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6/25)

8.

   YT전자는 YT그룹에서 가장 많은 매출이익을 가져오 는 효자 계열사로 한 해 매출액만 약 180조 원에 달한다. 그중 90%는 해외시장에서 벌어들이고,그 해외매출의 1/3은 미주지역에서 발생한다.

   여홍재가 YT전자의 미국판매법인 YT US의 총괄 마케 팅 매니저로 부임한 것은 4년 전,그의 실제 나이 27세일 때였다. 대외적으로 32살로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꽤 파격적인 발령이라는 논란이 많았다. 당시 그는 실제 업무능력이 증명되지 않은 햇병아리 명문대 박사에 불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대 이상으로 눈부신 사업수완을 발휘했 다. 부임한 첫해 매출액을 22%나 껑충 끌어올렸고,그 후 로도 꾸준히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 2년 연속 미국 가전 시 장에서 점유율 1 위를 달리고 있었다.

   낙하산 인사라는 오명은 당연히 자연스레 사그라졌다. 오명을 불식시킨 것분만 아니라 조만간 마케팅 부장으로

의 승진도 기대해봄 직했고,더 나아가서는 이 성공적인 이력을 발판으로 금의환향한 그가 YT그룹의 핵인 YT전자 의 주요 임원직을 단박에 꿰차지 않을까 전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속사정을 모르는 외부인들 의 시선이었다. 가문 내에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얼자 로 태어난 주제에 어설프게 비범해 일찍이 변방으로 내쫓 긴 왕자와 다름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차기 가주로 확정 된 여제운을 중심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지배구조 체제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홍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여제운에게 패배했다 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군호의 직계자식이 아니라는 그 하 나의 이유로 말이다. 야망이 큰 남자는 제힘으로 바꿀 수 없는 태생의 한계 앞에서 무수히도 불행했다. 저 스스로 가 여제운을 위협할 만한 존재라서 권력의 중심에서 멀리 내쳐진 거라고 늘 이를 갈았다.

   보좌관 하나 없이 뉴욕에 홀로 착륙했던 날,그는 YT US 본사 건물을 올려다보며 다짐했다. 완벽하게 응집된 여군호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면,세대전 환의 혼란을 공략하는 수밖에 없다고.

   즉,여홍재는 여제운이 권력 승계를 받느라 어수선한 틈을 노릴 생각이었다. 여군호의 눈치를 보느라 바븐 가문

의 원로들은 저에게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권력 구도의 변 혁이 찾아왔을 때 굳이 반대하지 않을 정도는 된다는 말이 었다.

   기회라는 것은 일생에 한 번쯤 꼭 오기 마련이다. 결벽 적인 여제운도 실수라는 것을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를 놓치지 않으면 된다. 작은 불씨에 기름을 부어 대형화재 로 만들면,제아무리 탄탄한 세습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 다.

   그렇게 권력에 관심이 없는 듯 가업에 매달린 지 4년, 드디어 작은 실마리를 묶은 기회의 하살이 제 집 대문에 꽂혀 들어왔다. 여홍재는 제 눈을 의심하며 몇 번이고 모 니터를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가문 전용의 인트라넷에 대대적인 공고가 걸렸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여제운이 차기 가주 권한을 박탈당했 고 여타 여 가의 남자들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는 것 이었다. 또한 여 씨 성을 쓰는 강하고 능력 있는 자라면 누 구도 차기 가주로 발탁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시사했다.

   여군호가 직계 승계를 포기했다면 제게도 충분히 가능 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그 공고를 본 여 가의 가솔들 이라면 가장 먼저 여제운을 대신할 적임자로 여홍재 자신 을 떠올렸을 것이 분명했다.

   여홍재는 차분하게 마음을 정돈하며 수시로 명상에 잠 겼다. 기대보다 빠르게 찾아온 기회가 성큼 제게 다가서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그 바람이 좌절 앞에 서 무너지지 않을 것 역시.

   공고가 게시된 지 이틀 뒤,YT US 본사로 여군호의 직 속 비서진 중 한 명이 찾아왔다. 그는 정중한 어투로 여군 호의 전언을 풀어놓았다.

   수일 내로 인사개편이 있을 것이니 지금부터 업무에 차 질이 없게 현지 생활을 정리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말대 로 나흘 뒤 인사발령 공고가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발표되 었다. 여홍재는 팀장에서 본부장으로 승진이 되어 9월 1 일부로 한국 본사로 발령이 났다.

   《잘해야 한다. 이게 마지막 기회다 생각하고 덤벼야 해. 너도 알겠지만 아우는 절대 만만한 놈이 아니다. 그 머 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항상 경계하고 의심해라.〉〉

   부친은 십 수 번도 넘게 같은 이야기만 했다. 젊었을 적 이미 여군호와의 싸움에서 처참하게 패해 완전히 권력 구도에서 밀려났던 부친은 자식을 통해서라도 다음 대에 영광을 엿보고 싶은 마음이 큰 듯했다.

   여홍재는 그런 부친의 욕심에 어느 정도 공감을 했지 만 지긋지긋한 면도 없지 않았다. 장남으로 태어난 그가

동생에게 왕좌를 배앗기지만 않았어도 여제운이 편안하 게 가져간 그 자리는 제 것이 되었을 거였다. 제가 이렇게 돌고 돌아 기회를 얻은 것도 다 부친이 무능했기 때문이었 다. 뜨거운 감정이 울컥 가슴을 울렸다.

   “설교라면 그만 좀 하세요. 숙부님이 만만하게 볼 남자 가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아니까!”

   여홍재는 일방적으로 통화를 끝내 버렸다. 신경질적으 로 던져진 휴대폰이 벽에 부딪혀 바닥을 나뒹굴었다. 액정 이 박살 났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귀국과 동시에 새 전 화를 받게 될 테니.

   거실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선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최고급 가구와 집기로 가득했던 드넓은 맨션은 휑하기 그 지없었다. 거실에 남아 있는 것은 3인용 가죽 소파분이었 다-

   인공조명을 모두 끼 어둑한 바닥으로 흐릿한 불빛이 흔 들렸다. 여홍재는 창가로 걸어가 옷가지를 꽉꽉 눌러 먹 인 트렁크에 털썩 걸터앉았다.

   출국은 당장 내일이었다. 회사 일도 마음가짐도 모두 가 깔끔하게 매듭이 지어졌다. 그럼에도 어떤 이유에선지 계속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것은 어쪄면 묘연한 불안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여군호가 무슨 생각으로 저를 다시 불

러들이는 것인지,그 의도의 모호함이 계속 뇌중을 어지럽 게 하는 것이었다.

   천재일우의 기회인가,제 발목을 완전히 잘라 놓을 덫 인가.

   지금은 당연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를 겁낼 생각은 없다.

   권태는 일족을 녹슬게 하는 가장 큰 주범이었다. 혈기 도 야망도 순식간에 좀먹어버리는 곰팡이였다. 여홍재는 벗어날 수 없는 권태의 그물이 서서히 자신을 조여 오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깨끗이 닦인 유리창에 입김이 번졌다. 화려한 불빛이 수시로 달라지는 부연 농도 너머에서 눈물처럼 흔들렸다.

   숨 가븐 일상을 반복하는 이 도시도 이제 오늘로 끝이 었다. 여홍재는 좁은 모국에서 벌어질 격전에 피가 끓었 다. 다음 대 여 가의 가주는 반드시 제가 거머쥐고 말 것이 었다.

   한 달 동안 가솔들을 풀어 수집한 자료는 그 양이 방대 했다. 거의 50장은 족히 넘을 두께였고,이 모든 것이 최

가 형제들과 윤봄이로부터 비롯된 일들을 가감 없이 기술 한 것들이었다.

   태호연은 중간보고 없이 오늘 이 결과물만 손에 쥐었 다. 그간 오픈 이노베이션으로 인한 해외출장과 임상 실 험 허가 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 때만 해도 상황이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예상치 못했었 다.

   두툼한 문서를 한 장 한 장 넘겨갈 때마다 태호연의 눈 은 불쾌감으로 찌푸려졌다. 불쾌감이 누적되어감에 따라 곧 그 안에는 분노가 뒤섞였고,마지막 장을 덮을 때가 되 어서는 마침내 근심으로 변질되었다.

   이걸 국영이한테 알려줘도 되려나.

   태호연은 태국영의 반응이 매우 우려스러웠다. 아주 심 각하게 걱정이 되어 마음이 어수선하고 불안했다. 윤봄이 와 여제운의 도청 자료를 들었으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겠 지만,그 실상이 이 정도일 줄은 그조차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태국영은 이 보고서를 완독하자마자 이 안에 한 번이라 도 이름이 적힌 놈들을 모조리 없애고도 남을 남자였다. 그는 그로 인해 태 가의 일원들이 무고하게 흘릴지도 모르 는 피의 양도 불이익도 전혀 관심이 없는 놈이니까.

   그러나 태호연은 아니었다. 명예를 중시하지는 않았으 나 이 세계에서 제 가문이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최소한 도는 지켜주고 싶었다. 제 가족이 소중한 만큼 태국영과 태국영의 가족들이 소중했고,그리 친밀한 왕래가 없는 가 솔들의 집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태 가의 여자들 이 시집을 간 방계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딸 가진 부모 마음이 다 그렇다. 아무리 시집을 간 이후 로는 남의 집안 호적에 오른다지만 그 아이가 친정으로 인 해 조금이라도 눈총을 받는 것을 좋아할 부모는 없었다.

제 딸인 태현리도 이제 어엿이 한 집안의 안주인이 될 수 있을 만큼 커 버렸다. 제가 살아있는 한 어느 남자와 결혼 을 해도 기죽어 살 일은 없겠으나,그것은 제 능력만이 아 닌 가문의 힘도 어느 정도 뒷받침이 되어 주어야만 가능 한일이었다.

   이 경악스런 문서의 핵심주축인 윤봄이조차도 윤 가가 몰락하기 전까지는 평판이 꽤 괜찮은 편이었다. 특별히 매 력적인 화두에서 등장할 일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부정적 인 화젯거리의 도마에 오를 일도 없었다. 이 세계의 비정 한 불문율이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그녀를 간악하게 좀먹 은 것이었다.

   심정적으로는 윤봄이가 약간은 가여웠던 적도 있었다.

그 입 잘 못 놀린 형제만 아니었어도 제 가족이 제 눈앞에 서 도륙당하고,제 가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지 켜볼 일도 없었을 테니.

   “하지만이건너무심해.”

   태호연은 싸늘하게 중얼거리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 다. 손 안에 들어차는 온도는 마치 극렬하게 분노했을 때 의 열기와 닮았다.

   사회적인 요건으로 망가진 이들은 모든 세계에 차고 넘 쳤다. 그러나 그 모든 이들이 잔악한 범죄를 저지르며 살 아가지는 않는다. 동정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들의 아픔분 이다. 그들이 지난날을 핑계로 무고한 이들을 고통의 사슬 로 옭아매 죽인 잔악함이 아니라.

   차라리 윤봄이가 처음부터 끝까지 태국영만을 타깃으 로 삼았더라면 태호연은 이렇듯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리어 그 계집 참 배포도 크다며 평소처럼 농담 얹은 경 고를 태국영에게 건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 기록된 것들은 정도를 넘어섰다.

   등대를 찾아낸 것이 문제가 아니라,그들을 어떻게 이 용했는지가 관건이었다. 그들의 그물에 걸린 등대 두 명 은 원치 않는 매춘은 물론이고,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통해 번식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둘 중 누

군가는 한 번의 출산이 있었던 것 같은데,그에 관한 상세 한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아기에 관한 것을 발견 하지 못한 것을 보면 아마도 죽었지 싶었다.

   “우리 형님,생각이 많아 보이네.”

   의자에 앉아 벽을 바라보는 채로 한참 고뇌하던 태호연 은 불현듯이 등 뒤에서 급습하는 목소리에 간이 떨어질 듯 놀라고 말았다. 그는 재발리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 아보았다. 본능적으로 바짝 돋아난 시야에 걸린 것은 다 름 아닌 태국영이었다.

   “아이 놀래라. 형님 놀라니까 나까지 심장이 벌렁거리 잖아.”

   태국영은 그 특유의 말투로 능청을 떨었다. 속눈썹이 풍성한 눈매가 가느다랗게 휘어있는 모습은 마치 연인을 유혹하는 교태와 닮아 있었다. 태호연은 칠색 팔색하며 버 럭 고성을 내질렀다.

   “기척 좀 하고 들어오H 기습이라도 하나? 암살해? 뭐 가 그리 소리 소문도 없어!”

   “내가그랬어?”

   태국영은 무구한 낯으로 고개를 갸웃해 보이다가 이내 깨달음을 얻은 양 아,하며 빙긋 웃었다.

   “그래서 비서들이 날 개똥 취급하듯이 본체만체했구나.

웬일로 독재자 반기는 열혈신도들처럼 기립 인사를 안 하 나 싶었어. 놀랐다면 미안. 나 요새 개인적으로 미행 좀 하 느라 이게 버릇이 돼 놔서 그런가봐.”

   아무렇지 않게 그는 소파에 몸을 묻어 다리를 꼬았다. 태호연은 생리적인 거부감에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낌새도 없이 뒤를 잡힌다는 느낌은 말도 못하게 거북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한다고 들어먹을 놈도 아니었고,그를 상 대로 열등감을 느끼는 것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다는 걸 잘 알았다.

   태호연은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두툼한 서류를 한 손 에 들고 태국영의 맞은편에 앉았다. 키폰을 눌러 비서에 게 차 두 잔을 주문한 그가 빈정거리듯 입술을 비틀었다.

   “네 가솔들이 그리 못 미더우나. 알아서 탈탈 털어서 이 렇게 다 정리해 뒀는데 뭘 네가 직접 나서.”

   “그들이 못 미더워서가 아니야. 그냥 직접 기본기 쌓는 운동선수처럼 좀 돌아보고 싶었어.”

   탁 던진 서류뭉치를 태국영이 집어 들었다. 태호연은 차마 더 붙일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잠자코 입을 다물 고 있었다. 잠시 뒤 비서가 들어와 차 두 잔을 놓으며 눈짓 으로 태국영을 슥슥 가리켜 보였다. 도대체 저게 언제 들 어 왔냐고 묻는 눈치였다. 태호연은 득도한 노인처럼 지그

시 고개를 한 번 젓기만 했다. 비서는 입을 비죽거리며 태 국영을 못마땅한 듯 힐금 보고는 집무실 밖으로 사라졌다.

   그 뒤로는 거의 완벽할 정도의 침묵이 차곡차곡 쌓여갔 다. 간혹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그 정적의 균형을 잠시 깨 뜨릴 분이었다. 태호연은 고급스러운 차를 천천히 즐기며 힐긋힐긋 태국영의 안면을 살펐다. 미리 사찰을 했었다면 이 자리에서 새삼 그 폭력성을 드러낼 일은 없을 테지만, 아무래도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대략 10분이 넘어갈 즈음이 아닐까 싶었다.

   타악.

   태국영은 아주 느긋하고 담담한 표정으로 문서 뭉치를 내려두며 나른한 눈을 들었다. 그 입술에서 나올 말을 기 다리고 있었으나 의외로운 침묵이 이어졌다. 태호연은 찻 잔을 받침에 놓아두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명분은 중요해.”

   태국영의 무생물 같은 낯짝은 변화가 없었다. 태호연 은 야트막하게 한숨지으며 팔짱을 꼈다.

   “네가 이놈들을 깨끗하게 조질 수는 있어도,지금 상태 로는 절대로 그게 정당화될 수 없어. 종주는 분명 그렇게 판단할 테고,모두가 그에 동의하겠지. 태 가는 고립될 거

다. 그리고 서서히 도태되어 가겠지. 태 가의 피를 받은 모 든 이들이 인간들의 세상을 방황하게 될 거야. 영원히 섞 이지 못하는 곳에서,누구에게도 말 못할 비밀들을 산처 럼 떠안은 채로. 외롭고 고통스럽게 일생을 살다 죽어가겠 지.,,

   태호연이 내펼친 것은 지극히 정론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이경이,그리고 앞으로 태어날지도 모르 는 네 아이의 미래가 될 것이고.”

   간계에 소질이 없어 정공법을 선호하는 태 가의 남자다 웠다. 태국영은 그처럼 팔짱을 끼고서 희미한 미소를 입 술 끝에 매달았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글쎄,그건一”

   “이 새끼들이 포섭하는 세력이 커질수록 우리 승도는 정말 천박한 피를 타고났다는 인식이 팽배해질 텐데,내 가 이 새끼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아?”

   “아니. 그렇게 될 일은 없어.”

   “어떻게 확신해?”

   “여군호가 그걸 절대 방관할 리가 없으니까.”

   태호연은 단언했다.

   “여군호는 그렇게 저속한 문화가 제 일족을 파고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거야. 분명 그 속내를 빤히 들여다보 면 무언가 조치를 취하겠지. 우리가 찾을 수 없는 명분을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그 시커먼 속을 가진 늙은이를 믿어?”

   “그만큼 통찰력이 깊고 넓게 내려다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는 게 아니니까. 인정하긴 싫지만 여 가에 그런 지도 자의 피가 많이 태어난 것도 사실이고.”

   고대부터 종주의 직위는 거의 여 가의 가주가 차지했 다. 찝찝할 만치 속이 불투명하긴 했으나 그만큼 이성적으 로 전체 그림을 보는 자는 저희 일족에서 흔하게 태어나 지 않았다. 뜨거운 체온만큼이나 열혈적인 기운을 타고 나 는 사이에서 그들은 확실히 특이한 성향을 띄었다.

   태국영은 그를 빤히 응시하다 미지근하게 식은 찻잔을 처음으로 손에 들었다. 찻물을 한 모금 넘겨 은은하고 깊 은 맛을 음미한 그가 조금 아리송하게 중얼거렸다.

   “여군호가 방관할 리 없다는 의견에는 동의해. 하지만 여군호를 너무 신뢰하지 않는 게 좋아.”

   ‘‘왜지?”

   “그는 감정적인 것에 앞서 손익계산부터 할 늙은이거

   태호연은 얼핏 이해 못 한 듯 미간을 좁혔다. 그의 주

름 잡힌 살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채로 태국영은 차 한 잔을 느리게 다 비워냈다.

   “과거에 등대들이 멸족한 것은,분명히 여 가 놈들의 짓 이야.”

   태호연의 미간 골은 더 깊어졌다. 무엇을 근거로 저토 록 확신을 하나,고심하던 그의 뇌리로 문득 어떠한 생각 이 스쳐 지나갔다. 태호연은 일그러진 눈매를 크게 키우 며 물었다.

   “혹시 역사서에 그에 관련한 내용이라도 있어?”

   “있지. 그것도 아주 자세히. 다른 가문에서는 절대 있 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태국영은 너무나 의연하게 대답했다. 소리 없는 폭탄 이 태호연의 가슴 안에서 장대하게 폭발했다. 그는 숨을 멈춘 채 태국영을 빤히 보았다. 태국영은 피식 웃으며 반 대로 다리를 꼬았다.

   “형님.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 우리 태 가가 어떻게 그렇게 빠른 시간 내에 슈퍼문을 개발해 냈는지에 대해서.”

   ? □乂、,,

-「■[■

   “등대의 멸족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시간들 속에 서,아주 빠르게 이루어졌어. 그 와중에 아무도 등대를 급

살 시킨 범인을 추적할 수 없었고.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아무리 여 가의 은신능력이 뛰어나더라도,그 많던 등대들 이 다 피살되던 모든 순간에서 어떤 증거도 흔적도 발견 이 안됐다는 게.”

   태국영은 느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농담의 기색 없 이 진중한 표정이었다.

   “그건 불가능해. 여 가의 은신술에도 분명히 약점이 있 을 거야. 몇 번이고 반복되는 범죄에는 분명 일련의 법칙 이라는 게 생겨. 그런데 과연 누구도 몰랐을까. 과거 태 가 의 가주도?”

   “…잠깐. 그러니까 네 말은,과거 등대 멸족의 배경에 는 우리 태 가의 책임도 있다는 말이야?”

   핵심을 짚는 질문에 태국영은 혀를 차듯 웃었다. 꼰 다 리를 완전히 풀어낸 그가 상체를 슥 밀어 무릎에 팔을 걸 쳤다. 끝이 무더진 송곳처럼 위협적이나 날카롭지는 않은 눈빛이 태호연의 미간을 꿰뚫었다.

   “과거의 등대들이 정말 값싸게 군 건 부정할 수 없어.

