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93화
황제는 남은 삶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일찌감치 막내 황녀에게 황위를 넘겼다.
처음에는 반발했던 신하들도 살아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그의 말에 반대하는 걸 그만두었다.
이렇게 될지 알고 있었던 황석준은 발 빠르게 움직여 원하는 대로 정국을 이끌 판을 짜는 데 성공했다.
‘판을 짰으니 이제 정국만 더 안정되면…….’
혼란스러운 정국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야만 관부의 힘을 제대로 동원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안정된 정국은 황제의 뜻과 신하들의 뜻이 하나가 될 때 이루어진다는 거였다.
선황제가 막내 황녀에게 혼천회에 대해 말을 해줬을 테니 새로운 황제의 뜻은 걱정이 없었다.
걱정되는 게 있다면 신하들의 뜻이었다.
계파가 나뉜 신하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관부의 힘을 동원하는 걸 반대한다면 말짱 황이었다.
‘석준이가 판을 원하는 대로 이끌 능력이 될까?’
황일승이라면 이러한 의문을 품지 않았겠지만, 황석준이라면 달랐다.
금와전장을 맡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황석준이 관부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을까 싶었다.
‘한번 물어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노인네에게 복귀할 의향이 있는지 물어봐야지.’
친구인 황일승의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지금은 비상 상황이었다.
자존심보다 생존이 우선되어야 하니 황일승도 크게 상처 입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관부의 힘을 쓸 수 있게 됐으니 효율적으로 운용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말이 관부의 힘이지 사실 제일 필요한 건 금의위와 동창의 협조였다.
그들이 관리와 양민 등을 통해 뽑아내는 정보가 있다면 혼천회를 더 빠르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의 힘과 개방과 하오문의 힘을 합치면 어떨까?’
괜찮은 구상이 떠오르자 백서휘는 바로 황석준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에 가까워질수록 오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황석준에게 자신과 이야기할 여유가 있을지 걱정됐다.
‘일단은 간다.’
백서휘는 길게 줄을 서 있는 자들을 지나쳤다.
뭘 모르는 사람들이 새치기한다고 백서휘를 막으려 했다.
화들짝 놀란 하인들이 달려와 백서휘를 도왔다.
“고마워.”
“별말씀을.”
백서휘는 종을 울리고 황석준의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무슨 일이야?”
“나야. 할 말이 있어서 왔어.”
“잠깐만, 하던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되니까 좀만 기다려줘.”
“그러지.”
잠시 후, 황석준의 집무실에서 꽤 무력이 고강한 중년 남자가 나왔다.
“들어와!”
백서휘는 황석준의 집무실로 들어가면서 물었다.
“조금 전에 그 사람은 누구야?”
“대영반의 오른팔.”
“금의위에서 눈치챘나 보네. 지금 판을 만든 게 너라는 걸.”
“동창도 왔다 간 걸 보면 눈치채긴 한 것 같아. 그보다 무슨 일이야?”
시간이 없는 황석준은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조금 전에 이야기 나온 금의위랑 동창의 협조가 필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혼천회 잡는 문제 때문에 그러는 거면 황제 폐하를 통해서 명령을 곧 내릴 거야.”
“단순 협조 말고.”
“그러면?”
“개방과 하오문과 힘을 합쳐서 정보 동맹을 만들었으면 하거든.”
“정보 동맹?”
“혼천회 한정해서 모든 정보를 공유하면 그놈들을 찾아내기 쉬울 것 같아서.”
“좋은 생각이긴 한데, 가능할까?”
“부정력에 대한 정보를 금의위나 동창도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만 확실히는 모를 거야. 우리가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면 그들도 살고 싶을 테니 뭐 빠지게 움직이긴 하겠지.”
“두 곳에 이야기한 다음에 황제 폐하를 통해서 정보 동맹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려볼게.”
“고맙다.”
“용건은 이게 끝이야?”
“어, 끝이야. 난 이만 가볼게.”
“그래.”
백서휘는 집무실을 나와 하오문의 본단에 들렀다.
하오문의 문주는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이야기를 쏟아냈다.
“무림맹이 위험해요.”
“갑자기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광풍사랑 싸움에서 무림맹이 유리한 거 아니었어?”
“광풍사와의 싸움이라면 그렇죠.”
“다른 곳에서 끼어들기라도 했다는 거야?”
