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92화
“말하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어. 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거야?”
황석준이 백서휘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혼천회의 본단을 찾고 그놈들을 죽이는 데 관력(官力)을 동원하고 싶어서.”
“은혜를 입혀서 부탁을 들어주게 만들 생각이구나.”
“일단, 계획은 그래. 아무래도 인원이 많아지면 그놈들을 찾아낼 가능성이 커질 테니까.”
“그걸 고려해서 대답해야겠네.”
“그래 주면 고맙지.”
“잠시만 생각 좀 할게.”
백서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석준을 주시했다.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황석준은 눈을 살포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
‘어려운 문제이니 한참 동안 생각하겠지.’
백서휘의 예상과 다르게 황석준은 그리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았다.
일각쯤 지나니 황석준은 답을 거침없이 내놓았다.
“둘 중 하나라면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는 쪽이 더 좋아.”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뭔데?”
“제대로 준비해서 일을 진행하면 황제를 살렸을 때보다 더 쉽게 우리 입맛대로 정국을 풀어나갈 수 있어. 문제가 있다면 황위 계승권자가 다 죽어서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건데…….”
“진짜 다 죽은 거야? 사생아 없어?”
“없어.”
“정말?”
“그래.”
“좋아, 선대로 가면?”
“내가 알기로는 선대에도 없어.”
애초에 새 황제를 옹립하려고 한 건 황제쯤 되면 사생아가 반드시 있을 거란 생각에서 출발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사생아가 한 명도 없다니.
믿었던 보루가 무너지자 백서휘는 충격을 살짝 받았다.
“그럼 애초부터 내가 갈 길은 황제를 살리는 길 말고는 없었던 거네?”
“아니, 다른 길도 존재하긴 해.”
“어떤 길인데?”
“황제 폐하가 붕어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반란을 일으킨 사람 중 하나를 선택해서 황좌에 앉히면 돼. 이게 싫으면 황녀 중에 한 사람을 황좌에 앉혀도 되고. 후자의 경우엔 붕어를 기다리는 것 말고, 황제 폐하의 도움을 받아서 비교적 부드럽게 황제 자리를 이양받는 수도 있어.”
황석준이 말한 길은 백서휘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길이었다.
그래서 제법 많은 시간을 고민한 후에야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후자를 선택하는 게 낫겠어.”
“그럴 거면 막내 황녀를 선택하는 편이 좋을 거야.”
“이유는?”
“부마가 없고 연치가 어려서 뒤에서 흑막으로 있으면 원하는 대로 정국을 이끌고 갈 수 있어.”
“구체적인 작전 생각한 거 있으면 알려줘 봐.”
철판을 깔고 말하는 백서휘를 보며 황석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내가 뻔뻔한 거 충분히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말고 작전에 대해서 말하기나 해봐.”
“그냥 내가 건네준 정보들을 읽으면 대충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할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황석준에게 건네받은 정보들을 모두 읽은 백서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금성에 가야겠어.”
“벌써?”
“황제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건투를 빈다.”
백서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가장을 빠져나와 자금성으로 향했다.
자금성의 경비는 철통같았지만 은형잠종술을 쓰는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번엔 어디에 있으려나.’
기갑을 최대한으로 넓혀 보니 황제는 건청궁에 여러 사람과 함께 있었다.
황제는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태롭고 불안한 생기(生氣)를 가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삼도천을 건너갈 사람 같았다.
‘액막이 무녀가 살(煞)에 담긴 힘을 대부분 맞고 남은 걸 황제가 맞았는데 그거로 오늘내일하다니……. 혼천회에서 날린 살 자체가 엄청 강한 모양이네.’
혼천회에서도 다시는 쓰지 못하는 ‘비장의 패’를 쓴 게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함께 있는 사람은……. 다 궁녀들이군. 이것들을 처리해야 뭘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백서휘는 황제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훈혈을 짚었다.
비밀리에 호위하던 금의위며 궁녀며 다들 쓰러져 기절했다.
“사, 살려다오! 쿨럭쿨럭! 살려주면 금은보화도 주고 황궁 무고에 있는 비급도 주겠다.”