제 권력을 조금이라도 더 쌓을 수 있다면 얼마든 금수들 을 찾아다니며 다리를 벌렸으니까. 명청한 놈들은 그거에 잔뜩 홀려서 간이라도 배줄 듯이 굴기도 했었고,문제도 많이 일으켰지. 그게 여 가 놈들의 눈엔 얼마나 꼴 보기가

싫었겠어. 차라리 강한 놈이 콧대나 세우면 그러려니 할 텐데 몸뚱이 하나 잘 팔아서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등대들 이 얼마나 눈엣가시 였겠냐고.”

   “…그래서 제거할 생각을 했다? 그 많은 등대들을 싹 다?”

   태호연은 망연히 대꾸했다. 태국영은 그저 차분하게 입 술을 휘었다.

   “여 가의 은신술은 아주 피곤해. 너무 완벽해서 나조차 도 깜박 속을 정도거든. 그래서 그렇게 대범한 짓거리를 할 생각을 했겠지. 모두의 눈만 속이면 등대들의 목을 꺾 는 건 아주 쉬웠으니까.”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그런 큰일을 꾸미기엔,그들 이 얻는 것이 너무 없어.”

   “왜 없어? 등대들만 사라지면 나처럼 완벽하게 짐승의 형상으로 태어나는 놈들도 더는 이 땅에 발을 못 붙일 텐 데. 여 가에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던,제왕의 피 말이 야.,,

   “등대 없이 성장통을 견디지 못할 제왕의 피는 씨가 마 르겠지. 그럼 가문 간의 전력 차는 훌쩍 줄어들고,결국 머 릿수 싸움으로 가게 될 수밖에. 거기서 가장 이득을 얻는

건 여 가야. 그들은 등대에게 완전히 의지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약한 존재들 중에서 가장 강하고,세력이 컸으니까.”

   태호연은 충격에 굳어진 얼굴이었다. 태국영이 거짓말 을 할 이유도 없지만,억지로 거짓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 을 만큼 그의 말은 너무나 앞뒤가 잘 맞았다. 과거의 여 가 에는 단 한 번도 완전한 금수가 태어나지 못했다. 그에 관 한 그들의 콤플렉스는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했다.

   “그리고 때마침 그 당시 우리 가문의 가주는 엉덩이 가 벼운 애첩을 아주 못마땅해 하고 있던 시기였지. 스물일곱 이었다고 했던가,하여간 그때까지 포기를 못 하고 쫓아다 녔는데 결국 차였대. 결혼을 하면 완전히 한 남자의 아내 로만 살아야 하니까 그건 싫다고. 그리고 그 등대는 다른 남자랑 교접해서 애까지 가졌어. 등대를 낳기 위해서였지.

   태호연은 거기에서 이미 그 뒷이야기를 모두 짐작할 수 있었다. 아연해진 낯으로 명하니 말을 잃고 있는 그에 게,태국영은 쐐기를 박았다.

   “수개월에 걸쳐서 준비를 하던 여 가의 눈에 우리 가주 는 아주 매력적인 구명이었어. 적어도 저놈들의 이목만 완 전히 묵살해 놓으면 자기들 계획은 틀어질 일이 없을 거라 고,그렇게 생각을 했겠지. 그리고 우리 가주는 그 간악한

혀 놀림에 완전히 넘어갔고.”

   “심지어 자기가 그렇게 구애했던 등대를 생체실험에도 썼어. 슈퍼문은 그렇게 해서 나올 수 있었던 거야.”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군.”

   “못 믿겠으면 내일이라도 보여줄 수 있어. 내가 그동안 그걸 그냥 금고 안에 묻어두었던 건 내가 보기 싫어서였 지,우리 형님이 보는 게 껄끄러웠던 게 아니니까.”

   “아니. 난 보고 싶지가 않다.”

   “그래. 내 심정도 그랬어. 우리 승도 생각나서 내가 마 음이 너무 아팠거든.”

   태국영은 물안개 휘날리듯 아련한 미소를 머금었다.

   “슈퍼문의 부작용? 그거 이미 예전에 기록되어 있었어. 왜 그거 고치려고 연구 안 한 줄 알아? 우리 일족이 영원 히 그 걸레 같은 창기들에게 의존하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 래. 씨발. 그딴 게 내 조상이라니.”

   결국에는 다 제 더러운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 짓거리 했던 것을.

   “여군호가 승도의 존재를 묵인했던 건,승도를 숨겨두 고 사는 내 태도가 마음에 들어서였을 거야. 승도가 인간 남자랑 섹스해서 또 다른 등대를 낳을 걸 내가 두고 보지

도 않을 테니. 도리어 내가 관리를 잘 못 해서 다른 놈들 이 냄새를 맡을까 그걸 걱정했을걸?”

   “…과거와 같은 상황이 올지도 모르니까?”

   “맞아.”

   태국영은 깊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아주 다르지. 최가 놈들은 대놓고 등대들을 팔고 있어. 여군호가 과연 이걸 어떻게 볼까는 조금 더 두고 봐야 해. 품위는 좀 떨어지지만 일족들이 처 음부터 등대를 저희들의 아래로 인식하게 두는 것이 좋을 지,아니면 초장에 부리를 뽑으려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지.”

   태국영은 그쯤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단 한 번 유 심히 정독했던 보고서 뭉치는 그대로 방치해 둔 채였다. 태호연이 따라 일어나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야. 갈 때 가더라도 뭘 어떻게 할 건지는 말하고 가. 불 안하잖아.”

   태국영은 그 특유의 느슨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걱정 마. 나도 철 좀 들었어. 우리 승도랑 이경이랑 알 콩달콩 너무 예쁘게 놀아서,그거 보다 보면 뭘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지경이라 오래오래 지켜주고 싶어졌거든.”

   “그건 정말 다행이네. 제수씨밖에 없던 네 머릿속에 이

경이라도 같이 들어앉아 있다니.”

   적어도 무턱대고 때려 엎을 생각은 아닌 것 같아 안심 이 되었다.

   “일단 여군호의 선택을 지켜보자고. 뭐,혹시 알아? 예 전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애들 풀어서 처리해 버릴지.”

   한 달. 딱 그 정도만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이었다. 만약 오래도록 쥐 죽은 듯 조용하면 여군호가 최 가의 짓을 묵 인하는 것을 택했다는 걸로 봐도 무방했다. 그때부터 움직 여도 늦지 않았다. 적어도 내년 종가모임 때에는 이승도 를 동반할 생각이니 그전까지만 처리를 해 두면 문제없었 다. 태국영은 그렇게 생각했고,태호연 역시 그에 동의했 다.

   “담배,하세요?”

   여제운은 넋을 놓고 있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마치 가수면 상태에서 억지로 흔들어 깨워진 것 같은 느낌 이었다. 그는 현실감을 찾자마자 소리가 난 곳이 아닌 담 배 끼운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열기 남은 꽁초 끝에 후 불면 금방 허물어질 듯한 재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아주 가끔 합니다.”

   “그런 거 하면 괴롭다고 들었는데요.”

   “자학하는 느낌이 드는 건 맞습니다. 약 없이 보름을 보 내는 기분이 되지요.”

   “그런데 왜 억지로 하고 계세요.”

   “그러게요. 나도 잘 모르겠군요.”

   여제운은 재떨이에 담배를 짓눌러 껐다. 매캐한 끝 연 기가 아지랑이처럼 현란한 곡선으로 허공을 치솟았다. 제 잔에 맑은 차를 따라내던 여제운이 얼핏 맞은편을 보다 의 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배가 고프다고 안 하셨습니까.”

   “…배는 고팠는데 식욕은 없어서요.”

   “잘 안 넘어갑니까?”

   “네. 속은 텅 비었는데 체할 것 같아서 참고 있어요.” 박해인은 오늘 유독 안색이 파리했다. 빚쟁이에게 쫓기 듯 초조하고 불안한 얼굴이었다. 여제운은 그를 물끄러미 살펴보다 종업원을 불렀다. 그리고 전복죽과 흑임자죽을 주문했다. 메뉴판에는 없는 음식이었으나 종업원은 공손 하게 자리를 물러났다.

   “죽이라도 드십시오. 속에서 안 받으면 그냥 두시고요.

   “네…… 고맙습니다.”

   박해인은 얼떨떨한 속내를 애써 감추며 눈을 내리깔았 다. 이런 식의 배려는 그저 낯설 분이었다. 따뜻한 물이 담 긴 도기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기본적으로 손끝 체 온이 차가운 제게 그 온기는 조금 고통스러울 만치 뜨겁 게 느껴졌다.

   “저기,제운 씨.”

   한참을 입술만 깨물다 종업원이 죽 두 그릇을 놓고 갔 을 때,박해인은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여제운은 고기 몇 점만 집어 먹고 완전히 젓가락을 놓은 상태였다. 입맛 이 없는 듯 차만 줄기차게 마시던 그가 네,하며 고개를 들 었다.

   눈이 마주쳤다. 냉랭하고 담담한 눈에는 그저 순수한 의문만이 깃들어 있었다. 박해인은 도통 그를 알 수가 없 었다.

   이 남자는 도대체 저에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이렇듯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처럼 저를 만나 얻고자 하는 것 은 과연 무엇인가.

   그와 자신의 만남은 늘 똑같았다. 조용한 곳에서 식사 를 하고,밀폐되지 않은 공간을 잠깐 걸었다. 종착지는 늘 으리으리한 호텔 룸이었으나,그것마저도 그의 배려라는

것을 자신은 알고 있었다.

   “오늘도 그냥 돌아가실 건가요?”

   후식으로 나온 과일 접시를 밀어주던 손길이 멎었다. 여제운은 느리게 눈을 들어 그를 빤히 마주 보았다. 박해 인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억지로 고개를 세우고 버텼다.

   여제운은 가만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사심 없이 고요 하고 정적으로 가라앉은 눈동자였다. 그 기세를 이기지 못 한 박해인은 결국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혹시 저랑 관계가 없는 것으로 꾸중을 들었습니까?”

   “잤다고 하셔도 됩니다. 그걸로 해인 씨가 피해를 본다 면요.”

   그런 거짓말이 먹힐 거였다면 진작 그랬을 것이었다. 말문 막힌 박해인을 물끄러미 보던 여제운은 나지막이 한 숨을 지었다.

   “나를 먼저 보자고 하신 것도 그런 용건이었습니까?”

   박해인의 얼굴이 새발갛게 달아올랐다. 여제운은 박해 인이 홀로 짊어지며 곪아가고 있을 짐의 무게를 어렴풋이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제 선에서 해결해 줄 수 있는 일 의 규모가 아니었다. 제 아버지 여군호조차도 직접적으로 최가 형제들을 제지할 방법이 없으니 다른 길을 찾고 있

天I 않은가.

   “그런 거라면 저는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는 꽤 답 답하고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마음이 없는 상대와는 잠자 리를 하지 않습니다.”

   “저를 거부하시는 이유가,다른 등대를 갖고 계시기 때 문이겠죠?”

   여제운은 조금 놀란 눈을 했으나 그것은 일순간에 스 쳐 지나갔을 분이었다. 적어도 피가 나도록 입술을 물고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는 박해인이 감지할 수 있는 변화 는아니었다.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저에게 특별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밀쳐내는 건 결국 그런 이유밖에는……

   박해인은 작게 옮조리듯 대꾸했다. 여제운에게서 희미 하게 웃는 기척이 났다. 머뭇머뭇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적잖이 놀랐다. 늘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고 재미 없어 보이던 얼굴이 봄날 개화한 꽃처럼 핀 모양은 지독히 도 낯설었다.

   “제가 마음을 준 상대가 등대라고 어떻게 확신하십니

   “그리고 나는 그의 정체가 무엇이건 크게 상관이 없습 니다.,,

   박해인은 가시 돋친 듯 따갑게 느껴지는 눈꺼풀을 느리 게 깜빡였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꼿꼿하게 피하지 않았다. 그의 진의를 읽기 위해서였다.

   “등대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상대란 말씀이신가요? 하 지만,그건 있을 수 없어요. 당신에게 다른 등대가 있지 않 는 이상 나에게 특별한 반응을 보여야 해요. 그게 당신들 의 본능이니까.”

   박해인은 마치 매달리듯 말했다. 여제운은 단호하게 고 개를 저었다.

   “해인 씨. 뭘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등대들은 물 론 우리에게 매우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당신들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이들이 분명히 있으니 더더욱 그 렇겠죠.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습 니다만……

   여제운은 한참 동안 고른 말을 다듬어서 내뱉었다.

   “해인 씨는 인간에 가까우니 인간의 예를 드는 것이 가 장 빠르겠군요. 인간 남자들은 아름다운 여자에게 약하죠. 우리를 인간 남자라고 본다면,등대들은 아주 배어난 미 인 정도가 될 것 같네요.”

   “미인이요?”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등대란 아주 신비한 미인이랄

수 있습니다. 경국지색에 빠져 나라를 망친 임금들처럼 과 거의 우리도 그렇게 대책 없이 빠지는 경우도 많았었죠.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무력하게 발려 들어가기만 했더라 면 우리는 이미 예전에 멸족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또한 그랬더라면 애초에 등대들이 지상에서 사라지지 도 않았을 것이다. 여제운은 이제 윤봄이가 늘어놓은 독설 들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가 등대에게 보이는 이끌림이 영원을 약속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해인 씨에게 느끼는 건 순간적인 충동에 불과해요. 나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무언가가 변화하길 바랐으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태어 나 처음으로 품은 연심이 그렇게 값싼 것으로 전락하지 않 았음이 다행스러우면서도,노력해도 끊어지지 않는 감정 이 참으로 야속하기만 했다.

   “더 못 드시는 것 같은데,이만 나갈까요.”

   청유형이었지만 여제운은 이미 한 쪽에 벗어둔 재킷을 집어 들고 있었다. 박해인은 더 그를 붙잡을 구실이 없어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했다. 문을 열고 자연스레 에 스코트하는 그의 행동은 마치 선 자리에서 만난 귀한 영애

를 대하는 듯 정중했다.

   계산을 끝내고 가게 문을 열고 나오자 자갈밭 깔린 입 구에 세찬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예보에는 없었던 소 나기였다. 배웅 나온 가게 주인이 우산을 빌려드릴까 물었 다. 주차장이 있는 뒤뜰까지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으나 여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에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번거롭게 뭐 하러요. 이런 날에 찾아주실 손 님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니 부담 없이 가져가십시오.” 고운 미모의 여사장이 흐린 날과 정 반대의 햇살 같은 미소로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여제운은 깍듯하게 목례로 답한 뒤 계단을 내려가 우산을 펼쳤다. 그리고 어 정정하게 정문에 선 박해인에게 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이리 오세요.”

   박해인은 당혹한 얼굴로 쭈뼛쭈뼛 고개를 저었다.

   “혼자,혼자 갈수 있는데요.”

   “몸이 차니 비는 안 맞는 것이 좋습니다. 괜찮으니 오세

요.,,

   발긋하게 뺨을 붉힌 박해인이 낮은 계단을 밟아 내려왔 다. 여제운은 어색하게 곁에 선 그의 가녀린 어깨를 가볍 게 감싸 걸음을 옮겼다. 그쪽으로 우산을 많이 기울여도

세찬 바람이 싣고 온 빗방울이 자꾸만 옷깃을 적셨다. 뜰 로 연결된 오솔길에서,여제운은 걸음을 멈추고 우산 손잡 이를 박해인의 손에 쥐어 주었다. 박해인은 그의 팔 한쪽 에 걸려 있던 슈트 재킷이 제 어깨를 감싸오는 것을 명하 니 방관했다.

   “돌려주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마치 앞으로 볼 일이 없을 거라는 말 같았다. 박 해인은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 다보았다. 돌려드리고 싶어요,그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질 않았다. 품 큰 재킷에 담긴 상체가 따뜻했다. 그 지독한 온기에 몸이 떨려 왔다.

   “왜…….,,

   여제운이 문득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왜 우십니까.”

   박해인은 물 구슬을 눈동자에 그렁그렁 담고 저를 올려 다보고 있었다. 여제운은 난감한 마음에 손을 들었다가 멈 칫했다. 그 뺨에 흐르는 눈물을 차마 섣불리 닦아줄 수가 없었다. 박해인은 그 머뭇거림을 아프게 응시하며 입을 열 었다.

   “제운 씨가 마음에 품고 있는 분은 저와는 달리 고귀하 시겠지요. 이렇게 팔려 다니는 저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그래서 제가 노골적으로 유혹해도 흔들리지 않으셨건 거지요. 당신의 눈에 내가 등대란 이름으로 아무리 아름답 게 비친들,누구나 꺾을 수 있는 천박한 꽃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울먹임을 품고 터져 나온 목소리는 빗소리보다 작았다. 박해인은 가슴을 거뭇하게 물들이는 절망에서 제가 그에 게 희망을 품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런 스스로가 한심하 다 못해 환멸감마저 들었다. 고개를 들 수 없을 만치 서럽 고 부끄러웠다.

   “조심히 가세요.”

   박해인은 걸치고 있던 재킷을 떠넘긴 뒤 황급히 뒤돌 아 뛰어갔다. 송곳 같은 빗줄기가 기다렸다는 듯 그의 몸 을 파고들었다. 부옇게 흔들리는 물보라가 멀어져가는 뒷 모습을 기어이 삼키는 듯했다.

   여제운은 박해인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한동안 묵 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혔다는 자 각이 그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딱히 당신이 천박하고 그가 고귀해서가 아니었다. 그 저 이미 뜨겁게 옮겨가 버린 마음이 좀체 돌아와 주지 않 는 것일 분.

   박해인과 자신은 서로에게 일종의 구원을 바라고 있었 고,그 기대는 맞물릴 곳 없는 퍼즐처럼 한구석도 융화되 지 못하는 성질의 것이었다. 계산적으로 만남을 지속해온 것은 둘 다 마찬가지. 그리고 그도 자신도 이 관계에서 무 엇도 얻지 못한 채 종국엔 상실감만 가득 끌어안고 말았 다.

   쏴아아아_

   많은 사념을 곱씹는 사이 빗줄기는 더 거세져 있었다. 여제운은 마지막으로 담배를 한 대 태운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차게 식은 차량에 올라 시동을 걸고 엔진이 채 데 워지기도 전에 액셀을 밟아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와이퍼를 최대 속도로 돌려도 전면유리 너머는 잔뜩 일 그러졌다. 억수같이 퍼붓는 비에 네온사인과 가로등 불빛 이 으스러졌다. 정체된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 는 모습이 제법 전투적이었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빠지는 차선이 생기면 핸들부터 돌리는 차가 무수했고,또한 그때 마다 어김없이 신경질적으로 클랙슨이 울리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바깥과 달리 차내는 고요했다. 강판을 두드 리는 빗소리만이 둔중하게 사위를 에워쌌다. 여제운은 아 주 문득,어쩐지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홀로 유리된 느낌 을 받았다.

   감상적이군.

   이런 건 조금도 저답지 않았다. 여제운은 쓰게 웃으며 부러 머리를 비웠다. 계속된 정체로 족히 곱절은 넘을 시 간을 허비해 본가 정문을 지나쳤을 때였다.

   一가주님. 큰 도련님께서 지금 돌아오셨습니다.

   여제운은 경비의 보고가 뇌리를 울리자 일순 눈가를 좁 혔다. 경비가 뜬금없이 제가 도착했음을 알렸다는 것은 부 친이 사전에 지시를 했다는 말이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불순물처럼 머릿속을 떠돌던 의문은 지하주차장에 들 어섰을 때 절정을 이뤘다. 그다지 반갑지 않은 차량 한 대 가 손님용 구역에 들어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페라리 베를리네타는 해외에서 출시되자마자 태국 영이 가장 먼저 들여와서 일족들 사이에서 꽤 유명세를 탄 모델이다. 당시 한국에 있던 여홍재가 그 영향을 받아 발 빠르게 움직여 구매했던 차기도 했다.

   정작 슈퍼카 수집에 열을 올렸던 태국영은 요즘 화려 한 2인승 스포츠카엔 손도 대지 않는다. 이승도의 출퇴근 을 꼬박꼬박 책임지면서부터 뮬산이나 마이바흐 같은 세 단형만 주야장천 몰고 다니는 중이었다. 그 사실들을 빤 히 읽고 있는 입장에서 보자면,태국영을 향한 여홍재의

자격지심이 조금은 측은할 정도였다.

   또한 그 열등감이 비단 태국영만을 향한 것은 아니다. 여제운은 어릴 적부터 그의 비틀린 적대심을 피곤할 정도 로 겪었다. 그가 강하고 유능한 재목이라는 것에 이의를 달 생각은 없지만,그의 야망을 모두 담기에 그의 그릇은 지나치게 작았다.

