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22화
모용중광이 보법을 빠르게 밟아 위치를 계속해서 바꿨다.
백서휘의 빈틈을 노리면서 혹시 있을지 모를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의도가 너무 노골적으로 보이네.’
백서휘는 피식 웃으며 어서 오라는 듯 양팔을 활짝 벌렸다.
모용중광이 바로 거리를 좁혀서는 폭풍처럼 쌍검을 휘둘렀다.
콰콰콰콰쾅!
서로의 검이 맞부딪히며 폭음을 낼 때마다 모용중광의 쌍검을 휘감고 있는 검사가 뭉텅이로 깎여나갔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공격하는 건 지금 멈추면 언제 다시 기회를 잡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채채채채챙!
언젠가부터 모용중광은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쌍검을 휘둘렀다.
백서휘는 배려의 의미로 검기조차 두르지 않고 그를 상대했다.
‘이쯤 봐줬으면 됐겠지.’
백서휘의 검이 모용중광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그의 검에는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검사가 휘감겨 있었다.
모용중광은 얼굴을 굳히며 검에 다시 내력을 주입해 검사를 만들었다.
이제 막기만 하면 된다고 여긴 그가 황급히 방어 초식을 펼치려는데 목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뭔가 싶어 보니 백서휘의 검이 모용중광의 목에 겨누어져 있었다.
“……졌소.”
“한 번 더 할 건가?”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소. 당신의 검사는 왜 부서지지 않소? 경지 차이 때문에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검사를 만들 때 무작정 기를 응집시키지 말고 쇠사슬로 이어서 연결하는 느낌으로 만들어봐. 그럼 모든 기가 모래알처럼 뭉치는 게 아니라 하나로 연결될 텐데…….”
“하나로 연결…… 하나로 연결…… 헛!”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던 모용중광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깨달음을 얻은 건가.’
자신이 했던 말 중에 화두를 해결할 말이 있던 모양이었다.
기척을 감추고 숨어 있던 호위무사들이 부리나케 튀어나왔다.
깨달음을 얻은 걸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백서휘는 일부러 그들에게 육성 대신 전음을 날렸다.
『맹주는 내가 지킬 테니 너희들은 다른 사람이 이리로 오는 걸 막아.』
호위무사들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죽이려고 했으면 진작 죽였어.』
호위무사들은 지도 대련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회는 넘치도록 많았지만 백서휘는 그때마다 검을 겨누는 선에서 멈추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백서휘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어서 가라고 손짓했다.
호위무사들이 정원을 둘러싸고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막았다.
갑자기 모용중광을 중심으로 실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기감이 좋은 백서휘는 기가 움직여서 나타난 현상이란 걸 바로 알아차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은 점점 강해졌다.
처음에는 실바람이었던 것이 흔들바람을 거쳐 큰바람이 되어버렸다.
나뭇가지가 꺾이며 무인이 아닌 자는 걷기 어려울 정도로 바람이 강해졌다.
‘언제까지 이렇게 바람이 불려나.’
그 순간 모용중광의 몸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가 사라졌다.
우드드득!
모용중광의 온몸에 있는 근육과 뼈가 뒤틀렸다가 복구되기를 반복했다.
‘환골탈태가 이루어진다는 건 화경의 벽을 넘었다는 건데…….’
백서휘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무재가 떨어지는 모용중광을 화경의 경지에 이르게 한 걸 보면 자신의 교수법은 하늘에 닿은 게 분명했다.
학무관이 성공할 거란 확신이 생겼다.
‘이번에 돌아가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학무관을 열어야겠어.’
백서휘는 다짐을 하며 모용중광의 변화를 살폈다.
모용중광은 고통이 엄청날 텐데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왜 그런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처음 자신이 화경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고통보다 깨달음이 주는 희열이 더 컸었다.
그때의 쾌락을 떠올리니 현경의 벽을 넘고 싶은 욕구가 고개를 쳐들었다.
‘힘들겠지만 도전하긴 해야 돼.’
어디서 숨어 있다가 나타난 건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상대했던 적들의 무력은 자신과 비슷하거나 조금 떨어졌다.
점점 위험 수위가 올라가는 걸 생각하면 벽을 넘든, 넘지 않든 간에 지금보다 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벽이 문제인데…….’
백서휘는 자신 앞에 놓인 벽이 얼마나 두껍고 높은지 알고 있었다.
현경의 경지를 뛰어넘으려면 육체보다는 의념(意念)을 다루는 데 더 집중해야 했다.
‘의념을 더 강하게 만들고, 쉽게 다룰 수 있게 할 방법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보타문에서 알게 된 심상세계를 구축하는 주문이라면 지금의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수련에 대한 생각은 이쯤에서 끝내고 모용중광에게 집중하자.’
반 시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모용중광이 눈을 떴다.
그는 손에 주름과 검버섯이 없어진 걸 보며 믿기지 않는단 표정을 지었다.
“동경! 동경을 가지고 와라!”
잠시 후, 호위무사 중 하나가 동경을 가져와 모용중광에게 건넸다.
“이, 이게 진짜 내 얼굴이란 말인가?”
“그럼 누구 얼굴이겠어.”
“아!”
모용중광이 벌떡 일어나 백서휘에게 포권으로 인사했다.
“은공 덕분에 벽을 넘을 수 있었소! 감사하오!”
“감사는…… 하하!”
백서휘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 근데 감사 인사가 이걸로 끝은 아니지? 만약 이게 끝이라면 모용세가와 무림맹에 굉장히 실망할 것 같은데…….”
“저, 절대 이걸로 끝이 아니오. 모든 일이 끝나면 꼭 합당한 보상을 하겠소이다.”
“남아일언?”
“중천금이오!”
모용중광의 우렁찬 대답을 듣고 백서휘가 히죽 웃었다.