황제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데도 도망갈 힘이 없는지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진짜 줄 거야?”
“너, 너는…….”
황제는 삿대질할 힘도 없는지 몸을 부르르 떨기만 했다.
“오랜만이지?”
“도대체 내게 무슨 원한이 있길래, 살을 날리는 것도 모자라서 쿨럭쿨럭! 죽이러 온 것이냐.”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나는 살을 날린 적이 없어. 죽이러 오지도 않았고. 오히려 난 그쪽을 살리러 왔는데?”
“쿨럭쿨럭! 나, 나를 살리겠다고? 어떻게 말이냐?”
“그쪽 몸에 붙어 있는 살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그, 그게 진짜로 가능한 일이냐? 쿨럭쿨럭! 쿨럭!”
황제는 다 죽어가는 얼굴로 여러 번의 기침을 연달아서 했다.
“가능한데 당신이 원하는 만큼 오래는 못 살 거야.”
“내가 원하는 만큼이 쿨럭쿨럭! 아니면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 거지?”
“그건 들어가서 물어보도록 해.”
백서휘는 품속에서 괴력난신의 서를 꺼낸 후 황제를 책 속의 세계로 집어넣었다.
“……여, 여긴 어디냐? 쿨럭쿨럭!”
“당신을 조금이지만 더 살게 해줄 인간이 있는 곳.”
“음…….”
백서휘는 황제를 목인걸과 그의 아들에게 데려갔다.
목인걸을 본 황제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천지회가 황실을 전복하려고 할 때 목인걸을 본 기억이 그에게 있었다.
“저, 저놈은!”
“아는 놈이지?”
“반역자 놈에게 날 넘기려고 그런 거냐? 쿨럭쿨럭! 조금 더 살게 해준다는 말은 거짓이었고?”
“내가 아는 주술사 중에 가장 높은 수준의 주술사가 이놈이라 여기로 데려온 것뿐이야.”
“쿨럭쿨럭! 그럼 저 반역자 놈이 나를?”
“그래, 당신을 조금이나마 더 오래 살게 해줄 사람이 나다. 아니, 사람이라기보단 이젠 혼백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만…….”
목인걸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둘 다 준비됐지?”
“무슨 준비?”
“황제 당신은 살을 제거 받을 준비.”
“그거라면 됐다.”
“목인걸 당신은?”
“나도 됐다.”
“좋아, 그러면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게. 살 다 제거하면 황제 데리고 나와.”
“네!”
백서휘는 책 속의 세계를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애가 타는 황제가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호, 혼자 있어야 한다고?”
“왜? 안 돼?”
“저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 않느냐. 쿨럭쿨럭!”
“그거라면 걱정하지 말고 맘 편히 살이나 제거해. 황실을 전복시켜서 어떻게 해보겠단 야망은 사라진 지 오래일 테니까.”
“정말이냐?”
“정말이니까 괜히 의심하면서 기력 빼지 마라. 자칫 잘못하면 좀 더 오래 살기는커녕 기력 빠져서 죽는 수가 있어.”
목인걸이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믿어보도록 하지. 쿨럭!”
백서휘는 밖으로 나와 ‘모든 것을 베는 검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두고 한참 동안 고민했다.
‘누가 찾아온 거지?’
건청궁 밖에서 다른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내시네.’
백서휘는 훈혈을 짚어 내시를 기절시키고는 건청궁 안에 숨겨두었다.
화두에 대해 각을 잡고 고민할라치면 신하들이 찾아왔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그때 기감에 꽤 많은 수의 금위위와 동창이 잡혔다.
황제에게만 가면 깜깜무소식이 되니 누군가가 금의위와 동창에게 조사해달라고 말한 것 같았다.
‘이놈들 기절시키면 더 많은 놈들이 오겠지.’
어쩔 수 없단 생각으로 훈혈을 짚어 기절시켰다.
반각이 흘렀다.
금의위와 동창이 소속된 모든 무인들을 데려와 건청궁을 포위했다.
돌아가는 상황이 답답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황제가 살을 빨리 제거하고 나와야 조건을 얘기하고 사라질 수 있는데…….’