   여제운은 여홍재의 베를리네타를 순식간에 지나쳐서 지상으로 올라갔다. 어찐지 불길한 예감에 발걸음은 다급 해졌다.

   경비의 뜬금없는 보고는 지금 본가에 와 있는 여홍재 와 절대로 무관하지 않을 것이었다. 오늘 여군호와 여홍 재 사이에서 오고 갔을 밀담이 여제운 자신의 귀에 들어가 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것이 제가 들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라면 수긍할 수 있었다. 제 극렬한 반발을 살 만한 것이 아니기만 바랄 분 이었다.

   一그럼,연락드리겠습니다.

   현관에 들어섰을 때,여홍재는 막 작별인사를 건네던 참이었다.

   一절대,아주 작은 실수조차 없어야 한다는 걸 명심해.

   一실망시켜드릴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여군호의 서재에서 나온 여홍재는 로 비 한가운데 우두커니 선 여제운을 발견하곤 빙긋 웃었다. 완만하게 휜 눈꺼풀 속의 눈동자는 뱀처럼 차가운 빛을 번 득였다. 그것은 명백히 조롱과 애석함을 담은 미소였다.

   허나 그런 것은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여 군호에게 받은 지시사항이 무엇인지 그것이 자꾸만 신경 을 갉작거릴 따름이었다. 여홍재는 승리자처럼 오만한 눈 을 하고서 여제운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오고 간 말은 없었다. 여제운은 그가 떠난 뒤 여군호를 찾아가 직접적으로 물었으나,역시나 여군호는 여홍재와 의 밀담에 관해서는 함구했다. 평연한 무표정과 흔들림 없 는 목소리에서는 무엇도 훔칠 수가 없었다.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다 네가 자초한 일이니.”

   냉정하게 이르는 말에 여제운은 반박하지 않고 허리를 숙여 보였다. 돌아 나오는 등 뒤로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따 라붙었다. 한심한 놈,하고 핀잔하려는 의도가 다분했으 나 여제운은 그것마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제 부친의 속 내와 여홍재의 용도에 대해 파헤쳐보느라 상념에 빠져 있 었던 탓이었다.

   설마 가주님께서 과거의 일을 답습할 생각을 하고 계 신 건 아니겠지.

   여제운이 걱정하는 바는 바로 그것이었다.

   과거처럼 스스로가 원해서 저희 일족을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논 것도 아니고,그저 운이 없어 비참한 생애를 이 어가고 있을 분인 등대들이 아닌가.

   하필이면 또 오늘 박해인의 서러운 눈물을 보았던 터 라 더 심란해졌다. 여제운은 제 방 소파에 앉아 한참을 생 각하다 결국 결단을 내렸다. 아무래도 여군호가 무슨 생각 을 가지고 있는지,그 정도는 알아둬야겠다고.

   물론 여제운은,값싼 동정이 빚어낸 이 결정이 가까운 미래에 굉장히 뜬금없는 수확을 가져오게 될 거라고는 조 금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태이경은 차 안에서부터 유독 제 가슴에 코를 박 고 킁킁거렸다. 좋은 냄새,좋은 냄새,하면서 방긋방긋 웃는 것이 깨물기도 아까워 오냐오나 안아주었다.

   헌데 녀석은 집에 도착해서도 이상하리만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이제 곧잘 젓가락질을 잘하면서도 엄마 품에 서 먹어도 되나고 묻고,여은태를 씻길 때에도 같이 씻어 도 되나고 묻고,동물들을 한 번씩 살펴볼 때에도 옆에 꼭

붙어 있었다.

   ‘‘우리이경이,혹시 할말 있어?”

   원가 이상하다 싶어 이승도는 결국 태이경을 안고 소파 에 앉았다. 여은태 역시 궁금했던 건지 아래에 앉아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냥,엄마랑 더 오래 있고 싶어서요.”

   태이경은 어지럽게 눈을 굴리며 작게 대답했다. 맞잡 은 작은 손이 꼼지락거렸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린가 싶 어 말문이 막힌 사이,가만히 시선을 보내고 있던 여은태 가 바닥에 붙인 궁둥이를 떼고 일어났다. 뜨끈한 혀가 아 이의 뺨을 할았다.

   [아가가 선생님이랑 있는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지나 봐.]

   태이경은 으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운지 살 굿빛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예전엔 그냥 엄마 품에 잠깐이라도 안기는 게 그렇게 좋았는데,지금은 막 더 오래 안기고 싶어서 욕심나구 그 래요. 엄마 동물원 가면 난 거의 집에서 공부할 때가 많잖 아요. 아빠 집은 엄마 냄새도 안 나고,목소리도 못 듣고, 그래서 그냥……

   말끝을 흐린 녀석이 잔뜩 눈치를 보며 ‘나 못됐어요?

’하고 물었다. 이승도는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속이 깊고 의젓한 아이라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불시에 습격을 받은 기분이었다.

   [사실 나도 선생님 품에 더 오래 안기고 싶은데,형이니 까 참을 수 있어. 하지만 이경이는 아직 다섯 살도 안 된 아기니까 정말 슬플 거야. 내가 토닥토닥 잘 재워도 깨면 엄마부터 찾더라.]

   이승도는 깊은 죄책감에 콧등이 찡해졌다.

   “그랬구나. 우리 이경이가 엄마랑 떨어져 있는 시간이 외로웠어? 자다 깼을 때 옆에 없는 거 보고도 서운했구 나?”

   “…응. 쪼금.”

   “우리 은태도 이경이 오면서 차별받는다고 슬퍼질까 봐 선생님이 신경 많이 쓴다고 썼는데,부족하게 느꼈구 나. 선생님이 잘못했어.”

   ["■아…아니. 그렇게까지는……■]

   “신경 못 써서정말 미안해.”

   이걸 어쪄면 좋지.

   이승도는 표정을 흐리며 아이를 더 꼭 끌어안았다. 머 리가 그저 복잡하게 엉켜 엉망이었다. 거의 10시간 정도 를 동물원에 있다 보니 한창 엄마 품이 그리울 아기가 서

운해할 만도 했다. 더군다나 요 며칠은 아이들이 잠들자마 자 태국영과 뒹구느라 바쁘기까지 해서 더욱더 그러했을 터였다.

   이승도는 그간 방치하다 싶은 아기가 용기 내서 털어놓 은 속내에 마음이 아팠다. 한없이 퍼줘도 지난 시간들을 다 채워주지 못할 것인데,자신은 그저 색사에 빠져 있었 다니.

   “애들아,잠깐만. 나 국영이랑 애기 좀 하고 올게.”

   이승도는 태이경을 소파에 내려두고 테라스 문을 열고 나갔다. 태국영이 담배를 피운다고 마당에 나가 있었기 때 문이었다. 유리문이 실내와 실내를 딱 막자마자 여은태가 작게 소리쳤다.

   [잘했어! 완전 성공!]

   “응! 우리 이제 엄마랑 하루 종일 있을 수 있나 봐!”

   태이경은 여은태와 얼싸안고 소리죽여 방방 뛰었다. 어 떻게 하면 이승도를 집에 묶어두어서 셋이 알콩달콩 잘 놀 수 있을까,둘이 속닥속닥 머리를 짜낸 것이 헛된 일이 아니었다. 여은태는 기뻐하는 태이경을 앞발로 꼭 품어 안 고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우리 집 정원 되게 케 풀장도 엄청 크괴 형아랑 나랑 실컷 뛰어놀 수 있을 거야!”

   [응. 응.]

   여은태는 사실 넓은 정원 같은 것은 딱히 관심이 없었 다. 그저 이승도와 태이경이 없는 시간들이 조금 외로웠는 데 이제는 종일 같이 있을 수 있다니 그것이 기블 따름이 었다.

   一너 오늘부터 나한테 치근거리면 죽을 줄 알아.

   그러나 쫑긋 세운 귀로 꽂혀 온 것은 기대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이승도의 격앙된 목소리에 둘은 눈을 크게 뜨 며 일제히 숨을 멈췄다. 잔뜩 낮아진 태국영의 음성이 그 뒤를 이었다.

   一무슨 말이야.

   一네가 밤마다 날 업어가니까 이경이가 외로워하잖아.

   태이경은 조마조마하게 테라스 밖을 힐금거렸다. 여은 태 역시 불안하게 앞발로 바닥을 긁으며 청각을 곤두세웠 다.

   一승도야. 아무리 그래도.

   一나도 너랑 자는 거 좋아. 너 그동안 나 때문에 맘고 생 많이 하고 계속 억누르면서 기다린 것도 알아서 웬만하 면 다 받아주고 싶었어. 하지만 이경이가 외롭다고 눈치 보면서 말하는 거,다시 안 볼래. 나 그거 너무 슬퍼. 그러 니까 토요일에 한 번,딱 그때만 너랑 잘 거야.

   [이…이게 아닌데…….]

   여은태는 크게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태이경 역시 여은 태의 목덜미 쪽 털을 꽉 움켜쥔 채 숨을 할딱였다.

   “큰일이다. 형아,어떡해? 아빠 화낼 것 같아.”

   이미 제대로 눈이 돈 것 같다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 다. 태국영 화나면 진짜 무서운데,여은태는 이 난관을 어 찌해야 할지 격렬히 고민했다.

   一우리 승도 너무 잔인하네. 애까지 있지만 우리 지금 신혼인데.

   태국영은 조금 더 저항했으나 이승도는 흔들리지 않았 다. 다만 조금 기세를 꺾어 태국영을 안아주었다.

   一이경이 우리 아기야,국영아.

   一너랑 내가 같이 낳은 아기야. 그러니까우리 아기 몸 도 마음도 건강하게 잘 키우자. 이해해 줄 수 있지?

   태국영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살벌한 눈초리 가 유리문을 뚫고 직선으로 꽂혀 내려왔다. 여은태와 태이 경은 딴청을 부리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기댈 곳이 서로밖에 없는 둘은 점점 밀착했다. 태이경 은 조금 떨리는 손으로 여은태의 목을 부둥켜안았고,여은

태는 녀석의 허리를 앞발로 감아 포옹을 깊이 엮었다. 그 때 일방적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은 이승도가 다시 실내로 들어섰다.

   “우리 이경이랑 은태,보고 싶은 책이나 영화 하나씩 골 라 두기. 샤워하고 나서 같이 놀아줄 테니까. 알았지?”

   가,가지마! 이러고 가면 우린 어쩌라고!

   여은태는 기겁하며 앞으로 튀어 나가려다 태국영에게 꼬리를 잡혔다. 부러뜨릴 듯 강한 힘이었다. 흠칫 놀라 돌 아보자 태국영은 살벌한 낯으로 웃고 있었다. 그의 입 모 양이 나직이 경고했다.

   一영원히 도망칠 거 아니면 그냥 있지?

   엄마,하고 작게 불렀던 태이경도 그 서슬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이승도는 잠시 응? 하고 돌아보았으나 셋이 일 제히 손과 발을 흔들자 웃으며 욕실로 사라졌다.

   이승도가 없는 자리에는 빙설이 앉은 듯 한기가 몰아쳤 다. 여은태와 태이경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란히 서서 앞 발과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두 아이의 앞에 선 태국영은 팔짱을 낀 채 끓는 속을 여러 번에 걸쳐 내리눌렀다.

   “너희들이 잘못을 만회할 방법은 하나야. 무슨 수를 쓰 든 재 마음 돌려놔.”

   “…어,어떻게요?”

   “동생을 낳아 달라고 하든지,다른 가족들처럼 같이 살

자고 하든지.”

   [나는?]

   “년 네가 알아서 해. 내숭 잘 떠는 놈이 누구한테 조언 을 구해. 단순하고 착한 선생님 마음 움직이는 거 식은 죽 먹기라며?”

   여은태는 질렸다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거 뒤끝 한번 태평양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사태는 분명 저들 잘못이 맞았기에,여은태와 태이경은 미적미적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너그럽게 한 달이나 줄 테니까 그동안 승도가 절대 눈 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작업해. 괜히 티 나게 오버하다 들 키고 상황 더 악화시키면 너희들도 나랑 같이 지옥에 떨어 지는 거야. 명청한 놈들 아니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평화로운 미래를 심각하게 위협당한 둘의 고개가 떨어

져 나갈 듯 열렬히 위아래로 흔들렸다.

   남강우는 술처럼 몸에 해로운 담배를 고집스레 피우던 중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발신자는 이 담배를 전염시켰던 태국영이었다.

   《안녕. 우리 한 번 만날까?》

   누가 들으면 십년지기는 아니어도 꽤 친근한 사이라고 오해할 법한 투였다. 남강우는 필터 문 입술을 픽 휘며 대 꾸했다.

   “병적으로 가드 중인 네 애인 손 한 번만 잡게 해 주면 생각해 보지.”

   《요새 지랄병이 유행이야?》

   태국영은 어쩐지 조금 까칠한 상태인 것 같았다. 애인 이랑 싸웠나,그런 생각을 얼핏 떠올리며 대꾸했다.

   “그게 아니면 딱히 널 만날 이유가 없는데.”

   《내가 우리 투견한테 좋은 거 알려주려고 그래.》

   “원데.”

   《판돈도 결정이 안 났는데 패를 까는 미친놈도 있어?〉〉 남강우는 짧아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연기가 나가도록 활짝 열어둔 창밖은 장마가 끝나고 폭염이 내려 있었다. 길어진 해가 무겁게 지평선을 향해 가라앉고 있 는 모양을 무심히 바라보다 대꾸했다.

   “하긴. 그것도 그렇지.”

   《후회 없을 거야. 나 블러핑 취미는 없거든. 너 좋아하 는 술도 실컷 처먹여 줄게. 원한다면 짠도 같이 해 주고.》

   “좋아. 시간과 장소는?”

   《오늘 밤 열두 시. 시간은 내가 정했으니 장소는 네가 말해 봐.》

   “뭐가 그리 급하지. 그리고 뭐가 그리 늦고.”

   남강우는 미묘하게 눈썹 끝을 올렸다. 갑자기 전화가 와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원가 속전속결이었다. 진 짜 절친이면 이상할 것도 없으련만,문제는 그와 저 사이 가 그리 말랑말랑하지 않다는 거였다.

   막말로 저는 그에게 죽을 뻔했고,저는 아직도 포기 않 고 그의 애인을 종종 미행하며 닿아 볼 틈을 노리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술잔을 기울이기보다는 술병을 깨서 대가리를 칠 정도의 원수가 되는 게 더 타당한 관계 였다.

   《내가 좀 짜증 나는 일이 있어서 그래. 야밤으로 잡은 이유는 내 애인이 잠들 때까지 지켜보는 게 내 사는 낙이 라 포기하기 싫어서고.》

   염장을 지를 상대가 그리 없나.

   미간이 일그러졌다. 미묘한 웃음을 지은 남강우는 담

배 한 대를 더 배 물며 불분명한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네 애인 성추행할 틈만 보는 놈한테 그게 할 소리나.”

   〈〈못할소리야?〉〉

   “됐다. 장소는 내가 정해서 약도 보내두마.”

   《응. 이따 봐.》

   전화를 끊은 뒤 담뱃불을 붙였다. 타들어 가는 끝을 노 려보며 긴 폐활량으로 순식간에 한 대를 다 피웠다. 꽁초 를 재떨이에 짓이기고 일어선 그는 오기가 생겨 조기퇴근 을 결심했다. 비서진들은 당혹해했으나 그대로 수긍했다.

   남강우는 곧장 차에 올랐다. 거칠게 액셀을 밟아 순식 간에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러시아워는 아직 한참 남았음 에도 도로는 온통 자동차 천국이었다. 이리저리 끼어드느 라 바븐 것들 사이에서도 남강우는 유독 더 틈새를 잘 비 집고 들어가 쭉쭉 앞으로 나아갔다.

   한참을 그렇게 달려 도착한 곳은 이승도가 근무하는 동 물원이었다. 태양은 여전히 그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스팔트에 아지랑이가 너울거리고 있었다.

   더위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남강우는 약간의 갈등을 맞 닥뜨렸으나 곧 결정을 굳혔다. 그는 오만한 태국영의 낯짝 을 조금은 뭉개주고 싶었다. 그 결과가 또 무참한 전투로 이어지더라도 딱히 후회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악착같

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100년을 더 살든 1 년을 더 살든 상관없는 것이었다.

   “또 오셨습니까.”

   태국영보다 더 낯익은 얼굴이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 리며 말했다. 그늘진 곳을 골라서 잠입을 했는데도 귀신같 이 알아채는 놈이었다. 오늘도 텄다는 소리였다. 남강우 는 쯧 혀를 찼다. 방금 전까지 열을 올리던 휴대용게임기 를 한 손에 쥔 태성문은 나직이 한숨지으며 핀잔했다.

   “아무리 우리 세계에 꼴통들이 많다지만 너무 한 거 아 닙니까?”

   “너희 태 가 대가리가 그 꼴통들의 최정점에 있는데 날 비난하면 못쓰지.”

   “그건 사실입니다만 님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이 정도 면 포기할 때도 안 됐습니까. 우리 형수님 좀 그만 따라다 니십시오. 그러다 우리 가주님 진짜 열 받으면 염라대왕이 랑 지리멸렬하게 면담해야 합니다. 그거 겪어본 분이 왜 이러십니까,도대체.”

   “내가 찝찝하게 뭘 남겨놓는 걸 싫어해. 성격이다.”

   “저도 찝찝한 거 싫어하는 걸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놈입니다. 자,발리 나가십시오.”

   “네가 뭔데 나가라 마라나. 여기 입장료 내면 누구나 들

어올 수 있는 곳이다.”

   태성문은 찌릿 그를 노려보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입장료 내셨습니까?”

   남강우는 생각지도 못한 포인트에 침묵했다. 바람처럼 침투하려고 주차도 일부러 먼 곳에 했다. 입구도 소리소문 없이 스쳐 지나갔다.

   “가십시오. 어차피 제 눈에 띄신 이상 우리 형수님 그림 자도 못 밟으시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일단 가드의 눈에 띈 이상 제 뜻 을 강행하려면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렇게 인간들의 눈이 많은 곳에서 일을 그 지경까지 크게 벌이면 여러모 로 문제가 생겼다.

   남강우는 그늘 깔린 벤치를 찾아 앉았다. 충실한 감시 자 태성문은 그 곁에 앉아 다시 게임기를 두 손에 쥐었다. 담배를 한 대 물고 불을 댕기자 태성문은 게임기 액정을 열렬히 바라보는 채로 투덜거렸다.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뭐하는 짓입니까. 간접흡연 도 몸에서 열 올라오는데,참 매너 똥입니다. 술도 모자라 담배까지 자학도 가지가지군요.”

   “이 담배 너희 가주한테 배운 거야.”

   “압니다. 우리 가주님도 변태 끼 충만하시죠.”

   “다른 가문 놈한테 가주 욕해도 괜찮나. 게다가 나 이 래 봬도 조만간 가주 승계받을 몸인데.”

   “없는 데서는 나라님 욕도 한다고 했습니다. 어차피 귀 에 들어가지도 않을 거 뭐 어떻습니까.”

   “나 오늘 밤에 너희 가주 만나기로 했는데.”

   “이른다.”

   세상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게임기 붙들고 있을 것 같았 던 태성문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 었으나 불규칙하게 미동하는 눈동자가 동요를 비치고 있 었다. 남강우는 씩 웃으며 긴 다리를 꼬았다.

   “입 다물어 줄 테니까 너희 형수 손 한 번만 잡아보자.”

   태성문은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눈가를 찌푸리며 즉 답했다.

   “웃기지 마십쇼. 가주님 흉보다 들켜서 몇 대 맞는 거 랑 형수님 못 지켜서 죽기 직전까지 맞는 거랑 뭐가 낫겠 습니까.”

   “비밀로 해줄게.”

   “가드 팀이 나 혼잡니까. 어차피 다른 놈들이 다 불 겁 니다.,,

   바늘 끝도 안 들어갈 듯 완강한 태도였다.

   “고자질은 안 좋은 겁니다.”

   그래도 밀고는 조금 걱정되는 모양인지 한마디 덧붙이 는 걸 잊지 않았다. 남강우는 ‘너 하는 거 봐서.’하며 등받 이에 담배 든 팔을 걸쳤다. 부연 연기가 곡선을 그리며 뜨 거운 볕 틈바구니를 방황했다.

   “너희 가주는 왜 내가 제 애인 주위를 뱅글뱅글 도는 걸 그냥 놔두지? 끝장을 보는 게 태국영도 너희들도 편하 지 않나?”