“그나저나 종전 협정하러 갈 때 맹주 대리로 보낼 만한 인사가 있어?”
“맹주 대리?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오?”
“완전한 화경의 경지에 오르려면 시간이 필요하거든.”
“시간?”
백서휘는 모용중광을 배려해 전음으로 왜 시간이 필요한지 알려주었다.
『환골탈태한 몸이 완전히 자리를 잡기 전엔 작은 상처도 치명적으로 작용해서 조심해야 돼.』
『그거 때문이면 호위무사를 더 충원하면 되잖소.』
『이유가 하나 더 있어. 깨달음을 지금 이 시점에서 완전히 갈무리하지 않으면 많이 헤매게 될 거야.』
모용중광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한숨을 짓고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맹에 남겠소.』
『잘 생각했어.』
백서휘는 모용중광이 말을 듣지 않으면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주려고 했다.
거기까지 가지 않아 그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만 더 묻겠소. 지금의 나는 사도련주를 이길 수 있소?』
『지금 당장은 못 이겨. 하지만 깨달음을 갈무리하고 얼마나 깊이 수련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거야.』
『가망도 없던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단 소리구려. 고맙소. 그대 덕분에 희망을 얻었소.』
『감사 인사는 그쯤 해둬. 더 용건이 없으면 이만 가볼게.』
『맹주 대리는 최대한 빨리 생각해서 알려주겠소.』
『그래.』
백서휘는 엉망진창이 된 정원을 빠져나와 오룡단이 있는 곳으로 갔다.
* * *
모용중광이 깨달음을 얻어 화경에 이르렀을 때, 백광은 심각한 얼굴로 옥진에게 경고를 하고 있었다.
“그놈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놈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니요? 설마 맹주가 조건을 건 겁니까? 백서휘 그놈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일행에 끼워주지 않겠다고…….”
“아니다. 그런 게 아니야.”
백광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 뭐가 문제인 겁니까?”
“우리가 그놈의 무력을 얕잡아봤다.”
“그놈이 도대체 얼마나 강하길래 스승님께서 이러시는 건지 제자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도련주의 결정에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단 말을 들었을 때, 거짓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그자는 범인은 상상도 못 할 만큼 강한 자야. 너도 그자가 맹주를 지도 대련하는 걸 봤어야 하는데…….”
“맹주를 지도 대련했단 겁니까?”
옥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스승이 평생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단 걸 깨닫고 표정을 고쳤다.
“그래, 잠깐 봤지만, 그놈의 위용은 대단하더구나. 숨 한번 흐트러지지 않고 맹주를 밀어붙이는데…….”
작금의 강호에서 정파제일고수를 뽑는다면 각자의 상황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대체로 세 명을 꼽았다.
소림의 혜공.
무당의 청진.
모용중광
이중 청진은 전대의 고수인 데다 사도련에게서 무당파를 지키기 위해 무당산에서 내려오지를 않고 있고, 혜공은 당대의 고수지만 비슷한 이유로 숭산을 내려오지 않고 있으니, 속세의 최강자는 ‘모용중광’이라고 봐야 했다.
그런데 지금 백광의 말에 따르면 백서휘는 그 모용중광을 압도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옥진의 얼굴에 지독한 절망감이 드리워졌다.
“맹주를 압도한다는 건 저희가 주도권을 잡을 희망이 없단 뜻이지 않습니까.”
“아직 기회는 남아 있다.”
“오대세가와 그놈이 붙어먹었는데 저희에게 기회가 어떻게 있겠습니까.”
“맹주에게 가기 전에 개방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정보에 따르면 그는 이해득실에 굉장히 민감한 자다. 우리가 오대세가 이상의 이득을 안겨주면 넘어올 것이야.”
“……꼭 그래야 하는 겁니까?”
“그래, 그것 말고는 우리가 맹에서 주도권을 되찾을 방법이 없다. 그놈이 있으니 종전 협정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어.”
옥진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너는 십익을 소집해서 일단 그놈에게 사과부터 해라. 이후엔 나와 다른 문파의 중진들이 알아서 하겠다.”
“……당분간 십익을 소집하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아까 일 때문에 그런 것이냐.”
“예.”
마땅한 답이 없자 백광이 침음성을 내뱉었다.
“문제를 일으킨 자와 함께 제가 그놈을 찾아가서 사과하겠습니다.”
“그것도 괜찮겠구나.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지금 그놈과 문제를 일으키면 안 된다.”
자존심은 부릴 만한 상대에게나 부려야 한다는 걸 아는 옥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나는 이만 다른 문파의 사람들에게 가보마. 너는…….”
“저도 지금 바로 가보려고 합니다.”
백광은 믿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떠났다.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자가 맹주를 압도하는 고수라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백서휘가 강하단 건 인정하지만 맹주를 압도한다는 건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스승은 거짓을 말하는 법이 없었고 개방 역시 그러했다.
억지로라도 믿어야만 한다는 생각과 두 눈으로 봐야만 믿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청룡단의 그 머저리를 이용해야겠다.”
애초에 그 청룡단의 머저리가 문제를 가져오지 않았으면 백서휘에게 고개를 숙일 일도 없었다.
굴욕적인 일을 하게 된 것에 그 청룡단의 머저리에게 원인이 있으니 장기말로 써도 문제없으리라.
옥진은 옷매무새를 갖추고 방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걸은 덕에 청룡단의 기숙사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어? 회주?”
“자네를 찾아가려 했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마음이 통한 모양이야. 하하.”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시려고 했던 건지…….”
청룡단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백서휘와 있었던 일로 그 역시 감정이 상한 게 틀림없었다.
잘됐다고 생각하며 옥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되겠는가?”
청룡단원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옥진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뒤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