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21화
“관주님.”
제갈진천의 속삭임에 백서휘는 잠에서 깨어났다.
“음? 너희 아버지는 어디 가고 네가 여기에 있냐.”
“아버님은 다른 업무를 보러 가셨습니다.”
“회의가 완전히 끝난 건 맞지?”
“예.”
“무슨 이야기가 나왔는지 알아?”
“아버님께 설명을 듣긴 했습니다.”
“요약해서 짧게 설명해 봐.”
“개방과 화산, 소림에서는 관주님이 사도련과의 종전 협정에 나서는 것을 긍정적으로 봤지만, 나머지 문파들이 크게 반발하여…….”
“반발하여? 설마, 종전 협정이 무산됐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헛걸음하게 되어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절대로 피하고 싶었다.
“그건 아닙니다.”
백서휘가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럼 뭐 때문에 계속 말을 질질 끄는 건데?”
제갈진천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말하는 걸 멈추었다.
그러다 무언가 큰 결정을 내린 사람처럼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종전 협정을 도울 실무진에 구파일방에서 추천한 한 명, 중소 문파에서 추천한 한 명을 넣겠다고 합니다.”
“무슨 명분으로?”
“종전 협정이 제대로 이루어지는지 감독하고 검사하려면 그 수밖에 없답니다.”
“십익인가 뭔가도 그렇고 회의에 참석했던 늙은이들도 그렇고 진짜 가지가지 하네.”
“십익을 만나셨습니까?”
제갈진천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당진우가 얘기 안 하던가?”
“제겐 안 했습니다.”
멀리서 볼 때는 한 몸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아니었다.
오대세가마저 이렇게 분열되는 걸 보면 정파에 대한 기대는 이쯤에서 접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었다.
‘암중단체가 중원을 먹겠다고 준동하면 어쩌려고 이러는 거지?’
수호문이 너무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 같았다.
평화가 오래 지속되다 보니 정파고 사파고 위기감 자체가 사라졌다.
‘걱정되는군.’
가장 걱정되는 건 역시 혼천회였다.
수호문을 상대하기 위한 ‘연합’이라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연합’이란 건 여러 단체가 하나로 뭉쳤다는 의미 아닌가.
정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자신이 그들에게 패퇴한다면, 그때 중원무림이 그 연합들을 막을 힘이 있을까?
과보호일 수도 있고 너무 최악만 생각하는 걸 수도 있지만, 중원무림에겐 막을 힘이 없어 보였다.
‘힘도 없는데 하나로 뭉치지도 못하기까지 하니…….’
이래서는 안 된다.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때가 좋지 않아. 지금은 종전 협정에 집중하자.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하나가 되지 못하는 문제는 나중에 해결해도 돼.’
백서휘는 생각하는 걸 멈추고 제갈진천을 바라봤다.
“……아버님께서는 구파일방과 중소문파 연합이 종전 협정을 방해하기 위해 꺼낸 패라고 생각했고 감사 역할을 맡은 두 명을 넣는 걸 반대하기 위해…….”
“넣어.”
“예?”
“그냥 둘 다 넣으라고. 어차피 그치들이 무력으로 날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도련주인 종리혁한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그들이 작정하고 방해하면…….”
“그때는 두 놈 다 목을 쳐버리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아.”
너무나 과격한 백서휘의 방식에 제갈진천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놈들 때문에 다 같이 죽을 수는 없잖아.”
“그, 그렇긴 합니다만…….”
“내가 들어야 할 이야기는 지금 네가 말한 것뿐인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러면 딴 데 가도 되지?”
“아! 맹주님께서 관주님과 독대를 청했습니다.”
“나랑 독대를? 왜?”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언제 어디서 얘기하자는 건데?”
“잠룡지에서 기다리고 계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럼 지금 가야겠네.”
백서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잠룡지로 향했다.
‘그나저나 잠룡지면 내 손에 하백상이 죽었던 그곳 아닌가? 왜 그곳에서 부른 거지?’
보통은 불길하다고 하여 잠룡지 쪽으로는 웬만해선 출입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잠룡지로 부른 걸 보면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바쁘게 걸어가니 잠룡지 옆에 있는 작은 정자가 보였다.
그 정자에 모용중광이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백서휘는 그의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독대를 청한 이유가 뭐야?”
모용중광이 눈을 천천히 뜨고서 백서휘를 지긋이 바라봤다.
“계속 바라보고만 있을 거면 난 이만 가겠어. 시간 낭비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궁금한 게 있어서 독대를 청했소.”
백서휘는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다시 앉았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건데?”
“나와 사도련주 사이의 무력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 건지 궁금하오.”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종리혁과 비교해 달라는 거야?”
“그렇소.”
“그래도 차이가 꽤 나는데?”
