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80화
유형화된 살기가 덮쳐오자 유소화는 뱀 앞에 선 쥐처럼 얼어붙고 말았다.
살기에 질식당해 죽는 미래가 그녀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과, 관주…… 컥컥! 님…….”
유소화는 온 힘을 다해 괴로움을 호소했다.
분노를 세상에 투사하던 백서휘에게 그녀의 목소리가 닿았다.
“이런.”
백서휘는 다급히 살기를 거둔 후 유소화에게 진기를 불어넣었다.
잠시 후, 유소화는 완전히 안정을 되찾았다.
“미안하다. 너무 화가 나서 그만…….”
“아니에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원수가 누군지 알게 된 거잖아요.”
“그렇지.”
백서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유소화는 가만히 서서 그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저는 이만 나가볼 테니까 계속 자료 보고 계세요.”
“그래.”
유소화가 씩씩하게 밀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백서휘는 혼천회의 지부에서 입수한 서신들과 하오문이 보관하고 있던 자료들을 집중해서 봤다.
……당대의 수호문주가 석년에 우리 손에 죽었던 군자검의 아들이라고 한다. 너와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니 그놈에게 들켜서 공격받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충왕문의 문주가 문도에게 보낸 서신이었다.
“진정하자. 진정…….”
최대한 냉정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쩌다 돌아가셨는지 알았으니 당연히 진정하기가 어려웠다.
“이 개자식들! 죽여 버리겠어!”
백서휘의 몸에서 다시 한번 유형화된 살기가 몸에서 피어올랐다.
아무도 없는 밀실이었기에 그는 거침없이 살기를 내뻗었다.
한참 동안 화를 내던 그가 정신을 차린 건 복수를 생각하면서부터였다.
“분노는 일을 그르치게 만들어.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그래야만 제대로 복수할 수 있어.”
원래의 기분 상태로 돌아온 백서휘는 다른 서신과 자료들을 다시 정독했고, 다 읽은 이후에는 알고 있는 사실들과 함께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어쩌다 아버지가 돌아가게 되신 건지 대충은 그 전말을 알 것 같군.’
아버지는 백서휘를 봤다는 소문을 듣고 찾으러 떠났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화전민 마을에 들르게 됐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버지는 충술사를 만나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싸우게 된다.
‘서신에 언급된 게 아니었으면 충술사들과 아버지가 만나서 싸웠단 사실을 죽을 때까지 몰랐겠지.’
머릿수에서 밀렸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꽤 고강한 무인이던 아버지가 죽게 된다.
아버지와의 싸움 이후, 충술사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화전민들을 다 죽이고 집들을 태워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관에서 화전민 마을로 조사가 나왔다.
죽은 사람의 수가 많은 데다 상흔의 모양이 이상해서 무시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지현에게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화전민 중에서도 특히 아이들의 시체에 남은 상흔이 이상한 게 많다고 했어.’
내장이 있는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뚫고 나온 상처가 많았다고 하는데, 왜 그런 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세월은 흘러 급속도로 세력이 커진 충술사들은 악양에 자리를 잡고 ‘충왕문’을 개파하게 된다.
기이한 건 개파식을 치른 다음 날에 정체 모를 늙은 무인에게 멸문당했다는 것이다.
문파에 있었던 자 중엔 생존자가 전혀 없었고, 바깥에서 일을 봤던 몇 안 되는 문도와 소문주만 살아남았다.
‘하오문이 준 자료에는 멸문 이후로 생존자들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는데 지금 혼천회에서 발견됐지.’
혼천회는 수호문에게 복수하길 원하는 패배자들의 모임이었다.
지금 충왕문은 그 패배자들의 모임에 적을 두고 있었다.
‘내가 멸문시키지 않았고 늙은 무인이 그랬다는 목격담이 있는 걸 보면 충왕문을 멸문시킨 건 스승님이겠지.’
한창 스승이 혼자 활동할 때 일어난 일이기도 했다.
그가 무슨 이유로 충왕문을 멸문시켰는지는 얘기한 적이 없으니 알 수 없었다.
‘대신 복수해 준 건 아닐 거야.’
