조했다. 지갑이나 휴대 폰 같은 것이 없어 신상을 파악할 길이 없었을 터였다.
돌아서려 하는 것을 붙잡아 전화부터 좀 쓰게 해달라 고 부탁했다. 간호사는 다크서클이 짙은 얼굴을 찌푸렸다. 링거를 다 맞을 때까지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라고 협 박조로 말했다.
그쯤 해서 이승도는 정말로 불쾌해지고 말았다.
“간호사 선생님. 응급실 업무 힘든 거 알지만 저는 지
금 부탁을 하는 게 아니에요. 알다시피 난 휴대폰도 카드 도 없어요. 응급진료비를 해결하려면 보호자를 불러야 하 고,난 그 보호자에게 연락을 하겠다는 거예요.”
“좀 기다리세요.”
이번에도 쌀쌀맞게 대답하고 사라져 버렸다. 너무나 어 이가 없어 화도 안 났다. 주변은 어수선하고 시끄러웠고, 인턴인지 레지던트인지 모를 의사와 간호사들이 분주하 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승도는 가만히 주변을 살피다가 차 분한 걸음걸이의 간호사를 불렀다.
“저기요. 정말 미안한데,내가 지금 급하게 연락을 해 야 할 곳이 있거든요. 전화를 좀 쓰고 싶은데 자리를 비워 도 될까요?”
“휴대폰 없으세요?”
“아,아무것도 없이 실려 와서요.”
“접수는 하셨고요?”
“아까 간호사분 와서 접수증은 적었어요.”
간호사는 남은 링거 양을 보더니 급한 일이나 재차 물 었다. 이승도는 정말 아주 급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다행 히 그녀는 아주 친절했다. 폴 대를 직접 끌어 데스크까지 안내를 했고,이승도는 그제야 겨우 전화기를 잡을 수 있 었다. 다이얼을 누르는 손은 가늘게 떨렸다. 조심히 전송
하는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야.」
수화부에서 흘러나오는 태국영의 대꾸는 싸늘하게 경 직된 토막이었다. 부식된 쇳가루가 저들끼리 마찰하는 소 리 같기도 했다. 당연히 평소의 그 능청스럽고 달짝지근 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제발 제가 사라진 걸 모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은 무참히 깨졌다. 이미 저쪽은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친 듯했다. 전화를 끊고 응급실로 돌아온 이승도는 시무룩하 게 뒷일을 걱정했다.
저를 지키던 경호들도 문제지만,저 역시 문제였다. 따 지고 보면 제가 그리 크게 잘못한 게 없음에도 대역 죄인 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국영이 화 많이 났겠지…….
침대 곁에 털썩 주저앉아 명하니 넋을 놓고 있을 때,간 호사 두 명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한 명이 텅 빈 링거 팩 을 수거하고 바늘을 배는 동안,눈이 크고 입술이 도톰한 아가씨가 굳은 미소를 지으며 지금 당장 특실로 옮기겠다 고 말했다.
어리둥절해진 이승도는 일반 병실이면 된다고 고개를 저었으나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몹시 초조하나 공손한 태
도였다. 손바닥 뒤집듯 달라진 대우의 근원이 무엇인지 어 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승도는 쓴웃음을 삼키며 침대 에서 내려왔다. 간호사가 질겁하며 다시 앉혔다.
“움직이지 마세요. 이동 침대로 옮겨드릴게요.”
“…저걸을 수 있어요.”
“그러다 큰일 나면 다 저희 책임이에요!”
침대 타고 가라,걸을 수 있다,촌극 같은 실랑이 끝에 이승도는 결국 바퀴 달린 침대에 실려 가게 되었다. 얼굴 이 뜨거워 주변을 볼 수가 없었다.
옮겨간 특실은 으리으리했다. 샤워부스와 세면대,비데 까지 있는 널찍한 욕실은 물론 소파와 커피테이블을 갖춘 응접실도 있었다. 개별 정수기에 전자레인지까지 없는 게 없었다. 호텔이 부럽지 않은 시설이었다.
“불편한 점이 있으면 꼭 말씀해 주세요.”
책잡힐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승도는 그냥 그러 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복은 이걸 입으시고요,실려 오셨을 때 혈액검사 를 했는데 약간 이상한 점이 발견됐거든요. 담당 교수님께 선 재검사를 권하시는데 어쩌시겠어요?”
“…이상한 점이요? 뭐 문제가 생겼나요?”
“아,어딘가 문제가 보인 것은 아니니 염려 마세요. 아
마 담당 교수님 오시면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지만 호르몬 수치가 조금 기이하게 측정이 된 걸로 알아요. 그리고 정 맥주사를 놨는데 열이 떨어지기는커녕 더 오르더라고요. 혹시 특별히 거부반응 있는 약물이 있어요?”
이승도는 아아,하며 안도했다.
“거부반응 있는 약물은 없어요. 피검사도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호르몬 수치 이상이라면 제 체질 문제였다. 그들의 눈 엔 제가 그저 평범한 인간 남자로 보일 테니 의혹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래서 제가 일반병원을 안 다니는 거였다. 약물 이야기는 따로 태국영에게 말해서 그쪽의 전 문 의료진을 만나 상의해야 할 문제였다.
“그래도 이런 건 확실히 해 둬야 다음에 대처할 수 있어 요. 피검사 다시 하시는 게 좋을 텐데.”
간호사는 조금 염 려스러운 표정으로 재검사를 권유했 다. 순수하게 환자를 걱정하는 태도여서 아까까지의 껄끄 러움은 느끼지 못했다. 이승도는 극구 괜찮다고 사양하며 그녀를 내보냈다.
깨어났을 때보다 확연히 열이 내려 이제는 조금 따끈 한 정도였다. 그 외의 감기 기운은 신기하리만치 말끔하 게 사라졌다.
간호사가 가져다준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뒤 명하니 침 대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늘어진 빗줄기가 창문을 다닥다닥 두드리며 흘러내렸다. 넉넉한 품의 환자복은 마 치 새것처럼 서걱거렸다.
무거운 머리를 삐걱삐걱 굴리며 고심을 거듭했다. 잔 뜩 화가 나 있을 태국영과 위태로운 외줄 위에 서 있는 경 호원들,애매한 죄인의 신분이긴 하나 면죄 받을 것이 분 명한 이승도 자신,이 세 점을 연결하는 모난 삼각형을 어 떻게 하면 달덩이처럼 둥그렇게 만들까 하는 고민이었다.
이참에 해 볼까. 그 몸 로비라는 거.
이승도는 불현듯 얼굴을 붉히며 미소를 삼켰다. 먹먹 한 머리가 내어놓은 결론이란 것이 고작 이 따위인가. 보 는 사람도 없는데 괜스레 멋쩍어할 때였다.
파앗一
건재하게 천장에서 빛나던 조명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 추었다. 이승도는 당황한 낯으로 두리번거렸다. 곧 안내방 송이 병원 곳곳을 작게 진동했다.
《전력 과다로 잠시 정전이 되었습니다. 비상전력은 정 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보호자 분들은 안심하시길 바 랍니다. 현재 빠르게 복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을 一》
이승도는 막연히 신기해했다. 보통 작고 낙후된 시설 의 병원에서는 전력 소비가 많은 기간이면 갑자기 전기가 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지만,이렇게 큰 병원도 정전이 라는 게 되는구나 싶었다. 비상전력이 제대로 공급되어 중 환자실 같은 위급한 곳에 이상이 없다니 크게 걱정할 일 은아니었다.
뜨끈한 귀를 매만지다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간호사 가 준 슬리퍼를 직직 끌어 따뜻한 물을 받고 있을 때였다.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승도는 반가운 마음에 물 받다 만 컵을 쥔 채 조리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국영一”
화색 돋은 목소리가 새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터엉,이 승도의 손에 들려 있던 플라스틱 컵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 렸다. 따끈한 물방울이 발등에 수를 놓았다. 이승도는 본 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누,누구一”
그와 마주 본 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쓴 남자의 눈은 표정 없이 침착했다. 절절 끓는 열기가 눈 깜박할 사이에 가까워졌다.
이승도는 발작처럼 그를 밀어냈다. 그러나 바위처럼 꿈
쩍을 않았다. 무기력함을 느낄 사이도 없이 팔이 꺾여 바 닥으로 짓눌렸다. 등 뒤를 누르는 무게감은 거대하고 압도 적이었다.
본능적으로 버둥거렸으나 저항은 조금도 먹히지 않았 다. 두려움이 검은 연기처럼 심장을 뒤덮었다. 고동이 발 라질 때마다 숨은 가빠졌다.
이승도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는 입을 막을 시도 조차 하지 않았다. 비틀린 채 붙잡힌 팔에서 따끔한 감각 이 스쳤다.
달칵.
빈 주사기가 바닥에 처박힌 얼굴 바로 옆을 나뒹굴었 다. 이승도는 두려움에 몸을 떨며 입술을 악물었다. 빠져 나갈 방법이 없었다.
의미 없는 반항이 계속되었고,잠시 뒤 암전되는 시야 에서 번득이는 남자의 차가운 눈을 보았다.
국영아……
이승도는 덜덜 떨리는 입술을 달싹이다 정신을 잃었다.
태성문은 태일의 비서실에 입원 수속을 부탁한 뒤 곧
장 가드 팀과 함께 병원으로 출발했다. 세미나가 있었던 대학을 샅샅이 뒤지고 있던 터라 다행히 거리는 가까웠다. 윤봄이 부부의 자택 근처에서 이를 갈고 있던 태국영보다 훨씬 더 먼저 도착할 것이었다.
“더 밟으세요.”
태성문이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실종의 실마리가 말끔 히 풀렸으나 어찐지 계속 불길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이렇게 그 홀로 덩그러니 내버려둔 적이 없어서일 것이다.
빗길을 달리는 차량은 역류를 타고 올라가는 물고기처 럼 세차게 도로를 갈랐다. 퇴근 시간 전이었으나 한산해 야 할 도로는 어지러웠다. 곡예운전이 이어졌다. 엠불런스 가 끊은 속도를 주파하는 것이 목표인 양 미친 듯이 질주 했다.
태성문은 생각했다. 제가 이승도의 경호를 맡은 뒤로 이렇게 오래,멀리 떨어져 있었던 적이 있었는가 하고.
단언컨대 없었다. 그는 늘 긴장을 놓지 않은 채로 그림 자처럼 이승도를 따라다녔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로 이사 를 해 잠을 잘 때조차 거리를 두지 않으며 살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맞닥뜨린 불안함에 손끝이 제어가 안 됐다. 의미 없이 손끝을 뚝뚝 꺾던 태성문이 재촉했다.
“아직 멀었습니까?”
“다왔어. 내비시간으로 칠분 남았다.”
1 년 같은 1 분이 몇 번이나 흐른 뒤에야 그들은 병원에 도착했다. 주차를 제대로 할 틈도 없이 그들은 곧장 병실 로 튀어 올라갔다. 병원 특유의 냄새가 원인 모를 한기와 함께 코를 찔러 왔다.
태성문은 인간들의 눈을 속이고 바람처럼 움직일 만큼 마음이 다급했다. 그러나 도착한 병실은 텅 비어 있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물컵을 황망히 일별한 그는 혹시나 하 고 다시 문짝을 보았다. 이승도,그의 병실이 맞았다.
병실 내에서 빈 주사기를 발견한 그는 그것을 집어 들 고 곧장 간호사데스크로 달려가 환자의 행방을 물었다. 간 호사들은 하나같이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저었다. 주사기 를 보여주며 그럼 이것은 당신들이 처방한 것이나 물었다. 그들의 표정이 일제히 창백해졌다.
거친 욕설이 목 안에서 휘몰아쳤다. 뒤늦게 도착한 남 자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CCTV실로 달려갔다. 특실 환자 가 감쪽같이 증발한 것에 병원은 발칵 뒤집혔다.
태성문은 핏발 선 눈으로 모니 터를 보았다. 정전은 전 력 과다 때문이 아니라 인위적인 조작에 의해서였다. 용의 자는 캡모자와 마스크로 완벽하게 얼굴을 가린 채 유유히 복도를 걸었다. 그는 이승도의 병실에서 멈추어 문을 열었
다. 그 순간부터 영상은 큰 노이즈로 흔들렸다.