“얼마나 크게 나는지 이해하기 쉽게 직관적으로 설명해 주시오.”
“적나라하게 말해도 돼?”
“그걸 바라고 있소.”
“그때 수준이라면 당신 같은 수준의 무인 네다섯 명이면 종리혁을 노려볼 만했어. 막 화경에 오른 데다 불완전한 경지라 약점이 많았거든.”
“그러면 지금은 어떻소?”
“종리혁을 최근에 본 적이 없어서 얼마나 발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완전한 화경이라고 가정을 한다면…….”
모용중광은 백서휘가 하는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당신 정도의 무인 네다섯이면 종리혁은 경상에 그칠 거야. 대충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알겠지?”
“화경에 막 올랐을 때랑 지금이랑 정말 그 정도로 차이가 크오?”
“크지.”
백서휘는 모용중광이 헛된 희망을 품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더 단호하게 말했다.
“사도련주를 이기려면 어찌해야 하오?”
“지금보다 강해지면 돼.”
“원론적인 것 말고 실제로 내가 종리혁과 일대일로 싸웠을 때 이기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알고 싶소.”
“극독을 써서 중독시킨 이후에 기진(奇陣)에 가둬서 힘을 허비하게 만들고, 여러 명이 동시에 당가의 8대 암기에 버금가는 암기를 모든 방위에서 쓰는 거야.”
“그러면 진짜 이길 수 있소?”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계속 들어봐. 암기를 써서 상처를 입히면 종리혁이 기진맥진할 텐데, 그때 대여섯이 우르르 튀어나와서 협공해야 돼.”
“그러면…….”
“열에 여덟은 죽일 수 있겠지. 아! 참고로 지금 말한 건 대충 아무렇게나 말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조언하는 거야.”
“당신이 말한 방법 말고는 종리혁을 이길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거요?”
“일대일로 승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웬만하면 그 마음 버려. 몇 개월 전에 불완전한 경지일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조금의 가망도 없어.”
“……고맙소. 당신이 해준 말들이 내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소.”
모용중광은 작금의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질문 다 끝났으면 나도 질문해도 될까?”
“뭐든 해도 되오.”
“잠룡지로 부른 이유가 뭐야?”
“여기서 예전에 하백상과 독대를 한 적이 있소. 그때 언젠가 이곳에 맹주가 되어 오겠다고 속으로 다짐했소.”
“꿈을 이뤘군.”
“그렇소이다. 그런데 궁금한 건 조금 전에 말한 그게 전부인 거요?”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더 궁금한 게 없어? 없으면 나는 이만 애들 있는 곳으로 가보려고.”
“……정말 궁금한 게 있긴 하오.”
“뭔데?”
“어떤 수련을 하면 당신처럼 강해질 수 있는 거요?”
“실력 좋은 스승 밑에서 온종일 수련하고, 일정 경지에 올랐을 때 나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자와 생사결을 벌이면 나처럼 강해질 수 있어.”
“자리가 자리인지라 생사결을 하는 건 무리요.”
“그럼 뭐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게 지도 대련을 해줄 수 있소?”
초절정 경지에 오른 고수가 지도 대련을 청한 건 또 처음이었다.
‘모용중광 정도의 고수면 자존심이 엄청날 텐데…….’
일류에만 올라도 콧대가 하늘에 닿으려고 하는데 초절정 경지의 고수라면 어떨까.
아마 자아가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져 쓸데없이 강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잘못된 점을 지적받기보다는 잘하고 있는 점을 칭찬받길 원할 거야.’
거절하기 위한 말을 내뱉으려는데 호기심이 고개를 쳐들며 모용중광의 제안을 수락하라고 유혹했다.
‘이런 경험은 돈 주고도 못 사는데 그냥 거절하겠다고?’
부정적이고 선입견으로 이루어진 의견보다는 호기심을 충족시키자는 의견이 백서휘의 맘에 더 들었다.
백서휘는 모용중광의 제안을 승낙하고 정자를 나섰다.
어깨에 검을 걸친 그는 한쪽 끝으로 걸어가며 주위를 둘러봤다.
‘풍광이 제법이군.’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하백상을 죽이는 일에 집중하느라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알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 여유를 갖고 보게 되니 비로소 이 원림(園林)의 아름다움이 보였다.
사람의 손을 탔음에도 자연미가 있는 암석들과 곳곳에 심어진 수목들은 도시 속에서 심산유곡을 즐기게 해줬다.
그리고 그 심산유곡의 중심에는 물을 끌어다 만든 잠룡지라는 연못과 작은 정자가 있었다.
‘연무장도 아니고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지도 대련을 해도 되나? 아, 모르겠다. 해도 되니까 하자고 한 거겠지.’