   “가주님 속은 원래 시커메서 아무도 모르지만,추측해 보자면 가주님은 당신을 별로 위협으로 느끼지 않지 싶습 니다.,,

   “내가 작정하고 달려들면 너희들 셋 감당 못 할 거라고 생각하나?”

   태성문은 고개를 기울이며 담담하게 되물었다.

   “제가 말한 의미는 그쪽이 아닙니다만,혹시 정말로 님 혼자서 될 거라고 믿습니까?”

   남강우는 손끝으로 턱을 쓸며 태성문을 위아래로 훑어 보았다. 태 가의 아이들은 가문 내에서 자체적으로 성년식 을 치르는 것이 전통이었다. 당연히 구체적인 전력을 알 방법은 없으나,껍데기 안을 투시해 보면 대강 최대치를 뽑아낼 수는 있었다.

   “네 성년식은 누가 치러줬지?”

   “우리 가주님이 하셨습니다.”

   “태국영이 직접?”

   “네. 죽다 살아났습죠. 지금도 가끔 성년식을 다시 치르 는 꿈을 꾸는데,아주,매우,몹시도 끔찍합니다.”

   “의외로군. 귀찮은 건 딱 질색한다더니.”

   태성문은 침묵했다. 그게 아무래도 가주의 스트레스 해 소용 같다는 추측을 굳이 내뱉어 봐야 제게 득이 될 것이 없었다. 남강우는 바닥에 담배를 던져 구듯발로 비벼 껐 다.

   “년 꽤 좋은 재목이야. 보디가드로 쓰는 게 아까울 만 큼.,,

   “아까울 게 뭐 있습니까. 어차피 다들 가업에 소모되느 라 양복 입고 출근이나 하면서 살고 있는데요. 가주님이 형수님을 제게 맡기신 건 그만큼 저를 신뢰하신다는 뜻입 니다. 게다가 우리 형수님은 아주 정숙하셔서 까다롭게 신 경 곤두세울 일도 없고요. 상냥하신 분이라 보람차기도 합 니다. 전 이렇게 남는 시간에 게임도 하고 바깥구경도 하 는 지금이 좋습니다. 별 볼 일 없는 샐러리맨 신세보다는 요.,,

   남강우는 잠시 생각해 보곤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각해 보면 저도 샐러리맨처럼 출퇴근만 반복하는 생활 이 싫었기에 교관 일을 수락했었다. 적어도 성년식 의뢰 가 있을 땐 당일을 포함해서 총 사흘간 떳떳하게 농땡이 를 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쪽이 아니라고 한 건 무슨 의미지?”

   남강우가 뜬금없이 묻는 말을 태성문은 용케도 알아듣 고 대꾸했다.

   “뭐,예를 들어 님이 눈이 뒤집혀서 대낮에 혈투를 벌이 고 형수님을 납치하려고 한다든가,가주님을 완전히 적으 로 돌릴 각오를 하고 일을 벌인다든가 하는 걱정이 없는 거 아닐까 하는 관점이었습니다.”

   “이걸 좋아해야 도I나. 아니면 배포 없는 놈으로 비쳤다 는 걸 기분 나빠해야 하나.”

   “기분 나쁘실 이유는 없습니다. 가주님이 그만큼 님을 이성적이고 절제력 있는 남자로 봤다는 뜻이니까요. 만약 지금 이렇게 형수님 곁을 멤도는 게 님이 아니라 웬 개 같 은 망나니였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아마 이 렇게 저랑 대면할 일도 없었겠지요. 가주님이 먼저 처리 를 했을 테니까요.”

   “이 세계의 율법 같은 건 상관없다는 말인가.”

   태성문은 여전히 게임기에 열중하는 채로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님이 우리 가주님이라고 생각을 해 보십쇼. 이미 저 혼 자 한 가문을 박살 낼 정도의 능력이 있는데 남의 눈치 보 고 살겠습니까. 종주님이 명분 따져가며 태클을 걸면 곧 장 반발해서 전쟁을 걸고도 남을 분입니다. 물론 이길 능 력도 충분하고요.”

   “글쎄.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지 않나. 너희 쪽에 서 아무리 태국영 혼자만의 책임이라고 해도 그게 받아들 여질 리가 없잖아? 결국 가솔들의 안위는 보장할 수가 없 는 것을.”

   “네,압니다. 명분이 없다면 무조건 가문 대 가문의 싸 움으로 번지게 되는 거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들은 가주님을 따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 것 같습니까?

   “…글쎄. 강하기 때문에?”

   남강우는 고개를 한 번 갸웃하며 되물었다. 태성문은 대화 때문에 집중이 안 되는지 게임기를 결국 벤치 위에 완전히 내려두었다. 가벼우면서도 짙은 한숨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강한 놈은 이 세계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물론 우리 가 주님만큼 강한 작자는 흔치 않겠습니다만,태 가가 태국영

을 따르는 것에는 단순히 힘의 논리에 의한 것은 아닙니

다.,,

   “아니면?”

   “우리 가주님이 불필요한 전쟁을 싫어하기 때문이죠.”

   남강우는 개소리를 들은 것처럼 희한한 표정을 했다. 태성문은 개의치 않고 입술을 휘었다. 누구에게 이해해 달 라고 피력할 의사는 없었다. 다만 이것은 그가 느낀 진실 일 따름이었다.

   “안 믿기시겠지요. 저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건 과장 없는 사실입니다. 윤 가 학살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는 믿기 힘든 사실이겠지만,우리 가주님은 전쟁보다 평화 를 더 좋아합니다. 그게 본인이 행복해지는 최적의 조건 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최적의 조건?”

   “네. 우리 가주님은 무전취식 허송세월 재능 낭비 빈둥 빈둥 이런 사자성어들을 매우 좋아하고,그렇게 살고 싶 어 하는 분이니까요.”

   “…너 사자성어 뜻 모르지?”

   한심하다는 듯한 눈초리에 태성문은 잠시 흠칫했다가 도리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좀! 그런 사소한 것은 넘어갑시다! 어쨌든 우리 가

주님이 평화를 사랑하는 것만은 틀림없는 진실입니다!”

   태국영이 게으르고 방만한 면이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 고 있는 사실이었다. 남강우 자신도 그와 손을 섞었을 때 의아해했었다. 도대체 저 힘을 가지고도 왜 이제껏 저를 음해하려는 무리들을 방관하며 그저 잠잠했는가,하고.

   “우리 가주님은 형수님만 안 건드리면 굉장히 온순한 척 잘하는 짐승입니다. 그분의 목표는 다섯 살 때부터 지 금까지 변하지 않았거든요. 방해 없이 형수님과 알콩달콩 사랑하면서 사는 거요.”

   원가 수긍할 것 같으면서도 저 멀리에서 깔짝이는 것 이 있었다. 남강우는 그것의 정체를 한참 고민하다가 입 을 열었다.

   “그렇다면 윤 가는 뭐지. 내가 기억하기로,태국영이 윤 가와 전쟁을 벌였던 것은……

   의식의 흐름대로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던 남강우는 중 도에 멈칫 입을 다물었다. 이유. 태국영이 온몸의 털을 바 늘 같이 세우며 그들을 잔인하게 도륙했던 이유.

   남강우는 뜨겁게 일렁이는 아스팔트의 아지랑이를 무 의미하게 노려보았다. 마치 무생물처럼 미동 없이 굳은 채 한참 동안 생각만을 거듭하다 불현듯 깨달았다. 태국영 을 예민하게 만드는 포인트가 이제야 이해가 갔다.

   一등대.

   남강우는 한마디 말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라 졌다. 태성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의 뒷모습을 일별하 곤 이내 신경을 껐다. 이제 와 남강우가 무언가를 알게 되 었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언제가 되었든 태국영은 제 옆구리에 이승도를 끼고 다 닐 생각이 확고했다. ‘근데요 형님,우리 형수님이 등대라 는 것이 밝혀져도 상관없습니까.’ 그렇게 물었던 적이 있 었다. 그에 태국영은 이렇게 대답했었다.

   「숨길 생각도 없지만,숨긴다고 숨겨질 일이야? 승도 랑 이경이랑 그렇게 닮았는데 뭘 어떻게 숨겨. 우리 승도 가 밖에서 낳아 온 아기 내가 키우고 있다고 해? 기분 나 븐 오해라는 건 둘째 치고 아무도 안 믿을걸?」

   그건 그랬다. 이승도와 태이경은 그냥 얼굴만 봐도 너 무 닮았다. 누가 봐도 핏줄이 이어지지 않고서는 그 정도 로 닮을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어찜 그리 엄마 아빠 예븐 부분만 닮았을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홈 잡을 곳이 없는 태국영의 아이 는 그에 버금가게 엄청난 미인으로 태어날 거란 기대가 많 았다. 그러나 막상 태어난 아이는 아빠보다 엄마를 더 많 이 닮아 있었다. 절색의 미모를 기대했던 수많은 가솔들에

게 실망을 안겨줬다 들었다. 차마 태국영이 무서워서 대놓 고 그런 말을 못 끼냈을 분이지,다들 속으로는 그렇게 한 탄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지.

   태성문은 제 뇌리 속 태이경을 떠올리며 진지하게 고개 를 저었다. 지금의 태이경을 알고 있는 자라면 누구도 그 딴 소리를 입에 올리지 못할 게다.

   그 예쁘고 사랑스러운 모습에 껌뻑 기절하는 가솔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모든 것에 시큰둥하고 놀 생각만 뇌에 가득한 태호연과 그의 하나분인 딸조차 넋 빠진 것처럼 아 이에게 정신을 못 차리니,태이경은 과연 천진한 요물이 라 할수 있었다.

   태성문은 태국영에게 전화해 방금 전의 일을 빠짐없이 보고했다. 예상대로 태국영은 담담하게 ‘그래. 알았어.’하 고 말았다. 통화가 끝난 뒤 기분 좋게 게임기를 다시 두 손 에 들었다.

   직장인이 되어버렸다면 아마 이런 소소한 즐거움도 없 었을 거였다. 거기에 더해 요즘엔 사랑스러운 도련님이 매 일 엄마 곁에 찰싹 붙어 있으니,멀찍이서 구경하는 재미 도 쏠쏠했다.

   역시 직장인의 길을 격렬히 거부한 것은 제 인생 최고

의 선택이었다.

   여홍재 본부장의 비서실이 급작스레 꾸려지면서 일시 적인 인사이동이 있었다. 보통 임원들은 이미 손발이 잘 맞는 수석비서들을 하나씩 꿰찬 상태였지만 급작스레 승 진을 하게 된 여홍재에게 그러한 수족이 있을 리가 만무했 다. 그에 여군호는 여홍재의 임시 비서실장 자리에 여진희 를 임명했고,여진희는 비서실이 안정되기까지 체계를 잡 아 주는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오늘 그녀는 세 명의 신입 비서들을 양옆에 낀 채 스케 줄 관리 노하우를 설명하고 있었다. 신입 비서들은 회사에 서 자체 개발한 캘린더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교육을 받 은 채였지만 그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법은 모르고 있 었다. 여홍재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달갑지 않 은 일이었지만,그래도 제 맡은 바 임무에는 충실하게 임 할 생각이었다.

   “수행비서님과 내근비서님 모두 이 원격조종 프로그램 은 잘 익혀두셔야 해요. 내근비서님들은 밖에서 수행비서 님이 실시간으로 입력하는 일지를 수시로 체크하셔야 되

고,수행비서님은 안에서 수정되는 사항들을 빠르게 확인 하고 익혀두세요. 본부장님께서 어떤 질문을 하셨을 때 즉 각 대답해드릴 수 있도록 말이에요. 자,한번 해 보세요.” 여진희의 지시에 따라 내근비서 둘이 번갈아 캘린더를 수정한 두I,수행비서는 스마트패드로 프로그램에 접속했 다. 스마트패드에는 방금 전 수정된 항목들이 또렷한 색상 으로 떠올라 있었다. 수행비서의 손끝이 확인 버튼을 누 를 때마다 그것은 제날짜에 돌아가 박혔다.

   꽤 매끄러운 수순이라 여진희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 였다. 다들 습득력이 발리 이대로라면 당초 예상보다 더 발리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엔 반대로 수행비서님이 수정해 보세요.”

   그리고 막 역할을 바꿔주었을 때였다. 느닷없이 키폰 이 울려 고개를 돌리자 회장실 내선이 깜박이고 있었다. 여진희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예,가주님. 진희예요. 말씀하세요.”

   교육 중이었던 비서들은 그녀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여군호가 저 똑똑한 인간 여자를 딸처럼 총애하고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회사 안에 서 저 정도로 허물없이 여군호에게 대꾸할 수 있는 이는, 그들이 알기에 그녀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하다

못해 여제운조차 꼬박꼬박 극존칭을 붙였다. 여홍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병수 편에 그리로 간식 좀 보냈다. 개 도착하면 여 본 부장 딸려 보내.〉〉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잘 먹겠습니다.”

   《그래. 많이 먹어라.》

   통화가 끝나고 여진희는 본부장실 문을 노크했다. 들어 오K 여홍재가 말했다. 저 거만한 말투는 언제 들어도 거슬 렸다. 여진희는 문을 열고 들어가 로봇처럼 딱딱하게 말했 다.

   “가주님 전언입니다. 여병수 비서가 도착하면 그와 함 께 회장실로 오라고 하십니 다.”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여홍재가 몸을 일으켜 옷장으로 다가갔 다. 여진희는 그가 등을 돌린 사이 빠르게 눈을 굴렸다. 책 상 위는 단정하게 정리되어 깨끗한 상태였다.

   어디다 둔 거지?

   오래 훑어보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보고가 끝났는데 도 멀뚱히 서 있다면 의심 많은 여홍재는 분명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었다. 여진희는 이번에도 별수가 없나 싶어 자 연스럽게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검은색 둔탁한 빛이

그녀의 동공을 스쳤다. 티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놓인 소파에서 한순간 반짝인 빛이었다.

   막 재킷을 꺼내든 여홍재가 몸을 틀었다. 그와 눈이 마 주치기 직전 여진희는 돌아섰다.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따가운 시선이 뒤통수에 맺혀 왔다. 문고리 잡은 손의 떨 림이 그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발라진 고동이 늑골을 울렸다. 침착하게 소리 없는 심 호흡을 반복했다. 괜찮았다. 머뭇거린 시간은 짧았고 움직 임은 충분히 자연스러웠다.

   고작 1 초 정도에 초조해하는 스스로가 너무 과민하게 여겨지긴 했다. 그러나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그녀는 그 괜한 노파심을 때려잡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범함보다 는 신중함이 더 필요할 때였다.

   신입 비서들은 스마트패드와 컴퓨터를 각각 조작하며 프로그램을 살피는 중이었다. 여진희는 데스크 아래 놓아 둔 휴대폰을 들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놀렸다.

   기금.』

   답장은 곧바로 왔다.

   『알았다.』

   딱딱한 말투가 액정 안에 녹아들어 있었다. 별거 아닌

한마디를 장문의 편지라도 되듯이 읽고 또 읽었다.

   “진희 님 연애하시나 보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여진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 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하고 물으니 수행비서가 씩 웃으 며 투박한 검지 끝으로 뺨을 가리켰다.

   “아니. 꽃처럼 예쁘게 웃으셔서. 누구예요? 애인?”

   대답 없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을 때 여병수가 도착했다. 그는 한 아름 안고 온 박스를 데스크 위에 놓아 두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진희 씨.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고마워요. 달콤한 냄새가 나네요. 도넛인가요?”

   “예. 도넛도 있고 케이크도 있어요. 물론 날고기도 있고

요.,,

   시큰둥했던 수행비서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여진 희는 성급하게 박스 안으로 손을 넣는 그의 어깨를 다독이 며 말했다.

   “비서실은 잠시 제가 볼 테니 세 분 편하게 휴게실 가 서 간식 먹고 와요. 저는 그 다음에 먹을게요.”

   “어,그래도 돼요?”

   “네. 어차피 오늘 이후 일정은 딱히 특별한 게 없으니 괜찮아요. 그래도 십오 분은 넘기지 말고요.”

   “알았어요. 십오 분! 꽉 채워서 농땡이 치다 올 겁니다.

나중에 다른 말하기 없기예요.”

   여진희는 곱게 눈가를 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들 이 휴게실로 사라지고,여홍재는 여병수의 안내로 엘리베 이터에 올랐다. LED 표시판에 나타나는 아라비아숫자가 변화를 보이자 그녀는 재빠르게 본부장실 문을 열고 들어 갔다.

   소파에 놓인 휴대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여진 희는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움켜쥔 채 속으로 기쁨의 비 명을 질렀다. 그간 여홍재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몇 번이 고 기회를 엿보았으나 번번이 실패했었는데,오늘에야말 로 실망스런 기다림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된 것이었 다-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여홍재와 여군호의 독대가 얼마 나 이어질지는 아무도 몰랐다. 전하상으로 짧게 나눌 수 없는 말이니 직접 호출을 했을 거라는 예측에 기댈 수밖 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홍재의 휴대폰을 들고나온 여진희는 여자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기척 없이 적막한 가운데 은은한 방향제 냄 새만 흘렀다. 가장 구석 칸에 가 두 번 노크를 했다. 똑.

   그러자 문 위로 익숙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까치발

을 들어 그의 손에 여홍재의 휴대폰을 건넸다.

   “고마워.”

   돌아선 등 뒤로 그의 음성이 따라붙었다. 자리로 돌아 온 여진희는 차분히 앉아 호흡을 정돈했다. 고마워,무뚝 뚝한 인사가 달콤한 냄새를 맡은 나비처럼 자꾸만 귓전을 멤돌았다.

   열게 홍조 띤 얼굴이 데스크 안쪽에 비스듬히 붙은 거 울에 들어차 있었다. 핏줄이 비칠 것처럼 희고 매끈한 얼 굴은 여군호의 아내 한수연이 젊었을 적과 신기하리만치 닮았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할정도다.

   한수연이 저를 거둔 것도,여군호가 저를 특별히 아끼 는 것도,여제운이 자기 나름대로는 제게 꽤 다정하게 구 는 것도,모두 다 한수연을 쏙 배닮은 이 얼굴 때문이었다.

   어릴 적에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완벽한 가족이 제게 생긴 것만 같아 마냥 기쁘기만 했다. 그러나 십수 년 의 세월이 누적되어 가는 동안 어린 여자아이는 어엿한 숙 녀가 되었고,신기한 것들을 주워 담느라 바빴던 두 눈은 신열이 도는 듯 묘한 열기를 품게 되었다. 고독을 알아버 린 남자의 황량한 얼굴을 눈동자에 새길 때마다 고통을 곱 씹게 되었다.

   그의 뼈에 스며들고 있을 시린 결핍을 사무치게 이해하 고 있으므로,그가 가엽고 서글펐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것 은 고작 이런 것분이었지만,지금 이 고단한 순간을 견디 어 낸 훗날의 그가 후회에 아파하지 않도록 제가 할 수 있 는 모든 것을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끈질긴 미행 끝에 여홍재가 노리는 바를 눈치 챈 그가 도움을 구해 왔을 때,여진희는 거절할 수 없었다. 이 일이 잘못되어 혹여 제게 불이익이 돌아오더라도 도리 가 없다 여겼다.

   드드드득一

   열은 진동소리와 함께 도착한 메시지는 단 한마디였다.

   『다 됐다.』

   벌써 5분여가 흐른 상태였다. 발걸음을 서둘러 여홍재 의 휴대폰을 도로 받아 왔다. 그리고 본래 있던 소파에 놓 아두었다. 위치와 방향까지 꼼꼼하게 기억해둔 그대로 재 현했다. 몇 번을 거듭 살펴봐도 완벽했다.

   이제 끝이라고 안도하며 돌아서서 문고리를 잡았을 때 였다. 그러나 당기기도 전에 바깥쪽에서부터 완강한 힘이 밀고 들어왔다. 여진희는 떠밀리듯 뒤로 물러섰다.

   열리는 문 사이로 서서히 드러나는 남자의 모습에 얼굴 이 굳어들었다. 체내를 휘돌던 피가 발끝으로 콸콸 빠져나

가는 것만 같았다. 여홍재의 칼 같은 눈썹 한쪽이 슬쩍 위 로 올라갔다.

   “뭐 해,여기서.”

   여진희는 거뭇한 긴장을 애써 표백시키려 애쓰며 그를 살펐다. 정제되지 않은 그의 눈동자가 의아함을 담아 내려 다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생각들이 뒤엉키듯 교차했다. 그 안에서 가까스로 가장 그럴싸한 변명을 끄집 어 올렸다.