태성문은 그 일그러진 화면 안에서 일어난 상황을 똑똑 히 목격했다. 용의자는 이승도의 병실로 들어가 짧은 시간 을 머물렀다. 그리고 잠시 뒤 혼절한 이승도를 한쪽 어깨 에 둘러맨 채 나왔다.
주차장의 입출차 기록까지 샅샅이 캐낸 뒤 휴대폰을 꺼 내 태국영에게 보고했다. 상황설명이 이어지는 시간 동안 내내 침묵으로 반응을 대신하던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당장 경찰에 협조수사 요 청해. 경찰차가 따라붙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직접적 인 추적은 내가 직접 한다. 본사 비서진에 놈이 타고 나간 차량 번호만 넘겨줘. 실시간 이동 경로 파악해서 비서진 쪽에 바로바로 보고하라고 해. 나는 태호연이랑 내내 통화 하면서 움직일 거니까,너도 바로 내 뒤에 따라붙고.》
“알겠습니다.”
태성문은 기이할 정도로 침착한 태국영의 반응에 의문 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을 파고들 생각도,그럴 시간도 없 었다. 그는 통화를 끝내자마자 곧장 비서진과 연락해 지사 사항을 빠르게 옮었다.
비서진 쪽도 이미 잔뜩 뒤집어진 채로 비상이 걸려 있 었다. 그들은 신속하게 경찰 측에 납치 사건을 알리며 협
력을 요구했다. 말이 요구지 협박이나 다름없었으나 그들 은 충실하게 협조했다.
당연한 말로 차량소유주는 차량이 도난당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경찰청 서버에 실시간으로 수집되 는 차량 방범 CCTV 기록에 의하면 범인이 탄 차량은 동 작대교를 지나 강변북로로 진입했다.
태성문을 비롯한 경호원들도 그 뒤를 쫓아 미친 듯이 액셀을 밟았다.
콰지직一
짙은 고동색 문이 거칠게 열리며 경첩이 부러졌다. 쾅, 벽면에 부딪힌 문짝은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한 채로 바닥 에 기이한 각도로 몸을 숙였다. 여군호는 무표정한 얼굴 을 들어 무례한 침입자를 살펐다.
“무슨 짓이지?”
그는 침착하게 물었다. 중역회의 도중에 난입한 여제운 의 전신에서는 광포한 기운이 절절 끓었다. 당황한 임원들 이 여군호와 여제운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 다. 여제운은 하얗게 도드라져 올라온 턱을 꿈틀거리며 거
침없이 다가와 섰다.
“그건 제가 물어야 할 말 같습니다. 무슨 짓을 하셨습니 까.,,
여제운은 마치 질긴 고기를 씹듯이 이를 득득 갈며 물 었다. 여군호의 눈이 뱀처럼 가늘어졌다. 분위기는 삽시간 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여제운. 이곳에 네가 들어올 자격이 없다는 것쯤 알고 있을 텐데. 용건이 있다면 회의가 끝난 후에一”
“그에게 무슨 짓을 하셨습니까.”
여군호는 새파란 핏줄이 불거진 여제운의 손등을 일별 했다. 손등분만 아니라 소매를 걷어붙인 팔뚝도,단단하 게 근육이 감싼 목덜미도 마찬가지로 위험스럽게 일렁이 는 핏줄기가 비쳤다. 여군호는 붉게 핏발 선 여제운의 눈 을 가만히 노려보다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회의는 잠시 뒤로 미루지. 다들 이만 나가보도록.”
어찌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던 중역들이 기다렸다는 듯 일어서서 회의실 바깥으로 사라졌다. 억누르고 있던 화가 점점 끓어올랐던 여제운은 여군호와 덩그러니 남게 되었 을 때가 되어서야 잘게 토막 친 목소리를 뱉어냈다.
“다시 여쭙습니다,가주님. 이승도 씨에게 무슨 짓을 했 습니까.”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자각은 있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게 지금 저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요.”
여제운은 두 발자국 더 다가섰다. 여군호는 희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토록 흥분에 겨운 장남을 보는 것은 아마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늘 조용하고 정적이며 지나치 게 차가워서,군림하기보다는 관망하는 지배자가 되지 않 을까 염려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여군호는 불안정하 면서도 난폭하게 날뛰는 그의 안광을 빤히 올려다보며 생 각했다.
녀석의 가슴을 뜨겁게 불사른 것이 연정이 아니라 야망 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어리석은 놈. 내가 너를 시험할 때마다 이렇게 번번이 나를 실망시키다니. 내가 아들을 잘못 키웠구나.”
“아버지는.,,
그 무거운 단어가 목을 조여 왔다. 여제운은 잠시 입술 안쪽을 짓씹다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아버지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아들로 대한 적이 없습 니다.,,
격분을 감춘 목소리 다.
“또한 은태 역시 당신께 아들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
지요. 우리 둘은 그저 매 순간 여 가의 남자였고,무수히 도 아버지 눈 안의 저울에 올라야 했던 수많은 수컷들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원망하고자 이렇듯 자리를 박차고 달려온 것은 아니었 다. 그러나 견고했던 틀 안에는 자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넘쳐흐를 만큼 채워져 있었던 듯했다. 작은 균열로도 폭포 수처럼 터져 나올 만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버지를 존경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나도 너를 신뢰했다. 그 누구보다도.”
“당신 뒤를 이을 재목으로서겠지요.”
“내 모자란 부정을 탓하려거든 네 태생부터 원망해야 할 것이다. 너는 이제껏 내 아들로서 누려온 모든 특권을 무엇으로 설명할 셈이지? 그것은 본래 너의 것이 아니었 다. 내 것이지. 내가 내 방식대로 너를 아끼고 사랑하기에 물려주려 했던 것일 분.”
“사랑이요? 가주님께서 어머니를 사랑하는 방식이 그 러했습니까.”
여군호는 드물게 말문이 막혔고,여제운은 약점을 물어 뜯는 마냥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 여자가 내 곁에 설 만한 자격이 있는지,그 여자가
여 가의 가솔들을 포용할 만한 재목인지,그 여자에게 내 아이를 배게 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그중 하나라도 모자 라다면 어머니를 가차 없이 버릴 생각이셨습니까? 덕목 이 부족하다는 이유로요? 가주님께서 저와 은태를 대하셨 듯이요?”
“아버지께 사랑이라 이름 붙일 누군가가 있다면 그건 어머니분이겠지요. 저와 은태는 그 한 조각도 나눠 받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그런 것을 갈망하지 않았기에 그저 수긍하고 따랐습니다. 아버지께서 앉아 계신 그 자리가 얼 마나 무거운지 무수히 교육받았고,그것을 이해하고 존중 했기 때문입니다.”
속사포처럼 날 선 말을 토해내는 동안 여제운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실핏줄 올라온 흰자위가 점점 붉은 기를 더해 갔다.
지나치게 딱딱하고 냉정한 정도(正道)를 따지는 것이 여제운의 특징이었다. 우두머리로서는 나쁘지 않은 기질 이었으나 그것이 도가 지나쳐서 유연성이 극도로 부족한 것이 또한 단점이기도 했다.
“저는 가주님 같은 아버지가 될까 처음으로 두려워졌습
여 가의 가주들은 가문의 이득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모 든 갈취와 협잡을 당연하게 생각하도록 교육받는다. 증거 만 남기지 않으면 영원히 어둠 속에서 웃을 수 있다는 것 을,지상에서 등대가 사라진 비극의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으니 그들의 당위성은 충분하다.
“어리석은 놈. 흥분한 나머지 한 치 앞밖에 보지 못하는 구나. 아니면 나를 그리도 어설픈 작자로 본 것이나.”
가늘게 접힌 눈끼풀 아래 잠긴 여군호의 눈동자가 어스 레하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마치 천지 분간 못 하는 철부 지 아이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두 달에 걸쳐 준비한 일이다.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 고,어느 순간에 시작될지 모르기에 시간을 분 초 단위로 나누어 철저히 안배를 해 두었지. 내가 그린 그림대로라 면 결단코 실패할 리가 없다. 또한 그 안에서 그자가 다치 는 일도 없을 것이고. 장차 태 가의 안주인이 될 이를 위험 에 노출시키면서 내가 그 정도 안전장치도 해 두지 않았 을 것 같으나.”
“태국영이 알게 되면 픽이나 그것을 이해해 주겠습니 다.,,
“그가 막 사는 놈처럼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지. 최소 한의 명분은 남겨 두고 손을 쓰는 머리는 갖추지 않았느
나. 일의 전말을 알게 되면 필시 나를 의심하겠지. 그러나 증거가 없으니 무턱대고 내게 하살을 쏘는 명청한 짓을 하 지는 않을 게다. 그 순간부터 놈은 우리 일족 전체를 상대 로 싸우거나,영원히 버림받아 고립되고 말 테니.”
“그런 걸 두려워할 남자가 아닙니다.”
“과거라면 그랬겠지. 그러나 그는 이제 전쟁이든 고립 이든 필경 두려워할 것이다. 가족들과의 유대감이 짙어지 고 서로를 묶고 있는 애정이 깊어진 지금은.”
이승도는 본성이 선량하고 그의 아이 또한 그랬다. 그 달콤한 감각에 한껏 젖어 있을 태국영은 그 완벽한 그림 을 훼손시킬 마음이 털끝만치도 없을 것이다. 어설픈 심증 만을 가지고 섣불리 움직일 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기에 여 기까지 온 것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몇 수 앞선 판을 읽어 보아라. 지 금 상황에서 이보다 더 이상적인 수가 또 있더나.”
“가주님의 이상은 저와 확실히 다르군요. 그분이 은태 를 얼마나 제 자식처럼 귀하게 키워주고 있는지,시름에 잠긴 어머니를 어떻게 위로해 드렸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분이 이러실 수는 없는 겁니다. 이제 겨우 삶의 즐거 움을 찾으신 어머니를 무슨 낯으로 보시려고 그러십 니까.
더는 대화를 나눌 이유도,그럴 시간도 없었다. 여제운 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바늘 끝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 럼 단단한 뒷모습이 빠르게 회의실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여군호는 열린 문틈을 향해 짧게 소리쳤다.
“막아라. 몇 군데쯤 망가져도 좋으니 절대 놓치지 마.” 회의실 밖은 순식간에 둔탁한 충돌음과 파열음으로 가 득 차올랐다. 그러나 여군호는 여제운이 기어이 모든 것 을 부리치고 달려나갈 것임을 예감했다.
간절히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 여 가의 남자는 그 집착 과 끈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필사적인 동기가 없는 다 수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제칠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예 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요란한 소동 끝에 결국 놓쳤다 는 보고가 돌아왔다. 여군호는 지끈거리는 미간을 꿈틀거 리며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현장이 수습되는 즉시 여홍재를 내게 데려와.”
여제운이 저렇게 길길이 날뛴 이유에는 두 가지의 가능 성을 꼽아볼 수 있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과장 되게 알고 있거나,여홍재가 멋대로 제가 그린 그림을 훼 손시켰거나.
여제운은 신중한 남자였다. 아무런 근거 없이 누군가 를 몰아붙일 성정이 결코 아니었다. 때문에 여군호는 아마
도 후자일 거라고 확신했다.
“예상 방향은.”
《놈이 가는 쪽을 보아하니 김정구가 가장 유력해. 김정 구한테도 감시 세워 놨으니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 해 올 거다. 너는 지금 어디쯤이나.》
“강변북로. 한남대로로 빠지려면 십 분 정도는 더 가야 할 거야. 김정구는 지금 뭐 하는데.”
《집안에 틀어박혀 있어. 오늘은 외출한 적 없다고 하 고.》
“거기 말고 의심 가는 목적지 더 없어?”
《현재로는 없어. 갑자기 방향을 이상하게 틀지 않는 이 상.》
비가 걷힌 고속화도로는 한산한 편이었다. 진입 때를 제외하면 막히는 법 없이 잘 뚫렸다. 곡예 같은 질주를 하 는 그의 양옆으로 무수한 차들이 뒤로 떠밀려 갔다.