백서휘가 아는 스승은 수호문주로서의 의무를 굉장히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대신 복수해 줬다기보다는 충왕문이 선을 넘는 짓을 해서 멸문시켰다는 게 더 가능성 있었다.
‘정리 끝났으니 서신이랑 자료를 보는 건 그만둬야겠어.’
백서휘는 하오문에 벌레와 관련된 사건, 사고가 일어난 곳을 찾아달란 의뢰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 * *
‘도대체 언제 의뢰를 완수할 생각인 거지?’
보름이 다 되어가는데도 유소화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의뢰를 맡긴 백서휘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당장이라도 도화루로 찾아가 도대체 언제 정보를 줄 거냐고 항의하고 싶었다.
문제는 그렇게 한번 화를 내면 다시 참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백서휘의 속에 쌓여 있는 분노가 엄청나게 많았다.
지금이야 이성이 남아 있어 분노를 억누르는 게 가능하지만, 나중에도 이게 될 거란 자신이 없었다.
만약에라도 이게 활화산처럼 폭발하게 되면 여럿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악록산으로 가자.’
백서휘는 가족과 유소화에게 서신을 남기고 벽곡단을 챙겼다.
그다음 전력으로 응룡신법을 펼쳐 악록산으로 향했다.
‘이런 개좆같은! 도대체 오두막은 어디 있는 거야? 젠장, 여기 있군.’
오룡단을 가르칠 때 썼던 오두막이 그대로 있었다.
백서휘는 그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냥 가만히 있는데도 유형화된 살기가 저절로 그의 몸에서 피어올랐다.
유형화된 살기는 어느새 오두막을 가득 채웠다.
‘최대한 빨리 천의일기공을…….’
백서휘는 황급히 천의일기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천의일기공엔 격양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명경지수(明鏡止水)의 마음을 가지게 해주는 공능이 있었다.
백서휘는 그 공능을 빌어 분노를 최대한 억제해볼 생각이었다.
“후~ 하~ 후~ 하~”
들숨과 날숨에 최대한 집중하며 천의일기공을 운용하는데도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사실 이건 백서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격양된 감정은 원인을 제거하면 동력이 사라지는데, 지금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충왕문 놈들의 위치를 몰랐다.
모르니 제거할 수가 없고, 제거할 수 없으니 계속 그 힘을 키워갔다.
‘그놈들은 지금 밥도 잘 먹고 잠도 편안히 잘 자겠지?’
자꾸 안 좋은 상상을 하다 보니 분노의 몸집이 커지고 힘도 강력해졌다.
어느새 분노는 심마(心魔)가 되어 백서휘를 괴롭혔다.
“원수가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데 가서 죽이지 않고 뭐 하고 있는 거야? 계속 이렇게 앉아만 있을 거야? 어서 일어나서 장사로 돌아가! 그리고 쌓여 있는 이 분노를 풀어!”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자가 말하니 신뢰가 자연스럽게 갔다.
“가장 먼저 죽일 건 보름이 넘어가는데도 정보를 못 가져온 유소화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년이잖아! 죽여! 어서 죽이라고! 아니, 그냥 모두를 죽여! 중원에 사는 인간들이 없으면 네가 지킬 필요가 사라져.”
논리도 없고, 근거도 없는 말을 계속 들으니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다.
그때 어디서 부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독령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군!』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심마가 무저갱 속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이 개 같은 것들아! 날 놔줘!”
밖으로 도망을 가려는데 심마의 몸에서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심마는 절대 백서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때 다시 한번 독령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주군! 그놈과 잡은 손에 힘을…….』
‘잡은 손에 힘을?’
백서휘는 처음으로 심마의 몸에 붙은 손을 관찰했다.
‘어?’
자신의 손은 심마의 몸에 달라붙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양손으로 심마의 몸을 붙들고 있었다.
‘왜 이걸?’
오두막에 들어오고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백서휘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
심마를 붙잡고 있던 백서휘의 손이 자유로워졌다.
‘이제 알겠어.’
분노가 자신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분노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던 거였다.
그리고 그 분노를 키워서 심마로 만들어낸 것도 역시 자신이었다.