   “사무실이 너무 삭막해서 무엇을 놓으면 좋을까 한 번 살펴봤습니다.”

   그의 낯짝은 미동조차 없었다. 다만 눈빛만이 어둡게 반짝였다. 그것이 흥미로움인지 의심인지 구분이 가지 않 았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움켜쥔 주먹 안으로 땀이 찼 다.

   “그래서,뭐가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테이블 가운데에 유리 생화를 하나 두면 좋을 것 같습 니다.,,

   “유리 생화?”

   “생화를 특수한 방법으로 건조시켜서 유리 쇼케이스 안 에 넣어둔 상품을 말합니다. 주기적으로 바꿔줘야 하는 생 화와 달리 반영구적이고 조화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장

점이 있습니다.”

   “아一 종주님 책상에 있는 그거 말이군.”

   “네. 유리병 디자인부터 생화까지 제가 직접 골랐습니 다.,,

   여홍재는 가면 같은 표정을 벗어던지며 픽 웃었다. 그 러나 긴장의 끈을 놓기에는 일렀다.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 이 뒷골마저 뻐근해졌다. 여진희는 옆으로 살짝 비켜나며 학습된 접대 미소를 지어 보였다. 1 초라도 발리 이곳을 벗 어나고 싶었다.

   “건조한 꽃을 밀봉한 것이라 냄새도 나지 않고 좋을 겁 니다. 지금은 아무래도 좀 삭막한 분위기가 강해서요. 하 나 주문할 테니 마음에 안 드시면 버리시는 게 어떨지요.”

   살짝 허리를 굽힌 여진희의 곁으로 여홍재가 스쳐 지나 갔다.

   “년 그런 점마저도 작은어머니를 닮았군. 좋을 대로 해.

   그 말은 틀렸다. 닮은 것이 아니라 닮고 싶기에 노력했 던 것이었다. 옷과 인테리어 소품을 보는 안목이 뛰어난 그녀의 센스를 한 조각이라도 품고자 했던 열망이 어느새 습관이 되어있을 분이었다.

   “여진희/

   막 나가려던 여진희는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았다가 심 장이 내려앉았다. 여홍재가 고작 두어 뼘 간격을 두고 서 있는 것이었다. 크게 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본 것은 다시 금 고개를 드는 초조함 때문이었다.

   혹시 뒤늦게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챘을까.

   “의외네. 마냥 순진한 아가씬 줄 알았더니.”

   그러나 뒤따른 그의 말은 제법 엉뚱했다. 여진희는 얼 핏 당혹감을 느끼며 무심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나도 훔쳐 듣고 싶진 않은데,네 심장 소리가 워낙 크 게 들려서 말이야.”

   여홍재의 뜨거운 손끝이 뺨을 스쳤다. 등줄기로 괜한 소름이 내달렸다. 그 물리적 접촉 때문이 아니라 내리꽂히 는 눈동자에 어른거리는 기이한 탐욕 때문이었다. 그가 말 했다.

   “야망 있는 여자 나쁘지 않아.”

   그는 여전히 모를 말만 연거푸 내뱉었다. 무슨 대꾸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가 봐. 언제 같이 식사라도 한 번 하지.”

   “…네.,,

   속내를 짐작지 못해 어정정하게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얼떨떨한 상태로 나오자 간식을 먹으러 갔던 비서들이 막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일부러 조금 일찍 돌아왔다고 생색내 는 그들을 뒤로 한 채 여홍재가 내뱉은 말들을 한참 곱씹 어 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닫고 말았다.

   여홍재는 지금 여진희 자신이 그에게 짙은 호감을 느끼 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

   그 어마어마한 착각에 화가 치밀었다. 이 세상 남자들 이 모두 감쪽같이 증발해도 저런 놈을 눈에 담을 일은 결 단코 없을 것이었다.

   여진희는 드물게 냉소를 지으며 본부장실 문을 쏘아보 았다. 여군호가 무슨 생각으로 저를 불러들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한껏 도취되어 있는 꼴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이승도는 문득 잠에서 깨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사 위는 칠흑같이 어두워 사물의 윤곽조차 분간하기 힘들 정 도였다. 잠이 덜 깬 머릿속이 안개 낀 듯 몽롱한 와중에도 이승도는 품 안의 아이부터 살펐다. 젖먹이처럼 제게 꼭 붙어 자고 있는 녀석이 잠결에 옹알거렸다.

   “엄마아……

   고사리 같은 손이 는틀 는틀 움직여 밋밋한 맨가슴을 더 듬어 왔다. 잠결에도 심장 고동을 훔쳐가는 이 버릇은 제 아빠를 꼭 닮았다.

   귀여워.

   이승도는 I[웃음토 지으며 아이의 정수리에 뺨을 비볐 다. 누구 뱃속에서 요렇게 예븐 게 나왔을까,잠에 취한 와 중에서도 팔불출처럼 웃음이 나왔다. 척박한 아기집에서 도 꿋꿋하게 살아남은 아기가 너무 대견하고 고마웠다.

   “응.엄마여기 있어.”

   목소리에 반응한 여은태마저 등 뒤에 딱 붙어 꿈틀거렸 다. 이승도는 한 손을 뒤로 뻗어 녀석의 등허리도 살살 매 만져 주었다.

   그때 문득 저만치서 반짝이는 작은 불빛이 시야를 침범 했다. 이승도는 그제야 뒤늦게 잠에서 깬 이유를 이해했 다. 무음으로 해둔 휴대폰 액정이 깜박이면서 예민한 무의 식을 흔들어 깨운 것이었다.

   아이들이 깨지 않게 조심히 팔을 뻗어 휴대폰을 가져왔 다. 자정이 조금 넘어 있는 시각에 걸려오는 전화라면 거 의 두 가지였다. 잘못 걸려 왔거나 동물원에 급한 일이 생 겼거나.

   오늘은 후자였다. 이승도는 익숙한 번호에 전화를 받았 다.

   “네. 이승도입니다.”

   《죄송해요,선생님. 주무셨죠?》

   “괜찮아요. 무슨 일이 있나요?”

   목소리를 죽인다고 죽였으나 감각이 발달한 아이들은 금세 뒤척이기 시작했다.

   《나래가 조금 전부터 산통이 시작된 것 같아서요. CCTV를 봐도 정확히는 알 수 없는데,여러 가지 징후가 일단 들어맞거든요. 전에 선생님이 언제든 꼭 알려달라고 하셔서 전화 드렸어요.》

   이승도는 나래의 이름이 들렸을 때부터 용수철처럼 몸 을 일으켰다.

   “양수는 터졌어요?”

   《아뇨,아직이요.〉〉

   “지금당장갈게요.”

   이승도는 전화를 끊고 서둘러 옷장으로 뛰어갔다. 두 아이들이 졸린 눈을 무겁게 깜박이며 제 뒤를 졸졸 따라왔 다.

   “엄마 어디 가요?”

   “응. 동물원에 임신 중이었던 치타가 새끼를 낳을 준비

룰 하고 있대서 가 봐야 돼.”

   잠옷 대용으로 입는 반바지만 벗어 던지고 옷을 꺼내 입었다. 태이경은 잠이 확 깬 얼굴로 ‘우아! 아가 나와?’하 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태국영이나 여은태와는 달리 녀석은 동물을 좋아하고 친화력도 좋았다. 제가 집에서 보 살피는 작은 동물들과도 꽤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아마 도 이것은 제 성향을 닮은 것 같았다.

   [벌써 자정이 훌쩍 지났는데 선생님 혼자 가? 태국영 은?]

   “모르겠어. 어디 잠깐 나갔나 봐.”

   여은태는 킁킁대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어디 간 거야.

’하고 투덜거렸다. 이승도는 옷을 다 입고 앉아 녀석의 몸 을살펐다.

   “상황에 따라 선생님 오늘 못 들어올 수도 있어. 어디 아픈 데 없지?”

   [선생님 등에 꼭 붙어 있었더니 괜찮아.]

   “그래. 우리 은태가 형이니까 선생님 대신 이경이 잘 자 라고 쓰담쓰담 해 줘. 알았지?”

   [응. 내가 아가 잘 재울게. 다녀와.]

   여은태는 의욕 좋게 대답했다. 이승도는 두 아이의 배 응을 받으며 차고로 갔다. 중형차 두 대가 들어가면 꽉 차

는 차고에는 제 차와 태국영의 차가 일직선상으로 주차가 되어 있었다. 입구를 막고 있는 태국영의 차에 올라 시동 을 걸었다. 엔진이 데워지는 동안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신호음이 끊기자마자 물었다.

   《우리 승도,자다가 깨서 서방님이 보고팠나…… 했는 데,웬 엔진 소리야?〉〉

   장난치듯 받아치던 그의 목소리가 일순 낮아졌다.

   “나 지금 치타가 새끼 낳을 것 같아서 동물원에 가봐야 되는데,어떻게 해?”

   과일 사러 한 번 잘못 나갔다가 저도 은태도 혼쭐이 난 이후로 이승도는 차라리 사소한 외출도 미리 알려주고 있 었다. 가까운 곳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아예 출근을 해야 할 판이니 말없이 나가면 또 불똥이 날아올 게 분명했다.

   태국영은 잠시 생각하는 듯싶더니 말했다.

   《성문이 데려가.〉〉

   “급한데……

   〈〈오 분도 안걸려. 데려가.〉〉

   다짜고짜 저 할 말만 내뱉은 태국영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승도는 어리벙벙하게 눈을 깜박였다. 태국 영은 도대체 이 야밤에 어딜 가 있는지,태성문은 무슨 수

로 5분 안에 도착한다는 건지 궁금했으나 마음이 급해 일 단 차부터 뺐다.

   이승도는 대문 앞에 정차해 두고 초조하게 운전대를 두 드렸다. 나래의 양수가 언제 터질지 몰라 마음이 다급했 다. 그나마 차가 막힐 시간이 아니라 20분이면 도착할 거 라는 것만이 위안이었다.

   10초에 한 번씩 시계를 보며 입술을 물어뜯고 있던 때 였다. 이승도는 어느 순간 모든 행동을 멈추고 전면유리 너머를 명하니 응시하며 입을 벌렸다.

   저분이 왜 저기서 나오지?

   검은색 폴로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건장하고 잘생긴 청 년이 제 집의 맞은편 옆집에서 당당히 걸어 나오고 있었 다. 익히 알고 있는 태성문이었다. 5분도 안 걸린다던 태 국영의 장담이 귓가에서 왕왕 울렸다. 넋을 놓고 있는 사 이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운전석을 노크했다.

   “제가운전하겠습니다.”

   이승도는 얼떨떨한 머리를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 보조 석으로 옮겨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태성문은 운전석에 올 라 기어를 옮겼다.

   “출발하겠습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거기 살고 있었나 물을 새도 없이 그

가 액셀을 밟았다. 차량이 총알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한순간 몸이 강하게 떠밀려 좌석 등받이에 짓눌리는 느낌 이 들 정도였다. 이승도는 기겁하며 머리 위의 손잡이를 황급히 붙들었다.

   “너,너무 빠른데요!”

   어찌나 놀랐는지 목소리가 거친 결로 갈라져 나왔다. 그러자 태성문은 도리어 의아한 표정으로 힐긋 이승도를 보았다.

   “급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아니,그야 급하긴 급하지만…… 으악! 앞에 보셔야 죠!”

   태성문은 고개를 갸웃하며 핸들을 터프하게 돌렸다. 이 승도는 차 문에 가볍게 처박혔다. 차는 걱정과 달리 유연 하게 코너를 빠져나가 다시 골목을 달렸다. 중간중간 장애 물처럼 길가에 주차된 차를 요리조리 빠져나갈 때마다 이 승도의 혈색은 한 단계씩 창백해져 이내 새파래졌다.

   “저,저,성문 씨. 속도 좀 줄여주시면……

   곡예 수준의 골목 운전이 끝나고 마침내 차도에 진입했 을 때,이승도는 꽉 붙들고 있던 목소리를 겨우 풀어냈다. 태성문은 별다른 대꾸 없이 속도를 줄였다. 가슴이 벌렁벌 렁 뛰어 목까지 진동했다.

   “안전운전 부탁드립니다. 제발.”

   떨리는 목소리로 거듭 청했다. 태성문은 그제야 아,하 더니 믿음직스레 미소를 지었다.

   “안심하십시오. 누가 와서 고의적으로 들이받지 않는 한 저희들은 차사고를 낼 일이 없습니다. 가주님 차를 자 주 타셔서 익숙해지신 줄 알았는데,겁나셨다면 죄송합니 다.,,

   “…국영이는 이렇게 운전 안 해요.”

   태국영이 적정속도를 지키는 편은 아니었으나 지나친 과속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태성문은 느리게 눈을 두어 번 깜박인 뒤 다시 고개를 갸웃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 다.

   “가주님은 저희들 사이에서도 광란의 레이서로 유명하 신데.”

   이승도는 여전히 진정 안 되는 가슴을 한 손으로 눌렀 다. 태국영이 갑자기 무럭무럭 예뻐지는 것만 같았다.

   “국영이는 어디 갔나요?”

   생각난 김에 묻자 태성문은 조금 곤란한 듯 웃었다.

   “가주님은 원체 어디에 있다 뭘 한다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승도는 쉽게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성문 씨는 도대체 언제 이사하신 거예요?”

   “제가 형수님 가드를 맡자마자 옮겼으니 아마 일 년 조 금 넘었지 싶습니다.”

   “일 년이나요?”

   그런데 오래,그렇게 가까이 있었는데도.

   이승도는 그동안 제가 한 번도 눈치를 못 챘다는 사실 에 적잖이 충격받았다. 나름 예민하게 주위를 살핀다고 자 부했는데 어째서 몰랐을까. 한참을 고민하다 스스로는 답 을 낼 수 없어 솔직히 그에게 물었다. 태성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형수님이 불안해할 거라고 가주님께서 당부하셨습니 다. 최대한 기척도 냄새도 숨기라고 하셔서 그렇게 따른 것이니 이상해하실 거 없습니다.”

   “어…… 냄새를 숨긴다는 게 가능한 건가요?”

   “우리끼리야 조금 어려울 분 인간을 상대로는 아주 쉽 습니다. 그래야 할 필요가 없으니 다들 안 할 분이죠. 그래 도 예민한 형수님 코를 일 년 넘게 완벽히 피했으니 제가 좀 유능하다는 증거겠지요.”

   “…네.,,

   독특한 캐릭터구나 싶었다. 태성문과 처음 대면한 것 은 그의 말대로 1 년쯤 전이었다. 어느 날 태국영이 그를

데려와 말했다.

   「애 잘 기억해 둬. 네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뒤를 따 라다닐 거야. 혹시 주변에서 낯선 냄새 난다고 겁먹지 말 고.」

   그 뒤로는 딱히 길게 마주칠 일도 말 섞을 일도 없어 모 르고 있었다.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그를 신기한 듯 바라보다 문득 뇌리를 스친 생각에 휴대폰 을 꺼냈다.

   깜박 잊고 여전히 무음으로 둔 폰에서 역시나 부재중 램프가 점멸하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태국영이었다.

   《우리 승도,외간남자가 운전하는 차 타고 잘 가고 있 어?》

   이승도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너 나 스토킹 하더라?”

   《물론 나는 우리 조강지처 스토킹이 삶의 낙이지. 그게 왜.》

   뻔뻔한 반응이 지극히 태국영다웠다. 딱히 더 핀잔할 생각은 없었다.

“이 오밤중에 넌 어디 나갔어?” 《약속이 있어서.》

   뒤따르는 부연이 없었으나 그냥 그러려니 했다.

   “나 오늘 못 들어올지도 몰라. 새끼들이 발리 나오고 건 강하면 괜찮은데,산통이 길어지거나 위중한 상태면 아마 오래 지켜보고 있어야 할 거야.”

   〈〈오기 전에 전화해. 모시러 갈게.》

   “네가 직접?”

   《응. 밤샌 마누라 픽업해 와서 품에 안고 낮잠이나 자 게.》

   “알았어. 상황 봐서 전화든 문자든 할게. 너도 무슨 볼 일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찍 들어가서 애들 좀 봐줘. 어린 애들끼리 있어서 불안해.”

   둘 다 의젓하고 알아서 잘하는 아이들이었지만,그래 도 어른이 하나도 없는 집에 둘만 놓고 나오려니 여간 걱 정이 되는 게 아니었다.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둬. 몇 놈이 편 먹고 몰려오지 않 는 이상 걱정할 거 없으니까.》

   “무슨 말이야?”

   《네가 애기애기 하면서 불면 날아갈까 품에 끼고 사는 꼬맹이가 네 상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말이지. 근성도 좋아 서 제 한 몸 잘 지키고 이경이도 잘 지킬 거야.》

   태국영의 입에서 여은태의 칭찬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

다. 커다랗게 열린 눈꺼풀이 느리게 깜박였다. 가슴이 잔 잔히 두근거리고 있었다.

   마치 밖에서 낳아 온 아이가 이제야 조금씩 새 아빠에 게 예붐받기 시작한 느낌이랄까.

   비유가 조금 이상했으나 기분이 좋아져서 빙긋 웃었을 때였다.

   《그래도 그 둘만 놔둘 순 없지. 금방 돌아갈게.》

   “…응? 믿을 만하다며.”

   《그런 성질과는 달리 꼬맹이가 이경이 보는 눈이 심상 치가 않아서 말이야.》

   이승도는 숨을 들이켠 채 굳어들었다. 아득한 거리에서 도 그 반응을 감지해 낸 태국영은 도리어 기가 찬다는 듯 실소했다.

   《너 쫓아다닐 때랑 이경이 쫓아다닐 때 미묘하게 다른 거 몰랐어? 아주 예뻐 죽으려고 하잖아. 너랑 있을 땐 마 냥 응석쟁이가 이경이 앞에선 꼬박꼬박 멋진 남자로 어필 하고 싶어 하고.〉〉

   “그…그런……

   《어쨌든 볼일 끝내고 금방 들어갈게. 이따 전화해.》

   전화를 끊고도 이승도는 한동안 망연히 눈만 깜박였다. 그런 식으로 상상해본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태국

영의 발언에 의거해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더니 과연 녀석이 태이경을 대하는 것이 과도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이,이거 위험한 거아닌가.

   이승도는 당연히 태국영과의 어긋난 과거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너무 어릴 때부터 저에게 각인한 나머지 태 국영은 일찌감치 발정이 앞당겨졌다. 피를 쏟는 심정으로 인내하려 했으나 결국 그는 본능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그로 인해 서로가 얼마나 오랫동안 아파했었는지 되새김 질할 때마다,이승도의 낯은 창백하게 질려갔다.

   성교육. 성교육.

   결론적으로 뇌리에 남은 단어는 그것이었다. 태이경은 아직 아기니까 후일로 미뤄두더라도,여은태는 오늘부터 라도 확실히 교육시켜야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질 높은 라이브음악이 조도 낮은 실내를 끈적하게 녹였 다. 파이프오르간의 관을 본뜬 조명은 일정 거리를 두고 걸린 채 파스텔 톤 빛을 발산했다. 조명 걸린 벽마다 구상 나무가 새겨진 반투명 유리가 붙어 있었는데,눈꽃 결정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흘러내리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

출했다.

   태국영은 헐겁게 다리를 꼬고 소파 팔걸이에 상체를 비 스듬히 기대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며 통화 중인 그의 옆 얼굴은 신이 공들여 빚은 듯 완벽한 윤곽을 봄냈다.

   “오기 전에 전화해. 모시러 갈게.”

   휴대폰을 쥔 손의 모양조차 우아하기 그지없는 그는 블 랙진에 감청색 반팔 폴로셔츠를 입고 있었다. 저 정도로 막 입고 나온 손님은 적어도 이 호텔 라운지 바에 단 한 명 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독보적으로 시선을 끌었다. 그 리고 그의 맞은편에 앉은 남강우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 다-

   남강우 역시 반팔 셔츠에 슬랙스의 세미 정장 차림으 로 많은 이들의 이목 속에 있었다. 로맨틱하다 못해 야릇 한 분위기까지 흘리는 바는 사시사철 맵시 있게 차려입은 남녀들이 짝을 찾느라 바븐 곳이었는데,오늘은 지나치게 잘난 두 남자 덕분에 많은 이들이 허탕을 치게 될 게 분명 했다.

   “밤샌 마누라 픽업해 와서 품에 안고 낮잠이나 자게.”