《야,가주. 나갔다.〉〉
내내 끊지 않고 연결해 둔 휴대폰에서 태호연이 힘 있 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늘하게 찢어진 태국영의 눈이 가늘
게 좁아들었다.
《나갔단다,김정구 차가 방금.》
“따라붙어.”
《당연히 붙었어.》
태국영은 속력을 올리며 연신 이정표를 힐긋거렸다. 시 간 차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으나 도망치는 쪽 속력도 만 만치가 않았다. 지금 상태로는 최대 15분 정도 시간 차가 발생할 것이었다.
과연 그 시간을 이승도가 잘 버텨줄 수 있을까가 관건 이었다. 이승도는 주변을 경계하는 것은 수준급이지만 이 런 식의 위기대응 능력은 아직 검증된 바가 없었다. 《김정구는 아무래도 제 오피스텔로 가는 것 같아.〉〉
“오피스텔?”
《김정구가 최명욱이 대 주는 등대랑 만나는 장소지.》 김정구가 낚시일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될까. 태국영 은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 이성만으로 판단하려 노력했다. “그 오피스텔 주소 불러 봐.”
《바로 가게? 그러다 놈이 다른 곳으로 빠지면.》
“놈에게는 이 정도도 부담스러운 거리였을 거야. 처음 부터 내가 쫓을 걸 알고 계획한 일이니 충분히 리스크를 감당한 셈이지.”
《처음부터 알았다니?》
“죽이려면 그 병원에서 죽였을 거고,망가뜨릴 거였으 면 엠불런스를 습격해서라도 시간을 더 벌어서 더 확실히 처리했을 거야.”
이건 애초에 이승도를 해칠 생각까지는 없는,자신을 목표로 두고 그린 그림이었다. 태국영은 확신했다.
“길게 설명할 시간 없어. 주소부터 불러.”
김정구는 셋이나 되는 김 씨 일족 중에서도 세력이 가 장 작은 한 가문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호 기심이 많고 말썽이 많았던 그는 작년 성체가 된 이후로 여색을 밝히기 시작해서 온갖 문제를 일으켰다. 일족의 여 자는 물론이고 인간 여자들과 난잡하게 놀아나 그 추문이 끊일 날이 없었다. 머리라도 좋으면 다행인데 김정구는 설 상가상 충동적이고 단순하기까지 했다.
그의 부친은 입버릇처럼 한탄하곤 했다. ‘지유가 사내 아이로 태어났더라면 더 바랄 것이 없었을 것을.’하고.
김지유는 김정구의 손위 누이로,같은 뱃속에서 나온 것이 맞나 싶을 만큼 똑똑하고 야무진 여자였다. 냉철하
고 이성적이며 상황판단도 뛰어난 편이었다. 미모와 지성 을 모두 겸비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성별은 태어나면 서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
김지유는 그에 늘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겉으로 표출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제 목소리가 이 세계의 고리타분 한 고정관념을 굳게 지킬 것이 자명한 부친의 의사를 꺾 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년 또 어딜 나가니?”
갑자기 다급하게 옷을 챙겨 입고 나가는 김정구에게, 김지유는 한심한 눈초리를 꽂으며 물었다. 김정구는 어린 애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상관 말라고 쏘아붙였다. 김지유 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위층으로 사라졌고,김정구는 신발을 신고 나가 차에 몸을 실었다.
시동을 걸고 순식간에 차고를 나선 그는 최대한의 속도 로 골목을 빠져나가 차도로 접어들었다. 손짓은 다급했고 심장은 빠른 고동을 울렸다. 몇 분 전에 받은 전화 한 통 이 모처럼 집에 틀어박혀 학업에 열중하던 그를 이렇게 쉽 게 밖으로 끌어냈다.
「최가 형제한테 아쉬운 소리 하기 싫지 않나.」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기계음이 많이 섞여 있는 것이 변조를 거친 듯했다. 김정구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무슨 헛소리야. 너 누구나?」
「내가 누군지는 알 필요 없고,내가 갖고 있는 게 원지 궁금해하는 게 너에겐 좋을 텐데.」
「갖고 있는 거?」
상대가 웃는 기척이 들렸다. 궁금하지 않다면 다른 놈 에게 넘기도록 하지,하는 말에 저도 모르게 ‘그게 뭔데.
’하고 물었다. 그가 말했다.
「내가 우연히 등대를 하나 발견했어. 그런데 나는 딱히 이게 필요하지 않아서 말이야. 누굴 줄까 고민하다가,요 즘 가장 뻔질나게 최가랑 접촉한다는 네가 떠올랐지. 어 때,이거 관심 있나.」
사기꾼의 속삭임처럼 허무맹랑하고 기이한 제안이었 다. 제 신분을 밝히지도 않은 자가 제 행동반경은 어찌 알 고 있으며,그가 어떻게 등대를 발견했는지,왜 굳이 제가 가지지 않고 남에게 넘기려는지,하나도 이해가 가질 않았 다.
「발리 대답해.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네가 싫다고 하 면 난 이걸 최명욱의 다른 고객에게 넘길 거다.」
그의 말을 온전히 신뢰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거의 완 벽하게 불신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의 말이 거짓이 고 그저 자신을 농락하려는 짓거리라고 할지라도,잠시 헛
걸음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스스로를 설득시켰다. 애써 잊고 있던 갈증이 기다렸다는 듯이 메마른 목을 불태웠다.
「좋아. 잘 결정했어. 그럼 이건 네 펜트하우스 오피스 텔에 버려두고 가도록 하지.」
사실일 리가 없었다.
「하나만 명심해. 적어도 네가 오피스텔에 도착하기 전 까지는 그 누구의 전화도 받지 마.」
「왜지?」
「내가 이걸 너한테 넘기려 한다는 걸 누군가 알아챈 것 같으니. 미행까지 조심하지 않으면 한 번 손에 넣어보기 도 전에 배앗기게 될 거야.」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행운이 뜬금없이 제게 굴러들어 올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말투는 묘하게 차분하고 진 중해 덧없는 기대가 자꾸만 가슴을 간질였다.
김정구는 자꾸만 바싹 말라 오는 입술을 혀로 할았다. 만약 허탕을 치게 되면 그 길로 최명욱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당장 시간을 잡아 달라고 할 셈이었다. 핸들 잡은 그 의 손이 금단증상에 시달리는 중독자처럼 가늘게 흔들렸
끼이이이??
지하주차장의 마찰력 높은 바닥이 날카로운 비명을 토 해냈다. 사위는 어두웠다. 인위적인 불빛들은 모두 사라 져 있는 상태였다. 한 층에 한두 가구만 사는 고급 오피스 텔이라 인적 없이 매우 적막하기까지 했다.
차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센서는 고장 난 듯 암흑을 지 켰다. 은밀하게 몸을 숨기기 위한 여홍재의 짓이 분명했 다-
여제운은 과속방지턱에도 속력을 늦추지 않았다. 쿠 응,쿠응,충격을 다 흡수 못 한 차량이 험악하게 진동했 다. 보조석에 끈으로 고정시켜 둔 랩톱 컴퓨터가 좌석 앞 으로 떠밀린 채 곧 쏟아질 듯 아슬아슬한 움직임을 보였 다삼관없었다. 더 이상의 감청과 GPS 추적은 불필요했 다. 여홍재의 위치는 이미 확인했고 꼬리를 잡기 직전이었 다. 이 건물 어딘가에 있는지 그것만 찾으면 되었다.
김정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여제운은 여홍재가 왜 이곳에 와 있는지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이 승도를 납치했으며 이 오피스텔에서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여진희의 도움을 받아 여홍재의 휴대폰에 해킹프로그 램을 심어둔 것으로 너무 방심했다. 수상한 낌새가 없더라 도 그의 동태까지 수시로 확인을 했어야 했다. 여군호가 여홍재에게 독립적인 권한을 주었을 것이라고는 상상치 못했던 제 불찰이었다.
아마 태국영의 의문스런 전화가 없었더라면 자신은 여 전히 여홍재의 출장에 의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었다. 혹시 나 싶어 여홍재의 행적을 살피면서 곧장 깨달았다. 그의 동선은 출장지에서 벗어난 지점들을 떠돌며 기이한 움직 임을 보였다. 또한 목적지가 바뀔 때마다 뭐에 쫓기는 마 냥 매우 신속했다.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결 정적으로 여군호와의 설전을 통해 대강 일이 돌아가는 전 말을 알게 된 거였다.
건물 내부로 통하는 입구를 찾아 거칠게 코너를 돌았 을 때였다.
번쩍.
정면에서 강렬한 빛이 점등했다. 동공을 파고드는 헤드 라이트 불빛이 짐승의 이발처럼 번득였다. 바늘처럼 돋아 난 청각에 엔진의 으르렁거림이 걸렸다. 맞은편 끝에 서 있던 차가 돌진해 왔다.
여제운은 싸늘하게 눈을 치떴다. 꽉 다문 어금니에서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그는 그대로 액셀을 밟았다.
서로를 마주 보는 두 대의 차량은 흥분한 황소처럼 날 뛰며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여제운은 경고하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뭉개주지.”
3초. 2초…….
속으로 가속을 계산하며 충돌 시간을 가늠했다. 그리 고 ‘1 초’라는 단어가 뇌리를 스쳤을 때,여제운은 왼쪽으 로 빠르게 핸들을 꺾으며 브레이크를 끝까지 밟았다.
끼이이익一
잔뜩 혹사당한 타이어가 지면 위에서 짓눌렸다. 급회전 한 차는 그대로 방향을 바꿔 주차되어 있는 차를 들이받았 다. 에어백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상대도 브레이크를 밟 는 소리가 들렸다. 곧 차체 뒤편에 거대한 충격이 쏟아졌 다.
쿠우응!
차체가 심하게 흔들리며 반대 반향으로 돌아갔다. 에어 백이 사방에서 압박해 들어왔다. 바깥에서는 연달아 엄청 난 파열음이 터졌다. 여제운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안전벨 트를 풀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고무 타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제 차를 들이받고 2차
적으로 벽을 들이받은 상대의 차는 본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우그러져 있었다. 물론 제 차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미친 새끼!”
터진 이마를 부여잡고 보조석으로 넘어와 차에서 내린 것은 여홍재였다. 여제운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그에게 걸 어가 멱살을 틀어쥐었다. 불덩이 같은 눈빛이 허공에서 격 돌했다.
“어디 있는지 말해.”
“병신새끼.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이 건물 다 뒤집어 놓기 전에 말하라고. 몇 층이야.”
여홍재는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그거 꽤 봐줄 만하겠는걸. 할 수 있으면 해 보시지 그 래. 격분한 종주님께서 네게 어떤 처분을 내릴지 나도 궁 금하거든.”
여제운의 강직한 입술이 비틀렸다. 비아냥거리는 목소 리를 내뱉는 모가지를 부러뜨리고 싶어 손마디가 근질거 렸다. 그러나 몸싸움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건 어리석은 짓 이었다. 이 순간에도 저를 추적해오는 자들은 빠르게 가까 워지고 있을 터였다.
“너는 내가 여 가의 역사서에서 완전한 조연으로 밀려
나는 순간을 간곡하게 바라고 있겠지.”
여홍재는 대답 없이 음습하게 웃었다. 여제운은 틀어 쥔 옷깃을 거칠게 부리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그게 과연 너에게 꼭 득만 된다 자신하지는 마 라.,,
“뭐라는 거나.”
“아무런 책임감도 없어진 훗날의 내가 어떤 가면을 쓰 고 널 찾아갈지 나조차도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이지.”
여홍재의 피 흐른 뺨이 일그러졌다. 냉혈 동물의 무기 질 같은 눈에 살기가 어렸다. 여제운은 그 격랑 같은 분노 를 무시한 채 뒤돌아 바람처럼 달려갔다.
“흥분하지 마,애송이. 네가 그렇게 안달하지 않아도 지 금 태국영이 제 마나님 구하려고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 는 중이니까.”
이를 갈듯 말하는 여홍재의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았다. 여제운은 어깨너머 고개를 돌렸다. 바람처럼 다가와 선 여 홍재가 귓가에서 속삭였다.