‘모두 내가 한 일이었구나.’
버려야 할 걸 버리지 못하고 계속 쌓아두니 괴로운 거였다.
나무가 열매를 맺기 위해 꽃을 버리는 것처럼 분노를 하나씩 지워갔다.
‘그래도 남는 게 있네.’
하잘것없는 인간인지라 마음속에 있는 모든 분노와 살심을 없애는 건 불가능했다.
백서휘의 마음엔 여전히 분노가 있었고, 여전히 충왕문 놈들과 혼천회 놈들을 죽이고 싶었다.
조금 전에 작은 깨달음을 얻은 일로 달라진 게 없느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마음을 완벽히 다스릴 수 있게 돼서 감정에 휘둘릴 일이 사라졌다고 보면 됐다.
‘감정을 충동시키는 술법도 안 통할지도 모르겠네.’
백서휘는 상쾌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힐 일이 없으니 다시 장사로 돌아가도 될 것 같네.’
휘파람을 불며 악록산을 천천히 내려갔다.
그러다가 긴장을 잔뜩 한 유소화와 그녀의 부하들을 만나게 되었다.
“무슨 일이야? 아! 의뢰한 것 때문에 날 찾아왔구나? 그렇지? 아니야?”
“그, 그게…….”
“왜 이렇게 떨어? 누가 보면 내가 너 잡아먹는 줄 알겠다. 하하.”
백서휘의 반응은 유소화가 악록산으로 오면서 생각했던 것과 꽤 차이가 있었다.
“의, 의뢰를 완수한 건 아니고 후보군을 추려왔어요.”
“아, 후보군…….”
“후보군이긴 한데 거의 다 확실시되는 곳이에요.”
“줘봐.”
백서휘는 유소화가 건넨 서류를 빠르게 읽어나갔다.
‘혈침독봉 떼가 산서성의 양고(陽高) 근방에 있는 작은 마을을 습격해서 10명의 주민이 사망했고, 5명의 아이가 실종됨, 산서성의 오태산(五台山)에 올랐던 약초꾼이 진기를 다 빨린 목내이가 된 채로 발견되었고…….’
유소화가 긴장된 얼굴로 백서휘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산서성의 양고, 대동(大同), 항산(恒山), 산음(山陰), 응현(應縣), 오태산 중에 혼천회의 지부가 있을 거라고 추정하는 거지?”
“네, 그 근방이 벌레로 인한 사건 사고가 제일 잦은 곳이에요.”
“두 번째로 잦은 곳은 어딘데?”
“광서성의 용주(龍州), 녕명(寧明), 빙상(憑祥) 쪽이요.”
“끝에서 끝이네?”
“예.”
“둘 중 하나를 잘 골라서 가야겠어.”
“저는 산서성으로 가는 쪽을 추천해 드려요.”
“이유는?”
“가장 윗줄에 적힌 일이 제일 최근에 일어난 사건이거든요.”
“산서성의 양고에서 일어난?”
“네.”
“그럼 네가 추천한 대로 양고로 가야겠다. 더 할 말은 없는 거지?”
“예? 예.”
“그럼 나는 먼저 가볼게.”
백서휘는 전력으로 응룡비천신법을 펼쳐서 장사로 달려갔다.
‘사과부터 해야겠어.’
자신이 폭발할까 싶어 조마조마했을 가족들과 오룡단, 제자들에게 사과한 이후에 산서성으로 떠날 준비를 하면 될 것 같았다.
‘신법은 왜 또 빨라진 거야?’
조금 전에 얻은 깨달음은 정신과 연관된 것이지 육체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뭔가가 신법에 관여하고 있긴 한 것 같은데…….’
몸속을 관조한 덕분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깨달음을 얻어 마음을 완벽히 다스릴 수 있게 되면서, 정신의 상호작용과 연관이 있는 ‘의념(意念)’이 자연스럽게 강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강해진 의념은 ‘하늘의 뜻(天意)’에 영향을 끼쳐 ‘일기(一氣)’에 대한 지배력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잠깐! 이러면 어검술도 달라졌겠는데?’
백서휘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