   호텔 라운지 바에서는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자 정이 넘었음에도 몸을 낮춘 도시에는 불티가 홑날렸고,멀 리 보이는 한강 다리의 불빛이 강물에 반사되어 일렁거렸

다. 부드럽게 풀려 있는 그의 눈동자로 그 빛 가루가 배곡 히 일렁거렸다.

   남강우는 태국영의 이면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노 골적으로 눈빛에 촉수 같은 가시를 세우고 주시했으나 태 국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마치 주변의 모든 것을 까맣 게 지워버린 듯 제 애인과의 통화에만 열중했다. 방금 전 까지 최가 새끼들 운운하며 살벌하게 이를 드러내 웃던 것 과는 영 딴판이었다.

   “어쨌든 볼일 끝내고 금방 들어갈게. 이따 전화해.”

   태국영은 끊긴 휴대폰을 테이블에 놓았다. 미묘한 표정 으로 팔짱을 끼고 있던 남강우가 입술을 비틀었다.

   “웬만하면 다른 놈들 앞에서는 애인이랑 통화하지 마 라. 아주 역해서 혼났다.,,

   태국영의 교태라니 신물이 올라올 정도였다. 태국영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그들의 테이블 위로는 이미 위스키와 보드카,그리고 코냑까지 빈 병들이 줄지어 있는 상태였다.

   “너도 우리 승도처럼 예븐 마누라 얻어 보면 별다를 거 없을걸.”

   “됐고. 하던 애기나 마저 하지.”

   그냥 놔두면 마치 제 애인 자랑을 할 것 같은 분위기라

남강우는 냉정하게 잘라냈다. 태국영은 좀 아쉽다는 듯 혀 로 입술을 축이며 더블스트레이트 잔을 들었다.

   “나 하고 싶은 애기는 얼추 끝났어. 나머지는 네 선택 에 달린 문제고.”

   “글쎄. 지금으로썬 딱히 끌리지 않는데.”

   남강우는 심드렁하게 얼음 하나를 부숴 먹었다. 무표정 한 그의 눈은 수많은 빛의 조각들을 품은 채 태국영에게 고정되었다.

   “현재의 내 관심사는 그쪽이 아니야. 바로 네 애인이지. 잘알지 않나.”

   “알지.”

   “그리고 년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고. 네가 날 통해서 궁극적으로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거래를 하 려면 적어도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나.”

   태국영은 한쪽으로 기울이고 있던 고개를 반대쪽으로 꼬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풍성한 속눈썹이 조금 아래 로 늘어졌다. 남강우는 직원을 불러 술을 하나 더 시켰다.

   직원이 발렌타인을 놓고 사라졌을 때,태국영은 엎어 져 있던 휴대폰을 들었다. 그는 무언가 찾는 듯 기기를 잠 시 조작하더니 테이블에 다시 내려두고 손끝으로 툭 밀었

   “이것 좀 볼래?”

   남강우는 한쪽 눈썹을 들었다. 그의 손을 떠난 휴대폰 이 반 바퀴를 돌며 제 앞으로 스르르 미끄러져 와 멈추었 다. 반사적으로 내려다보았다. 액정을 한가득 채우고 있 는 것은 태국영의 애인과 어린아이가 한쪽 뺨을 맞댄 채 빙그레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우리 승도가 안고 있는 아이가 내 아들이야.”

   이 무슨 뜬금없는 전개인가 의아해하던 남강우는,무심 결에 상체를 세웠다. 그리고 빤히 액정을 들여다보다 불현 듯 깨달았다. 친근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는 둘은 굉장히 닮아 있었다.

   “성년식 전에 애가 생겼다지.”

   “응. 내가 굉장히 좋아해서 발정이 일찍 와 버렸거든.” “네 애인을 가드하는 놈이 말하길,다섯 살 때부터 네 목표는 하나분이었다고 하던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게는 우리 승도 하나분이었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이걸로 충분히 대답 이 되었다. 그가 왜 갑자기 관심도 없는 최 가를 운운하며 제게 이상한 제안을 했던 것인지 까지도.

   남강우는 실소하며 흔들던 잔을 입술에 붙였다. 단번

에 내용물을 비운 그가 물었다.

   “아주 예민한 문젠데,날 뭘 믿고 알려주는 거지.”

   “뭐가 예민해. 우리 승도가 뭐가 됐건 내 아내고 내 아 이의 엄마일 분인데.”

   “등대는 공유하는 것이 일족의 법칙이었다.”

   “그 법칙을 내게 들이대는 새끼들은 없을 거야. 있어도 내가 다 찢어 죽일 거거든.”

   물컹하고 나른했던 어투가 일변했다. 흔들리는 조명이 그의 얼굴에 깊은 음영을 남겼다. 오만하게 솟은 콧대 아 래 관능적인 모양의 입술이 야만적으로 뒤틀렸다. 그의 눈 가가 서슬 퍼렇게 휘었다.

   “그리고 뭘 잘못 알고 있는데,그 법칙은 우리가 정한 게 아니라 등대들 스스로가 정한 거였어. 우리들은 그들 의 의견을 어쩔 수 없이 존중했을 분이지. 그들이 원했으 니까. 우린 따를 수밖에 없을 만큼 감정적으로 약자였고.” 남강우에게는 생소한 관점이었다. 그러나 평소 등대에 대해 관심이라곤 전무했던 터라 제 정보는 한계가 있었 고,태국영이 그런 걸로 말장난을 할 것 같지도 않았다.

   “너 같으면 정신 못 차릴 만큼 예뻐하는 상대를 다른 새 끼 품으로 돌리고 싶겠어? 그런 놈이 있으면 그게 또라이 지.,,

   또한 태국영의 말은 논리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었다. 풍성한 속눈썹 아래 짙게 내려앉은 눈동자 는 거친 안광을 쏟아냈다. 남강우는 그 눈빛을 빤히 마주 보다 대꾸했다.

   “그래.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그리고 네가 굳이 네 애 인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도,공유를 강요하는 놈들을 끝까지 잡아 죽일 생각인 것도 알겠어. 그런데.” 태국영의 눈매가 가늘게 봅혔다. 풍성한 속눈썹이 그 의 눈 밑에 가시 같은 그늘을 드리웠다.

   “네 애인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나?”

   “이건 또 무슨소리야.”

   “네 애인이 과거의 등대들처럼 여러 금수들을 부리면 서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나는 말이다.” 태국영은 동요 없이 매끈하게 입술을 휘었다.

   “그런 확신이 없었더라면 영원히 숨기고 살았겠지. 다 른 건 몰라도 난 우리 승도 나눠 가지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으니까.”

   과연 그럴까.

   인간들의 권력욕은 가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가 진 놈들은 더 가지려 발악하고,못 가진 놈들은 가진 놈이 되기 위해 발악했다. 그들의 음습함은 저들 일족보다 더하 면 더했지 절대 못하지 않았다.

   “그런데 너,여제운이랑 안친해?”

   맥락 없이 틀어진 화제에 남강우는 잔을 채우다 말고

눈을 들었다. 그리고 가차 없이 말했다.

   “개처럼 너무 꽉 막히고 답답한 타입은 질색이다.”

   “아하,그래서 네가 날 좋아하는구나. 내가 리듬체조선 수처럼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태국영은 어린애처럼 무구하게 눈을 빛내며 헛소리를 뱉어냈다. 어이가 없었던 남강우는 잠시 멀거니 눈만 깜박 이다 이내 이를 갈듯이 웃어 보였다.

   “착각은 자유지만 나로서는 불쾌한 착각이군.”

   “매정하네. 주위를 다 둘러 봐도 나만큼 우정 쌓기 좋 은 상대가 없을 텐데. 무엇보다 너랑 대작해주는 놈이 나 밖에 없지 않아?”

   “제 속 뒤틀리면 일단 손부터 나가는 놈하고 무슨 우정 을 쌓아.”

   “꼭 너는 아닌 것처럼 말한다?”

   남강우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전이라면 의연하게 부 정할 수 있었으나 약을 끊은 뒤 충동을 절제하기 힘들어 진 건 사실이었다. 신영애의 파티에서 폭력사건을 일으킨 것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원래 자신은 그런 일로 쉽게 피 를 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됐고,여제운 애기는 뭐나.”

   남강우는 귀찮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태국영은 선선 히 대답했다.

   “개 얼마 전에 승도한테 대시했다가 대차게 까였거든. 만약 승도가 권력이 탐났다면 그만큼 좋은 먹이가 없었을 텐데 말이야. 안 그래?”

   “…여제운이?”

   남강우의 눈매가 시원하게 벌어졌다. 은은한 푸른빛으 로 바뀐 조명이 그의 놀란 눈동자 안에서 파도처럼 산란했 다. 갖고 싶다고 말하던 여제운의 음성이 문득 뇌리를 스 쳤다. 과연,앞뒤 꽉 막힌 놈답게 정공법으로 밀고 나간 모 양이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태국영은 잔을 채우고 또 비운 뒤 말했다.

   “그 여제운이한테 우리 승도가 말했지. 내게는 국영이 분이에요.”

   남강우의 낯이 구겨졌다. 그는 소름 돋는 팔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연애놀음은 나 없는 데서 해라. 제발.”

   “그저 알려준 건데 왜 그렇게 과민해. 혹시 우리 승도 손 한번 잡고 싶어서 따라다니느라 그간 잘 못 풀었어?”

   “내 성 생활을 너에게 알릴 의무는 없지.”

   “네가 꼭 욕구불만에 시달리다 행복한 연인을 질투하 는 모양새라 그래. 쌓아두지 마. 그거 정신건강에 안 좋 아.,,

   태국영은 얼핏 시계를 보더니 휴대폰을 챙겨 들었다. 그는 더 이상 미련 없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덧붙 였다.

   “난 일하러 간 마누라 대신 이만 애 보러 가야겠어. 돌 아가서 내가 했던 말 곰곰이 잘 생각해 봐. 기한은 한 달이 야.,,

   남강우는 팔랑팔랑 손사래만 쳤다. 태국영은 그대로 자 리를 떠 카운터에서 계산을 한 뒤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남강우가 미끼를 물었으면 싶지만,물지 않더라도 사 실 큰 상관은 없었다. 피 보는 걸 싫어하는 이승도 때문에 평화로운 방법을 택할 수 있다면 그편이 더 나을 분이었 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을 때,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형님,형수님 동물원 도착하셨습니다. 근처에서 대기 합니다.』

   착실히 보고하는 태성문에게 ‘그래.’하고 짧게 대답했 다. 태국영은 기어를 옮기고 액셀을 밟았다. 끼이이이,타 이어가 사납게 바닥을 마찰했다.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

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주차장을 빠져나간 차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한산한 도로를 질주했다. 과속단속 카메라가 수도 없이 그 를 찍었을 것이나,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나래는 긴 산고 끝에 귀한 새끼를 네 마리나 낳았다. 초 산인데다 산통이 길게 이어져 녀석은 기진맥진한 상태였 음에도 열심히 새끼들을 할아주며 돌보는 기특한 모습을 보였다.

   조마조마하게 산실의 CCTV를 주시해야 했던 사육사 와 이승도는 나래가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고 나서야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며칠 내내 숙직을 번갈아 했던 사 육사들은 퀭한 눈으로 서로를 얼싸안고 기뻐했고,이승도 도 그 사이에 끼어 싱글벙글했다. 모두 잠이 부족해 비몽 사몽이었으나 새끼들이 어미 배에 매달려 꼬물거리는 모 습을 보고 있으면 피로는 참으로 하찮은 문제로 전락했다.

   나래를 식사시간에 내실로 들인 뒤 보양식을 먹이는 동 안,산실에 남은 새끼들의 건강 상태를 체크했다. 코안의 불순물이 잘 제거되어 호흡들은 안정적이었다. 다만 마지

막에 나온 녀석이 유난히 기력이 없어 보였는데,그도 크 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보양식을 말끔하게 해치우고 돌아온 나래는 다시 자리를 깔고 누워 새끼들을 돌보았다.

   초산인 나래가 모성을 보이지 못하면 어쩌나 했던 것 은 모두 기우였다. 며칠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이대로라 면 아주 무난하게 자연포육을 해도 될 것 같았다.

   감격한 사육사가 싱글벙글 웃으며 동료 사육사와 하이 파이브를 했다.

   “우리 동물원에 이런 경사가 생기다니,이건 기념비적 인 일이야.”

   “벌써부터 방송국에서 취재 요청이 쇄도하고 있대요. 관리부장이 아주 입이 조커처럼 입이 찢어져서 다닌다는 괴담도 돌고요.”

   근거 충만한 소문이었다. 이미 관리부장은 숙직실에 들 러 오늘 두 시간씩 일찍 퇴근해도 좋다고 통보했다. 깐깐 한 그의 성격으로는 절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사육 사 둘은 다크서클 맺힌 눈을 길게 찢어 한참을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다 그들은 예고 없이 이승도의 곁에 착 달라 붙어 어린애처럼 눈을 빛냈다.

   “쌤. 우리 오늘 맥주 한잔합시다.”

   애기가 왜 그런 쪽으로……

   이승도는 당황해하며 손을 내저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태산이에게 버림받은 베테랑 맹수 사육사까지 합세 했다.

   “이 선생. 진짜 가볍게 한잔하자. 오늘 같은 날 안 마시 면 언제 마셔. 저번에도 아가씨들한테 둘러싸여서 한 잔 도 같이 못 부딪쳤잖아.”

   “아… 저,그럼 오늘 숙직은……■,,

   “괜찮아,괜찮아. 내가 거의 이 주 내내 여기서 먹고 자 고 하다시피 했는데 하루쯤 다른 놈한테 맡겨도 돼.”

   다섯 살 연상의 그는 이제 꽤 친숙하게 말을 놓고 있었 다. 연하는 잘 다뤄도 연상은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이승 도는 애매하게 굴다 결국 발목을 붙잡혔다. 얼떨결에 떠밀 려 ‘치킨에 맥주!’를 연호처럼 외치고 만 이승도는 뒤늦게 밀려온 민망함에 홀로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이따 봐! 도망치면 우리 쌤 왕따시킬 거야!”

   “네. 꼭 참석할게요.”

   뒷일을 사육사에게 맡기고 진료실로 오던 길,이승도 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살갗에 물기가 맺혀 왔다. 반사적 으로 올려다본 하늘은 모르는 사이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낭패로 얼굴을 흐리자마자 가는 빗줄기가 이상한 궤도로 홑날리어 내려앉기 시작했다.

   일기예보를 챙겨볼 틈이 없었던 터라 우산도 우비도 준 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빗줄기는 빠르게 부피를 늘려갔다. 사분했던 빗방울의 착륙 소리도 곧 육중한 소음으로 변했 다. 순식간에 전신을 휘감은 빗줄기는 희부연 장막으로 시 야를 흐렸다.

   다 젖고 나서야 뛰기 시작했다. 살갗을 뚫을 듯한 엄청 난 장대비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손차양으로 겨우 시야 를 확보하며 허둥지둥 진료실로 뛰어가고 있을 때,문득 익숙한 향기를 맡았다. 이승도는 무심결에 걸음을 멈춰 몸 을 돌렸다.

   그 순간 후끈한 열기가 코끝에 스몄다. 무겁게 물 먹은 천이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정수리를 때리던 비가 멈추었 다.

   “나 없는 데서 이렇게 젖으면 어떡해.”

   달콤한 암흑이 묻은 목소리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너무 야해서 서방님 불안하잖아.”

   태국영은 차에 싣고 다니는 바람막이 점퍼로 이승도의 머리 위를 크게 가리고 있었다. 이승도는 턱까지 올랐던 숨을 가쁘게 내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폭우가 감싼 그의 몸에서 보얗게 물보라가 일었다. 곡 선이 또렷한 입체적인 이목구비는 물비늘처럼 반짝였고,

무채색의 반팔 셔츠는 반투명하게 젖어 그 속에 감춰진 남 성적인 굴곡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열렬히 봐. 설레게.”

   태국영이 농치듯 건네 온 말이 송곳처럼 가슴을 찔러 왔다. 이승도는 넋을 놓고 올려다보던 그의 얼굴에서 시선 을 뜯어냈다. 흔들리는 눈이 발치를 헤맸다. 외곽 시야에 는 여전히 척척한 옷에 감싸인 그의 몸뚱이가 시야를 어지 럽혔다.

   이승도는 무심결에 벨트 바깥으로 살짝 튀어나와 있는 그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심장 고동이 목에서 뛰어 귓전에 서 울렸다. 당황스러웠다. 뜬금없이 전신을 뒤흔드는 열 띤 충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태국영의 고개가 깊이 떨어지더니 점퍼 아래를 파고들 어왔다. 한 뼘 더 다가온 향기는 소름 돋게 자극적이었다.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 물기 젖은 손끝이 턱을 쓰다듬 어 왔다.

   이승도는 느릿느릿 눈을 들었다. 시선이 쓸고 간 길은 창백하게 젖은 손끝이 더듬고 올라갔다. 그의 눈은 묘하 게 탁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국영아.”

   응,그가 대답했다. 이승도는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

처럼 다시금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나 이따 퇴근하고 사육사들이랑 맥주 마시기로 했어.” 달콤한 말을 기대했던 태국영의 매끈한 낯에 미묘한 실 금이 갔다. 이승도는 못마땅함과 어이없음 사이를 헤매는 그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또 대기하다가 나 데리고 가. 업어주면 이번엔 그냥 업 혀줄게.”

   이승도는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꽁무니를 내뺐다.

빗속에 홀로 남겨진 태국영은 들고 있던 점퍼를 털썩 내리 며 실소했다.

   귀엽게 굴긴.

   그는 느긋하게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퇴근 후 찾은 호프집은 독특하게 옛날식 통닭을 팔았 다. 이승도는 절단면 없이 통째로 튀겨낸 닭을 그날 처음 보았다. 이걸 어쩌라는 거지 하며 그저 어리벙벙해 하고 있으니 태산이에게 버림받은 사육사가 죽죽 찢어 살뜰히 개인 접시에 올려주었다. 얼떨결에 받아먹기만 했다. 사육사가 ‘이 선생은 생긴 대로 참 곱게 자랐나 보?.’하

는 말에 꽤나 멋쩍었으나 요령 좋은 척을 할 수는 없었다. 닭의 관절은 배곡히 알고 있어도,이것을 식량으로 두고 어떻게 해체해야 맛있게 먹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직면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그렇게 첫 시작은 ‘가볍게 치킨과 맥주’였다. 그 러나 뒤늦게 하나둘 퇴근해서 합류하는 이들이 늘어나며 판은 점점 커졌다. 넷이서 조촐하게 치킨 두 마리를 시켜 두고 생맥주를 즐기며 ‘우리 나래’ ‘기특한 나래’ ‘이븐 새 끼들’ 운운하며 소소하게 담소를 나누던 무리는 이제는 아 홉으로 늘었다.

   게다가 자기가 갈 때까지 절대 누구도 가지 말라고 징 징거림을 동반한 협박전화도 줄기차게 울리고 있었다. 도 무지 매정하게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이승도는 계속해서 멀찍이 홀로 앉아 있는 태국영의 눈 치를 살펐다. 기름에 튀긴 고기라면 질색하는 그는 먹지 도 않는 안주를 구색 맞추기 용으로 시켜둔 상태였다.

   그는 매우 심심한 것 같았다. 촘촘히 퇴적되어 가는 지 루함의 분풀이는 통닭이 대신 받았다. 털만 봅힌 모양을 고스란히 드러낸 닭에게 그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수저 통에 들어 있었던 젓가락들이 하나둘 통닭의 몸통에 꽂혔 다. 눈치를 볼 때마다 그 수는 계속 늘었다. 저것이 닭인

지 고슴도치인지 모를 지경까지 가 버리고 나서야 이승도 는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쌤. 벌써 가요?”

   장밋빛 뺨 통통한 어린 아가씨가 서운한 듯 올려다보 며 말했다. 이승도는 미안해요,하며 나긋하게 웃어 보였 다. 얼굴을 붉힌 아가씨가 더 말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승도는 ‘십 분만.’ ‘조금만.’ ‘좀만 더.’하고 붙드는 이들 에게 일일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주고 나서야 힘겹게 자 리를 뜰 수 있었다.

   그때 태국영은 카운터에 있었다. 바삐 걸음을 옮겨 그 에게 다가가자 그의 짙은 향기와 함께 울림 좋은 낮은 음 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저 테이블 한 십만 원 정도 더해서 계산해 줘. 나 가면 저기 가서 맘껏 더 먹으라고들 전해 주고. 이승도가 계산 했다고 하면 돼.”