“병신 같은 짓거리 관두고 기척이나 숨기라고. 태 가랑 대대적으로 전쟁을 치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사방이 고요하고 어두컴컴했다. 무심결에 몸을 일으키 려다 상체가 풀썩 꺾여 바닥으로 쓰러졌다. 당황해서 몸 을 비틀었으나 등 뒤로 묶인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발 목도 단단하게 옭아매진 상태였다. 그제야 기절하기 직전 의 상황이 바짝 깨어난 뇌리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호흡이 가파른 곡선을 타고 올랐다. 인중으로 쏟아진 숨결은 입을 막은 테이프 위에서 매끄럽게 미끄러져 내렸 다. 기이하게도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처럼 몸이 불덩이 같 았다.
여기가 어디지?
이승도는 불안한 마음에 우왕좌왕 주변을 살펐다. 그러 나 어둠이 너무 깊고 광대해 사물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바닥에 뺨을 대고 비벼보니 매끄럽고 차가운 감촉이 느껴 졌다. 마치 대리석 같은 촉감이었다.
거친 호흡을 애써 정돈했다. 두려움에 몸이 떨렸으나 언제까지 공황상태에 빠져있을 수만은 없었다. 침착하게 견디고 있으면 머지않아 태국영이 자신을 찾아낼 것이었 다-
마지막 통화가 이어진 상태였으니 크게 걱정할 것은 없 었다. 이승도는 태국영을 무한히 신뢰했다. 만약 찾아내
지 못하면 어쪄지,하는 불안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 다. 그러나 그런 의심은 제 정신건강에 조금도 도움이 되 지 않기에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침착하게 눈을 굴려 사방을 살피자,조금 전까지 발견 하지 못했던 가느다란 빛을 발견했다. 이승도는 온몸을 움 직여 빛이 보이는 방향으로 바닥을 기어갔다. 얇고 빳빳 한 환자복이 서걱서걱 차가운 소리를 흘렸다.
묵직한 것에 머리를 부딪쳤다. 이승도는 그것에도 뺨 을 대고 비볐다. 딱딱한 것이 고급스러운 가죽으로 덮여있 었다. 소파로 추정되었다. 그렇다면 역시 여기는 누군가 의 주거공간이었다.
이리저리 몸을 틀어가며 겨우 빛에 닿았을 때,이승도 는 사방이 어찌 그리 어두웠는지 알 수 있었다. 암막 커튼 이 아주 치밀하게 창을 덮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리로 커 튼 한쪽을 밀어내자 흐린 빛이 기다렸다는 듯 득달같이 실 내로 몰려들어왔다.
이승도는 몸을 돌려 빛살 스민 실내를 훑어보았다. 크 림색 대리석 바닥이 청명하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제 가 있는 곳은 소파와 티 테이블이 있는 응접실이었다. 놀 라울 정도로 넓은 응접실과 통으로 붙어 있는 다이닝은 미 닫이 중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지나치게 깨끗해 생활감이
언뜻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었다.
어떻게든 손에 묶인 것을 풀어보려 노력했으나,어찌 나 단단하게 동여매 뒀는지 조금의 틈도 낼 수가 없었다. 결국 포박 풀길 완전히 포기한 채 간헐적으로 목울음만 흘 렸다. 태국영이 제 냄새를 감지할 수 있는 반경에 들어오 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초조함에 입 안이 말라갔 다.
삐익.
이승도는 소스라치며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현관문 의 잠금이 풀리는 소리였다. 태국영이라면 저렇듯 정중하 게 들어올 리가 없었다. 실낱같이 품고 있던 희망이 점점 희박한 불씨만 남기고 사그라지려 했다.
조급한 발소리가 복도를 순식간에 헤치고 나왔다. 자연 광 속으로 낯선 남자가 출몰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본능 적으로 몸이 굳었다. 남자의 눈으로 기이한 안광이 번득 스쳐 지나갔다. 그 전류 같은 시선이 뱀의 똬리처럼 전신 을 으스러뜨릴 듯이 휘감았다.
어떻게 해야 도?. 국영아,나 어떻게 해야 돼.
날짐승의 거친 향기와 그들이 제게 흘려보내는 특유의 매혹적인 향기가 섞였다. 그에게서는 유독 비린내가 짙게 풍겼다. 터질 듯한 심장 고동이 목까지 치밀어 올랐다.
국영아. 난 널 믿어. 분명 내게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나를 찾아내 줄 거야. 날 이 무서운 상황에서 구해주고 뜨 겁게 안아줄 거야. 나는,국영아. 너만 믿고 있을게.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무릎을 굽혀 앉았다. 가늘게 떨리는 손이 뺨으로 다가올 때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맹수를 대하는 직업병이 한계치까지 발휘되어 꿋꿋하게 평정을 유지했다.
뜨거운 체온이 연속적으로 뺨을 쓸어내렸다. 손길이 누 적되어갈수록 테이프로 봉해진 입술은 제어를 벗어나 부 들거렸다. 남자가 광휘 도는 미소를 지었다.
“진짜였어. 너,정말등대구나.”
이승도는 숨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누가……
남자는 그리 말하다가 제풀에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아 무래도 상관없다는 투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정말 내 것이 생겼어.”
남자,김정구는 그것이 못내 기뻤다. 살갗을 파고드는 청량한 냉기가 갈증을 부수었다. 이것은 등대만이 줄 수 있는 환락이다. 이제는 누구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도 제 가 원할 때마다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벅찬 희열감에 김정구의 얼굴에 물든 미소가 사특하게
짙어졌다.
“일단맛 좀 보자.”
김정구는 다짜고짜 이승도의 앞섶을 뜯어냈다. 서걱거 리는 옷자락이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찢어졌다. 단추 가 사방으로 튀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공포를 들키지 말 아야 한다는 생각은 위기감에 허무하게 홑어져버렸다.
최대한 몸을 웅크린 이승도는 어금니를 꽉 사리물며 발 버둥을 쳤다. 소용없는 반항이라는 걸 알면서도 몸을 틀 어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뒤에서 쑥 뻗어온 팔이 팔뚝을 붙들어 끌어올렸다. 하얗게 치아를 드러낸 그는 이승도를 번쩍 안아올렸다.
“년 앙탈이 있구나. 그것도 나쁘지 않아. 그것들처럼 시 체같이 늘어져 있는 꼴보다야 낫지.”
투정 부리는 애완견을 대하는 어투였다. 이승도는 모멸 감에 입술 안쪽을 씹어 물며 있는 힘껏 몸부림쳤다. 가볍 게 제압한 그가 방으로 들어가 이승도를 침대 위로 던졌 다-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었다. 순식간에 윗옷을 벗어 던 진 그가 범처럼 날아 몸을 짓눌렀다. 딱딱하게 굳은 눈가 로 요사스럽게 발간 혀가 다가와 척척하게 비벼졌다. 혐오 감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들었다.
“씨발…… 너 정말 죽여주는 냄새가 나. 그 닳고 닳은 것들보다 훨씬 더……
김정구는 너풀거리는 환자복의 앞섶을 세차게 어깨 뒤 로 넘겼다. 그리고 막 온전히 벗기기 위해 이승도의 손에 걸린 결박을 풀어내려던 때였다. 기쁨이 흘러넘쳐 광기까 지 보이던 그의 얼굴에 일순 싸늘한 표정이 내려앉았다.
“뭐야… 이미 다른 새끼들이 거쳐갔어?”
이승도는 숨 가쁘게 어깨를 들썩이며 반사적으로 고개 를 내렸다. 따가운 시선이 꽂히는 곳에는 딱 보아도 진한 정사의 흔적들이 낭자했다. 새겨졌을 당시의 발겠던 울혈 자국은 지금 자줏빛으로 농익어 있었다. 그것은 제가 보기 에도 하얗고 매끄러운 살결 위에서 무척이나 음란해 보였 다-
이승도는 공황상태에서 벗어나 재발리 고개를 끄덕였 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갈피를 못 잡는 이승도를 빤히 노려보던 김정구가 입에 붙은 테이프를 거칠게 떼어냈다.
여린 표피가 함께 뜯겨 나가며 뜨끔한 통증이 느껴졌 다. 그러나 그것에 신음을 내지를 여유가 없었다.
“난 태국영이랑 결혼할 사이야.”
그의 열렬한 주시에 얼핏 의아함이 깃들었다. 그는 무
심결인 듯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태국영?”
이승도는 재발리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이 혼란스러 웠으나 덧붙일 말을 망설이지 않았다. 하얗게 질린 입술 이 파들파들 떨렸다.
“내게 조금이라도 손대면 국영이가 가만있지 않을 거 야. 나는 그가 평생을 맹세한 그의 짝이니까.”
김정구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이승도가 불규칙 하게 내뱉는 숨만 아니었으면 완벽한 정적이었을 것이다. 반응 보인 그의 모습에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이승도는 두려움을 누르고 오연하려 애썼다.
“깜박 속을 뻔했네.”
침묵 끝에 그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의혹을 굴리 던 머리를 깨끗하게 정리한 김정구의 눈에 번들거리는 위 협이 떠올랐다.
“태국영 그 새끼의 이름을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모르 겠지만,네 급조한 변명은 너무 허술해.”
김정구는 불현듯이 고개를 숙여 이승도의 목을 발았다. 이승도는 기겁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에게 물린 목을 미 친 듯이 비틀며 몸을 들썩였다. 그의 단단한 이가 벌주듯 쇄골을 콱 깨물었다. 이승도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으드득 씹힌 여린 조직에서 피가 울컥
배어 나왔다.
“확인해 보면 되잖아. 전화 한 통이면……!”
그는 잇자국을 따라 맺혀 나온 피를 할으며 비릿하게 냉소했다.
“웃기는 소리. 모르는 모양인데 태국영은 종가모임에 단 한 번도 암컷을 대동한 적이 없어. 미래를 약속하고 이 정도로 진하게 사랑을 나눌 정도면,넌 왜 여태껏 놈의 곁 에 서지 못했지?”
이승도는 말문이 막혔다. 그건 제가 거부한 탓이었다. 짐승들의 냄새가 자욱한 곳에 있는 것이 그저 불안하고, 그와의 미래를 설계할 만큼 제가 그를 사랑하게 될 줄도 몰랐기 때문에.
「불안하면 시집와.」
그 말을 처음 꺼내던 태국영은,모처럼 심술 없이 달짝 지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귀한 것을 대하듯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넘겨주고,포근한 입맞춤을 열꽃 핀 뺨 에 홑어 놓았었다.
“게다가 네 몸에서 태국영의 냄새라고는 조금도 나지 않는걸. 이게 가장 큰 증거지.”
지독하게 불운한 상황에 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아프지만 않았어도,그렇게 비 오듯 땀을 흘려
씻어내지만 않았어도,아니,애초에 진작 집에 돌아가기 만했었어도……
손목과 발목을 묶은 것이 풀려나갔으나 이승도는 어떻 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를 아무리 후려 패고 할퀴어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기력 을 앗아갔다.
환자복 윗옷이 마침내 완전히 벗겨져 나갔다. 그의 입 술이 게걸스럽게 목을 타고 내려가 가슴을 씹었다. 허벅지 에 짓눌린 그의 국부는 터질 듯 팽창해 있었다. 그 느낌이 말도 못 하게 역겨웠다.
거친 손길이 옆구리를 쓸다가 아랫배에 닿았다. 몸부림 에 침대가 출렁거렸다. 그의 손가락이 막 고무줄 바지를 내리려던 차였다. 어떤 이유에선지 그의 행동이 일거에 멎 었다. 먹히지 않을 걸 알면서도 이승도는 발악하듯 발을 휘둘렀다.
픽.
뒤따른 상황은 의외였다. 그의 옆얼굴을 직격한 정강이 에 찌르르 아픔이 느껴졌다. 이승도는 작게 헐떡이며 필사 적으로 창가를 향해 뛰었다. 내려다본 아래는 까마득히 멀 었다. 몸을 던지면 필시 죽을 것이었다.
강간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러나 이렇게 죽으려고 그리
도 악착같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었다. 저는 꼭 살아서 지 켜줘야 할 이들이 있었다.
두려움이 사라졌다. 이승도는 뒷걸음질 쳐서 창가를 벗 어나 돌아섰다.