“천축의 소뇌음사(小雷音寺)에서 끼어들었어요.”
“그놈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
과거에 소뇌음사와 싸웠던 적이 있었다.
지금 세력을 회복하고 쳐들어오기까지 한 것을 보면 그때 완전히 멸절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예?”
“별 얘기 아니니까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 봐.”
“광풍사가 시선을 끄는 역할을 맡은 건지 아니면 우연히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림맹의 주력이 묶여 있는 사이에 소뇌음사에서 섬서성에 깊숙이 침입해서 지금 패악질을 부리고 있어요.”
하오문의 문주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언제쯤 일어난 일이야? 오래됐어?”
“보름 전에 일어난 일이에요.”
“이걸 왜 난 지금 안 거지?”
“개방에서 숨겼으니까요.”
“개방에서 숨겼다고? 왜?”
백서휘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희 쪽에서는 남만야수궁과의 일을 원활히 해결했지만, 그쪽은 지금 지지부진한 상황이잖아요.”
“광풍사가 유격전을 벌여서 힘들다고 듣기는 했어.”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본인들의 영역을 제대로 방비하지 못해서 당했단 소리를 듣기 싫었는지 개방 방주가 정보를 차단했어요.”
백서휘는 머리가 지끈거려오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정보를 차단했는데 어떻게 안 거야? 설마 혼천회에 써야 할 전력을 무림맹 쪽에…….”
“없다고는 말 못 하지만 수호문주께서 생각하는 것만큼 많이 보내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이 정보는 후개가 저희 쪽에 전해 준 거예요.”
“후개가?”
“수호문주께 전해달라고 저희에게 정보를 준 거로 보여요.”
“그나마 후개가 똑똑하게 굴긴 했네.”
“……소뇌음사 놈들을 죽이러 가실 건가요?”
“가야지. 섬서성은 호남성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까.”
“그럼 북경으로는…….”
“다시 오긴 할 거야. 그래야 할 일이 있거든.”
“어떤 일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하오문의 문주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여기 온 이유기도 한데, 금의위와 동창, 개방, 하오문을 한데 묶는 정보 동맹을 만들 생각이야.”
“혼천회에 한해서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 그런 동맹인가요?”
하오문의 문주는 말을 듣자마자 정보 동맹이 어떤 일을 할지 바로 알아차렸다.
“일단은 그래.”
“‘일단은’이라면 나중에 변경될 수 있다는 거네요.”
“수호문만 고생하는 건 너무하단 생각이 요즘 계속 들더라고.”
“확실히 수호문은 너무 오랫동안 혼자 분투하긴 했죠.”
“그 ‘혼자’만 분투하는 것도 영 아닌 것 같아서 제자도 세 명으로 늘렸어.”
“정보 동맹은 그 세 명을 위한 건가요?”
“응, 일이 잘 풀리면 지금 만들려는 정보 동맹을 암중단체에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게 만들 생각이야.”
“정보 동맹을 만들 때부터 미리 준비해놓는 게 좋겠네요.”
“아직은 먼 미래의 이야기니까 다른 암중단체에 대해 신경 쓰는 것보다는 혼천회의 꼬리를 잡는 데 더 신경을 쓰는 게 좋을 거야. 혼천회에서 얼마나 많은 부정력을 모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내가 볼 땐 거의 다 모은 것 같거든.”
“지금 저희의 힘만으로는 혼천회를 잡기 힘드니, 정보 동맹을 최대한 빨리 출범하는 쪽으로 일을 진행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나도 최대한 노력해 볼 테니까 금의위랑 동창이 응하면 바로 출범할 수 있도록 준비해둬. 개방한테도 이 얘기를 해두고.”
“알겠어요.”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백서휘는 하오문의 본단에서 나와 다시 황가장으로 돌아갔다.
짐을 다 챙겨서 나오니 그를 담당하는 하인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소뇌음사의 땡중들을 잡으러 가.”
“소뇌음사? 거기가 어딥니까?”
“천축에 있는 곳인데 그놈들이 지금 중원으로 들어왔다고 하거든. 그놈들 잡으러 간다고 석준이한테 전해 줘. 내가 집무실에서 이야기했던 것도 최대한 빨리 준비해달라고도 전해 주고.”
“알겠습니다.”