   카운터에 있던 어린 알바생이 냉큼 카드를 받아 긁었 다. 태국영은 카드기가 툭툭 뱉어내는 명세표를 그대로 내 버려둔 채 앞장서 나갔다. 따라 나가자 등을 보인 그가 냉 큼 다리를 굽히며 제 어깨를 툭 쳐 보였다.

   “업혀.”

   그냥 업혀주겠다고 했던 것은 이승도 자신이었으나 밀

려오는 민망함에 낯이 뜨거워졌다. 태국영이 힐긋 어깨너 머 돌아보며 희미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안 업히면 오래 기다리게 했다고 화낼 거야.”

   이승도는 냉큼 그의 등에 몸을 실었다. 이미 시간은 훌 쩍 흘러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으나 비는 깨끗이 걷혔다. 지나치게 밝은 가로등 속에서 호기심 어린 눈초리가 여기 저기서 하살처럼 꽂혀들었다.

   이승도는 만취한 것처럼 그의 어깨에 코를 박았다. 그 러나 연극처럼 꾸며낸 행동은 이내 진실이 되어 전신을 눌 러 왔다. 머릿속으로 제가 맥주를 몇 잔이나 마셨더라 가 만히 추산해 보았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대략 500cc 로 넉 잔은 마신 듯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알딸딸한 취 기가 피막을 뚫은 양 혈관을 휘돌기 시작했다.

   물기 남은 바닥을 착실히 밟은 그가 보조석 문을 열어 이승도를 태웠다. 보닛을 돌아서 운전석으로 가 몸을 실 은 태국영이 막 브레이크를 밟고 기어를 옮겼을 때였다.

   “국영아. 넌 내가 왜 좋아?”

   어린아이 같은 질문에 태국영은 다소 황당하게 눈가를 접었다. 그는 룸미러와 사이드미러를 번갈아 보며 한 손으 로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글쎄. 내가 싫어할 만한 점이 하나도 없어서?”

   전방주차 되어있던 차가 직각으로 빠져나와 입구를 향 해 전진했다. 이승도는 그의 대답을 알 것 같기도,모를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주차비를 계산하는 동안 이승도는 알쏭달쏭 이 방향 저 방향으로 번갈아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가능해? 아무리 좋아도 맘에 안 드는 거 하나쯤 은 있잖아.”

   태국영은 번화가를 빠져나가 대로로 접어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부드럽게 휜 눈매에 속눈 씹이 아스라이 그늘졌다.

   “별로.”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노랑 신호등 불빛에 차가 서 서히 멈춰 정지선 전에 멈추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기어 를 구에 놓았다. 철컥,안전벨트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승도는 어리둥절해서 눈만 깜빡였다. 반쯤 돌아앉은 그가 보조석으로 몸을 기울였다.

   가볍게 입술이 맞닿았다. 충돌하듯 부딪친 입술은 완전 히 떨어져 나가지 않고 얇은 표피를 잠시 부대낀 채 머물 다 멀어졌다. 그의 손이 느긋하게 허공을 갈랐다. 부들부 들한 집게손가락이 양쪽 눈꺼풀을 툭툭 건드리고 담백하 게 물러났다.

   무슨 행동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접촉이 너무 간지

러워 가슴이 뛰었다. 이승도는 기어봉 위에 가볍게 얹힌 그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힐긋 제게 떨어진 시선이 미소 한 줌 남기고 다시 전방으로 날아갔다.

   이승도는 빙그레 웃었다.

   이승도는 배란이 불규칙했다. 물론 남자 등대들이 모 두 겪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보통은 배란 주기가 너무 길 어서 문제지,이렇게 짧은 경우는 드문 경우에 속했다.

   그 때문에 태국영은 점점 불안해졌다. 설마 앞으로도 이승도가 계속 한 달에 한 번씩 배란이 있으면 어쪄나 싶 었다. 그 말은 즉 콘돔을 포함한 인위적 피임법을 믿지 않 는 이승도 때문에 한 달에 열흘은 꼼짝없이 금욕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술기운에 눅눅하게 늘어진 이승도는 또 배란기 에 있었다. 태국영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면서도 착실 하게 이승도를 씻기고 침대에 눕혔다. 이제 제 품에 안기 는 것이 익숙한 이승도는 아기처럼 양순하게 가슴을 파고 들어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나 아직 배란기야?”

   “아직이 아니라 지금이 가장 위험한 시기야. 은근슬쩍 꼬드길 수도 없을 만큼.”

   이승도는 아쉽다는 듯이 배시시 웃으며 태국영의 턱을 가볍게 깨물었다.

   “국영아. 나 좀 만져봐.”

   태국영은 실소하며 이승도의 허리를 꽉 당겨 안았다.

   “너 이거 재미 들렸지? 내가 안달하는 거 구경하면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

   “…아닐걸?”

   “대답이 늦어. 네 청순한 머릿속 내가 모를 줄 알아?”

   이 여우 같은 놈,태국영은 아프지 않게 이승도의 이마 에 꿀밤을 먹였다. 이승도는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야야 엄 살을 부렸다.

   “왜 때려. 난 그냥 네가 만져주는 게 좋아서 그런 건데.

   이렇게 순수한 눈동자를 빌미로 건네는 말은 작은 불신 조차 죄악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을 의심 없이 믿기 에는 너무 많은 세월 그의 곁에 있었다. 제 몸 사리는 데 에 예민한 이승도가 그저 순간의 쾌락만으로 이런 유혹을 부릴 리가 없었다.

   이승도는 지극히 본능적으로 연하의 짐승들을 꿰는 방

법에 능통했다. 그것이 태국영 자신을 오랜 시간 겪어 오 며 터득한 경험이라면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그러나 간간 이 들려주는 동물원 에피소드들을 들어보면,이승도는 이 지 없는 짐승들이라도 저를 따르는 것을 매우 기뻐했다. 어떨 때는 그것을 낙으로 삼는 것 같기도 했다.

   말로는 ‘재가 너무 나만 의지하는 것 같아.’하고 시무룩 해하는데,실상 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저만 의지하는 동물들을 각별하게 더 예뻐했다. 자기 말로는 아 니라는데 가만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 승도,내가 안달하는 게 좋아?”

   태국영은 이승도의 입술을 잘근잘근 물며 웃었다.

   “내가 막 끙끙거리면서 넣게 해 달라고 조르는 게 좋 아?”

   역시나 이승도는 정곡을 찔린 마냥 슬쩍 시선을 피했 다. 시트를 가볍게 움켜쥔 손끝에는 작게 힘이 들어갔다. 태국영은 눈동자가 다 파묻힐 만큼 짙은 미소를 지으며 이 승도의 뺨에 제 것을 문댔다.

   “괜찮아. 난 여우 같은 마누라 좋거든. 더 안달하게 해 도 돼. 얼마든지 조를 테니까.”

   이승도는 조금 멋쩍은 듯 명하니 있다가 머뭇머뭇 눈 을 들었다. 뒤이어 다가온 손이 태국영의 뜨거운 뺨을 조

심히 감싸안았다.

   “사실 그래. 너 응석 부릴 때 되게 예뻐. 그게 아기 같 은 응석이 아니라 애인한테 부리는 응석이라 좀 애매하긴 하지만…… 그거 계속 보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심술부리 나봐.”

   “내가 응석 부리고 달라붙을 때 예뻐?”

   “피곤해서 기절할 것 같을 때에도 받아주고 싶을 만큼 예뻐.”

   “지금처럼?”

   “응. 지금처럼.”

   이승도는 수줍게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태국영은 얇 은 눈꺼풀 위에 아련히 입술을 붙였다. 가볍게 내민 혀끝 으로 까슬한 속눈썹을 할짝할짝 지분거리다가 밋밋한 뺨 을 깨물었다.

   “그럼 더 졸라야겠네. 나 맛 좀 보게 해 달라고.”

   그의 혀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턱선을 한 번 훑고는 그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쇄골을 물고 가슴을 깨물 어 잇자국 난 자리를 낱낱이 할았다.

   “승도야. 아기 생기는게 왜 무서워?”

   태국영은 분위기를 틈타 은근슬쩍 물었다. 발끝으로 시 트를 갈고리처럼 모아 긁던 이승도는 몽롱하게 대답했다.

   “나,일그만두는 거,싫어서……■,,

   “왜? 내 집에 틀어박혀서 나랑 이경이 보는 것만으로 는 사는 게 재미없고 지루할 것 같아?”

   이승도는 제 젖꼭지를 맘대로 갖고 노는 태국영의 혀 를 막연하게 즐기다가 작은 목소리를 옹알거렸다.

   “그건 아니야. 너랑 이경이 보는 거 되게 좋아. 그런데 나한테 그것만 남는다고 생각을 하면,잘 모르겠어. …좀 무서운 것 같기도 하고,우울증 걸리면 어쪄나 싶기도 하 고그래.”

   그것은 이승도의 온전한 진심이었다. 태국영은 이해했 다. 생의 의미가 어느 순간 강박적으로 줄게 된다면 우울 감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태국영은 이승도에게 얼마나 충격을 줘도 되는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난 나중에 우리 승도가 이경이 동생 낳아주면 좋을 것 같아.”

   어깨를 움츠리며 살갗에 눌어붙는 숨결을 즐기던 이승 도가 눈매를 크게 키웠다. 태국영은 당혹한 빛으로 빠르 게 깜박이는 눈에 가녀린 입맞춤을 내렸다.

“그냥 내 바람이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난 네가 아기를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어.”

   “애 자체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그냥 너랑 나를 닮은

아기가 있는 게 좋은 거지. 사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그 냥,정말 그것분이야.”

   태국영은 굳이 말하자면 아기 욕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 다. 헌데 그런 그가 구태여 둘째 이야기를 끼낸 것은 정말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승도와 저를 닮은 아이가 있다는 것 이 그저 신기하고 좋았다. 그 아이가 예븐 짓을 하지 않아 도,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예블 것 같았다.

   “나중에 생각해. 나는 우리 승도 이렇게 맘껏 안고 노 는 게 지금은 더 좋으니까.”

   태국영은 더 이상의 잡념을 차단하려는 듯이 강하게 젖 꼭지를 깨물었다. 그와 동시에 샤워 후 입혀 놓은 브리프 위로 엉덩잇살을 손으로 꽉 쥐어 비틀었다. 이승도는 앓 는 듯 목울음을 내며 허리 아래를 부드럽게 움직거렸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던 대답을 꺼내놓았다.

   “사실은 나도 그래. 누구를 더 닮건 아기가 더 있었으 면 좋겠어. 그런데 이경이가 걱정이야. 내가 워낙 못 해준 게 많아서,내가 갓난 동생 예뻐해 주는 걸 보며 속상해하 면어쪄지 싶어……

   이승도는 착각하고 있었다. 태이경은 엄마가 저를 외면 했던 과거의 일 같은 것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태중 기억 이 확실한 녀석이라 엄마의 차가운 외면조차 잘 이해했

고,지금 순간의 행복만을 명확하게 인지하며 만끽하고 있 는 상태였다. 사실 그것은 저희 일족의 아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다만 인간에 너무도 가까운 이승도는 그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였지만,굳이 그것을 애써 설명해 납득시킬 생각은 없었다.

   태국영은 아주 정성스럽게 이승도의 입술을 발았다. 젖 먹이가 젖을 찾는 것처럼,홀딱 반한 애인이 사랑을 갈구 하는 것처럼.

   보드랍고 안락한 키스가 다급하게 변하기까지는 순식 간이었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살 냄새를 깊이 흡입하며 흥 분을 채웠고,그럴수록 더 거칠어졌다. 팬티가 가린 국부 쪽도 야릇하게 짓눌려서 마찰하며 짙은 성애처럼 느껴졌 다.

   “아…….,,

   이승도는 간드러지게 신음하며 태국영의 등을 꽉 부둥 켜안고 머리를 띄웠다. 소란스러운 관자놀이를 그의 어깨 에 비볐다. 그는 축축한 입술을 안면 여기저기 되는대로 눌러 왔다. 눈앞으로 보이는 그의 남자다운 목은 점 하나 없이 매끈했다.

   푸르게 돋아난 핏줄을 명하니 보다 입을 벌려 살을 물 었다. 이로 가볍게 씹어 힘껏 발자 그는 나지막이 신음하

며 턱을 젖혀 들었다. 어깨와 등허리를 동여맨 그의 팔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뼈가 부대끼며 통증이 일었으나 그것 이 묘한 쾌감으로 감각에 불을 지펐다.

   문득 코를 찌르는 그의 향기가 짙어졌다고 느꼈다. 인 식하자마자 숨 막힐 듯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다리 활짝 벌려 봐,승도야. 내 좆에다 네 걸 문질러 줘.,,

   이승도는 그의 허리를 조이듯 모으고 있던 허벅지를 열 었다. 은밀한 열기를 품은 중심이 짓눌리듯 맞닿았다. 무 섭도록 팽창한 살덩이 위로 엉덩이를 슬슬 움직이자 그의 목에서 탄식이 끓어올랐다.

   태국영 역시 부드럽게 허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탄력적 으로 꽉 조여 있는 복근이 느긋한 곡선으로 물결쳤다. 천 조각에 갇힌 생식기 두 개는 원색적으로 서로를 갈구하며 마찰했다.

   이승도는 할딱이며 그 리듬을 따라갔다. 움직임은 숨소 리처럼 점차 거칠어졌다. 그의 허리와 엉덩이는 아주 우아 하면서도 동시에 야만적인 운동을 반복했다.

   이승도는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아 꽉 끌어왔다. 논리 적인 사고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그 음탕한 것을 제 다 리 사이에 가두고 싶었다.

   달콤한 비음은 제가 듣기에도 마치 유혹하는 듯했다. 어깻죽지를 이로 긁고 발던 태국영이 불분명한 욕설을 짧 게 씹어뱉었다. 그가 위협하듯 귓바퀴를 콱 씹었다. 이승 도는 날카롭게 신음하며 그의 등에 매달렸다.

   “우리 승도,여기서 더 익숙해지면 요분질까지 끝내주 게 잘하겠어.”

   “그,그런 말 좀,하지 마…앗……■,,

   “왜. 씹질이라고 하려다 말았는데.”

   생식기처럼 눅눅히 젖은 목소리가 촉수처럼 귓구멍을 파고들어 척추까지 한 번에 꿰뚫었다. 떨리는 등허리를 쓸 어 올린 그가 고개를 들었다. 진득한 눈빛을 단단히 매듭 얽은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씹질 잘하는 마누라 둬서 행복하다는 말이야.”

   “하,하지 말라니……으응…….,,

   그는 강한 흡입력으로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발 다가 턱을 쓸고 내려갔다. 표류하는 배처럼 흔들리던 몸 이 거칠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삽입하고 밀어붙이는 듯이 그가 허리를 툭툭 밀어 올리고 있는 탓이었다.

   시야가 조각조각 흐트러졌다. 혼몽하게 풀린 눈이 백열 등 불빛의 가루를 좇았다. 아스팔트에 떨어뜨린 한 조각

초콜릿처럼 몸이 흐물흐물했다.

   그의 혀는 마치 늪지를 탈출한 뱀처럼 불규칙한 곡선 을 그리며 내려갔다. 목을 타고 쇄골 위를 덧그리고 가슴 위를 이리저리 헤맸다. 점액처럼 끈끈한 것이 그의 혀를 따라 길을 만들었다.

   그가 허벅지 안쪽을 쭉쭉 발았을 때는 본능적으로 그 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밀어내도 꿈쩍을 안 했다. 이 승도는 전투력 없이 매끈한 허벅지 근육을 파들파들 떨며 비음을 흘렸다.

   그가 사타구니에 딱 붙어 있는 팬티의 선을 따라 혀를 문질렀다. 다리가 절로 오그라들었다. 그는 얇고 넓적한 밴드를 잇새로 여러 번 씹었다 놓았다.

   “이거 찢어도 돼?”

   이승도는 시트에 뒷머리를 짓뭉개며 무작정 고개를 끄 덕였다. 의미를 깨달은 것은 촘촘한 직물이 찢어지는 소리 가 들린 뒤였다. 화들짝 놀라 아래를 보았다.

   팬티의 허리 밴드와 사타구니를 감싼 밴드는 그대로였 다. 국부를 가린 천 조각만 너덜너덜 찢어져 있는 상태였 다. 마치 해부 당한 물고기 배를 비집고 나온 내장처럼 그 사이로 제 생식기만 툭 튀어나와 있었다.

   얼굴에 불이 붙은 듯했다. 아니,전신이 새발갛게 달아

올랐다. 싫어,하고 밀어냈으나 이번에도 소용없었다. 태 국영은 발기한 제 성기와 팬티를 짐승처럼 마구잡이로 할 기 시작했다.

   “그냥,벗겨 주…… 하…흐웃……!”

   완전히 발기한 성기가 그의 입속으로 발려 들어갔다. 이승도는 충격에 입을 벌렸다. 늘어진 다리가 무섭도록 경 련했다. 귀두가 그의 목구명 깊은 곳에 닿았다.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흔들다 결국 시트에 뺨을 처박고 말았다. 크 게 떴다 감은 눈꼬리를 타고 생리적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태국영은 난생처음 사탕을 먹어 보는 어린애처럼 열렬 히 입 안 점막을 조였다. 힘껏 발아올렸다가 앞뒤로 피스 톤처럼 움직였다.

   그는 어둑하게 잠긴 눈을 느릿느릿 움직였다. 갈라놓 은 천 사이로 튀어나온 이승도의 성기는 신기하리만치 예 븐 핑크빛이었다. 제 것을 품었던 구명과 같은 색이었다. 등대의 생식기는 다 이런가,어렴풋이 뇌리를 스친 생각 은 용광로에 빠진 양 그대로 녹아내렸다.

   이승도는 침대에 뺨을 비비며 달콤하게 울고 있었다. 매달릴 곳을 잃은 손은 애처롭게 시트만 꽉 움켜쥐었다. 사타구니의 뼈가 하얗게 도드라져 올라올 만큼 긴장하고 있었으나 훤히 드러낸 아랫도리는 가리지 않았다. 그 모습

이참 어여뻤다.

   태국영은 성기 밑동을 쥐고 입과 점막을 세게 모아 쭉 발아올렸다. 음란하게 젖은 마찰음이 울리자 벌어진 가랑 이가 파들거렸다. 번들거리는 귀두에 혀끝을 쑤시며 팬티 속에 갇혀 있는 고환을 주물렀다. 이승도는 그때부터 엉 엉 울기 시작했다.

   “국영아…아흣……응,으응,그만……!”

   나와,나올 것 같아,처음으로 반항했다. 후려 찰 듯 버 둥거리는 다리를 가볍게 제압했다. 양 발목을 한 손에 쥐 고 그대로 고정했다.

   “괜찮아. 그냥 싸. 너도 내 걸 아래로 먹는데.”

   이승도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고집스레 버텼다. 얼마 나 버티나 볼까,태국영은 거친 날숨을 한 번 뽑아낸 뒤 다 시 이승도의 성기를 삼켰다. 붙들린 다리가 연체동물처럼 무너져 내렸다.

   “흐…흐으

   태국영은 사타구니 밴드를 벌리고 손을 미끄러뜨렸다. 커다란 손에 억세게 움켜쥔 살이 탱탱하게 비틀렸다. 부리 까지 삼킬 때마다 입술에는 젖은 팬티가 스쳤다. 미끈거리 고 야릇한 향기가 나는 액체가 도색적으로 퍼져 있었다.

   이승도가 다급히 턱을 젖혀 들었다. 허공에 붕 떴던 다

리가 그대로 다시 떨어져 시트를 뭉갰다. 날카로운 비음 이 공기 중에 터져 나왔다. 저리 가,저리 가,이승도는 울 먹이며 소리쳤으나 태국영은 기다렸다는 듯 부리까지 남 김없이 삼켜버렸다.

   목구명 깊은 곳에서 미끄덩한 액체가 폭발했다. 태국영 의 목울대가 세차게 끄덕였다. 덩어리를 삼키는 것처럼 노 골적인 소리가 이승도의 울부짖는 신음에 섞여들었다.

   점점 작아지던 성기가 마침내 완전히 말랑해졌음에도 태국영은 아주 오랫동안 집요하게 발았다. 탈력한 듯 흐느 끼는 이승도는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가랑이만 훤히 열 고 몸만 떨었다.

   머릿속은 엉망이었고 눈앞은 투명한 불길이 일렁이는 양 너울거렸다. 이승도는 그의 혀가 제 풀 죽은 성기를 할 는 모양이,마치 교미 후에 수컷이 암컷의 생식기를 할아 주는 것 같다 느꼈다. 살을 섞을 때마다 그는 제가 잔뜩 쏟 아낸 구명을 저렇게 할아주곤 했다.