“강간이든 뭐든 맘대로 해 봐. 이 쓰레기 같은 놈아.”
눈물이 날 것 같은 눈시울에 독기를 세우며 그를 똑바 로 노려보았다. 그때까지 영문 모르게 굳어 있던 김정구 는 흐리게 일그러진 낯으로 전혀 엉뚱한 소리를 했다.
“너……심장소리가나.”
“그럼 내가시체인 줄알았어?”
“…아니. 너한테서가아니라.”
미묘하게 일렁거리는 그의 눈동자가 느리게 아래로 떨 어졌다. 이승도는 무심코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렸 다.
“네 뱃속에서,아주 작은 게 뛰기 시작했어. 방금 전부 터.,,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고,그의 말뜻을 파헤친 순간 전신으로 오한 같은 소름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 승도는 숨을 멈췄다. 경직의 침묵이 한참 지속되고,다리 가 풀렸다.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빳빳한 재질의 환자 복 바지가 넝마처럼 구겨지며 바닥에 짓뭉개졌다.
이승도는 명하니 제 아랫배를 내려다보다 본능적으로 그 위를 한 손으로 감쌌다. 얼음처럼 차가운 손끝에 따끈 한 체온이 감겨 왔다. 떨리는 손아귀 안에 닿은 아랫배는 볕에 말린 솜이불처럼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두려움도 독기도 새하얗게 탈색된 뇌리로 문득 스쳐 지 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약 한 달쯤 전,나래가 출산했 던 날 태국영과 가진 섹스였다.
5% 미만이라더니,순 엉터리였다.
태이경을 가졌을 때에도 그랬다. 심각할 정도로 저체 온 증상이 왔을 때 제 배는 이렇듯 아기의 생존본능으로 뜨끈한 열기를 붐어냈었다.
아기…가…….
이승도는 두 손으로 배를 감쌌다. 김정구 역시 갈등하 듯 미간을 모은 채 굳어 있었다.
김정구는 그답지 않은 고민에 망설이는 중이었다. 이 제 막 심장이 뛰기 시작한 태아의 고동이 예사롭지가 않았 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인간 아기라면 이렇게 힘차고 강하 게 박동할 리가 없었다. 저것은 저희 일족의 씨가 분명했 다.
경종을 울리는 뇌리로 어느 순간부터 빗발치게 울리던 휴대폰을 떠올렸다. 미지의 공급자가 건넨 충고대로 그 전
화를 무시했다. 남자의 말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도리어 기 대가 강해졌었다.
저게 설마 정말로 태국영의 아기는 아니겠지.
김정구는 서둘러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배 들었다. 부 재중 통화는 수두룩하게 쌓여 있었다.
넋을 놓고 앉아있던 이승도의 눈동자에 기어이 물기가 차올랐다. 이승도는 화끈거리는 눈꺼풀을 질끈 내려 감으 며 소리쳤다.
“이 자식! 지금 안 오면 평생 용서 안 해!”
강간은 두려웠으나,노력하면 극복하지 못할 것도 없었 다. 폭력의 일부로 애써 자기암시를 걸면 어떻게든 될 것 이었다. 고작 이런 일로 태국영의 온건한 사랑이 흠집나 지 않을 건 분명했고,귀여운 아이들이 제 다친 마음을 어 루만져줄 것이었다.
그러나 아기는 아니었다. 생명은 끼지는 순간 돌이킬 수 없었다.
“제발,국영아. 지금 오면 용서해 줄게.”
이승도는 북받쳐 올라오는 설움을 더는 이기지 못했다. 감은 속눈썹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덮었다. 그때였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얼어붙은 공기를 진동했다. 이승도 는 젖은 눈을 돌려 소리가 난 방향을 명하니 응시했다. 저 만치 잿빛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유 리가 날카롭게 박살 나 있었다.
뻥 뚫린 창을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은 세찼 다. 눅눅한 머리카락이 맹수의 갈기처럼 거칠게 홑날렸다.
“국영아.”
태국영은 위협적인 파편을 짓밟고 한쪽 무릎만 굽혀 앉 아 있었다. 드물게 거친 숨을 내쉬는 그의 어깨가 가파르 게 오르내렸다.
헝클어진 머리를 방치해 둔 그의 눈이 느리게 움직였 다. 불같이 뜨겁고 집요한 시선이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이따금씩 섬뜩한 빛을 흘리다가 이윽고 낯선 잇 자국을 발견한 순간 잔혹하게 깨어졌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넋을 놓고 있던 김정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욕설을 뱉어낸 그가 태국영을 등지고 침 실 밖으로 튀어 나가려 했다.
그 순간 태국영을 중심으로 뜨거운 열기가 폭발했다. 그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크악!”
한 발자국도 제대로 떼기도 전,김정구는 그대로 태국
영의 손에 뒷덜미를 잡혔다. 순식간에 목뼈가 부러진 그 가 벽에 내동댕이쳐졌다.
쿠응.
다시금 끔찍한 비명이 새발간 핏물과 함께 허공에 부려 졌다. 단단한 콘크리트 벽이 무너져 내리며 먼지 입자가 보얗게 올라왔다. 돌 더미에 묻힌 남자가 컥컥 목을 울리 며 바르작댔다.
태국영은 경추골절로 괴로워하는 김정구를 파편들 사 이에서 끄집어냈다. 그리고 곧장 그의 가슴을 후려쳤다. 부러진 갈비뼈는 심장을 파고들었다. 시벌겋게 충혈된 김 정구의 눈이 검은자가 안 보일 정도로 돌아갔다. 끅끅거리 는 입에서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하지 마.”
이승도는 작게 속삭였다. 태국영은 거칠게 일그러진 숨 결을 토해내며 뒤돌았다. 이승도는 뺨을 적신 눈물을 말끔 하게 닦아내며 그에게 한 손을 뻗었다.
“이리오?,국영아. 나부터 데리고 나가 줘.”
“잠깐이면 돼. 눈 감고 귀 막고 있어.”
“눈 감고 귀 막으면 나는 모르겠지만,우리 아기는 알 거야.”
싸늘하게 무표정했던 태국영의 미간이 일순 꿈틀 미동
했다. 이승도는 굳어있던 안면을 억지로 움직여 그에게 미 소 지었다.
“우리 아기 생겼대. 나 좀 발리 집에 데려다줘.”
태국영은 장승처럼 선 채 이승도가 두 손으로 감싼 아 랫배를 빤히 보았다. 그 안의 심장 소리를 감지해 낸 그의 귀가 간헐적으로 꿈틀댔다.
가면 같던 표정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태국영은 일격으로 김정구의 가슴을 부쉈다. 늑골에 짓눌린 심장에 더 큰 손상이 간 그를 쓰레기처럼 돌 더미 위에 패대기치 고는 바람처럼 몸을 움직였다.
그는 이승도를 조심히 가슴에 품었다. 뜨거운 입술이 습기 남은 눈가에 맺혀들었다. 이승도는 그제야 온전히 밀 려온 안도감에 그의 팔뚝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더 늦었으면 진짜 용서 안 했을 거야.”
“알아. 그래서 미친듯이 달려왔어.”
“잘했어. 안 늦었으니까 용서해 줄게.”
태국영은 거친 날숨을 몰아쉬다 이승도를 안아 들었다. “눈 감아. 곧 성문이 올 거야. 그때까진 여기에 있어야 해.,,
가만히 눈을 감은 이승도를 안고서 태국영은 응접실로
나갔다. 환한 볕을 뚫고 걸어가는 움직임은 마지 제 집을 누비는 양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제 허벅지 에 이승도를 앉혔다.
“이제 눈 떠도 돼.”
이승도는 가만히 눈꺼풀을 올렸다. 태국영은 땀 젖은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입고 있던 셔츠 단추를 끌러냈 다. 벌어지는 셔츠 앞섶 사이로 단단하게 뭉친 근육들이 사나운 곡선으로 물결쳤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감정들은 지독하게 따갑고 매서 웠다. 화가 나 있었지만 그것을 풀 곳이 없는 그의 눈동자 는 이따금씩 난폭하게 일그러졌다.
‘‘파,,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격랑 치는 감정들을 능숙히 숨겼 다. 이승도는 양순하게 팔을 벌렸다. 그의 몸을 감쌌던 셔 츠가 제게 옮겨왔다. 태국영은 아기 옷 입히듯이 단추까 지 하나하나 채워주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에 가시 돋쳤던 신경이 무디게 녹아내 렸다. 심적 여유를 찾은 이승도는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열 었다.
“미안해. 내가 괜히 고집부려서……
“어디든 가도 된다고 했던 건 나야. 놓친 내 잘못이고.”
태국영은 가면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정하지만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이 정도로 풀어질 것이 아 닌가. 이승도는 위기에서 벗어나자마자 제 경호원들의 안 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저,국영아. 내 잘못도 있고,실수할 수도 있는 거니
까……■,,
하필 그때 태국영의 휴대폰이 울렸다. 태국영은 더 듣 지 않겠다는 듯이 곧장 전화를 받았다.
“올라와서 저거 수거해.”
한마디가 끝이었다. 곧이어 현관문이 부서지며 남자들 이 들어왔다. 셋 다 낯이 익었고 그중에서 태성문은 특히 나 그랬다. 눈이 마주치자 세 남자가 동시에 허리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누구에게 하는 인사인지 알 수 없었지만,이승도는 괜 히 민망해 고개를 내렸다. 태국영이 이승도를 업고 일어 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수록 꼿 꼿하게 세운 그들의 몸이 굳어졌다.
태국영은 지척에서 멈추더니 잠시 동안 가만히 그들을 노려보았다. 남자들의 긴장한 목울대가 하나같이 크게 오 르내렸다. 불안해진 이승도는 국영아,하며 그를 달래었
다. 태국영이 말했다.
“내가 원래는 너희 세 놈 만나자마자 대가리를 깨 주려 고했는데.”
세 남자는 숨을 멈추면서도 태국영에게서 시선을 빗기 지 않았다.
“너희 형수가 임신해서 산 줄 알아.”
경색되어 있던 세 쌍의 눈이 일제히 화등잔만 해졌다. 이승도는 쏟아지는 시선에 멋쩍어져서 태국영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축하드립니다,형수님.”
태성문이 활짝 웃으며 건넨 말을 시작으로 줄줄이 축하 인사가 쏟아졌다. 이승도는 더 민망해져서 모기 날갯짓 같 은 소리로 네,네,만 반복했다. 태국영이 손사래를 치며 그들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됐고. 저 새끼나 잘 실어다 놔.,,
태국영은 지상으로 내려가 삐뜰게 세워둔 차에 몸을 실 었다. 아래는 갑작스런 폭발에 동요한 인간들이 웅성웅성 모여들어 있었다. 누구도 허공으로 치솟은 태국영을 보지 못했는지,안에서 무슨 일이 생겼다고만 알고 있는 것 같 았다.
태국영은 유리 세공품을 대하듯 조심조심 이승도를 보
조석에 앉혔다. 운전석에 몸을 실은 그가 뒤늦게 ‘많이 놀 랐지.’하고 물었다. 이승도는 솔직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괜찮아. 놀랐던 거 너 보니까 다 없어졌어. 너 안심시켜주려고 하는 거짓말 아니야.”
기어봉 위에 얹힌 그의 손을 가져와 뺨에 댔다. 네가 있 으니까 정말 괜찮아,하며 웃었다. 태국영은 가만히 뺨을 어루만지다가 그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에서 잠깐 쉬다가 가.”
“…하지만 애들一”
“네가 더 중요해. 어차피 너 없을 시간이니 아파도 견디 는 게 당연하고.”
그는 단호하게 말하고 기어를 옮겼다. 가까운 호텔로 향해가는 그의 차는 평소보다 더 천천히 도로를 달렸다.