백서휘는 빠르게 황가장을 빠져나와 호남성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 * *
장사에 도착한 백서휘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분위기만 뒤숭숭할 뿐, 아직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는 일은 없었던 것 같았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장원부터 가자.”
장원에는 건축 자재를 든 인부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의문이 들어 장원 안으로 들어가니 우염상과 홍륜이 목청을 높이며 인부들에게 지시하고 있었다.
“계란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고 몇 번을…… 어? 서휘야!”
우염상이 백서휘를 발견하고 후다닥 달려왔다.
홍륜은 작업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눈인사만 했다.
“갑자기 공사는 왜 하는 거야?”
“오면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섬서성에 소뇌음사 놈들이 나타났다.”
“그 이야긴 북경에 있을 때 들었어.”
“그놈들을 막으려고 지금 기관장치를 강화하는 중이야.”
“그놈들이 오기 전에 작업을 끝낼 수 있겠어? 작업하는 도중에 쳐들어오면 기관장치를 쓰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 있잖아.”
우염상과 홍륜이 생각이 있어서 강화작업을 하는 거겠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오문이랑 개방에서 전해 준 정보에 의하면 아직 올 기미는 안 보인다고 해. 그리고 조금 전에 말했다시피 약식으로 하는 일이라 오늘내일 안으로 금방 끝나게 될 거다.”
“올 기미도 없다고? 진짜?”
“나야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지. 그런데 개방이랑 하오문이 똑같은 소리를 하는 걸 보면 진짜 올 기미가 없는 것 아니겠느냐.”
“왜 그러는 거지? 나를 안 노리고 섬서성에만 있는 이유가 따로 있나?”
혼천회 최대, 최악의 적은 백서휘 자신이었다.
그런데 자신이나 장사를 노리는 게 아니라 섬서성에서 난장을 피운다?
이건 혼천회 측이든 소뇌음사 측이든 다른 계획이 있단 뜻이었다.
“소뇌음사가 다른 뜻을 품고 있는 건가?”
“다른 뜻?”
“나를 안 노리고 섬서성에서 패악질을 부리는 게 이상해서.”
“그거야 네가 강해서 그런 거 아니겠느냐.”
“내가 강해서? 아!”
부정력을 모으려면 슬픔, 혼돈, 공포, 절망,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사람들이 느끼게 해야 한다.
그런데 자신에게 덤볐다가 소뇌음사 놈들이 다 죽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
혼천회로서는 부정력을 긁어모을 수단이 사라지게 된다.
“내 기반이 되는 곳을 노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장사로 온 건데, 잘못 선택한 거였네.”
“그게 무슨 소리야?”
“부정력에 대해서는 들었지?”
“오룡단에게 듣긴 했다만…….”
백서휘는 조금 전에 떠올린 생각을 우염상에게 해주었다.
“혼천회가 부정력 모으는 걸 막으려면 바로 섬서성으로 가야겠구나.”
“그놈들 움직임을 봐야겠지만 그래야지.”
“그럼 그 운학 사범을 데려가는 게 어떻겠느냐?”
“운학을?”
“우연히 지나가다 봤는데 사문이 걱정돼서 그런지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하고 있더구나.”
“아…….”
자신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서 사문에 갈 수 없단 사실이 운학을 마음고생 하게 한 모양이었다.
“같이 가야겠네. 운학 어딨어?”
“가족들 안 보고 가려고?”
“시간이 없어서.”
“운학은 내가 찾아올 테니까 너는 가족과 있거라.”
“……그래도 되겠어?”
“내가 뒷방 늙은이가 됐다고 진짜 그렇게 취급하는구나. 나 화령철장이다. 내 체력이랑 근력은 아직도 쓸 만해!”
“그럼 부탁할게.”
“기다리고 있거라.”
백서휘는 우염상이 운학을 찾아오는 동안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가족들을 보니 어색하면서도 좋았다.
‘운학이 왔군.’
기감을 최대한으로 넓혀 놓고 있었기에 근방에 왔단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일어나야겠네.”
“벌써?”
“나도 더 있고 싶은데 세상이 나를 쉬게 두질 않아.”
백서휘가 한숨을 쉬고는 장원 밖으로 향했다.
가족들은 배웅할 생각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만 가볼게.”
백서휘는 빠른 걸음으로 운학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몸조심해!”
“삼촌 다치지 마세요!”
가족들의 간절한 외침이 백서휘의 마음을 찌르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