생각하기 무섭게 목인걸의 아들이 황제를 업고 바깥으로 나왔다.
“살은 다 제거했어?”
“네, 다 끝났습니다.”
“이야! 혈색이 정상으로 돌아왔네? 아까 전까지는 진짜 다 죽어가는 것 같았는데.”
“장기가 더는 썩어들어가지 않으니까요.”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목인걸의 주술은 신기하고 대단했다.
“썩어들어가는 것만 멈춘 건가?”
“주술로 훼손된 장기의 복원을 시도해 봤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많이 썩었어?”
“너무 많이 썩어서 장기의 능력이 떨어졌습니다. 지금은 그냥 기능만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남은 예상 수명은 얼마나 돼?”
“100일입니다.”
“황제도 그 사실을 알고 있나?”
“예.”
죽을 날을 받아놓은 황제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가 공포로 정신이 나가지 않았기를 바랐다.
“내가 알아야 할 건 지금 말한 게 전부야?”
“황제에게 방어 주술을 걸어놓았습니다. 최소 100일 동안은 살을 맞아서 죽을 일은 업을 겁니다.”
“그 방어 주술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공격을 받으면 저절로 역공하거나 공격한 놈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술법은 없어?”
“제가 배움이 짧아서 아직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목인걸의 아들은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깨워도 되는 거지?”
“예, 지쳐서 잠든 것뿐이라서 깨워도 상관없습니다.”
백서휘는 황제의 몸 안에 진기를 살짝 흘려 넣었다.
“으음…….”
“정신이 들어?”
백서휘는 황제에게 흘려 넣었던 음기를 회수했다.
“여, 여긴…….”
“그쪽 침소야.”
“꿈이 아니었군.”
“그건 그쪽 손에 달려 있어. 내 말을 안 따라주면 살을 맞았을 때를 똑같이 재연해 줄 생각이거든.”
황제의 얼굴이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원하는 게 뭐냐.”
“일단 밖에서 포위하고 있는 금의위랑 동창부터 물려.”
“알았다.”
황제는 강호의 기인이사가 붙어 있는 살을 제거하는 걸 도와줬다고 이야기하며 금의위와 동창을 물렸다.
금의위의 대영반과 동창의 제독은 납득하지 못 했지만, 황제의 명이라 어쩔 수 없이 병력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자, 이제 말해 봐라.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
“일단은 관의 힘을 모두 동원해서 혼천회를 찾아.”
“혼천회라면 쇠말뚝으로 부정력이란 걸 모으던 곳 아니냐.”
“맞아.”
“쇠말뚝만큼이나 잘 숨었으면 찾기 어려울 것 같은데…….”
“어려워도 찾아. 그쪽 원수이기도 하니까.”
“원수? 설마…….”
황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쪽이 생각하는 거 맞아.”
“부정력이 아니더라도 꼭 찾아야 할 놈들이구나.”
“그래.”
“다른 부탁은 없느냐?”
“죽을 거면 막내 황녀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고 죽어.”
황제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주 씨가 아닌 다른 성씨에 물리는 것보단 솔직히 더 낫잖아.”
“그거야 그렇긴 하다만…….”
“그렇게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일 때가 아니야.”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다.”
“뭐야, 사생아라도 있는 거야?”
“없다.”
“그러면 무조건 막내 황녀를 후계자로 정해야 돼. 그쪽이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죽으면 중원은 100일 후에 엄청난 혼돈을 겪게 될 거야. 그리고 그 혼돈은…….”
“부정력이 되어 그놈들에게 가겠지.”
“그래, 맞아. 잘 아네.”
“잠시만 시간을 줘.”
황제는 한 시진이 넘게 고민하다 지친 얼굴로 백서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결정했어?”
“그래.”
“어떤 결정이지?”
“……막내 황녀에게 황제 자리를 넘기고 죽겠다. 엄한 놈에게는 절대 넘기지 않겠어.”
“용기 내준 거 고마워. 난 이만 가볼게.”
백서휘는 은형잠종술을 펼쳐 자금성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