이승도가 무사히 구출된 것을 확인한 뒤 태호연은 모처 럼 직접 움직였다. 전무후무한 가문의 안주인一아직은 예 정이지만一 납치 사건에 태 가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이 번만큼은 태국영이 무슨 미친 짓을 해도 막을 생각이 없었 다. 설사 그 상대가 여 가처럼 영향력 있는 가문이어도 개
의치 않을 것이다. 이건 그냥 넘어갈 수도 없으며,그냥 넘 어가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태호연은 가장 먼저 증거들을 수습했다. 이승도가 잠 시 입원해 있던 병원 CCTV 원본,납치범이 버리고 간 차 량,태성문이 붙잡은 김정구의 차량과 휴대폰까지 압수했 다-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납치범을 찾을 방 도는 없었다. 모든 증거에서 그의 신원을 알 수 있는 실마 리가 발견되지 않았다. 철저하게 준비된 계획이 아니라면 이토록 완벽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놈은 김정구에게 직접 이승도를 넘긴 게 아니 라 번거롭게 오피스텔을 정전시키고 경비를 뚫어가며 이 승도를 버려두고 갔다. 자택에 있었던 김정구가 감시당하 고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거였다.
태호연은 차에서 내려 셔츠 단추를 하나 풀어냈다. 성 큼성큼 걸어간 그가 김정구의 본가 담벼락을 훌쩍 넘어갔 다. 무례한 방문을 하면서도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정 원을 손질하던 고용인 한 명이 비명을 질렀다.
태호연은 그녀를 무시한 채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굳 건히 닫힌 현관문이 그의 손에 의해 뜯겨 나갔다. 뜯어낸 문짝을 한쪽으로 던져버린 그는 구듯발로 느긋하게 실내
에 들어섰다.
홑어져 있던 고용인들은 불길함을 느낀 듯 멀찍이 모여 들고 있었고,다급한 발소리가 내려왔다. 김정구의 손윗 누이인 김지유였다. 도대체 이 무슨 짓이나 따지고 물을 틈도 없이 그녀는 계단 한가운데에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본능적으로 큰일이 생겼구나 직감한 눈치였다.
“김지유 양. 나 알지?”
태호연은 빙긋 웃으며 물었다. 김지유는 밀랍을 바른 듯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하고 현명 한 여자라는 평판이 많았으나 그래 봐야 아직 스물둘이었 다. 태호연의 단단한 전신에서 넘쳐흐르는 살기가 그녀의 몸으로 달라붙어 경련을 불러왔다.
“아빠 안 계셔?”
“…히,회사에 계시는데요.”
“아참. 지금 대낮이지.”
부드럽게 휘어진 태호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도 흥분 한 나머지 그 기본적인 것을 깜박 잊고 있었다. 지금은 다 들 그놈의 징글징글한 가업에 정신없이 치이고 있을 시각 이었다.
“여기서 기다릴 테니 부모님 오라고 해.”
태호연은 마치 제 집 안방을 누비듯 여유롭게 걸어와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김지유는 용기 내어 확신에 찬 질 문을 던졌다.
“정구가 무슨 사고를 쳤나요?”
태호연의 입가에 픽 가벼운 웃음이 걸렸다.
“염병하게 큰 사고를 쳤지. 그 새끼가 국영이 애인을 건 드렸거든.”
김지유는 경악한 얼굴로 숨을 멈췄다. 다른 문제도 아 니고 여자를,그것도 태국영의 여자를. 아무리 막 사는 녀 석이었지만 그 정도로 명청하게 굴 리가 없었다.
“무,무언가 오해가 있었을 거예요. 아무리 철이 없어 도 국영 씨 여자를 건드릴,아,…아닐 거예요.”
“안타깝지만 놈은 태국영에게 현행범으로 딱 걸렸어. 현장에서 도망치려던 놈은 지금 개처럼 붙들려서 구금되 어 있는 처지고. 뭐,놈은 국영이 애인인 줄 몰랐다면서 발 버둥을 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용서받진 못할 거야. 국 영이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 새끼가 정말로 우리 제수씨 를 강간할 뻔했거든.”
“그러니까 되도록 발리 튀어오라고 해. 꼬리 자르고 몸 별 기회는 줄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태호연은 너그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태국영은 근처 호텔을 찾아 체크인을 했다. 샤워도 마 다하고 침대부터 찾아 서로 엉켜들었다. 깊은 애무 없이 그저 부둥켜안은 채 입을 맞췄다. 태국영은 김정구가 남 긴 약간의 자국들을 거의 물어뜯듯 키스해 가며 없애 버리 고 나서야 진정했다. 품 안의 이승도는 그가 안정적으로 등을 토닥일 때가 되어서야 배가 고프다고 털어놓았다. 태 국영은 메뉴판을 가져와 내밀었다.
“골라 봐. 먹고 싶은 게 없으면 나가서 먹어도 되고.” 이승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뉴판을 유심히 읽어 내렸 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앉아 어깻죽지 에 턱을 걸쳤다. 그의 손은 평소 리듬을 되찾은 이승도의 심장 부근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이승도는 좋아하던 한식 메뉴와 샐러드류를 살폈으나 그리 당기는 게 없었다.
“나 스테이크 먹을래.”
“스테이크?”
“응. 여기 와규 스테이크랑 로브스터,그리고 양송이 수 프하고 리코타 치즈 샐러드도 같이.”
그걸 다 먹겠다고?
태국영은 잠시 의아한 눈을 했지만 이내 납득하고 고개 를 끄덕였다. 태아가 오늘부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면 이 제부터 한창 영양분을 공급받아 나머지 장기들과 신체를 만들기 시작할 때였다. 그런 상식을 빠삭하게 꿰고 있으면 서도 잠시나마 의식하지 못했던 것은 태이경을 가졌을 때 이승도의 식사량이 크게 늘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룸서비스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둘은 함께 샤워를 했다. 태국영은 손수 타월로 물기를 닦아주고 배달된 새 옷까지 입혀주었다. 이승도는 아기 다루듯 하는 그의 행동 이 조금 멋쩍었으나 그냥 내버려두었다.
룸으로 배달된 식사를 이승도가 한참 복스럽게 먹고 있 을 때,태국영은 진동하는 휴대폰을 들고 잠시 침실로 자 리를 옮겼다. 어,하고 전화를 받자마자 태호연이 먼저 입 을 열었다.
《김정구 가족들은 협조하기로 했다. 말이 새 나갈 시엔 몰살당할 각오해야 된다고 단단히 협박해 뒀어.》
“대 이을 유일한 장남이 지금 끔찍하게 고문당하고 있 다는 말은 했어?”
《증거까지 다 들이대니 항의할 생각도 안 드는 것 같더 라.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눈치를 보아하니 그 집 장녀한테 자리를 물려줄 생각인 것 같아.》
“뭐,그거야 내알 바아니고.”
태국영은 창턱에 가볍게 기대선 채 눈을 내리깔았다. 고민에 잠긴 듯 턱을 쓸어내리는 손짓이 느리게 반복되었 다. 잠시의 침묵 끝에 결단을 내린 듯 그가 담담하게 말했 다.
“종주한테 연락 넣어둬. 내가 사흘 뒤 오후 여섯 시에 댁으로 찾아가겠다고.”
〈?"사흘? 그렇게 발리?〉〉
행보는 이상치 않으나 그 시기가 생각보다 발라 조금 은 놀란 듯했다. 태국영은 혀를 차며 대꾸했다.
“승도가 둘째를 가져서 예정보다 발리 끝내야겠어.”
?……뭐!〉〉
수화부 건너편에서 정체 모를 경악으로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태국영은 차근차근 제 계획을 그에게 설명했다. 태호연은 오늘 일에 여전히 의구심을 느끼는지 질문이 많 았다. 일일이 대답해 주느라 시간을 꽤 허비해야 했다.
“아무튼 지저분한 것들 청소 발리 끝내고 우리 승도 다 시 자유롭게 나다니게 해야지. 너무 집에만 있으면 재 우 울증 와.”
《그래. 있는 힘껏 신속하게 끝내 보자. 제수씨 몸은 어
때? 많이 놀랐을 텐데.》
“괜찮아. 그래도 다행히 험한 꼴은 안 당해서 몇 대 맞 은 걸로 치려나 봐. 지금 기운 차리자마자 엄청 먹고 있어.
태국영은 말 나온 김에 잠시 근심했던 것을 입에 담았 다.
“겁 많고 걱정 많은 우리 승도 아기 나올 때까지 나 밀 어낼 게 뻔해서 내가 고민이 많아. 임신 중 관계가 일족의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뭐 그런 연구 논문 같은 거 있으면 다 긁어서 좀 보내 줘봐. 고작 섹스로 유산될 일은 전혀 없 다는 문구가 아주 강하게 박혀있을수록 좋아.”
《너 그게 큰일 앞둔 이 시기에 할 소리나?》
“왜 아나. 그게 지금 내 가장 큰 고민거린데.”
태호연은 어이없다는 듯 크게 혀를 찼다.
《일족에 대한 연구자료 같은 건 주치의한테 애기하면 자판기처럼 다 튀어나오니까 그쪽에 애기해,자식아. 좋 은 마음으로 뒤쫓아 다니면서 챙겨주니까 날 무슨 지 따까 린 줄 알아.》
“아하. 주치의,알았어.”
태국영은 순순히 수긍했다.
“김정구는 누구한테 맡겼어?”
《준호랑 경재. 그 둘이 놈한테 가장 원한이 깊을 테니
던져줬다. 제수씨 맞은편 집 있잖아. 그리로 찾아가면 돼■
“지들이 등신 짓거리해서 일 크게 만들어 놓고 원한은 무슨. 똥줄 타서 화풀이하는 건 상관없지만 죽이면 곤란 해. 나 갈 때까진 반드시 살려 두라고 해.”
《설마 그 정도도 조절 못 할 만큼 병신들이겠나.》
“나 이제 개들 안 믿어. 성문이 배고 가드 싹 바꿀 거니 까 괜찮은 애들 좀 골라 봐. 좀 이따가 또 전화할게.” 《그래.》
긴 통화를 끊고 나가자 식사를 끝낸 이승도가 뭔가 골 뜰히 생각에 잠긴 듯 명하니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설 마 저걸 진짜 다 먹을까 싶었는데 접시들은 아주 깨끗하 게 비어 있는 상태였다. 부족한 것보다는 그냥 먹다 남기 라고 볼로네이즈 스파게티에 돌솥비빔밥,디저트로 과일 과 케이크까지 주문했는데 그것까지 다 해치웠다.
평소 밥 한 공기로 적당히 식사를 끝내던 이승도의 식 사량을 생각하면 기함할 일이었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옆 자리로 다가가 앉으며 은근슬쩍 아랫배를 힐긋거렸다. 저거 너무 잘 먹네.
“저,국영아……■,,
읽을 수 없는 상념에 푹 파묻혀 있던 이승도가 머뭇대
며 말문을 열었다. 태국영은 응,하며 그의 머리칼을 홑어 놓았다.
“나 병원에 있을 때 링거 맞았는데,그거 아기한테 안 좋으면 어떡하지? 보통 임신 중이면 약도 잘 안 먹는다고 하잖아.”
유산이 잘 안 되는 것과 별개로 모체를 통해 공급받는 것을 성장에 쓰는 것은 인간들과 같았다. 중추신경계는 특 히 예민한 쪽이라 그것은 태국영도 장담할 수 없는 부분이 었다.
“병원에 전화해서 링거 성분들이 뭐였는지,IV주사는 뭘 놨는지 뽑아서 주치의한테 물어보라고 할게.”
그의 입에서 ‘괜찮아.’라는 말이 딱 떨어지지 않자 이승 도는 불안한 듯한 손으로 아랫배를 감쌌다.
“간호사가 그랬어. 정맥주사 놨는데 열이 떨어지기는커 녕 더 올랐다고. 이거 잘못됐다는 신호면 어쪄지.”
당장 비서진에 연락할 생각이었던 태국영은 행동을 멈 추고 고개를 기울였다.
“발열이 있었다고?”
“응. 열이 올랐대. 그리고 나 깨났을 때도 잠시 동안 몸 이 되게 뜨거웠어. 조금 있다가 가라앉긴 했지만.”
태국영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칼처럼 매끈한 눈썹 끝
이 슬쩍 위로 올라갔다. 이승도는 불안한 눈으로 그를 살 펐다.
“그건 좋은 신호야.”
그가 느린 어투로 뱉어낸 말은 뜻밖이었다.