백서휘는 걸음을 멈추고 모용중광 쪽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혹시나 해서 먼저 말하는데 자존심 상한다고 죽상을 하면 그때는 바로 그만둘 거야.”
“명심하겠소.”
백서휘가 어서 들어오라는 의미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가겠소!”
모용중광이 검사가 휘감긴 검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처음에 그는 청석이 깔린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그러다 백서휘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풀과 꽃이 심어진 땅도 거리낌 없이 밟았다.
백서휘는 현란한 발놀림으로 보법을 밟는 모용중광을 자못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봤다.
모용중광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눈썹의 개수를 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그런데도 백서휘는 대비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에 모용중광은 깊은 굴욕감을 느꼈다.
“흐앗!”
모용중광은 쌍검이라는 장점을 이용하기 위해 위와 아래에서 양동 공격을 했다.
백서휘는 그제야 팔짱을 풀고 난화만천수를 펼쳤다.
소매 펄럭이는 소리가 잠룡지에 울려 퍼졌다.
파바박!
모용중광의 검에 감겼던 검사가 깨지면서 파편이 이리저리로 튀었다.
파편들은 주위에 있는 수목들의 껍질에 거친 상처를 만들어냈다.
백서휘가 공격을 모두 튕겨낸 후 히죽 웃으며 다시 한번 손을 까딱거렸다.
상처도 만들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게 하지도 못했단 사실에 모용중광은 큰 충격을 받았다.
“아직 대련 안 끝났다.”
백서휘가 내뱉은 말에 모용중광이 정신을 차렸다.
무인의 의지가 꺾이지 않으면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는 말을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며 다시 쌍검을 곧추세웠다.
그러고 다시 백서휘를 향해 달려갔다.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지자 모용중광은 비호처럼 위로 뛰어올랐다.
그다음 몸을 사선으로 꺾더니 마차 바퀴처럼 빠르게 회전시켰다.
휘리리릭!
회전력을 머금은 쌍검이 백서휘를 덮쳤다.
동급의 고수에겐 꽤 위협적인 공격이겠지만 백서휘는 동급의 고수가 아니었다.
경지로만 치면 백서휘는 모용중광이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고수였다.
“제법 괜찮은 공격이지만 당신보다 고수한테는 쓰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빈틈이 너무 많거든.”
백서휘는 옆으로 몸을 옮겨 회전하는 검날을 피한 후, 방어되지 않는 하체에 발차기를 날렸다.
모용중광의 자세가 무너지면서 검날의 회전이 멈추었다.
백서휘에 비해서 손색이 있어서 그렇지 그 역시 초절정 경지의 고수였다.
공격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쌍검을 휘둘러 자세를 회복할 시간을 벌었다.
“자, 다시 덤벼.”
모용중광이 바닥을 밀치면서 앞으로 날아가 쌍검을 한 점에 꽂아 넣었다.
백서휘는 웃는 얼굴로 검을 빠르게 뽑아 그의 공격을 쳐냈다.
캉!
가벼운 공격에 모용중광의 검사가 반쯤 깨졌다.
검사의 파편은 멀리 있는 정자까지 날아가 지붕을 흔적만 남게 만들었다.
“조금 전 공격은 좋았어. 예상치 못한 일격은 상대를 당황하게 만들지.”
모용중광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칭찬 좀 했다고 가만히 있지 말고 계속 달려들어.”
백서휘는 모용중광이 수를 쓰면 그걸 막거나 피해냈다.
가끔씩 공격도 해 방어를 얼마나 잘하는지도 점검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 때, 무당파에서 무림맹으로 파견 온 백광 진인이 모용중광을 찾았다.
“맹주! 감사역을 맡을 자에 대해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이리 찾아…….”
백서휘의 검면에 맞은 모용중광이 정자가 있는 곳으로 날았다.
콰아아앙!
이제는 지붕만이 아니라 정자 자체가 완전히 부서졌다.
정자가 파괴되며 발생한 파편이 백광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백광도 방어할 새가 없었다.
백광은 뺨에 난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걸 느끼고 얼굴을 굳혔다.
모용중광이 땀에 젖은 옷을 벗어 던지며 힘겹게 일어났다.
“매, 맹주!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오?”
“지도 대련을 받고 있소.”
모용중광은 짧게 말하고는 백서휘에게 달려들었다.
“지, 지도 대련?”
하백상이 죽은 이상 정파 무림의 최강자는 모용중광이었다.
그런 모용중광이 지도 대련을 받다니 다른 누가 들으면 백광을 미쳤다고 할 게 분명했다.
“도대체 저자는 얼마나 강하길래 맹주를 지도한단 말인가……!”
그때 백광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오, 옥진이 저자와 충돌이 있었다고 그랬는데? 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백광은 제자인 옥진에 경고를 하기 위해 급히 잠룡지를 떠났다.