   그 야릇한 감상을 육중한 그림자가 몰아냈다. 어둑해 진 시야에 어둠이 흔들렸다. 이승도는 깨진 눈동자를 맞추 듯 맹인처럼 허공을 더듬어 올라갔다. 제 정액을 깨끗하 게 할아먹은 입술은 평소보다 더 붉고 더 도톰해 보였다.

   물에 젖은 장미꽃잎처럼 탐스러운 입술이 다가왔다. 젖

은 턱이 그의 손가락에 사로잡혔다. 입술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부드럽게 혀가 밀려 들어왔다. 설소대를 쓸고 양 볼 점막을 차례차례 할는 그의 혀는 포개지듯 제 혀 위에 드러누웠다. 윗입술이 그의 입술 사이에서 발리고 비벼졌 다.

   간헐적으로 남아있던 떨림은 달콤한 키스에 설탕물처 럼 녹아내렸다. 이승도는 엄마 품을 찾은 아이처럼 그의 품에 매달렸다.

   지척에서 마주친 눈매가 시원하게 휘었다. 그의 손이 다가와 칭찬하듯 가슴과 배를 어루만졌다. 입천장을 긁은 혀가 완전히 빠져나갔다. 쪽,쪽,간드러진 베이비키스에 눈가를 움찔거리던 이승도는,한참 뒤에야 개미가 기어가 듯 목소리를 흘렸다.

   “저,국영아… 나,나도 할아줄까?”

   태국영은 의외로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지금은 네 몸 어느 구명에 넣어도 정신이 나 갈 것같거든.”

   그는 오늘도 제 치부에 대고 한참을 비비다가 사정했 다. 찢어진 팬티와 민망하게 노출된 성기가 그의 우윳빛 정액에 흠뻑 젖어들었다. 오르가즘에 다다른 태국영의 관 능적인 얼굴을 야금야금 눈으로 훔쳐 먹다 충동적으로 입

을 열었다.

   “국영아. 넣어 봐.”

   이승도는 머뭇대면서도 다리를 양옆으로 활짝 벌리며 말했다. 태국영은 딱히 큰 감응 없이 눈만 깜박였다. 아주 편파적으로 보자면 조금은 당황한 듯도 했다. 이승도는 그 의 허리를 종아리로 꽉 감싸 안으며 깊이 눈을 내리깔았 다.

   “나 지금 너한테 안기고 싶어. 그래도 사정은 밖에 하

고……■,,

   뒷말은 급작스런 안개에 침몰되듯 흐려졌다. 태국영은 그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곤 육감적인 곡선의 입술을 시원 스레 휘었다.

   “응. 밖에다 할게.”

   남자 등대의 통계적 임신 확률은 5%,그것도 체내 사 정일 때였다. 체외사정일 때의 수치는 기록되어 있는 것 이 없었으나 거의 0.1% 이내로 떨어진다는 소견이 있었 다. 한마디로 단언하자면 거의 불모지에 마른 씨앗을 부리 는 정도라는 거였다.

   “저,그래도 국영아. 혹시 아기 생기면……

   괜한 걱정에 머뭇거리는 이승도의 이마에 태국영은 제

것을 가볍게 부딪치며 웃었다.

   “생겨도 돼. 너도 둘째도 많이 예뻐해 줄 테니까 걱정하 지 마.”

   태국영은 밑으로 내려가 이승도의 배 부근을 열심히 할 았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양손은 엉덩이를 비틀듯 쥐었다 가 부드럽게 문질렀다.

   이승도는 신음을 삼키며 허리를 들썩였다. 배꼽을 움푹 하게 할으며 아래로 내려간 혀가 펜촉처럼 뾰족하게 솟아 나 아랫배를 감싼 밴드를 슬쩍슬쩍 들어냈다.

   정말 민감한 성감대는 건드려지지도 않았는데 이승도 는 못 참겠다는 듯 그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밀어내려 했 으나 그는 꿈쩍도 안 했다. 도리어 거부의 몸짓에 반발심 을 가진 것처럼 그는 급박해졌다.

   그의 딱딱한 이가 아랫배를 아무렇게나 물었다. 아,이 승도는 약간의 통증을 느끼고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태국영은 개의치 않았다. 갈고리처럼 구부러진 검지가 허 리 밴드 틈으로 물컹하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너덜너덜한 천 조각은 금세 분해되었다. 벗겨진 건지 찢겨나간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날카로운 이성은 용광로 에 몸을 던진 쇳조각처럼 흐물흐물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 졌다.

   이승도는 더 허벅지를 벌려 그가 자유롭게 제 몸을 탐

할 수 있게 길을 터 주었다. 태국영은 그의 몸을 감싼 작 은 천 조각조차 남김없이 털어내었다.

   발갛게 부풀어있는 그의 중심은 제 비부를 아무렇게나 탐닉하기 시작했다. 고환과 회음,둔부와 항문을 정처 없 이 떠돌았다. 이승도는 눈썹 사이를 종잇조각처럼 구기며 허리를 뒤틀었다.

   “하지 마…… 하지 마…… 그냥 넣어.”

   속이 조금은 메슥거렸으나 제 본심은 필터링 없이 튀 어 나갔다. 잊고 있던 취기가 갑자기 불쑥 올라왔다. 눈앞 은 핑핑 도는데도 태국영의 모습은 흔들림 없이 건재하게 똑바른 상태를 유지했다.

   이승도는 둔부를 띄워 그의 시야에 제 비부를 낱낱이 드러냈다. 태국영의 가라앉은 눈동자가 무심결에 그곳으 로 향해 뜨거운 불꽃을 피워냈다. 그가 야릇하게 혀를 내 밀어 제 입술을 한 번 훔쳐냈다.

   “아……!,,

   미끈하게 젖은 귀두가 단번에 살을 벌리고 꾸역꾸역 밀 려들어왔다. 이승도는 턱을 젖혀 들며 이를 악물었다. 사 슴처럼 고운 목에 핏줄도 섰다.

   내벽은 질퍽하게 젖어있었으나 처음 벌어지는 순간에 는 늘 그랬듯 힘겨웠다. 거대한 압박감이 뜨겁게 안을 채

우고 끝까지 밀고 들어왔다. 그의 아랫배가 둔부에 쪄억 달라붙었다.

   전립선이 강하게 짓눌리자 말랑하게 죽어있던 성기가 순식간에 힘을 받았다. 이승도는 간드러진 날숨을 내뱉었 다. 늘어져 있던 다리를 무심결에 허공에 띄워 활짝 벌렸 다.

   그의 남성을 가득 받고 있는 엉덩이가 절로 움찔거렸 다. 이승도는 조급하게 허리를 놀렸다. 끙끙거리며 비틀 때마다 통로를 꽉 채운 그의 성기가 부드럽게 안에서 휘돌 았다. 사정 후 예민해져 있는 몸뚱이는 쾌락에 쉽게 달아 올랐다.

   태국영이 웃으며 상체를 숙였다.

   “역시 우리 마누라 씹질은 기가 막히一”

   이승도는 재발리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들어 키스했 다. 거칠게 입을 벌리고 들어가니 그는 눈웃음을 치며 요 령 좋게 혀를 얽었다.

   달아오른 눈으로 새치름하게 노려봐 봤자 무섭지도 않 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견갑골 사이를 가볍게 받쳐 들고 는 빠듯하게 조인 아래를 부드럽게 앞뒤로 흔들었다.

   이승도는 금세 달큼한 비음을 흘리며 흐트러진 표정을 지었다. 늘 금욕적이고 단정했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달게 할딱였다.

   습한 피부에 얼룩진 매끈한 머리칼도,초점 흐린 눈에 애욕을 가득 담아 올려다보는 것도,저만 볼 수 있는 것들 이었다. 유치한 만족감에 태국영의 숨결도 덩달아 거칠어 졌다. 이제는 살을 섞는 것에 담담해질 법도 하건만,한 번 이 몸뚱이에 엉겨들기 시작하면 정신을 못 차리게 되 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태국영은 이승도가 자진해서 벌리고 있는 다리 안쪽을 큰 손짓으로 애무했다. 으응,금세 반응이 오며 아랫배가 꽉 수축했다. 조임은 더 심해지고 태국영의 목 안에서도 짙은 탄식이 끓어올랐다.

   그는 허공에 곧게 뻗어 있는 다리를 허벅지에서부터 농 밀하게 쓰다듬어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손길이 가느 다란 발목에 닿았을 때,태국영은 세차게 혀를 얽으며 사 정없이 퍽픽 쳐올리기 시작했다.

   이승도는 어깨를 움츠리며 퍼드득 경련했다. 긴장한 팔 이 허공을 휘저어 목덜미에 안착했다. 열렬히 매달리면 그 역시 뜨겁게 허리를 짓쳐 올렸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교성이 맞물린 키스 사이에서 으스 러졌다. 음란한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것이 깊은 속살 을 뚫고 들어올 때마다,이승도는 숨넘어갈 듯 헐떡였다.

온몸이 정정 울릴 만큼 강렬한 쾌감이 전신에 내렸다.

   연달아 쾌락점을 자극당한 이승도가 막 엉덩이를 긴장 시키며 파정하려던 때였다. 태국영이 급작스레 허리를 뒤 로 물렀다. 명하니 학학대며 고개를 든 이승도는 솜 인형 처럼 가볍게 몸이 뒤집혔다. 상황을 인지할 사이도 없었 다. 두 팔이 뒤로 붙들려 그대로 아래를 꿰뚫렸다.

   “흐읍! 아,아아!”

   상체가 무너졌다. 고개는 시트에 닿을 듯 말 듯 깊이 거 꾸러졌다. 태국영은 높이 솟은 엉덩이를 무차별적으로 퍽 퍽 쳐올렸다. 그때마다 이승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리 만 비틀었다.

   “깊,너무 깊…어……! 하옷!”

   도가 넘은 자극에 이승도의 눈매는 금방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적나라하고 뜨거운 시선이 비부를 파고들었다. 생 식기의 교접이 그 어느 때보다 잘 보일 것이었다. 짐승처 럼 그에게 내보이고 있는 엉덩이가 수치로 경련했다.

   팔을 붙들고 있던 그의 손이 무너지려는 아랫배를 턱 감쌌다. 벌건 손자국 남은 팔뚝에 얼굴을 묻으려던 때,그 의 화염 같은 체온이 등을 덮어 왔다.

   “우리 승도,깊이 박는 거 좋아하잖아.”

   태국영이 귓가에서 웃음 섞어 속삭였다. 그의 억센 손

이 턱을 감싸 비틀어 올렸다. 그의 불투명한 눈동자에 음 탕하게 젖은 얼굴이 비쳤다. 이 행위에 몸도 맘도 휩쓸린 이승도 자신의 얼굴이었다.

   “이것 봐. 이렇게 금방 싸버리고는.”

   그의 손가락은 흐린 우윳빛 정액이 흠뻑 묻어 있었다. 이렇게 짐승처럼 뒤에서 뚫린 순간에 제가 쏟아낸 것이었 다. 질픽하게 젖은 손가락이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이승도는 헐떡이며 그것을 혀로 감았다. 미각을 자극하 는 맛은 묘하고 진득했다. 뭐에 홀린 듯 다 할아먹었다. 짓 눌린 머릿속은 이성을 상실했다. 지극히 미개한 부분만 남 은듯했다.

   뒤로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바짝 올라붙 은 근육들이 손아귀에서 세차게 꿈틀댔다. 키스해,이승도 는 말했고 태국영은 고분고분 순응했다. 아기 새처럼 벌어 진 입술 안을 그의 혀가 용암처럼 파고들었다.

   이승도는 할딱할딱 밭은 숨을 쉬었다. 허공에 치켜든 엉덩이를 위아래로 미적거렸다. 그 안을 험악하게 들락거 리던 성기가 더 단단하게 여물었다. 지문을 화인처럼 남 길 듯한 그의 손이 등허리를 쓸어내리며 엉덩이에 고정되 었다. 살집이 부푼 엉덩이는 커다란 손에 한가득 잡혀 비 틀렸다. 매트리스에 거꾸러져 있던 상체가 더 깊이 휘었

   “흐…옷…… 국영,아…살살……

   이승도는 내벽을 바짝 조이며 애걸했다. 태국영은 그 애처로운 말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착유기처럼 강한 조임에 갇힌 성기는 너무나 무력하게 제 욕망만을 주장했 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등에 가슴을 둥글게 마찰하며 속삭 였다.

   “조이지 마. 나 쌀지도 몰라.”

   완만하게 솟아오른 유두가 등허리에 골짜기를 만들 것 처럼 긁어내렸다. 이승도는 그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했 다. 비음 섞인 울음을 흘리며 엉덩이를 이상한 방향으로 꺾었다.

   삽입은 더 깊어질지언정 얕아지지 않았다. 단번에 푹 푹 파고드는 움직임은 은밀한 부위를 자비 없이 압박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덜렁거리는 성기에선 희멀건 정액이 툭툭 흘렀다.

   이승도는 그것이 싫었다. 뒤로만 느끼는 자극에 제가 무력하게 정액을 쏟는 것은 그저 짐승적인 교미에서 오는 쾌락만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랫입술의 불퉁한 조직을 세 게 짓씹은 그가 헐떡이며 젖은 목소리를 흘렸다.

   “싫어,나……뒤집어. 이거 싫어……■,,

   이승도는 몰아붙여진 어린아이처럼 팔뚝에 얼굴을 묻 었다. 입술을 깨물며 흐느끼고 있으려니 그의 손이 뺨을 훑으며 젖은 눈가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가 말했다.

   “얼굴 보고 해?”

   이승도는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엉덩이 만 배 든 수치스러운 자세가 그를 마주 보는 것으로 바뀌 었다. 그의 성기를 꽉 씹어 문 내벽이 격렬하게 굽이쳤다. 절정의 아래에서 휘도는 그 느낌에 이승도는 소리 없는 비 명을 지르며 입을 벌렸다.

   눈앞이 불티처럼 작은 입자로 바스러졌다. 시트에 파묻 힌 뺨이 척척하게 젖어들었다. 이승도는 목적 없이 움직 인 손끝에 가장 먼저 닿는 것을 움켜쥐었다. 그것은 태국 영의 단단한 팔뚝이었다.

   “너무해……

   이승도는 울먹이며 불평을 뱉어냈다. 싫은 소리를 들었 음에도 태국영은 시원하게 트인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뭐가 너무해. 우리 승도 더 좋은 거 찾아주려고 애쓰 고 있는 건데.”

   이승도는 고개를 흔들었다. 진득하게 눈가를 적신 물기 가 그의 살결에 번져갔다. 태국영은 짙은 한숨을 지으며

급박하게 허리를 꺾었다. 딱딱하고 뜨거운 기둥은 독한 리 듬으로 내벽을 짓쑤셨다.

   아까처럼 다리 벌려 보?,그가 말했다. 이승도는 후들거 리는 오금을 억지로 펼쳐 그의 양옆으로 다리를 벌렸다. 활짝 벌어진 비부에는 그의 음란하게 젖은 성기가 끊임없 이치고 들어왔다.

   픽,픽,그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몸은 무력하게 흔들 렸다. 그는 어쩔 줄 몰라 시트만 움켜쥔 손을 끌어모아 제 목에 감았다. 이승도는 그의 목덜미에 두 손을 깍지 꼈다. 방울방울 눈물 흐르는 눈매는 목적지를 정하지 못해 정신 없이 허공을 헤매었다.

   섹스라는 것은 정말 이상했다. 그저 원초적인 욕망을 해결하는 수단인 줄로만 알았다. 배출하지 못한 정액을 기 계적으로 뽑아내는 것이 이렇게 음탕한 수단으로 변질될 것이라고는,상상치 못했다. 적어도 그와 살을 섞어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홋…으응,응……그만…….,,

   이승도는 기력을 잃어 중얼거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기 절할 것 같은데도 그가 내려주는 자극에 일일이 몸을 떨 며 목을 울리는 것이 너무 힘겨웠다.

   그만 하고 싶었다. 그와의 섹스는 좋았지만 너무 길어

지면 몸도 마음도 걷잡을 수 없을 만치 축나버렸다. 시간 이 흐르면 균형 잃은 몸은 다시금 중심을 잡지만 갈피 잃 은 마음은 계속 안갯속을 헤매었다.

   아무렇게나 접힌 채 곱아들고 있는 손에 그의 뜨거운 체온이 겹쳐졌다. 깍지 낀 두 손을 번갈아 키스하며 그는 단단하게 조여진 복근을 울렁거렸다. 검지일까 중지일까, 판단할 수 없는 곳을 그에게 콱 물렸다.

   피가 흐르는 것 같았으나 그의 혀끝으로 옮겨가는 것 은 가녀린 떨림분이었다. 초점이 완전히 나간 몽롱한 눈 이 그의 얼굴을 느리게 할아 내렸다. 무심결에 혀를 내밀 었다. 허공에 무안하게 떠 있는 것을 태국영은 길게 보지 않고 마주 얽었다.

   그의 허릿짓이 점차 세차게 변해갔다. 덜컥거리는 침대 보다 심장 고동이 더 요란하게 울렸다. 이승도는 고통스러 울 만치 강렬한 쾌감에 엉덩이를 뒤틀었다. 늘어져 있던 다리가 허공에 치솟고,그것은 이어 바닥으로 다시 스러졌 다.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덜덜 떨리는 다리로 그 의 허리를 감았다. 태국영은 능숙한 연상처럼 야하게 허리 를 놀리다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다급하게 쏟아진 말은 뜨거운 흥분이 녹았다. 이승도 는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듬직하게 벌어진 어깨를 두 손으로 허겁지겁 감싸 끌어왔다.

   태국영은 드물게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비틀었다. 그 가 재발리 몸을 배려 했으나 이승도는 본능적으로 그의 몸 을 깊이 옭아맸다.

   “왜. 빼지 마.,’

   싫어,이승도는 어린애처럼 칭얼댔다. 잠시 잠깐이라 도 떨어져 나가는 온기를 못마땅해 하는 젖먹이처럼 굴었 다.

   태국영은 찰나 극렬한 갈등에 빠졌다. 억지로 부리치자 면 어린애 팔목 꺾는 것보다 쉬웠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는 이승도가 매달리는 것에 매우 약했다.

   “안에다 싸?”

   “? 으

   ?, ?

   이승도는 잔뜩 풀린 눈으로 정신을 못 차렸다. 제가 무 슨 말을 하는지 그것은 알까 궁금할 정도였다. 꼭 맞는 퍼 즐 조각처럼 잘 맞아떨어진 두 입술이 서로를 애타게 물었 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안에서 파정하는 제 것을 느끼며 낭 패감을 느꼈으나,이내 그것마저도 희미해졌다. 픽픽 정액

을 쏟아내는 성기가 질퍽하게 젖어들었다. 후희를 삽입으 로 이어가는 부드러운 허리 놀림에,작아진 성기 곁을 비 집고 흰 거품이 몽글몽글 새어 나왔다. 눈앞이 무너지는 절정의 격류가 온 천지를 휩쓸었다.

   태국영은 습하게 젖은 몸뚱이 위로 무너져 내렸다. 척 척하게 눌어붙는 살결도 불쾌하지 않았다. 살 냄새가 진하 게 서로에게 엉겨들었다.

   이승도는 과음한 취객처럼 목이 탄다며 중얼거렸다. 태 국영은 그 바싹 마른 입 안을 정성스레 비볐다. 타액은 누 구에게서 솟아 나온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승도가 삼 키고 태국영도 발아들였다.

   이승도는 허리를 뒤틀며 달콤한 목울음을 흘렸다. 그러 다가 문득 젖은 살결 마찰하는 소리에 조금 정신을 차린 듯 난색을 띠었다.

   “아. 맞다…….,,

   태국영은 어이없이 실소했다.

   “배지 말라고 칭얼댄 건 너야.”

   “…내 탓이야?”

   “우리 승도한테 약한 서방님 탓이지.”

   이승도는 배시시 웃으며 품 안을 파고들었다. 취기인

지 흥분인지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익어 있었다.

   “우리 이제 둘째 생겨?”

   “전에 한 말 어디로 들었어. 오 퍼센트 미만이라니까.”

   “우리 아기 정말 예뻐해 줄 거지?”

   전혀 듣지 않는군.

   “그래. 약속해.”

   깊어진 밤처럼 이승도는 빠르게 수마에 휩쓸려갔다. 태 국영은 가는 눈웃음으로 잠든 이승도를 내려다보며 젖은 이마에 키스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