“태아가 제 몸에 해로운 걸 스스로 정화했다는 뜻이라 고. 내가 담배를 피우면 체온이 올라가는 것과 비슷해.”
“…그런 거야?”
“그래.”
화색 돋은 얼굴에 확신을 내려주었다. 이승도는 확연 히 밝아진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태국영은 마주 웃어주면 서도 속으로 참 묘하다 생각했다.
갓 심장이 뛰기 시작한 녀석이다. 모체와 연결이 되어 있으니 당연히 민감하게 반응했을 테지만,벌써부터 저 스 스로 유해한 것을 정화하기 시작했다니 조금은 놀라도 될 법한이야기였다.
우리 둘째는 꽤 강한 새싹인가 보네.
설마 내 체질을 닮으려나,반갑지도 언짢지도 않게 추 측했을 때였다. 걱정을 덜어낸 이승도가 벌떡 일어나 팔 을 잡아끌었다.
“국영아. 이제 푹 쉬고 배도 채웠으니까 집에 가자. 은 태랑 이경이 보고 싶어.”
태국영은 가만히 이승도를 올려다보다 도리어 끌어왔 다. 얼떨결에 허벅지에 걸터앉은 이승도가 고개를 갸웃했 다. 태국영은 은근히 허리를 쓰다듬으며 뺨에 입술을 붙 여 왔다. 그게 마치 조금만 만지게 해 달라고 조를 때 같아 서 이승도는 바짝 긴장했다.
“승도야. 서방님이 부탁하나 할게.”
“…원데?”
역시내
이승도는 꼭 거절해야지 야무지게 다짐했다. 그러나 그 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완전히 예상외의 것이었다.
“한동안 일 관두고 내 집에 들어와 있어.”
이승도는 불쾌하다기보다는 조금 당혹해서 미간을 찌 푸렸다. 육안으로도 배가 불러 오면 어쩔 수 없이 관둬야 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이렇듯 초장부터 집에 들어 앉히려들 줄은 예상치 못했다.
“혹시,나 오늘 납치될 뻔했던 것 때문에 그래?”
뻔했던 것이 아니라 됐었다. 그러나 태국영은 굳이 그 오류를 지적하지 않았다. 진심이건 방어기제가 작용했건 이승도가 오늘 일을 미수로 결론지었다면 반가운 일이었 다. 적어도 정신적인 고통이 그리 크지 않음을 방증하는 것일 테니.
“나 계속 위험해?”
“어쩌면.”
이승도는 마침내 핵심을 짚었고,태국영은 더 숨기지 않았다. 숨길 때가 아니었다.
“나는 당장 내일부터 네가 상상하지 못할 만큼 더 철저 하게 가드를 붙일 생각이야. 인간들 많은 곳에서만큼은 비 교적 너를 자유롭게 풀어놔 주고 싶었지만,한동안은 그 게 정말 힘들어.”
그 어떤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해도,인간들이 많은 곳 에서 버젓이 큰일을 칠 만큼 간이 부은 일족은 없었다. 정 보통신 분야가 발달하면서 인간들의 입소문은 빛보다 빠 르게 번졌다. 목격자들을 일일이 찾아가 기억을 조작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는 말이었다.
“네가 밖에 있을 때면 그게 어디든 네 지척에 가드를 붙 일 거야. 오늘 일을 예로 들자면 네가 들어간 강의실까지 딸려 보낼 거고,심지어 네가 들어간 화장실 문 바로 밖에 서 대기를 시킬 만큼 거의 빈틈없이 너를 주시하는 눈이 항상 너를 따라다니게 될 거야. 그건 네가 생각하는 것 이 상으로 불편한 일이 되겠지. 그래서 나는 지금 강요가 아 닌 부탁을 하는 거야.”
“…그정도로 내가 위험해?”
“글쎄. 지금도 너를 직접적으로 노릴 만큼 간 큰 놈이 많지 않을 거라는 건 분명해.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 으니 예방하자는 차원이긴 하지만,무엇도 확신하지 못하 는 것도 사실이고.”
“길게 끌지 않을 거라는 건 약속할게.”
진중하고 진실 된 어조였다. 이승도는 조금 시무룩하 게 눈을 내렸다. 어머니 영향으로 수의사가 되기로 결심했 지만,저는 이 직업을 매우 좋아했다. 그저 일이라고만 생 각하는 게 아니라 동물들을 돌보는 게 진심으로 행복했다.
“둘째 나오고 나서는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다시 취직 하겠다고 해도 터치 안 할게.”
태국영은 이승도의 얼굴을 양손에 감싸 살살 달래듯 만 졌다.
“어차피 몇 달 차이잖아. 태교하는 셈 치고 이경이랑 여 가 꼬맹이랑 하루 종일 재밌게 놀아. 네가 돌보던 동물 들 보고 싶어지면 언제든 내가 데려가 줄 테니까 말만 하 고.,,
억지를 부릴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태국영이 그간 제 생활을 최대한 지켜주려 노력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강수를 놓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는
것도. 이런 상황에서 위험을 불사해가며 직장생활을 하겠 다고 우기는 것은 모두에게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알았어. 내일 가서 사직서 낼게……
이승도는 침울하게 대답했다.
“진짜? 엄마 우리 집으로 이사 가요? 정말?”
태이경은 깜짝 선물을 받은 듯이 환한 표정이었다. 그 큰 눈망울이 기대와 환희로 반짝반짝했다. 아이가 기뻐하 는 것을 보니 조금 심란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 듯했다. 빙그레 웃는 사이 태국영이 대신 대답했다.
“내일 승도 출근한 사이에 여기 사는 짐승들이랑 꼭 필 요한 것들만 골라내서 본가로 옮겨다 놓을 거야. 승도는 퇴근하면 내가 바로 본가로 데려갈 거고.”
가만히 듣고 있던 여은태가 소매를 물어 당겼다. 이승 도는 녀석의 배를 만져주며 태이경을 바라보던 눈을 내렸 다.
[선생님,나도?]
여은태는 설렘 깃든 어투로 물어 왔다. 이승도는 순간 적으로 이게 무슨 소린가 어리벙벙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데려가는 거지?]
“년이 집사는 짐승아니나?”
태국영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거
야 맞는 말이긴 한데,어째 저렇게 들으니 지능 낮은 잡 짐 승들의 하향 평준화 속에 낑겨든 것만 같아 묘하게 불쾌해 졌다. 여은태는 뾰로통하게 눈가를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참 말 예쁘게 한다니까. 봐도 봐도 선생님이 아깝다, 정말.]
뒤늦게 질문을 이해한 이승도가 작게 웃으며 여은태의 머리를 두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당연히 우리 은태도 가야지. 은태도 선생님 아들이나 다름없는데.”
그제야 기분 좋아진 녀석이 세차게 꼬리를 흔들며 그 큰 덩치를 밀어붙였다. 응,응,신나게 대답한 녀석이 평 소 애교부릴 때처럼 이승도를 앞발로 밀어 넘어뜨리려던 때였다. 태국영이 잽싸게 목덜미를 움켜쥐고 뒤로 끌어당 겨 제지했다. 여은태가 털을 세우며 짜증을 냈다.
[아,또 왜 이래! 이 성격파탄자야!]
“우리 승도 지금 임신 중이야. 앞으로는 네 힘 생각 안
하고 막 깔고 뭉개다가 걸리면 혼난다/
맹세코 아무 생각 없이 깔고 뭉갠 적은 없었다. 그저 조 금 굴리고 아프지 않을 만큼 머리로 들이받고 그 정도로 애교를 부린 게 다였다. 그러나 그런 항의를 할 심적 여유 가 없었다. 댕그랗게 커진 눈이 소리 없이 굳어들었다. 가 장 먼저 반응한 것은 태이경이었다.
“지,진짜?! 엄마 뱃속에 진짜 아가 있어?”
이승도는 괜한 쑥스러움에 살짝 발긋해진 눈가만 긁어 댔다. 태이경은 발을 동동 구르더니 아예 주저앉아 머리 를 푹 숙였다. 어떻게든 아랫배에 얼굴을 들이밀려 낑낑거 렸다.
여은태를 쓰다듬어 주느라 바닥에 무릎 꿇어앉았던 이 승도는 몸을 일으켜 섰다. 그러자 태이경이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꼭 끌어안아오며 뱃가죽 위에 귀를 붙였다.
자그마한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예븐 빛깔이었다. 이승 도는 부드럽게 웃으며 녀석의 뺨을 쓰다듬었다.
[드,들린다…… 진짜들려.]
쫑긋 선 귀를 꼼틀대던 여은태가 먼저 명하니 반응했 다. 그 직후 태이경 역시 몸을 바들바들 떨며 소리쳤다.
“정말 여기 아가가 들어있어! 심장이 콩당콩당 해!” 이승도는 두 아이들의 반응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저는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잡아내지 못하는 소리를 정확
히 탐지해냈다. 제 뱃속에 들은 아기도 이 아이들과 다르 지 않을 것이었다. 태이경은 으아앙,하며 후다닥 떨어져 나가더니 태국영의 허벅지에 매달려 엉덩이를 콩콩 흔들 었다.
“아빠아! 아기가! 안녕,하는 것 같아요! 콩당이 안녕 하 는 거 맞아요?”
“아닐걸”
대꾸는 현실적이고 냉정했으나 태이경은 조금도 기죽 지 않았다.
“언제 나와요? 몇 날 지나야 나와요?”
“여섯 달은 더 있어야 나와.”
“여섯 달이나? 조금 더 일찍 나오라고 하면 안 돼요?”
“나도 심정 같아서는 한두 달 일찍 나오라고 닦달하고 는 싶지만,아기는 다 크지 않은 상태로 나오면 아프게 돼.
아주 약간 실망했지만 태이경은 금세 방실방실 웃으며 다시 이승도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이승도는 연신 신기한 듯 배에 귀를 갖다 붙이는 녀석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 다. 한 손으로는 녀석의 작은 머리를 살살 쓰다듬고,다른 손으로는 여은태가 내민 앞발을 차분히 주물러 주었다.
이토록 따뜻하게 반겨주고 기뻐해주는 아이들 곁에 둘
러싸여 있으니 험난했던 오늘 하루가 마치 꿈인 것 같았 다. 뱃속 아기 덕분인지 감기도 씻은 듯 나아 몸마저 가분 했다.
“우리 이경이 좋아?”
“응! 나 동생 생계 너무 좋아요! 내가 많이 예뻐해 줄게 요. 엄마,나 너무 기대도H. 우리 동생 엄청 예블 거야. 그
치,형아?”
태이경은 감격해서 울 것 같은 얼굴로 방긋방긋 웃었 다. 극도로 흥분한 나머지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난리 였다. 이번엔 여은태의 목덜미를 꼭 끌어안고 발긋한 얼굴 을 마구 비벼댔다. 여은태는 조금 새침하게 녀석을 내려다 보더니 마주 고개를 슥슥 비비적대며 대답했다.
[응. 예블 거야. 그래도 너가 더 예쁘겠지만.]
“아니야. 느낌에 내 동생이 더 예블 것 같아.” [현실적으로 너보다 더 예븐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건 불가능해.]
“아닌데. 형아도 나보다 예쁘잖아.”
[내가 예뻐?]
묻는 여은태의 눈빛은 유난히도 반짝거렸다.
“응. 엄청 예뻐! 우리 엄마 다음으로 예뻐!”
[태국,아니 너희 아빠보다 더?]
“우리 아빠는 우주에서 제일 멋지고 근사한 거지.”
[…난안 멋져?]
“형아는 아직 어린이잖아. 그래도 나중에 열다섯 열일 곱 이렇게 되면 아빠만큼 멋지게 될 거야.”
[맞아. 솔직히 내가 너희 아빠보다 약하긴 해도 더 멋지 게 자라긴 할 거야. 정말로.]
놀고들 있네,태국영이 기막히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 다. 태국영의 성교육에 저도 한 힘 보태야겠다고 생각하 던 이승도는 그를 책하듯 슬쩍 흘겨보았다. 눈이 마주치 자 그가 능청스레 웃으며 다가와 뺨에 키스를 했다.
“애들이랑 놀고 있어. 난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까.”
“어딜?”
이승도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물어 왔다. 태국영 은 조금,아주 조금 당황했다. 무심결에 제 옷깃을 꼭 부여 잡은 손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멋대로 움직이려는 눈을 단 속했다.
이승도는 지금 긴장하고 있었다. 태국영 자신이 그를 놔두고 자리를 비우는 것을. 그것을 이승도가 자각하게 하 고 싶지 않았다. 맘 같아서는 이대로 품에 안고 내내 체온 을 전해주고 싶었지만,이번 일 만큼은 남에게 맡겨둘 수 가 없는 사안이었다.
“삼십 분이면 도?. 애들 밥 먹이고 씻기고 놀다 보면 금 방 올 거야.”
괜찮은 척하지만 그렇지가 않은 거다. 금방 씻어내 버 린 것처럼 의연하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아직 무서워하고 있는 거였다. 이승도는 응,하면서도 셔츠 깃을 단단히 틀 어쥔 손을 놓지 않았다. 정말 말 그대로 무의식적인 행동 인 것 같았다. 그래서 태국영은 이승도의 허리를 꽉 조여 안으며 고개를 비틀어 내렸다.
‘‘왜? 서방님 잠깐 어디 가는 것도 보내기 싫어? 내내 우리 승도 옆에서 물고 발고 애교도 부리고 그럴까?”
‘‘……됐어. 얼른 나가.”
이승도는 퉁명스럽게 태국영을 밀어내며 대꾸했다. 이 승도는 발개진 귀를 감추지도 못한 채 양옆으로 아이들을 대동하고 다이닝으로 사라졌다. 마치 도망치듯 다급한 발 걸음이었다. 태국영은 조금 짠하게 그 뒷모습을 전송하다 가 뒤를 돌았다.
자동 센서가 밝혀지듯 그의 얼굴에 명암이 또렷해졌다. 부드러운 가죽구두를 신은 그의 발소리가 그의 표정처럼 냉엄하게 허공을 울렸다.
쇳소리 나는 대문을 밀고 나왔다. 저 거슬리는 소음도 오늘로 끝이었다. 태국영은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태성문
의 숙소로 향했다. 키홀더를 꺼내 대문과 현관을 차례로 열었다. 아까부터 제 귓가에만 지긋지긋하게 울리던 고통 의 비명이 조금 더 짙어졌다.
“오셨습니까,형님. 예븐 아기 배고 계신 우리 형수님 맛난 거 많이 사드리셨습니까?”
응접실에서 홀로 게임기에 열중해 있던 태성문이 가장 먼저 튀어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열심히 비위를 맞추려 활짝 웃으니 길쭉한 보조개가 움푹 파였다. 한 대 후려치 고 싶을 만큼 해맑은 얼굴이었다. 허나 능력도 좋고 눈치 도 좋은데다가 오늘 일에 직접적으로 실수한 것이 없어 나 무라는 것도 영 내키지 않았다. 태국영은 흐느낌 섞인 절 규가 흘러나오는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그래. 먹고 남기라고 배 터질 만큼 사줬는데 그걸 다 먹더라. 오는 길에도 생전 안 먹던 떡볶이를 다 먹고.”
“입덧은 안 하십니까?”
“아직은.”
“다행입니다. 제 어머니는 저 가지고 한삼 개월을 입덧 해서 아주 쭉쭉 말라갔다고 하더군요. 태일에서 입덧 가라 앉히는 약을 개발하면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이참에 하 나 개발하라고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거 개발해도 안 팔린다. 회사가 바본 줄 아나. 투자
가치 없는 일에 돈을 쏟아 붓게.”
“네? 왜 안 팔립니까? 저희 어머니는 그런 약 있으면 당장 드셨을 텐데요?”
“일족을 상대로 한 약장사는 슈퍼문으로 충분해. 그건 생존이 걸린 거니 비싼 돈 주고 가져가는 거고. 임신을 한 인간 여자들은 그런 약이 있어도 거의 안 먹을 텐데 뭐하 러 개발을 해.”
“인간 여자들이 왜 안 먹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제 몸 괴로운 거 해결해주겠다는데.”
태국영은 떡볶이에 이어 매운 닭발을 먹을까 말까 고민 하다가 결국 포기하던 이승도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인간들의 모성이라는 게 그래. 괜찮다고 말해도 제 아 기한테 혹시라도 뭐 안 좋은 영향 갈까 걱정되는 건 일단 피하는 거지.”
“그딴 모성이 밥 먹여 준답니까. 모체가 튼튼해야 아기 도 튼튼한데. 차라리 약 먹고 입덧 멈추고 잘 먹는 게 아기 한테도 도움이 될 텐데요.”
물론 태국영 역시 그런 말을 했었다. 그러나 이승도는 극구 고개를 저었다. 인간들 미신 같은 것에 그런 게 있다 고 했다. 임신 중에 닭을 먹으면 아기 피부가 닭살처럼 나 온다고 하면서.
태국영은 굳이 더 설득할 이유를 느끼지 못해 그냥 입 을 다물고 방문을 열었다. 코끝을 찌르던 피비린내가 득달 같이 몰려와 후각을 꽉 움켜쥐었다. 미간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질 정도였다. 한 손의 엄지와 검지로 콧등을 꽉 짓 누른 태국영이 다른 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냄새 나 죽겠네. 너희 나와.”
태준호와 태경재가 소리 없이 방을 나갔다. 태국영은 환기 겸 방문을 열어둔 채 안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 다. 김정구는 울분 쌓인 둘로 인해 이미 고깃덩어리나 다 름없는 상태였다. 쇳덩이에 짓눌린 듯 바닥에 짓눌려 있 는 그의 몸을 발끝으로 살짝 굴려 바로 눕혔다.
끄흑,끄흑,재생력도 현저히 떨어진 놈은 숨 쉴 기력 도,피를 펌프질해 낼 여력도 없는 상태였다. 만나면 개떡 이 되도록 다져놓으리라 결심했는데 이렇게 되면 손을 대 기조차 끼려졌다. 피 냄새가 배면 이승도가 분명 킁킁거리 다가 의문 어린 눈을 할 것이었다. 거짓말을 할지언정 슬 쩍 방향을 틀어 어물쩍 넘기는 제게는 별로 좋지 않은 상 황이었다.
태국영은 서너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무릎만 굽혀 가볍 게 앉았다.
“너도 참 나만큼 팔자가 세다. 왜 그렇게 명청하게 태어
나서 이런 거지 같은 일에 표적이 됐어.”
김정구가 함몰된 안구를 느리게 움직였다. 한쪽은 아 예 완전히 으스러져 심장이 말끔하게 복구되지 않는 이상 회생이 어려운 상태였다. 둘 다 시력이 온전하지 않을 것 은 당연했다. 태국영은 아이를 어르듯 다감한 목소리로 속 삭였다.
“지금부터 내가 몇 가지 물을 거야. 네가 아는 범위에 서 성실하게 대답만 하면 편히 죽게 해 줄지도 몰라. 내 말 알아들어?”
김정구는 온몸의 구명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무기력하 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태국영의 입매가 완만하게 휘었다.
“그럼 처음부터 가 보자. 오늘 무슨 연락을 받고 오피스 텔로 갔어?”
김정구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자백은 아주 충실했 다. 몇 번의 변조를 거친 듯한 목소리가 그의 갈증을 교묘 하게 자극하며,일단 한 번 가 봐도 크게 손해될 것 없다 는 투로 설득을 했다고 했다. 그 와중에도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는 받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다고. 딱히 예상 을 벗어나는 말들은 아니었다.
“그래서 네가 강간한 등대는 몇 명이야?”
제가 알기로 두 명밖에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묻자 김정
구 역시 두 명이라고 대답했다.
“그 계집은,지금 생각해도 미친 거 아닌가,그렇게 생 각할 만큼,큰돈을 주고 샀어. 처녀였거든. 내가 직접 아 다를 떼 줬지.”
가만 듣고 있던 태국영의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사나 운 곡선으로 꿈틀거렸다. 그러나 시력저하가 온 김정구는 미처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맛이 좋았어?”
김정구는 질문의 의도를 쉬이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너무 힘겹고 고단해서 뭐든 발리 끝냈으면 싶었다. 그래 서 그는 더욱 솔직해졌다.
“죽여줬지. 너도 알지 않아……? 한 번도,뚫려본 적 없 는…… 그 길을 내가 개통했다,이 말이야. 냄새도 죽이 고,조임도 죽이고,하아…싫다고 우는 그 얼굴도 좋았어.
태국영은 굽혔던 무릎을 펴 성채처럼 견고한 몸을 곧 게 세웠다. 김정구는 벌레처럼 바르작대며 쿨럭거렸다. 놈 에게 용건은 끝났다. 태국영은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아 나 갔다. 문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태성문이 곧장 따라붙으 며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그에 태국영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너희들이 죽이고 싶은 방법으로 죽여. 저 새끼는 그래 도 돼.”
편하게 죽여준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 다고 했지.
저건 곱게 죽을 가치도 없는 놈이었다. 비슷한 실수를 저질러 이승도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빈 처지에 비난할 자 격이 없을지도 모르겠으나,적어도 저는 완벽한 심신 상 실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먼저 죄책감과 자학에 가까 운 괴로움을 느꼈다.
내가 이토록 아끼는 너를. 다시는 상처 주고 싶지 않았 던 너를.
차라리 내가 죽어줄까,그렇게 진심으로 물을 만큼.
“너희들 이리와.”
태준호와 태경재가 슬금슬금 다가와 섰다. 태국영은 열 받친 손을 허공에 치켜들었다가 방향을 바꾸었다. 이 심리 상태로 놈들의 머리통을 갈기면 정말로 죽을지도 몰 랐다. 허약했던 윤 가 놈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으니 차 마 손이 나가지 않았다.
설마 그 정도로 일격에 명을 달리할 줄 어찌 알았을까. 동족들이 생각보다 허약하구나,그런 깨달음을 얻은 사
건이었다. 그래서 태국영은 적당히 힘을 실어 그들의 허벅 지를 번갈아 후려 찼다. 대퇴부가 으스러진 둘이 힘없이 바닥에 스러졌다. 그들은 신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신음 을 참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시 말해. 임신한 너희 형수 아니었으면 둘 다 나한 테 죽었어. 저 새끼 처리하자마자 돌아가. 가드는 다른 놈 들로 교체될 거야.”
두 남자는 재발리 고개를 숙였다. 태국영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멀찍이 선 태성문에게 손짓했다. 태성문은 지 극히 찜찜하고 껄끄러운 표정을 하고서 좁은 보폭으로 다 가와 섰다. 저도 혹시 후려 맞을까 전신에 긴장을 불어넣 은 채였다.
“애네 뒤로 올 애들 다 너보다 어린 애들일 거야. 네가 대가리니까 알아서 잘 통솔해.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다 네 책임 거 분명히 숙지하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오모나 별일이네,그런 표정으로 눈만 끔뻑이던 태성문 이 이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역시 사랑합니다,형님.”
“꺼지라고.”
태국영은 매정하게 돌아서서 피 냄새 자욱한 집을 나섰 다. 콰앙,닫히는 대문 앞에 서서 이 피 냄새를 어쩔까 싶
어 잠시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그는 가만히 청력을 돋워 집안을 살펐다. 참방참방 물소리가 두 아이들의 밝은 목소 리와 어우러졌다.
一엄마. 이사 가면 우리 하루 종일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죠?
一응. 우리 이경이 안기고 싶을 때 언제든 안아 주고, 낮잠 자고 싶으면 같이 낮잠 자고 그래도 돼.
一선생님,나도?
一당연하지. 우리 은태도 선생님이 계속 안아줄게.
一응!
一와아아!
태국영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달려갔다. 대문을 따고 들어가 마당에서 훌쩍 몸을 띄웠다. 한 팔로 가분하게 2 층 욕실의 창턱에 매달린 그는 나머지 손으로 창문을 열 어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자리에서 훌훌 옷을 벗고 샤워 를 했다.
오늘 밤은 임신 초기 험한 일을 당할 뻔했다는 핑계로 이승도를 또 격리시켜 저 혼자만 품에 안고 잘 생각이었 다. 태국영은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기 레버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